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3)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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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한나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8일 (화) 15:12 판 (본문2: 마한 및 진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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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3)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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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3)-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04월
시작쪽 029쪽 종료쪽 057쪽 전체쪽 029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4. 전삼한(全三韓)의 경역


'한의 명칭의 기원'에 다음하여 제기되는 문제는 한 전체(韓全體)의 총경역에 대한 일고이나, 이는 또한 장차 세밀히 논난할 각 삼한 부분 문제에 들어갈 준비적 고찰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전 삼한의 경역에 관하여는, 이때 제1장에서도 좀 언급한 바와 같이, 위략(한원확씨주소인)에
쪽수▶P29-1「韓의 名稱의 起源」에 다음하야 提起되는 問題는 韓全體의 總境域에 對한 一考이나, 이는 또한 장차 細密히 論難할 各三韓 部分問題에 들어갈 準備的考察이라고도 볼수 있는 것이다 全三韓의 境域에 關하여는, 이때 第一章에서도 좀 言及한바와 같이, 魏略(翰苑確氏注所引)에

韓 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地方四千里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云云

쪽수▶P29-2 韓 在帶方南 東西以海爲限 地方四千里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云云
이라하고, 위지 동이전한조 첫머리에도
쪽수▶P29-3 이라하고, 魏志 東夷傳韓條 첫머리에도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云云

쪽수▶P29-4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云云
이라하여, 비교적 뚜렷한 기사를 보여주거니와, 위지에는 「南與倭接」의 일구가 더 명시되어 있으며, 또 동서예조의 첫머리에는 濾南與辰韓接의 일절이 보여있다. 위지의 기사는 대개 위략의 것으로 습수한 것인듯하며, 위 기재가 다 중국의 삼국시대의 사실에 속함은 물론이니, 이에 의하면 삼한은 대방과 예의 남에 위치하여 동과 서는 바다로써 한하고 남은 왜와 접하여 지방이 사천리 가량이나 된다는 것이다. (위략위지의 기사를 승수한 한후서동이전에 馬 韓… 其北與樂浪……接이라고 한것은, 대방군 설치 이전, 즉 대방의 땅이 낙랑군 소속 하에 있던 후한시대를 표준으로 삼아 한말에 지나지못한다) 단 南與倭接은, 한이-남으로-바다를 대하여 왜와 근접하여 있다는 말로 활간할 것이요, 결코 한왜의 경이 육지로 연접하였다는 의미의 말로 오해할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 중의 혹은 이 접자에 구니되어 당시 반도 남부 지방에 왜인 소속의 영지(領地)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이는 변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아전인수격의 왜곡한 논법이니, 동서 즉 위지 왜인조에는 분명히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 하고, 또 그 밑에 從郡(〇帶方)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耶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 至對馬國이라고 하여있다. 구야한(가야 혹은 가락)은 즉 변진이십여국중의 하나로 지금 김해 지방에 해당하거니와, 그곳은 전한국의 남단이요 대마도 및 구주지방의 월안으로, 당시 대방의 사선이 한역의 서남해안을 연행하여 왜국에 왕섭하는데있어 반드시 기박하던 곳이었다. 그래서 到其北岸狗邪韓國이라고한것이며, 소위 칠천여리니 천여리니하는 리수는, 물론 정확한 측량에서 얻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북으로 한과 대방 및 예와의 경계는, 말할 것도 없이 육지로 인접하였던 것이니, 그중 대방은 그 북의 낙랑군과 함께 당시 위령 하에 속한 자로, 현대문주1▶그곳(대방)이 지금의 자비령 이남 황해도 일대에 불과하였던 것은 졸고 「眞番郡考」[a 1]를 비롯하여 앞서 옥설한 바이며, 또 대방의 동쪽인(동예)는 그북의 옥저와 함께 고임둔의 후로, 그(예) 지역이 지금의 함경남도의 남부 내지 강원도의 북부 일대-좀더 분명히 말하면 정평이남 철령철 원이북의 땅-에 지나지 못하였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현대문주2▶졸고「玄菟郡及臨屯郡考」[a 2] 공조) 그러면 대방 및 동예의 남, 반도의 땅으로 분거한 삼한의 전지역은, 대개 금일의 경기・충청・강원(일부)경상・전라의 제도(諸道), 즉 중부 조선으로부터 이남의 땅을 포함하였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한의 북경은 -제족쟁충의 땅이었든 만치-때로 신축을 면치 못하여, 그 계선이 다른 동서남의 삼면과 같이 그렇게 단순하고 일정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에 관하여는 오히려 차장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할 기회가 있겠으므로 여기서는 보류하여 두기로 한다. 그런데 전삼한의 지방을 사천리라고 한 위략위지의 기사에 대하여는 의심이 없지 아니하니, 물론 여기 지방이니 혹은 방이니 한 것은, 동서남북의 광무(면적)를 의미한 말이어니와, 한위시대의 일리는 조선의 구(舊)일리, 일본의 사정허에 해당한즉, 전삼한의 광무가 사천리라하면 암만해도 실제와는 부합치 않는 지나친 리수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역시 정확한 측량에 의한 리수는 아닐 것이므로 이러한 숫자에는 신용을 둘 수 없고 다소 할인하여 보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쪽수▶P29-5이라하야, 比較的 뚜렷한 記事를 보여주거니와, 魏志에는 「南與倭接」의 一句가 더 明示되어 있으며, 또 同書濊條의 ▶P30 첫머리에는 「濾南與辰韓接」의 一節이 보여있다. 魏志의 記事는 대개 魏略의 것으르 襲修한것인듯하며, 右記載가 다 中國의 三國時代의 事實에 屬함은 勿論이니, 이에 依하면 三韓은 帶方과 濊의 南에 位置하야 東과 西는 海로써 限하고 南은 倭와 接하야 地方이 四千里가량이나 된다는 것이다. (魏略魏志의 記事를 承修한 漢後書東夷傳에 「馬 韓… 其北與樂浪……接」이라고 한것은, 帶方郡 設置以前, 即帶方의 地가 樂浪郡 所屬下에 있든 後漢時代를 標準으로삼아 한말에 지나지못한다) 但 「南與倭接」은, 韓이-南으로-海를 帶하야 倭와 近接하여 있다는말로 活看할 것이요, 決코 韓倭의 境이 陸地로 連接하였다는 意味의 말로 誤解할 것은 아니다. (日本學者中의 或은 이接字에 拘泥되어 當時 半島南部地方에 倭人所屬의 領地가 있었다고 主張하는이도 있으나, 이는 辨할거리도 되지못하는 我田引水格의 歪曲한 論法이니, 同書 即魏志 倭人條에는 分明히 「倭人在帶方東南大海之中」이라 하고, 또 그밑에 「從郡(〇帶方)至倭 循海岸水行 歷韓國 乍南乍東 到其北岸狗耶韓國 七千餘里 始度一海 千餘里 至對馬國」이라고 하여있다. 狗耶韓(伽耶혹은駕洛)은 即 弁辰二十餘國中의 하나로 今 金海地方에 該當하거니와, 그곳은 全韓國의 南端이요 對馬島及九州地方의 越岸으로, 當時 帶方의 使船이 韓阈의 西南海岸을 沿行하야 倭國에 徃涉하는데있어 반듯이 寄泊하든곳이었다. 그래서 到其北岸狗邪韓國이라고한것이며, 所謂七千餘里니 千餘里니하는 里數는, 勿論 精確한 測量에서 얻은것이라고는 할수없다. ) 北으로 韓과 帶方 及 濊와의 境界는, 말할것도 없이 陸地로 隣接하였든 것이니, 其中 帶方은 그北의 樂浪郡과 共히 當時 魏領下에 屬한者로, 원문주1▶그곳(帶方)이 지금의 慈悲嶺以南 黃海道 一帶에 不過하였든 것은 拙稿 「眞番郡考」[1]를 비롯하야앞서 屋說한바이며, 또 帶方의 東인(東濊)는 그北의 沃沮와 함께 故臨屯의 後로, 그(濊) 地域이 지금의 咸鏡南道의 南部 乃至 江原道의 北部 一帶-좀더 分明이 말하면 定平以南 鐵嶺鐵 原以北의 地-에 ▶P31-1지나지 못하였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원문주2▶拙稿「玄菟郡及臨屯郡考」[2] 恭照) 그러면 帶方 及 東穢의 南, 半島의 地로 分居한 三韓의 全地域은, 대개 今日의 京畿・忠淸・江原(一部)慶尙・全羅의 諸道, 即 中部朝鮮으로부터 以南의 를 包含하였든 것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韓의 北境은 -諸族爭衝의 地이었든 만치-때로 伸縮을 免치못하야, 그界線이 다른東西南의 三面과 같이 그렇게 單純하고 一定하지는 아니하였다. 이에 關하여는 오히려 次章에서 더 具體的으로 말할 機會가 있겠으므로 여기서는 保留하여 두기로 한다. 그런데 全三韓의 地方을 四千里라고한 魏略魏志의 記事에 對하여는 疑心이 없지아니하니, 勿論 여기 地方이니 혹은 方이니 한것은, 東西南北의 廣袤(面積)룰 意味한 말이어니와, 漢魏時代의 一里는 朝鮮의 舊一里, 日本의 四町許에 該當한즉, 全三韓의 廣袤가 四千里라하면 암만해도 實際와는 符合치안는 지나친 里數라고 하지아니할수없다. 이역시 精確한 測量에 依한 里數는 아닐것이므로 이러한 數字에는 信用을 둘수없고 多少 割引하여 보지아니하면 아니된다.



































본문2: 마한 및 진한 문제


이상을 삼한 연구의 총론이라고 할 수 있다면, 이로부터의 논술은 그것의 각론이라고 볼 수 있으니, 삼한 중에도 제일 먼저 신해석을 요할 것은, 마한 및 진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대개 이 두 문제는 삼한 문제 중에 가장 중요하고도 곤란한 자에 속하여, 이것이 다소라도 해결된다면 다른 변진(변한) 문제는 저절로 빙석될 것이며, 또 마한과 진한은 성질상 서로 분리하여 논할수 없는 관계의 것이라 함이 나의 이 연구의 방침이요 안목이다. 지금껏 삼한문제가 미해결대로 있게 된 소이와. 그로 인하여 소를 다른 문제에까지 끼친 것은, 전혀 이 마한 및 진한 문제에 대한 학자의 심각한 고찰이 없고, 더욱 진한 문제와 같은 것은 종래 오랫동안(어림없이) 이를 오해하여 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른바 신고찰은 무슨 특이한 신자료를 발견함에 인함이 아니라, 즉 재래 누구나 다 잘 알고 만져 오던 그 자료에 대하여-분석비판 추리고증으로써 한 새로운 해역과 고찰을 시험함에 불과한 것이다. 이 소론이 이 문제 및 이에 관련되는 다른 중요문제에 대하여 다소 해몰의 서광을 주게된다면, 나로서는 무엇보다의 행(幸)이라고 생각하겠다.
쪽수▶P31-2以上을 三韓硏究의 總論이라고 할수있다면, 일로부터의 論述은 그것의 各論이라고 볼수있으니, 三韓中에도 第一▶P32-1 먼저 新解釋을 要할 것은, 馬韓 及 辰韓問題라고 생각한다. 대개 이 두 問題는 三韓問題中에 가장 重要하고도 困難한者에 屬하야, 이것이 多少라도 解决된다면 다른 弁辰(弁韓) 問題는 저절로 氷釋될것이며, 또 馬韓과 辰韓은 性質上 서로 分離하야 論할수 없는 關係의 것이라 함이 나의 이 硏究의 方針이요 眼目이다. 于今껏 三韓問題가 未解決대로 있게된 所以와. 그로因하야 素를 他問題에까지 끼처준것은, 全혀 이 馬韓 及辰韓問題에 對한 學者의 深刻한 考察이 없고, 더욱 辰韓問題와 같은것은 從來 오래동안(어림없이) 이를 誤解하여 온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이른바 新考察은 무슨 特異한 新資料틀 發見함에 囚함이 아니라, 即 在來 누구나 다 잘알고 만저 오던 그 資料에 對하야-分析批判 推理考證으로써 한 새로운 解驛과 考察을 試함에 不過한 것이다. 이 小論이 이 問題 및 이에 關聯되는 다른 重要問題에 對하야 多少 解没의 曙光을 주게된다면, 나로서는 무엇보담의 幸이라고 생각하겠다.
마한 및 진한문제를 해석함에는, 먼저 위지의 소위마한오십여국(그중에는 진한부락의 중심지도 포함함) 및 그 수부(首府)에 대한 지리적 내지 정치적 고찰과 동서 진한조 기사의 해석을 요하는 동시에 마한과 진한과의 역사지리적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설이 좀 복잡할듯하므로 2, 3의 소항목에 나누어 논술하려한다.
쪽수▶P32-2馬韓 及 辰韓問題를 解釋함에는, 먼저 魏志의 所謂馬韓五十餘國(其中에는 辰韓部落의 中心地도 包含함) 及其首府에 對한 地理的 乃至 政治的 考察과 同書 辰韓條 記事의 解釋을 要하는 同時에 馬韓과 辰韓과의 歷史地理的 關係를 삺일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다. 考說이 좀 複雜할듯하므로 二三의 小項日에 나누어 論述하려한다.
(갑) 위지의 소위 마한 오십여 국과 그 정치적 중심지
쪽수▶P32-3(甲) 魏志의 所謂馬韓五十餘國과 그 政治旳中心地
위지 동이전 한조를 보면, 전장에 인한 전삼한경역에 관한 기사에 다음하여, 다음과 같은 수단의 기재가 있다.
쪽수▶P32-4 魏志 東夷傳 韓條틀 보면, 前章에 引한 全三韓境域에 關한 記事에 다음하야, 如左한 數段의 記載가 있다.
(A) 馬韓在西……散在山海間云云
쪽수▶P32-5 (A) 馬韓在西……散在山海間云云
(B) 유원양국(1)・모수국(2)・상외국(3)・소석색국(4)・대석색국(5)・우휴솔탁국(6)・신궤활국(7)・백제국(8)・속로부사국(9)・일화국(10)・고탄자국(11)・고리국(12)・노람국(13)・월지국(14)・자리모로국(15)・소위건국(16)・고원국(17)・막로국(18)・비리국(19)・고리비국(20)・신흔국(21)・지침국(22)・구로국(23)・비미국(24)・감해비리국(25)・고포국(26)・치리국국(27)・염로국(28)・아림국(29)・사로국(30)・내비리국(31)・감해국(32)・만로국(33)・벽비리국(34)・구사오단국(35)・일리국(36)・부미국(37)・지반국(38)・구소국(39)・첩로국(40)・모로비리국(41)・신소도국(42)・막로국(43)・고랍국(44)・임소반국(45)・신운신국(46)・여래비리국(47)・초산도비리국(48)・일난국(49)・구해국(50)・부운국(51)・부사분사국(52)・원지국(53)・건마국(54)・초리국(55) 범 50여국 대국만여가 소국수천가 총십여만호
쪽수▶P32-6 (B) 有爰襄國(1)・牟水國(2)・桑外國(3)・小石索國(4)・大石索國(5)・優休率涿國(6)・臣潰活國(7)・伯濟國(8)・速盧不斯國(9)・日華國(10)・古▶P33-1誕者國(11)・古離國(12)・怒藍國(13)・月支國(14)・咨離牟盧國(15)・素謂乾國(16)・古爰國(17)・莫盧國(18)・卑離國(19)・古離卑國(20)・臣釁國(21)・支侵國(22)・狗盧國(23)・卑彌國(24)・監奚卑離國(25)・古蒲國(26)・致利鞠國(27)・冉路國(28)・兒林國(29)・駟盧國(30)・內卑離國(31)・感奚國(32)・萬盧國(33)・辟卑離國(34)・臼斯烏旦國(35)・一離國(36)・不彌國(37)・支半國(38)・狗素國(39)・捷盧國(40)・牟盧卑離國(41)・臣蘇塗國(42)・莫盧國(43)・古臘國(44)・臨素半國(45)・臣雲新國(46)・如來卑離國(47)・楚山塗卑離國(48)・一難國(49)・狗奚國(50)・不雲國(51)・不斯濆邪國(52)・爰池國(53)・乾馬國(54)・楚離國(55)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C) 진왕치월지국
쪽수▶P33-2 (C) 辰王治月支國
이들 위지의 기재는 경서에는 서로 연속되어 있는 것을, 지금 필자가 논술의 편의상, 우(右)와 같이 부호를 붙이어 삼단에 나누어 논것이어니와, 우문(右文)중 A단은 마한의 위치를 말한것이며, B단은 소위 마한오십여국의 칭호와 및 그 국세의 대략을 보인것이며 C단은 진왕의 치도 즉 마한의 수부를 기시한것이다, 마한의 위치를 '在西'라 '散在山海間' 이라한 것을 보면-이 물론 그 동쪽 (실상은 동북쪽에 있는 북방유이족의 진한부락(마한소제)을 제외한 부분으로 순연한 마한인의 부락은 반도중부이남 서해안지대에 많이 위치하고 분포되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우의 소위오십여국도 대부분은 마한인 부락에 속한 자이나, 그 전부가 그렇다고는 할 수 없고, 그중에는 진한인부락의 몇 부분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함이, 나의 장차 진술할 신견해의 하나이니, 진한은 실제 정치상에 있어서는 마한의 일부분으로 마한인의 주인 진왕의 지배를 받고, 그들 스스로는 독립의 주를 가지지 못하였었다. 진왕은 진국시대이래의 칭호로 본시 '辰國王'의 의미의 표시에 불과한 것이지만, 삼한시대에도 그와 같이 불렀던 모양이며, 이때의 진왕의 정치적지위는 아마 진국 시대와는 좀 달라젔을것이나, 적어도 우기(右記) 오십여국의 최고지배자격으로 있었던 것은 우의 B, C단의 연속된 문면에 의하여 작연한 바이며, 그의 치도인 월지국은 즉 그 오십여국중의 하나인 월지국 그것으로 지금 직산・성환・평역 등지를 포함하였던 곳이리라 함은 이미 앞서 말한 바이어니와, 이 역시 진국시대이래의 고도(古都)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하면 이때의 진왕의 칭호와 치도는 진국시대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辰國'의 명호만은 전한말 후한초로부터 낙랑한대들에게 상칭되지 않는 진명으로 화하였으니 그것은 기술한 바와 같이 '辰'의 일명이 객운인 신래족의 '韓'부락에게 전가되어 '辰韓'의 명을 생하고, 또 '韓'의 칭은 점점 확대하여 진의 주체인 '고마'족에까지 보급되어 '馬韓'의 명을 생한 소이다). 그러나 진왕의 치도는 이후 얼마아니되어 즉 서진초에 이르러 남천의 운을 당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되나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마한의 동북계에 백제국이 굴기하여 마한의 중심지를 나날이 침략하여 마지아니하였든 까닭이며 그때 이 침략에 견디지못한 마한의 수부(진왕의 치도)는 어디로 옮기어 갔느냐하면, 후술할바와같이 건마국(금마) 즉 지금의 전북익산지방으로 천동되었다고 인정한다. 종래에 마한의 수도를 익산에 차정하여온 것은 오랜 전설에 의한 것으로서, 근거가 없지 못하되, 이곳을 처음부터의 마한의 수도로 잡는 구견해에 대하여는 불찬성이다. 나는 이렇게 마한의 남천사실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 전기의 수도는 월지국, 후기의 것은 건마국이라고 단언하거니와, 이에 관하여는 오히려 후술할 기회가 있겠다고 믿는다. (위지에 이 마한의 남천사실이 기재되지 아니한 것은, 위지의 근본적 기사가 이 사실의 발생이전에 된것이므로서다).
쪽수▶P33-3 이들 魏志의 記載는 京書에는 서로 連續되어 있는 것을, 지금 筆者가 論述의 便宜上, 右와 같이 符號를 붙이어 三段에 나누어 논것이어니와, 右文中 A段은 馬韓의 位置를 말한것이며, B段은 所謂 馬韓五十餘國의 稱號와 및 그 國勢의 大略을 보인것이며 C段은 辰王의 治都 即 馬韓의 首府를 記示한것이다, 馬韓의 位置를 「在西」라 「散在山海間」 이라한 것을 보면-이 勿論 그 東쪽 (실상은 東北쪽에 있는 北方流移族의 辰韓部落(馬韓所制)을 除外한 部分으로 純然한 馬韓人의 部落은 半島中部以南 西海岸地帶에 많이 位置하고 分布되었든 것을 알수있으며, 우의 所謂五十餘國도 大部分은 馬韓人部落에 屬한者이나, 其全部가 그렇다고는 할수없고, 其中에는 辰韓人部落의 멫 部分도 包含되어 있으리라 함이, 나의 장차 陳述할 新見解의 하나이니, 辰韓은 實際 政治上에 있어서는 馬韓의 一部分으로 馬韓人의 主인 辰王의 支配를 받고, 그들 스스로는 獨立의 主를 가지지 못하였었다. 辰王은 辰國時代以來의 稱呼로 本是 「辰國王」의 義의 表示에 不過한것이지만, 三韓時代에도 그와같이 불렀든 모양이며, 이떄의 辰王의 政治的地位는 아마 辰國時代와는 좀 달라젔을것이나, 적어도 右記 五十餘國의 最高支配者格으로 있었든것은 우의 B, C段의 連續된 文面에 ▶P34 依하야 灼然한바이며, 그의 治都인 月支國은 即 그 五十餘國中의 一인 月支國 그것으로 지금 稷山・成歡・平譯等地를 包含하였든 곳이리라함은 이미 앞서 말한바이어니와, 이 역시 辰國時代以來의 古都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하면 이때의 辰王의 稱呼와 治都는 辰國時代의 것과 다름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다만 「辰國」의 名呼만은 前漢末 後漢初로부터 樂浪漢大들에게 常稱되지 안는 陳名으로 化하였으니 그것은 旣述한바와 같이 「辰」의 一名이 客韻인 新來族의 「韓」部落에게 轉嫁되어 「辰韓」의 名을 生하고, 또 「韓」의 稱은 漸漸 擴大하야 辰의 主體인 「고마」族에까지 普及되어 「馬韓」의 名을 生한 所以다). 그러나 辰王의 治都는 이후 얼마아니되어 卽 西晋初에 이르러 南遷의 運을 當하지 아니하면 아니될 事情이 잇었다고 생각되나니, 그것은 다름아니라 馬韓의 東北界에 百濟國이 崛起하야 馬韓의 中心地를 나날이 侵略하여 마지아니하였든 까닭이며 그때 이侵略에 견디지못한 馬韓의 首府(辰王의 治都)는 어디로 옴기어 갓느냐하면, 後述할바와갈이 乾馬國(金馬) 卽 今의 全北益山地方으로 遷動되었다고 認定한다. 從來에 馬韓의 首都틀 益山에 此定하여온 것은 오랜 傳說에 依한것으로서, 根據가 없지못하되, 이곳을 처음부터의 馬韓의 首都로 잡는 舊見解에 對하여는 不贊成이다. 나는 이렇게 馬韓의 南遷事實을 認定하는 同時에 그 前期의 首都는 月支國, 後期의 것은 乾馬國이라고 斷言하거니와, 이에 關하여는 오히려 後述할 機會가 있겠다고 믿는다. (魏志에 이 馬韓의 南遷事實이 記載되지 아니한 것은, 魏志의 根本的 記事가 이 事實의 發生以前에 된것이므로서다).
다음에 논할 것은 상기 오십여국의 국수(國數) 및 위치 차정에 관한 문제인데, 대체 이 오십여국에 대한 위지의 기재는 어느 때를 표준으로한 것이냐 하면-이는 물론 지나의 삼국시대를 표준으로한 사실임에 틀림이 없으나, 나는 삼국시대중에도 특히 위제왕방정시칠년(246A.D.)이후에 속한 사실의 기재라고 본다. 정시 칠년에는 후에 상술할 바와 같이 한・위(낙랑대방)간에 일대충돌이 생하여 그 결과 한의 나해 등 수십국이 위(낙랑대방)에 강복하게되었으며, 위지 한전에는 이를 과장하여 '二郡(樂浪.帶方) 遂滅韓'이라고까지 대서하였거니와, 동전에 열거한 삼한열국(읍) 명중에 나해의 명이 보이지 아니함을 보면 이들 수십국은 거기서 제외된 것이 분명하고, 따라서 삼한열국(읍)에 관한 위지의 기사는 이 변훈이 있든 정시칠년이후의 사실임을 더욱 잘 알 것이다. (한위충돌초에 한군이 먼저 대방군의 기리영(황해도평산의구기린역, 즉 지금의 동군 인산면 기린리인듯)이란 곳을 공격하여, 일로 인하여 낙랑대방이군태수의 창정을 보게되고 더욱 이때 대방태수궁준은 전사까지 하였다 함으로 그 충돌은 상당히 컸던 모양이며, 또 마침내 한인 측이 대불리(大不利)에 빠져 나해 등 수십국이 부락을 들어 강복하게 된 것을 이와같이 '二郡遂滅韓'이라고까지 한 것을 보면-한인측에서든 어떠하였던지-위인측에서는 이를 중대시하였든 모양이다). 낙랑대방의 위인과의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교섭이 빈번하든 한인의 부락은, 대개 (한의) 북경 내지 그 근처에 있던 자이었을 것이므로, 나해 등 국읍도 낙랑대방에서 멀지 아니한 곳에 위치하였을 것은 용역히 짐작되지만, 나해란 지금의 어느곳인지 당처를 꼭 지정해내기는 곤란하다. 그러나 지리상, 북방(낙랑대방)에 근접하였든 관계로 보아 이들 수십 국은 본시 마한의 지배를 받든 부락(진한부락의 일부)들임이 무의하며, 인하여 오십여 국은 원래부터 그 수효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특히 정시칠년 한위충돌이후의 변동으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오십여국의 상문(위지)에 나타나는 국명을 계산하면 총합오십오국이나, 기중 '莫盧國'(18 및 43)은 동명의 첩출이 있으므로 그 일(其一)을 제하면 54국이 되나니, 후한서 (동이전한조)에 '馬韓在西 有五十四國'이라한 소이며, 한원주소인의 위략에는 '凡有小國五十六'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떻게 계산하고 한 말인지-혹 오산은 아닌지-모르겠다. 54국이란것도 반드시 정확을 얻은 수라고 할는지 일의문(一疑問)이니, 사자에 물고한 문학박사 내등호차랑씨와 같은 이는 상기국읍중 '不彌國'(37) '支半國'(38) '狗素國'(39)의 3국은, 일본서기신공기사십구년조에 보이는 한(마한) 지명중의 '布彌支' '半古' 2국의 오례이리라하여,(3) 이를 '不彌支國' '半狗國'의 2읍으로 보고 '素'자는 하의 '捷盧國'(40)에 붙이어 '素捷盧國'으로 볼 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매우 온당한 견해로 생각되나니 이 설에 쫓아 다시 계산한다면, 54국은 53국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오례과 첩출은 이밖에도 또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우선 저 '一離國'(36) '一難國'(49)과 같은 것도, 이자(離字)와 난우(難宇)가 자형이 근사하여 서로 와오되기 쉬운 것인즉 동명의 첩출이 아니라고 확보하기어려우며, 또 '楚山塗卑離國'(48)이란 것은 실상 '楚山國'과 '塗卑離國'의 2읍으로 볼 것을 잘못 연서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밖에 글자의 전도, 탈루와 서를 따라 자의 이동이 더러있는 것은, 다음에 순차로 변하려하거니와, 이와 병론할 각 50 여국의 소재위치의 비정문제는 역시 단순한 것이아니여서, 그중에 비정해얻지 못한 자가 오분의 일 가량은 되며, 또 그럴듯하게 비정될수 있는자중에도 완전히 확실성을 가진자와 그렇지 못한자가 각각 절반씩이나 된다. 그러나 이는 나의 지금의 고구를 표준으로 삼아 한말이므로 물론 장래에는 그중에 정정될 자도 있을것이요, 또 새로 거득 발견될 자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논술의 편의상 국명에 번호를 붙이어 순차로 소견을 개진하면
쪽수▶P34-2 다음에 論할 것은 上記 五十餘國의 國數 및 位置 此定에 關한 問題인데, 대체 이 五十餘國에 對한 魏志의 記載는 어느때를 標準으로한 것이냐 하면-이는 勿論 支那의 三國時代를 標準으로한 事實임에 틀림이없으나, 나는 三國時代中에도 特히 魏齊王芳正始七年(246A.D.)以後에 屬한 事實의 記載라고 본다. 正始七年에는 後에 詳述할바와 같▶P35이 韓・魏(樂浪帶方)間에 一大衝突이 生하야 그結果 韓의 那奚等 數十國이 魏(樂浪帶方〕에 降服하게되었으며,(1) 魏志 韓傳에는 이를 誇張하야 「二郡(樂浪.帶方) 遂滅韓」이라고까지 大書하였거니와,(2) 同傳에 列舉한 三韓列國(邑) 名中에 那奚의 名이 보이지 아니함을 보면 이들 數十國은 거기서 除外된 것이 分明하고, 따라서 三韓列國(邑)에 關한 魏志의 記事는 이 變勳이 있든 正始七年以後의 事實임을 더욱 잘 알 것이다. (韓魏衝突初에 韓軍이 먼저 帶方郡의 崎離營(黃海道平山의舊麒麟驛, 卽 今의同郡麟山面麒麟里인듯)이란 곳을 攻擊하야, 일로 因하야 樂浪帶方二郡太守의 昌征을 보게되고 더욱 이때 帶方太守弓遵은 戰死까지 하였다 함으로 그衝突은 相當히 컷던 모양이며, 또 마츰내 韓人側이 大不利에 빠저 那奚等數十國이 部落을 들어 降服하게 된 것을 右와같이 「二郡遂滅韓」이라고까지 한것을 보면-韓人側에서든 어떠하였던지-魏人側에서는 이를 重大視하였든 모양이다). 樂浪帶方의 魏人과의 政治的 經濟的 軍事的 交涉이 頻繁하든 韓人의 部落은, 대개 (韓의) 北境 乃至 그 近處에 있든者이었을 것이므로, 那奚等 國邑도 樂浪帶方에서 멀지 아니한곳에 位置하였을것은 容易히 짐작되지만, 那奚란 지금의 어느곳인지 當處를 꼭 指定해내기는 困難하다. 그러나 地理上, 北方(樂浪帶方)에 近接하였든 關係로 보아 이들 數十國은 본시 馬韓의 支配를 받든 部落(辰韓部落의 一部)들임이 無疑하며, 因하야 五十餘國은 元來부터 그 數爻에 限定된 것이 아니라 特히 正始七年 韓魏衝突以後의 變動으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되겠다. 五十餘國의 上文(魏志)에 나타나는 國名을 計算하면 總合五十五國이나, 其中 「莫盧國」(一八 及 四三)은 同名의 疊出이 있으므로 其一을 除하면 五十四國이 되나니, 後漢書 (東夷傳韓條)에 「馬韓在西 有五十四國」이라한 所以며, 翰苑注所引의 魏略에는 「凡有小國五十六」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어떻게 計算하고 한말인지-혹 誤算은 아닌지-모르겠다. 五十四國이란것도 반듯이 正確을 얻은 數라고 할는지 一疑問이니, 蓑者에 物▶P36-1故한 文學博士 內藤虎次郞氏와 같은이는 上記國邑中 「不彌國」(三七) 「支半國」(三八) 「狗素國」(三九)의 三國은, 日本書紀神功紀四十九年條에 보이는 韓(馬韓) 地名中의 「布彌支」 「半古」 二國의 誤列이리라하야,(3) 이를 「不彌支國」 「半狗國」의 二邑으로 보고 「素」字는 下의 「捷盧國」(四0)에 붗이어 「素捷盧國」으로 볼것이라고 하였다. 이는 매우 穩當한 見解로 생각되나니 이說에 쫓아 다시 計算한다면, 五十四國은 五十三國이 되어야 할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誤列과 疊出은 이밖에도 또 더러 있을지 모르겠다. 于先 저 「一離國」(三六) 「一難國」(四九)과 가튼것도, 離字와 難宇가 字形이 近似하야 서로 訛誤되기 쉬운것인즉 同名의 疊出이 아니라고 確保하기어려우며, 또 楚山塗卑離國」(四八)이란 것은 실상 「楚山國」과 「塗卑離國」의 二邑으로 볼 것을 잘못 連書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밖에 글자의 顚倒, 脫漏와 書를 따라 字의 異同이 더러있는것은, 다음에 順次로 辨하려하거니와, 이와 並論할 各五十餘國의 所在位置의 比定問題는 역시 單純한것이아니여서, 其中에 比定해얻지 못한者가 五分의一 가량은 되며, 또 그럴듯하게 比定될수 있는者中에도 完全히 確實性을 가진者와 그렇지 못한者가 各各 折半씩이나 된다. 그러나 이는 나의 지금의 考究를 標準으로 삼아 한말이므로 勿論 將來에는 其中에 訂正될 者도 있을것이요, 또 새로 據得發見될者도 있으리라고 믿는다. 論述의 便宜上 國名에 番號를 붗이어 順次로 所見을 開陳하면
(1) 원양국…………동국여지승람(권9) 남양부 고적조에 '載陽廢縣 在府東十里 古安陽縣 高麗顯宗九年 改今名'이라 고려사(권56) 지리지1 당성군조에도 '載陽縣古安陽縣 顯宗九年 稱今名'이라한 '安陽'은 상당히 오래된 이름으로 이 '爰襄'과 음이 자못 근이할뿐더러, 안양(재양)을 포함한 당성군(남양부)은 고래로 부터(역사가 깊은) 저명한 곳이요, 또 이곳 지명에-안양・재양・남양-등 늘 양(양(襄)과동음)자가 따라옴을 보면, 이 일대는 예전의 원양국의 소재지가 아니었을가한다. 안양은 지금 수원군 음덕면.
쪽수▶P36-2(一) 爰襄國…………東國輿地勝覽(券九) 南陽府 古跡條에 「載陽廢縣 在府東十里 古安陽縣 高麗顯宗九年 改今名」이라 高麗史(卷五十六) 地理志一 唐城郡條에도 「載陽縣古安陽縣 顯宗九年 稱今名」이라한 「安陽」은 相當히 오래된 이름으로 이 「爰襄」과 音이 자못 近以할뿐더러, 安陽(載陽)을 包含한 唐城郡(南陽府)은 古來로 부터(歷史가깊은) 著名한 곳이요, 또 이곳 地名에-安陽・載陽・南陽-等 늘 陽(襄과同音)字가 딸어옴을 보면, 이 一帶는 昔日의 ▶P37-1 爰襄國의 所在地가 아니었을가한다. 安陽은 今水原郡 陰德面.
(2) 모수국…………은 고구려광개토왕비문에 보이는 백제정복성명중의 하나인 모수성 그것으로 추측되거니와 지금의 수원(속명 매산)이 고구려시대에 매홀(수성의 의미)의 이름을 얻고 또 신라일통시대에 수성으로 개칭(역칭) 되고 고려시대에도 수주 혹은 수원으로 명명되어, 그이름에 늘 수(水)자가 붙어 내려옴을 보면, 모수국, 모수성은 즉 수원읍의 땅이 아닌가 의심한다.
쪽수▶P37-2(二) 牟水國…………은 高句麗廣開土王碑文에 보이는 百濟征服城名中의 一인 牟水城 그것으로 推測되거니와 지금의 水原(俗名매산)이 高句麗時代에 買忽(水城의 義)의 名을 얻고 또 新羅一統時代에 水城으로 改稱(譯稱) 되고 高麗時代에도 水州 혹은 水原으로 命名되어, 그이름에 늘 水字가 붙어 내려옴을 보면, 牟水國, 牟水城은 卽 水原邑의 地가아닌가 의심한다.
(3) 상외국…………은 려대(麗代)의 쌍부현인 지금 수원군 장안・우정 양면(兩面) 일대의 땅인듯한데 장안면사곡리의 속명이 삼귀 혹은 삼괴라고하니, 쌍부, 삼괴 사곡 등명은 바로 상외(외의 고음은 go)의 전음이 아닌가한다.
쪽수▶P37-3 (三) 桑外國…………은 麗代의 雙阜縣인 今水原郡 長安・雨汀兩面一帶의 地인듯한데 長安面沙谷里의 俗名이 三歸 혹은 三槐라고하니, 雙阜, 三槐 沙谷等名은 바루 桑外(外의古音은go)의 轉音이 아닌가한다.
(4) 소석삭국 (5) 대석삭국………… '小石索國'은 위서백제전의 백제왕(개로왕)표문에 이른바 '西界小石山海中云云'의 소석산 그곳이리라함은 일즉이 선유중에도 이를 간파한이가(4) 있지만, 나도 여기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그 자세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다만 표문에 '西界'또는, '北國海中'의 어(語)가 있는 것을 보아-물론 이 표문을 보내든 때는 백제남천하기 수년전인즉-소석산은 지금 경기서해빈의 어느곳이나 혹은 동해중의 어느 섬이 아니었든가 하는 막연한 추측뿐이며, 이와 병거된 '大石索國'도 그 이름으로 보아 소석삭국과 나란히 위치하였던 것이리라고 밖에는 아직 고구의 도리가 없다.
쪽수▶P37-4(四) 小石索國 (五) 大石索國………… 「小石索國」은 魏書百濟傳의 百濟王(盖鹵王)表文에 이른바 「西界小石山海中云云」의 小石山 그곳이리라함은 일즉이 先儒中에도 이를 看破한이가(4) 있지만, 나도 여기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그 仔細한 位置는 알 수 없고, 다만 表文에 「西界」또는, 「北國海中」의 語가 있는 것을 보아-勿論 이 表文을 보내든때는 百濟南遷하기 數年前인즉-小石山은 今 京畿西海濱의 어느곳이나 혹은 同海中의 어느섬이 아니었든가 하는 漠然한 推測뿐이며, 이와 並擧된 「大石索國」도 그이름으로 보아 小石索國과 나란이 位置하었든 것이리라고 밖에는 아직 考究의 道理가 없다.
(6) 우휴모탁국………… 은 후의 고구려시대의 주부토군(부평, 지금의 부천군)에 차정할수있으니, '優休'는 '유'(u) 로 반절되어 후에 주 즉'쥬'(ju)로 전한 것 같고, '牟'는 '夫'로 변한듯하며, 또 '涿'과 '吐'는 거의 동음으로 제(뚝,덕) 혹은 양(돌)을 의미한 말일듯하다. 주부토군이 신유일통시대에 장제군으로 개칭되고 또 고구려시대의 내토군(지금 제천군)이 역시 신라통시대에 내제군이라고 개명된것을보면, 토는 확실히 제를 의미한 말로, 바로 현금어의 '둑' '뚝' '덕' 그것인즉, '涿'도 이러한 의미의 어를 사음한것이라고 해석된다. 단 '優休'와 '主'는 무엇을 의미한 말인지 자세치 못하나, 라대(羅代)의 이름이 장제인 것으로 보면, 혹시 장・치의 의미나 아닌가 의심하며, 모는 물(水)의 사음인듯하고 부는 벌 혹 불(평야)의 사음인듯하다. (구부평읍동에 한강으로 주입하는 직포란 내가 있는것을 참고로 말하여둔다)
쪽수▶P37-5 (六) 優休牟涿國………… 은 後의 高句麗時代의 主夫吐郡若(富平, 지금의 富川郡)에 此定할수있으니, 「優休」는 「유」(u) 로 反切되어 後에 主 卽「쥬」(ju)로 轉한것같고, 「牟」는 「夫」로 變한듯하며, 또 「涿」과 「吐」는 거이 同音으로 堤(뚝.,덕) 혹은 梁(돌)을 意味한 말일듯하다. 主夫吐郡이 新維一統時代에 長堤郡으로 改稱되고 또 高句麗時代의▶P38-1 奈吐郡(今堤川郡)이 역시 新羅統時代에 奈堤郡이라고 改名된것을보면, 吐는 確實히 堤를 意味한 말로, 바루 現今語의 「둑」 「뚝」 「덕」 그것인즉, 「涿」도 이러한 意味의 語를 寫音한것이라고 解釋된다. 但 「優休」와 「主」는 무엇을 意味한 말인지 仔細치 못하나, 羅代의 名이 長提인 것으로 보면, 혹시 長・置의 義나 아닌가 의심하며, 牟는 물(水)의 寫音인듯하고 夫는 벌 혹 불(平野)의 寫音인듯하다. (舊富平邑東에 漢江으로 注入하는 直浦란 내가 있는것을 參考로 말하여둔다)
(7) 신독활국…………은 동조하문에는 독신리아로 되어있고 또 남송본 삼국지에는 신독고국으로 되어있으나, 전자의 독신은 신지의 전도, 리아는 활아(아는 R음)의 오기요, 후자의 고(沽)도 활(活)의 와(訛)니, 나는 이 신궤활(아)국을 후일 고구려시대의 사복홀(일운사읍을) 라대(羅代)의 적성인 지금의 양성지방에 비정한다, 독활(아)・복・파을은 다 동음의 이사로 적의 방언인 붉을 혹은 붉・밝을의 어(語)임은 라대(羅代)에 이곳을 적성이라 개칭한것으로써 넉넉이 알 수 있으며, 신(臣)과 사(沙)는-마치 타지명좌에 보이는 신(新)과 사(斯)가 음이 공통됨과 같이 거의 동음으로 적의 의미를 일층 modify한 형용사가 아닌가한다, 즉 샛 붉은, 섓 밝은(진적)의 샛의 차음인듯하다.
쪽수▶P38-2(七) 臣瀆活國…………은 同條下文에는 瀆臣離兒로 되어있고 또 南宋本 三國志에는 臣瀆沽國으로 되어있으나, 前者의 瀆臣은 臣漬의 顚倒, 離兒는 活兒(兒는R音)의 誤요, 後者의 沽도 活의 訛니, 나는 이 臣潰活(兒)國을 後日 高句麗時代의 沙伏忽(一云沙邑乙) 羅代의 赤城인 지금의 陽城地方에 比定한다, 瀆活(兒)・伏・巴乙은 다 同音의 異寫로 赤의 方言인 붉을 혹은 붉・밝을의 語임은 羅代에 이곳을 赤城이라 改稱한것으로써 넉넉이 알수있으며, 臣과 沙는-마치 他地名屮에 보이는 新과 斯가 音이 共通됨과 같이 거이 同音으로 赤의 義를 一層 modify한 形容詞가 아닌가한다, 即 샛 붉은, 섓 밝은(眞赤)의 샛의 借音인듯하다.
(8) 백제국…………은 말할 것도 없이 후일 백제국의 구신(舊身)으로 지금 광주 지방이었든 것이 무의하다.
쪽수▶P38-3 (八) 伯濟國…………은 말할 것도 없이 後日 百濟國의 舊身으로 今 廣州地方이었든 것이 無疑하다.
(9) 연로부사국…………동국여지승람(권10) 통진현 고적조에 '守安廢縣 在縣南十五里 本 高句麗首爾忽 新羅景德王 改戌城云云'이라한 수이와 술(戌)은 이 '連盧'와 음이 근사하고, 또 동현(통진)건치연혁조에 '平淮押縣 一云 比史城 一云別史波衣'라고한 비사와 별사는 '不斯'의 음과 거의 일치하고본즉, 연로부사국은 바루 이 수이 (혹 수(戍)) ・ 비사 (혹 별사)의 이현을 포함한 통진 지방이 아니었든가한다 (연로와 부사가 실상은 서로 인접한 두 나라의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연로・수이(술이・술)은 다 봉(수리의 의미임에 틀림없을 듯하며, 부사・비사・별사는 저 전주(완산)의 고명인 비사벌, 창녕의 고명인 비자화・ 비자벌의 비사・비자・비자와 같은 어형으로, 후자의 어의가 점패방지진(點貝房之進)씨의 설과같이(5) 광, 색의 방언인 '빛'그것이라고 한다면, 전자의 어의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쪽수▶P38-4 (九) 連盧不斯國…………東國輿地勝覽(卷十) 通津縣 古跡條에 「守安廢縣 在縣南十五里 本 高句麗首爾忽 新羅景德王 改戌城云云」이라한 首爾와 戌은 이 「連盧」와 音이 近似하고, 또 同縣(通津)建置沿革條에 「平淮押縣 一云 比史城 一云別史波衣」라고한 比史와 別史는 「不斯」의 音과 거이 一致하고본즉, 連盧不斯國은 바루 이 首爾 (혹戍) ・ 比史 (혹別史)의 二縣을 包含한 通津地方이 아니었든가한다 (連盧와 不斯가 실상은 서로 隣接한 二國의 名인지도 모르겠▶P39-1다. 連盧・首爾(述爾・戌)은 다 峰(수리의 義임에 틀림없을 듯하며, 不斯・比史・別史는 저 全州(完山)의 古名인 比斯伐, 昌寧의 古名인 比自火・ 比子伐의 比斯・比自・比子와 같은 語形으로, 後者의 語義가 點貝房之進氏의 說과같이(5) 光, 色의 方言인 「빛」그것이라고 한다면, 前者의 語義도 그러하다고 볼 수 있다.
(10) 일화국 (11) 고탄자국…………둘 다 미상
쪽수▶P39-2 (一0) 日華國 (一一) 古誕者國…………並未詳
(12) 고리국…………은 광개토왕비문(백제성명중)에 나타나는 고리성에 비정하고 싶다, 고리성은 동비문에 아단성(금아차산)등 한북 제성(漢北諸城)과 열서된 것을 보면 역시 한수 북쪽의 땅으로 추측되거니와, 지금 양주 풍양의 고명이 고구려(소유)시대에 골의노현이라고 하였던 것을 참고하면 골의는 곧 고리 고리와 음이 일치한즉 (노는 천양의 의미) 그것들을 이곳에 비정하여 불가함이 없을 줄로 안다.
쪽수▶P39-3 (一二) 古離國…………은 廣開土王碑文(百濟城名中)에 나타나는 古利城에 比定하고 싶다, 古利城은 同碑文에 阿旦城(今峨嵯山)等 漢北諸城과 列書된 것을 보면 역시 漢水 北쪽의 地로 推測되거니와, 今 楊州豊壤의 古名이 高句麗(所有)時代에 骨衣奴縣이라고 하였든것을 參考하면 骨衣는 곧 古利 古離와 音이 一致한즉 (奴는川壤의義) 그것들을 이곳에 比定하야 不可함이 없을줄로 안다.
(13) 노람국…………은 지금 경기도 이천군의 일부가 된 음죽의 땅인 듯. 음죽은 고구려시대의 노음죽현이니, 노음과 노람과의 비정이 또한 가능할 것이다.
쪽수▶P39-4(一三) 怒藍國…………은 今 京畿道利川郡의 一部가 된 陰竹의 地인 듯. 陰竹은 高句麗時代의 奴音竹縣이니, 奴音과 怒藍과의 比定이 또한 可能할 것이다.
(14) 월지국…………은 위략 후한서에는 목지국으로 되어있음과, 또 그곳이 진왕의 소도로 지금의 직산・성환・평택 등지를 포함하였든 지역이리라함은 기술한바이므로 여기에는 번거로운 설명을 하지 아니한다.
쪽수▶P39-5 (一四) 月支國…………은 魏略 後漢書에는 目支國으로 되어있음과, 또 그곳이 辰王의 所都로 지금의 稷山・成歡・平澤等地를 包含하였든 地域이리라함은 旣述한바이므로 여기에는 번거로운 說明을 하지 아니한다.
(15) 자리모로국…………동국여지승람(권8)음죽현고적조를 보면 '迲村處 在縣西十里0迲 古今書無之. 本國方言 謂束草若新爲迲 合玆乙阿三字爲訓 而無音義'라고한 것이 있다. 겁(迲)는 즉 '자래' 혹은 '잘애'로 훈(訓)하여 속초의 의미를 가진 속자어니와, 겁촌은 조선말로 훈독하면 '자래말' 혹은 '잘애말'이니, '咨離牟盧'는 곧 이 겁촌의 구명으로 우의 노람국과 인접하였든 것이 아닌가한다. 모로는 읍촌의 의미로 현금어의 '마을' '마심' 일본어의 'ムラ'에 해당한 것이다.
쪽수▶P39-6 (一五) 咨離牟盧國…………東國輿地勝覽(卷八)陰竹縣古跡條를 보면 「迲村處 在縣西十里0迲 古今書無之. 本國方言 謂束草若新爲迲 合玆乙阿三字爲訓 而無音義」라고한 것이 있다. 迲는 即 「자래」 혹은 「잘애」로 訓하야 束草의 義를 가진 俗字어니와, 迲村은 朝鮮말로 訓讀하면 「자래말」 혹은 「잘애말」이니, 「咨離牟盧」는 곧 이 迲村의 舊名으로 우의 怒藍國과 隣接하였든 것이 아닌가한다. 牟盧는 邑村의 義로 現今語의 「마을」 「마심」 日本語의 「ムラ」에 該當한 ▶P40-1것이다.
(16) 소위건국 (17) 고원국…………둘 다 미상
쪽수▶P40-2 (一六) 素謂乾國 (一七) 古爰國…………並未詳
(18) 막로국…………은 백제시대의 마서랑현(지금 전북 옥구군)이나 혹은 (동 시대의) 마로현(지금 전남 광양군)에 비정함이 어떠할가한다.
쪽수▶P40-3 (一八) 莫盧國…………은 百濟時代의 馬西良縣(今全北沃溝郡)이나 혹은 (同代의) 馬老縣(今全南光陽郡)에 比定함이 어떠할가한다.
(19) 비리국…………은 백제의 부리, 신라의 벌(伐)・발(發)・불(弗)・화(火)와 같은 말로 흔히 국읍명 끝에 붙는것임으로 간단히 비리국이라고 함은 좀 우스운 것같고, 실상은 그 앞에 무슨 글자가 탈락된 듯하니, 일본의 고(故) 나아통세씨와 같이 이를 백제시대의 부부리현(지금 전북 옥구군 회면)에 구한다고하면, 비리국은 비비리국의 탈오가 아닌가한다.
쪽수▶P40-4 (一九) 卑離國…………은 百濟의 夫里, 新羅의 伐・發・弗・火와 같은 말로 흔이 國邑名 끝에 붙는것임으로 單히 卑離國이라고 함은 좀 우숩운것같고, 실상은 그우에 무슨 글자가 脫落된듯하니, 日本의 故那阿通世氏와 같이(6) 이를 百濟時代의 夫夫里縣(今全北沃溝郡繪面)에 求한다고하면, 卑離國은 卑卑離國의 脫誤가 아닌가한다.
(20) 고리비국…………은 한원주소인 위략에는 고비리국으로 되어있으니, 리비는 물론 비리의 전도일것이요 점도 고자의 와오일것이다(한원주 기사는 오탈이 심한것도 있지만, 이와같이 본래의 면목을 전하여 주는듯한 것 도 많다). 그러면 고비리국은 백제의 고사부리군, 신라일통이후의 고부군(지금 같음)에 비정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쪽수▶P40-5 (二0) 古離卑國…………은 翰苑注所引 魏略에는 古卑離國으로 되어있으니, 離卑는 勿論 卑離의 顚倒일것이요 占도 古字의 訛誤일것이다(翰苑注 記事는 誤脫이 甚한것도 있지만, 이와같이 本來의 面目을 傳하여 주는듯한 것 도 많다). 그러면 古卑離國은 百濟의 古沙夫里郡, 新羅一統以後의 古阜郡(今同)에 比定할수있다고 생각된다.
(21) 신흔국………… 위의 나가통세(那珂通世)씨는 이를 백제시대의 진현현(충남구진잠현)에 비정하였는데, 나도 아직 이 설에 쫓는다.
쪽수▶P40-6 (二一) 臣釁國………… 우의 那珂通世氏는 이를 百濟時代의 眞峴縣(忠南舊鎭岑縣)에 比定하였는데,(7) 나도 아직 이 說에 쫓는다.
(22) 지침국…………은 삼국사기 지리지 끝에 붙은 당의 신치백제주군명중에 나타나는 지심주 지심현, 일본서기 응신기팔년조소인의 백제기에 보이는 지침 그것에 틀림이 없거니와, 전자에 의하면 지심주의 속현구개를 열거하되, '己汶縣 本今勿 支潯縣 本只彡村 馬津縣 本孤山 子來縣 本夫首只 解禮縣 本皆利伊 古魯縣 本古麻只 平夷縣 本知留 珊瑚縣 本沙好薩 隆化縣 本居斯勿'이라고하였다. 구현중 기문현인 금물은 구덕산(충남) 마진현인 고산은 금례산(동상)자래현인 부수지는 즉 벌수지(혹운 부지)로 今唐津(同上)의 땅이며, 해례현인 개리이는 금면천(여지승각동읍고적조에 보이는 가리제부곡이 이것인 듯), 평이현인 지류는 말송보화씨의 설과 같이 지육(백제지육현)의 대음으로 지금 서산군 지곡면인듯하고, 그외 고로현(목고마지) 산호(본 사호살) 융화현(본 거사물)의 삼현의 위치는 분명하지 못하나, 여기의 중심 문제로 나머지 일현인 지심현(지삼촌)에 대하여는 김정호 선생의 대동지지(권5)대흥연혁조에 '本百濟只彡村 唐改支 潯 爲支潯州領縣'이라하여 그 위치를 지금 대흥에 지정하였다. 김선생의 설이 어디 근거한 말인지는 자세하지 못하나, 지심주의 제현치가 위와 같이 예산 덕산 당진 면천 서산 등지에 있었다고 하면, 이들과의 인접지로 역사지리상 저명한 처소의 하나인 대흥에 또한 그치현이 없었을 리가 없은즉, 김선생의 설은 무슨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으로 나는 본다. 인하여 위지의 지침국의 소재는 지금 대흥 지방에 불과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잡고의 저자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씨는 지침의 위치를 홍주지방에 비정하였으나, 홍주 지방은 나의 소견으로는 다음에 말할 감해비리국의 소재지인듯 함으로, 그 설에는 찬성하기 어렵다.
쪽수▶P40-7 (二二) 支侵國…………은 三國史記 地理志 끝에 붙은 唐의 新置百濟州郡名中에 나타나는 支潯州 支潯縣, 日本書紀 應神紀八年條所引의 百濟記에 보이는 支侵그것에 틀림이 없거니와, 前者에 依하면 支潯州의 屬縣九個를 列擧하되, 「己汶縣 本今勿 支潯縣 本只彡村 馬津縣 本孤山 子來縣 本夫首只 解禮縣 本皆利伊 古魯縣 本古麻只 平夷縣 本知留 珊瑚縣 本沙好薩 隆化縣 本居斯勿」이라고하였다. 九縣中 己汶縣인 今勿은 舊德山(忠南) 馬津縣인 孤山은 今禮山(同上)子來縣▶P41-1인 夫首只는 卽 伐首只(或云夫只)로 今唐津(同上)의 地며, 解禮縣인 皆利伊는 今沔川(輿地勝覺同邑古跡條에 보이는 加里諸部曲이 이것인 듯), 平夷縣인 知留는 末松保和氏의 說과(8) 같이 知六(百濟知六縣)의 對音으로 今 瑞山郡地谷面인듯하고, 其外 古魯縣(木古麻只) 珊瑚(本沙好薩) 隆化縣(本居斯勿)의 三縣의 位置는 分明하지못하나, 여기의 中心 問題로 나머지 一縣인 支潯縣(只彡村)에 對하여는 金正浩先生의 大東地志(卷五)大興沿革條에 「本百濟只彡村 唐改支 潯 爲支潯州領縣」이라하야 그 位置를 今 大興에 指定하였다. 金先生의 說이 어디 根據한 말인지는 仔細하지못하나, 支潯州의 諸縣治가 右와 같이 禮山 德山 唐津 沔川 瑞山等地에 있었다고 하면, 이들과의 隣接地로 歷史地理上 著名한 處所의 하나인 大興에 또한 그置縣이 없었을 理가 없은즉, 金先生의 說은 무슨 確實한 根據가 있는것으로 나는본다. 因하야 魏志의 支侵國의 所在는 지금 大興地方에 不過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雜故의 著者 鮎貝房之進氏는 支侵의 位置를 洪州地方에 比定하였으나,(9) 洪州地方은 나의 所見으로는 다음에 말할 監奚卑離國의 所在地인듯 함으로, 그說에는 贊成하기 어렵다.
(23) 구로국…………은 백제의 고랑부리현(즉 지금의 충남 청양군)인듯하니, 구(狗)와 고(古), 려(慮)와 랑(良)는 고대에 있어서 흔히 상통되는 음이다.
쪽수▶P41-2 (二三) 狗盧國…………은 百濟의 古良夫里縣(卽 今의 忠南靑陽郡)인듯하니, 狗와古, 慮와良는 古代에 있어서 흔이 相通되는 音이다.
(24) 비미국…………당의 백제(웅진)도독부 13현 중의 하나인 '賓汶縣本比勿'은 즉 이 비미국의 후신으로 인식되거니와, 비물은 지금의 어느 곳이냐 하면 위의 김정호 선생은 이를 구비인현(지금 충남 서산에 합군)의 땅으로 명서하여, 비인은 '本百濟比勿(一云比衆) 唐改賓汶 爲熊津都督府領縣'이라고 하었다 삼국사기지리지(3) 고려사지리지(1) 및 여지승람(권20)에는 비인은 '本百濟比衆縣'이라고만 쓰여있을뿐이요 비물의 일명이 또 있는 것은 보여있지 아니하나, 중(衆)의 훈(訓)이 '무리'임을 알진대 비중이 곧 비물이요 차물이 곧 비중임을 용이히 추지할것이다. 연즉 김선생의 위의 기재는 역시 확거가 있는 것으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쪽수▶P41-3 (二四) 卑彌國…………唐의 百濟(熊津)都督府十三縣中의 一인 賓汶縣本比勿」은 即 이卑彌國의 後身으로 認識되거니와, 比勿은 지금의 어느곳이냐 하면 우의 金正浩先生은 이를 舊庇仁縣(今忠南瑞山에合郡)의 地로 明書하야, 庇仁은 「本百濟比勿(一云比衆) 唐改賓汶 爲熊津都督府領縣」이라고(10) 하었다 三國史記地理志(三) 高麗史地理志(一) 및 輿地勝覽(卷二十)에는 庇仁은 「本百濟比衆縣」이라고만 쓰여잇을뿐이요 比勿의 一名이 또 있는것은 보여있지 아니하나, 衆의 訓이 ▶P42-1「무리」임을 알진대 比衆이 곧 比勿이요 此勿이 곧 比衆임을 容易히 推知할것이다. 然即 金先生의 右의 記載는 역시 確據가 있는것으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되겠다.
(25) 감해비리국…………은 당의 백제도독부직할13현중의 '甘蓋縣本古莫夫里'라한 그곳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며 감해(해의 고음은 khai)와 감개는 다 고막개(개는 포 혹 천의 의미) 혹은 '곰개'의 대음인 것이 의심없다. 고막은 바루 '고마'의 차음자로, 이러한 이름이 붙은 지명은 고금을 통하여 양호 지방에 하도 많으니까, 이를 어느 곳에 비정 하여야 좋을런지 언뜻 갈피가 나스지 안치만, 도독부직할의 제현이 대개 금부여군인듯한 굴이현을 중심으로하여(최초), 금 정산・청양・보령・비인・은진 등 호서지방에 분치되었든 것인즉, 그 중의 하나인 고막부리의 소재도 이 호서 지방에 구함이 당연할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호서 지방에 있어 '고마'의 명을 가졌던 가장 저명한 곳으로 말하면, 백제 구도(舊都)의 하나인 웅진성(양서소위고마성・수서소위거발성・북사소위구원성・일본서기소위구마노리성) 즉금의 공주에 우(右)할 자 없으므로 고막부리를 이에 비정함이 가장 좋은 것 같이도 생각될는지 모르지만, 웅진은 당초에 도독부13현중에 들지 아니하고 도리어 동명주 사현 중에 하나로 들어있은즉, 그것을 이곳에 비정할 수는 없는것이다. 웅진 이외의 땅으로-호서에 있어서-그러한 지명을 가지고 있는 곳은 금홍성 (구 홍주)이 제2위라고 할 수 있으니, 홍성은 금아산만으로 주입하는 삽교천의 상류인 금마천유역을 중심으로 하고있는 곳이어니와, 이 금마천의 이름은 오랜 것으로 이미 여지승람(권19) 홍주목조에도 그 이름이 보이며 현금에는 거기서(천명) 유래한 면명 내지 교명의 금마까지도 생기었지만, 이 금마야말로 고막의 대음일 것은 또한 의심없는 것이다. 더욱 신기한 것은 김정호 선생의 청구선표도(혹은 청구도라고도함)를 보면, 지금 이 금마면의 소재명이 대감개면으로 되어었으니, 이 면명도 역시 오랜 연원을 가지고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는 동시에 감개는 곧 저 감해 감개의 대음인 것이 분명하며, 지금도 금마천의 속명을 '곰개'라고 한다는 것을 들을 때, 나는 말할 수 없이 고금불변의 감에 환취하였다, 즉 감해(비리) 감개 고막(부리) 및 감개는 다 이 '곰개' 혹은 '고마개'에서 취한 것일지니, 지금 홍성을 감해비리국(백제의고막부리)의 소재지로 인정하여 하등의 구애가 없을 줄로 안다. (단 김정호 선생은 이 홍주의 땅을 도독부직할의 감개현으로 보지아니하고 지심주의 일현(지류)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지견의 일하점이라고 할 수 있다).
쪽수▶P42-2 (二五) 監奚卑離國…………은 唐의 百濟都督府直轄十三縣中의 「甘蓋縣本古莫夫里」라한 그곳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며 監奚(奚의 古音은 khai)와 甘蓋는 다 古莫개(개는 浦 혹 川의義) 혹은 「곰개」의 對音인 것이 의심없다. 古莫은 바루 「고마」의 借音字로, 이러한 이름이 붙은 地名은 古今을 通하야 兩湖地方에 하도 많으니까, 이를 어느곳에 比定 하여야 조흘는지 언뜻 갈피가 나스지 안치만, 都督府直轄의 諸縣이 대개 今扶餘郡인듯한 崛夷縣을 中心으로하야(最初), 今 定山・靑陽・保寧・庇仁・恩津等 湖西地方에 分置되었든 것인즉,(11) 其中의 一인 古莫夫里의 所在도 이 湖西地方에 求함이 當然할 것은 勿論이다. 그런데 湖西地方에 있어 「고마」의 名을 가젔든 가장 著名한 곳으로 말하면, 百濟舊都의 一인 熊津城(梁書所謂固麻城・隋書所謂居拨城・北史所謂俱援城・日本書紀所謂久麻怒利城) 即今의 公州에 右할者 없으므로 古莫夫里를 이에 比定함이 가장 조흔 것 같이도 생각될는지 모르지만, 熊津은 當初에 都督府十三縣中에 들지아니하고 도리어 東明州 四縣中에 하나로 들어있은즉, 그것을 이곳에 比定할 수는 없는것이다. 熊津以外의 地로-湖西에 있어서-그러한 地名을 가지고 있는 곳은 今洪城 (舊洪州)이 第二位라고 할수있으니, 洪城은 今牙山灣으로 注入하는 揷橋川의 上流인 金馬川流域을 中心으로 하고있는 곳이어니와, 이 金馬川의 名은 오랜것으로 이미 輿地勝覽(卷十九) 洪州牧條에도 그이름이 보이며 現今에는 거기서(川名) 由來한 面名 乃至 校名의 金馬까지도생기었지만, 이金馬야말로 古莫의 對音일 것은 또한 의심없는것이다. 더욱 新奇한 것은 金正浩先生의 靑邱線表圖(혹은 靑邱圖라고도함)를 보면, 지금 이 金馬面의 所在名이 大甘介面으로 되어었으니, 이 面名도 역시 오랜 淵源을 가지고 내려▶P43-1온 것으로 생각되는 同時에 甘介는 곧 저 監奚 甘蓋의 對音인 것이 分明하며, 지금도 金馬川의 俗名을 「곰개」라고 한다는 것을 들을때, 나는 말할수없이 古今不變의 感에 幻醉하였다, 即 監奚(卑離) 甘蓋 古莫(夫里) 및 甘介는 다 이 「곰개」 혹은 「고마개」에서 取한것일지니, 今 洪城을 監奚卑離國(百濟의古莫夫里)의 所在地로 認定하야 何等의 拘碍가 없을줄로 안다. (但 金正浩先生은 이 洪州의 地를 都督府直轄의 甘蓋縣으로 보지아니하고 支潯州의 一縣(知留)으로 보았는데,(12) 그것은 知見의 一瑕點이라고 할수있다).
(26) 고포국…………미상
쪽수▶P43-2 (二六) 古蒲國…………未詳
(27) 치리국국…………은 백제의 지육현, 라대(羅代)의 지육현, 려대(麗代)의 지곡현인 지금 충남 서산郡 지곡면 일대의 땅인듯. 환언하면 지육・지육은 치리국(리국을 합음하면 육(六) 혹은 육(育)에 가까운 음이난다)의 전음인듯하다.
쪽수▶P43-3 (二七) 致利鞠國…………은 百濟의 知六縣, 羅代의 地育縣, 麗代의 地谷縣인 今忠南瑞山郡地谷面一帶의 地인듯. 换言하면 地六・地育은 致利鞠(利鞠을 合音하면 六 혹은 育에 가까운 音이난다)의 轉音인듯하다.
(28) 염로국…………은 백제의 아술현, 신라대(羅代)의 음봉현(일운 음잠)인 지금 충남 아산에 비정하고 싶다. 아술의 아의 훈이 '엄니'요 술(수리)의 의미가 봉(峯)인 것은, 라대(羅代)에 이를 음봉 혹은 음잠이라고 개칭한 것을 보아도 알겠으니, 아술은 즉 엄(니)수리라고 훈독하여야 될 것 (술은 흔히 지명 끝에 붙는 것)이다, 그러면 염로는 바로 이 '엄니'의 대음이 아니었든가한다. 이는 마치 저 염난수(압록강)가 엄리(대수)・엄표(掩淲)・엄표(掩淲) 등(표(淲). 표(㴲)는, 다 니(泥)의 와(訛))의 대음인 것과 마찬가지며, 여기 염로도 실상 엄리(대수)와 같은 의미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엄리는 대수의 의미라고 함이 학자의 통설이어니와 염로국으로 비정되는 아산이야말로 조선 서해안의 가장 깊이 들어간 아산만(세대중수의주입처)에 위치하였으므로 일찍이 그러한 이름을 들었을 법도 하다.
쪽수▶P43-4 (二八) 冉路國…………은 百濟의 牙述縣, 羅代의 陰峯縣(一云陰岑)인 今 忠南牙山에 比定하고 싶다. 牙述의 牙의 訓이 「엄니」요 述(수리)의 義가 峯인 것은, 羅代에 이를 陰峯 혹은 陰岑이라고 改稱한 것을 보아도 알겠으니, 牙述은 卽 엄(니)수리라고 訓讀하여야 될것 (述은 흔이 地名끝에 붙는것)이다, 그러면 冉路는 바루 이 「엄니」의 對音이 아니었든가한다. 이는 마치 저 鹽難水(鴨綠江)가 奄利(大水)・掩淲・掩淲等(淲. 㴲는, 다 泥의 訛)의 對音인것과 마찬가지며, 여기 冉路도 실상 奄利(大水)와 같은 意味의 말인지도 모르겠다. 奄利는 大水의 義라고함이 學者의 通說이어니와 冉路國으로 比定되는 牙山이야말로 朝鮮西海岸의 가장 깊이 들어간 牙山灣(細大衆水의注入處)에 位置하였으므로 일즉이 그러한 이름을 들었을법도하다.
(29)아림국…………나가통세(那珂通世)씨는 이를 백제의 설림군 즉 지금의 충남 서천군에 비정하였는데, 아직 그 설에 쫓는다.
쪽수▶P43-5 (二九)兒林國…………那珂通世氏는 이를 百濟의 舌林郡 即 今의 忠南舒川郡에 比定하였는데,(13) 아직그說에 쫓는다.
(30) 사로국…………은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씨의 설과 같이 백제의 사시랑현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니, 사시랑은 일운 사라라고 하였고, 라대(羅代)에는 신랑, 려대(麗代)에는 여양(여일작려(驪一作黎))이라고 개칭하였으며, 이조시대에는 폐현이 되어 홍주 (지금 홍성)의 일부분이 되었는데, 지금의 홍성군 장곡면 일대가 그곳이다.
쪽수▶P44-1 (三0) 駟盧國…………은 鮎貝房之進氏의 說과 같이 百濟의 沙尸良縣에 틀림없다고 생각되나니, 沙尸良은 一云 紗羅라고 하였고, 羅代에는 新良, 麗代에는 驪陽(驪一作黎)이라고 改稱하였으며, 李朝時代에는 廢縣이 되어 洪州 (今洪城)의 一部分이 되었는데, 지금의 洪城郡 長谷面 一帶가 그곳이다.
(31) 내비리국…………미상
쪽수▶P44-2 (三一) 內卑離國…………未詳
(32) 감해국…………은 우의 감해비리역의 감해와 같이 '곰개' 혹은 '고마개'의 대음인 것이 의심없거니와, '곰개'・'고마개'의 지명이 한둘이 아니므로 이 역시 현지비정에 있어 경솔히 속단할 수는 없으나, 감해(비리)를 호서지방에 구하여 홍주에 처치한 이상에는 이 감해는 자연 호남지방에 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본다면 전북의 함열(지금 익산에 합함)을 이에 가장 해당한 곳으로 추정치 아니할 수 없다. 함열(咸悅)은 라대(羅代) 이래의 칭호로 백제시대에는 감물아(현)라고 하였으니, 감물과 함열은 거이 동음이자다 '감물' '곰물' 혹은 -'고마물'의 차음자이며. 아(阿)는 변(邊)의 의미로 '가' 또는 '개'로 훈독하였던 것 같다 감물아에서 물(수)을 생략하면 곧 감해와 일치한 음이 나거니와, 본래 함열은 '고마'강인 금강의 하류역에 위치하여 실제 그곳에는 웅포 즉 '곰개'란 곳이 있으니 (웅포의 이름은 여지승기 동현산천조에도 보이고, 지금에는 그러한 면명까지 생기었다) 감물아・함열・웅포(곰개)는 다 감해와 관계가 있는 지명으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된다.
쪽수▶P44-3 (三二) 感奚國…………은 우의 監奚卑離阈의 監奚와 같이 「곰개」 혹은 「고마개」의 對音인 것이 의심없거니와, 「곰개」・「고마개」의 地名이 한둘이 아니므로 이역시 現地比定에 있어 輕率히 速斷할 수는 없으나, 監奚(卑離)를 湖西地方에 求하야 洪州에 處置한 以上에는 이感奚는 自然 湖南地方에 求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되며, 그리고 본다면 全北의 咸悅(今益山에合함)을 이에 가장 該當한 곳으로 推치 아니할수없다. 咸悅은 羅代以來의 稱呼로 百濟時代에는 甘勿阿(縣)라고 하였으니, 甘勿과 咸悅은 거이 同音異字다 「감물」 「곰물」 혹은 -「고마물」의 借音字이며. 阿는 邊의 義로 「가」 또는 「개」로 訓讀하였든 것 같다 甘勿阿에서 勿(水)을 略하면 곧 感奚와 一致한 音이 나거니와, 본래 咸悅은 「고마」江인 錦江의 下流域에 位置하야 實際 그곳에는 熊浦 卽 「곰개」란 곳이 있으니 (熊浦의 名은 輿地勝暨 同縣山川條에도 보이고, 지금에는 그러한 面名까지 생기었다) 甘勿阿・咸悅・熊浦(곰개)는 다 感奚와 關係가 있는 地名으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된다.
(33) 만로국…………은 한원옹씨주소인 위략에는 매로국(邁盧國)으로 되어있으니, 남제서백제전중에 보이는 매로(邁盧) 및 매라(邁羅)가 그것이며, 또 당의 백제도독부직할13현중의 하나인 매라현(邁羅縣)도 물론 그곳일 것이다. 도독부13현의 땅은 상술한 바와 같이 대개 호사지방(충남)의 일부에 불과하였는터인즉 매라현 역시 그 범위안에 위치되어 있었을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금의 어느 곳이 이에 해당하겠느냐하면, 나는 지금 충남 보령군의 일부가 된 남포(藍浦)를 들어 비정해 보려고한다. 남포는 라대(羅代) 이래(일통이후)의 칭호로, 백제시대에는 사포(일운 마산)현이라고 하였으니, 사포(寺浦)의 사(寺)는 '말' 혹은 '마을'로 훈독하었을 것이라고 해석된다. 지금도 관사자의 훈만은 '마을'(시)이라고 읽지만, 고대에는 사(寺)는-관사 승사를 물론하고-다 '마을' 혹은 '말'이라고 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사포의 일명이 마산인 것을 보면 여기 사(寺)는 그렇게 훈독하였든 것이 거의 무의(無疑)하다, 또 남포에는 마량(진)이란 곳이 있어, 이조시대의 충청우도수군절제사진영소재지로 유명하거니와, 마량・마산・사(말)포의 칭은 그 연원이 다 매로(邁盧) 매라(邁羅)에서 발한 듯 싶고, 남포의 이름까지도 역시 거기서(노(盧), 라(羅))유래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면 위지의 만로(매로)국의 소재지는 말할 것도 없이 남포에 비정될 것이라고 자신된다.
쪽수▶P44-4 (三三)萬盧國…………은 翰苑雍氏注所引 魏略에는 邁盧國으로 되어있으니, 南齊書百濟傳中에 보이는 邁盧 及 邁羅가 그것이며, 또 唐의 百濟都督府直轄十三縣中의 一인 邁羅縣도 勿論 그곳일 것이다. 都督府十三縣의 地는 上述한 바와 같이 대개 湖四地方(忠南)의 一部에 不過하였는터인즉 邁羅縣역시 그範圍안에 位置되어 있었을 것은 더 말할▶P45-1것도 없거니와, 지금의 어느곳이 이에 該當하겠느냐하면, 나는 今忠南 保寧郡의 一部가 된 藍浦를 들어 比定해 보려고한다. 藍浦는 羅代以來(一統以後)의 稱呼로, 百濟時代에는 寺浦(一云馬山)縣이라고 하였으니, 寺浦의 寺는 「말」 혹은 「마을」로 訓讀하었을것이라고 解釋된다. 지금도 官寺字의 訓만은 「마을」(시)이라고 讀하지만, 古代에는 寺는-官舍 僧舍를 勿論하고-다 「마을」 혹은 「말」이라고 하였는지 모르겠다. 어떻든 寺浦의 一名이 馬山인 것을 보면 여기 寺는 그렇게 訓讀하였든 것이 거이 無疑하다, 또 藍浦에는 馬梁(鎭)이란 곳이 있어, 李朝時代의 忠淸右道水軍節制使鎭營所在地로 有名하거니와, 馬梁・馬山・寺(말)浦의 稱은 그 淵源이 다 邁盧 邁羅에서 發한듯싶고, 藍浦의 名까지도 역시 거기서(盧. 羅)由來한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하면 魏志의 萬盧(邁盧)國의 所在地는 말할 것도 없이 藍浦에 比定될것이라고 自信된다.
(34) 벽비리국………… 은 남제서백제전 급 일본서기신공기49년조에 보이는 벽중, 삼국사기지리4에 말부한 당의 신치백제주현중 고사주속현의 하나인 '辟城縣本碧骨' 그것으로 지금 전북 김제의 땅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나가통세(那珂通世)씨의 설과 같이 백제의 파부리현(신라대(羅代)의 부리현, 고려대(麗代)의 복성현)으로 지금 전남 보성군(복내면 일대)의 땅이 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쪽수▶P45-2 (三四) 辟卑離國…………은 南齊書百濟傳 及 日本書紀神功紀四十九年條에 보이는 辟中, 三國史記地理四에 末附한 唐의 新置百濟州縣中 古四州屬縣의 一인 「辟城縣本碧骨」 그것으로 今 全北 金堤의 地이거나, 그렇지 아니하면 那珂通世氏의 說과같이(15) 百濟의 波夫里縣(羅代의 富里縣, 麗代의 福城縣)으로 今 全南寶城郡(福內面一帶)의 地가될것이라고 생각된다.
(35) 구사오단국…………종래 학자의 설과 같이 백제시대의 구사진혜현, 당의 百濟州縣中 분차주속현인 '貴旦縣本丘斯珍兮' 그것에 틀림없으니, 그곳은 신라, 고려 양대(羅麗兩代)의 진원현 즉 지금의 전남 장성군 진원면 일대의 땅이다. 구(丘)(구(仇))사진혜의 진(珍)은 양(梁)・훼(喙)・돌(突)과 같이 '돌' 혹은 '도'로 읽고 혜(兮)는 진(珍)과 합하여 '도래' '도라' '드래' 또는 '달래' 등으로 성음되었을것이니, 구사오단 및 귀단의 단(旦)은 다 이 진혜(珍兮)의 대음으로 볼것이다. (古代에 珍을 '돌' '도'로 훈독한 예에 취하여는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씨가 그 저 '雜政' 자2전 하권에 자세한 설명을 하였으므로 독자는 그것을 공고하기를 바란다).
쪽수▶P45-3 (三五) 臼斯烏旦國…………從來 學者의 說과 같이 百濟時代의 丘斯珍兮縣, 唐의 百濟州縣中 分嵯州屬縣인 「貴旦縣本丘斯珍兮」 그것에 틀림없으니, 그곳은 羅麗兩代의 珍原縣 即 今의 全南 長城郡 珍原面 一帶의 地이다. 丘(仇)斯珍兮의 珍은 梁・喙・突과 같이 「돌」 혹은 「도」로 讀하고 兮는 珍과 合하야 「도래」 「도라」 「드래」 또는 「달래」 等으로 聲音되었을것이니, 臼斯烏旦 及 貴旦의 旦은 다 이 珍兮의 對音으로 볼것이다. (古代에 珍을 「돌」 「도」로 訓▶P46-1讀한 例에 就하여는 鮎貝房之進氏가 其著 「雜政」 笫二轉 下卷에 자세한 說明을 試하였으므로 讀者는 그것을 恭考하기를 바란다).
(36) 일리국…………미상
쪽수▶P46-2 (三六) 一離國…………未詳
(37) 부미국 (38) 지반국 (39) 구소국 (40) 첩로국…………4국은 상술한 바와 같이 내등호차랑씨의 설에 쫓아 부미지급・반구・소첩로 3국의 오기로 보는 것이 온당하거니와, 그렇다고 하면 '不彌支'와 '半狗'의 2국은 일본서기신공기 49년조에 보이는 한(韓) 지명중의 '布彌支' '半古' 그것에 틀림없을 것이다. 포미지・반고는 확실히 지금 전남 지방의 어느 연접한 두 곳을 들어보인 것인듯 하므로, 2읍을 또 당의 백제주현중의 대방주속현인 '半那縣(本半那夫里)'과 '布賢縣(本巴老彌)'에 비정하여 보아도 무방하다고 생각되나니, 후자 즉 포현현(파로미)은 포미지에, 전자 즉 반나현(반내부리)은 반고에 비정된다. 반나현인 반내부리는 신라 고려(羅麗)대의 반남으로, 지금의 전남 나주군 반남면 일대를 중심으로 삼았던 곳이며, 포현현인 파로미는 바로 나주의 옛 이름인 발나(發羅)에 비정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부미지・포미지・포현 (파로미)은 다 같은 곳으로 지금 나주읍을 중심삼아 있던 것이요 반구・반고・반나(반내)도 동일한 곳으로 반남을 읍치로 삼아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소첩로국은 이를 비정할 방도가 끊어져 아직 미상에 붙이어둔다.
쪽수▶P46-3 (三七) 不彌國 (三八) 支半國 (三九) 狗素國 (四0) 捷盧國…………四國은 上述한바와 같이 內藤虎次郞氏의 說에 從하야 不彌支岌・半狗・素捷盧 三國의 誤記로 보는 것이 穩當하거니와, 그렇다고하면 「不彌支」와 「半狗」의 二國은 日本書紀神功紀 四十九年條)에 보이는 韓地名中의 「布彌支」 「半古」 그것에 틀림없을것이다. 布彌支・半古는 確實히 今 全南地方의 어느 連接한 두곳을 들어보인것인듯 하므로, 二邑을 또 唐의 百濟州縣中의 帶方州屬縣인 「半那縣(本半那夫里)」과 「布賢縣(本巴老彌)」에 比定하여 보아도 無妨하다고 생각되나니, 後者 即 布賢縣(巴老彌)은 布彌支에, 前者 卽 半那縣(半奈夫里)은 半古에 比定된다. 半那縣인 半奈夫里는 羅麗代의 潘南으로, 지금의 全南羅州郡潘南面 一帶를 中心으로 삼었든곳이며, 布賢縣인 巴老彌는 바루 羅州의 古名인 發羅에 比定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면 不彌支・布彌支・布賢 (巴老彌)은 다 같은곳으로 今 羅州邑을 中心삼아 있든것이요 半狗・半古・半那(半奈)도 同一 한 곳으로 潘南을 邑治로 삼아있든것이라고 볼수있다. 다음 素捷盧國은 이를 比定할 方途가 끊어저 아직 未詳에 붙이어둔다.
(41) 모로비리국…………은 백제시대의 모랑대리현 즉 지금의 전북 고창군의 땅이라 함이 종래의 통설이니 모(毛)와 모(牟)는 물론이요, 로(盧)와 랑(良)(라)도 고대에는 상통되던 음이다.
쪽수▶P46-4 (四一) 牟盧卑離國…………은 百濟時代의 毛良大里縣 卽 今의 全北高敞郡의 地라함이 從來의 通說이니 毛와 牟는 勿論이요, 盧와 良(라)도 古代에는 相通되든音이다.
(42) 신소도국…………위지동전 마한의 습속을 적은 곳에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라한 소도는, 즉 솟대(간목) 내지 솟대를 세워 제사하는 처소의 위(謂)로 그것은 한의 제국읍마다 있었든 모양이나, 제국읍의 (소)소도에 대하여 종주적 수뇌적 지위에 있는 특수의 (대)소도가 따로 있었던 것은 추측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이니, 여기 '臣蘇塗國'이란 것은 즉 그것의 소재국이 아니었든가한다 (신(臣)은 진(眞)・대(大)・심(深)의 의미의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신소도국의 소재는 어디냐하면 소도의 음에 가장 가까운 백제의 성대혜현・라대(羅代)의 소태(혹운 소주)현이었든 충남 태안(금 서산군의 일부가 되었음)의 땅이 그곳이었으리라고 억측된다.
쪽수▶P43-5 (四二) 臣蘇塗國…………魏志同傳 馬韓의 習俗을 적은 곳에 「又諸國各有別邑 名之爲蘇塗 立大木 縣鈴鼓 事鬼神 ▶P47-1 亡逃至其中 皆不還之 好作賊 其立蘇塗之義 有似浮屠 而所行善惡有異」라한 蘇塗는, 卽 솟대(竿木) 내지 솟대를 세워 祭祀하는 處所의 謂로 그것은 韓의 諸國邑마다 있었든 모양이나, 諸國邑의 (小)蘇塗에 대하야 宗主的 首腦的 地位에 있는 特殊의 (大)蘇塗가 따로 있었든것은 推測의 可能性을 가지고 있는者이니, 여기 「臣蘇塗國」이란 것은 即 그것의 所在國이 아니었든가한다 (臣은 眞・大・深의 義의 語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臣蘇塗國의 所在는 어디냐하면 蘇塗의 音에 가장 가까운 百濟의 省大兮縣・羅代의 蘇泰(或云蘇州)縣이었든 忠南 泰安(今瑞山郡의 一部가되었음)의 地가 그곳이었으리라고 臆測된다.
(43) 막로국…………첩출 (견상(見上))
쪽수▶P47-2 (四三) 莫盧國…………疊出 (見上)
(44) 고랍국…………형가통세씨는 이를 백제시대의 고룡군 즉 지금의 전북 남원군에 비정하였는데, 아직 그 설에 쫓거니와. 남원은 신라대 오소경의 하나로, 고려시대 때에는 부(혹 군), 이조시대에는 도호부가 되었던 만큼 저명한 곳이다.
쪽수▶P47-3 (四四) 古臘國…………邢珂通世氏는 이를 百濟時代의 古龍郡 即 今의 全北南原郡에 比定하였는데, 아직 그說에 쫓거니와. 南原은 羅代五小京의 一로, 麗代에는 府(혹郡), 李朝時代에는 都護府가 되였든만치 著名한 곳이다.
(45) 임소반국………… 의 소재는 지금 전북 옥구군의 일부가 된 임피에 구할 수 있으니, 임피 (피의 고음은 파, 바)는 신라대 이래의 칭호로, 임소반에서 소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또 그곳에는 동으로 함열과의 경계처에 소방(일운 소방)이란 산과, 서쪽 면으로 소안이란 산이 있거니와(청구선표도급대동여지도 참조), 소방(所防)・소안(蘇安)의 이름은 다 역시 臨을 생략한 소반의 전음이 아닌가한다. 백제시대의 동지명으로는 단순히 '피산소도'의 일칭이 있으나, 소와 피도 또한 소・반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었든가 추측된다.
쪽수▶P47-4 (四五) 臨素半國………… 의 所在는 今 全北沃溝郡의 一部가 된 臨陂에 求할수있으니, 臨陂 (陂의古音은파, 바)는 羅代以來의 稱呼로, 臨素半에서 素가 略된 것으로 볼수있으며, 또 그곳에는 東으로 咸悅과의 境界處에 所方(一云所防)이란 山과, 西면으로 素安이란 山이 있거니와(靑邱線表圖及大東輿地圖參照), 所方(所防)・蘇安의 名은 다 역시 臨을 略한 素半의 轉音이 아닌가한다. 百濟時代의 同地名으로는 單히 「陂山」「所島」의 一稱이 있으나, 所와 陂도 또한素・半에서 由來된 것이 아니었든가 推測된다.
(46) 신운신국………… 위지동조하문에 보이는 '臣雲遣支報'(견지는 곧 건길지니, 군장의 칭이요 보는 미상) 운운의 신운 그것인데, 여지승각(권15) 천안군 역원조를 보면 신은이란 역명이 보이고 그 밑에 '在郡北十里' 라고 쓰여있다. 천안은 '本東西兜率之地'라고만 하여있고 삼국시대의 군현명으로는 특히 명시된 것이 없으나, 이 신은역의 이름은 상당히 오래된 이름인 듯, 고려사(권82) 병지참역조에도 그 이름이 보이며, 또 천안이란곳은 고인의 언과 같이 삼국의 중심이요 일방 요충의 지로 고래 일컫던 곳이므로, 삼한시대에도 무슨 국읍이 거기 있었을것은 물론이다. 그리하여 나는 신운과 신은과를 비정하여 보는것이다.
쪽수▶P47-5 (四六) 臣雲新國…………은 魏志同條下文에 보이는 「臣雲遣支報」(遣支는 곧 犍吉支니, 君長의 稱이요 報는 未詳) 云云의 臣雲 그것인데, 輿地勝覺(卷十五) 天安郡驛院條를 보면 新恩이란 驛名이 보이고 그 밑에 「在郡北十里」 라고 ▶P48-1 쓰여있다. 天安은 「本東西兜率之地」라고만 하여있고 三國時代의 郡縣名으로는 特히 明示된 것이 없으나, 이 新恩驛의 名은 相當히 오래된 이름인 듯, 高麗史(卷八十二) 兵志站驛條에도 그이름이 보이며, 또 天安이란곳은 古人의 言과 같이(17) 三國의 中心이요 一方 要衝의 地로 古來 일컸든 곳이므로, 三韓時代에도 무슨 國邑이 거기 잇었을것은 勿論이다. 그리하야 나는 臣雲과 新恩과를 比定하여 보는것이다.
(47)여래비리국…………형가통세씨는 이를 백제의 이릉부리군(일명 인부리)(전남 능성군)에 비정하였으나, 나는 그보다도 신라 대의 여랑현(礪良縣)(본 백제지랑초현)이었든 전북 여산지방(지금 익산에 합군)에 구함이 훨씬 타당하지 아니할까한다 여래와 여랑(라)은 전혀 동음의 이역으로 볼수있는 소이다.
쪽수▶P48-2 (四七) 如來卑離國…………邢珂通世氏는 이를 百濟의 爾陵夫里郡(一名仁夫里)(全南綾城郡)에 比定하였으나, 나는 그보다도 羅代의 礪良縣(本百濟只良肖縣)이었든 全北礪山地方(今益山에合郡)에 求함이 훨신 妥當하지 아니할까한다 如來와 礪良(라)은 全혀 同音의 異譯으로 볼수있는 所以다.
(48) 초산도비리국…………이것은 전술함과 같이 초산국, 도비리국의 둘을 잘못 연서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거니와, 비견에 큰 과오가 없다고 하면 초산국의 소재는 지금 전북 정읍군의 땅에 구할 수 있으니, 여지승람(권 34)정읍현 군명조에 초산의 일명이 보이므로써다. 어느 시대의 칭호라고는 명시하지 아니하였지만 어떻든 정읍을 초산이라고 한적이 있었든 것은 속일수 없는 사실이며, 실제 그곳에는 초산이란 산이 또한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산명의 초산은 청구선표도와 대동여지도에도 보이지만, 지금의 정읍면 초산봉이 곧 그것이니, 그 이름의 유래는 매우 구원하였던 것이라고 보지아니하면 아니되며, 동시에 정읍 그곳을 삼한시대의 초산국으로 추정하는 소이다. 도비리국은 초산과 연서된 만큼 그와 지리적으로 퍽 밀접하였으리라고 상측될 뿐이요, 그 분명한 위치에 있어서는 징고할 길이 없음을 유감으로 여긴다.
쪽수▶P48-3 (四八) 楚山塗卑離國…………이것은 前述함과 같이 楚山國, 塗卑離國의 둘을 잘못連書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거니와, 鄙見에 큰 過誤가 없다고하면 楚山國의 所在는 今 全北井邑郡의 地에 求할수있으니, 輿地勝覽(卷三十四)井邑縣 郡名條에 楚山의 一名이 보이므로써다. 어느時代의 稱呼라고는 明示하지 아니하였지만 어떻든 井邑을 楚山이라고 한적이 있었든 것은 속일수 없는 事實이며, 실제 그곳에는 楚山이란 山이 또한 있는것을 잊어서는 아니된다. 山名의 楚山은 靑邱線表圖와 大東輿地圖에도 보이지만, 지금의 井邑面楚山峯이 곧 그것이니, 그이름의 由來는 매우 久遠하였든것이라고 보지아니하면 아니되며, 同時에 井邑 그곳을 三韓時代의 楚山國으로 推定하는 所以다. 塗卑離國은 楚山과 連書된만큼 그와 地理的으로 퍽 密接하였으리라고 想測될뿐이요, 그 分明한 位置에 있어서는 徵考할길이 없음을 遺憾으로 여긴다.
(49) 일난국…………미상
쪽수▶P48-4 (四九) 一難國…………未詳
(50) 구해국…………은 일본서기신공기49년조에 보이는 고해진(古奚津) 그것이니, 거기 보면 일본의 목라근자등의 군이 가라 방면에서 서쪽으로 고해진에 회지하여 남만침미다례를 도(屠)하여 백제에 주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것은 아마 이때 일본군이 백제를 원조하여 마한의 쇠잔해가는 국읍을 파한 것을 의미한 기재인듯 하거니와, 여기 보이는 고해진과 소위 남만침미례다는-거의 한곳으로-가라에서 서편에 당하는 땅이므로 지금의 전남의 남부 지방인 것을 우선 용이히 알 수 있다. 다시 구체적으로 말하면 침미다례(トムタレ)는 고해의 일요지(성진)로, 백제도무군(지금 강진)의 속현인 동음현(신라대 이름 탐진) 즉 지금의 탐진강 하류처가 그곳에 당하므로, 고해는 바로 이것을 포함한 강진 전체의 이름이라고 해석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일본학자중에는 고해와 침미례다를 전연 떠러저있는 별지로 해석하여, 후자를 탐라 즉 지금의 제주도에 비정하는 이가 많이 있으나, 그것은 일본서기의 '移兵西廻至古奚津屠南蠻忱彌多禮云元'의 구를 작견치 못한 오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구해・고해(コケ)는 '구개' '고개'로 발음하였든 모양이니, 지금 강진군 군동면에 있는 '호계리'의 이름과 같은 것은. 옛 그림자를 자못 농후하게 보존하여온 것 같으며. 강진의 강, 그 전명인 도강의 강도 다 그 편린을 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쪽수▶P49-1 (五0) 狗奚國…………은 日本書紀神功紀四十九年條에 보이는 古奚津 그것이니, 거기 보면 日本의 木羅斤資等의 軍이 加羅方面에서 西로 古奚津에 廻至하야 南蠻忱彌多禮를 屠하야 百濟에 주었다는 記事가 있다. 이것은 아마 이때 日本軍이 百濟를 援助하야 馬韓의 衰殘해가는 國邑을 破한 것을 意味한 記載인듯 하거니와, 여기 보이는 古奚津과 所謂 南蠻忱彌禮多는-거이한곳으로-加羅에서 西편에 當하는 地이므로 지금의 全南의 南部地方인 것을 于先 容易히 알수있다. 다시 具體的으로 말하면 忱彌多禮(トムタレ)는 古奚의 一要地(城鎭)로, 百濟道武郡(今康津)의 屬縣인 冬音縣(羅代名耽津) 即 今의 耽津江下流處가 그곳에 當하므로, 古奚는 바루 이것을 包含한 康津全體의 名이라고 解釋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日本學者中에는 古奚와 忱彌禮多를 全然 떠러저있는 別地로 解釋하야, 後者를 耽羅 即 今의 濟州島에 比定하는이가 많이 있으나, 그것은 日本書紀의 「移兵西廻至古奚津屠南蠻忱彌多禮云元」의 句를 灼見치못한 誤解라고 볼수밖에 없다. 狗奚・古奚(コケ)는 「구개」 「고개」로 發音하였든 모양이니, 지금 康津郡 郡東面에 있는 「虎溪里」의 名과 같은것은. 옛 그림자를 자못 濃厚하게 保存하여온 것 같으며. 康津의 康, 그 前名인 道康의 康도 다 그 片鱗을 傳한것이라고 볼 수 있다.
(51) 부운국…………백제시대의 벌음지현 (지금 공주의 서부)인듯하나, 더 후고를 요한다.
쪽수▶P49-2 (五一) 不雲國…………百濟時代의 伐音只縣(今公州의 西部)인듯하나, 더 後考를 要한다.
(52) 부사궤사국…………여기 부사는 북위서백제전 급 남제서백제부중에 보이는 부사후(혹은불중후) 그것이라고함과, 또 이들은 다 전주 완산의 고명인 비사벌(일운 벌주)의 위(謂)에 불과하다함과, 더욱 분(濆)은 곧 벌(伐)에 당한 것이라고함은 점패방지진씨의 탁설로 나의 경복하는 바이나, 단 씨가 궤사를 궤활로 오간오서하여 '발갈'로 읽을 것처럼 말한 것은, 씨의 정상신밀에 맞지않는 실수라고 볼수있다. 위지에는 어느 본에던지 부사궤사로 되어있고 부사궤활 로 되
쪽수▶P49-3 (五二) 不斯潰邪國…………여기 不斯는 北魏書百濟傳 及 南齊書百濟傅中에 보이는 不斯侯(혹은弗中侯) 그것이라고함과, 또 이들은 다 全州 完山의 古名인 比斯伐(一云伐州)의 謂에 不過하다함과, 더욱 濆은 곧 伐에 當한것이라고함은 鮎貝房之進氏의 卓說로(18) 나의 敬服하는바이나, 但 氏가 潰邪를 潰活로 誤看誤書하야 「발갈」로 讀할것처럼 말한 것은, 氏의 精詳愼密에 맛지안는 실수라고 볼수있다. 魏志에는 어느本에던지 不斯潰邪로 되어있고 不斯潰活로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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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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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있는곳은 나는 보지못하였다, 이는 아마 씨가 그 위에 있는 신궤활의 궤활과 혼동착간한 소이인듯하나, 착간은 확실히 착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씨의 설에 다소 보충하여 궤사를 해석하면, 사(邪)는 야(耶)・형(邢)・라(羅)・양(良로) 통음되어 (예를 들면 구사를 가야・가라・가양이라고 함과, 안사들 아형・안라・아시랑라고함과 같음), B음을 표하고 궤은 그초중성인 J’u, I’u의 음을 대표하여, 궤사는 곧 '불' '벌'로 읽어도 좋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부사궤사들 비사벌(전주)에 비정하는 점패 씨의 설은 더욱 유리하게 될 것이다.
쪽수▶P51-1 어 있는곳은 나는 보지못하였다, 이는 아마 氏가 그우에 있는 臣潰活의 潰活과 混同錯看한 所以인듯하나, 錯看은 確實히 錯看이다, 그러므로 나는 氏의 說에 多少 補充하야 潰邪를 解釋하면, 邪는 耶・邢・羅・良로 通音되어 (例하면 狗邪를 伽耶・加羅・加良라고함과, 安邪들阿邢・安羅・阿尸良라고함과 같음), B音을 表하고 潰은 그初中聲인 J’u, I’u의 音을 代表하야, 潰邪는 곧 「불」 「벌」로 讀하야 좋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不斯潰邪들 比斯伐(全州)에 比定하는 鮎貝 氏의 說은 더욱 有利하게 될 것이다.
(53) 원지국…………미상
쪽수▶P51-2 (五三) 爰池國…………未詳
(54) 건마국…………은 기술한 바와같이 백제의 금마저군, 신라, 고려 대의 금마군인 지금 익산지방으로, 마한후기의 수부라고 인정한다. 익산의 진산은 지금도 금마산이라고 하거니와, 여지승람(광해본)에는 이를 건자산이라고 하여있다 (유행본에 건여산이라고 한것은 자자(子字)의 와전이다) 점패씨는 건자 (혹 건여)를 건마(마)의 오기라고 보았는데, 그 설도 물론 유리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건자의 자를 마자의 초서인 る의 오기로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지 아니한가한다. 하여간 건마 금마가 동음의 이사인 것은 이에 의하여 더욱 명백하다.
쪽수▶P51-3 (五四) 乾馬國…………은 旣述한바와같이 百濟의 金馬渚郡, 羅麗代의 金馬郡인 今 益山地方으로, 馬韓後期의 首府라고 認定한다. 益山의 鎭山은 지금도 金馬山이라고 하거니와, 輿地勝覽(光海本)에는 이를 乾子山이라고 하여있다 (流行本에 乾予山이라고 한것은 子字의 訛轉이다) 鮎貝氏는 乾子 (혹 乾予)를 乾亇(마)의 誤라고 보았는데,(19) 그 說도 勿論 有利하지만 나는 그보다도 乾子의 子를 馬字의 草書인 る의 誤로 보는편이 훨신 自然스럽지 아니한가한다. 何如間 乾馬 金馬가 同音의 異寫인 것은 이에 依하야 더욱 明白하다.
(55) 초리국…………은 실상 초비리국의 오기인듯한 동시에 후일 백제의 수도인 소부리 일운 사설(지금 부여군)가 그곳인듯하다.
쪽수▶P51-4 (五五) 楚離國…………은 실상 楚卑離國의 誤인듯한 同時에 後日 百濟의 首都인 所夫里 一云泗泄(今扶餘郡)가 그곳인듯하다.
다음과 같이 오십여국의 위치비정에 있어, 자못 의심스럽고 미상한 곳도 많지만, (그 中에는) 또한 확실무의하다고 생각되는 곳도 여럿이 있으니, 예를 들면 백제국(광주)・속로부사국(통진)・월(목)지국(직산성환)・감해비리국(홍성) 구사오단국(장성의 진원)・모로비리국(고창)・구해국(강진)・부사궤사국(전주) 및 건마국(익산)과 같은것들이다. 그중에 백제국은 후술할바와같이 북방 유이 부족의 중심지요, 월(목)지국과 건마국은 기술한 바와 같이 마한 전후기의 정치적 중심지였다. 그런즉 오십여국은 대개 지금 경기(특히 한강 유역 이남)・충청・전라의 제도, 즉 광의의 기호지방에 걸치어 분포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방은 폭원(면적)도 클뿐더러 대소의 하천・평야가 많고, 해안선의 굴곡이 심하고, 기타 기후의 온난, 산물의 풍요함과 아울러, 일찍부터 인문발달에 여간 기여공헌한바가 아니며, 인하여 인민의 취락분포는 타지방의 비가 아니니, 소위 마한오십여국의 수는 비교적으로 도리어 적다고 할지언정,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수다. 여기 이른바 '國'은 말할 것도 없이 국읍의 의미로 한 부락적 사회에 지나지 못하던 것이니, 위지에 마한의 국(읍)세를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라고 한 것을 보아 더욱 알 수 있다. 즉 마한의 국읍 중 대읍락은 만여호, 소읍락은 수천호로, 오십여국의 총합호수가 십여만에 달하였다는 것이다. 이로써 보면. 마한의 일국 (읍락)은-대소를 막론하고-한대 동방(조선)군현의 일현 정도쯤밖에는 되지 못하며, 동시에 전한말 대낙랑군(진번임둔의 일부를 합한 낙랑군)의 군세-현 25, 호 62,812, 구 406748,-에 비하면, 마한의 오십여국 십여만호는 약 그 배이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십여만(호)이란 수는 개약을 들어보인데 불과하므로 자세한 수효는 얼마가 되는지 알수없으나, 마한의 국수가 낙랑속현수의 배이상이 되므로 그것(호수)도 낙랑호수의 배이상이 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마한의 인구는 위지의 기재가 없으나, 국수 호수가 낙랑의 것의 배이상이 된다고하면 이 역시 낙랑인구수의 약 배이상(팔십여만)에 달하었다고 상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십여국의 전부가 순연한 마한인(고마족)만의 부락이 아니요 기중에는 북래의 유이족(진한)의 사회도 포함되었다고 하는 것이 나의 입론인만큼 그 소위 십여만호란 호수도 마한인과 유이족의 혼합호수로 보는 것이 나의 해석이어니와, 기중의 다대수를 점한 것은 물론 마한인이라고 생각된다. 유이족은 곧 진한이니, 진한과 마한은 본래 종족상의 구별로, 각기 거주구역을 좀 달리하였을 뿐이요, 정치상으로 본다면 이들은 다 월(목)지국을 치부로한 진왕의 직접 지배하에 있던 한덩어리의 큰 집합체에 불과한것이다. 다시 말하면 두 자는 '一而二二而一'적관계로 되어, 정치상으로는 일체요, 종족・주지・칭호상으로는 이체(二體)이었다. 이들의 이체가 거주지역상으로 어떻게 달랐느냐? 하는 것은 중요문제로서, 이는 차절의 진한문제의 고찰을 기다려, 비로소 해석될 것이므로 아직 보류하여두거니와, 정시칠년한위충돌의 결과 한(진한)나해등 수십국이 위(낙랑대방)에 강복한 후로는 마한소속의 진한부락이란, 극히 소수로 마한 동(북)계의 한 작은 지역을 차지한데 불과하였을 것이다. (즉 오십여국중에 포함된 진한 부락은 불과 얼마되지 아니하였을것이다). 이것은 미리 주의하여둘 필요가 있다.
쪽수▶P51-5 右述과 같이 五十餘國의 位置比定에 있어, 자못 의심스럽고 未詳한 곳도 많지만, (其中에는) 또한 確實無疑하다고 생각되는 곳도 여럿이 있으니, 例하면 伯濟國(廣州)・速盧不斯國(通津)・月(目)支國(稷山成歡)・監奚卑離國(洪城) ▶P52 臼斯烏旦國(長城의珍原)・牟盧卑離國(高敞)・狗奚國(康津)・不斯潰邪國(全州) 및 乾馬國(益山)과 같은것들이다. 其中에 伯濟國은 後述할바와같이 北方 流移部族의 中心地요, 月(目)支國과 乾馬國은 旣述한바와 같이 馬韓 前後期의 政治的中心地였다. 그런즉 五十餘國은 대개 今 京畿(特히漢江流域以南)・忠淸・全羅의諸道, 即廣義의 畿湖地方에 걸치어 分布되었든 것을 알수있다. 이地方은 幅員(面積)도 클뿐더러 大小의 河川・平野가 많고, 海岸線의 屈曲이 甚하고, 其他 氣候의 溫暖, 產物의 豐饒함과 아울러, 일즉부터 人文發達에 여간 寄與貢獻한바가 아니며, 因하야 人民의 聚落分布는 他地方의 比가 아니니, 所謂 馬韓五十餘國의 數는 比較的으로 도리어 적다고 할지언정, 많다고는 할수없는 數다. 여기 이른바 「國」은 말할 것도 없이 國邑의 義로 한 部落的社會에 지나지못하든 것이니, 魏志에 馬韓의 國(邑)勢를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라고 한 것을 보아 더욱 알 수 있다. 即 馬韓의 國邑中 大邑落은 萬餘戶, 小邑落은 數千戶로, 五十餘國의 總合戶數가 十餘萬에 逹하였다는것이다. 이로써 보면. 馬韓의 一國 (邑落)은-大小를 莫論하고-漢代 東方(朝鮮)郡縣의 一縣程度쯤밖에는 되지못하며, 同時에 前漢末 大樂狼郡(眞蕃臨屯의一部를合한樂浪郡)의 郡勢-縣二十五, 戶六萬二千八百一十二, 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20)-에 比하면, 馬韓의 五十餘國十餘萬戶는 約 그 倍以上이 된다고 할 수 있다. 勿論 十餘萬(戶)이란 數는 槪約을 들어보인데 不過하므로 仔細한 數爻는 얼마가 되는지 알수없으나, 馬韓의 國數가 樂浪屬縣數의 倍以上이 되므로 그것(戶數)도 樂浪戶數의 倍以上이 된다고 할수있는 것이다. 또 馬韓의 人口는 魏志의 記載가 없으나, 國數 戶數가 樂浪의 것의 倍以上이 된다고하면 이 역시 樂浪人口數의 약 倍以上(八十餘萬)에 達하었다고 想測할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五十餘國의 全部가 純然한 馬韓人(고마族)만의 部落이 아니요 其中에는 北來의 流移族(辰韓)의 社會도 包含되었다고 하는것이 나의 立論인만큼 그 ▶P53-1 所謂 十餘萬戶란 戶數도 馬韓人과 流移族의 混合戶數로 보는 것이 나의 解釋이어니와, 其中의 多大數를 占한 것은 勿論 馬韓人이라고 생각된다. 流移族은 곧 辰韓이니, 辰韓과 馬韓은 본래 種族上의 區別로, 각기 居住區域을 좀 달리하였을 뿐이요, 政治上으로 본다면 이들은 다 月(目)支國을 治府로한 辰王의 直接 支配下에 있든한덩어리의 큰 集合體에 不過한것이다. 다시말하면 二者는 「一而二二而一」的關係로 되어, 政治上으로는 一體요, 種族・住地・稱號上으로는 二體이었다. 이들의 二體가 居住地域上으로 어떻게 달렀느냐? 하는 것은 重要問題로서, 이는 次節의 辰韓問題의 考察을 기둘러, 비로소 解釋될것이므로 아직 保留하여두거니와, 正始七年韓魏衝突의 結果 韓(辰韓)那奚等 數十國이 魏(樂浪帶方)에 降服한후로는 馬韓所屬의 辰韓部落이란, 極히 少數로 馬韓 東(北)界의 한 작은 地域을 차지한데 不過하였을 것이다. (即 五十餘國中에 包含된 辰韓部落은 불과 얼마되지 아니하였을것이다). 이것은 미리 注意하여둘 必要가 있다.
당시 마한의 정치조직은 진국시대와 별로 큰 변동이 없었다. 역시 중앙에는 위에 누언한바와같이 진왕이란 최고지배자가 있어 월(목)지국을 치소로 삼어있었고, 기타 제국읍에는 반자치적의 거수(장관)가있어, 각기 부락을 통제하였으나, 그 기율과 통제는 좀 유치하였던 모양인듯 위지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라고 하였다. 거수의 대한 자는 신지라하고 그 다음가는 자는 읍차라고 하였으니, 동서한전마한조에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신지는 삼국사기지리지고령군조에 보이는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고 일운 내진주지의 주지(여지승람동군조에 이끈 최치원의 석리정전에 '大伽耶王惱窒朱日'이란 주일은 주지의 오기인 듯' 일목고사상에 보이는 한국사자명중의 하하질지(シチ) 하하사등(シト)와 마찬가지의 말로서, 신은 전술한 바와같이 진 혹은 대의 의미인듯하고 지는 읍차의 차 다음에 말할 험측의 측, 견지(보)・축지의 지, 앞서 말한 염사착(염사는 읍명)의 鑡 소마시의 시와 함께 장자존칭의 뜻을 가진 것이니, 신라관등 중의 척간(척간의 대에 흔히 손(飡)자를 씀)・사지・길사혹운예지혹운길차・대오지・소오지와 같은 것들이라든지, 또 신라진흥왕순수관경비(창녕비) 중에 보이는 속간사훼무력지・척간사훼칠총지・사척간한성군주훼죽부지 ・사척간비리성군주훼복등지・沙尺干甘文軍主沙喙心麥夫智・及尺干上州行使大等沙喙宿欣智・及尺干喙次叱智・奈末下州行使大等沙喙春夫智等의 지(智)는 다 역시 그런 뜻의 유칭일것이며, 후세의 수척・화척・양수척 등의 척, 갓바치(피장)・재바치(공장)・장사치(상인)・벼슬아치 등의 치도 거기서 유래된 것일것이다. 지(智)는 몽고어의 하하적(치)와도 공통된 말임은 근래 학자의 공인하는 바이다. 그다음 읍차는 신라 관등 중의 대오지・소오지(견상)의 오지(烏知)와같은 말일지며, 일본어의 オサ(장)와도 관련이 있는 말일 것이다. 삼한에는 신지 읍차 이외에도 또 여러가지의 관호가 있었음은, 동서변진조에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巖 次有殺奚 次有借邑'(읍차의 전도)라고 한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마한과 변진은 본래 같은 족속으로 언론・풍습・관제가 서로 공통하였으므로) 험측・번예・살해 등의 관호는 非但 변진에만 한한 것이 아니요 마한에도 또한 있었을 것이다. (설명견하) 동서마한조 '辰王治月支國' 하에
쪽수▶P53-2 當時 馬韓의 政治組織은 辰國時代와 別로 큰變動이 없었다. 역시 中央에는 우에 屢言한바와같이 辰王이란 最高支配者가 있어 月(目)支國을 治所로 삼어있었고, 其他 諸國邑에는 半自治的의 渠帥(長官)가있어, 각기 部落을 統制하였으나, 그紀律과 統制는 좀幼稚하였든 모양인듯 魏志에 「其俗少綱紀 國邑雖有主帥 邑落雜居 不能善相制御」라고하였다, 渠帥의 大한者는 臣智라하고 그다음가는者는 邑借라고 하였으니, 同書韓傳馬韓條에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臣智는 三國史記地理志高靈郡條에 보이는 大加耶國의 始祖 伊珍阿鼓 一云內珍朱智의 朱智(輿地勝覽同郡條에 이끈 崔致遠의 釋利貞傳에 「大伽耶王惱窒朱日」이란 朱日은 朱智의 誤인 듯」 日木古史上에 보이는 韓國使者名中의 何何叱知(シチ) 何何斯等(シト)와 마찬가지의 語로서, 臣은 前述한바와같이 眞 혹 ▶P54-1 혹은 大의 義인듯하고 智는 邑借의 借 다음에 말할 險側의 側, 遣支(報)・蹴支의 支, 앞서 말한 廉斯鑡(廉斯는 邑名)의 鑡 蘇馬諟의 諟와 함께 長者尊稱의 뜻을 가진것이니, 新羅官等中의 尺干(尺干의 代에 흔이 飡字틀 用함)・舍知・吉士或云睿知或云吉次・大烏知・小烏知와 같은것들이라든지, 또 新羅眞興王巡狩管境碑(昌寧碑) 中에 보이는 速干沙喙武力智・尺干沙喙七聰智・沙尺干漢城軍主喙竹夫智 ・沙尺干碑利城軍主喙福登智・沙尺干甘文軍主沙喙心麥夫智・及尺干上州行使大等沙喙宿欣智・及尺干喙次叱智・奈末下州行使大等沙喙春夫智等의 智는 다 역시 그런뜻의 遺稱일것이며, 後世의 水尺・禾尺・楊水尺等의 尺, 갓바치(皮匠)・재바치(工匠)・장사치(商人)・벼슬아치等의 치도 거기서 由來된것일것이다. 智는 蒙古語의 何何赤(치)와도 共通된 말임은 近來 學者의 公認하는바이다. 그다음 邑借는 新羅官等中의 大烏知・小烏知(見上)의 烏知와같은 말일지며, 日本語의 オサ(長)와도 關聯이 있는 말일것이다. 三韓에는 臣智 邑借 以外에도 또 여러가지의 官號가 있었든은, 同書弁辰條에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巖 次有殺奚 次有借邑」(邑借의顚倒)라고 한것을보아 알수있다 (馬韓과 弁辰은 본래 같은 族屬으로 言論・風習・官制가 서로 共通하였으므로) 險側・樊穢・殺奚等의 官號는 非但 弁辰에만 限한 것이 아니요 馬韓에도 또한 있었을것이다. (說明見下) 同書馬韓條 「辰王治月支國」 下에
臣智(A)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B)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쪽수▶P54-2 臣智(A)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踧支․濆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B)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郎將․都尉․伯․長
이란 구절이 있는데, 이 역시 마한에만 한한 기재가 아니요 삼한 공통의 것임은 물론이어니와, 여기에는 다소 해석의 필요를 느낀다, A 부호의 절은 종래 난독의 문으로 유명하지만, 나는 이와 같이 중간구점을 찍는 동시에 '臣雲'으로부터 이하의 구절은 제한국 거수의 관호를 국명에 붙이어 예시한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 위의 '臣智或加優呼'는 위지찬자(혹은 그 이전의 기사자)의 사족한 바로서, 찬자는 그 이하의 기사를 신지의 특별한 우호 (미호)로 오해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지의 특별한 우호도 아무것도 아니요, 단지 諸韓國 거수중에는 약하약하한 국의 약하약하한 관호가 있었다는 것을 원기사자가 예로 보인 바에 부외한 것이다. 즉 (1) 신운견지보는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마한오십여국중의 하나인 신운(신)국의 견지보란 말이니, 보의 의미는 미상하나 (혹 인명이 아닌가?) 견지는 변진의 험측 남사이맥전신라조에 보이는 '其官名有子賁旱支・宣旱支・齊旱支・謁旱支・壹吉支・奇貝旱支'의 한지와 거의 동음동의의 어이며, 또 북사백제전에 보이는 '……百姓呼爲鞬吉支 夏言並王也'의 건길지라든지, 고사기・일본서기에 백제・신라・가라 등의 국왕을 コニキシ 또는 コキシ라고 훈(訓)한 그것이라든지, 일본서기신공기에 보이는 신라인(왕자) 미질한기(오년조), 탁순왕미금한기(사십육년조)와 갈은 칭호(한기)와도, 물론 관련이 있는 어이니, 견・험・한(khan)・건・コニ・コ・한 등은 다-마치 남사신라전에 '其俗呼城曰健牟羅'(모라(牟羅)는 성읍의 의미)라한 건과 한가지-대의 의미로 현금어 '큰'에 해당한 말이다. 그리고 견지의 지, 험측의 측, 한지의 지는 다 길지(吉支)・キシ의 약어로, 위에 말한 신라 관등 중 제십사위의 길사혹운계지혹운길차, 일본고사기(중권)에 보이는 백제인 아지길사(아직기)・화이길사(왕인)의 길사와 공통한 말이며, 일본서기의 아직기의 기와 한기(カンキ)의 기(岐)는 다 어미의 사(シ)음을 생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안사축지는 변진 십여국중의 하나인 안사국의 축지란 말이니, 축지는 역시 위에 말한 신지・주지의 거의 동음이사로 인식되며, 그다음 (3)지신리아부례의 지신은 신궤의 전도, 리아(離兒)는 활아의 오기로서, 이는 마한 신지활(아)국의 거수의 칭을 보인 것인데, 부례는 곧 변진의 번예와 마찬가지의 말일 것이며, (4)구사지렴은 역시 변진구사국의 진지염이란 것으로, 염(廉)의 의미는 미상하나(혹 인명은 아닌지?), 진지는 말할 것도없이 신지 그것의 이(자)역이다. 일로써 보면 마한에도 신지・읍차 외에 견지(험측)・부례(번담) 등의 관직이 있었던 것을 더욱 알 것이다. B 부호의 절은 한국고유의 관제가 아니라 한인이 특히 사이군장에게 주든 관직의 이름들이니, 아마 이때 제한역의 거수로 낙랑대방에 통하여 위정으로부터 率善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의 직첩을 받는 자가 많았던 모양이다. 위지(한전)에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下戶詣郡 (낙랑대방 양군의 오기인둣)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 衣幘千有餘人'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소식을 전하여주는 중요한 기사이다. (계속)
쪽수▶P54-3 이란 句節이 있는데, 이 역시 馬韓에만 限한 記載가 아니요 三韓共通의 것임은 勿論이어니와, 여기에는 多少 解釋의 必要를 늣긴다, A附號의 節은 從來 難讀의 文으로 有名하지만, 나는 右와같이 中間句點을 찍는 同時에 「臣雲」으▶P55로부터 以下의 句節은 諸韓國 渠帥의 官號를 國名에 붙이어 例示한것에 不過한것이라고 解釋한다. 그우의 「臣智或加優呼」는 魏志撰者(혹은 그以前의記事者)의 蛇足한바로서, 撰者는 그 以下의 記事를 臣智의 特別한 優呼 (美號)로 誤解하였든 모양이다. 그러나 이것은 臣智의 特別한 優呼도 아무것도 아니요, 단지 諸韓國 渠帥中에는 若何若何한 國의 若何若何한 官號가 있었다는것을 原記事者가 例로 보인 바에 不外한것이다. 即 (1)臣雲遣支報는 우에도 말한 바와 같이 馬韓五十餘國中의 一인 臣雲(新)國의 遣支報란 말이니, 報의 義는 未詳하나 (혹人名이 아닌가?) 遣支는 弁辰의 險側 南史夷貊傳新羅條에 보이는 「其官名有子賁旱支・宣旱支・齊旱支・謁旱支・壹吉支・奇貝旱支」의 旱支와 거이 同音同義의 語이며, 또 北史百濟傳에 보이는 「……百姓呼爲鞬吉支 夏言並王也」의 鞬吉支라든지, 古事記・日本書紀에 百濟・新羅・加羅等의 國王을 コニキシ 또는 コキシ라고 訓한 그것이라든지, 日本書紀神功紀에 보이는 新羅人(王子) 微叱旱岐(五年條), 卓淳王未錦旱岐(四十六年條)와 갈은 稱號(旱岐)와도, 勿論 關聯이 있는 語이니, 遣・險・旱(khan)・鞬・コニ・コ・旱等은 다-마치 南史新羅傳에 「其俗呼城曰健牟羅」(牟羅는城邑의義)라한 健과 한가지-大의 義로 現今語 「큰」에 該當한 말이다. 그리고 遣支의 支, 險側의 側, 旱支의 支는 다 吉支・キシ의 略語로, 우에 말한 新羅官等中 第十四位의 吉士或云稽知或云吉次, 日本古事記(中卷)에 보이는 百濟人 阿知吉師(阿直岐)・和邇吉師(王仁)의 吉師와 共通한 말이며, 日本書紀의 阿直岐의 岐와 旱岐(カンキ)의 岐는 다 語尾의 師(シ)音을 略한 것으로 볼수있다. (2)安邪蹴支는 弁辰 十餘國中의 一인 安邪國의 蹴支란 말이니, 蹴支는 역시 우에 말한 臣智・朱智의 거이 同音異寫로 認識되며, 그다음(3)漬臣離兒不例의 漬臣은 臣潰의 顚倒, 離兒는 活兒의 誤로서, 이는 馬韓 臣漬活(兒)國의 渠帥의 稱을 보인것인데, 不例는 곧 弁辰의 樊濊와 마찬가지의 말일것이며, (4)狗邪支▶P56廉은 역시 弁辰狗邪國의 秦支廉이란 것으로, 廉의 義는 未詳하나(혹 人名은 아닌지?), 秦支는 말할것도없이 臣智 그것의 異(字)譯이다. 일로써 보면 馬韓에도 臣智・邑借外에 遣支(險側)・不例(樊淡) 等의 官職이 있었든것을 더욱 알것이다. B附號의 節은 韓國固有의 官制가 아니라 漢人이 特히 四夷君長에게 주든 官職의 名들이니, 아마 이때 諸韓阈의 渠帥로 樂浪帶方에 通하야 魏廷으로부터 率善 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 伯・長의 職牒을 받는者가 많었든 모양이다. 魏志(韓傳)에 「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下戶詣郡 (樂浪帶方兩郡의 誤인둣)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 衣幘千有餘人」이라고 한것은 이러한 消息을 傳하여주는 重要한 記事이다. (續)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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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史學雜誌第四十編第五號
  2. 同 志 第四十一編第五號






현대문주


  1. 사학잡지 제40편 제5호
  2. 사학잡지 제41편 제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