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몽촌토성지 - 백제시대의 성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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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6일 (화) 16:07 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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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몽촌토성지 - 백제시대의 성채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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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廣州夢村土城址 - 百濟時代의 城砦址 -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1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9년12월
시작쪽 171쪽 종료쪽 176쪽 전체쪽 006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광장진 철교를 건너 송파리(松坡里) 쪽으로 향하는 중간에 촌락이 둘이 있는 바, 그 하나는 한강연안에 직접한 풍납리(風納里) 부락이요, 다른 하나는 강안에서 조금 동편에 떨어져 있는 몽촌(夢村) 부락이다. 풍납리와 몽촌 사이에는 한강으로 흘러들어가는 한 조그만 내가 있어, 이를 경계로 하여 두 촌락이 남북으로 상대하여 있다. 즉 전자(풍납리)는 이 천류의 북쪽에 있어―행정구획 상―광주군 구천면에 속하고 후자(몽촌)는 그 남에 위치하여 동군 중대면에 속하여 있다. 풍납리에는 세인이 널리 잘 아는 바와 같이―주위 7-8리(조선리정)에 뻗친, 지금에는 연전의 홍수로 서측 북측을 유실한―대규모의 토성의 유지(遺址)가 남아있어, 총독부에서는 이를 조선고적 제27호에 지정하였고 또 필자는 본학보 전권에 있어 이곳이 백제시대의 사성(虵城) 그것임에 틀림없음을 발표하였거니와, 일찍이 이 풍납리 토성을 답사하였을 때에 나는 그 남쪽인 몽촌 부락을 바라보고 그 地形이 아무리 뜯어보아도 순연한 천작(天作)만의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여 이 방면까지도 아울러 조사하려 하였으나 그때 날이 이미 저물어 목적을 달치 못하고 후일을 기약하게 되었다.
쪽수▶P171-1廣壯津鐵橋를 건너 松坡里쪽으로 向하는 中間에 村落이 둘이 있는 바, 그 하나는 漢江沿岸에 直接한 風納里部落이요, 다른 하나는 江岸에서 조금 東편에 떨어져 있는 夢村部落이다. 風納里와 夢村사이에는 漢江으로 흘러들어가는 한 조그만 내가 있어, 이를 境界로 하야 두 村落이 南北으로 相對하여 있다. 즉 前者(風納里)는 이 川流의 北쪽에 있어―行政區劃上―廣州郡九川面에 屬하고 後者(夢村)는 그 南에 位置하야 同郡中垈面에 屬하여 있다. 風納里에는 世人이 널리 잘 아는 바와 같이―周圍七八里(朝鮮里程)에 뻐친, 지금에는 年前의 洪水로 西側北側을 流失한―大規模의 土城의 遺址가 남아있어, 總督府에서는 이를 朝鮮古蹟第二十七號에 指定하였고 또 筆者는 本學報前卷에 있어 이곳이 百濟時代의 虵城 그것임에 틀님없음을 發表하였거니와, 일즉이 이 風納里土城을 踏査하였을 때에 나는 그 南쪽인 夢村部落을 바라보고 그 地形이 아모리 뜨더보아도 純然한 天作만의 것으로 보이지 아니하야 이 方面까지도 아울러 調査하려 하였으나 그때 날이 이미 저물어 目的을 達치 못하고 後日을 期約하게 되었다.
금년 5월에 이르러 나는 석남 송석하(宋錫夏)씨 천뢰 김두헌(金斗憲)씨 등 두어 회우(會友)로 더불어 비로소 이 방면 답사에 반일을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곳의 지형이 나의 전일의 소요(所料)와 다르지 아니함을 보고 기쁨을 금치 못하였다. 먼저 몽촌의 지리적 환경을 살펴보면, 서는 부리도(浮里島)를 싸고 흐르는 한강의 이분파류에 임하고, 북은 구천면(九川面)의 풍납리, 성내리, 동은 동면(同面)의 둔촌고지와 상대하고, 몽촌과 이들 사이에는 위에 말한 바와 같이 조그만 천류가 흘러 한강으로 들어간다. 이 천류의 근원은 두 곳에서 발하여, 한 갈래는 마천리, 또 한 갈래는 감이리 방면에서 흘러오거니와, 전자의 계곡을 소상하면 남한산성에 통하는 길이 있고, 후자 계곡은 춘궁리쪽으로 통하는 길과 연락된다. 그리고 남은 신몽촌인 신설부락을 통하여 방이리, 문정리, 가락리 등의 고지와 접하고, 서남은 송파로 통하여 있다. 요컨대 몽촌의 동북서 삼면은 수류로 둘려있고 오직 남쪽만이 그렇지 않다. 다음에 몽촌 그곳의 지세(地勢)는 대개 요(凹)자형의 구릉―즉 부등변방형에 가까운 강롱(岡隴)으로 돌기하여 있는바 북서남 삼면이 높고 동측 일면이 좀 저함(低陷)하여 동내 전체의 경사가 이리로 지고 따라 동구(洞口)도 동쪽으로 트이어있다. 그리하여 먼저 동측 일대의 언덕을 조사하여보매 길이 약 5정, 최고처가 5-60척에 달하고, 동구에 연속된 저약한 부분은 거의 다 인조의 구릉, 즉 토첩(土疊)의 자취가 아직도 농후하게 남아있음을 간취하였다(도판 제1 및 제2 참조). 나는 곧 석남에게 청하여 카메라로 동구 일대를 촬영하고, 때마침 동구 앞을 지나가는 촌민이 있어 그에게 참고로 이것의 토성(土城) 여부를 질(質)하였든바, 그는 말하되 토성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동구 밖을 흔히 문밖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자래로 이와 같이 불러올진대 옛날 이곳에 성문(城門)이 서 있었음은 물론이요, 몽촌의 강척(岡脊) 전부에 걸쳐 성책(城柵)이 둘려있었음을 또한 유력히 증좌하게 된다. 나는 다시 동내로 들어가 북측 구릉 일대를 밟아 보았는데, 길이가 약 4정, 최고처가 약 8-90척 가량이며, 여기에도 토성의 흔적이 약현약은(若顯若隱)하게 간간히 남아 있을 뿐더러 그 중 저약한 강척에는 북측 내외를 연락하는 한 통로가 열려있음을 보고, 여기가 역시 성문지(城門址) 즉 북문이 있든 곳임을 알았다(도판 제3 참조). 그리하여 나는 이 북문지 및 그 부근과 동내의 전무(田畝) 사이를 돌아다니며 어떠한 유물을 얻어 보려고 약간 시간을 허비하였으나 그럴듯한 훌륭한 것은 발견치 못하고, 오직 밭고랑에서 백제시대에 속한 듯한 도기(陶器)의 파편을 간간히 주워 보았을 뿐이었다. 이러할 즈음에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울어 광선을 감추려하므로 서측 남측은 채 조사도 못하고 동구 밖으로 나와 석남에게 또다시 수고를 청하여 동북 양측의 촬영을 마치고 이어 발을 돌이키었다.
쪽수▶P171-2今年五月에 이르러 나는 石南宋錫夏氏 天籟金斗憲氏等 두어 會友로 더불어 비로소 이 方面踏査에 半日을 보낸 일이 있었는데, 이곳의 地形이 나의 前日의 所料와 다르▶P172-1지 아니함을 보고 기쁨을 禁치 못하였다. 먼저 夢村의 地理的 環境을 삺여보면, 西는 浮里島를 싸고 흘으는 漢江의 二分派流에 臨하고, 北은 九川面의 風納里 城內里, 東은 同面의 遁村高地와 相對하고, 夢村과 이들 사이에는 우에 말한 바와 같이 조그만 川流가 흘러 漢江으로 들어간다. 이 川流의 根源은 두 곳에서 發하야, 한 갈래는 馬川里, 또 한 갈래는 甘二里方面에서 흘러오거니와, 前者의 溪谷을 溯上하면 南漢山城에 通하는 길이 있고, 後者 溪谷은 春宮里쪽으로 通하는 길과 連絡된다. 그리고 南은 新夢村인 新設部落을 通하야 芳荑里, 文井里, 可樂里 등의 高地와 接하고, 西南은 松坡로 통하여 있다. 要컨대 夢村의 東北西三面은 水流로 둘려있고 오직 南쪽만이 그렇지 않다. 다음에 夢村 그곳의 地勢는 대개 凹字形의 丘陵―즉 不等邊方形에 가까운 岡隴으로 突起하여 있는바 北西南 三面이 높고 東側一面이 좀 低陷하야 洞內全體의 傾斜가 이리로 지고 따라 洞口도 東쪽으로 트이어있다. 그리하야 먼저 東側一帶의 언덕을 調査하여보매 기리 약 五町, 最高處가 五六十尺에 達하고, 洞口에 連續된 低弱한 部分은 거의 다 人造의 丘陵, 즉 土疊의 자취가 아직도 濃厚하게 남어있음을 看取하였다(圖版第一及第二參照). 나는 곧 石南에게 請하야 캐메라로 洞口一帶를 撮影하고, 때 마침 洞口 앞을 지나가는 村民이 있어 그에게 參考로 이것의 土城與否를 質하였든바, 그는 말하되 土城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洞口밖을 흔이 門밖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自來로 이와 같이 불러올진대 옛날 이곳에 城門이 서 있었음은 勿論이요, 夢村의 岡脊全部에 걸치어 城柵이 둘려있었음을 또한 有力히 證左하게 된다. 나는 다시 洞內로 들어가 北側丘陵一帶를 밟아 보았는데, 기리가 約四町, 最高處가 約八九十尺 가량이며, 여기에도 土城의 흔적이 若顯若隱하게 間間히 남어 있을 뿐더러 그 중 低弱한 岡脊에는 北側內外를 連絡하는 한 通路가 열려있음을 보고, 여기가 역시 城門址 즉 北門이 있든 곳임을 알았다(圖版第三參照). 그리하야 나는 이 北門址 및 그 附近과 洞內의 田畝사이를 도라다니며 어떠한 遺物을 얻어보려고 약간 時間을 허비하였으나 그럴듯한 훌륭한 것은 發見치 못하고, 오직 밭고랑에서 百濟時代에 屬한 듯한▶P173-1 陶器의 破片을 間間히 주서 보았을 뿐이었다. 이러할 지음에 해는 벌써 西山에 기울어 光線을 감추려하므로 西側 南側은 채 調査도 못하고 洞口밖으로 나와 石南에게 또다시 수고를 請하야 東北兩側의 撮影을 마치고 이어 발을 도리키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토성답사 전에 몽촌 동구밖 맞은쪽 두어 마장되는 곳(그곳은 둔촌에 속함)에 소위 ‘말무덤’ 일좌가 있음을 그 근방 사람에게 듣고 그의 안내로 이를 찾아보았다. 촌민들은 대개 큰 고분을 가리켜 ‘말무덤’이라고 하나 ‘말’은 마(馬)의 뜻이 아니라 크다는 뜻일 것이다. 이 고분은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적은 유의 것은 아니다.(도판 제4 참조). 면적이 약 4-500평, 강기(降起)가 약 2-30여척에 달한다. 이 고분과 몽촌토성과에 어떠한 역사적 관계가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둘이 다 백제시대의 유적에서 더 내려오지 아니할 것은 말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구천면, 중대면 및 그 부근에는 원래 백제시대의 유적유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므로 이 방면에 대하여는 우리의 철저한 조사를 요하는 터이다. 이 몽촌토성과 같은 것은 전혀 세인의 주의 밖에 있던 것을 우리가 처음으로 발견한 바이어니와, 이와 같이 세상에 알려지지 아니한 숨은 유적과 유물이 광주 일대에 얼마나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쪽수▶P173-2그런데 우리는 이 土城踏査前에 夢村洞口밖 마즌쪽 두어 마장되는 곳(그곳은 遁村에 屬함)에 소위 『말무덤』 一座가 있음을 그 近旁사람에게 듣고 그의 案內로 이를 찾어보았다. 村民들은 대개 큰 古墳을 가리처 『말무덤』이라고 하나 『말』은 馬의 뜻이 아니라 크다는 뜻일 것이다. 이 古墳은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으나 그러나 적은 類의 것은 아니다.(圖版第四參照). 面積이 約四五百坪, 降起가 約二三十餘尺에 달한다. 이 古墳과 夢村土城과에 어떠한 歷史的關係가 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둘이 다 百濟時代의 遺蹟에서 더 내려오지 아니할 것은 말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九川面 中垈面 및 그 附近에는 원래 百濟時代의 遺蹟遺物이 比較的 많이 남어 있으므로 이 方面에 對하여는 吾人의 徹底한 調査를 要하는 터이다. 이 夢村土城과 같은 것은 全혀 世人의 注意밖에 있든 것을 우리가 처음으로 發見한 바이어니와, 이와 같이 世上에 알려지지 아니한 숨은 遺蹟과 遺物이 廣州一帶에 얼마나 있는지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 후 나는 몽촌의 미진한 조사를 곧 계속해보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속무와 심한 더위로 인하여 즉시 실현치 못하고 지난 9월말 경에 이르러서야 겨우 하루의 틈을 타서 (몽촌의) 나머지 부분을 답사하게 되였다. 이번에는 주로 서측 남측 부분을 휘돌아 보았는데, 서측은 북측에 비하여 더 높고 더 길고 수목도 더 울창하다. 즉 길이는 약 7정 가량이요, 높이는 최고처가 약 100척 내외나 되며 그리고 여기에는 2-3처의 성문지가 있는 바, 중앙의 것이 제일 크다(도판 제5 제6 참조). 서측 산척에도 토첩의 자취가 띄엄띄엄 남아 있거니와 중앙 이남은 지형상 특히 내외의 겹성으로 둘렸던 것 같이 보인다. 그 다음 남측은 높이가 북측만하고 길이는 동측과 같이 약 5정 가량쯤 되어 보이는데 토첩의 자취는 많이 감추어졌고, 여기에도 다만 내외를 통하는 수처의 문지(門址)가 남아있을 뿐이다. 서
廣州夢村及其附近圖

第一圖 夢村洞口(宋錫夏氏撮影)

第二圖 夢村東側(同上)

第三圖 夢村北側(一部)(同上)

第四圖 夢村古墳(同上)

第五圖 夢村西側門址의入口(筆者 撮影)

第六圖 同西側中央門址(同上)

第七圖 同西側山上의土城址(同上)

第八圖 金構墓(同上)
쪽수▶P173-3그후 나는 夢村의 未盡한 調査를 곧 繼續해보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俗務와 甚한 더위로 因하야 卽時 實現치 못하고 지난 九月末頃에 이르러서야 겨우 一日의 틈을 타서(夢村의) 남어지 部分을 踏査하게 되였다. 이번에는 主로 西側南側部分을 휘도라 보았는데, 西側은 北側에 比하야 더 높고 더 길고 樹木도 더 鬱蒼하다. 즉 기리는 約七町 가량이요, 높이는 最高處가 約 百尺內外나 되며 그리고 여기에는 二三處의 城門址가 있는 바, 中央의 것이 第一 크다(圖版第五 第六參照). 西側山脊에도 土疊의 자취가 뛰엄뛰엄 남어 있거니와 中央以南은 地形上 特히 內外의 겹城으로 둘렸든 것 같이 보인다. 그 다음 南側은 높이가 北側만하고 기리는 東側과 같이 約五町 가량쯤 되여 보이는데 土疊의 자취는 많이 감추어졌고, 여기에도 다만 內外를 通하는 數處의 門址가 남어 있을 뿐이다. 西
廣州夢村及其附近圖

第一圖 夢村洞口(宋錫夏氏撮影)

第二圖 夢村東側(同上)

第三圖 夢村北側(一部)(同上)

第四圖 夢村古墳(同上)

第五圖 夢村西側門址의入口(筆者 撮影)

第六圖 同西側中央門址(同上)

第七圖 同西側山上의土城址(同上)

第八圖 金構墓(同上)
측 하부에는 근세 정조 때의 좌상 김종수(金鍾秀)의 증조되는 김구(金構)의―장려한 석물을 갖춘―분묘가 있어 (도판 제8 참조) 이에 참배하고 돌아왔었다. 몽촌은 즉 김종수의 선영(先塋) 소재지로, 더욱 그가 만년에 퇴로하던 곳으로 유명하거니와 그의 호를 몽촌(夢村) 혹은 몽오(夢梧)라 함도 이로 인함이었다.(유물 습득은 이번에도 실패하고 돌아왔다).
▶P174-1側下部에는 近世 正祖時의 左相 金鍾秀의 曾祖되는 金構의―壯麗한 石物을 가춘―墳墓가 있어 (圖版第八參照) 이에 參拜하고 도라왔었다. 夢村은 즉 金鍾秀의 先塋 所在地로, 더욱 그가 晩年에 退老하든 곳으로 有名하거니와 그의 號를 夢村 혹은 夢梧라 함도 이로 因함이었다.(遺物拾得은 이번에도 失敗하고 도라왔다).
요컨대 몽촌은 사위 합하여 주회(周回) 약 5리(조선리정)에 불과한 조그만 산성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니 상술함과 같이 백제시대의 하나의 요새이었음은 재언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즉 이 몽촌 산성은 저 광장진 배후의 아단성(아차산성)이라든지 그 대안(對岸)의 사성(풍납리 토성)과 한가지 백제의 국도인 한성(춘궁리) 및 그 부속 산성(남한산성)을―적(敵)으로부터―보호하고 방수하는―중요한 임무를 갖던―한강 연안의 성진(城鎭)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혹 이곳이 백제 이전 삼한시대에 이미 어떤 부락국가에 의하여 거성(居城)이나 요진(要鎭)으로 이용되었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지리로 보아 백제시대에 이곳을 그대로 방치하였을 리가 만무한즉 반드시 그때 재이용의 지(地)가 되었을 것은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P174-2要컨대 夢村은 四圍 合하야 周回 約五里(朝鮮里程)에 不過한 조그만 山城으로 볼 수 있는 곳이니 上述함과 같이 百濟時代의 一要塞이었음은 再言을 기다리지 아니한다. 즉 이 夢村 山城은 저 廣壯津背後의 阿旦城(峨嵯山城)이라든지 其對岸의 虵城(風納里土城)과 한가지 百濟의 國都인 漢城(春宮里) 및 그 附屬山城(南漢山城)을―敵으로부터―保護하고 防守하는―重要한 任務를 갖든―漢江沿岸의 城鎭의 하나이었을 것이다. 혹 이곳이 百濟以前 三韓時代에 이미 어떤 部落國家에 依하야 居城이나 要鎭으로 利用되였는지도 알 수 없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地理로 보아 百濟時代에 이곳을 그대로 放置하였을 理가 萬無한즉 반드시 그때 再利用의 地가 되였을 것은 想像하기에 어렵지 않다.
이상은 대개 실지답사의 결과로 보아, 즉 그 지리와 유적 상으로 보아, 몽촌이 고대의 일성지에 틀림없음을 말한 바이어니와, 다시 문헌에 빙거(憑據)하여 보아도 그러함을 더욱 확인할 수 있다. 윤정기의 『동환록(東寰錄)』 권3 「夢村條」를 보면 거기에는 몽촌을 고원강촌(○○○○)이라 하고, 그 밑에 계속하여 여말명신 조훈을(趙云仡)과 이곳과의 관계 사실을 기재하였다. 이 기사는 여사본전의 것을 이끈 것이므로, 본전에 의하여 좀 자세히 말하면, 조운흘은 본시 풍양현인(豊壤縣人)으로 공민왕 6년에 등제하여 우왕 창왕 공양왕 및 이씨 태조에 역사(歷仕)하여 내외요직을 밟은 이인데, 위인이 질탕괴위(跌宕瑰偉)하여 공민왕 23년에는 전법총랑(典法摠郞)의 직을 사(辭)하고 상주 노음 산하에 거하여 석간(石澗) 서하옹(棲霞翁)이라 자호(自號)하고 출인할 때에 반드시 소를 타므로 기우도(騎牛圖)를 저(著)하고 또 석간가(石澗歌)를 찬(贊)한 일이 있으며, 우왕 6년에는 판전교사(判典校寺) 사(事)로 광주고원강촌(○○○○)에 퇴거하여 판교 사평 양원을 중수(重修)할 새 자칭 원주(院主)라 하고 폐의초리(敝衣草履)로 역도(役徒)와 함께 노동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조에 입(入)하여는 강릉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로 있다가 얼마 아니하여 병으로 직을 사(辭)하고 광주별서(○○○○)에 퇴귀하였다 한다. 광주별서는 역시 고원강촌을 가리킴이니, 본전 말단에 그의 병종 시의 자술한 묘지(墓誌)를 인용하여
▶P174-3以上은 대개 實地踏査의 結果로 보아, 즉 그 地理와 遺蹟上으로 보아, 夢村이 古代의 一城池에 틀림없음을 말한 바이어니와, 다시 文獻에 憑據하여 보아도 그러함을 더욱 確認할 수 있다. 尹廷琦의 東寰錄卷三 夢村條를 보면 거기에는 夢村을 古垣江村(○○○○)이라 하고, 그 밑에 繼續하야 麗末名臣 趙云仡과 이곳과의 關係史實을 記載하였다. 이 記事는 麗史本傳의 것을 이끈 것이므로, 本傳에 依하야 좀 자세히 말하면, 趙云仡은 본시 豊壤縣人으로 恭愍王六年에 登第하야 禑王 昌王 恭讓王 및 李氏太祖에 歷仕하야 內外要職을 밟은 인데, 爲人이 跌宕瑰偉하야 恭愍王二十三年에는 典法摠郞의 職을 辭하고 尙州 露陰山下에 居하야 石澗 棲霞翁이라 自號하고 出人할 때에 반드시 소를 타므로 騎牛圖를 著하고 또 石澗歌를 贊한 일이 있으며, 禑王六年에는 判典校寺事로 廣州古垣江村(○○○○)에 退居하야 板橋 沙平兩院을 重修할새 自稱院主라 하고 敝衣草履로 役徒와 함께 勞働을 하였다 한다. 그리고 李朝에 入하여는 江陵大都護府使로 있다가 얼마 아니하야 病으로 職을 辭▶P175-1하고 廣州別墅(○○○○)에 退歸하였다 한다. 光州別墅는 역시 古垣江村을 가르침이니, 本傳末段에 그의 病終時의 自述한 墓誌를 引하야

年七十三 病終廣州古垣城(○○○○○) [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 而葬于古楊州峨嵯山南]云云

▶P175-2

年七十三 病終廣州古垣城(○○○○○) [無後 以日月爲珠璣 以淸風明月爲奠 而葬于古楊州峨嵯山南]云云

이라 하였음을 보아 더욱 알 수 있다. 고원강촌을 조운흘 자술의 묘지에는 이와 같이 ‘고원성(古垣城)’이라고 하였거니와, 이것이 지금의 몽촌인 것은 『동환록』 저자가 어떠한 근거에서 단정한 것이냐 하면, 나는 생각컨대
▶P175-3이라 하였음을 보아 더욱 알 수 있다. 古垣江村을 趙云仡自述의 墓誌에는 이와 같이 『古垣城』이라고 하였거니와, 이것이 지금의 夢村인 것은 東寰錄著者가 어떠한 根據에서 斷定한 것이냐 하면, 나는 생각컨대

『동국여지승람』(권6) 광주목 인물 조운흘조에
晩節卜築于州之夢村(○○)夢村 一日 見林廉之黨妻女遠配而去有詩云 柴門日午喚人開 步出林亭坐石苔 昨夜山中風雨惡 滿溪流水泛花來

▶P175-4

『東國輿地勝覽』(卷六) 廣州牧 人物 趙云仡條에
晩節卜築于州之夢村(○○)夢村 一日 見林廉之黨妻女遠配而去有詩云 柴門日午喚人開 步出林亭坐石苔 昨夜山中風雨惡 滿溪流水泛花來

라 하고 『지봉유설』(권13) 문장부 동시에도 이와 같은 기사를 실어 “麗季趙云仡 退去于廣州夢村(○○○○)云云”이라 하였으므로 『동환록』 저자는 이런 유의 기록에 의하여 내린 단안(斷案)이 아닌가 한다. 서거정(徐居正)의 『필원잡기』(권2) 중 조운흘에 관한 기사에는 “卜居廣州之古垣村云云”이라 하여 여기에는 단히 고원촌(古垣村)이라고 하였지만, 하여간 ‘고원강촌’이라 ‘고원촌’이라 ‘고원성’이라 하는 것이 다 몽촌의 지칭인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원’이라 명명한 것은 물론 이곳에 고대 토성의 유적이 남아 있음으로 인한 바이어니와 더욱 ‘고원성’의 칭(稱)은 이를 증명하여 남음이 있다. 고려시대의 이곳은 물론 오늘날보다는 훨씬 뚜렷한 성지를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을 얻게까지 되었지만, 이 고성의 원명은 무엇이었는지 징빙(徵憑)할 사료가 없음을 큰 유감으로 여기며, 지금 거기 거주하는 촌민은 토성의 유무조차 아는 자 희소함을 보고 나는 슬퍼하였다. 강촌이라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강연안에 위치하여 목전에 강을 바라보고 또 동과 북으로는 강에 흘러 들어가는 천류를 띠어 있어, 결국 그로 말미암아 얻은 이름이거니와, ‘몽촌’이란 이름을 어느 때 어떠한 뜻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일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제법 오래된 이름일 것은 몽촌의 명이 이미 『동국여지승람』에 보이는 까닭이다. 승람(광주목)에는 전거한 인물조 외에 산천조에도 그 이름이 보이어 “望月峯在州西十里夢村”이라 하고 그 밑에 서거정의 몽촌망월봉시를 게재하여
▶P175-5라 하고 『芝峯類說』(卷十三) 文章部 東詩에도 이와 같은 記事를 실어 『麗季趙云仡 退去于廣州夢村(○○○○)云云』이라 하였으므로 東寰錄著者는 이런 類의 記錄에 依하야 내린 斷案이 아닌가 한다. 徐居正의 筆苑雜記(卷二)中 趙云仡에 관한 記事에는 『卜居廣州之古垣村云云』이라 하야 여기에는 單히 古垣村이라고 하였지만, 何如間 『古垣江村』이라 『古垣村』이라 『古垣城』이라 하는 것이 다 夢村의 指稱인 것은 의심할 수 없는 事實이다. 『古垣』이라 命名한 것은 勿論 이곳에 古代 土城의 遺蹟이 남어 있음으로 因한 바이어니와 더욱 『古垣城』의 稱은 이를 證明하야 남음이 있다. 高麗時代의 이곳은 勿論 오늘날보다는 훨신 뚜렷한 城址를 갖었기 때문에 이러한 名稱을 얻게까지 되였지만, 이 古城의 元名은 무엇이었는지 徵憑할 史料가 없음을 큰 遺憾으로 여기며, 지금 거기 居住하는 村民은 土城의 有無조차 아는 자 稀少함을 보고 나는 슬퍼하였다. 江村이라 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漢江沿岸에 位置하야 目前에 江을 바라보고 또 東과 北으로는 江에 흘러 들어가는 川流를 띠어 있어, 결국 그로 말미암아 얻은 이름이거니와, 『夢村』이란 이름을 어느 때 어떠한 뜻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일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제법 오래된 이름일 것은 夢村의 名이 이미 東國輿地勝覽에 보이는 까닭이다. 勝覽(廣州牧)에는 前擧한 人物條外에 山川條에도 그 이름이 보이어 『望月峯在州西十里夢村』이라 하고 그 밑에▶P176-1 徐居正의 夢村望月峯詩를 揭載하야

長風飽帆漢水急 山中歸來酒初熟 枮腸得酒亦易醉 雙耳鳴鳴興自足 移樽飛上夢山(○○)顚 偸眠東峯待新月(以下畧)

▶P176-2

長風飽帆漢水急 山中歸來酒初熟 枮腸得酒亦易醉 雙耳鳴鳴興自足 移樽飛上夢山(○○)顚 偸眠東峯待新月(以下畧)

운운이라 하였다. 망월봉(望月峯)은 이 시구의 내용으로 보아 몽촌의 서측 제1고봉에 당한 듯하며, 시구 중의 ‘몽산(夢山)’은 이것이 원래부터의 산명일지 혹은 몽촌산에 약칭으로 쓴 것일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어떻든 몽촌 몽산의 명은 서거정(세종2년생 성종19년졸)시대에도 벌써 호칭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토성의 백제시대의 원명을 찾을 도리가 없는 것은 거듭 거듭 유감으로 여긴다.
▶P176-3云云이라 하였다. 望月峯은 이 詩句의 內容으로 보아 夢村의 西側第一高峯에 當한 듯하며, 詩句中의 『夢山』은 이것이 元來부터의 山名일지 혹은 夢村山에 略稱으로 쓴 것일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어떻든 夢村 夢山의 名은 徐居正(世宗二年生成宗 十九年卒)時代에도 벌서 呼稱되였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土城의 百濟時代의 元名을 찾을 道理가 없는 것은 거듭 거듭 遺憾으로 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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