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화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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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7일 (일) 13:25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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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화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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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高麗畵跡 對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3호 발행기관 震檀學會
저자 고유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50900
시작쪽 109쪽 종료쪽 131쪽 전체쪽 23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일반으로 조선 문화 방면이 다 그러하지만 미술 공예품에 있어서도 문헌 내지 유적이 희귀한 중 특히 상고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무괴(無怪)한 편이나 근근 오백년 전 내지 천 년 전 간의 고려의 별적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기괴를 지나 처 마하 불가사의의 일이라 할 만하다. 논자 있어 그 이유를 설명하여 가로되 혹은 병화부식(兵禍不息)을 거증하고 혹은 예도에 대한 일반의 무교 무관심을 부회하나 전론은 오히려 사실에 근사하지만 후론은 일단의 검토를 경하여야 할 것이 위선 필자가 당장에 문제하고 있는 고려의 예도에 대한 애호가 범론상식으로써 의할 바 아니어서 단간 척소 산견되는 기록에서나마 일대 호화판을 그려낼 수 있으니, 여초 이래 사사건축의 장엄, 현고 간의 팔만대장경과 일반 서적의 인행, 의종 전후의 별궁 이전의 수려와 및 청자의 발달, 충렬 충선간의 사경예술의 발달, 기타 탑비, 나전칠기, 금착동기의 발달, 이러한 주도 이외의 편례를 모두 고사시하고 순전히 회화미술에서의 예만 들더라도 국초의 도화원 내지 화국의 설립이 대서특서할 중요한 사실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 같은 내외가 추억하는 유일의 조선미술안내서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 운운의 망론을 경거히 단론하였으나, 고려사 백관지 외직(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이란 기록이 있고, 파한집(破閑集)의 이영(李寧)의 기사 중에 "睿宗時畫局"이란 구와 동문선 이인로 이상귀휴도찬서(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의 구가 있으니, 화원화국의 존재를 어찌 의심하랴. 실로 이 화원의 설치야말로 장차로는 회화미술의 교화(아카데미슴)의 한 원인(遠因)을 형성할 것이나, 그러나 그 시설 당초에 있어서는 화용의 중차대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시설(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화도에 대한 애호를 이 화원의 한 일(一事)로써만 입증하려 함은 구우일모에 비의 불과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구체적 사실을 들어 말하면, 역대 제왕 중 현대문주1▶헌종[a 1] 현대문주2▶인종[a 2] 명종 충선왕 공민왕 등 지존으로서 화도에 정진한 이가 많음은 역사상 드문 일이며, 예종은 천장각(天章閣)을 구금에 창립하여 송제의 어필서화(御筆書畫)를 완장하여 때때로 군신에게 선시하였으며, 의종 조에는 내시의 좌우번(左右番)이 유경(遊競)에 빙탁하여 진보 서화를 헌상하였으며, 충선왕은 연저(燕邸)에 만권당을 창구하 염복(閻復), 도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석유(碩儒)와 명화 대가들로 교유하되 특히 본국에서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絕)로 칭송되던 이익재(李益齋)를 소치하여 그들과 교유하게 하였으니, 왕이 이미 능서의 재주로써 다시 삼절의 익재공(益齋公)을 소치한 것은 촌탁(忖度)하건댄 예문치학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화도에 정진, 명화의 수습에도 의략이 있었다 할 것이니 현대문주3▶조맹과(趙孟顆)[a 3] 벌써 명화대가이지만 고소 주덕윤(朱德潤)과도 친교를 맺고 왕공엄(王公儼), 임인계(仁癸), 이간(李衎), 장언보(張彥輔), 유도권(劉道權) 등 대가들을 품등하며, 위언(韋偃)의 화송畫松 한간(韓幹)의 화마(畫馬) 등 고화를 들어 시화일치의 화론(畫論)을 설립한 계림공(鷄林公)이 어찌 고려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현대문주4▶사대부로서 화도에 능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a 4]─지륵사(智勒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가 일석도(一釋徒)로서 현대문주5▶「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호화벽을 들지 마자[a 5] 그러나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에 "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 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같은 글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고려인의 호화벽의 일단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려사 열전 이녕조(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명종은 오히려 그림에 능한 인물인 만큼 그 의견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 '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중의를 강조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대세를 알고서의 결착이었든지 천언만사의 주석을 요(要)치 않는 절대의 호증(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화도에 대한 관심은 고려 사회에 일반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결코 이조(李朝)말엽 이후의 조선의 정상으로써 과거를 촌도(忖道)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면 상술한 배경 속에서 자라난 고려의 회화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필자가 빈약한 문헌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쪽수▶P109一般으로 朝鮮文化 方面이 다 그러하지만 美術工藝品에 있어서도 文獻 乃至 遺跡이 稀貴한 中 特히 上古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無怪한 편이나 僅僅 五百年 前 乃至 千年 前 間의 高麗의 畫跡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奇怪를 지나 처 摩訶 不可思議의 일이라 할 만하다. 論者 있어 그 理由를 說明하여 가로되 或은 兵禍不息을 擧證하고 或은 藝道에 對한 一般의 無敎無關心을 附會하나 前論은 오히려 事實에 近似하지만 後論은 一段의 檢討를 經하여야 할 것이 爲先 筆者가 當場에 問題하고 있는 高麗의 藝道에 對한 愛好가 凡論常識으로써 議할 바 아니어서 斷簡 尺素 散見되는 記錄에서나마 一大 豪華版을 그려낼 수 있으니 麗初 以來 寺社建築의 莊嚴, 顯高 間의 八萬大藏經과 一般書籍의 印行, 毅宗 前後의 別宮 離殿의 修麗와 및 靑磁의 發達, 忠烈 忠宣間의 寫經藝術의 發達, 其他 塔碑, 螺鈿漆器, 金錯銅器의 發達 이러한 晝道 以外의 片例를 모두 姑捨是하고 純全히 繪畫美術에서의 例만 들더라도 國初의 圖畫院 乃至 畫局의 設立이 大書特書할 重要한 事實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內外가 推抑하는 唯一의 朝鮮美術案內書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云云의 妄論을 輕擧히 斷論하였으나, ▶P110高麗史 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 이란 記錄이 있고, 破閑集의 李寧의 記事中에 「睿宗時畫局」이란 句와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句가 있으니, 畫院畫局의 存在를 어찌 疑心하랴。實로 이 畫院의 設置야말로 將次로는 繪畫美術의 校化(아카데미슴)의 一 遠因을 形成할 것이나, 그러나 그 施設 當初에 있어서는 畫用의 重且大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高麗時代의 畫道에 對한 愛好를 이 畫院의 一事로써만 立證하려 함은 九牛一毛에 比의 不過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具體的 事實을 들어 말하면, 歷代 諸王 中 원문주1▶獻宗[1] 원문주2▶仁宗[2] 明宗 忠宣王 恭愍王 等 至尊으로서 畫道에 精進한 이가 많음은 歷史上 드문 일이며, 睿宗은 天章閣을 九禁에 剏立하여 宋帝의 御筆書畫를 玩藏하여 때때로 群臣에게 宣示하였으며, 毅宗朝에는 內侍의 左右番이 遊競에 憑托하여 珍寶 書畫를 獻上하였으며, 忠宣王은 燕邸에 萬卷堂을 剏構하 閻復, 姚燧, 趙孟頫, 虞集 等 碩儒와 名畫 大家들로 交遊하되 特히 本國에서 詩書畫三絕로 稱頌되던 李益齋를 召致하여 그들과 交遊하게 하였으니, 王이 이미 能書의 才로써 다시 三絕의 益齋公을 召致한 것은 忖度하건댄 例文致學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畫道에 精進, 名畫의 收拾에도 意略이 있었다 할 것이니 원문주3▶趙孟顆[3] 벌써 名畫大家이지만 姑蘇 朱德潤과도 親交를 맺고 王公儼,任仁癸, 李衎, 張彥輔, 劉道權 等 大家들을 品騰하며, 韋偃의 畫松 韓幹의 畫馬 等 古畫를 들어 詩畫一致의 畫論을 設立한 鷄林公이 어찌 高麗畫 發展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원문주4▶士大夫로서 畫道에 能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4]─ 智勒寺의 廣智禪師가 一釋徒로서 원문주5▶「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好畫癖을 들지 마자[5] 그러나 圖畫見聞誌에「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同書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P111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麗人의 好畫癖의 一端 證明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高麗史列 傳 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 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明宗은 오히려 能畫人物인 만큼 그 意見은 個人的 意見에 不過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 「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衆意를 強調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大勢를 알고서의 結着이었든지 千言萬辭의 注釋을 要치 않는 絕對의 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畫道에 對한 關心은 高麗社會에 一般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決코 李朝末葉 以後의 朝鮮의 情狀으로써 過去를 忖度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면 上述한 背景 속에서 자라난 高麗의 繪畫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筆者가 貧弱한 文獻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본문


본문1: 一.人物畫


원래 회화의 시원(始源)이 인물화에 있었음은 작화 충동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아동의 희화에서도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초기의 인물화는 유형적 인물화여서 어느 특수한 개성을 가진 특수한 인물화 즉 초상화가 아니었다. 이러한 의미의 초상화가 언제부터 조선에서 발생되었을까 함은 매우 추정하기 어려운 것이니 예컨대 고구려 벽화에 나타난 인물화들은 초상화라는 것보다 오히려 유형적 인물화에 가까운데 백제의 아좌태자(阿佐太子)는 벌써 완전한 초상화를 남긴 듯이 전하여 내려오니, 어느 세대에 초상화가 비로소 발전되었는지 확실히 말하기 어려웁고 신라통일기에 들어와서는 확실한 초상화가 있었던 듯하여 다소의 문헌에 남아 있다. 예컨대 쌍계사 진감선사(雙溪寺 眞鑒禪師) 비문에 보이는 6조영이든지 단속사 신행선사(斷俗寺 神行禪師) 비문에 보이는 신행(神行)의 진영이라든지 비로암 진공대사(毗盧庵 眞空大師) 비문에 보이는 도의(道儀)의 진영이라든지 삼국사기 궁예전에 보이는 부석사(浮石寺)의 신라왕상 등이 그 특례이다. 그러나 그 수가 문헌적으로 실로 요요(寥寥)함에 비하여 고려조에서의 초상화의 발달은 놀랄만한 수효와 계통이 있으니, 역대 제왕의 진전(眞殿), 도형공신(圖形功臣)의 초상 등은 그중에도 의미 깊은 것으로 조선에 있어서는 고려조가 처음이다.
쪽수▶P111-2元來 繪畫의 始源이 人物畫에 있었음은 作畫衝動이 發揮되기 시작하는 兒童의 戱畫에 도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初期의 人物畫는 類型的 人物畫이어서 어느 特殊한 個性을 가진 特殊한 人物畫 即 肖像畫가 아니었다. 이러한 意味의 肖像畫가 언제부터 朝鮮서 發生되었을까 함은 매우 推定하기 어려운 것이니 例컨대 高句麗壁畫에 나타난 人物畫들은 肖像畫라는 이 보다 오히려 類型的 人物畫에 가까운데 百濟의 阿佐太子는 벌써 完全한 肖像畫를 남긴 듯이 傳하여 내려오니, 어느 世代에 肖像畫가 비로소 發展되었는지 確實이 말하기 어려웁고 新羅統一期에 들어와서는 確實한 肖像畫가 있었던 듯하여 多少의 文獻에 남아 있다. 例컨대 雙溪寺 眞鑒禪師 碑文에 보이는 6조 ▶P112-1影이든지 斷俗寺 神行禪師 碑文에 보이는 神行의 眞影이라든지 毗盧庵 眞空大師 碑文에 보이는 道儀의 眞影이라든지 三國史記 弓裔傳에 보이는 浮石寺의 新羅王像 等이 그 特例이다. 그러나 그數 文獻的으로 實로 寥寥함에 比하여 高麗朝에서의 肖像畫의 發達은 놀랄만한 數爻와 系統이 있으니, 歷代 諸王의 眞殿, 圖形功臣의 肖像 等은 그중에도 意義 깊은 것으로 朝鮮에 있어서는 麗朝가 처음이다.





































본문1-1: (甲)眞殿의 發達


황윤석(黃胤錫) 이재집(頤齋集)에 고려 진전의 원시설이 있으니 하였으되

漢制自諸帝各廟在京師者外,別立原廟,又爲高帝百世 不遷, 分立高廟于郡國, 蓋周末春秋之世, 已以邑有 先君之墓者, 謂之都, 而漢國之也, 至唐 追尊老子爲玄元皇帝, 通中外立塑像爲廟,而諸帝亦以塑像配焉,宋眞宗崇道教,又因唐京有景靈宮,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 並以諸帝塑像繪容安之,而其以配于老子者, 徃往不一,我東高麗眞殿之設,實其遺也云云

즉 고려제왕의 진전(영전)을 경령전(景靈殿)이라 함이 이 경령궁(景靈宮) 에서 유래한 것임을 이에 알 것이요, 평양의 성용전(聖容殿) 영 유(永柔) 봉진사(鳳進寺) 남쪽의 태조 영전 등이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의 영전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효사관(孝思觀)이란 것 이 소위 별묘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사사(寺社) 의 진전이 소위 배우노자식(配于老子式)에 해당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다만 고려사 윤소종(尹紹宗) 열전에 "景靈殿太祖皇考之別廟孝思親太祖眞之所在"라 하여 있으나, 현대문주6▶사실에 있어서 경령 전(景靈殿)은 태조황고뿐 아니라 사대역조의 진을 비롯하여 [a 6] 숙종 (원종 2년), 예종(인종 2년), 인종(의종 2년), 명종(원종 6년), 강종(고종 2년), 고종 원종(충렬 2년), 충렬(충선 2년), 충혜(충목 2년) 등, 비록 단편적 이나마 역대 제왕의 진영을 봉안(奉安)한 사실이 고려사에 있으니 경령전(景靈殿)이 곧 고려제왕의 진전이었다 할 것이요, 효사관(공민왕 대에 경명전(景命殿)이라 개칭하다) 만은 태조의 진영만이 있었던 듯하여 다른 왕의 진영을 봉안한 사실이 보이지 않는다. 경령전은 즉 궐내에 있던 원묘이요, 효사관은 궐외 봉은사에 있던 별묘이나, 내전에도 별묘가 있었던 듯하여 고려사 고종 12년조에 "內殿康宗眞殿"이란 구가 보이며, 중엽 이후로 들면서부터는 진전에 대하여 특별한 칭호를 붙인 듯 하여 충렬왕의 진전을 명인전(明仁殿)이라 하고 제국공주의 진전을 인화전(仁和殿)이라 하고, 왕륜사의 노국공주의 진전을 인희전(仁熙殿)이라 하고, 공민왕의 진전 혜명전(惠明殿)이라 하였다.
쪽수▶P112-2黃胤錫 頤齋集에 髙麗 眞殿의 源始說이 있으니 하였으되 漢制自諸帝各廟在京師者外, 別立原廟, 又爲高帝百世 不遷, 分立高廟于郡國, 蓋周末春秋之世, 已以邑有 先君之墓者, 謂之都, 而漢國之也, 至唐 追尊老子爲玄元皇帝, 通中外立塑像爲廟,而諸帝亦以塑像配焉,宋眞宗崇道教,又因唐京有景靈宮,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 並以諸帝塑像繪容安之,而其以配于老子者, 徃往不一,我東高麗眞殿之設,實其遺也云云 即 高麗諸王의 眞殿(殿影)을 景靈殿이라 함이 이 景靈宮에서 由來한 것임을 이에 알 것이요, 平壤의 聖容殿 永柔 鳳進寺 南의 太祖 影殿 等이 「天下名都名山分立宮觀」의 影殿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孝思觀이란 것이 所謂 別廟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으며, 寺社의 眞殿이 所謂 配于老子式에 該當한 것임을 이에서 알 수 있다. 다만 高麗史 尹紹宗 列傳에 「景靈殿太祖皇考之別廟 孝思親太祖眞之所在」라 하여 있으나, 원문주6▶事實에 있어서 景靈殿은 太祖皇考뿐 아니라 四代歷祖의 眞을 비롯하여[6] 肅宗(元宗 2年), 睿宗(仁宗 2年), 仁宗(毅宗 2年), 明宗(元宗 6年), 康宗(高宗 2年), 高宗(元宗 2年), 元宗(忠烈 2年), 忠烈(忠宣 2年), 忠惠(忠穆 2年) 등, 비록 斷片的이나마 歷代諸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이 麗史에 있으니景靈殿이 곧 高麗諸王의 眞殿이었다 할 것이요, 孝思觀(恭愍王代에 景命殿이라 改稱하다) 만은 太祖의 眞影만이 있었던 듯하여 다른 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이 보이지 않는다. 景靈殿은 ▶P113-1即 闕內에 있던 原廟이요, 孝思觀은 闕外 奉恩寺에 있던 別廟이나, 內殿에도 別廟가 있었던 듯하여 麗史 高宗 12年條에 「內殿康宗眞殿」이란 句가 보이며, 中葉 以後로 들면서부터는 眞殿에 對하여 特別한 稱號를 붙인 듯 하여 忠烈王의 眞殿을 明仁殿이라 하고 齊國公主의 眞殿을 仁和殿이라 하고, 王輪寺의 魯國公主의 眞殿을 仁熙殿이라 하고, 恭愍王의 眞殿 惠明殿이라 하였다.
이밖에 능묘에도 진전이 있었음은 세조 창릉의 진전이 그 일례요, 정릉 정자각에 있던 노국공주의 진영도 그 일례이나, 후자는 릉 앞에 있던 운암사(雲岩寺)(누구는 광언사(光岩寺)라 하고, 혹자는 광통 보제사(廣通普濟寺)라 한다)에 소속되었던 것인 듯싶으니 대저 능묘 근처에 사원을 설치하고 사원 근처에 능묘를 경영하여 그 사찰을 인하여 곧 원찰을 삼고, 현대문주7▶ 이내 진전을 설치함은 고려의 특색이었다 하여도 될 것이요[a 7] 그 외 사찰까지도 각 왕의 원찰을 삼고 진 전을 경영함은 전에 기술한 바와 같이 지나(支那, 중국)에서 제제(諸帝)의 소상회용(所像繪容)을 봉안한 궁관에 노자상(老子像)을 배치함과 그 의태가 유사한 것으로 이제 역대 제왕의 진영이 있던 사찰을 열거하면 대략 좌측과 같다.

세조의 진영─영통사(명종 2년) (연대만 추거한 것은 역사에 의함 이하 방비)
태조의 진영─영통사(명종 2년) 태안사(명종 2년) 봉은사(명종 11년)
연산 개태사 (공민왕 11년) 죽주 봉업사 (공민왕 12년) 여은현 양 산사 (이는 우왕 6년에 순흥으로 이안) 용천사(주세붕 무능세고)
성종의 진영─개국사(고종 4년)
현종의 진영─현화사(동사 비문)에서 숭교사로(고종 4년) 황고 안 종 황비 순성태후 황자 성목장공주 왕비 원정왕후 등 의 진영─현화사(동사 비문) 후에 안종신은 현종과 함께 숭 교사로 (고종 4년)
정종의 진영─대안사(명종 10년)
비 인예순덕왕후의 진영─국청사(숙종 원년) 안화사(예종 15년)
숙종의 진영─개국사(예종 원년)에서 천수사(예종 11년)로 안화사로 (원종 2년)
비명의왕후의 진영─개국사(예종 8년)에서 천수사로 (예종 11년) 인종 급 공예왕후의 진영─나통사(명종 14년)
의종의 진영─해안사(명종 5년)에서 선효사(오미원)로 불 주사로 (명종 26년)
명종의 진영─영통사(충선 2년)
강종의 진영─현화사에서 숭교사로 왕륜사로(고종 4년)
충렬왕의 진영─서보통사 영진전(동왕 34년) 묘련사(동사 비문)
비 제국공주의 진영─묘련사(충선 5년)
충선왕의 진영─묘련사(동사 비문) 해안사(익재집) 승청부 흥천 사(공민 6년)
비 한국공주의 진영─흥천사(공민 6년)
의비의 진영─청운사에서 묘련사로(충숙 8년)
충숙왕의 진영─천수사(공민왕 22년)
비 복국장공주의 진영─순천사(충숙 8년)
충혜왕 급 덕영공주의 진영─신효사(우왕 3년)
공민왕 급 순정왕후의 진영─왕륜사 혜명전(우왕 2년)
노국공주의 진영─왕륜사 인희전(공민왕 15년) 광암사(공민왕 23년)

쪽수▶P113-2이밖에 陵廟에도 眞殿이 있었음은 世祖 昌陵의 眞殿이 그 一例요, 正陵 丁字閣에 있던 魯國公主의 眞影도 그 一例이나, 後者는 陵前에 있던 雲岩寺(一云 光岩寺 或云 廣通普濟寺)에 所 屬되었던 것인 듯싶으니 大抵 陵墓 近處에 寺院을 設置하고 寺院 近處에 陵墓를 經營하여 그 寺刹을 因하여 곧 願刹을 삼고, 원문주7▶ 이내 眞殿을 設置함은 高麗의 特色이였다 하여도 可할 것이요[7] 其外 寺刹까지도 各王의 願刹을 삼고 眞 殿을 經營함은 前에 己述한 바와 같이 支那에서 諸帝의 塑 像繪容을 奉安한 宮觀에 老子像을 配置함과 그 意態가 類似한 것으로 이제 歷代 諸王의 眞影이 있던 寺刹을 列擧하 면 大略 左와 같다.
世祖의 眞影─靈通寺(明宗 2年) (年代만 推擧한 것은 歷史에 衣함 以下 倣比)
太祖의 眞影─靈通寺(明宗 2年) 泰安寺(明宗 2年) 奉恩寺(明宗 11年)
連山 開泰寺 (恭愍王 11年) 竹州 奉業寺 (恭愍王 12年) 如恩縣 陽 山寺 (이는 禑王 六年에 順興으로 移安) 龍泉寺(周世鵬 武陵世稿)
成宗의 眞影─開國寺(高宗 4年)
顯宗의 眞影─玄化寺(同寺 碑文)에서 崇敎寺로(高宗 4年) 皇考 安 宗 皇妣 順聖太后 皇姉 成穆長公主 王妃 元貞王后 等 의 眞影─玄化寺(同寺 碑文) 後에 安宗神은 顯宗과 함께 崇 敎寺로 (高宗 4年)
靖宗의 眞影─大安寺(明宗 10年)
妃 仁睿順德王后의 眞影─國淸寺(肅宗 元年) 安和寺(睿宗 15年)
肅宗의 眞影─開國寺(睿宗 元年)에서 天壽寺(睿宗 11年)로 安 和寺로 (元宗 2年)
妃明懿王后의 眞影─開國寺(睿宗 8年)에서 天壽寺로 (睿宗 11年) ▶P114-1 仁宗 及 恭睿王后의 眞影─儺通寺(明宗 14年)
毅宗의 眞影─海安寺(明宗 5年)에서 宣孝寺(吳彌院)로 佛 住寺로 (明宗 26年)
明宗의 眞影─靈通寺(忠宣 2年)
康宗의 眞影─玄化寺에서 崇敎寺로 王輪寺로(高宗 4年)
忠烈王의 眞影─西普通寺 靈眞殿 (同王 34年) 妙蓮寺(同寺 碑文)
妃齊國公主의 眞影─妙蓮寺(忠宣 5年)
忠宣王의 眞影─妙蓮寺(同寺 碑文) 海安寺(翼齋集)昇天府 興天 寺(恭愍 6年)
妃 韓國公主의 眞影─興天寺(恭愍 6年)
懿妃의 眞影─靑雲寺에서 妙蓮寺로(忠肅 8年)
忠肅王의 眞影─天水寺(恭愍王 22年)
妃 濮國長公主의 眞影─順天寺(忠肅 8年)
忠惠王 及 德寧公主의 眞影─神孝寺(禑王 3年)
恭愍王 及 順靜王后의 眞影─王輪寺 惠明殿(禑王 2年)
魯國公主의 眞影─王輪寺 仁熙殿(恭愍王 15年) 光岩寺 (恭愍王 23年)
이외에도 상술한 사사진전 외에 고려사 병제에 홍원사 구조 당, 흥왕사, 대운사, 중광사, 홍호사, 건원사 등의 진전이 보이며, 윤지표(尹之彪) 묘지에 태운사 진전(이것은 대운사와 동일한 것인 듯) 등이 보이니, 고려사를 더욱 자세히 뒤지면 상술한 것 이외에 사찰이 많을 것 같다.
쪽수▶P114-2以外에도 上述한 寺社眞殿 外에 麗史 兵制에 弘圓寺 九祖 堂, 興王寺, 大雲寺, 重光寺, 弘護寺, 乾元寺 等의 眞殿이 보이며, 尹之彪 墓誌에 泰雲寺 眞殿(이것은 大雲寺와 同一한 것인 듯) 등이 보이니, 麗史를 더욱 仔細히 뒤지면 上述한 것 以外에 寺刹이 많을 것 같다.
각설 상술한 제왕의 진영은 거개 화공의 손에서 제작 되었을 것은 물론이나 하등의 사실을 이에 대하여 전함이 없고 보한집(補閑集)에 이기(李琪)가 그렸다는 현대문주8▶의종진(毅宗眞)[a 8]은 지방민의 자호(自好) 에서 나온 것이요, 대각국사가 송제로부터 받은 문종의 진 영(동사문집)은 어떠한 것인지 불명하고 현대문주9▶충렬왕 급 제국공주진 만은 원나라 사람의 소작(所作)이며[a 9] 현대문주10▶운암사의 노국공주진은 공민왕의 친필로 유명하나[a 10] 그 이외 진영에 대하여는 모두 제작자가 미상하다. 현대문주11▶ 장단 화장사에 공민왕의 자화상이 있어 유명하였으나[a 11] 지금에 전하지 않고 덕행히 대정 5년도 고적 조사보고서에 만환(漫漶)된 화폭의 사진이 있어 그윽히 여향을 엿볼 수 있으나 진위를 모를 것이며 현대문주12▶공민왕의 화상으로 다시 윤택(尹澤)에게 하사된 바 있었으나[a 12] 지금에 물론 전함이 없을 것이다.
쪽수▶P114-3却說 上述한 諸王의 眞影은 舉皆 畫工의 손에서 製作되었을 것은 勿論이나 何等의 事實을 이에 對하여 傳함이 없고 補閑集에 李琪가 그렸다는 원문주8▶毅宗眞[8]은 地方民의 自好에서 나온 것이요, 大覺國師가 宋帝로부터 받은 文宗의 眞影(同師文集)은 어떠한 것인지 不明하고 원문주9▶忠烈王 及 齊國公主眞 만은 元人의 所作이며[9] 원문주10▶雲岩寺의 魯國公主眞은 恭愍王의 親筆로 有名하나[10] 그 以外 眞影에 對하여는 모두 作者가 未詳하다. 원문주11▶長湍 華藏寺에 恭愍王의 自畫像이 있어 有名 하였으나[11] 지금에 傳하지 않고 德倖히 大正 5年度 古蹟 調査報告書에 漫漶된 畫幅의 寫眞이 있어 그윽히 餘香을 ▶P115-1 엿볼 수 있으나 眞僞를 모를 것이며 원문주12▶恭愍王의 畫像으로 다시 尹澤에게 下賜된 바 있었으나[12] 지금에 勿論 傳함이 없을 것이다.
화태에 대하여서도 물론 전함이 없고 고려사절요 명종 14년조에 태후의 화상이 입상이 아니였고 좌상이었음을 전함이 있으니, 공민왕 진영의 화태와 대조하면 당대 진영의 대체적인 양식은 얼마간 추상할 수 있다 하겠다.
쪽수▶P115-2 畫態에 對하여서도 勿論 傳함이 없고 高麗史節要 明宗 14年條에 太后의 畫像이 立像이 아니였고 坐像이었음을 傳함이 있으니, 恭愍王 眞影의 畫態와 對照할제 當代 眞影의 大體 樣式은 얼마간 推想할 수 있다 하겠다.
































본문1-2: (乙)圖形功臣


다음에 역대 제왕의 진영의 발전과 서로 맞아 발전된 것은 소위 공신의 도형이니, 신라 대에 있었음을 들을 수 없은즉, 조선에서의 도형공신이란 고려조에서 비로소 시작된 듯 싶다. 그러나 그 원태는 벌서 지나(支那)에 있던 것으로 정창(鄭昶)이 지은 중국화학전사(中國畫學全史)에

宣帝甘露三年,單于入朝,上思股肱之美,逎圖書其人 於麒麟閣, 王充論衡謂宣帝之時, 圖畫列士, 或不在畫上 者, 子孫恥之云, 自是以後, 凡有紀功頌德以及其他 關於紀念之事, 往往藉畫, 以達其用, 始於王家, 次及 士夫, 乃至庶民, 亦多効法之

라 하여 그 기원설이 있지만, 고려조에 있어서도 개국(開國), 위사(衛社), 정난(靖難), 익대(翼戴), 척경(拓境), 탕구(謁寇), 기타 여러가지 사유에 의한 소위 벽상공신 도형공신의 칭호 밑에 많은 화상이 조성되었다. 고려사 태조 23년조에 "重修新興寺, 置功臣堂, 畫三韓 功臣於東西璧, 設無遮大會一畫夜, 歲以爲常"이라 한 것이 아마 조선사 상(上)의 최초의 일일 것이며, 같은 글 원종 3년 조에 "重營彌勒寺及功臣堂, 初自太祖以來, 功臣皆圖於壁 上, 每歲十月爲張佛事 以資冥福, 頃因遷都久廢, 至是王命 運營設齋"라 한 것이 그 부연된 사실이니 이곳에 말한 미륵사는 곧 신흥사 이다. 이 밖에 영유(永柔)에도 공신당이 있었으니 여지승람(輿地勝覽) 50권에"高麗太祖影殿, 在永柔米豆山鳳進 寺之南, 中安太祖影幀, 東西壁畫三十七功臣十二將軍"운운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는 그 도형의 전반을 찾기 어려우므로 추구하지 않거니와, 중엽 이후에 권신의 천권으로 말미암아 공신 품등의 동요가 잦아, 첨삭이 일시 유행하였으니, 현종조 공신으로 양규(揚規), 김숙흥(金叔興) 강민첨(姜民瞻) 등을 정종 12년에, 박선(朴選), 하공진(河拱辰) 등을 문종 6년에 비로소 첨가하고, 고종조 공신이라던 이의민(李義旼)의 도형을 만삭(墁削)하고, 최충헌의 도형을 창복사로, 최이(崔怡)의 도형을 선원사로 옮겼다가 후에 만삭한 등 사실이 각기 열전에 보인다.
쪽수▶P115-3다음에 歷代 諸王의 眞影의 發展과 서로 맞아 發展된 것은 所謂 功臣의 圖形이니, 羅代에 있었음을 들을 수 없은즉, 朝鮮에서의 圖形功臣이란 麗朝에서 비로소 始作된 듯 싶다. 그러나 그 原態는 벌서 支那에 있던 것으로 鄭昶 著 中國畫學全史에
宣帝甘露三年,單于入朝,上思股肱之美,逎圖書其人 於麒麟閣, 王充論衡謂宣帝之時, 圖畫列士, 或不在畫上 者, 子孫恥之云, 自是以後, 凡有紀功頌德以及其他 關於紀念之事, 往往藉畫, 以達其用, 始於王家, 次及 士夫, 乃至庶民, 亦多効法之
라 하여 그 記源說이 있지만, 高麗朝에 있어서도 開國, 衛社, 靖難, 翼戴, 拓境, 蕩寇, 其他 여러가지 事由에 依한 所謂 壁上功臣 圖形功臣의 稱號 밑에 많은 畫像이 造成되었다. 高麗史 太祖 23年條에 「重修新興寺, 置功臣堂, 畫三韓 功臣於東西璧, 設無遮大會一畫夜, 歲以爲常」이라 한 것이 아마 朝鮮史 上의 最初의 일일 것이며, 同書 元宗 3年 條에 「重營彌勒寺及功臣堂, 初自太祖以來, 功臣皆圖於壁 上, 每歲十月爲張佛事 以資冥福, 頃因遷都久廢, 至是王命 運營設齋」라 한 것이 그 敷演된 事實이니 이곳에 말한 彌 勒寺는 곧 新興寺이다. 이 밖에 永柔에도 功臣堂이 있었으니 輿地勝覽 50卷에「高麗太祖影殿, 在永柔米豆山鳳進 寺之南, 中安太祖影幀, 東西壁畫三十七功臣十二將軍」云云이라 하였다. 그러나 지금에 있어서는 그 圖形의 全般 을 찾기 어려우므로 追究하지 않거니와, 中葉 以後에 權▶P116-1臣의 擅權으로 말미암아 功臣 品騰의 動搖가 잦아, 添削이 一時 流行하였으니, 顯宗朝 功臣으로 揚規, 金叔興姜民瞻 等을 靖宗 12年에, 朴選, 河拱辰 等을 文宗 6年에 비로소 添加하고, 高宗朝 功臣이라던 李義旼의 圖形을 墁削하고, 崔忠獻의 圓形을 昌福寺로, 崔怡의 圖形을 禪源寺로 옮겼다가 後에 墁削한 等 事實이 各其 列傳에 보인다.


































본문1-3: (丙)其他의 肖像


상술한 바와 같이 정교적 의미 내지 의례적 의미를 갖고 발전된 고려의 초상화는 한갓 왕실에서 공신에서 뿐 아니라 상하 일반이 유용하게 되었으니, 정원군(定原君) 삼한 대국공 균(鈞)의 진을 양릉사에 안치한 것은(공양 2년), 종실의 일례요 조인규(趙仁規), 정인(鄭仁) 等의 영정을 각기 사당에 걸게 됨은(각인의 묘지명) 사대부의 일례요, 구례현(求禮縣)의 민 손순흥(孫順興)이 그 모상을 봉사함은 (성종 9년) 서인의 일례이다. 이외에 여러 문헌에 산견되는 초상화도 대개는 제사용으로 많이 그려졌을 듯하나, 고려조의 초상화의 참고로 열거하면 대략 좌와 같다.

이암(묘지명) 최형, 정세운, 김사공, 이공수(목은집) 최충권중화, 정도전(양촌집)이성계, 전조생(포은집), 전록생(야은일고) 하송헌, 이무방(근재집), 김죽헌(익재집), 길염(야은집) 권근, 조준(삼봉집) 강감찬(청은집) 강민첨 (여지승 남진주) 순암(가정집) 강서처(려사 우왕)

이 중에 미수(眉叟, 이인로)가 기록한 말에 의하면 이색의 초상은 한산 문헌서원에 있었다 하지만, 지금 잔존된 것은 이왕조의 모본이요 그 원본이 잔존되었을지 의문이며, 숭양서원에 남아 있는 포은의 화상도 이왕조의 모본이요 안유의 초상은 지금도 흥 소수서원에 남아있고, 이제현의 초상은 지금 이왕가 박물관에 남아있다. 현대문주13▶익재의 초상만은 원나라 사람 진감여의 필로 유명한 것이나[a 13] 그 외의 필자는 미상하며, 필자가 확연한 것으로

이기필─안치민, 박인석진 (보한집 이상국집)
이광필필─두경승진(려사)
정홍진필─이규보진(이상국집)
공민왕필─이〿진(동왕 21년) 유원정진(동왕 22년)
윤해진(목은집) 염제신진(묘지) 윤택진(묘지)
이강진(묘지) 손홍량진 (여지승람안 동림하사)

등이 있다. 이밖에 일본 화공의 필로 나흥유의 상이 열전에 있고, 고려도경에는 이자겸, 윤언식, 김부식, 김인규, 이지미(李之美) 5인의 초상을 서긍이 그렸음이 보인다.
쪽수▶P116-2上述한 바와 같이 政敎的 意味 乃至 儀禮的 意味를 갖고 發展된 高麗의 肖像畫는 한갓 王室에서 功臣에서뿐 아니라 上下 一般이 流用하게 되었으니, 定原君 三韓 大國公 鈞의 眞을 陽陵寺에 安置한 것은(恭讓 2年), 宗室의 一例요 趙仁規, 鄭仁 等의 影幀을 各其 祠堂에 걸게 됨은(各人의 墓誌銘) 士大夫의 一例요, 求禮縣 民 孫順興이 그 母像을 奉祀함은(成宗 9年) 庶人의 一例이다. 以外에 여러 文獻에 散見되는 肖像畫도 大概는 祭祀用으로 많이 그려졌을 듯하나, 麗朝의 肖像畫의 參考로 列擧하면 大畧 左와 같다.
李嵓(墓誌銘) 崔瑩, 鄭世雲, 金司空, 李公遂(牧隱集) 崔沖 權仲和, 鄭道傳(楊村集)李成桂, 田祖生(圃隱集), 田綠生(壄隱逸稿) 河松軒, 李茂方(謹齋集), 金竹軒(益齋集), 吉冉(冶隱集) 權近, 趙浚(三峯集 )姜邯瓚(淸隱集) 姜民瞻 (舆地勝 覽晋州) 順菴(稼亭集) 姜 筮妻(麗史 禑王)
이 中에 眉叟記言에 依하면 李穡의 肖像은 韓山 文獻書院에 있었다 하지만, 現今 殘存된 것은 李朝의 摹本이요 그 原本이 殘存되었을지 疑問이며, 崧陽書院에 남아 있는 圃隱의 畫像도 李朝의 摹本이요 安裕의 肖像은 지금도 興 紹修書院에 남아있고, 李齊賢의 肖像은 지금 李王家博物館에 남아있다. 원문주13▶益齋의 肖像만은 元人 陳鑑如의 筆로 有名한 것이나[13] 其外의 筆者는 未詳한것이며, 筆者가 確然한 것으로
李琪筆─安置民, 朴仁碩眞 (補閑集 李相國集)
李光弼筆─杜景升眞(麗史)
丁鴻進筆─李奎報眞(李相國集)
▶P117-1恭愍王筆─李〿眞(同王 21年) 柳爰廷眞(同王 22年)
尹侅眞(牧隱集) 廉悌臣眞(墓誌) 尹澤眞 (墓誌)
李岡眞(墓誌) 孫洪亮眞 (輿地勝覽安 東臨河寺)
等이 있다. 이밖에 日本 畫工의 筆로 羅興儒의 像이 列傳에 있고, 高麗圖經에는 李資謙, 尹彥植, 金富軾, 金仁揆, 李之美 5人의 肖像을 徐兢이 그렸음이 보인다.
이제 전술한 화상의 형식을 보건대, 이미 익재 초상과 회헌 초상에서와 같이 전신상과 반신상과의 구별이 있음을 제일로 들 수 있으니, 이러한 형식의 구별은 일찍이 려사 열전 두경승전에「勅畫工李光弼圖形, 光弼曰畫法主時半像耳, 景升怒使具體」란 구절이 있어 어떠한 의궤에서 나온 양식론인 듯하나, 일반이 곧 준수하지 않은 것임은 이 문례에서도 볼수 있고, 공민왕의 초상은 정면 직각의 상이나 익재 및 회헌은 약 30도 각도의 좌측상으로 비수 없는 세선으로 설색 후에 다시 윤곽을 잡았으니, 이 좌상은 불과 두 가지 예이지만 이조의 초상이 거개 우측대을 이루고 있음과 호개(好個)의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그곳에 어떠한 경향성을 볼 수 있을듯하나 단안키 어렵고, 당대의 필선이 고고유사묘에 국한되어 있는 것은 후기 조선의 초상화 필법의 한 철칙을 이룬 것으로 주목할만하다. (상술한 이외에 다른 초상화들은 축조 설명하고자 한다.)
쪽수▶P117-2이제 前述한 畫像의 形式을 보건대, 이미 益齋 肖像과 晦軒 肖像에서와 같이 全身像과 半身像과의 區別이 있음을 第一로 들 수 있으니, 이러한 形式의 區別은 일찍이 麗史 列傳 杜景升傳에「勅畫工李光弼圖形, 光弼曰畫法主時半像耳, 景升怒使具體」란 一句 있어 어떠한 儀軌에서 나온 樣式論인 듯하나, 一般이 곧 遵守하지 않은 것임은 이 文例에서도 볼수 있고, 恭愍王의 肖像은 正面 直角의 像이나 益齋 및 晦軒은 約 30度 角度의 左側像으로 肥瘦 없는 細線으로 設色 後에 다시 輪郭을 잡았으니, 이 左像은 不過 二例이지만 李朝의 肖像이 擧皆 右側袋을 이루고 있음과 好個의 對照를 이루는 것으로 그곳에 어떠한 傾向性 을 볼 수 있을 듯하나 斷案키 어렵고, 當代의 筆線이 高古游絲描에 局限되어 있는 것은 後期 朝鮮의 肖像畫 筆法의 一 鐵則을 이룬 것으로 注目할만하다. (上述한 以外에 다른 肖像畫들은 逐條 說明하고자 한다.)


































본문2: 二.宗敎畫


조선 회화사 상에 있어서 종교화 같이 가장 고고한 시대로부터 발달된 것은 다시 없을 것이니, 조선의 초상들도 실로 종교화로 말미암아 발전된 것이다. 종교화야말로 조선 회화사 상에 제1 혈을 점령할 것이라 하겠으니, 고려조에 있어서 더욱 그 발전을 볼 수 있다.
쪽수▶P117-3朝鮮 繪畫史 上에 있어서 宗敎畫 같이 가장 高古한 時代로부터 發達된 것은 다시 없을 것이니, 朝鮮의 肖像들도 實로 宗敎畫로 말미암아 發展된 것이다. 宗敎畫야말로 朝鮮 繪畫史 上에 第一頁를 占領할 것이라 하겠으니, 麗朝에 있어서 더욱 그 發展을 볼 수 있다.







































본문2-1: (甲)佛敎畫


조선에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로부터 신라 고려 양조를 통하여 불교가 융성하였음은 이미 상식화된 사실로서 사원의 창립, 지존의 수계, 명문거족의 출가 등은 특서할 논제도 못 되거니와, 왕궁후가는 물론이요 서민의 두옥까지 불상을 봉안하고 불탑을 봉안하고 도장 연설함은 고려의 특색이었다 아니 할 수 없다. 의종이 천제석, 관음보살을 많이 그려 중외사원에 분송하며, 백선연이 의종의 행년에 준하여 관음 40구를 그렸음이라든지(려사 열전) 충렬왕이 부도관세음보살 12구를 궁중에 그려 법회를 엶이라든지(충렬 원년) 화불점안의 의식을 궁중에서 행함이라든지 (려사 한희유전) 조인규가 회소범상을 다작하였음이라든지 (려사 열전) 충렬 충선대에 화불을 많이 원조에 납공한 것이라든지 공민왕이 보현 달마 관음 등을 친히 그렸음 등은 고려조에서나 볼 일이요 그 외 전국적으로 창립하고 중즙한 사찰마다 불화없음이 없었을 것이로되 특히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건대,

안화사─미타전 양하(兩厦)의 동무 조사상, 서무 지상장(고려 도경)
광통보제사─나한보전 양무의 금선문수보현나한 오백구화상(동상) 해주 숭산사─고려 태조 6년에 복부경 윤질이 후량으로부터 재래한 나한 500구 화상(고려사)
흥왕사─문종 30년에 최사훈이 송 상국사 벽화를 이모(移模)한 벽화(고려도경 도화견문지)
선원사─비려전의 석학선필의 동서벽화, 노영필 화옥, 석식영암의 북벽화(근역서 화징)
송도 운거사─운마화상(양촌집)
여주 신륵사─금선초상(동상)
법왕사─비려문수보현 급 화엄제조상(동상)
오대산서대수정암─미타팔대보살상(동상)
광교원─노사나, 석가, 장기이조 급 해동육조상(금산사 혜덕왕사)
안선보국원─오백나한 화상(법인국사비)
흥덕사─공민왕필 석가출산상(용재총화)
금천안양사─약사회 석가열반회 미타극악회 김경신중회(여지승람)

등이 유명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얼마나 잔존되었는지 의문이며, 이왕직 박물관에 남아 있는 나한상 일폭에

高麗太祖六年府尹質使 於後梁帝以五道子所畫」 五百羅漢幀奉使曰可奉」 安于東國名山麗太祖承」 詔奉安于首陽山神光寺」 至今千有餘載猶存眞本」 雖爲剝落敢慕古人名」 畫誠意亦使吾輩得」 拜」 尊者七分面目不勝欽仰」 補缺復排以爲有綠者之」 作福云爾」 光緖十八年壬辰正月日一沙彌允五」 ○筆者圈

라는 발문이 있어 일견 당초의 원본인 듯하나, 그러나 원화폭 기문에

國土大一聖壽天」 太子千」 令壽万」? 之願金」 智」 丙申七月」 棟樑隊」 金義仁」

이란 단간이 있어 문이 벌써 조선식일뿐더러 화본 그 자체도 후대의 모본인 듯하니, 문제되지 않는다. 현재 잔존된 불화는 대개 문헌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영주 부석사의 범천제석 급 사천왕 벽화, 노영필의 담무알현신도(현재 총박)고야산친왕원의 석가설법도, 대은사 왕궁만다라, 법은사의 석가삼존아난가엽도, 최교사의 열반도 등이 유명하며 경권에 붙은 불화가 경성 양 박물관에 다소 남아 있다.
쪽수▶P117-4朝鮮에 佛敎가 傳來된 三國時代로부터 新羅 高麗 兩朝를 通하여 佛敎가 隆盛하였음은 이미 常識化된 事實로서寺院의 創立, 至尊의 受戒, 名門巨族의 出家 等은 特書할 ▶P118-1論題도 못 되거니와, 王宮侯家는 勿論이요 庶民의 斗屋까지 佛像을 奉安하고 佛塔을 奉安하고 道場 筵設함은 高麗의 特色이었다 아니 할 수 없다. 毅宗이 天帝釋, 觀音菩薩을 많이 그려 中外寺院에 分送하며, 白善淵이 毅宗의 行年에 准하여 觀音 40軀를 그렸음이라든지(麗史 列傳) 忠烈王이 浮屠觀世音菩薩 12軀를 宮中에 그려 法會를 엶이라든지(忠烈 元年) 畫佛點眼의 儀式을 宮中에서 行함이라든지 (麗史 韓希愈傳) 趙仁規가 繪塐梵像을 多作하였음이라든지 (麗史 列傳) 忠烈 忠宣代에 畫佛을 많이 元朝에 納貢한 것이라든지 恭 愍王이 普賢 達磨 觀音 等을 親히 그렸음 等은 麗朝에서나 볼일이요 其外 全國的으로 𠞴立하고 重葺한 寺刹마다 佛畫 없음이 없었을 것이로되 特히 文獻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을 보건대, 安和寺─彌陀殿 兩厦의 東廡 祖師像, 西廡 地像藏(高麗 圖經)
廣通普濟寺─羅漢寶殿 兩廡의 金仙文殊普賢羅漢 五百 軀畫像(仝上)
海州 嵩山寺─麗太祖 6年에 福府卿 尹質이 後梁으로부터 齎來한 羅漢 500軀 畫像(麗史)
興王寺─文宗 30年에 崔思訓이 宋相國寺壁畫를 移模 한 壁畫(高麗圖經 圖畫見聞誌)
禪源寺─毗廬殿의 釋鶴仙筆의 東西壁畫, 魯英筆 畫屋, 釋息影庵의 北壁畫(槿域書 畫徵)
松都 雲居寺─運摩畫像(陽村集)
驪州 神勒寺─金仙肖像(仝上)
法王寺─毗廬文殊普賢 及 華嚴諸祖像(仝上)
五臺山西臺水精庵─彌陀八大菩薩像(仝上)
廣敎院─盧舍那, 釋迦, 獎基二祖 及 海東六祖像(金山寺 慧德王師)
安禪報國院-五百羅漢 畫像(法印國師碑)
興德寺─恭愍王筆 釋迦出山像(慵齊叢話)
衿川安養寺─藥師會 釋迦涅槃會 彌陀極樂會 金經神衆會(輿地勝覽)
等이 有名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現在 얼마나 ▶P119-1殘存되었는지 疑問이며, 李王職 博物館에 남아 있는 羅漢像 一幅에
高麗太祖六年府尹質使 於後梁帝以五道子所畫」 五百羅漢幀奉使曰可奉」 安于東國名山麗太祖承」 詔奉安于首陽山神光寺」 至今千有餘載猶存眞本」 雖爲剝落敢慕古人名」 畫誠意亦使吾輩得」 拜」 尊者七分面目不勝欽仰」 補缺復排以爲有綠者之」 作福云爾」 光緖十八年壬辰正月日一沙彌允五」 ○筆者圈
라는 跋文이 있어 一見 當初의 原本인 듯하나, 그러나 原畫幅 記文에
國土大一聖壽天」 太子千」 令壽万」? 之願金」 智」 丙申七月」 棟樑隊」 金義仁」
이란 斷簡이 있어 文이 벌써 朝鮮式일뿐더러 畫本 그 自體도 後代의 模本인 듯하니, 問題되지 않는다. 現在 殘存된 佛畫는 大概 文獻에 보이지 않는 者로 榮州 浮石寺의 梵天帝釋 及 四天王 壁畫, 魯英筆의 曇無謁現身圖(今在 總博) 高野山親王院의 釋迦說法圖, 大恩寺 王宮曼茶羅, 法恩寺의 釋迦三尊阿難迦葉圖, 最敎寺의 涅槃圖 等이 有名하며 經卷에 붙은 佛畫가 京城 兩 博物館에 多少 남아 있다.
요컨댄 고려 불화로서는 문헌에 나타난 한에서 화폭 수의 비례로 보면 나한, 관음, 보현, 달마가 가장 많이 신앙된 듯싶다. 의종의 화관음, 백선연의 화관音 40, 충렬왕의 화관음 12, 공민왕의 화관음 등은 기술한 바요, 그 외에 진양공 최이 소장의 관음(이상국집), 환장로 소장 한생화 백의관음(동상) 수월관음(대각국사문집) 등이 관음상으로 유명한 것이며, 보현상으로서는 공민왕의 동자보현 백아상도(도은) 혜소국사의 생모의 원성인 보현상 오백정(동사비문)이 유명하며, 달마상으로는 공민왕의 달마노엽도강도(도은선) 이두 점 화 달마도(양촌집) 달마대사상, 달마화상정(이상국집) 등이유명하며, 오백나한상으로서는 이미 서술한 바 있다. 이외에 특수한 화제로 천축국 천길상진(대각국사문집) 월담장로 소장의 섭공풍간도(익재집) 연라자도(목은집), 세포상화행도천왕도(도화견문록) 등이 있으며, 김치양이 십왕사에 그렸다는 괴기한 도상(麗史 열전)은 불교도상의 무주적 악용의 일례요, 민제가 화공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는「복례제정주견수승무상도」(려사 열전)는 반불반신적 도상으로 주의할 만하다.
쪽수▶P119-2 要컨댄 高麗 佛畫로서는 文獻에 나타난 限에서 畫幅 數의 比例로 보면 羅漢, 觀音, 普賢, 達磨가 가장 많이 信仰된 듯싶다. 毅宗의 畫觀音, 白善淵의 畫觀音 40, 忠烈王의 畫觀音 12, 恭愍王의 畫觀音 等은 己述한 바요, 其外에 晉陽公 崔怡 所藏의 觀音(李相國集), 幻長老 所藏 韓生畫 白衣觀音(仝上) 水月觀音(大覺國師文集) 等이 觀音像으로 有名한 것이며, 普賢像으로서는 恭愍王의 童子普賢 白牙象圖(陶隱) 彗炤國師의 生母의 願成인 普賢像 五百㡧(同師碑文)이 有名하며, 達磨像으로는 恭愍王의 達磨蘆葉渡江圖(陶隱先) 李斗岾畫 達磨圖(陽村集) 達磨大師像, 達磨畫像㡧(李相國集) 等이 有名하며, 五百羅漢像으로서는 이미 叙述한 바 있다. 以外에 特殊한 畫題로 天竺國 天吉祥眞(大覺國師文集) 月潭長老 所藏의 涉公豊干圖(益齋集) 烟蘿子圖(牧隱集), 細布上畫行道天王 ▶P120-1圖(圖畵見聞錄) 等이 있으며, 金致陽이 十王寺에 그렸다는 怪奇한 圖像(麗史 列傳)은 佛敎圖像의 巫呪的 惡用의 一例요, 閔霽가 畫工으로 하여금 그리게 하였다는「僕隷制挺嗾犬遂僧巫狀圖」(麗史 列傳)는 反佛反神的 圖像으로 注意할 만하다.
각설 상술한 불화에 수법에 대하여서는 일찍이 화감에 "高麗畫觀音像甚工, 其源出唐尉遲乙僧, 筆意流而至於纖麗"라 평한 구가 있으니, 위지을승의 필의란 철요화법을 말함이나, 그 수법은 벌서 육조대에 즉 고구려 벽화에서도 이미 볼 수 있던 것으로 고려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요, "至於纖麗"라 한 것은 그 수법이 매우 저회적 산문적으로 흐름을 뜻한 것이나 이는 지나 자체의 송조부터 이미 그 경향이 있던 것이니, 유독 고려만의 결점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오히려 말하자면 너무 섬약에 흘렀다 함이 가능하다. 오늘날 잔존된 수점의 불화에서 보더라도 오도자류의 소위 난엽묘선의 계통에 속할 것과 고고유사적 구 붕묘법의 계통에 속하는 두 가지가 있으나, 혹은 선이 유약하고 혹은 선이 건조하여 다대(多大)한 가치를 인정하기 어려움은 사실이다. 임진역(壬辰役) 후에 일본에 유전된 고려 불화가 적지 않은데, 그중에 우수한 것은 소위 장사공(張思恭) 풍이라 하여 장사공의 화적으로 혼입된 것이 적지 않은 듯하나, 장사공 그 자신이 일류에 속할 대가가 아님에서도 고려 불화의 예술적 가치를 너무 높이 둘 수 없는 것 같다.
쪽수▶P120-2却說 上述한 佛畫에 手法에 對하여서는 일찍이 畫鑒에 「高麗畫觀音像甚工, 其源出唐尉遲乙僧, 筆意流而至於纖麗」라 評한 句가 있으니, 尉遲乙僧의 筆意란 凸凹畫法을 말함이나, 그 手法은 벌서 六朝代에 即 高句麗 壁畫에서도 이미 볼 수 있던 것으로 高麗에서 始作된 것이 아니요, 「至於纖麗」라 한 것은 그 手法이 매우 低徊的 散文的으로 흐름을 뜻한 것이나 이는 支那 自體의 宋朝부터 이미 그 傾向이 있던 것이니, 唯獨 高麗만의 缺点이라 할 수 없는 것이요, 오히려 말하자면 너무 纖弱에 흘렀다 함이 可하다. 오늘날 殘存된 數點의 佛畫에서 보더라도 吳道子流의 所謂 蘭葉描線의 系統에 屬할 것과 高古游絲的 拘硼描法의 系統에 屬하는 두 가지가 있으나, 或은 線이 柔弱하고 或은 線이 乾燥하여 多大한 價値를 認定하기 어려움은 事實이다. 壬辰役後에 日本에 流傳된 高麗佛畫가 적지 않은데, 그中에 優秀한 것은 所謂 張思恭風이라 하여 張思恭의 畫跡으로 混入된 것이 적지 않은 듯하나, 張思恭 그 自身이 一流에 屬할 大家가 아님에서도 高麗 佛畫의 藝術的 價値를 너무 높이 둘 수 없는 것 같다.
[조사영]불화와 함께 발전하여 인물화 발전의 직접 동기를 이룬 것은 조사의 진영이니, 이 또한 일찍이 신라대부터 유행되기 시작하였으나, 참으로 성행되기는 고려조에서라 할 것이다. 대각국사가 송제로부터 받은 천태교도 이본(동사 문집) 이장용이 저록한 선가종파도(여사 열전) 목은집에 보이는 조사 종파도, 인각사 선각국사비에 보이는 조도 이권 등은 모두 계도에 불과한 것이었을 것이나, 대각국사집에 보이는 불조도영, 계주장로진, 증원승통진, 안양사 능정승통진, 칠장사 혜소국사진, 경덕사 보덕성사영, 화엄사 연기조사영, 분황사 효성상(?) 부석사 상사영, 흥교사 신림조사영, 대각국사영, 이상국집에 보이는 가지산조사진, 수미산조사진, 성주산조사진, 소성거사진, 목은집에 보이는 식목수진, 환암진, 신륵사 선각국사진, 양촌집에 보이는 법왕사 화엄제조진, 익재집에 보이는 송광사 이국사진, 김석총람의 각탑비문 중에 보이는 봉암사 정진대사진, 고련사 원종대사진, 보원사 법인국사진, 광교원장기이사 및 해동륙조진, 옥룡사 선각국사진, 백련사 박보필 원묘 국사진, 신륵사 보제선사진, 휴휴암몽산진, 불갑사 각진 국사진, 이것들이 대개 문헌에 보이는 진영들이나, 현재 얼마나 이 중에 남아 있는지는 전연 의문이며, 그중에 신라대의 유적도 섞였을 법하나 문헌상으로만은 구별을 지을 수 없다.
쪽수▶P120-3〔祖師影〕 佛畫와 함께 發展하여 人物畫 發展의 直接 動機를 이룬 것은 祖師의 眞影이니, 이 亦 일찍이 羅代부터 流行되기 시작하였으나, 참으로 盛行되기는 麗朝에서라 할 것이다. 大覺國師가 宋帝로부터 받은 天台敎圖 二本(同師 文集) 李藏用이 著錄한 禪家宗派圖(麗史 列傳) 牧隱集에 보이는 祖師 宗派圖, 麟角寺 先覺國師碑에 보이는 祖圖 二卷 等은 모두 系圖에 不過한 것이었을 것이나, 大覺國師集에 보이는 佛祖圖影, 戒珠長老眞, 證遠僧統眞, 安養寺 能淨僧統眞, 漆長寺 彗炤國師眞, 景德寺 普德聖師影, 華嚴寺 緣起祖師影, 芬皇寺 曉聖像(?) 浮石寺 想師影, 興敎寺 神林祖師影, 大覺國師影, 李相國集에 보이는 迦智山祖師眞, 須彌山祖師眞, 聖住山祖師眞, 小性居士眞, 牧隱集에 보이는 息牧叟眞, 幻菴眞, 神勒寺 禪覺國師眞, 陽村集에 보이는 法王寺 華嚴諸祖眞, 益齋集에 보이는 松廣寺 李國師眞, 金石總覽의 各塔碑文 中에 보이는 鳳岩寺 靜眞大師眞, 高連寺 元宗大師眞, 普願寺 法印國師眞, 廣敎院獎基二師 及 海東六祖眞, 玉龍寺 先覺國師眞, 白蓮社 朴輔筆 圓妙 國師眞, 神勒寺 普濟禪師眞, 休休菴蒙山眞, 佛岬寺 覺眞 國師眞, 이것들이 大概 文獻에 보이는 眞影들이나, 現在 얼마나 이 中에 남아 있는지는 全然 疑問이며, 그中에 羅代의 遺跡도 섞였을 법하나 文獻上으로만은 區別을 지을 수 없다.

































본문2-2: (乙)儒敎畫


유화로서는 문선왕 10철 72제자상이 이미 신라 효소왕 16년에 지나로부터 수입되기 시작하였으나(삼국사기) 려조에 들어 유교 관계의 도상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성종 2년때 박사 임로성이 문선왕묘도 1포, 제기도 1권 등을 송으로부터 재래한 사실이다. 이후 선종 8년에 국학 벽상에 72현위를 그렸으며, 숙종 6년에는 문묘 좌우랑에 61자 21현을 그렸으며, 충렬왕 29년에는 안향이 김문정 강남에 보내어 선성 급 70제자의 화상을 구입한 것이 가장 유명한 사실로 되어 있다. 이상국집에는 사직성진이 화공으로 하여금 중니 안회 등 70현을 그리게 하였던 사실이 보이고, 다시 려사 안향 전에는 회헌이 주회암의 진을 게양하여 일석첨모하였던 기사가 있을 뿐이요, 유교에 관련된 것으로 마씨사친당도, 고금이십사효도 등 감계화가 양촌집에 보이며, 사마격옹도 같은 교화가 이상국 목은 양촌 등 문집에 보이고 간신거국도 같은 풍간도가 목은집에 보인다.
쪽수▶P121-2儒畫로서는 文宣王 10哲 72弟子像이 이미 新羅 孝昭王 16年에 支那로부터 輸入되기 시작하였으나(三國史記) 麗朝에 들어 儒敎 關係의 圖像이 第一 먼저 보이는 것은 成宗 2年때 博士 任老成이 文宣王廟圖 一鋪, 祭器圖 一卷 等을 宋으로부터 齎來한 事實이다. 以後 宣宗 8年에 國學 壁上에 72賢位를 그렸으며, 肅宗 6年에는 文廟 左右廊에 61子 21賢을 그렸으며, 忠烈王 29年에는 安珦이 金文鼎 江南에 보내어 先聖 及 70弟子의 畵像을 購入한 것이 가장 有名한 事實로 되어 있다. 李相國集에는 司直成眞이 畫工으로 하여금 仲尼 顔回 等 70賢을 그리게 하였던 事實이 보이고, 다시 麗史 安珦 傳에는 晦軒이 朱晦菴의 眞을 揭揚하여 日夕瞻慕하였던 記事가 있을 뿐이요, 儒敎에 關聯된 것으로 馬氏思親堂圖, 古今二十四孝圖 等 鑑戒畫가 陽村集에 보이며, 司馬擊瓮圖 같은 敎畫가 李相國 牧隱 陽村 等 文集에 보이고 諫臣去國圖 같은 諷諫圖가 牧隱集에 보인다.


































본문2-3: (丙)道教畫


고려도경에 의하면, 예종이 특히 도교신앙에 두터워, 정화년 중에 복원관 건립하고 그중에 삼청상을 봉안하였다 하여 「混元皇帝鬚髮皆紺色, 偶合聖朝圖繪眞聖貌像之意, 亦可嘉也」라 칭송하였을 뿐이요, 다른 예를 볼 수 없으나 도교적 의미를 가진 화상으로 사호화선(경렴정집) 희신도(남양시집) 신선배면도(가정집) 본국팔노도(도화견문지) 세화십장생도(목은집) 등을 들 수 있을까 한다.
쪽수▶P121-3 高麗圖經에 依하면, 睿宗이 特히 道敎信仰에 두터워, 政和年 中에 福源觀 建立하고 그中에 三淸像을 奉安하▶P122였다 하여 「混元皇帝鬚髮皆紺色, 偶合聖朝圖繪眞聖貌像之意, 亦可嘉也」라 稱頌하였을 뿐이요, 다른 例를 볼 수 없으나 道敎的 意味를 가진 畫像으로 四皓畫扇(景濂亭集) 喜神圖(南陽詩集) 神仙背面圖(稼亭集) 本國八老圖(圖畵見聞誌) 歲畫十長生圖(牧隱集) 等을 들 수 있을까 한다.


































본문2-4: (丁)神道畫


조선에 있어서 신도라 하면 곧 살만적 무격, 및 그에 부대된 신앙을 이름이요, 현금에도 그에 관계된 도상이 많이 이용되어 있는 점에서 고려조에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로되 문헌상 유례는 대단히 드물다. 려사 의종 16년조에 보이는 화계사건 충선왕 3년조에 보이는 화룡기 우 등을 그 예로 볼수 있고, 인종 9년에 서경 임원궁성 팔성당에 그린 화상은 도불신 삼자의 혼합형식으로 주목할 만하니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一曰 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舍利菩薩
二曰 龍圍嶽六通尊者實德釋迦佛
三曰 月城嶽天仙實德大辨天神
四曰 駒麗平壤仙人實德燃燈佛
五曰 駒麗木覓仙人實德毗婆尸佛
六曰 松嶽震主居士實德金剛索菩薩
七曰 甑城嶽神人實德勒叉天王
八曰 頭嶽天女實德不動優婆夷

등이 그것이다. 선인거사의 신앙은 도교적 신앙이요, 산악에 배치한것은 재래 산신사상과의 결합이요 그 신위의 본질(實德)을 밀교적 불보살로 해석한 것은 곧 불교적 요소의 혼합을 말함이니, 그만치 일종 특이한 도상을 이루었을 것이나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는 없다. 이밖에 신묘마다 회상이 있었을 것은 물론이나 도경의 오룡묘의 오신상만이 문헌에 보이는 유일한 예이다.
쪽수▶P122-2朝鮮에 있어서 神道라 하면 곧 薩滿的 巫覡, 및 그에 附帶된 信仰을 이름이요, 現今에도 그에 關係된 圖像이 많이 利用되어 있는 點에서 高麗朝에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로되 文獻上 遺例는 대단히 드물다. 麗史 毅宗 16年條에 보이는 畫鷄事件 忠宣王 3年條에 보이는 畫龍祈 雨 等을 그 例로 볼수 있고, 仁宗 9年에 西京 林原宮城 八聖堂에 그린 畫像은 道佛神 三者의 混合形式으로 注目할 만하니 麗史節要에 依하면
一曰 護國白頭嶽太白仙人實德文殊舍利菩薩
二曰 龍圍嶽六通尊者實德釋迦佛
三曰 月城嶽天仙實德大辨天神
四曰 駒麗平壤仙人實德燃燈佛
五曰 駒麗木覓仙人實德毗婆尸佛
六曰 松嶽震主居士實德金剛索菩薩
七曰 甑城嶽神人實德勒叉天王
八曰 頭嶽天女實德不動優婆夷
等이 그것이다. 仙人居士의 信仰은 道敎的 信仰이요, 山岳에 配置한것은 在來 山神思想과의 結合이요 그 神位의 本質(實德)을 密敎的 佛菩薩로 解釋한 것은 곧 佛敎的 要素의 混合을 말함이니, 그만치 一種 特異한 圖像을 이루었을 것이나 具體的으로 想像할 수는 없다. 이밖에 神廟마다 繪像이 있었을 것은 勿論이나 圖經의 五龍廟의 五神像만이 文獻에 보이는 唯一한 例이다.


































본문3: (戊)自由畫


자유화라 함은 종교, 감계, 실용 등, 체용적 의미에서 떠나 순수 독립적 의미를 갖고 발전한 것을 이름이니 지나에서는 벌써 동진 이후에 발전되기 시작하였으나, 조선서는 언제부터 발전되었는지 의문이요, 진흥왕대 사람이라 하며 또는 신문왕대 사람이라 하는 솔거가 황룡사벽에 노송을 그렸다 하며 선덕왕대에 당조로부터 모란도가 왔다 하니, 삼국 말기에는 이미 자유화가 있었던 듯하나 그 이후 다시 차종 자유화의 화전이 있음을 들을 수 없으니 자유화의 참다운 발전은 이 또한 고려조에 있었다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순서를 따라 그 화적을 찾아볼까 한다.
쪽수▶P122-3自由畫라 함은 宗敎, 鑑戒, 實用 等, 體用的 意味에서 떠나 純粹 獨立的 意味를 갖고 發展한 것을 이름이니 支那 ▶P123-1에서는 벌써 東晉 以後에 發展되기 시작하였으나, 朝鮮서는 언제부터 發展되었는지 疑問이요, 眞興王代 사람이라 하며 또는 神文王代 사람이라 하는 率居가 皇龍寺壁에 老松을 그렸다 하며 善德王代에 唐朝로부터 牡丹圖가 왔다 하니, 三國 末期에는 이미 自由畫가 있었던 듯하나 그 以後 다시 此種 自由畫의 畫傳이 있음을 들을 수 없으니 自由畫의 참다운 發展은 이 亦 高麗朝에 있었다 할 수 밖에 없다. 이제 順序를 따라 그 畫跡을 찾아볼까 한다.
(갑) 산수화
산수화의 명인으로 근역서화징에는 명종, 석혜근, 공민왕, 이광필, 윤평 등이 보이나, 필화합보에는 정지상도 그 한 사람으로 들었고, 산수화적을 남긴 자로 근역서화징에는 이녕의 산수도, 예성강도, 명종 시의 소상팔경도(李光 필필?) 윤평의 12복산수도, 공민왕의 추산도, 산수도 택혜근의 산수도, 류방선의 산수도 등이 보이나, 류방선은 홍무무진생으로 이조 태종조 5년에 등과하였은즉 고려의 화가로 치기 어렵다. 이외에 목은집에는 청산백운도, 산수도가, 제산수도, 산수소도, 산수도, 절동파연강첩장도시구, 우사재송수묵산수팔첩병풍, 기타 다수한 산수도가 보이며, 양촌집에는 연산로인 관산행려도, 천태복 암상인수권도 등이 보이며, 가정집에는 강촌막설도 등이 보이고, 기타 문집에 산수도가 많이 보이나, 거개 지나의 화적이므로 여기에 들지 않는다.
쪽수▶P123-2(甲) 山水畫
山水畫의 名人으로 槿域書畵徵에는 明宗, 釋惠勤, 恭 愍王, 李光弼, 尹泙 等이 보이나, 筆畵合譜에는 鄭知常도 그 一人으로 들었고, 山水畵跡을 남긴 자로 槿域書畵徵에는 李寧의 山水圖, 禮成江圖, 明宗 時의 瀟湘八景圖(李光 弼筆?) 尹泙의 12福山水圖, 恭愍王의 秋山圖, 山水圖 澤惠勤의 山水圖, 柳方善의 山水圖等이 보이나, 柳方善은 洪武戊辰生으로 李朝 太宗朝 5年에 登科하였은즉 高麗의 畫家로 치기 어렵다. 以外에 牧隱集에는 靑山白雲圖, 山水圖歌, 題山水圖, 山水小圖, 山水圖, 節東波烟江疊嶂圖詩句, 禹四宰送水墨山水八疊屛風, 其他 多數한 山水圖가 보이며, 陽村集에는 燕山老人 關山行旅圖, 天台𩡊庵上人手卷圖 等이 보이며, 稼亭集에는 江村幕雪圖 等이 보이고, 其他 文集에 山水圖가 많이 보이나, 擧皆 支那의 畫跡이므로 여기에 들지 않는다.
(을) 궁전누각도
이 예는 그리 많지 않으니, 이녕의 천수원남문도, 공민왕의 아방궁도가 가장 유명한것이며, 윤평의 산수도병 중의 범찰가궁 등왕각 황학루 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근역서화징각인전)
쪽수▶P123-3 (乙) 宮殿樓閣圖
이 例는 그리 많지 않으니, 李寧의 天壽院南門圖, 恭愍王의 阿房宮圖가 가장 有名한것이며, 尹泙의 山水圖屛 中의 梵刹伽宮 滕王閣 黃鶴樓 等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槿域書畵徵各人傳)
(병) 화훼령모도
이 예는 이상국집에 박문수가 장화 모단, 중서역사 장단도, 월사방장화 족협죽 도화 요화 백로도, 박현구가장화 반송병, 귀일상인 소화 노회병풍, 보제사 청사벽노송도, 목은집에 고화연작병풍, 양촌집에 이구령가장, 석화원, 해송권자 백첨 오죽도, 매호집에 화선반송 등이 보이니, 그중에 귀일상인은 회송으로 가장 유명하였다. 동물화로는 화마가 가장 많은 편으로 가정집의 송제주 육릉도, 당태종륙준도 등은 고려의 진적이 아닐 듯싶으나, 이상국집에 쌍마도, 목은집에 화마 등이 보이며, 그 외에 분상인 소축신룡도(목은집○) 화호, 박현구가장 쌍로도, 온상인소축 독화로로도, 양연사 소축 백학도, 정득공의 화리 등(이상국집)이 있으니 정득공은 화리의 대가였다. 포은집에 화응기사가 다소 보이나 고려의 화적이 아닌 듯하다.
쪽수▶P123-4(丙) 花卉翎毛圖
이 例는 李相國集에 朴文秀家 藏畫 牡丹, 中書譯史 壯丹圖, 月師方丈畫 簇夾竹 桃花 蓼花 白鷺圖, 朴玄球家藏畫 盤松屛, 歸一上人 所畫 老檜屏風, 普濟寺 聽事壁老松圖, 牧隱集에 古花燕雀屛風, 陽村集에 李九齡家藏, 析▶P124-1花園, 海松卷子 伯瞻 梧竹圖, 梅湖集에 畫扇蟠松 等이 보이니, 그중에 歸一上人은 檜松으로 가장 有名하였다. 動物畫로는 畫馬가 가장 많은 편으로 稼亭集의 宋祭酒 六陵圖, 唐太宗六駿圖 等은 高麗의 盡跡이 아닐 듯싶으나, 李相國集에 雙馬圖, 牧隱集에 畫馬 等이 보이며, 其外에 玢上人 所蓄神龍圖(牧隱集○) 畫虎, 朴玄球家藏 雙鷺圖, 溫上人所蓄 獨畫鷺鷺圖, 養淵師 所蓄 白鶴圖, 鄭得恭의 畫鯉 等(李相國集)이 있으니 鄭得恭은 畫鯉의 大家였다. 圃隱集에 畫鷹記事가 多少 보이나 高麗의 畫跡이 아닌 듯하다.
(정) 금기도서도
이 예로서는 삼봉집에 「萊州城南驛館婦人琴珙書畵圖四疊屛」의 일례가 있다.
쪽수▶P124-2(丁) 琴琪圖書圖
이 例로서는 三峯集에 「萊州城南驛館婦人琴珙書畵圖四疊屛」의 一例가 있다.
(무) 사군자도
사군자 중에서는 묵죽이 가장 성행하였으니, 이는 그 연유된 바가 있다 하겠다. 정창 저 중국화학전사에

元代四君子畫, 尤以墨竹爲最盛, 能作此类之畫家, 其泯滅不可考者 不可知, 以其可考者而言, 其數實占 元代畫家三分之二, 雖以其用筆簡略易於學習所致, 然亦因國勢民心之特有情感, 有以使然, 由厭世而逃於閒放, 以爲簡淡超逸, 如此類之繪畫, 爲易表其情感, 而 群習之也 云云

이라 한 바가 그것이다. 그러나 묵죽은 원대에서 더욱 성행되었다 할지언정, 벌서 송대 부부도 성행되었던 것이니 현대문주14▶려조에서도 일찍이 묵죽의 대가로 김돈중 김군수의 부자 정서[a 14], 안치민, 이인로, 정홍진, 이암, 옥서침, 석행, 석풍, 석축분 등이 있었다. 이 밖에 정지상, 차원과는 화매로 유명하고 옥서침은 화란으로 유명하고, 석축분은 난죽매혜를 다 잘하였다.
쪽수▶P124-3(戊) 四君子圖
四君子 中에서는 墨竹이 가장 盛行하였으니, 이는 그 緣由된 바가 있다 하겠다. 鄭昶 著 中國畵學全史에
元代四君子畫, 尤以墨竹爲最盛, 能作此类之畫家, 其泯滅不可考者 不可知, 以其可考者而言, 其數實占 元代畫家三分之二, 雖以其用筆簡略易於學習所致, 然亦因國勢民心之特有情感, 有以使然, 由厭世而逃於閒放, 以爲簡淡超逸, 如此類之繪畫, 爲易表其情感, 而 群習之也 云云
이라 한 바가 그것이다. 그러나 墨竹은 元代에서 더욱 盛行되었다 할지언정, 벌서 宋代부부도 盛行되었던 것이니 원문주14▶麗朝에서도 일찍이 墨竹의 大家로 金敦中 金君綏의 父子 鄭叙[14], 安置民, 李仁老, 丁鴻進, 李嵒, 玉瑞琛, 釋行,釋豐, 釋竺芬 等이 있었다. 이밖에 鄭知常, 車原顆는 畫梅로 有名하고 玉瑞琛은 畫蘭으로 有名하고, 釋竺芬은 蘭竹梅蕙를 다 잘하였다.
(기) 은일도
이 종류의 회화로서는 유영 이백 권주도(이상국집) 이상국장진양도(파한집) 수경당상재강, 백첨조수도(양촌집) 범승상맥주도, 김백안방문정공의전댁도(근재집) 일본승중 암서리행월하등우도, 도잠채국도(기우자집) 초비도 (삼숭집) 기우도(려사조운흘전) 박자운화이상귀휴도(동문선) 등이 있다.
쪽수▶P124-4(己) 隱逸圖
이 種類의 繪畫로서는 劉伶李白勸酒圖(李相國集) 李相國藏晋陽圖(破閑集) 壽慶堂桑梓岡, 伯瞻釣叟圖(陽村集) 范丞相麥舟圖, 金伯顏訪文正公義田宅圖(謹齋集) 日本僧中 庵書李行月下▶P125-1腾牛圖, 陶潜採菊圖(騎牛子集) 樵斐圖 (三崇集) 騎牛圖(麗史趙云仡傳) 朴子雲畫二相歸休圖(東文選) 等이 있다.
(경) 유연계회도
이 종류의 회화는 일찍이 고려사 숙종 5년 조에 당 현종 타구도 시라는 것이 보이나, 그 화폭이 있었는지 의문이며 충렬왕 22년조에 향각 벽상에 당 현종 야연도가 있었음은 유명한 사실이요, 예종 11년에는 투호의도를 찬한 바 있으나, 이는 자유화에 속할 것이 아닌 듯싶다. 그러나 가장 주의할 것은 계탐도의 발생이니, 조선에서 가장 시초를 이룬 것은 신종조의 최당의 계회도이다. 양촌집에

耆英會尙矣, 唐之白樂天, 宋之文潞公, 俱有洛中之會, 當時稱美, 作圖以傳之, 吾東方 在前朝盛時, 大尉崔公讜, 號變明齋, 與其士大夫之老而自逸者七人, 慕二公之事, 始爲海東耆英之會, 約每月逐旬一集, 惟以觴詠自娛, 語不及臧否得失, 厥後踵而繼之者, 爲佞佛之席, 至使老者, 僕僕而亟拜, 殊失君子知命不感, 優游自樂之意矣, 今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李公閱家中舊書得其先人所藏雙明齋耆英會圖序, 云云

이라 함이 있으니 이는 고려사 최당열전에

(神宗時)上章乞退, 遂致仕閑居, 扁其齋曰雙明, 與弟太傅詵及太僕卿致仕張自牧, 東宮侍讀學士高瑩中, 判秘書省致仕白光臣, 守司空致仕李俊昌, 戶部尙書致 仕玄德秀, 守司空致仕李世長, 國子監大司成致仕趙通等 爲耆老會, 逍遙自適, 時人謂之地上仙, 圖形刻石, 傳於世, 云云

이라 함과 부합되는 사실로 동문선 이인로제 이전해동기노도후서에─"况乎太尉公作詩, 以增益其光價歟"란 구가 있음으로서 전후의 문맥이 요요상부하는 귀중한 자료이었으나, 도본이 잔존되어 있을지 의문이다. 양촌집에도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선례가 있은 후로부터 계회도는 많이 작성되었을 것이나 채홍철, 권부 등 팔노의 기영회는 자하동곡의 신곡까지 작출한 데서 유명하고, 곡성 부원군의 원암무집도(목은집) 정미갑전도(경렴정집) 등 려말에 돌면서부터 점점 늘어 이조에 들어와서는 더욱 성행된 것이 있다. 국재 권부가 광종 이래의 장시장원을 도록하여 교원록이라한 예는 다르나 이곳에 붙여둔다.(고려사열전)
쪽수▶P125-2(庚) 遊宴契會圖
이 種類의 繪畫는 일찍이 麗史 肅宗 5年 條에 唐 玄宗 打毬圖 詩라는 것이 보이나, 그 畫幅이 있었는지 疑問이며 忠烈王 22年條에 香閣 壁上에 唐 玄宗 夜宴圖가 있었음은 有名한 事實이요, 睿宗 11年에는 投壺儀圖를 撰한 바 있으나, 이는 自由畫에 屬할 것이 아닌 듯싶다. 그러나 가장 注意할 것은 契貪圖의 發生이니, 朝鮮에서 가장 始初를 이룬 것은 神宗朝의 崔讜의 契會圖이다. 陽村集에
耆英會尙矣, 唐之白樂天, 宋之文潞公, 俱有洛中之會, 當時稱美, 作圖以傳之, 吾東方 在前朝盛時, 大尉崔公讜, 號變明齋, 與其士大夫之老而自逸者七人, 慕二公之事, 始爲海東耆英之會, 約每月逐旬一集, 惟以觴詠自娛, 語不及臧否得失, 厥後踵而繼之者, 爲佞佛之席, 至使老者, 僕僕而亟拜, 殊失君子知命不感, 優游自樂之意矣, 今領司平府事西原府院君李公閱家中舊書得其先人所藏雙明齋耆英會圖序, 云云
이라 함이 있으니 이는 高麗史 崔讜列傳에
(神宗時)上章乞退, 遂致仕閑居, 扁其齋曰雙明, 與弟太傅詵及太僕卿致仕張自牧, 東宮侍讀學士高瑩中, 判秘書省致仕白光臣, 守司空致仕李俊昌, 戶部尙書致 仕玄德秀, 守司空致仕李世長, 國子監大司成致仕趙通等 爲耆老會, 逍遙自適, 時人謂之地上仙, 圖形刻石, 傳於世, 云云
이라 함과 符合되는 事實로 東文選 李仁老題 李佺海東𦒿老圖後序에 「─况乎太尉公作詩, 以增益其光價歟」란 句가 있음으로서 前後의 文脉이 耀耀相傅하는 貴重한 資料이었으나, 圖本이 殘存되어 있을지 疑問이다. 陽村集에도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先例가 있은 後로부터 契會圖는 많이 作成되었을 것이나 蔡洪哲, 權溥 等 八老의 耆英會는 紫霞洞曲의 新曲까지 作出한 데서 有名하고, 曲城府院君의 ▶P126-1元岩廡集圖(牧隱集) 丁未甲槇圖(景濂亭集) 等 麗末에 돌면서부터 漸漸 늘어 李朝에 들어와서는 더욱 盛行된 것이 있다. 菊齋 權溥가 光宗 以來의 掌試壯元을 圖錄하여 校苑錄이라한 例는 다르나 이곳에 붙여둔다.(麗史 列傳)
(신) 실경사생도
이 종류의 회화로서는 목종 10년에 탐라의 화산상황을 그린 전공지의 화산도, 인종조의 이영의 천수원남문도, 예성강도, 숙종 4년의 위왕관서이원, 고종 12년의 권응경의 왜형도, 충렬왕 30년의 금강산도, 공민왕 14년의 정릉의위차제급산릉제도도 등이 려사에 보인다.
쪽수▶P126-2(辛) 實景寫生圖
이 種類의 繪畫로서는 穆宗 10年에 耽羅의 火山狀況을 그린 田拱之의 火山圖, 仁宗朝의 李寧의 天壽院南門圖, 禮成江圖, 肅宗 4年의 魏王舘瑞異圓, 高宗 12年의 權應經의 倭形圖, 忠烈王 30年의 金剛山圖, 恭愍王 14年의 正陵儀衛次弟及山陵制度圖 等이 麗史에 보인다.
이상 실경사생화 중에는 자유화로 인정할 수 없는 것도 섞이었으나, 하여간에 상술한 바에서 보면, 문헌에 나타난 화도가 그 수 적다 못할 것이니 지금에 어느 정도까지 잔존되었는지 전연 의문이요 현재 이왕직 박물관에 고려화로 추정되어있는 백진도라는 고화 일폭이 있고, 경성 오봉빈 씨에게 공민왕의 누각산수도(소위 아방궁도라고도 한다)란 것이 일폭 있으나, 필자는 도무지 미상한 것들이요, 후자는 '장치지인', '주량진장' 등의 인문이 있어 지나 인명들인 듯한 데서 더욱 검토를 받아야 할 것이다. 또 공민왕 필로 전하는 천산대렵도는 지금 이왕직 총독부 양 박물관에 분폭단간으로 남아 있어 고려화를 위하여 만장의 기도을 토하고 있다.
쪽수▶P126-3以上 實景寫生畫 中에는 自由畫로 認定할 수 없는 것도 섞이었으나, 何如間에 上述한 바에서 보면, 文獻에 나타난 畫圖가 그 數 적다 못할 것이니 지금에 어느 程度까지 殘存되었는지 全然 疑問이요 現在 李王職 博物館에 高麗畫로 推定되어있는 百珍圖라는 古畫 一幅이 있고,京城吳鳳彬 氏에게 恭愍王의 樓閣山水圖(所謂阿房宮圖라고도 한다)란 것이 一幅 있으나, 筆者는 도무지 未詳한 것들이요, 後者는 「張治之印」「周亮珍藏」 等의 印文이 있어 支那人名들인 듯한데서 더욱 檢討를 받아야 할 것이다. 또 恭愍王筆로 傳하는 天山大獵圖는 지금 李王職 總督府 兩博物館에 分幅斷簡으로 남아 있어 高麗畫를 爲하여 萬丈의 氣熖을 吐하고 있다.









































본문4: 四.實用畫


(갑) 천문지리도
천문도로서는 려사 공민왕 15년조에 봉선사성상도라는 것이 보이고, 현대문주15▶양촌집에 평양 소재 석각천문도[a 15]라는 것이 보이며, 지리도로서는 려사 의종 2년에 유공식가장고려지도, 문종 25년에 민부시랑 김제가 입송시에 통과한 주현을 그렸다는 지도(三峯集) 려사 충렬왕 7년조의 고려지도, 동왕 17년조의 요동수정도(절요), 윤청가 찬진한 오천축국도, 공민왕대 나흥유가, 찬진한 중원 급 본국지도(려사), 동왕대의 함주지도(절요), 화이도 (이상국집), 민총랑 소지의 후소지도(목은집), 여진지도(포은집) 등이 현대문주16▶있다.[a 16]
쪽수▶P126-4(甲) 天文地理圖
天文圖로서는 麗史 恭愍王 15年條에 奉先寺星象圖라는 것이 보이고, 원문주15▶楊村集에 平壤 所在 石刻天文圖[15]라는 것이 보이며, 地理圖로서는 麗史 毅宗 2年에 柳公植家藏 高麗地圖, 文宗 25年에 民部侍郎 金悌가 入宋時에 通過한 州縣을 그렸다는 地圖(三峯集) 麗史 忠烈王 7年條의 高麗地圖, 同王 17年條의 遼東水程圖(節要), 尹請가 撰進▶P127-1한 五天竺國圖, 恭愍王代 羅興儒가, 撰進한 中原 及 本國地圖(麗史), 同王代의 咸州地圖(節要), 華夷圖 (李相國集), 閔摠郞 所持의 後蘇地圖(牧隱集), 女眞地圖(圃隱集) 등이 원문주16▶있다. [16]
(을) 경뢰도
광종 10년 후주에 보낸 효경자웅도, 문종 10년에 이정 공이 찬진한 신조삼례도 54판, 의종 8년에 송조에 보낸 이아도 2권, 삼조황도 1권, 영헌도 1권, 사마 법한국 1권, 예종 11년의 투호의도, 민지의 세계도, 권근의 입학도설, 해인사 소장와 삼례도, 악기도(이상 여사), 정도전의 진맥도(도은집) 등이 있으나 불교 방면의 조사 종파도와 같이 순수회화에 속하지 못할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쪽수▶P127-2(乙) 經籟圖
光宗 10年 後周에 보낸 孝經雌雄圖, 文宗 10年에 李靖恭이 撰進한 新雕三禮圖 54板, 宜宗 8年에 宋朝에 보낸 爾雅圖 2卷, 三朝黃圖 1卷, 靈憲圖 1卷, 司馬 法漢國 1卷, 睿宗 11年의 投壺儀圖, 閔漬의 世係圖, 權近의 入學圖說, 海印寺 所藏와 三禮圖, 樂器圖(以上 麗史), 鄭道傳의 診脉圖(陶隱集) 等이 있으나 佛敎 方面의 祖師 宗派圖와 같이 純粹繪畫에 屬하지 못할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병) 기타잡화
기타의 실용주로서 건축 고분 기명 복식 기치 등의 식화를 들 수 있으나, 각기 특별한 주제를 찾기 어렵다. 복식 족치의 식화는 려사 지제의 여복 치부조와 고려도경의 기직공장조에 보이나, 물론 순수한 회화가 아니요 대개 ○화이었을 듯하며, 기명에는 화탁 화상 화초 화번 기타 여러가지 종류는 보이나 이 또한 특별한 화제가 문헌에 남아 있지 않고 그중에 화선에 대하여는 고려도경에 "畫榻扇, 金銀塗飾, 復繪其國山林人馬女子之形, 麗人不能之云是日本所作, 觀其所繢饋衣物, 信然"이라 하여 고려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다시 이곳에 추거할 바 아니나 그러나 매호집 경렴정집 등에 화선례가 보이니 (기술한 화선반송사호화선등) 고려에 화선이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시 추구하지 않고 불사건축 등의 벽화는 실용화라느니보다 종교화에 속할 것들이 많았으므로 그 또한 이곳에 추거하지 않으나, 다만 려사절요 문종 원년조에 대묘문도가 보이니 "門下省奏, 謹按前典戟之爲制, 如槍兩岐, 施刃其端, 魏武帝門戟用蝦蟆頭, 以懸幡旒, 長一丈二尺, 雜以靑黃,今宮殿及大廟門, 戟皆作鬼面, 實無所據, 乞依古制, 改畫爲蝦蟆頭"라는 것이 그것으로 건축식화의 구체적 일례로 주목할 만하다.
쪽수▶P127-3(丙) 其他雜畫
其他의 實用晝로서 建築 古墳 器皿 服飾 旗幟 等의 飾畫를 들 수 있으나, 各其 特別한 晝題를 찾기 어렵다. 服飾 族幟의 飾畫는 麗史 志第의 輿服 歯簿條와 高麗圖經의 旗織供張條에 보이나, 勿論 純粹한 繪畫가 아니요 大槪 ○畫이었을 듯하며, 器皿에는 畫卓 畫床 畫鞘 畫蕃 其他 여러가지 種類는 보이나 이亦 特別한 畫題가 文獻에 남아 있지 않고 그중에 畫扇에 對하여는 高麗圖經에 「畫榻扇, 金銀塗飾, 復繪其國山林人馬女子之形, 麗人不能之云是日本所作, 觀其所繢饋衣物, 信然」이라 하여 高麗의 產物이 아닌 것으로 되어 있으니, 다시 이곳에 推擧할 바 아니나 그러나 梅湖集 景濂亭集 等에 畫扇例가 보이니 (己述한 畫扇蟠松四皓畫扇等) 高麗에 畫扇이 全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다시 追究하지 않고 佛寺建築 等의 壁畫는 實用畵라느니보다 宗敎畫에 屬할 것들이 많았으므로 그亦 이곳에 推擧하지 않으나, 다만 麗史節要 文宗 元年條에 大廟門圖가 보이니 「門下省奏, 謹按前典戟之爲制, 如槍兩岐, 施刃其端, 魏武帝門戟用蝦蟆頭, 以懸幡旒, 長一丈二尺, 雜以靑黃,今宮殿及大廟門, 戟皆作鬼面, 實無所據, 乞依古制, 改畫爲蝦蟆頭」라는 것이 그것으로 建築飾畫의 具體的 一例로 注目할 만하다.
고유 고려화적-1.png
쪽수▶P128
고유 고려화적-1.png












































본문5: 結語


하나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회화미술, 그 자체의 내용가치, 정신가치 특징을 찾자면 회화미술의 문학화라는 것을 들수있다. 환언하면 회화미술의 「로만티씨슴」의 발생이다. 화제에서 볼때 은일도, 유연계회도, 사군자도 등의 발생이 그것이며 섭공풍간연라자 등도 종교화의 문학화의 현상이다. 이것을 예술적 상념에서 볼 때 시화 일치론이 그것이니, 익재집에

東坡題韓幹十四馬云, 韓生畫馬眞是馬, 蘇子作詩見畫(○○○○○○) 世無伯樂亦無韓, 此詩此畫誰當看(○○○○○○○), 李文順公題鷺鶿圖云, 畫難人人畜, 詩可處處布, 見詩如見畫(○○○○○), 亦足傳萬古, 語雖不作(○○○○), 其用意同也(○○○○○)

라 한것이 하필 소동파만의 회화관이 아니요, 이규보만의 회화관이 아니요, 익재의 회화관이 되는 동시에 고려 일반의 회화관도 된다. 이것을"畫老松於皇龍寺壁烏雀往徃飛人"이라던 신라대의 회화관과 대조하면 회화의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의 커다란 변통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고려화의 특색이다.
쪽수▶P129하나이라 하겠다. 그러나 무엇보다 繪畫美術, 그 自體의 內容價値, 精神價値 特徵을 찾자면 繪畫美術의 文學化라는 것을 들수있다. 換言하면 繪畫美術의 「로만티씨슴」의 發生이다. 畵題에서 볼제 隱逸圖, 遊宴契會圖, 四君子圖 等 發生이 그것이며 涉公豊干烟蘿子 等도 宗敎畫의 文學化의 現象이다. 이것을 藝術的 想念에서 볼제 詩畫 一致論이 그것이니, 益齋集에 東坡題韓幹十四馬云, 韓生畫馬眞是馬, 蘇子作詩見畫 世無伯樂亦無韓, 此詩此畫誰當看, 李文順公題鷺鶿圖云, 畫難人人畜, 詩可處處布, 見詩如見畫, 亦足傳萬古, 語雖不作, 其用意同也라 한것이 何必 蘇東坡만의 繪畫觀이 아니요, 李奎報만의繪畵觀이 아니요, 益齋의 繪畵觀이 되는 同時에 高麗 一般의 繪畵觀도 된다. 이것을 「畫老松於皇龍寺壁烏雀往徃飛人」이라던 羅代의 繪畵觀과 對照하면 繪畫의 客觀 主義에서 主觀主義로의 커다란 變通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무엇보다도 큰 高麗畫의 特色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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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槿域書畵徵에는 獻宗을 들지 않았으나, 高麗史에는「性聰彗九歲好書畵」라 하였고, 또「王幼沖, 不知修省, 只引內醫三四人, 討問方書, 或習書畵」라 하다.
  2. 이 亦 槿域書畵徵에는 書家로서 만들었으나, 高麗史에는 「自少多才壽, 曉音律善書畵」라 하였다.
  3. 金安老 龍泉談寂記에 「高麗忠宣王在燕邸,構萬巷堂, 召李齊賢置府中, 與元學士姚遂·閻復·元明善·趙孟頫遊, 圖籍之傳多所闡秘, 其後, 魯國大長公主之來, 凡什物器用簡冊書畫等, 物船載浮海, 今時所傳妙繪寶軸, 多其時出來云」 라 하여 同樣외 意見을 볼 수 있다.
  4. 그 例는 槿域書畵徵에서 찾아볼지어다.
  5. 朝鮮金石總覽上, 智勒寺廣智大禪師墓誌.
  6. 高麗古都徵 5
  7. 陵墓附近에 願刹을 세우고, 또는 死者의 冥福을 爲하여 따로이 願刹을 經營하였음은 이미 羅代부터 있었고 寺刹에 王의 眞影을 奉安한 事實도 三國史記 弓裔傳에 보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意〿的이오 또 具體的으로 實行되었던 것인지는 疑問이다.
  8. 補閑集」 毅王遜于南荒,有李琪者善畵,寫眞不題,稱謂安於東都草堂,朝夕禮事」 云云.
  9. 麗史 忠烈王 23年 及 24年.
  10. 麗史 后妃列傳.
    「王手寫公主眞, 日夜對食,悲泣三年).
  11. 槿域書畵徵 恭愍王條 叅照.
  12. 麗史 尹澤列傳.
  13. 益齋集에는 「古杭吳壽山 一本作陳鑑如誤也」 라 있지만 現在 殘存된 原幅에는 確實히 陳鑑如의 畵蹟으로 되어있으니, 一般의 參考를 爲하여 賛記를 이곳에 轉載한다. 다만 漫漶되어야 不明한 것은 文集에 依하여 □表로써 補讀하였다.
    延祐[己][未]余年二十三[從][於]忠宣王降」 香江浙」 王召 [古]杭陳鑑如寫陋容而[湯][北]村」 爲之贊北歸爲人借觀因[失][所]在」 後[三]十一年奉國表如京師復得」之邵驚老壯之 異貌感離合[之]有」 時使韓國(?)雲把筆口占四十字爲識」 我昔留形影靑青兩[鬢]春[流]傳」 幾歲月邂逅[尙]精神此物」 非他物前身定後身兒孫」 渾不識相間是何人」 益齋」 車書其同禮[樂][其]東光岳其鍾爲人之宗爲世之雄」 爲儒之通氣正而洪貌儼而恭言慎而從恢恢乎容溫溫乎」 融挺挺乎中於學則充於道則 隆於文則豐存心而忠臨」 政以公輔國以功命而登庸瞻而和衷 從而雍時」延祐己未鞠月望日北村老民湯炳龍書于錢塘保和 讀(?)易齋時年七十有九(???)
    安珦의 畵像에 關하여는 그의 發見者인 栢原昌三氏가 朝鮮史 講座에 詳細한 紹介와 考證을 하여, 原本이 元人의 所作으로 三幅이나 있었음을 말하였으나, 畵贊記에 對한 紹介가 없으므로 이 亦 參考로 들어둔다.
    宣授高麗國儒學提擧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贈諡文成公安珦 眞」 越延祐五年二月日降」 宥旨其日云都僉議中贊修文殿大」 學土安珦有崇設學校之功亦於」夫子廟庭圖形致祭桑鄉興州守□」 郎崔琳依其目摹寫一軀將安之」 于鄉校時嗣子于器□承乏鎭邊崔」 君送以示之□□焚香拜手乃爲」 贊曰」 先君當日振儒風」 上命圖形」 文廟中一幅丹靑[照][桑]梓四時還」 豆答膚功」 □年秋九月 日賛」 慶尙全羅道巡察鎭邊傅匡靖大夫檢校僉講評理兼判典議寺事上護軍安于瑀拜題」
  14. 槿域書畵徵에는 金富軾이 墨竹을 잘한 例로 破閑集의 「樞府金立之詞翰外, 尤工墨, 君嘗以湘岸兩叢, 獻大宗伯崔相國」 云云의 句를 들고 다시 「或曰, 立之非雷川之字, 乃其子敦中之字云, 然未有確據, 姑從大東韻玉」이라 하여 立之를 富軾의 子로 看做하였으나, 破閑集의 前句에는 이어서 곧 「金壯元君綏, 即其子也, 得其家法甚妙」라 하였고 補閑集에는 「崔文淑公典試, 金承宣立之擢第龍頭, 文淑公之嗣, 文懿公典試, 金承宣之子諫議君綏又中壯元, 諫議才識富膽, 墨竹傳家, 筆法不凡」이라 있은즉 金君綏는 곧 金敎中의 子요 立之는 곧 金敎中의 字임을 알 수 있으니 書畵微의 立之를 富軾의 字로 봄이 誤謬요, 同時에 金富軾을 能畵列傳숙에 編入한 것은 「傳家筆法」이란 데서 或 그리할 수도 있을 듯하나 멀리 乃祖에까지 推定함은 過斷에 屬 할 듯싶다.
  15. 昨年 12月頃에 平壤서 洪武 28年의 氾文이 있는 石 刻天文圖가 發見되었다는 消息이 新聞에 揭載된 바 있었으니 이는 推測컨댄 陽村集 天文圖詩에 「右天文圖石本 舊在平壤城, 因兵亂沉于江而失之, 歲月旣久, 其印本之存者, 亦絕無矣, 惟我殿下, 受命之初, 有以一本投進者, 殿下寳重之, 命書雲觀重刻干石本, 觀上言, 此圖, 歲久星己差, 宜更推步以定, 令四仲昏曉之中, 勒成新以示于後, 上以爲然, 越乙亥夏六月, 新修中星記一編以進(中略)於是 仍舊圖改中星鐫石, 甫訖, 乃命臣近, 誌其後(中略) 洪武28年冬10有2月日」이라 있는 그 石本의 複寫本인가 한다 筆者는 보지 못하였으므로 斷言하지 않거니와 이곳 今論에 例舉한 것은 勿論 舊圖를 뜻하기 爲함이다.
  16. 本報 第一輯 金庠基氏의 「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就하여」의 一의 註六 中 蘇東坡의 論高麗 買書利害箚子文에 「今使者所至, 圖畵山川形勝, 窺測虛實云云이란 記가 있음을 말하였으니 高麗畵工의 손에서 製畵된 中國地圖가 相當히 있었을 법하다.
    附記 이 論文에서 舉例한 畵種은 筆者가 極히 局限된書籍에서 觸目된 바를 羅列함에 不過하였은즉 充分하지 못함을 이어 自量하는바이요 그중에도 外來의 畵跡을 問題삼지 않았으니 그에 對하여는 學海 第一輯(京城帝大 文科助手會編)에 실린 「高麗時代の繪畵の外國との交涉」라는 拙稿를 參考하기 바란다.






현대문주


  1. 근역서화징에는 헌종을 들지 않았으나, 고려사에는「性聰彗九歲好書畵」라 하였고, 또 「王幼沖, 不知修省, 只引內醫三四人, 討問方書, 或習書畵」라 하다.
  2. 이 또한 근역서화징에는 서가로서 만들었으나, 고려사에는 「自少多才壽, 曉音律善書畵」라 하였다.
  3. 김안로 용천담적기에 「高麗忠宣王在燕邸,構萬巷堂, 召李齊賢置府中, 與元學士姚遂·閻復·元明善·趙孟頫遊, 圖籍之傳多所闡秘, 其後, 魯國大長公主之來, 凡什物器用簡冊書畫等, 物船載浮海, 今時所傳妙繪寶軸, 多其時出來云」 라 하여 동양외 의견을 볼 수 있다.
  4. 그 예는 근역서화징에서 찾아볼지어다.
  5. 조선김석총람상, 지륵사광지대선사묘지.
  6. 고려고도징 5
  7. 능묘부근에 원찰을 세우고, 또는 사자의 명복을 위하여 따로 원찰을 경영하였음은 이미 신라 대부터 있었고 사찰에 왕의 진영을 봉안한 사실도 삼국사기 궁예전에 보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의〿적이오 또 구체적으로 실행되었던 것인지는 의문이다.
  8. 보한집」 毅王遜于南荒,有李琪者善畵,寫眞不題,稱謂安於東都草堂,朝夕禮事」 운운.
  9. 고려사 충렬왕 23년 및 24년.
  10. 려사 후비열전.
    「王手寫公主眞, 日夜對食,悲泣三年)
  11. 근역서화징 공민왕조 참조.
  12. 려사 윤택 열전.
  13. 익재집에는 「古杭吳壽山 一本作陳鑑如誤也」 라 있지만 현재 잔존된 원폭에는 확실히 진감여의 화적으로 되어있으니, 일반의 참고를 위하여 찬기를 이곳에 전재한다. 다만 만환되어 불명한 것은 문집에 의하여 □표로써 보독하였다.
    延祐[己][未]余年二十三[從][於]忠宣王降」 香江浙」 王召 [古]杭陳鑑如寫陋容而[湯][北]村」 爲之贊北歸爲人借觀因[失][所]在」 後[三]十一年奉國表如京師復得」之邵驚老壯之 異貌感離合[之]有」 時使韓國(?)雲把筆口占四十字爲識」 我昔留形影靑青兩[鬢]春[流]傳」 幾歲月邂逅[尙]精神此物」 非他物前身定後身兒孫」 渾不識相間是何人」 益齋」 車書其同禮[樂][其]東光岳其鍾爲人之宗爲世之雄」 爲儒之通氣正而洪貌儼而恭言慎而從恢恢乎容溫溫乎」 融挺挺乎中於學則充於道則 隆於文則豐存心而忠臨」 政以公輔國以功命而登庸瞻而和衷 從而雍時」延祐己未鞠月望日北村老民湯炳龍書于錢塘保和 讀(?)易齋時年七十有九(???)
    안향의 화상에 관하여는 그의 발견자인 백원창삼씨가 조선사 강좌에 상세한 소개와 고증을 하여, 원본이 원인의 소작으로 세 폭이나 있었음을 말하였으나, 화찬기에 대한 소개가 없으므로 이 또한 참고로 들어둔다.
    宣授高麗國儒學提擧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贈諡文成公安珦 眞」 越延祐五年二月日降」 宥旨其日云都僉議中贊修文殿大」 學土安珦有崇設學校之功亦於」夫子廟庭圖形致祭桑鄉興州守□」 郎崔琳依其目摹寫一軀將安之」 于鄉校時嗣子于器□承乏鎭邊崔」 君送以示之□□焚香拜手乃爲」 贊曰」 先君當日振儒風」 上命圖形」 文廟中一幅丹靑[照][桑]梓四時還」 豆答膚功」 □年秋九月 日賛」 慶尙全羅道巡察鎭邊傅匡靖大夫檢校僉講評理兼判典議寺事上護軍安于瑀拜題」
  14. 근역서화징에는 김부식이 묵죽을 잘한 예로 파한집의 「樞府金立之詞翰外, 尤工墨, 君嘗以湘岸兩叢, 獻大宗伯崔相國」 운운의 구를 들고 다시 「或曰, 立之非雷川之字, 乃其子敦中之字云, 然未有確據, 姑從大東韻玉」이라 하여 입지를 부식의 자로 간주하였으나, 파한집의 전구에는 이어서 곧 「金壯元君綏, 即其子也, 得其家法甚妙」라 하였고 보한집에는 「崔文淑公典試, 金承宣立之擢第龍頭, 文淑公之嗣, 文懿公典試, 金承宣之子諫議君綏又中壯元, 諫議才識富膽, 墨竹傳家, 筆法不凡」이라 있은즉 김군수는 곧 김교중의 자요 입지는 곧 김교중의 자임을 알 수 있으니 서화미의 입지를 부식의 자로 봄이 오류요, 동시에 김부식을 능화열전 숙에 편입한 것은 「傳家筆法」이란 데서 혹 그리할 수도 있을 듯하나 멀리 내조에까지 추정함은 과단에 속할 듯싶다.
  15. 작년 12월경에 평양서 홍무 28년의 범문이 있는 석 각천문도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게재된 바 있었으니 이는 추측컨댄 양촌집 천문도시에 「右天文圖石本 舊在平壤城, 因兵亂沉于江而失之, 歲月旣久, 其印本之存者, 亦絕無矣, 惟我殿下, 受命之初, 有以一本投進者, 殿下寳重之, 命書雲觀重刻干石本, 觀上言, 此圖, 歲久星己差, 宜更推步以定, 令四仲昏曉之中, 勒成新以示于後, 上以爲然, 越乙亥夏六月, 新修中星記一編以進(中略)於是 仍舊圖改中星鐫石, 甫訖, 乃命臣近, 誌其後(中略) 洪武28年冬10有2月日」이라 있는 그 석본의 복사본인가 한다 필자는 보지 못하였으므로 단언하지 않거니와 이곳 금론에 예거한 것은 물론 구도를 뜻하기 위함이다.
  16. 본보 제일집 김상기씨의 「古代의 貿易形態와 羅末의 海上發展에 就하여」의 일의 주(석)6 중 소동파의 논고려 매서리해차자문에 「今使者所至, 圖畵山川形勝, 窺測虛實云云이란 기가 있음을 말하였으니 고려화공의 손에서 제화된 중국지도가 상당히 있었을 법하다.
    부기 이 논문에서 거례한 화종은 필자가 극히 국한된 서적에서 촉목된 바를 나열함에 불과하였은즉 충분하지 못함을 이어 자량하는바이요 그중에도 외래의 화적을 문제삼지 않았으니 그에 대하여는 학해 제일집(경성제대 문과조수회편)에 실린 「高麗時代の繪畵の外國との交涉」라는 졸고를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