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6)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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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0일 (일) 16:59 판 (본문1: 6. 변진(변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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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6)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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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六)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7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07월
시작쪽 099쪽 종료쪽 147쪽 전체쪽 049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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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본문1: 6. 변진(변한)문제


이상은 마한 및 진한 문제에 대하여 우견을 (좀 장황하게) 설술하였으므로 이로부터는 나머지 변진(변한)문제에 들어가 오로지 논난하려고 하거니와 서술이 역시 번거로울 듯하므로 아래와 같이 2, 3항에 나누어 순차로 말하려 한다.
쪽수▶P99-1 以上은 馬韓 及 辰韓問題에 就하야 愚見을 (좀 장황하게) 說述하였으므로 일로부터는 남어지 弁辰(弁韓)問題에 들어가 오로지 論難하려고 하거니와 敍述이 역시 번거러울 듯하므로 아래와 같이 二, 三項에 나노아 順次로 말하려 한다.
(갑) 변진의 명칭 강역 및 그 지리
쪽수▶P99-2 (甲) 弁辰의 名稱 疆域 및 그 地理
(을) 변진 20여국에 관한 위지기사의 해석과 제국(諸國)의 위치 비정
쪽수▶P99-3 (乙) 弁辰 二十餘國에 關한 魏志記事의 解釋과 諸國의 位置比定
(병) 신라의 발흥과 변진 제국(諸國)의 변천
쪽수▶P99-4 (丙) 新羅의 勃興과 弁辰諸國의 變遷
(갑) 변진의 명칭 강역 및 그 지리
쪽수▶P99-5 (甲) 弁辰의 名稱 疆域 및 그 地理
진(辰)을 극복하여 그것에 대신한 소이거나 할 것이며, 어떤 편으로 하던지 그 일명은 한의 칭호가 확대되어 변진을 역시 한의 일종으로 보던 때에 생긴 것이었을 것이다. 또 변진변한의 변을 書(서)에 따라 卞(변) 혹은 辨(변)으로도 적은 곳이 있고 지금도 사람에 따라 그렇게 쓰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마치 진한의 진(辰)을 진(秦), 마한의 마(馬)를 모(慕)로도 씀과 같이 음 상사(相似)로 인한 이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으며, 그러나 그 원래의 正稱(정칭)은 변진이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弁(변)자를 쓰는 것이 올타고 생각한다. 그러면 변진의 변은 무엇을 의미한 것인가? 변진의 진은 (그것이) 진인(辰人)의 일종인 소이로서의 칭이려니와, 변은 어떠한 이유로 부여된 것인가? 이에 대하여는 이미 선배의 所論(소론)도 있고 또 나의 소견도 있으므로 그것을 말하여 볼까 한다.
쪽수▶P99-6 弁辰은 一云 弁韓이라고도 하지만 弁韓은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弁辰韓의 略稱이거나 그러치 않으면 全혀 韓의 稱이▶P100-1 辰을 克服하야 그것에 대신한 所以거나 할 것이며, 어떤 편으로 하던지 그 一名은 韓의 稱號가 擴大되어 弁辰을 역시 韓의 一種으로 보든 때에 생긴 것이었을 것이다. 또弁辰弁韓의 弁을 書에 따라 卞 혹은 辨으로도 적은 곳이 있고 지금도 사람에 따라 그러케 쓰는 이가 있으나, 그것은 마치 辰韓의 辰을 秦, 馬韓의 馬를 慕로도 씀과 같이 音相似로 因한 以外에는 他理由가 없으며, 그러나 그 元來의 正稱은 弁辰이므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弁字를 쓰는 것이 올타고 생각한다. 그러면 弁辰의 弁은 무엇을 意味한 것인가? 弁辰의 辰은 (그것이) 辰人의 一種인 所以로서의 稱이려니와, 弁은 어떠한 理由로 附與된 것인가? 이에 對하여는 이미 先輩의 所論도 있고 또 나의 所見도 있으므로 그것을 말하야 볼까한다.
현대문주1▶먼저 선배의 설을 소개하면 일즉이 다산 정약용 선생은 변진고 [a 1]란 논문 中에 말하되
쪽수▶P100-2 원문주1▶먼저 先輩의 說을 紹介하면 일즉이 茶山 丁若鏞先生은 弁辰考[1]란 論文 中에 말하되

鏞按弁者駕洛也 駕洛者伽耶也 東俗 凡冠幘之尖頂者 通謂之駕那 今禁府皀隸稱羅將 及郡縣侍奴(稱及唱) 猶戴尖頂之幘名之曰駕那 亦謂之金駕那 方言流傳 必有所本也 新羅時 駕洛國在今金海 或稱加羅 或稱伽耶 此乃弁辰之總王也 必其巾幘特爲尖頂之制 故號之曰驾羅國 而中國之人譯之以文 則謂之弁辰也 及其末王仇亥投降新羅之後 名其國曰金官金官者金冠也 金冠者金駕那也 駕那之爲弁辰 尙足疑乎

쪽수▶P100-3

鏞按弁者駕洛也 駕洛者伽耶也 東俗 凡冠幘之尖頂者 通謂之駕那 今禁府皀隸稱羅將 及郡縣侍奴(稱及唱) 猶戴尖頂之幘名之曰駕那 亦謂之金駕那 方言流傳 必有所本也 新羅時 駕洛國在今金海 或稱加羅 或稱伽耶 此乃弁辰之總王也 必其巾幘特爲尖頂之制 故號之曰驾羅國 而中國之人譯之以文 則謂之弁辰也 及其末王仇亥投降新羅之後 名其國曰金官金官者金冠也 金冠者金駕那也 駕那之爲弁辰 尙足疑乎

라 하여, 즉 변진의 변은 한자 그대로의 뜻으로서 동속(東俗)에 관책(冠幘)의 뾰족(尖頂)한 것을 통칭 변이라 또는 ‘駕那’(가나)라 하고, 변진의 일국이었던 가락(駕洛), 가라(駕羅) 가야(伽耶)라고도 함)은 변진의 총왕처(總王處)로 반드시 그때 그 관책의 양식이 첨정의 특색을 가졌던 소이의 득칭(得稱)이었을 것인즉, 변진의 변은 곧 가나(駕那) 가락(駕洛) 가라(加羅) 가야(伽耶)의 한역(漢譯)임이 무의(無疑)하다고 보았다. 현대문주2▶속해동역사의 저자 한진서 선생도 다산의 이 설을 찬동하여 此可謂發前人之所末發而理固然矣 [a 2]라고 칭양(稱揚)하였다. 그리하여 다산의 설은 우리 학계에 큰 권위를 가지고 내려왔었다. 현대문주3▶그런데 이에 대하여 일본 문학박사 백조고길(白鳥庫吉) 씨는 한 이 설을 제창하되[a 3] 변은 한자 그대로의 뜻이 아니라 토어(土語)의 대음(對音)으로, 변한의 위치가 진한과 마한 사이에 개재하여 낙랑군으로부터는-12지수 중의-정히 巳(蛇, 사)방에 당하고 변의 음은 사(蛇)의 말인 paiyam암과 근사한즉 그것은 사를 의미한 말일 것이라 하고 그 밖에 진한의 진, 마한의 마도 이러한 12지수의 이름에 인한 것이라고 하였다-즉 진한은 낙랑군으로부터 진(龍, 용)방에 당하고 진의 음은 계림유사(鷄林類事)의 고려방언 중 ‘龍曰稱(용왈칭)’(彌(미)?)이라 한 칭과 거의 일치함으로 보아 진한은 토어 C'ing-han稱韓(칭한, 즉 용한)의 대음인 듯하고, 또 마한은 낙랑의 午(오, 馬(마))방에 당함으로써 그것은 토어 Mal-han(즉 마한)의 음역이리라고 하였다. 백조 씨의 설은 기저(其著) 한의조선4군 강역고 및 만주역사지리 제1권 제1편 한 대의 조선 중 「지명의 鮮釋(선석)」이라고 題(제)한 부론 중에 자세히 보이어 있거니와 중국의 辭源(사원, 진한 변한 마한조)에도 이 설을 취하여 놓았다. 백조 박사는 정다산의 설을 일종의 부회로 돌리어 자기는 거기서 일보를 내킨 거와 같이 말하였지만, 나로써 보면 백조 씨의 설이야말로 일종의 견강부회라고 생각한다. 물론 다산의 설 가운데도 다소의 무리한 점이 없지 아니하지만, 백조 씨의 설은 그 보다도 더 심하여 전부가 억설(臆說)투성이다. 다산의 설을 평하기 전에 먼저 백조 씨의 설을 논난하면-씨는 진한은 즉 진국으로서 조선왕 우거(右渠)의 치세(한무제 때)에 반도의 일부를 거유(據有)하였는즉 변한 마한의 2국도 또한 당시에 존재하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따라 12지수의 제(制)가 당시 한인 간에 행하였던 소이라고 하니, 이것이 첫째 씨의 설을 크게 곤란케 만드는 바이라고 생각된다. 진국의 존재가 우거의 시대에는 물론이요 이미 그 이전부터 나타난 반도의 한 옛 나라으로서 진한의 '진'이 이에서 유래된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지만, 진국이 곧 진한이란 설과 변한마한의 칭호가 이미 우거 시대에 있었다는 것은 다 나의 앞서 고설(考說)한 바와는 상위(相違)되는 설이며, 또 이들 칭호가 12지수의 제(制)인한 것이라 함은 더욱 일대의문이다. 12지수의 기원에 취하여는 백조씨도 인설(引說)한 바와 같이 청의 조익(趙翼)의 저인 해여총고, 권34의 「12상속기어후한」이란 논문에 한 개의 고설(考說)이 보이어 있거니와, 조익의 고증한 바에 의하면 12상속에 관한 문자는 후한 시대의 기록-특히 왕충의 논형, (물세편)-에 뚜렷이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 이전에는 이에 언급한 자가 없으므로 그 기원은 후한 시대에서 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는 이 사상의 유래를 북속(北俗)에 구하여 흉노 호한사선우(呼韓邪單于)가 오원(五原)의 쌔(塞)에 입거하였을 때(哀帝(애제) 시)에 제인(齊人)이 이와 상잡(相雜)하여 그 습속을 중국에 유전(流傳)한 것이었으리라고 하였다. 현대문주4▶조익의 12상속 흉노유래설은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문제지만 백조씨는 조익의 설에 반대하여 12지수의 기원을 전한시대에 구하는 동시에 이 사상은 태초력(太初曆)과 한가지 서역의 Bactria 즉 한의 소위 대하국 변으로부터 중국에 수입된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a 4] 그러나 이 역시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고 근래, 혹 학자는 그 기원을 우량(右兩)씨의 설보다도 일층 구원(久遠)한 옛적에 구하는 이가 있지만 그건 어찌했든 진국 내지 삼한의 칭호가 12지수에 인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진'이란 말이 조선어로 무엇인가는 연구를 요할 문제지만 씨의 설과 같이 용의 방어(方語)의 음역이라고는 볼 수 없다. 진의 고음이 Cin이요 계림유사의 고려방언 중에 용을 칭 (Cing)이라 하였다고 하여 진을 용의 뜻이라고 함은 씨의 그릇된 관찰이다.현대문주5▶계림유사의 「용왈칭」의 칭자는 이미 전간공작(前間恭作)씨의 간파[a 5]한 바와 같이 미(彌)자의 오(誤)로 용의 고훈(古訓)은 「칭」이 아니라 「미리」 혹은 「미-ㄹ」이라고 하였던 소이다. 또 마한의 마도 마의 말인 「말」의 대음이 아니라 즉 「고마」(古馬, 고마) 혹은 「개마」(蓋馬, 개마)-이는 신성의 뜻인 듯하지만-의 약칭이라고 함은 이미 앞서 屢說(누설)한 바이다. 그런즉 진국 진한의 「진」과 마한의 「마」는 조선어의 용 또는 마의 訓義(훈의)와는 상관이 없는 말이며, 따라서 변진의 「변」도 조선어의 배얌(蛇, 사)의 寫音(사음)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가령 진국 내지 삼한의 칭호가 12지수의 이름에 인하여 낙랑 한인의 명명한 바이었을 것 같으면 변진도 알기 쉽게 巳(사, 蛇(사))진이라든지 혹은 巳(사, 蛇(사))한이라든가 할 것이거늘 왜 하필-군색하게-변자를 취하여 변진이라 변한이라 할 까닭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변과 배얌과의 語音的(어음적) 비정도 썩 긴밀하지 못하지만, 한인이 이렇게까지 친절하게 씨의 해석과 같이 동방어를 고려하여 명명하였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리고 자래(자래)로 12지수의 제에 의하여 (혹 방위는 지칭하는 일은 있지만) 저명한 地處(지처)를 명명한 예가 중국에나 조선 일본에 일찍이 있었는지 나의 과문으로는 듣지 못하였다. 백조씨는 동방 한사군의 하나인 玄菟郡(현토군)의 칭호도 그러한 방위의 獸名(수명)에 인한 것의 일례로 말하였으나, 현대문주6▶이는 내가 이미 玄菟郡考(현토군고) 중[a 6]에 논박하였던 바와 같이-설사 그때 그런 習制(습제)가 행하였다손 치더라도-타 3군의 이름이 대개 고유 土稱(토칭)에 인한 것이 분명한 이상 현토군만이 12지수의 제에 의할 리가 만무하며 인하여 현토도 역시 토어에 의한 雅稱(아칭)으로 실상은 後(후)의 고구려국의 수도의 하나이었던 「丸都(환도)」와 동음동의의 말로 바로 이것의 前稱(전칭)이라고 늘 확신하여 마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백조씨의 12지수는 여간 많은 결함과 견강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거기에는 일일이 좇을 수 없는 것뿐임을 유감으로 여긴다.
쪽수▶P100-4라 하야, 즉 弁辰의 弁은 漢字 그대로의 義로서 東俗에 冠幘의 尖頂(뾰족)한 者를 통칭 弁이라 또는 󰡔駕那󰡕(가나)라 하고, 弁辰의 一國이었든 駕洛(駕羅 一云伽耶)은 弁辰의 總王處로 반듯이 그때 그 冠幘의 樣式이 尖頂의 特色을 가졌든 所以의 得稱이었을 것인즉, 弁辰의 弁은 곧 駕那 駕洛 加羅 伽耶의 漢譯임이 無疑하다고 보았다. 원문주2▶續海東繹史의 著者 韓鎭書先生도 茶山의 이 說을 贊同하야 󰡔此可謂發前人之所末發而理固然矣󰡕[2]라고 稱揚하였다. 그리하야 茶山의 說▶P101은 우리 學界에 큰 權威를 가지고 내려왔었다. 원문주3▶그런데 이에 對하야 日本 文學博士 白鳥庫吉氏는 한 異說을 提唱하되[3] 弁은 漢字 그대로의 義가 아니라 土語의 對音으로, 弁韓의 位置가 辰韓과 馬韓 사이에 介在하야 樂浪郡으로부터는-十二支獸中의-正히 巳(蛇)方에 當하고 弁의 音은 蛇의 語인 paiyam암과 近似한즉 그것은 蛇를 意味한 말일 것이라 하고 그 밖에 辰韓의 辰, 馬韓의 馬도 이러한 十二支獸의 名에 因한 것이라고 하였다-卽 辰韓은 樂浪郡으로부터 辰(龍)方에 當하고 辰의 音은 鷄林類事의 高麗方言 中 「龍曰稱」(彌?)이라 한 稱과 거이 一致함으로 보아 辰韓은 土語 C'ing-han稱韓(卽 龍韓)의 對音인 듯하고, 또 馬韓은 樂浪의 午(馬)方에 當함으로써 그것은 土語 Mal-han(卽 馬韓)의 音譯이리라고 하였다. 白鳥氏의 說은 其著 漢の朝鮮四郡疆域考 及 滿洲歷史地理 第一卷 第一編 漢代の朝鮮 中 「地名の鮮釋」이라고 題한 附論 中에 자세히 보이어 있거니와 中國의 辭源(辰韓 弁韓 馬韓條)에도 이 說을 取하야 노았다. 白鳥博士는 丁茶山의 說을 一種의 附會로 돌리어 自己는 거긔서 一步를 내킨 거와 같이 말하였지만, 나로써 보면 白鳥氏의 설이야말로 一種의 牽强附會라고 생각한다. 勿論 茶山의 說 가운데도 多少의 無理한 點이 없지 아니하지만, 白鳥氏의 說은 그 보다도 더 심하야 全部가 臆說투성이다. 茶山의 說을 評하기 전에 먼저 白鳥氏의 說을 論難하면-氏는 辰韓은 卽 辰國으로서 朝鮮王 右渠의 治世(漢武帝時)에 半島의 一部를 據有하였은즉 弁韓 馬韓의 二國도 또한 當時에 存在하였을 것이라 推測하고 따라 十二支獸의 制가 當時 漢人間에 行하였든 所以라고 하니, 이것이 첫재 氏의 說을 크게 困難케 맨드는 바이라고 생각된다. 辰國의 存在가 右渠의 時代에는 勿論이요 이미 그 以前부터 나타난 半島의 一古國으로서 辰韓의 󰡔辰󰡕이 이에서 由來된 것은 의심없는 事實이지만, 辰國이 곧 辰韓이란 說과 弁韓馬韓의 稱號가 이미 右渠時代에 있었다는 것은 다 나의 앞서 考說한 바와는 相違되는 說이며, 또 이들 稱號가 十二支獸의 制에▶P102因한 것이라 함은 더욱 一大疑問이다. 十二支獸의 起原에 就하여는 白鳥氏도 引說한 바와 같이 淸의 趙翼의 著인 陔餘叢考(卷卅四)의 「十二相屬起於後漢」이란 論文에 一個의 考說이 보이어 있거니와, 趙翼의 考證한 바에 依하면 十二相屬에 關한 文字는 後漢時代의 記錄-特히 王充의 論衡(物勢編)-에 뚜렷이 나타나기 始作하고 그 以前에는 이에 言及한 자가 없으므로 그 起原은 後漢時代에서 더 올라갈 수 없다는 것이며, 그리하야 그는 이 思想의 由來를 北俗에 求하야 匈奴 呼韓邪單于가 五原의 塞에 入居하였을 때(哀帝時)에 齊人이 이와 相雜하야 그 習俗을 中國에 流傳한 것이었으리라고 하였다. 원문주4▶趙翼의 十二相屬 匈奴由來說은 다시 생각해 볼 餘地가 있는 問題지만 白鳥氏는 趙翼의 설에 反對하야 十二支獸의 起原을 前漢時代에 求하는 同時에 이 思想은 太初曆과 한가지 西域의 Bactria 卽 漢의 所爲 大夏國 邊으로부터 中國에 輸入된 것이 아닌가라고 하였다.[4] 그러나 이 역시 漠然한 推測에 不過하고 近來, 或 學者는 그 起原을 右兩氏의 說보다도 一層 久遠한 옛적에 求하는 이가 있지만 그건 何如했든 辰國 乃至 三韓의 稱號가 十二支獸에 인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안는다. 「辰」이란 말이 朝鮮語로 무엇인가는 硏究를 要할 問題지만 氏의 說과 같이 龍의 方語의 音譯이라고는 볼 수 없다. 辰의 古音이 Cin이요 鷄林類事의 高麗方言 中에 龍을 稱 (Cing)이라 하였다고 하야 辰을 龍의 義리라고 함은 氏의 그릇된 觀察이다. 원문주5▶鷄林類事의 「龍曰稱」의 稱字는 이미 前間恭作氏의 看破[5]한 바와 같이 彌字의 誤로 龍의 古訓은 「칭」이 아니라 「미리」 혹은 「미-ㄹ」이라고 하였든 所以다. 또 馬韓의 馬도 馬의 語인 「말」의 對音이 아니라 즉 「고마」(古馬) 혹은 「개마」(蓋馬)-이는 神聖의 義인 듯하지만-의 略稱이라고 함은 이미 앞서 屢說한 바이다. 그런즉 辰國 辰韓의 「辰」과 馬韓의 「馬」는 朝鮮語의 龍 또는 馬의 訓義와는 相關이 없는 말이며, 따라서 弁辰의 「弁」도 朝鮮語의 배얌(蛇)의 寫音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또 가령 辰國 乃至 三韓의 稱號가 十二支獸의 名에 因하야 樂浪漢人의 命名한 바이었을 것 같으면 弁辰도 알기 쉽게 巳(蛇)辰이라든지 혹은 巳(蛇)韓이라든가 할 것이어늘 왜 何必-군색하게-弁字를 取하야 弁辰이라 弁韓이라 할 까닭이 있는가 하는 말이다. 弁과 배얌과의 語音的 比定도 썩 緊密하지 못하지만, 漢人이 이러케까지 親切하게 氏의 解釋과 같이 東方語를 考慮하야 命名하였을까 하는 疑問이다. 그리고 自來로 十二支獸의 制에 依하야 (혹 方位는 指稱하는 일은 있지만) 著名한 地處를 命名한 예가 中國에나 朝鮮 日本에 일즉이 있었는지 나의 寡聞으로는 듣지 못하였다. 白鳥氏는 東方 漢四郡의 一인 玄菟郡의 稱號도 그러한 方位의 獸名에 인한 것의 一例로 말하였으나, 원문주6▶이는 내가 이미 玄菟郡考 中[6]에 論駁하였든 바와 같이-설사 그때 그런 習制가 行하였다손 치더라도-他三郡의 名이 대개 固有 土稱에 인한 것이 分明한 以上 玄菟郡만이 十二支獸의 制에 의할 理가 萬無하며 因하야 玄菟도 역시 土語에 依한 雅稱으로 실상은 後의 高句麗國의 首都의 一이었든 「丸都」와 同音同義의 語로 바루 이것의 前稱이라고 늘 確信하야 마지안는다. 이와 같이 白鳥氏의 十二支獸은 여간 만흔 缺陷과 牽强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거긔에는 일일이 좇을 수 없는 것뿐임을 遺憾으로 역인다.
그러면 다산의 설은 어떠하냐? 하면, 씨의 가락 즉 가나, 변 즉 가락의 譯稱(역칭)이란 설은 역시 찬동을 표하기 어렵다. 관책의 方語(방어)인 駕那(가나)와 변진의 일국인 가락(狗邪(구사), 伽耶(가야), 加羅(가라))의 이름이 발음상으로는 물론 서로 일치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가락(국명)이 곧 관책의 뜻이라고는 속단할 수 없다. 더구나 金官(금관, 가락의 後名(후명))이 곧 金冠(금관)이라 함은 너무도 자음에 拘泥(구니)된 臆斷(억단)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일 金官(금관)이 金冠(금관)의 뜻일 것 같으면 바로 金冠(금관)이라고 하였을 것이요 구태여 관자와 동음이의인 다른 관자를 취할 리가 만무한 것이다). 현대문주7▶금관의 이름은 본시 가락국 내의 一小(일소) [a 7]지명으로서 후일 신라에 병합된 후 비로소 大名(대명, 郡名(군명)⦁京名(경명))으로 化(화)하여진 것이어니와, 「가락」 「가야」 「가라」란 이름도 원래는 魏志(위지)에 보이는 변진 20여 국 중의 하나인 「狗邪國(구사국)」 그것에 불과하였던 국명이다. 그리고 당시 頭飾衣服(두식의복)의 제와 같은 것은 적어도 변진 제국 간에는 서로 공통된 양식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구사 일국에만 그러한 특색의 관책의 제가 있어 그 이름을 先取(선취) 독점하였으리라고는 해석할 수 없으며, 동시에 변진의 변도 그 국명을 譯稱(역칭)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구사 즉 가라 가야 가락의 뜻에 취하여는 더 신중한 고려를 요할 문제지만 나의 해석은 邪(사) 耶(야) 羅(라) 洛(락)은 다-동음의 異寫(이사)로-國邑(국읍)-(나라)의 뜻이요, 狗(구) 伽(가) 加(가) 駕(가)는-역시 동음으로-邊(변)의 뜻인 「가」 「가」 「가」의 借音字(차음자)인가 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邊國(변국) 혹은 邊邑(변읍)의 뜻인 듯하다. 구사국은 조선의 나일(Nile)강이라고 할 만한 낙동강 하류의 삼각주(delta) 및 그 右岸(우안)에 위치한 금 김해의 땅이었으므로 그러한 해석이 더욱 허용될 줄로 안다. 현대문주8▶참고로 고구려의 䢘城軍(수성군, 杆城(간성))의 一稱(일칭)에 加阿忽(가아홀) [a 8] 현대문주9▶혹은 加羅忽(가라홀) [a 9]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면 사견을 일층 확실케 하여 주는 것이 있다. 䢘(수)은 동국의 俗子(속자)로 중국 字書(자서)에는 없는 자이나 그 자형으로 보면 邊(변)의 속자인 过(과)의 원시형으로 邊防守成(변방수성)의 뜻인 듯하고 실제 䢘城(수성, 羅名(나명) 守成(수성)) 지금의 간성은 일시 고구려 東南界(동남계)의 중심적 重鎭(중진)이었으므로 加阿(가아) 혹은 加羅(가라)의 일명을 얻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변진의 구사(가라)국도 (낙동강 하구에 위치하여) 변진제국 중에 있어 중요한 또는 저명한 邊國(변국, 邊邑(변읍))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던 까닭에 그러한 칭호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편이 더 타당할 듯하다. 어떻든 정다산과 같이 가라를 관책의 뜻으로 보고 변진의 변을 가라의 한역으로 해석하는 것은 肯綮(긍계)을 얻은 설이라고 할 수 없다. 정말 변진의 변을 한자 그대로의 뜻으로 解(해)할 것이라면 그러한 不肯綮的(불긍계적) 천착을 요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럽게 설명될 도리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다산의 설에 다소의 수정을 가하여 말하면 비단 가락뿐만이 아니라 전 변진인 제부락 간에는 변과 비슷한 양식의 유표(有表)한 冠帽(관모)를 頭戴(두대)하던 풍속이 있어, 그로 인하여 중국인이 이 진인의 일족을 변진이라고 특칭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가 더 훨씬 理順(이순)할 것 같다. 변진인의 관책의 제에 관한 분명한 기사는 사서에 별로 보이는 바가 없으나, 일본사 상에 보이는 任那人(임나인) 蘇那曷叱智(소나갈길지) 즉 都怒我阿羅斯(도노아아라사) 등의 史話(사화)와 또 근래 영남 지방의 고분에서 발굴되는 유물에 의하여 고대 변진인의 관모의 양식이 어떠하던 것을 추리 짐작할 수 있다. 소나갈질지의 사화는 즉 일본서기 垂仁紀(수인기) 2년 「是歲任那人蘇那曷叱智 請之欲歸于國云云」의 기재 하의 分註(분주)와 및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 실리어 있거니와, 전자(서기 註說(주설))에 「一云御間城天皇之世 額有角人 乘一船 泊于越國笥飯浦 故號其處 曰角鹿也 問之曰 何國人也 對曰意富加羅國王之子 名都怒我阿羅斯等 亦名曰于斯岐阿利叱智干岐云云」이라 함과 후자 즉 성씨록(未定雜姓(미정잡성), 右京(우경), 三間名公條(삼간명공조))에 「崇神天皇御世 額有角人 乘船泊于越國笥飯浦 遣人間曰何國人也 對曰意富加羅國王子 名都怒我阿羅斯等云云」이란 것-전후 기재에 비록 약간의 異同(이동)(이동)이 있으나 동일 사료의 계통에서 나온 것-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都怒我(도노아)는 동 성씨록 他條(타조)에는 「都奴賀(도노하)」 혹은 「都奴加(도노가)」로도 쓰여있으나, 다 蘇那曷(소나갈)의 동음이역임은 이미 학자의 공인하는 바이며 阿羅斯(아라사) 등이니 阿利叱智(아리질지)니 하는 斯等(사등, シト)叱智(질지)는 진인 渠帥(거수)의 칭인 臣智(신지, 秦支(진지)), 阿羅(아라) 阿利(아리)는 「알」의 寫音(사음)으로 신라의 「閼智(알지)」의 閼(알)과 같은 존칭일 것이다. 그리고 「額有角人(액유각인)」이라 함은-역시 세간 학자의 설이 있는 거와 같이-이때 임나인 頭上(두상)에 쓴 관책의 전면에 무슨 角形(각형)의 것이 있어서 그것을 형용해 말함인 것 같고, 또 「蘇那曷(소나갈)」 「都努我(도노아)」 「角鹿(각록)」(ツヌガ) 등은 위 기재에는 인명 혹은 지명으로 되어 있지만, 본시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변진인의 관책의 칭인 보통명사가 아니었든가 한다. 현대문주10▶曷(갈), 我(아), 鹿(록, ガ)는 다 관의 뜻으로 고구려 貴人(귀인)의 관인 「蘇骨(소골)」 [a 10]의 骨(골), 현대문주11▶신라 冠縣(관현, 문경)의 일명인 「高思曷伊(고사갈이)」 [a 11](고ㅅ갈)의 曷(갈), 現今語(현금어)의 「갓」(관)과 같은 말인 듯하며, 蘇那(소나), 都努(도노), 角(각, ツヌ)는 즉 관을 Modify한 품사로 「蘇骨(소골)」의 蘇(소)와도 관련이 있는 말인 듯하나 분명하지 못하고, 일본서 角(각)자로써 이에 충당한 것은 각의 훈과 그것이 音同(음동)하고 또 관의 형상이 「額有角(액유각)」의 부회를 生(생)케 하였던 까닭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떻든 蘇那曷(소나갈), 都努我(도노아)는 본시 관책의 칭으로 변진인을 표시(represent) 혹은 상징(symbolize)하는 별호가 되고 따라 그들의 頻數(빈삭)히 내왕하던, 또는 이주 식민하던 곳의 별명으로도 化(화)하여진 것이라고 생각되나니, 「蘇那曷叱智(소나갈질지)」 「都努我羅斯(도노아라사)등」의 본명은 실상 于斯岐(우사기)로 전자는 후자의 별명 「角鹿(각록)」 「角國(각국)」 「敦賀(돈하)」의 이름도 이 우사기 이후 변진인의 왕래 이주로 인하여 생긴 별칭이라고 볼 수 있다. 今(금) 石川縣(석천현) 鹿島郡(녹도군) 熊木村(웅목촌)에는 在昔(재석)으로부터 久麻加夫都阿羅加志比古란 신사가 있어, (임나의) 都奴加阿良斯止神 阿良加止比古神을 奉祀(봉사)하여 오거니와 (久麻加夫都阿良加志比古神像의 木造一軀(목조일구)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음) 여기 「久麻加夫都(구마가부도)」란 말은 즉 熊兜(웅두)로 熊(구마)은 신성 용맹의 표시, 兜(가부도)는 도노아(소나갈)의 對語(대어)임을-그 主神名(주신명, 都奴加阿良斯止(도노가아랑사지))에 의하여-알 수 있는 동시에 도노아⦁소나갈의 뜻이 더욱 명료하여짐을 알게 된다. 환언하면 도노아(소나갈)은 곧 구마가부도요 구마가부도는 곧 도노아니 하나는 가라어(변진어), 하나는 일본어로, 다 변진인의 관책을 지칭한 말들이다.
쪽수▶P103-2 그러면 茶山의 說은 어떠하냐? 하면, 氏의 駕洛 卽駕那, 弁 卽駕洛의 譯稱이란 說은 역시 贊同을 표하기 어렵다. 冠幘의 方語인 駕那(가나)와 弁辰의 一國인 駕洛(狗邪, 伽耶, 加羅)의 名이 發音上으로는 勿論 서루 一致한다고 볼 수 있지만, 그렇다고 駕洛(國名)이 곧 冠幘의 義라고는 速斷할 수 없다. 더구나 金官(駕洛의 後名)이 곧 金冠이라함은 너무도 字音에 拘泥된 臆斷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만일 金官이 金冠의 義일 것 같으면 바루 金冠이라고 하였을 것이요 구태야 冠字와 同音異義인 다른 官字를 取할 理가 萬無한 것이다). 원문주7▶金官의 名은 본시 駕洛國內의 一小[7]地名으로서 後日 新羅에 倂合된 후 비로소 大名(郡名⦁京名)으로 化하여진 것이어니와, 「駕洛」 「伽耶」 「加羅」란 이름도 원래는 魏志에▶P104보이는 弁辰 二十餘國 中의 一인 「狗邪國」 그것에 不過하였든 國名이다. 그리고 當時 頭飾衣服의 制와 같은 것은 적어도 弁辰諸國間에는 서루 共通된 樣式이었을 것이다. 그러면 狗邪一國에만 그러한 特色의 冠幘의 制가 있어 그 이름을 先取 獨占하였으리라고는 解釋할 수 없으며, 同時에 弁辰의 弁도 그 國名을 譯稱한 것이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狗邪 卽加羅 伽耶 駕洛의 義에 就하여는 더 愼重한 考慮를 要할 問題이지만 나의 解釋은 邪 耶 羅 洛은 다-同音의 異寫로-國邑-(나라)의 義요, 狗 伽 加 駕는-역시 同音으로-邊의 義인 「가」 「가」 「가」의 借音字인가 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邊國 혹은 邊邑의 義인 듯하다. 狗邪國은 朝鮮의 나일(Nile)江이라고 할 만한 洛東江下流의 三角洲(delta)및 그 右岸에 位置한 今 金海의 地였으므로 그러한 解釋이 더욱 許容될 줄로 안다. 원문주8▶參考로 高句麗의 䢘城軍(杆城)의 一稱에 加阿忽[8] 원문주9▶혹은 加羅忽[9]의 名이 있는것을 보면 私見을 一層 確實케 하야 주는 것이 있다. 䢘은 東國의 俗子로 中國 字書에는 없는 字이나 그 字形으로 보면 邊의 俗字인 过의 原始形으로 邊防守成의 義인 듯하고 실제 䢘城(羅名 守成) 지금의 杆城은 一時 高句麗 東南界의 中心的 重鎭이었으므로 加阿 혹은 加羅의 一名을 얻었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弁辰의 狗邪(加羅)國도 (洛東江河口에 位置하야)弁辰諸國 中에 있어 重要한 또는 著名한 邊國(邊邑)으로서의 任務를 다하든 까닭에 그러한 稱號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하는 편이 더 妥當할 듯하다. 어떠튼 丁茶山과 같이 加羅를 冠幘의 義로 보고 弁辰의 弁을 加羅의 漢譯으로 解釋하는 것은 肯綮을 얻은 설이라고 할 수 없다. 정말 弁辰의 弁을 漢字 그대로의 義로 解할 것이라면 그러한 不肯綮的 穿鑿을 要하지 안트라도 自然스럽게 說明될 道理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즉 茶山의 說에 多少의 修正을 加하야 말하면 비단 駕洛뿐만이 아니라 全弁辰人 諸部落間에는 弁과 비슷한 樣式의 유표(有表)한 冠帽를 頭戴하든 風俗이 있어, 그로 因하야 中國人이 이 辰人의 一族을 弁辰이라고 特稱한 것이 아닌가 하는 見解가 더 훨신 理順할 것 같다. 弁辰人의 冠幘의 制에 關한 分明한 記事는 史書에 別로 보이는 바가 없으나, 日本史上에 보이는 任那人 蘇那曷叱智 즉 都怒我阿羅斯等의 史話와 또 近來 嶺南地方의 古墳에서 發掘되는 遺物에 依하야 古代 弁辰人의 冠帽의 樣式이 어떠하든 것을 推理 짐작할 수 있다. 蘇那曷叱智의 史話는 즉 日本書紀 垂仁紀 二年 「是歲任那人蘇那曷叱智 請之欲歸于國云云」의 記載下의 分註와 및 新撰姓氏錄에 실리어 있거니와, 前者(書記註說)에 「一云御間城天皇之世 額有角人 乘一船 泊于越國笥飯浦 故號其處 曰角鹿也 問之曰 何國人也 對曰意富加羅國王之子 名都怒我阿羅斯等 亦名曰于斯岐阿利叱智干岐云云」이라 함과 後者 즉 姓氏錄(未定雜姓, 右京, 三間名公條)에 「崇神天皇御世 額有角人 乘船泊于越國笥飯浦 遣人間曰何國人也 對曰意富加羅國王子 名都怒我阿羅斯等云云」이란것-前後 記載에 비록 若干의 異同이 있으나 同一史料의 系統에서 나온 것-에 注意할 必要가 있다. 都怒我는 同姓氏錄 他條에는 「都奴賀」 혹은 「都奴加」로도 쓰여있으나, 다 蘇那曷의 同音異譯임은 이미 學者의 共認하는 바이며 阿羅斯等이니 阿利叱智니 하는 斯等(シト)叱智는 辰人 渠帥의 稱인 臣智(秦支), 阿羅 阿利는 「알」의 寫音으로 新羅의 「閼智」의 閼과 같은 尊稱일 것이다. 그리고 「額有角人」이라 함은-역시 世間學者의 說이 있는 거와 같이-이때 任那人 頭上에 쓴 冠幘의 前面에 무슨 角形의 것이 있어서 그것을 形容해 말함인 것 같고, 또 「蘇那曷」 「都努我」 「角鹿」(ツヌガ) 등은 右記載에는 人名 혹은 地名으로 되여 있지만, 本是는 固有名詞가 아니라 弁辰人의 冠幘의 稱인 普通名詞가 아니었든가 한다. 원문주10▶曷, 我, 鹿(ガ)는 다 冠의 義로 高句麗 貴人의 冠인 「蘇骨」[10]의 骨, 원문주11▶新羅 冠縣(聞慶)의 一名인 「高思曷伊」[11](고ㅅ갈)의 曷, 現今語의 「갓」(冠)과 같은 말인 듯하며, 蘇那, 都努, 角(ツヌ)는 즉 冠을 Modify한 品詞로 「蘇骨」의 蘇와도 關聯이 있는 말인 듯하나 分明하지 못하고, 日本서 角字로써 이에 充當한 것은 角의 訓과 그것이 音同하▶P105고 또 冠의 形相이 「額有角」의 附會를 生케 하였든 까닭에 起因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떠튼 蘇那曷, 都努我는 본시 冠幘의 稱으로 弁辰人을 表示(represent) 혹은 象徵(symbolize)하는 別號가 되고 따라 그들의 頻數히 來往하던, 또는 移住植民하든 곳의 別名으로도 化하여진 것이라고 생각되나니, 「蘇那曷叱智」 「都努我羅斯等」의 本名은 실상 于斯岐로 前者는 後者의 別名 「角鹿」 「角國」 「敦賀」의 名도 이 于斯岐 以後 弁辰人의 往來 移住로 因하야 생긴 別稱이라고 볼 수 있다. 今 石川縣 鹿島郡 熊木村에는 在昔으로부터 久麻加夫都阿羅加志比古란 神社가 있어, (任那의) 都奴加阿良斯止神 阿良加止比古神을 奉祀하야 오거니와 (久麻加夫都阿良加志比古神像의 木造一軀는 日本의 國寶로 指定되었음) 여긔 「久麻加夫都」란 말은 즉 熊兜로 熊(구마)은 神聖 勇猛의 表示, 兜(가부도)는 都努我(蘇那曷)의 對語임을-그 主神名(都奴加阿良斯止)에 依하야-알 수 있는 同時에 都努我⦁蘇那曷의 義가 더욱 明瞭하야짐을 알게 된다. 換言하면 都努我(蘇那曷)은 곧 久麻加夫都요 久麻加夫都는 곧 都努我니 一은 加羅語(弁辰語), 一은 日本語로, 다 弁辰人의 冠幘을 指稱한 말들이다.
변진인의 관책의 특색이 전면에 무슨 각(角)상의 것이 있었던 것은 위의 '額有角人(액유각인)'이란 설화로도 이를 짐작하겠지만, 더욱 실증적으로 그 진상을 우리 눈 앞에 보여주는 것은 근래 영남 지방의 고분에서 나오는 출토품 그것이다. 현대문주12▶대정 9년(1920)에 양산군 北亭洞(북정동)의 한 고분에서와 대정 12년 달성군 달서면 고분37호분에서는 별도A의 표시와 같은 형상의 관모가 출토되고 [a 12], 현대문주13▶대정 7년 성주군 星山洞(성산동) 제1호고분 및 대정 8년 창녕군 교동의 한 고분에서는 관의 전면에 붙은 부속품(은제의 箭狀部(전상부))만이 발견되었다. [a 13] 관은 樺皮(화피, 벗나무 껍질)로 제조되어 그 전면에 箭形狀(전상부)의 金具(금구)를 붙인 것인데, 현대문주14▶혹은 鳥羽(조우)를 象(상)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 [a 14]이 있다. 조우 그것을 관식으로 한 것은 평남 용강 雙楹塚(쌍영총) 벽화 중의 인물(B도 참조)에서도 그 예
쪽수▶P106-2 弁辰人의 冠幘의 特色이 前面에 무슨 角狀의 것이 있었든 것은 우의 「額有角人」이란 說話로도 이를 짐작하겠지만, 더욱 實證的으로 그 眞相을 우리 눈 앞에 보여주는 것은 近來 嶺南地方의 古墳에서 나오는 出土品 그것이다. 원문주12▶大正 九年(1920)에 梁山郡 北亭洞의 一古墳에서와 大正 十二年 達城郡 達西面 古墳三十七號墳에서는 別圖A의 表示와 같은 形狀의 冠帽가 出土되고[12], 원문주13▶大正 七年 星州郡 星山洞 第一號古墳 及 大正 八年 昌寧郡 校洞의 一古墳에서는 冠의 前面에 붙은 附屬品(銀製의 箭狀部)만이 發見되였다.[13] 冠은 樺皮(벗나무 껍질)로 製造되어 그 前面에 箭形狀의 金具를 붙인 것인데, 원문주14▶或은 鳥羽를 象한 것이 아닌가 하는 설[14]이 있다. 鳥羽 그것을 冠飾으로 한 것은 平南 龍岡 雙楹塚 壁畵 中의 人物(B圖 叅照)에서도 그 例
(A) 양산 북정동 고분 출토 관식 원상도
(A) 梁山 北亭洞古墳 出土 冠飾 原狀圖
(B) 용강 쌍영총 벽화 인물관식
(B) 龍岡 雙楹塚壁畵 人物冠飾
를 볼 수 있지만 기타 문헌 (견하)에도 많이 보이는 사실이므로, 이 箭狀(전상)의 부속품은 확실히 조우를 象(상)한 것으로 관념되며, (근래 경주 및 기타처에서 발굴된 금관의 상면 2角(각)도 역시 2조우를 상한 것이니) 그 원시적인 것은 바로 조우 그것이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右示(우시) 출토품은 任那加羅(임나가라) 시대의 유물임이 거의 의심없고 따라 이러한 유의 관을 변진어로 소나갈(도노아), 일본서는 후에 구마가부도(웅두)라고 한 것 같으며, 「額有角(액유각)」의 부회도 실상 이런 箭狀(전상)의 관식을 보고 지어낸 말일 것이다. 물론 시대(및 귀천)을 따라 관식의 재료라든지 제식이 다소의 변천을 지냈을 것은 無疑(무의)하나 변진 후기의 관제는 대개 아래와 같은 양식에 불과하였을 것이요 그 초기의 것은-자세치 못하나-이 양식에서 더 훨씬 弁形(변형)에 가까웠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변진」의 칭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함이 나의 천견이다. 위에 참고로 보인 B도의 고구려 시대 벽화의 인물의 관식은, 누구나 잘 연상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위서 고구려전에 「頭着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有差」, 北史(북사) 고구려전에 「人皆頭着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이라 한, 弁形(변형)의 折風冠(절풍관)에 加揷二鳥羽(가삽이조우)한-蘇骨(소골)-그것으로 인식되거니와, 그 절풍관에 관한 기사는 이미 위지 後漢書(후한서)에도 보이어 「著折風形如弁」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기원은 상당히 오래 되었던 것이다. 물론 A도 관식의 본체의 양식도 이러한 帽形(모형)에 얼마쯤 근사하지만, 변진 초기의 것은 더 훨씬 이것과 유사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현대문주15▶변진의 일족인 신라(사로)에는 遺子禮(유자례) [a 15]란 관이 있었고, 현대문주16▶백제에는 「其冠兩廂加翅」 [a 16]라 한, 역시 양측에 二翅(이시)의 부가한 관책이 있었는데, 그 관식의 실체에 관하여는 하등의 구체적 기사가 없으나 대개 전자는 A도류(소나갈?)에, 후자는 B도류(소골)와 방불하였을 것이다. 신라는 변진의 일족으로 모든 풍속이 임나 가라와 略同(약동)하고 백제의 治者(치자) 계급은 고구려와 동족으로 그 의복 관식이 서로 대동소이하였던 까닭이다. 일로써 보면 고대 동방 제족 간의 관식에는-재료와 양식에 있어 약간의 차는 있었을 망정-그다지 懸殊(현수)한 意匠(의장)과 취향은 보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사이의 많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으며, 더욱 上狹下廣(상협하광)의 弁形(변형)에 조우 혹은 箭狀(전상)의 副飾品(부식품)을 부가함은 동일한 취향의 변천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이것이 외인의 눈에는 이상한 주의를 일으키게 되었던 모양이다. 워낙 관모란 것은 頭上(두상)에 쓰는 有表(유표)한 물건이기 때문에 흔히 異俗(이속)의 사람으로 깊은 인상을 가지게 하는 것이지만, 고대 변진인의 관식이야말로 중국인 또는 일본인에게 이상한 인상을 주었던지 전자로부터는 변진 혹은 변한의 칭호를 받고 후자로부터는 「소나갈」 「도노아」의 별명 내지 「액유각인」이란 부회적 별칭을 듣게 되었다. 이 진인의 일족이 (중국인에게) 변진의 칭을 얻기 시작한 연대는 분명치 못하나 일러도 한의 동방군현이 반도 북부 지방에 설치된 때로부터 얼마 오래지 아니한 시대에 속한 것이라고 억측한다.
쪽수▶P107-1 를 볼 수 있지만 其他 文獻 (見下)에도 만히 보이는 事實이므로, 이 箭狀의 附屬品은 確實히 鳥羽를 象한 것으로 觀念되며, (近來 慶州 及 其他處에서 發掘된 金冠의 上面 二角도 역시 二鳥羽를 象한 것이니) 그 原始的인 것은 바루 鳥羽 그것이었을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右示 出土品은 任那加羅時代의 遺物임이 거의 疑心없고 따라 이러한 유의 冠을 弁辰語로 蘇那曷(都努我), 日本서는 後에 久麻加夫都(熊兜)라고 한 것 같으며, 「額有角」의 附會도 실상 이런 箭狀의 冠飾을 보고 지어낸 말일 것이다. 勿論 時代(及 貴賤)을 따라 冠飾의 材料라든지 制式이 多少의 變遷을 지냈을 것은 無疑하나 弁辰 後期의 冠制는 대개 아래와 같은 樣式에 不過하였을 것이요 그 初期의 것은-仔細치 못하나-이 樣式에서 더 훨신 弁形에 가까웠든 것이 아닌가. 그리하야 「弁辰」의 稱을 얻게 된 것이 아닌가 함이 나의 淺見이다. 右에 參考로 보인 B圖의 高句麗時代壁畵의 人物의 冠飾은, 누구나 잘 聯想할 수 있는 바와 같이 魏書 高句麗傳에 「頭着折風 其形如弁 旁揷鳥羽 貴賤▶P108-1有差」, 北史 高句麗傳에 「人皆頭着折風 形如弁 士人加揷二鳥羽 貴者其冠曰蘇骨 多用紫羅爲之 飾以金銀」이라 한, 弁形의 折風冠에 加揷二鳥羽한-蘇骨-그것으로 認識되거니와, 그 折風冠에 關한 記事는 이미 魏志 後漢書에도 보이어 「著折風形如弁」이라고 하였으므로 그 起原은 相當히 오레 되였든 것이다. 勿論 A 圖冠飾의 本體의 樣式도 이러한 帽形에 얼마쯤 近似하지만, 弁辰 初期의 것은 더 훨신 이것과 類似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원문주15▶弁辰의 一族인 新羅(斯盧)에는 遺子禮[15]란 冠이 있었고, 원문주16▶百濟에는 「其冠兩廂加翅」[16]라 한, 역시 兩側에 二翅의 附加한 冠幘이 있었는데, 그 冠飾의 實體에 關하여는 何等의 具體的 記事가 없으나 대개 前者는 A圖類(蘇那曷?)에, 後者는 B圖類(蘇骨)와 방불하였을 것이다. 新羅는 弁辰의 一族으로 모든 風俗이 任那 加羅와 略同하고 百濟의 治者階級는 高句麗와 同族으로 그 衣服冠飾이 서루 大同少異하였든 까닭이다. 일로써 보면 古代 東方諸族間의 관식에는-村料와 樣式에 있어 若干의 差는 있었을 망정-그다지 懸殊한 意匠과 趣向은 보이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사이의 만흔 共通點을 發見할 수 있으며, 더욱 上狹下廣의 弁形에 鳥羽 혹은 箭狀의 副飾品을 附加함은 同一한 趣向의 變遷이라고 볼 수 있거니와, 이것이 外人의 눈에는 異常한 注意를 이르키게 되었든 모양이다. 원악 冠帽란 것은 頭上에 쓰는 有表한 물건이기 때문에 흔이 異俗의 人으로 깊은 印象을 가지게 하는 것이지만, 古代 弁辰人의 冠飾이야말로 中國人 또는 日本人에게 異常한 印象을 주었던지 前者로부터는 弁辰 혹은 弁韓의 稱呼를 받고 後者로부터는 「蘇那曷」 「都努我」의 別名 乃至 「額有角人」이란 附會的 別稱을 듣게 되였다. 이 辰人의 一族이 (中國人에게) 弁辰의 稱을 얻기 始作한 年代는 分明치 못하나 일러도 漢의 東方郡縣이 半島 北部地方에 設置된 때로부터 얼마 오래지 아니한 時代에 屬한 것이라고 臆測한다.
동방인의 관식에 대한 중국인의 주의 내지 기이감의 일례로-한가지 참고 겸 episode로-말하여 둘 것은 육조시대의 南齊人(남제인) 王融(왕융)이 고구려 使者(사자)의 쓴 절풍관을 보고 이상히 여기어 戱言(희언)을 농하였던 이야기와, 隋(수) 煬帝(양제) 시의 尙書(상서) 李子雄(이자웅)이 신라 사자의 관(유자례?)을 보고 역시 이상히 여기어 서로 酬酌(수작)하다가 사자의 감정을 상하고 실언으로 인하여 일시 직을 면하게까지 되었던 일종 자미있는 이야기니, 각기 기사의 원문을 들어 보이면 아래와 같다-南齊書(남제서) 東夷傳(동이전) 고려(즉 고구려)조에 「高麗俗 服窮袴 冠折風一梁 謂之幘 知讀五經 使人在京師 中書郞王融戱之曰 服之不衷 身之災也 頭上定是何物 答曰此卽弁之遺像也」라 하고 隋書(수서) 李子雄傳(이자웅전)楊玄感傳附(양현감전부)에 「新羅嘗遣使朝貢 子雄至朝堂 與語 因問其冠制所由 其使者曰 皮弁遺像 安有大國君子而不識皮弁也 子雄因曰 中國無禮 求諸四夷 使者曰 自至己來 此言之外 未見無禮 憲司以子雄失詞 奏劾其事 竟坐免 俄而復職」이라 한 것이 즉 그것이니, 두 사자의 말이 다 古弁(고변)의 遺像(유상)이라고 주장한 것은 과연 어떠할지 모르나 다소 중국의 고대의 변에 가까운 제식을 가졌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고래 동이족의 酋長(추장)들은 중국의 중앙정부 혹은 지방정청에 나아가 소위 朝謁(조알) 朝貢(조공) 朝獻(조헌)의 형식 하에 국제적 호의를 구하는 동시에 중국의 의책 印緩(인완)를 받는 것을 일종의 영광으로 여기어 왔었으므로 얼마간 중국식의 弁幘(변책)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쪽수▶P108-2東方人의 冠飾에 對한 中國人의 注意 乃至 奇異感의 一例로-한가지 參考兼 episode로-말하여 둘 것은 六朝時▶P109-1代의 南齊人 王融이 高句麗使者의 쓴 折風冠을 보고 異常히 역이어 戱言을 弄하였든 이약이와, 隋煬帝時의 尙書 李子雄이 新羅使者의 冠(遺子禮?)을 보고 역시 異常히 역이어 서루 酬酌하다가 使者의 感情을 傷하고 失言으로 因하야 一時 職을 免하게까지 되였든 一種 자미있는 이약이니, 각기 記事의 原文을 들어 보이면 아래와 같다-南齊書 東夷傳 高麗(即 高句麗)條에 「高麗俗 服窮袴 冠折風一梁 謂之幘 知讀五經 使人在京師 中書郞王融戱之曰 服之不衷 身之災也 頭上定是何物 答曰此卽弁之遺像也」라 하고 隋書 李子雄傳楊玄感傳附에 「新羅嘗遣使朝貢 子雄至朝堂 與語 因問其冠制所由 其使者曰 皮弁遺像 安有大國君子而不識皮弁也 子雄因曰 中國無禮 求諸四夷 使者曰 自至己來 此言之外 未見無禮 憲司以子雄失詞 奏劾其事 竟坐免 俄而復職」이라 한 것이 즉 그것이니, 두 使者의 言이 다 古弁의 遺像이라고 主張한 것은 果然 어떠할지 모르나 多少 中國의 古代의 弁에 가까운 制式을 가졌든 것은 事實인 듯하다. 古來 東夷族의 酋長들은 中國의 中央政府 혹은 地方政廳에 나아가 所爲 朝謁 朝貢 朝獻의 形式下에 國際的 好誼를 求하는 同時에 中國의 衣幘 印緩를 받는 것을 一種의 榮光으로 역이어 왔었으므로 얼마간 中國式의 弁幘의 影響도 있었을 것이다.
상술한 나의 천견에 대과(大過)가 없다고 하면 변진의 변은 한자 그대로의 뜻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거니와, 그러면 이 변진의 칭을 듣던 진의 일족의 분포 지역-즉 그 주지(住地)의 위치 강역은 어떠하였던가? 에 취하여 잠깐 언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위지에 보이는 변진 20여 국의 지리적 위치는 다음 절에 자세히 고증하기로 하고 여기에는 단지 그 20여 국을 포함한 변진 전체의 총위치 총강역에 취하여 일언하려 한다. 위지에는 이 20여 국의 제 부락을 진한 변진 2대 부족의 혼합체로 오해하여 「弁辰與辰韓雜居…衣服居處與辰韓同 언어法俗相似」라 하여 즉 변진은 진한과 잡거하여 지역적으로나 언어습속상으로나 양자 사이에 어떠한 구별이 없는 것처럼 말하였고, 위지의 기사를 많이 승습한 후한서(후한서, 동이전 한조)에도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구하고) 바로 그 밑에는 「言語風俗有異」라 하고 또 그 한조 上文(상문) 중에는 「弁辰在辰韓之南」이라고까지 명언하였다. 후한서의 이 두 구절만은 위지 이외의 사서(魏略(위략)?)에 근거한 듯한 것으로 吾人(오인)의 주의를 이끄는 것이나 20여 국의 일반을 진한 타 일반을 변진의 부족으로 본 것은 위지와 같은 견해에 빠진 것이다. 현대문주17▶나말의 문호 崔致遠(최치원)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삼한을 삼국에 비정하여 「馬韓則高麗高句麗 弁韓則百濟 辰韓則新羅」 [a 17]라는 무리한 설을 토하였음에도 不顧(불고)하고 삼국사기(지리지) 및 동국여지승람의 찬자는 최씨의 설을 가장 유리한 것으로 취하여 특히 승람에는 금 전라도의 땅을 고변진의 땅으로 보아 동서 전라도조에 「本卞韓之地 後爲百濟所有」라고 하였으며, 또 여말선초의 鉅儒(거유)로 치는 陽村(양촌) 權近(권근)과 같은 이는-역시 삼한을 삼국에 비정하되-최씨설에 반대하여 단연히 마한으로써 금 전라도(백제)의 땅이라고 주장하면서, 변진에 있어서는 너무도 脫線(탈선)에 달아나 금 평양(고구려)설을 창하여, 仍曰(잉왈) 현대문주18▶「後漢書以爲 卞韓在南 辰韓在東 馬韓在西 其謂卞韓在南者 蓋自漢界遼東之地而云耳 非謂卞韓在辰馬二韓之南也 崔致遠因謂馬韓麗也 卞韓百濟也 誤矣」 [a 18]라고 하였다. 양촌의 이 평양설은 비평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유치한 설이지만, (씨는 고조선 및 낙랑의 중심지를 평양에 비정하면서 또 변진을 이곳에 구하는 자가당착에 빠짐을 깨닫지 못하였고 후한서에 분명히 「弁辰在辰韓之南」이라 한 것을 망각하고 「非謂卞韓在辰馬二韓之南」이라고 우기었다) 씨의 억견은 위의 최씨의 오해보다는 더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후세의 久庵(구암) 韓百謙(한백겸)은 이 최씨설 권씨설의 삼한을 삼국에 비정하는 결함을 간파하여 현대문주19▶「崔致遠始謂馬韓麗也 弁韓濟也 此一誤也 權近雖知馬韓之爲百濟 而亦不知高句麗之非弁韓 混而說之 此再誤也」 [a 19]라 전제하고 이어서 위지 후한서 등에 근거하여 「馬韓統五十四國 辰弁韓各統十二國 소위國卽今之郡縣 合辰弁二韓 僅得二十四國 不能當馬韓之半 以此見之 湖西湖南合爲馬韓 而嶺南一道 自分爲辰弁二韓 又何疑乎」라 하여 변진을 금 경상도 내에 구하였다. 구암 이후의 학자는 대개 이 설을 좇게 되었다. 구암의 이 견해는 확실히 일단의 진보를 보인 설이라고 할 수 있으나 위지 후한서의 僞筆(위필)에 의하여 변진 20여 국을 변한 진한의 혼합체로 보고 동시에 영남(경상도)의 일반을 변진, 타 일반을 진한의 땅으로 인정한 것은 依然(의연) 불합리를 면치 못한 설이라고 나는 본다. 나는 이미 앞서 역설한 바와 같이 진한의 부족을 변진 20여 국 중에서나 그 위치를 영남 즉 금의 경상도 내에 구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북인 마한의 동북 경내에 비정하는 신견해를 제출하였으므로써다. 진한과 변진은 엄밀한 의미에 있어 서로 종족을 달리하고 언어 습속도 다소 달랐을 것이며, 더구나 住地(주지)에 있어서는 남북으로 截然(절연)한 구별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이와 같이 진한의 위치를 마한의 동북계(금 경기도)에 처리하고 마한의 본토(proper)를 충청 전라 양 지방에 구함이 당연하다고 하면 변진의 위치 강역은 설명할 것도 없이 지금 鳥領(조령) 이남 경상도 일대의 땅이 다 이에 해당할 것이다. 대개 경상도란 곳은 그 지리가 北과 西는 小白山系의 산맥이 連亘하여 無數한 大領과 大山이 天然的 障壁을 이루어 있고 동과 남은 대해로 둘러 一區(일구)의 별천지를 지어가지고 있거니와, 弁辰族(변진족)은 이 별천지의 보금자리에서 생장 발전하던 족속들이라고 할 수 있다.(단 태백산계의 4, 5조의 산맥이 이 지방을 남북으로 縱貫(종관)하여 고대 변진의 제부락으로 하여금 분립에서 통일에 달하는 시기를 다소遲遲하게 하였던 것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또 이 지방 중앙에는 낙동강이란 대강이 남북을 관류하여 일대 동맥을 지어있는 만치 강의 좌우 연안 일대는 고대 변진인의 중추적 무대로서의 임무를 다하였던 곳이다. 낙동강은 경북 봉화군 태백산 潢池(황지)에서 발원하여 안동에서 서로 꺾여 상주의 북에 이르러 乃城川(내성천) 등 衆水(중수)를 합하고 거기서 남하하여 의성 방면의 渭川(위천)을 합하고 또 남하하여 선산에서 甘川(감천)을, 고령 동북에서 琴湖江(금호강)을, 협천에서 黃江(황강)을, 함안 북에서 南江(남강)을 합한 후 동류하여 밀양의 密陽江(밀양강)을 합하여 김해 동에 이르러 삼각주를 지어 조선해협에 주입하는-流程(유정)이 530km, 유역이 24,750km2에 달하는 대강이니, 경상도의 동해안 지대를 제하고서는 거의 대부분이 이 유역 범위 안에 속하며, 舟楫(주즙)의 利(이)는 반도의 여러 대강 중 제1위, 관개의 리도 또한 절대한 것은 고래로부터의 정평이다. 낙동강은 말하자면 남조선의 나일(Nile)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대소의 차와 남류북류의 차는 있지만, 그 유역의 광대한 품과 그 하구가 delta로 되여 있음과 거의 해마다 홍수의 범람이 있음과(때로 그 해도 있지만) 주즙 관개의 리와 地味(지미)의 비옥, 농산물의 풍부함이 저 나일강과 유사할 뿐더러 고대 그 유역 위에 한 문명의 꽃이 피었음도 서로 자미있는 비교이다. 나일강 유역에는 고대 埃及(애급)의 문명이 열렸었고 낙동강 유역에는 고대 변진족의 주체인 가라의 문명이 피었었다. 希臘(희랍) 역사가 헤로더터스(Herodotus)가 애급을 칭하여 「나일의 賜物(사물)」 (The gift of Nile)이라 하였지만, 우리는 옛날 가라의 문명을 회고하여 낙동강의 사물이라고 할 수 있다. 애급에 상애급(Upper Egypt) 하애급(Lower Egypt)의 지역적 칭호가 있음과 같이 가라에도 상가라(금 고령) 하가라(금 김해)의 정치적 내지 지역적 구별이 있었으니, 상하 가라의 땅은 실로 변진의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만하였다. 낙동강유역의 地味(지미)의 비옥함과 농산물의 適宜(적의)함은 고래로 일컫는 바이지만, 위지 동이전 변진조에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鎌布」라 한 것도 특히 이 유역의 지리와 생산을 말한 것으로 해석된다. 但 同書 同條에 「國出錢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이라 한 것은-그 소위 국은 변진 제국을 통칭한 광의의 국인 듯하므로-변진 전체에 관한 기사로 간주함이 온당할 듯하니, 이 지방이 또한 철의 多産地(다산지)인 것은 근래 이 지방에서 盛(성)히 발굴된 고대 유물 중에 철기가 많음을 보아도 짐작되지만, 더욱 동국여지승람 경상도편에 의하면 梁山(양상, 火者浦(화자포)) 永川(영천, 郡東(군동) 乾川(건천)) 彦陽(언양, 石南山(석남산)) 安東(안동) 醴泉(예천, 大谷灘(대곡탄)) 盈德(영덕, 無吐山(무토산)) 禮安(예안,縣東上里(현동상리)) 龍宮(용궁, 修正灘(수정탄)) 尙州(상주, 松蘿灘(송라탄)) 陜川(합천, 冶蘆縣(야로현) 深妙里(심묘리)) 三嘉(삼가, 黃山(황산)) 山陰(산음, 尺旨山(척지산)) 金海(김해, 府東(부동) 甘勿也村(감물야촌)) 昌寧(창녕, 佛母山(불모산))등 諸處(제처)가 다 철을 産(산)한다 하고 그 밖에 경주(府東(부동) 八助浦(팔조포))서는 沙鐵(사철), 蔚山(울산, 達川山(달천산))서는 水鐵(수철), 寧海(영해)서는 銅(동)과 鉛(연)이 出(출)한다고 하였다. (現今(현금)에도 義城(의성) 昌原(창원) 등지에서는 동을 산한다). 어떻든 변진지방은 철의 산출지로 저명하여 일찍부터 철을 사용하고 이것으로써 매매교환의 표준가치로까지 사용할 줄을 알았고, 한인(특히 진마2한) 濊人(예인, 東濊(동예)) 倭人(왜인)들의 (철)거래가 행하고 또 이를 낙랑 대방 2군의 수요에 공급하였던 것을-위지에 의하여-알 수 있거니와, 철(및 동) 이외에 금은 등 귀금속도 풍부히 산출 사용하였던 것은 역시 근래 이 지방 고분의 출토품 중에 금은속 장식구관식⦁耳飾環(이식환)⦁帶飾(대식)등가 많이 나옴을 보아 알 수 있다. 일본서기 神代紀(신대기) 所引(소인) 一書(일서)에 「韓鄕之嶋是有金銀」이라 함과 顯宗紀(현종기) 원년조의 「金銀蕃國」이라 함과 古事記(고사기) 중권에 「西方有國 金銀爲本目之炎耀 種種珍寶 多在其國」이라 한 것은 다 변진제국에 관한 설화로 볼 것이니 이에 의하여 그 지방이 금은의 소산지임을 더욱 認得(인득)할 수 있다. 변진제국 중에도 특히 임나(彌馬邪烏(미마사오)) 가라(구사)와 같은 곳은-변진의 정치문화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일종의 철금은 기타 珍寶(진보)의 取引(취인장)으로(이 때문에) 왜인과의 관계가 더욱 미묘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한다. 일본사 상의 소위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日本府(일본부) 즉 ヤマトノミコトモチ는 倭宰(왜재)의 뜻이요 宰(재)는 使臣(사신)의 뜻이다란 것도 나의 소견으로는 후세의 倭館(왜관) 관리와 같은 종류의 것으로서 이 때에는 다소의 정치적 활동을 겸하였던 것인 듯하거니와, 이 역시 본질적으로 구명하면 철 금은 직물 재보(珠玉(주옥)) 기타 곡물의 무역 거래를 주로 맡은 일종의 공적 商官(상관)이 아니었든가 한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논술할 기회가 있겠으므로 여기에는 더 말하지 아니하고 단지 힌트만 보이여 둔다. 요컨대 弁辰人은 반도 동남방의 「別爲一區」인 금 경상도의 땅을 점거하여 특히 낙동강유역을 중심 무대로 삼아 그 지리와 산물에 의하여 성장 발전하던 족속이라고 할 수 있다.
쪽수▶P109-2上述한 나의 淺見에 大過가 없다고 하면 弁辰의 弁은 漢字 그대로의 義에 不過하다고 할 수 있거니와, 그러면 이 弁辰의 稱을 듯든 辰의 一族의 分布地域-即 그 住地의 位置疆域은 어떠하였든가? 에 就하야 잠간 言及하지 아니할 수 없다. 魏志에 보이는 弁辰 二十餘國의 地理的 位置는 다음 節에 자세히 考證하기로 하고 여기에는 단지 그 二十餘國을 包含한 弁辰 全體의 總位置 總疆域에 就하야 一言하려 한다. 魏志에는 이 二十餘國의 諸部落을 辰韓 弁辰 二大部族의 混合體로 誤解하야 「弁辰與辰韓雜居…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라 하야 卽 弁辰은 辰韓과 雜居하야 地域的으로나▶P110言語習俗上으로나 兩者 사이에 어떠한 區別이 없는 것처럼 말하였고, 魏志의 記事를 만히 承襲한 後漢書(東夷傳 韓條)에도 「弁辰與辰韓雜居 城郭衣服皆同」이라고 하였는데, (이에 不拘하고) 바루 그 밑에는 「言語風俗有異」라 하고 또 그 韓條 上文 중에는 「弁辰在辰韓之南」이라고까지 明言하였다. 後漢書의 이 두 句節만은 魏志以外의 史書(魏略?)에 根據한 듯한 것으로 吾人의 注意를 익그는 者이나 二十餘國의 一半을 辰韓 他 一半을 弁辰의 部族으로 본 것은 魏志와 같은 見解에 빠진 것이다. 원문주17▶羅末의 文豪 崔致遠은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三韓을 三國에 比定하야 「馬韓則高麗高句麗 弁韓則百濟 辰韓則新羅」[17]라는 無理한 說을 吐하였음에도 不顧하고 三國史記(地理志) 及 東國輿地勝覽의 撰者는 崔氏의 說을 가장 有理한 것으로 取하야 特히 勝覽에는 今 全羅道의 地를 古弁辰의 地로 보아 同書 全羅道條에 「本卞韓之地 後爲百濟所有」라고 하였으며, 또 麗末鮮初의 鉅儒로 치는 陽村 權近과 같은 이는-역시 三韓을 三國에 比定하되-崔氏說에 反對하야 斷然히 馬韓으로써 今 全羅道(百濟)의 地라고 主張하면서, 弁辰에 있어서는 너무도 脫線에 다라나 今 平壤(高句麗)說을 唱하야, 仍曰 원문주18▶「後漢書以爲 卞韓在南 辰韓在東 馬韓在西 其謂卞韓在南者 蓋自漢界遼東之地而云耳 非謂卞韓在辰馬二韓之南也 崔致遠因謂馬韓麗也 卞韓百濟也 誤矣」[18]라고 하였다. 陽村의 이 平壤說은 批評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幼稚한 설이지만, (氏는 古朝鮮 及 樂浪의 中心地를 平壤에 比定하면서 또 弁辰을 이곳에 求하는 自家撞着에 빠짐을 깨닫지 못하였고 後漢書에 分明히 「弁辰在辰韓之南」이라 한 것을 忘却하고 「非謂卞韓在辰馬二韓之南」이라고 우기었다) 氏의 臆見은 우의 崔氏의 誤解보다는 더 심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後世의 久庵 韓百謙은 이 崔氏說 權氏說의 三韓을 三國에 比定하는 缺陷을 看破하야 원문주19▶「崔致遠始謂馬韓麗也 弁韓濟也 此一誤也 權近雖知馬韓之爲百濟 而亦不知高句麗之非弁韓 混而說之 此再誤也」[19]라 前提하고 仍히 魏志․後漢書等에 根據하야 「馬韓統五十四國 辰弁韓各統十▶P111二國 所謂國卽今之郡縣 合辰弁二韓 僅得二十四國 不能當馬韓之半 以此見之 湖西湖南合爲馬韓 而嶺南一道 自分爲辰弁二韓 又何疑乎」라 하야 弁辰을 今 慶尙道內에 求하였다. 久庵 以後의 學者는 대개 이 說을 좇게 되였다. 久庵의 이 見解는 確實히 一段의 進步를 보인 설이라고 할 수 있으나 魏志․後漢書의 僞筆에 依하야 弁辰 二十餘國을 弁韓 辰韓의 混合體로 보고 同時에 嶺南(慶尙道)의 一半을 弁辰, 他一半을 辰韓의 地로 認定한 것은 依然 不合理를 免치 못한 설이라고 나는 본다. 나는 이미 앞서 力說한 바와 같이 辰韓의 部族을 弁辰 二十餘國 중에서나 그 位置를 嶺南 즉 今의 慶尙道內에 求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그 北인 馬韓의 東北境內에 比定하는 新見解를 提出하였으므로써다. 辰韓과 弁辰은 嚴密한 意味에 있어 서루 種族을 달리하고 言語 習俗도 多少 달렀을 것이며, 더구나 住地에 있어서는 南北으로 截然한 區別이 있었다고 認定한다. 이와 같이 辰韓의 位置를 馬韓의 東北界(今 京畿道)에 處理하고 馬韓의 本土(proper)를 忠淸 全羅 兩地方에 求함이 當然하다고 하면 弁辰의 位置疆域은 說明할 것도 없이 지금 鳥領 以南 慶尙道 一帶의 地가 다 이에 該當할 것이다. 대개 慶尙道란 곳은 그 地理가 北과 西는 小白山系의 山脈이 連亘하야 無數한 大領과 大山이 天然的 障壁을 이루어 있고 東과 南은 大海로 둘러 一區의 別天地를 지어가지고 있거니와, 弁辰族은 이 別天地의 보금자리에서 生長 發展하든 族屬들이라고 할 수 있다.(단 太白山系의 四五條의 山脈이 이 地方을 南北으로 縱貫하야 古代 弁辰의 諸部落으로 하야금 分立에서 統一에 至하는 時期를 多少遲遲하게 하였든 것은 속일 수 없는 事實일 것이다.) 또 이 地方 中央에는 洛東江이란 大江이 南北을 貫流하야 一大動脈을 지어있는 만치 江의 左右 沿岸 一帶는 古代 弁辰人의 中樞的 舞臺로서의 任務를 다하였든 곳이다. 洛東江은 慶北 奉化郡 太白山 潢池에서 發源하야 安東에서 西으로 꺾기여 尙州의 北에 이르러 乃城川等 衆水를 合하고 거긔서 南下하야 義城方面의 渭川을 합하고 또 南下하야 善山에서▶P112甘川을, 高靈 東北에서 琴湖江을, 峽川에서 黃江을, 咸安 北에서 南江을 合한 후 東流하야 密陽의 密陽江을 合하야 金海 東에 이르러 三角洲를 지어 朝鮮海峽에 注入하는-流程이 530km, 流域이 24,750km2에 達하는 大江이니, 慶尙道의 東海岸地帶를 除하고서는 거이 大部分이 이 流域範圍 안에 屬하며, 舟楫의 利는 半島의 諸大江 中 第一位, 灌漑의 利도 또한 絶大한 것은 古來로부터의 定評이다. 洛東江은 말하자면 南朝鮮의 나일(Nile)이라고 할 수 있다. 勿論 大小의 差와 南流北流의 差는 있지만, 그 流域의 廣大한 품과 그 河口가 delta로 되여 있음과 거의 해마다 洪水의 汎濫이 있음과(때로 그 害도 있지만) 舟楫 灌漑의 利와 地味의 肥沃, 農産物의 豊富함이 저 나일江과 類似할 뿐더러 古代 그 流域 우에 한 文明의 꽃이 피었음도 서루 자미있는 比較이다. 나일江流域에는 古代 埃及의 文明이 열렸었고 洛東江流域에는 古代 弁辰族의 主體인 加羅의 文明이 피었었다. 希臘 歷史家 헤로더터스(Herodotus)가 埃及을 칭하야 「나일의 賜物」 (The gift of Nile)이라 하였지만, 우리는 옛날 加羅의 文明을 回顧하야 洛東江의 賜物이라고 할 수 있다. 埃及에 上埃及(Upper Egypt) 下埃及(Lower Egypt)의 地域的 稱號가 있음과 같이 加羅에도 上加羅(今 高靈) 下加羅(今 金海)의 政治的 乃至 地域的 區別이 있었으니, 上下 加羅의 地는 실로 弁辰의 政治 經濟 및 文化의 中心地라고 할 만하였다. 洛東江流域의 地味의 肥沃함과 農産物의 適宜함은 古來로 일컸는 바이지만, 魏志 東夷傳 弁辰條에 「土地肥美 宜種五穀及稻 曉蠶桑 作鎌布」라 한 것도 特히 이 流域의 地利와 生産을 말한 것으로 解釋된다. 但 同書 同條에 「國出錢 韓濊倭皆從取之 諸市買皆用鐵 如中國用錢 又以供給二郡」이라 한 것은-그 所爲 國은 弁辰諸國을 統稱한 廣義의 國인 듯하므로-弁辰 全體에 關한 記事로 看做함이 穩當할 듯하니, 이 地方이 또한 鐵의 多産地인 것은 近來 이 地方에서 盛히 發掘된 古代遺物 中에 鐵器가 만흠을 보아도 짐작되지만, 더욱 東國輿地勝覽 慶尙道篇에 依하면 梁山(火者浦) 永▶P113川(郡東 乾川) 彦陽(石南山) 安東 醴泉(大谷灘) 盈德(無吐山) 禮安(縣東上里) 龍宮(修正灘) 尙州(松蘿灘) 陜川(冶蘆縣 深妙里) 三嘉(黃山) 山陰(尺旨山) 金海(府東 甘勿也村) 昌寧(佛母山)等 諸處가 다 鐵을 産한다 하고 그 밖에 慶州(府東 八助浦)서는 沙鐵, 蔚山(達川山)서는 水鐵, 寧海서는 銅과 鉛이 出한다고 하였다. (現今에도 義城 昌原等地에서는 銅을 産한다). 어떠튼 弁辰地方은 鐵의 産出地로 著名하야 일즉부터 鐵을 使用하고 이것으로써 賣買交換의 標準價値로까지 使用할 줄을 알았고, 韓人(特히 辰馬二韓) 濊人(東濊) 倭人들의 (鐵)거래가 行하고 또 이를 樂浪帶方二郡의 需要에 供給하였든 것을-魏志에 依하야-알 수 있거니와, 鐵(及 銅)以外에 金銀等 貴金屬도 豊富히 産出 使用하였든 것은 역시 近來 이 地方古墳의 出土品 中에 金銀屬 裝飾具冠飾⦁耳飾環⦁帶飾等가 만히 나옴을 보아 알 수 있다. 日本書紀 神代紀 所引 一書에 「韓鄕之嶋是有金銀」이라 함과 顯宗紀 元年條의 「金銀蕃國」이라 함과 古事記中卷에 「西方有國 金銀爲本目之炎耀 種種珍寶 多在其國」이라 한 것은 다 弁辰諸國에 關한 說話로 볼 것이니 이에 依하야 그 地方이 金銀의 所産地임을 더욱 認得할 수 있다. 弁辰諸國 중에도 特히 任那(彌馬邪烏) 加羅(狗邪)와 같은 곳은-弁辰의 政治文化의 中心地였을 뿐아니라-一種의 鐵金銀 其他珍寶의 取引으로(이 때문에) 倭人과의 關係가 더욱 微妙하게 되였든 것이 아닌가한다. 日本史上의 所爲 任那日本府日本府 즉 ヤマトノミコトモチ는 倭宰의 義요 宰는 使臣의 義다란 것도 나의 所見으로는 後世의 倭館 官吏와 같은 種類의 것으로서 이 때에는 多少의 政治的 活動을 겸하였든 것인 듯하거니와, 이 역시 本質的으로 究明하면 鐵 金銀 織物 財寶(珠玉) 其他 穀物의 貿易 거래를 주로 맡은 一種의 公的 商官이 아니었든가 한다. 이에 對하여는 따루 論述할 機會가 있겠으므로 여기에는 더 말하지 아니하고 단지 힌트만 보이여 둔다. 要컨대 弁辰人은 半島 東南方의 「別爲一區」인 今 慶尙道의 地를 占居하야 特히 洛東江流域을 中心 舞臺로 삼아 그 地利와 産物에 依하야 成長發展하든 族屬▶P114이라고 할 수 있다.
(을) 변진 20여 국에 관한 위지 기사의 해석과 제국의 위치 비정
쪽수▶P114-2(乙) 弁辰 二十餘國에 關한 魏志記事의 解釋과 諸國의 位置比定
위와 같이 변진 족속의 住地(주지)가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대를 함유하였던 것이라고 하면 위지 변진조의 下記(하기) 기사는 이를 어떻게 해석하며, 또 그 제국의 지리적 위치는 지금의 어느 곳에 해당할 것인가? 함이 이 절의 논제이다.
쪽수▶P114-3右와 같이 弁辰族屬의 住地가 지금의 慶尙(南北)道 一帶를 含有하였든 것이라고 하면 魏志 弁辰條의 下記 記事는 이를 어떠케 解釋하며, 또 그 諸國의 地理的 位置는 지금의 어느 곳에 該當할 것인가? 함이 此節의 論題이다.

[A]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借邑 [B] 有巳𣏚國(一)⦁不斯國(二)⦁弁辰彌離彌凍國(三)⦁弁辰接塗國(四)⦁勤耆國(五)⦁難彌離彌凍國(六)⦁弁辰古資彌凍國(七)⦁弁辰古淳是國(八)⦁冉奚國(九)⦁弁辰半路國(十)⦁弁樂奴國(十一)⦁軍彌國(十二)⦁弁軍彌國(十三)⦁弁辰彌烏邪馬國(十四)⦁如湛國(十五)⦁弁辰甘路國(十六)⦁戶路國(十七)⦁州鮮國(十八)⦁馬延國(十九)⦁弁辰狗邪國(二十)⦁弁辰走漕馬國(二十一)⦁弁辰安邪國(二十二)⦁馬延國(二十三)⦁弁辰瀆盧國(二十四)⦁斯盧國(二十五)⦁優由國(二十六) 弁辰韓合二十四國 [C] 大國四五千家 소국六七百家 總四五萬戶 [D]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E] 辰王王當作韓不得自立爲王魏畧曰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쪽수▶P114-4

[A]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借邑 [B] 有巳𣏚國(一)⦁不斯國(二)⦁弁辰彌離彌凍國(三)⦁弁辰接塗國(四)⦁勤耆國(五)⦁難彌離彌凍國(六)⦁弁辰古資彌凍國(七)⦁弁辰古淳是國(八)⦁冉奚國(九)⦁弁辰半路國(十)⦁弁樂奴國(十一)⦁軍彌國(十二)⦁弁軍彌國(十三)⦁弁辰彌烏邪馬國(十四)⦁如湛國(十五)⦁弁辰甘路國(十六)⦁戶路國(十七)⦁州鮮國(十八)⦁馬延國(十九)⦁弁辰狗邪國(二十)⦁弁辰走漕馬國(二十一)⦁弁辰安邪國(二十二)⦁馬延國(二十三)⦁弁辰瀆盧國(二十四)⦁斯盧國(二十五)⦁優由國(二十六) 弁辰韓合二十四國 [C]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D]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E] 辰王王當作韓不得自立爲王魏畧曰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

이 위지의 글을 위의 부호와 같이 ABCDE의 5단으로 분석하여 본다면 A단은 변진인 독립의 연맹국 수와 및 그 거수들의 칭호를 보인 것, B단은 독립 불독립을 불문하고 변진 전체의 저명한 국명을 열거하되 독립한 자는 국명 앞에 변진자를 부치고 그렇지 아니한 자는 마한조의 열국과 같이 그대로 국명만 표시한 것, C단은 변진 전체의 국세를 보인 것, D단은 변진제국 중 특히 비독립국의 정치적 소속을 명시한 것, E단은 변진과 직접 상관이 없는 진한의 기사를(찬자의 오해로)잘못 이곳에 실은 것이라고 나는 해석한다. 다시 이를 逆推(역추)하여 상론하면 E단의 「辰王(진왕)」은 전자에도 屢說(누설)한 바와 같이 진한의 誤(ᅌᅩ)로, 진한은 확실히 마한의 동(동북)계를 할거한 북방의 유이족으로서 마한의 所制(소제)가 되여 자립의 주를 갖지 못한다는(즉 자립하여 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인데-인하여 裴注(배주)의 략약에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라 함도 곧 이 진한에 대한 말인데-찬자는 사료를 정리할 때에 D절의 「其十二國」을 진한인의 부락으로 오해하여, 마침내 E절을 D절 하에 연속시킨 것인 듯하나 그것은(찬자의) 큰 불찰이요 杜撰(두찬)이다. D절의 소위 「其十二國」 은 물론 B절의 변진 20여 국 중 변진자를 부치지 아니한 12개 국(巳𣏚國(사시국)⦁不斯國(불사국)⦁勤耆國(근기국)⦁難彌離彌凍國(난미리미동국)⦁冉奚國(염해국)⦁軍彌國(군미국)⦁如湛國(여담국)⦁戶路國(호로국)⦁州鮮國(주선국)⦁馬延國(마연국)⦁斯盧國(사로국)⦁優由國(우유국), 23번의 마연국은 重出(중출))을 지칭한 것으로 이 12국은 정치상으로 마한인 세습의 辰馬(진마)의 주인 「진왕」을 맹주로 삼아 (명의상) 거기에 소속한 부락들이므로 진왕 불소속의 타 변진 12국과 구별하기 위하여 특히 변진자를 부치지 아니한 것이나, 부족상으로 말하면 이들은 역시 변진 부족이요 결코 진한족에 속한 자는 아니었다. 즉 변진자를 붙이고 아니 붙인 것은 단지 진왕 소속의 여부를 표시한 정치적 구별이요, 종족적 구별의 표시가 아니다. 그런데 찬자는 「진왕」을 (마한인 세습의) 진한왕의 뜻과 같이 오해하여 드디어 진왕에 소속한 이들 12국을 순연한 진한인의 부락으로처럼 오인함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B절에 있어-원사료를 거의 그대로 편입하면서도-20여 국을 변진과 진한과의 혼합국 수로 간주하여 환언하면 그 중 변진자를 부친 국명들을 변진의 부락으로, 그렇지 아니한 자는 진한의 국명으로 추측하여 이 절 끝에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는 사족과 (적어도 「韓(한)⦁合(합)」 두 자만은 찬자의 사족한 것) 별항에 「弁辰與辰韓雜居云云」이란 망설까지 발하게 되었다. 이것이 자래로 진한의 정체를 크게 오인하게 한 중요한 장본이 되는 소이다. 변진과 진한은 종족상으로나 언어 풍속상으로 서로 다소의 차이가 있었을 것은 물론이요 지역상으로도 서로 전연 別區(별구)에 처하여 역사지리상 하등의 큰 밀접한 관계가 없었던 것으로 인식되며 따라서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B절의 20여 국은 C절의 총호수(45만호)의 표시와 같이 한 덩어리의-언어 습속을 공동이 하든-같은 변진 제부족으로 볼 수밖에 없고, 결코 이를 2대 별족의 혼합이나 잡거로 보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위지(또는 위략)의 찬자는 사료를 편수할 때에 너무도 선입적 오해에 끌리어 상술함과 같은 사족과 위필을 가한 것이어니와, 변진조 기사 중의 별항의 소위 「진한」은 다(20여 국 중의) 진왕 소속의 12국을 지칭한 僞辰韓(위진한)으로 보면 가할 것이다. 즉 그 「弁辰與辰韓雜居…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의 진한은 다 이 위진한의 謂稱(위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삼한문제를 정찰하고 善解(선해)함에는 이 위진한에 대한 재래의 인습적 유견을 용감이 벽파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내가 본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한 꼬투리도 실상 이 위진한에 대한 不絶(불절)한 疑雲(의운) 속에서 생긴 것이다.
쪽수▶P114-5이 魏志의 文을 우의 附號와 같이 ABCDE의 五段으로 分析하야 본다면 A段은 弁辰人 獨立의 聯盟國數와 및 그 渠帥들의 稱號를 보인 것, B段은 獨立 不獨立을 不問하고 弁辰 全體의 著名한 國名을 例擧하되 獨立한 者는 國名 앞에 弁辰字를 부치고 그러치 아니한 字는 馬韓條의 列國과 같이 그대로 國名만 表示한 것, C段은 弁辰 全體의 國勢를 보인 것, D段은 弁辰諸國 中 特히 非獨立國의 政治的 所屬을 明示한 것, E段은 弁辰과 直接 相關이 없는 辰韓의 記事를(撰者의 誤解로)잘못 이곳에 실은 것이라고 나는 解釋한다. 다시 이를 逆推하야 詳論하면 E段의 「辰王」은 前者에도 屢說한 바와 같이 辰韓의 誤로, 辰韓은 確實히 馬韓의 東(東北)界를 割居한 北方의 流移族으로서 馬韓의 所制가 되여 自立의 主를 갖지 못한다는(即 自立하야 王이 되지 못한다는) 것인데-因하야 裴注의 魏略에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라 함도▶P115곧 이 辰韓에 對한 말인데-撰者는 史料를 整理할 때에 D節의 「其十二國」을 辰韓人의 部落으로 誤解하야, 마츰내 E節을 D節下에 連續시킨 것인 듯하나 그것은(撰者의)큰 不察이요 杜撰이다. D節의 所爲 「其十二國」 은 勿論 B節의 弁辰 二十餘國 中 弁辰字를 부치지 아니한 十二個國(巳𣏚國⦁不斯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冉奚國⦁軍彌國⦁如湛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斯盧國⦁優由國, 二十三番의 馬延國은 重出)을 指稱한 것으로 이 十二國은 政治上으로 馬韓人 世襲의 辰馬의 主인 「辰王」을 盟主로 삼아 (名義上) 거긔에 所屬한 部落들이므로 辰王 不所屬의 他弁辰 十餘國과 區別하기 爲하야 特히 弁辰字를 부치지 아니한 것이나, 部族上으로 말하면 이들은 역시 弁辰部族이요 決코 辰韓族에 屬한 자는 아니었다. 즉 弁辰字를 부치고 아니 부친 것은 단지 辰王 所屬의 與否를 表示한 政治的 區別이요, 種族的 區別의 表示가 아니다. 그런데 撰者는 「辰王」을 (馬韓人 世襲의)辰韓王의 義와 같이 誤解하야 듸듸어 辰王에 所屬한 이들 十二國을 純然한 辰韓人의 部落으로처럼 誤認함에 이르렀고, 그리하야 B節에 있어-原史料를 거의 그대로 編入하면서도-二十餘國을 弁辰과 辰韓과의 混合國數로 看做하야 換言하면 其中 弁辰字를 부친 國名들을 弁辰의 部落으로, 그러치 아니한 者는 辰韓의 國名으로 推測하야 此節 끝에 「弁辰韓合二十四國」이라는 蛇足과(적어도 「韓⦁合」 두 字만은 撰者의 蛇足한 것)別項에 「弁辰與辰韓雜居云云」이란 妄說까지 發하게 되였다. 이것이 自來로 辰韓의 正體를 크게 誤認하게 한 重要한 張本이 되는 所以다. 弁辰과 辰韓은 種族上으로나 言語 風俗上으로 서루 多少의 差異가 있었을 것은 勿論이요 地域上으로도 서루 全然 別區에 處하야 歷史地理上 何等의 큰 密接한 關係가 없었든 것으로 認識되며 따라서 아무리 생각하더라도 B節의 二十餘國은 C節의 總戶數(四五萬戶)의 表示와 같이 한 덩어리의-言語 習俗을 共同이 하든-같은 弁辰諸部族으로 볼 수밖에 없고, 決코 이를 二大 別族의 混合이나 雜居로 보아서는 아니될 ▶P116-1것이다. 魏志(또는 魏略)의 撰者는 史料를 編修할 때에 너무도 先入的 誤解에 끌리어 上述함과 같은 蛇足과 僞筆을 가한 것이어니와, 弁辰條 記事 中의 別項의 所爲 「辰韓」은 다(二十餘國 중의) 辰王 所屬의 十二國을 指稱한 僞辰韓으로 보면 可할 것이다. 즉 그 「弁辰與辰韓雜居…衣服居處與辰韓同 言語法俗相似」의 辰韓은 다 이 僞辰韓의 謂稱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三韓問題를 正察하고 善解함에는 이 僞辰韓에 對한 在來의 因襲的 謬見을 용감이 闢破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내가 本問題를 硏究하기 始作한 고투리도 실상 이 僞辰韓에 對한 不絶한 疑雲 속에서 생긴 것이다.
B단의 국수는 이를 총계하면 통히 26국이나, 그 중에는 동명의 疊出者(첩출자)가 있으니 마연국(19⦁23)과 같은 것은 분명한 중출이며, 그 앞의 군미국(12⦁13)도 일견 첩출과 같이 보이어 위지 찬자는 이들, 동명의 再出者(재출자)를 제외하여 24국으로 계산한 모양인 듯한데 나로써 보면 군미국은 그 중 하나는 변진자를 부치지 아니하고 그 밑의 하나는 그것(변자 하에 진자 탈)을 부치어 구별을 표시한 것으로 보면 이는 첩출이 아니고 실제 동명의 군미국이 두 곳에 다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그 하나는 진왕 소속의 12국 중에 있어 변진자를 붙이지 하니하고 다른 하나는 진왕 불소속의 10여 국 중에 있어서 특히 그것을 붙인 것이 아닌가 해석한다. 조선 고대 지명 중에는 실로 동명의 것이 많아 일일이 예시할 겨를이 없거니와 전에 말한 마한조의 50여 국 중에도 대소 2 石索國(석소국)이라든지 監奚(감해, 卑離(비리))와 感奚(감해)라든지 萬(邁)盧(만(매)로)와 莫盧(막로)라든지 卑彌(비미)와 不彌(支)(불미)(지)같은 것은 다 同音義(동음의)의 지명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해석으로 과오가 없다고 하면 B단의 實國數(실국수)는 총합 25국으로서 그 중 12국은 진왕에 속하고 기타 13국은 그 소속 외에 있든 순연한 변진인 연맹의 제국이라고 할 수 있다. 변진제국과 진왕과의 정치적 관계가 전후에 어떠한 변천을 밟아 왔는지 이에 대하여는 자세히 알 도리가 없으나 일찍이 말하여 두었던 바와 같이 변진 13국은 처음(진국시대)에는 타 12국과 한 가지 目支國(목지국)의 진왕을 맹주로 하여 그 소속 명의 하에서 낙랑 등 중국의 제군현과 교통(소위 조알조공의 형식으로)을 하여 오다가 후에 이르러 (후한말? 삼국초?) 진왕의 소속을 떠나 각각 독자적으로 활약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며, 타의 12국은 魏代(위대)에도 의연히 진왕에 속하였던 모양이나 그 소위 屬(속)이란 것은 형식에 불과하고 실상은 각자 반독립적의 혹은 수 개 이상 연맹의 부락 국가로서 그나마 未久(미구)에 진왕의 소속을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니, 이는 무엇보다도 진왕의 맹주적 지위가 저 백제의 흥기 발전으로 말미암아 점점 미약에 빠저들어가는 대세에 기인한 소이이었을 것이다. 12국 중의 사로(신라)와 같은 국은 암암리에 실력을 길러 마침내 업수이 역이지 못할 강대한 세력을 나타내게 되었지만 그 건국의 연대는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역시 진왕의 소속을 완전히 벗기 시작한 때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삼국시대의 변진의 상태는 대체로 위지 기사에 보임과 과이 틀림이 없었을 줄로 믿는다. 단 B단에 열거된 변진의 제 국명은 당시 중국인에게 알려진 저명한 자의 표시에 불과하고 실상은 그 이외에 또 소국들이 다소 있었을 것이며 C단의 「總四五萬戶」란 호수도 25국만의 총호수로서 거기에 열거되지 아니한 국읍의 호수는 역시 산입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위지에 보인 이 변진의 국수(25)와 호수(45만)를 동서 마한조에 나타난 진마의 국수(50여) 및 호수(10여 만)에 비하면 거의 그 반수에도 달할락 말락 하거니와 그것은 피차 강역의 대소의 차가 있고 또 마한조의 국수도 진마 전체의 실국수라기보다(역시) 저명한 자의 記示(기시)에 불과한 것인즉 설령 피차의 수효를 늘려잡는대야 항상 그 비례에서 더하고 덜하지 안았을 것이다. 그리고 진마의 대국 호수가 만여(가)임에 대하여 변진의 그것은 4, 5천(가)에 불과하고 또 전자의 소국 호수가 수천(가)임에 대하여 후자의 그것은 겨우 6, 7백(가)밖에 되지 못하였음을 보면, 변진 지방의 호구의 분포는 진마 지방의 그것에 비하여 다소 희박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변진은 강역상으로나 국세상으로나 진마 지방에는 견줄 수 없는한 작은 소지방이었다.
쪽수▶P116-2 B段의 國數는 이를 總計하면 통히 二十六國이나, 其中에는 同名의 疊出者가 있으니 馬延國(十九⦁二十三)과 같은 것은 分明한 重出이며, 그 앞의 軍彌國(十二⦁十三)도 一見 疊出과 같이 보이어 魏志 撰者는 이들, 同名의 再出者를 除外하야 二十四國으로 計算한 모양인 듯한데 나로써 보면 軍彌國은 그 中 하나는 弁辰字를 부치지 아니하고 그 밑의 하나는 그것(弁字下에 辰字脫)을 부치어 區別을 表示한 것으로 보면 이는 疊出이 아니고 실제 同名의 軍彌國이 두 곳에 다 있었든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그 하나는 辰王 所屬의 十二國 中에 있어 弁辰字를 附치 하니하고 다른 하나는 辰王 不所屬의 十餘國 中에 있어서 特히 그것을 附한 것이 아닌가 解釋한다. 朝鮮古代 地名 중에는 실로 同名의 것이 많아 일일이 例示할 겨를이 없거니와 전에 말한 馬韓條의 五十餘國 중에도 大小 二 石索國이라든지 監奚(卑離)와 感奚라든지 萬(邁)盧와 莫盧라든지 卑彌와 不彌(支)같은 것은 다 同音義의 地名들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解釋으로 過誤가 없다고 하면 B段의 實國數는 總合 二十五國으로서 其中 十二國은 辰王에 屬하고 其他 十三國은 그 所屬外에 있든 純然한 弁辰人 聯盟의 諸國이라고 할 수 있다. 弁辰諸國과 辰王과의 政治的 關係가 前後에 어떠한 變遷을 밟아 왔는지 이에 對하여는 仔細히 알 道理가 없으나 일즉이 말하야 두었든 바와 같이 弁辰十三國은 처음(辰國時代)에는 他十二國과 한 가지 目支國의 辰王을▶P117 盟主로 하야 그 所屬 名義下에서 樂浪等 中國의 諸郡縣과 交通(所爲 朝謁朝貢의 形式으로)을 하야 오다가 後에 이르러 (後漢末? 三國初?) 辰王의 所屬을 떠나 各各 獨自的으로 活躍하였든 것이 아닌가 하며, 他의 十二國은 魏代에도 依然히 辰王에 屬하였든 모양이나 그 所爲 屬이란 것은 形式에 不過하고 실상은 各自 半獨立的의 혹은 數個 以上 聯盟의 部落國家로서 그나마 未久에 辰王의 所屬을 벗어나게 되였든 것이니, 이는 무엇보다도 辰王의 盟主的 地位가 저 百濟의 興起 發展으로 말미암아 漸漸 微弱에 빠저들어가는 大勢에 基因한 所以이었을 것이다. 十二國 中의 斯盧(新羅)와 같은 國은 暗暗裏에 實力을 길러 맟음내 업수이 역이지 못할 强大한 勢力을 나타내게 되었지만 그 建國의 年代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역시 辰王의 所屬을 完全히 벗기 始作한 때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中國의) 三國時代의 弁辰의 狀態는 대체로 魏志記事에 보임과 과이 틀림이 없었을 줄로 믿는다. 但 B段에 列擧된 弁辰의 諸國名은 當時 中國人에게 알려진 著名한 者의 表示에 不過하고 실상은 그 以外에 또 小國들이 多少 있었을 것이며 C段의 「總四五萬戶」란 戶數도 二十五國만의 總戶數로서 거긔에 列擧되지 아니한 國邑의 戶數는 역시 算入되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魏志에 보인 이 弁辰의 國數(二十五)와 戶數(四五萬)를 同書 馬韓條에 나타난 辰馬의 國數(五十餘) 及 戶數(十餘萬)에 比하면 거이 그 半數에도 達할락 말락 하거니와 그것은 彼此 疆域의 大小의 差가 있고 또 馬韓條의 國數도 辰馬 全體의 實國數라기보다(역시) 著名한 者의 記示에 不過한 것인즉 설영 彼此의 數爻를 늘려잡는대야 항상 그 比例에서 더하고 들하지 안었을 것이다. 그리고 辰馬의 大國 戶數가 萬餘(家)임에 對하야 弁辰의 그것은 四五千(家)에 不過하고 또 前者의 小國 戶數가 數千(家)임에 對하야 後者의 그것은 겨우 六七百(家)밖에 되지 못하였음을 보면, 弁辰地方의 戶口의 分布는 辰馬地方의 그것에 比하야 多少 稀薄하였든 것을 알 수 있다. 要컨대 弁辰은 疆域上으로나 國勢上으로나 辰馬地方에는 견줄 수 없는▶P118-1 한 작은 小地方이었다.
그는 그렇다 하고, 다음에는 B단의 25국의 소재 위치에 대하여 고찰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들의 소재를 현금 지리에 비정해 얻을 수 있는 데까지 고심하여 보았으나 아직도 그 중의 23국의 소재는 전혀 풀리지 못한 채로 있고 나머지 제국의 비정은 그 중의 어떤 것은 재래의 설에 參從(참종)한 바도 있지만 전연 선진의 설파 혹은 언급치 못한 것을 고득한 점도 있다. 지금 이들 국명에 대하여 순차로 번호를 붙여 사견을 개진하면 아래와 같다.
쪽수▶P118-2그는 그러타 하고, 다음에는 B段의 二十五國의 所在位置에 對하야 考察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나는 이미 오랫동안 이들의 所在를 現今地理에 比定해 얻을 수 있는 데까지 苦心하여 보았으나 아직도 그 중의 二十三國의 所在는 全혀 풀리지 못한 채로 있고 남어지 諸國의 比定은 그 중의 어떤 것은 在來의 설에 參從한 바도 있지만 全然 先進의 說破 혹은 言及치 못한 것을 考得한 점도 있다. 지금 이들 國名에 對하야 順次로 番號를 부치어 私見을 開陳하면 아래와 같다.
(1) 巳𣏚國(사시국)…巳𣏚(사시)의 巳(사)는-己(기)와 자형이 근사하므로 기의 訛(와)인 듯 실제 지명에는 巳(사)자 붙은 지명보다 己(기)자 붙은 그것이 더 많음을 볼 수 있으며 또 사시는 그 자음상으로 보면 금 安東郡(안동군)의 古號(고호)인 古陀耶(고타야, 古邑(고읍)), 금 居昌郡(거창군) 및 晋州郡(진주군)의 古名(고명)인 居陀(거타, 일운 居烈(거열))와 자못 유사한즉 그 소재는 이들 3군 중에서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그런데 변진자를 부치지 않은, 즉 진왕 소속의 제국의 소재는 후에 차차 말할 바와 같이 대개 낙동강의 상류로부터 본도(경상도)동반부에 비정되는 것이 많음을 보면, 지금의 거창이나 진주에는 이것을 구할 수 없고, 오직 안동에 비정하는 편이 온당할 것 같다. 안동군은 즉 낙동강의 상류역에 위치한 고래의 名郡(명군)으로 신라시대에는 古陀耶郡(고타야군) 또는 古昌郡(고창군)이라 하고 고려시대에는 안동 永嘉(영가) 또는 吉州(길주)라고 하였거니와, (여말선초의 사람으로 안동 권씨인 陽村(양촌) 權近(권근)의 封號(봉호)를 吉昌君(길창군)이라고 한 것도 「고창」 「길주」의 고명에 연원한 바일 것이다.) 고타야의 古陀(고타)는 바로 사시 그것에 당하고 耶(야)는 那(나) 羅(라) 邪(아)와 공통음으로 국을 의미한 말일 것이다. 그러면 고타야는 고타국(사시국)의 뜻이니 신라 소유 이전에 그곳이 변진족의 한 소국으로 있었던 것을 더욱 證左(증좌)하여 준다.
쪽수▶P118-3(一) 巳𣏚國…巳𣏚의 巳는-己와 字形이 近似하므로 己의 訛인 듯 실제 地名에는 巳字 붙은 地名보다 己字 붙은 그것이 더 만흠을 볼 수 있으며 또 己𣏚는 그 字音上으로 보면 今 安東郡의 古號인 古陀耶(古邑), 今 居昌郡 及 晋州郡의 古名인 居陀(一云 居烈)와 자못 類似한즉 그 所在는 이들 三郡 중에서 求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그런데 弁辰字를 부치지 않은, 즉 辰王 所屬의 諸國의 所在는 後에 차차 말할 바와 같이 대개 洛東江의 上流로부터 本道(慶尙道)東半部에 比定되는 것이 만흠을 보면, 지금의 居昌이나 晋州에는 이것을 구할 수 없고, 오직 安東에 比定하는 편이 穩當할 것 같다. 安東郡은 즉 洛東江의 上流域에 位置한 古來의 名郡으로 新羅時代에는 古陀耶郡 또는 古昌郡이라 하고 高麗時代에는 安東 永嘉 또는 吉州라고 하였거니와, (麗末鮮初의 人으로 安東 權氏인 陽村 權近의 封號를 吉昌君이라고 한 것도 「古昌」 「吉州」의 古名에 淵源한 바일 것이다.) 古陀耶의 古陀는 바루 己𣏚그것에 當하고 耶는 那 羅 邪와 共通音으로 國을 意味한 말일 것이다. 그러면 古陀耶는 古陀國(己𣏚國)의 義니 新羅所有 以前에 그곳이 弁辰族의 一小國으로 있었든 것을 더욱 證左하야 준다.
(2) 不斯國(불사국)…불사국은 지금의 경남 昌寧郡(창녕군)의 땅이라 함이 통설이니, 창녕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火王郡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 名下州 二十六年州廢 景德王改名 今昌寧郡」이라 하여 신라시대에 比自火郡(비자화군) 일운 比斯伐郡(비사벌군) 또는 火王郡(화왕군)이라고 하였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창녕 소재 眞興王巡狩碑(진흥왕순수비)의 「比自伐(비자벌)」 및「比子伐(비자벌)」, 삼국사기 신라기 婆娑尼師今(파사이사금) 29년조의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云云」의 比只國(비지국), 삼국유사(권1) 五伽耶條(오가야조)의 「非火(비화)」 일본서기 神功紀(신공기)를 비롯하여 동서에 자주 나타나는 (한 지명의)比自㶱(비자발)도 다 같은 창녕의 칭호임은 또한 학자의 공인하는 바이다. 현대문주20▶설명할 것도 없이 不斯(불사) 比自(비자) 比斯(비사) 比子(비자) 比只(비지)는 다 동음의 異寫(이사)로 그 뜻은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씨의 설 [a 20]과 같이 光(광)의 뜻, 즉 빛(光)의 사음인 듯하고 火(화) 伐(벌) 㶱(발)은 弗(불)⦁發(발)⦁卑離(비리)⦁夫里(부리)와 같은 어음으로 국읍을 의미한 말이다. 요컨대 불사국의 소재는 지금의 창녕군으로, 그 국명 위에 변진자를 附(부)치 아니하였음을 보면 삼한시대에는 저 진왕 소속의 12국 중의 하나였던 것이 분명하나, 원래 지리상 그곳이 가야와 접근한 관계로 후에는 진왕의 소속을 벗어나 가야연맹제국 중의 하나로 참가되었던 것 같으니, 이는 삼국유사(권1) 오가야조 所引(소인) 本朝史略(본조사략)저자 미상이나 고려인 所撰(소찬)의 麗朝史略(여조사략)일 것이다에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 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이라 하여 非火(비화) 즉 창녕이 소위 오가야 중의 하나이었던 것을 보여줌으로써다. 여기의 오가야는 고령을 중심으로 하여 단지 그 이외의 제가야만을 지칭한 것이므로 고령의 一所(일소)가 빠진 것이어니와, 비화 註(주)에 「恐高靈之訛」라고 한 것은 이를 불찰한 杜撰(두찬)이다. 삼국사기 祭祀志(제사지)에 「推心火加耶郡」이라 한 火伽耶(화가야)는 역시 非火伽耶(비화가야)의 약칭일 것이니 이에 의하여도 비화가 가야연맹의 일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권27) 창녕군 고적조를 보면 「火王山古城 石築 周五千九百八十三尺 今廢 中有泉九池三」이란 기재가 있는데 이 古城(고성)은 아마 가야연맹시대의 산성인 듯하며, 또 근래 總督府古蹟調査委員(총독부고적조사위원)에 의하여 동군 북 校洞(교동)의 大古墳(대고분) 및 그 동쪽의 소고분 몇 개가 발굴되어 가야시대의 다수한 귀중한 유물(寶冠(보관)⦁金製耳飾(금제이식)⦁環狀金具(환상금구)⦁管玉(관옥)⦁小玉(소옥)⦁槍身(창신)⦁狀鐵器(상철기)⦁刀子(도자)⦁鐵製金具(철제금구)⦁鐵釘(철정)⦁토기 등)을 보게 된 것은 이 방면 연구자의 여간 기쁨이 아니지만 앞으로 더 계속 발굴되면 당시 문명의 진상은 더욱 여실하게 나타날 것이다.
쪽수▶P118-4 (二) 不斯國…不斯國은 지금의 慶南 昌寧郡의 地라 함이 通說이니, 昌寧은 三國史記 地理志에 依하면 「火王郡本▶P119比自火郡一云比斯伐 眞興王十六年置州 名下州 二十六年州廢 景德王改名 今昌寧郡」이라 하야 新羅時代에 比自火郡 一云比斯伐郡 또는 火王郡이라고 하였든 것을 알 수 있으며, 昌寧 所在 眞興王巡狩碑의 「比自伐」 及「比子伐」, 三國史記 新羅紀 婆娑尼師今 二十九年條의 「遣兵伐比只國多伐國草八國云云」의 比只國, 三國遺事(卷一) 五伽耶條의 「非火」 日本書紀 神功紀를 비롯하야 同書에 자조 나타나는 (韓地名의)比自㶱도 다 같은 昌寧의 稱號임은 또한 學者의 共認하는 바이다. 원문주20▶說明할 것도 없이 不斯 比自 比斯 比子 比只는 다 同音의 異寫로 그 뜻은 鮎貝房之進氏의 說[20]과 같이 光의 義, 卽 빛(光)의 寫音인 듯하고 火 伐 㶱은 弗⦁發⦁卑離⦁夫里와 같은 語音으로 國邑을 意味한 말이다. 要컨대 不斯國의 所在는 지금의 昌寧郡으로, 그 國名 우에 弁辰字를 附치 아니하였음을 보면 三韓時代에는 저 辰王 所屬의 十二國 中의 一었든 것이 分明하나, 원래 地理上 그곳이 伽耶와 接近한 關係로 후에는 辰王의 所屬을 벗어나 伽耶聯盟諸國 中의 하나로 參加되였든 것 같으니, 이는 三國遺事(卷一) 五伽耶條 所引 本朝史略著者未詳이나 高麗人 所撰의 麗朝史略일 것이다에 「太祖天福五年庚子 改五伽耶名 一金官爲金海府 二古寧爲加利縣 三非火今昌寧, 恐高靈之訛 餘二 阿羅․星山(同前, 星山或作碧珍伽耶)」이라 하야 非火 즉 昌寧이 所爲 五伽耶 中의 一이었든 것을 보여줌으로써다. 여기의 五伽耶는 高靈을 中心으로 하야 단지 그 以外의 諸伽耶만을 指稱한 것이므로 高靈의 一所가 빠진 것이어니와, 非火註에 「恐高靈之訛」라고 한 것은 이를 不察한 杜撰이다. 三國史記 祭祀志에 「推心火加耶郡」이라 한 火伽耶는 역시 非火伽耶의 略稱일 것이니 이에 依하야도 非火가 伽耶聯盟의 一國이었든 것을 알 수 있다. 東國輿地勝覽(卷二十七) 昌寧郡 古跡條를 보면 「火王山古城 石築 周五千九百八十三尺 今廢 中有泉九池三」이란 記載가 있는데 이 古城은 아마 伽耶聯盟時代의 山城인 듯하며, 또 近來 總督府古蹟調査委員에 依하야 同郡北 校洞의 大古墳 및 그 東쪽의 小古墳 멫 개가 發掘되어 伽耶時代의 多數한 貴重한 遺物(寶冠⦁金製耳飾⦁環狀金具⦁管玉⦁▶P120-1小玉⦁槍身⦁狀鐵器⦁刀子⦁鐵製金具⦁鐵釘⦁土器 等)을 보게 된 것은 이 方面 硏究者의 여간 기뿜이 아니지만 앞으로 더 繼續 發掘되면 當時 文明의 眞相은 더욱 如實하게 나타날 것이다.
(3) 弁辰彌離彌凍國(변진미리미동국)…나는 이를 지금의 경남 密陽郡(밀양군)에 비정한다. 밀양은 신라의 推火郡(추화군)으로 景德王(경덕왕) 때에 密城郡(밀성군)이라 개칭하고 고려 성종 때에 密州刺史(밀주자사), 이조 초에 密陽府(밀양부) 내지 同都護府(동도호부)로 改陞(개승)하고, 또 삼국사기 지리지 밀성군조에 의하면 동군 속현 중에 「密津縣 本推浦縣一云竹山」이란 縣名(현명)이 보이고, 여지승람(권26) 동도호부 군명조에는 密山(밀산)의 일명이 보이니, 推(추)는 方訓(방훈) 밀(Mil) 혹은 미루(Miru)로 讀(독)할 것이요, 密(밀)은 물론 자음 그대로 발음할 것이다. 그러면 推(밀, 미루)와 密(밀)은 다 彌離(미리)와 같은 音義(음의)의 말로 거기서 연원된 이름일 것이며, 또 이들은 타 지명인 저 고구려 國原城(국원성, 忠州(충주))의 일명인 未乙省(미을성)의 未乙(미을, 밀)과도 공통한 말일 것이다. 이 미을성의 일명에 또 長城(울장성), 託長城(탁장성)의 칭이 있는 것을 보면 미을은 원래 「長(장)」을 의미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장의 특징을 가졌다는 龍(용)의 古方訓(고방훈)에 「미리」 「미-ㄹ」란 말이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한즉 미을⦁미리⦁추⦁밀은 다 長(장) 혹은 龍(용)을 의미한 말로 해석할 수 있거니와 龍(미르․밀)을 밀자로써 나타내는 예는 저 평양의 上密德(상밀덕) 下密德(하밀덕) 乙密臺(을밀대)의 이름에서도 볼 수 있으니 密德(밀덕) 密臺(밀대)는 다 龍堰(용언)의 뜻이므로써다(현대문주21▶졸고 「고려 西京(서경)의 左右宮(좌우궁) 급 龍堰宮(용언궁)」 참조 [a 21]). 더욱 위의 密津縣(밀진현) 즉 推浦縣(추포현)의 소재가 밀양군 남(36리)인 龍津(용진)에 비정되는 데서 밀, 추와 용과의 관계를 분명히 파악할 수 있다. 현대문주22▶여기서 한가지 辨(변)하여 둘 것은 승람의 찬자는 이 密津縣(밀진현)의 소재를 靈山(영산) 남에 구하여 「靈山南三十里 有蔑浦 推與蔑密 方音同 疑此其地」 [a 22]라고 하였는데, 큰 杜撰(두찬)임을 면치 못한다. 영산이 밀진과 한가지 신라 밀성군의 1현이었던 것은 의심 없으나 당시의 현명은 尙藥(상약)으로서 지리상으로나 명칭상으로나 밀진(현)과 혼동하지 못할 別地(별지)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용진의 이름은 이미 승람(밀양 산천조)에도 나타나건만 찬자는 추와 밀와 蔑(멸)의 동음인 것만 알고 밀진(추포)이 곧 용진인 것은 推得(추득)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미리⦁추⦁밀이 다 같은 龍(용) 혹 長(장)의 방언의 異寫(이사)라고 하면 「彌凍(미동)」은 무엇을 의미한 말일까. 나는 앞서ㅅ번에 미동을 水戶(수호, ミト)의 뜻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다시 생각하여 본 바) 지금은 이와 좀 다른 해석을 가지게 되었다. 즉 미동은 백제의 未冬夫里(미동부리, 전남 南平(남평))의 未冬(미동), 신라의 武冬彌知(무동미지, 경북 의성 丹密(단밀))의 무동과 같은 의미의 말로, 또 전에 말한 마한조 50여 국 중의 하나인 優休牟𣵠(우휴모탁, 경기 富川郡(부천군))의 牟𣵠(모탁)과도 공통한 말이라고 解(해)한다. 현대문주23▶모탁의 모는 水(물)의 뜻, 탁은 후세의 借音子(차음자)인 吐(토)와 같이 堤(제, 둑)의 뜻임을 이미 말하여 두었거니와 [a 23], 이 미동(미동⦁무동)도 역시 물둑(水堤, 수제)의 뜻이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하면 彌(미, 未(미)⦁武(무))는 牟(모)와 같이 水(수)를 의미한 말, 凍(동, 冬(동))은 𣵠(탁) 혹은 吐(토)와 같이 堤(제)를 의미한 말이 아닌가 한다. 나의 해석이 옳다고 하면 미리미동은 즉 龍堤(용제) 혹은 용 같이 긴 물둑이란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미리미동국으로 비정하는 지금의 밀양은 낙동강의 좌(동)지류의 하나인 凝川(응천, 금 密陽江(밀양강)) 유역에 위치한 대읍이니 여지승람 동군 고적조에 의하면 군남인 守山縣(수산현)에 守山堤(수산제)란 周圍(주위) 20리의 大堤(대제)가 있어, 「世傳 高麗 金方慶 築此堤灌田 以備征日本軍儲 池中有竹島 茇荷菱茨彌望云云」이라고 하였으나 고려의 金方慶(김방경)이 이 제를 축조하였다는 전설은 믿지 못할 말이고, 이런 대제는 더 훨씬 구원한 昔日(석일)의 유적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것이 오랜 고대로부터 있어 오던 것이라고 하면 미리미동의 명이 여기에서 緣起(연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연상도 일어난다. 그러나 더 후고를 요하려 한다. 또 동서 동조에 「推火山古城 山頂有石城 周二千三百六十尺 內有二泉一池」란 古山城(고산성)의 기사가 있는데, 이 推火(추화, 군동 5리)고성은 어느 시대의 所築(소축)인지 역시 미상하나 삼한시대의 유적이 아니면 삼국시대의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쪽수▶P120-2(三) 弁辰彌離彌凍國…나는 이를 지금의 慶南 密陽郡에 比定한다. 密陽은 新羅의 推火郡으로 景德王時에 密城郡이라 改稱하고 高麗 成宗時에 密州刺史, 李朝初에 密陽府 乃至 同都護府로 改陞하고, 또 三國史記地理志 密城郡條에 依하면 同郡 屬縣 中에 「密津縣 本推浦縣一云竹山」이란 縣名이 보이고, 輿地勝覽(卷二十六) 同都護府 郡名條에는 密山의 一名이 보이니, 推는 方訓 밀(Mil) 혹은 미루(Miru)로 讀할 것이요, 密(밀)은 勿論 字音 그대로 發音할 것이다. 그러면 推(밀, 미루)와 密(밀)은 다 彌離(미리)와 같은 音義의 말로 거긔서 淵源된 이름일 것이며, 또 이들은 他地名인 저 高句麗 國原城(忠州)의 一名인 未乙省의 未乙(밀)과도 共通한 말일 것이다. 이 未乙省의 一名에 또 長城, 託長城의 稱이 있는 것을 보면 未乙은 원래 「長」을 意味한 말인지도 모르지만, 長의 特徵을 가젔다는 龍의 古方訓에 「미리」 「미-ㄹ」란 말이 있는 것은 周知의 事實이다. 然則 未乙⦁彌離⦁推⦁密은 다 長 혹은 龍을 意味한 말로 解釋할 수 있거니와 龍(미르․밀)을 密字로써 나타낸는 例는 저 平壤의 上密德 下密德 乙密臺의 名에서도 볼 수 있으니 密德 密臺는 다 龍堰의 義이므로써다(원문주21▶拙稿 「高麗西京의 左右宮及龍堰宮」 參照[21]). 더욱 우의 密津縣 卽推浦縣의 所在가 密陽郡南(三十六里)인 龍津에 比定되는 데서 密․推와 龍과의 關係를 分明히 把握할 수 있다. 원문주22▶여긔서 한가지 辨하야 둘 것은 勝覽의 撰者는 이 密津縣의 所在를 靈山南에 求하야 「靈山南三十里 有蔑浦 推與蔑密 方音同 疑此其地」[22]라고 하였는데, 큰 杜撰임을 免치 못한다. 靈山이 密津과 한가지 新羅 密城郡의 一縣이었든 것은 疑心 없으나 當時의 縣名은 尙藥으로서 地理上으로나 名稱上으로나 密津(縣)과 混同하지 못할 別地임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龍津의 名은 이미 勝覽(密陽 山川條)에도▶P121-1나타나건만 撰者는 推와 密와 蔑의 同音인 것만 알고 密津(推浦)이 곧 龍津인 것은 推得하지 못하였다. 이와 같이 彌離⦁推⦁密이 다 같은 龍 혹 長의 方言의 異寫라고 하면 「彌凍」은 무엇을 意味한 말일까. 나는 앞서ㅅ번에 彌凍을 水戶(ミト)의 義가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으나 (다시 생각하야 본 바) 지금은 이와 좀 다른 解釋을 가지게 되였다. 즉 彌凍은 百濟의 未冬夫里(全南 南平)의 未冬, 新羅의 武冬彌知(慶北 義城 丹密)의 武冬과 同意味의 語로, 또 前에 말한 馬韓條 五十餘國 中의 一인 優休牟𣵠(京畿 富川郡)의 牟𣵠과도 共通한 말이라고 解한다. 원문주23▶牟𣵠의 牟는 水(물)의 義, 𣵠은 後世의 借音子인 吐와 같이 堤(둑)의 義임을 이미 말하야 두었거니와[23], 이 彌涷(未冬⦁武冬)도 역시 물둑(水堤)의 뜻이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하면 彌(未⦁武)는 牟와 같이 水를 意味한 말, 凍(冬)은 𣵠 혹은 吐와 같이 堤를 意味한 말이 아닌가 한다. 나의 解釋이 올타고 하면 彌離彌凍은 즉 龍堤 혹은 龍 같이 긴 물둑이란 뜻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彌離彌凍國으로 比定하는 지금의 密陽은 洛東江의 左(東)支流의 一인 凝川(今密陽江) 流域에 位置한 大邑이니 輿地勝覽 同郡 古跡條에 依하면 郡南인 守山縣에 守山堤란 周圍 二十里의 大堤가 있어, 「世傳 高麗 金方慶 築此堤灌田 以備征日本軍儲 池中有竹島 茇荷菱茨彌望云云」이라고 하였으나 高麗의 金方慶이 此堤를 築造하였다는 傳說은 믿지 못할 말이고, 이런 大堤는 더 훨신 久遠한 昔日의 遺跡일지도 모르겠다. 만일 이것이 오랜 古代로부터 있어 오든 것이라고 하면 彌離彌凍의 名이 여기에서 緣起된 것이 아닌가 하는 聯想도 일어난다. 그러나 더 後考를 要하려 한다. 또 同書 同條에 「推火山古城 山頂有石城 周二千三百六十尺 內有二泉一池」란 古山城의 記事가 있는데, 이 推火(郡東五里)古城은 何時代의 所築인지 역시 未詳하나 三韓시대의 遺跡이 아니면 三國時代의 것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四) 현대문주24▶弁辰接塗國(변진접도국)…接塗國(접도국)은 고 那珂通世(나가통세) 씨의 설 [a 24]에 쫒아 금 경남 漆原(칠원)咸安郡(함안군)에 병합에 비정하여 두고자 하니, 칠원은 신라의 漆吐縣(칠토현)으로서 경덕왕 때에는 漆隄(칠제)라고 개칭하였지만, 칠토 칠제는 그 자음이 接塗(접도)와 매우 가깝고 그 지리적 위치로서도 변진접도국에 비정하여 하등의 장애가 없을 것이다. 단 접도의 어의가 무엇인지-塗(도)는 吐(토) 혹은 위의 凍(동)과 같이 堤(둑)의 방언인 듯하지만 接(접)은 무엇인지-자세치 아니하므로 후고를 요한다.
쪽수▶P121-2 (四) 원문주24▶弁辰接塗國…接塗國은 故那珂通世氏의 說[24]에 쫒아 今慶南 漆原咸安郡에 倂合에 比定하여 두고저 하니, 漆原은 新▶P121-1羅의 漆吐縣으로서 景德王時에는 漆隄라고 改稱하였지만, 漆吐 漆隄는 그 字音이 接塗와 매우 가깝고 그 地理的 位置로서도 弁辰接塗國에 比定하야 何等의 障碍가 없을 것이다. 但 接塗의 語義가 무엇인지-塗는 吐 혹은 우의 凍과 같이 堤(둑)의 方言인 듯하지만 接은 무엇인지-자세치 아니하므로 後考를 要한다.
(5) 勤耆國(근기국)…근기국의 소재에 취하여는 점패방지진 씨의 일설이 있으니, 씨는 이를 지금의 迎日郡(영일군)에 비정하여 가로대 「삼국지 근기국은 삼국사기 迎日(영일)의 고명 斤烏支(근오지)를 가리키는 것으로, 근오지의 烏(오)은 語尾反切母韻(어미반절모운)으로 삽입시킨 것인 만치, 그 유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컨대 삼국사기 전남 珍原(진원)의 고명 丘斯珍兮(구사진혜)를 삼국지 마한국명으로 臼斯烏旦國(구사오단국)이라 하고, 李勣(이적) 奏狀(주상)에는 貴旦(귀단)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현대문주25▶고로 영일의 고명 근오지도 단히 근지라고도 쓴 것으로, 삼국지…의 근기국 이와 동명이 되는 셈이다」 [a 25]라고 하였다. 즉 영일의 신라시대의 이름은 근오지로서 斤(근)은 勤(근)과 전연 동음, 오는 단지 어미반절모음으로 삽입된 것, 支(지)는 耆(기)와 같이 「기」 음을 表寫(표사)한 것이므로 삼한시대의 근기국은 이곳에 해당한다는 설이다. 씨의 이 비정은 확실히 當(당)을 얻은 것이라고 사료되여 나도 이를 贊從(찬종)하여 마지않는다.(삼국사기 제사지 中祀條(중사조)에 보이는 四海(사해)의 하나인 阿等邊註(아등변주)에 「一云斤烏兄邊 退火郡」이라 한 斤烏兄(근오형)은 즉 근오지의 誤(오)로 只(지)는 역시 「지」 「기」 양음에 통한 즉, 근오지 그것으로 볼 수밖에 없거니와 근오지 변이 영일에 속치 아니하고 退火郡(퇴화군)興海(흥해)에 속한 것은 그곳이 兩地(양지) 접경처에 있든 관계로 인함이 아닌가 한다. 잠깐 참고로 일언하여 둔다).
쪽수▶P122-2 (五) 勤耆國…勤耆國의 所在에 就하여는 鮎貝房之進氏의 一說이 있으니, 氏는 이를 지금의 迎日郡에 比定하야 가로대 「三國志 勤耆國은 三國史記 迎日의 古名 斤烏支를 가리키는 것으로, 斤烏支의 烏은 語尾反切母韻으로 揷入시킨 것인 만치, 其有無는 問題가 되지 안는다. 예건대 三國史記 全南 珍原의 古名 丘斯珍兮를 三國志 馬韓國名으로 臼斯烏旦國이라 하고, 李勣 奏狀에는 貴旦이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원문주25▶故로 迎日의 古名 斤烏支도 單히 斤支라고도 쓴 것으로, 三國志…의 勤耆國 이와 同名이 되는 셈이다」[25]라고 하였다. 즉 迎日의 新羅時代의 名은 斤烏支로서 斤은 勤과 全然 同音, 烏는 단지 語尾反切母音으로 揷入된 것, 支는 耆와 같이 「기」 音을 表寫한 것이므로 三韓時代의 勤耆國은 이곳에 該當한다는 說이다. 氏의 이 比定은 確實히 當을 얻은 것이라고 思料되야 나도 이를 贊從하야 마지안는다.(三國史記祭祀志 中祀條에 보이는 四海의 一인 阿等邊註에 「一云斤烏兄邊 退火郡」이라 한 斤烏兄은 卽斤烏只의 誤로 只는 역시 「지」 「기」 兩音에 통한 즉, 斤烏支 그것으로 볼 수밖에 없거니와 斤烏只邊이 迎日에 屬치 아니하고 退火郡興海에 屬한 것은 그곳이 兩地 接境處에 있든 關係로 因함이 아닌가 한다. 잠간 參考로 一言하야 둔다).
(6) 難彌離彌凍國(난미리미동국)…은 신라일통시대의 單密縣(단밀현, 본 武冬彌知縣(무동미지현))인 금 경북 의성군 丹密面(단밀면) 일대에 틀림없으리라고 믿나니, 單密(단밀, 丹密(단밀))의 單(丹)(단)은 難(난)의 轉音(전음)이요, 密(밀)은 彌離(미리)에 당하고 단밀의 前稱(전칭)인 武冬彌知(무동미지)의 武冬(무동)은 바로 彌凍(미동)과 같은 말로, 거기서 유래된 이름일 것이다. 현대문주26▶(단 미지는 城保(성보) 즉 「믿」의 寫音(사음)이란 설이 있음). [a 26] 미리미동이 龍堤(용제) 혹 長堤(장제)의 뜻이리라 함은 이미 전술한 바어니와, 그 위의 難(난, 單(단) 혹 丹(단))은 무엇을 의미한 말일까. 이는 필경 저 백제국의 「難珍阿縣 一云月良」(금 鎭安郡(진안군))의 難(난), 동국의 「高山縣 一云難等良」(금 全州(전주) 高山(고산))의 難(난)과 마찬가지의 말일지니 고산의 일명이 難等良(난등량)等良(등량)은 珍阿(진아), 月良(월랑)과 같이 드라, 도래, 달래 등으로 발음하여 野坪(야평)의 뜻이 있음임을 보면 難(난)은 혹 高大(고대)를 의미하는 고어의 寫音(사음)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더 후고할 필요가 있다.
쪽수▶P122-3(六) 難彌離彌凍國…은 新羅一統時代의 單密縣(本 武冬彌知縣)인 今慶北 義城郡 丹密面一帶에 틀림없으리라고 믿나니, 單密(丹密)의 單(丹)은 難의 轉音이요, 密(밀)은 彌離(미리)에 當하고 單密의 前稱인 武冬彌知의 武冬은 바루 彌凍과 같은 말로, 거긔서 由來된 이름일 것이다. 원문주26▶(단 彌知는 城保 즉 「믿」의 寫音이란 說이 있음).[26] 彌離彌凍이 龍▶P123-1堤 혹 長堤의 義리라 함은 이미 前述한 바어니와, 그 우의 難(單 혹 丹)은 무엇을 意味한 말일까. 이는 필경 저 百濟國의 「難珍阿縣 一云月良」(今鎭安郡)의 難, 同國의 「高山縣 一云難等良」(今 全州 高山)의 難과 마찬가지의 말일지니 高山의 一名이 難等良等良은 珍阿, 月良과 같이 드라, 도래, 달래 等으로 發音하야 野坪의 뜻이 있음임을 보면 難은 혹 高大를 意味하는 古語의 寫音이 아닌가 의심한다. 그러나 더 後考할 必要가 있다.
(7) 변진고자미동국…은 선유들의 설과 같이 금 경남 固城(고성)의 땅이다. 「고성」은 신라 경덕왕 때의 개칭이요 그 이전 군명은 古自(고자)니 고자와 古資(고자)는 물론 동음동의의 말로 다 岬崎(갑기)를 의미하는 방언 「곶」 혹은 「고지」의 寫音(사음)일 것이다. 후세에서는 「곶」 「고지」의 借字(차자)에 串(곶)자를 用(용)하여, 예하면 長山串(장산곶, 長淵(장연))이니 於乙買串(어을매곶, 交河(교하))이니 甲串(갑곶, 江華(강화))이니 冬外串(동외곶, 迎日(영일))이니 하지만, 고대에는 表音的(표음적)으로 古資(고자) 古自(고자) 혹은 古次(고차, 甲比古次(갑비고차))라고도 한 일이 있었다. 다시 그 어원을 캐어보면 「곶」 「고지」는 즉 口(구)의 고어에서 나온 것 같으니, 지금도 일본어에는 口(구)를 「クチ」라고 하거니와, 고구려의 穴口郡(혈구군, 강화)을 일운 갑비고차(즉 갑곶)라 하고 동 泉井口縣(천정구현, 교하)을 일운 어을매곶이라고 함을 보면 고차니 串(곶)이니 한 말은 口(구) 혹 喙(훼)에서 나온 말로 볼 수밖에 없다甲比(갑비)는 穴(혈) 혹 峽(협)의 뜻인듯, 일본어에도 협을 カヒ라 함. 於乙買(어을매)는 泉井(천정)의 뜻. 즉 「곶」 「고지」는 본래 신체의 돌출한 口部(구부)에 대한 말로서 그것이 一轉(일전)하여 岬崎串(갑기곶)의 칭이 된 것이다. 古資彌凍國(고자미동국)인 고성은 과연 海中(해중)에 돌출한 고성반도에 위치하였으므로 일찍이 古資(고자) 古自(고자)의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며, 또 彌凍(미동)의 이름이 이에 붙은 것을 보면 이곳에도 유명한 제방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고성을 소위 오가야 혹은 육가야 중의 하나인 小伽耶(소가야) 그 곳이라 함은 삼국유사(오가야조) 이래 기록에 나타나는 바로, 더욱 여지승람(권32) 고성현 建置沿革條(건치연혁조)에는 「本伽耶國 新羅取之 置古自郡」라까지 보임으로 근거가 있는 말로 믿거니와 실제 지리상으로 보더라도 그곳은 김해 함안 등 제가야국과 접근하여 가야연맹의 일부를 지었을 것이 의심 없다. 단 소가야란 칭호는 후세 사가의 追附(추부)한 바이요 당시의 칭은 아니었을 것이며 만일 당시에 가야 혹은 가라 2자를 붙여서 부른 일이 있었다고 하면 古資(고자, 古自(고자))가야나 古資(고자, 古自(고자))가라라고 하였을 것이다.
쪽수▶P123-2 (七) 弁辰古資彌凍國…은 先儒들의 說과 같이 今慶南 固城의 地다. 「固城」은 新羅 景德王時의 改稱이요 그 以前 郡名은 古自니 古自와 古資는 勿論 同音同義의 語로 다 岬崎를 意味하는 方言 「곶」 혹은 「고지」의 寫音일 것이다. 後世에서는 「곶」 「고지」의 借字에 串字를 用하야, 例하면 長山串(長淵)이니 於乙買串(交河)이니 甲串(江華)이니 冬外串(迎日)이니 하지만, 古代에는 表音的으로 古資 古自 혹은 古次(甲比古次)라고도 한 일이 있었다. 다시 그 語源을 캐어보면 「곶」 「고지」는 卽 口의 古語에서 나온 것 같으니, 지금도 日本語에는 口를 「クチ」라고 하거니와, 高句麗의 穴口郡(江華)을 一云 甲比古次(卽甲串)라 하고 同 泉井口縣(交河)을 一云 於乙買串이라고 함을 보면 古次니 串(곶)이니 한 말은 口 혹 喙에서 나온 말로 볼 수밖에 없다甲比는 穴 혹 峽의 義인듯, 日本語에도 峽을 カヒ라 함. 於乙買는 泉井의 義. 즉 「곶」 「고지」는 본래 身體의 突出한 口部에 對한 말로서 그것이 一轉하야 岬崎串의 稱이 된 것이다. 古資彌凍國인 固城은 果然 海中에 突出한 固城半島에 位置하였으므로 일즉이 古資 古自의 名을 얻게 된 것은 當然한 일이며, 또 彌凍의 名이 이에 붙은 것을 보면 이곳에도 有名한 堤防이 있었든 것이 아닌가 한다. 固城을 所爲 五伽耶 혹은 六伽耶中의 一인 小伽耶 그곳이라 함은 三國遺事(五伽耶條) 以來 記錄에 나타나는 바로, 더욱 輿地勝覽(卷三十二)固城縣 建置沿革條에는 「本伽耶國 新羅取之 置古自郡」라까지 보임으로 根據가 있는 말로 믿거니와 실제 地理上으로 보더라도 그곳은 金海 咸安等 諸伽耶▶P124-1國과 接近하야 伽耶聯盟의 一部를 지었을 것이 의심 없다. 但 小伽耶란 稱呼는 後世史家의 追附한 바이요 當時의 稱은 아니었을 것이며 만일 當時에 伽耶 혹은 加羅 二字를 붙여서 부른 일이 있었다고 하면 古資(古自)伽耶나 古資(古自)加羅라고 하였을 것이다.
(8) 현대문주27▶변진고순시국…고 길전동오(吉田東伍) 씨와 위에 말한 점패(鮎貝) 씨는 진주의 고명 居陀(거타)와 이 古淳是(고순시)와의 音近(음근)을 전제로 하여 양자의 비정 [a 27]을 試(시)한 일이 있으나, 과연 어떠할지? 나 역시 이에 대하여는 별로 신통한 견해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아직 의문에 부치어 둔다.
쪽수▶P124-2 (八) 원문주27▶弁辰古淳是國…故 吉田東伍氏와 우에 말한 鮎貝氏는 晋州의 古名 居陀와 이 古淳是와의 音近을 前提로 하야 兩者의 比定[27]을 試한일이 있으나, 果然 어떠할지? 나 역시 이에 對하여는 別로 신통한 見解를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아직 疑問에 부치어 둔다.
(9) 冉奚國(염해국)…冉奚(염해)의 冉(염)은 전에 말한 冉路國(염로국)의 염, 鴨綠江(압록강)의 고명 鹽難水(염난수)의 염 또 東明傳說(동명전설) 중에 나타나는 庵利(엄리, 大水(대수))․掩(엄니, 泥(니)?)의 奄(엄), 掩(엄)과 동음동의의 말로 大(대, 엄)를 의미한 말이요, 奚(해, Kai)는 역시 마한의 監奚卑離國(감해비리국) 및 感奚國(감해국)의 奚(해)와 같이 개(浦(포))의 사음이니 염해는 즉 「엄개」(冉浦(염포)), 다시 말하면 大浦(대포)의 뜻이다. 그러면 저 유명한 三浦(삼포)東萊(동래) 富山浦(부산포)⦁熊川(웅천) 薺浦(제포)⦁蔚山(울산) 鹽浦(염포))의 하나인 울산의 염포도 또한 大浦(대포)의 뜻으로 그것은 바로 이 염해의 끼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삼한시대의 염해국을 지금의 울산(염포) 지방에 비정하여 둔다.
쪽수▶P124-3(九) 冉奚國…冉奚의 冉은 前에 말한 冉路國의 冉, 鴨綠江의 古名 鹽難水의 鹽 또 東明傳說 中에 나타나는 庵利(大水)․掩(泥?)의 奄․掩과 同音同義의 語로 大(엄)를 意味한 말이요, 奚(Kai)는 역시 馬韓의 監奚卑離國 及 感奚國의 奚와 같이 개(浦)의 寫音이니 冉奚는 즉 「엄개」(冉浦), 다시 말하면 大浦의 義이다. 그러면 저 有名한 三浦東萊 富山浦⦁熊川 薺浦⦁蔚山 鹽浦)의 一인 蔚山의 鹽浦도 또한 大浦의 義로 그것은 바루 이 冉奚의 끼친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야 나는 三韓時代의 冉奚國을 지금의 蔚山(鹽浦)地方에 比定하야 둔다.
(10) 현대문주28▶弁辰半路國(변진반로국)…고 길전동오 씨 및 고 나가통세 씨의 설에 의하면 [a 28] 반로의 路(로)자는 跛(파)자의 誤(오)로서, 신라의 本彼縣(본피현)이었던 금 星州(성주)의 땅이 그곳이라 한다. 路(로)와 跛(파)는 字樣(자양)이 相近(상근)하여 착오되기 쉬울뿐더러, 일본서기(계체기)에 나타나는 이 방면 국명 중에는 실제 「伴跛(반파)」란 것이 있은즉 반로는 양씨와 같이 반파(반파)의 誤(오)로 보는 편이 매우 온당할 것 같고 또 성주(읍)의 고명인 본피와 서기의 반파와의 비정은 거의 학자 간의 통설이 되여 있다. 단 주의할 것은 본피현(성주군 성주면 및 부근)은 본 신라 一利郡(일리군, 일운 里山郡(이산군))의 속현으로, 郡治(군치)는 본래 一利縣(일리현, 後改加利縣(후개가리현), 금 고령군 성산면)에 있어 경덕왕 때에는 군명을 성산이라 고치고 동시에 본피현의 명도 新安(신안)이라 고치었더니 후에 군치를 신안(본피)으로 옮기어 碧珍郡(벽진군)이라 개칭하고, 또 고려 초에는 벽진을 고쳐 京山府(경산부)라고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지리지 성산군조에 「星山郡 本一利郡(一云 里山郡)景德王改名 今加利縣 領縣四…新安縣 本本彼縣 景德王改名 今京山府」라 하고 고려사 지리지2, 京山府條(경산부조)에 「京山府 本新羅本彼縣 景德王改名新安爲星山郡領縣 後改爲碧珍郡 太祖二十三年更今名」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반파(본피)가-신라의 군현이 되기 전에는-가야연맹의 일국으로 있었던 것은, 삼국유사(권1) 오가야조에 「星山伽耶 今京山一云碧珍」의 이름이 보이고 또 여지승람 星州牧(성주목) 郡名條(군명조)에 「가야」의 일명이 보이고 동 金海都護府(김해도호부) 龜旨峯(구지봉) 오가야조에 「星州爲碧珍伽耶」란 句(구)가 있으므로써 알 수 있지만, 성산가야니 벽진가야니하는 칭호는 물론 후세의 군명으로써 追稱(추칭)한 것이요 가야시대의 본명은 아닐 것이다. 현대문주29▶금 성주군 성주면 星山(성산) 西麓(서록)에는 무수한 고분군이 산재하여 그 중 2, 3개는 연전에 총독부고적조사위원의 손에 발굴되어 다수한 귀중한 유물의 채취를 보게 되었는데 [a 29] 그 유물 중에는 토기(臺(대)⦁壺(호)⦁高坏(고배) 등) 금속장식구(金環(금환)⦁銅環(동환)⦁금제이식⦁銀製帶飾(은제대식)⦁銀製冠飾(은제관식)) 무기공구(환두도⦁直刀(직도)⦁도자⦁창신⦁斧頭(부두) 등) 기타 刀釰(도일) 鐵釘(철정) 鐵鎹(철송) 등의 철물이 나타났다. 이들은 다 반로국(가야연맹)시대의 유물로 그 시대 문화 연구의 귀중한 자료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쪽수▶P124-4(一0) 원문주28▶弁辰半路國…故 吉田東伍氏 및 故 那珂通世氏의 說에 依하면[28] 半路의 路字는 跛字의 誤로서, 新羅의 本彼縣이었든 今 星州의 地가 그곳이라 한다. 路와 跛는 字樣이 相近하야 錯誤되기 쉬울뿐더러, 日本書紀(繼體紀)에 나타나는 이 方面 國名 중에는 실제 「伴跛」란 것이 있은즉 半路는 兩氏와 같이 半跛(伴跛)의 誤로 보는 편이 매우 穩當할 것 같고 또 星州(邑)의 古名인 本彼와 書紀의 伴跛와의 比定은 거이 學者間의 通說이 되여 있다. 但 注意할 것은 本彼縣(星州郡 星州面및 附近)은 本新羅 一利郡(一云 里山郡)의 屬縣으로, 郡治는 본래 一利縣(後改加利縣, 今高靈郡 星山面)에 있어 景德王時에는 郡名을 星山이라 곷이고 同時에 本彼縣의 名도 新安이라 곷이었더니 後에 郡治를 新安(本彼)으로 옴기어 碧珍郡이라 改稱하고, 또 高麗初에는 碧珍을 곷이어 京山府라고 하게 되였다. 三國史記 地理志 星山郡條에 「星山郡 本一利郡(一云 里山郡)景德王改名 今加利縣 領縣四…新安縣 本本彼縣 景德王改名 今京山府」라 하고 高麗史 地理志二, 京山府條에 「京山府 本新羅本彼縣 景德王改名新安爲星山郡領縣 後改爲碧珍郡 太祖二十三年更今名」이라고 한 것이 즉 그것이다. 半跛(本彼)가-新羅의 郡縣이 되기 前에는-伽耶聯盟의 一國으로 있었든 것은, 三國遺事(卷一) 五伽耶條에 「星山伽耶 今京山一云碧珍」의 名이 보이고 또 輿地勝覽 星州牧 郡名條에 「伽耶」의 一名이 보이고 同 金海都護府 龜旨峯五伽耶條에 「星州爲碧珍伽耶」란 句가 있으므로써 알 수 있지만, 星山伽耶니 碧珍伽耶니하는 稱號는 勿論 後世의 郡名으로써 追稱한 것이요 伽耶時代의 本名은 아닐 것이다. 원문주29▶今星州郡 星州面 星山西麓에는 無數한 古墳群이 散在하야 그 中 二三個는 年前에 總督府古蹟調査委員의 손에 發掘되어 多數한 貴重한 遺物의 採取를 보게 되었는데[29] 그 遺物 중에는 土器(臺⦁壺⦁高坏 等) 金屬裝飾具(金環⦁銅環⦁金製耳飾⦁銀製帶飾⦁銀製冠飾) 武器工具(環頭刀⦁直刀⦁刀子⦁槍身⦁斧頭 等) 其他 刀釰 鐵釘 鐵鎹 等의 鐵物이 나타낫다. 이들은 다 半路國(伽耶聯盟)時代의 遺物로 그 時代 文化硏究의 貴重한 資料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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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我邦疆域考(弁辰考).
  2. 續海東繹史卷三(弁辰條).
  3. 東洋學報第二卷 第二號 「漢の朝鮮四郡疆域考」(其中 地名の解釋)及滿洲歷史地理 第一卷 第一編(漢代の朝鮮).
  4. 同上.
  5. 鷄林類事麗言攷四十七面.
  6. 史學雜誌 第四十一編 第四號.
  7. 日本書紀 繼體紀 二十三年條註에 보임.
  8. 三國史記 地理志 四.
  9. 高麗史 地理志 三 及 輿地勝覽 卷四十五.
  10. 北史高句麗傳.
  11. 輿地勝覽卷二十九, 聞慶縣條.
  12. 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 第一册 第一編 參照.
  13. 同上.
  14. 同上.
  15. 梁書 新羅傳에 보임.
  16. 周書 異域傳 百濟條.
  17. 三國史記 崔致遠傳.
  18. 東國史略卷一.
  19. 東國地誌(後漢書 三韓傳按說).
  20. 靑丘學叢第四號, 「全北全州及慶南昌寧の古名に就きて」 參照.
  21. 同上 第四號.
  22. 輿地勝覽卷二十六(密陽 古跡條).
  23. 本 學報 第四卷, 本論文 中 優休牟𣵠條.
  24. 朝鮮古史考(三韓考).
  25. 雜攷第二輯 上卷 九張〜十張.
  26. 輿地勝覽卷二十一(慶州 古跡條 西畿停註 所引 李詹說)及雜攷第二輯 下卷 三十八張 參照.
  27. 日韓古史斷第二編 第三章 第二節 伽耶條 及 雜攷第二輯 上卷 二十三張.
  28. 日韓古史斷第二編 第三章 第二節 伽耶條 及 朝鮮古史考(三韓考).
  29. 大正七年度古蹟調査報告第一冊 第一編 參照.






현대문주


  1. 아방강역고(변진고).
  2. 속해동역사 권3(변진조).
  3. 동양학보 제2권 제2호 「漢の朝鮮四郡疆域考(한의 조선4군 강역고)」(그 중 지명의 해석) 및 만주역사지리 제1권 제1편(한대의 조선).
  4. 동양학보 제2권 제2호 「漢の朝鮮四郡疆域考」(그 중 지명의 해석) 및 만주역사지리 제1권 제1편(한대의 조선).
  5. 鷄林類事麗言攷四十七面.
  6. 史學雜誌(사학잡지) 제41편 제4호.
  7. 日本書紀(일본서기) 繼體紀(계체기) 23년조 註(주)에 보임.
  8. 三國史記(삼국사기) 지리지 4.
  9. 고려사 지리지 3 및 輿地勝覽(여지승람) 권45.
  10. 北史高句麗傳(북사고구려전).
  11. 여지승람 권29, 문경현조.
  12. 대정7년도고적조사보고 제1책 제1편 참조.
  13. 동상.
  14. 동상.
  15. 梁書(양서) 신라전에 보임.
  16. 周書(주서) 異域傳(이역전) 백제조.
  17. 三國史記 崔致遠傳.
  18. 東國史略卷一.
  19. 東國地誌(동국지지, 후한서 삼한전按說(안설)).
  20. 靑丘學叢(청구학총) 제4호, 「全北全州及慶南昌寧の古名に就きて(전북전주급경남창녕의고명에취하여서」 참조.
  21. 동상 제4호.
  22. 여지승람 권26(밀양 고적조).
  23. 본 학보 제4권, 본 논문 중 優休牟𣵠條(우휴모탁조).
  24. 朝鮮古史考(조선고사고, 삼한고).
  25. 雜攷(잡고) 제2집 상권 9장〜10장.
  26. 여지승람 권21(경주 고적조 西畿停註(서기정주) 所引(소인) 李詹說(이첨설))및 잡고 제2집 하권 38장 참조.
  27. 日韓古史斷(일한고사단) 제2편 제3장 제2절 가야조 및 잡고 제2집 상권 23장.
  28. 일한고사단 제2편 제3장 제2절 가야조 및 조선고사고(삼한고).
  29. 대정7년도 고적조사보고 제1책 제1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