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용무, 나례, 산대극의 관계를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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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6일 (화) 14:30 판 (본문1: 1.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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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나례, 산대극의 관계를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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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處容舞, 儺禮, 山臺劇의 關係를 論함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2 발행기관
저자 송석하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5년04월
시작쪽 87쪽 종료쪽 114쪽 전체쪽 28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서언


조선에는 연극이 없다는 것은 세간에서 흔히 말하는 바로 사실 조선에는 연극이 없었다. 따라 충분한 발달도 생장도 없었다. 그러나 필자는 종래로 조선에도 연극이 있었다고 하여 왔는데 이는 결국 다른 시도에서 그렇게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쪽수▶P87-1朝鮮에는 演劇이 없다는 것은 世間에서 흔히 말하는 바로 事實 朝鮮에는 演劇이 없었다. 따라 充分한 發達도 生長도 없었다. 그러나 筆者는 從來로 朝鮮에도 演劇이 있었다고 하여 왔는데 이는 結局 다른 視度에서 그렇게 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연극상의 조선은 아직 부월(斧鉞)을 들이지 않던 야생림이나 처녀지라고 하겠다. 연극이라는 수목을 식림(殖林)할 사람이 없다느니 보다 차라리 어떤 그릇된 식림가가 연극수(樹)의 식림을 불필요한 까닭과 불호한 비료를 하였으므로 야생이 그대로 존재하였다. 그리고 현재의 조선의 연극은 다른 데서 묘목을 가져 온 개량종이 전성이고 재래종은 그 영자(影子)조차 감추어서 접붙이 묘목만이라도 발견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는 상태라고 하겠다.
쪽수▶P87-2演劇上의 朝鮮은 아즉 斧鉞을 드리지 않든 野生林이나 處女地라고 하겠다. 演劇이라는 樹木을 殖林할 사람이 없다느니 보다 차라리 어떤 그릇된 殖林家가 演劇樹의 殖林을 不必要한 까닭과 不好한 肥料를 하얐으므로 野生이▶P88-1 그대로 存在하였다. 그리고 現在의 朝鮮의 演劇은 다른 데서 苗木을 갖어 온 改良種이 全盛이고 在來種은 그 影子조차 감추어서 接부치 苗木만이라도 發見키가 어려웁게 되어 있는 狀態라고 하겠다.
조선의 연극에는 현대 수입연극 이외에 재래의 그것으로는 우인극·가면극 등의 특수 연극과 상징적의 중국극 유사(보다 더 간략화한 것)의 창조극(또는 창극) 과 및 무용에서 발달된 무언극(묵극) 등이 있는데 본고에서는 이들을 소개하려는 것이 목적이 아니며 다만 재래로 있는 모종의 가면극과 가면무용의 관계를 논하여 보려는 것이 목적이다.
쪽수▶P88-2朝鮮의 演劇에는 現代 輸入演劇 以外에 在來의 그것으로는 偶人劇·假面劇 等의 特殊 演劇과 象徵的의 中國劇 類似(보다 더 簡畧化한 것)의 倡調劇(又는 倡劇) 과 및 舞踊에서 發達된 無言劇(默劇) 等이 있는데 本稿에서는 이들을 紹介하려는 것이 目的이 않이며 다만 在來로 있는 某種의 假面劇과 假面舞踊의 關係를 論하여 보려는 것이 目的이다.
연극 발생의 원인의 하나로 종교적 원인을 드는 것은 필자 역시 긍정하는 것이다. 종교적이라고 말하더라도 의식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며 그 의식적 원인 중에도 두 개의 상이한 관념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하나는 의식의 전(먼저) 형태가 연극으로서 연극에서 의식으로 발달한 것과 또 하나는 의식의 방법인 연극 다시 말하면 연극 자체가 의식이고 의식 자체가 연극이란 두 대별을 할 수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 종교적 원인 좀 더 상세하게 말하면 의식적 동기에 인한 연극 발생의 예는 조선의 가면극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나 (현대문주1▶유독 조선뿐만 아니다[a 1]) 이런 관념적 분류에 대해서는 다른 날에 고찰하려고 하는 것이다.
쪽수▶P88-3演劇 發生의 原因의 하나로 宗敎的 原因을 드는 것은 筆者 亦是 肯定하는 것이다. 宗敎的이라고 말하더래도 儀式과 關聯되어 있는 것이 大部分이며 그 儀式的 原因 中에도 두 個의 相異한 觀念이 存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卽 하나는 儀式의 前(몬저) 形態가 演劇으로서 演劇에서 儀式으로 發達한 것과 또 하나는 儀式의 方法인 演劇 다시 말하면 演劇 自體가 儀式이고 儀式 自體가 演劇이란 二大別을 할 수가 있겠다고 생각한다. 이 宗敎的 原因 좀 더 詳細하게 말하면 儀式的 動機에 因한 演劇 發生의 例는 朝鮮의 假面劇에서도 發見할 수 있는 것이나 (원문주1▶唯獨 朝鮮뿐만 아니다[1]) 이런 觀念的 分類에 대해서는 他日에 考察하려고 하는 것이다.
조선의 가면극 내지 연극적 색채가 있는 가면무용은 신라시대로부터 고려시대까지에 오희(오기)·무검희·처용무·무애 등이 있고 고려조(朝) 중엽 이후로 현대에 이르러서는 중부 조선의 산대극, 황해도 봉산을 중심으로 한 탈춤, 남선의 경상남도 해안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발달한 오광대노름 및 야유 등이 있어 이에 대한 간단한 현대문주2▶소개와 고찰은 전에 다른 곳에 했으므로[a 2] 이제 중복을 피하는 것이나 그 중 2, 3을 제한 외에는 자못 종교적 특히 의식적 방면에서 발생하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연극과 의식의 관계에 대한 고찰은 앞서 한 말과 같이 할애하기로 하고 오로지 처용무와 산대극과의 관계만에 대하여 약술하고자 한다.
쪽수▶P88-4朝鮮의 假面劇 乃至 演劇的 色彩가 있는 假面舞踊은 新羅時代로부터 高麗時代까지에 五戲(五伎)·舞劍戲·處容舞·無㝵 等이 있고 高麗朝 中葉 以後로 現代에 亘해서는 中部 朝鮮의 山臺劇, 黃海道 鳳山을 中心으로 한 탈춤, 南鮮의 慶尙南道 海岸 地方을 中心으로 하야 發達한 五廣大노름 及 野遊 等이 있어 이에 對한 簡單한 원문주2▶紹介와 考察은 前에 他에 했음으로[2] 이제 重複을 避하는 것이나 그 中 二三을 除한 外에는 자못 宗敎的 特히 儀式的 方面에서 發生하▶P89-1였다고 하겠다. 그러나 演劇과 儀式의 關係에 對한 考察은 前言과 같이 割愛하기로 하고 오로지 處容舞와 山臺劇과의 關係만에 對하야 畧述코저 한다.
처용무는 고려조(朝) 말기의 모든 시인의 제영(題詠)에서든지 또는 약학궤범서적 및 기타 문헌으로 인하여 알려진 가면무용으로 연기적 색채의 농후한 것이었으나 계통 있는 연극에까지는 발달하지 못한 것으로 일부 식자가 말함과 같이 처용무는 산대가면극의 동체이칭(同體異稱)이라 함은 전연 승복하지 못하겠으며 단 혹 산대극 자체가 무용을 다분히 포함한 관계상 그 영향을 받은 것은 면치 못하였으리라 하는 것이면 이에는 수긍할 점이 없다고 하지를 않겠노라.
쪽수▶P89-2處容舞는 高麗朝 末期의 諸詩人의 題詠에서든지 또는 樂學軌範 及 其他 文献으로 因하야 알려진 假面舞踊으로 演期的 色彩의 濃厚한 것이었으나 體系 있는 演劇에까지는 發達치 못한 것으로 一部 識者가 말함과 같이 處容舞는 山臺假面劇의 同體異稱이라 함은 全然 承服치 못하겠으며 但 或 山臺劇 自體가 舞踊을 多分히 包含한 關係上 그 影響을 바든 것은 免치 못하얐으리라 하는 것이면 이에는 首肯할 點이 없다고 하지를 않겠노라.


































본문2: 2.문헌 및 논고와 이에 대한 약간의 비판


처용무가 여하한 유래를 가졌는가를 말하기 전에 세간에 흔히 인용되는 삼국유사의 처용랑조와 약학궤범의 처용무의 양 고문헌과 한 개의 현대 논문을 용번(冗煩)하지만 전록(轉錄)하여서 독자의 편의를 돕고 다시 그에 대한 약간의 비판을 해볼까 한다.
쪽수▶P90-1處容舞가 如何한 由來를 가젓는가를 말하기 前에 世間에 흔이 引用되는 三國遺事의 處容郞條와 樂學軌範의 處容舞의 兩 古文獻과 한 個의 現代 論文을 冗煩하지마는 轉錄하야서 讀者의 便宜를 돕고 다시 그에 對한 若干의 批判을 하여볼가 한다.
〇삼국유사 권제2 처용랑 망해사
쪽수▶P90-2〇三國遺事 卷第二 處容郞 望海寺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之形容, 不入其門矣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쪽수▶P90-3

第四十九憲康大王之代, 自京師至於海內, 比屋連墻無一草屋, 笙歌不絶道路, 風雨調於四時, 於是大王遊開雲浦在鶴城西南今蔚州, 王將還駕, 晝歇於汀邊, 忽雲霧冥曀, 迷失道路, 怪問左右, 日官奏云, 此東海龍所變也, 宜行勝事以解之, 於是勅有司爲龍刱佛寺近境, 施令已出, 雲開霧散, 因名開雲浦, 東海龍喜, 乃率七子, 現於駕前, 讚德獻舞奏樂, 其一子隨駕入京, 輔佐王政, 名曰處容, 王以美女妻之, 欲留其意, 又賜級干職, 其妻甚美, 疫神欽慕之, 變爲人, 夜至其家, 竊與之宿, 處容自外至其家, 見寢有二人, 乃唱歌作舞而退, 歌曰,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肹隱吾下於叱古, 二肹隱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隱, 奪叱良乙何如爲理古, 時神現形, 跪於前曰, 吾羨公之妻, 今犯之矣, 公不見怒, 感而美之, 誓今已後, 見畫公之形容, 不入其門矣因此, 國人門帖處容之形, 以僻邪進慶, 王旣還, 乃卜靈鷲山東麓勝地置寺, 曰望海寺, 亦名新房寺.

위의 글 중에, 신라의 이두문자로 쓰인 향가가 있는데 이 해독을 시도한 학자는 현대문주1▶가나자와 쇼자부로(金澤庄三郎) 박사[a 3], 현대문주2▶신채호씨[a 4] 현대문주3▶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씨[a 5], 현대문주4▶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박사[a 6] 등인데 그 중 오구라 신페이의 대조역(譯)을 들면 다음과 같다(근간에 양주동씨의 미발표한 역문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채록하지 못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쪽수▶P90-4右文 中에, 新羅의 吏讀文字로 쓰인 鄕歌가 있는데 이 解讀을 試한 學者는 원문주1▶金澤庄三郎 博士[3], 원문주2▶申采浩氏[4] 원문주3▶鮎貝房之▶P91-1進氏[5], 원문주4▶小倉進平 博士[6] 等인데 그 中 小倉敎授의 對照譯을 擧하면 다음과 같다(近間에 梁柱東氏의 未發表한 譯文이 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採錄치 못함을 遺憾으로 생각한다).

第十六 處客歌
東京ᄇᆞᆰᄋᆞᆫᄃᆞᆯ東京明期月良
밤들어노녀다가夜入伊遊行如可
들어사자리에보곤入良沙寢矣見昆
ᄅᆞᆯ이네히러라脚烏伊四是良羅
둘은나이엇고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누이언고二肹隱維支下焉古
믿이내이다ᄆᆞᄅᆞᆫ本矣吾下是如馬於隱
빼앗어늘엇디ᄒᆞ리잇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

쪽수▶P91-2

第十六 處客歌
東京ᄇᆞᆰᄋᆞᆫᄃᆞᆯ東京明期月良
밤들어노녀다가夜入伊遊行如可
들어사자리에보곤入良沙寢矣見昆
ᄅᆞᆯ이네히러라脚烏伊四是良羅
둘은나이엇고二肹隱吾下於叱古
둘은누이언고二肹隱維支下焉古
믿이내이다ᄆᆞᄅᆞᆫ本矣吾下是如馬於隱
빼앗어늘엇디ᄒᆞ리잇고奪叱良乙何如爲理古

〇약학궤범권지5(의(依)태백산본)
쪽수▶P92-1〇樂學軌範卷之五(依太白山本)
학연화대 처용무합설
쪽수▶P92-2鶴蓮花臺 處容舞合設
초입배열도
쪽수▶P92-3
初入排列圖
오방작대도
쪽수▶P93-1
五方作隊圖
시종회무도
쪽수▶P93-2
始終回舞圖

十二月晦前一日更初, 樂師女妓樂工等詣闕, 是日儺禮時, 樂師率妓工奏樂, 至驅儺後, 設池塘具於內庭, 樂師率兩童女, 以入坐於蓮花中而出以待節次, 凡驅儺後, 處容舞二度, 前度則無鶴蓮花臺回舞等事, 樂師執銅鈸, 導靑紅黃黑白五方處容及女妓執拍, 樂師鄕樂工奏處容慢機即鳳凰吟一樓女妓唱處容歌, 前腔新羅盛代昭盛代天下大平羅候德處容아바以是人生애相不語하시란대附葉三災八難이一時消滅하샷다中葉어와이븨즈이여處容아뵈즈이여附葉滿頭揷花계오샤기울어신머리예小葉아으壽命長願하샤넙거신니마해後腔山象이슷깅어신눈닙에愛人相見하샤오은어신누네附葉風入盈庭하샤우글어신귀예中葉紅桃花가티붉거신모야해附葉五香마ᄐᆞ샤웅긔어신고해小葉아으千金머그샤어위어신이베大葉白玉琉璃가티해여신닛바래人讃福盛ᄒᆞ샤미나거신ᄐᆞᆨ에七寶계우샤숙거신엇게예吉慶계우샤늘의어신ᄉᆞ맷길헤附葉설믜모도와有德ᄒᆞ신가ᄉᆞ매中葉福智俱足하샤브르거신배예紅鞓계우샤굽거신허리예附葉同樂大平ᄒᆞ샤길이신허튀예小葉아으界面도ᄅᆞ샤넙거신바래前腔누고지어셰니오누고지어셰니오바늘도실도어ᄡᅵ바늘도실도어ᄡᅵ附葉處容아비ᄅᆞᆯ누고지어셰니오中葉마아만만아만ᄒᆞ니여附葉十二諸國이모다지어온小葉아으處容아비랸마아만하니여後腔머자외야자綠李야ᄲᅳᆯ리나내신고ᄒᆞᆯ매야라附葉아니옷매시면나리어다머즌말中葉東京발ᄀᆞᆫ다래새도록노니다가附葉드러내자리ᄅᆞᆯ보니가라리네히로섀라小葉아으둘흔내해어니와둘흔뉘해어니오大葉이런저긔處容아비옷보시면熱痛神이아膾ㅅ가시로다千金을주리여處容아바七寶를주리여處容아바附葉千金七寶도말오熱病神를날자바주쇼셔中葉山이여매히여千里外예附葉處容아비랄어여려거져小葉아으熱病大神의發願이샷다. 以次入如圖排立, 樂至中葉, 杖皷擊鞭, 處容五者皆俯腰, 而並擧兩袖凡舞始作擊杖鼓鞭而並俯腰而擧兩手後做此下置膝上, 靑紅者回顧相面, 黃者回顧而, 東黑白者回顧相面, 訖還北向, 擊杖皷皷面, 並擧而兩袖而落무롭디피舞〇隨手而皆擧足靑紅黑白者並先擧內足黃者先擧右足〇內謂兩人間也東立者左爲內西立者右爲內後做此〇凡舞終擧並還北向撀杖鼓鼓面擧兩手而落後做此〇凡舞一從黃者之舞唯左右手足各異用之耳後此做此擊鞭, 靑紅者回顧相背, 黃者回顧而西, 黑白者回顧相背訖隨手而皆擧足靑紅黑白者並先擧外足黃者先擧左足〇東立者右爲外西出者左爲外後做此擊鞭, 如上儀舞訖相面二度相背二度凡四度也擊鞭, 靑紅黑白者, 並舞手而內挾, 黃者舞手而右挾黃者無耦故稱左右後做此 並舞手而換挾訖靑紅黑白者並外挾黃者左挾〇紅程 돔듬 舞擊鞭, 五者舞進ᄇᆞᆯ바딧舞〇靑紅黑白者並內足先進黃者右足先進於顧庭正中, 齊行北向而立訖, 擊鞭, 黃者東向而舞人舞〇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靑紅黑白者並西向而舞並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訖, 擊鞭, 黃者西向而舞人舞〇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並東向而舞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訖, 擊鞭, 紅者舞退, 立於南方右足先退黑者舞進, 立於北方左足先進, 靑黃白者, 無立於其位黃者中央靑者東方白者西方〇ᄇᆞᆯ바디作隊舞訖, 擊鞭, 黃者北向而舞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〇垂楊手무룹디피舞靑紅黑白者, 舞向中央對舞並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 背中央 各向其方而舞並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訖, 擊鞭, 黃者北向而舞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向他方做此〇垂楊手五方舞四方同黑者向中央對舞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第四手擊初鞭靑者舞作擊後鼓黑者落手他方做此樂漸數則, 奏鳳凰吟中機, 妓唱其歌(歌詞省略) 三方立者, 隨樂節, 擧袖而落隨手而皆擧足他方做此黃者向而舞 靑者向中央對舞, 黃者南向而舞, 紅者向中央對舞, 黃者西向而舞, 白者向中央對舞, 訖 擊鞭, 黃者不出其方, 周旋而舞左旋〇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 並不出其方, 一時向中央而舞並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 又不出其方, 周旋而舞右旋〇並左右手皆兩度 訖回舞左旋〇黑者先出 三匝各還立其方, 北向而舞, 擊鞭, 黑者舞退左足先退 紅者舞進右足先進 五者齊行而舞, 樂漸數則奏鳳凰吟急機, 連奏三眞勺, 妓唱其歌(歌詞省略) 黃者仍立而舞, 靑紅黑白者舞退, 齊行而舞左右手皆兩度或一度 黃者舞退, 靑白者舞進, 舞退, 紅黑者舞進, 舞退, 訖, 五者齊行而舞, 樂奏井邑急機, 妓唱其歌(註略)五者變舞井邑舞 仍奏北殿急機, 妓唱其歌(歌詞省略)五者舞出懽場舞 女妓樂師樂工, 以次而出, 樂止, 又至後度, 陳鶴蓮花臺·儀物等具, 執銅鈸樂師先導, 靑白鶴次之, 靑紅黃黑白處容次之, 引人仗·旋節·蓋引人仗旋節蓋兩件一件立於擧花之次 奉花舞童次之, 女妓次之, 執拍樂師·鄉唐樂工各以次隨之, 樂奏靈山會相慢, 妓工齊聲唱詞靈山會相佛菩薩以入回旋左旋 三匝以次如圖排立, 擊拍擊大皷, 奏靈山會相令, 樂漸數, 五方處容足蹈歡舞, 女妓樂工及執儀物假面舞童等, 亦從而足蹈搖身極歡, 訖, 樂止五方處容小退左右分立 樂奏步虛子令, 擊拍, 靑白鶴如譜進退而舞, 啄蓮花, 兩童女乃出, 兩鶴驚躍而退, 樂止 還立於初位, 兩童女下池塘, 齊行而立, 呈才如儀, 訖, 又奏處容慢機女妓唱處容歌 五方處容復立前位, 容作一如上儀, 訖, 樂止 奏彌弛讚, 女妓二人導唱西方大敎主南無阿彌陀佛諸妓齊聲和(註省略),如前回旋(註省略), 至本師讚(註省略), 觀音讚(註省略), 並如上導唱和之至觀音讚諸妓齊聲唱歌(歌詞省略), 以次而出, 樂止, 乃訖, (두점은 필자가 붙임)

쪽수▶P93-3

十二月晦前一日更初, 樂師女妓樂工等詣闕, 是日儺禮時, 樂師率妓工奏樂, 至驅儺後, 設池塘具於內庭, 樂師率兩童女, 以入坐於蓮花中而出以待節次, 凡驅儺後, 處容舞二度, 前度則無鶴蓮花臺回舞等事, 樂師執銅鈸, 導靑紅黃黑白五方處容及女妓執拍, 樂師鄕樂工奏處容慢機即鳳凰吟一樓女妓唱處容歌, 前腔新羅盛代昭盛代天下大平羅候德處容아바以是人生애相不語하시란대附葉三災八難이一時消滅하샷다中葉어와이븨즈이여處容아뵈즈이여附葉滿頭揷花계오샤기울어신머리예小葉아으壽命長願하샤넙거신니마해後腔山象이슷깅어신눈닙에愛人相見하샤오은어신누네附葉風入盈庭하▶P94샤우글어신귀예中葉紅桃花가티붉거신모야해附葉五香마ᄐᆞ샤웅긔어신고해小葉아으千金머그샤어위어신이베大葉白玉琉璃가티해여신닛바래人讃福盛ᄒᆞ샤미나거신ᄐᆞᆨ에七寶계우샤숙거신엇게예吉慶계우샤늘의어신ᄉᆞ맷길헤附葉설믜모도와有德ᄒᆞ신가ᄉᆞ매中葉福智俱足하샤브르거신배예紅鞓계우샤굽거신허리예附葉同樂大平ᄒᆞ샤길이신허튀예小葉아으界面도ᄅᆞ샤넙거신바래前腔누고지어셰니오누고지어셰니오바늘도실도어ᄡᅵ바늘도실도어ᄡᅵ附葉處容아비ᄅᆞᆯ누고지어셰니오中葉마아만만아만ᄒᆞ니여附葉十二諸國이모다지어온小葉아으處容아비랸마아만하니여後腔머자외야자綠李야ᄲᅳᆯ리나내신고ᄒᆞᆯ매야라附葉아니옷매시면나리어다머즌말中葉東京발ᄀᆞᆫ다래새도록노니다가附葉드러내자리ᄅᆞᆯ보니가라리네히로섀라小葉아으둘흔내해어니와둘흔뉘해어니오大葉이런저긔處容아비옷보시면熱痛神이아膾ㅅ가시로다千金을주리여處容아바七寶를주리여處容아바附葉千金七寶도말오熱病神를날자바주쇼셔中葉山이여매히여千里外예附葉處容아비랄어여려거져小葉아으熱病大神의發願이샷다. 以次入如圖排立, 樂至中葉, 杖皷擊鞭, 處容五者皆俯腰, 而並擧兩袖凡舞始作擊杖鼓鞭而並俯腰而擧兩手後做此下置膝上, 靑紅者回顧相面, 黃者回顧而, 東黑白者回顧相面, 訖還北向, 擊杖皷皷面, 並擧而兩袖而落무롭디피舞〇隨手而皆擧足靑紅黑白者並先擧內足黃者先擧右足〇內謂兩人間也東立者左爲內西立者右爲內後做此〇凡舞終擧並還北向撀杖鼓鼓面擧兩手而落後做此〇凡舞一從黃者之舞唯左右手足各異用之耳後此做此擊鞭, 靑紅者回顧相背, 黃者回顧而西, 黑白者回顧相背訖隨手而皆擧足靑紅黑白者並先擧外足黃者先擧左足〇東立者右爲外西出者左爲外後做此擊鞭, 如上儀舞訖相面二度相背二度凡四度也擊鞭, 靑紅黑白者, 並舞手而內挾, 黃者舞手而右挾黃者無耦故稱左右後做此 並舞手而換挾訖靑紅黑白者並外挾黃者左挾〇紅程 돔듬 舞擊鞭, 五者舞進ᄇᆞᆯ바딧舞〇靑紅黑白者並內足先進黃者右足先進於顧庭正中, 齊行北向而立訖, 擊鞭, 黃者東向而舞人舞〇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靑紅黑白者並西向而舞並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訖, 擊鞭, 黃者西向而舞人舞〇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並東向而舞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訖, 擊鞭, 紅者舞退, 立於南方右足先退黑者舞進, 立於北方左足先進, 靑黃白者, 無立於其位黃者中央靑者東方白者西方〇ᄇᆞᆯ바디作隊舞訖, 擊鞭, 黃者北向而舞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〇垂楊手무룹디피舞▶P95靑紅黑白者, 舞向中央對舞並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 背中央 各向其方而舞並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訖, 擊鞭, 黃者北向而舞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向他方做此〇垂楊手五方舞四方同黑者向中央對舞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第四手擊初鞭靑者舞作擊後鼓黑者落手他方做此樂漸數則, 奏鳳凰吟中機, 妓唱其歌(歌詞省略) 三方立者, 隨樂節, 擧袖而落隨手而皆擧足他方做此黃者向而舞 靑者向中央對舞, 黃者南向而舞, 紅者向中央對舞, 黃者西向而舞, 白者向中央對舞, 訖 擊鞭, 黃者不出其方, 周旋而舞左旋〇右手先擧左右手皆兩度 靑紅黑白者, 並不出其方, 一時向中央而舞並左手先擧左右手皆兩度 又不出其方, 周旋而舞右旋〇並左右手皆兩度 訖回舞左旋〇黑者先出 三匝各還立其方, 北向而舞, 擊鞭, 黑者舞退左足先退 紅者舞進右足先進 五者齊行而舞, 樂漸數則奏鳳凰吟急機, 連奏三眞勺, 妓唱其歌(歌詞省略) 黃者仍立而舞, 靑紅黑白者舞退, 齊行而舞左右手皆兩度或一度 黃者舞退, 靑白者舞進, 舞退, 紅黑者舞進, 舞退, 訖, 五者齊行而舞, 樂奏井邑急機, 妓唱其歌(註略)五者變舞井邑舞 仍奏北殿急機, 妓唱其歌(歌詞省略)五者舞出懽場舞 女妓樂師樂工, 以次而出, 樂止, 又至後度, 陳鶴蓮花臺·儀物等具, 執銅鈸樂師先導, 靑白鶴次之, 靑紅黃黑白處容次之, 引人仗·旋節·蓋引人仗旋節蓋兩件一件立於擧花之次 奉花舞童次之, 女妓次之, 執拍樂師·鄉唐樂工各以次隨之, 樂奏靈山會相慢, 妓工齊聲唱詞靈山會相佛菩薩以入回旋左旋 三匝以次如圖排立, 擊拍擊大皷, 奏靈山會相令, 樂漸數, 五方處容足蹈歡舞, 女妓樂工及執儀物假面舞童等, 亦從而足蹈搖身極歡, 訖, 樂止五方處容小退左右分立 樂奏步虛子令, 擊拍, 靑白鶴如譜進退而舞, 啄蓮花, 兩童女乃出, 兩鶴驚躍而退, 樂止 還立於初位, 兩童女下池塘, 齊行而立, 呈才如儀, 訖, 又奏處容慢機女妓唱處容歌 五方處容復立前位, 容作一如上儀, 訖, 樂止 奏彌弛讚, 女妓二人導唱西方大敎主南無阿彌陀佛諸妓齊聲和(註省略),如前回旋(註省略), 至本師讚(註省略), 觀音讚(註省略), 並如上導唱和之至觀音讚諸妓齊聲唱歌(歌詞省略), 以次而出, 樂止, 乃訖, (讀點은 筆者가 附함)

〇안확씨 논문 대의
쪽수▶P96-1〇安廓氏 論文 大意
처용무와 산대극에 관해서 현대적 고찰을 시도한 학자는 안확씨 한 사람뿐이라고 하겠다. 안확씨는 잡지 「조선」(쇼화 7년 2월)에 “山臺戱と七處容舞と儺”라고 제(題)한 논고에서 대략 처용무는 현대문주5▶구나의(驅儺儀)[a 7]에서 발달하여 산대도감(山臺都監)이라는 별명을 가졌다고 보았으나 이에는 승복하지 못하겠다. 처용무가 나의와 동일한 관념인 것은 대체로 긍정하는 것이나 처용무와 산대도감노름이 동종이명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하 안확씨의 논고를 좀 더 소세(昭細)하게 검토하면 씨는(단 원문 선역)
쪽수▶P96-2處容舞와 山臺劇에 關해서 現代的 考察을 試한 學者는 安廓氏 一人뿐이라고 하겠다. 同氏는 雜誌 「朝鮮」(昭和 七年 二月)에 「山臺戱と七處容舞と儺」라고 題한 論考에서 大略 處容舞는 원문주5▶驅儺儀[7]에서 發達하야 山臺都監이라는 別名을 가졋다고 보았으나 이에는 承服하지 못하겠다. 處容舞가 儺儀와 同ᅳ한 觀念인 것은 大體로 肯定하는 것이나 處容舞와 山臺都監노름이 同種異名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것이다. 以下 同氏의 論考를 좀 더 昭細하게 檢討하면 氏는(但 原文 鮮譯)

「조선시대에 있어 가면희(戱)라는 것은 처용무와 산대희(戱)와의 둘밖에 없다. 이 둘은 당대의 창조가 아니고 앞선 시대의 것을 이용해서 소규모로서는 처용무로 대규모로서는 산대희로 된 것 같다. 그러므로 처용무와 산대희와는 따로 바라볼 수 없고 동일시할 것이다. 고려 당시에도 이 양자는 분리하지 아니하고 동일물인 것 같이 칭하여 왔다. 이것은 고려 이색의 목은집에 산대잡극이란 제하에 이런 시가 보인다.
山臺結綴似蓬萊 獻果仙人海上來
雜類鼓鉦轟地動 處容衫袖逐風廻
長竿倚漢九平地 爆火働天似疾雷
欲寫太平眞氣像 老臣簪筆愧非才.
여기에서 산대극이람과 또 시의 내용에 처용무를 설명한 것을 보면 산대극이 즉 처용무인 것이 명백하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본래 두 가지 것을 산대극에 합작하였던 것인지는 모르나 산대극이란 내용에 처용무가 주장된 것은 사실이 되어왔다⋯⋯⋯이와 같이 처용과 산대와는 동일한 것인 것이 확실한 동시에 처용무에 유(由)하여 산대희의 근거를 탐고(探考)할 단서가 발견된다」(90―91쪽)

쪽수▶P96-3

「李朝時代에 있어 假面戱라는 것은 處容舞와 山臺戱와의 둘밖에 없다. 이 둘은 當代의 創造가 아니고 前代의 것을 利用해서 小規模로서는 處容舞로 大規模로서는 山臺戱로 된 것 같다. 그러므로 處容舞와 山臺戱와는 分立視할 수 없고 同一視할 것이다. 高麗 當時에도 이 兩者는 分離하지 아니하고 同一物인 것 같이 稱하여 왔다. 이것은 高麗 李穡의 牧隱集에 山臺雜劇이란 題下에 이런 詩가 보인다.
山臺結綴似蓬萊 獻果仙人海上來
雜類鼓鉦轟地動 處容衫袖逐風廻
長竿倚漢九平地 爆火働天似疾雷
欲寫太平眞氣像 老臣簪筆愧非才.
여기에서 山臺劇이람과 또 詩의 內容에 處容舞를 說明한 것을 볼진데 山臺劇이 即 處容舞인 것이 明白하다. 勿▶P97-1論 高麗時代에도 本來 두 가지 것을 山臺劇에 合作하였든 것인지는 모르나 山臺劇이란 內容에 處容舞가 主張된 것은 事實이 되어왔다⋯⋯⋯이와 같이 處容과 山臺와는 同ᅳ한 것인 것이 確實한 同時에 處容舞에 由하야 山臺戱의 根據를 探考할 端緖가 發見된다」(九〇―九一頁)

라고 말하였다. 군데군데 의미불통한 데도 있으나 요약하면 처용무와 산대희 둘밖에(●●●) 없는(●●) 가면희는 동일한 것이라고 함이다. 그리고 안확씨는 삼국유사의 처용랑조 전문을 들고 다시 고려시대에 이 설화에 의하여 “극시로 되어서 일종의 무극이 연출했다”라고 하고 약학궤범·가정의 현대문주6▶개운포시[a 8]·익재의 현대문주7▶소악부[a 9]·도은의 현대문주8▶처용가[a 10] 등의 문헌을 들어서 고려시대의 소위 무극이 성함을 설명하고 다시 나아가 처용은 ‘일식신(日蝕神)의 성(星)’이라 하여 약학궤범·동국세시기 상원조·불서 수요경·대일경소·율사경 등으로서 입증하였다. 또 후한서 권15 선랍조(글 생략)와 그 외 이색의 구나행(驅儺行)
쪽수▶P97-2라고 말하였다. 군데군데 意味不通한 데도 있으나 要約하면 處容舞와 山臺戱 둘밖에(●●●) 없는(●●) 假面戱는 同一한 것이라고 함이다. 그리고 同氏는 三國遺事의 處容郞條 全文을 들고 다시 高麗時代에 이 說話에 依하야 「劇詩로 化해서 ᅳ種의 舞劇이 演出햇다」라고 하고 樂學軌範·稼亭의 원문주6▶開雲浦 詩[8]·益齊의 원문주7▶小樂府[9]·陶隱의 원문주8▶處容歌[10] 等의 文獻을 들어서 高麗時代의 所謂 舞劇이 盛함을 證明하고 다시 나아가 處容은 「日蝕神의 星」이라 하야 樂學軌範·東國歲時記 上元條·佛書宿曜經·大日經疏·聿斯經 等으로서 立證하였다. 또 後漢書 卷十五 先臘條(文 省略)와 其外 李穡의 驅儺行

天地之動何冥々 有善有惡紛流船
或爲禎祥或妖蘗 雜糅豈得人心寧
辟除邪惡古有禮 十有二神恒赧靈
國家大置屛障房 歲々掌行淸內庭
黃門侲子群相連 掃去不祥如迅霆
司平有府備巡警 烈士成林皆五丁
忠義所激代屛障 畢陳惟詭超群伶
舞五方鬼踊白澤 吐出回祿吞靑萍
金天之精有古月 或黑或黃目靑熒
其中老者偃面長 衆共警嗟南極星
江南買客語侏離 進退輕捷風中螢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 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稚龍爭珠 琯々百獸如堯庭

쪽수▶P97-3

天地之動何冥々 有善有惡紛流船
或爲禎祥或妖蘗 雜糅豈得人心寧
辟除邪惡古有禮 十有二神恒赧靈
國家大置屛障房 歲々掌行淸內庭
黃門侲子群相連 掃去不祥如迅霆
司平有府備巡警 烈士成林皆五丁
忠義所激代屛障 畢陳惟詭超群伶
舞五方鬼踊白澤 吐出回祿吞靑萍▶P98-1
金天之精有古月 或黑或黃目靑熒
其中老者偃面長 衆共警嗟南極星
江南買客語侏離 進退輕捷風中螢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 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稚龍爭珠 琯々百獸如堯庭

과 삼국사기 낙지에 있는 최치원의 향악잡영 5수 중의
쪽수▶P98-2과 三國史記 樂志에 있는 崔致遠의 鄕樂雜詠 五首 中의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超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쪽수▶P98-3

黃金面色是其人 手抱珠鞭役鬼神
疾步徐超呈雅舞 宛如丹鳳舞堯春

을 들어 “이 황금면은 나의의 방상씨 황금4목과 같고 手抱珠鞭役鬼神은 역신을 구축하는 형태의 묘사이므로 나(儺)는 삼국시대에 신라에 들어와 처용무가 되고 처용무는 산대가 되었다”고 하고 또 다음과 같이 부첨하였다.
쪽수▶P98-4을 들어 「이 黃金面은 儺儀의 方相氏 黃金四目과 같고 手抱珠鞭役鬼神은 疫神을 驅逐하는 形態의 描寫임으로 儺는 三國時代에 新羅에 入하야 處容舞가 되고 處容舞는 山臺가 되엿다」고 하고 또 如左히 附添하였다.

「상술함과 같이 산대희는 단순한 것이 아니고 꽤 복잡한 것으로 전연 나의로 성립한 것이라고 못한다. 즉 백희(百戱)는 주로 나희를 행하여 후일에 이르러는 백희라는 명칭을 잊고 다만 나(儺)라고 칭하고 일명 산대희라고 하여 왔다. 현대문주9▶허백집[a 11]에 있는 관나시에도
秘殿春光泛彩棚 朱衣畵袴亂縱橫
弄丸眞似宜僚巧 步素還同飛燕輕
小室四旁藏傀儡 長竿百尺舞壺觥
라고 하여 나의에도 여러가지 잡극(소위 백희)을 행하여 왔다. 즉 산대희는 변체적(變體的)의 나의를 주로 한 백희인 것을 단언한다」

쪽수▶P98-5

「上述함과 같이 山臺戱는 單純한 것이 아니고 頗히 複雜한 것으로 全然 儺儀로 成立한 것이라고 못한다. 即 百戱는 主로 儺戱를 行하야 後日에 至하야는 百戱라는 名稱을 잊고 다만 儺라고 稱하고 ᅳ名 山臺戱라고 하여 왓다. 원문주9▶虛白集[11]에 있는 觀儺詩에도
秘殿春光泛彩棚 朱衣畵袴亂縱橫
弄丸眞似宜僚巧 步素還同飛燕輕▶P99-1
小室四旁藏傀儡 長竿百尺舞壺觥
라고 하야 儺儀에도 여러가지 雜劇(所謂 百戱)을 行하여 왔다. 即 山臺戱는 變體的의 儺儀를 主로 한 百戱인 것을 斷言한다」

라고 하였으나 전후의 논지에 모순이 있고 파악하기 어려운 요령이나 결국 산대희는 나의로부터가 아니고 백희가 당대(唐代)에 신라에 유입하여 그 백희에서 나(儺)가 생기고 그것이 일명 산대희인 동시에 또한 변태적 나희라고 하였으나 부득요령도 심하다.
쪽수▶P99-2라고 하였으나 前後의 論旨에 矛盾이 있고 把握하기 어려운 要領이나 結局 山臺戱는 儺儀로부터가 아니고 百戱가 唐代에 新羅에 流入하야 그 百戱에서 儺가 生하고 그것이 一名 山臺戱인 同時에 또한 變態的 儺戱라고 하였으나 不得要領도 甚하다.
이렇게 안씨의 논고는 말하려는 것이 어느 곳 있는지 대단히 불분명함을 유감으로 생각한다. 이색의 산대잡극시에만 의하여 산대극과 처용무가 동일하다고 함은 조계(早計)라고 하겠다. 차라리 필자는 구나를 근원으로 하여 전연 별개로 발달한 별(別)종류라고 보고싶다. 산대 문제에 관해서는 본고에 후술할 것이나 필자는 이색이 말한 산대잡극은 안씨도 얼마간 언급함과 같이 개괄적의 넓은 의미로 해석해서 소위 ‘백희각반’을 지칭한 것이라고 본다. 흡사히 곡마단의 명칭 아래에 곡마·요술·곡예·레뷰·코메디 등을 포함한 것 같지나 않는가 한다. 현재 현대문주10▶’사당패’[a 12]의 명칭 아래에 연극·무용·가곡·땅재조·동굴이 기타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필자는 도리어 목은의 구나행과 허백당의 관나시에 의하여 처용무의 별명이 산대극이 아니고 구나의 희화한 것이 (명칭은 의연히 구나례라고 하고 산대잡극인 것 같다. 목은의 시에 대하여 안씨는 그 전부가 처용무의 묘사인 줄 안 것 같으나 실은 처용무의 묘사는 “處容衫袖逐風廻”뿐이고 다른 “長竿倚漢九平地”는 대광대(죽광대)를 말함이요 “爆火働地似疾雷”는 폭죽 또는 화화(花火)를 지칭한 것이라고 보겠다. 또 억측을 허용한다면 “山臺結綴似蓬萊”는 무대를 산에 설치한 모양이라고 하고 싶다.
쪽수▶P99-3如斯히 安氏의 論考는 말하려는 것이 那邊에 있는지 大端 不分明함을 遺憾으로 생각한다. 李穡의 山臺雜劇詩에만 依하야 山臺劇과 處容舞가 同ᅳ하다고 함은 早計라고 하겠다. 차라리 筆者는 驅儺를 根源으로 하야 全然 別個로 發達한 別種類라고 보고싶다. 山臺 問題에 關해서는 本稿에 後述할 것이나 筆者는 李穡의 말한 山臺雜劇은 安氏도 얼마간 言及함과 같이 槪括的의 넓은 意味로 解釋해서 所謂 「百戱各般」을 指稱한 것이라고 본다. 恰似히 曲馬團의 名稱 下에 曲馬·妖術·曲藝·레뷰·코메디 等을 包含한 것 같지나 않는가 한다. 現在 원문주10▶「社堂패」[12]의 名稱 下에 演劇·舞踊·歌曲·땅才操·동굴이 其他를 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筆者는 도로혀 牧隱의 驅儺行과 虛白堂의 觀儺詩에 依하야 處容舞의 別名이 山臺劇이 아니고 驅儺의 戱化한 것이 (名稱은 依然히 驅儺禮라고 하고 山臺雜劇인 것 같다. 牧隱의 詩에 對하야 安氏는 그 全部가 處容舞의 描寫인 줄 안 것 같으나 實은 處容舞의 描寫는 「處容衫袖逐風廻」뿐이고 他의 「長竿倚漢九平地」는 대광대(竹廣大)를 말함이요 「爆火働地似疾雷」는 爆竹 又는 花火를 指稱한 것이라고 보겠다. 또 臆測을 許容한다면 「山臺結綴似蓬萊」는 舞臺를 山에 設置한 模樣이라고 하고 싶다.
안씨가 말하는 가정의 개운포시 익재의 소악부 목은의 처용가 등은 고려시대의 무극의 성대함을 설명한다느니보다도 처용무 및 처용가의 일단을 서술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즉 처용가는 신라시대로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
쪽수▶P100-1安氏가 말하는 稼亭의 開雲浦詩 益齊의 小樂府 陶隱의 處容歌 等은 高麗時代의 舞劇의 盛大함을 證明한다느니보다도 處容舞 及 處容歌의 一端을 叙述함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即 處容歌는 新羅時代로부터 存在하였다는 것을 말할 따름이다.
목은의 구나행에 있어도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은 처용무를 묘사한 것인지 모르나 “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碓龍爭珠, 蹌蹌百獸如堯庭”은 명백히 다른 구경거리를 지칭한 것이다.
쪽수▶P100-2牧隱의 驅儺行에 있어도 「新羅處容帶七寶, 花枝壓頭香露零, 低回長袖舞太平」은 處容舞를 描寫한 것인지 모르나 「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碓龍爭珠, 蹌蹌百獸如堯庭」은 明白히 다른 구경꺼리를 指稱한 것이다.
쪽수▶P100-3허백당의 관나시를 검토하더라도 “秘殿春光泛彩棚”은 구경거리 전경을 묘사하고 “朱衣畵袴亂縱橫”은 무용의 묘사이나 처용무를 지칭한 것인지 불명하며 (이 의장은 많음) “弄丸眞似宜僚巧」는 수당(隋唐)에 성행한 서역계통의 잡희와 동일한 것이 아닌가 하며 “步素還同飛燕輕”은 줄타기를 가리키고 “小室四旁藏傀儡”는 우인극의 무대를 말한 것이며 (인형지거 제4호 소재 졸고 참조) “長竿百尺舞壺觥”은 대광대의 곡예를 지칭한 것으로 안씨의 말과 같이 구나(희화)에 백희 각반이 포함된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으나 처용무가 산대극이란 예증은 되지 않는다.
쪽수▶P100-3虛白堂의 觀儺詩를 檢討하더래도 「秘殿春光泛彩棚」은 구경꺼리 全景을 描寫하고 「朱衣畵袴亂縱橫」은 舞踊의 描寫이나 處容舞를 指稱한 것인지 不明하며 (이 衣裝은 많음) 「弄丸眞似宜僚巧」는 隋唐에 盛行한 西域系統의 雜戱와 同ᅳ한 것이 아닌가 하며 「步素還同飛燕輕」은 줄타기를 가르치고 「小室四旁藏傀儡」는 偶人劇의 舞臺를 말한 것이며 (人形芝居 第四號 所載 拙稿 叅照) 「長竿百尺舞壺觥」은 대광대의 曲藝를 指稱한 것으로 安氏의 말과 같이 驅儺(戱化)에 百戱 各般이 包含된 것은 事實이라고 하겠으나 處容舞가 山臺劇이란 例證은 되지 않는다.



























본문3: 3.처용무와 산대극의 현실적 비교


돌이켜 궁중의 처용무(약학궤범에 의함. 민간에서는 전에 경주에서 노기(老妓) 영월(映月)이를 주로 하여 처용무의 부흥을 의도하였으나 말기에 폐지되고 그 무법(舞法) 역시 궁중 식에 의하였다 하며 이씨조(朝) 초기에 궁중 식으로 변경하기 전의 형태 그대로 민간에 전승된 것은 없다)와 현대 산대극을 현실적 방면으로 그 유사점과 상이점을 대조 비교하여 양자 간의 관계를 고찰 천명하여 보겠노라.
쪽수▶P103-1도리켜 宮中의 處容舞(樂學軌範에 依함. 民間에서는 前에 慶州에서 老妓 映月이를 主로 하야 處容舞의 復興을 圖하얏으나 未幾에 廢止되고 그 舞法 亦是 宮中 式에 依하였다 하며 李氏朝 初期에 宮中 式으로 變更하기 前의 形態 그대로 民間에 傳承된 것은 없다)와 現代 山臺劇을 現實的 方面으로 그 類似點과 相異點을 對照 比較하야 兩者 間의 關係를 考察 闡明하여 보겠노라.
첫째는 관념상으로 볼 때 (후술 참조) 처용설화의 발생 녹기(綠起)는 벽사진경의 사상에서 녹유(綠由)된 것으로 처용이 외출하였다가 귀가하여 그 연적을 위하여 무용을 한 것이라든지 문전에 화상을 붙임으로써 벽사의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라든지 또 그 무용에 있어도 오행사상의 오방 처용(민간신앙에 있어서 오방신장은 악귀사신을 퇴치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이 가면을 쓰고 무용을 하는 것은 다 벽사 관념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에 대하여 현대 산대극도 그 현대문주1▶제1과장(科場)[a 13] 사방신고사무(양인무)에 사신을 구축하는 무용이 있다. 이들은 적극 소극의 차는 있으나 그 몽리에는 전연 동일하다. (해서지방 탈춤에는 사상좌무 남선지방의 오광대가면극의 오신장무가 동일한 관념이다)
쪽수▶P103-2其一은 觀念上으로 볼 때 (後述 叅照) 處容說話의 發生 綠起는 僻邪進慶의 思想에서 綠由된 것으로 處容이 外出하였다가 歸家하야 그 戀敵을 爲하야 舞踊을 한 것이라든지 門前에 畵像을 붙이므로서 僻邪의 目的을 達成하는 것이라든지 또 그 舞踊에 있어도 五行思想의 五方 處容(民間信仰에 있어서 五方神將은 惡鬼邪神을 退治하는 힘을 가졌다고 믿는다)이 假面을 쓰고 舞踊을 하는 것은 다 僻邪 觀念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에 對하여 現代 山臺劇도 그 원문주1▶第一科場[13] 四方神告祀舞(兩人舞)에 邪神을 驅逐하는 舞踊이 있다. 이들은 積極 消極의 差는 있으나 그 蒙利에는 全▶P104-1然 同一하다. (海西地方 탈춤에는 四上佐舞 南鮮地方의 五廣大假面劇의 五神將舞가 同一한 觀念이다)
둘째 그들에 쓰이는 음곡 및 가요를 비교하여 보면 처용무에는 신라시대로부터 전한 것이라고 볼 만한 처용가를 최초에는 완조(緩調)로 (현대문주2▶처용만기 즉 봉황음 일기[a 14]) 다음에는 얼마간 급조(봉황음 중기)인 “山河千里⋯⋯⋯”를 창하고 다시 급조(봉황음 급기)로 나아가 “내 님을 따라서⋯⋯”를 창하고 최후에 진작·정읍급기·북전급기를 주(奏)하여 전반을 마치고 후반에 들어가서는 영산회상만·영산회상령·보허자·처용만기로 점차 미타찬, 본사찬, 관음찬 등의 불보살송덕가요로 넘어가는 것이나 한편 산대극은 최초의 사방신고사무에 염불타령(속곡)의 반주로서 하고 그 외에는 염불타령, 굿거리 등으로 하며 노래도 단가조·속요를 하는 것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가사에 지(至)하여도 전자와 공통된 것이 전연 없다.
쪽수▶P104-2其二에 그들에 쓰이는 音曲 及 歌謠를 比較하여 보면 處容舞에는 新羅時代로부터 傳한 것이라고 볼 만한 處容歌를 最初에는 緩調로 (원문주2▶處容慢機 即 鳳凰吟 一機[14]) 다음에는 얼마간 急調(鳳凰吟中機)인 「山河千里⋯⋯⋯」를 唱하고 다시 急調(鳳凰吟急機)로 나아가 「내 님을 따라서⋯⋯」를 唱하고 最後에 眞勺·井邑急機·北殿急機를 奏하야 前半을 맡이고 後半에 드러가서는 靈山會相慢·靈山會相令·步虛子·處容慢機로 漸次 彌陀讃, 本師讃, 觀音讃 等의 佛菩薩頌德歌謠로 넘아가는 것이나 一方 山臺劇은 最初의 四方神告祀舞에 念佛打令(俗曲)의 伴奏로서 하고 그 外에는 念佛打令, 굿거리 等으로 하며 노래도 短歌調·俗謠를 하는 것은 할 수 없다 하더래도 歌詞에 至하야도 前者와 共通된 것이 全然 없다.
셋째 무용상으로 이것을 볼 것 같으면 처용무(그림1 및 그림2 참조)의 용형(踊型)으로(동작적 종별) 약학궤범에 ‘수양수 무룹디피무’(정강이를 올리면서 몸을 좌우로 흔드는 춤)·’발바딧무’(발을 쾅쾅 굴리는 춤)·’홍정도돔무’(사행형으로 가면서 추는 춤) 및 그 외에 ‘인무’·’수양수오방무’ 등이 보이고 산대극에는 ‘돌단무’(삥삥 돌면서 추는 것)·’곱사위무’(장고의 앞에서 뒷걸음질하면서 추는 춤)·’화장무’(풍물 앞에서 두 팔을 번갈아 어깨까지 올렸다 내리는 춤)·’여다지무’(곱사위무를 하고 두 팔을 순차로 돌리면서 사태에다(고간) 박고 다시 그것을 한목 앞으로 내밀어 좌우로 벌리고 장고에 향하여 나아가면서 추는 것) (그림4 참조)·’멍석마리춤’(장고에 향해서 멍석을 마는 형용을 하면서 무진(舞進)하는 것) 등인데 처용무의 각 모형은 산대극의 여하한 형(型)에도 해당하는 것이 없어 무용적 입장으로는 전연 유사점을 발견할 수 없다.
쪽수▶P104-3第三에 舞踊上으로 이것을 볼 것 같으면 處容舞(第一圖 及 第二圖 參照)의 踊型으로(動作的 種別) 樂學軌範에 「垂楊手 무룹디피舞」(정강이를 올니면서 몸을 左右로 흔드는 춤)·「발바딧舞」(발을 쾅쾅 굴니는 춤)·「紅程도돔舞」(蛇行形으로 가면서 추는 춤) 及 其外에 「人舞」·「垂楊手五方舞」 等이 보이고 山臺劇에는 「돌단舞」(삥삥 돌면서 추는 것)·「곱사위舞」(杖皷의 앞에서 뒷거럼질하면서 추는 춤)·「화장舞」(風物 앞에서 두 팔을 번가러 억게까지 올렸다 나리는 춤)·「여다지舞」(곱사위舞를 하고 두 팔를 順次로 돌니면서 삿태다(胯間) 박고 다시 그것을 한목 앞으로 내밀어 左右로 벌니고 杖鼓에 向하야 나아가면서 추는 것) (第四圖 參照)·「멍석마리춤」(杖皷에 向해서 멍석을 마는 形容을 하면서 舞進하는 것) 等인데 處容舞의 各型은 山臺劇의 如何한 型에도 該當하는 것이 없어 舞踊的 立塲으로는 全然 類似點을 發見할 수 없다.
넷째 조형미술상으로 비교하면 가면의 형태에 있어 처용가면(그림3 참조)과 같은 가면은 산대가면(그림9 참조)에는 유사한 것이 하나도 없고 남선 가면극의 대종(大宗)인 오광대극(예진주·통영·김해가락) 가면(그림7, 8, 10, 11 참조) 및 야유극가면(그림5 참조)에도 유사한 것이 없고 산대극의 최후의 계통인 봉산탈춤 가면(그림6 참조)에 초유사품이 있으나 이 유사적 관계는 그 근거가 심히 박약하다. 즉 그 면(面)의 융기 정도가 근사할 따름이요 용모는 조금도 같지 않다. 이러므로 전연 동일 계통이라고 할 수 없고 제작재료상으로 보더라도 처용가면은 저포(苧布)로 만들고 (절종 후에 이왕직에서 추상적으로 제작한 신품은 지제(紙製)) 산대가면은 목제⋅호제(瓠製)이며 (간혹 후술할 봉산식 지제품이 있음. 봉산의 가면은 지제품 부해서 형재(型梓)에 넣는다) 이고 진주오광대 가면은 지제 (평면에 그린 것. 단 호제도 있음)로서 재료 여하는 그 계통에는 별로 문제될 것도 없지만 상이한 것만은 사실이다. 그리고 익재의 소악부에 보이는 ‘패치퇴순’은 현존한 어떤 가면에도 발견하지 못하겠고 명칭상으로도 동일 또는 유사한 것이 없다.
쪽수▶P105-1其四 造型美術上으로 比較하면 假面의 形態에 잇서 處容假面(第三圖 參照)과 같은 假面은 山臺假面(第九圖 參照)에는 類似한 것이 하나도 없고 南鮮 假面劇의 大宗인 五廣大劇(例晉州·統營·金海駕洛) 假面(第七, 八, 十, 十一圖 參照) 及 野遊劇假面(第五圖 參照)에도 類似한 것이 없고 山臺劇의 最後의 系統인 鳳山탈춤 假面(第六圖 參照)에 稍類似品이 있으나 이 類似的 關係는 그 根據가 甚히 薄弱하다. 即 그 面의 隆起 程度가 近似할 따름이요 容貌는 조곰도 같지 않다. 이러므로 全然 同一 系統이라고 할 수 없고 製作材料上으로 보더래도 處容假面은 苧布로 만들고 (絶種 後에 李王職에서 推想的으로 製作한 新品은 紙製) 山臺假面은 木製⋅瓠製이며 (間或 後述할 鳳山式 紙製品이 有함. 鳳山의 假面은 紙製品 부해서 型梓에 넛는다) 이고 晉州五廣大 假面은 紙製(平面에 그린 것. 但 瓠製도 有함)로서 材料 如何는 그 系統에는 別노 問題될 것도 없지마는 相異한 것마는 事實이다. 그리고 益齊의 小樂府에 보이는 「貝齒頹脣」은 現存한 어떤 假面에도 發見하지 못하겠고 名稱上으로도 同一 又는 類似한 것이 없다.
다섯째 문헌적으로는 별술(別述)함과 같으므로 중복의 도로(徒勞)를 다시 않겠다.
쪽수▶P105-2其五 文獻的으로는 別述함과 같으므로 重複의 徒勞를 다시 않겟다.
위에서 서술함과 같이 궁중의 처용무와 현대의 산대극 간에는 벽사 관념에 있어 공통점을 가지나 이것은 후술함과 같이 처용무와 산대극이 동일이란 예증이 되지를 않고 다른 점인 조형미술상, 무용동작상, 음곡가요상(주석과 같이 부분적으로 공통한 것은 있다)의 상이점으로 관지(觀之)하면 처용무가 산대극이라고 단정함에는 너무나 불리한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05-3叙上함과 같이 宮中의 處容舞와 現代의 山臺劇 間에는 僻邪 觀念에 있어 共通點을 가지나 이것은 後述함과 같이 處容舞와 山臺劇이 同一이란 例證이 되지를 않고 他點인 造形美術上, 舞踊動作上, 音曲歌謠上(註와 같이 部分的으로 共通한 것은 있다)의 相異點으로 觀之하면 處容舞가 山臺劇이라고 斷定함에는 너무나 不利한 資料라고 아니할 수 없다.


































































































본문4: 4.처용무·나례·산대극의 본질적 고찰


처용이라 함은 앞서 든 문헌과 같이 신라 제49대의 헌강왕이 현금의 경상남도 울산군 대현면 세죽포처용암은 온산면 처용리에 있음인(?) 개운포에 거동하였다가 마침 환궁할 즈음에 갑자기 일어난 운무 까닭으로 길을 잃었을 때 수행하던 일관(日官)이 그것은 동해 용의 소변(所變)이란 상주(上奏)를 하므로 근경에 용을 위하여 불사를 창기하라는 칙명이 내리자 운무가 사산(四散)하고 용이 일곱 아들을 데리고 왕의 앞에 현신하여 왕덕을 찬양하고 무용과 주악을 바쳤다. 그 중 첫째 아들 처용이 왕을 따라 입경하여 왕정을 보좌하였으므로 왕은 급간의 지위를 주고 또한 미녀로써 처를 삼게 하였다. 역신이 그 미모를 흠모하여 사람으로 번형하여 야반에 처용의 집에 절숙(竊宿)한 것을 처용이 외출하였다가 귀가하여 이것을 발견하고 창가작무하여 이를 물리치니 역신이 형용을 날아내어 꿇어 앉아 ‘내가 공의 처를 흠모하여 이제 범하였더니 공이 보시고 노하시지 아니시니 이후 난 공의 화상만 보아도 문에 들어서지 않겠다’는 의미의 설화에 유시(由始)된 것이다.
쪽수▶P107-1處容이라 함은 前揭 文獻과 같이 新羅 第四十九代의 憲康王이 現今의 慶尙南道 蔚山郡 大峴面 細竹浦處容岩은 溫山面 處容里에 在인(?) 開雲浦에 擧動하였다가 마침 還宮할 지음에 갑작이 이러난 雲霧 까닭으로 길을 이렀을 때 隨行하든 日官이 그것은 東海 龍의 所變이란 上奏를 함으로 近境에 龍을 爲하야 佛寺를 創起하라는 勅命이 나리자 雲霧가 四散하고 龍이 七子를 다리고 王의 앞에 現身하야 王德을 讚揚하고 舞踊과 奏樂을 獻하얐다. 그 中 一子 處容이 王을 따라 入京하야 王政을 輔佐하였으므로 王은 級干의 地位를 주고 또한 美女로써 妻를 삼게 하였다. 疫神이 그 美貌를 欽慕하야 사람으로 變形하야 夜半에 處容의 집에 竊宿한 것을 處容이 外出하였다가 歸家하야 이것을 發見하고 唱歌作舞하야 이를 물리치매 疫神이 形容을 날아내여 꾸러 안저 「내가 公의 妻를 欽慕하야 이제 犯하였더니 公이 보시고 怒하시지 아니시니 已後 난 公의 畫像만 보아도 門에 드러서지 않겠다」는 意味의 說話에 由始된 것이다.
망해사 녹기전설로서의 이외의 처용설화를 그 구성되어 있는 요소를 검토하여 보면 (1)용은 운무를 자유자재하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것 (二)신(선신)은 현실적으로 인간의 정치에도 간여할 수 있다는 것(현대문주1▶이것은 신라시대에 있어 신에 대한 관념의 특색이다.[a 15]) (3)역신(악신)이 형자(形姿)를 변하여 인간과 생리적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것은 관념적으로는 미모를 시기한 역신이 역병을 전염하려던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삼국유사의 “入良沙寢矣見昆” 이하를 볼 것 같으면 명백히 성교의 자세를 지칭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조선의 두창신은 무속상으로 여성이며 명칭은 호구별성마마이나 여기에 말하는 역신은 여하한 종류의 역(疫)인지 불분명하다) (4)처의 부정(不貞)을 보고 노하지 않고 도리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는 것 (5)화상만으로서도 (가면으로 환치하여도 무방) 악신을 물리칠 수가 있다는 것 등이나 요는 이 설화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역신과 처의 교섭(관념 또는 생리적의 어느 것을 불문하고)이 계기가 되어 의식적 연극화(무용화)된 것은 명료한 사실인데 총괄적으로 보면 이 (현대문주2▶설화는[a 16]) 벽사진경관념 및 신라화랑도 찬양관념을 포함한 복합설화가 아닌가 한다.
쪽수▶P107-2望海寺 綠起傳說로서의 以外의 處容說話를 그 構成되어 있는 要素를 檢討하여 보면 (一)龍은 雲霧를 自由自在하는 힘을 가젓다고 생각하는 것 (二)神(善神)은 現實的으로 人間의 政治에도 干與할 수 있다는 것(원문주1▶이것은 新羅時代에 있어 神에 對한 觀念의 特色이다[15]) (三)疫神(惡神)이 形姿를 變하야 人間과 生理的 關係를 맺일 수 있는 것(이것은 觀念的으로는 美貌를 猜忌한 疫神이 疫病을 傳染하려든 것이라고도 解釋할 수 있으나 三國遺事의 「入良沙寢矣見昆」 以下를 볼 것 같으면 明白히 性交의 姿勢를 指稱함이라고 할 수 있다. 近代의 朝鮮의 痘瘡神은 巫俗上으로 女性이며 名稱은 戶口別星媽媽이나 여기에 말하는 疫神은 如何한 種類의 疫인지 不分明하다) (四)妻의 不貞을 보고 怒▶P108-1하지 않고 도로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엇다는 것 (五)畫像만으로서도 (假面으로 換置하여도 無妨) 惡神을 물리칠 수가 있다는 것 等이나 要는 이 說話의 가장 重要한 核心이 되는 疫神과 妻의 交涉(觀念 又는 生理的의 어느 것을 不問하고)이 契機가 되어 儀式的 演劇化(舞踊化)된 것은 明瞭한 事實인데 總括的으로 보면 이 (원문주2▶說話는[16]) 僻邪進慶觀念 及 新羅花郞道 讚揚觀念을 包含한 複合說話가 아닌가 한다.
조선에서 선악 두 신에 대한 인간의 자기방어 또는 몽리의 방법으로서 전자에 대하여는 연극, 가무 등의 의식을 봉납하거나 혹은 향응으로 대우하여 (양자병용도 있음) 그 가호를 받으려는 것과 악신에 대하여는 혹형의 의식으로서 퇴치하든지 혹은 뽄세만인 음식으로서 대우하는 것이 (걸인에게 시물(施物)하는 것처럼) 통례이다. 그런데 이 처용설화에는 악신에 대하여도 가무로서 대우하였다. 신라시대의 화랑도가 가무를 기호하고 문무에 효통하고 그 도량이 넓은 것으로 간판을 삼아 남아의 기상이라고 뽐내던 사실로서 추측하면 이 설화도 화랑도 찬양의 구현이라고 보겠다.
쪽수▶P108-2朝鮮에서 善惡 二神에 對한 人間의 自己防禦 又는 蒙利의 方法으로서 前者에 對하여는 演劇, 歌舞 等의 儀式을 奉納하거나 或은 饗應으로 待遇하야 (兩者倂用도 有함) 그 加護를 受하려는 것과 惡神에 對하야는 酷刑의 儀式으로서 退治하든지 或은 뽄세만인 飮食으로서 待遇하는 것이 (乞人에게 施物하는 것처름) 通例이다. 그런데 이 處容說話에는 惡神에 對하여도 歌舞로서 待遇하였다. 新羅時代의 花郞徒가 歌舞를 嗜好하고 文武에 曉通하고 그 度量이 넓은 것으로 看板을 삼아 男兒의 氣像이라고 뽑내든 事實로서 推測하면 이 說話도 花郞道 讚揚의 具現이라고 보겠다.
가면 또는 화상으로 적극적으로는 나(儺), 소극적으로는 잡신금기에 이용하는 것은 중국의 옛날부터 있는 원시신앙으로 (중국에 한한 것은 아니나) 이 처용설화는 중국의 그것인지 조선 자체의 신앙인지 불명하나 여하간 벽사진경의 관념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는 것이며 또 이 사상은 비교적 뿌리가 굳세어 현재의 조선 민속에 있어도 각 형태에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처용의 언어학적 해석은 필자는 이 방면에 지식이 없으나 안확씨 설(쇼화 7년 2월호 조선)이 경청할 만하다.
쪽수▶P108-3假面 又는 畫像으로 積極的으로는 儺, 消極的으로는 雜神禁忌에 利用하는 것은 中國의 옛날부터 있는 原始信仰으로 (中國에 限한 것은 아니나) 이 處容說話는 中國의 그것인지 朝鮮 自體의 信仰인지 不明하나 如何間 僻邪進慶의 觀念에서 나온 것은 틀림없는 것이며 또 이 思想은 比較的 뿌리가 굳세여 現在의 朝鮮 民俗에 있어도 各 形態에 發見할 수 있다. 그리고 處容의 言語學的 解釋은 筆者는 이 方面에 智識이 없으나 安廓氏 說(昭和 七年 二月號 朝鮮)이 傾聽할 만하다.
처용가의 창작 연대에 대하여는 “東京明期月良⋯⋯奪叱良乙何如爲理古”까지는 제가(諸家)가 고증함과 같이 신라시대 작임은 대략 명백하나 “新羅盛代昭盛代⋯⋯⋯小葉아으熱病大神의發願이샷다”는 지금 형편으로는 신라시대 작이라고 인정할 하등의 재료도 없다. 고려 말기의 이숭인의 도은집에 처용가라고 제(題)하고 “十一月十七日夜, 聽功益新羅處容歌聲調悲壯, 令人有感”이라 하고 “夜久新羅曲, 停盃共聽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日城頭近, 悲風樹梢嘶, 無端懷抱惡, 功益亦何爲”랄 뿐이요 전표를 모름은 의연하다.
쪽수▶P108-4處容歌의 創作 年代에 對하여는 「東京明期月良⋯⋯奪叱良乙何如爲理古」까지는 諸家가 考證함과 같이 新羅時代 作임은 大畧 明白하나 「新羅盛代昭盛代⋯⋯⋯小葉아으熱病大神의發願이샷다」는 只今 形便으로는 羅代 作이라고 認▶P109-1定할 何等의 材料도 없다. 高麗 末期의 李崇仁의 陶隱集에 處容歌라고 題하고 「十一月十七日夜, 聽功益新羅處容歌聲調悲壯, 令人有感」이라 하고 「夜久新羅曲, 停盃共聽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日城頭近, 悲風樹梢嘶, 無端懷抱惡, 功益亦何爲」랄 뿐이요 全豹를 모름은 依然하다.
처용무는 (약학궤범에 의하면) 석제이환부가면에 사모(紗帽)를 쓰고 목단화 및 도지도실을 꽂고 채의(彩衣)를 입는 무용인데 이 궁중 식이(式以) 외에 민간에도 있음직하지만 현재에는 전하지 않는다. 상당히 체계 있는 처용무의 창작 연대는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참고할 만한 것이 없고 고려사 권71, 악2에 인용한 이제현의 시 “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貝齒頹脣歌夜月, 鳶肩紫袖舞春風” 및 여말 국초의 이첨의 시 “滿天明月夜悠悠, 東海神人下市樓, 路闊可容長袖舞, 世平宜揖百錢遊, 高蹤鰾継歸仙府, 遺曲傳在慶州 巷口春風時一起 依然吹動挿花頭”에서도 그 창작 연대를 명백히 할 아무 자료도 없다. 유차관지(由此觀之)하면 처용무의 창작은 고려시대 이전으로는 소급하지 못할 것 같다. 이조 성종조(朝) 사람 성현은 그의 저 ‘용재총화’에 “音樂處容之戱, 肇自新羅憲康王時, 有神人 云云”이라고 하였으나 출전미상하여 취상(取上)하기 어렵다.
쪽수▶P109-2處容舞는 (依樂學軌範) 錫製耳環附假面에 紗帽를 쓰고 牧丹花 及 桃枝桃實을 꼿고 彩衣를 닙는 舞踊인데 이 宮中 式以 外에 民間에도 있음직하지마는 現在에는 傳하지 않는다. 相當히 體系 있는 處容舞의 創作 年代는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參考할 만한 것이 없고 高麗史 卷七十一, 樂二에 引用한 李齊賢의 詩 「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貝齒頹脣歌夜月, 鳶肩紫袖舞春風」 及 麗末 國初의 李詹의 詩 「滿天明月夜悠悠, 東海神人下市樓, 路闊可容長袖舞, 世平宜揖百錢遊, 高蹤鰾継歸仙府, 遺曲傳在慶州 巷口春風時一起 依然吹動挿花頭」에서도 그 創作 年代를 明白히 할 아무 資料도 없다. 由此觀之하면 處容舞의 創作은 高麗時代 以前으로는 溯及하지 못할 것 같다. 李朝 成宗朝 人 成俔은 其著 「鏞齋叢話」에 「音樂處容之戱, 肇自新羅憲康王時, 有神人 云云」이라고 하였으나 出典未詳하야 取上하기 難하다.
상술한 것을 총괄적으로 말하면 신라에 처용설화에 기인하여 처용가가 생기고 (같은 신라시대) 고려시대에 이르러 그 가요를 기(幾)부분 간 보식(補飾)하여 용용화(容踊化)한 것이라고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쪽수▶P109-3上述한 것을 總括的으로 말하면 新羅에 處容說話에 基因하야 處容歌가 生하고 (같은 新羅時代) 高麗時代에 이르러 그 歌謠를 幾部分 間 補飾하야 容踊化한 것이라고 봄이 妥當하지 않을가 한다.
중국의 나례에 관하여는 주례하관사마, 후한서예의(중), 예기월령 (계춘) (중추) (계동), 논어(향당편), 당육전(14) 등에 보이며 이에 대한 설명은 소략하나 조선에도 비교적 일찍이 수입되어 신라 최치원의 시에 있는 오희(오기)도 나(儺)라고 단정하는 (현대문주3▶학자가 있다[a 17]. (현대문주4▶고려사 예지[a 18]에 의하면 고려 정종 6년(1040)에는 이미 나례에 관한 조서와 주상이 있었고 예종 11년(1116)에는 또 나례에 관한 창우잡기가 있었다.
쪽수▶P109-4中國의 儺禮에 關하여는 周禮夏官司馬, 後漢書禮儀(中), 禮記月令 (季春) (仲秋) (季冬), 論語(鄕黨編), 唐六典(一四) 等에 보이며 이에 對한 說明은 省略하나 朝鮮에도 比較的 일즉이 輸入되여 新羅 崔致遠의 詩에 있는 五▶P110-1戱(五伎)도 儺라고 斷定하는 (원문주3▶學者가 잇다[17]. (원문주4▶高麗史 禮志[18]에 依하면 高麗 靖宗 六年(1040)에는 이미 儺禮에 關한 詔書와 奏狀이 있었고 睿宗 十一年(1116)에는 또 儺禮에 關한 倡優雜技가 있었다.
고려사의 기록으로서 추측하면 이 도화적 의식은 점차 연극적 색채를 띠운 것 같은데 이는 당연의 귀결이며 의식 그 자체가 연극인 형태에 왕왕히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이다. 이후 점차 나례(의)는 가면무용 및 가면극의 대명사의 관(觀)을 정(呈)하여 드디어 잡희 (기)백반을 의미한 것에 통용한 것은 이색의 목은집 21권 구나행 및 성현의 허백당집 관나시에 의하여 명백하다. 그러나 의식인 나례와 연극인 나례를 대략 구별했다고 볼 수 있는 점도 없지는 않다. 증보문헌비고 권107에
쪽수▶P110-2高麗史의 記錄으로서 推測하면 이 道化的 儀式은 漸次 演劇的 色彩를 띠운 것 같은데 이는 當然의 歸結이며 儀式 그 自體가 演劇인 形態에 往往히 發見할 수 있는 現象이다. 爾後 漸次 儺禮(儀)는 假面舞踊 及 假面劇의 代名詞의 觀을 呈하야 디디여 雜戱 (伎)百般을 意味한 것에 通用한 것은 李穡의 牧隱集 二十一卷 驅儺行 及 成俔의 虛白堂集 觀儺詩에 依하야 明白하다. 그러나 儀式인 儺禮와 演劇인 儺禮를 大略 區別햇다고 볼 수 있는 點도 없지는 않다. 增補文獻備考 卷百七에

世宗戊戌(1418) (世宗 卽位 之年) 欽差宦官陸善才, 奉勅書及欽賜名稱歌曲一千本來 綴綵棚設儺禮(●●●●●●)

쪽수▶P110-3

世宗戊戌(1418) (世宗 卽位 之年) 欽差宦官陸善才, 奉勅書及欽賜名稱歌曲一千本來 綴綵棚設儺禮(●●●●●●)

라고 함은 세종 즉위에 관한 명제칙서를 지래(持來)한 육선재(陸善才)를 위하여 연출한 것이며, 또 세종실록 (권126) 31년, 겨울 10월 무신삭조에
쪽수▶P110-4라고 함은 世宗 卽位에 關한 明帝勅書를 持來한 陸善才를 爲하야 演出한 것이며, 또 世宗實錄 (卷一百二十六) 三十一年, 冬十月 戊申朔條에

禮曹啓, 洪熙宣德兩皇帝明의 仁宗 宣宗 登極, 詔使之來, 不用綵棚儺禮, 至正統時乃用之明 英宗 即位時 今必詔使又來明 景宗 即位時 然太上皇帝陷虜庭非常時之此謂明英宗敗陷土木堡 綵棚儺(●●●)禮似若喜慶, 恐或未安, 上日洪熙宣德之時, 易月之制未畢故耳今日之事, 雖天下所痛憤, 然無凶問, 綵棚儺禮(●●●●)似難廢也

쪽수▶P110-5

禮曹啓, 洪熙宣德兩皇帝明의 仁宗 宣宗 登極, 詔使之來, 不用綵棚儺禮, 至正統時乃用之明 英宗 即位時 今必詔使又來明 景宗 即位時 然太上皇帝陷虜庭非常時之此謂明英宗敗陷土木堡 綵棚儺(●●●)禮似若喜慶, 恐或未安, 上日洪熙宣德之時, 易月之制未畢故耳今日之事, 雖天下所痛憤, 然無凶問, 綵棚儺禮(●●●●)似難廢也

라고 특히 ‘채붕나례’라 하였는데 (이는 산대극을 지칭한 것 같다)이에 대하여 ‘의식나례’는 이조 인조 때의 호조판서 이서의 상소문에
쪽수▶P110-6라고 特히 「綵棚儺禮」라 하였는데 (이는 山臺劇을 指稱한 것 같다)이에 對하야 「儀式儺禮」는 李朝 仁祖時의 戶曹判書 李曙의 上疏文에

歲時儺禮(●●●●), 市民所費甚多, 宜罷之

쪽수▶P110-7

歲時儺禮(●●●●), 市民所費甚多, 宜罷之

라고 하여 ‘채붕나례’에 대하여 ‘세시나례’로서 구별하였다. 다만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시가 반드시 제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므로 앞선 기록의 세시가 대내(大內)의 의식인 제석대나례를 지칭한 것인지 또는 다른 것을 의미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연중행사인 나례를 말한 것임은 틀림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쪽수▶P111-1라고 하야 「綵棚儺禮」에 對하야 「歲時儺禮」로서 區別하였다. 다만 遺憾으로 생각하는 것은 歲時가 반듯이 除夕을 意味하는 것이 아님으로 前記의 歲時가 大內의 儀式인 除夕大儺禮를 指稱함인지 又는 다른 것을 意味함인지는 不分明하나 年中行事인 儺禮를 말함임은 틀임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산대극(산대노름 산대도감노름 산대도감노리 등 칭호에 대하여는 다른 날 상고하려 하므로 우선 위와 같은 명칭으로 개괄하노라)의 명칭은 아직까지 출처 불분명한 것인데 산대라는 문자가 최초에 쓰인 문헌은 고려 말 이색의 목은집 권33으로 “自東大門至闕門前, 山臺雜劇前所未聞也”와 및 앞서 인용한 이색의 시라고 하겠다.
쪽수▶P111-2山臺劇(山臺노름 山臺都監노름 山臺都監노리 等 稱號에 對하야는 他日 詳考하려 함으로 于先 如上한 名稱으로 槪括하노라)의 名稱은 아즉까지 出處 不分明한 것인데 山臺라는 文字가 最初에 쓰인 文獻은 麗末 李穡의 牧隱集 卷三十三으로 「自東大門至闕門前, 山臺雜劇前所未聞也」와 및 前引한 同人의 詩라고 하겠다.
산대의 어원 및 개념의 문제는 앞서 약술함과 같이 비교적 중요 문제이면서도 지금까지 방치했던 것이다. 이 어원 내지 출처는 이색의 목은집에 ‘산대’라는 문자는 있으나 그 출전에 관해서는 하등 보임이 없고 문의(文意)상으로 해석하면 그 이전부터 산대잡극이란 것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인데 그때 비로소 도시에 들어왔다고 봄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그러면 그 전에는 어떤 특별한 지리적 구역에서만 하던 것으로 추측되는 것이다. 만약 필자에게 억측을 허용한다면 이 특별한 지역은 산록(山麓)인 대지이고 그곳에다가 붕(棚)을 세워 채막을 에워싼 것의 표현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목은의 시 “山臺結綴似蓬萊”의 산대의 의미는 ‘산의 대’라는 의미와 ‘연극 이름의 산대’라는 두 가지로 해석하고 싶다. 유득공(이조 정종 때의 사람)의 경도잡지에
쪽수▶P111-3山臺의 語原 及 槪念의 問題는 앞서 畧述함과 같이 比較的 重要 問題이면서도 只今까지 放置햇든 것이다. 이 語原 乃至 出處는 李穡의 牧隱集에 「山臺」라는 文字는 있으나 그 出典에 關해서는 何等 보임이 없고 文意上으로 解釋하면 그 以前부터 山臺雜劇이란 것이 있엇는 것만은 事實인데 그때 비로소 都市에 드러왓다고 봄이 妥當하지 않을가 한다. 그러면 그 前에는 어떤 特別한 地理的 區域에서만 하든 것으로 推測되는 것이다. 萬若 筆者에게 臆測을 許容한다면 이 特別한 地域은 山麓인 臺地이고 그곧에다가 棚을 設하야 綵幕을 에워싼 것의 表現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므로 牧隱의 詩 「山臺結綴似蓬萊」의 山臺의 意味는 「山의臺」라는 意味로와 「演劇名의山臺」라는 두 가지로 解釋하고 싶다. 柳得恭(李朝 正宗時 人)의 京都雜誌에

演劇有山戱野戱 兩部屬於儺禮都監, 山戱結棚下帳⋯⋯⋯

쪽수▶P111-4

演劇有山戱野戱 兩部屬於儺禮都監, 山戱結棚下帳⋯⋯⋯

이라 하여 산과 야를 대립시킨 것을 보더라도 그에는 어떤 이유가 개재(介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뿐더러 이익(이조 현종 때의 사람)의 성호사설(오하(五下)기예문)에는 좀 더 소상하여
쪽수▶P111-5이라 하야 山과 野를 對立식힌 것을 보더레도 그에는 어떤 理由가 介在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뿐더러 李瀷(李朝 顯宗▶P112-1時 人)의 星湖僿說(五下技藝門)에는 좀 더 昭詳하야

綵棚山者, 高麗遺俗也, 今世別置都監, 每上使至, 爲左右棚, 競鬪新奇

쪽수▶P112-2

綵棚山者, 高麗遺俗也, 今世別置都監, 每上使至, 爲左右棚, 競鬪新奇

하고 해서 명백히 산에 ‘채의 붕’을 세워서 연출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다만 필자가 가장 당혹하는 것은 명 동월(董越)의 조선부(賦)에
쪽수▶P112-3하고 해서 明白히 山에 「綵의棚」을 設해서 演出한 것으로 解釋할 수 있다. 다만 筆者가 가장 當惑하는 것은 明 董越의 朝鮮賦에

光化門外東西, 列鰲山二座, 高與門等, 極其巧⋯⋯平壤黃州皆設鰲山, 陳百戱迎詔, 而王京爲勝

쪽수▶P112-4

光化門外東西, 列鰲山二座, 高與門等, 極其巧⋯⋯平壤黃州皆設鰲山, 陳百戱迎詔, 而王京爲勝

이라고 하는 오산인데 영화촬영소의 세트와 같은 감을 주나 이것은 도구를 묘사한 것인지 또 혹은 산대극 전경을 표현한 것인지 불명하다. 그러나 저러나 필자는 산대라는 것은 산에 인연이 있는 지리적 구역에 연극을 연출하려고 설치한 모양을 지칭한 데서 시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쪽수▶P112-5이라고 하는 鰲山인데 映畵撮影所의 셋트와 같은 感을 주나 이것은 道具를 描寫한 것인지 又 或 山臺劇 全景을 表現한 것인지 不明하다. 그러나 저러나 筆者는 山臺라는 것은 山에 因緣이 있는 地理的 區域에 演劇을 演出하려고 設置한 貌樣을 指稱한 데서 始作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대극을 관념상으로 보면 고려 말과 현대와는 상이하다고 할 수 있다. 전출(前出)의 목은의 산대잡극시를 분석하면 그에는 처용무·죽광대·폭화 등의 3개 잡기가 포함되어 있고 현대의 산대극에는 그 제1 과장에 원시 연극 형태에 왕왕 있는 의식 (지금은 벽사) 내지 녹희물(綠喜物)인 고사축원무용이 있을 뿐이요 다른 잡기는 전연 포함되지 않는다.
쪽수▶P112-6山臺劇을 觀念上으로 보면 麗末과 現代와는 相異하다고 할 수 있다. 前出의 牧隱의 山臺雜劇詩를 分析하면 그에는 處容舞·竹廣大·爆火 等의 三個 雜伎가 包含되여 있고 現代의 山臺劇에는 그 第一 科場에 原始 演劇 形態에 往往이 있는 儀式 (此에는 僻邪) 乃至 綠喜物인 告祀祝願舞踊이 있을 뿐이요 他雜伎는 全然 包含되지 않는다.
일언이장지(ᅳ言以藏之)하면 초기의 산대잡극은 각 독립한 잡희를 총괄해서 지칭할 때의 칭호이며 ‘나례’(초기시대의 연극인 나례)라는 자구와 동양으로 사용되었고 현대 늦어도 이조 정종 이후의 산대극은 체계 및 연극 조건을 구비한 특수한 연극의 명칭이라고 하겠다. 혹자 산대의 고사축원·사리원 탈춤의 사상좌무 및 남선오광대극의 오방신장의 과장은 처용무와 관계가 없다고 해석하느냐 반문하면 이에 대한 답은 지극히 간단하여 여러 차례 말한 가면에 대한 관념으로부터 재출발하여 해석하면 빙석(氷釋)할 것이다.
쪽수▶P112-7ᅳ言以藏之하면 初期의 山臺雜劇은 各 獨立한 雜戱를 總括해서 指稱할 때의 稱號이며 「儺禮」(初期時代의 演劇인 儺禮)라는 字句와 同樣으로 使用되었고 現代 느저도 李朝 正宗 以後의 山臺劇은 體系 及 演劇 條件을 具備한 特殊한 演劇의 名稱이라고 하겟다. 或者 山臺의 告祀祝願·沙里院 탈춤의 四上佐舞 及 南鮮五廣大劇의 五方神將의 科場은 處容舞와 關係가 없다고 解釋하너냐 反問하면 이에 對한 答은 至極히 簡單하야 屢說한 假面에 對한 觀念으로부터 再出發하야 解釋하면 氷釋할 것이다.
그림1 순조기축진찬도의 처용무
第一圖 純祖己丑進饌圖의 處容舞
그림2 처용무(Korean Review Vol.no.3)
第二圖 處容舞(Korean Review Vol.no.3)
그림3 약학궤범의 처용 가면
第三圖 樂學軌範의 處容 假面
그림4 여다지무
第四圖 여다지舞
그림5 동래야유극 가면
第五圖 東萊野遊劇 假面
그림6 봉산탈춤 가면
第六圖 鳳山탈춤 假面
그림7 진주 오광대극 가면
第七圖 晋州 五廣大劇 假面
그림8 위와 같음
第八圖 同右
그림9 산대 가면
第九圖 山臺 假面
그림10 통영 오광대극 가면
第十圖 統營 五廣大劇 假面
그림11 김해가락 오광대극 가면
第十一圖 金海駕洛 五廣大劇 假面




























본문5: 5.결언


이렇게 총관(總觀)할 때 무용·연극에 관한 문헌이 심히 적고 게다가 이조의 유교정책이 화(禍)가 되어 이들 예술의 발달은 직접 간접으로 조지(阻止)된 결과 후세의 학도로 하여금 그 연구에 다대한 불편과 위험을 가지게 하였다.
쪽수▶P113-1如斯總觀할 때 舞踊·演劇에 關한 文獻이 甚少하고 게다가 李朝의 儒敎政策이 禍가 되어 이들 藝術의 發達은 直接 間接으로 阻止된 結果 後世의 學徒로 하여곰 그 硏究에 多大한 不便과 危險을 가지게 하였다.
무용·연극에 한한 것은 아니지만 고대와 관계를 가진 문화 과학 등의 연구 특히 사적 연구에는 문헌에 의한 고증학적 방법과 민간 전승에 의한 민속학적 방법이 유력한 것은 세인이 업기(業己) 인정하는 바이나 조선에는 이들 연극 관계의 문헌이 자못 없고 다만 창해유주적의 수3단적(數三端的) 문헌에 의하든지 혹은 극도로 유린된 민속예술에 의하여 그 전표의 기부분(幾部分)이라도 규시하려는 가장 무폭(無暴)한 계획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부자연하고 무리한 조건 아래에서 이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나 잘못하면 연구자 자신도 모르게 별로(別路)에 상양(徜佯)하게 되는 것이다.
쪽수▶P113-2舞踊·演劇에 限한 것은 아니지마는 古代와 關係를 가진 文化 科學 등의 硏究 特히 史的 硏究에는 文獻에 依한 考證學的 方法과 民間 傳承에 依한 民俗學的 方法이 有力한 것은 世人이 業己 認定하는 바이나 朝鮮에는 이들 演劇 關係의 文獻이 자못 없고 다만 蒼海遺珠的의 數三端的 文獻에 依하든지 或은 極度로 蹂躪된 民俗藝術에 依하야 그 全豹의 幾部分이라도 窺視하려는 가장 無暴한 計劃을 하지 않으면 않 된다. 如斯한 不自然하고 無理한 條件 下에서 이를 硏究하지 않으면 않 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나 잘못하면 硏究者 自身도 모르게 別路에 徜佯하게 되는 것이다.
위에서 서술한 처용무·나례·산대극에서만 하더라도 안확시와 같이 이색(목은)의 구나행에 처용무가 있고 산대잡극시에 처용무가 있다 하여 구나와 산대극을 동일한 것이라 단(斷)하고 산대극을 나례라고 칭한 앞서 든 각 문헌에 의하여 삼단논법적으로 3자 동일하다고 단안한 것은 일면 타당한 논고 같기도 하나 사실은 대단 피상적 관찰로서 문헌의 검토를 엄밀히 하지 않고 또 민속학적 실제사상을 무시한 데서 발생한 착오라고 아니할 수 없다. 처용무와 구나는 벽사진경 관념에 있어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으나 나례로부터 분립했다는 것을 이색(목은)의 구나행과 성현(허백당)의 관나시로 증명함은 불철저한 말이다. 전자의 “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稚龍爭珠, 踰々百獸如堯庭”은 처용무를 가리키지 않고 후자의 “弄丸眞似宜僚巧⋯⋯長竿百尺舞壺觥”은 전〿함과 같이 각각 다른 잡기의 묘사로서 각 독립한 잡기의 총괄적 칭호인 것을 알 수 있고 이색이 말한 산대잡극의 개념도 대략 이와 동일한 것으로 어떤 특정 연극 명칭이 아니고 전연 별개로 된 각종 연극 및 연극 형태물의 총칭이니 나례가 처용무요 산대극이라고 할 수 없다.
쪽수▶P114-1叙上의 處容舞·儺禮·山臺劇에서만 하더래도 安廓氏와 같이 李穡(牧隱)의 驅儺行에 處容舞가 있고 山臺雜劇詩에 處容舞가 있다 하야 驅儺와 山臺劇을 同ᅳ한 것이라 斷하고 山臺劇을 儺禮라고 稱한 前揭 各 文獻에 依하야 三段論法的으로 三者 同ᅳ하다고 斷案한 것은 一面 妥當한 論考 같기도 하나 事實은 大端 皮相的 觀察로서 文獻의 檢討를 嚴密히 하지 않고 또 民俗學的 實際事象을 無視한 데서 生한 錯誤라고 아니할 수 없다. 處容舞와 驅儺는 僻邪進慶 觀念에 있어는 同一하다고 할 수 있으나 儺禮로부터 分立햇다는 것을 李穡(牧隱)의 驅儺行과 成俔(虛白堂)의 觀儺詩로 證明함은 不徹底한 말이다. 前者의 「醉瞼爛赤猶未醒 黃犬踏稚龍爭珠, 踰々百獸如堯庭」은 處容舞를 가르치지 않고 後者의 「弄丸眞似宜僚巧⋯⋯長竿百尺舞壺觥」은 前〿함과 같이 各々 다른 雜伎의 描寫로서 各 獨立한 雜伎의 總括的 稱號인 것을 알 수 있고 李穡이 말한 山臺雜劇의 槪念도 大畧 이와 同ᅳ한 것으로 어떤 特定 演劇 名稱이 아니고 全然 別個로 된 各種 演劇 及 演劇 形態物의 總稱이니 儺禮가 處容舞요 山臺劇이라고 할 수 없다.
졸렬한 독필로 중언부언한 이들 3자에 대한 필자의 주장은 설령 처용무와 나례를 동일한 일자에 거행한다 할지라도 약학궤범 및 실록·문헌비고에도 보이는 것과 같이 전연 별개의 것이요 또 개념이 다른 잡기 총체를 의미한 나례도 처용무 하나만 지칭하지를 않았다. 산대극도 고려 말기에는 잡기 백반을 지칭하였으나 현대에는 특정의 연극 명칭이며 잡기는 전연 포함하지 않으니 이 또한 처용무라고 할 수 없다. 다만 현대의 산대극에 처용무와 같은 관념의 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며 또 나(儺)가 산대극의 발생 동기를 지은 것만은 긍정하는 것이다.
쪽수▶P114-2拙劣한 禿筆로 重言復言한 이들 三者에 對한 筆者의 主張은 設令 處容舞와 儺禮를 同ᅳ한 日字에 擧行한다 할지라도 樂學軌範 及 實錄·文獻備考에도 보이는 것과 같이 全然 別個의 것이요 또 槪念이 다른 雜伎 總體를 意味한 儺禮도 處容舞 一個만 指稱하지를 않았다. 山臺劇도 高麗 末期에는 雜伎 百般을 指稱하였으나 現代에는 特定의 演劇 名稱이며 雜伎는 全然 包含하지 않으니 이 또한 處容舞라고 할 수 없다. 다만 現代의 山臺劇에 處容舞와 同 觀念의 舞踊이 包含되어 있는 것은 事實이며 또 儺가 山臺劇의 發生 動機를 지은 것만은 肯定하는 것이다.
부언. 본편은 오로지 조선의 무용·연극에 대한 지식을 가지지 않는 인사에게 개념을 줌을 목표로 하여 전에 계간 연극학(동경)에 발표한 것을 금반에 극소부분만을 첨삭하며 번역한 것이다. (을해 2월 어해미정해남장(於海美貞海南莊) 탈고)
쪽수▶P114-3附言. 本篇은 오로지 朝鮮의 舞踊·演劇에 對한 智識을 가지지 않는 人士에게 槪念을 줌을 目標로 하야 前에 季刊 演劇學(東京)에 發表한 것을 今般에 極少部分만을 添削하며 飜譯한 것이다. (乙亥二月於海美貞海南莊脫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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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


  1. 西藏의 「하모」劇, 蒙古의 假面劇 其他 太平洋 諸島의 그것 等 其類例가 頗多하나 一々히 列擧치 아니하며 比較的 詳細하게 考察한 著書에 The Drama of Savage people by L. Havenmayer가 있다. 또 西藏의 儺系 假面劇에 關하여는 W. D. Hambly의 著 Tribal Dancing and Social Development 參照
  2. 「朝鮮の人形芝居」(人形芝居硏究―昭和四年―東京). 「朝鮮の民俗劇」(民俗學 第四卷 第八號―東京). 「五廣大小考」(朝鮮民俗 第一號―京城). 「朴僉知劇に對する數三考察」(季刊人形芝居 第四號―京都). 「朝鮮演劇」(平凡社大百科事典 十七卷―東京). 「鳳山舞用假面」(東亞日報 昭和 八年 十二月). 「南朝鮮假面剿復興氣運」(東亞日報 昭和 九年 四月). 「沙里院民俗舞踊に就いて」(ドルメン第二卷 第九號―東京). 等 各 拙稿 參照
  3. 金澤庄三郞 「吏讀の硏究」(朝鮮彙報, 大正 七年 四月)
  4. 申采浩 「朝鮮 古來의 文字와 詩歌의 變遷」(東亞日報, 大正 十四年 一月)
  5. 鮎貝房之進 「國文(方言俗字)吏吐·俗證造字·俗音·借訓字」(朝鮮史講座自 第一號 至 第三號―京城).
  6. 小倉進平 「鄕歌及吏讀の硏究」(京城帝國大學 法文學部 紀要 第一號)
  7. 鬼神 쫓는 儀式―儺, 難, 大儺, 追儺, 驅儺, 驅儺儀, 儺儀, 儺禮, 驅儺禮 等 各樣을 쓰나, 本稿에는 區分을 하지 않음. 또 綵棚儺儀, 彩棚儺禮, 歲時儺禮라는 것이 文獻에 보이고 民間에서는 山臺劇을 儺藝라고도 한다. 그런데 文獻에 儀式인 정말의 儺禮와 戱化한 演劇인 儺禮를 區別하지 아니함이 많고 安廓氏 亦是 襲用하였음으로 筆者 또한 不用意하게도 再襲用한 데가 있을는지 모르나 이는 讀者가 推想하면 自解할 것이다.
  8. 稼亭先生文集 卷之二十 十二丁 開雲浦 詩에 「地勝仙遊密, 雲開世路通, 依稀羅代兩仙翁, 曾見畵圖中, 舞月娑娑白, 簪花爛爛紅, 欲尋遺跡沓, 難窮須喚半帆風」이라고 하얏다.
  9. 李齊賢 益齊集 益齊亂藁四 小樂府에 「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具齒頹脣歌夜月, 薦肩紫袖舞春風」이라고 함.
  10. 李崇仁 陶隱集에 處容歌라고 題하야 「十一月十七日夜, 聽功益新羅處容歌, 聲調悲壯, 令人有感」이라 하고 또 「夜久新羅曲停盃共聽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日城頭近, 悲風樹梢嚥, 無端懷抱惡, 功益亦何爲」라 함.
  11. 成俔虛白堂詩集 卷之七 觀儺詩.
  12. 社堂은 社黨·祀黨·社長·等으로도 쓰며 萍草行旅를 하는 藝人으로 男社堂·女社堂의 別이 有함. 表面은 假面劇, 人形劇, 俗謠, 舞踊, 曲藝를 하나 그 裏面은 머슴 階級을 相對로 賣春(男子는 鷄姦)을 하는 團體로 그 根源은 相當히 오랜 것 같으며 近代에 와서는 寺刹이 이를 利用하게 되어 寺奴의 觀을 呈하였는데 安城 靑龍寺 社堂 及 南海 花芳寺 중매구가 다 그 例다. 그래서 이를 引率하는 居士·모갑(某甲이라고 普通 借字한다) 이와 社堂 間에는 複雜한 關係를 形成하야 社會學上으로 參考할 만한 點이 많다. 그리고 男社堂의 雞姦에 있어는 印度 支那의 네이(ney)와 恰似하며 全體로 보아서는 平安朝 當時 日本傀儡子와 同하다고 하겠다. 即 大江匡房의 「日本傀儡子記」에 「傀儡子, 無定居無常家, 穹廬氈帳, 逐水草以移徙, 頗類北狄之俗, 男則皆便弓馬, 以狩獵爲事, 或跳雙劍弄七丸, 或舞木人⋯⋯女則爲愁眉, 啼粧折腰步齵慈咲, 施朱傅粉, 倡歌淫樂, 以求妖媚, 父母夫胥不誡, 口亟雖逢行人旅客, 不嫌一宵之佳會, 微璧女之餘, 自獻千金, 繡服錦衣, 金銀鈿医之具, 莫不悉有之不耕一畝田, 不採一技桑, 故不屬縣官, 皆非土民, 自限浪人, 上不知三公, 傍不怡牧宰, 以無課役, 爲一生之樂, 夜則祭百神鼓舞喧嘩, 以祈福助, 東國, 美濃⋯⋯云云」이라고 하야 朝鮮의 社堂하고 同ᅳ함을 알겠으며 또 그것이 北方俗하고 類似함을 알겟는데 그 後 日本서는 此語를 專혀 木偶에만 使用하야 ク〿ッ라고 發音한다. 그리하야 學者 中에는 朝鮮의 廣大가 日本語 ク〿ッ의 原語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그는 專혀 中宗朝人 崔世珍의 訓蒙字會 中에 있는 傀字 發音 광대괴와 儡字 發音 광대ᄅᆡ에 依하얏다. 그러나 이에 承服하기 難하며 우리의 薄倖한 學者 金在喆氏의 著 「朝鮮演劇史」 中에 引用한 郭禿說이 有力할 것이다. 그리고 崔世珍의 訓字에 注意할 것은 同書 儡字註에 「傀儡假面戱俗呼鬼瞼兒」라 하야 傀儡戱와 假面戱하고는 同一한 것 같이 말하얏는데 이 또한 一理가 있고 考究할 點도 있다. 다만 種別的으로 傀儡戱와 假面戱가 同ᅳ하다고 보얏다면 全然 不可한 것으로서 訓蒙字會가 發刊된 嘉靖 六年 四月(中宗 二十二年)보다 約 四十年 前 成俔의 虛白堂集 卷之七의 前出觀儺詩 中에 있는 「小室四旁藏傀儡」를 보든지 又 同書 卷之十四 觀傀儡雜戱詩 「煌煌金帶耀朱衣, 眼結投身條似飛, 走素弄丸多巧術, 穿絲刻木逞神機, 宋家郭禿奚專美, 漢祖平城可解圍, 爲敬朝廷陳褥禮, 皇華眼大定嘲譏」를 보면 (이는 大略 世祖 七年 壬午年 作으로 推想됨) 人形劇을 指함을 알겟다. 다만 「走素弄丸多巧術」까지가 意味 不分明하나 이는 두 가지로 解釋할 수 있는데 其一은 「줄타기」, 其二는 「마리오넷트」(marrionette) 中의 一技術로 볼 것이나 其如何를 不問하고 後句를 보아 人形劇임은 틀님없으며 이것을 民間傳承上으로 보아 只今도 人形劇, 簡單한 假面劇, 땅才操, 줄타기를 總稱하는 民俗藝術을 民間에서 稱하기를 朴僉知노름, 洪同知노름, 꼭두각씨노름, 山頭朴僉知노름, 社堂패노름이라고 함을 보아 斟酌할 수 있다. 그러면 社堂의 그것하고 이 民俗藝術하고의 相異한 點인데 普通의 區別로서는 前者는 賣春을 主로 한 不級의 그것이오 後者는 賣春도 하지만 比較的 規模를 크게 한 技術을 主로 한 團體로서 廣大가 普通 이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崔世珍의 錯誤도 이에서 出發한 것이라고 보겟다. 그리고 보면 日本 傀儡子記에 보이는 傀儡子하고 社堂하고 그 形態 機能에 잇어 같고 人形을 意味한 ク〿ッ는 朝鮮의 傀儡戱에 相當하고 朝鮮서 傀儡雜戱라고 하는 데는 山臺雜劇, 綵棚儺禮 同樣, 다른 노름도 包含됨을 알겟다. 그러나 이는 다 局外者의 認識 不足에 因한 錯誤요 그 自體에는 儼然한 區別이 存在하였을 것이다.
  13. 科場 問題에 關해서는 「季刊 人形芝居」(第四號 京都) 所收 拙稿 「朴僉知劇に對する數三考察」 參照. 科場을 幕, 場, 景 等으로 譯하나 다 穩當치 못하며 朝鮮民俗劇의 科場은 一種 獨特한 것이다.
  14. 鳳凰吟은 李期 世宗 때 歌詞를 改撰해서 廟廷의 正樂으로 한 것인데 世祖 代에 이르러 改題하야 合奏樂으로 만든 것이며 그 關係는 左表와 如함.
    曲名(管分) 俗名 稱號 曲數 曲名(絃分) 摘要 備考
    鳳凰吟 井邑 壽齊天, 昇萬平歲, 壽廷長, 表正萬方의 繼續
    壽齊天 井邑 올녀부는 井邑
    動動 井邑 細歌樂(세가락)井邑
    昇平萬歲之曲 與民樂 五雲開端朝
    壽廷長之曲 尾還入 賀聖朝 尾還入(미도드리)
    表正萬方之曲 靈山會相 重光之曲 管樂靈山會相 靈山會相管分에는 上靈山, 中靈山, 細靈山, 加樂除只, 三絃還入(上絃), 念佛還入, 打令, 軍樂의 八曲의 組合曲이며, 絃分은 俗間의 「줄풍류」로 三絃還入 及 念佛還入之 間에 下絃이 入하야 九曲의 組合曲이 된다.
    長春不老之曲 步虛子 黃河淸之曲
    北殿
    眞勺
  15. 處容說話의 外에 「三國遺事, 紀異 卷一, 桃花女, 鼻荆郞條」 叅照.
  16. 邪는 惡神 中에도 奸惡 卑賤 淫兇한 것으로 이를 退讓하는 意味의 字句로서는 僻邪, 辟邪, 闢邪 等을 씀.
  17. 安廓 「山臺戱と製容舞と儺」(朝鮮, 昭和 七年 二月號)
  18. 高麗史 禮志六(季冬大儺儀)에 「靖宗 六年 十一月 戊寅詔日, (前略) 歲終儺禮, 磔五鷄以驅疫氣, 朕甚痛之, 可貸以他物, 司天臺奏, 瑞祥志云, 季冬之月, 命有司大儺旁磔土牛以送寒氣, 請造黃土牛四頭各長一尺高五寸以代磔鷄從之」, 又 「睿宗 十一年 十二月 己丑大儺, 先是(●●), 宦者分儺爲左右求勝, 王又命親王分主之, 凡倡優雜伎, 以至外官遊妓無不被徵, 遠近全至旌旗亘路, 充斥禁中」이라고 하였다.






현대문주


  1. 서장(西藏)의 ‘하모’극, 몽고의 가면극 기타 태평양 제도의 그것 등 그 유례가 파다하나 일일히 예거하지 아니하며 비교적 상세하게 고찰한 저서에 The Drama of Savage people by L. Havenmayer가 있다. 또 서장의 나계(儺系) 가면극에 관하여는 W. D. Hambly의 저 Tribal Dancing and Social Development 참조
  2. 「朝鮮の人形芝居」원고(인형지거연구학술지―쇼화4년―동경). 「朝鮮の民俗劇」원고(민속학학술지 4-8권호―동경). 「오광대소고」원고(조선민속학술지 1권호―경성). 「朴僉知劇に對する數三考察」원고(계간 인형지거학술지 4권호―경도). 「조선연극」원고(평범사대백과사전학술지 17권호―동경). 「봉산무용가면」원고(동아일보 쇼화 8년 12월). 「남조선가면초부흥기운」원고(동아일보 쇼화 9년 4월). 「沙里院民俗舞踊に就いて」원고(ドルメン학술지 2-9권호―동경). 등 각 졸고 참조
  3. 가나자와 쇼자부로 「吏讀の硏究」(조선휘보, 대정 7년 4월)
  4. 신채호 「조선 고래의 문자와 시가의 변천」(동아일보, 대정 14년 1월)
  5. 아유카이 후사노신 「國文(方言俗字)吏吐·俗證造字·俗音·借訓字」(조선사강좌자 제1호부터 제3호―경성).
  6. 오구라 신페이 「鄕歌及吏讀の硏究」(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기요 제1호)
  7. 귀신 쫓는 의식―나(儺), 난(難), 대나(大儺), 추나(追儺), 구나(驅儺), 구나의(驅儺儀), 나의(儺儀), 나례(儺禮), 구나례(驅儺禮) 등 각양(各樣)을 쓰나, 본고에는 구분을 하지 않음. 또 채붕나의(綵棚儺儀), 채붕나례(彩棚儺禮), 세시나례(歲時儺禮)라는 것이 문헌에 보이고 민간에서는 산대극을 나예(儺藝)라고도 한다. 그런데 문헌에 의식인 정말의 나례와 희화(戱化)한 연극인 나례를 구별하지 아니함이 많고 안확씨 역시 습용하였으므로 필자 또한 불용의(不用意)하게도 재습용한 데가 있을는지 모르나 이는 독자가 추상하면 자해(自解)할 것이다.
  8. 가정선생문집 권지20 12정(丁) 개운포시에 「地勝仙遊密, 雲開世路通, 依稀羅代兩仙翁, 曾見畵圖中, 舞月娑娑白, 簪花爛爛紅, 欲尋遺跡沓, 難窮須喚半帆風」이라고 하였다.
  9. 이재현 익재집 익재난고4 소악부에 「新羅昔日處容翁, 見說來從碧海中, 具齒頹脣歌夜月, 薦肩紫袖舞春風」이라고 함.
  10. 이숭인 도은집에 처용가라고 제(題)하여 「十一月十七日夜, 聽功益新羅處容歌, 聲調悲壯, 令人有感」이라 하고 또 「夜久新羅曲停盃共聽之, 聲音傳舊譜, 氣像想當時, 落日城頭近, 悲風樹梢嚥, 無端懷抱惡, 功益亦何爲」라 함.
  11. 성현허백당시집 권지7 관나시.
  12. 사당은 사당(社黨)·사당(祀黨)·사장(社長) 등으로도 쓰며 평초행려를 하는 예인으로 남사당·여사당의 구별이 있음. 표면은 가면극, 인형극, 속요, 무용, 곡예를 하나 그 이면은 머슴 계급을 상대로 매춘(남자는 계간)을 하는 단체로 그 근원은 상당히 오랜 것 같으며 근대에 와서는 사찰이 이를 이용하게 되어 사노(寺奴)의 관(觀)을 정(呈)하였는데 안성 청룡사 사당 및 남해 화방사 중매구가 다 그 예다. 그래서 이를 인솔하는 거사·모갑(모갑(某甲)이라고 보통 차자한다) 이와 사당 간에는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여 사회학상으로 참고할 만한 점이 많다. 그리고 남사당의 계간에 있어는 인도 지나의 네이(ney)와 흡사하며 전체로 보아서는 평안조(朝) 당시 일본괴뢰자와 같다고 하겠다. 즉 오에나 마사후사(大江匡房)의 「일본괴뢰자기」에 「傀儡子, 無定居無常家, 穹廬氈帳, 逐水草以移徙, 頗類北狄之俗, 男則皆便弓馬, 以狩獵爲事, 或跳雙劍弄七丸, 或舞木人⋯⋯女則爲愁眉, 啼粧折腰步齵慈咲, 施朱傅粉, 倡歌淫樂, 以求妖媚, 父母夫胥不誡, 口亟雖逢行人旅客, 不嫌一宵之佳會, 微璧女之餘, 自獻千金, 繡服錦衣, 金銀鈿医之具, 莫不悉有之不耕一畝田, 不採一技桑, 故不屬縣官, 皆非土民, 自限浪人, 上不知三公, 傍不怡牧宰, 以無課役, 爲一生之樂, 夜則祭百神鼓舞喧嘩, 以祈福助, 東國, 美濃⋯⋯云云」이라고 하여 조선의 사당하고 동일함을 알겠으며 또 그것이 북방 속(俗)하고 유사함을 알겠는데 그 후 일본에는 차어(此語)를 전혀 목우(木偶)에만 사용하여 ク〿ッ라고 발음한다. 그리하여 학자 중에는 조선의 광대가 일본어 ク〿ッ의 원어라고 하는 이도 있는데 그는 전혀 중종조(朝) 사람 최세진의 훈몽자회 중에 있는 괴자(傀字) 발음 광대괴와 뇌자(儡字) 발음 광대ᄅᆡ에 의하였다. 그러나 이에 승복하기 어려우며 우리의 박행(薄倖)한 학자 김재철씨의 저 「조선연극사」 중에 인용한 곽독설이 유력할 것이다. 그리고 최세진의 훈자(訓字)에 주의할 것은 같은 책 뇌자주(註)에 「傀儡假面戱俗呼鬼瞼兒」라 하여 괴뢰희와 가면희하고는 동일한 것 같이 말하였는데 이 또한 일리가 있고 고구할 점도 있다. 다만 종별적으로 괴뢰희와 가면희가 동일하다고 보았다면 전연 불가한 것으로서 훈몽자회가 발행된 가정(嘉靖) 6년 4월(중종 22년)보다 약 40년 전 성현의 허백당집 권지7의 전출관나시 중에 있는 「小室四旁藏傀儡」를 보든지 또한 같은 책 권지14 관괴뢰잡희시 「煌煌金帶耀朱衣, 眼結投身條似飛, 走素弄丸多巧術, 穿絲刻木逞神機, 宋家郭禿奚專美, 漢祖平城可解圍, 爲敬朝廷陳褥禮, 皇華眼大定嘲譏」를 보면 (이는 대략 세조 7년 임오년 작(作)으로 추상됨) 인형극을 가리킴을 알겠다. 다만 「走素弄丸多巧術」까지가 의미 불분명하나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줄타기’, 둘은 ‘마리오넷트’(marrionette) 중의 일기술로 볼 것이나 그 여하를 불문하고 뒤의 구(句)를 보아 인형극임은 틀림없으며 이것을 민간전승상으로 보아 지금도 인형극, 간단한 가면극, 땅재조, 줄타기를 총칭하는 민속예술을 민간에서 칭하기를 박첨지노름, 홍동지노름, 꼭두각씨노름, 산두박첨지노름, 사당패노름이라고 함을 보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사당의 그것하고 이 민속예술하고의 상이한 점인데 보통의 구별로서는 전자는 매춘을 주로 한 불급의 그것이오 후자는 매춘도 하지만 비교적 규모를 크게 한 기술을 주로 한 단체로서 광대가 보통 이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최세진의 착오도 이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보겠다. 그리고 보면 일본 괴뢰자기에 보이는 괴뢰자하고 사당하고 그 형태 기능에 있어 같고 인형을 의미한 ク〿ッ는 조선의 괴뢰희에 상당하고 조선서 괴뢰잡희라고 하는 데는 산대잡극, 채붕나례 동양(同樣), 다른 노름도 포함됨을 알겠다. 그러나 이는 다 국외자(局外者)의 인식 부족에 인한 착오요 그 자체에는 엄연한 구별이 존재하였을 것이다.
  13. 과장 문제에 관해서는 「계간 인형지거」(제4호 경도) 소수(所收) 졸고 「朴僉知劇に對する數三考察」 참조. 과장을 막, 장, 경 등으로 번역하나 다 온당치 못하며 조선민속극의 과장은 일종 독특한 것이다.
  14. 봉황음은 이조 세종 때 가사를 개찬(改撰)해서 묘정의 정악으로 한 것인데 세조 대에 이르러 개제하여 합주악으로 만든 것이며 그 관계는 다음의 표와 같음.
    곡명(관분) 속명 칭호 곡수 곡명(현분) 적요 비고
    봉황음 정읍 1 수제천, 승만평세, 수정장, 표정만방의 계속
    수제천 정읍 3 올려 부르는 정읍
    동동 정읍 2 細歌樂(세가락)정읍
    승평만세지곡 여민락 7 오운개선조
    수정장지곡 미환입 7 하성조 미환입(미도드리)
    표정만방지곡 영산회상 8 중광지곡 관악영산회상 영산회상관분에는 상영산, 중영산, 세영산, 가락덜기, 삼현환입(상현), 염불환입, 타령, 군악의 8곡의 조합곡이며, 현분은 속간의 「줄풍류」로 삼현환입 및 염불환입지 간에 하현이 입하여 9곡의 조합곡이 된다.
    장춘불로지곡 보허자 7 황하청지곡
    북전 1
    진작 4
  15. 처용설화의 외에 「삼국유사, 기이 권1, 도화녀, 비형랑조」 참조.
  16. 사(邪)는 악신 중에도 간악 비천 음흉한 것으로 이를 퇴양하는 의미의 자구로서는 벽사(僻邪), 벽사(辟邪), 벽사(闢邪) 등을 씀.
  17. 안확 「山臺戱と製容舞と儺」(조선, 쇼화 7년 2월호)
  18. 고려사 예지6(계동대나의)에 「靖宗 六年 十一月 戊寅詔日, (前略) 歲終儺禮, 磔五鷄以驅疫氣, 朕甚痛之, 可貸以他物, 司天臺奏, 瑞祥志云, 季冬之月, 命有司大儺旁磔土牛以送寒氣, 請造黃土牛四頭各長一尺高五寸以代磔鷄從之」, 또는 「睿宗 十一年 十二月 己丑大儺, 先是(●●), 宦者分儺爲左右求勝, 王又命親王分主之, 凡倡優雜伎, 以至外官遊妓無不被徵, 遠近全至旌旗亘路, 充斥禁中」이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