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신고(부 화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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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1일 (월) 16: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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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고(부 화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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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風神考(附禾竿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 발행기관 震檀學會
저자 宋錫夏 역자 @ 집필일자 19341100 게재연월 @
시작쪽 156쪽 종료쪽 166쪽 전체쪽 011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민속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梗槪(경개)


본고에 풍신(風神)이라 함은 주로 남조선 지방 일대에 전승하여오는 구 2월의 '영동할머니' 또는 그와 유사한 명칭으로 부르는 민속 신앙을 지칭하는 것에 한정하노라.
쪽수▶P156-1本稿에 風神이라 함은 主로 南朝鮮 地方 一帶에 傳承하여오는 舊 2月의 『영동할머니』 又는 그와 類似한 名稱으로 부르는 民俗信仰을 指稱하는 것에 限定하노라.
이를 학적 연구 대상으로 한 학자가 고금으로 통하여 수 3인 있었으나, 오히려 전적으로 빙석(氷釋)할 만한 설명을 한 전례가 없어, 이제까지 민속학적 숙제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필자가 졸고를 시도하려는 것도 군맹무상지격(群盲撫象之格)에 지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며, 이 점에 대하여는 독자 제언의 관대한 양해가 있기 바라는 바다.
쪽수▶P156-2이를 學的 硏究 對象으로 한 學者가 古今으로 通하야 數3人 있었으나, 오히려 全的으로 氷釋할 만한 說明을 한 前例가 없어, 이제까지 民俗學的 宿題로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筆者가 拙考를 試하려는 것도 群盲撫象之格에 지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며, 이 點에 對하여는 讀者 諸彦의 寬大한 諒解가 있기 바라는 바다.
'영동풍신'에 대한 경개(梗槪)를 약술하면, 그 명칭은 '영동할만네·영동할맘·영동할마니 ·영동할마시·할마시·영동·바람·풍신·할만네·영등·연등·마고할마니' 등의 여러가지 명칭이 있다. 지금 편의 상 3개 지방의 대표적 의식을 예거하면 다음과 같다. 남조선의 동부 지방에서는 정월 회일(晦日, 그믐날)에 황토를 문 앞에 깔고 좌도승(左綯繩)을 대문 혹는 삽작에 걸고 그 금줄에는 청엽(靑葉)이 붙은 죽지를 세 가지(枝)쯤 꽂아두어 부정을 피한다. 그리고 계명(鷄鳴) 후에 우물에서 정화수를 급취하여 장독간이나 주간에 두었다가 다음날 아침(翌朝)에 섬밥(淨飯)을 한 후에 그것을 '볏가리'에 갖다 두고 주부가 기도(손 비빈다고 함)를 드린 다음, 청죽 3개를 교차하여 상부에서 1척허쯤 되는 곳을 결박하고 색사‧오색포편‧백지를 달고 새 표주박(新瓢)에 담은 정화수를 그 위에 둔다. 도의는 농사의 풍요 및 가내의 안태를 주로 하며, 초10일 15일 20일에 개수하며, 『영동할만네』는 초10일에 상칭(부?) 15일에 중칭 20일에 하칭이 올라가고, 여양(찌꺼기)는 그믐날까지 맥전(麥田)에 남는다고 한다. 현대문주1▶'영동할만네'가 딸을 데리고 하강(내려오면)하면 바람이 불고, 며느리를 데리고 하강하면 비가 온다고 한다.[a 1]
쪽수▶P157-1『영동風神』에 對한 梗槪를 略述하면, 그 名稱은 『영동할만네·영동할맘·영동할마니 ·영동할마시·할마시·영동·바람·風神·할만네·영등·연등·麻姑할마니』 等의 여러가지 名稱이 있다. 只今 便宜上 3個 地方의 代表的 儀式을 例擧하면 다음과 같다. 南朝鮮의 東部 地方에서는 正月 晦日에 黃土를 門前에 깔고 左綯繩을 大門 叉는 삽작에 걸고 그 금줄에는 靑葉이 붙은 竹枝를 數3枝 꽂아두어 不淨을 避한다. 그리고 鷄鳴 後에 우물에서 淨華水를 汲取하여 장독간이나 廚間에 두었다가 翌朝에 섬밥(淨飯)을 한 後에 그것을 『볏가리』에 갖다 두고 主婦가 祈禱(손 비빈다고 함)를 드린 다음, 靑竹 3個를 交叉하여 上部에서 1尺許쯤 되는 곳을 結縛하고 色絲‧五色布片‧白紙를 달고 新瓢에 담은 淨華水를 그 위에 둔다. 禱意는 農事의 豊饒 及 家內의 安泰를 主로 하며, 初十日 15日 20日에 改水하며, 『영동할만네』는 初十日에 上칭(府?) 15日에 中칭 20日에 下칭이 올라가고, 餘洋(찌꺼기)는 晦日까지 麥田에 남는다고 한다. 원문주1▶『영동할만네』가 딸을 데리고 下降(내려오면)하면 바람이 불고, 며느리를 데리고 下降하면 비가 온다고 한다.[1]
남해안 지방(예로 통영)에서는 2월 초1일 동 틀 무렵(質明)에 충렬사 우물(충무공 사당 앞)에서 중류 이상 가정의 처녀와 소부가 음식을 구비하여 먹고, 정화수를 급취 귀가한 뒤에 새 박(新瓢)에 담아두고 신죽(新竹) 1개의 선단을 수 조각으로 부할(剖割, 쪼개고 벰)하여 그 청죽을 땅에 굳게 세우고, 그 위에다가 전기 정화수표를 올려두고, 그 밑에는 오색포편·오색사·백지 등을 걸고, 물대(수장 즉 앞의 청죽)에는 동백·송·죽엽을 달고 지면에는 황토를 깐 후에 주부가 전년 가을에 추수한 정곡을 항아리에 넣어서 특히 대청루는 방안에 준비하여 두었던 것으로 오곡반·비빈떡(거제도에서는 인절미)을 차린 후에 소지(燒紙) 기도를 한다 (거제에서는 기도 음식을 집 안에서 회식하고 인절미만은 유지방의 포내에 넣어 대청에 있는 성조항에다가 위하여 두었다가, 3일 후에 먹고 장승포에서는 풍신 올라간 후에 먹는다)
쪽수▶P157-2 南海岸 地方(例로 統營)에서는 2月 初1日 質明에 忠烈祠 우물(忠武公 祀堂 前)에서 中流 以上 家 ▶P158-1庭의 處女와 少婦가 飮食을 俱備하여 먹고, 淨華水를 汲取 歸家한 뒤에 新瓢에 담아두고 新竹 1個의 先端을 數片으로 剖割하여 그 靑竹을 땅에 굳게 세우고, 그 위에다가 前記 淨華水瓢를 올려두고, 그 밑에는 五色布片‧五色絲‧白紙 等을 걸고, 물대(水竿 即 前記 靑竹)에는 冬栢‧松‧竹葉을 달고 地面에는 黃土를 깐 後에 主婦가 前年 가을에 秋收한 淨穀을 항아리에 넣어서 特히 大廳 又는 房안에 準備하여두었던 것으로 5穀飯·비빈떡(巨濟島에 서는 인절미)을 차린 後에 燒紙 祈禱를 한다. (巨濟에서는 祈禱 飮食을 家內 會食하고 인절미만은 유지방의 苞內에 넣어 大廳에 있는 成造缸에다가 위하여 두었다가, 3日 後에 먹고 長承浦에서는 風神 올라간 後에 먹는다)
그리고 집안 사정에 의하여 2월 초 1일에서 초 5일까지 기도를 변경할 수도 있다. 정화수는 2월 초1일에서 2월 19일까지 매일 개수하며 『영동할마니』는 2월 초4일 초9일 19일에 올라간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딸과 며느리 차별은 전자 동양(同樣)하다. 현대문주2▶특히 이 지방 부근에 전승하여오는 다른 유형에 2월 초1일에는 각씨풍신이 내리고, 2월 19일에는 처녀풍신이 내린다고 하여 전연 상반되는 형태를 발견할 수 있으나, 그다지 보편적이 아닌 것 같을 뿐더러, 2월 19일이란 것은 필자에게 자료를 제공한 사람의 착오가 아닌가 한다.[a 2]
쪽수▶P158-2그리고 집안 事情에 依하여 2月 初 1日에서 初 5日까지 祈禱를 變更할 수도 있다. 淨華水는 2月 初1日에서 2月 19日까지 每日 改水하며 『영동할마니』는 2月 初4日 初9日 19日에 올라간다고 한다. 여기에서도 딸과 며느리 差別은 前者 同樣하다. 원문주2▶特히 이 地方 附近에 傳承하여오는 다른 類型에 2月 初1日에는 閣氏風神이 내리고, 2月 19日에는 處女風神이 내린다고 하여 全然 相反되는 形態를 發見할 수 있으나, 그다지 普遍的이 아닌 것 같을 뿐더러, 2月 19日이란 것은 筆者에게 資料를 提供한 사람의 錯誤가 아닌가 한다.[2]
현대문주3▶경기도 안성 및 충남 천안‧대전에서는 2월 초1일에 '마고할마니가' 하강한다 하여 그 집안 식구의 연령 수와 같은 수의 송편떡을 해서 먹고 근신하며, 동월 20일에는 상천일이라고 할 뿐이요, 특수한 의식은 없으나, 이 날 비가 오면 대풍의 전조요 소부과 소리개 한 마리만 지나가도 좋다고 한다.[a 3]
현대문주4▶제주도의 그것에 대하여는 업기 타 학자가 소개한 바 있으므로 할애하기로 한다.[a 4]
틀:Tagpage원문주3▶京畿道 安城 及 忠南 天安‧大田에서는 2月 初1日에『麻姑할마니가』 下降한다 하여 그 집안 食口의 年齡 數와 同數의 송편떡을 해서 먹고 謹愼하며, 同月 20日에는 上天日이라고 할 뿐이요 特殊한 儀式은 없으나, 이 날 비가 오면 大豊의 前兆요 少不過 소리개 한 마리만 지나가도 좋다고 한다.[3]
원문주4▶濟州島의 그것에 對하여는 業己 他 學者가 紹介한 바 있으므로 割愛하기로 한다.[4]


































본문2: 禾竿(화간)


전기한 '볏가리'는 추엽륭 교수가 소개한 적도 있지만(주5), 이 또한 남부 조선에 성행되는 풍신 신앙에도 관련되는 입간(立竿) 민속으로 상원 불효(拂曉, 동틀 무렵)에 세워서 2월 삭일 조효(早曉, 이른 새벽 무렵)에 철거하는 것이며 '유지방·유지봉·유조지·오지봉·유지뱅이·유구지·햇대·보름대' 등의 별명이 지방에 따라 존재한다. 장간 상정부에는 고포(藁苞)를 만들어 붙이고 거기에다가 폐지·죽세·파랑개미를 꽂고 고포 밑에는 고근(藁根)을 간간이 나오게 한 좌도승을 내리기도 하고, 혹은 대나무를 세장하게 짜서 백지들 감기도 하여 (한쪽만 가위질을 하여 백지의 일부분이 일어서게 한다) 역시 수하(垂下)하게 하는데 이는 화곡을 상징함은 췌언(贅言)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현대문주6▶'볏가리'가 기풍 민속이라 함은 필자가 전에도 말한 바도 있거니와[a 5], 이 민속이 어디서 배태(胚胎)되었나 하면, 화상 상징의 물체로 인하여 풍년이 되어달라는 것과 조해 예방의 이중적 주술 신앙에서 출발하였다고 보겠다. 그리고 후자의 조해 예방에도 두 가지의 상이한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고 하겠다. 즉 그 하나는 남해안 지방에 발견할 수 있는 위조보새의 속신에 의한 것이고, 그 둘은 동해안 남단 지방에 있는 위조금기의 속신이라고 하겠다. 전자에 있어 '볏가리'를 오지봉·오지방‧유조지 등의 한자를 차용함은 조신하기 어려운 일들 뿐 아니라, 전거의 각 명칭이 다만 음편 상의 변화인 만큼 그 근거는 오히려 박약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속신(俗信)에 조류가 '볏가리' 위에서 놀다 가게 한다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이다. 그리고 신라 소지왕의 금갑(琴匣) 사건으로 인하여 발생되었다고 전하는 위오보새(爲烏報賽) 민속의 관계에 대해서는 그 가부 여하를 단(斷)할만한 자료가 없으므로 이는 후일에 속할 문제라고 하겠다. 후자의 위조금기의 속신은 『볏가리』는 「갈」이라는 새 (상상의 새로써 짐조(鴆鳥)와 같이 그 새가 지나가기만 하여도 흉년이 든다고 한다)가 오는 것을 물리치기하여 입간하는 것으로 갈새가 이 입간이 존재하는 동리에는 습래(襲來)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볏가리'가 아니라 '벽갈'이라고 하나, 이와 같은 문자 상의 희롱은 전자 동양 하등 권위 없는 설로써 단순한 부회(附會)에 지나지 못함은 물론이다. 그러나 형태 상으로 전자보다는 진보된 것이라고 할 것은 전자의 조류가 상원에 2월 삭(朔, 초하루)까지 접대를 받아 단순히 추기에 탁곡(啄穀)의 해를 끼치지 아니한다더라도 풍흉을 좌우할 권위가 없는 것이다. 그 새에다가 초실제력(超實際力)을 부여하여 그 새의 비거(飛去)하는 지역에는 여하한 이유를 불구하고 흉년을 초래한다면 비로소 유력한 신앙이 발생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내용 관념 상으로 분류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볏가리는' 조류에 관련된 주술적 기풍 민속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다음에 말할 풍신 민속하고 접촉되는 부분도 이 기풍 관념에 있는 것이다.
쪽수▶P159원문주5▶前記한 『볏가리』는 秋葉隆 敎授가 紹介한 적도 있지만[5], 此亦 南部 朝鮮에 盛行되는 風神 信仰에도 關聯되는 立竿 民俗으로 上元 拂曉에 세워서 2月 朔日 早曉에 撤去하는 것이며 『유지방·유지봉·유조지·오지봉·유지뱅이·유구지·햇대·보름대』 等의 別名이 地方에 따라 存在한다. 長竿 上頂部에는 藁苞를 만들어 붙이고 거기에다가 幣紙·竹笹·파랑개미를 꽂고 藁苞 밑에는 藁根을 間間이 나오게 한 左綯繩을 나리기도 하고, 叉는 대나무를 細長하게 짜게어서 白紙들 감기도 하여 (한쪽만 가위질을 하여 白紙의 一部分이 일어서게 한다) 亦是 垂下하게 하는데 이는 禾穀을 象徵함은 贅言할 必要도 없는 것이다. 원문주6▶『볏가리』가 祈豊 民俗이라 함은 筆者가 前에도 말한 바도 있거니와[6], 이 民俗이 어디서 胚胎되었나 하면, 禾狀 象徵의 物體로 因하여 豊年이 되어달라는 것과 鳥害 豫防의 二重的 呪術 信仰에서 出發하였다고 보겠다. 그리고 後者의 鳥害 豫防에도 두 가지의 相異한 形態로 分類할 수 있다고 하겠다. 即 其1은 南海岸 地方에 發見할 수 있는 爲鳥報賽의 俗信에 依한 것이고, 其2는 東海岸 南端 地方에 있는 爲鳥禁忌의 俗信이라고 하겠다. 前者에 있어 『볏가리』를 烏止棒·烏止防‧留鳥止 等의 漢字를 借用함은 措信하기 難한 일들 뿐 아니라, 前擧의 各 名稱이 다만 音便上의 變化인만큼 그 根據는 오히려 薄弱하다고 하겠다. 그러나 俗信에 鳥類가 『볏가리』 위에서 놀다 가게 한다는 것은 相當히 普遍的이다. 그리고 新羅 炤知王의 琴匣事件으로 因하야 發生되었다고 傳하는 爲烏報賽 民俗의 關係에 對해서는 그 可否 如何를 斷▶P160할만한 資料가 없으므로 이는 後日에 屬할 問題라고 하겠다. 後者의 爲鳥禁忌의 俗信은 『볏가리』는 「갈」이라는 새 (想像鳥로써 鴆鳥와 같이 그 새가 지나가기만 하여도 凶年이 든다고 한다)가 오는 것을 물리치기 하여 立竿하는 것으로 갈새가 이 立竿이 存在하는 洞里에는 襲來하지 못한다는 것이며, 『볏가리』가 아니라「僻갈」이라고 하나, 이와 같은 文字上의 戱弄은 前者 同樣 何等 權威 없는 說로써 單純한 附會에 지나지 못함은 勿論이다. 그러나 形態上으로 前者보다는 進步된 것이라고 할 것은 前者의 鳥類가 上元에 2月 朔까지 接待를 받아 單純히 秋期에 啄穀의 害를 끼치지 아니한다더라도 豊凶을 左右할 權威가 없는 것이다. 그 새에다가 超實際力을 賦與하여 그 새의 飛去하는 地域에는 如何한 理由를 不拘하고 凶年을 招來한다면 비로소 有力한 信仰이 發生되는것 이라고 하겠다.이와 같이 內容 觀念上으로 分類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볏가리는』 鳥類에 關聯된 呪術的 祈豊 民俗임은 틀림없는 것으로 다음에 말할 風神 民俗하고 接觸되는 部分도 이 祈豊觀念에 있는 것이다.
이 민속의 분포 지역은 현재에는 인멸되어서 상세한 조사는 자못 불가능한 일에 속할 것이나, 대략은 경성 이남으로 갈수록 그 민속이 성행한 것만은 명료한 것이다. 이자(李耔)의『음애일기』에 「國俗於元月望日 縛藁作糓穗連箒 象多實 架木通索 以祈年糓 闕內因國俗稍煩 其制摸像七月篇所載人物 以爲耕種之狀 初非欲作奇功 亦是務本重農之意 至末流 左右分邊 有勝負 勝者有賞 官吏工匠 竸作新巧 假物作形 極其真妙 搜括物色 市肆一空... …」과 『동야수언』 권1, 아국기년초, 중종에 「癸酉命行內農作 國俗於元月望 綁藁作穀穗 連禾實 架大木通素 以祈年殿於阙 其制象七月福 以爲耕種之狀 意在重農 初非作奇 而末流分邊 務出入右 窮極戱玩 浮費且千 臺諫論其不可 上以祖宗故事 不宜頓廢 强言餅數 必欲觀玩 畢國爭不得 大小且怪... …」라고 함을 보건대, 이는 궐 내에서도 심하여 종말에는 연극적 경향을 띈 것을 알 수 있다. 순조 조인(朝人) 홍석모의『동국세시기』에 「鄕里人家 以上元前日 束纛如狀 包禾黍稷粟之穗 又懸木綿花 冒於長竿之首 建屋傍 張索把定 稱禾積以祈豊」이라 한 것과, 정종 조인 유득공의 『경도잡지』의 「束藁如纛狀 冒竿首 建屋傍 張索把定 稱禾積 國朝故事 正月望日 大內象爾風七月耕穫狀 分左右角勝 盖亦祈豊之意 而閭巷禾竿亦其一事爾」라고 함을 보면 현재의 화간민속과 상당히 접근됨을 짐작하겠다.
쪽수▶P160-2이 民俗의 分布 地域은 現在에는 湮滅되어서 詳細한 調查는 자못 不可能한 事에 屬할 것이나, 大略은 京城 以南으로 갈수록 그 民俗이 盛行한 것만은 明暸한 것이다. 李耔의『陰崖日記』에 「國俗於元月望日 縛藁作糓穗連箒 象多實 架木通索 以祈年糓 闕內因國俗稍煩 其制摸像七月篇所載人物 以爲耕種之狀 初非欲作奇功 亦是務本重農之意 至末流 左右分邊 有勝負 勝者有賞 官吏工匠 竸作新巧 假物作形 極其真妙 搜括物色 市肆一空……」과 『東野粹言』 卷1, 我國紀年鈔, 中宗에 「癸酉命行內農作 國俗於元月望 綁藁作穀穗 連禾實 架大木通素 以祈年殿於阙 其制象七月福 以爲耕種之狀 意在重農 初非作奇 而末流分邊 務出入右 窮極戱玩 浮費且千 臺諫論其不可 上以祖宗故事▶P161-1不宜頓廢 强言餅數 必欲觀玩 畢國爭不得 大小且怪……」라고 함을 보건대, 이는 闕內에서도 甚하여 終末에는 演劇的 傾向을 띈 것을 알 수 있다. 純祖朝人 洪錫謨의『東國歲時記』에 「鄕里人家 以上元前日 束纛如狀 包禾黍稷粟之穗 又懸木綿花 冒於長竿之首 建屋傍 張索把定 稱禾積以祈豊」이라 한 것과, 正宗朝人 柳得恭의 『京都雜志』의 「束藁如纛狀 冒竿首 建屋傍 張索把定 稱禾積 國朝故事 正月望日 大內象爾風七月耕穫狀 分左右角勝 盖亦祈豊之意 而閭巷禾竿亦其一事爾」라고 함을 보면 現在의 禾竿民俗과 相當히 接近됨을 酙酌하겠다.
이상의 문헌으로 그 연대를 대략 고찰하여보면, 이자는 성종 때에 출생하여 연산군 때 문과에 등제하여 그 후 형조판서로 서거한 사람으로 『음애일기』의 기사는 연산 조(朝)의 것을 기록한 것으로 사실적으로 이삭이 달린 벼를 그대로 결박하여 나무에 걸어 기풍(祈豊)하던 주술적 행사이던 것이 그 후 약 250년을 경과한 정종 때에 이르러서는 화서직속 등의 오곡 급 면화실(棉花實)을 짚에다가 싸서 〿과 같이 만들고 그것을 장간에 달아매어 건물의 부근에 세우는 상징적으로 변천함을 알겠다. 그리고 『동국세시기』와 『음애일기』에 기록된 물체가 동일한 것을 지칭하였다고 볼 것은 유득공의 『경도잡지』에 그 전반은 『음애일기』와 같고, 후반은 『동국세시기』에 같음을 보아, 유득공은 이자의 『음애일기』에 부연하고 홍석모는 류득공의 『경도잡지』를 보식(補飾)함을 알겠다.
쪽수▶P161-2以上의 文獻으로 그 年代를 大略 考察하여보면, 李耔는 成宗 때에 出生하여 燕山君 때 文科에 登第하여 그後 刑曺判書로 逝去한 사람으로 「陰崖日記』의 記事는 燕山朝의 것을 記錄한 것으로 寫實的으로 이삭이 달린 벼를 그대로 結縛하여 나무에 걸어 祈豊하던 呪術的 行事이던 것이 그後 約250年을 經過한 正宗 때에 이르러서는 禾黍稷粟 等의 五穀 及 棉花實을 짚에다가 싸서 〿과 같이 만들고 그것을 長竿에 달아매어 建物의 附近에 세우는 象徵的으로 變遷함을 알겠다. 그리고 『東國歲時記』와 『陰崖日記』에 記錄된 物體가 同一한 것을 指稱하였다고 볼 것은 柳得恭의 『京都雜志』에 그 前半은 『陰崖日記』와 같고, 後半은 『東國歲時記』에 같음을 보아, 柳得恭은 李耔의 『陰崖日記』에 敷衍하고 洪錫謨는 柳得恭의 『京都雜志』를 補飾함을 알겠다.
그리고 '볏가리' 민속의 분포 지역은 이상의 제 문헌에는 명백한 기재가 없음으로 규지(窺知)하기는 어려우나 『경도잡지』가 대략으로 경성 중심의 기록이므로 희미하나마 경성에서도 있었음을 추측될 뿐더러, 현대문주7▶민간 전승 상으로 보면 경성에서도 존재하였다고 하며[a 6] , 현대문주8▶충남 당진군 고대면 진관리에서는 현재에도 이 민속이 전승한다 하니[a 7], 그 분포 지역은 경성으로부터 이남 일대에 존재한 것은 명확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쪽수▶P161-3그리고 『볏가리』 民俗의 分布 地域은 以上의 諸 文獻에는 明白한 記載가 없음으로 窺知하기는 難하나 『京都雜志』가 大略으로 京城 中心의 記錄이므로 稀微하나마 京城에서도 있었음을 推測될 뿐더러, 원문주7▶民間 傳承 上으로보면 京城에서도 存在하였다고 하며[7], 원문주8▶忠南 唐津郡 高大面 眞舘里에서는 現在에도 이 民俗이 傳承한다 하니[8], 그 分▶P162-1布 地域은 自 京城 以南 一帶에 存在한 것은 明確한 事實이라고 하겠다.
관념 상의 입간 민속은 지금 결론부터 말하면, 이상의 제 문헌이나 민간 전승에 의하여 기풍에 있다고 하겠으나, 다만 어로(漁撈)에까지 관련되는가 아닌가는 당분간 언명을 피하고자 한다. 그리고 '볏가리'가 기풍의 형태에 있어서 주술적에서 연극적으로 후기적에서 발달한 데 관하여도 후일의 고찰에 미루는 것이다.
쪽수▶P162-2觀念 上의 立竿民俗은 只今 結輪부터 말하면, 以上의 諸 文獻이나 民間 傳承에 依하여 祈豊에 있다고 하겠으나, 다만 漁撈에까지 關聯되는가 아닌가는 當分間 言明을 避하고자 한다. 그리고 『볏가리』가 祈豊의 形態에 있어서 呪術的에서 演劇的으로 後期的에서 發達한데 關하여도 後日의 考察에 미루는 것이다.





































본문3: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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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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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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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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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蔚山郡 下廂面 伴鷗里 金正福氏 談
  2. 統營 崔天, 李琫振兩氏 談
  3. 安城郡 元谷面 竹栢里 李洪植氏 外 數人 談
  4. 秋葉隆 「濟州島に於ける蛇鬼の信仰」 (這歸文化圏の試み)(靑丘學叢 第7號), 秋葉隆「巨濟島の立竿民俗」朝鮮民俗 第1號)
  5. 仝上
  6. 拙稿 「祈豊, 占豊과 民俗(續)」(朝鮮中央日報 本年 4月 23日)
  7. 朝鮮民俗 第1號 14頁 第6行
  8. 唐津郡 高大面 眞舘里 孫寬秀君 談






현대문주


  1. 울산군 하상면 반구리 김정복씨 이야기.
  2. 통영 최천, 이봉진 양씨 이야기.
  3. 안성군 원곡면 죽백리 이홍식씨 외 수인(數人) 이야기.
  4. 추엽륭 「제주도에 있어서 사귀의 신앙」 (저귀문화권의 형식)(청구학총 제7호), 추엽륭「거제도의 입간민속」 조선민속 제1호)
  5. 졸고 「기풍, 점풍과 민속(續)」(조선중앙일보 본년 4월 23일)
  6. 조선민속 제1호 14엽 제6행.
  7. 당진군 고대면 진관리 손관수 군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