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4)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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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4)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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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四)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5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07월
시작쪽 092쪽 종료쪽 118쪽 전체쪽 027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5. 마한 및 진한 문제 (승전(承前))


(을) 위지동이전 진한조 기사의 검토와 진한의 기원 및 실체
쪽수▶P92-1 (乙) 魏志東夷傳辰韓條記事의 檢討와 辰韓의 起源及實體
마한 문제-특히 그 강역 및 진한과의 관계-는 진한 문제의 고찰을 따라 더 구명될 것이 있으므로, 차회(此回)에 있어서는 오로지 진한 문제 에 대하여 논난(論難)하려고 하거니와, 이(진한) 문제를 해석함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기(下記) 「위지(魏志)」 (동이전(東夷傳)) 진한조(辰韓條) 기사에 대한 심각한 검토가 있어야 될 것이다.
쪽수▶P92-2 馬韓問題-특히 그 疆域 及 辰韓과의 關係-는 辰韓問題의 考察을 따라 더 究明될 것이 있으므로, 此回에 있어서는 오로지 辰韓 問題에 대하야 論難하려고 하거니와, 이(辰韓 )問題를 解釋함에는 무엇보다도 먼저 下記 󰡔魏志󰡕 (東夷傳) 辰韓條 記事에 대한 深刻한 檢討가 있어야 될 것이다.
辰韓 在馬韓之東 其耆老傅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 與之 有城柵 其言語 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쪽수▶P92-3

辰韓 在馬韓之東 其耆老傅世自言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 與之 有城柵 其言語 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爲秦韓者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위 기사를 다시 알기 쉽게 분해하면
쪽수▶P93-1 위 記事를 다시 알기 쉽게 分解하면
(1) 진한은 그 위치가 마한의 동쪽에 있다는 것
쪽수▶P93-2 (一) 辰韓은 그 位置가 馬韓의 東쪽에 있다는 것
(2) 진한 기로(耆老)의 전설에 (이르되), 옛적의 망인(亡人, 망명인)이 진역(秦役)을 피하여 한국에 왔더니, 마한이 그 동계의 땅을 베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마한과 달리 성책이 있다는 것)
쪽수▶P93-3 (二) 辰韓 耆老의 傳說에 (이르되), 옛적의 亡人(亡命人)이 秦役을 避하야 韓國에 왔더니, 馬韓이 그 東界의 地를 베어 주었다는 것 (그리고 馬韓과 달리 城柵이 있다는 것)
(3) 또 진한의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아니하여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라 하고 적(賊)을 구(寇)라 하고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서로 불러 주(徒)라 하여, 진인(秦人)과 유사함이 있고 비단 연제(燕齊)의 명호물색(名號物色)뿐만 아니라는 것
쪽수▶P93-4 (三) 또 辰韓의 言語는 馬韓과 같지 아니하야 國을 邦이라 하고 弓을 弧라 하고 賊을 寇라 하고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서루 불러 徒라 하야, 秦人과 類似함이 있고 非但 燕齊의 名號物色뿐만 아니라는 것
(4) 진한인이 낙랑인을 지칭하여 ‘아잔(阿殘)’이라고 하니, 아(阿)는 동방어에 아(我)란 말로 ‘낙랑인은 본래 그들(진한인)의 잔여인이라’는 뜻에 불과하다는 것
쪽수▶P93-5 (四) 辰韓人이 樂浪人을 指稱하야 「阿殘」이라고 하니, 阿는 東方語에 我란 語로 「樂浪人은 본래 그들(辰韓人)의 殘餘人이라」는 뜻에 不過하다는 것
(5) 찬자 시대에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쪽수▶P93-6 (五) 撰者時代에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6) 진한은 처음에 6국이더니 뒤에 조금 나누어져서 12국이 되었다는 것
쪽수▶P93-7 (六) 辰韓은 처음에 六國이더니 후에 조곰 나누어져서 十二國이 되었다는 것
이다. 그런데 위 기재 중에는 찬자 혹은 원기자의 선인견에 의한 부회와 억해가 섞여 있음으므로 이를 그대로 승인하여서는 아니될 것이요, 불가불 분석 비판을 요한다. 첫째 진한의 내력을 말하는 제2단 기재 중에 「古之亡人 避秦役來適韓國」이라 한 진역(秦役) 2자가 일대 의문의 글자이니, 이것이 과연 진한 기로의 설을 그대로 틀림없이 옮겨 놓은 것인지? 혹은 기자의 어떠한 주관적 오해에서 부회 변작(變作)된 것인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위지보다 뒤에 된 후한서(後漢書)에는 위의 구절을 한층 더 개필하여 「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云云」이라 하고 또 위의 (위지 기사의) 3단과 5단과를 직접 연락시키어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이라고까지 명언하였다. 진서(晋書) 동이전 진한조에도(후한서의 것을 승습(承襲)하여) 이와 같은 기사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종래의 사가는 진한이라면 의례히 이를 진(秦) 망인의 후예로 관념하게 되었다. 위지에는 이와 같이 명시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그러한 의미의 어취(語趣)가 없는 것은 아니다.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 한 것은 물론 사실이나, 그것이 진한의 언어가 진인(秦人)과 같다는 이유에서 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진(辰)과 진(秦)이 음(音) 상동(相同)하여 진한을 혹 진한(秦韓)이라고도 하였다 하면 몰라도, 진인(秦人) 혹은 진어(秦語)와 유사함이 있어서 그와 같이 이름하였다고 함은 너무도-글자에 구니(拘泥)된 억설(臆說)로-곧이 들리지 않는 견강부회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위지의 ‘진역(秦役)’ 2자도 실상 그것이 진한 기로의 설 그대로라고 하는 것보다, 차라리 기자 혹은 수사자(修史者)가 「진한의 언어가 진인(秦人)과 근사(近似)하고 또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 즉 진한은 진(秦)의 고역 혹은 가역(苛役)을 피하여 동래(東來)한 중국인의 부락이리라」는 그릇된 선입적 논리에서 이를 변작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 아닌가. (후한서 진서 등의 기사는 이 위지의 것을 승와(承訛) 전와(轉訛)한 제2차, 3차의 사료이므로 더구나 문제 거리가 되지 않는다.) 즉 진한기로의 전설은-추측이지만-본시 “고지망인(古之亡人)이 난(難)(혹은 난(亂))을 피하여 한국에 왔었다 운운”한 데 불과한 것을 수사자가 이상의 선입견을 가지고 그와 같이 부회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만일 위지의 진역(秦役) 2자를 살리어 후한서와 같이 해석하여 진한을 진망인(秦亡人)의 후라고 한다 하면, 그 언어 및 기타는-바로 진한인(秦漢人) 그대로일 것이니-진인(秦人)과 유사하다고 말할 배가 아닐 것이며, “有似秦人”이니 “有似秦語”니 한 것은 대단히 약한 말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더구나 그 (진인(秦人)과) 유사하다고 열거한 진한어(辰韓語)가-국(國)을 방(邦)이라하고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상호(相呼)하여 도(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이-다 과연 진한인의 본래의 국어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또한 문제 거리다. 중국인 혹은 그 유이민의 후예가 아니라도, 중국과의 정치, 문화, 경제 상의 구원한 교섭이 있던 주위 민족에 있어 특히 한학의 교양을 가진 지식 계급의 일상용어 중에, 허다한 유의 한어가 사용된 예는 무엇보다도 금일의 조선어나 일본어 중의 그것을 보아 더 잘 알겠지만, 고대 반도 북부 지방에 한(내지 위진(魏晋))의 군현이 개치(開置)되어 있었을 때에-그 군현 내의 토민은 물론이요-그 주위에 접근한 여러 민족의 언어습속상에 끼친 중국문화의 영향이 어떠하였을 것은 넉넉히 상상할 수 있다 (위지 동이전 한조에 “其北方近郡(樂浪帶方) 諸國 差曉禮俗云云”이라 한 것도 중국 예속의 영향을 말한 것이다). 진한과 역사지리상으로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고 생각되는 백제의 언어풍속에 관한 양서(梁書) 동이전(백제전(百濟條))의 기사를 보면,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帽曰冠 曰復衫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云”이라 하여, 이 역시 진한(秦韓, 辰韓)의 유속(遺俗)이라 한다 하고 또 “其言參諸夏”라고 하였지만, 관(冠)이니 복삼(複衫)이니 곤(褌)이니 하는 말들은 본래의 고유 한어가 아니요 즉 외래 한어의 영향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또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실린 고려방언(高麗方言) 중에 천왈천(千曰千)이라 하고 만왈만(萬曰萬)이라 하고 해왈해(海曰海) 강왈강(江曰江) 계왈계(溪曰溪)라 하고 인왈인(人曰人) 주왈주(主曰主) 병왈군(兵曰軍)이라 하고 복두왈복두(幞頭曰幞頭) 모자왈모(帽子曰帽) 포왈포(袍曰袍) 대왈요대(帶曰腰帶)라 하고 청왈청(靑曰靑) 흑왈흑(黑曰黑) 적왈적(赤曰赤) 홍왈진홍(紅曰眞紅) 비왈비(緋曰緋)라 하고 인왈인(印曰印) 차왈차(車曰車) 탁자왈식상(卓子曰食床) 임왈임(林曰林)이라 하고 묵왈묵(墨曰墨) 비왈비(轡曰轡) 기왈기(旗曰旗) 일왈장도(釰曰長刀)라 한다(기타 생략)는 것도 다 외래어임은 물론이거니와, 외래어 중에도 상용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는 것은 또한 사실이니 이상 제어 중에도 그러한 것이 있을 줄로 안다. 중국의 문화를 여지 없이 흠모할 시대에, 중국인과의 공적 혹은 사적 교제에 있어 자아의 이속을 될수록 감추려 하던 지식계급의 태도로는 불상용의 외래어(한어)라도 상용의 것처럼 표시한 일도 있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특히 고려치 아니하고 기사 그대로 신용하려 하여서는 안된다. 그리고 보면 진한어에 국(國)을 방(邦)이라 하고 궁(弓)을 호(弧), 적(賊)을 구(寇), 행주(行酒)를 행상(行觴)이라 하고 상호하여 다 도(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은, 실상 진한의 고유국어가 아니라 이러한 외래의 한어류로 그 중에는 역시 실제에 상용하지 않는 자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동시에 “其言語不與馬韓同”이란 것은 실상 이러한 어류를 보고 내린 말이므로 거기에도 작량할 필요가 있다. 진한이 북방에서 유이해 온 족속의 사회인 만큼, 그 언어가 마한과 다소의 이동은 있었을지언정 전혀 별계통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필자는 일찍이 이 문제에 관하여 자산(自山) 안확(安廓)씨와도 (좌담적으로) 토론한 적이 있었는데, 자산의 설은 “궁위호(弓爲弧)의 호(弧)는 조선어 활(弓)의 사음(寫音)이요 적위구(賊爲寇)의 구(寇)는 ‘괴’의 사음이 아닌가, ‘괴’란 말은 지금에는 고양이(猫)의 일명이 되고 말았지만 속(俗)에 도적을 쫓을 때에 ‘괴’라고 하는 것을 보아 고대 조선어에 그러한 말이 있었을 것 같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매우 흥미를 느끼어 “그러면 상호개위도(相呼皆爲徒)란 도(徒)도 조선어 들(等)의 이름이 아닌가”하는 말을 한 일도 있었지만 이를 다시 생각하여 볼 때 너무도 천착에 기운 감이 있을뿐더러 다른 ‘방(邦)’과 ‘행상(行觴)’에 관하여는 그런 유의 해석이나마 허하지 아니하므로 결국은 도로(徒勞)에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하여 지금 와서는 나는 이러한 천착적 해석보다도 차라리 이를 상기 양서의 백제어례(百濟語例)라던지 계림유사의 고려방언(高麗方言) 중 위에서 인용한 제 어례와 유를 같이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편이 온당하다고 생각되는 동시에, 그 열거한 어례 중에는 불상용의 것이 혼재하였으리라고 중언한다. 어떻든 진한인은 나의 소견으로는 진한인(秦漢人)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한 별족이지만, 그 유이 이전 이후를 막론하고 중국문화의 영향을 비교적 심각히 받아 지식계급에는 일찍부터 중국식의 예속도 다소 알게 되고 또 한자의 사용, 한어류의 명호가 상당히 행하였던 것은 의심없는 사실이다. 위지의 “有似秦人”이니 “非但燕齊之名物”이니 한 것을 보아도 그 얼마나 중국문화에 물들었던가를 상상하여 남음이있다. 단 위지(내지 그 이후 사서)에 진한에 관하여 이와 같이 “有似秦人” 또는 “避秦役”이니 하여 진(秦)자를 연해 쓴것은, 진한을 진(秦) 망인의 부락으로 그릇 관념한데 기인한 바이며, 또 이렇게 그릇 관념하게 된 까닭은 전술한 바와 같이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서칭한 데서 말미암은 듯하나, 진한을 진한(秦韓)이라고도 한 것은 진한(辰秦) 2자의 음이 상통하므로 인한 이외에는 다른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 동시에 진한인을 진인(秦人)의 여류(餘流)나 한인의 파류(派流)로 볼 이유도 없는 것이다.
쪽수▶P93-8 이다. 그런데 위 記載 중에는 撰者 혹은 原記者의 先人見에 의한 附會와 臆解가 서끼어 있음으므로 이를 그대로 承認하여서는 아니될 것이요, 不可不 分析批判을 요한다. 첫째 辰韓의 來歷을 말하는 第二段記載 중에 「古之亡人 避秦役來適韓國」이라 한 秦役二字가 一大疑問의 글짜이니, 이것이 果然 辰韓耆老의 說을 그대로 틀림없이 옮기어 논 것인지? 혹은 記者의 어떠한 主觀的 誤解에서 附會 變作된 것인지 생각해 볼 問題이다. 魏志보다 후에 된 後漢書에는 위의 句節을 한층 더 改筆하야 「秦之亡人 避苦役 適韓國云云」이라 하고 또 위의 (魏志記事의) 三段과 五段과를 直接 連絡시키어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이라고까지 明言하였다. 晋書東夷傳辰韓條에도(後漢書의 것을 承襲하야) 이와 같은 ▶P941 記事를 보여준다. 그리하야 從來의 史家는 辰韓이라면 依例히 이를 秦 亡人의 後裔로 觀念하게 되였다. 魏志에는 이와 같이 明示하지는 아니하였지만, 그래도 그러한 意味의 語趣가 없는 것은 아니다. 辰韓을 或云 秦韓이라고 한 것은 물론 事實이나, 그것이 辰韓의 言語가 秦人과 같다는 理由에서 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안는다. 辰과 秦이 音相同하야 辰韓을 혹 秦韓이라고도 하였다하면 몰라도, 秦人 或은 秦語와 相似함이 있어서 그와 같이 이름하였다고 함은 너무도-글짜에 拘泥된 臆說로-고지 들리지 안는 牽强附會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魏志의 「秦役」 二字도 실상 그것이 辰韓耆老의 說 그대로라고 하는 것보다, 차랄이 記者 或은 修史者가 「辰韓의 言語가 秦人과 近似하고 또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한 即 辰韓은 秦의 苦役 或은 苛役을 避하야 東來한 中國人의 部落이리라」는 그릇된 先入的 論理에서 이를 變作한것이라고 보는 편이 妥當할 것이 아닌가. (後漢書 晋書等의 記事는 이 魏志의 것을 承訛轉訛한 第二次 三次의 史料이므로 더구나 問題거리가 되지 안는다) 即 辰韓故老의 傳說은-推測이지만-본시 「古之亡人이 難(或은亂)을 避하야 韓國에 왔었다 云云」한데 不過한 것을 修史者가 如上의 先入見을 가지고 그와 같이 附會한 것이 아니었든가 한다. 만일 魏志의 秦役二字를 살리어 後漢書와같이 解釋하야 辰韓을 秦亡人의 後라고 한다 하면, 그 言語 및 其他는-바루 秦漢人 그대로일 것이니-秦人과 類似하다고 말할 배가 아닐 것이며, 「有似秦人」이니 「有似秦語」니 한 것은 대단히 弱한 말이라고 하지 안으면 아니된다. 더구나 그 (秦人과) 類似하다고 列擧한 辰韓語가-國을 邦이라하고 弓을 弧, 賊을 寇,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相呼하야 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이-다 果然 辰韓人의 本來의 國語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또한 問題거리다. 中國人 或은 그 流移民의 後裔가아니라도, 中國과의 政治 文化 經濟上의 久遠한 交涉이 있던 周圍民族에 있어 특히 漢學의 敎養을 가진 知識階級의 日常用語 中에, 許多▶P95한 類의 漢語가 使用된 예는 무엇보다도 今日의 朝鮮語나 日本語 中의 그것을 보아 더 잘 알겠지만, 古代 半島北部地方에 漢(乃至 魏晋)의 郡縣이 開置되어 있었을 때에-그 郡縣 內의 土民은 물론이요-그 周圍에 接近한 諸民族의 言語習俗上에 끼친 中國文化의 影響이 어떠하였을 것은 넉넉이 想像할 수 있다 (魏志東夷傳韓條에 「其北方近郡(樂浪帶方) 諸國 差曉禮俗云云」이라 한 것도 中國禮俗의 影響을 말한 것이다). 辰韓과 歷史地理上으로 密接한 關係를 가젓다고 생각되는 百濟의 言語風俗에 關한 梁書東夷傳(百濟條)의 記事를 보면, 「今言語服章 略與高驪同………帽曰冠 曰復衫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云」이라 하야, 이 역시 秦韓(辰韓)의 遺俗이라 한다 하고 또 「其言參諸夏」라고 하였지만, 冠이니 複衫이니 褌이니 하는 말들은 本來의 固有韓語가 아니요 即 外來漢語의 影響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또 鷄林類事에 실린 高麗方言 中에 千曰千이라 하고 萬曰萬이라 하고 海曰海 江曰江 溪曰溪라 하고 人曰人 主曰主 兵曰軍이라 하고 幞頭曰幞頭 帽子曰帽 袍曰袍 帶曰腰帶라 하고 靑曰靑 黑曰黑 赤曰赤 紅曰眞紅 緋曰緋라 하고 印曰印 車曰車 卓子曰食床 林曰林이라 하고 墨曰墨 轡曰轡 旗曰旗 釰曰長刀라 한다(其餘省略)는 것도 다 外來語임은 물론이어니와, 外來語 中에도 常用하는 者와 그러치 못한 者가 있는 것은 또한 事實이니 以上 諸語 中에도 그러한 것이 있을 줄로 안다. 中國의 文化를 餘地 없이 欽慕할 時代에, 中國人과의 公的 或은 私的 交際에 있어 自我의 夷俗을 될수록 감추려하든 知識階級의 態度로는 不常用의 外來語(漢語)라도 常用의 것처럼 表示한 일도 있었을 것이므로, 이러한 것을 특히 考慮치 아니하고 記事 그대로 信用하려 하야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보면 辰韓語에 國을 邦이라 하고 弓을 弧, 賊을 寇, 行酒를 行觴이라 하고 相呼하야 다 徒라고 한다는 그 말들은, 실상 辰韓의 固有國語가 아니라 이러한 外來의 漢語類로 其中에는 역시 實際에 常用하지 안는 者도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同時에 「其言語不與馬韓同」이란 것은 실상이 ▶P96 러한 語類를 보고 내린 말이므로 거기에도 酌量할 必要가 있다. 辰韓이 北方에서 流移해온 族屬의 社會인만치, 그 言語가 馬韓과 多少의 異同은 있었을지언정 全혀 別系統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안는다. 筆者는 일즉이 이 問題에 관하야 自山安廓氏와도 (坐談的으로) 討論한적이 있었는데, 自山의 說은 「弓爲弧의 弧는 朝鮮語 활(弓)의 寫音이요 賊爲寇의 寇는 「괴」의 寫音이 아닌가, 「괴」란 말은 지금에는 고양이(猫)의 一名이 되고 말았지만 俗에 盜賊을 쫓을 때에 「괴」라고 하는 것을 보아 古代 朝鮮語에 그러한 말이 있었을 것같다」고한다. 이 말을 들을때 나는 매우 興味를 늣기어 「그러면 相呼皆爲徒란 徒도 朝鮮語 들(等)의 謂가 아닌가」하는 말을 한 일도 있었지만 이를 다시 생각하여 볼 때 너무도 穿鑿에 기운 感이 있을뿐더러 다른 「邦」과 「行觴」에 關하여는 그런 類의 解釋이나마 許하지 아니하므로 結局은 徒勞에 도라가고 말았다. 그리하야 지금와서는 나는 이러한 穿鑿的解釋보다도 차랄이 이를 上記 梁書의 百濟語例라든지 鷄林類事의 高麗方言 中 上引의 諸語例와 類를같이 하는 것으로 解釋하는 편이 穩當하다고 생각되는 同時에, 그 列擧한 語例 中에는 不常用의 것이 混在하였으리라고 重言한다. 어떠튼 辰韓人은 나의 所見으로는 秦漢人과는 全혀 系統을 달리한 別族이지만, 그 流移 以前 以後를 莫論하고 中國文化의 影響을 比較的 深刻히 받어 知識階級에는 일즉부터 中國式의 禮俗도 多少 알게 되고 또 漢字의 使用, 漢語流의 名號가 相當히 행하였든 것은 의심없는 事實이다. 魏志의「有似秦人」이니 「非但燕齊之名物」이니 한 것을 보아도 그 얼마나 中國文化에 물들었든가를 想像하야 남음이있다. 但 魏志(乃至 그 以後 史書)에 辰韓에 관하야 이와 같이 「有似秦人」 또는 「避秦役」이니 하야 秦字를 연해 쓴것은, 辰韓을 秦亡人의 部落으로 그릇 觀念한데 基因한 바이며, 또 이러케 그릇 觀念하게 된 所以는 前述한 바와 같이 辰韓을 秦韓이라고도 書稱한 데서 말미암은 듯하나, 辰韓을 一云秦韓이라고 한 것은 辰秦二字의 音이 相通함으로 因한 以外에는 다른 ▶P97-1理由를 發見할 수 없다. 同時에 辰韓人을 秦人의 餘流나 漢人의 派流로 볼 理由도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의 “名樂浪人爲阿殘”이란 아잔(阿殘)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해석할 것인가. 위지 찬자(혹은 그 이전 기사자)의 해석으로는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기자의 주관적 억해에서 나온 말인 듯 하므로 도저히 그대로 신용하기는 어렵다. 첫째 막연하게 동방인이라 한 것도 우습지만-이는 눌러보아 진한인을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아(阿)가 동방어에 아(我)의 뜻이라는 것이 암만해도 의심을 자아낸다. 阿(아)가 我의 이름일 것 같으면 한자를 빌릴 때에 왜 동음동훈인 아(我)자를 빌리지 아니하고 부자연하게 이훈인 아(阿)자를 취하였느냐 하는 것이 一의문인 동시에 위의 해석을 곤란케 하는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아잔의 잔(殘)을 단순히 잔여의 뜻으로만 해석한 것이 나는 부당한 양으로 안다. (설명 견후) 살피건대 수사자는 진한인을 어디까지라도 진한인(秦漢人)과 동족시하려는 선입견이 있을뿐더러, 진(辰)과 진(秦)이 진한(辰韓)에 대하여 통용됨과 한가지, 아(阿)와 아(我)도 음 상동하여 혼용된 걸로 관념함이 있어, 드디어 (막연하게) “東方人名我爲阿”란 (그릇된) 명제 하에 아잔을 “아(我)의 잔여인”이란 뜻으로 그릇 추단한 것이 아닌가 한다. 선유(선유) 성해응(成海應)(호 연경재(硏經齋))과 같은 이는 아잔에 대하여 일설을 세우되 현대문주1▶“今俗 卑殘人 呼以羅殘 盖阿與羅相似而訛傳也”[a 1]라 하여, 硏經齋全集(成海應著) 故事類(少華鳳俗攷) 조선어의 「나즌」(비천)이란 말로써 아잔의 뜻을 풀려고 하였다. 즉 아잔은 羅殘(나)의 와전이리라는 설인데, 물론 이 설에는 곧 찬종하기 어려우나 저 위지 기사의 설을 승인하지 아니한 점에 있어서는 보통 선유와 동일에 말할 이가 아니다. 나의 과문으로는 선유 중에 성 연경재 외에 아잔에 대하여 별로 이러한 사설을 내린 이도 없으므로써다. 그러면 아잔은 결국 어떠한 의미의 말일까. 나로써 이를 살피면 아잔이란 말이 기위 진한인의 대낙랑인(對樂浪人)의 칭인즉, 적어도 아(阿)는 낙랑의 음의 일을 취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아니한가. 즉 아(阿)는 낙랑의 낙(樂)에 대한 음으로, 낙(樂)은 라 행음이 아니라 아 행음이었던가 한다. 낙랑은 현대문주2▶‘낙랑(樂良)’ [a 2] 현대문주3▶혹은 ‘낙라(樂羅)’[a 3]라고도 한곳이 있지만, 그것은 낭(浪)과 랑(良)과 라(羅)가 음 상통함에 기인된 바이거니와 사견으로는 낙랑(良)은 곧 阿良(아라 혹은 알라) 혹은 아라(阿羅)에 대한 아어적(雅語的) 음역이라고 본다. ‘아랑(阿良)’, ‘아라(阿羅)’가 동방어에 무엇을 의미한 말인가는 신중히 고려할 필요가 있지만 이는 필경 변진(弁辰)의 안사국(安邪國) 아나(阿那)⦁안라(安羅)⦁阿尸良(알라), 신라 상성군(商城郡)의 1정(停)인 관아랑(官阿良)을 북아랑(北阿良)이라고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말로 「고마」와 같이 고대에 흔히 있던 지명인 듯하다. 중국서는 일찍부터 낙랑의 낙을 낙(洛)음과 같이 발음하여온 일파가 있었던 모양인 듯하여 현대문주4▶ 당의 안사고(顔師古)도 “樂音洛浪音狼”[a 4]이라고 하였지만 원래 낙의 음이 「락」 외에 「악」또는 「요」라고 하는 음도 있는즉, 낙랑의 원음이 반드시 「락랑」이었으리라고는 보증하기 어렵다. 조선서는 종래 낙랑을 역시 「락랑」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또한 「악랑」이라고 음하는 이도 있으니, (필자가 유년시에 서당에서 동몽선습(童蒙先習)을 수업했을 때에 낙랑을 역시 그런 음으로 배운 기억이 난다) 이는 마치 같은 한사군중의 하나인 현토(玄菟)의 토(菟)를 「도」 혹은 「토」로, 고구려 말기의 영웅 개소문(蓋蘇文)의 개(蓋)를 「개」 혹은 「합」으로, 또 후백제의 주인 견훤(甄萱)의 견(甄)을 「견」 혹은 「진」으로 발음하는 이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어니와, 낙랑을 「악랑」이라고 읽는 것이 결코 무식하거나 무리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도리어 그렇게 읽는 것이 나는 가한 양으로 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씨도 일찍이 이러한 설을 취하여 낙랑의 고음(古音)은 「악랑」 「아리양」 현대문주5▶ 혹은 「알랑」 [a 5]이었으리라고하였는데, 낙을 아 행음의 차자(借字)로 인(認)하는데는 절대 찬성이다. 어떻든 낙랑은 아랑(阿良)의 대음(對音)으로, 阿良(아라)는 저 변진 20여국 중의 하나인 안아(安邪)(阿那(아나)⦁安羅(안라)⦁阿尸良(아시랑))와 동일한 어음일 것이니, 이를 「아냐」 「안야」 「아나」 「알라」 등으로도 발음한 듯하며, 실제 「라」음은 「나」 「냐」 「야」의 제음과 통용되는 예가 옛날에 많다. 서라벌(徐羅伐)을 서나벌(徐那伐) 혹은 서야벌(徐耶伐)이라 함과, 가라(加羅)(가락(駕洛)⦁가랑(加良))를 구사(狗邪) 혹은 가야(伽耶)라 함과 같음은 그것의 저명한 예이다. 고대 일본인이 한의 훈을 「アヤ」 한인을 「アヤヒト」, 한직(漢織)을 「アヤハトリ」 혹은 (혈직(穴織)이라 쓰고) 「アナハトリ」라고도 한 것은 또한 저명한 사실이거니와, 이 「アヤ」 「アナ」야 말로 ‘낙랑’의 고음에 관하여 중요한 결정적 암시를 주는 자로 인식되나니 속히 말하면 이는-나의 소견으로는-본시 한 본토의 이름이 아니라 한의 동방 군현의 중추인 낙랑(아랑)의 지칭인 것이 거의 의심없는 까닭이다. 즉 「アヤ」 「アナ」는 워낙은 낙랑(아랑)에 대한 칭호이던 것이 뒤에 점점 확대되어 (광의화하여) 낙랑 한인의 본국인 한까지도 그렇게 훈칭(訓稱)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 씨는 「アヤ」 「アナ」를 변진의 일국인 안사(安邪) 현대문주6▶즉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咸安)의 고명에 대한 지칭이라고 주장하였는데 [a 6], 그 지리적 방위에 있어서는 나의 설과 큰 경정(逕庭)이 있지만 어음적 설명에 있어서는 피차에 공통됨이 많으니 그것은 상술함과 같이 낙랑과 안사가 어음 상으로는 일치되는 까닭이다). 이에 의하여 ‘낙랑’의 고음의 본색은 더욱 명료하게 들어나진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즉 아잔의 아는 분명히 낙랑(아랑)의 낙(아)에 대한 음인 것을 잘 알 수 있거니와, 다음의 잔(殘)의 뜻은 또 무엇이냐 하면, 이는 해석하기에 별로 큰 곤란을 느끼지 아니한다. 잔은 곧 한자 그대로의 뜻을 가진 것이니, 잔의 한자 뜻은 잔여 잔얼(殘孼)의 뜻 외에 적, 잔해, 잔흉, 잔악, 쇠잔 등의 뜻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고 보면 아잔은 ‘아랑잔적(阿良殘賊)’의 약칭 즉 ‘낙랑적‘낙'랑놈’의 뜻으로 진한인이 낙랑 한인을 적개시하여 불렀던 것이라고 볼 수 밖게 없다. 이는 마치 고구려 호태왕(好太王)(광개토왕(廣開土王))비에 백제를 ‘백잔(百殘)’ 또는 ‘이잔(利殘)’이라고 서칭한 예와 같으니, 백잔은 단지 백제의 동음이사(同音異寫)로만 볼 것이 아니라 역시 ‘백제잔적(百濟殘賊)’ ‘백제놈’의 뜻을 함유한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이잔은 백제가 특히 아리수(阿利水)(한강의 원명) 유역을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아리수의 적’이란 뜻으로 그렇게 별명한 것도 같고 또는 아리수 외에 고리성(古利城), 오리성(奧利城), 간궁리성(幹弓利城), 어리성(於利城), 야리성(也利城), 탁지리성(柝支利城) 등의 리(利)자가 붙은 백제지명(호태왕 비문에 보임)이 많았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었던가도 싶다. 아잔 백잔 이잔 등은 다 동일한 유의 어법으로 각기 적국에 대한 악의의 칭호이었던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자신되며, 이에 의하여 진한과 낙랑 한인과의 관계가 적대관계로 있었던 것을 또한 잘 알 수 있다. 그런즉 아잔에 대한 위지 찬자의 해설과 나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큰 경정(逕庭)이 있게 되었다.
쪽수▶P97-1 그러면 다음의 「名樂浪人爲阿殘」이란 阿殘은 어떠한 뜻을 가지고 있는 말로 解釋할 것인가. 魏志撰者(或은 그 以前 記事者)의 解釋으로는 「東方人名我爲阿 謂樂浪人本其殘餘人」이라고 하였으나, 이 역시 記者의 主觀的 臆解에서 나온 말인 듯 함으로 到底히 그대로 信用하기는 어렵다. 첫재 漠然하게 東方人이라 한 것도 우습지만-이는 눌러보아 辰韓人을 말한 것이라고 할지라도-阿가 東方語에 我의 義라는것이 암만해도 疑心을 자아낸다. 阿(아)가 我의 謂일 것 같으면 漢字를 借할 때에 왜 同音同訓인 我字를 借치 아니하고 不自然하게 異訓인 阿字를 取하였느냐 하는 것이 一疑問인 同時에 위의 解釋을 困難케 하는 所以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또 阿殘의 殘을 單純히 殘餘의 義로만 解釋한 것이 나는 不當한 양으로 안다. (說明見後) 按컨대 修史者는 辰韓人을 어데까지라도 秦漢人과 同族視하려는 先入見이 있을뿐더러, 辰과 秦이 辰韓에 對하야 通用됨과 한가지, 阿와 我도 音相同하야 混用된걸로 觀念함이 있어, 드듸어 (漠然하게) 「東方人名我爲阿」란 (그릇된) 命題下에 阿殘을 「我의 殘餘人」이란 뜻으로 그릇 推斷한 것이 아닌가 한다. 先儒 成海應(號硏經齋)과 같은 이는 阿殘에 對하야 一說을 세우되 원문주1▶「今俗 卑殘人 呼以羅殘 盖阿與羅相似而訛傳也」라 하야,[1] 朝鮮語의 「나즌」(卑賤)이란 말로써 阿殘의 뜻을 풀려고 하였다. 即 阿殘(아잔)은 羅殘(나)의 訛傳이리라는 說인데, 물론 이 설에는 곧 贊從하기 어려우나 저 魏志 記事의 설을 承認하지 아니한 點에 있어서는 普通先儒와 同日에 語할 이가 아니다. 나의 寡聞으로는 先儒 中에 成硏經齋 外에 阿殘에 對하야 別로 이러한 私說을 내린 이도 없으므로써다. 그러면 阿殘은 結局 어떠한 意味의 말일까. 나로써 이를 按하면 阿殘이란 語가 旣爲 辰韓人의 對樂浪人의 稱인즉, 적어도 阿는 樂浪의 音의 一을 取한 것이라고 보는 편이 훨신 自然스럽지 아니한가. 即 阿는 樂浪의 樂에 대한 音으 ▶P98로, 樂은 라 行音이 아니라 아 行音이었든가 한다. 원문주2▶樂浪은 「樂良」[2] 원문주3▶或은 「樂羅」[3]라고도 한곳이 있지만, 그것은 浪과 良과 羅가 音相通함에 基因된 바이어니와 私見으로는 樂浪(良)은 곧 阿良(아라 或은 알라) 혹은 阿羅에 對한 雅語的 音譯이라고 본다. 「阿良」 「阿羅」가 東方語에 무엇을 意味한 말인가는 愼重히 考慮할 必要가 있지만 이는 畢竟 弁辰의 安邪國 一云阿那⦁安羅⦁阿尸良(알라), 新羅商城郡의 一停인 官阿良 一云北阿良과 마찬가지의 말로 「고마」와 같이 古代에 흔히 있던 地名인 듯하다. 中國서는 일즉부터 樂浪의 樂을 洛音과 같이 發音하야온 一派가 있었든 모양인 듯하야 원문주4▶唐의 顔師古도 「樂音洛浪音狼」이라고 하였지만[4] 元來 樂의 音이 「락」 外에 「악」또는 「요」라고 하는 音도 있는즉, 樂浪의 原音이 반듯이 「락랑」이었으리라고는 保證하기 어렵다. 朝鮮서는 從來 樂浪을 역시 「락랑」이라고 하는 이도 있지만, 또한 「악랑」이라고 音하는 이도 있으니, (筆者가 幼年時에 書堂에서 童蒙先習을 受業햇슬 때에 樂浪을 역시 그런 音으로 배운 記憶이 난다) 이는 마치 같은 漢四郡中의 一인 玄菟의 菟를 「도」 或은 「토」로, 高句麗 末期의 英雄 蓋蘇文의 蓋를 「개」 或은 「합」으로, 또 後百濟의 主인 甄萱의 甄을 「견」 或은 「진」으로 發音하는 이가 있는 거와 마찬가지어니와, 樂浪을 「악랑」이라고 읽는 것이 결코 無識하거나 無理한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안코, 도리어 그러케 읽는 것이 나는 可한 양으로 안다. 원문주5▶六堂 崔南善氏도 일즉이 이러한 설을 取하야 樂浪의 古音은 「악랑」 「아리양」 或은 「알랑」이었으리라고[5] 하였는데, 樂을 아 行音의 借字로 認하는데는 絶對 贊成이다. 어떠튼 樂浪은 阿良의 對音으로, 阿良(아라)는 저 弁辰 二十餘國中의 一인 安邪(阿那⦁安羅⦁阿尸良)와 同一한 語音일 것이니, 이를 「아냐」 「안야」 「아나」 「알라」 等으로도 發音한 듯하며, 실제 「라」音은 「나」 「냐」 「야」의 諸音과 通用되는 例가 옛날에 많다. 徐羅伐을 徐那伐 혹은 徐耶伐이라 함과, 加羅(駕洛⦁加良)를 狗邪 或은 伽耶라 함과 같음은 그것의 著名한 예이다. 古代 日本人이 漢의 訓을 「アヤ」 ▶P99漢人을 「アヤヒト」, 漢織을 「アヤハトリ」 혹은 (穴織이라 書하고) 「アナハトリ」라고도 한 것은 또한 著名한 事實이어니와, 이 「アヤ」 「アナ」야 말로 「樂浪」의 古音에 關하야 重要한 決定的 暗示를 주는 者로 認識되나니 速히 말하면 이는-나의 所見으로는-本是 漢 本土의 謂가 아니라 漢의 東方郡縣의 中𨋀인 樂浪(阿良)의 指稱인것이 거의 疑心없는 所以다. 即 「アヤ」 「アナ」는 원악은 樂浪(阿良)에 對한 稱呼이던 것이 後에 점점 擴大되어 (廣義化하야) 樂浪 漢人의 本國인 漢까지도 그러케 訓稱하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원문주6▶(鮎貝房之進氏는 「アヤ」 「アナ」를 弁辰의 一國인 安邪 卽今의 慶尙南 道咸安의 古名에 對한 指稱이라고 主張하였는데,[6] 그 地理的 方位에 있어서는 나의 說과 큰 逕庭이 있지만 語音的 說明에 있어서는 彼此에 共通됨이 많으니 그것은 上述함과같이 樂浪과 安邪가 語音上으로는 一致되는 까닭이다). 이에 依하야 「樂浪」의 古音의 本色은 더욱 明瞭하게 들어나진다고 할 수 있다. 然則 阿殘의 阿는 分明히 樂浪(阿良)의 樂(阿)에 對한 音인 것을 잘 알 수 있거니와, 다음의 殘의 義는 또 무엇이냐 하면, 이는 解釋하기에 별로 큰 困難을 늣기지 아니한다. 殘은 곧 漢字 그대로의 뜻을 가진 것이니, 殘의 漢字義는 殘餘 殘孼의 뜻 外에 賊 殘害 殘凶 殘惡 衰殘 等의 義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그리고 보면 阿殘은(●●●) 「阿良殘賊」의(●●●●●) 略稱(●●) () 「樂浪賊」(●●●) 「樂浪놈」의(●●●●) 義로(●●) 辰韓人이(●●●) 樂浪漢人을(●●●●●) 敵愾視하야(●●●●●) 불렀든(●●●) 것이라고(●●●●) () () 밖게(●●) 없다(●●). 이는 마치 高句麗 好太王(廣開土王)碑에 百濟를 「百殘」 또는 「利殘」이라고 書稱한 例와 같으니, 百殘은 단지 「百濟」의 同音異寫로만 볼것이 아니라 역시 「百濟殘賊」 「百濟놈」의 義를 含有한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利殘은 百濟가 特히 阿利水(漢江의 原名) 流域을 中心으로 삼었기 때문에 「阿利水의 賊」이란 뜻으로 그러케 別名한 것도 같고 또는 阿利水 外에 古利城 奧利城 幹弓利城 於利城 也利城 柝支利城 等의 利字가 붙은 百濟地名(好太王碑文에 보임)이 많엇기 때문에 그러케 일컬었든가도 싶다. 阿殘 百殘 ▶P100-1利殘 等은 다 同一한 類의 語法으로 각기 敵國에 대한 惡義의 稱呼이었든 것은 움직일수없는 事實로 自信되며, 이에 依하야 辰韓과 樂浪漢人과의 關係가 敵對關係로 있었든 것을 또한 잘 알수있다. 그런즉 阿殘에 對한 魏志撰者의 解說과 나의 그것과의 사이에는 큰 逕庭이 있게 되였다.
1 다음에 또 논난할 것은 위의 위지 기사의 말단에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이란 12국 3자에 대하여다. 이 기재가 진한인 부락의 발전 과정을 의미한 것임은 의심 없으나, “稍分爲十二國”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을 수 없으니-진한 초기에 있어서 부락은 위 기사와 같이 6국에 불과하였는지 모르지만-후한말 삼국초 한예(韓濊)가 한참 강성하여 (뒤에서 보임) 낙랑 대방과 충돌을 만들던 시대에는 진한인 부락의 수는 12국에만 그치지 아니하였던 까닭이다. 위의 정시(正始) 연간에 한(진한) 위(낙랑, 대방) 충돌의 결과, 한의 나해(那奚) 등 수십 국이 위에 항복한 사실이 있었다 함은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소위 나해 등 수십 국이란 대개 진한인 소속의 부락들이므로, 이것을 보더래도 “稍分爲十二國”이라 함은 부당한 설이다. 적어도 “稍分爲數十國”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그러면 수사자는 어떠한 소견으로 12국이란 분명한 수효를 거시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또 일어난다. 그릇된 기사에도 (말미암은바) 그렇게 된 까닭은 있을 것이다. 동서 변진조에 “弁辰亦十二國”이라 하고 그 아래에 변진자를 붙인 국읍명 12동명 첩출자를 제하고와 변진자를 붙이지 아니한 국읍명동명 첩출자를 제하고 12를 혼합 열거한 후 “弁辰韓合二十四國………其十二國屬辰王”이라 한 것을 보면-물론 여기의 “其十二國”은 변진자를 붙이지 아니한 12국의 지칭이니, 찬자는 즉 변진 20여 국 중 진왕(마한왕)에 종속된 사로(경주) 등 12국(기저국(己柢國)⦁불사국(不斯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염해국(冉奚國)⦁군미국(軍彌國)⦁여담국(如湛國)⦁호로국(戶路國)⦁주선국(州鮮國)⦁마연국(馬延國)⦁사로국(斯盧國)⦁우중국(優中國))을 진한 소속의 것으로 오해하였던 모양이다. 진왕은 진한의 뜻도 아니요 진한왕의 뜻도 아니요 진국(마한)왕의 뜻이라 함과, 또 진한은 진국(마한)의 일우를 점거한 북방유이부족의 사회로 독립의 주를 가지지 못하던 것이라 함은 앞서 누설(屢說)한 바이지만, 수사자는 진왕을 진한왕의 뜻으로 오해하고 또 변진의 칭을-일개 독립적 고유명사로 처리하면서 일방으로는 자면(字面)에 끌리어 변한, 진한의 합칭으로 관념하여 드디어 위와 같은 위필(僞筆)을 농(弄)하였을뿐더러, 일보를 나아가(변진조에) “弁辰與辰韓雜居”라는 대망언을 발하기까지 하였다. 이 위필과 망발로 인하여 진한의 지리적 방위가 종래 어떻게(어림없이) 오인되어 왔는가는 뒤에 장차 말하려 하거니와, 오래된 기록이라고 반드시 죄다 신빙할 가치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오랫동안 믿어 오던 설이라 하여 그대로 쫒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당시의 대세와 사정을 두루 살피고 우리의 (밝은) 이성과 (풍부한) 상식에 소(訴)하여 가히 신종(信從)할만 한 것이면 어디까지라도 신종하여야 하고, 그러하지 못한 것이면 또한 어디까지라도 냉정하고 엄숙한 태도를 취하여야한다.
쪽수▶P100-2一다음에 또 論難할것은 우의 魏志 記事의 末段에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이란 十二國 三字에 對하여다. 이 記載가 辰韓人 部落의 發展 過程을 意味한 것임은 無疑하나, 「稍分爲十二國」에 對하여는 疑心이없을 수 없으니-辰韓 初期에 있어서의 部落은 右 記事와 같이 六國에 不過하였는지 모르지만-後漢末 三國初 韓濊가 한참 强盛하야 (見後文) 樂浪 帶方과 衝突을 生하든 時代에는 辰韓人 部落의 數는 十二國에만 끄치지 아니하였든 까닭이다. 魏의 正始 年間에 韓(辰韓) 魏(樂浪帶方) 衝突의 結果, 韓의 那奚 等 數十國이 魏에 降服한 事實이 있었다 함은 앞서도 말한 바이지만, 所謂 那奚等 數十國이란 대개 辰韓人 所屬의 部落들이므로, 이것을 보더래도 「稍分爲十二國」이라 함은 不當한 설이다. 적어도 「稍分爲數十國」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러면 修史者는 어떠한 所見으로 十二國이란 分明한 數爻를 擧示하였는가 하는 疑問이 또 이러난다. 그릇된 記事에도 (말미암은바) 所以然은 있을 것이다. 同書 弁辰條에 「弁辰亦十二國」이라 하고 그 아래에 弁辰字를 붙인 國邑名 十二同名 疊出者를 除하고와 弁辰字를 붗이지 아니한 國邑名同名 疊出者를 除하고 十二를 混合 列擧한후 「弁辰韓合二十四國………其十二國屬辰王」이라 한 것을 보면-勿論 여긔의 「其十二國」은 弁辰字를 붗이지 아니한 十二國의 指稱이니, 撰者는 즉 弁辰二十餘國中 辰王(馬韓王)에 從屬된 斯盧(慶州)等 十二國(己柢國⦁不斯國⦁勤耆國⦁難彌離彌凍國⦁冉奚國⦁軍彌國⦁如湛國⦁戶路國⦁州鮮國⦁馬延國⦁斯盧國⦁優中國)을 辰韓 所屬의것으로 誤解하였든 모양이다. 辰王은 辰韓의 義도 아니요 辰韓王의 義도 아니요 辰國(馬韓)王의 義라 함과, 또▶P100-2辰韓은 辰國(馬韓)의 一隅를 占居한 北方流離部族의 社會로 獨立의 主를 가지지 못하든 것이라 함은 앞서 屢說한 바이지만, 修史者는 辰王을 辰韓王의 義로 誤解하고 또 弁辰의 稱을-一個獨立的固有名詞로 處理하면서 一方으로는 字面에 끌리어 弁韓 辰韓의 合稱으로 觀念하야 드듸어 右와 같은 僞筆을 弄하였을뿐더러, 一步를 進하야(弁辰條에) 「弁辰與辰韓雜居」라는 大妄言을 發하기까지 하였다. 이 僞筆과 妄發로 因하야 辰韓의 地理的 方位가 從來 어떠케(어림없이) 誤認되어 왔는가는 後에 장차 말하려 하거니와, 오래된 記錄이라고 반듯이 죄다 信憑할 價値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 오래동안 믿어 오든 說이라 하야 그대로 좇을 必要도 없는 것이다. 當時의 大勢와 私情을 周察하고 우리의 (밝은) 理性과 (豊富한) 常識에 訴하야 可히 信從할만 한 것이면 어디까지라도 信從하야야 하고, 그러하지 못한 것이면 또한 어디까지라도 冷靜하고 嚴肅한 態度를 取하야야한다.
이상은 주로 위지 진한조 기사 중 신용하기 어려운 부분에 대하여 축조(逐條) 비판을 가한 바이지만, 기타 정말 사실(史實)로 인(認)할 만한 부분의 기재라야 너무도 소략에 지나쳐, 그것만으로는 진한족의 유래 그 지리적 위치 등 중요 문제가 의연히 막연한 가운데 있게 되므로 나는 불가불 다른 기사와 전설을 참고하여 이를 설명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거니와, 여기에 제일 먼저 설명을 요할 중요한 기사는 전기(前記) 진한 기로의 전설에 관한 것이다.
쪽수▶P101-2 以上은 主로 魏志 辰韓條 記事 중 信用하기 어려운 部分에 就하야 逐條 批判을 加한 바이지만, 其他 정말 史實로 認할 만한 部分의 記載라야 너무도 踈略에 지나쳐, 그것만으로는 辰韓族의 由來 그 地理的位置 等 重要 問題가 依然히 漠然한 가운데 있게 되므로 吾人은 不可不 다른 記事와 傳說을 參考하야 이를 說明하지 안으면 아니 되겠거니와, 여긔에 第一 먼저 說明을 요할 重要한 記事는 前記 辰韓 耆老의 傳說에 關한 것이다.
진한 기로의 전설이라고 적은 위지의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의 일절은, 진한족의 유래를 말하는 중요한 기사임에 불구하고, 진역 2자의 수사자의 위필로 인하여 종래 사가의 오해를 일으키었지만, 그 두 글자가 수사자의 위필임을 깨달은 나는 거기에 조금도 집착할 필요는 없는 것이며, 나는 전술한 바와 같이 피진역(避秦役)을 단지 히 피난(혹은 난)」에 대한 개필로 보는 동시에, 고지망인(古之亡人)을 진한인(秦漢人)과는 전연 계통을 달리한 족속으로 보거니와, 그러하다고 하면 위의 진한 기로의 전설은 대체 어느 시대의 어떠한 사실을 가리켜 이름인가? 이것이 일로부터의 논제이다. 이 전설은 북방에서 남방 즉 진국 방면(후일 소위 마한)에 피난한 사상의 어떤 저명한 망인의 사실을 말한 것임은 물론이거니와, 이 방면에의 망인에 관한 사실로 저명한 자를 들면 대개 셋이 있다. 즉 그 하나는 위지에 “淮(準)……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云云”이라고 전하는 조선왕(朝鮮王) 준(準)의 남천(南遷) 사실이요, 그 둘은 위략(魏略)에 “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云云”이라 한 조선왕 우거(右渠)의 신(臣) 역계경(歷谿卿) 이하 2,000여 호의 진국 이주 사실이요, 그 셋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하는 백제의 시조 온조(溫祚)에 관한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자의 각각이 서로 시대를 달리하고 또 그 중의 전 이자(二者)는 동일한 조선 방면의 망인으로 순연히 종족을 같이 함에 반하여 후자는 부여족의 일파로 전 이자와는 다소 종락을 달리한 자이지만, 삼자가 진한이란 유이족의 사회를 구성함에 있어서는 다 같이 중요한 요소를 이루었던 것이라 함은, 나의 주장하는 신견해의 하나로 더욱 ‘한’이란 명칭이 조선왕 준의 교거부락-즉 자호한왕(自號韓王)이라고 한 사실-에서 기원하였다 함과 준의 본성이 기씨(箕氏)가 아니라 한씨(韓氏)였다고 함은, 앞서 제3권에 상론하였던 터이거니와, 진한 기로의 전설은 곧 이 준왕의 남래 사실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닌가 한다.-물론 그중의 (내적 한국의) ‘한국’ 또는 ‘마한’의 칭은 후일의 것으로 추칭(追稱)한 것일지니-다시 말하면 진한 기로의 고지망인 운운은 조선왕 (한)준이 위만(燕人(연인)이라고 하나, 본래는 遼東(요동)의 토인인듯?)에게 공탈(攻奪)되어 좌우의 궁인들을 이끌고 남으로 해중(海中) 즉 진국에 달아와 진(辰)의 용허를 받아 그 동계(동북계)의 땅을 점거하였던 사실의 이름이 아닌가 한다. “馬韓割其東界地與之”는 망인의 거주지역으로 동계를 획정하여 주었다는 것일지요 정치상으로 영히 할여하였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하여 진한의 유래와 기원을 이 준왕의 망명 부락에 구하는 창견(創見)을 주장하게 되었다. 단 후한서(後漢書)(동이전 마한조)에 이 준왕에 관하여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이라 한 것은 기술한 바와 같이 위지의 기사를 윤색 개필한 것이며, 준의 남분 후 조선의 유민들이 그 뒤를 이어 진국에 망래한 자가 많았을 것은 혹 상상할 수 있는 사실이지만, 준이-일패도지(一敗塗地)의 세로 창황히-남분할 때에 여중수천인(餘衆數千人)이나 되는 수효를 이끌고 와서 더구나 마한(진국)과 같은 대국을 공파하여 진왕에 대신하여 자왕(自王)하였다 함은 대세 상으로 보아 또는 상식에 소(訴)하여 도저히 믿기 어려운 사실이다. 종래 동방의 사가들은 이 후한서의 개필에 의하여 준의 입거 땅을 진왕의 치부인 월지국(月支國)으로 인정함이 보통이었고 또 월지(月支)의 위치를 마한 후기의 수부인 금 익산(益山)(건마국(乾馬國))에 비정하기를 예사로 하였으나, 이는 더욱 이와증와(以訛增訛)의 무가치한 설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준이 진의 일변지(一邊地)에 입거하여 자칭한왕 혹은 자립 위왕(爲王)한 것이라면 몰라도, 진의 중심지나 전국토를 탈거하여 왕이 되었다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준왕의 망명이 창황하였던 일사로써 넉넉히 추리할 수있는 일이며, 현대문주7▶ 또 그 망명이 어떻게 창황하였던가는 위만의 준왕에 대한 습격이 불의 창졸(倉卒)에 출(出)한 일사[a 7]로도 짐작되지만, 현대문주8▶그것보다도 준의 자(子)와 기타 친속이 미처 왕을 따라오지 못하고 고국(조선)에 남아있게 된 그 사실[a 8]이 이를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위지의 ‘기후절멸(其後絶滅)’이니 후한서의 ‘준후멸절(準後滅絶)’이니 한 것도, 왕자 및 친속이 고국에 유재(留在)하여 그 뒤를 계승할 인물이 없었던 까닭이니, 준(한씨) 왕실의 명맥은 준왕의 죽음과 함께 끊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종래 학자의 대개는 준왕 사후에도 얼마 동안의 전세(傳世)와 역년(歷年)이 있었던 양으로 여겨-심지어 기씨족보(奇氏族譜)에는 9세 202년이란 역수와 왕호까지 분명히 들어 놓았지만 그것은 비판할 거리도 되지 못하며, ‘기후절멸’이라 ‘준후멸절’이라하면 준왕의 후사가 곧 끊어졌다는 말로 해석하지 아니하면 안된다. 현대문주9▶선유 중에도 정약용(丁若鏞) 한진서(韓鎭書)와 같은 이는 역시 이러한 해석을 내려 “準之爲馬韓王止於本身 未嘗傳世而歷久也" [a 9]라 하였으나, 준을 마한의 왕으로 보는 전통적 유견(謬見)에는 또한 벗어나지를 못하였다.
쪽수▶P101-3 辰韓 耆老의 傳說이라고 적은 魏志의 「古之亡人 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의 一節은, 辰韓族의 由來를 말하는 重要한 記事임에 不拘하고, 「秦役」 二字의 修史者의 僞筆로 因하야 從來 史家의 誤解를 이르키었지만, 그 두 글짜가 修史者의 僞筆임을 깨다른 吾人은 거긔에 조금도 執着할 必要는 없는 것이며, 나는 前述한 바와 같이 「避秦役」을 單▶P102히 「避難(혹은亂)」에 대한 改筆로 보는 同時에, 「古之亡人」을 秦漢人과는 全然 系統을 달리한 族屬으로 보거니와, 그러하다고 하면 우의 辰韓耆老의 傳說은 대체 어느 時代의 어떠한 史實을 가르처 이름인가? 이것이 일로부터의 論題이다. 이 傳說은 北方에서 南方 卽 辰國方面(後日 所謂 馬韓)에 避難한 史上의 어떤 著名한 亡人의 史實을 말한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이 方面에의 亡人에 關한 史實로 著名한 者를 들면 대개 셋이 있다. 即 其一은 魏志에 「淮(準)……爲燕亡人衛滿所攻奪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云云」이라고 傳하는 朝鮮王 準의 南遷 事實이요, 其二는 魏略에 「初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右渠不用 東之辰國 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云云」이라한 朝鮮王 右渠의 臣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의 辰國 移住 事實이요, 其三은 三國史記에 傳하는 百濟의 始祖 溫祚에 關한 傳說이라고 할 수 있다. 三者의 各各이 서로 時代를 달리하고 또 그 중의 前二者는 同一한 朝鮮 方面의 亡人으로 純然히 種族을 같이 함에 反하야 後者는 夫餘族의 一派로 前二者와는 多少 種落을 달리한 者이지만, 三者가 辰韓이란 流移族의 社會를 構成함에 있어서는 다같이 重要한 要素를 이루었든 것이라 함은, 나의 主張하는 新見解의 하나로 더욱 「韓」이란 名稱이 朝鮮王 準의 僑居部落-即 自號韓王이라고한 事實-에서 起源하였다함과 準의 本姓이 箕氏가 아니라 韓氏였다고 함은, 앞서 第三卷에 詳論하였든 터이어니와, 辰韓 耆老의 傳說은 곧 이 準王의 南來 事實을 가리처 말한 것이 아닌가한다.-勿論 그중의 (來適韓國의) 「韓國」 또는 「馬韓」의 稱은 後日의 것으로 追稱한 것일지니-다시 말하면 辰韓者老의 「古之亡人」云云은 朝鮮王 (韓)準이 衛滿(燕人이라고 하나, 本來는 遼東의 土人인듯?)에게 攻奪되여 左右의 宮人들을 익글고 南으로 海中 即 辰國에 다라와 辰의 容許를 받아 그 東界(東北界)의 地를 占居하였든 事實의 謂가 아닌가 한다. 「馬韓割其東界地與之」는 亡人의 居住地域으로 東界를 劃定하야 주었다는 것일지요 政治上으로 永히 割與하였다는 것은 아▶P102닐 것이다. 그리하야 辰韓의 由來와 起源을 이 準王의 亡命部落에 求하는 創見을 主張하게되였다. 但 後漢書(東夷傳馬韓條)에 이 準王에 關하야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 準後滅絶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이라한 것은 旣述한 바와 같이 魏志의 記事를 潤色改筆한 것이며, 準의 南奔後 朝鮮의 遺民들이 그 뒤를 이어 辰國에 亡來한 者가 만헛슬 것은 혹 想像할 수 있는 事實이지만, 準이-一敗塗地의 勢로 蒼黃히-南奔할 때에 餘衆數千人이나 되는 數爻를 익글고 와서 더구나 馬韓(辰國)과 같은 大國을 攻破하야 辰王에 대신하야 自王하였다 함은 大勢上으로 보아 또는 常識에 訴하야 到底히 믿기 어려운 事實이다. 從來 東方의 史家들은 이 後漢書의 改筆에 依하야 準의 入居地를 辰王의 治府인 月支國으로 認定함이 普通이었고 또 月支의 位置를 馬韓後期의 首府인 今益山(乾馬國)에 比定하기를 例事로 하였으나, 이는 더욱 以訛增訛의 無價値한 說로 돌려 보낼 수밖에 없다. 準이 辰의 一邊地에 入居하야 自稱韓王 혹은 自立爲王한 것이라면 몰라도, 辰의 中心地나 全國土를 奪居하야 王이 되였다고는 想像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準王의 亡命이 蒼黃하였든 一事로써 넉넉이 推理할 수있는 일이며, 원문주7▶또 그 亡命이 어떠케 蒼黃하였든가는 衛滿의 準王에 대한 襲擊이 不意倉卒에 出한 一事로도[7] 짐작되지만, 원문주8▶그것 보담도 準의 子와 其他 親屬이 미처 王을 따라오지 못하고 故國(朝鮮)에 남아있게 된 그 事實이[8] 이를 雄辯으로 말하고 있다. 魏志의 「其後絶滅」이니 後漢書의 「準後滅絶」이니 한 것도, 王子 及 親屬이 故國에 留在하야 그 뒤를 繼承할 人物이 없었든 까닭이니, 準(韓氏)王室의 命脈은 準王의 死와 함께 끈어지고 말았든 것이다. 從來 學者의 대개는 準王 死後에도 얼마 동안의 傳世와 歷年이 있었든 양으로 역이어-심지어 奇氏族譜에는 九世 二百二年이란 曆數와 王號까지 分明히 들어 노았지만 그것은 批判할거리도 되지못하며, 「其後絶滅」이라 「準後滅絶」이라하면 準王의 後嗣가 곧 끈어졌다는 말▶P103-1로 解釋하지아니하면 아니된다.원문주9▶先儒中에도 丁若鏞 韓鎭書와 같은 이는 역시 이러한 解釋을 내리어 「準之爲馬韓王止於本身 未嘗傳世而歷久也」라[9] 하였으나, 準을 馬韓의 王으로보는 傳統的謬見에는 또한 버서나지를 못하였다.
요컨대 준은 진국의 중심지에 들어와 마한왕이 되었거나 또는 그 사후에 전세, 역년이 있었던 것이 아니요, 단지 진국의 일우에 내적(來適)하여 진왕의 용인(혹은 보호)하에 일 교거부락을 형성하고 한왕의 호를 자칭하다가-후사없이-여생을 마친데 불과하였던 것이다. 준의 후는 비록 멸절하였다 하더라도 그 부하의 뒤는 오히려 연면(連綿) 번식하였을 것이며, 또 준의 사망 전후를 통하여 조선 방면으로부터 유이해 들어오는 준의 유민들도 많았을 것이므로, 한왕의 부락자체는 의연히 계속되는 동시에 한왕의 제사를 봉하는 자도 있었을것이다. 과연 위지에 “其(準)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고 한 것을 보면, 이 기사 당시까지도 한왕을 봉사하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 부락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일대는 진국의 중심지로부터는 다소 떨어져 있는 변계의 땅으로 북방에서 유이 망명하여 오는 부중(部衆)을 용납하기에 가장 적의한 지방이었으리라 함은 전에도 말한 바이거니와, 이런 까닭으로 북방에서 정치적, 경제적 대변동이 있을 때마다 그 방면의 유망민은 (집단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의례히 이 지방에 밀려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우거 시대의 조선상 역계경 이하 2,000여 호의 이민단의 내주 지점도 역시 (진국의 변계인)이 한왕 부락의 소재 지역 내지 그 부근에 불외(不外)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동시에 이 방면 ‘유이부족(流移部族)’의 사회는 이 유민단(流民團)의 내왕에 인하여 훨씬 팽대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때 이 이민군의 호수가 과연 표시한 숫자와 꼭 같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떻든 다수한 부중의 천동(遷動), 말하자면 일부 민족의 이동으로 볼만한 주의할 사실이었다. 때는 ‘우거미파시(右渠未破時)’라 하였으므로 우거의 조선이 아직 한 무제(武帝)의 군에게 토멸되기 전 얼마 안된 때였을 것이니, 역계경의 ‘동지진국(東之辰國)’은 비단 우거왕에게 간언(한정(漢廷)에 거항치 말자는 간언인듯)이 불용되어서 뿐만 아니라 장차 한군의 침입을 예상하고 결행한 것일지며, 또 그 뒤를 따라온 민중들도 역시 불원한 장래의 외난(外難)을 피하고 현하(現下) 대한(對漢) 방비 등의 고역을 면하기 위하여 이주한 것일 것이다. 이와 같이 우거 미파(未破) 시에도(오히려) 다수한 민중의 이동이 있었거던, 황차(况且) 우거의 조선이 한군에게 파멸되어 그 땅에 한의 군현이 개치되던 당시와 그 뒤에 있어서랴. 한인 세력의 침입이 심각할수록 북방 조선민의 이동의 물결은 더욱 심하였을 것이다. 이 물결을 홀로 받아들인 진의 일우에는 유망부족으로써 충만하였을 것이고, 낙랑에 내주한 한인의 이 방면에 대한 주시도 차차 커졌을 줄로 안다. 이 유망 부족의 사회는 선입한 한왕의 유민과 후래한 우거 유민이 자연 서로 잡거의 상태를 이뤘을 것이지만 종족 및 습속에 있어서는 전후 유민이 별다를 것이 없고 다같은 조선 방면의 유민들이었다. 해중 ‘한’의 칭은 이미 한왕의 시대로부터 시작되어, 그 후 이 유망부족의 사회를 통칭 ‘한’ 혹은 ‘한인’이라 하게되고 또 뒤에는 ‘진한’이란 명칭까지도 생기게 되었으니, ‘진한’이란말은 본 학보 제3권 졸고에도 말한 바와 같이 진국의 한-즉 진국의 일우를 점거한 유이족의 한이란 뜻으로 처음 낙랑의 한인이 이에 대하여 지은 특별 명칭인듯하다. 그러면 진한의 칭은 어느 때로부터 생기었느냐 하면, 나는 저 한의 군현 설치 후 얼마 오래되지 아니한 때의 사실이라고 보며, 뒤에 이를 진한(秦韓)이라고도 하것은-마치 신지(臣智)를 진지(秦支)라고도 함과 한가지-순연히 진진(辰秦) 두 음이 상통함으로써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을 것이다.
쪽수▶P104-2 要컨대 準은 辰國의 中心地에 들어와 馬韓王이 되었거나 또는 그 死後에 傳世 歷年이 있었든 것이 아니요, 단지 辰國의 一偶에 來適하야 辰王의 容認(혹은 保護)下에 一僑居部落을 形成하고 韓王의 號를 自稱하다가-後嗣없이-餘生을 맟인데 不過하였든 것이다. 準의 後는 비록 滅絶하였다 하드라도 그 部下의 後는 오히려 連綿繁殖하였을 것이며, 또 準의 死亡前後를 通하야 朝鮮方面으로부터 流移해 들어오는 準의 遺民들도 만헛슬 것이므로, 韓王의 部落自體는 依然히 繼續되는 同時에 韓王의 祭祀를 奉하는者도 있었을것이다. 果然 魏志에 「其(準)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고 한 것을 보면, 이 記事 當時까지도 韓王을 奉祀하는 者가 있었든 모양이다. 이 部落을 中心으로한 地域의 一帶는 辰國의 中心地로부터는 多少 떠러저 있는 邊界의 地로 北方에서 流移 亡命하여 오는 部衆을 容納하기에 가장 適宜한 地方이었으리라 함은 前에도 말한 바이어니와, 이런 까닭으로 北方에서 政治的 經濟的 大變動이 있을 때마다 그 方面의 流亡民은 (集團的으로 혹은 部分的으로) 依例히 이 地方에 밀려 들어오게 되었을 것이다. 右渠時代의 朝鮮相 歷谿卿以下 二千餘戶의 移民團의 來住地點도 역시 (辰國의 邊界인)이 韓王部落의 所在地域 乃至 그 附近에 不外하였을 것이라고 생각되며, 同時에 이 方面 「流移部族」의 社會는 이 流民團의 來往에 因하야 훨신 澎大되었을 것이라고 推測한다. 이때 이 移民群의 戶數가 果然 表示한 數字와 꼭 같았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어떠튼 多數한 部衆의 遷動, 말하자면 一部民族의 移動으로 볼만한 注意할 事實이었다. 때는 「右渠未破時」라 하였으므로 右渠의 朝鮮이 아직 漢 武帝의 軍에게 討滅되기 前 얼마 안된 때였을 것이니, 歷谿卿의 「東之辰國」은 非但 右渠王에게 諫言(漢廷에 拒抗치 말자는 諫言인▶P105-1듯)이 不用되어서 뿐만 아니라 장차 漢軍의 侵入을 豫想하고 決行한 것일지며, 또 그 뒤를 따라온 民衆들도 역시 不遠한 將來의 外難을 避하고 現下 對漢防備等의 若役을 免하기 爲하야 移住한 것일것이다. 이와 같이 右渠 未破時에도(오히려) 多數한 民衆의 移動이 있었거든, 况且 右渠의 朝鮮이 漢軍에게 破滅되어 그 땅에 漢의 郡縣이 開置되던 當時와 그 後에 있어서랴. 漢人 勢力의 侵入이 深刻할수록 北方 朝鮮民의 移動의 물ㅅ결은 더욱 甚하였을것이다. 이 물ㅅ결을 홀로 받어들인 辰의 一隅에는 流亡部族으로써 充滿하였을것이고, 樂浪에 來住한 漢人의 이 方面에 대한 注視도 차차 커졌을 줄로 안다. 이 流亡部族의 社會는 先入한 韓王의 遺民과 後來한 右渠遺民이 自然 서로 雜居의 狀態를 일웠을 것이지만 種族及習俗에 있어서는 前後遺民이 別달을 것이 없고 다같은 朝鮮方面의 遺民들이었다. 海中 「韓」의 稱은 이미 韓王의 時代로부터 始作되어, 그후 이 流亡部族의 社會를 通稱 「韓」 혹은 「韓人」이라 하게되고 또 後에는 「辰韓」이란 名稱까지도 생기게 되었으니, 「辰韓」이란말은 本學報 第三卷 拙稿에도 말한 바와 같이 辰國의 韓-即 辰國의 一隅를 占據한 流移族의 韓이란 듯으로 처음 樂浪의 漢人이 이에 對하야 지은 特別 名稱인듯하다. 그러면 辰韓의 稱은 어느 때로부터 생기었느냐 하면, 나는 저 漢의 郡縣 設置 後 얼마 오래되지 아니한 때의 事實이라고 보며, 後에 이를 秦韓이라고도 하것은-마치 臣智를 秦支라고도 함과 한가지-純然히 辰秦 兩音이 相通하므로써인 外에 다른 理由가 없을 것이다.
전한 말 후한 초로부터는 ‘한’ 내지 ‘진한’의 칭이 제법 확대되어 진국의 본체(주체)에 대하여까지도 그렇게 호칭함을 예사로 하였던 모양이니, 저 위략에 보이는 왕망(王莽) 지황(地皇) 연간의 진한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에 관한 설화를 참고하면 더욱 잘 알 것이다(본 학보 제1권 졸문 참조). 즉 그 설화 중에 나타나는 ‘진한’, ‘한인’ 또는 단히 ‘한’, ‘진’ 등의 칭은 다 진국의 주체를 지칭한 것으로, 진(주체)과 한(객체)의 칭이 혼용된 일례로 볼 수 있다. 한의 칭이 점점 확대됨을 따라 한인(漢人)은 진국의 전체를 다 같은 한족(韓族)으로 간주하여 위략, 위지, 후한서의 소위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위지에는 변한)”의 설까지 생기게 되었다. ‘진’과 ‘한’은 기술한 바와 같이 본시 종족 상으로는 그다지 큰 차가 있는 것이 아니요, 말하자면 동일 북방 계통에 속하는 광의의 예맥족(濊貊族)으로 내왕에 선후의 차가 있을 뿐이며 더구나 주객 이체(二體)가 정치상으로는 월지국의 진왕을 공대(共戴)하는 일대 집합체였으므로, 호도하기 좋아하는 중국인에게 그러한 혼칭을 받게 된 것은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진한’의 칭은 결코 진과 한의-주객 이체의-연칭이 아니라 (특히 중국의 한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국의 한이란 뜻으로 처음에 명명하였다는 것을 거듭 말하여 둔다. 단 ‘마한’, ‘변한’의 칭은 ‘진한’의 칭보다는 뒤에 된 것으로, 한의 이름이 확대되었을 때에 ‘진한’ 부락과 구별하기 위하여 특히 진의 주체인 「고마」(혹은 개마)족을 마한이라 (약칭)하고 변진 부족을 변한이라고 (약칭) 한 것이다. 진한은 정치상으로는 비록 마한의 소제(所制)가 되었을지언정 문화상으로는 북방 조선의 유민인 만큼 타의 두 한에 비하여 훨씬 우수한 바가 있었을 것이며, 언어, 습속에 있어서도 다소 다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원래 조선은 북방에 위치하여 지나 대륙과의 교섭이 일찍부터 열리어 중국문화의 영향을 입음이 유구 또 심각하였고, 더욱 한(漢)의 신흥의 세력이 조선을 극복하여 그곳에 군현을 개치함에 이르러서는, 조선 고토의 재래 주민들은 물론이요 조선의 유민으로 그 근방에 이주한 자들도 역시 한(漢) 문화의 영향을 의연히 받았을 것이다. 진한의 언어와 명칭이 중국인과 유사하다는 것을 보면 더욱 사과반(思過半)함이 있다. 이것은 진한의 지리적 위치를 고찰함에 있어서도 특히 미리 주의를 요할 점이라고 생각한다.
쪽수▶P105-2前漢末 後漢初로부터는 「韓」 乃至 「辰韓」의 稱이 제법 擴大되어 辰國의 本體(主體)에 對하여까지도 그러케 呼稱함을 例事로 하였든 모양이니, 저 魏略에 보이는 王莽地皇年間의 辰韓 右渠帥 廉斯鑡에 關한 說話를 參考하면 더욱 잘 알 것이다(本學報 第一卷 拙文 參照). 即 그 說話 中에 나타나는 「辰韓」 「韓人」 또는 單히 「韓」 「辰」 等의 稱은 ▶P106다 辰國의 主體를 指稱한 것으로, 辰(主體)과 韓(客體)의 稱이 混用된 一例로 볼 수 있다. 韓의 稱이 점점 擴大됨을 따라 漢人은 辰國의 全體를 다 같은 韓族으로 看做하야 魏略魏志 後漢書의 所謂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魏志에는 弁韓)」의 설까지 생기게 되였다. 「辰」과 「韓」은 旣述한 바와 같이 本是 種族上으로는 그다지 큰 差가 있는 것이 아니요 말하자면 同一 北方 系統에 屬하는 廣義의 濊貊族으로 來往에 先後의 差가 있을 뿐이며 더구나 主客 二體가 政治上으로는 月支國의 辰王을 共戴하는 一大 集合體였으므로, 糊塗하기 조와하는 中國人에게 그러한 混稱을 받게 된 것은 無理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辰韓」의 稱은 決코 辰과 韓의-主客 二體의-連稱이 아니라 (特히 中國의 韓과 區別하기 爲하야) 辰國의 韓이란 뜻으로 처음에 命名하였다는 것을 거듭 말하여 둔다. 但 「馬韓」 「弁韓」의 稱은 「辰韓」의 稱보다는 後에 된 것으로, 韓의 名이 擴大되었을 때에 「辰韓」 部落과 區別하기 爲하야 特히 辰의 主體인 「고마」(혹은개마) 族을 馬韓이라 (略稱)하고 弁辰 部族을 弁韓이라고(略稱) 한 것이다. 辰韓은 政治上으로는 비록 馬韓의 所制가 되었을지언정 文化上으로는 北方 朝鮮의 遺民인 만치 他의 二韓에 比하야 훨신 優秀한 바가 있었을 것이며, 言語 習俗에 있어서도 多少 다른 바가 있었을 것이다. 元來 朝鮮은 北方에 位置하야 支那大陸과의 交涉이 일즉부터 열리어 中國文化의 影響을 입음이 悠久 또 深刻하였고, 더욱 漢의 新興의 勢力이 朝鮮을 克服하야 그곳에 郡縣을 開置함에 이르러서는, 朝鮮 故土의 在來 住民들은 勿論이요 朝鮮의 遺民으로 그 近傍에 移住한 자들도 역시 漢文化의 影響을 依然히 받았을 것이다. 辰韓의 言語와 名稱이 中國人과 有似하다는 것을 보면 더욱 思過半함이 있다. 이것은 辰韓의 地理的 位置를 考察함에 있어서도 특히 미리 注意를 要할 點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진한의 실체는 진(秦)의 유민이 아니라 실상 조선의 유민이 이를 태성(胎成)한 것이라고 확신하거니와 이 우견을 더욱 유력케 하여주는 것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설이니, 즉 동서 나기(羅紀) 시조 혁거세(赫居世) 원년조(元년조)에 “先是 조선유민 分居山谷之間 爲六村……是爲辰韓六部”라 한 것이 그것이다. 단 사기의 찬자가 진한을 신라(사로) 6촌에 부회한 것은 전통적 오해에 기인한 바이므로(아래에 보임) 거기에는 수긍하기 어렵지만, 진한을 조선 유민의 형성한 사회로 말한 것은, 확실히 동방의 오랜 고기와 전설에 근거한 듯하다. 여기 소위 ‘조선유민’에 대하여는 근세의 정약용⦁한진서 제씨는 이를 단지 우거의 신민 현대문주10▶즉 조선상 역계경 이하 이천여호의 유망민의 지칭으로만 해석[a 10] 하였지만, 나는 그것뿐 아니라 한왕 준의 유민까지 포함한 지칭으로 해한다. 사기의 찬자는 (나기 시조 원년조에) 이상의 기재를 서시(叙示)하면서 동왕 28년조에는 또 “前此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多 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云云”이란 일절을 실었다. 즉 진한은 조선 유민의 형성한 부락이라고 하면서, 일방으로는 중국인이 진란(秦亂)을 피하여 마한 동쪽에 와서 진한과 잡거하였다는 설인데, 후 일절은 말할 것도 없이 위지, 후한서 등의 진한조 기사를 참고, 변통한 문자이니, 찬자는 위지 및 후한서의 기사가 곧 조선 유민의 이주 그것에 관한 오전(誤傳)임을 작견(灼見)치 못하고 각각 별개의 사실로보아 진인(秦人) 동래의 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여진한잡거(與辰韓雜居)’란 구차한 글구를 붙이게 되었다. 그러나 찬자가 진한의 주체를 진(秦)의 유민으로 보지 아니하고 특히 조선의 유민으로 인정한 것은, 동방의 고기와 고전을 존중히 처리한 심리의 일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쪽수▶P107-1 이와 같이 辰韓의 實體는 秦의 遺民이 아니라 실상 朝鮮의 遺民이 이를 胎成한 것이라고 確信하거니와 이 愚見을 더욱 有力케 하야주는 것은 三國史記의 說이니, 即 同書 羅紀始祖赫居世 元年條에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是爲辰韓六部」라 한 것이 그것이다. 但 史記의 撰者가 辰韓을 新羅(斯盧) 六村에 附會한 것은 傳統的 誤解에 基因한 바이므로(見下) 거기에는 首肯하기 어렵지만, 辰韓을 朝鮮 遺民의 形成한 社會로 말한것은, 確實히 東方의 오랜 古記와 傳說에 根據한 듯하다.원문주10▶여기 所謂 「朝鮮遺民」에 對하여는 近世의 丁若鏞⦁韓鎭書 諸氏는 이를 단지 右渠의 臣民卽 朝鮮相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의 流亡民의 指稱으로만 解釋하였지만,[10] 나는 그것뿐 아니라 韓王準의 遺民까지 包含한 指稱으로 解한다. 史記의 撰者는 (羅紀 始祖 元年條에) 如上의 記載를 叙示하면서 同王 三十八年條에는 또 「前此中國之人 苦秦亂東來者衆多 處馬韓東 與辰韓雜居 至是寖盛云云」이란 一節을 실었다. 即 辰韓은 朝鮮遺民의 形成한 部落이라고하면서, 一方으로는 中國人이 秦亂을 피하야 馬韓 東쪽에 와서 辰韓과 雜居하였다는 說인데, 後一節은 말할 것도 없이 魏志 後漢書 等의 辰韓條 記事를 參考變通한 文字이니, 撰者는 魏志 及 後漢書의 記事가 곧 朝鮮 遺民의 移住 그것에 關한 誤傳임을 灼見치못하고 各各 別個의 事實로보아 秦人 東來의 事實을 認定하는 同時에 「與辰韓雜居」란 苟且한 글句를 附하게 되였다. 그러나 撰者가 辰韓의 主體를 秦의 遺民으로 보지 아니하고 特히 朝鮮의 遺民으로 認定한것은, 東方의 古記와 古傳을 尊重히 處理한 心理의 一表現이라고 볼 수 있다.
(병) 진한의 위치와 그 사회의 변천
쪽수▶P107-2 (丙) 辰韓의 位置와 그 社會의 變遷
이상은 진한의 기원에 대하여 설래(說來)한 바이지만, 다음에는 그 위치와 사회의 변천에 대하여 고찰하려고 한다. 위지의 “辰韓在馬韓之東”은 진한의 위치를 말하는 중요한 문자인 것은 의심없으나, 그 소위 동이란 것이 정동(正東)을 가리켜 이름인지 또는 동북이나 동남을 의미한 말인지 그것만으로는 좀 막연하여 분명한 위치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런데 동서에는 전술함과 같이 진한의 국읍을 변진 20여 국 중 진왕에 종속된 사로 등 12국에 부회 비정한 때문에, 마치 진한은 사로(신라)를 포함한 일대의 띵 즉, 지금의 경상도 내에 위치하였던 것과 같이 되었고, 그 후의 사서들은 이 (위지의) 견해를 더욱 승습, 전개시키었다-양서(梁書)(권54) 동이전 신라조에는 이를 근거로 하여 “新羅者 其先 本辰韓種也……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라 하였고, 북사(北史)(권94) 신라전에도 역시 양서와 비슷한 기재가 있으니, 양서의 ‘위시왈신로(魏時曰新盧)’는 바로 위지의 사로 그것으로, 신(新)은 사(斯)의 와(訛)거나 혹은 동음의 이사(異寫)인 듯 하거니와, 사로 즉 신라가 진한 12국의 일이란 설은 분명히 위지의 위필에 의거한 것이다. 재래 동방 사가들은 이 양서 북사의 설에 자극되어, 또한 진한을 신라의 전신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사로를 진한의 기원처 또는 중심지로 여겨 왔었다. 앞에 인용한 삼국사기(나기 시조 원년조)와 삼국유사(신라 시조조)의 기재를 보더라도 금 경주의 땅인 사로(서라벌) 6촌을 가리켜 진한의 6부라하였고 현대문주11▶나말의 문호인 최치원도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에[a 11]“伏聞東海之外 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라하여 삼한(三韓)을 (무리로) 삼국에 비정하여-진한을 신라의 전신으로 보았다. 이조의 편찬인 고려사(高麗史)(지리지2)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21)에도 대개 이 두 설을 취하여 경주는 물론이요 경상1도를 옛 진한의 땅이라 하였고, 또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의 저자 구암(久庵) 한백겸(韓百謙)은 경상도의 일부를 진한,현대문주12▶ 다른 일부를 변한의 땅[a 12] 이라고 창도(唱道)하매 이후 사가들은-금일에 이르기까지-다 이 설을 승습, 반복함에 불과하였다. 최치원과 같은 이는 신라 때의 사람이지만 오랫동안 당(唐)에서 유학하고 벼슬하였을 뿐더러 본시 업이 문장을 주로 하는 파라 자국의 역사에 대하여는 여간 암매(暗昧)하던 인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그는 위와 같이 삼한을 삼국에 비정하는 무리의 짓을 감행하였거니와, 또 그의 발한 망설 중에 한가지 변하여 둘 것은 삼국유사 권1 진한조에 인용된 “(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漸涿”이란 설이다. 진한인을 연인(燕人)의 동래자라고 한 것은 혹 위지에 “非但燕齊之名物也”라 한 것을 근거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연인설(燕人說)은 위에 변한 진인설(秦人說)과 같은 따위의 말이므로 거듭 변론할거리가 되지 못하며, 그 소위 ‘사탁(沙涿)’, ‘점탁(漸涿)’의 탁(涿)은 위 인문(引文) 하주(下註)에 “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라 함과 같이 나음(羅音)에는 「도」 혹은 「돌」로 읽어 흔히는 ‘훼(喙)’와 ‘량(梁)’으로 쓰거니와, 이들은 다 방언 「돌」의 차자(借字)에 불과한 것이요 결코 연(燕)의 탁수(涿水)의 이름을 취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러한 논법으로 연인 즉 중국인의 신라 동래설을 주장한다고 하면 다른 신라의 방언 ‘서라벌’ ‘거서간(居西干)’, ‘차차웅(次次雄)’, ‘이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과 같은 말은 이를 어떻게 설명할 터인가, 이들도 역시 연제(燕齊) 지방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끼. 이는 너무도 심한 말 같지만 어떻든 최치원의 견해에 대하여는 족히 거론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한다. 단 ‘진한즉신라(辰韓則新羅)’라는 따위의 설은 오랫동안-내외 학자를 통하여-한 움직일 수 없는 철안(鐵案)으로 믿어오다시피 한 것이나, 그 설의 근본 원류를 소구하면 결국 전술한 위지, 양서 등의 위필에 귀착, 기인하므로 나는 여기에 더 집착할 필요가 없지만, 이 설을 시인함에는 또한 2, 3의 큰 난점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첫째 진한은 북방 망인의 형성한 사회인 것, 둘째 진한은 낙랑(평남) 대방(황해도)과 교섭이 빈번하던 곳인 것, 셋째 이런 까닭에 진한은 중국문화의 영향을 입음이 유구 또 농후하였다는 것 등은, 위에도 누설(屢說)하였고 뒤에도 또 말할 속일 수 없는 사실이거니와, 신라도 말하면 그 시초가 망인의 건설한 사회도 아니요, 또 낙랑, 대방과 빈삭한 교섭을 생할 만한 지리적 거리에 위치하였던 곳도 아니며, 따라서 그렇게 일찍부터 중국문화와 접촉할 기회를 가지게도 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신라는 사로 6촌에서 평화로운 생장과 완만한 발전을 수(遂)하던 사회로, 그 위치가 반도 동남방에 편재하였던이만큼 대륙 문명의 여택(餘澤)에 욕(浴)함이 반도 내의 다른 국가 사회에 비하여 매우 뒤떨어졌던 것이니, 진한의 위치를 이 방면에 구한다는 것은 암만 생각하여 보아도 불합리를 극한 설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신라는 나의 결론으로부터 보면 진한의 후예가 아니라 변진 즉 변한의 묘예(苗裔)이다. 구당서(舊唐書) 동이전 신라조에는 분명히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라하고 신당서(新唐書) 동이전(신라조)과 신오대사(新五代史) 동이전(신라조)에도 그와 같은 기사가 있다. 당서 본문 중 “其國在漢時樂浪之地”라 함은, 마치 한서(漢書) 지리지 연조(燕條)에 “夫樂浪海中 有倭人 分爲百餘國云云”이라 한 필법과 같이 낙랑을 확대시하여 쓴 것이거나, 혹은 위지 한전(韓傳)에 “韓……漢時屬樂浪郡云云”이란 것에 의거한 말인듯하므로, 거기에는 시비를 말할 필요가 없으며, 또 신라를 변한의 묘예라고 한 것은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이 위지에 열거한 변진 20여 국 중의 하나로 들어있음을 보고 한 말인지는 모르나, 어떻든 그 설은 진실성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안된다. 삼한시대의 사로 등 12국은 정치상으로는 진왕(마한왕)에 종속되어 있지만 부족상으로는 변진 부족에 속하여 있는 까닭이다.
쪽수▶P107-3 以上은 辰韓의 起源에 就하야 說來한 바이지만, 다음에는 그 位置와 社會의 變遷에 就하야 考察하려고 한다. 魏志의 「辰韓在馬韓之東」은 辰韓의 位置를 말하는 重要한 文字인 것은 無疑하나, 그 所謂 東이란 것이 正東을 가르처 일임인지 ▶P108또는 東北이나 東南을 意味한 말인지 그것만으로는 좀 漠然하야 分明한 位置를 把握하기 어렵다. 그런데 同書에는 前述함과 같이 辰韓의 國邑을 弁辰二十餘國 中 辰王에 從屬된 斯盧 等 十二國에 附會 比定한때문에, 마치 辰韓은 斯盧(新羅)를 包含한 一帶의 地 卽今의 慶尙道內에 位置하였든 거와 같이 되였고, 그 후의 史書들은 이 (魏志의) 見解를 더욱 承襲 展開시키었다-梁書(卷五十四) 東夷傳 新羅條에는 이를 根據로 하야 「新羅者 其先 本辰韓種也……辰韓始有六國 稍分爲十二 新羅則其一也……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라 하였고, 北史(卷九十四) 新羅傳에도 역시 梁書와 비슷한 記載가 있으니, 梁書의 「魏時曰新盧」는 바루 魏志의 斯盧 그것으로, 新은 斯의 訛거나 或은 同音의 異寫인 듯 하거니와, 斯盧 卽 新羅가 辰韓十二國의 一이란 설은 分明히 魏志의 僞筆에 依據한 것이다. 在來 東方史家들은 이 梁書 北史의 설에 刺戟되어, 또한 辰韓을 新羅의 前身으로 認定하는 同時에 斯盧를 辰韓의 起源處 又 中心地로 역이어 왔었다. 前引한 三國史記(羅紀 始祖 元年條)와 三國遺事(新羅 始祖條)의 記載를 보더라도 今 慶州의 地인 斯盧(徐羅伐) 六村을 가리처 辰韓의 六部라 하였고 원문주11▶羅末의 文豪인 崔致遠도 上大師侍中狀에[11] 「伏聞東海之外 有三國 其名馬韓卞韓辰韓 馬韓則高麗 卞韓則百濟 辰韓則新羅也」라하야 三韓을 (無理로) 三國에 比定하야-辰韓을 新羅의 前身으로 보았다. 李朝의 編纂인 高麗史(地理志二)와 東國輿地勝覽(卷卄一)에도 대개 이두 說을 取하야 慶州는 勿論이요 慶尙一道를 古辰韓의 地라하였고, 원문주12▶또 東國地理誌의 著者 久庵 韓百謙은 慶尙道의 一部를 辰韓, 他一部을 弁韓의 地라고[12] 唱道하매 以後 史家들은-今日에 이르기까지-다 이 說을 承襲 反覆함에 不過하였다. 崔致遠과 같은 이는 新羅 때의 사람이지만 오래동안 唐에서 留學하고 벼슬하였을 뿐더러 본시 業이 文章을 主로 하는 派라 自國의 歷史에 對하여는 여간 暗昧하든 人物이 아니었다. 그리하야 그는 右와 같이 三韓을 三國에 比定하는 無理의 짓을 敢行하였거니와, 또 그의 發한 ▶P109妄說 中에 한가지 辯하야둘 것은 三國遺事 卷一 辰韓條에 所引된 「(崔致遠云)辰韓本燕人避之者 故取涿水之名 稱所居之邑里 云沙涿․漸涿」이란 說이다. 辰韓人을 燕人의 東來者라고 한 것은 혹 魏志에 「非但燕齊之名物也」라 한 것을 根據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燕人說은 위에 辯한 秦人說과 같으 따위의 말이므로 거듭 辯論할거리가 되지 못하며, 그 所謂 「沙涿」 「漸涿」의 涿은 右引文 下註에 「羅人方言 讀涿音爲道 故今或作沙梁 梁亦讀道」라 함과 같이 羅音에는 「도」 或은 「돌」로 讀하야 흔이는 「喙」와 「梁」으로 書하거니와, 이들은 다 方言 「돌」의 借字에 不過한 것이요 決코 燕의 涿水의 名을 取한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러한 論法으로 燕人 即 中國人의 新羅 東來說을 主張한다고 하면 다른 新羅의 方言 「徐羅伐」 「居西干」 「次次雄」 「尼師今」 「麻立干」과 같은 語는 이를 어떠케 說明할 터인가, 이들도 역시 燕齊地方에서 由來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가. 이는 너무도 甚한 말 같지만 어떠튼 崔致遠의 見解에 就하여는 足히 擧論할 價値도 없다고 생각한다. 但 「辰韓則新羅」라는 따위의 說은 오래동안-內外學者를 通하야-한 움직일 수 없는 鐵案으로 믿어오다싶이 한 것이나, 其說의 根本源流를 溯究하면 結局 前述한 魏志 梁書 等의 僞筆에 歸着 基因하므로 吾人은 여기에 더 執着할 必要가 없지만, 이 說을 是認함에는 또한 二三의 큰 難點이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첫재 辰韓은 北方亡人의 形成한 社會인것, 둘재 辰韓은 樂浪(平南) 帶方(黃海道)과 交涉이 頻繁하든 곳인 것, 샛재 이런 까닭에 辰韓은 中國文化의 影響을 입음이 悠久 且 濃厚하였다는 것 等은, 위에도 屢說하였고 뒤에도 또 말할 속일 수 없는 事實이어니와, 新羅도 말하면 그 始初가 亡人의 建設한 社會도 아니요, 또 樂浪 帶方과 頻數한 交涉을 生할만한 地理的 距里에 位置하였든 곳도 아니며, 따라서 그러케 일즉부터 中國文化와 接觸할 機會를 가지게도 되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新羅는 斯盧六村에서 平和로운 生長과 緩慢한 發展을 遂하든 社會로, 그 位置가 半島 東南方에 偏在하였든이만치 大陸文明의 餘澤에 浴함이▶P110-1半島 內의 다른 國家 社會에 比하야 매우 뒤떠러졌든 것이니, 辰韓의 位置를 이 方面에 求한다는 것은 암만 생각하야 보아도 不合理를 極한 說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新羅는 나의 結論으로부터 보면 辰韓의 後裔가 아니라 弁辰 即弁韓의 苗裔이다. 舊唐書 東夷傳 新羅條에는 分明히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라하고 新唐書 東夷傳(新羅條)과 新五代史 東夷傳(新羅條)에도 그와 같은 記事가 있다. 唐書 本文 中 「其國在漢時樂浪之地」라 함은, 마치 漢書地理志燕條에 「夫樂浪海中 有倭人 分爲百餘國云云」이라 한 筆法과 같이 樂浪을 擴大視하야 쓴 것이거나, 或은 魏志韓傳에 「韓……漢時屬樂浪郡云云」이란 것에 依據한 말인듯하므로, 거기에는 是非를 말할 必要가 없으며, 또 新羅를 弁韓의 苗裔라고 한 것은 新羅의 前身인 斯盧國이 魏志에 列擧한 弁辰二十餘國中의 하나로 들어있음을 보고 한말인지는 모르나, 어떠튼 其說은 眞實性을 가진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三韓時代의 斯盧等十二國은 政治上으로는 辰王(馬韓王)에 從屬되여 있지만 部族上으로는 弁辰部族에 屬하여 있는 까닭이다.
그러면 진한의 위치는 이를 어느 곳에 구하여야 될 것인가. (魏志에 보이는) 진한 기로의 전설에 “馬韓割其東界地與之”란 뚜렷한 문자가 표시되어 있는 가히, 진한은-변진 방면에 구할 것이 아니라-마한의 동계의 땅에 구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마한 동계의 땅이라면 또 어느 곳을 가리켜 이름인가. 이에 있어 나에게 한 중요한 결정적 암시를 주는 전설의 기사가 있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溫祚王) 24년 추 7월조에 왕(온조)이 웅천책(熊川柵)(금 안성천(安城川) 상류)을 지음에 마한왕이 사(使)를 보내어 책양(責讓)(항의)하였다는 말 가운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云云”이라 한 그것이다. 여기 먼저 주의할 것은-‘왕초도하(王初渡河)’의 하(河)는 (말할 것도 없이) 금 한강(漢江)의 이름으로, 이 전설은 적어도 그 하가 마한의 중요한 국경으로 되었을 때의 이야기니, 다시 말하면 이것은 금일의 한강이 마한의 전신인 진국과 그 북의 진번(眞番)과의 사이에 중요한 경계로서의 임무를 하던 진국시대의 전설인 것이 분명하거니와 백제의 왕실인 부여씨(夫餘氏)의 남래는, 이미 진번(군)의 남부가 폐기되어 금일의 한강이 국경으로서의 임무를 잃은 후세의 사실에 속할 뿐더러 현대문주13▶부여씨의 최초 근거지는 다른 논문 중[a 13]에 고구할 바와 같이 하남(河南)의 땅이 아니라 하북(河北)의 땅이었으므로, 위 전설은 나의 소견으로는 부여씨(온조) 대 마한 관계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고, 그보다 선행한 한왕 준 이래 조선유민의 진한과 진국과의 관계 설화가 후세 사가의 손에 의하여 잘못 이(부여씨)에 부회된 것이 아닌가 한다. 즉 한왕 준의 뒤 조선상 역계경 이하 이천여호의 대이민단이 도하 입거하여 앞서 준왕 시에 진국으로부터 획정하여 주었던 지역의 한계를 넘어 무렴(無廉)하게도 진국의 중심지 부근에까지 번연(繁延)하므로 인하여, 진왕이 위와 같은 힐책을 (진한에 대하여) 발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용인된다면 진왕의 힐난한 말 가운데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 一百里之地安之”는 바로 위지(진한 기로 전설)의 “古之亡人……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란 것과 부합되는 동시에 이는 온조의 사실이 아니라 실상 한왕 준에 관한 사실인 듯하고, 그 이하의 말은 힐책을 받는 조선 유민에 관한 사실을 다소 윤색한 것인 듯 하다. ‘왕’이니 ‘100리’니 하는 것도 수식의 말일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마한이 동계의 땅을 할여하였다는 것은 진국의 동북계를 망인의 거주지역으로 획정하여 주었다는 말이며, 또 그 소위 ‘동북’은 진왕의 치부인 월(목)지국 즉 금의 직산(稷山), 평택(平澤) 지방을 표준으로 삼은 방위의 지칭일지니, 진한의 중심지는 즉 이곳에서 동북면에 당하는 곳에 구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진국의 동북계(하남)로 북방의 망인들을 수용하기에 적당(광활)한, 또 역사지리상 저명한 곳을 던다면 금일의 광주(廣州) 및 그 근접지를 제외할 수는 없다. 더구나 위에서 인용한 온조에 부회한 전설이 온조의 근거지를 하남인 광주로 전제삼고 현대문주14▶거기서 금일의 안성천 유역인 웅천[a 14]에까지 세력을 확장한 것과 같이 말하였으므로, 위에 ‘동계’니 혹은 ‘동북 100리의 땅’이니 한 땅은, 다 금일의 광주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의 일대를 이름일 것이다. 광주의 삼한 시대의 칭호는 바로 백제(伯濟)로서, 백제는 소위 마한 50여 국 중의 하나이나, 일찍부터 진한인의 중심지가 되어있다가, 뒤에는 백제의 왕조를 이룬 부여씨가 하북에서 이곳으로 옮겨 수부를 삼고 동시에 국호를 백제라고 고치었던 것이니, 진한에 관한 사실이 왕왕 백제 왕실에 부회된것은 양유이야(良有以也)라고 할 수 있다(백제의 건국 연대에 대하여는 후절에 고쳐서 말하려고 하지만, 삼국사기의 소기보다는 훨씬 후세에 당한다). 이와 같이 백제(伯濟)(광주)를 진한의 중심지라고 하면, 그곳은 물론 위지에 “辰韓……始有六國”이라 한 6국의 하나로 처음 한왕 준의 입거한 지점, 다음 조선상 역계경 등 이천여 호의 내주 지역이 다 여기를 중축으로 삼았을 것이며, 타의 5국(읍)도 역시 그 주위에 인접된 하남의 땅이었을 것은 의심없으나 국명의 표시가 없으므로 그것은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환언하면 초기 진한(6국)의 경역(거주지역)을 현금 지리상으로 분명히 논하기는 어려우나, 다만 금일 광주 지방을 중심으로 삼아 남한강(南漢江) 유역(특히 양평(楊平), 여주(驪州), 이천(利川), 등지)을 점거하였던 것은- ‘할기동계(割其東界)’니 ‘할기동북일백리지지(割東北一百里之地)’니 한 것으로 보아-사실인 듯하다.
쪽수▶P110-2그러면 辰韓의 位置는 이를 어느 곳에 求하여야 될 것인가. (魏志에 보이는) 辰韓 耆老의 傳說에 「馬韓割其東界地與之」란 뚜렷한 文字가 表示되여있는 以上, 辰韓은-弁辰 方面에 求할 것이 아니라-馬韓의 東界의 地에 求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馬韓 東界의 地라면 또 어느 곳을 가리처 일음인가. 이에 있어 吾人에게 한 重要한 決定的 暗示를 주는 傳說의 記事가 있으니,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二十四年秋七月條에 王(溫祚)이 熊川柵(今安城川上流)을 作하매 馬韓王이 使를 보내어 責讓(抗議)하였다는 말 가온대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一百里之地安之(……宜思有以報之 今以國完民聚 謂莫與我敵 大設城池 侵犯我封疆 其如義何)云云」이라 한 그것이다. 여기 먼저 注意할 것은-「王初渡河」의 河는 (말할 것도 없이) 今 漢江의 謂로, 이 傳說은 적어도 그 河가 馬韓의 重要한 國境으로 되었 ▶P111을 때의 이야기니, 다시 말하면 이것은 今日의 漢江이 馬韓의 前身인 辰國과 그 北의 眞番과의 사이에 重要한 境界로서의 任務를 하든 辰國時代의 傳說인 것이 分明하거니와 百濟의 王室인 夫餘氏의 南來는, 원문주13▶이미 眞番(郡)의 南部가 廢棄되어 今日의 漢江이 國境으로서의 任務를 失한 後世의 事實에 屬할뿐더러 夫餘氏의 最初 根據地는 他 論文 中[13]에 考究할 바와 같이 河南의 地가 아니라 河北의 地였으므로, 右 傳說은 나의 所見으로는 夫餘氏(溫祚) 對 馬韓 關係의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고, 그보다 先行한 韓王 準 以來 朝鮮遺民의 辰韓과 辰國과의 關係 說話가 後世 史家의 손에 依하야 잘못 이(夫餘氏)에 附會된 것이 아닌가 한다. 即 韓王 準의 뒤 朝鮮相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의 大移民團이 渡河 入居하야 앞서 準王 時에 辰國으로부터 劃定하야 주었든 地域의 限界를 넘어 無廉하게도 辰國의 中心地 附近에까지 繁延하므로 因하야, 辰王이 右와 같은 詰責을 (辰韓에 對하야) 發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이 容認된다면 辰王의 詰難한 말 가온대 「王初渡河 無所容足 吾割東北 一百里之地安之」는 바루 魏志(辰韓耆老傳說)의 「古之亡人……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란 것과 符合되는 同時에 이는 溫祚의 事實이 아니라 실상 韓王準에 關한 事實인듯하고, 그 以下의 말은 詰責을 받는 朝鮮遺民에 關한 事實을 多少 潤色한 것인듯 하다. 「王」이니 「一百里」니 하는 것도 修飾의 語일는지 모르겠다. 何如間 馬韓이 東界의 地를 割與하였다는 것은 辰國의 東北界를 亡人의 居住地域으로 劃定하여 주었다는 말이며, 또 그 所謂 「東北」은 辰王의 治府인 月(目)支國 即 今의 稷山 平澤 地方을 標準으로 삼은 方位의 指稱일지니, 辰韓의 中心地는 即 이곳에서 東北面에 當하는 곳에 求하지 아느면 안되겠다. 辰國의 東北界(河南)로 北方의 亡人들을 受容하기에 適當(廣闊)한, 又 歷史地理上 著名한 곳을 든다면 今日의 廣州 及 其近 接地를 除外할 수는 없다. 원문주14▶더구나 上引 溫祚에 附會한 傳說이 溫祚의 根據地를 河南인 廣州로 前提삼고 거기서 今日의 安城川 流域인 熊川[14]에까지 勢力을 擴張한 거와 같이 ▶P112말하였으므로, 위에 「東界」니 或은 「東北一百里之地」니 한 땅은, 다 今日의 廣州地方을 中心으로 한 地域의 一帶를 일음일 것이다. 廣州의 三韓時代의 稱號는 바루 伯濟로서, 伯濟는 所謂 馬韓五十餘國中의 하나이나, 일즉부터 辰韓人의 中心地가 되여있다가, 後에는 百濟의 王朝를 이룬 夫餘氏가 河北에서 이곳으로 옮기어 首府를 삼고 同時에 國號를 百濟라고 고치었든 것이니, 辰韓에 關한 事實이 往往 百濟王室에 附會된것은 良有以也라고 할 수 있다(百濟의 建國年代에 就하여는 後節에 곷어서 말하려고 하지만, 三國史記의 所記보다는 훨신 後世에 當한다). 이와 같이 伯濟(廣州)를 辰韓의 中心地라고하면, 그곳은 勿論 魏志에 「辰韓……始有六國」이라 한 六國의 一로 처음 韓王 準의 入居한 地點, 다음 朝鮮相 歷谿卿 等 二千餘戶의 來住 地域이 다 여기를 中𨋀으로 삼았을 것이며, 他의 五國(邑)도 역시 그 周圍에 隣接된 河南의 地이었을 것은 無疑하나 國名의 表示가 없으므로 그것은 具體的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換言하면 初期 辰韓(六國)의 境域(居住地域)을 現今 地理上으로 分明히 論하기는 어려우나, 다만 今日 廣州 地方을 中心으로 삼아 南漢江 流域(特히 楊平 驪州 利川 等地)을 占居하였든 것은- 「割其東界」니 「割東北一百里之地」니 한 것으로 보아-事實인 듯하다.
초기의 진한은 위와 같이 백제(伯濟)를 중심으로 삼아 하남 6국을 점거한 데 불과하였지만, 그 후 북조선 한사군의 하나인 진번의 땅에 정치적 변동이 생함에 미쳐서는 한인의 하북에 대한 발전은 막을 수 없는 형세이었다. 즉 한 소제(昭帝) 시원(始元) 5년(B.C. 82)에 진번 15현의 땅자비령(慈悲嶺) 이남 한강 이북의 땅가 폐군되어 현대문주15▶그 중 북부 7현만은 낙랑군에 병속되고 남부 8현이 영원히 폐기[a 15]된 후로는, 8현의 땅대개 한강 이북 경기도 내는 지리상 관계로 自然 韓人의 세력 範圍안에 들게 되었다. 漢江 南北의땅을 領有하게 된 진한의 요소는 더욱 複雜하여, 그 중에는 원래 토착의 진인(辰人) 및 북방 조선유민 외에 진번의 유민 내지 동북 예(濊) 방면으로부터의 이민군도 있었을 것이며, 또 뒤에는 백제의 왕실이 될 부여씨의 일족도 남래하여 한북(漢北)의 땅에 거하여 암암리에 세력을 잠양(潛養)하면서 이 유이민 사회의 한 중요한 요소를 지어가지고 있었다고 추찰되거니와, 이들 유이족의 사회의 정치상태는 형식상으로는 비록 다 같이 월지국의 진왕(마한왕)을 맹주로 삼아있었을지라도 실질에 있어서는 진한 유민을 비롯하여 여러 반독립적 부락 국가의 상태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위지(한조)에 “桓靈之末 韓濊疆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이라고 한 것을 보면, 후한 말 환(桓)⦁영(靈) 양제 시대의 한과 예는 낙랑 군현의 힘으로 능히 제어하기 어려웠을 만큼 강성하여, 동 군현 내의 본토주민으로서 진한에 유입하는 자가 또한 퍽이나 많았던 모양이며, 이로 인하여 낙랑의 남부 즉 둔유현(屯有縣)금 황주(黃州) 이남의 구 진번 7현의 금 황해도 내의 땅은 거의 황지화(荒地化)하게 되었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A.D.196-220)에는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강(公孫康)이 드디어 한예(韓濊)에 대한 적극적 태도를 취하여 둔유현 이남의 황지(荒地)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를 두는 동시에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보내어 한예를 벌하여 구민을 다소 수집하게 되었으니, 위에서 인용한 위지의 문에 계속하여 “建安中 公孫康分屯有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云云”이라 한 것이 즉 그것이다. 이때 진한과 대방과의 경계는 어떻게 되어있었느냐 하면,현대문주16▶ 나의 고찰한 바로는 [a 16] 대개 금일의 경기⦁황해 양도 간의 계선과 동일한 상태로 되어있었다고 인식되나니, 이것은 금일 대방 시대의 유적이 경기도 내에서는 발견되지 아니하고 그 이북인 황해도 지방에서 많이 발견됨을 보아도 알 것이다. 그리하여 취중(就中) 금일의 예성강(禮成江) 하류와 같은 것은 진한과 대방 사이에 있어, 중요한 경계로서의 임무를 다하던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또 그러면 이때(후한말 삼국초) 소위 진한의 타 삼면에 관한 경역은 어떠하였는가 함이 문제이다. 이를 고찰함에 또한 귀중한 시사를 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8월조에 “遣使馬韓告遷都 遂畵定疆場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이라 한 일절이다. 이 기사는 역시 온조 때의 사실은 아니라 하더라도, 부여씨가 이미 건국의 기초를 이룬 후(건국 연대에 관하여는 후절에 논하려함) 도(都)를 하북에서 하남의 광주 지방으로 옮겨 구 진한 시대의 제 부락을 통일한 사실의 이름인 듯하므로, 나는 이에 의하여 진한 시대의 경역을 비교적 뚜렷이 알 수가 있는것이다. 위 글 중 패하(浿河)는 고려사세계(高麗史世系)에서 인용한 김관의(金寬毅) 편년통록(編年通錄) 중에 보이는 패강(浿江) 및 동 지리지3 평주조(平州條)에 “猪淺一云浿江”이라 한 패강 그 곳으로 금 예성강에 당하며, 웅천은 위에 보임과 같이 금 안성천 상류, 대해(大海)는 서해, 주양(走壤)은 삼국사기 나기 문무왕(文武王) 13년 9월조에 “築……首若州走壤城 一名迭巖城”이라 한 그곳으로, 금 춘천(春川)에 당한다. 그런즉 진한의 구역(舊域)은 북은 예성강, 남은 안성천 상류(양성(陽城)?), 서는 황해, 동은 춘천에 달하였다고 할 수 있다. 환언하면 이때 진한 유이민의 전 주지(住地)는 금 경기도의 거의 전부 및 강원도의 일부분을 포함한 지역에 불과하였다고 할 수 있다. 魏志에 열거한 소위 마한 50여 국 중 해양국(奚襄國)지금 수원군(水原郡) 음덕면(陰德面) 일대? 모수국(牟水國)지금수원읍(水原邑) 상외국(桑外國)금 수원군 장안면(長安面), 우정면(汀兩面) 소석삭국(小石索國), 대석삭국(大石索國)이상 병미상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지금 부천군(富川郡) 신분활국(臣濆活國)금 안성군(安城郡) 양성면(陽城面) 일대 백제국(伯濟國)지금 광주군(廣州郡)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금 통진(通津)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이상 병미상 고리국(古離國)금 양주군(楊洲郡)? 노남국(怒藍國)지금 이천군(利川郡)의 일부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역시 금 이천군의 일부 등 14국은 거개(擧皆) 한강 유역 이남의 진한인 국읍으로 보아 좋고, 그 이북의 국읍으로 명호가 금일 전하지 않는 것은 매우 유감이나, 위지 권4 제왕방(齊王芳) 정시(正始) 7년(A.D. 246) 하(夏) 5월조에 「……韓那奚等數十國 各率種落降」이라 하고 실제 나해(那奚)의 이름이 위지의 소거한 제한국 읍명 중에 나타나지 않는 것을 보면, 한나해등수십국은 거기서 제외된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이들 수십 국은 한강유역 내지 그 이북의 진한인 부락에 속한 자이었을 것이다. 나해위치 미상 등 수십 국이 종락(種落)을 솔하여 위에 항복하게 된 것은, 동년 즉 정시 7년에 낙랑대방과 진한과의 충돌로 결과된 사실이거니와 그 충돌에 관하여는 위지 위전(魏傳)에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분할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이라 한 비교적 자세한 기사가 보이고 또 이 글 상단에는 “景初(A.D.237-239)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이란 기재가 접속되어 있다. 이 두 기사는 주로 위대(魏代)의 낙랑대방 대 한국 관계의 사실을 적은 것으로, 특히 전자는 진한 관계의 사실로 양자의 관계를 밝힘에 뿐 아니라 재래의 진한 위치설을 전복시킴에도 여간 중요한 ‘힌트’를 주는 것이 아닌즉, 거기 대하여 다소의 해석을 시(試)할 필요가 있다. ‘부종사오림(部從事吳林)’ 및 ‘태수궁준(太守弓遵)’은 대방군의 태수 및 부종사한대 이래 각 군마다 있는 상임관(常任官)를 이름이니, 한위(韓魏) 충돌의 원인은 대방군의 부종사 오림이 진한에 대하여 ‘낙랑본통한국(樂浪本統韓國)’이라는 이유로써 그 중의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부여하였더니 통역자의 전달에 이동이 생하여 도리어 한인의 분개를 돋았다는 것이다. ‘낙랑본통한국’은 동전(同傳) 전문(前文) 중의 “(韓)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의 사실을 말함인 듯하며, 또 여기 통(統)이니 속(屬)이니 한 것은 물론 실질상의 정치관계의 통속이 아니요, 외이(外夷)의 조알조공관계에 있어서의 통속인즉, 오림의 취한 소위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도 이러한 의미의 할여(割與)일 것이다. 현대문주17▶이에 관하여는 동대(東大)의 지내굉(池內宏) 박사가 일찍이 「公孫氏の帶方郡設置と曹魏の樂浪帶方二郡」[a 17]이란 논문 중에 상세한 연구를 발표하였거니와, 박사의 설에 의하면 공손강의 낙랑군 분할의 결과, 한국인의 조공을 관장하는 권능은 낙랑군으로부터 대방군에 옮겨 가고, 2군이 유(有)가 된 뒤에도 얼마 동안은 그대로 내려오다가, 드디어 제 한국을 2분하여 그 1반을 낙랑군에 조공케 하려는 신제가 창시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박사는 말하되 “ここに辰韓八國とある辰韓は, 韓傳の 別の條に 明記してある如く 十二圈に分れてゐたのであるから, 帶方郡の所屬は 四國に 減ぜられたわけであらう”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로써 보면 한전(韓傳) 별조(別條)에 기시(記示)한 진한 12국이란 것은, 앞서도 누차 변술한 바와 같이, 찬자가 변진 20여 국 중 진왕에 종속된 12국을 진한의 것으로 오인, 오기한 것인즉, 여기 소위 진한 8국을 거기에 구하는 것은 불가한 양으로 생각한다. 나의 해석으로는 ‘진한 8국’은 한북(漢北)의 땅이라고 생각되는 한(진한) 나해 등 수십 국 중에 포함되는 것으로, 특히 이 8국만을 낙랑군에 분속시키려 한 것은 그것이 한대 이래 낙랑과의 무슨 특수의 관계를 가졌던 까닭이 아닌가 한다. 일보를 내켜 생각하면, 즉 이 8국은 본시 구 진번군 15현 중(7현은 낙랑에 병합)의 8현으로 뒤에 진한의 유(有)가 되어서도 조알, 조공 기타로 인하여 낙랑과 특수의 관계를 가졌던 것인 듯하며, 그리하여 이때 8국만은 전일의 상태대로 낙랑에 예속케 하고 그 나머지의 진한 제국은 대방에 속하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때 이역(吏譯)의 이동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이 변혁의 취지를 전달하는 통역자 중에 혹은 말하기를 조알조공관계의 분속으로써 하지 아니하고, 실질상의 영토적 분할의 사실로처럼 와전한 것인 듯하다. 그래서 진한의 신지(거수)는 한인(진한)을 격분시키어 대방의 기리영(崎離營)이란 곳을 공격하는 행위에까지 다달았고, 드디어 2군 태수의 출정을 보게 된 까닭이다. 기리영은 대방군 내의 땅이므로, 금일의 황해도 내에 당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평산(平山)의 구 기린역(騏麟驛)인 동군 인산면(麟山面) 기린리(麒麟里)의 이름이 이와 근사함을 보면, 이곳이 바로 그 곳인 듯하다. 이 전쟁에 대방태수 궁준은 전사하게 되었던 이만큼 한인의 공격이 맹렬하였던 모양이었으나, 필경은 한인 측이 대불리에 빠져 ‘이군수멸한(二郡遂滅韓)’이라고까지 대서(大書)하였다. 멸한(滅韓) 2자는 지내(池內) 박사의 설과 같이 너무나 과장에 지나친 필법인 듯 싶고 실상은 전기 나해 등 수십 국의 항복한 사실을 이 같이 대서한 것인 듯하다. 여하간 진한은 이 전쟁의 결과로 다소의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으며, 따라서 부락의 통어(統御)도 무능하여지고 한북(漢北) 일대의 땅은 거의 무통일상태에 있었던 모양이다. 진한의 일요소로 장차 백제국의 왕실이 될 부여씨의 건국적 공작은 실상은 이 시기에 배태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백제(최초 국호는 위례(慰禮)인 듯)의 건국은 차절에 자세히 논술할 바와 같이 고이왕(古尒王) 만년에 된 것 같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이 이전의 제왕은 다 부락 국가시대의 거수거나 혹은 전혀 뒤에 추존한 왕이거나 할 것이다. 같은 책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추 8월조를 보면, “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라고 한 기재가 있으나-여기 삭방태수(朔方太守) 왕준(王遵)은 즉 대방태수 궁준의 오(誤)이거니와-이는 후세의 사가가 위지 예전에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 擧邑降”이라 한 기사에 의하여 부회한 것인 듯 하므로 거기에는 고려의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건국은 정시 7년의 사변을 계기로 하여 그 후 얼마되지 아니하여 실현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112-2初期의 辰韓은 右와 같이 伯濟를 中心으로 삼아 河南 六國을 占據한데 不過하였지만, 그 후 北朝鮮 漢四郡의 一인 眞番의 地에 政治的 變動이 生함에 및어서는 韓人의 河北에 對한 發展은 막을 수없는 形勢이었다. 即 漢昭帝 始元五年(82B.C.)에 眞番 十五縣의 地慈悲嶺 以南 漢江 以北의 地가 廢郡되야 원문주15▶그중 北部 七縣만은 樂浪郡에 倂屬되고 南部 八縣이 永히 廢棄된 후로는,[15] 八縣의 地대개 漢江 以北京畿道內는 地理上 關係로 自然 韓人의 勢力 範圍안에 들게 되였다. 漢江 南北의地를 領有하게 된 辰韓의 要素는 더욱 複雜하야, 그 중에는 原來 土着의 辰人 及 北方 朝鮮遺民 外에 眞番의 遺民 乃至 東北 濊 方面으로부터의 移▶P113民群도 있었을 것이며, 또 後에는 百濟의 王室이 될 夫餘氏의 一族도 南來하야 漢北의 地에 居하야 暗暗裏에 勢力을 潛養하면서 이 流移民 社會의 一重要한 要素를 지어가지고 있었다고 推察되거니와, 이들 流移族의 社會의 政治狀態는 形式上으로는 비록 다 같이 月支國의 辰王(馬韓王)을 盟主로 삼아있었을지라도 實質에 있어서는 辰韓 遺民을 비롯하야 여러 半獨立的 部落國家의 狀態에 不過하였을 것이다. 魏志(韓條)에 「桓靈之末 韓濊疆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이라고 한 것을 보면, 後漢末 桓⦁靈 兩帝 時代의 韓과 濊는 樂浪郡縣의 힘으로 能히 制御하기 어려웠을 만치 强盛하야, 同 郡縣 內의 本土住民으로서 辰韓에 流入하는 者가 또한 퍽으나 만힜든 모양이며, 일로 因하야 樂浪의南部 即 屯有縣今 黃州 以南의 舊 眞番 七縣의 今 黃海道 內의 地는 거이 荒地化하게 되였다. 獻帝 建安年間(196A.D.-220)에는 遼東太守 公孫康이 드디어 韓濊에 對한 積極的 態度를 取하야 屯有縣 以南의 荒地를 分割하야 帶方郡를 置하는 同時에 公孫模 張敞 等을 보내어 韓濊를 伐하야 舊民을 多少 收集하게 되었으니, 上引 魏志의 文에 繼續하야 「建安中 公孫康分屯有以南荒地爲帶方郡 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 興兵伐韓濊 舊民稍出云云」이라 한 것이 即 그것이다. 이때 辰韓과 帶方과의 境界는 어떠케 되어있었느냐 하면, 원문주16▶나의 考察한 바로는[16] 대개 今日의 京畿⦁黃海 兩道 間의 界線과 同一한 狀態로 되여있었다고 認識되나니, 이것은 今日 帶方時代의 遺蹟이 京畿道 內에서는 發見되지 아니하고 그 以北인 黃海道 地方에서 만히 發見됨을 보아도 알 것이다. 그리하야 就中 今日의 禮成江 下流와 같은 것은 辰韓과 帶方 사이에 있어, 重要한 境界로서의 任務를 다하든 것이라고 나는 確信한다. 또 그러면 이때(後漢末 三國初) 所謂 辰韓의 他 三面에 關한 境域은 어떠하였는가 함이 問題이다. 이를 考察함에 또한 貴重한 示唆를 주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三國史記 百濟本紀 溫祚王 十三年 八月條에 「遣使馬韓告遷都 遂畵定疆場 北至浿河 南限熊川 西窮大海 東極走壤」이라 한 一節이다. 이 記事는 역시 溫祚時의▶P114事實은 아니라 하드라도, 夫餘氏가 이미 建國의 基礎를 이룬 후(建國年代에 關하여는 後節에 論하려 함) 都를 河北에서 河南의 廣州 地方으로 옴기어 舊 辰韓時代의 諸部落을 統一한 事實의 謂인 듯하므로, 吾人은 이에 依하야 辰韓 時代의 境域을 比較的 뚜렷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右文 中 浿河는 高麗史世系 所引 金寬毅 編年通錄 中에 보이는 浿江, 及 同地理志 三 平州條에 「猪淺一云浿江」이라 한 浿江 그 곳으로 今 禮成江에 當하며, 熊川은 위에 보임과 같이 今 安城川 上流, 大海는 西海, 走壤은 三國史記 羅紀 文武王 十三年 九月條에 「築……首若州走壤城 一名迭巖城」이라 한 그곳으로, 今 春川에 當한다. 그런즉 辰韓의 舊域은 北은 禮成江, 南은 安城川 上流(陽城?), 西는 黃海, 東은 春川에 達하였다고 할 수있다. 換言하면 이때 辰韓 流移民의 全 住地는 今 京畿道의 거이 全部 및 江原道의 一部分을 包含한 地域에 不過하였다고 할 수 있다. 魏志에 列擧한 所謂 馬韓五十餘國 中 奚襄國今 水原郡 陰德面 一帶? 牟水國今 水原邑 桑外國今 水原郡 長安雨 汀兩面 小石索國 大石索國以上 並末詳 優休牟涿國今 富川郡 臣濆活國今 安城郡 陽城面 一帶 伯濟國今 廣州郡 速盧不斯國今 通津 日華國 古誕者國以上 並未詳 古離國今 楊洲郡? 怒藍國今 利川郡의 一部 咨離牟盧國역시 今 利川郡의 一部 等 十四國은 擧皆 漢江流域 以南의 辰韓人 國邑으로 보아 조코, 그 以北의 國邑으로 名號가 今日 傳하지 아는것은 매우 遺憾이나, 魏志 卷四 齊王芳 正始七年(246A.D.) 夏五月條에 「……韓那奚等數十國 各率種落降」이라 하고 실제 那奚의 名이 魏志의 所擧한 諸韓國邑名 中에 나타나지 안는 것을 보면, 韓那奚等數十國은 거기서 除外된 것이 分明하고, 따라서 이들 數十國은 漢江流域 乃至 그 以北의 辰韓人 部落에 屬한 者이었을 것이다. 那奚位置 未詳 等 數十國이 種落을 率하야 魏에 降服하게 된 것은, 同年 即 正始七年에 樂浪帶方과 辰韓과의 衝突로 結果된 事實이어니와 그 衝突에 關하여는 魏志 魏傳에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 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이라 한 比較的 仔細한 記事가 보이고 또 此文 上段▶P115에는 「景初(237A.D.-239) 中 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이란 記載가 接續되어 있다. 이 두 記事는 主로 魏代의 樂浪帶方 對 韓國關係의 事實을 적은 것으로, 特히 前者는 辰韓關係의 事實로 兩者의 關係를 밝힘에 뿐 아니라 在來의 辰韓 位置說을 顚覆시킴에도 여간 重要한 「힌트」를 주는 것이 아닌즉, 거긔 對하야 多少의 解釋을 試할 必要가 있다. 「部從事吳林」 及 「太守弓遵」은 帶方郡의 太守 및 部從事漢代 以來 各 郡마다 있는 常任官를 일음이니, 韓魏衝突의 原因은 帶方郡의 部從事 吳林이 辰韓에 對하야 「樂浪本統韓國」이라는 理由로써 그 중의 八國을 分割하야 樂浪에 附與하였더니 通譯者의 傳達에 異同이 生하야 도리어 韓人의 憤慨를 돋았다는 것이다. 「樂浪本統韓國」은 同傳 前文 中의 「(韓)漢時屬樂浪郡四時朝謁」의 事實을 말함인 듯하며, 또 여긔 統이니 屬이니 한 것은 勿論 實質上의 政治關係의 通屬이 아니요, 外夷의 朝謁朝貢關係에 있어서의 統屬인즉, 吳林의 取한 所謂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도 이러한 意味의 割與일 것이다. 원문주17▶이에 關하여는 東大의 池內宏 博士가 일즉이 「公孫氏の帶方郡設置と曹魏の樂浪帶方二郡」[17]이란 論文 中에 詳細한 硏究를 發表하였거니와, 博士의 說에 의하면 公孫康의 樂浪郡 分割의 結果, 韓國人의 朝貢을 管掌하는 權能은 樂浪郡으로부터 帶方郡에 옴기어 가고, 二郡이 魏의 有가 된 뒤에도 얼마 동안은 그대로 내려오다가, 드디어 諸韓國을 二分하야 그 一半을 樂浪郡에 朝貢케 하려는 新制가 創始되었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야 博士는 말하되 「ここに辰韓八國とある辰韓は, 韓傳の 別の條に 明記してある如く 十二圈に分れてゐたのであるから, 帶方郡の所屬は 四國に 減ぜられたわけであらう」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로써 보면 韓傳別條에 記示한 辰韓十二國이란 것은, 앞서도 屢次 辯述한 바와 같이, 撰者가 弁辰二十餘國中 辰王에 從屬된 十二國을 辰韓의 것으로 誤認 誤記한 것인즉, 여기 所謂 辰韓 八國을 거기에 求하는 것은 不可한 양으▶P116로 생각한다. 나의 解釋으로는 「辰韓八國」은 漢北의 地라고 생각되는 韓(辰韓)那奚等數十國 中에 包含되는 것으로, 특히 이 八國만을 樂浪郡에 分屬시키려 한 것은 그것이 漢代 以來 樂浪과의 무슨 特殊의 關係를 가젔든 所以가 아닌가한다. 一步를 내켜 생각하면, 即 이 八國은 본시 舊眞番郡 十五縣 중(七縣은 樂浪에 倂合)의 八縣으로 後에 辰韓의 有가 되어서도 朝謁 朝貢 其他로 因하야 樂浪과 特殊의 關係를 가젔든 것인 듯하며, 그리하야 이때 八國만은 前日의 狀態대로 樂浪에 隸屬케 하고 其餘의 辰韓諸國은 帶方에 屬하게 하였든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이때 吏譯의 異同이 있었다는 것은 아마 이 變革의 趣旨를 傳達하는 通譯者 中에 혹은 말하기를 朝謁朝貢關係의 分屬으로써 하지 아니하고, 實質上의 領土的 分割의 事實로처럼 訛傳한것인 듯하다. 그래서 辰韓의 臣智(渠帥)는 韓人(辰韓)을 激忿시키어 帶方의 崎離營이란 곳을 攻擊하는 行爲에까지 다달었고, 드디어 二郡 太守의 出征을 보게된 所以다. 崎離營은 帶方郡 內의 地이므로, 今日의 黃海道 內에 當할 것은 勿論이어니와, 平山의 舊騏麟驛인 同郡 麟山面 麒麟里의 名이 이와 近似함을 보면, 이곳이 바루 그곳인듯하다. 이 戰爭에 帶方太守 弓遵은 戰死하게 되었든 이만치 韓人의 攻擊이 猛烈하였든 모양이었으나, 畢竟은 韓人側이 大不利에 빠저 「二郡遂滅韓」이라고까지 大書하였다. 滅韓 二字는 池內 博士의 說과 같이 너무나 誇張에 지나친 筆法인듯싶고 실상은 前記 那奚等 數十國의 降服한 事實을 이 같이 大書한 것인 듯하다. 如何間 辰韓은 이 戰爭의 結果로 多少의 打擊을 받은 것은 事實이었으며, 따라서 部落의 統御도 無能하여지고 漢北 一帶의 地는 거이 無統一狀態에 있었든 모양이다. 辰韓의 一要素로 장차 百濟國의 王室이 될 夫餘氏의 建國的 工作은 실상은 이 時期에 胚胎되었든 것이 아닌가 한다. 百濟(最初 國號는 慰禮인 듯)의 建國은 次節에 仔細히 論述할 바와 같이 古尒王晩年에 된 것 같으며, 三國史記에 所記된 古尒以前의 諸王은 다 部落國家時代의 渠帥거나 혹은 全혀 後에 追尊한 王이거나 할 것이다. 同書百▶P117濟本紀 古尒王 十三年秋八月條를 보면, 「魏幽州刺史毌丘儉與樂浪太守劉茂․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라고 한 記載가 있으나-여기 朔方太守 王遵은 即 帶方太守 弓遵의 誤이거니와-이는 後世의 史家가 魏志 濊傳에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 擧邑降」이라 한 記事에 依하야 附會한것인듯 하므로 거기에는 考慮의 價値가 없는것이다. 그러나 百濟의 建國은 正始七年의 事變을 契機로 하야 그후 얼마되지 아니하야 實現되었든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 논술한 낙랑대방 대 진한 관계 사실에 의하여 나는 선유들의 거의 상상하지 못한 제점에까지 추구하여 들어갔지만, 무엇보다도 주의할 것은 나의 주장하는 진한의 위치가 이 사실에 의하여 일층 확실성을 가지게 된 그것이다. 진한과 낙랑대방이 지리적으로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었기에, 상술함과 같은 사실의 교섭이 생한 것이며, 취중(就中) 진한의 신지(臣智)가 병을 들어 대방을 공격한 사실로써 보면, 더욱 양자의 지리적 접근에 있어 사과반함이 있다. 만일 진한의 위치가 재래의 설과 같이 경상도 방면에 있었다고 하면 지리적으로 격리한 양자 간에 이러한 사실이 용이히 발생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심을 억제하기 어렵다. 요컨대 재래의 ‘진한은 신라의 선이라’하는 설은 이상 논술함과 같은 여러 가지의 불합리를 포함한 것이므로, 그것은 가짜 진한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 정말 진한은 백제가 그곳에서 일어나 이를 통일한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안된다. 진한의 연원이 한왕 준 및 그 부하에 의하여 발하고 그 사회가 右渠 유민의 내주에 의하여 팽대되고 또 폐진번 8현의 몰입에 의하여 지역이 확대되고 족유의 요소가 복잡하게 되었지만, 그 국가적 건설의 공작은 부여씨에 의하여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
쪽수▶P117-2以上 論述한 樂浪帶方 對 辰韓 關係 事實에 依하야 吾人은 先儒들의 거이 想像하지 못한 諸點에까지 追求하야 들어갓지만, 무엇보다도 注意할것은 나의 主張하는 辰韓의 位置가 이 事實에 依하야 一層 確實性을 가지게 된 그것이다. 辰韓과 樂浪帶方이 地理的으로 서루 密接한 關係가 있었기에, 上述함과 같은 事實의 交涉이 生한 것이며, 就中 辰韓의 臣智가 兵을 들어 帶方을 攻擊한 事實로써 보면, 더욱 兩者의 地理的 接近에 있어 思過半함이 있다. 만일 辰韓의 位置가 在來의 說과 같이 慶尙道 方面에 있었다고 하면 地理的으로 隔離한 兩者 間에 이러한 事實이 容易히 發生할 수 있었을가 하는 疑心을 抑制하기 어렵다. 要컨대 在來의 「辰韓은 新羅의 先이라」하는 說은 以上 論述함과 같은 여러 가지의 不合理를 包含한 것이므로, 그것은 僞辰韓으로 돌릴 수밖에 없고, 정말 辰韓은 百濟가 그곳에서 일어나 이를 統一한 것이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辰韓의 淵源이 韓王準 및 그 部下에 依하야 發하고 그 社會가 右渠 遺民의 來住에 依하야 膨大되고 또 廢眞番八縣의 沒入에 依하야 地域이 擴大되고 族類의 要素가 複雜하게 되었지만, 그 國家的 建設의 工作은 夫餘氏에 依하야 實現되였다고 볼 수 있다. (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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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硏經齋全集(成海應著) 故事類(少華鳳俗攷).
  2. 後魏書地形志, 樂良郡條.
  3. 硏經齋集卷五 「記樂羅王墓」條를 보면(年代의 表示는 없으나)鳳山郡 南十里 南川上 古墳 中에서 「故樂羅王墓」라고 쓴 字畵古拙의 石刻이 보이였다 한다. 그 石刻은 지금 얻어 볼 수 없지만, 樂羅는 卽樂浪의 同音異寫일 것이다.
  4. 漢書卷二十八, 地理志 樂浪郡條註.
  5. 朝鮮學報 第一卷 第一號 「古朝鮮に於ける政治規範」(崔南善 論文).
  6. 雜攷 第二輯 上, 六十六面 (鮎貝房之進 著).
  7. 三國志 魏志 東夷傳韓條, 裴松之註 所引 魏略文 參照.
  8. 雜攷 第二輯上, 六六頁 (鮎貝房之進著).
  9. 我邦疆域考 「馬韓考」(丁若鏞 著)及海東繹史續卷三, 馬韓條(韓鎭書 著).
  10. 同上 「辰韓考」及「辰韓」條.
  11. 三國史記卷四十六, 崔致遠傳所引.
  12. 東國地理誌 三韓按說(韓百謙著).
  13. 「百濟慰禮城考」(未發表).
  14. 여기 所謂 熊川은 公州의 熊津이 아니요 今日의 安城川이 그것에 當한다 함은, 故大原利武氏도 雜誌 朝鮮第一七十六號에 「箕準及其後裔の馬韓國」이라고 題한 글 가운데 이미 말하였지만, 今 安城川流域에는 熊橋里 俗稱 「고무다리」(安城郡 孔道面)란 地名이 있고 또 그 上流에는 熊月谷이란 곳도 있으니, 이들 俗名은 물론 熊川이란 河名에서 생겼을 것이다. 이 河川은 近來 平澤 以東에는 水量이 豊富치 못하고 舟楫의 通行도 보지 못하지만, 昔日에는(本學報 第一卷中에 旣述함과 같이) 今日과 反對의 現象이었든 모양이다.
  15. 史學雜誌 第四十編 第五號, 拙稿 「眞番郡考」 參照.
  16. 史學雜誌 第四十編 第五號, 拙稿 「眞番郡考」 參照.
  17. 史苑 第二卷 第六號






현대문주


  1. 연경재전집(성해응저) 고사류(소화봉속고)
  2. 후위서지형지, 낙랑군조
  3. 연경재집 권 5. 「기낙라왕묘」조를 보면(연대의 표시는 없으나)봉산군 남쪽 10리 남천상 고분 중에서 「고낙라왕묘」라고 쓴 자화고졸의 석각이 보이였다 한다. 그 석각은 지금 얻어 볼 수 없지만, 낙라는 즉 낙랑의 동음이사일 것이다.
  4. 한서 권28, 지리지 낙랑군조주.
  5. 조선학보 제1권 제1호 「古朝鮮に於ける政治規範」(최남선 논문).
  6. 잡고 제2집 상, 66면 (점패방지진 저).
  7. 삼국지 위지 동이전한조, 배송지주 소인 위략문 참조.
  8. 잡고 제2집 상, 66쪽 (점패방지진 저).
  9. 아방강역고 「마한고」(정약용 저) 및 해동역사 속권3, 마한조(한진서 저).
  10. 아방강역고 「마한고」(정약용 저) 및 해동역사 속권3 「진한고」 및 「진한」조.
  11. 삼국사기 권46, 최치원전소인.
  12. 동국지리지 삼한안설(한백겸 저).
  13. 「백제위례성고」(미발표).
  14. 여기 소위 웅천은 공주의 웅진이 아니요 금일의 안성천이 그것에 당한다 함은, 고대원리무씨도 잡지 조선 제176호에 「箕準及其後裔の馬韓國」이라고 제한 글 가운데 이미 말하였지만, 지금 안성천 유역에는 웅교리 속칭 「고무다리」(안성군 공도면)란 지명이 있고 또 그 상류에는 웅월곡이란 곳도 있으니, 이들 속명은 물론 웅천이란 강 이름에서 생겼을 것이다. 이 하천은 근래 평택 이동에는 수량이 풍부치 못하고 주즙의 통행도 보지 못하지만, 옛날에는(본 학보 제1권 중에 기술함과 같이) 금일과 반대의 현상이었던 모양이다.
  15. 사학잡지 제40편 제5호, 졸고 「眞番郡考」 참조.
  16. 사학잡지 제40편 제5호, 졸고 「眞番郡考」 참조.
  17. 사원 제2권 제6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