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

North Korea Humanities

이지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8일 (월) 11:26 판 (본문1-1: (1)양전법)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李朝田稅制度의 成立過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4 발행기관
저자 박시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96쪽 종료쪽 148쪽 전체쪽 53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이 소편의 목적은, 이조가 전 조(朝) 고려의 퇴폐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한 개의 새로운 전제(田制)를 확립한 제공작 중, 특히 전세제도에 관한 것에 대하여, 그 확립의 전말과 제도의 내용을 구명하는 데 있다. 대개 이조의 전세제도는 태조가 자신의 권력으로써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한 과전법에 의하여 잠정적인 편법을 발견하였고, 그 후 태종 조(朝)의 다소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세종 조(朝)에 이르러 결정적인 대변혁을 거쳐 가지고, 세조 이후 경국대전에 등재되어, 그 이후 길이 만세불역지법(萬世不易之法)으로 시행하려던 것이니 이 소편의 당면적인 토구(討究)의 대상은 즉 경국대전 소재 전세관계 제조문의 내면적인 해석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96-1이 小篇의 目的은, 李朝가 前朝 高麗의 頹廢된 土地制度를 改革하야 한 箇의 새로운 田制를 確立한 諸工作中, 特히 田稅制度에 關한 것에 對하야, 그 確立의 顚末과 制度의 內容을 究明하는 데 있다. 大概 李朝의 田稅制度는 太祖가 自身의 權力으로써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한 科田法에 依하야 暫定的인 便法을 發見하얐고, 그 後 太宗朝의 多少의 修正을 거처, 마침내 世宗朝에 이르러 決定的인 大變革을 거처 가지고, 世祖 以後 經國大典에 登載되여, 厥後 기리 萬世不易之法으로 施行하랴든 것이니 이 小篇의 當面的인 討究의 對象은 即 經國大典 所載 田稅關係 諸條文의 內面的인 解釋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


본문1: 1.공법 이전의 수세법


이조 최초의 전조에 관한 법제는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된 소위 ‘과전법’ 중의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가 주문이 되어 있다.
쪽수▶P96-2李朝 最初의 田租에 關한 法制는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된 所謂「科田法」 中의 次揭 一條가 主文이 되어 있다.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고려사 권78 식화지

쪽수▶P97-1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위의 조는 세종 조(朝)의 공법이 시행되기까지 유효하는 법이니, 이에 대하여 차례대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쪽수▶P97-2右一條는 世宗朝의 貢法이 施行되기까지 有效하는 法이니, 이에 對하야 逐次 解釋을 試코자 한다.
위의 조의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잠깐 해혹을 하여 둘 것이 있다. 즉 과전법 중, 위에 든 전조(○○)에 관한 규정에 계속하여,
쪽수▶P97-3右條의 解釋에 드러가기 前에 여기서 暫間 解惑을 하야 둘 것이 있다.即 科田法 中, 右揭 田租(○○)에 關한 規定에 繼續하여,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쪽수▶P97-4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이라는 조가 있는데, 이것은 전세(○○)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면 조(租)와 세(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국가가 직접 수납하는 공과로 1결에 30두씩 마련이요, 이에 대한 ()는 능침·창고·궁사·공해 소속의 일반 공전과 공신전이라는 특별한 사전과를 제외한 일절의 전 즉 과전·직전·별사전·군전 등의 모든 사전과, 향·진·역·관 등의 모든 외역전과의 소유자(점유자)가 그들에게 사급된 수화전 혹은 경작전의 소득 중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바, 감축된(○○○) ()로 1결에 2두씩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 공전은 조 이외에 다시 세를 바치는 것은 없다. 국가에서 조를 수납하는 전과 세를 수납하는 전은 최초부터 구별되어 있다. 환언하면 조는 일반 전에 대한 본래의 공과요, 세는 특정한 사인에게 수조권 또는 경작권을 부여한 전에 대하여 국가가 전연 이를 방임하지 않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감축된 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초에는 조와 세의 이름을 명확히 구분하였으나 후에는 점점 ‘조’자를 사용하지 않고 종래의 조도 ‘세’라고 칭하게 되었다. 물론 경국대전 등에는 ‘조’자를 일절 사용하지 안 하였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인 이상 두 용어의 통일은 조금도 불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편에 있어 ‘조’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의미의 용어니 독자는 이를 살피기 바란다.
쪽수▶P97-5이라는 一條가 있는데, 이것은 田稅(○○)에 關한 規定이다. 그러면 租와 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國家가 直接 收納하는 公課로 一結에 三十斗씩 마련이요, 此에 對한 ()는 陵寢·倉庫·宮司·公廨所屬의 一般 公田과 功臣田이라는 特別한 私田과를 除外한 一切의 田 即 科田·職田·別賜田·軍田 等의 諸私田과, 鄕·津·驛·舘 等의 諸外役田과의 所有者(占有者)가 그들에게 賜給된 收和田 或은 耕作田의 所得 中에서 國家에 納付하는 바, 減縮된(○○○) ()로 一結에 二 斗式 마련이다. 따라서 一般公田은 租以 外에 다시 稅를 바치는 것은 없다. 國家에서 租를 收納하는 田과 稅를 收納하는 田은 最初부터 區別되여 있다. 換言하면 租는 一般 田에 對한 本來의 公課요, 稅는 特定한 私人에게 收租權 又는 耕作權을 賦與한 田에 對하야 國家가 全然 此를 放任하지 않고 그들의 收入의 一部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減縮된 租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最初에는 租와 稅의 名을 明確히 區分하얐으나 後에는 漸々 「租」字를 使用하지 않고 從來의 租도 「稅」라고 稱하게 되였다. 勿論 經國大典 等에는「租」字를 一切 使用하지 안 하였다. 兩者는 本質的으로 何等의 差異가 없는 것인 以上 두 用語의 統一은 조금도 不可가 없었던 것이다. 이 小篇에 있어 「稅」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意味의 用語니 讀者는 이를 諒하기 바란다.


































본문1-1: (1)양전법


과전법 조문에 1결 30두라 하였으니, 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쪽수▶P97-6科田法 條文에 一結 三十斗라 하얐으니, 먼저 「結」로 따지는 量田法을 說明할 必要가 있다.
①양전척⋯⋯양전(전지 측량)의 기초가 되는 양전척(○○○)의 제도는 고려 조(朝)에서 이조로 그냥 인계된 것인데 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에
쪽수▶P97-7①量田尺⋯⋯量田(田地測量)의 基礎가 되는 量田尺(○○○)의 制▶P98-1度는 高麗朝에서 李朝로 그냥 引繼된 것인데 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에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쪽수▶P98-2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이라 하고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는
쪽수▶P98-3이라 하고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는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쪽수▶P98-4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일절의 전은 위선 그 비척(肥瘠)의 차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등급에 구별된다. 이리하여 이 3종전을 측량하는 양전척은 각각 다르다. 3종 양전척을 결정한 최초의 표준은 정당한 농부의 2지(생각건대 제2지와 제3지였을 것이다)를 밀착하여 그 횡격(橫隔)의 선을 좇아 이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전장을 상전척(○○○) 1척으로 하고 같은 법으로 2지를 5도, 3지(생각건대 제2 제3 제4지였을 것이다)를 5도 거듭하여 그 전장을 가지고 중전척(○○○) 1척으로 하고 3지를 10도 거듭하여 하전척(○○○) 1척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3종 척장의 비는 대강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쪽수▶P98-5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一切의 田은 위선 그 肥瘠의 差異에 依하야 上中下 三等級에 區別된다. 이리하야 이 三種田을 測量하는 量田尺은 各々 다르다. 三種 量田尺을 決定한 最初의 標準은 正常한 農夫의 二指(생각컨대 第二指와 第三指이었을 것이다)를 密着하야 그 橫隔의 線을 쫓아 此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全長을 上田尺(○○○) 一尺으로 하고 同法으로 二指를 五度, 三指(생각컨댄 第二 第三 第四指이었을 것이다)를 五度 거듭하야 그 全長을 가지고 中田尺(○○○) 一尺으로 하고 三指를 十度 거듭하야 下田尺(○○○) 一尺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三種尺長의 比는 大綱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②결부제⋯⋯상 중 하 3종전의 각 지적법은 다음과 같다. 무릇 지적의 단위를 ()이라 칭하고 결의 100분의 1을 ()라 하고 부의 10분의 1을 ()이라 하고 속의 10분의 1을 ()라 한다. 이 모든 등수법은 거의 고려 조(朝) 이전부터의 원칙인 모양이다. 또 고려 조(朝)의 양전법은 문종 23년의 제정에 의하여 양전척(○○○) 대척을 장1보(○○)라 하고 33보 4방을 지적 1결(○○)로 정하였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 경리조. 그런데 실제의 양전에 있어서는 고려말의 현제(現制)로서는 3보 3척 4방을 가지고 1부로 하고 있었다. 이 제(制)에 의하면 1부는 12·25평방보 3.5(보)×2.5(보)=12.25평방보가 되어 1결 1,089평방보 33(법)×33(보)=1089평방법의 100분의 1보다 넓게 된다. 이 실지 측량상의 오차는 아마 문종의 결법 제정 당시부터 그랬을 것인데 산법의 미발달에서 나온 착오인가 한다. 공양왕 원년에 장차 대두할 신 정권에 의하여 전반적인 양전이 실행되었는데 그때도 물론 이 3보3척 4방위 1부의 방법에 의거하여 이조로 넘어 온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 5년에 다시 전국적 양전을 할 때에 이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하여, 1부의 지적을 축소시켜 3보1척8촌(3·3보)4방으로 하였다. 이에 의하여 1부는 10·89평방보 3.3(보)×3.3(보)=10,89평방보가 되어 1결의 100분의 1에 해당하게 되었으나 지방에 종래 실제(○○)행하여져(○○○○) 오던(○○) 1결(○○)의 면적(1부12·25평방보의 100배 1,235평방보)은 상당한 축소를 보게 되어 인민에 대하여는 결국 그만한 증세가 되어 버린 셈이다(1결당 세액은 부동하는 고로). 이에 세종 10년 10월에 이르러 전세 경멸(輕滅)의 의미에서 태종 5년 이래의 신제(新制)를 폐하고 다시 1부는 전과 같이 3보3척 4방으로 하고, 1결을 넓혀 35보 4방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1결은 1,235평방보 35(보)×35(보)=1225평방보가 되어 다시 1부의 100배에 해당하게 되었다세종실록 10년 10월 신사조 참조.
쪽수▶P98-6②結負制⋯⋯上中下 三種田의 各 地積法은 다음과 같다. 무릇 地積의 單位를 ()이라 稱하고 結의 百分之一을 ()라 하고 負의 十分之一을 ()이라 하고 束의 十分之一을 ()라 한다. 이 諸等數法은 거의 高麗朝 以前부터의 原則인 모양이다. 또 高麗朝의 量田法은 文宗 二十三年의 制定에 依하야 量田尺(○○○) 六尺을 長一步(○○)라 하고 三十三步 四方을 地積 一結(○○)로 定하얐다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田制經理條. 그런데 實際의 量田에 있어서는 高麗末의 現制로서는 三步三尺 四方을 가지고 一負로 하고 있었다. 此制에 依하면 一負는 一二·二五平方步 3.5(步)×2.5(步)=12.25平方步가 되여 一結 一, 〇八九平方步 33(法)×33(步)=1089平方法의 百分之一보다 넓게 된다. 이 實地 測量 上의 誤差는 아마 文宗의 結法 制定 當時부터 그랬을 것인데 算法의 未發達에서 나온 錯誤인가 한다. 恭讓王 元年에 將次 擡頭할 新政權에 依하야 全般的인 量田이 實行되였는데 그때도 勿論 이 三步三尺 四方爲 一負의 方法에 依據하야 李朝로 넘어 온 것이다. 그렇다가 太宗 五年에 다시 全國的 量▶P99-1田을 할 때에 이 不合理를 是正하기 爲하야, 一負의 地積을 縮少시켜 三步一尺八寸(三·三步)四方으로 하얐다. 이에 依하야 一負는 1〇·八九平方步 3.3(步)×3.3(步)=10,89平方步가 되여 一結의 百分之一에 該當하게 되였으나 他方에 從來 實際(○○)行하야저(○○○○) 오든(○○) 一結(○○)의 面積(一負一二·二五平方步의 百倍 一,二三五平方步)은 相當한 縮少를 보게 되여 人民에 對하야는 結局 그만한 增稅가 되여 버린 셈이다(一結當 稅額은 不動하는 故로). 이에 世宗 十年 十月에 이르러 田稅輕滅의 意味에서 太宗 五年 以來의 新制를 廢하고 다시 一負는 前과 같이 三步三尺 四方으로 하고, 一結을 넓히어 三十五步 四方으로 하았다. 이리하야 一結은 一,二三五平方步 35(步)×35(步)=1225平方步가 되여 다시 一負의 百倍에 該當하게 되였다世宗實錄 十年 十月 辛巳條 參照.
이 최후의 방법은 세종의 공법 제정 때까지 지속되어 온 것인데 이 법에 의한 상중하(○○○) 3종전(○○○) 각1결의(○○○○) 실적(○○)은 두루 척제에 의한 지나의 경묘법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세종실록 26년 6월 갑신조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
쪽수▶P99-2이 最後의 方法은 世宗의 貢法 制定 때까지 持續되여 온 것인데 此法에 依한 上中下(○○○) 三種田(○○○) 各一結의(○○○○) 實積(○○)은 周尺制에 依한 支那의 頃畝法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世宗實錄 二十六年 六月 甲申條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
전별/경묘법 경묘법에 의한 평방척(주척)수 동묘수 면적비 비고: 3등전의 면적비 16:25:36은 3등전척의 장의 비 4:5:6의 자승비에 해당하다.
상전1결 152,568평방척 25·43묘 16
중전1결 239,414평방척 39·90묘 25
하전1결 345,744평방척 57·62묘 36
쪽수▶P99-3
田別/頃畝法 頃畝法에 의한 平方尺(周尺)數 同畝數 面積比 備考: 三等田의 面積比 16:25:36은 三等田尺의 長의 比 4:5:6의 自乘比에 該當하다.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尺 二五·四三畝 一六
中田一結 二三九,四一四平方尺 三九·九〇畝 二五
下田一結 三四五,七四四平方尺 五七·六二畝 三六

비고 1. 경묘법에서는 주척 방5척위1보 240보위1묘 100묘위1경이다. 따라서 1묘는 6천평방주척이다세종실록 25년 11월 갑자조.
2. 여기 결부를 경묘로 환산할 때에 사용한 주척(○○)은 그 실장(實長)이 곡척 6촌6분에 해당하니(유형원 반계수록 권2 소재 세종 조(朝) 소정 주척도후세복원자지 및 증보문헌비고 권91 악고도량형조 참조), 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전 각 1결의 실적을 척관법 도량형의 평수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상전1결 1,846평강 1,844평
중전1결 2,897평약 2,897평
하전1결 4,184평약 4,182평
(하단의 숫자는 이치로 와다(和田一郎) 박사 저 「조선의 토지제도 및 지세제도 조사보고서」 대정 9년 간 중의 숫자 같은 책 695쪽)
3. 또 상 중 하 3종전의 양전척에 의한 면적과 (3종전이 다 각기 양전척으로 6척위1보 35보 평방위1결, 즉 1결은 210양전척평방 즉 4만4천1백평방척) 주척에 의한 면적(상전은 152,568평방주척 등)과의 관계에 의하여 상 중 하 3종 양전척의 실장을 곡척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다.
상전척 곡1·228척(0.66곡척×√152568(주척)÷210(양전척)=1.2276곡척etc.)
중전척 곡1·537척
하전척 곡1·848척
이에 3종척의 실장은 2지계10(지폭) 운운의 연원에 부절을 합하듯이 맞는다.
4. 수지척의 성질을 최초에 생각해 본 이는 정다산인데 그는 경세유표(권9 결부고변)에서 수지척을 규정하여 “⋯⋯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라 하였으니 즉 ‘지(指)’라는 것을 ‘뺌’으로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지를 뺌으로 해석한다면 우리가 본항 모두에 게출(揭出)한바 수지척에 관한 두 가지 자료 중 후자 즉 용비어천가의 20지·25지·30지 설을 설명할 수가 있으나 전자 즉 세종실록에 보이는 하연(河演) 상언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 설을 설명할 수가 없을 뿐더러(만일 지(指)를 뺌이라면 2지계10 등의 구차한 표현법을 취할 리가 없다) 3종척의 실장이 너무 길어져서 상전1결 152,568평방주척 등의 실적에 도저히 부합하지 아니하여 그 부당한 것이 적확한즉, 이는 그의 천려일실에 속하는 것이다. 다음에 수지척의 실장을 실제로 계산한 사람은 가와이 히로타미(河合弘民) 박사인데(동문관판, 경제대사서 결부조 참조, 대정 3년 간), 그는 그의 계산 경로를 자세히 밝히지 아니하였으나 여하간에 용비어천가에 실려 있는 상 중 하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와 결부 작성법에 의하여 계산하였다는 것인데 그 결과 1지장곡척1촌3분여(○○○○○○○○○) 즉 1등전척1척장 2척6촌여를 얻었다. 그러나 용비어천가의 자료란 다른 것이 아니니, 3등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는 우리가 앞에서 사용한 것이오 결부 작성법이라는 것은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로 서술되어 있는 것이니 실적 44척1촌위속이라는 말은 실적 441척위1부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실적 4만4천1백척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210척평방위1결(√44100=210) 즉 6척위1보, 35보평방위1결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당연히 우리가 얻은 결과와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박사도 주척장은 곡6촌6분임을 알고 있다(앞서 든 사서 토지제도조 참조). 우리의 계산(○○)에 틀림이 없는 한 박사가 얻은 결과는 오류이다. 그리고 박사는 1지(○○)장곡척1촌3분여를 얻고는 ‘1지’의 처치에 곤란하여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곡1촌3분여에는 당치 않다), “1지란 손가락 두 개의 폭이리라”고 부설(附說)하였으나 거북한 설명이다. 다음 이치로 와다 박사는 고려 결부를 논할 즈음에, 상 중 하 3종전의 평수만 산출하고 (전출. 방법은 3종전의 주척에 의한 면적수에 의하여), 3종수지척의 설명은 불가해라 하여 포기하였다(앞서 든 책 696쪽). 가와이 히로타미 박사의 논문이 계산의 경과를 밝히지 않았으므로 성강고농(盛岡高農) 카가미 야수노수케(鏡保之助) 교수가 다시 수지 척장의 계산을 시도하였는데(성강고등농림학교 창립 25주년 기념논총. 소화 3년 간. 「시대를 달리 한 결부제도 간의 맥락.」), 교수는 계산의 자료를 전혀 문헌비고에 시뢰(是賴)한 지라 같은 책 권148에 공교롭게도 어로지류를 범하여 있는바 세종 25년 찬성 하연 상언 중에 보이는 고려 결부제에 관한 숫자를 무비판하게 써서 계산을 하여(설상가상으로 씨의 계산법이 또한 황당무계하다) 결국 1지장 곡1촌2분7리1수 즉 1등척장2척5촌4분2리를 얻었다. 문헌비고만을 시뢰하였다 하지만 같은 책 중에는 앞서 든 어로차착(魚魯差錯)의 하연 상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역시 정당한 자료도 있으니 그것은 이조 숙종 35년 평천군 신완의 상소에 보이는 숫자로(같은 책 권142), 역시 용비어천가와 같이 “實績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의 설명법이다. 카가미씨도 한 번은 이 숫자를 들어서 계산을 하여 1지장곡5분9갑5수 즉 상전척장곡1척 2촌9분을 얻었으나 (사실은 우리가 얻은 결과와 당연히 부합하여야 할 것이지만 거기도 계산의 차착이 있어 근사하게밖에 못 되었다.) 박사 가와이 히로타미씨의 1지장1촌3분여에는 대단히 거리가 먼 지라 주장낭패(周章狼狽)하여 평천군소 중의 숫자를 오류라 하여 버리고, 앞서 든 것과 같이 어로차착의 하연 상언 중의 숫자를 취하여 계산한 결과, 우연히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으니 이것은 가와이 박사의 1지에 가까운 지라, 대희하고 다음엔 일보를 나아가 가와이 박사와 자기와의 상이(相異)는 박사의 계산이 부정한 탓이라고 정해 버렸다. 또, 1지장곡1촌2분7리1수를 얻고는 그 결과를 고려 결부법의 다른 요소에 유추하여 새로운 억설을 창조하였으나 본론에는 그다지 긴요하지 않으니 다급(多及)하지 않는다. 하여간에 수지척의 고구가 종래 이상과 같으므로 그 진의를 몰각할까 저어하여 다소 장황한 서술을 시도한 바이다.

쪽수▶P99-4

備考 一, 頃畝法에서는 周尺 方五尺 爲一步 二百四十步爲一畝 百畝爲一頃이다. 따라서 一畝는 六千平方周尺이다世宗實錄 二十五年 十一月 甲子條.
二, 여기 結負를 頃畝로 換算할 때에 使用한 周尺(○○)은 그 實長이 曲尺 六寸六分에 該當하니(柳馨遠磻溪隨錄 卷二 所載 世宗朝所定 周尺圖後世復原者也 及 增補文獻備考 卷九十一 樂考度量衡條 參照), 이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田 各 一結의 實積을 尺貫法 度量衡의 坪數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
上田一結 一, 八四六坪强 一, 八四四坪
中田一結 二, 八九七坪弱 二, 八九七坪▶P100-1
下田一結 四, 一八四坪弱 四, 一八二坪
(下段의 數字는 和田一郎博士 著 「朝鮮의 土地制度 及 地稅制度 調査報告書」 大正 九年 刊中의 數字 同書 六九五頁)
三, 또 上中下 三種田의 量田尺에 依한 面積과 (三種田이 다 各其 量田尺으로 六尺爲一步 三十五步 平方爲一結, 即 一結은 二百十量田尺平方 即 四萬四千一百平方尺) 周尺에 依한 面積(上田은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과의 關係에 依하야 上中下 三種量田尺의 實長을 曲尺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다.
上田尺 曲一·二二八尺(0.66曲尺×√152568(周尺)÷210(量田尺)=1.2276曲尺etc.)
中田尺 曲一·五三七尺
下田尺 曲一·八四八尺
이에 三種尺의 實長은 二指計十(指幅) 云々의 淵源에 符節을 合하듯이 맞는다.
四, 手指尺의 性質을 最初에 생각해 본 이는 丁茶山인데 그는 經世遺表(卷九 結負考辨)에서 手指尺을 規定하야 「⋯⋯此所云二十指三十指者 蓋以拇指與長指 搩而度之 名之曰一指也」라 하얐으니 即 「指」라는 것을 「뺌」으로 解釋한 것이다. 그러나 指를 뺌으로 解釋한다면 吾人이 本項 冒頭에 揭出한바 手指尺에 關한 두 가지 資料 中 後者 即 龍飛御天歌의 二十指·二十五指·三十指 說을 說明할 수가 있으나 前者 即 世宗實錄에 보이는 河演 上言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 說을 說明할 수가 없을 뿐더러(萬一 指를 뺌이라면 二指計十 等의 苟且한 表現法을 取할 理가 없다) 三種尺의 實長이 너머 기러저서 上田一結 一五二,五六八平方周尺 等의 實積에 到底히 符合치 아니하야 그 不當한 것이 的確한즉, 이는 그의 千慮一失에 屬하는 것이다. 다음에 手指尺의 實長을 實際로 計算한 사람은 河合弘民 博士인데 (同文館判, 經濟大辭書 結負條 參照, 大正 三年 刊), 그는 그의 計算 經路를 仔細이 밝히지 아니하얐으나 何如間에 龍飛御天歌에 실려 있는 上中下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와 結負▶P101-1 作成法에 依하야 計算하였다는 것인데 그 結果 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 即 一等田尺一尺長 二尺六寸餘를 得하얐다. 그러나 龍飛御天歌의 資料란 딴 것이 아니니, 三等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는 吾人이 前揭 使用한 것이오 結負 作成法이라는 것은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而皆以 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十束爲負, 百負爲結.」로 叙述되여 있는 것이니 實積 四十四尺一寸爲束이라는 말은 實積 四百四十一尺爲一負라는 것과 같은 말이오, 또 이것은 實積 四萬四千一百尺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며, 또 이것은 二百十尺平方爲一結(√44100=210) 即 六尺爲一步, 三十五步平方爲一結이라는 것과 같은 말로(6×35=210) 當然이 吾人의 得한 結果와 符合하여야 할 것이다. 勿論 博士도 周尺長은 曲六寸六分임을 알고 있다(前揭 辭書 土地制度條 參照). 吾人의 計算(○○)에 틀림이 없는 限 博士의 得한 結果는 誤謬이다. 그리고 博士는 一指(○○)長曲尺一寸三分餘를 得하고는 「一指」의 處置에 困難하야 (손가락 하나 가지고는 기리로 놓으나 가로 놓으나 꼬부려 놓으나 도무지 曲一寸三分餘에는 當치 않다), 「一指란 손가락 두 개의 幅이리라」고 附說하였으나 거북한 說明이다. 다음 和田一郎 博士는 高麗 結負를 論할 지음에, 上中下三種田의 坪數만 算出하고 (前出. 方法은 三種田의 周尺에 依한 面積數에 依하야), 三種手指尺의 說明은 不可解라 하야 抛棄하였다(前揭 書 六九六頁). 河合 博士의 論文이 計算의 經過를 밝히지 안 하였음으로 盛岡高農 鏡保之助敎授가 다시 手指尺長의 計算을 試하였는데(盛岡高等農林學校 創立 二十五周年 記念論叢. 昭和 三年 刊. 「時代를 달리 한 結負制度 間의 脈絡.」), 敎授는 計算의 資料를 專혀 文獻 備考에 是賴한 지라 同書 卷百四十八에 工巧롭게도 魚魯之謬를 犯하야 있는바 世宗 二十五年 賛成 河演 上言 中에 보이는 高麗 結負制에 關한 數字를 無批判하게 써서 計算을 하야(雪上加霜으로 氏의 計算法이 亦 荒唐無稽하다) 結局 一指長 曲一寸二分七厘一毛 即 一等▶P102-1尺長二尺五寸四分二厘를 得하였다. 文獻 備考만을 是賴하였다 하지마는 同書 中에는 前記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만 있는 것이 아니라, 亦是 正當한 資料도 있으니 그것은 李朝 肅宗 三十五年 平川君 申琓의 上疏에 보이는 數字로(同書 卷百四十二), 亦是 龍飛御天歌와 같이 「實積四十四尺一寸爲束 云々」의 說明法이다. 鏡氏도 한 번은 이 數字를 들어서 計算을 하야 一指長曲五分九厘五毛 即 上田尺長曲一尺 二寸九分을 得하였으나 (事實은 吾人의 得한 結果와 當然이 符合하여야 할 것이지마는 거기도 計算의 差錯이 있어 近似하게밖에 못 되였다.) 博士 河合弘氏의 一指長一寸三分餘에는 大端이 距離가 먼 지라 周章狼狽하야 平川君疏 中의 數字를 誤謬라 하야 버리고, 前記와 같이 魚魯差錯의 河演 上言 中의 數字를 取하야 計算한 結果, 偶然이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니 이것은 河合 博士의 一指에 가까운 지라, 大喜하고 다음엔 一步를 進하여 河合 博士와 自己와의 相異는 博士의 計算이 不精한 타시라고 定해 버렸다. 또, 一指長曲一寸二分七厘一毛를 得하고는 그 結果를 高麗 結負法의 他要素에 類推하야 새로운 臆說을 創造하였으나 本論에는 그다지 緊要치 안 하니 多及치 안 한다. 何如間에 手指尺의 考究가 從來 以上과 같음으로 그 眞意을 沒却할가 저어하야 多少 長皇한 叙述을 試한 바이다.

그런데 상 중 하 3종전의 실제 분포 상황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경상·전라도에서는 상전은 1000결 중에 12결 중 전은 100결 중에 12결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또 경상·전라 이외의 도에는 상전은 절무하고 1000결 중에 12결의 중전이 있을 뿐이오 나머지는 다 하전이었다. 즉 대범하게 말하자면 전국 전은 1결57묘의 획일적인 제도에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
쪽수▶P102-2그런데 上中下 三種田의 實際 分布 狀況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慶尙·全羅道에서는 上田은 千結 中에 一二結 中 田은 百結 中에 一二結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었다. 또 慶尙·全羅 以外의 道에는 上田은 絕無하고 千結 中에 一二結의 中田이 있을 뿐이오 남어지는 다 下田이였다. 即 大凡하게 말하자면 全國 田은 一結五十七畝의 劃一的인 制度에 依存하고 있었든 것이다.(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
다음 전분 3등법의 시비를 잠깐 검토하건대 대관절 3종전의 면적비는 16:25:36이요 그것들에서 동액의 조세를 (1결30두) 징수한다 하니 그렇다면 차등 3종전 동일면적의 생산량의 비는 1등전:2등전=25:16과, 2등전:3등전=26:25와의 연비 67:42:30(이 숫자는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세종이 신양전법을 설정하라고 3종전법의 불합리를 논할 때에 든 숫자인데 그것은 당시 1결세액 30두가 가리키는 수 30을 편의상 하전에 배당하고 작성한 숫자로 개산(槪算)이다.)이 되어야 처음으로 수세의 공평을 기할 수가 있을 것이다. 과연 3종양전척의 2지계10 2지계5 3지계5 3지계10과 3종전 동일면적의 수량과의 사이에 이러한 우연적인 신비적인 관계가 존재할 수가 있었을까. 전연 생각지 못할 일이다. 실로 3종척의 결정, 따라서 또 그 평방으로 되는 지적(地積)의 결정은 가장 원시적인 자연발생적인 수 관념의 기초 위에 선 것이었다.
쪽수▶P102-3다음 田分 三等法의 是非를 暫間 檢討하건댄 大關切 三種田의 面積比는 16:25:36이오 그것들에서 同額의 租稅를 (一結三十斗) 徵收한다 하니 그렇면 此等 三種田 同一面積의 生產量의 比는 一等田:二等田=25:16과, 二等田:三等田=26:25와의 連比 67:42:30(이 數字▶P103-1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世宗이 新量田法을 設定하라고 三種田法의 不合理를 論할 때에 든 數字인데 그것은 當時 一結稅額 三十斗가 가르키는 數 三十을 便宜上 下田에 配當하고 作成한 數字로 槪算이다.)이 되여야 처음으로 收稅의 公平을 期할 수가 있을 것이다. 果然 三種量田尺의 二指計十 二指計五 三指計五 三指計十과 三種田 同一面積의 收量과의 사이에 이러한 偶然的인 神秘的인 關係가 存在할 수가 있었을가. 全然 생각지 못할 일이다. 實로 三種尺의 決定, 따라서 또 그 平方으로 되는 地積의 決定은 가장 原始的인 自然發生的인 數 觀念의 基礎 우에 선 것이였다.





























본문1-2: (2)수세액


@
@


































본문2: 2.공법 시행기


@
@







































본문2-1: (1)세종 12년의 공법 시문


@
@


































본문2-2: (2)세종 18년·19년 간의 공법 논의


@
@


































본문2-3: (3)세종 20년에서 25년까지의 시험


@
@


































본문3: 3.공법 정착


@
@














































본문3-1: (1)세종 25년 7월부터 익 26년 6월까지―공법의 수정


@
@


































본문3-2: (2)세종 26년 6월부터 11월까지―공법의 완성


@
@


































본문4: 4.공법 정착 이후의 제문제


@
@














































본문4-1: (1)제위전에 관한 문제


@
@


































본문4-2: (2)신공법의 적용


@
@


































본문4-3: (3)연분등제


@
@


































본문4-4: (4)감면지제


@
@


































본문5: 5.공법 개관


@
@














































본문6: 6.공법 여론


@
@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