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7완)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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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7일 (일) 17:51 판 (본문1-1: (병) 신라의 발흥과 변진 제국의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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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6)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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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六)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11월
시작쪽 031쪽 종료쪽 056쪽 전체쪽 026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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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본문1: 6. 변진 (변한) 문제 (승전)






































본문1-1: (병) 신라의 발흥과 변진 제국의 변천


진마(辰馬)의 땅에 백제가 흥기하여 마침내 그곳을 통일 융합함과 같이 변진의 일족인 신라도 次第(차제)로 주위의 제소국을 잠식하여 드디어 낙동강 연안의 임나(任那)•가라(加羅)의 제연맹국을 병탄하여, 변진의 온(전)종족을 완전히 한 덩어리에 뭉친 (나중에는 반도를 통일하는) 최후의 패자가 되매 이르렀거니와, 신라의 흥기발전은 곧 변진제국의 변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환언하면 신라의 변진제국에 있어서의 관계는 마치 백제의 진마 제국간에 있어서의 관계 그대로를 방불케 하여 준다. 그리하여 이 절에는-역시 변진문제를 철저히 구명하기 위하여-신라의 발흥, 및 그 발전 과정을 주로 하여 변진 제소국의 변천을 고찰하려 한다. 그러면 신라는 어느 때 어떠한 처지에서, 즉 어떠한 milieu에서 발흥하기 시작하였는가를 먼저 고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쪽수▶P31辰馬의 地에 百濟가 興起하야 마침내 그곳을 統一融合함과 같이 弁辰의 一族인 新羅도 次第로 周圍의 諸小國을 蠶食하야 듸듸어 洛東江沿岸의 任那•加羅의 諸聯盟國을 倂呑하야, 弁辰의 온(全)種族을 完全히 한 덩어리에 뭉친 (나중에는 半島를 統一하는)最後의 覇者가 되매 이르렀거니와, 新羅의 興起發展은 곧 弁辰諸國의 變遷을 意味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換言하면 新羅의 弁辰諸國에 있어서의 關係는 마치 百濟의 辰馬諸國間에 있어서의 關係 그대로를 彷彿케 하야 준다. 그리하야 此節에는-역시 弁辰問題를 徹底히 究明하기 爲하야-新羅의 勃興, 및 그 發展過程을 主로 하야 弁辰諸小國의 變遷을 考察하려 한다. 그러면 新羅는 어느 때 어떠한 處地에서, 즉 어떠한 milieu에서 勃興하기▶P32-1시작하였는가를 먼저 考究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신라는 기술한 바와 같이 위지*(동이전) 변진조에 보이는-20여 국 중의 하나인-사로국(斯盧國) 그것의 후신으로 그 옛 이름을 또한 徐那(서나, 伐(벌))一作徐耶(伐)又作徐羅(伐) 혹은 斯羅(사라)라고도 書稱(서칭)하지만, 이들 전후 명자는 실상 다 마찬가지의 어음, 즉 신국(新國)의 뜻인 「새라」(새나라)의 종종 음역에 불과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요 또 앞서번에도 말한 바이며, 단 신라의 신(新)만은 음의(音義) 공통의 역(譯)으로 볼 것이다. 신라의 발흥을 말하자면 자연이(전신인) 사로국 즉 서나벌(徐那伐) 시대의 상태를 살피지 아니하면 아니되거니와, 이에 관하여는 위지 후한서 등 중국의 고사서에는 하등의 자세한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동방의 고사서인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다소의 전설적 기사가 실리어 있으므로 이를 통하여 그것을 고찰할 수밖에 없다(단 이들 전설적 기사에는 후세의 부회와 윤색이 많이 가하였으므로 그대로 신용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사기(권1) 및 유사(권1)에 의하면 徐羅伐(서라벌)은 처음 三韓(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의 6촌이 서로 결합하여 이를 형성한 것과 같이 말하였고, 또 6촌의 이름은 처음에는 (1) 閼川(알천) 楊山村(양산촌) (2) 突山(돌산) 高墟村(고허촌) (3) 觜山(자산) 珍支村(진지촌)或云(혹운) 于珍村(우진촌) (4) 茂山(무산) 大樹村(대수촌) (5) 金山(금산) 加利村(가리촌) (6) 明活山(명활산) 高耶村(고야촌)단 유사에는 3과 4의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음이었는데, 후(儒理尼師今(유리이사금 9년)에 이를 개칭하여 양산촌을 及梁部(급량부, 일운 梁部(양부)), 고허촌을 沙梁部(사량부), 우진촌을 本彼部(본피부), 대수촌을 漸梁部(점량부, 일운 牟梁部(모량부)), 가리촌을 漢祗部(한지부)遺事作漢岐 又韓岐, 고야촌을 習比部(습비부)라 하고 동시에 6부에는 李(이) 崔(최) 孫(손) 鄭(정) 裴(배) 薛(설)의 6성이 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고려할 점이 많이 있다. 첫째 진한 6촌설이니, 신라의 전신인 사로는 이미 누차 변증하여온 바와 같이 변진족 중 辰王(진왕, 馬韓(마한)의 맹주) 소속 하의 12국의 하나로서, 저 북조선방면의 유민인 「진한」과는 본래부터 族類(족류)와 住地(주지)를 달리한 것으로 나는 인정하며, 따라 위의 소위 6촌은 이를 사로의 6촌이라면 가하되 「辰韓六村」이라거나 혹은 「辰韓六部」라고 하는 것은 대단 부당한 양으로 안다. 생각컨대 진한 6촌설은 그 근거가 신라를 진한의 種裔(종예)로 본 梁書(양서, 신라전) 이래의 오해와, 또 위지의 「辰韓…始有六國云云」이라고 한 6국의 숫자가 이 6촌의 숫자와 우연 일치한 데서 기인한 것인 듯하나, 양서 이래의 오해는 또 다시 거듭하여 말할 필요가 없고, 위지의 소위 6국도 이를 6촌 혹은 6부로 해석하거나 또는 거기에 부회할 이유는 전연 없는 것이다. 그때의 소위 「국」이란 것이 아무리 소국이라 할지라도 일개의 촌락과 동일 정도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적어도 수개 이상의 촌락의 결합체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원시신라인 사로가 과연-전설과 같이-처음부터 6촌으로써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부락국가의 상태를 이루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미 6개 이상의 집단으로써 구성되었을 것이다. 사로 6촌의 형성이 어느 때부터의 사실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위지 기사에 나타나기 이전에 임에 그것의 존재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찰된다. 다음에는 6촌의 명칭에 취하여서니, 전설상에 보이는 그 명칭을 과연 그대로 신용하여 좋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6촌 중 양산 고허 대수의 3촌의 이름은 이를, 후에 개칭되었다는 급량(일운 양부) 사량 점량(일운 모량)의 3부의 이름과 비하여 보면 도리어 후자의 것이 전자보다 더 원시적인 古樸(고박)한 감을 줄뿐더러, 전자 중에는 「알천 양산촌」과 같이 각각 별처의 산천의 이름을 결합하여 동일처소의 명칭을 삼은 듯한 것도 있다(알천은 지금의 경주읍 북을 흐르는 北川(북천)의 舊稱(구칭), 양산은 동읍 남의 현명 남산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설에 보이는 6촌의 명칭은 실상 원시적의 것이 아니요 훨씬 후세에 雅名化(아명화)한 6부의 산명 내지 里名(리명)으로써 부회한 것 같고 또 그 중의 어떤 것은 전연 임의로 꿈인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러면 6촌의 원시적 칭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후의 6부의 명칭이 그 전신인 6촌의 것을 승습한 것으로 보는 동시에 6촌과 6부의 지명 사이에는 본래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며, 다만 표음적 기사에 있어서 종종의 異同(이동)가 있었을 뿐이라고 인식된다 예하면 같은 6부시대에도 급량 사량 점량의 량(들, 도)을 흔히 喙(훼, 동상)로써 기사하여 신라 眞興王巡境碑(진흥왕순경비)와 같은 오랜 금석문에는 喙部(훼부) 沙喙部(사훼부)로 되여 있음과(훼가 량보다 더 원시적일 것이다) 또 점량부의 점(물)을 牟(모)로도 표현하여 일운 모량부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6촌의 이름은 처음으로부터 6부 시대에 걸처서 하등의 큰 변천을 인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회상태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본질적 변동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재래에는 전설적 기사에 의하여 6촌과 6부와의 차이를 명칭상으로만 인하고 실상 내용 본질에 있어서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6촌을 일운 6부라고도 하는 혼동까지 생기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라의 6촌과 6부와의 구별은 마치 고구려의 五族(오족)과 5부와의 구별과 같은 것으로 사료되나니 원문주1▶(고구려의 5족 및 5부에 대하여는 이미 今西(금서), 池內(지내) 두 박사의 古說(고설)이[1] 있거니와) 상언하면 6촌은 초기 고구려의 5족과 같이 일종의 씨족(Clan)적 취락으로서, 각 씨족단은 각별의 추장 하에 혈연적조상을 같이 함 지연적共祖(공조)의 신념으로 住地(주지)를 같이 함으로 결합한 사회조직인 듯하고, 6부는 후기 고구려, 후기 백제, 고려 및 근세 조선의 도내의 오부제와 같이 일종의 행정구획으로서, 씨족사회가 붕괴되어 국가정치의 조직이 발달하던 때의 산물인 듯하다. 즉 씨족사회의 6촌이 변천하여 도시구획상의 6부로 化(화)한 데 불과하다고 생각되나니 여기에 신라 사회조직의 변천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행정구획으로서의 6부는 부락정치를 완전히 탈출한 국가정치시대에 실현되었을 것이므로 물론 신라초기에 속한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기 및 유사에는 6부의 개정과 6성의 배정이 공히 신라 제3대 유리(일운 弩禮(노례))이사금 9년 된 거와 같이 말하였으나 거기에는 도저히 信從(신종)할 수 없고, 이를 만일 제14대의 동명 왕(儒禮尼師今, 유례이사금)의 9년 사실의 誤傳(오전)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하는 의문을 가질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지지한 사회적 발전의 상태로 보면 그때도 그 顯現(현현)을 보기에는 좀 이르다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더욱 6부의 賜姓(사성)과 같은 것은 唐代(당대) 문화의 영향일 것이므로 6부 그것의 실현보다도 훨씬 후세(통일시대)의 사실에 속할 것이다. 신라 6부제의 실현은 (나의 고찰로는) 대개 慈悲麻立干(자비마립간) 12년(서기 458년) 京都(경도)의 坊里名(방리명)을 정하였다고 하는 그 때에 되었으리라고 믿거니와, 6촌과 6부는-비록 성질을 달리할지라도-전후신의 관계로 지리적 명칭 내지 위치에 있어서는 실상 그다지 큰 구별이 없었던 것인데, 후세의 사가가 이를 오해하여 즉 6촌시대의 고유명칭이 따로 있었던 것이 전치 아니한 양으로 알아 일부러 후세의 6부의 산천명 혹은 이명을 취하여 6촌의 古名(고명)으로 가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32-2 新羅는 旣述한 바와 같이 魏志(東夷傳) 弁辰條에 보이는-二十餘國 중의 一인-斯盧國 그것의 後身으로 그 舊名을 또한 徐那(伐)一作徐耶(伐)又作徐羅(伐) 혹은 斯羅라고도 書稱하지만, 이들 前後名字는 실상 다 마찬가지의 語音, 즉 新國의 뜻인 「새라」(새나라)의 種種音譯에 不過한 것임은 周知의 事實이요 또 앞서번에도 말한 바이며, 但 新羅의 新만은 音義共通의 譯으로 볼 것이다. 新羅의 勃興을 말하자면 자연이(前身인) 斯盧國 즉 徐那伐時代의 狀態를 살피지 아니하면 아니되거니와, 이에 關하여는 魏志 後漢書 등 中國의 古史書에는 何等의 仔細한 記事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東方의 古史書인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에 多少의 傳說的 記事가 실리어 있으므로 이를 通하야 그것을 考察할 수밖에 없다(단 이들 傳說的 記事에는 後世의 附會와 潤色이 만히 可하였으므로 그대로 信用하기 어려운 것은 勿論이다). 史記(卷一)及 遺事(卷一)에 依하면 徐羅伐은 처음 三韓 中의 一인 辰韓의 六村이 서루 結合하야 이를 形成한 것과 같이 말하였고, 또 六村의 名은 처음에는 (一) 閼川 楊山村 (二) 突山 高墟村 (三) 觜山 珍支村或云于珍村 (四) 茂山 大樹村 (五) 金山 加利村 (六) 明活山 高耶村단 遺事에는 三과 四의 順序가 서루 바뀌어 있음이었는데, 後(儒理尼師今 九年)에 이를 改稱하야 楊山村을 及梁部(一云梁部), 高墟村을 沙梁部, 于珍村을 本彼部, 大樹村을 漸梁部(一云 牟梁部), 加利村을 漢祗部遺事作漢岐 又韓岐, 高耶村을 習比部라 하고 同時에 六部에는 李 崔 孫 鄭 裴 薛의 六姓이 配定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考慮할 點이 만히 있다. 첫재 辰韓 六村說이니, 新羅의 前身인 斯盧는 이미 屢次 辨證하여온 바와 같이 弁辰族 中 辰王(馬韓의 盟主)所屬下의 十二國의 하나로서, 저 北朝鮮方面의 遺民인 「辰韓」과는 본래부터 族類와 住地를 달리한 것으로 나는 認定하며, 따라 우의 所爲 六村은 이를 斯盧의 六村이라면 可하되 「辰韓六村」이라거나 혹은 「辰韓六部」라고 하는 것은 대단 不當한 양으로▶P33 안다. 생각컨대 辰韓六村說은 그 根據가 新羅를 辰韓의 種裔로 본 梁書(新羅傳) 以來의 誤解와, 또 魏志의 「辰韓…始有六國云云」이라고 한 六國의 數字가 이 六村의 數字와 偶然 一致한 데서 基因한 것인 듯하나, 梁書 以來의 誤解는 또 다시 거듭하야 말할 必要가 없고, 魏志의 所爲 六國도 이를 六村 혹은 六部로 解釋하거나 또는 거긔에 附會할 理由는 全然 없는 것이다. 그때의 所爲 「國」이란 것이 아모리 小國이라 할지라도 一個의 村落과 同一程度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적어도 數個以上의 村落의 結合體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原始新羅인 斯盧가 果然-傳說과 같이-처음부터 六村으로써 形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部落國家의 狀態를 이루기 始作하였을 때에는 임이 六個 以上의 集團으로써 構成되었을 것이다. 斯盧六村의 形成이 어느 때부터의 事實인 지는 자세이 알 수 없으나, 적어도 魏志 記事에 나타나기 以前에 임에 그것의 存在를 보았을 것이라고 推察된다. 다음에는 六村의 名稱에 就하여서니, 傳說上에 보이는 그 名稱을 果然 그대로 信用하야 조흘 것인가가 問題이다. 六村 中 楊山 高墟 大樹의 三村의 名은 이를, 後에 改稱되였다는 及梁(一云梁部) 沙梁 漸梁(一云牟梁)의 三部의 名과 比하여 보면 도리어 後者의 것이 前者보다 더 原始的인 古樸한 感을 줄뿐더러, 前者 중에는 「閼川 楊山村」과 같이 各各 別處의 山川의 名을 結合하야 同一處所의 名稱을 삼은 듯한 것도 있다(閼川은 지금의 慶州邑北을 흐르는 北川의 舊稱, 楊山은 同邑南의 現名 南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傳說에 보이는 六村의 名稱은 실상 原始的의 것이 아니요 훨신 後世에 雅名化한 六部의 山名 乃至 里名으로써 附會한 것 같고 또 그 중의 어떤 것은 全然 任意로 꿈인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러면 六村의 原始的 稱號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後의 六部의 名稱이 그 前身인 六村의 것을 承襲한 것으로 보는 同時에 六村과 六部의 地名 사이에는 本來 큰 變動이 없었든 것으로 보며, 다만 表音的 記寫에 있어서 種種의 異同이 있었을 뿐이라고 認識된다 例하면 같▶P34은 六部時代에도 及梁 沙梁 漸梁의 梁(들, 도)을 흔이 喙(同上)로써 記寫하야 新羅 眞興王巡境碑와 같은 오랜 金石文에는 喙部 沙喙部로 되여 있음과(喙가 梁보다 더 原始的일 것이다) 또 漸梁部의 漸(물)을 牟로도 表現하야 一云 牟梁部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六村의 名은 처음으로부터 六部時代에 걸처서 何等의 큰 變遷을 認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社會狀態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本質的 變動이 있었든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在來에는 傳說的 記事에 依하야 六村과 六部와의 差異를 名稱上으로만 認하고 실상 內容 本質에 있어서는 兩者를 同一視하야 六村을 一云六部라고도 하는 混同까지 생기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區別할 必要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新羅의 六村과 六部와의 區別은 마치 高句麗의 五族과 五部와의 區別과 같은 것으로 思料되나니 원문주1▶(高句麗의 五族 及 五部에 對하여는 이미 今西․池內兩博士의 古說이[2] 있거니와) 詳言하면 六村은 初期 高句麗의 五族과 같이 一種의 氏族(Clan)的 聚落으로서, 各氏族團은 各別의 酋長下에 血緣的祖上을 같이 함 地緣的共祖의 信念으로 住地를 같이 함으로 結合한 社會組織인 듯하고, 六部는 後期 高句麗, 後期 百濟, 高麗 및 近世朝鮮의 都內의 五部制와 같이 一種의 行政區劃으로서, 氏族社會가 崩壞되어 國家政治의 組織이 發達하든 때의 産物인 듯하다. 즉 氏族社會의 六村이 變遷하야 都市區劃上의 六部로 化한 데 不過하다고 생각되나니 여기에 新羅 社會組織의 變遷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行政區劃으로서의 六部는 部落政治를 完全히 脫出한 國家政治時代에 實現되었을 것이므로 勿論 新羅初期에 屬한 事實이라고는 볼 수 없다. 史記 及 遺事에는 六部의 改定과 六姓의 配定이 共히 新羅 第三代 儒理(一云 弩禮)尼師今 九年에 된 거와 같이 말하였으나 거긔에는 到底히 信從할 수 없고, 이를 만일 第十四代의 同名王(儒禮尼師今)의 九年 事實의 誤傳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하는 疑問을 가질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新羅의 遲遲한 社會的 發展의 狀態로 보면 그때도 그 顯現을 보기에는 좀 이르다고 하지 아니하면 아▶P35-1니되며, 더욱 六部의 賜姓과 같은 것은 唐代文化의 影響일 것이므로 六部 그것의 實現보다도 훨신 後世(統一時代)의 事實에 속할 것이다. 新羅 六部制의 實現은 (나의 考察로는) 대개 慈悲麻立干 十二年(西紀四百五十八年) 京都의 坊里名을 定하였다고 하는 그 때에 되었으리라고 믿거니와, 六村과 六部는-비록 性質을 달리할지라도-前後身의 關係로 地理的 名稱 乃至 位置에 있어서는 실상 그다지 큰 區別이 없었든 것인데, 後世의 史家가 이를 誤解하야 즉 六村時代의 固有名稱이 따루 있었든 것이 傳치 아니한 양으로 알아 일부러 後世의 六部의 山川名 혹은 里名을 取하야 六村의 古名으로 假裝한 것이 아닌가 한다.
6촌 6부는 말하자면 신라의 기초요 중심지이므로 그 지리적 위치에 대하여 또한 일고할 필요가 있다. 6촌 6부의 땅이 지금의 경주 읍치 및 그 부근에 해당함은 별로 이의가 없는 바이지만 각촌 각부의 세밀한 소재에 취하여서는 아직도 학자의 설이 미진한 곳이 있다. 6촌 6부의 제1위인 급량(급훼) 일운 량(훼)은 물론 유사의 설과 같이 금 南川(남천, 蚊川(문천)) 남의 曇嚴寺址(담엄사지)를 중심으로 하였던 곳으로서 남천 이남 南山(남산, 楊山(양산)) 서북 일대의 땅을 포함하였던 것 같고, 원문주2▶급량의 급은 前間恭作(전간공작) 씨의 설[3]에 따라 근본 근저의 뜻인 「밑」의 借字(차자)로 解(해)함이 가할 듯하니, 그곳에는 실제 박씨 시조의 탄생지라고 전하는 蘿井(나정)과 동 시조의 능이라고 하는 오릉(일운 蛇陵(사릉))이 있는 것을 아울러 참고할지며, 다음의 사량(사훼)의 소재는 재래에는 금 남천 상류의 한 지류인 史等川(사등천) 유역에 비정하여 왔으나 사량과 같이 저명하고 중요한 부락이 중심지에서 그렇게 떠ퟝ진 곳에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않는다. 삼국유사(권1) 신라시조조에 (시조부인 閼英(알영)의 탄생지를)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云云」이라고 한 것을 보면 사량은 알영정의 소재지인-금 남천(문천)의 북안의 沙正里(사정리)를 중심으로 하여 남천 이북, 서천 이동, 북천(알천)유역 이남의 땅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인식되며 (즉 위의 급량과 남북으로 대치하여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든 저명한 부락으로서) 사량의 사는 보통 학자의 설과 같이 新(새)의 뜻인 듯하다고려 초에 사량부를 고쳐 南山部(남산부)라고 한 것은, 살피컨대 慶州府治(경주붙이)를 사량에 두고, 부를 남산 동남으로 옮기었음에 인함인 듯 셋째의 본피진흥왕비에는 本(본피)라고 보임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皇龍寺(황룡사) 남의 땅으로 지금의 仁旺里(인왕리) 일대에 위치하였던 것 같으나, 최초에는 金城(금성) 내지 半月城(반월성)까지도 포함하여 사량 동편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원시 본피의 일반은 후에 왕성 소재지로 化(화)하여 그 지역의 축소를 보았던 것 같다. 넷째의 점량 일운 모량은 말할 것도 없이 서천의 지류인 牟梁川(모량천) 유역에 위치하였던 것으로서 금 孝峴里(효현리) 일대가 그 부락의 중심지였을 것이며 다섯째의 漢祗(한지)소위 금산 가리촌는 역시 유사의 설과 같이 금 북천(알천) 북쪽의 金剛山(금강산, 小金剛山(소금강산)) 栢栗寺(백률사) 부근을 중심으로 하여 있었던 것이며, 끝으로 습비소위 명활산 고야촌는 지금의 명활산 서남록의 普門里(보문리) 일대와 및 狼山(낭산) 부근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니, 삼국사기 祭祀志(제사지) 大祀條(대사조)에 보이는 3산의 수위인 「柰歷習比部」은 곧 경주의 鎭山(진산)인 낭산 그것임을 참고함이 가하다(그리고 동지 四城門祭條(사성문제조)에는 또 習比門(습비문)의 이름이 보이나니, 이는 물론 왕성 4문 중의 하나로서 습비부 방면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금 경주읍의 중앙에 있던 것은 사량과 본피요, 사량의 남편에 있던 것이 급량이요, 급량의 서편이 점량(모량)이요, 본피의 동이 습비, 본피 및 사량의 북이 한지였다.
쪽수▶P35-2六村 六部는 말하자면 新羅의 基礎요 中心地이므로 그 地理的 位置에 對하야 또한 一考할 必要가 있다. 六村 六部의 地가 지금의 慶州邑治 및 그 附近에 該當함은 別로 異議가 없는 바이지만 各村 各部의 細密한 所在에 就하여서는 아직도 學者의 說이 未盡한 곳이 있다. 六村 六部의 第一位인 及梁(及喙) 一云梁(喙)은 勿論 遺事의 說과 같이 今 南川(蚊川)南의 曇嚴寺址를 中心으로 하였든 곳으로서 南川 以南 南山(楊山)西北一帶의 地를 包含하였든 것 같고, 원문주2▶及梁의 及은 前間恭作氏의 說[4]에 따라 根本 根柢의 義인 「밑」의 借字로 解함이 可할 듯하니, 그곳에는 실제 朴氏始祖의 誕生地라고 傳하는 蘿井과 同 始祖의 陵이라고 하는 五陵(一云 蛇陵)이 있는 것을 아울러 參考할지며, 다음의 沙梁(沙喙)의 所在는 在來에는 今 南川上流의 一支流인 史等川流域에 比定하야 왔으나 沙梁과 같이 著名하고 重要한 部落이 中心地에서 그러케 떠러진 곳에 있었으리라고는 믿지 안는다. 三國遺事(卷一) 新羅始祖條에 (始祖夫人 閼英의 誕生地를) 「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邊云云」이라고 한 것을 보면 沙梁은 閼英井의 所在地인-今南川(蚊川)의 北岸의 沙正里를 中心으로 하야 南川以北, 西川以東, 北川(閼川)流域以南의 地에 位置하였든 것으로 認識되며 (즉 우의 及梁과 南北으로 對▶P36-1峙하야 서루 密接한 關係를 가지든 著名한 部落으로서) 沙梁의 沙는 普通 學者의 說과 같이 新(새)의 義인 듯하다高麗初에 沙梁部를 곷이어 南山部라고 한 것은, 按컨대 慶州府治를 沙梁에 두고, 部를 南山 東南으로 옴기었음에 因함인 듯 셋재의 本彼眞興王碑에는 本라고 보임는 三國遺事에 依하면 皇龍寺南의 地로 지금의 仁旺里一帶에 位置하였든 것 같으나, 最初에는 金城 乃至 半月城까지도 包含하야 沙梁 東편에 있었든 것이 아닌가 한다. 즉 原始 本彼의 一半은 後에 王城所在地로 化하야 그 地域의 縮少를 보았든 것 같다. 넷재의 漸梁 一云牟梁은 말할 것도 없이 西川의 支流인 牟梁川流域에 位置하였든 것으로서 今 孝峴里一帶가 그 部落의 中心地였을 것이며 다섯재의 漢祗所爲 金山加利村는 역시 遺事의 說과 같이 今 北川(閼川)北쪽의 金剛山(小金剛山) 栢栗寺 附近을 中心으로 하야 있었든 것이며, 끝으로 習比所爲 明活山 高耶村는 지금의 明活山 西南麓의 普門里一帶와 및 狼山附近을 차지하고 있었든 것이니, 三國史記 祭祀志 大祀條에 보이는 三山의 首位인 「柰歷習比部」은 곧 慶州의 鎭山인 狼山 그것임을 參考함이 可하다(그리고 同志 四城門祭條에는 또 習比門의 名이 보이나니, 이는 勿論 王城 四門 中의 一로서 習比部 方面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얻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今 慶州邑의 中央에 있든 것은 沙梁과 本彼요, 沙梁의 南便에 있든 것이 及梁이요, 及梁의 西편이 漸梁(牟梁)이요, 本彼의 東이 習比, 本彼 及 沙梁의 北이 漢祗였다.
삼국유사(권1)의 전설적 기재에 의하면 처음 6촌에는 謁平(알편, 급량의 祖(조)) 蘇伐都利(소벌도리, 사량의 조) 俱禮馬(구례마, 모량의 조) 智伯虎(지백호, 본피의 조) 祗沱(지타) 일운 只他(지타, 한기의 조) 虎珍(호진, 습비의 조)의 6인이 天降(천강)하여 6촌의 장이 되고 동시에 6부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이들 6조의 이름과 천강설은 다 후인의 부회한 바로서 믿을 것이 되지 못하지만, 6촌은 말하자면 사로부족을 구성한 6개의 씨족단이므로 각촌에 각별의 酋帥(추수)가 있어 소단체를 통솔하였던 것과 또 그 결합의 紐帶(유대)가 혈연적으로 혹은 전설상 선조를 동일히 한다는 신념 하에 맺어진 것임은 의심 없는 사실이다. 그런즉 위의 전설은 사로의 6촌이 씨족사회에 불과한 것을 암시하여 주는 외에는 하등의 의의가 없는 것이다. 또 동서(권1)에 의하면-잘 아는 이야기지만-前漢(전한) 宣帝(선제) 地節(지절)원년 3월달에 6부의 조가 각기 자제들을 이끌고 알천 岸上(안상)에 회합하여, 有德人(유덕인)을 구하여 군왕을 삼을 일과 및 立邦設都(입방설도)의 뜻를 決(결)한 후, 이어 양산(남산)하 蘿井(나정) 곁에서 赫居世(혁거세)란-身生光彩(신생광채)의-卵生兒(난생아)를 얻어 位號(위호)를 居瑟邯(거슬감, 或作(혹작) 居西干(거서간))이라 하고 또 同日(동일)에 사량리 閼英井(알영정) 변에 사는 알영이란-姿容(자용) 殊麗(수려)의-龍生女(용생녀)를 얻어 남산 서록(昌林寺址, 창림사지)에 궁실을 짓고, 2聖兒(성아)를 봉양하여 나이 13세가 되자, 漢宣帝(한선제) 五鳳(오봉)원년 갑자(57B.C.)에 男(남)을 세워 왕을 삼고 女(여)로써 后(후)를 삼고 나라를 서라벌(又(우) 徐伐(서벌), 혹운 斯羅(사라), 又(우) 斯盧(사로))이라고 하였다는 설화가 있으며 삼국사기에도 이와 대동소이한 전설이 있거니와, 이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암시하여 주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물론 위 설화에는 혁거세로써 건국의 시조를 삼고, 한의 오봉 원년으로써 건국의 연대를 삼었지만, 어느 점으로 보든지 신라의 엄밀한 의미의 건국이 이 때에 되었다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아니하므로 위 설화는 필경(엄밀한 의미의 건국 설화)라기보다 그 원시국가 즉 「사로」란 부락국가의 창시에 관한 전설로밖에 볼 수 없으니(물론 그 연대는 미상하지만)소위 알천 상의 6촌회의는 즉 사로6촌의 씨족단이 회합하여 비로소 씨족을 부족으로 결속하는 동시에 부족을 통솔할 渠帥(거수)의 선거를 꾀하던 사실의 전설로 解(해)할 것이며, 또 혁거세와 알영에 관한 기괴한 설화적 요소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사로란 원시국가의 거수가 처음 양산 하인 급량 부락의 출신으로써 선거되었던 것과, 또 급량 부락과 그 對岸(대안)의 사량 부락과의 사이에 결혼이 행하였던 사실은 이를 인정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혁거세는 신라의 원시국가시대의 시조로 숭봉된 저명한 거수라고 할지언정, 이를 곧 정식 국가 공작기의 太祖(태조)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가 과연 설화 대로 기원전 1세기의 사람이냐 아니냐도 큰 의문 중에 있는 것이다. 혁거세의 탈출한 卵(란)의 大(대)가 박(瓢)과 같다 하여 성을 朴(박)이라 하였다는 사기, 유사의 전설도 물론 후인의 부회한 바로서, 실상은 혁거세의 「혁」이 방언의 「밝」(광명)의 借訓字(차훈자)이므로 후세에 이와 동음인 박으로써 성을 추칭한 데 불과한 것이며, 또 혁거세의 「거세」도 실상은 그 位號(위호)인 거서간 일운 거슬감의 「거서」 「거슬」과 동음동어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됨에 불구하고, 사기 및 유사에는 이를 구별하여 하나는 인명, 하나는 위호로 하여 심지어 「赫居世居西干」이라고 疊書(첩서)하기까지 하였다. 나의 견해로는 거세 거서 거슬은 전에 말한 백제의 鞬吉支(건길지)의 吉支(길지), 阿知吉師(아지길사) 和邇吉師(화이길사)의 吉師(길사, キシ)라든지, 日本書紀(일본서기)의 백제 신라 加羅(가라) 등 국왕에 대한 訓稱(훈칭)인 コニキシ コキシ의 キシ라든지, 또는 후일 신라의 관등 중 제14위의 吉士(길사) 혹운 稽知(계지) 혹운 吉次(길차)와 전연 같은 말의 異寫(이사)로 거기에 干(간)이나 邯(감)의 존호를 더 붙인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혁은-마치 건길지의 건(큰, 대의 뜻)과 같이-거세•거서(간)•거슬(감)을 modify한 형용사로, 유사(권1)주에 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理世(이세) 2자는 무용의 부회지만)라고 한 것을 보면 혁은 원문주3▶弗矩內(불구내, 弗矩(불구)는 붉 혹은 밝, 內(내)는 )[5] 즉 붉은•밝의 漢譯(한역)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혁거세(혁거서간•혁거슬감)는 바로 明王(명왕) 聖王(성왕) 혹은 철인 현지자의 뜻일 것이다. 이는 마치 고구려의 시조 朱蒙(주몽, 鄒牟(추모)•東明(동명))이 善射者(선사자)의 뜻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卵生傳說(난생전설)에 있어서도 양자가 공통한 점이 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유사하니, 혁거세의 의의와 실재성을 주몽의 그것과 방불한 양으로 보면 가할 것이다.
쪽수▶P36-2 三國遺事(卷一)의 傳說的 記載에 依하면 처음 六村에는 謁平(及梁의 祖) 蘇伐都利(沙梁의 祖) 俱禮馬(牟梁의 祖) 智伯虎(本彼의 祖) 祗沱一云只他(韓岐의 祖) 虎珍(習比의 祖)의 六人이 天降하야 六村의 長이 되고 同時에 六部의 始祖가 되였다고 한다. 이들 六祖의 名과 天降說은 다 後人의 附會한 바로서 믿을 것이 되지 못하지만, 六村은 말하자면 斯盧部族을 構成한 六個의 氏族團이므로 各村에 各別의 酋帥가 있어 小團體를 統率하였든 것과 또 그 結合의 紐帶가 血緣的으로 혹은 傳說上 先祖를 同一히 한다는 信念下에 맺어진 것임은 의심 없는 事實이다. 그런즉 우의 傳說은 斯盧의 六▶P37村이 氏族社會에 不過한 것을 暗示하야 주는 외에는 何等의 意義가 없는 것이다. 또 同書(卷一)에 依하면-잘 아는 이야기지만-前漢 宣帝 地節元年 三月朔에 六部의 祖가 각기 子弟들을 익글고 閼川岸上에 會合하야, 有德人을 求하야 君王을 삼을 일과 및 立邦設都의 議를 決한 후, 이어 楊山(南山)下 蘿井傍에서 赫居世란-身生光彩의-卵生兒를 얻어 位號를 居瑟邯(或作 居西干)이라 하고 또 同日에 沙梁里 閼英井邊에 사는 閼英이란-姿容 殊麗의-龍生女를 얻어 南山西麓(昌林寺址)에 宮室을 짓고, 二聖兒를 奉養하야 나이 十三歲가 되자, 漢宣帝 五鳳元年 甲子(57B.C.)에 男을 세워 王을 삼고 女로써 后를 삼고 나라를 徐羅伐(又徐伐, 或云斯羅, 又斯盧)이라고 하였다는 說話가 있으며 三國史記에도 이와 大同小異한 傳說이 있거니와, 이들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을 暗示하야 주는가를 생각하여 보자. 勿論 右說話에는 赫居世로써 建國의 始祖를 삼고, 漢의 五鳳元年으로써 建國의 年代를 삼었지만, 어느 點으로 보든지 新羅의 嚴密한 意味의 建國이 이때에 되였다고는 到底히 믿어지지 아니하므로 右說話는 필경(嚴密한 意味의 建國說話)라기보다 그 原始國家 즉 「斯盧」란 部落國家의 創始에 關한 傳說로밖에 볼 수 없으니(勿論 그 年代는 未詳하지만)所爲 閼川上의 六村會議는 즉 斯盧六村의 氏族團이 會合하야 비로소 氏族을 部族으로 結束하는 同時에 部族을 統率할 渠帥의 選擧를 꾀하든 事實의 傳說로 解할 것이며, 또 赫居世와 閼英에 關한 奇怪한 說話的 要素는 別問題로 하더라도 斯盧란 原始國家의 渠帥가 처음 楊山下인 及梁部落의 出身으로써 選擧되었든 것과, 또 及梁部落과 그 對岸의 沙梁部落과의 사이에 結婚이 行하였든 事實은 이를 認定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赫居世는 新羅의 原始國家時代의 始祖로 崇奉된 著名한 渠帥라고 할지언정, 이를 곧 正式 國家工作期의 太祖라고는 할 수 없으며, 그가 果然 說話 대로 紀元前 一世紀의 人이냐 아니냐도 큰 疑問 中에 있는 것이다. 赫居世의 脫出한 卵의 大가 박(瓢)과 같다 하야 姓을 朴이라 하였▶P38-1다는 史記․遺事의 傳說도 勿論 後人의 附會한 바로서, 실상은 赫居世의 「赫」이 方言의 「밝」(光明)의 借訓字이므로 後世에 이와 同音인 朴으로써 姓을 追稱한 데 不過한 것이며, 또 赫居世의 「居世」도 실상은 그 位號인 居西干 一云 居瑟邯의 「居西」 「居瑟」과 同音同語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됨에 不拘하고, 史記 及 遺事에는 이를 區別하야 一은 人名, 一은 位號로 하야 심지어 「赫居世居西干」이라고 疊書하기까지 하였다. 나의 見解로는 居世 居西 居瑟은 前에 말한 百濟의 鞬吉支의 吉支, 阿知吉師 和邇吉師의 吉師(キシ)라든지, 日本書紀 의 百濟 新羅 加羅等 國王에 對한 訓稱인 コニキシ コキシ의 キシ라든지, 또는 後日 新羅의 官等 中 第十四位의 吉士 或云稽知 或云吉次와 全然 같은 말의 異寫로 거긔에 干이나 邯의 尊號를 더 붙인 것에 不過하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赫은-마치 鞬吉支의 鞬(큰, 大의 意)과 같이-居世•居西(干)•居瑟(邯)을 modify한 形容詞로, 遺事(卷一)注에或作弗矩內王 言光明理世也(理世 二字는無用의 附會지만)라고 한 것을 보면 赫은 원문주3▶弗矩內(弗矩는 붉 혹은 밝, 內는 )[6] 즉 붉은•밝의 漢譯으로 볼 수밖에 없으니, 赫居世(赫居西干•赫居瑟邯)는 바루 明王 聖王 혹은 哲人 賢知者의 義일 것이다. 이는 마치 高句麗의 始祖 朱蒙(鄒牟•東明)이 善射者의 義인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卵生傳說에 있어서도 兩者가 共通한 點이 있지만 그 이름에 있어서도 이와 같이 類似하니,赫居世의 意義와 實在性을 朱蒙의 그것과 彷彿한 양으로 보면 可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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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史林(사림) 제6권 제3호 금서 박사의 「高句麗五族五部考」 및 東洋學報(동양학보) 16권 제1호 지내 박사의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 참조.
  2. 史林第六卷 第三號 今西博士의 「高句麗五族五部考」及東洋學報十六卷 第一號 池內博士의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 參照.
  3. 동양학보 제14권 제2호,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きて」 주11.
  4. 東洋學報第一四卷 第二號, 「新羅王の世次と其の名につきて」 注十一.
  5. 불구내의 내는 「」으로 훈독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 이는 鮎貝房之進(점패방지진) 씨니 그의 저인 雜攷(잡고) 제1집 居西干條(거서간조)를 참조함이 가함.
  6. 弗矩內의 內는 「」으로 訓讀하여야 할 것을 主張한 이는 鮎貝房之進氏니 그의 著인 雜攷第一輯 居西干條를 參照함이 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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