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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규리(GNU2024)

North Korea Humanities

윤규리(G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13일 (금) 15:50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윤규리G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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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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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글명 김홍도 한자명 金弘道 영문명 Kim Hong-do 가나명 이칭 호(號): 단원(檀園), 단구(丹邱)
성별 남자 생년 1745년(영조 21)년 몰년 1806년(순조 6)년 출신지 김해 전공 예술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홍도는 조선후기 「군선도병」·「단원풍속화첩」·「무이귀도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745년(영조 21)에 태어났고 사망일은 미상이다. 강세황의 천거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29세 때 영조와 왕세자의 어진을 그렸고, 정조의 명으로 금강산 일대를 기행하고 명승지를 그려 바치기도 했다. 50세 이후로 한국적 서정과 정취가 짙게 밴 실경 산수화를 즐겨 그리면서 단원법이라 불리는 세련된 화풍을 이룩했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해학적 감성으로 표현한 독창적인 풍속화도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선회화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긴 화가다.[1]


생애


출생

경기도 안산에서 아버지 김석무(金錫武)와 어머니 인동 장씨(仁同 張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김해 김씨 삼현파 17세손이며, 탁영 김일손(金馹孫)의 후손이다. 7대조부 김수원(金秀源)은 조선 선조 때 내금위장을, 6대조부 김흥상(金興祥)은 어모장군을, 5대조부 김득남(金得男)은 수문장을, 고조부 김중현(金重鉉)은 별제를, 증조부 김진창(金震昌)이 만호 벼슬을 지냈다. 김홍도는 1745년 김해(金海) 김씨(金氏)의 한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홍도의 집안은 중인 (中人)이었다. 중인은 의사, 통역사, 서리나 아전과 같은 하급벼슬을 맡은 계층으로 양반처럼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난한 백성들보다는 나은 위치에 있었다. 김홍도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한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대체로 경기도 안산 (安山) 부근 이었을 것으로 생각되고있다.이는 김홍도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유명한 문인화가인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에게 학문과 그림을 배웠다고 기록되어진 사료를 통하여 알수 있다.[2]


유년시절

당시에는 화원세계는 무척 폐쇄적이었다. 그런데 김홍도의 가계로 보면 김홍도 집안에는 화원이나 사자관(寫字官) 출신이 없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그가 어떻게 강세황과 교제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다. 그러나 《화사양가보록》(畵寫兩家譜錄)을 참고하면 김홍도의 부친인 김석무(金錫武)의 장인, 즉 김홍도의 외조부는 장필주(張弼周)이고, 그가 속하는 인동장씨(仁同張氏) 집안은 대대로 화원을 낸 화원사회의 명문거족이다. 따라서 김홍도는 외가에 드나들다 자신의 화재(畵才)가 돋보여 강세황을 비롯한 화원세계에 소개되었다.


유년시절 김홍도는 강세황을 만났고, 강세황은 시(詩), 서(書), 화(畵)에 능했으며 당시 최고의 감식안으로서 김홍도의 화업에 많은 도움과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강세황은 정조의 신임을 두텁게 받아 김홍도가 정조의 어진(御瞋)을 제작하는 명예를 누리도록 해주었는데, 이것은 화원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5] 또한 강세황은 말년에 이르러 김홍도를 가리켜 "우리나라 금세(今世)의 신필(神筆)"[9]이라고 극찬하고 화제(畵題)를 써주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을 것이라 학자들은 짐작하고 있다[3]


전기생애

'영조의 어진을 그리다' 이처럼 강세황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김홍도는 20대에서부터 이미 화명(畵名)이 높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것은 대략 1773년(영조 49년)경에 29세의 나이로 영조 어진 및 왕세손 이산의 초상화 제작에 동참화사로 참여하여 그렸다고 생각되는 것인데, 이것은 화원으로서의 재능이 여간 인정받지 않고서는 하기 어렵고 그만큼 명예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무예도보통지》를 보면 정조의 말씀으로 "김홍도는 그림에 교묘한 자로 그 이름은 안지 오래이다. 30년 전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회사(繪事)에 속한 일은 모두 홍도로써 주장하게 하였다." 고 하였으니 일찍이 화단에 자신의 이름을 날렸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정조와의 인연'

김홍도는 영조 말년에 세손(정조)의 초상화를 제작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재능을 알아본 정조로부터 많은 배려와 관심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4] 김홍도와 정조와의 관계는 조희룡의 《호산외사》 속에 "정조 때에는 화원의 공봉(供奉)으로 관내에서 그림을 그려 올릴 때마다 매번 칭찬을 받고 곧 왕지(王旨)에 맞았다." 또는 "임금께서 금강산 사군(四郡)의 산수를 김홍도에게 그리라고 명하고 관용으로 조석(朝夕)을 받들게 하니, 이는 이수(異數)의 대접이었다."라는 기록을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정조는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에서 김홍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홍도는 그림에 솜씨 있는 자로서 그 이름을 안 지가 오래다. 삼십 년쯤 전에 나의 초상을 그렸는데, 이로부터 무릇 그림에 관한 일은 모두 홍도를 시켜 주관케 하였다." [4]


후기생애

김홍도의 후기 작품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40세 되던 해인 1784년에 그린 《단원도》이며 이 때부터 "단원"이라는 관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중인인 김홍도가 명나라의 문인화가 이유방의 호를 자신의 호로 삼은 것은 후기의 그의 새로운 심적상태를 반영한 것이다. 40세가 되던 해인 1784년에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18]이 되어 2년 5개월 간 근무하였다. 1790년에는 정조가 할아버지 영조와의 정치적인 대립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위해서 지은 사찰인 용주사 대웅전에 운연법으로 입체감을 살린 삼세여래후불탱화를 그렸다. 48세가 되던 해인 1791년에는 충청도 연풍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충청도 연풍에서 현감으로 일한 경험은 김홍도가 민중들의 삶을 중국의 영향을 받는 대신 자신만의 개성으로 그려내는 중요한 기회가 되었다. 1796년에는 용주사 부모은중경의 삽화, 1797년에는 정부에서 찍은 오륜행실도의 삽화를 그렸다. 김홍도가 51세의 나이가 되던 1795년에 “남의 중매나 일삼으면서 백성을 학대했다.”는 충청 위유사 홍대협의 보고로 만 3년만에 파직됐다. 연풍 현감에서 해임되어 한양으로 올라온 김홍도는 다시 화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김홍도는 50대의 나이로 관직 생활 이후에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정립해가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벌이게 된다. 이 시기 그는 도화서의 공적인 일 이외에 사적인 주문에 의한 작품도 활발하게 하였고, 부드럽고 서정적인 필치로 그린 그의 작품은 인간적으로나 화가로서나 원숙한 모습을 보여준다


노년

1800년 정조가 갑작스럽게 승하한데다가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그와 교류하던 후원자인 김한태도 별세하여 그는 후원자를 모두 잃고 생활이 어려워졌다. 김홍도가 정확히 몇 년에 사망을 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1805년 12월에 쓴 편지만 전해지고 이후 행적과 작품이 일절 전하지 않아 예순한두 살이던 1805년이나 1806년도로 추측될 뿐이다





연구


<단원풍속도첩>

기와이기, 주막, 새참, 무동, 씨름, 쟁기질, 서당, 대장간, 점보기, 윷놀이, 그림 감상, 타작, 편자 박기, 활쏘기, 담배 썰기, 자리 짜기, 신행, 행상, 나룻배, 우물가, 길쌈, 고기잡이, 노상과안(路上過眼), 장터길, 빨래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단원 김홍도(1745~ ?)가 그린 [단원풍속도첩] 속 스물다섯 점의 그림들이다. 이 그림들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이미지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민들의 노동, 놀이, 남녀 사이에 오고 가는 은근한 감정 등 삶의 여러 모습들이 그려져 있다.가로, 세로 30여 센티미터 정도의 종이에 그려진 [단원풍속도첩]의 그림들은 아주 간단하고 간결하다. 거장의 대표작이라는 포장을 풀고 그림만 다시 살펴보면, 이 그림은 분명히 아주 공들여 그린 그림은 아니다. 공들여 그린 공필(工筆)도 아니며 화려한 채색이 입혀진 것도 아니다. 기법적인 부분에서 보자면 이 그림은 그림의 소재와 같이 격식을 갖추지 않고 편안하게 그려진 그림이다. 배경을 생략하고 그리고자 하는 소재만 집중하여 그렸다. 농사일을 끝내고 새참을 먹는데 논밭은 보이지 않고, 동네에서 씨름판이 벌어졌는데 근처에 나무 한 그루가 없다. 색도 거의 쓰지 않았는데, 엷은 먹색을 중심으로 하여 역시 매우 엷은 푸른색과 갈색조로만 채색을 하고 그 이외의 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화가는 보통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일상을 그린 이 그림들에 가장 어울리는 기법으로 최소화된 묘사와 채색이라는 방식을 선택했다. 덜 그리고 덜 칠함으로써 소재 자체를 돋보이게 했다. [5]


<서원아집도>

김홍도 필 서원아집도 병풍은 1778년(조선 정조 2) 김홍도가 그린 작품으로 북송(北宋) 영종(英宗, 재위 1063∼1067)의 부마 왕선(王詵)이 수도 개봉(開封)에 있던 자신의 집 서원(西園)에서 1087년경에 소식(蘇軾)과 이공린(李公麟), 미불(米芾) 등의 여러 문인들과 함께 다양한 문예활동을 즐겼던 ‘서원아집(西園雅集)’을 주제로 한 것이다. 17세기 이래 조선에 유입된 명대 구영(仇英)의 작품에서 도상을 차용하였지만, 배경의 버드나무를 비롯한 암벽, 소나무 등을 과감한 필치로 그려내어 공간에 생동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길상적 의미를 지닌 사슴과 학을 그려 넣어 조선의 서원아집도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총 6폭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귀거래도를 그리는 이공린, 시문을 창작하는 소식, 담론하는 원통대사 등의 등장인물을 3폭에서 6폭에 배치하고 있다. 또한 5폭에서 6폭 상단에 14행으로 김홍도의 스승인 강세황의 제발이 적혀 있는데, 이에 따르면 1778년 9월에 이 작품이 완성되고 3개월 후 1778년 12월 강세황이 김홍도를 ‘신필(神筆)’이라고 칭송하며 그 이유를 밝힌 내용이 적혀 있어 김홍도의 예술 세계를 파악하는 귀중한 문헌 자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6]


사슴과동자

김홍도가 산속에서 동자와 사슴이 만나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약초 캐는 동자가 호미를 짊어지고 등에는 광주리를 메고 깊은 산속을 가고 있다. 뒤에는 험준한 바위산이 보이고 아래쪽에는 폭포가 떨어진다. 쌍계를 튼 머리, 허리에 표주박을 찬 동자는 필시 신선일 것이다. 화면 오른쪽 바위 위로 오르는 동자와 그 아래에서 왼쪽을 향한 사슴 사이에는 각이 지게 꺾인 나무넝쿨이 살짝 가로막고 있다. 동자와 사슴은 서로 반대쪽을 향하다가 동자가 뒤돌아봄으로써 서로 연결되고 있다. 산수의 대략적 표현에 비해 사슴은 생기 있는 눈동자, 그리고 몸체의 터럭들까지 비교적 정밀하게 표현하였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홍도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김홍도 Institution: 조선고등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홍도 Institution: 경상국립대학교 A worksAt B
Person: 김홍도 Group: 조선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김홍도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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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안산시 문화관광
  3. 위키백과-김홍도
  4. 위키백과-김홍도
  5. [네이버 지식백과] 단원풍속도첩 - 조선을 화폭에 담다 (국립중앙박물관 선정 우리 유물 100선, 국립중앙박물관, 이혜경)
  6. 국가유산청-김홍도<서원아집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