원태상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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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상(元泰常)
출처 :
원태상박사
 
한글명 원태상 한자명 元泰常 영문명 Won Tae Sang 가나명 미정 이칭 미정
성별 남자 생년 1903(고종 40)년 몰년 1976년 출신지 경기도광주 전공 토목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경기도 광주 출생. 경성고등공업학교 토목과를 졸업한 뒤 조선총독부 토목과와 만주국 교통부에 근무하면서 하천조사와 하천수문(河川水文)자료의 정리·분석에 전념하였다. 광복 후에는 미군정청 보건후생부 위생국장직에 잠시 있다가 서울대학교 토목과교수에 임명되었다.

1952년에 서울대학교에 「배수곡선(背水曲線)의 신합리적 해법(新合理的解法)」을 제출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이학박사가 되었고, 1955년에는 도쿄대학에서 「극대홍수량도식(極大洪水量圖式)에 관한 연구」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1950년대 중반 미국에 가서 미네소타대학교·컬럼비아대학교·뉴욕대학교에서 연구하였고, 『하천공학』·『위생공학』·『수력발전공학』·「하수도 및 하수처리」 등 많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원박사식수리계산척(元博士式水理計算尺)을 고안하여 유명해졌다. 토목학계에 이바지한 공로로 1968년 한국토목학회 제1회 학술상을 받았고, 서울특별시문화상도 받았다.[1]


생애


출생및 유년시절

소년 시절과 교육 태상원 교수는 1903년 5월 22일 한반도 중부인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본어에 능통하여반도 북동부에 있는 함경도의 철도 건설 현장에서 일본어 통역자로 일했고, 태상원 교수는 그곳에서 초등학교 교육을 받았습니다. 14세에 초등학교를 마치고, 원태상 교수는 혼자 서울로 가서 경기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봤습니다. 경기고등학교는 한반도에서1등이었습니다. 전국의 우수한 학생들이 입학 시험을 보기 위해 모였고,결과적으로 경쟁이매우 치열했습니다.그럼에도 입학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대학시절

그는 1922년부터 1927년까지 서울공과대학(현재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서 토목공학을 전공했고 1927년 3월 1일에 학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1929년에 27세의 나이로 분남 정과 결혼했고 부부는 아들 넷과 딸 둘을 두었습니다. 그의 아내는 서울의 이화여자대학에서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2]


졸업이후

1927년 5월 1일 원태상 교수는조선총독부로부터물리 및수학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습니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 원 교수는서울의 이화여자대학에서 강사로물리 및 수학을 가르쳤고 한국의 북동쪽 도시인 함흥에 있는영생고등학교에서 가르쳤습니다.1933년까지 5년 동안 그는서울 시청의 공공 서비스 직원으로 일했습니다. 과제는 주로 서울지역의 물 공급 시스템 프로젝트 확장과시스템 유지 관리였습니다. 1933년 원 교수는 내무부 토목국으로 자리를 옮겼고 원 교수는 조선총독부에서 1942년까지 재직했습니다. 그는 주로 상수도, 홍수 조절,수력 발전, 관개, 하천 개량 공사,고속도로, 교량 및 하수도와 같은 토목공학의 전 분야에 관여했습니다. 1943년 4월 1일 태상원 교수는 만주 정부 교통부에서 수력 조사부의 수석 엔지니어로 제의를 받았습니다. 5개월 후 그는 만주 정부 제국 과학 연구소의 연구 엔지니어라는 추가 임무를 부여받았습니다. 그는 홍수 조절, 물 공급, 수력 발전, 관개, 하천 개량 공사 및 수문 조사에 대한 조사, 계획, 설계 및 모델 테스트에 참여했습니다. 1945년 4월 태상원 교수는 서울로 돌아와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서울에 있는 한국 비행기 제조 회사의 수석 엔지니어로서 공장의 계획 및 설계에 잠시 참여했습니다.[3]


광복및 한국전쟁이후

1945년 해방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까지 한국의 정치 상황과 경제, 사회적 상황은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법과 질서가 확립되지 않았고 정치적 혼란이 있었습니다. 많은 정당이 있었고 그중 몇몇은 러시아의 강력한 영향 하에 북한 정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 당시 대학생들도 우익과 좌익의 두 그룹으로 나뉘었고 정치적인 학생 활동이 많아 그 결과 대학 교육은 다소 불규칙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부 수업은 중단되거나 취소되었고 일부 학생은 체포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태상원 교수는 1945년 10월 1일 한국에 있는 미국 군정에 의해 서울공과대학의 토목공학과 교수 겸 학과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년 후인 1946년에 그는 같은 기관의 교수 겸 학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기관은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으로 재편되었습니다. 그는 1964년까지 18년 동안 학과장을 역임했습니다. 그의 교수 과제에는 하천 공학, 위생 공학, 수력 발전과 같은 다양한 과목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시기에도 그는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 시작했고, 1950년 5월에는 박사학위 논문 "백워터 곡선의 합리적 해결 방법"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학교 대학원에 논문을 제출하는 것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한 달 후인 1950년 6월 25일로 연기되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 원태상 교수도 대학과 함께 부산으로 이전했고 수업이 재개되었습니다. 교실은 바람과 비로부터 간신히 보호할 수 있는 임시 막사에 있었습니다. 난방은 없었고 바닥은 모래였으며 칠판과 의자만 있었습니다. 강의는 간신히 할 수 있었고 연구를 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문제는 교재가 부족했습니다. 특히 교과서가 없었기 때문에 태상원 교수는 손으로 쓴 등사 인쇄 교과서를 썼고 그러한 등사 인쇄 교과서조차도 모든 학생이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부산에 체류하는 동안 1952년 4월 26일 자연과학 박사 학위가 수여되었습니다. 원태상은 한국 최초의 토목공학 박사였습니다. 1946년에서 1959년 사이에 태상원 교수는 대학교에서의 직책 외에도 여러 정부 기관에서 컨설팅을 매우 활발히 했습니다. 특히 그는 2차 세계 대전 이후 한국에 주둔한 미 8군에서 전문 개인 컨설턴트로 활동하여 한국에서 미 육군의 급수 시스템, 주택, 하수도 프로젝트에 대처하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습니다.[4]


정년퇴임 이후

원태상 교수는 1969년 65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한 후 대부분의 시간을 부유 방파제와 부유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바쳤으며, 1960년대에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구조물은 특히 대륙붕 지역에 퇴적된 해양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근 콘크리트 케이슨 블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발전소, 하수 처리 시설, 거주 공간, 심지어 군사적 목적, 즉 이동식 해군 또는 공군 기지에도 사용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블록 요소를 연결하는 연결 시스템은 케이슨 블록의 롤링과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특별히 설계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서류 작업과 계산을 했으며, 특별히 고안된 연결 시스템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아마도 대규모 실험 검증이 부족하여 실제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은퇴 후에도 그의 정신은 예전처럼 활기찼습니다. 그는 강의, 프레젠테이션, 국제 컨퍼런스 참석으로 바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유 방파제와 부유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바쳤습니다. 이를 실용화하기 위해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상당히 큰 규모의 실험을 위한 연구 기금을 받으려고 했지만 기금을 받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원태상 교수는 1969년 6월, 서울대학교에서 24년간 재직하며 교육, 연구, 인사를 정리하는 데 힘썼고, 서울대학교가 처음 설립되었을 당시의 혼란스러운 상황과 현재의 토목공학과를 가능하게 한 중요한 공헌을 한 후 명예교수로 추대되었습니다.[5]





연구


하천공학

1953년 한국전쟁 휴전 협정에 따라 태상원 교수는 부산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잦은 폭격으로 인해 심하게 파손된 공과대학에서 수업을 재개하기 전에 많은 과제에 직면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또 다른 박사 학위 논문 "최대 홍수 유량 공식에 대한 연구"를 작성하여 도쿄 대학 공학부에 제출했고 두 번째 박사 학위인 공학 박사 학위가 1955년 12월 5일에 수여되었습니다. 그의 주요 연구 관심사는 유출, 흐름 프로파일 및 역류 곡선, 홍수 유량이었습니다. 이러한 주제에서 그는 여러 논문을 발표하고 집중 시간, 홍수 유량 및 최대 홍수 유량을 포함한 "T. W. 공식"이라는 자신의 공식을 제안했으며, 이는 그가 한국어로 쓴 책 '하천 공학'에 실렸습니다.[6]


Hydraulic Slide Rule

태상원 교수는 일본의 헤미사에서 제조한 유압 슬라이드 룰을 발명했습니다. 헤미 회사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전 세계 대부분의 엔지니어와 공학도들이 기억하는 회사입니다. 이들은 범용 슬라이드 룰을 사용했습니다.유압 슬라이드 룰은 수많은 계산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개방형 채널(직사각형, 삼각형 및 사다리꼴 채널)과 파이프라인에서 평균 속도와 유량에 대한 매닝 공식의 솔루션입니다. 매닝 공식을 풀 때 평균 속도, 거칠기 계수, 기울기 및유압 반경과 같은 네 가지 변수 중 하나를 찾을 수 있습니다. 나머지 네 가지가커서와 슬라이딩 스케일의 세 단계만이동하면 됩니다. [7]


Floating Breakwaters and Floating(부유방파제)

1969년 65세의 나이로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한 태상원 교수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유 방파제와 부유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바쳤으며, 1960년대에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구조물은 특히 대륙붕 지역에 퇴적된 해양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철근 콘크리트 케이슨 블록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또한 발전소, 하수 처리장, 거주 공간, 심지어 군사적 목적, 즉 이동식 해군 또는 공군 기지에도 사용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블록 요소를 연결하는 연결 시스템은 케이슨 블록의 굴림과 흔들림을 방지하도록 특별히 설계되었습니다. 그는 많은 서류 작업과 계산을 했으며, 특별히 고안된

연결 시스템을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은 아마도 대규모 실험 검증이 부족했기 때문에 실용화되지 않았습니다. 은퇴한 후에도 그의 정신은 예전처럼 생동감 넘쳤습니다. 그는 강의, 프레젠테이션, 국제 컨퍼런스 참석으로 바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유 방파제와 부유 플랫폼을 개발하는 데 바쳤습니다. 이를 실용화하기 위해 그는 미국 정부로부터 상당히 대규모 실험을 위한 연구 기금을 지원받으려고 했지만 기금을 받는 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8]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원태상 Person: 원태상 A hasSon B
Person: 원태상 Institution: 경기고등학교 A graduates B
Person: 원태상 Institution: 서울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원태상 Group: 토목학회 A isMemberOf B
Book: 하천공학 Person: 원태상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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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_학술저널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
  3.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
  4.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
  5.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
  6.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
  7.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
  8. PROFESSOR TAE SANG WON'S CONTRIBUTIONS TO MODERN HYDRAULIC ENGINEERING IN KOREA_한양대학교 윤태훈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