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5)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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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13일 (일) 15:14 판 (본문1: 5. 마한 및 진한 문제 (승전(承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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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5)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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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五)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6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11월
시작쪽 071쪽 종료쪽 092쪽 전체쪽 022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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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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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본문1: 5. 마한 및 진한 문제 (승전(承前))


(정) 백제의 흥기와 마한의 변천
쪽수▶P71-1 (丁) 百濟의 興起와 馬韓의 變遷
백제는 진한의 한 요소를 이루던 부여씨족(夫餘氏族, 유이족)에 의하여-진한의 땅에-소창(所創)된 나라로 먼저 진한의 제 부락을 통일하고 나아가 마한의 본토(Proper)를 잠식하여 마침내 진마(辰馬) 2체의 융합을 실현하게 되었으므로, 진마 문제 특히 마한의 강역 변천을 구명하자면 또한 이 백제국의 흥기 발전에 대하여 일고하지 아니할 수 없다. 백제의 흥기를 말하자면 또 먼저 그 시조에 관한 전설을 음미하고 동시에 그 건국 연대에 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백제 시조에 대하여는 삼국의 타 2국 즉 고구려(高句麗) 신라(新羅)의 시조에 관한 전설과 같이 그렇게 단순치 아니하여 그 설이 구구하니 이를 분류하면 대개 (1) 시조온조설(始祖溫祚說) (2) 시조비류설(始祖沸流說) (3) 시조도모설(始祖都慕說) (4) 시조구태설(始祖仇台說) 등이 있다.
쪽수▶P71-2 百濟는 辰韓의 一要素를 이루든 夫餘氏族(流移族)에 依하야-辰韓의 地에-所創된 나라로 먼저 辰韓의 諸部落을 統一하고 나아가 馬韓의 本土(Proper)를 蠶食하야 마츰내 辰馬二體의 融合을 實現하게 되었으므로, 辰馬問題 特히 馬韓의 疆域變遷을 究明하자면 또한 이 百濟國의 興起發展에 就하야 一考하지 아니할 수 없다. 百濟의 興起를 말하자면 또 먼저 그 始祖에 關한 傳說을 吟味하고 同時에 그 建國年代에 關하야 考察할 必要가 있다. 그런데 百濟始祖에 對하여는 三國의 他二國 卽 高句麗 新羅의 始祖에 關한 傳說과 같이 그러케 單純치 아니하야 其說이 區區하니 이를 分類하면 대개 (一) 始祖溫祚說 (二) 始祖沸流說 (三) 始祖都慕說 (四) 始祖仇台說 등이 있다.
(1) 시조온조설은 다음의 시조비류설과 함께 순전히 동방 사서에 의하여 전하는 설로,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紀) 이래 대개 정설로 취한 자이니 거기에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朱蒙到卒本 聚越郡女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 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蒿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국호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란 것이 즉 그것이며, 다음
쪽수▶P72-1(一) 始祖溫祚說은 다음의 始祖沸流說과 함께 純全히 東方史書에 依하야 傳하는 說로, 三國史記 百濟本紀 以來 대개 定說로 취한 者이니 거기에 百濟始祖溫祚王 其父鄒牟 或云朱蒙 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 扶餘王無子 只有三女子 見朱蒙 知非常人 以第二女妻之 未幾 扶餘王薨 朱蒙嗣位 生二子 長曰沸流 次曰溫祚或云朱蒙到卒本 聚越郡女生二子 及朱蒙在北扶餘所生子來 爲太子 沸流溫祚恐爲太子所不容 遂與烏干馬黎等十臣南行 百姓從之者多 遂至漢山 登負兒嶽 望可居之地 沸流欲居於海濱 十臣諫曰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蒿岳 南望沃澤 西阻大海 其天險地利 難得之勢 作都於斯 不亦宜乎 沸流不聽 分其民 歸彌鄒忽以居之 溫祚都河南慰禮城 以十臣爲輔翼 國號十濟 是前漢成帝鴻嘉三年也 沸流以彌鄒土濕水 不得安居 歸見慰禮 都邑鼎定 人民安泰 遂慙悔而死 其臣民皆歸於慰禮 後以來時百姓樂從 改號百濟 其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 故以扶餘爲氏」란 것이 즉 그것이며,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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