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7완)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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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7일 (일) 16:4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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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6)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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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六)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11월
시작쪽 031쪽 종료쪽 056쪽 전체쪽 026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6. 변진 (변한) 문제 (승전)






































본문1-1: (병) 신라의 발흥과 변진 제국의 변천


진마(辰馬)의 땅에 백제가 흥기하여 마침내 그곳을 통일 융합함과 같이 변진의 일족인 신라도 次第(차제)로 주위의 제소국을 잠식하여 드디어 낙동강 연안의 임나(任那)•가라(加羅)의 제연맹국을 병탄하여, 변진의 온(전)종족을 완전히 한 덩어리에 뭉친 (나중에는 반도를 통일하는) 최후의 패자가 되매 이르렀거니와, 신라의 흥기발전은 곧 변진제국의 변천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환언하면 신라의 변진제국에 있어서의 관계는 마치 백제의 진마 제국간에 있어서의 관계 그대로를 방불케 하여 준다. 그리하여 이 절에는-역시 변진문제를 철저히 구명하기 위하여-신라의 발흥, 및 그 발전 과정을 주로 하여 변진 제소국의 변천을 고찰하려 한다. 그러면 신라는 어느 때 어떠한 처지에서, 즉 어떠한 milieu에서 발흥하기 시작하였는가를 먼저 고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쪽수▶P31辰馬의 地에 百濟가 興起하야 마침내 그곳을 統一融合함과 같이 弁辰의 一族인 新羅도 次第로 周圍의 諸小國을 蠶食하야 듸듸어 洛東江沿岸의 任那•加羅의 諸聯盟國을 倂呑하야, 弁辰의 온(全)種族을 完全히 한 덩어리에 뭉친 (나중에는 半島를 統一하는)最後의 覇者가 되매 이르렀거니와, 新羅의 興起發展은 곧 弁辰諸國의 變遷을 意味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換言하면 新羅의 弁辰諸國에 있어서의 關係는 마치 百濟의 辰馬諸國間에 있어서의 關係 그대로를 彷彿케 하야 준다. 그리하야 此節에는-역시 弁辰問題를 徹底히 究明하기 爲하야-新羅의 勃興, 및 그 發展過程을 主로 하야 弁辰諸小國의 變遷을 考察하려 한다. 그러면 新羅는 어느 때 어떠한 處地에서, 즉 어떠한 milieu에서 勃興하기▶P32-1시작하였는가를 먼저 考究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신라는 기술한 바와 같이 위지*(동이전) 변진조에 보이는-20여 국 중의 하나인-사로국(斯盧國) 그것의 후신으로 그 옛 이름을 또한 徐那(서나, 伐(벌))一作徐耶(伐)又作徐羅(伐) 혹은 斯羅(사라)라고도 書稱(서칭)하지만, 이들 전후 명자는 실상 다 마찬가지의 어음, 즉 신국(新國)의 뜻인 「새라」(새나라)의 종종 음역에 불과한 것임은 주지의 사실이요 또 앞서번에도 말한 바이며, 단 신라의 신(新)만은 음의(音義) 공통의 역(譯)으로 볼 것이다. 신라의 발흥을 말하자면 자연이(전신인) 사로국 즉 서나벌(徐那伐) 시대의 상태를 살피지 아니하면 아니되거니와, 이에 관하여는 위지 후한서 등 중국의 고사서에는 하등의 자세한 기사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동방의 고사서인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에 다소의 전설적 기사가 실리어 있으므로 이를 통하여 그것을 고찰할 수밖에 없다(단 이들 전설적 기사에는 후세의 부회와 윤색이 많이 가하였으므로 그대로 신용하기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사기(권1) 및 유사(권1)에 의하면 徐羅伐(서라벌)은 처음 三韓(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의 6촌이 서로 결합하여 이를 형성한 것과 같이 말하였고, 또 6촌의 이름은 처음에는 (1) 閼川(알천) 楊山村(양산촌) (2) 突山(돌산) 高墟村(고허촌) (3) 觜山(자산) 珍支村(진지촌)或云(혹운) 于珍村(우진촌) (4) 茂山(무산) 大樹村(대수촌) (5) 金山(금산) 加利村(가리촌) (6) 明活山(명활산) 高耶村(고야촌)단 유사에는 3과 4의 순서가 서로 바뀌어 있음이었는데, 후(儒理尼師今(유리이사금 9년)에 이를 개칭하여 양산촌을 及梁部(급량부, 일운 梁部(양부)), 고허촌을 沙梁部(사량부), 우진촌을 本彼部(본피부), 대수촌을 漸梁部(점량부, 일운 牟梁部(모량부)), 가리촌을 漢祗部(한지부)遺事作漢岐 又韓岐, 고야촌을 習比部(습비부)라 하고 동시에 6부에는 李(이) 崔(최) 孫(손) 鄭(정) 裴(배) 薛(설)의 6성이 배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고려할 점이 많이 있다. 첫째 진한 6촌설이니, 신라의 전신인 사로는 이미 누차 변증하여온 바와 같이 변진족 중 辰王(진왕, 馬韓(마한)의 맹주) 소속 하의 12국의 하나로서, 저 북조선방면의 유민인 「진한」과는 본래부터 族類(족류)와 住地(주지)를 달리한 것으로 나는 인정하며, 따라 위의 소위 6촌은 이를 사로의 6촌이라면 가하되 「辰韓六村」이라거나 혹은 「辰韓六部」라고 하는 것은 대단 부당한 양으로 안다. 생각컨대 진한 6촌설은 그 근거가 신라를 진한의 種裔(종예)로 본 梁書(양서, 신라전) 이래의 오해와, 또 위지의 「辰韓…始有六國云云」이라고 한 6국의 숫자가 이 6촌의 숫자와 우연 일치한 데서 기인한 것인 듯하나, 양서 이래의 오해는 또 다시 거듭하여 말할 필요가 없고, 위지의 소위 6국도 이를 6촌 혹은 6부로 해석하거나 또는 거기에 부회할 이유는 전연 없는 것이다. 그때의 소위 「국」이란 것이 아무리 소국이라 할지라도 일개의 촌락과 동일 정도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적어도 수개 이상의 촌락의 결합체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원시신라인 사로가 과연-전설과 같이-처음부터 6촌으로써 형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부락국가의 상태를 이루기 시작하였을 때에는 이미 6개 이상의 집단으로써 구성되었을 것이다. 사로 6촌의 형성이 어느 때부터의 사실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적어도 위지 기사에 나타나기 이전에 임에 그것의 존재를 보았을 것이라고 추찰된다. 다음에는 6촌의 명칭에 취하여서니, 전설상에 보이는 그 명칭을 과연 그대로 신용하여 좋을 것인가가 문제이다. 6촌 중 양산 고허 대수의 3촌의 이름은 이를, 후에 개칭되었다는 급량(일운 양부) 사량 점량(일운 모량)의 3부의 이름과 비하여 보면 도리어 후자의 것이 전자보다 더 원시적인 古樸(고박)한 감을 줄뿐더러, 전자 중에는 「알천 양산촌」과 같이 각각 별처의 산천의 이름을 결합하여 동일처소의 명칭을 삼은 듯한 것도 있다(알천은 지금의 경주읍 북을 흐르는 北川(북천)의 舊稱(구칭), 양산은 동읍 남의 현명 남산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전설에 보이는 6촌의 명칭은 실상 원시적의 것이 아니요 훨씬 후세에 雅名化(아명화)한 6부의 산명 내지 里名(리명)으로써 부회한 것 같고 또 그 중의 어떤 것은 전연 임의로 꿈인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러면 6촌의 원시적 칭호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후의 6부의 명칭이 그 전신인 6촌의 것을 승습한 것으로 보는 동시에 6촌과 6부의 지명 사이에는 본래 큰 변동이 없었던 것으로 보며, 다만 표음적 기사에 있어서 종종의 異同(이동)가 있었을 뿐이라고 인식된다 예하면 같은 6부시대에도 급량 사량 점량의 량(들, 도)을 흔히 喙(훼, 동상)로써 기사하여 신라 眞興王巡境碑(진흥왕순경비)와 같은 오랜 금석문에는 喙部(훼부) 沙喙部(사훼부)로 되여 있음과(훼가 량보다 더 원시적일 것이다) 또 점량부의 점(물)을 牟(모)로도 표현하여 일운 모량부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6촌의 이름은 처음으로부터 6부 시대에 걸처서 하등의 큰 변천을 인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사회상태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본질적 변동이 있었던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재래에는 전설적 기사에 의하여 6촌과 6부와의 차이를 명칭상으로만 인하고 실상 내용 본질에 있어서는 양자를 동일시하여 6촌을 일운 6부라고도 하는 혼동까지 생기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라의 6촌과 6부와의 구별은 마치 고구려의 五族(오족)과 5부와의 구별과 같은 것으로 사료되나니 원문주1▶(고구려의 5족 및 5부에 대하여는 이미 今西(금서), 池內(지내) 두 박사의 古說(고설)이[1] 있거니와) 상언하면 6촌은 초기 고구려의 5족과 같이 일종의 씨족(Clan)적 취락으로서, 각 씨족단은 각별의 추장 하에 혈연적조상을 같이 함 지연적共祖(공조)의 신념으로 住地(주지)를 같이 함으로 결합한 사회조직인 듯하고, 6부는 후기 고구려, 후기 백제, 고려 및 근세 조선의 도내의 오부제와 같이 일종의 행정구획으로서, 씨족사회가 붕괴되어 국가정치의 조직이 발달하던 때의 산물인 듯하다. 즉 씨족사회의 6촌이 변천하여 도시구획상의 6부로 化(화)한 데 불과하다고 생각되나니 여기에 신라 사회조직의 변천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행정구획으로서의 6부는 부락정치를 완전히 탈출한 국가정치시대에 실현되었을 것이므로 물론 신라초기에 속한 사실이라고는 볼 수 없다. 사기 및 유사에는 6부의 개정과 6성의 배정이 공히 신라 제3대 유리(일운 弩禮(노례))이사금 9년 된 거와 같이 말하였으나 거기에는 도저히 信從(신종)할 수 없고, 이를 만일 제14대의 동명 왕(儒禮尼師今, 유례이사금)의 9년 사실의 誤傳(오전)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하는 의문을 가질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신라의 지지한 사회적 발전의 상태로 보면 그때도 그 顯現(현현)을 보기에는 좀 이르다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더욱 6부의 賜姓(사성)과 같은 것은 唐代(당대) 문화의 영향일 것이므로 6부 그것의 실현보다도 훨씬 후세(통일시대)의 사실에 속할 것이다. 신라 6부제의 실현은 (나의 고찰로는) 대개 慈悲麻立干(자비마립간) 12년(서기 458년) 京都(경도)의 坊里名(방리명)을 정하였다고 하는 그 때에 되었으리라고 믿거니와, 6촌과 6부는-비록 성질을 달리할지라도-전후신의 관계로 지리적 명칭 내지 위치에 있어서는 실상 그다지 큰 구별이 없었던 것인데, 후세의 사가가 이를 오해하여 즉 6촌시대의 고유명칭이 따로 있었던 것이 전치 아니한 양으로 알아 일부러 후세의 6부의 산천명 혹은 이명을 취하여 6촌의 古名(고명)으로 가장한 것이 아닌가 한다.
쪽수▶P32-2 新羅는 旣述한 바와 같이 魏志(東夷傳) 弁辰條에 보이는-二十餘國 중의 一인-斯盧國 그것의 後身으로 그 舊名을 또한 徐那(伐)一作徐耶(伐)又作徐羅(伐) 혹은 斯羅라고도 書稱하지만, 이들 前後名字는 실상 다 마찬가지의 語音, 즉 新國의 뜻인 「새라」(새나라)의 種種音譯에 不過한 것임은 周知의 事實이요 또 앞서번에도 말한 바이며, 但 新羅의 新만은 音義共通의 譯으로 볼 것이다. 新羅의 勃興을 말하자면 자연이(前身인) 斯盧國 즉 徐那伐時代의 狀態를 살피지 아니하면 아니되거니와, 이에 關하여는 魏志 後漢書 등 中國의 古史書에는 何等의 仔細한 記事가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東方의 古史書인 三國史記 및 三國遺事에 多少의 傳說的 記事가 실리어 있으므로 이를 通하야 그것을 考察할 수밖에 없다(단 이들 傳說的 記事에는 後世의 附會와 潤色이 만히 可하였으므로 그대로 信用하기 어려운 것은 勿論이다). 史記(卷一)及 遺事(卷一)에 依하면 徐羅伐은 처음 三韓 中의 一인 辰韓의 六村이 서루 結合하야 이를 形成한 것과 같이 말하였고, 또 六村의 名은 처음에는 (一) 閼川 楊山村 (二) 突山 高墟村 (三) 觜山 珍支村或云于珍村 (四) 茂山 大樹村 (五) 金山 加利村 (六) 明活山 高耶村단 遺事에는 三과 四의 順序가 서루 바뀌어 있음이었는데, 後(儒理尼師今 九年)에 이를 改稱하야 楊山村을 及梁部(一云梁部), 高墟村을 沙梁部, 于珍村을 本彼部, 大樹村을 漸梁部(一云 牟梁部), 加利村을 漢祗部遺事作漢岐 又韓岐, 高耶村을 習比部라 하고 同時에 六部에는 李 崔 孫 鄭 裴 薛의 六姓이 配定되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考慮할 點이 만히 있다. 첫재 辰韓 六村說이니, 新羅의 前身인 斯盧는 이미 屢次 辨證하여온 바와 같이 弁辰族 中 辰王(馬韓의 盟主)所屬下의 十二國의 하나로서, 저 北朝鮮方面의 遺民인 「辰韓」과는 본래부터 族類와 住地를 달리한 것으로 나는 認定하며, 따라 우의 所爲 六村은 이를 斯盧의 六村이라면 可하되 「辰韓六村」이라거나 혹은 「辰韓六部」라고 하는 것은 대단 不當한 양으로▶P33 안다. 생각컨대 辰韓六村說은 그 根據가 新羅를 辰韓의 種裔로 본 梁書(新羅傳) 以來의 誤解와, 또 魏志의 「辰韓…始有六國云云」이라고 한 六國의 數字가 이 六村의 數字와 偶然 一致한 데서 基因한 것인 듯하나, 梁書 以來의 誤解는 또 다시 거듭하야 말할 必要가 없고, 魏志의 所爲 六國도 이를 六村 혹은 六部로 解釋하거나 또는 거긔에 附會할 理由는 全然 없는 것이다. 그때의 所爲 「國」이란 것이 아모리 小國이라 할지라도 一個의 村落과 同一程度로 보아서는 아니될 것이다. 적어도 數個以上의 村落의 結合體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原始新羅인 斯盧가 果然-傳說과 같이-처음부터 六村으로써 形成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部落國家의 狀態를 이루기 始作하였을 때에는 임이 六個 以上의 集團으로써 構成되었을 것이다. 斯盧六村의 形成이 어느 때부터의 事實인 지는 자세이 알 수 없으나, 적어도 魏志 記事에 나타나기 以前에 임에 그것의 存在를 보았을 것이라고 推察된다. 다음에는 六村의 名稱에 就하여서니, 傳說上에 보이는 그 名稱을 果然 그대로 信用하야 조흘 것인가가 問題이다. 六村 中 楊山 高墟 大樹의 三村의 名은 이를, 後에 改稱되였다는 及梁(一云梁部) 沙梁 漸梁(一云牟梁)의 三部의 名과 比하여 보면 도리어 後者의 것이 前者보다 더 原始的인 古樸한 感을 줄뿐더러, 前者 중에는 「閼川 楊山村」과 같이 各各 別處의 山川의 名을 結合하야 同一處所의 名稱을 삼은 듯한 것도 있다(閼川은 지금의 慶州邑北을 흐르는 北川의 舊稱, 楊山은 同邑南의 現名 南山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傳說에 보이는 六村의 名稱은 실상 原始的의 것이 아니요 훨신 後世에 雅名化한 六部의 山名 乃至 里名으로써 附會한 것 같고 또 그 중의 어떤 것은 全然 任意로 꿈인 것같이 생각되는 것도 있다. 그러면 六村의 原始的 稱號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後의 六部의 名稱이 그 前身인 六村의 것을 承襲한 것으로 보는 同時에 六村과 六部의 地名 사이에는 本來 큰 變動이 없었든 것으로 보며, 다만 表音的 記寫에 있어서 種種의 異同이 있었을 뿐이라고 認識된다 例하면 같▶P34은 六部時代에도 及梁 沙梁 漸梁의 梁(들, 도)을 흔이 喙(同上)로써 記寫하야 新羅 眞興王巡境碑와 같은 오랜 金石文에는 喙部 沙喙部로 되여 있음과(喙가 梁보다 더 原始的일 것이다) 또 漸梁部의 漸(물)을 牟로도 表現하야 一云 牟梁部라고 함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六村의 名은 처음으로부터 六部時代에 걸처서 何等의 큰 變遷을 認할 만한 것이 없었다 할지라도 社會狀態에 있어서는 그 사이에 本質的 變動이 있었든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在來에는 傳說的 記事에 依하야 六村과 六部와의 差異를 名稱上으로만 認하고 실상 內容 本質에 있어서는 兩者를 同一視하야 六村을 一云六部라고도 하는 混同까지 생기었었다. 그러나 이것은 크게 區別할 必要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新羅의 六村과 六部와의 區別은 마치 高句麗의 五族과 五部와의 區別과 같은 것으로 思料되나니 원문주1▶(高句麗의 五族 及 五部에 對하여는 이미 今西․池內兩博士의 古說이[2] 있거니와) 詳言하면 六村은 初期 高句麗의 五族과 같이 一種의 氏族(Clan)的 聚落으로서, 各氏族團은 各別의 酋長下에 血緣的祖上을 같이 함 地緣的共祖의 信念으로 住地를 같이 함으로 結合한 社會組織인 듯하고, 六部는 後期 高句麗, 後期 百濟, 高麗 및 近世朝鮮의 都內의 五部制와 같이 一種의 行政區劃으로서, 氏族社會가 崩壞되어 國家政治의 組織이 發達하든 때의 産物인 듯하다. 즉 氏族社會의 六村이 變遷하야 都市區劃上의 六部로 化한 데 不過하다고 생각되나니 여기에 新羅 社會組織의 變遷을 또한 볼 수 있는 것이다. 行政區劃으로서의 六部는 部落政治를 完全히 脫出한 國家政治時代에 實現되었을 것이므로 勿論 新羅初期에 屬한 事實이라고는 볼 수 없다. 史記 及 遺事에는 六部의 改定과 六姓의 配定이 共히 新羅 第三代 儒理(一云 弩禮)尼師今 九年에 된 거와 같이 말하였으나 거긔에는 到底히 信從할 수 없고, 이를 만일 第十四代의 同名王(儒禮尼師今)의 九年 事實의 誤傳으로 본다면 어떠할까 하는 疑問을 가질 이도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新羅의 遲遲한 社會的 發展의 狀態로 보면 그때도 그 顯現을 보기에는 좀 이르다고 하지 아니하면 아▶P35-1니되며, 더욱 六部의 賜姓과 같은 것은 唐代文化의 影響일 것이므로 六部 그것의 實現보다도 훨신 後世(統一時代)의 事實에 속할 것이다. 新羅 六部制의 實現은 (나의 考察로는) 대개 慈悲麻立干 十二年(西紀四百五十八年) 京都의 坊里名을 定하였다고 하는 그 때에 되었으리라고 믿거니와, 六村과 六部는-비록 性質을 달리할지라도-前後身의 關係로 地理的 名稱 乃至 位置에 있어서는 실상 그다지 큰 區別이 없었든 것인데, 後世의 史家가 이를 誤解하야 즉 六村時代의 固有名稱이 따루 있었든 것이 傳치 아니한 양으로 알아 일부러 後世의 六部의 山川名 혹은 里名을 取하야 六村의 古名으로 假裝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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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주


  1. 史林(사림) 제6권 제3호 금서 박사의 「高句麗五族五部考」 및 東洋學報(동양학보) 16권 제1호 지내 박사의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 참조.
  2. 史林第六卷 第三號 今西博士의 「高句麗五族五部考」及東洋學報十六卷 第一號 池內博士의 「高句麗の五族及び五部」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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