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군 문제 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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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1일 (월) 02:10 판 (본문1: 서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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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군 문제 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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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廢四郡問題管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인영 역자 집필일자 1940년 8월 10일 게재연월 1941년 3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4쪽 전체쪽 03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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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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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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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소개글


澄玉父前中樞全生 年九十八 聞二子被召 置酒前二子而飮之曰 予年近百歲 位入樞府 身享二宰樞榮養 國家以爾等爲有用 同時徵召 願努力王事 勿以予老爲念 予人事已盡 死復何恨 執盞起舞而歌 聞者壯其志 而嘉李氏有子也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8월 기유조―

쪽수▶P1-1

澄玉父前中樞全生 年九十八 聞二子被召 置酒前二子而飮之曰 予年近百歲 位入樞府 身享二宰樞榮養 國家以爾等爲有用 同時徵召 願努力王事 勿以予老爲念 予人事已盡 死復何恨 執盞起舞而歌 聞者壯其志 而嘉李氏有子也
世宗實錄서적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已酉條―






본문


본문1: 서언


이조 초기에 있어서의 육진(경흥·경원·온성·종성·회령·부령) 개척과 사군(무창·여연·우예·자성) 설치가 조선 북방 발전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오늘날 평안북도 자성·후창 양군에 해당하는 사군 지방은 설치된 지 얼마 안 되어 단종인물 3년 을해(현대문주1▶세조인물 원년,[a 1] 명 경태 6년, 1453A.D.) 먼저 우예·여연·무창 3군이 철폐되고 이어서 세조인물 5년에는 자성군까지도 철폐되어 그 주민들은 전부 강계와 구성으로 이주하고 말았는데 그 후 이 지방을 ‘폐사군’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저명한 사실이다. 이 폐사군에 관한 연구로서는 일직 진전좌우길인물(津田左右吉) 박사가 현대문주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원고[a 2]라는 제목 하에 약간 논술한 바 있었고 또 고 뢰야마웅인물(瀨野馬熊) 씨 현대문주3▶조선폐사군고원고[a 3]라는 논문이 있는바 특히 후자는 전자가 이용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조실록 읍지 등을 참조해 가지고 먼저 사군의 군치와 강역에 관한 상세한 지리적 고증하고 다음에 사군 설치로부터 철폐에 이르는 그간의 사정을 논술한 역작이다. 그러나 폐사군에 관한 문제는 이것을 전면적으로 관찰할 때 오늘까지의 연구는 극소한 그 일부분의 구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전인물 박사나 뢰야인물 씨의 연구에 있어서도 나는 이를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이만치 수년 전 이 문제에 관한 신사료 원영주인물(元永胄) 일기와 이여절인물(李汝節) 수본(진단학회기관 소장 연경재전집서적 수록)이 출현하자 현대문주4▶종래의 사군 지명 고증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약간의 비견을 발표한 바 있었다.[a 4] 본 소고에 있어서는 세조인물조에 사군을 철폐한 원인에 대하여 과연 종래의 견해가 그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파촬(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재음미하는 동시에 또한 나의 견해를 진술코자 하는 바이다.
쪽수▶P2-1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六鎭(慶興·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 開拓과 四郡(茂昌·閭延·虞芮·慈城) 設置가 朝鮮 北方 發展史上 重要한 位置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現今 平安北道 慈城·厚昌 兩郡에 該當하는 四郡 地方은 設置된 지 얼마 안 되어 端宗 三年 乙亥(원문주1▶世祖元年,[1] 明景泰 六年, 1453A.D.) 먼저 虞芮·閭延·茂昌 三郡이 撤廢되고 이어서 世祖 五年에는 慈城郡까지도 撤廢되여 그 住民들은 全部 江界와 龜城으로 移住하고 말었는데 그後 이地方 「廢四郡」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著名한 事實이다. 이 廢四郡에 關한 硏究로서는 일즉 津田左右吉 博士가 원문주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2]라는 題目 下에 若干 論述한 바 있었고 또 故 瀨野馬熊 氏 원문주3▶「朝鮮廢四郡考」[3]라는 論文이 있는바 特히 後者는 前者가 利用할 機會를 얻지 못한 李朝實錄 邑誌 等을 參照해 가지고 먼저 四郡의 郡治와 疆域에 關한 詳細한 地理的 考證하고 다음에 四郡設置로부터 撤廢에 이르는 그間의 事情을 論述한 力作이다. 그러나 廢四郡에 關한 諸問題는 이것을 全面的으로 觀察할 때 今日까지의 硏究는 極少한 그 一部分의 究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津田 博士나 瀨野 氏의 硏究에 있어서도 ▶P3-1나는 이를 다시 한번 檢討할 必要를 늣기고 있는 이만치 數年 前 이 問題에 關한 新史料 元永胄日記와 李汝節手本(震檀學會藏硏經齋全集所收)이 出現하자 원문주4▶從來의 四郡地名 考證에 對한 批判과 아울러 若干의 卑見을 發表한 바 있었다.[4] 本 小稿에있어서는 世祖朝에 四郡을 撤廢한 原因에 就하여 果然 從來의 見解가 그 歷史的 事件의 眞相을 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再吟味하는 同時에 또한 나의 見解를 陳述코자 하는 바이다.
이조가 태조인물의 건국 이래 정종인물·태종인물을 거처 제4대 세종인물 말년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에 전조 고려의 강역 이외인 함경도와 경계가 확실치 않던 압록강 상류지방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자연적 경계에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거기에 육진과 사군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관점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북방 발전이라는 욕구는 적어도 고려 건국 이래 배양되어 온 조선사회의 이상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대원제국이 쇠망하고 명국의 새 세력이 아직 요동 방면에 확립치 못하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며, 셋째로는 고려 공민왕인물조에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인물로 하여금 원나라 쌍성총관부(함경남도 영흥)를 탈취케 함으로써 시작된 국토확장책의 귀결인 것이며, 넷째로는 태조인물가 동북면(함경도) 출신인 것과 세종인물이 적극적 진취적 정책을 감행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세조인물조에 이르러 함경도 육진 방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상류 지방의 사군을 철폐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쪽수▶P3-2李朝가 太祖의 建國 以來 定宗·太宗을 거처 第四代 世宗 末年에 이르는 約 六十年 동안에 前朝 高麗의 疆域 以外인 咸鏡道와 境界가 確實치 않든 鴨綠江 上流地方을 開拓하여 鴨綠江과 豆滿江의 自然的 境界에까지 國土를 擴張하고 거기에 六鎭과 四郡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觀點에서 이를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北方 發展이라는 欲求는 적어도 高麗 建國 以來 培養되여 온 朝鮮社會의 理想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大元帝國이 衰亡하고 明國의 新勢力이 아직 遼東方面에 確立치 못하였다는 時代的 背景을 가지고 進行된 것이며, 셋째로는 高麗 恭愍王朝에 東北面 兵馬使 柳仁雨로 하여금 元나라 雙城摠管府(咸鏡南道 永興)를 奪取케 함으로써 始作된 國土擴張 策의 歸結인 것이며, 넷째로는 太祖가 東北面(咸鏡道) 出身인 것과 世宗이 積極的 進取的 政策 敢行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世祖朝에 이르러 咸鏡道 六鎭 方面에있어서는 別다른 變化가 없었음에도 不拘하고 鴨綠江 上流地方의 四郡을 撤廢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사군이라는 명칭은 이것을 관제상으로 볼 때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자성과 우예는 설치로부터 철폐까지 종시 군으로서 일관하였지만 여연은 세종인물 17년 군으로부터 도호부가 되고 무창은 그 설치로부터 2년을 경과한 세종인물 24년에 처음으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므로 철폐 당시로 말하면 일부삼군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이러한 시간적 관제상 관념을 버리고 종래의 상식적 관제상 명칭에 좇아 어떤 것이나 다 군 혹은 읍이라고 하여둔다.
쪽수▶P4-1四郡이라는 名稱은 이것을 官制上으로 볼 때 반다시 正當한 것은 아니다. 慈城과 虞芮는 設置로부터 撤廢까지 終始 郡으로서 一貫하였지만은 閭延은 世宗 十七年 郡으로부터 都護府가되고 茂昌은 그 設置로부터 二年을 經過한 世宗 二十四年에 처음으로 縣에서 郡으로 陞格하였다. 그러므로 撤廢 當時로 말하면 一府三郡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便宜上 이러한 時間的 官制上 觀念을 버리고 從來의 常識的 官制上 名稱에 좃차 어떤 것이나 다 郡 或은 邑이라고 하여둔다.




































본문2: 사군철폐의 내적 소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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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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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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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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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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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睿宗實錄 卷六, 元年 七月 戊子條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同癸巳 條申叔舟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世祖實錄이 乙亥年을 元年으로 한 데 對하여, 國朝寶鑑 其他는 翌年丙子로써 世祖 元年을 삼었다. 本稿에는 世祖實錄에 依하여 乙亥를 元年으로 하였다.
  2. 津田左右吉 博士 著, 朝鮮歷史地理 第二卷, 이五五―三六〇頁.
  3. 東洋學報 第十三卷 第一號‧第三號. 潮野馬熊 遺稿 二五三―三六〇頁.
  4. 拙稿 「鮮初廢四郡地理考」(靑丘學叢 第二十九號·第三十號).






현대문주


  1. 예종실록서적 권6, 원년 7월 무자조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같은 해 계사조 신숙주인물 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세조실록서적가 을해년을 원년으로 한 데 대하여, 국조보감서적 기타는 다음 해 병자로써 세조인물 원년을 삼었다. 본고에는 세조실록서적에 의하여 을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2. 진전좌우길인물 박사 지음, 조선역사지리서적 제2권, 255―360쪽.
  3. 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1호권호제3호권호. 뢰야마웅인물 유고 253―360쪽.
  4. 졸고 「선초폐사군지리고원고」(청구학총학술지 제29호·제30호권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