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3)

North Korea Humanities

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6일 (화) 16:17 판 (새 문서: __NOTOC__ <font face="함초롬돋움"> {{버튼클릭|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버튼클릭|XML 문서 다운받기}} <br...)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조선탑파의 연구(3)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6월
시작쪽 051쪽 종료쪽 095쪽 전체쪽 045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二.典型的樣式成立以後의一般石塔樣式의變遷相


우리는 석조 탑파의 제1절 제1항에서 익산군 용화산 하 미륵사지에 있는 다층석탑 조선 석탑파로서의 최초의 시원형식을 이룬 유일한 유구로서 설명하였고, 같은 곳 왕궁면 왕궁리 속칭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 저 미륵탑의 모방적 재현 형식의 유구로서 건축적 구조특질보다도 조각적 응집 결태로서의 과도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으며, 부여읍 추정 정림사지에 있는 오중탑(속칭 평제탑)은 미륵탑의 건축적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다 더 완성태로의 발전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직접 계련 관계는 여하간에 양식적으로는 다른 시원적인 일례가 의성군 영니산 하 일명사지에 오중탑 일기가 있어 이것들이 경주 감은사지의 삼중탑 양기, 고선사지의 삼중탑, 나원리 일명사지의 오중탑, 충주 가금면 탑정
쪽수▶P51우리는 石造 塔婆의 第一節 第一項에서 益山郡 龍華山 下 彌勒寺址에 있는 多層石塔 朝鮮石塔婆로서의 最初의 始源形式을 이룬 唯一한 遺構로써 說明하였고 同地 王宮面 王宮里 俗稱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 저 彌勒塔의 模倣的 再現 形式의 遺構로서 建築的 構造特質보다도 彫刻的 凝集 結態로서의 過渡 傾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說明하였으며, 扶餘邑 推定 定林寺址에 있는 五重塔 (俗稱 平濟塔)은 彌勒塔의 建築的 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야 보다 더 完成態로의 發展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直接 係聯關係는 如何間에 樣式的으론 다른 始源的인 一例가 義城郡 盈尼山 下 逸名寺址에 五重塔 一基가 있어 이것들이 慶州 感恩寺址의 三重塔 兩基, 高仙寺址의 三重塔, 羅原里 逸名寺址의 五重塔, 忠州 可金面塔亭▶P52里 逸名寺址의 七重塔(俗稱 中央塔) 等에서 綜合 聚成되야 그곳에 朝鮮石塔으로서의 最初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있었다는 것을 第二項에서 說明하였고 그리고 第三項에서 이 兩大部類의 世代觀을 말하야 彌勒塔·王宮坪塔·定林塔·盈尼山下塔 統一以前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을 統一 以後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後─ 筆者의 反省과 追究는 以上 論考 中 한 개의 矛盾을 發見케 되었으니 即 그것은 王宮坪塔에 대한 意見이다. 무엇이냐 하면 王宮坪塔은 外樣으로선 第一部類 即 始源的 樣式部類에 類聚될 수 있는 樣式 感情을 充分히 가졌고 또 一部 屋蓋의 構造法같은데 定林塔과의 類似點이 있지만 屋裏層段形「밭임」의 全般的으로 田字形四分派의 平面을 이루는 意思는 이 第一部類에 屬하는 諸他石塔에는 共通性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第二部類의 典型的 塔婆類들에 共通되는 것, 또 初層屋身 板石으로써 構成하면서 隅柱及 中間柱의 形式을 便宜的인 浮彫法에 依하였을 뿐더러 上下의 太細의 變化, 即「엔터시스」의 精神이 없는 것─이러한 짧은 樣式的으로도 確實히 第二部類의 下에 屬할 것임을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換言하면 이러한 理由에서 이 王宮坪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等과 같이 樣式的으로 第一部類 即 始源部類에 類聚시킬 수 없는 同時에 時代的으로도 그러한 類들과 함께 新羅統一 以前, 即 三國期에 둘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新羅統一後 即 저 典型的 塔婆들이라 指稱한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들과 함께 類聚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問題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典型的 塔婆들은 이▶P53미 前節에서도 說明한 바와 같이 그 初層屋身들의 構造手法에 있어 四個隅柱가 이미「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別個의 長石으로써 獨立되히 構成되고 그리고 壁面의 面石만은 또 다시 다른 石片으토써 構成하고 있음에서(但羅源里塔만은各面一枚板石으로써 成立시키고 一隅一柱를 模刻하게됨) 그 寫實的 眞實味를 갖고 있는 터인데, 王宮坪에는 이러한 眞實珠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初層屋身壁面에 한 間柱를 나타낸 것도 或欺 저 定林塔·中央塔 等의 初層屋身에서 볼 수 있는 二間區分 再現키 爲한 것이였었는지 알 수 없지만 萬一 그러한 意思에서의 表現 樣式이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愚拙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盈尼山 下五重塔이 二層 以上의 屈身부터 二間壁을 나타낸 無意味性보다도 더 甚한 無意味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無意味性의 拙劣한 實例는 원문주1▶星州邑東 醫公寺(一云 東方寺)址에도 一基(現存 八重)가[1] 있지만 時代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何如間, 以上 理由에서 王宮坪塔을 樣式史的 見地에선 第一期의 始源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킬 수 없고 第二期의 典型的 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키기 困難한 것이다. 차라리 初層屋身만은 後代의 修補였다면 나머지 上層 部分은 第二期의 類型 속에 編시켜도 좋을 可能性이 많은데 그렇지 않고 이 初層屋身이 原狀대로라 하면 이 塔은 依然히 救할 수 없는 것이다. 即 第二期의 部類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못 塔婆 自身의 이러한 樣式的 問題를 떠나서 그 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한 개의 參考資料로서의 瓦當같은 것을 副次的으로 商量한다면 그 瓦當紋儀는 이미 關野貞 博士도 指稱한 바와 같이 新羅統一初의 것이라는 것과 共通되는 特質을 가졌고 또 나의 所見으로선 忠州 中央塔附近에서 ▶P54-1發見되었다는 瓦當과도 共通되는 時代性을 보이는 點이 있음에서 이 瓦當을 通하야 볼제는 저 中央塔이란 것과 이 王宮坪塔이란 것과가 位次的으로 共通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即 이러한 點을 하여서나 $宮坪堵이 겨우 第二期의 堵婆部類들에 끼워질수 있는 可能性이 생기게될뿐, 樣式的론 危殆危殆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朝鮮의 第一期石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三基에 限定되고 만다. 即 其三基만이 統一 以前의 作品인 것이다. 彌勒塔은 損傷이 甚한 것이지만 定林塔, 盈尼山下塔 唐風이 아직 보이지 않은 即 六朝 氣風이 明白히 보이는 塔이라 하겠다. 적어도 隨風까지는 充分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
쪽수▶P54-2다시 前節 第二項에서는 典型的 塔婆로서 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을 列舉하야 樣式史的 順次를 定해 보았으나 確實한 斷案을 내리지 못한 點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樣式的으로 그 四塔이 거의 等一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後의 商考에 依하면, 威恩塔을 第一位, 高仙塔을 第二位, 中央塔을 第三位, 羅原里塔을 第四位에 둘까한다. 그 理由로선 爲先 高仙塔이 樣式的으로 感恩塔과 全혀 同一하나 屋蓋 其他에 多少 疑縮된 意思와 基壇上 臺覆石에 多少 簡化된 手法과 初層塔身에 修飾 意思의 加味 等이 있어 이러한 點에서 이것을 感恩塔 다음에 두겠고 中央塔은 部分的으론 古意를 多少 남긴 點도 있으나 다시 또 部分的으로 新意에 屬하는 것도 있어(例如, 屋蓋와 屋蓋「밭임」과가 一石으로 되는 點은 新意라 할 수 있다) 古意는 옛것 외 殘滓로 볼 수 있어 下限이 未定되는 것이나 新意는 그 上限에 制限이 있는 것인즉 이러한 點에서 高仙▶P55塔 下位에 둘 수 있겠고 羅原里塔 初層屋身에 벌써 四枚板石으로써 結構하는 同時에 그 一隅에 隅柱를 表現하려는 意思와 第三層 以上 屋蓋와 屋蓋「밭임」이 一石으로 되는(第二, 第一 屋蓋는 屋蓋와 屋蓋밭임이 別石이다) 意思가 있어 이러한 點에서 最下位에 두는 바이다. 時代로 말하면 이 類型의 樣式 上眼을 感恩塔에 두었은즉 이 類型은 모두 文武王代 以後가 된다. 年代로 말하면 文武王 8年(即 新羅 통統一年 西紀 668年)以後이나 各其 塔婆의 個別的 建立 年數란 勿論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筆者는 이 四塔을 朝鮮 石塔의 典型的 塔婆라 指稱하는 同時에 朝鮮 石塔婆史上 第二期에 屬하는 것이요 新羅 歷史上 中代前期에 屬하는 塔婆라 看做한다. 中代前期라는 것은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러 聖德王代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新羅史의 世代區分에 있어 新羅本紀가 말하는 眞德王까지의 聖骨 時代를 古期라 하고 武烈王 以後 敬順王까지 眞骨 時代 中 惠恭王代까지를 中代라한 區分法에 依하야 武烈王부터 惠恭王까지의 中代一代 筆者는 또다시 聖德王代까지 區分하야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를 中代前期, 孝成王부터 惠恭王代까지를 中代後期 라 함에 依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前에 말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들의 統一 以前의 作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新羅 中代 前期란 것과 時代的으론 相覆되는 部分이 생긴다. 事實말이지 武烈王 一代는 勿論이요 文武王 8年까지도 統一은 完成된 것이 아니다. 即 三國期의 殘存이 依然히 繼續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을 三國末期의 作品이라할 때 新羅史的으론 依然히 그것이 新羅中代에도 걸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못 彌勒塔·定林塔은 百濟 覆滅 以前에 屬할 것임으로 그 下限▶P56이 西紀 661年 前까지 되나 이것도 新羅史的으로 보면 新羅 中代에 걸칠 可能性도 있는 것이다. 况新羅 領域 內에 있어 歲年이 不確實한채 저 彌勒塔·定林塔 間에 介在할 수 있는 盈尼山下塔이 時代的으로 이 新羅 中代에 屬하지말란 法이 없다. 이 點에서 彌勒塔·定林塔은 別 問題로 하더라도(百濟塔이니) 盈尼山下塔만 新羅史的으로 보아 新羅中代에 編入시킬 수도 있다. 即 武烈王 以後이다. 그러나 確實히 저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區別 세우기 爲하야 그것들을 統一以後 作이라면 盈尼山下塔 統一以前이라 할 수 있뿐이요, 威恩塔의 上限이 반드시 文武王八九年 即後에 시작되었을것이 아닐진댄 實際年代的一 론 盈尼山下塔이 文武王八九年 以後까지도 即 感恩塔의 上限이 내려가는대로 그下限이 솟차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야 時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充分히 新羅中期에 깊이 드러갈수도 있는 것이 다. 이것 統一以前에 簡便히 두어버린것은 感恩塔 以 諸塔과 明嶸한 劃을 보히기爲한 한 樣式史的 處分手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第一期(太作品이란것이 新羅史的見地에 있어선 實際 年代的으론 中代까지도 드러올수 있는 것인 同時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感恩塔以下 諸塔과 實 際年代로선 重覆되는 것이 아니요 依然히 區分되면서 中代라는데 包含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樣 式史的世代라는 것과 歷史에서 말하는 實際世代와간에 어긋나는, 또는 多少 意味가 다른 世代라는 것 이 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야 始源的樣式이라는 第一期의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이 典 型的塔婆라할 第二期의 感恩塔以下糾 諸塔과 함끠 世代的으론 新羅中代前期에 合처질수도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본문1-2: 제목@




































본문1-3: 제목@




































본문2-2: 제목@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원문주석1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