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7완)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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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30일 (토) 19:06 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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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6)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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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六)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11월
시작쪽 031쪽 종료쪽 056쪽 전체쪽 026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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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본문1: 6. 변진 (변한) 문제 (승전)






































본문1-1: (병) 신라의 발흥과 변진 제국의 변천


진마(辰馬)의 땅에 백제가 흥기하여 마침내 그곳을 통일 융합함과 같이 변진의 일족인 신라도 次第(차제)로 주위의 제소국을 잠식하여 드디어 낙동강 연안의 임나(任那)•가라(加羅)의 제연맹국을 병탄하여, 변진의 온(전)종족을 완전히 한 덩어리에 뭉친 (나중에는 반도를 통일하는) 최후의 패자가 되매 이르렀거니와, 신라의 흥기발전은 곧 변진제국의 변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환언하면 신라의 변진제국에 있어서의 관계는 마치 백제의 진마 제국간에 있어서의 관계 그대로를 방불케 하여 준다. 그리하여 이 절에는-역시 변진문제를 철저히 구명하기 위하여-신라의 발흥, 및 그 발전 과정을 주로 하여 변진 제소국의 변천을 고찰하려 한다. 그러면 신라는 어느 때 어떠한 처지에서, 즉 어떠한 milieu에서 발흥하기 시작하였는가를 먼저 고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쪽수▶P31辰馬의 地에 百濟가 興起하야 마침내 그곳을 統一融合함과 같이 弁辰의 一族인 新羅도 次第로 周圍의 諸小國을 蠶食하야 듸듸어 洛東江沿岸의 任那•加羅의 諸聯盟國을 倂呑하야, 弁辰의 온(全)種族을 完全히 한 덩어리에 뭉친 (나중에는 半島를 統一하는)最後의 覇者가 되매 이르렀거니와, 新羅의 興起發展은 곧 弁辰諸國의 變遷을 意味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換言하면 新羅의 弁辰諸國에 있어서의 關係는 마치 百濟의 辰馬諸國間에 있어서의 關係 그대로를 彷彿케 하야 준다. 그리하야 此節에는-역시 弁辰問題를 徹底히 究明하기 爲하야-新羅의 勃興, 및 그 發展過程을 主로 하야 弁辰諸小國의 變遷을 考察하려 한다. 그러면 新羅는 어느 때 어떠한 處地에서, 즉 어떠한 milieu에서 勃興하기▶P32-1시작하였는가를 먼저 考究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신라는 기술한 바와 같이 위지*(동이전) 변진조에 보이는-20여 국 중의 하나인-사로국(斯盧國) 그것의 후신으로 그 옛 이름을 또한 徐那(서나, 伐(벌))一作徐耶(伐)又作徐羅(伐) 혹은 斯羅(사라)라고도 書稱(서칭)하지만, 이들 전후 명자는 실상 다 마찬가지의 어음, 즉 신국(新國)의 뜻인 「새라」(새나라)의 종종 음역에 불과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요 또 앞서번에도 말한 바이며, 단 신라의 신(新)만은 음의(音義) 공통의 역(譯)으로 볼 것이다. 신라의 발흥을 말하자면 자연이(전신인) 사로국 즉 서나벌(徐那伐) 시대의 상태를 살피지 아니하면 아니되거니와, 이에 관하여는 위지 후한서 등 중국의 고사서에는 하등의 자세한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동방의 고사서인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다소의 전설적 기사가 실리어 있으므로 이를 통하여 그것을 고찰할 수밖에 없다(단 이들 전설적 기사에는 후세의 부회와 윤색이 많이 가하였으므로 그대로 신용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사기(권1) 및 유사(권1)에 의하면 徐羅伐(서라벌)은 처음 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의 6촌이 서로 결합하여 이를 형성한 것과 같이 말하였고, 또 6촌의 이름은 처음에는 (1) 閼川(알천) 楊山村(양산촌) (2) 突山(돌산) 高墟村(고허촌) (3) 觜山(자산) 珍支村(진지촌)或云(혹운) 于珍村(우진촌) (4) 茂山(무산) 大樹村(대수촌) (5) 金山(금산) 加利村(가리촌) (6) 明活山(명활산) 高耶村(고야촌)단 유사에는 3과 4의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음이었는데, 후(儒理尼師今(유리이사금 9년)에 이를 개칭하여 양산촌을 及梁部(급량부, 일운 梁部(양부)), 고허촌을 沙梁部(사량부), 우진촌을 本彼部(본피부), 대수촌을 漸梁部(점량부, 일운 牟梁部(모량부)), 가리촌을 漢祗部(한지부)遺事作漢岐 又韓岐, 고야촌을 習比部(습비부)라 하고 동시에 6부에는 李(이) 崔(최) 孫(손) 鄭(정) 裴(배) 薛(설)의 6성이 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고려할 점이 많이 있다. 첫째 진한 6촌설이니, 신라의 전신인 사로는 이미 누차 변증하여온 바와 같이 변진족 중 辰王(진왕, 馬韓(마한)의 맹주) 소속 하의 12국의 하나로서, 저 북조선방면의 유민인 「진한」과는 본래부터 族類(족류)와 住地(주지)를 달리한 것으로 나는 인정하며, 따라 위의 소위 6촌은 이를 사로의 6촌이라면 가하되 「辰韓六村」이라거나 혹은 「辰韓六部」라고 하는 것은 대단 부당한 양으로 안다. 생각컨대 진한 6촌설은 그 근거가 신라를 진한의 種裔(종예)로 본 梁書(양서, 신라전) 이래의 오해와, 또 위지의 「辰韓…始有六國云云」이라고 한 6국의 숫자가 이 6촌의 숫자와 우연 일치한 데서 기인한 것인 듯하나, 양서 이래의 오해는 또 다시 거듭하여 말할 필요가 없고, 위지의 소위 6국도 이를 6촌 혹은 6부로 해석하거나 또는 거기에 부회할 이유는 전연 없는 것이다. 그때의 소위 「국」이란 것이 아무리 소국이라 할지라도 일개의 촌락과 동일 정도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적어도 수개 이상의 촌락의 결합체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원시신라인 사로가 과연-전설과 같이-처음부터 6촌으로써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부락국가의 상태를 이루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미 6개 이상의 집단으로써 구성되었을 것이다. 사로 6촌의 형성이 어느 때부터의 사실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위지 기사에 나타나기 이전에 임에 그것의 존재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찰된다. 다음에는 6촌의 명칭에 취하여서니, 전설상에 보이는 그 명칭을 과연 그대로 신용하여 좋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6촌 중 양산 고허 대수의 3촌의 이름은 이를, 후에 개칭되었다는 급량(일운 양부) 사량 점량(일운 모량)의 3부의 이름과 비하여 보면 도리어 후자의 것이 전자보다 더 원시적인 古樸(고박)한 감을 줄뿐더러, 전자 중에는 「알천 양산촌」과 같이 각각 별처의 산천의 이름을 결합하여 동일처소의 명칭을 삼은 듯한 것도 있다(알천은 지금의 경주읍 북을 흐르는 北川(북천)의 舊稱(구칭), 양산은 동읍 남의 현명 남산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설에 보이는 6촌의 명칭은 실상 원시적의 것이 아니요 훨씬 후세에 雅名化(아명화)한 6부의 산명 내지 里名(리명)으로써 부회한 것 같고 또 그 중의 어떤 것은 전연 임의로 꿈인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러면 6촌의 원시적 칭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후의 6부의 명칭이 그 전신인 6촌의 것을 승습한 것으로 보는 동시에 6촌과 6부의 지명 사이에는 본래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며, 다만 표음적 기사에 있어서 종종의 異同(이동)가 있었을 뿐이라고 인식된다 예하면 같은 6부시대에도 급량 사량 점량의 량(들, 도)을 흔히 喙(훼, 동상)로써 기사하여 신라 진흥왕 순경비와 같은 오랜 금석문에는 喙部(훼부) 沙喙部(사훼부)로 되여 있음과(훼가 량보다 더 원시적일 것이다) 또 점량부의 점(물)을 牟(모)로도 표현하여 일운 모량부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6촌의 이름은 처음으로부터 6부 시대에 걸처서 하등의 큰 변천을 인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회상태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본질적 변동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재래에는 전설적 기사에 의하여 6촌과 6부와의 차이를 명칭상으로만 인하고 실상 내용 본질에 있어서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6촌을 일운 6부라고도 하는 혼동까지 생기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라의 6촌과 6부와의 구별은 마치 고구려의 五族(오족)과 5부와의 구별과 같은 것으로 사료되나니 원문주1▶(고구려의 5족 및 5부에 대하여는 이미 今西(금서), 池內(지내) 두 박사의 古說(고설)이[a 1] 있거니와) 상언하면 6촌은 초기 고구려의 5족과 같이 일종의 씨족(Clan)적 취락으로서, 각 씨족단은 각별의 추장 하에 혈연적조상을 같이 함 지연적共祖(공조)의 신념으로 住地(주지)를 같이 함으로 결합한 사회조직인 듯하고, 6부는 후기 고구려, 후기 백제, 고려 및 근세 조선의 도내의 오부제와 같이 일종의 행정구획으로서, 씨족사회가 붕괴되어 국가정치의 조직이 발달하던 때의 산물인 듯하다. 즉 씨족사회의 6촌이 변천하여 도시구획상의 6부로 化(화)한 데 불과하다고 생각되나니 여기에 신라 사회조직의 변천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행정구획으로서의 6부는 부락정치를 완전히 탈출한 국가정치시대에 실현되었을 것이므로 물론 신라초기에 속한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기 및 유사에는 6부의 개정과 6성의 배정이 공히 신라 제3대 유리(일운 弩禮(노례))이사금 9년 된 거와 같이 말하였으나 거기에는 도저히 信從(신종)할 수 없고, 이를 만일 제14대의 동명 왕(儒禮尼師今, 유례이사금)의 9년 사실의 誤傳(오전)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하는 의문을 가질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지지한 사회적 발전의 상태로 보면 그때도 그 顯現(현현)을 보기에는 좀 이르다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더욱 6부의 賜姓(사성)과 같은 것은 唐代(당대) 문화의 영향일 것이므로 6부 그것의 실현보다도 훨씬 후세(통일시대)의 사실에 속할 것이다. 신라 6부제의 실현은 (나의 고찰로는) 대개 慈悲麻立干(자비마립간) 12년(서기 458년) 京都(경도)의 坊里名(방리명)을 정하였다고 하는 그 때에 되었으리라고 믿거니와, 6촌과 6부는-비록 성질을 달리할지라도-전후신의 관계로 지리적 명칭 내지 위치에 있어서는 실상 그다지 큰 구별이 없었던 것인데, 후세의 사가가 이를 오해하여 즉 6촌시대의 고유명칭이 따로 있었던 것이 전치 아니한 양으로 알아 일부러 후세의 6부의 산천명 혹은 이명을 취하여 6촌의 옛 이름으로 가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32-2 新羅는 旣述한 바와 같이 魏志(東夷傳) 弁辰條에 보이는-二十餘國 중의 一인-斯盧國 그것의 後身으로 그 舊名을 또한 徐那(伐)一作徐耶(伐)又作徐羅(伐) 혹은 斯羅라고도 書稱하지만, 이들 前後名字는 실상 다 마찬가지의 語音, 즉 新國의 뜻인 「새라」(새나라)의 種種音譯에 不過한 것임은 周知의 事實이요 또 앞서번에도 말한 바이며, 但 新羅의 新만은 音義共通의 譯으로 볼 것이다. 新羅의 勃興을 말하자면 자연이(前身인) 斯盧國 즉 徐那伐時代의 狀態를 살피지 아니하면 아니되거니와, 이에 關하여는 魏志 後漢書 등 中國의 古史書에는 何等의 仔細한 記事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東方의 古史書인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에 多少의 傳說的 記事가 실리어 있으므로 이를 通하야 그것을 考察할 수밖에 없다(단 이들 傳說的 記事에는 後世의 附會와 潤色이 만히 可하였으므로 그대로 信用하기 어려운 것은 勿論이다). 史記(卷一)及 遺事(卷一)에 依하면 徐羅伐은 처음 三韓 中의 一인 辰韓의 六村이 서루 結合하야 이를 形成한 것과 같이 말하였고, 또 六村의 名은 처음에는 (一) 閼川 楊山村 (二) 突山 高墟村 (三) 觜山 珍支村或云于珍村 (四) 茂山 大樹村 (五) 金山 加利村 (六) 明活山 高耶村단 遺事에는 三과 四의 順序가 서루 바뀌어 있음이었는데, 後(儒理尼師今 九年)에 이를 改稱하야 楊山村을 及梁部(一云梁部), 高墟村을 沙梁部, 于珍村을 本彼部, 大樹村을 漸梁部(一云 牟梁部), 加利村을 漢祗部遺事作漢岐 又韓岐, 高耶村을 習比部라 하고 同時에 六部에는 李 崔 孫 鄭 裴 薛의 六姓이 配定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考慮할 點이 만히 있다. 첫재 辰韓 六村說이니, 新羅의 前身인 斯盧는 이미 屢次 辨證하여온 바와 같이 弁辰族 中 辰王(馬韓의 盟主)所屬下의 十二國의 하나로서, 저 北朝鮮方面의 遺民인 「辰韓」과는 본래부터 族類와 住地를 달리한 것으로 나는 認定하며, 따라 우의 所爲 六村은 이를 斯盧의 六村이라면 可하되 「辰韓六村」이라거나 혹은 「辰韓六部」라고 하는 것은 대단 不當한 양으로▶P33 안다. 생각컨대 辰韓六村說은 그 根據가 新羅를 辰韓의 種裔로 본 梁書(新羅傳) 以來의 誤解와, 또 魏志의 「辰韓…始有六國云云」이라고 한 六國의 數字가 이 六村의 數字와 偶然 一致한 데서 基因한 것인 듯하나, 梁書 以來의 誤解는 또 다시 거듭하야 말할 必要가 없고, 魏志의 所爲 六國도 이를 六村 혹은 六部로 解釋하거나 또는 거긔에 附會할 理由는 全然 없는 것이다. 그때의 所爲 「國」이란 것이 아모리 小國이라 할지라도 一個의 村落과 同一程度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적어도 數個以上의 村落의 結合體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原始新羅인 斯盧가 果然-傳說과 같이-처음부터 六村으로써 形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部落國家의 狀態를 이루기 始作하였을 때에는 임이 六個 以上의 集團으로써 構成되었을 것이다. 斯盧六村의 形成이 어느 때부터의 事實인 지는 자세이 알 수 없으나, 적어도 魏志 記事에 나타나기 以前에 임에 그것의 存在를 보았을 것이라고 推察된다. 다음에는 六村의 名稱에 就하여서니, 傳說上에 보이는 그 名稱을 果然 그대로 信用하야 조흘 것인가가 問題이다. 六村 中 楊山 高墟 大樹의 三村의 名은 이를, 後에 改稱되였다는 及梁(一云梁部) 沙梁 漸梁(一云牟梁)의 三部의 名과 比하여 보면 도리어 後者의 것이 前者보다 더 原始的인 古樸한 感을 줄뿐더러, 前者 중에는 「閼川 楊山村」과 같이 各各 別處의 山川의 名을 結合하야 同一處所의 名稱을 삼은 듯한 것도 있다(閼川은 지금의 慶州邑北을 흐르는 北川의 舊稱, 楊山은 同邑南의 現名 南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傳說에 보이는 六村의 名稱은 실상 原始的의 것이 아니요 훨신 後世에 雅名化한 六部의 山名 乃至 里名으로써 附會한 것 같고 또 그 중의 어떤 것은 全然 任意로 꿈인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러면 六村의 原始的 稱號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後의 六部의 名稱이 그 前身인 六村의 것을 承襲한 것으로 보는 同時에 六村과 六部의 地名 사이에는 本來 큰 變動이 없었든 것으로 보며, 다만 表音的 記寫에 있어서 種種의 異同이 있었을 뿐이라고 認識된다 例하면 같▶P34은 六部時代에도 及梁 沙梁 漸梁의 梁(들, 도)을 흔이 喙(同上)로써 記寫하야 新羅 眞興王巡境碑와 같은 오랜 金石文에는 喙部 沙喙部로 되여 있음과(喙가 梁보다 더 原始的일 것이다) 또 漸梁部의 漸(물)을 牟로도 表現하야 一云 牟梁部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六村의 名은 처음으로부터 六部時代에 걸처서 何等의 큰 變遷을 認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社會狀態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本質的 變動이 있었든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在來에는 傳說的 記事에 依하야 六村과 六部와의 差異를 名稱上으로만 認하고 실상 內容 本質에 있어서는 兩者를 同一視하야 六村을 一云六部라고도 하는 混同까지 생기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區別할 必要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新羅의 六村과 六部와의 區別은 마치 高句麗의 五族과 五部와의 區別과 같은 것으로 思料되나니 원문주1▶(高句麗의 五族 及 五部에 對하여는 이미 今西․池內兩博士의 古說이[1] 있거니와) 詳言하면 六村은 初期 高句麗의 五族과 같이 一種의 氏族(Clan)的 聚落으로서, 各氏族團은 各別의 酋長下에 血緣的祖上을 같이 함 地緣的共祖의 信念으로 住地를 같이 함으로 結合한 社會組織인 듯하고, 六部는 後期 高句麗, 後期 百濟, 高麗 및 近世朝鮮의 都內의 五部制와 같이 一種의 行政區劃으로서, 氏族社會가 崩壞되어 國家政治의 組織이 發達하든 때의 産物인 듯하다. 즉 氏族社會의 六村이 變遷하야 都市區劃上의 六部로 化한 데 不過하다고 생각되나니 여기에 新羅 社會組織의 變遷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行政區劃으로서의 六部는 部落政治를 完全히 脫出한 國家政治時代에 實現되었을 것이므로 勿論 新羅初期에 屬한 事實이라고는 볼 수 없다. 史記 及 遺事에는 六部의 改定과 六姓의 配定이 共히 新羅 第三代 儒理(一云 弩禮)尼師今 九年에 된 거와 같이 말하였으나 거긔에는 到底히 信從할 수 없고, 이를 만일 第十四代의 同名王(儒禮尼師今)의 九年 事實의 誤傳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하는 疑問을 가질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新羅의 遲遲한 社會的 發展의 狀態로 보면 그때도 그 顯現을 보기에는 좀 이르다고 하지 아니하면 아▶P35-1니되며, 더욱 六部의 賜姓과 같은 것은 唐代文化의 影響일 것이므로 六部 그것의 實現보다도 훨신 後世(統一時代)의 事實에 속할 것이다. 新羅 六部制의 實現은 (나의 考察로는) 대개 慈悲麻立干 十二年(西紀四百五十八年) 京都의 坊里名을 定하였다고 하는 그 때에 되었으리라고 믿거니와, 六村과 六部는-비록 性質을 달리할지라도-前後身의 關係로 地理的 名稱 乃至 位置에 있어서는 실상 그다지 큰 區別이 없었든 것인데, 後世의 史家가 이를 誤解하야 즉 六村時代의 固有名稱이 따루 있었든 것이 傳치 아니한 양으로 알아 일부러 後世의 六部의 山川名 혹은 里名을 取하야 六村의 古名으로 假裝한 것이 아닌가 한다.
6촌 6부는 말하자면 신라의 기초요 중심지이므로 그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또한 일고할 필요가 있다. 6촌 6부의 땅이 지금의 경주 읍치 및 그 부근에 해당함은 별로 이의가 없는 바이지만 각촌 각부의 세밀한 소재에 취하여서는 아직도 학자의 설이 미진한 곳이 있다. 6촌 6부의 제1위인 급량(급훼) 일운 량(훼)은 물론 유사의 설과 같이 금 南川(남천, 蚊川(문천)) 남의 曇嚴寺址(담엄사지)를 중심으로 하였던 곳으로서 남천 이남 南山(남산, 楊山(양산)) 서북 일대의 땅을 포함하였던 것 같고, 원문주2▶급량의 급은 前間恭作(전간공작) 씨의 설 [a 2]에 따라 근본 근저의 뜻인 「밑」의 借字(차자)로 解(해)함이 가할 듯하니, 그곳에는 실제 박씨 시조의 탄생지라고 전하는 蘿井(나정)과 동 시조의 능이라고 하는 오릉(일운 蛇陵(사릉))이 있는 것을 아울러 참고할지며, 다음의 사량(사훼)의 소재는 재래에는 금 남천 상류의 한 지류인 史等川(사등천) 유역에 비정하여 왔으나 사량과 같이 저명하고 중요한 부락이 중심지에서 그렇게 떨어진 곳에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삼국유사(권1) 신라시조조에 (시조부인 閼英(알영)의 탄생지를)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云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사량은 알영정의 소재지인-금 남천(문천)의 북안의 沙正里(사정리)를 중심으로 하여 남천 이북, 서천 이동, 북천(알천)유역 이남의 땅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인식되며 (즉 위의 급량과 남북으로 대치하여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든 저명한 부락으로서) 사량의 사는 보통 학자의 설과 같이 新(새)의 뜻인 듯하다고려 초에 사량부를 고쳐 南山部(남산부)라고 한 것은, 살피컨대 慶州府治(경주붙이)를 사량에 두고, 부를 남산 동남으로 옮기었음에 인함인 듯 셋째의 본피진흥왕비에는 本(본피)라고 보임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皇龍寺(황룡사) 남의 땅으로 지금의 仁旺里(인왕리) 일대에 위치하였던 것 같으나, 최초에는 金城(금성) 내지 半月城(반월성)까지도 포함하여 사량 동편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원시 본피의 일반은 후에 왕성 소재지로 化(화)하여 그 지역의 축소를 보았던 것 같다. 넷째의 점량 일운 모량은 말할 것도 없이 서천의 지류인 牟梁川(모량천) 유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서 금 孝峴里(효현리) 일대가 그 부락의 중심지였을 것이며 다섯째의 漢祗(한지)소위 금산 가리촌는 역시 유사의 설과 같이 금 북천(알천) 북쪽의 金剛山(금강산, 小金剛山(소금강산)) 栢栗寺(백률사) 부근을 중심으로 하여 있었던 것이며, 끝으로 습비소위 명활산 고야촌는 지금의 명활산 서남록의 普門里(보문리) 일대와 및 狼山(낭산) 부근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니, 삼국사기 祭祀志(제사지) 大祀條(대사조)에 보이는 3산의 수위인 「柰歷習比部」은 곧 경주의 鎭山(진산)인 낭산 그것임을 참고함이 가하다(그리고 동지 四城門祭條(사성문제조)에는 또 習比門(습비문)의 이름이 보이나니, 이는 물론 왕성 4문 중의 하나로서 습비부 방면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금 경주읍의 중앙에 있던 것은 사량과 본피요, 사량의 남편에 있던 것이 급량이요, 급량의 서편이 점량(모량)이요, 본피의 동이 습비, 본피 및 사량의 북이 한지였다.
쪽수▶P35-2六村 六部는 말하자면 新羅의 基礎요 中心地이므로 그 地理的 位置에 對하야 또한 一考할 必要가 있다. 六村 六部의 地가 지금의 慶州邑治 및 그 附近에 該當함은 別로 異議가 없는 바이지만 各村 各部의 細密한 所在에 就하여서는 아직도 學者의 說이 未盡한 곳이 있다. 六村 六部의 第一位인 及梁(及喙) 一云梁(喙)은 勿論 遺事의 說과 같이 今 南川(蚊川)南의 曇嚴寺址를 中心으로 하였든 곳으로서 南川 以南 南山(楊山)西北一帶의 地를 包含하였든 것 같고, 원문주2▶及梁의 及은 前間恭作氏의 說[2]에 따라 根本 根柢의 義인 「밑」의 借字로 解함이 可할 듯하니, 그곳에는 실제 朴氏始祖의 誕生地라고 傳하는 蘿井과 同 始祖의 陵이라고 하는 五陵(一云 蛇陵)이 있는 것을 아울러 參考할지며, 다음의 沙梁(沙喙)의 所在는 在來에는 今 南川上流의 一支流인 史等川流域에 比定하야 왔으나 沙梁과 같이 著名하고 重要한 部落이 中心地에서 그러케 떠러진 곳에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안는다. 三國遺事(卷一) 新羅始祖條에 (始祖夫人 閼英의 誕生地를)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云云」이라고 한 것을 보면 沙梁은 閼英井의 所在地인-今南川(蚊川)의 北岸의 沙正里를 中心으로 하야 南川以北, 西川以東, 北川(閼川)流域以南의 地에 位置하였든 것으로 認識되며 (즉 우의 及梁과 南北으로 對▶P36-1峙하야 서루 密接한 關係를 가지든 著名한 部落으로서) 沙梁의 沙는 普通 學者의 說과 같이 新(새)의 義인 듯하다高麗初에 沙梁部를 곷이어 南山部라고 한 것은, 按컨대 慶州府治를 沙梁에 두고, 部를 南山 東南으로 옴기었음에 因함인 듯 셋재의 本彼眞興王碑에는 本라고 보임는 三國遺事에 依하면 皇龍寺南의 地로 지금의 仁旺里一帶에 位置하였든 것 같으나, 最初에는 金城 乃至 半月城까지도 包含하야 沙梁 東편에 있었든 것이 아닌가 한다. 즉 原始 本彼의 一半은 後에 王城所在地로 化하야 그 地域의 縮少를 보았든 것 같다. 넷재의 漸梁 一云牟梁은 말할 것도 없이 西川의 支流인 牟梁川流域에 位置하였든 것으로서 今 孝峴里一帶가 그 部落의 中心地였을 것이며 다섯재의 漢祗所爲 金山加利村는 역시 遺事의 說과 같이 今 北川(閼川)北쪽의 金剛山(小金剛山) 栢栗寺 附近을 中心으로 하야 있었든 것이며, 끝으로 習比所爲 明活山 高耶村는 지금의 明活山 西南麓의 普門里一帶와 및 狼山附近을 차지하고 있었든 것이니, 三國史記 祭祀志 大祀條에 보이는 三山의 首位인 「柰歷習比部」은 곧 慶州의 鎭山인 狼山 그것임을 參考함이 可하다(그리고 同志 四城門祭條에는 또 習比門의 名이 보이나니, 이는 勿論 王城 四門 中의 一로서 習比部 方面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今 慶州邑의 中央에 있든 것은 沙梁과 本彼요, 沙梁의 南便에 있든 것이 及梁이요, 及梁의 西편이 漸梁(牟梁)이요, 本彼의 東이 習比, 本彼 及 沙梁의 北이 漢祗였다.
삼국유사(권1)의 전설적 기재에 의하면 처음 6촌에는 謁平(알편, 급량의 祖(조)) 蘇伐都利(소벌도리, 사량의 조) 俱禮馬(구례마, 모량의 조) 智伯虎(지백호, 본피의 조) 祗沱(지타) 일운 只他(지타, 한기의 조) 虎珍(호진, 습비의 조)의 6인이 天降(천강)하여 6촌의 장이 되고 동시에 6부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6조의 이름과 천강설은 다 후인의 부회한 바로서 믿을 것이 되지 못하지만, 6촌은 말하자면 사로부족을 구성한 6개의 씨족단이므로 각촌에 각별의 酋帥(추수)가 있어 소단체를 통솔하였던 것과 또 그 결합의 紐帶(유대)가 혈연적으로 혹은 전설상 선조를 동일히 한다는 신념 하에 맺어진 것임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그런즉 위의 전설은 사로의 6촌이 씨족사회에 불과한 것을 암시하여 주는 외에는 하등의 의의가 없는 것이다. 또 동서(권1)에 의하면-잘 아는 이야기지만-前漢(전한) 宣帝(선제) 地節(지절)원년 3월달에 6부의 조가 각기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 岸上(안상)에 회합하여, 有德人(유덕인)을 구하여 군왕을 삼을 일과 및 立邦設都(입방설도)의 뜻를 決(결)한 후, 이어 양산(남산)하 蘿井(나정) 곁에서 赫居世(혁거세)란-身生光彩(신생광채)의-卵生兒(난생아)를 얻어 位號(위호)를 居瑟邯(거슬감, 或作(혹작) 居西干(거서간))이라 하고 또 同日(동일)에 사량리 閼英井(알영정) 변에 사는 알영이란-姿容(자용) 殊麗(수려)의-龍生女(용생녀)를 얻어 남산 서록(昌林寺址, 창림사지)에 궁실을 짓고, 2聖兒(성아)를 봉양하여 나이 13세가 되자, 漢宣帝(한선제) 五鳳(오봉)원년 갑자(57B.C.)에 男(남)을 세워 왕을 삼고 女(여)로써 后(후)를 삼고 나라를 서라벌(又(우) 徐伐(서벌), 혹운 斯羅(사라), 又(우) 斯盧(사로))이라고 하였다는 설화가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이와 대동소이한 전설이 있거니와, 이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여 주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물론 위 설화에는 혁거세로써 건국의 시조를 삼고, 한의 오봉 원년으로써 건국의 연대를 삼었지만, 어느 점으로 보든지 신라의 엄밀한 의미의 건국이 이 때에 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아니하므로 위 설화는 필경(엄밀한 의미의 건국 설화)라기보다 그 원시국가 즉 「사로」란 부락국가의 창시에 관한 전설로밖에 볼 수 없으니(물론 그 연대는 미상하지만)소위 알천 상의 6촌회의는 즉 사로6촌의 씨족단이 회합하여 비로소 씨족을 부족으로 결속하는 동시에 부족을 통솔할 渠帥(거수)의 선거를 꾀하던 사실의 전설로 解(해)할 것이며, 또 혁거세와 알영에 관한 기괴한 설화적 요소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사로란 원시국가의 거수가 처음 양산 하인 급량 부락의 출신으로써 선거되었던 것과, 또 급량 부락과 그 對岸(대안)의 사량 부락과의 사이에 결혼이 행하였던 사실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혁거세는 신라의 원시국가시대의 시조로 숭봉된 저명한 거수라고 할지언정, 이를 곧 정식 국가 공작기의 太祖(태조)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가 과연 설화 대로 기원전 1세기의 사람이냐 아니냐도 큰 의문 중에 있는 것이다. 혁거세의 탈출한 알의 대(大)가 박(瓢)과 같다 하여 성을 박(朴)이라 하였다는 사기, 유사의 전설도 물론 후인의 부회한 바로서, 실상은 혁거세의 「혁」이 방언의 「밝」(광명)의 借訓字(차훈자)이므로 후세에 이와 동음인 박으로써 성을 추칭한 데 불과한 것이며, 또 혁거세의 「거세」도 실상은 그 位號(위호)인 거서간 일운 거슬감의 「거서」 「거슬」과 동음동어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됨에 불구하고, 사기 및 유사에는 이를 구별하여 하나는 인명, 하나는 위호로 하여 심지어 「赫居世居西干」이라고 疊書(첩서)하기까지 하였다. 나의 견해로는 거세 거서 거슬은 전에 말한 백제의 鞬吉支(건길지)의 吉支(길지), 阿知吉師(아지길사) 和邇吉師(화이길사)의 吉師(길사, キシ)라든지, 日本書紀(일본서기)의 백제 신라 加羅(가라) 등 국왕에 대한 訓稱(훈칭)인 コニキシ コキシ의 キシ라든지, 또는 후일 신라의 관등 중 제14위의 吉士(길사) 혹운 稽知(계지) 혹운 吉次(길차)와 전연 같은 말의 異寫(이사)로 거기에 干(간)이나 邯(감)의 존호를 더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혁은-마치 건길지의 건(큰, 대의 뜻)과 같이-거세•거서(간)•거슬(감)을 modify한 형용사로, 유사(권1)주에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理世(이세) 2자는 무용의 부회지만)라고 한 것을 보면 혁은 원문주3▶弗矩內(불구내, 弗矩(불구)는 붉 혹은 밝, 內(내)는 ) [a 3] 즉 붉은•밝의 漢譯(한역)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혁거세(혁거서간•혁거슬감)는 바로 明王(명왕) 聖王(성왕) 혹은 철인 현지자의 뜻일 것이다. 이는 마치 고구려의 시조 朱蒙(주몽, 鄒牟(추모)•東明(동명))이 善射者(선사자)의 뜻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卵生傳說(난생전설)에 있어서도 양자가 공통한 점이 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유사하니, 혁거세의 의의와 실재성을 주몽의 그것과 방불한 양으로 보면 가할 것이다.
쪽수▶P36-2 三國遺事(卷一)의 傳說的 記載에 依하면 처음 六村에는 謁平(及梁의 祖) 蘇伐都利(沙梁의 祖) 俱禮馬(牟梁의 祖) 智伯虎(本彼의 祖) 祗沱一云只他(韓岐의 祖) 虎珍(習比의 祖)의 六人이 天降하야 六村의 長이 되고 同時에 六部의 始祖가 되였다고 한다. 이들 六祖의 名과 天降說은 다 後人의 附會한 바로서 믿을 것이 되지 못하지만, 六村은 말하자면 斯盧部族을 構成한 六個의 氏族團이므로 各村에 各別의 酋帥가 있어 小團體를 統率하였든 것과 또 그 結合의 紐帶가 血緣的으로 혹은 傳說上 先祖를 同一히 한다는 信念下에 맺어진 것임은 의심 없는 事實이다. 그런즉 우의 傳說은 斯盧의 六▶P37村이 氏族社會에 不過한 것을 暗示하야 주는 외에는 何等의 意義가 없는 것이다. 또 同書(卷一)에 依하면-잘 아는 이야기지만-前漢 宣帝 地節元年 三月朔에 六部의 祖가 각기 子弟들을 익글고 閼川岸上에 會合하야, 有德人을 求하야 君王을 삼을 일과 및 立邦設都의 議를 決한 후, 이어 楊山(南山)下 蘿井傍에서 赫居世란-身生光彩의-卵生兒를 얻어 位號를 居瑟邯(或作 居西干)이라 하고 또 同日에 沙梁里 閼英井邊에 사는 閼英이란-姿容 殊麗의-龍生女를 얻어 南山西麓(昌林寺址)에 宮室을 짓고, 二聖兒를 奉養하야 나이 十三歲가 되자, 漢宣帝 五鳳元年 甲子(57B.C.)에 男을 세워 王을 삼고 女로써 后를 삼고 나라를 徐羅伐(又徐伐, 或云斯羅, 又斯盧)이라고 하였다는 說話가 있으며 三國史記에도 이와 大同小異한 傳說이 있거니와, 이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暗示하야 주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勿論 右說話에는 赫居世로써 建國의 始祖를 삼고, 漢의 五鳳元年으로써 建國의 年代를 삼었지만, 어느 點으로 보든지 新羅의 嚴密한 意味의 建國이 이때에 되였다고는 到底히 믿어지지 아니하므로 右說話는 필경(嚴密한 意味의 建國說話)라기보다 그 原始國家 즉 「斯盧」란 部落國家의 創始에 關한 傳說로밖에 볼 수 없으니(勿論 그 年代는 未詳하지만)所爲 閼川上의 六村會議는 즉 斯盧六村의 氏族團이 會合하야 비로소 氏族을 部族으로 結束하는 同時에 部族을 統率할 渠帥의 選擧를 꾀하든 事實의 傳說로 解할 것이며, 또 赫居世와 閼英에 關한 奇怪한 說話的 要素는 別問題로 하더라도 斯盧란 原始國家의 渠帥가 처음 楊山下인 及梁部落의 出身으로써 選擧되었든 것과, 또 及梁部落과 그 對岸의 沙梁部落과의 사이에 結婚이 行하였든 事實은 이를 認定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赫居世는 新羅의 原始國家時代의 始祖로 崇奉된 著名한 渠帥라고 할지언정, 이를 곧 正式 國家工作期의 太祖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가 果然 說話 대로 紀元前 一世紀의 人이냐 아니냐도 큰 疑問 中에 있는 것이다. 赫居世의 脫出한 卵의 大가 박(瓢)과 같다 하야 姓을 朴이라 하였▶P38-1다는 史記․遺事의 傳說도 勿論 後人의 附會한 바로서, 실상은 赫居世의 「赫」이 方言의 「밝」(光明)의 借訓字이므로 後世에 이와 同音인 朴으로써 姓을 追稱한 데 不過한 것이며, 또 赫居世의 「居世」도 실상은 그 位號인 居西干 一云 居瑟邯의 「居西」 「居瑟」과 同音同語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됨에 不拘하고, 史記 及 遺事에는 이를 區別하야 一은 人名, 一은 位號로 하야 심지어 「赫居世居西干」이라고 疊書하기까지 하였다. 나의 見解로는 居世 居西 居瑟은 前에 말한 百濟의 鞬吉支의 吉支, 阿知吉師 和邇吉師의 吉師(キシ)라든지, 日本書紀 의 百濟 新羅 加羅等 國王에 對한 訓稱인 コニキシ コキシ의 キシ라든지, 또는 後日 新羅의 官等 中 第十四位의 吉士 或云稽知 或云吉次와 全然 같은 말의 異寫로 거긔에 干이나 邯의 尊號를 더 붙인 것에 不過하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赫은-마치 鞬吉支의 鞬(큰, 大의 意)과 같이-居世•居西(干)•居瑟(邯)을 modify한 形容詞로, 遺事(卷一)注에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理世 二字는無用의 附會지만)라고 한 것을 보면 赫은 원문주3▶弗矩內(弗矩는 붉 혹은 밝, 內는 )[3] 즉 붉은•밝의 漢譯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赫居世(赫居西干•赫居瑟邯)는 바루 明王 聖王 혹은 哲人 賢知者의 義일 것이다. 이는 마치 高句麗의 始祖 朱蒙(鄒牟•東明)이 善射者의 義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卵生傳說에 있어서도 兩者가 共通한 點이 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類似하니,赫居世의 意義와 實在性을 朱蒙의 그것과 彷彿한 양으로 보면 可할 것이다.
사기 및 유사에 전하는 초기 신라의 역대계통을 보면, 혁거세의 다음에는 그 아들 南解次次雄(남해차차웅)이 서고 南解(남해)의 다음에는 그 아들 유리(일운 노례)이사금이 서고 유리의 다음에는 남해의 女婿(여서) 昔脫解(석탈해, 일운 吐解(토해))가 서서 이사금이 되었다 하며, 전설에는 탈해의 내력을 신괴히 하여 倭人(왜인)의 卵生兒(난생아)가 표류해온 것처럼 말하였지만 이는 후인의 꾸민 황탄무계한 소리이므로 不可信(불가신)이다 그 이후에는 유리의 자손(소위 박씨)과 탈해의 자손(소위 석씨)이 연령 혹은 인물 여하에 의하여 이사금의 位(위)를 替承(체승)하다가, 제11대 助賁(조분)이사금(소위 석씨)의 女婿(여서)인 金味鄒(김미추)가 제12대 沾解(첨해)이사금(조분 弟(제))의 뒤를 잇고 미추의 侄(질)이요 여서인 奈勿(내물, 일운 那密(나밀))이 제16대 訖解(흘해)이사금(소위 석씨)의 뒤를 잇고 역시 미추의 여서요 족인인 實聖(실성)이 내물의 뒤를 잇고 내물의 아들인 제19대 訥祗(눌지)麻立干(마립간)으로부터는 대대로 내물계통의 자손이 계승하여, 신라왕실 계통의 소위 박석김 3성의 셋 파를 生(생)케 하였다는 것이어니와, 소위 박씨니 석씨니 김씨니 하는 씨성은 시초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후일 중국문화의 영향으로, 계통을 소급하여 追附(추부)한 것에 불과한 것이며, 또 제17대 내물 이전의 제왕은 후에 말할 바와 같이 다 부락정치시대의 거수로, 그 세계가 과연 얼마만치의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지? 자못 의문 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후세의 소위일지라도 박씨 석씨 김씨의 3개 씨성으로써 과거 세습 거수의 계통을 구별한 것을 보면 확실히 거수의 위는 사로부족을 구성하는 중요한 6개 씨족 중의 어느 우세한 互相(호상) 밀접한 혈연적 관계를 가졌던, 3개촌의 씨족에 의하여 세습(실상은 선거에 의한 세습)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3촌의 씨족은 6촌 중의 어느 것에 해당할까. 나의 고찰한 바에 의하면 하나는 급량의 씨족이니, 신라의 시조요 박씨의 조라고 하는 혁거세의 탄생지가 급량 부락 중에 있음을 보아 소위 박씨 계통의 거수들은 다 급량 부락의 출신인 듯하며, 하나는 본피의 씨족인 듯하니, 석씨의 조라고 하는 탈해의 거주지가 양산 하(실상은 양산의 對岸(대안))인 후일의 月城(월성) 그곳이라고 전함을 보아-월성의 땅은 위에 말한 바와 같이 본시 본피의 소속 지대인 듯하니-소위 석씨계통의 거수들은 본피부락의 출신이었던 듯하며, 또 하나는 사량의 씨족인 듯하니, 김씨의 발상지라고 하는 始林(시림)이 월성의 서편에 있음을 보아 소위 김씨계통의 이사금은 사량 부락의 출신이었던 것 같다. 환언하면 박석김 3성은 바로 급량 본피 사량의 3씨족 출신의 거수 및 그 일족에 부여한 구별로서, 이들 3촌의 씨족이 가장 우세하였던 모양이다(단 6부의 사성은 이 씨족사회가 붕괴된 때로부터 썩 이후의 일이다). 박씨란 추칭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혁거세혁(밝) 즉 방언의 「밝」을 취음한 성이요, 김씨는 역시 제2회 拙文(졸문) 중에 언급한 바와 같이 군장 대인의 존칭인 干(간)居西干(거서간), 마립간, 기타•邯(감)거슬감 舒弗邯(서불감)•금(이사금)•錦(금, 寐錦(매금))에서 雅義(아의)의 자로 취음한 성인 듯하나, 석씨에 대하여는 종종의 고안이 있어 아직 미상에 부치어 둔다. 그리고 거서간(대인의 뜻이다)이라 차차웅 일운 慈充(자충, 방언 巫(무)의 이름이라 함)이라 이사금(연장자의 뜻이라 함)이라 하는 것은 순연한 부락정치시대의 거수의 칭호로서, 就中(취중) 방언 무의 이름이라 하는 차차웅(자충)과 같은 것은 가장 확실히 제정일치시대의 원시국가적 酋長號(추장호)의 특색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립간이란 위호에 이르러서는 다소 엄밀한 의미의 계급적 색채를 띄운 것으로 부락정치에서 국가정치로 변형하는 때의 왕호로 볼 수 있으니 대개 마립이란 말은-金大問(김대문)의 설에 의하면 방언 橛(궐, 말)의 이름으로 즉 君橛(군궐) 臣橛(신궐)의 궐의 뜻이라고 하나, 원문주4▶나는 그보다도-점패방지진 씨의 설과 같이 [a 4] 조선어의 頭(두, 마리) 宗棟廳(종동청, 마루)등의 말과 동 어원으로(고구려의 莫離支(막리지)와도 동 어원일 것이다), 極所(극소) 頂上(정상)을 의미하는 말로 解(해)하여, 마립간을 漢文流(한문류)의 폐하 전하의 존칭과 같이 볼 것이다. 마립간은 즉 頭監(두감) 上監(상감)의 뜻으로 폐하 전하의 字義(자의)와는 정반대지만, 군주에 대한 존칭어로는 양자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후세에 군주 폐하를 上監瑪樓下(상감마루하) 혹은 上監瑪瑪(상감마마)라고 하는 것은 마립간의 와전으로 실상은 동 의미의 중복어인 듯하고, 또 하인의 관인에 대한 존칭어에 대감마님 영감마님 나리마님이라 하는 마님은 즉 마리님 마루님의 약어로 다 마립간에서 연원 변천된 말이 아닌가 한다). 여하간 마립간이란 칭호는 신라인의 계급관념 계급적 시설이 제법 농후하여 지던 때에 시작된 듯한 晩生(만생)의 것인즉, 이를 사용하던 때에는 이미 신라의 국가정치의 형태가 발생되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쪽수▶P38-2史記 及 遺事에 傳하는 初期 新羅의 歷代系統을 보면, 赫居世의 다음에는 其子 南解次次雄이 서고 南解의 다음에는 其子 儒理(一云 弩禮)尼師今이 서고 儒理의 다음에는 南解의 女婿 昔脫解(一云 吐解)가 서서 尼師今이 되였다 하며, 傳說에는 脫解의 來歷을 神怪히 하야 倭人의 卵生兒가 漂流해온 것처럼 말하였지만 이는 後人의 꾸민 荒誕無稽한 소리이므로 不可信이다 그 以後에는 儒理의 子孫(所爲 朴氏)과 脫解의 子孫(所爲 昔氏)이 年齡 혹은 人物 如何에 依하야 尼師今의 位를 替承하다가, 第十一代 助賁尼師今(所爲 昔氏)의 女婿인 金味鄒▶P39가 第十二代 沾解尼師今(助賁 弟)의 뒤를 잇고 味鄒의 侄이요 女婿인 奈勿(一云 那密)이 第十六代 訖解尼師今(所爲 昔氏)의 뒤를 잇고 역시 味鄒의 女婿요 族人인 實聖이 奈勿의 뒤를 잇고 奈勿의 子인 第十九代 訥祗麻立干으로부터는 代代로 奈勿系統의 子孫이 繼承하야, 新羅王室 系統의 所爲 朴昔金 三姓의 셋 派를 生케 하였다는 것이어니와, 所爲 朴氏니 昔氏니 金氏니 하는 氏姓은 始初부터 있었든 것이 아니라 後日 中國文化의 影響으로, 系統을 溯及하야 追附한 것에 不過한 것이며, 또 第十七代 奈勿 以前의 諸王은 後에 말할 바와 같이 다 部落政治時代의 渠帥로, 그 世系가 果然 얼마만치의 確實性을 가지고 있는지? 자못 疑問 中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後世의 所爲일지라도 朴氏 昔氏 金氏의 三個氏姓으로써 過去 世襲渠帥의 系統을 區別한 것을 보면 確實히 渠帥의 位는 斯盧部族을 構成하는 重要한 六個 氏族 中의 어느 優勢한 互相 密接한 血緣的 關係를 가졌든, 三個村의 氏族에 依하야 世襲(실상은 選擧에 依한 世襲)되였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그 三村의 氏族은 六村中의 어느 것에 該當할까. 나의 考察한 바에 依하면 一은 及梁의 氏族이니, 新羅의 始祖요 朴氏의 祖라고 하는 赫居世의 誕生地가 及梁部落 中에 있음을 보아 所爲 朴氏系統의 渠帥들은 다 及梁部落의 出身인 듯하며, 一은 本彼의 氏族인 듯하니, 昔氏의 祖라고 하는 脫解의 居住地가 楊山下(실상은 楊山의 對岸)인 後日의 月城 그곳이라고 傳함을 보아-月城의 地는 우에 말한 바와 같이 본시 本彼의 所屬 地帶인 듯하니-所爲 昔氏系統의 渠帥들은 本彼部落의 出身이었든 듯하며, 또 一은 沙梁의 氏族인 듯하니, 金氏의 發祥地라고 하는 始林이 月城의 西편에 있음을 보아 所爲 金氏系統의 尼師今은 沙梁部落의 出身이었든 것 같다. 換言하면 朴昔金 三姓은 바루 及梁 本彼 沙梁의 三氏族 出身의 渠帥 及 其一族에 賦與한 區別로서, 이들 三村의 氏族이 가장 優勢하였든 모양이다(단 六部의 賜姓은 이 氏族社會가 崩壞된 때로부터 썩 以後의 일이다). 朴氏란 追稱은 우에도 말한 바와 같이 赫居世▶P40-1赫(밝) 즉 方言의 「밝」을 取音한 姓이요, 金氏는 역시 第二回 拙文 中에 言及한 바와 같이 君長大人의 尊稱인 干居西干, 麻立干, 其他•邯居瑟邯 舒弗邯•今(尼師今)•錦(寐錦)에서 雅義의 字로 取音한 姓인 듯하나, 昔氏에 對하여는 種種의 考案이 있어 아직 未詳에 부치어 둔다. 그리고 居西干(大人의 義이다)이라 次次雄 一云 慈充(方言 巫의 謂라 함)이라 尼師今(年長者의 義라 함)이라 하는 것은 純然한 部落政治時代의 渠帥의 稱號로서, 就中 方言 巫의 謂라 하는 次次雄(慈充)과 같은 것은 가장 확실이 祭政一致時代의 原始國家的 酋長號의 特色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麻立干이란 位號에 이르러서는 多少 嚴密한 意味의 階級的 色彩를 띄운 것으로 部落政治에서 國家政治로 變形하는 때의 王號로 볼 수 있으니 대개 麻立이란 말은-金大問의 說에 依하면 方言 橛(말)의 謂로 즉 君橛 臣橛의 橛의 義라고 하나, 원문주4▶나는 그보다도-鮎貝房之進氏의 說과 같이[4] 朝鮮語의 頭(마리) 宗棟廳(마루)等의 語와 同語源으로(高句麗의 莫離支와도 同語源일 것이다), 極所 頂上을 意味하는 말로 解하야, 麻立干을 漢文流의 陛下 殿下의 尊稱과 같이 볼 것이다. 麻立干은 즉 頭監 上監의 義로 陛下 殿下의 字義와는 正反對지만, 君主에 對한 尊稱語로는 兩者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後世에 君主陛下를 上監瑪樓下 혹은 上監瑪瑪라고 하는 것은 麻立干의 訛轉으로 실상은 同意味의 重複語인 듯하고, 또 下人의 官人에 對한 尊稱語에 大監마님 令監마님 나리마님이라 하는 마님은 즉 마리님 마루님의 略語로 다 麻立干에서 淵源 變遷된 말이 아닌가 한다). 如何間 麻立干이란 稱號는 新羅인의 階級觀念 階級的 施設이 제법 濃厚하여 지든 때에 시작된 듯한 晩生의 것인즉, 이를 使用하든 때에는 이미 新羅의 國家政治의 形態가 發生되였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마립간의 칭호는 어느 왕 때에 비로소 쓰기 시작하였는가. 이는 신라의 국가적 현출의 시기를 살핌에 있어 한 중요한 관건이 된다. 사기에는 제19대 눌지로부터 4대의 사이를 통하여 마립간이라고 하였으나, 유사(왕력)에는 제17대 내물로부터 이를 서칭하였다. 나는 유사의 기재가 옳은 양으로 생각되나니, 그것은 이러한 방증적 기사에 의하여 首肯될 수 있다. 즉 太平御覽(태평어람) 所引(소인) 秦書(진서)에 의하면 秦王(진왕) 苻堅(부견) 建元(건원) 18년(382) 신라 入貢(입공)에 관한 기사에 「其王樓寒遣使衛頭 貢美女云云」이란 것이 있다. 건원 18년은 신라 내물왕 27년에 당한즉 삼국사기에는 이 사실을 전년인 내물 26년조에 기재하였음, 소위 「其王樓寒」은 분명히 내물왕의 이름임을 알 수 있고, 원문주5▶또 그 樓寒(누한)이란 말은 왕명이 아니라 왕호인 마립간의 와전이리라 함이고 나가통세(那珂通世) 씨 [a 5]이래 금일 학자의 공인하는 바이어니와, 나는 와전이라는 것보다 당시 신라인의 서칭 그대로 옮겨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타인의 서칭이라면 樓(누)는 마루의 取訓(취훈)으로 麻立(마립)과 같이 볼 수 있고, 寒(한)은 물론 干(간)과 같이 취음의 자이다. 어떻든 누한은 마립간에 상당한 칭호로서, 내물왕 때에 이미 이런 위호가 사용되었던 것을 유사의 기재와 아울러 단정할 수 있고, 인하여 신라의 국가정치도 이 내물마립간 시대에 비로소 정식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단지 이 위호 사용에 의하여 그 정식 국가의 현출 여부를 운운함은 너무도 경솔한 감이 있으므로, 吾人(오인)은 다시 당시 신라 주위의 형편을 참고하여 이를 高調(고조)하려 한다. 변진 20여 국 중의 하나인 사로란 부락국가가 중국의 삼국시대 및 그 이전에는 주위의 11국과 한가지 진마의 주인 「辰王」을 맹주로 삼아 (형식상) 거기에 소속하였던 것은 앞서 누언한 바이지만, 삼국말 西晋(서진)초에 진마의 一隅(일우)에 백제국이 발흥하여 진한의 제부락을 통일하고 나아가 마한의 故地(고지)를 잠식하여 東晋(동진)세에는 백제의 近肖古王(근초고왕)이란 英主(영주)의 경략으로 마한의 영토를 전부 병합하게 되었던 것도 이미 전전회에 논술하여 두었던 바이다. 진마의 땅을 통일한 근초고왕의 치세는 정히 신라의 내물왕 대에 당하거니와, 신라와 「辰王」과의 관계는 마한의 쇠퇴에 따라 물론 이미 큰 변동을 보았을 것이요 신라 자신의 발흥에 있어서도 이러한 주위의 사정에 자극된 바가 적지 안헜을 것이다. 환언하면 백제의 발전과 마한의 쇠잔이, 신라의 국가적 발흥의 기운을 촉진시킴에 있어 얼마나 큰 자극이 되었을 것은 상상하여 남음이 있다. 백제의 마한통일은 전에 말한 바와 같이 근초고왕 24년(369) 즉 신라의 내물왕 14년에 당하니, 신라의 엄밀한 의미의 건국을 줄잡어 이 내물왕 때에 구하는 사견에는 더욱 이의가 없을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를 삼국 중 제일 선진국으로 삼아 그 건국 연대도 타 2국의 우(上)에 놓았지만 사실은 이와 정반대로 최후진국이었다.자치통감, 권104에 의하면 내물왕 22년에 당하는 동진 武帝(무제) 太元(태원) 2년(377)에 신라의 사절이 처음으로 前秦(전진)에 파견된 것이 보이고, 태평어람 소인 진서에는 상술과 같이 내물왕 27년에 상당한 진왕 부견 건원 18년(382)에 또한 신라 입공에 관한 기사가 보이거니와, 후자 기사 중에-진왕 견과 신라사절 사이의 문답에-「堅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答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 今焉得同」이라고 한 일절은 오인의 전술한 견해에 일층 중요한 암시와 증좌를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의 「海東之事」는 신라뿐만 아니라 (광의로) 그 주위 제국의 변천, 특히 백제의 마한통일과 같은 사실까지도 포함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떻든 신라를 주체로 삼아 표현한 말일지요, 사자의 대답도 주로 신라의 변천이 중국의 시대변혁․ 명호개역과 같다는 의미의 말일지니, 신라의 변혁은 물론 내물왕 시대에 부락정치를 탈출하여 국가정치로 換形(환형)한-별언하면 이사금의 시대에서 마립간의 시대로 轉變(전변)하던-사실의 이름에 不外(불외)할 것이다. 그런즉 내물왕이야말로 신라의 국가적 건조의 시조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원문주6▶여초 崔彦撝(최언위) 所撰(소찬)의 眞空大師碑文(진공대사비문)에 [a 6] 「俗姓金氏 鷄林人也 其先降自聖韓○閼智勢或作星漢의 이름인듯 興於勿 本枝百世」라고 한 勿(나물)은 那勿(나물) 즉 奈勿(내물)의 이름으로서, 이것은 특히 김씨 세계에 있어서 내물의 지위를 보인 것이어니와 내물은 실상 김씨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전 신라정치사상의 중시조적 인물로, 더욱 신왕조 개창의 태조라고 하여야 할 것을 重言(중언)하여 둔다. 그러므로 내물의 신라사 상에 처한 지위는 마치 백제사 상의 古爾(고이, 仇台(구태)) 왕의 지위와 같고, 따라 내물 이전의 제왕은 또한 마치 고이 이전의 제왕과 같이 부락국가시대의 거수로 보아 좋다고 생각한다.
쪽수▶P40-1그러면 麻立干의 稱號는 어느 王때에 비로소 쓰기 시작하였는가. 이는 新羅의 國家的 現出의 時期를 살핌에 있어 한 重要한 關鍵이 된다. 史記에는 第十九代 訥祗로부터 四代의 間을 通하야 麻立干이라고 하였으나, 遺事(王曆)에는 第十七▶P41代 奈勿로부터 이를 書稱하였다. 나는 遺事의 記載가 올흔 양으로 생각되나니, 그것은 이러한 旁證的 記事에 依하야 首肯될 수 있다. 즉 太平御覽 所引 秦書에 依하면 秦王 苻堅 建元十八年(382) 新羅 入貢에 關한 記事에 「其王樓寒遣使衛頭 貢美女云云」이란 것이 있다. 建元十八年은 新羅 奈勿王 二十七年에 當한즉 三國史記에는 이 事實을 前年인 奈勿 二十六年條에 記載하였음, 所爲 「其王樓寒」은 分明히 奈勿王의 謂임을 알 수 있고, 원문주5▶또 그 樓寒이란 語는 王名이 아니라 王號인 麻立干의 訛轉이리라 함이 故 那珂通世氏[5]以來 今日 學者의 共認하는 바이어니와, 나는 訛轉이라는 것보다 當時 新羅人의 書稱 그대로 옴기어 노은 것이 아닌가 한다. 他人의 書稱이라면 樓는 마루의 取訓으로 麻立과 같이 볼 수 있고, 寒은 勿論 干과 같이 取音의 字이다. 어떠튼 樓寒은 麻立干에 相當한 稱號로서, 奈勿王時에 임이 이런 位號가 使用되였든 것을 遺事의 記載와 아울러 斷定할 수 있고, 因하야 新羅의 國家政治도 이 奈勿麻立干時代에 비로소 正式으로 形成되였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단지 이 位號 使用에 依하야 그 正式 國家의 現出 與否를 云云함은 너무도 輕率한 感이 있으므로, 吾人은 다시 當時 新羅 周圍의 形便을 參考하야 이를 高調하려 한다. 弁辰 二十餘國 中의 一인 斯盧란 部落國家가 中國의 三國時代 및 그 以前에는 周圍의 十一國과 한가지 辰馬의 主인 「辰王」을 盟主로 삼아 (形式上) 거기에 所屬하였든 것은 앞서 屢言한 바이지만, 三國末 西晋初에 辰馬의 一隅에 百濟國이 勃興하야 辰韓의 諸部落을 統一하고 나아가 馬韓의 故地를 蠶食하야 東晋世에는 百濟의 近肖古王이란 英主의 經略으로 馬韓의 領土를 全部 倂合하게 되였든 것도 이미 前前回에 論述하야 두었든 바이다. 辰馬의 地를 統一한 近肖古王의 治世는 正히 新羅의 奈勿王代에 當하거니와, 新羅와 「辰王」과의 관계는 馬韓의 衰頹에 따라 勿論 이미 큰 變動을 보았을 것이요 新羅 自身의 勃興에 있어서도 이러한 周圍의 事情에 刺戟된 바가 적지 안헜을 것이다. 換言하면 百濟의 發展과 馬韓의 衰殘이, 新羅의 國家的 勃興의 機運을 促進시킴에▶P42있어 얼마나 큰 刺戟이 되었을 것은 想像하여 남음이 있다. 百濟의 馬韓統一은 前에 말한 바와 같이 近肖古王 二十四年(西紀369) 즉 新羅의 奈勿王 十四年에 當하니, 新羅의 嚴密한 意味의 建國을 줄잡어 이 奈勿王時에 求하는 私見에는 더욱 異議가 없을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新羅를 三國 中 第一先進國으로 삼아 그 建國年代도 他二國의 우(上)에 노았지만 事實은 이와 正反對로 最後進國이었다. 資治通鑑(卷百四)에 依하면 奈勿王 二十二年에 當하는 東晋 武帝 太元 二年(377)에 新羅의 使節이 처음으로 前秦에 派遣된 것이 보이고, 太平御覽 所引 秦書에는 上述과 같이 奈勿王 二十七年에 相當한 秦王 苻堅 建元 十八年(西紀382)에 또한 新羅 入貢에 關한 記事가 보이거니와, 後者 記事 中에-秦王 堅과 新羅使節 사이의 問答에-「堅曰 卿言海東之事 與古不同 何也 答曰亦猶中國時代變革•名號改易 今焉得同」이라고 한 一節은 吾人의 前述한 見解에 一層 重要한 暗示와 證左를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긔의 「海東之事」는 新羅뿐만아니라 (廣義로) 그 周圍諸國의 變遷, 特히 百濟의 馬韓統一과 같은 事實까지도 包含한 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떠튼 新羅를 主體로 삼아 表現한 말일지요, 使者의 對答도 主로 新羅의 變遷이 中國의 時代變革․名號改易과 같다는 意味의 말일지니, 新羅의 變革은 勿論 奈勿王時代에 部落政治를 脫出하야 國家政治로 換形한-別言하면 尼師今의 時代에서 麻立干의 時代로 轉變하던-事實의 謂에 不外할 것이다. 그런즉 奈勿王이야말로 新羅의 國家的 建造의 始祖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원문주6▶麗初 崔彦撝 所撰의 眞空大師碑文에[6] 「俗姓金氏 鷄林人也 其先降自聖韓○閼智勢或作星漢의 謂인듯 興於勿 本枝百世」라고 한 勿은 那勿 즉 奈勿의 謂로서, 이것은 特히 金氏世系에 있어서 奈勿의 地位를 보인 것이어니와 奈勿은 실상 金氏世系에서뿐만아니라 全新羅政治史上의 中始祖的 人物로, 더욱 新王朝 開創의 太祖라고 하여야 할 것을 重言하여 둔다. 그러므로 奈勿의 新羅史上에 處한 地位는 마치 百濟史上의 古爾(仇台) 王의 地▶P43-1位와 같고, 따라 奈勿 以前의 諸王은 또한 마치 古爾 以前의 諸王과 같이 部落國家時代의 渠帥로 보아 조타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물 이전의 世次(세차)란 것은 전술과 같이 얼마만치의 확실성을 가진 것인지? 거기 대한 의문은 역시 백제의 고이 이전의 세차에 대한 의문과 마찬가지어서 담보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더욱 삼국사기에 기재된 그들 제왕에 관한 연대기란 것은 대개 허구적이 아니면 후일 발전시대의 사실과 사상으로써 부회 추기한 것이 많아, 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 예하면 혁거세 및 남해 때로부터 낙랑의 兵(병)이 내공 내침하였다는 것과 유리이사금 14년(37)에 낙랑국인 5천이 내투하여 6부에 분거케 하였다는 것과 같음은 전혀 허구의 기재이니, 사로와 낙랑과의 교섭은 지리상으로나 대세상으로나 이를 거의 상상할 수 없는 까닭이며(이는 혹 한강유역의 진한과 낙랑과의 관계 사실을 僞辰韓(위진한)인 신라와의 것으로 오인하여 轉變(전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유리이사금 9년(32)조의 6부의 개정 및 사성이라든지, 탈해이사금때로부터 가장 빈번히 나타나는 백제와의 충돌 기사라든지(이때 백제 역시 아직 흥기 전이다), 탈해•婆娑(파사)•袛摩(저마)의 때에 이미 가야(김해)와의 충돌이 금 洛東(낙동) 하류 방면에 있었다는 기사라든지, 파사이사금 29년(103)에 낙동강 유역의 소국인 比只(비지, 昌寧(창녕)) 多伐(다벌, 大邱(대구)?) 草八(초팔, 草溪(초계))의 3국을 쳐서 병합하였다는 것이라든지, 지마이사금 때로부터 자주 나타나는 靺鞨(말갈)과의 충돌 기사라든지 또 阿達羅(아달라)이사금 3년(156) 5년(158)에 鷄立嶺路(계립령로)와 竹嶺(죽령)을 열었다는 것, 조분이사금 2년(231)에 甘文國(감문국, 開寧(개령))을 討破(토파)하여 군을 삼았다는 것, 沾解(첨해)이사금 때에 沙伐國(사벌국, 尙州(상주))을 토멸하였다昔于老傳(석우로전) 및 지리지 참조는 것, 基臨(기림)이사금 3년(300)에 比列忽(비열흘, 安邊(안변))과 牛頭州(우두주, 春川(춘천))에 순행하였다는 등의 기재는, 다 후일 발전시대의 사실을 상고에 소급하여 부회한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신라의 부락국가시대의 발전이란 것은 모든 방면에 있어 실로 지지하였던 터이므로 이상과 같은 사실이 각각 당해 연대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단 제5대 파사이사금 23년(102)에 音汁伐(음즙벌)(경주군 강서면)) 실직곡역시 음즙 부근인 듯, 재래 三陟說(삼척설)은 부당 押督(압독, 慶山(경산))의 삼국이 내항하였다는 것과, 제7대 逸聖(일성)이사금 13년(146)에 압독국이 叛(반)하여 發兵討平(발병토평)하였다는 것과, 제10대 柰解(내해)이사금 14년(209)에 浦上八國(포상팔국)이 加羅(가라)를 謀侵(모침)함에 가라 왕자의 來請(내청)에 응하여 이를 구원하였다 함과, 다음 조분이사금 7년(236)에 骨伐國(골벌국, 永川(영천))이 내항하여 그 땅으로써 군현을 삼았다 함과 같음은-물론 그 연대에는 신용할 수 없지만-지리상 거리로 보아 그러한 관계의 사실이 일찍부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제14대 유례이사금 14년(297)에 伊西(古)國(이서(고)국, 즉 위지의 優由國(우유국))이란 지금의 淸道(청도) 방면에 있던 소국이 來攻(내공)하여 신라는 마침내 이를 격파하였다는 이야기가 사기 및 유사(未鄒王條(미추왕조))에 적혀 있던 것을 또한 사실로 본다면(단 유사 권1 제3 노례왕조에는 이 이야기를 제3대 유리 때의 것으로 하여 「建虎 十八年 伐伊西國滅之」라고 하였으나, 이는 전회에 변술함과 같이 큰 杜撰(두찬)이어니와, 당시 즉 3세기 말경에도 신라의 가까운 주위에 약간의 변진 소국들이 엄연 존재하였던 것과 신라의 국력이 아직도 부근의 제소국을 죄다 병탄하지 못하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유사 왕력표 乞解(걸해)이사금조를 보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이라 하여, 백제와의 교섭은 제16대 걸해 때(310-356)에 이르러 비로소 된 양으로 전하여 사기의 기재와는 전혀 딴판의 것을 보여주거니와, 혹은 이것이 사실이었는지도 모르며 그렇다고 하면 신라의 발전과 원거리의 제국과의 교섭은 더욱 오인의 상상 이상으로 후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쪽수▶P43-2그러나 奈勿 以前의 世次란 것은 前述과 같이 얼마만치의 確實性을 가진 것인지? 거긔 對한 疑問은 역시 百濟의 古爾 以前의 世次에 對한 疑問과 마찬가지어서 擔保하기 어려운 問題이며, 더욱 三國史記에 記載된 그들 諸王에 關한 年代記란 것은 대개 虛構的이 아니면 後日 發展時代의 事實과 思想으로써 附會 追記한 것이 많아, 그대로 信用하기는 어렵다. 例하면 赫居世 及 南解時로부터 樂浪의 兵이 來攻 來侵하였다는 것과 儒理尼師今 十四年(37)에 樂浪國人 5千이 來投하야 六部에 分居케 하였다는 것과 같음은 全혀 虛構의 記載이니, 斯盧와 樂浪과의 交涉은 地理上으로나 大勢上으로나 이를 거이 想像할 수 없는 까닭이며(이는 혹 漢江流域의 辰韓과 樂浪과의 關係事實을 僞辰韓인 新羅와의 것으로 誤認하야 轉變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또 儒理尼師今 九年(32)條의 六部의 改定 及 賜姓이라든지, 脫解尼師今時로부터 가장 頻繁히 나타나는 百濟와의 衝突記事라든지(이때 百濟 역시 아직 興起前이다), 脫解•婆娑•袛摩의 時에 임이 伽耶(金海)와의 衝突이 今 洛東下流方面에 있었다는 記事라든지, 婆娑尼師今 二十九年(103)에 洛東江流域의 小國인 比只(昌寧) 多伐(大邱?) 草八(草溪)의 三國을 쳐서 倂合하였다는 것이라든지, 祗摩尼師今時로부터 자조 나타나는 靺鞨과의 衝突記事라든지 또 阿達羅尼師今 三年(156) 五年(158)에 鷄立嶺路와 竹嶺을 開하였다는 것, 助賁尼師今 二年(231)에 甘文國(開寧)을 討破하야 郡을 삼었다는 것, 沾解尼師今時에 沙伐國(尙州)을 討滅하였다昔于老傳 及 地理志 參照는 것, 基臨尼師今 三年(300)에 比列忽(安邊)과 牛頭州(春川)에 巡幸하였다는 等의 記載는, 다 後日 發展時代의 事實을 上古에 溯及하야 附會한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新羅의 部落國家時代의 發展이란 것은 모든 方面에 있어 實로 遲遲하였든 터이므로 以上과 같은 事實이 각각 當該年代에 있었다고는 볼 수 없다. 但 第五代 婆娑尼師今 二十三年(102)에 音汁伐▶P44-1(慶州郡 江西面) 悉直谷역시 音汁 附近인 듯, 在來 三陟說은 不當 押督(慶山)의 三國이 來降하였다는 것과, 第7代 逸聖尼師今 十三年(146)에 押督國이 叛하야 發兵討平하였다는 것과, 第十代 柰解尼師今 十四年(209)에 浦上八國이 加羅를 謀侵함에 加羅王子의 來請에 應하야 이를 救援하였다 함과, 다음 助賁尼師今 七年(236)에 骨伐國(永川)이 來降하야 그 땅으로써 郡縣을 삼었다 함과 같음은-勿論 그 年代에는 信用할 수 없지만-地理上 距離로 보아 그러한 關係의 事實이 일즉부터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第十四代 儒禮尼師 十四年(297)에 伊西(古)國(即 魏志의 優由國)이란 지금의 淸道 方面에 있든 小國이 來攻하야 新羅는 마침내 이를 擊破하였다는 이야기가 史記 及 遺事(未鄒王條)에 적히어 있든 것을 또한 事實로 본다면(단 遺事卷一 第三 弩禮王條에는 이 이야기를 第三代 儒理時의 것으로 하야 「建虎 十八年 伐伊西國滅之」라고 하였으나, 이는 前回에 辨述함과 같이 큰 杜撰이어니와, 當時 즉 三世紀末頃에도 新羅의 가까운 周圍에 若干의 弁辰 小國들이 儼然 存在하였든 것과 新羅의 國力이 아직도 附近의 諸小國을 죄다 倂呑하지 못하였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 遺事 王曆表 乞解尼叱今條를 보면 「是王代 百濟兵始來侵」이라 하야, 百濟와의 交涉은 第十六代 乞解時(310-356)에 이르러 비로소 된 양으로 傳하야 史記의 記載와는 全혀 딴판의 것을 보여주거니와, 혹은 이것이 事實이었는지도 모르며 그러타고 하면 新羅의 發展과 遠距離의 諸國과의 交涉은 더욱 吾人의 想像 以上으로 後進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내물왕으로부터는 국가정치시대로 인식되는 만치 부근의 제소부락들을 완전히 통합하여, 그 국력의 신장은 서로 낙동강유역의 가야연맹제국을 壓(압)함은 물론이요 서북으로 백제, 동으로 왜인과의 교섭을 잦게 하고 遠北(원북)으로 고구려와도 교섭을 生(생)하였으며, 또 고구려를 통하여 2차나 전진에까지 사자를 보낸 등, 넉넉히 그 두각을 국제장 속에 나타내게 되었다. 사기 내물왕 37년조에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大西知子實聖爲質」이라고 한것은, 이때 羅麗(나려) 2국의 접근과 결호를 의미하는 사실로서, 당시 고구려는 유명한 광개토왕이 전년에 즉위하여 안으로 勵精圖治(여정도치), 밖으로 南征北伐(남정북벌)의 端(단)을 열 때라 가위 문자 대로의 강성이라고 할 만하였고, 서로(백제•가라연맹제국), 동(왜)으로 적을 가진 신라로서 멀리 이 고구려와 好(호)를 맺으려 함은-소위 원교근공의 감이 없지 아니하지만-사실 국제균형을 위하여 자연한 추세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때 신라의 가장 두통거리는 가야 방면에서 활동하는 왜인의 세력이었으니, 신라의 이 방면에의 진출을 阻止(조지)하는 것도 가야를 후원하는 왜인의 세력이었다. 당시 변진족의 舊國(구국)으로 낙동강 본류역 및 그 以西(이서)에 상존한 자를 일본서기韓地名(한지명)은 백제사료에 의거한 듯에 의하여 들어 보면 창녕 방면에는 比自㶱(비자발, 위지의 不斯國(불사국)), 김해 방면에는 南加羅(남가라, 위지의 狗邪國(구사국)), 咸安(함안) 방면에는 安羅(안라, 위지의 安邪國(안사국)), 高靈(고령) 방면에는 任那加羅(임나가라, 魏志의 彌馬邪鳥國(미마사조국)), 星州(성주) 방면에는 伴跛(반파, 위지의 伴路國(반로국)), 金山(김산) 방면에는 卒麻(졸마, 위지의 走漕馬國(주조마국)) 등 국이 있고 그밖에 喙國(훼국, 達丘伐(달구벌), 즉 대구) 己呑(기탄, 漆谷(칠곡)?) 卓淳(탁순, 昌原(창원)?) 多羅(다라, 陜川(합천)) 散半奚(산반해)합천 廢縣(폐현)의 舊新分縣(구신분현), 즉 금의 新繁(신번) 斯二岐(사이기, 三嘉(삼가)) 子他(자타, 居昌(거창)?) 등 소부락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 연맹형식으로 互相(호상) 친밀한 관계를 갖던 자이며, 그 중의 임나가라(대가야) 남가라(본가야) 안라(아라가야)의 3국은 牛耳(우이)를 잡든 자이었다. 이들 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일찍부터 특수하여, 변진의 鐵金銀(철금은) 직물 재보(珠玉(주옥)) 기타 곡물은 왜인의 주요한 무역품이 되었고, 또 왜인의 무력은 이들 제국의 후원거리가 되었었다. 일본사 상의 소위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란 것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본질적으로는 경제적 이익(무역 거래)을 주로 하던 일종의 공적 상관(후일의 왜관과 같은 것)이었던 것이 후에 차차 정치적 내지 군사적 활동을 겸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일본부의 소재는 처음 임나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사에 임나부라고도 한 것이어니와, 후에 그것이 남가라로 옮겨서도 오히려 그 칭호를 갖게 되어 일본서는 남가라까지도 임나라 하였고, 또 후에 남가라에게 倂合되어 동부가 안라로 옮기어서는 안라까지도 임나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러면 왜인의 가야 방면에의 정치적 군사적 활동은 어떻게 하여 유치된 것이냐 하면, 나의 고찰로는 제3세기 전반기 이래 서로는 백제가 전성의 세로 마한의 舊土(구토)를 병탄하여 오고 동으로는 신라가 발흥하여 부근의 제부락을 통일하여 차차 이(가야) 방면에로 진출하여 올새, 가야제국들은 자연 동서의 신흥세력의 압박을 느끼지 아니할 수 없었고 더욱 신라와의 충돌은 빈삭하고 심각하였던 모양으로, 그들은 이 세력에 저항하기 위하여 내로 동맹을 굳게 함은 물론이요 외로 자기네와 특수의 관계를 가진 왜인과의 호의를 두터이 하여 그 무력적 원조를 힘입기를 得策(득책)으로 하였음에 원인한 것이니, 왜인편으로 보더라도 신라의 이 방면에의 진출은 자기네의 물질적 이익을 위하여 여간한 타격이 아니므로 될수록 가야제국의 현상을 지지하고 신라의 진출을 배제 阻止(조지)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신라⋅왜인 간의 불화와 또 이 방면에서의 상호 충돌은 이리하여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왜인의 활동은 제4세기 말로써 최절정을 이루었었다. 고구려 廣開土王碑文(광개토왕비문)에 「九年己亥○新羅奈勿王四十五年(中略)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中略)歸王請命 太王□後稱其忠□□違 使還告以□許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今驪州?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以下八字缺 來背息 追至任那加羅○즉 고령의 대가야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拔新羅城 □城倭滿倭潰城六云云」(그 아래에도 오히려 「倭潰城」의 자가 보이고 또 「安羅人戍兵」의 자가 2개소에나 보이되 전후에 결자가 많아 文義(문의)가 속치 아니함)이라고 한 일절은 즉 이때 이 방면의 왜인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니, 다시 이(완결이 있는)비문의 대의를 해독하면 고구려 광개토왕 9년(399), 즉 신라 내물왕 44년에 다수한 왜인이 신라국경에 침입하여 城池(성지)를 破潰(파궤)하거늘 신라-사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청하니, 麗王(여왕)이 이때 步騎(보기) 5만을 보내어 신라를 구할새 男居城(남거성)乃斤(내근, 나귀)성 즉 驪州(여주)인 듯으로부터 신라성(왕성?)에 이른즉 성 중에 주둔하였던 왜인들은 麗兵(여병)의 이름을 보고 퇴각하는지라 여병은 이 뒤를 쫓아 임나가라(고령)에 이르러 그 성을 빼여 항복을 받았더니, 안라인의 군병이 재차 신라성을 습탈하고, 왜인은 □성을 점거하여 성을 파궤하였다는 것이다. 이 전역은 왜인•임나가라•안라인 대 신라•고구려인의 충돌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어떻든 이 전역에 신라는 다소의 타격을 받었던 모양이다. 동 비문에 의하면 이때 왜인은 비단 가라연맹제국을 도아 신라를 침습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백제를 도와 고구려의 남진을 阻止(조지)하려 하여 금 황⋅평 양도에까지 침입하다가 광개토왕의 군에게 쫓기어 大敗蕩盡(대패탕진)의 酷禍(혹화)를 입은 일이 있었다. 이것은 동왕 14년 갑진(404) 내지 동왕 17년 정미(407)의 사실이니 이로부터 왜인의 세력과 활기는 대단 멸살되어 가라 방면에 있어서도 전일과 같은 성한 활동은 보지 못하였던 것 같고, 따라서 신라의 서진에 대한 가라 왜인의 저항은 다소 유약함을 면치 못하였던 것 같았다 (삼국사기 나기 實聖(실성) 원년조에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이라 하고 동서 朴堤上傳(박제상전)에도 이와 같은 기재와 및 그들에 관한 유명한 史話(사화)가 실려 있으나, 원문주7▶이것은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박사의 설과 [a 7]같이 왜인의 신라에 대한 압력이 강하던 때의 일일 것인즉, 실상은 실성 원년으로부터 얼마쯤 이전에 속한 사실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리하여 신라의 실성(402-417) 눌지(417-458) 양 왕대에는 낙동강 동안의 제소국이 대부분 신라의 소유에 歸(귀)하였던 모양이나, 그 중 歃梁(삽량, 梁山(양산))과 같은 곳은 여전히 왜인 침습의 入門(입문)이 되다싶이 하고 또 喙國(훼국, 대구) 등지는 다음 자비마립간 8년(465)에 (임나를 후원하는) 왜인에게 일시 침탈되야 朝失暮得(조실모득)의 상태였고 비자발(창녕)은 의연히 서안 제국과의 연맹으로 존립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므로 신라의 낙동강 서안에의 진출은 아직도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쪽수▶P44-2 그러나 다음 奈勿王으로부터는 國家政治時代로 認識되는 만치 附近의 諸小部落들을 完全히 統合하야, 그 國力의 伸長은 西으로 洛東江流域의 加耶聯盟諸國을 壓함은 勿論이요 西北으로 百濟, 東으로 倭人과의 交涉을 잦게 하고 遠北으로 高句麗와도 交涉을 生하였으며, 또 高句麗를 통하야 二次나 前秦에까지 使者를 보낸 등, 넉넉히 그 頭角을 國際場裏에 나타내게 되였다. 史記 奈勿王 三十七年條에 「高句麗遣使 王以高句麗强盛 送伊大西知子實聖爲質」이라고 한▶P45것은, 이때 羅麗 二國의 接近과 結好를 意味하는 事實로서, 當時 高句麗는 有名한 廣開土王이 前年에 卽位하야 內로 勵精圖治, 外로 南征北伐의 端을 열 때라 可謂 文字 대로의 强盛이라고 할 만하였고, 西로(百濟•加羅聯盟諸國), 東(倭)으로 敵을 가진 新羅로서 멀리 이 高句麗와 好를 매즈려 함은-所爲 遠交近攻의 感이 없지 아니하지만-事實 國際均衡을 爲하야 自然한 趨勢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이때 新羅의 가장 頭痛거리는 加耶方面에서 活動하는 倭人의 勢力이었으니, 新羅의 이 方面에의 進出을 阻止하는 것도 加耶를 後援하는 倭人의 勢力이었다. 當時 弁辰族의 舊國으로 洛東江 本流域 및 그 以西에 尙存한 者를 日本書紀韓地名은 百濟史料에 依據한 듯에 依하야 들어 보면 昌寧方面에는 比自㶱(魏志의 不斯國), 金海方面에는 南加羅(魏志의 狗邪國), 咸安方面에는 安羅(魏志의 安邪國), 高靈方面에는 任那加羅(魏志의 彌馬邪鳥國), 星州方面에는 伴跛(魏志의 伴路國), 金山方面에는 卒麻(魏志의 走漕馬國)等 國이 있고 그밖에 喙國(達丘伐, 卽大邱) 己呑(漆谷?) 卓淳(昌原?) 多羅(陜川) 散半奚陜川廢縣의 舊新分縣, 卽 今의 新繁 斯二岐(三嘉) 子他(居昌?) 等 小部落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다 聯盟形式으로 互相 親密한 關係를 갖든 者이며, 그 중의 任那加羅(大伽倻) 南加羅(本加耶) 安羅(阿那加耶)의 三國은 牛耳를 잡든 者이었다. 이들 諸國과 日本과의 關係는 일즉부터 特殊하야, 弁辰의 鐵金銀 織物 財寶(珠玉) 其他 穀物은 倭人의 主要한 貿易品이 되었고, 또 倭人의 武力은 이들 諸國의 後援거리가 되였었다. 日本史上의 所爲 任那日本府란 것은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本質的으로는 經濟的 利益(貿易去來)을 主로 하든 一種의 公的 商官(後日의 倭館과 같은 것)이었든 것이 後에 차차 政治的 乃至 軍事的 活動을 겸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日本府의 所在는 처음 任那에 있었기 때문에 日本史에 任那府라고도 한 것이어니와, 後에 그것이 南加羅로 옴기어서도 오히려 그 稱號를 갖게 되여 日本서는 南加羅까지도 任那라 하였고, 또 後에 南加羅에게 倂合되어 同府가 安羅로 옴기▶P46어서는 安羅까지도 任那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러면 倭人의 加耶方面에의 政治的 軍事的 活動은 어떠케 하야 誘致된 것이냐 하면, 나의 考察로는 第四世紀 前半期以來 西으로는 百濟가 全盛의 勢로 馬韓의 舊土를 倂呑하야 오고 東으로는 新羅가 勃興하야 附近의 諸部落을 統一하야 차차 이(加耶) 方面에로 進出하야 올새, 加耶諸國들은 자연 東西의 新興勢力의 壓迫을 늣기지 아니할 수 없었고 더욱 新羅와의 衝突은 頻數하고 深刻하였든 모양으로, 그들은 이 勢力에 抵抗하기 爲하야 內로 同盟을 굳게 함은 勿論이요 外로 自己네와 特殊의 關係를 가진 倭人과의 好誼를 도타이 하야 그 武力的 援助를 힘닙기를 得策으로 하였음에 原因한 것이니, 倭人편으로 보더라도 新羅의 이 方面에의 進出은 自己네의 物質的 利益을 爲하야 여간한 打擊이 아니므로 될 수록 加耶諸國의 現狀을 支持하고 新羅의 進出을 排擠阻止하려고 하였든 것이다. 新羅ㆍ倭人間의 不和와 또 이 方面에서의 互相衝突은 이리하야 생기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倭人의 活動은 第四世紀末로써 最絶頂을 이루었었다. 高句麗 廣開土王碑文에 「九年己亥○新羅奈勿王四十五年(中略)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中略)歸王請命 太王□後稱其忠□□違 使還告以□許 十年庚子敎遣步騎五萬往救新羅 從男居城○今驪州?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兵方至 倭賊退以下八字缺 來背息 追至任那加羅○卽高靈의 大加耶 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戍兵拔新羅城 □城倭滿倭潰城六云云」 (그 아래에도 오히려 「倭潰城」 의 字가 보이고 또 「安羅人戍兵」의 字가 二個所에나 보이되 前後에 缺字가 만허 文義가 屬치 아니함)이라고 한 一節은 즉 이때 이 方面의 倭人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니, 다시 이(刓缺이 있는)碑文의 大意를 解讀하면 高句麗 廣開土王 九年(399), 즉 新羅 奈勿王 四十四年에 多數한 倭人이 新羅國境에 侵入하야 城池를 破潰하거늘 新羅-使를 高句麗에 보내어 救援을 청하니, 麗王이 이때 步騎 五萬을 보내어 新羅를 救할새 男居城乃斤(나귀)城 卽 驪州인 듯으로부터 新羅城(王城?)에 이른即 城中에 駐屯하였든 倭人들은 麗兵의 이름을 보고 退却하는지▶P47-1라 麗兵은 이 뒤를 쪼차 任那加羅(高靈)에 이르러 그 城을 빼여 降服을 받았더니, 安羅人의 軍兵이 再次 新羅城을 襲奪하고, 倭人은 □城을 占據하야 城을 破潰하였다는 것이다. 이 戰役은 倭人•任那加羅•安羅人 對 新羅•高句麗人의 衝突로 볼 수 있는 것이어니와, 어떠튼 이 戰役에 新羅는 多少의 打擊을 받었든 모양이다. 同碑文에 依하면 이때 倭人은 비단 加羅聯盟諸國을 도아 新羅를 侵襲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百濟를 도와 高句麗의 南進을 阻止하려 하야 今黃ㆍ平 兩道에까지 侵入하다가 廣開土王의 軍에게 쫓기어 大敗蕩盡의 酷禍를 입은 일이 있었다. 이것은 同王 十四年 甲辰( 404) 乃至 同王 十七年 丁未(407)의 事實이니 이로부터 倭人의 勢力과 活氣는 대단 滅殺되어 加羅方面에 있어서도 前日과 같은 盛한 活動은 보지 못하였든 것 같고, 따라서 新羅의 西進에 對한 加羅倭人의 抵抗은 多少 柔弱함을 免치 못하였든 것 같았다 (三國史記 羅紀 實聖 元年條에 「與倭國通好 以奈勿王子未斯欣爲質」이라 하고 同書 朴堤上傳에도 이와 같은 記載와 및 그들에 關한 有名한 史話가 실려 있으나, 원문주7▶이것은 津田左右吉博士의 설과[7]같이 倭人의 新羅에 對한 壓力이 强하든 때의 일일 것인즉, 실상은 實聖元年으로부터 얼마쯤 以前에 屬한 事實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리하야 新羅의 實聖(402-417) 訥祗(417-458) 兩王代에는 洛東江 東岸의 諸小國이 大部分 新羅의 所有에 歸하였든 모양이나, 其中 歃梁(梁山)과 같은 곳은 如前히 倭人 侵襲의 入門이 되다싶이 하고 또 喙國(大邱)等地는 다음 慈悲麻立干 八年(465)에 (任那를 後援하는)倭人에게 一時 侵奪되야 朝失暮得의 狀態였고 比自㶱(昌寧)은 依然히 西岸諸國과의 聯盟으로 存立을 維持하고 있었든 것 같았다. 그러므로 新羅의 洛東江 西岸에의 進出은 아작도 容易한 일이 아니었다.
신라의 자비마립간 시대는 고구려의 長壽王(장수왕) 조, 백제의 盖鹵王(개로왕) 조에 당하거니와, 이때 삼국의 국제관계는 일변하여 신라와 고구려 간의 실화, 백제와 신라 간의 친선이 현출되었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장수왕의 남진책에 원인한 바이었다. 그리하여 서기 475년 장수왕의 대병이 백제의 남북한성을 무찌를 때 개로왕은 왕자 文周(문주)를 신라에 보내여 구원을 乞(걸)함에 신라는 곧 군사 1만을 출동하여 보냈으나 期(기)에 미치지 못하고 성은 함락, 왕은 참해를 입었다. 신라는 그 대신 문주를 도와 왕위를 잇게 하고 백제의 국도는 부득이 熊津(웅진, 公州(공주))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후 羅濟(나제) 간의 친밀은 더욱 굳어져 서기 484년신라 炤知(소지)마립간 6년, 백제 東城王(동성왕) 6년고구려가 신라의 북변을 침하였을 때에 백제는 신라로 더불어 이를 母山城(모산성)鎭川(진천) 東(동)아래에서 격파하고, 서기 493년에는 양국이 서로 혼인을 맺고 (백제의 동성왕이 신라에 혼인을 청함에 신라 소지마립간은 伊伐飡(이벌찬) 比智(비지)의 딸을 보내었다), 익년 신라가 금 報恩(보은) 지방에서 고구려와 싸워 苦境(고경)에 빠졌을 때에 백제는 이를 구원하였고, 또 그 익년 고구려가 금 原州(원주)의 땅이라고 생각되는 雉壤城(치양성)에 침입하였을 때에 신라는 백제를 구조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백제는 고구려의 거의 연년 入寇(입구)에 불안을 느껴 후일 聖王(성왕) 16년(538)에는 국도를 다시 웅진에서 그 서남인 泗沘原(사비원, 금 扶餘(부여))으로 옮기었었다. 이런 형세는 신라로 하여금 益益(익익) 강대케 하여 장차 크게 웅비할 기틀을 짓게 하였다. 그간 신라에 있어서는 자비마립간의 뒤 소지마립간(479-500)을 지나 智證(지증)마립간(500-514)에 이르러 자못 한문화의 양식을 모방하여 비로소 「新羅」란 雅義(아의)의 국호 문자와 「王」이란 칭호를 사용하고(동왕 4년) 喪服法(상복법)을 제정 반행하고 또 국내의 주군현을 정하여 悉直州(실직주, 三陟(삼척))를 두고(동왕 6년) 小京(소경)를 阿尸村(아시촌, 미상)에 두었으며, 다음의 法興王(법흥왕, 514-540)은 7년에 율령을 領示(영시)하고 비로소 백관의 공복을 제정하고 15년에 불법의 신앙을 공인하고 23년에 연호를 칭하여 建元(건원) 원년이라 하는 등 내로 자못 혁신의 치를 할 뿐 아니라 또한 외로 가라 방면의 외교 경략에 힘을 써서 큰 성공을 이루었으니, 나기 동왕 9년조에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飡比助夫之妹送之」라 함과 11년조에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라 함과, 19년조에 「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云云」이라 함을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9년조의 기사는 전회에 이미 설파한 바와 같이 崔致遠(최치원) 所撰(소찬) 釋順應傳(석순응전)의 「大伽耶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輩之女而生太子云云」이란 것에 상응하는 사실로서-傳(전)의 소위 夷粲(이찬) 比枝輩(비지배)는 바로 사기의 伊(이찬) 比助夫(비조부) 그 사람이나 하나는 그이의 妹(매)라 하고 하나는 그의 女(녀)라고 한 차가 있다. 어떻든-이것은 신라와 대가야 사이에 국혼의 맺음이 있던 것을 말함이니, 이때 이와 같이 대가야가 다년 숙적의 신라와 졸지에 혼인을 맺게 된 것은 그 이면에 종종의 사정(예하면 백제 세력의 東漸(동점)에 대한 불안, 왜인의 무력적 후원이 전과 같지 못한 것)이 있겠지만, 또한 신라의 교묘한 외교적 술책에 원인한 바도 많았으리라고 믿는다. 양국의 혼인관계에 취하여는 (역시 전회에 지적한 바와 같이) 일본서기 繼體紀(계체기) 23년조에 「加羅王娶新羅王女 遂有兒息 新羅初送女時 幷遣百人爲女從 受而散置諸縣 令着新羅衣冠 阿利斯等가라국의 왕자 嗔其變服 遣使徵還 新羅大羞 翻欲還女曰 前承汝聘 吾便許婚 今旣若斯 請還王女 加羅己富利知伽異腦王(이뇌왕)의 별명인듯報云配合夫婦 安得更離 亦有息兒 棄之何往遂於所經拔刀伽•古跛•布那牟羅三城 亦拔北境五城」이란 비교적 자세한 기재가 보이거니와 -서기에 新羅王女(신라왕녀)라고 한 것은 傳聞(전문)의 誤(오)인 듯-이 설화의 전부를 역사적 사실 그대로 볼 것이냐 함은 일의문이지만, 어떻든 대가야왕이 신라의 女(녀)를 취하여 兒息(아식)을 生(생)하였다는 것과 그 후 얼마 아니하여 양국 간에 불화가 도로 발생하였던 것과 또 그 실화의 책임이 신라에 있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듯하니, 아마 이때 신라는 혼인(및 女從(여종))책에 의하여 어떠한 음모(내응 作亂(작란))를 圖(도)하려 하다가 그것이 폭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서기의 연대(계체천황 23년)는 신라에 있어서는 법흥왕 16년에 상당하나 이는 양국의 불화가 발생된 때의 연대인즉 혼인 연대는 사기의 지시함과 같이 이보다 6, 7년이나 앞선 법흥왕 9년임이 무의할 것이다. 다음의 법흥왕 11년조의 기사는 그 연대에 상응한 다른 자세한 참고 사료를 발견할 수 없으나, 거기 나타나는 南境拓地(남경척지)는 아마 가야연맹의 하나인 비자발(창녕) 卓淳(탁순, 昌原(창원)?) 등 소국의 병탄을 의미한 것인 듯하다. 끝으로 19년조의 기사는 말할 것도 없이 소위 금관가야국(본가야)의 降附(항부)에 관한 것이니, 사기 지리지 金海小京條(금관소경조)에도 「自始祖首露王至十世仇亥(衷)王 以梁中大通四年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 以其地爲金官郡」이라고 하고, 삼국유사 왕력표 및 駕洛國記(가락국기) 所引(소인) 開皇錄(개황록)에도 본가야의 내항 연대를 역시 양의 중대통 4년 임자 즉 법흥왕 19년(532)으로 명서하였음에 대하여, 가락국기 仇衡王條(구형왕조)에는 이를 魏(위) 保定(보정) 2년 임오 즉 신라 진흥왕 23년(562)으로 書(서)하였다. 그러나 국기의 연대는 전회에도 이미 변박함과 같이 후에 말할 대가야의 멸망 연대와 혼동한 오류이므로 거기에는 좇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본서기 계체기를 보면 21년신라 법흥왕 14년조에는 신라 所破(소파)의 南加羅(남가라, 본가야) 훼(대구) 己呑(기탄, 대구 인근)의 부흥운동에 관한 기재가 있고 동 23년신라 법흥왕 16년조에는 신라의 上臣(상신) 伊叱夫體智干岐(이질부체지간지, 異斯夫(이사부))가 금관•背伐(배벌)•安多(안다)•委陀(위타, 혹운 多多羅(다다라)•須那羅(수나라)•和多(화다)•費智(비지)) 등 남가라의 4촌을 抄掠(초략)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전자의 소위 신라 所破(소파)란 어떤 정도의 타격을 이름인지? 즉 남가라 전체의 파멸인지 혹은 일부의 파멸인지 자세치 못하나, 후자의 금관 등 4촌 초략을 사실이라고 하면-다른 훼•기탄의 2소국은 몰라도-적어도 남가라의 타격만은 아직 전체의 멸망 정도에는 이르지 아니하고 다만 장차 그 존립이 위태할 만하고 또 왜인의 임나부(왜관과 같은 것)가 거기서 안라로 옮기게 되었던 정도의 타격을 의미한 것 같다. 그 타격을 받은 연대에 취하여는 서기의 명시가 없으나 그것은 필연 계체천황 21년, 신라 법흥왕 14년으로부터 12년 前事(전사)일 것이다. 그리고 이질부체지간기(이사부)의 남가라 4촌 襲掠(습략)을 서기의 所示(소시)와 같이 계체천황 23년 즉 신라 법흥왕 16년에 發生한 사실이라고 하면 그것은 익년 남가라 국왕 金仇亥(衷)(김구해(충)) 일운 仇衡(구형)이 國帑(국탕) 보물을 들어 신라에 투항하게 된 최후의 치명상이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사기 이사부전에 이사부가 智度路王(지도로왕) 즉 지증왕 떼에 沿邊官(연변관)이 되어 馬戱(마희)로써 가야국을 암습하여 이를 취하였다는 것은 이 남가라 4촌의 습략에 관한 사실을 연대상으로나 지역상으로 지나치게 전한 것이 아닌가 하나 더 후고를 요한다). 신라의 영토가 낙동강(하류) 서편에 진출하기는 실로 법흥왕 때로부터 이어니와, 다음 진흥왕 대에 이르러서는 신라의 발전은 可謂(가위) 旭日昇天(욱일승천)의 세로서 낙동강 유역의 (변진)제부족의 통일은 물론이요 북으로 죽령 이북의 고구려의 군현을 점유하여 경역이 한강 유역 내지 함경남도에까지 이르렀으니, 왕의 척경에 관한 위업은 무엇보다도 현존한 네 巡境碑(순경비, 창녕•북한산•黃草嶺(황초령)•磨雲嶺(마운령))가 이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말하려고 하는 것은 진흥왕의 낙동강 서편 제국의 경략 내지 변진족의 통일 그것에 취하여서다. 첫째 대가야 즉 임나가라에 대한 경략이니, 대가야는 법흥왕 9년에 신라에 附(부)하여 혼인을 맺고 친밀을 圖(도)하다가 未久(미구)에 신라의 야심을 간파하고 도로 이와 간극을 生(생)하게 된 것은 위에 이미 말한 바이어니와, 신라의 영토적 욕망이야말로 이때 점점 고도에 달하여 가고 가야 제국의 유일한 후원인 왜인의 세력은 제국을 도와 신라의 서진을 阻止(조지)하기에는 너무도 무능무력하고 더구나 남가라•훼국•기탄 등 국이 이미 완전한 신라의 소유가 된 이상, 나머지 제소국의 운명은 실로 풍전의 등화라고 할 만하였다. 진흥왕의 대가야 경략에 관하여는 사기 동왕 23년조에
쪽수▶P47-2新羅의 慈悲麻立干時代는 高句麗의 長壽王朝, 百濟의 盖鹵王朝에 當하거니와, 이때 三國의 國際關係는 一變하야 新羅와 高句麗間의 失和, 百濟와 新羅間의 親善이 現出되었으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長壽王의 南進策에 原因한 바이었▶P48다. 그리하야 西紀 四百七十五年 長壽王의 大兵이 百濟의 南北漢城을 뭇지를 때 盖鹵王은 王子 文周를 新羅에 보내여 救援을 乞함에 新羅는 곧 軍士 一萬을 出動하여 보냈으나 期에 및이지 못하고 城은 陷落, 王은 斬害를 입었다. 新羅는 그 대신 文周를 도아 王位를 이으게 하고 百濟의 國都는 不得已 熊津(公州)으로 옴기게 되였다. 以後 羅濟間의 親密은 더욱 굳어져 西紀 四百八十四年新羅 炤知麻立干 六年, 百濟 東城王 六年高句麗가 新羅의 北邊을 侵하였을 때에 百濟는 新羅로 더불어 이를 母山城鎭川 東下에서 擊破하고, 西紀 四百九十三年에는 兩國이 서루 婚姻을 맺고 (百濟의 東城王이 新羅에 婚姻을 請함에 新羅 炤知麻立干은 伊伐飡 比智의 女를 보내었다), 翌年 新羅가 今 報恩地方에서 高句麗와 싸워 苦境에 빠젔을 때에 百濟는 이를 救援하였고, 또 그 翌年 高句麗가 今 原州의 地라고 생각되는 雉壤城에 侵入하였을 때에 新羅는 百濟를 救助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百濟는 高句麗의 거이 年年 入寇에 不安을 늣기어 後日 聖王 十六年(538)에는 國都를 다시 熊津에서 그 西南인 泗沘原(今 扶餘)으로 옴기었었다. 이런 形勢는 新羅로 하야금 益益 强大케 하야 장차 크게 雄飛할 기틀을 짓게 하였다. 그간 新羅에 있어서는 慈悲麻立干의 뒤 炤知麻立干(479-500)을 지나 智證麻立干(500-514)에 이르러 자못 漢文化의 樣式을 模倣하야 비로소 「新羅」란 雅義의 國號 文字와 「王」이란 稱號를 使用하고(同王 四年) 喪服法을 制定頒行하고 또 國內의 州郡縣을 定하야 悉直州(三陟)를 두고(同王 六年) 小京를 阿尸村(未詳)에 두었으며, 다음의 法興王(514-540)은 七年에 律令을 領示하고 비로소 百官의 公服을 制定하고 十五年에 佛法의 信仰을 公認하고 二十三年에 年號를 稱하야 建元 元年이라 하는 등 內로 자못 革新의 治를 할 뿐 아니라 또한 外로 加羅方面의 外交經略에 힘을 써서 큰 成功을 이루었으니, 羅紀 同王 九年條에 「春三月 加耶國王遣使請婚 王以伊飡比助夫之妹送之」라 함과 十一年條에 「秋九月 王出巡南境拓地 加耶國王來會」라 함과, 十九年條에 「金官國主金仇亥與妃及三子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P49武力 以國帑寶物來降云云」이라 함을 보아 이것을 알 수 있다. 九年條의 記事는 前回에 임이 說破한 바와 같이 崔致遠所撰 釋順應傳의 「大伽耶國月光太子 乃正見之十世孫 父曰異腦王 求婚于新羅 迎夷粲比枝輩之女而生太子云云」이란 것에 相應하는 事實로서-傳의 所爲 夷粲 比枝輩는 바루 史記의 伊 比助夫 其人이나 一은 그이의 妹라 하고 一은 그의 女라고 한 差가 있다. 어떠튼-이것은 新羅와 大伽耶 사이에 國婚의 맺임이 있든 것을 말함이니, 이때 이와 같이 大伽耶가 多年 宿敵의 新羅와 졸지에 婚姻을 맺게 된 것은 그 裏面에 種種의 事情(例하면 百濟勢力의 東漸에 對한 不安, 倭人의 武力的 後援이 前과 같지 못한 것)이 있겠지만, 또한 新羅의 巧妙한 外交的 術策에 原因한 바도 만었으리라고 믿는다. 兩國의 婚姻關係에 就하여는 (역시 前回에 指摘한 바와 같이) 日本書紀 繼體紀 二十三年條에 「加羅王娶新羅王女 遂有兒息 新羅初送女時 幷遣百人爲女從 受而散置諸縣 令着新羅衣冠 阿利斯等伽羅國의 王子 嗔其變服 遣使徵還 新羅大羞 翻欲還女曰 前承汝聘 吾便許婚 今旣若斯 請還王女 加羅己富利知伽異腦王의 別名인듯報云配合夫婦 安得更離 亦有息兒 棄之何往遂於所經拔刀伽•古跛•布那牟羅三城 亦拔北境五城」이란 比較的 仔細한 記載가 보이거니와 -書紀에 新羅王女라고 한 것은 傳聞의 誤인 듯-이 說話의 全部를 歷史的 事實 그대로 볼 것이냐 함은 一疑問이지만, 어떠튼 大伽耶王이 新羅의 女를 娶하야 兒息을 生하였다는 것과 그 후 얼마아니하야 兩國間에 不和가 도로 發生하였든 것과 또 그 失和의 責任이 新羅에 있었든 것은 움직일 수 없는 事實인 듯하니, 아마 이때 新羅는 婚姻(及女從)策에 依하야 어떠한 陰謀(內應作亂)를 圖하려 하다가 그것이 暴露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書紀의 年代(繼體天皇 二十三年)는 新羅에 있어서는 法興王 十六年에 相當하나 이는 兩國의 不和가 發生된 때의 年代인즉 婚姻年代는 史記의 指示함과 같이 이보다 六, 七年이나 앞슨 法興王 九年임이 無疑할 것이다. 다음의 法興王 十一年條의 記事는 그 年代에 相應한 다른 仔細한 參考史料를 發見할 수 없▶P50으나, 거긔 나타나는 南境拓地는 아마 加耶聯盟의 一인 比自㶱(昌寧) 卓淳(昌原?) 등 小國의 倂呑을 意味한 것인 듯하다. 끝으로 十九年條의 記事는 말할 것도 없이 所爲 金官伽耶國(本伽耶)의 降附에 關한 것이니, 史記 地理志 金海小京條에도 「自始祖首露王至十世仇亥(衷)王 以梁中大通四年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 以其地爲金官郡」이라고 하고, 三國遺事 王曆表 及 駕洛國記所引 開皇錄에도 本伽耶의 來降年代를 역시 梁의 中大通 四年 壬子 즉 法興王 十九年(532)으로 明書하였음에 對하야, 駕洛國記 仇衡王條에는 이를 魏 保定 二年 壬午 즉 新羅 眞興王 二十三年(562)으로 書하였다. 그러나 國記의 年代는 前回에도 이미 辨駁함과 같이 後에 말할 大伽耶의 滅亡年代와 混同한 誤謬이므로 거긔에는 좇을 必要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日本書紀 繼體紀를 보면 二十一年新羅 法興王 十四年條에는 新羅所破의 南加羅(本加耶) 喙(大邱) 己呑(大邱隣近)의 復興運動에 關한 記載가 있고 同二十三年新羅 法興王 十六年條에는 新羅의 上臣 伊叱夫體智干岐(異斯夫)가 金官•背伐•安多•委陀(或云 多多羅•須那羅•和多•費智)等 南加羅의 四村을 抄掠하였다는 記載가 있다. 前者의 所爲 新羅所破란 어떤 程度의 打擊을 이름인지? 즉 南加羅 全體의 破滅인지 혹은 一部의 破滅인지 자세치 못하나, 後者의 金官等 四村 抄掠을 事實이라고 하면-다른 喙•己呑의 二小國은 몰라도-적어도 南加羅의 打擊만은 아직 全體의 滅亡 程度에는 이르지 아니하고 다만 장차 그 存立이 危殆할 만하고 또 倭人의 任那府(倭館과 같은 것)가 거긔서 安羅로 옴기게 되였든 程度의 打擊을 意味한 것 같다. 그 打擊을 받은 年代에 就하여는 書紀의 明示가 없으나 그것은 필연 繼體天皇 二十一年, 新羅 法興王 十四年으로부터 十二年 前事일 것이다. 그리고 伊叱夫體智干岐(異斯夫)의 南加羅 四村 襲掠을 書紀의 所示와 같이 繼體天皇 二十三年 즉 新羅 法興王 十六年에 發生한 事實이라고 하면 그것은 翌年 南伽羅國王 金仇亥(衷)一云 仇衡이 國帑寶物을 들어 新羅에 投降하게 된 最後의 致命傷이었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史記 異斯夫傳에 異斯▶P51-1夫가 智度路王 卽 智證王時에 沿邊官이 되야 馬戱로써 加耶國을 暗襲하야 이를 取하였다는 것은 이 南加羅 四村의 襲掠에 關한 事實을 年代上으로나 地域上으로 지나치게 傳한 것이 아닌가 하나 더 後考를 要한다). 新羅의 領土가 洛東江(下流) 西편에 進出하기는 실로 法興王時로부터 이어니와, 다음 眞興王代에 이르러서는 新羅의 發展은 可謂 旭日昇天의 勢로서 洛東江流域의 (弁辰)諸部族의 統一은 勿論이요 北으로 竹嶺 以北의 高句麗의 郡縣을 占有하야 境域이 漢江流域 乃至 咸鏡南道에까지 이르렀으니, 王의 拓境에 關한 偉業은 무었보다도 現存한 四巡境碑(昌寧•北漢山•黃草嶺•磨雲嶺)가 이를 雄辯으로 말하고 있다. 그러나 여긔서 特히 말하려고 하는 것은 眞興王의 洛東江 西便諸國의 經略 乃至 弁辰族의 統一 그것에 就하여서다. 첫재 大加耶 즉 任那加羅에 對한 經略이니,大加耶는 法興王 九年에 新羅에 附하야 婚姻을 맺고 親密을 圖하다가 未久에 新羅의 野心을 看破하고 도로 이와 間隙을 生하게 된 것은 우에 이미 말한 바이어니와, 新羅의 領土的 欲望이야말로 이때 점점 高度에 達하야 가고 加耶諸國의 唯一한 後援인 倭人의 勢力은 諸國을 도와 新羅의 西進을 阻止하기에는 너무도 無能無力하고 더구나 南加羅•喙國•己呑等國이 임이 完全한 新羅의 所有가 된 以上, 남어지 諸小國의 運命은 실로 風前의 燈火라고 할 만하였다. 眞興王의 大加耶 經略에 關하여는 史記 同王 二十三年條에

九月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 先馳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云云

쪽수▶P51-2

九月加耶叛 王命異斯夫討之 斯多含副之 斯多含領五千騎 先馳入栴檀門 立白旗 城中恐懼不知所爲 異斯夫引兵臨之 一時盡降云云

이라 하고 동서(권44) 斯多含傳(사다함전)에도 「眞興王命異飡伊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時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確 送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領麾下兵 先入栴檀梁栴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 其國人不意兵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이라 하고, 또 동서 지리지 고령군조에는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鼓王一云內珍朱智至道設智凡十六世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이라고 한 기사가 있다. 나는 전회(弁辰彌鳥邪馬條, 변진미조사마조)에 있어 위의 사기 진흥왕 23년조의 첫머리의 「加耶叛」이란 문자와, 동왕 12년조의 「先是 伽耶國嘉悉王 製十二絃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伽耶琴」이란 기사와, 익 13년조 및 동서 악지(伽耶琴條, 가야금조) 所引(소인) 古記(고기)에 보이는 于勒(우륵) 관계의 기사를 참조하여, 대가야의 병속 연대를 진흥왕 23년 이전에 구하는 동시에 위의 23년조의 기사를 가야 반란에 대한 토평으로 해석한 일이 있으나, 근일 이를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23년조의 「加耶叛」 3자는 암만하여도 무슨 착오로 생긴 사족의 글 句(구)인 듯하니, 만일 그때 정말 가야에 반란이 있어서 토벌군을 내인 것이라고 하면, 그 밑에 「城中恐懼不知爲」라든가 또 사다함전에 「其國人不意兵猝至驚動不能禦」라 한 사실에 대하여 다소의 의아가 없을 수 없다. 왜 그러냐하면 과연 대가야의 반란이 있었다고 하면, 신라의 토벌군이 아무리 졸연히 닥치었다 하기로 그렇게 의외로 경동하여 不知所爲(부지소위)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뿐만 아니라 사다함전을 보면 거기에는 조금도 가야의 반란으로 인하여 출정한 듯한 의미의 문자를 발견할 수 없고 단지 이찬 이사부를 명하여 가라 즉 대가야를 음습케 하였다는 의미의 말 뿐이며, 또 위의 지리지의 글을 보더라도 「眞興大王侵滅之」라고 하였은즉, 이는 필경 신라에서 진흥왕 23년에 계획적으로 대가야를 도모하려고 비밀리에 군대를 파견하여 불의에 일거 침습한 것이 무의하다고 생각한다. 대가야가 진흥왕 23년 이전에 일단 신라에게 병속되었다가 동 23년에 반란을 일으키어 재차 신라에게 토멸을 당하였던 것과 같이 해석한 전번의 사견은 지금 와서는 이를 취소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23년조의 「加耶叛」 3자는 어찌하여 생긴 글 구이냐 하면 이는 아마 찬자가 이 가야를 남가라 즉 후세 소위 금관가야로 오해하여 이 나라는 앞서 법흥왕 19년에 분명히 신라에 합병된 일이 있은즉 진흥왕 23년의 가야 정벌은 필시 남가라의 반란으로 인한 것이리란 선입적 臆見(억견)에서 출래된 사족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요컨대 대가야의 신라에의 병속 연대 즉 그 멸망 연대는 진흥왕 23년인 것이 확실하고 다만 樂師(악사) 우륵의 신라 투항만은 미리 그 나라의 쇠망할 것을 짐작하고 果行(과행)한 것인 듯하므로 그 투항 연대는 물론 이에 앞섰을 것이다.
쪽수▶P51-3이라 하고 同書(卷四十四) 斯多含傳에도 「眞興王命異飡伊斯夫襲加羅一作加耶國 時斯多含年十五六 請從軍 王以幼少不許 其請勤而志確 送命爲貴幢裨將 其徒從之者亦衆 及抵其國界 請於元帥領麾下兵 先入栴檀梁栴檀梁 城門名 加羅語謂門爲梁 其國人不意兵▶P52猝至 驚動不能禦 大兵乘之 遂滅其國」이라 하고, 또 同書 地理志 高靈郡條에는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鼓王一云內珍朱智至道設智凡十六世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이라고 한 記事가 있다. 나는 前回(弁辰彌鳥邪馬條)에 있어 위의 史記 眞興王 二十三年條의 첫머리의 「加耶叛」이란 文字와, 同王 十二年條의 「先是 伽耶國嘉悉王 製十二絃琴 以象十二月之律 乃命于勒製其曲 及其國亂 操樂器投我 其樂名伽耶琴」이란 記事와, 翌十三年條 及 同書 樂志(伽耶琴條) 所引 古記에 보이는 于勒關係의 記事를 參照하야, 大加耶의 倂屬年代를 眞興王 二十三年 以前에 求하는 同時에 우의 二十三年條의 記事를 加耶叛亂에 對한 討平으로 解釋한 일이 있으나, 近日 이를 다시 생각하여 보건대 二十三年條의 「加耶叛」 三字는 암만하야도 무슨 錯誤로 생긴 蛇足의 글 句인 듯하니, 만일 그때 정말 加耶에 叛亂이 있어서 討伐軍을 내인 것이라고 하면, 그 밑에 「城中恐懼不知爲」라든가 또 斯多含傳에 「其國人不意兵猝至驚動不能禦」라 한 事實에 對하야 多少의 疑訝가 없을 수 없다. 왜 그러냐하면 과연 大加耶의 叛亂이 있었다고 하면, 新羅의 討伐軍이 아무리 猝然히 닥치었다 하기로 그러케 意外로 驚動하야 不知所爲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을까? 그뿐만아니라 斯多含傳을 보면 거긔에는 조금도 加耶의 叛亂으로 因하야 出征한 듯한 意味의 文字를 發見할 수 없고 단지 伊飡 異斯夫를 命하야 加羅 卽大加耶를 음습케 하였다는 意味의 말 뿐이며, 또 우의 地理志의 文을 보더라도 「眞興大王侵滅之」라고 하였은즉, 이는 필경 新羅에서 眞興王 二十三年에 計劃的으로 大加耶를 도모하려고 秘密裏에 軍隊를 派遣하야 不意에 一擧 侵襲한 것이 無疑하다고 생각한다. 大加耶가 眞興王 二十三年 以前에 일단 新羅에게 倂屬되였다가 同 二十三年에 叛亂을 이르키어 再次 新羅에게 討滅을 당하였든 것과 같이 解釋한 前번의 私見은 지금 와서는 이를 取消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二十三年條의 「加耶叛」 三字는 어찌하야 생긴 글句이냐 하면 이는 아마 撰者가 이 加耶를 南加羅 즉 後世 所爲 金官加耶로▶P53-1誤解하야 이 나라는 앞서 法興王 十九年에 分明히 新羅에 合倂된 일이 있은즉 眞興王 二十三年의 加耶征伐은 필시 南加羅의 叛亂으로 因한 것이리란 先入的 臆見에서 出來된 蛇足으로 볼 수밖에 없다. 要컨대 大加耶의 新羅에의 倂屬年代 즉 그 滅亡年代는 眞興王 二十三年인 것이 確實하고 다만 樂師 于勒의 新羅投降만은 미리 그 나라의 衰亡할 것을 짐작하고 果行한 것인 듯하므로 그 投降年代는 勿論 이에 앞섰을 것이다.
대가야가 멸망된 진흥왕 23년에는 가야연맹의 일 중요국인 안라(아라가야)도 동일한 운명에 빠졌으며, 기타의 소국들도 필경 望風(망풍)의 세로 몰락되고 말았다. 일본서기 欽明紀(흠명기) 23년조에 신라가 임나를 타멸하였다는 기사와 및 그 주에 「一本云 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嗟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合十國」이라고 한 것은 다 진흥왕 23년 경에 가라(대가야) 안라를 위시하여 낙동강 서편의 연맹제국의 파멸을 말한 것이니, 이때 일본서는 자국과 이해관계가 깊으니만치 임나제국의 부흥을 위하여 무한히 노력하여 보았으나, 결국은 수포에 돌아가고 말았다. (삼국사기 지리지 함안조에 안라아라가야의 멸망을 법흥왕 대에 된 것과 같이 말한 것은 전회에 변술함과 같이 잘못된 것이니, 즉 그 「法興王以大兵滅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 以其地爲郡」의 법흥왕은 진흥왕으로 改看(개간)할 것이다). 위의 書紀(서기) 주에 열거된 제국 중에 半跛國(반로국)星山伽耶(성산가야)이 빠진 것을 보면 이 나라는 남가라 훼국 기탄국 비자발국 탁순국과 한가지 이 이전에 이미 법흥왕 대에 몰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변진족의 잔여의 제국은 법흥․ 진흥 양대에 이르러 죄다 신라에 병합되고 만 것이다. 어떻든 신라의 변진족 통일은 진흥왕 23년(562)경에 완성된 것으로 볼 수 있거니와, 이는 진마 통일이 완성된 백제 근초고왕 23년(369)과의 연대상 거리를 따져보면 이보다 실로 2세기나 뒤떨어졌다. 변진족의 住地(주지)가 진마의 경역에 비하여 훨씬 적음에 불구하고 그 통일에 있어서는 전자가 후자보다 약 2세기나 뒤떨어진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거기에는 물론 종종의 이유가 있다. 첫째는 신라의 흥기가 백제의 그것에 비하여 다소 뒤떨어진 것, 둘째는 경상도의 지리가 남북으로 태백산계의 4, 5조의 산맥이 縱貫(종관)하고, 또 낙동강이란 대강이 남북을 관류하여 신라의 서방에로의 발전이 남북에로의 그것보다 비교적 용이치 아니하였던 것, 셋째는 낙동강 유역의 가야 등 제소국이 동맹을 공고히 하고 그 위에 일본의 무력을 배경으로 하여 꾸준히 신라의 서진을 제지하였던 것, 넷째는 백제는 부여의 일족으로 진한이란 일찍부터 한문화의 영향을 깊이 받은 북조선의 이민부락 중에서 起國(기국)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반도의 문화 중심지였던 낙랑 대방과 지리상으로 가장 근접하여-입국 전후를 통하여-그곳과의 교섭이 빈번하였으므로 그 개화의 정도는 마한이나 변진의 비가 아니었음에 대하여, 신라는 낙랑 대방으로부터 가장 떨어진 동남隅(우)에 편재하여 백제와는 물론이요 같은 변진족에 있어서도 가야 등 제국에 비하면 문화적으로 저열함을 면치 못하였던 것 등의 이유가 있다. 환언하면 이상 여러 가지의 이유가 신라의 변진 통일을-백제의 진마 통일보다-지지하게 하였던 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신라는 대륙문화 흡수의 후진국가인 만치 고유의 습속과 정신을 보존하여 옴이 다른 제국에 비하여 으뜸이었고, 또 그 아름다운 습속과 정신에 의하여 오래동안 훈련 도야되어 온 국민의 성격과 에네르기는 마침내 비약적으로 발휘하여 비단 변진족의 통일뿐 아니라 일보를 내키어 반도를 통일하는 최후의 승리자가 됨에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쪽수▶P53-2大加耶가 滅亡된 眞興王 二十三年에는 加耶聯盟의 一重要國인 安羅(阿那加耶)도 同一한 運命에 빠젔으며, 其他의 小國들도 필경 望風의 勢로 沒落되고 말았다. 日本書紀 欽明紀 二十三年條에 新羅가 任那를 打滅하였다는 記事와 및 그 註에 「一本云 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嗟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 合十國」 이라고 한 것은 다 眞興王 二十三年頃에 加羅(大加耶) 安羅를 爲始하야 洛東江 西便의 聯盟諸國의 破滅을 말한 것이니, 이때 日本서는 自國과 利害關係가 깊으니만치 任那諸國의 復興을 爲하야 無限히 努力하여 보았으나, 결국은 水泡에 도라가고 말았다. (三國史記 地理志 咸安條에 安羅阿那加耶의 滅亡을 法興王代에 된 것과 같이 말한 것은 前回에 辨述함과 같이 잘못된 것이니, 즉 그 「法興王以大兵滅阿尸良國一云阿那加耶 以其地爲郡」의 法興王은 眞興王으로 改看할 것이다). 위의 書紀註에 列擧된 諸國 中에 半跛國星山伽耶이 빠진 것을 보면 이 나라는 南加羅 喙國 己呑國 比自㶱國 卓淳國과 한가지 이 以前에 이미 法興王代에 沒落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弁辰族의 殘餘의 諸國은 法興․眞興兩代에 이르러 죄다 新羅에 倂合되고 만 것이다. 어떠튼 新羅의 弁辰族 統一은 眞興王 二十三年(562)경에 完成된 것으로 볼 수 있거니와, 이는 辰馬 統一이 完成된 百濟 近肖古王 二十四年(369)과의 年代上 距離를 따저보면 이보다 실로 二世紀나 뒤떨어졌다. 弁辰族의 住地가 辰馬의 境域에 比하야 훨신 적음에 不拘하고 그 統一에 있어서는 前者가 後▶P54-1者보다 約 二世紀나 뒤떠러진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면 거긔에는 勿論 種種의 理由가 있다. 첫재는 新羅의 興起가 百濟의 그것에 比하야 多少 뒤떠러진 것, 둘재는 慶尙道의 地理가 南北으로 太白山系의 四五條의 山脈이 縱貫하고, 또 洛東江이란 大江이 南北을 貫流하야 新羅의 西方에로의 發展이 南北에로의 그것보다 比較的 容易치 아니하였든 것, 셋재는 洛東江流域의 加耶等 諸小國이 同盟을 鞏固히 하고 그 우에 日本의 武力을 背景으로 하야 꾸준히 新羅의 西進을 制止하였든 것, 넷재는 百濟는 扶餘의 一族으로 辰韓이란 일즉부터 漢文化의 影響을 깊이 받은 北朝鮮의 移民部落 중에서 起國하였을 뿐아니라 當時 半島의 文化 中心地였든 樂浪帶方과 地理上으로 가장 近接하야-立國 前後를 통하야-그곳과의 交涉이 頻繁하였으므로 그 開化의 程度는 馬韓이나 弁辰의 比가 아니었음에 對하야, 新羅는 樂浪帶方으로부터 가장 떠러진 東南隅에 偏在하야 百濟와는 勿論이요 같은 弁辰族에 있어서도 加耶等 諸國에 比하면 文化的으로 低劣함을 免치 못하였든 것 等의 理由가 있다. 換言하면 以上 여러가지의 理由가 新羅의 弁辰 統一을-百濟의 辰馬 統一보다-遲遲하게 하였든 所以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新羅는 大陸文化 吸收의 後進國家인 만치 固有의 習俗과 精神을 保存하야 옴이 다른 諸國에 比하야 읏듬이었고, 또 그 아름다운 習俗과 精神에 依하야 오래동안 訓練陶冶되어 온 國民의 性格과 에네르기는 마침내 飛躍的으로 發揮하야 비단 弁辰族의 統一뿐아니라 一步를 내키어 半島를 統一하는 最後의 勝利者가 되매 이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본문2: 7. 결론


본고의 논술이 회를 거듭함이 일곱 번, 해를 거침이 벌써 4년에 달하여, 독자는 물론 필자 자신도 다소의 지리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근본사료의 부족, 지엽 문제의 회피 보류로 인하여 간간히 설이미진(說而未盡)한 곳이 있는 것은 스스로 유감을 느끼는 바이다. 회피 보류된 지엽 문제에 취하여는 타일 일일히 고를 달리하여 발표하려고 하거니와, 근본 사료의 희박으로 인한 미진한 의논은 이 어찌할 수 없는 유감이다. 그리하여 이상 고찰한 나의 신견해 중에는 소소한 부분 문제에 있어서는 더러 빈약한 추리와 억설이 있을지 모르나, 대체 주요한 本幹(본간) 문제에 있어서는 근본 사료의 심각한 분석 비판 내지 정리에 의하여―재래의 전통적 구설을 근본적으로 전복하는 동시에-자기로서는 거의 확실 무의하다고 생각하는 신창견을 학계에 제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신견해 중에도 가장 특색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진한 문제의 신고찰이라고 할 수 있으니, 재래에는 흔히 진한을 변진과―지역적 혹은 종족적으로―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았음에 대하여 필자는 도리어 진한은 마한과―지역적 또는 정치적으로 一이이일(―二而)⋅일이이적(一而二的) 관계를 가졌던 것이라고 강조하여, 그 소재를 마한의 동북계인 한강유역에 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나는 위지 변진조에 열거한 25국을 전부 변진족의 총합국 수 (실상은 저명한 자만을 거시한 것)로 해석하고 동서 마한조에 열거한 진왕 직속의 50여 국을 진한•마한의―저명한 국읍의―혼합한 수효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일로 인하여 마한과 변진의 강역도 선유의 소견과는 좀 차이를 생(生)하게 되었고 더욱이 韓(한)의 명칭의 기원 내지 삼한의 후신인 백제•신라의 기원에 있어서는 재래의 역사관을 일변한 것이 있는 것을 독자는 잘 알 것이다. 필자는 이것으로써 간단한 결론을 지어두거니와, 이번에 본고의 부론으로 삼한 풍속고를 초(草)하지 못하고 이 다음 기회에 미루게 된 것을 유감으로 여긴다.
쪽수▶P55-1本稿의 논술이 回를 거듭함이 일곱 번, 해를 거침이 벌써 四年에 達하야, 讀者는 勿論 筆者 自身도 多少의 支離한 늣김을 갖게 되였다. 그러나 根本史料의 不足, 枝葉問題의 回避 保留로 因하야 間間히 說而未盡한 곳이 있는 것은 스스로 遺憾을 늣기는 바이다. 回避 保留된 枝葉問題에 就하여는 他日 一一이 稿를 달리하야 발표하려고 하거니와, 根本史料의 稀薄으로 因한 未盡한 議論은 이 어찌할 수 없는 遺憾이다. 그리하야 以上 考察한 나의 新見解 中에는 小小한 部分問題에 있어서는 더러 貧弱한 推理와 臆說이 있을지 모르나, 大體 主要한 本幹問題에 있어서는 根本史料의 深刻한 分析 批判 乃至 整理에 依하야―在來의 傳統的 舊說을 根本的으로 顚覆하는 同時에-自己로서는 거이 確實 無疑하다고 생각하는 新創見을 學界에 提出한 것이다. 그런데 이 新見解 中에도 가장 特色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辰韓問題의 新考察이라고 할 수 있으니, 在來에는 흔이 辰韓을 弁辰과―地域的 혹은 種族的으로―密接한 關係를 갖었든 ▶P56것으로 보았음에 對하야 필자는 도리어 辰韓은 馬韓과―地域的 또는 政治的으로 ―二而一ㆍ一而二的 關係를 갖었든 것이라고 强調하야, 그 所在를 馬韓의 東北界인 漢江流域에 求하고 말았다. 그리하야 나는 魏志 弁辰條에 列擧한 二十五國을 전부 弁辰族의 縂合國數 (실상은 著名한 者만을 擧示한 것)로 解析하고 同書 馬韓條에 列擧한 辰王 直屬의 五十餘國을 辰韓•馬韓의―著名한 國色의―混合한 數爻라고 認定하게 되였다. 일로 因하야 馬韓과 弁辰의 疆域도 先儒의 所見과는 좀 差異를 生하게 되었고 더욱이 韓의 명칭의 起源 乃至 三韓의 後身인 百濟•新羅의 起源에 있어서는 在來의 歷史觀을 一變한 것이 있는 것을 讀者는 잘 알 것이다. 筆者는 이것으로써 簡單한 結論을 지어두거니와, 이번에 本稿의 副論으로 三韓 風俗考를 草하지 못하고 이 다음 機會에 미루게 된 것을 遺憾으로 역인다.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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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史林第六卷 第三號 今西博士의 「高句麗五族五部考」及東洋學報十六卷 第一號 池內博士의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 參照.
  2. 東洋學報第一四卷 第二號,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きて」 注十一.
  3. 弗矩內의 內는 「」으로 訓讀하여야 할 것을 主張한 이는 鮎貝房之進氏니 그의 著인 雜攷第一輯 居西干條를 參照함이 可함.
  4. 鮎貝房之進氏 著, 雜攷第一輯 麻立干條.
  5. 故 那珂通世氏 著, 朝鮮古史考(新羅考).
  6. 朝鮮金石總覽上, 百三十五面.
  7. 津田左右吉博士 著,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 一三八頁.






현대문주


  1. 사림 제6권 제3호 금서 박사의 「高句麗五族五部考」 및 동양학보 16권 제1호 지내 박사의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 참조.
  2. 동양학보 제14권 제2호,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きて」 주11.
  3. 불구내의 내는 「」으로 훈독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 이는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씨니 그의 저인 雜攷(잡고) 제1집 居西干條(거서간조)를 참조함이 가함.
  4.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씨 저, 잡고 제1집 마립간조.
  5. 고 나가통세(那珂通世) 씨 저, 조선고사고, 신라고).
  6. 조선금석총람 상, 135혈.
  7. 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 박사 저,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新硏究 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