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2) -진국 및 삼한고-

North Korea Humanities

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5일 (토) 16:57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삼한문제의 신고찰(2) -진국 및 삼한고-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二)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5년09월
시작쪽 093쪽 종료쪽 108쪽 전체쪽 016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한'의 명칭의 기원


전장(前章)에는 삼한 연구의 전제라고 할 만한 진국 문제에 취하여 고찰하였으므로, 이번부터는 순연히 삼한 문제에 들어가 논란(論難)하려고 하거니와, 여기에도 우선 우리의 고려를 요할 것은 '한'의 명칭의 기원에 관하여다. 즉 삼한이란 '한'의 칭(稱)이 어느 때 시작되고, 그것의 원의(原義)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 하여 진국 전체에 공통하는 칭호가 되었는지, 이에 대하여 먼저 생각하여 볼 필요가 있다.
쪽수▶P93-1前章에는 三韓硏究의 前提라고 할만한 辰國問題에 就하야 考述하였으므로, 일로부터는 純然히 三韓問題에 드러가 論難하려고 하거니와, 여기에도 于先 吾人의 考慮를 要할 것은 '韓'의 名稱의 起源에 就하여다. 即 三韓이란 '韓'의 稱이 어느 때 始作되고, 그것의 原義가 무엇이며, 또 그것이 어떻게하야 辰國全體에 共通하는 稱呼가 되었는지, 이에 對하야 먼저 생각하여 볼 必要가 있다.
삼한이 진국의 후신으로, '한'의 칭호가 '진'의 그것에 비하여 뒤였을 것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지만 실제 문헌 상에 나타나는 것을 보아도, 진국의 이름은 이미 (지나의) 사기, 한서 등 서에 보이되, '한'외 칭(稱)은 거기에는 도무지 보이지 않고 후한 대 기록을 위시하여 위략・위지・ 및 후한서 등에 많이 나타난다. 사한에는 진국 외에 조선(낙랑)・진번・임둔・현토・부여・관맥의 이름과, 특히 한서에는 고구려 내지 왜의 이름까지 보이면서, 삼한이란 한의 명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사기・한서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그것이 반드시 (지나의) 전한시대에는 없었든 이름이라고 단언하게까지는 되지못하지만, 단 그 이름이 한초로부터 널리 호칭되든것이라고 하면, 사한 이외와 다른 전한 대 기록에라도 보일 만한 일인데, 그렇지 아니함을 보면, 전한 시대에 (동방에) '한' 칭(稱)이 있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그렇게 널리 일컬어지지는 못하였던 모양이다. 더욱 한무제 때에는 삼한의 전신인 진국이 엄연히 존재하여, 사한 (조선전)에 …… 辰國欲上書見天子 (武帝)라고 하였던 것 만큼 —그 이름이 한토인의 필설(筆舌)에 상칭되었던 터이므로, 적어도 당시에는 그 나라(진)가 한으로써. 통칭되지 아니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래에 일설이 있으니, 즉 상서주관편의 武王旣伐 東夷云云'의 (위)공안국전에 '海東諸夷, 駒麗扶餘馯貊之屬'이라고한 구절에 대하여, 당의 공영달은 소(疏)하되 '海東諸夷, 駒麗扶餘軒狛之屬, 此皆孔君之時, 有此名也, (中畧)漢書有高駒麗扶餘韓. 無此馯, 馯即彼韓也, 音同而宇異爾'라고하였다. 이로 인하여 선유(先儒)의 대개는 전의 '간(馯)'은 곧 '한'의 음역으로 그 이름이 이미 공안국 시절 (한 무제 때)에 한토에 저문(著聞)되었든것으로 여김에 주저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공영달소의 소위 '한서'는 전후한서 중 어떤 것의 위(謂)인지, 이것이 후한서라면 몰라도, 원(전)한서라면 불가한 것은 원(전)한서에는 상술과 같이 이 '한'의 이름이 보여있지 아니하므로써며 –서전(書傳)의 소위 '간(馯)'이 과연 공소(孔疏)의 해석과 같이 삼한의 한에 대한 사음(寫音)이라고 할런지, 혹은 구려・부여・맥과 한가지 다른 북방 족속 중의 일명(一名)으로 볼런지. 이것도 문제려니와, 설령 '간(馯)'이 한의 지칭이라 할지라도, 소위 공안국전 그것이(진위 문제로) 일대 의문 중에 있어, 주자 및 청유들의 고증에는 이를 후인(위진 때 사람)의 위작이라고 함이 보통인즉 실제 그 중에 병거된 구려와 같은 족속도 전한 말로부터 점차 강성하여 한인의 주시를 이끌기 시작하였든건 인즉. 전이 꼭(무제 때의) 공안국의 작(作)이라고 믿기 어렵고, 따라 '간(馯)'의 서칭(書稱)이 그때에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공전이 후인의 위작이라고 하면, 그것은 고구려의 흥기발전이 있던 전한말 이후의 조작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어떻든 동방의 '한'의 이름이 전한 대 기록에 잘 나오지 아니함은 사실이며, 그것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기는 후한대 이래의 기록에서부터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로써 '한'의 명칭의 기원을 후한 시대에 구하려고함은 결코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 이전에 구하려고하는 사람의 하나이다. '한'이 '진'과 같이 전체에 공통하는 총명(總名)이 되게됨과, 또 그것이 중국 현존 문헌 상에 빈출하게 되기는 얼마 후세의 일이지만, 그 이름의 유래 기원은 실상 그보다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한'의 명칭은 어느 때에 기원한 것인가? 위지 동이전 마한조를 보면, 조선왕준의 남분사실을 말하는 곳에
쪽수▶P93-2三韓이 辰國의 後身으로, '韓'의 稱呼가 '辰'의 그것에 比하야 後하였을것은 再言을 不待하지만 實際 文獻上에 나타나는것을 보아도, 辰國의 名은 이미 (支那의) 史記. 漢書等書에 보이되, '韓'외 稱은 거기에는 도모지 보이지않고 後漢代記錄을 爲始하야 魏略・魏志・및後漢書等書에 많이 나타난다. 史漢에는 辰國外에 朝鮮(樂浪)・眞番・臨屯・玄菟・夫餘・灌貉의 名과, 特히 漢書에는 高句麗 乃至 倭의 名까지 보이면서, 三韓이란 韓의 名은 나타나지 않는다. 勿論 史記・漢書에 나타나지않는다고 그것이 반듯이 (支那의) 前漢時代에는 없었든 이름이라고 斷言하게까지는 되지못▶P94하지만, 但 그 이름이 漢初로부터 널리 呼稱되든것이라고 하면, 史漢以外와 다른 前漢代記錄에라도 보일만한 일인데, 그렇지 아니함을 보면, 前漢時代에 (東方에) '韓' 稱이 있었다 하드라도 처음부터 그라게 널리 일커러지지 못하였든 모양이다. 더욱 漢武帝時에는 三韓의 前身인 辰國이 儼然히 存在하야,—史漢 (朝鮮傳)에 …… 辰國欲上書見天子 (武帝)라고 하였는이만치—그 이름이 漢土人의 筆舌에 常稱되었든터이므로, 적어도 當時에는 그나라(辰)가 韓으로써. 通稱되지 아니하였든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在來에 一說이 있으니, 即 尙書周官篇의 武王旣伐 東夷云云의 (僞)孔安國傳에 海東諸夷, 駒麗扶餘馯貊之屬이라고한 句節에 對하야, 唐의 孔穎達은 疏하되 海東諸夷, 駒麗扶餘軒狛之屬, 此皆孔君之時, 有此名也, (中畧)漢書有高駒麗扶餘韓. 無此馯, 馯即彼韓也, 音同而宇異爾(●●●●● ●●●●●●)라고하였다. 이로 因하야 先儒의 대개는 傳의 '馯'은 곧 '韓'의 音譯으로 그 이름이 이미 孔安國 時節 (漢武帝時)에 漢土에 著聞되었든것으로 역임에 躊躇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孔潁達疎의 所謂「漢書」는 前後漢書中 어떤것의 謂인지, 이것이 後漢書라면 몰라도, 원(前) 漢書라면 不可한것은 원(前)漢書에는 上述과같이 이 '韓'의 名이 보여있지 이니 하므로써며-書傳의 所謂 '馯'이 果然 孔疏의 解釋과 같이 三韓의 韓에 對한 寫音이라고 할는지, 혹은 駒麗・扶餘・貊과 한가지 다른 北方族屬中의 一名으로 볼는지. 이것도 問題려니와, 設令 '馯'이 韓의 指稱이라 할지라도, 所謂孔安國傳 그것이(眞僞問題로) 一大疑問中에 있어, 朱子 및 淸儒들의 考證에는 이를 後人(魏晋時人)의 僞作이라고 함이 普通인즉—實際 其中에 並擧된 駒麗와 같은 族屬도 前漢末로부터 漸次 强盛하야 漢人의 注視를 익글기 始作하였든건 인즉. 傳이 꼭(武帝時의)孔安國의 作이라고 믿기 어렵고, 따라 '馯'의 書稱이 그때에 있었는지가 疑問이다. 孔傳이 後人의 僞作이라고 하면, 그것은 高句麗의 興起發展이 있든 前漢末以後의 造作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어떻든 東方의▶P95-1'韓'의 名이 前漢代記錄에 잘 나오지 아니함은 事實이며, 그것이 文獻上에 分明히 나타나기는 後漢代以來의 記錄에서 부터이다. 그러나 吾人은 이로써 '韓'의 名稱의 起源을 後漢時代에 求하려고함은 決코 아니다. 나는 오히려 그以 前에 求하려고하는 사람의 하나이다. '韓'이 '辰'과 같이 全體에 共通하는 總名이 되게됨과, 또 그것이 中國 現存文獻上에 頻出하게되기는 얼마 後世의 일이지만, 그이름의 由來起源은 실상 그보다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韓'의 名稱은 어느때에 起源한것인가? 魏志 東夷傳 馬韓條를 보면, 朝鮮王準의 南奔事實을 말하는곳에

侯淮(準) ………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前略)準與衛滿戰不敵也, 將其左右宮人, 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云云

쪽수▶P95-2

侯淮(準) ……… 爲燕亡人衛滿所攻奪 魏略曰(前略)準與衛滿戰不敵也, 將其左右宮人, 走入海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 云云

이라하고, 후한서 동이전 마한조에도
쪽수▶P95-3이라하고, 後漢書 東夷傳 馬韓條에도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云云

쪽수▶P95-4

初朝鮮王準, 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 走入海, 攻馬韓破之(●●●●●), 自立爲韓王云云(●●●●●)

이라고한, 일절이 있다. 재래의 학자들은 흔히 이들 기사에 의하여 진말한초 준왕남분 이전에 이미 '한' 내지 '마한'의 칭(稱)을 가진 지방이 반도 중부 이남에 있었던 것으로 여기어왔고, 필자도 전에는 그렇게 인정한 적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생각하여 볼 문제이니, 위지의 소위 '居韓地'와 후한서의 소위 '攻馬韓破之'의 구가, 원래 근본 사료로부터 있어온 것인지, 혹은 양서의 각 기찬자가 자의로 가입한것인지, 재고하여 볼 필요 있다. 만일 전자의 경우라면, '한' 내지 '마한'의 칭(稱)은, 우기 사실 발생 당초의 칭호 그대로라고 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인 때 찬자 당시의 칭호 즉 후일의 명호로 추칭 부연한 바일 것은 물론이다. 우양서의 기사보다도 좀 더 먼저 된 위략—그 전문은 오늘날 전하여오지 않지만, 전인 위지 배주 소인의 단편문-에 의하면, 거기에는 '準王海中'의 구가 보인다. 여기 소위'海中'은 물론 글자대로의 해중(海中)이 아니라, 준(準)의 입거위왕한 지방 범칭으로, 특히 삼면위해의 반도 중부 이남의 땅인 진국 즉 후일 삼한 외 땅를 가르쳐 이른 것이 의심 없거니와—단 (주의할 것은) '準王海中'은 해중(진국)전체에 군림한 것이 아니라 그중의 어느 지방에 입거하여 자립한 것을 그렇게 말함인듯하고—위지・후한서의 '주입해'의 해(海)도, 바로 이 위략의 '海中' 그것으로, 역시 글자대로의 해(海)가 아니라 진(한)지를 별칭한 것인즉, '走入海'는 즉 '走入辰國'혹은 '走入韓地'와 마찬가지의 말일것이다. 그러면 위지의 이 구하(句下)에 '居韓地'의 구가 있는 것은, 내용으로 보아 결국 무의미의 중첩한 글구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되며, 따라서 원 사료에는 이러한 중첩의 의미를 가진 구가 있을 리가 만무하고. 오직 위지에 이르러 비로소 이것을 첨입한 듯하다. 즉 위지의 찬자는 '走入海'의 구만으로는 너무도 막연하여 이 글자대로의 입해(入海)로 오해할 독자가 있을까하여 (더구나 그 밑에 '自號韓王'의 구가 있으므로) 특히 '居韓地'의 구를 일부러 넣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후한서의 '攻馬韓破之'의 구는 이 위지의 '居韓地'를 일층 더 부연한 것으로, 그 밑에 '準後滅絕,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의 후일절(後一節)과 한가지 맹랑한 가필이라고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후한서의 찬자는 위지의 '韓地'를 진국의 중심지인 마한으로 해석한 동시에 준(準)이 이를 공파하여 자왕(自王)한줄로 오인한 것이지만, 이는 대세상으로 보아 또는 상식에 소하여,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때 저 위만에게 쫓기어 (일패도지의 세로) 창황히 남분한 준(準)의 고잔한 무리가 능히 진국과 같은 대국의 중심지에 처들어와 이를 파하고 진왕에 대신하여 스스로 왕이 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소이다 (준(準)이 진의 일변지에 입거하여 자립위왕한것이라면 몰라도, 진의 중심지나 전토를 탈거하여 왕이 되였다고는 상상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이를 전제로 삼아 첨가한 '準後滅絕,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의 기사는, 비판할 거리도 되지못한다. 위지의 '淮(準)…, 將其左右宮人云云'에 대하여, 후한서에 '乃將其餘衆數天人'이라한것도 과연 그대로 신빙할만한 수효의 것인지, 혹 찬자가 (그밑에) '攻馬韓破之'의 구를 유력히 하기 위하여 다소 과대적으로 부윤한 것인지 일의문이지만, 하여간 후한서의 기사 중에는 위지의 것을 일층 더 개필 혹은 전와하여, 후세의 학자로 하여금 더욱 오해를 일으키게하는 것이 한둘이 아님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상술한 바에 의하여 후한서의 '攻馬韓破之'의 구는 물론이요, 위지의 '居韓地'의 구까지도 찬자의 더한 사족 (즉 후일의 이름으로 추칭추기한것) 임이 무응한즉, 우리는 이에 의하여 '한' 내지 '마한'의 칭호가 준왕 남분 이전에 해중에 있었다고 할 이유는 없다. 재래에는 이런 추기적 기사에 대하여 거의 무검토 몰비판적이었다.
쪽수▶P95-5이라고한, 一節이 있다. 在來의 學者들은 흔이 이들 記事에 依하야 秦末漢初 準王南奔 以前에 이미 '韓' 乃至 '馬韓'의 稱을 가진 地方이, 半島中部以南에 있었든것으로 역이어왔고, 筆者도 前에는 그렇게 認定한 적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생각하여 볼 問題이니, 魏志의 所謂 '居韓地'와 後漢書의 所謂 '攻馬韓破之의' 句가, 元來 根本史料로부터 있어온것인지, 혹은 兩書의 各其撰者가 自意로 加入한것인지, 再考하여 볼 必要 있다. 만일 前者의 境遇라면, '韓' 乃至 '馬韓'의 稱은, 右記事實 發生當初의 稱呼 그대로라고 할수있지만, 後者의 境遇인 時 撰者當時의 稱呼 即 後日의 名號로 追稱敷衍한바일것은 勿論이다. 右兩書의 記事보다도 좀 더 먼저 된 魏畧—其全文은 오늘날 傳하여오지 않지만, 前引 魏志 裴註 所引의 短片文—에 依하면, 거기에는 準王海中의 句가 보인다. 여긔 所謂'海中'▶P96은 勿論 글자대로의 海中이 아니라, 準의 入居爲王한 地方 泛稱으로, 特히 三面圍海의 半島 中部以南의 地인 辰國 即 後日 三韓외 地를 가르처 이른 것이 疑心없거니와—但(注意할것은)準王海中은 海中(辰國)全體에 君臨한 것이 아니라 其中의 어느 地方에 入居하야 自立한것을 그렇게 말 함인듯하고—魏志・後漢書의 '走入海'의 海도, 바루 이 魏略의 '海中' 그것으로, 역시 글자대로의 海가 아니라 辰(韓)地를 別稱한것인즉, '走入海'는 即 '走入辰國'혹은 '走入韓地'와 마찬가지의 말일것이다. 그러면 魏志의 此句下에 居韓地의 句가 있는것은, 内容으로보아 結局 無意味의 重疊한 글句라고 하지아니하면 아니되며, 따라서 原史料에는 이러한 重疊의 意味를 가진 句가 있을 理가 萬無하고. 오직 魏志에 이르러 비로소 이것을 添入한듯하다. 即 魏志의 撰者는,走入海의 句만으로는 너무도 漠然하야 이 글자대로의 入海로 誤解핱 讀者가 있을까하야 (더구나 그밑에 自號韓王의 句가 있으므로) 特히 居韓地의 句를 일부러 너은것이라고 생각된다. 後漢書의 攻馬韓破之의 句는 이魏志의 '居韓地'를 一層 더 敷衍한 것으로, 그 밑에 準後滅絕,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의 後一節과 한가지, 孟浪한 加筆이라고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後漢書의 撰者는 魏志의 '韓地'를 辰國의 中心地인 馬韓으로 解한 同時에 準이 이를 攻破하야 自王한줄로 誤認한것이지만, 이는 大勢上으로 보아 또는 常識에 訴하야, 到底히 容認할수없는 事實이다. 이때 저 衛滿에게 쫓기어 (一敗塗地의 勢로) 蒼黃히 南奔한 準의 孤殘한 무리가 能히 辰國과 같은 大國의 中心地에 처드러와 이를 破하고 辰王에 대신하야 스스로 王이 되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所以다(準이 辰의 一邊地에 入居하야 自立爲王한것이라면 몰라도, 辰의 中心地나 全土를 奪居하야 王이 되였다고는 想像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이를 前提로 삼아 添加한 準後滅絕, 馬韓人復自立爲辰王의 記事는, 批判할거리도 되지못한다. 魏志의 '淮(準)…, 將其左右宮人云云'에 對하야. 後漢書에 '乃將其▶P97-1餘衆數天人'이라한것도 果然 그대로 信憑할만한 數爻의 것인지, 혹 撰者가 (그밑에) 攻馬韓破之의 句를 有力히하기 爲하야 多少 誇大的으로 敷潤한것인지 一疑問이지만, 何如間 後漢書의 記事中에는 魏志의 것을 一層 더 改筆 혹은 轉訛하야, 後世의 學者로하여곰 더욱 誤解룰 이르키게하는것이 한둘이 아님은 이미 周知의 事實이다. 上述한바에 依하야 後漢書의 攻馬韓破之의 句는 勿論이요, 魏志의居韓地의 句까지도 撰者의 加한 蛇足 (即 後日의 名으로 追稱追記한것) 임이 無凝한즉, 吾人은 이에 依하야 '韓' 乃至 '馬韓'의 稱呼가 準王 南奔 以前에 海中에 있었다고 할 理由는 없다. 在來에는 이런 追記的記事에 對하야 거이 無檢討 沒批判的이었다.
이와 같이 준왕의 입해이전에는 '한'이란 칭이 진국방면에 아직 없었든 것이라고 하면, 준의 입해후 '自號韓王'이라 혹 '自立爲韓王'이라한 위지 급 후한서의 기재는, 이를 여하히 볼것인가? 이것도 각 기찬자의 윤식의 필이라고하여 부인할수있을가? 나는 이것까지 마저 부인하려고함은 아니다. 이런 구절은 이미 위략 및 그 이전의 원사료로부터 존전하여오는, 우리의 주의를 요할 중요한 기사로 은료되나니, 준이 약간의 무리를 이끌고 해중(진국)에 정입하여( 일우에서) 스스로 한왕이라고 호(號)하였든것은 의심없는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동방 '한'의 지명은 이에서 기인된것이라고 믿는다. 즉 입해후 준은 진의 용허를 받어 진의 일변지(그 지점에 취하여는 후에 말하려함)에서 한 조그만—나라(국)라기보다—부락(망인부락, 즉 교거부락)을 건설하고 한왕이라 자호하는 동시에 그 부락의 이름도 인하여 한이라고 일컬어, 그대로 지명으로 바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처음에 있어서는, 한의 칭은 극히 소지역에 한하였던 것으로 인식된다. 위지외 '自號韓王' 하에 '其後絕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한 한인은, 특히 이 (한 부락의 후예들을 가리켜 이름일지요, 순전한 마한인이나 삼한인 전체의 일컫는 것이 아닐것이다. 왜 그러냐하면 준의 후는 멸절하였으되, 그부하의 후는 오히려 연면번식하여 이 기사 당시에도 준의 제사를 봉하는 자가 (당연히) 있었을뿐더러, 다른 진인에 계통한 자는 그렇게 제사를 봉하도록 관계가 심절하지 못하였든 까닭이다. 이와 같이 해중 '한'의 칭이 준에 의하여 즉 그 '自號韓王'의 사실에 인하여, 기원된 것이라고하면, 준은 여하한 유서와 의의로써 한왕이라고 자호하였든것인가? 여기서 '한'의 칭의 유래와 원의를 추구하여보자 후한 왕부의 저 잠부론(卷九, 志氏姓第三十五)을 보면
쪽수▶P97-2이와가티 準王의 入海以前에는 '韓'이란 稱이 辰國方面에 아직 없었든 것이라고하면, 準의 入海後 '自號韓王'이라 혹 '自立爲韓王'이라한 魏志 及 後漢書의 記載는, 이를 如何히 볼것인가? 이것도 各其撰者의 潤飾의 筆이라고하야 否認할수있을가? 나는 이것까지 마저 否認하려고함은 아니다. 이런 句節은 이미 魏畧 및 그 以前의 原史料로부터 存傳하여오는, 吾人의 注意를 要할 重要한 記事로 恩料되나니, 準이 若干의 무리를 익글고 海中(辰國)에 定入하야( 一隅에서) 스스로 韓王이라고 號하였든것은 疑心없는 歷史的 事實인 同時에 東方 '韓'의 地名은 이에서 起因된것이라고 믿는다. 即 入海後 準은 辰의 容許를 받어 辰의 一邊地(그 地點에 就하여는 後에 말하려함)에서 한 조그만—나라(國)라기보다—部落(亡人部落, 即 橋居部落)을 建設하고 韓王이라 自號하는 同時에 其部落의 名도 因하야 韓이라고 일컬어, 仍히 地名 으로 化한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 처음에 있어서는, 韓의 稱은 極히 小地域에 限하였든 것으로 認識된다. 魏志외 '自號韓王' 下에 '其後絕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라한 韓人은, 特히 이 (韓 部落의 後裔들을 가리처 이름일지요, 純全한 馬韓人이나 三韓人全體의 謂가 아닐것이다. 웨 그러냐하면 準의 後는 滅絕하였으되, 그部▶P98-1下의 後는 오히려 連綿繁殖하야 이 起事 當時에도 準의 祭祀를 奉하는者가 (當然히) 있었을뿐더러, 다른 辰人에 系統한者는 그렇게 祭祀를 奉하도록 關係가 深切하지 못하였든 까닭이다. 右와가티 海中 '韓'의 稱이 準에 依하야 即 그 '自號韓王'의 事實에 因하야, 起源된것이라고하면, 準은 如何한 由緒와 意義로써 韓王이라고 自號하였든것인가? 여기서 '韓'의 稱의 由來와 原義를 推究하여보자 後漢 王符의 著 潜夫論(卷九, 志氏姓第三十五)을 보면
昔周宣王 王下恐脫時字 亦有韓侯, 其國也 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이라 한 일절이 있다, 우문 중 '韓西'는 그대로 보아서는 의부합 설부거이므로 '韓東'의 오(誤)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되겟거니와, 왕부의 설은 즉 시의 대집 한혁장에 보이는 한후의 국은 그 위치가 연에 접근하였으므로 普彼韓城, 燕師(衆)所完(築)이라고 한것이며, 그 후에 한의 동쪽(나라)에서도 또한 한씨의 성을 칭하였는데, 위만에게 벌한바되어 해중으로 천거하였다는것이다. 이 설의 후 일절인 '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은 확실히 조선왕준의 입해 사실을 말하는것으로 우의 주의를 이끄는 자이니, 이에 의하면 준의 성은 본래 그 씨가 아니라 한씨인것을 알수있다 단 시의 소위 한후의 국이 연과 접근의 지라면 지금의 어느 곳에 당하며, 또 그 나라와 고조선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지? 이것은 갑작이 논하기 어려우나 고조선의 국성(國姓)이 한씨인것만은 우(右) 기사에 의하여 명백하니 우기사는 이를 이분(二分)하여 일은 연에 근접한 한후의 국에 관한 것, 일은 그 나라와 가까운 고조선한씨에 관한 것으로 탁別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드시 동일국의 역사적 변천 사실을 말한 것으로 볼것은 아니다. 현대문주2▶해동역사의 저자 한치윤은 우잠부론의 기사에 대하여 '然則 詩所云韓侯, 果指箕氏 而言歟, 此未可的證云云'이라하고[a 1] 현대문주3▶ 또 그 질(侄) 한진서도 '且據王符之說, 詩所云韓侯, 即箕氏也, 然則韓之稱似由於箕氏, 而箕氏之稱韓, 又似在於南奔金馬以前也, 然與後漢書不合, 又無他證, 未可詳也'라한 것은,[a 2]다 왕부의 설을 분탁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일관시하여 왕부가 시의 한후를 곧 고조선으로 인한 거와 같이 해석할뿐더러 고조선에 기씨 한씨의 전후의 칭성이 있었는가를 반신반의하였다. 준 및 그 선조의 성을 그로 알아오든 재래 선유의 머리에는 한성설이 잘 들어가지 않고 다소 의아 중에 있을것은 도리어 당연한 일이지만, 준의 성이 원래 기씨라는 확거는 없다. 재래의 관념으로는, 준은 은기자의 후예라하여 그 성이 기씨라고 하여왔으나, 준의 시조가 기자라는 것도 지금은 믿기 어려운 말이거니와, 설령 기자라 하더라도 기는 성이 아니라 봉국명이며, 자는 이름이 아니라 작명이다 현대문주4▶ [a 3](기자의 이름은 서여(胥餘)라한다). 그러면 준을 그 성인(箕姓人)으로 인정할 하등의 근거틀 찾을 수 없다. 전게 위지 '自號韓王'하 배주소인의 위략에 '其(準)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라고 한것을 보면—물론 이 문 상단에는 위지와 같이 '走入海' '自號韓王' 등의 구가 연속된 것으로 볼지니 이에 의하면— 당시 준왕외 자와 그 친족으로 고국(조선)에 류재(留在)한 자도 또한 한씨를 잉칭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여기 '冒姓'이라고 한 것은 다소 기자의 억측에 윤색된 구인듯 하므로 일언을 변치 아니할 수 없다. 대개 모성이라면 타성을 모한다. 즉 남의 성을 습칭 혹 가칭한다는 뜻이니, 찬자의 억측에는 필시 기자의 후라고 하는 준급일족은 본래 기씨인데, 준이 입해하여 한왕이라고 자호하매, 고토에 남아 있는 기자와 친족들도 因하여 한성(韓姓)을 습칭한 것이라고 관념한 듯하다. 다시 말하면 위략 찬자 (혹은 그 이전의 기사자도 그러하였는지 모르지만) 의 생각에는, 준의 자와 친족이 고국에서 (의례히) 기성을 칭하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고 한씨의 성을 칭하였다함은, 이는 필경 입해한 준이 한왕이라고 자호하였음에 인위한 것이라고 오인한 듯하다. 준이 비록 기자의 다음이라 할지라도 그 본성(本姓)이 기씨가 아닐 것은 위에도 말한 바이므로 변할 나위가 없고, 준이 입해하여 한왕이라고 한것은, 그것이 아무 유래와 의의없이 칭한 바도 아닐지며. 또 그렇다고 결코 당시 '한'의 칭을 가진 지방에 와서 왕하였기 때문에 운이함도 아니다. 실상 그 본성이 한씨였으므로해서 그와 같이 자호한 것일지며, 또 고국에 유재한 준의 가족이 한성을 칭한것은, 그것이 더구나 모성도 가칭도 아니요 원 본성이 한씨였기 때문에 그대로 잉칭한 바일것이다. 그리고 보면 상기 위략문의 '因冒姓(韓氏)'의 삼자에는 암만하여도 찬자의 개필이 가한듯싶고, 기실 근본 사료 에는—추측이지만—모자가 없이 바루'因 (혹仍)姓韓氏'나 혹'因(혹仍)稱韓氏'로나 되어있는 것을 그와 같이 모자를 가한 것이 아닌가한다. 이것이 용인된다면 그 기사는 즉 준은 주입해 하여 한왕이라 호(號)하고 기자 및 친족으로 고국에 유재(억유)된 자도 또한 한씨를 의구히 칭하였다는것으로 해석할것이다. 환언하면 역망후 남북으로 갈린 준왕의 일족은 함께 본성을 변치아니하고 전대로(한씨로) 행세하였다는것이 원기전의 요반이있을 것이다. 그런즉 준은 기준이 아니라 실상 '한준'이며, 그의 고국은 기씨조선이 아니라 한씨조선이라고 하여야 되겠다. 재래 동역사서에는 준은 기자의 후 사십여세손이라하여 흔히 기준이라고 서칭하여왔으나. 중국의 고사서에는 그렇게 분명히 '기준'이라고 적히어 있는 곳은 보지 못하였다. 물론 준을 기자의 후라 혹은 기여의 후사십여세라고 하기는 이미 위략위지후한서로 부터이지만 준의 성을 기라고하거나 또는 기준이라고 명서한것은 보지못하였고, 단지 위략에 '준'이라 위지에 '朝鮮侯淮(準)'혹은 '侯淮(準)'이라 후한서에 역시 '朝鮮侯準' 혹은 '朝鮮王準'이라고 하였음을 볼뿐이다. 그러나 위략의 찬자 혹은 그 이전의 기자로서 준의 성올 기로 오인함이 있었기에 '其子及親因冒姓韓氏'라고 한것이니, 이에 대한 의혹을 깨트리기에 나는 실로 남모르게 고심한바—있었다. 고조선의 한씨는 마치 부여의 해씨와 고구려의 고씨와 백제의 여씨와 신라의 박씨김씨와 발해의 대씨와 고려의 왕씨와 근세조선의 이씨와 같이 국중의 대성으로 준왕남분후에도 역연하였을듯하니, 저 사기조선전에 보이는 우거 유신중의 일인인 한음은 물론이요, 근래 빈빈히 발견되는 낙랑・대방 시대의 전명중에 나타나는 한씨들도, 조선본토의 한성인이 아니었든가한다. (청주한씨의 세보를 보면, 위략에 운이라 하고 기자의 후(예)에 우평・우량・우친이 있어 그중 우량이 마한을 습하여 상당(청주)한씨가 되었다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전연 열조의 것이니, 살피건대 열조자는 전인 위략문의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의 급자(접속사)가 문헌통고(사상고마한조)와 같은 서에 우자로 와전된 것을 그대로 보아 그 하의 친자와 합하여 '우친'이란 인명으로 오독한 후에, 경진일보하여 우자의 항렬을 붙이어 우평・우량의 이허위인을 가조한 것이 분명하므로 기여(其餘)의 것은 더 비판을 요하지 않는다) 대개 동이족의 칭성이란, 중국문화를 모흠하는(나라의)특수층에서 처음 발생하여 차차 (그것이) 보급화함과, 또 그 세계 연원이 중국에서 발한 것처럼 표방함이 보통임을 알진대, 고조선과 같이 중국과의 정치적 문화적 교섭이 구원(久遠)하였든 나라에 있어서는, 왕실의 칭성과 기자시조설류의 발생이 도리어 당연성을 가졌다고 할수 있으니, 즉 고조선의 왕실은 한씨를 칭하는 동시에 특히 그 연원을 은의 기자에서 발한 양으로 표방하였든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것이 마침내 기자동래설 내지 교화설을 생하게까지 된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난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후일에 숙고를 요하기로하고 다만 여기에는 준왕의 본성이 한씨였다는 것과 그것이 고조선의 대성이었으리라는 것과 동이족의 칭성이 중국모방에 불과하다는 것만을 장담하여 두는데, 한가지 논급할 것은 고조선의 '한'성이 아무 고유동방어와의 관련없이 순연히 중국의 것을 그대로 모취하여 온것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우견으로는 그것의 형식은 비 혹 중국식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자못 동방어의 의의도 고려된 듯하다. 만몽어에 군장(대인) 대군을 한(han)혹은 가한(khahan)이라하고, 조선어에 대(大)를 '한' 이라 한즉. '韓'은 이러한 군장 대인 또는 대(大)의 의를 가진 동방어로 이와 류음인(중국식의 추성을 취한것이 아닌가한다. 고대 반도에서는 씨성 이외에 관지명에 있어서도 대(大)의 의로 한자를 차래하는 예가 많으니, 현대문주5▶가령 신라 관명중에 대사를 한사라 하기도 하고[a 4] 현대문주6▶대아손을 한아손[a 5] 현대문주7▶혹은 간단히 한찬[a 6]이라고도 하고, 대내말(大奈末) 현대문주8▶혹은 한내말(韓奈末)[a 7]라고하고, 현대문주9▶백제시대의 마산현(한산)을 고려 때로부터 한산[a 8]이라 함과, 현대문주10▶신라 이름 중에 소다사현에 대하여 한다사군[a 9]이 있음과 같다 ('馬'도 역시 대(大)의 의미인 것은, 대산을 '말뫼' 대총을 '말무덤'이라함에서 알수있다) 또 한(韓)자외에 한(翰)・한(漢)등의 자로써 대(大)의 의미를 표시하는 예도 있지만 일일히 매거할 겨를이 없다. 군장・대인・또는 대(大)의 의미의 어로써 국성을 삼는 예는 동이족간에 흔히 보는 사실이니, 후세 발해의 대씨와 같은 것은 논(論)이요 전세 부여의 해씨와 고구려의 고씨와 가락・신라의 김씨와 같은 것도 이러한 뜻의 어(語)로 해역한다. 해(解)의 고음(古音)은 ha, ha, gu로 현음(現音)은 kai, hai, ka 음으로 발음하니, 부여의 해는 즉 동국의 대인 대관의 칭인 대가-마가 우가 저가 구가의 가와 고구려의 고추가(대가)의 가와 동음동의의 어인 大 인 대군의 의미일지며, 현금 조선어의 대(大)를 의미하는'크'와도 서로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대문주11▶고구려 지명 중에 왕봉현을 개백[a 10]이라고 함을보면, 봉과 백은 거의 동음이자, 왕의 훈(訓)은 개(皆)의 음과 같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개(皆)와 동음인 해(解)가 군장의 의미임을 더욱 알수있다). 고구려는 부여와 동족인 관계로 언어법속이 서로 같을뿐더러 왕실도 바로 부여 해씨의 일족이 와서 창시한 것이므로 구려의 고씨는 해(씨)의 음에서 일층 아의(雅義)를 가진 류음(類音)의 자로 변한 바에 지나지 못할 것이다. 다음 가락 신라의 김씨는 역시 군장주상의 칭인 '干'(거세간, 마립간 기타 략), '邯'(거슬감서불감) '今'(니사금혹니질금) '錦'(매금)에서 아의의 자를 취한 것일지요, 결코 저 황탄한 김란 전설에서 발생한 것은 아닐것이다. (신라에서 왕성을 김성이라고 함을보아 '金'이 군장의 의미임을 더욱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유례로 보면 한씨 해씨 고씨 김씨가 다 동일어원의 분형일지도 모르나, 어떠튼 대인장군의 의미를 가진 어형으로써 국성을 삼는데 있어서는 서로 공통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쪽수▶P98-2昔周宣王 王下恐脫時字 亦有韓侯, 其國也 近燕, 故詩云, 普彼韓城, 燕師所完, 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이라 한 一節이 있다, 右文中 '韓西'는 그대로 보아서는 義不合 說不去이므로 '韓東'의 誤로 보지아니하면 아니되겟거니와, 王符의 說은 即 詩의大集 韓奕章에 보이는 韓侯의 國은 그位置가 燕에 接近하였으므로 普彼韓城, 燕師(衆)所完(築)이라고 한것이며, 其後에 韓의 東쪽(나라)에서도 또한 韓氏의 姓을 稱하였는데, 衛滿에게 伐한바되어 海中으로 遷居하였다는것이다. 此說의 後 一節인 亦姓韓, 爲衛滿所伐, 遷居海中은 確實히 朝鮮王準의 入海 事實을 말하는것으로 吾人의 注意를 익그는 者이니, 이에 依하면 準의 姓은 本來 箕氏가 아니라 韓氏인것을 알수있다 但 詩의 所謂 韓侯의 國이 燕과 接近의 地라면 지금의 어느곳에 當하며, 또 그나라와 古朝鮮사이에 어뎌한 關係가있었는지?이것은 갑작이 論하기어려우나 古朝鮮의 國姓이 韓氏인것만은 右記事에 依하야 明白하니 右記事는 이를 二分하야 一은 燕에 近接한 韓侯의 國에 關한것, 一은 그나라와 가까운 古朝鮮韓氏에 關한것으로 柝別하지 아니하면아니된다. 그러므로 이것은 반듯이 同一國의 歷史的 變遷事實을 말한것으로 볼것은 아니다. 원문주2▶海東繹史의 著者 韓致奫은 右潜夫論의 記事에 對하야 '然則 詩所云韓侯, 果指箕氏 而言歟, 此未可的證云云'이라하고[1] 원문주3▶또 그侄 韓鎭書도 且據▶P99王符之說, 詩所云韓侯, 即箕氏也, 然則韓之稱似由於箕氏, 而箕氏之稱韓, 又似在於南奔金馬以前也, 然與後漢書不合, 又無他證, 未可詳也라한것은[2], 다 王符의 說을 分柝하지아니하고 그대로 一貫視하야 王符가 詩의 韓侯를 곧 古朝鮮으로 認한 거와같이 解釋할뿐더러 古朝鮮에 箕氏 韓氏의 前後의 稱姓이 있었는가를 半信半疑하였다. 準及 其先祖의 姓을 箕로 알아오든 在來先儒의 머리에는 韓姓說이 잘 들어가지 않고 多少 疑訝中에 있을것은 도리어 當然한 일이지만, 準의 姓이 元來 箕氏라는 確據는 없다. 在來의 觀念으로는, 準은 殷箕子의 後裔라하야 그 姓이 箕氏라고 하여왔으나, 準의 始祖가 箕子라는것도 지금은 믿기 어려운 말이어니와, 設令 箕子라 하더라도 箕는 姓이 아니라 封國名이며, 子는 名이아니라 爵名이다 원문주4▶(箕子의名은胥餘라한다)[3]. 그러면 準을 箕姓人으로 認할 何等의 根據를 찾을 수 없다. 前揭 魏志'自號韓王'下 裴註所引의 魏畧에 '其(準)子及親留在國者, 因冒姓韓氏'라고 한것을 보면—勿論 此文上段에는 魏志와 같이 '走入海 自號韓王 等의 句가 連續된것으로 볼지니 이에 依하면—當時 準王외 子와 그親族으로 故國(朝鮮)에 留在한者도 또한 韓氏를 仍稱한 事實을 알수 있는데, 여긔 '冒姓'이라고 한것은 多少 記者의 臆測에 潤色된 句인듯 하므로 一言을 辨치 아니할수없다. 대개 冒姓이라면 他姓을 冒한다, 即 남의 姓을 襲稱 혹 假稱한다는 뜻이니, 撰者의 臆測에는 必是 箕子의 後라고 하는 準及一族은 本來 箕氏인데, 準이 入海하야 韓王이라고 自號하매, 故土에 남어 있는 其子와 親族들도 因하야 韓姓을 襲稱한것이라고 觀念한듯하다. 다시말하면 魏畧 撰者 (혹은 그 以前의 記事者도 그러하였는지 모르지만) 의 생각에는, 準의 子와 親族이 故國에서 (依例히) 箕姓을 稱하여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않고 韓氏의 姓을 稱하였다함은, 이는 畢竟 入海한 隼이 韓王이라고 自號하였음에 因胃한것이라고 誤認한듯하다. 準이 비록 箕子의 後라 할지라도 其本姓이 箕氏가 아닐것은 위에도 말한바이므로 辨할 나위가 없고, 準▶P100이 入海하야 韓王이라고 한것은, 그것이 아무 由來와 意義없이 稱한바도 아닐지며. 또 그렇다고 决코 當時 '韓'의 稱을 가진 地方에 와서 王하였기 때문에 云爾함도 아니다. 실상 其本姓이 韓氏였으므로해서 그와같이 自號한 것일지며, 또 故國에 留在한 準의 家族이 韓姓을 稱한것은, 그것이 더구나 冒姓도 假稱도 아니요 원 本姓이 韓氏였기 때문에 그대로 仍稱한 바일것이다. 그리고 보면 上記 魏畧文의 '因冒姓(韓氏)'의 三字에는 암만하여도 撰者의 改筆이 加한듯싶고, 其實 根本史料 에는—推測이지만—冒字가 없이 바루'因 (혹仍)姓韓氏'나 혹'因(혹仍)稱韓氏'로나 되어있는것을 그와같이 冒字를 加한 것이 아닌가한다. 이것이 容認된다면 그記事는 即準은 走入海 하야 韓王이라 號하고 其子及親族으로 故國에 留在(抑留)된者도 또한 韓氏를 依舊히 稱하였다는것으로 解釋할것이다. 換言하면 阈亡後 南北으로 갈린 準王의 一族은 共히 本姓을 變치아니하고 前대로(韓氏로) 行世하였다는것이 原記專의 要頒이있을 것이다. 그런즉 準은 箕準이 아니라 실상 '韓準'이며, 그의 故國은 箕氏朝鮮이 아니라 韓氏朝鮮이라고 하여야 되겠다. 在來 東阈史書에는 準은 箕子의 後 四十餘世孫이라하야 흔이 箕準이라고 書稱하여왔으나. 中國의 古史書에는 그렇게 分明히 '箕準'이라고 적히어 있는곳은 보지 못하였다. 勿論 準을 箕子의 後라 혹은 箕予의 後四十餘世라고 하기는 이미 魏畧魏志後漢書로 부터이지만 準의 姓을 箕라고하거나 또는 箕準이라고 明書한것은 보지못하였고, 단지 魏略에 '準'이라 魏志에 '朝鮮侯淮(準)'혹은 '侯淮(準)'이라 後漢書에 역시 '朝鮮侯準' 혹은 '朝鮮王準'이라고 하였음을 볼뿐이다. 그러나 魏略의 撰者 혹은 그以前의 記者로서 準의 姓올 箕로 誤認함이 있었기에 '其子及親因冒姓韓氏'라고 한것이니, 이에 對한 疑惑을 깿이기에 나는 실로 남모르게 苦心한바—있었다. 古朝鮮의 韓氏는 마치 夫餘의 解氏와 高句麗의 高氏와 百濟의 餘氏와 新羅의 朴氏金氏와 渤海의 大氏와 高麗의 王氏와 近世朝鮮의 李氏와같이 國中의 大姓으로 準王南奔後에도 亦▶P101然하였을듯하니, 저 史記朝鮮傳에 보이는 右渠 遺臣中의 一人인 韓陰은 勿論이요, 近來 頻頻히 發見되는 樂浪・帶方 時代의 磚銘中에 나타나는 韓氏들도, 朝鮮本土의 韓姓人이 아니었든가한다. (淸州韓氏의 世譜를 보면, 魏略에 云이라 하고 箕子의 後(裔)에 友平・友諒・友親이 있어 其中 友諒이 馬韓을 襲하야 上黨(淸州)韓氏가 되었다는 記事가 있으나, 이는 全然 揑造의 것이니, 按컨대 揑造者는 前引 魏略文의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의 及字(接續詞)가 文獻通考(四商考馬韓條)와같은 書에 友字로 訛轉된것을 그대로 보아 其下의 親字와 合하야 '友親'이란 人名으로 誤讀한 후에, 更進一步하야 友字의 行列을 불이어 友平・友諒의 二虛僞人을 加造한것이 分明하므로 其餘의것은 더 批判을 要하지 않는다) 대개 東夷族의 稱姓이란, 中國文化를 模欽하는(나라의)特殊層에서 처음 發生하야 차차 (그것이) 普及化함과, 또 그世系 淵源이 中國에서 發한것처럼 標榜함이 普通임을 알진대, 古朝鮮과 같이 中國과의 政治的 文化的 交涉이 久遠하였든 나라에 있어서는, 王室의 稱姓과 箕子始祖說類의 發生이 도리어 當然性을 가졌다고 할수 있으니, 即 古朝鮮의 王室은 韓氏를 稱하는 同時에 特히 그淵源을 殷의 箕子에서 發한양으로 標榜하였든것이 아닌가. 그리하야 그것이 맟음내 箕子東來說 乃至 敎化說을 生하게까지 된것이 아닌가 하는 疑心이 난다. 그러나 이에 對하여는 後日에 熟考를 要하기로하고 다만 여기에는 準王의 本姓이 韓氏였다는것과 그것이 古朝鮮의 大姓이었으리라는 것과 東夷族의 稱姓이 中國模倣에 不過하다는것만을 壯談하여 두는데, 한가지 論及할것은 古朝鮮의 '韓'姓이 아무 固有東方語와의 關聯없이 純然히 中國의 것을 그대로 模取하여 온것이냐 아니냐 하는問題이다. 愚見으로는 그것의 形式은 비 혹 中國式이지만 內容에 있어서는 자못 東方語의 意義도 考慮된듯하다. 滿蒙語에 君長(大人) 大君을 汗(han)혹은 可汗(khahan)이라하고, 朝鮮語에 大를 '한 이라 한즉. '韓'은 이러한 君長 大人 또는 大의 義를 가진 東方語로 이와 類▶P102音인(中國式의 推姓을 取한것이 아닌가한다. 古代半島에서는 氏姓以外에 官地名에 있어서도 大의 義로 韓字를 借來하는 例가 많으니, 가령 新羅 官名中에 大舍를 원문주5▶一云 韓舍라[4] 하고 원문주6▶大阿飡을 韓阿飡[5] 원문주7▶혹은 單히 韓粲[6]이라고도 하고, 원문주8▶大奈末 혹은 韓奈末[7]라고하고, 원문주9▶百濟時代의 馬山縣(韓山)을 高麗때로부터 韓山이라 함과[8], 원문주10▶新羅 名中에 小多沙縣에 對하야 韓多沙郡[9]이 있음과 같다 ('馬'도 역시 大의 義인 것은, 大山을 '말뫼' 大塚을 '말무덤'이라함에서 알수있다) 또 韓字外에 翰・漢等의 字로써 大의 義를 表示하는 例도 있지만 一一히 枚擧할 결을이 없다. 君長・大人・또는 大의 義의 語로써 國姓을 삼는 例는 東夷族間에 흔히 보는 事實이니, 後世 渤海의 大氏와 같은것은 論이요 前世 夫餘의 解氏와 高句麗의 高氏와 駕洛・新羅의 金氏 와 같은것도 이러한 뜻의 語로 解繹한다. 解의 古音은 ha, ha, gu로 現音은 kai, hai, ka 音으로 發音하니, 夫餘의 解는 即同國의 大人 大官의 稱인 大加-馬加 牛加 豬加 狗加의 加와 高句麗의 古雛加(大加)의 加와 同音同義의 語인 大 人 大君의 義일지며, 現今 朝鮮語의 大를 意味하는'크'와도 서로 關聯이 있을것이다. (원문주11▶高句麗地名中에 王逢縣을 一云 皆伯[10]이라고 함을보면, 逢과 伯은 거이 同音異字, 王의訓은 皆의音과같다고 할 수 있고, 따라서 皆와 同音인 解가 君長의 義임을 더욱 알수있다). 高句麗는 夫餘와 同族인 關係로 言語法俗이 서로 같을뿐더러 王室도 바루 夫餘 解氏의 一族이와서 創始한것이므로 句麗의 高氏는 解(氏)의 音에서 一層 雅義를 가진 類音의 字로 變한바에 지나지못할것이다. 다음 駕洛 新羅의 金氏는 역시 君長主上의 稱인 '干'(居世干, 麻立干其他略), '邯'(居瑟邯舒弗邯) '今'(尼師今혹尼叱今) '錦'(寐錦)에서 雅義의 字를 取한것일지요, 決코 저 荒誕한 金卵傳說에서 發生한것은 아닐것이다. (新羅에서 王城을 金城이라고 함을보아 '金'이 君長의 義임을 더욱 알수있다). 이와같은 類例로 보면 韓氏 解氏 高氏 金氏가 다 同一語源의 分形일지도모르나, 어떠튼 大人長君의 義를 가진 語形으로써 國姓을 삼는데 있어서는 서로 共通하였으리라고 믿는다.
입해후준이 '自號韓王'이라한것은 결국 구성을 인칭한 표시에 불과하거니와, 그 교거부락의 이름도 역시 한국이라 자칭 하여 비로소 해중(진국)에 한의 명이 생긴 것으로 사료되며, 그때의 한이란-전술과 같이-준의교거부락에 한한 명칭이므로 극히 작은 지역에서 초월하지 못하였을 것이고, 따라서 그 초기에는 외국에까지 저문될 만한 지명이 되지못하였을것이다. 전한대기록에 동방 한의 이름이 잘 나오지 아니함은 전혀 이러한 소이가 아닌가 한다. 그러면 준의 입거명명한 최초의 '韓'은 어느곳이며, 그 이름이 어떻게 하여 진한 마한 변한 등 삼한의 칭을 생하여 진의 명을 대하는 전체의 총명이 되었느냐? 하는 중대문제에 즉면하였다. 이에 대하여 비견을 개진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쪽수▶P103-1入海後準이 '自號韓王'이라한것은 結局舊姓을 因稱한 表示에 不過하거니와, 그僑居部落의 名도 역시 韓國이라 自稱 하야 비로소 海中(辰國)에 韓의 名이 생긴것으로 思料되며, 그때의 韓이란-前述과같이-準의僑居部落에 限한名稱이므로 極히 작은 地域에서 超越하지 못하였을것이고,따라서 그初期에는 外國에까지 著聞될 만한 地名이 되지못하였을것이다. 前漢代記錄에 東方 韓의 名이 잘 나오지 아니함은 全혀 이러한 所以가 아닌가 한다. 그러면 準의 入居命名한 最初의 '韓'은 어느곳이며, 그이름이 어떻게하야 辰韓 馬韓 弁韓等 三韓의 稱을 生하야 辰의 名을 代하는 全體의 總名이 되었느냐? 하는 重大問題에 即面하였다. 이에 對하야 鄙見을 開陳하면 대개 다음과 같다.
준의 남분입거한 지점은 (재래에는 준이 진왕의 치도인 월지국에 들어와 마한왕이 되었다는 오해와 또 월지의 위치가 금익산이리란 오측에 의하여 익산준도설이 행하였으나, 그것은 일고의 가치가 없음) 전술과 같이 진국의 일변지로서,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후일 소위 삼한의 일인 진한 (마한의 동북)의 땅이라고 나는 인정하나니, 그곳은 북쪽 조선 방면으로보터 유이망명하여 오는 부중을 용납하기에 가장 적당한 지방일 뿐더러, 본래 진한의 역사가 (후술할 바와같이) 망인부락으로 형성되어, 그 후에 부절히 유입하는 북방의 이주민에 의하여 차차 커진 사회인 까닭이다. 진한의 현재 지리상의 위치와 그 칭호의 시초에 취하여는 후절에 진한문제를 전론하는곳에서 상술하려하므로 여기서는 아직 보류하여 두거니와, 어떻든 준의 명명한 '韓'은 처음 이곳에서 시작되어 후에 '辰韓'의 칭을 얻게된 것이니, 진한이란 말은 즉 진국의 한-다시말하면 진국의 일우를 할거한(유이 부족의)한-이란 뜻으로 처음 낙랑 한인이 유이 부족에 대하여 지은 특별명칭인것같다. 진한인 스스로는 그냥 한이라고 하였을것이요 진한이라고는 하지아니하였을것 같으며, 한인도 왕왕 진한(인)을 간단히 한(인)이라고 서칭한 예가 위략 위지 후한서 등서에 보인다. 위략에 보이는 염사면에 관한 설화 중에는 앞서 전장에도 말한 바와 같이 진한(객체)과 진국(주체)을 혼동하여 진역에 대하여도 '辰韓' 혹은 '韓'이라고 서칭하였거니와, 전한말 왕장 시대에는-이미 유이부족의 팽대에 따라-'辰韓' 및 '韓'의 칭이 제법 광의화하여, 진의 주체요 본체인 '고마'족 (이 용어는 필자가 처음 쓴 것이나, 마한의 마가 흔히 근래 학자의 설과 같이 '고마'의 약칭으로 인식될진대, 이런 용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에까지 그 이름이 혼용된 것은 사실인 동시에 '韓'이 '辰'의 칭을 차차 압도하고 극복하게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후한서 광무기 건무건이십년조에 '秋東夷 韓國人, 率衆, 請樂浪內附'라한 한국인은, 동서 동이전 한조에 보이는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云云'의 한인염사인의 위(謂)로, 염사란 지방이 진국의 동(동북)계인 진한에 있지 아니하고 진국수부의 서편에 있었다고 함은 이미 전장에도 변한 바어니와, 이 경우에 진인 (혹은진국) 염사인이라 하지아니하고 한인염사인이라고 한것을 보면, '辰'의 칭은 점점 진명으로 화하고 한의 칭이 이에 대하여감을 더욱 알 수 있다. 후한서의 편찬은 위지보다도 후에 되었지만, 본기 및 기타의 비사는 후한시대의 기록에 의거함이 많었으므로 우(右)기사와 같은 것은 후한대기록 그대로 보아 좋다. 후한 유희(劉熙) (일운 유진(劉珍))의 석명(석음식조에 보이는'韓羊韓兎韓鷄本法出韓國所爲也'의 한 및 한국도 (선유의 설과 같이)역시 광의의 한을 지칭한것인듯 하거니와, 한의 칭은 후한시대에 이르러 더욱 보편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馬韓'이란 칭호는 어느 때부터 불러젔는지 자세하지않으나, 필시 '韓'의 칭이 광의화한 후한시대에 유이부족의 진한과 구별하기 위하여 생긴 명칭인듯하니, 마한은 즉 '고마'한의 약칭이라고 함이 가장 합리적 해석일것같다. 이 '고마'한 설의 대표자는 '雜玫'의 저자 점패방지진씨라고 할수있는데, 현대문주12▶그 어의적 해석에 있어 씨가 '고마'는 조선고어에 마의 칭이리라고 [a 11]추정한데 대하여는 (논거박약하여) 찬동하기어렵고, 필자는 일즉부터—'고마'는 고구려의 '蓋馬'란 말과 동원동의의 어로, 현대문주13▶이것은 도리어 '上' '神' '聖'을 의미하는 조선어의 '감' '검' '금' 일본어의 カミ, カム에 해당한 말이 아닌가하는 의견을 주장하여온 일이 있었다.[a 12] 그것의 당부는 하여햇든, '고마'는 맥족의 칭어로 고래 일본서도 맥 혹 고구려를 'コマ'라고 훈독하여왔거니와, 맥족은 그들 자신을 '개마' '고마' 혹은 이와 유사한 음의 어로써 호칭하고, 또 그 주지 및 신성시하는 명산대천에까지 그렇게 이름짓기를 좋아하여, 실제 맥족의 분포한 곳에는 그런 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마치 고대 희랍인이 저들 자신을 Hellenea 라하고 그 거주하는 토지를 Hellas 라고 함과 같이) 중국의 오랜 지리서인 산해경(해내북경)에 '葢國, 在鉅燕南・倭北, 倭屬燕' 이라한 개국은-즉 그 지리상의 위치로 보아-진국의 '개마'(고마)족을 약칭한 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거니와, 현대문주14▶ 진국의 마한지방이었든 금일의 충청전라지방에 '고마' '금마' 혹은 이와 동훈인 웅자가 붙은 지명이 고금을 통하여 무수[a 13]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진국의 본체는 고예맥족 (개마족)의 남하자로 일찍이 개국의 별칭을 듣고 후한시대에는 진한과 구별하여 신한의 칭을 얻었으니, 진한은 즉 진국의 동북계에 내주한 유이부족에 대한 전칭이 되고 마한은 그 서남방에 반거한 본'고마'족에 대한 전칭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 신구(주객) 이족(二族)은 본시 종족상으로는 그다지 큰 차가 없었을 것이요 (단 문화 정도의 차는 별문제로 삼고) 말하자면 동일 북방 계통에 속하는 광의의 예맥족으로 내주에 선후의 차가 있을 뿐이며, 더구나 주객이체가 거의 서로 잡거하다시피 하였으므로, 그들에 대한 칭호도 가위, '異中有同, 同中有異'의 격이 되어 '辰'의 일명은 객체인 신래족(新來族)의 '韓'에 붙어 '辰韓'의 명이 생기고 또 '韓'의 칭은 점점 광의화하여 주체인 재래족에까지 보급하여 '馬韓' '弁韓'의 명이 생기게 된 것이다. 변한은 역시 변진한의 약칭이니, 이는 본시 진국의 일부로서 그 본명은 변한이 아니라 변진이었던 까닭이다. 변한이란 명칭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위략과 위지에서부터이나, 현전 위략의 단편문에는 앞서 인변한 염사착(廉斯鑡)에 관한 기사 중에 보이는 '牟韓'이 즉 그 변한의 오(誤)이리라고 생각되는 것 밖에는 더 변한의 그 이름을 얻어 볼 수 없고, 위지에도 동이전한조 첫머리에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이라한 변한 외에는 타처에는 다 변진으로 되어있고 변한이라고는 하지 아니하였으며, 이상 양서를 승습한 후한서동이전에는 변진은 전부 변진이라 쓰고 변한이라고 쓴 곳은 하나도 볼 수 없다. 변한이란 명칭은 그 이후의 사서 중에 더러 많이 보이나, 어떻든 그런 명칭이 이미 위략위지에(비록 하나라도) 보이기 시작하였고, 더구나 이상 삼서에 다 변진을 삼한중에 산입하였은즉, 이것을 한의 일종으로 관념한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관념은 이미 후한시대로부터 더욱 농후하여 지었으리라고 추측한다.
쪽수▶P103-2準의 南奔入居한 地點은 (在來에는 準이 辰王의 治都인 月支國에 들어와 馬韓王이 되었다는 誤解와 또月支의 位置가 今益山이리란 誤測에 依하야 益山準都說이 行하였으나, 그것은 一顧의 價値가 없음) 前述과 같이 辰國의 一邊地로서, 좀 더 具體的으로 말하면 後日 所謂三韓의 一인 辰韓 (馬韓의東北)의 地라고 나는 認定하나니, 그 곳은 北쪽 朝鮮方面으로보터 流移 亡命하여 오는 部衆을 容納하기에 가장 適當한 地方일 뿐더러, 本來 辰韓의 歷史가 (後述 할바와같이) 亡人部落으로 形成되어, 其後에 不絶히 流入하는 北方의 移住民에 依하야 차차 커진 社會인 까닭이다. 辰韓의 現在地理上의 位置와 其稱號의 始初에 就하여는 後節에 辰韓問題를 專論하는곳에서 詳述하려하므로 여기서는 아직 保留하여 두거니와, 어떻든 準의 命名한 '韓'은 처음 이곳에서 始作되어 後에 '辰韓'의稱을 얻게된것이니, 辰韓이란 말은 即 辰國의 韓-다시말하면 辰國의 一隅를 割居한(流移部族의)韓-이란 뜻으로 처음 樂浪 漢人이 流移部族에 對하야 지은 特別名稱인것같다. 辰韓人 스스로는 그냥 韓이라고 하였을것이요 辰韓이라고는 하지아니하였을것 같으며,漢人도 往往 辰韓(人)을 單히 韓(人)이라고 書稱한 例가 魏略 魏志 後漢書 等書에 보인다. 魏略에 보이▶P104는 廉斯緬에 關한 說話中에는 앞서 前章에도 말한바와같이 辰韓(客體)과 辰國(主體)을 混同하야 辰阈에 對하여도 '辰韓' 혹은 '韓'이라고 書稱 하였거니와, 前漢末 王葬 時代 에는-이미 流移郭族의 膨大에 따라-'辰韓' 及 '韓'의 稱이 제법 廣義化하야, 辰의 主體요 本體인 고마'族(이用語는 筆者가 처음 쓴것이나, 馬韓의 馬가 흔이 近來 學者의 說과 같이 '고마'의 略稱으로 認識될진대, 이런 用語도 無妨하다고 생각한다) 에까지 그 이름이 混用된것은 事實인 同時에 '韓'이 '辰'의 稱을 차차 壓倒하고 克服하게된것도 또한 事實이다, 後漢書 光武紀 建武建二十年條에 '秋東夷 韓國人, 率衆, 請樂浪內附'라한 韓國人은, 同書 東夷傳 韓條에 보이는 '建武二十年, 韓人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云云'의 韓人廉斯人의 謂로, 廉斯란 地方이 辰國의 東(東北)界인 辰韓에있지아니하고 辰國首府의 西便에 있었다고함은 이미 前章에도 辨한바어니와, 이境遇에 辰人(혹은辰國) 廉斯人이라 하지아니하고 韓人廉斯人이라고 한것을 보면, '辰 의 稱은 漸漸 陳名으로 化하고 韓의 稱이 이에 代하여감을 더욱 알수있다. 後漢書의 編纂은 魏志보다도後에 되었지만, 本紀 及其他의 肥事는 後漢時代의 記錄에 依據함이 많었으므로 右記事와 같은것은 後漢代記錄 그대로 보아좋다. 後漢 劉熙(一云劉珍)의 釋名(釋飲食條,에 보이는'韓羊韓兎韓鷄本法出韓國所爲也'의 韓 及 韓國도 (先儒의 說과 같이)역시 廣義의 韓을 指稱한것인듯 하거니와, 韓의 稱은 後漢時代에 이르러 더욱 普遍化하였다고 볼수있다. '馬韓'이란 稱呼는 어느때부터 불러젔는지 仔細하지않으나, 必是 '韓'의 稱이 廣義化한 後漢時代에 流移部族의 辰韓과 區別하기 爲하야 생긴 名稱인듯하니, 馬韓은 即'고마'韓의 略稱이라고함이 가장 合理的 解釋일것같다. 이'고마'韓 說의 代表者는 '雜玫'의 著者 鮎貝房之進氏라고 할수있는데, 원문주12▶其語義的 解釋에 있어 氏가 '고마'는 朝鮮古語에 馬의 稱이리라고[11]推定한데 對하여는 (論據薄弱하야) 賛同하기어렵고, 筆者는일즉부터—'고마'는 高句麗의 '蓋馬'란말▶P105과 同源同義의 語로, 이것은 도리어 '上' '神' '聖'을 意味하는 朝鮮語의 '감' '검' '금' 日本語의 カミ, 원문주13▶カム에 該當한말이 아닌가하는 意見을 主張하여온 일이 있었다.[12] 그것의 當否는 何如햇든, '고마'는 貊族의 稱語로 古來 日本서도 貊혹 高句麗를 'コマ'라고 訓讀하여왔거니와, 貊族은 그들 自身을 '개마' '고마' 혹은 이와 類似한 音의 語로써 呼稱하고,또 그 住地및 神聖視하는 名山大川에까지 그렇게 이름짓기를 조와하야, 實際 貊族의 分布한 곳에는 그런 이름이 많이 남어있다 (마치 古代 希臘人이 저들自身을 Hellenea 라하고 그 居住하는 土地를 Hellas 라고 함과갈이) 中國의 오랜 地理書인 山海經(海內北經)에 '葢國, 在鉅燕南・倭北, 倭屬燕' 이라한 葢國은-即 그 地理上의 位置로 보아-辰國의 '개마'(고마)族을 略稱한것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거니와, 원문주14▶辰國의 馬韓地方이었든 今日의 忠淸全羅地方에 '고마' '금마' 혹은 이와 同訓인 熊字가 붙은 地名이 古今을 通하야 無數[13]한것은 決코 偶然한 일이 아니라고 할 수있다. 要컨대 辰國의 本體는 古濊貊族 (개마族)의 南下者로 일즉이 蓋國의 別稱을 듯고 後漢時代에는 辰韓과 區別 하야 新韓의 稱을 얻었으니, 辰韓은 即 辰國의 東北界에 來住한 流移部族에 對한 專稱이 되고 馬韓은 그 西南方에 盤据한 本'고마'族에 對한 專稱이 되었었다. 그러나 이 新舊(主客)二族은 本是 種族上으로는 그다지 큰 差가 없었을 것이요 (但文化程度의差는 別問題로 삼고) 말하자면 同一北方系統에 屬하는 廣義의 濊貊族으로 來住에 先後의 差가있을뿐이며, 더구나 主客二體가 거이 서루 雜居하다싶이 하였으므로, 그들에 對한 稱呼도 可謂, 異中有同, 同中有異'의 格이 되어 '辰'의 一名은 客體인 新來族의 '韓'에 붙어 '辰韓'의 名이 생기고 또 '韓'의 稱은 漸漸 廣義化하야 主體인 在來族에까지 普及하야 '馬韓' '弁韓'의 名이 생기게된것이다. 弁韓은 역시 弁辰韓의 略稱이니, 이는 本是 辰國의 一部로서 其本名은 弁韓이 아니라 弁辰이었든 까닭이다. 弁韓이란 名稱이 文獻上에 나타나기는 魏略과 魏志에서▶P106-1부터이나, 現傳 魏略의 短片文에는 앞서 引辨한 廉斯鑡에 關한 記事中에 보이는 '牟韓'이 即 그弁韓의 誤이리라고 생각되는것 밖에는 더 弁韓의 記名을 어더 볼수없고, 魏志에도 東夷傳韓條 첫머리에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이라한 弁韓外에는 他處에는 다弁辰으로 되어있고 弁韓이라고는 하지 아니하였으며, 以上兩書를 承襲한 後漢書東夷傳에는 弁辰은 全部 弁辰이라 書하고 弁韓이라고 書한 곳은 하나도 볼수없다. 弁韓이란 名稱은 그以後의 史書中에 더러 많이 보이나, 어떻든 그런 名稱이 이미 魏略魏志에(비록 하나라도) 보이기 始作하였고, 또 구나 以上三書에 다 弁辰을 三韓中에 算入하였은즉,이것을 韓의 一種으로 觀念한것은 더 말할것도 없거니와 이러한 觀念은 이미 後漢時代로부터 더욱 濃厚하여 지었으리라고 推測한다.
이와같이 '韓'의 칭은 처음 조선왕준의 망명부락에서 시작되어 그후 두 칭호가 점차 노대하여 필경은 진의 이름을 대(代)하는 전체의 총명이 되고말았지만 소명(小名)이 대명(大名)으로 변하는 예는 외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가장 저명하고도 적절한 예를 하나 들면 일본사상에서 한을 'カラ'라고 칭함과 같은 것이니 'カラ'는 본시 변진 이십여국 중의 하나인 구사 (즉 가라 혹은 가야 가락)에 대한 음칭으로-처음에는 한 전체의 칭호는 아니였든 것인데-그것이 후에 점점 광의화하여 구사 이외의 다른 변진제국은 물론이요, 전삼한에 대하여도 그와 같이 호칭하여 한은 의례히 'カラ' 혹은'カラクニ'라고 하게 되고, 다시 일보를 진하여 지나의 당까지도 일본서 그렇게 부르기를 예사로 하였다. 'カラ'란 소명(小名)이 고대일본인에 의하여 대명으로 변하여진 것과 힌가지 '韓'이란 소명(小名)도 한인(특히 낙랑한인이 위시)에 의하여 점차 대명화하여지는 동시에 삼한의 칭이 생기었다고 볼 수 있다.
쪽수▶P106-2이와같이 '韓'의 稱은 처음 朝鮮王準의 亡命部落에서 始作되어 그후 二稱呼가 漸次擄大하야 畢竟은 辰의名을 代하는 全體의 總名이 되고말았지만 小名이 大名으로 化하는 例는 他에도 흔이 볼수있는것이다. 가장 著名하고도 適切한 例를 하나 들면 日本史上에서 韓을 'カラ'라고 稱함과 같은 것이니 'カラ'는 本是 弁辰二十餘國 中의 一인 狗邪 (即加羅 혹은 伽耶 駕洛)에 對한 音稱으로-처음에는 韓全體의 稱呼는 아니였든 것인데-그것이 後에 漸漸 廣義化하 야 狗邪以外의 다른 弁辰諸國은 勿論이요, 全三韓에 對하야도 그와 같이 呼稱하야 韓은 依例히 'カラ' 혹은'カラクニ'라고 하게되고, 更히 一步를 進하야 支那의 唐까지도 日本서 그렇게 부르기를 例事로 하였다. 'カラ'란 小名이 古代日本人에 依하야 大名으로 化하여진것과 힌가지 '韓'이란 小名도 漢人(特히 樂浪漢人이 爲始)에 依하야 漸次大名化하여지는 同時에 三韓의 稱이 생기었다고 볼수있다.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1. 海東繹史卷三, 三韓條.
  2. 海東釋史續卷三, 三韓疆域總諭.
  3. 史記卷三十八,宋微子世家曜胭集解所引馬融說, 及司馬貞索隱所引司馬彪說.
  4. 三國史記卷三十八職官志上.
  5. 日本書紀卷廿七,天武天皇二年條.
  6. 高麗史世家太祖一. 輿地勝費卷十五淸州, 人物條.
  7. 註6과 同.
  8. 輿地勝覺卷十七, 韓山條.
  9. 三國史記卷三十四, 地理志一, 河東郡條.
  10. 三國史記卷三十七, 地理志四.
  11. 鮎貝房之進氏가 「고마」를 馬의 朝鮮古方言이리라 하는 推論에있어,그 證據로서, 全羅道遂寧(今長興)廢縣의 古名인 古馬彌知를 舉하야 「此の古舄弼知は新羅馬邑と漢文義譯名に稱したれば古馬は即ち馬塘なり。而して三國史記憲德王の時の記事に此古馬彌知を馬彌知と書きちるは鳥を馴殖にせしものにて、馬即古馬なり。此の語は何時代より鹿一誇となりしか, 今明かならざるも古方言には明かに存在しを毎らるべし」라고하였지만、「馬邑」 혹은 「馬彌知」는 古馬彌如의 略稱일지요 그것의 義譯名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그러므로 「고마」는 馬를 意味하는 朝鮮古方言이라고 斷言할수없는것이다 (彌知는 彌郊・買召・彌凍의 語와 함께 日本語의 ミト 即水戶란 말과 共通하는 海水出入處 혹은 港灣의 義인듯하다)
  12. 史學雜誌第四十編第四號, 拙稿 「玄菟郡及臨郡屯郡考」및 震檀學報第二卷「쓸라빅氏에게答함」並恭照
  13. 于先 著名한 者만 들어 보드라도 아래와 같으니, 馬韓과 百濟初朝(실상은辰韓)과의 境界이든 熊川柵(今安城川), 馬韓諸國中의 一인 乾馬國(今益山), 百濟時代의 熊津 及熊津城 (今公州) 金馬渚郡 (今益山) 古馬彌知 (今長興) 古彌縣 (今靈岩西) 古莫夫里 (未詳) 古麻山 (今錦山?) 古麻只(未詳) 等이 있고. 또近來地名中에 남은것으로 平澤외 軍勿津혹은 昆池津(今安城川下流) 과 洪城의 金馬面及金馬川과, 保寧의 熊川面及熊川(前日, 保寧의 水營을 「고마水營」이라고한것은 이런 地名으로 因함인듯) 과 公州(舊名熊津)錦江(同上)熊津渡(고마나루同上)와,益山의 金馬面及熊浦(古咸悦) 面과, 全州의 熊峙, 高興의 金馬里(大西面). 寳城의 熊峙面, 光州의 顧馬山, 羅州의 金馬山(南平面) 莞島의 古馬島 等이있다.






현대문주


  1. 해동역사 권3, 삼한조.
  2. 해동역사 속 권3, 삼한강역총유
  3. 사기 권 38, 송미자세가요연집해소인마융설, 및 사마정색은소인사마표설.
  4. 삼국사기 권 38 직관지상.
  5. 일본서기 권 17, 천무천황 2년조.
  6. 고려사세가 태조 1. 여지승비 권 15 청주, 인물조.
  7. 일본서기 권 17, 천무천황 2년조.
  8. 여지승람 권 17, 한산조.
  9. 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1, 하동군조.
  10. 삼국사기 권 37, 지리지 4.
  11. 점패방지진(鮎貝房之進)씨가 「고마」를 ‘마’의 조선 옛 방언이리라 하는 추론에 있어, 그 증거로서, 전라도 수녕(지금 장흥)폐현의 옛 이름인 고마미지를 들어 「此の古舄弼知は新羅馬邑と漢文義譯名に稱したれば古馬は即ち馬塘なり。而して三國史記憲德王の時の記事に此古馬彌知を馬彌知と書きちるは鳥を馴殖にせしものにて、馬即古馬なり。此の語は何時代より鹿一誇となりしか, 今明かならざるも古方言には明かに存在しを毎らるべし」라고 하였지만、「마읍」 혹은 「마미지」는 고마미여의 약칭일지요 그것의 의역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그러므로 「고마」는 말을 의미하는 조선 옛 방언이라고 단언할 수 없는 것이다 (미지는 미교・매소・미동의 어와 함께 일본어의 ミト 즉 수호란 말과 공통하는 해수출입처 혹은 항만의 의미인듯하다)
  12. 사학잡지 제40편 제4호, 졸고 「현토군 및 임군둔군고」및 진단학보 제2권 「쓸라빅氏에게答함」 병공조.
  13. 우선 저명한 자만 들어 보더라도 아래와 같으니, 마한과 백제 초조(실상은 진한)과의 경계이던 웅천책(지금 안성천), 마한 여러 나라 중의 하나인 건마국(지금 익산), 백제시대의 웅진 및 웅진성 (지금 공주) 금마저군 (지금 익산) 고마미지 (지금 장흥) 고미현 (지금 영암 서쪽) 고막부리 (미상) 고마산 (지금 금산?) 고마지(미상) 등이 있고. 또 근래 지명중에 남은 것으로 평택외 군물진 혹은 곤지진(지금 안성천 하류)과 홍성의 금마면 및 금마천과, 보령의 웅천면 및 웅천(전일, 보령의 수영을 「고마수영」이라고한것은 이런 지명으로 인함인듯) 과 공주(옛 이름 웅진) 금강(위와 같음) 웅진도(고마나루 위와 같음)와, 익산의 금마면 및 웅포(옛 함열)면과, 전주의 웅치, 고흥의 금마리(대서면). 보성의 웅치면, 광주의 고마산, 나주의 금마산(남평면) 완도의 고마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