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태

North Korea Humanities

이윤정(S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12일 (목) 22:27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윤정SNU2024)이 작성했습니다.




김성태(金星泰)
출처 :
 
한글명 김성태 한자명 金星泰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생년 1894년 몰년 1962년 출신지 경기도 양주구읍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양주별산대놀이」해금 전승자로 지정된 예능보유자이다.


생애


출생 및 어린시절

성운(盛運)의 아들로 경기도 양주구읍(楊州舊邑)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무부(巫夫)이자 「양주별산대놀이」의 명연희자이며 모가비였고, 어머니 한간난이는 ‘옴팽이 만신’이라는 이름으로 양주군일대에서 이름난 큰무당이었다. 14세 때부터 아버지와 이창유(李昌裕)에게서 산대춤을 배웠는데, 특히 왜장녀의 배꼽춤은 이들을 본받아 배웠다고 한다.


학력

학력은 서당에 다녔을 뿐이다. 20∼30세 동안에는 헌병보조원을 지냈다. 그 뒤로는 광복 10년 전까지 순사를 지냈으며, 광복 때까지 소방단장과 경방단부단장(警防團副團長) 등을 지냈다.


활동

순사를 그만둔 뒤에는 양주구읍에서 소실을 두고, 청요리점을 경영하기도 했다. 그는 민족항일기에도 「양주별산대놀이」를 계속하였고, 6·25남침으로 마을이 소실되었으나, 환도 후 다시 가면을 제작하여 탈놀이를 계속하게 한 중심인물이었다. 1957년 11월 9일 한국연극학회 주최로 이화여자고등학교 노천극장에서 「양주별산대놀이」를 공연함으로써 광복 후 처음으로 일반에게 이들의 탈놀음을 선보였고, 박준섭(朴俊燮) · 박동환(朴東煥)과 더불어 명연희자로서의 솜씨를 보였다.





연구


양주별산대놀이

한국전쟁 이후 탈이 소실되고 다수의 연희자가 사망하며 전승되던 양주별산대놀이는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1950년대에 김성대(金成大, 1907~1970)의 후원으로 당시 전 과장에 걸친 연희 능력을 갖추었던 김성태(金星泰, 1894~1962)가 탈을 제작하며 남은 소수의 인원과 함께 놀이를 복원하였다. 1964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가 결성되면서 당시 8명의 연희자가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이때 김성태는 양주 별산대놀이가 무형유산으로 선정되자 제1급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성운 Person: 김성태 A hasSon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서당 A graduates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헌병보조원 A worksAt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순사 A worksAt B
Person: 김성태 Institution: 소방단장,경방단부단장 A worksAt B
Person: 김성태 Group: 양주별산대놀이 A isMemberOf B
Person: 김성태 Person: 김상용 A hasSon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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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9496#section-1 김성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