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문제의 신고찰(1) -진국 및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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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선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5일 (토) 16:57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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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문제의 신고찰(1) -진국 급 삼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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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韓問題의 新考察(一) -辰國 及 三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 발행기관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4년11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25쪽 전체쪽 025쪽 연재여부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삼한(三韓)은 누구나 잘 아는 바와 같이 고대 반도의 마한 진한 변한(변진)의 총칭이어니와, 이들 三韓(삼한)에 관한 역사지리(Historical geography)상의 문제- 각 강역 및 그 전후 변천관계 여하-는 저 고조선 한사군에 관한 그것과 한가지 조선사학상의 일대 중요문제에 속하며, 또 이런 문제의 연구는 특히 조선 상대사를 석명(釋明)함에 있어 큰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삼한 급 사군(四郡) 문제로서 어느 정도까지의 해결을 보지 못하면, 조선 상대사의 한 큰 중요 부분은 마치 운무와 암흑에 잠긴 바와 같아 애매 혼돈하여 언제든지 정당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고 말 것이며, 인하여 진정한 조선사의 현출(現出)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띠운 더구나 난문제인 만큼 재래 선유(先儒) 선배 간에 이에 대하여 부분적 혹은 총괄적으로 불소한 노력을 비(費)하여 종종의 의론과 고설(考說)이 쌓여왔었다. 그리하여 사군(四郡) 문제에 있어서는 선배 간에 하등의 큰 귀정(歸定)을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이 삼한 문제에 있어서는 근세의 한백겸인물(선조 급 광해군 조의 인)의 설(즉 “湖西湖南合爲馬韓而嶺南 一道自分爲辰弁二韓”云)이 일출(一出)하여, 학계에 큰 충동을 준 뒤로는 기설을 승습(承襲)하는 자 많이 있어 우금껏 이 외에 별로 큰 이설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오직 이와 대동소이한 의견이 반복되어 왔을 뿐이며, 또 특히 진한 문제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학자의 설(진한은 즉 신라의 선(先)이란 설)이 거의 귀일(歸一)되어 누구나 감히 이에 대하여 의심을 품으려고까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나로서 이런 문제를 회고하여보면, 저 선진의 설 중에는 여러가지 찬동하기 어려운 미안한 점이 많이 있고, 또 설급(說及)하지 아니한 바도 적지 아니하여 문제의 대부분이 의연히 천년 장야(長夜) 중에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니, 말하자면 이런 문제는 오인에게 재검토 혹은 더 연구 개척할 여지와 사명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부터 이들 삼한 사군 문제에 큰 관심을 가져, 애오라지 고구(考究)를 거듭하여 보았던 바 기간에 종종의 독특한 주장에 봉착함을 얻었었다. 그래서 기중(其中) 자신상 발표하여도 좋다고 생각된 이삼(二三)문제(진번(眞番)ᆞ현토(玄菟)ᆞ임둔(臨屯) 및 기타 패수(浿水))에 있어서는 이미 타지(他誌) 상에 이를 발표한 일이 있었고, 아직 좀 더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자는 발표를 주저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도 지금 草(초)하는 삼한 문제의 고찰과 같은 것은 재래에 거의 정론으로 여기던 권위있는 견해와 너무도 격이한 것이 있어, 임염(荏苒) 숙고 금일에 급(及)하였던바, 지금 와서는 소신이 일층 더하여 어찌할 수 없어 이에 비견(鄙見)을 개진하여서 제현의 질정을 빌고자 한다.
쪽수▶P1 三韓은 누구나 잘 아는 바와 같이 古代半島의 馬韓 辰韓 弁韓(弁辰)의 總稱이어니와, 이들 三韓에 관한 歷史地理(Historical geography)上의 問題-各 疆域 및 그 前後 變遷關係 如何-는 저 古朝鮮 漢四郡에 관한 그것과 한가지 朝鮮史學上의 一大 重要問題에 속하며, 또 이런 問題의 硏究는 특히 朝鮮 上代史를 釋明함에 있어 큰 關係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三韓 及 四郡 問題로서 어느 程度까지의 解決을 보지 못하면, 朝鮮 上代史의 한 큰 重要 部分은 마치 雲霧와 暗黑에 잠긴 바와 같아 曖昧混沌하여 언제든지 正當한 認識에 到達하지 못하고 말 것이며,▶P2 인하여 眞正한 朝鮮史의 現出은 바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重要性을 띠운 더구나 難問題인 만큼 在來 先儒 先輩間에 이에 대하여 部分的 혹은 總括的으로 不少한 努力을 費하여 種種의 議論과 考說이 쌓여왔었다. 그리하여 四郡問題에 있어서는 先輩間에 何等의 큰 歸定을 보지 못하고 말았지만, 이 三韓問題에 있어서는 近世의 韓久庵百謙(宣祖 及 光海君朝의 人)의 설(원문주1▶즉“湖西湖南合爲馬韓而嶺南一道自分爲辰弁二韓”云 [1])이 一出하여, 學界에 큰 衝動을 준 뒤로는 其說을 承襲하는 자 많이 있어 于今껏 이 외에 별로 큰 異說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오직 이와 大同小異한 意見이 反覆되어 왔을 뿐이며, 또 특히 辰韓問題에 있어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學者의 설(辰韓은 卽 新羅의 先이란 설)이 거의 歸一되어 누구나 감히 이에 대하여 疑心을 품으려고까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나로서 이런 問題를 回顧하여보면, 저 先進의 설 중에는 여러가지 贊同하기 어려운 未安한 점이 많이 있고, 또 說及하지 아니한 바도 적지 아니하여 問題의 大部分이 依然히 千年長夜中에 있다 하여도 過言이 아니니, 말하자면 이런 問題는 吾人에게 再檢討 혹은 더 硏究開拓할 餘地와 使命을 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나는 일찍부터 이들 三韓四郡問題에 큰 關心을 가져, 애오라지 考究를 거듭하여 보았던 바 其間에 種種의 獨特한 主張에 逢着함을 얻었었다. 그래서 其中 自信上 發表하여도 좋다고 생각된 二三問題(眞番ㆍ玄菟ㆍ臨屯 및 其他 浿水)에 있어서는 이미원문주2▶'他誌上에 [2] 이를 發表한 일이 있었고, 아직 좀 더 熟考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 者는 發表를 躊躇하고 있었는데, 箇中에도 지금 草하는 三韓問題의 考察과 같은 것은 在來에 거의 定論으로 여기던 權威있는 見解와 너무도 隔異한 것이 있어, 荏苒 熟考 今日에 及하였던바, 지금 와서는 所信이 一層 더하여 어찌할 수 없어 이에 鄙見을 開陳하여 써 諸賢의 叱正을 빌고자 한다.





































본문2: 진국 및 삼한과의 관계


삼한 문제를 고찰하자면 먼저 진국(辰國) 문제에 관하여 토구(討究)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진국(辰國) 문제는 삼한 문제를 석명(釋明)함에 있어 직접 큰 관계가 있고 또 전제가 되는 까닭이다. 실로 여기 관한 토구(討究)없이 곧 삼한 문제에 들어가 논난(論難)하는 것은 너무도 단도직입적이므로 이를 선차적으로 고찰하려는 것이다. 진국(辰國)에 관한 주된 문제는 진국(辰國)의 방위 그 정치적 중심지 및 삼한과의 관계 특히 진한(辰韓)과의 이동(異同) 여부 내지 그 강역에 취하여서니, 우선 이들에 관하여 (오랜 문헌의 순서를 따라) 차제(次第)로 논구(論究)하려 한다.
쪽수▶P3-1三韓問題를 考察하자면 먼저 辰國問題에 관하여 討究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辰國問題는 三韓問題를 釋明함에 있어 直接 큰 關係가 있고 또 前提가 되는 까닭이다. 실로 여기 관한 討究없이 곧 三韓問題에 들어가 論難하는 것은 너무도 單刀直入的이므로 이를 先次的으로 考察하려는 것이다. 辰國에 관한 주된 問題는 辰國의 方位 그 政治的 中心地 및 三韓과의 關係 특히 辰韓과의 異同 與否 乃至 그 疆域에 就하여서니, 우선 이들에 관하여 (오랜 文獻의 順序를 따라) 次第로 論究하려 한다.
(甲) 사한(史漢)에 나타나는 진국(辰國)과 그 방위
쪽수▶P3-2(甲) 史漢에 나타나는 辰國과 그 方位
진국(辰國)은 저 조선(낙랑(樂浪)) 진번(眞番) 임둔(臨屯)의 제 부족과 한가지 고대 반도 내의 일국으로 일찍이 중국에 알려진 저명한 나라이어니와, 진국(辰國)의 명(名)이 문헌상에 나타나기는 이미 사기서적, 한서서적의 조선전(朝鮮傳)에서부터이다. 한서서적 조선전(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사기서적 조선전(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전재하다시피한 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수사상의 이동(異同)과 첨삭(添削)이 있음은 별문제로 삼고) 우선 나의 고술(考述)의 편의상 한서서적에 의하면 조선왕(朝鮮王) 만(滿)의 손(孫) 우거인물시대의 한무제시(漢武帝時)에 대한 태도를 적은 곳에
쪽수▶P3-3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우선 나의 考述의 便宜上 󰡔漢書󰡕에 의하면 朝鮮王 滿의 孫 右渠時代의 漢(武帝時)에 대한 態度를 적은 곳에
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쪽수▶P4-1至孫右渠 所誘漢亡人滋多 又未嘗入見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
이라고 보이어 있다. 이 후일절(後一節)은 즉 (한무제시(漢武帝時)에) 금(今)의 평양공간 방면을 중심으로 하였던 조선왕(朝鮮王) 우거인물가 그 인근의 진번(眞番), 진국(辰國)이 한(漢)에 통하려함을 차단하였다는 것인데, 이를 근본적인 사기서적 조선전(朝鮮傳)에 徵(징)하면, ‘진번(眞番)’하에는 ‘방(旁)’일자(一字)가 더하여 있고, 그리고 금일(今日) 보통 유행본(流行本) 사기서적에는 이 경우에 “眞番旁衆國云云”이라 하여 진국(辰國)의 명(名)이 보여 있지 않지만, 송간본(宋刊本) 사기서적에는 중국(衆國)은 분명히 진국(辰國)으로 되어 있어, “眞番旁辰國云云”이라 하였다 한다. 교간사기집주(校刊史記集註) 색은정의찰기(索隱正義札記) 4의 “眞番旁衆國” 주(註)에 “宋本衆作辰”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단 ‘방(旁)’ 자는 여하(如何)한 본의 사기서적에든지 다 한결같이 되어 있다. 나는 이미 졸고(拙稿)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중에 이를 변(辯)하였음과 같이 송본(宋本)의 ‘진국(辰國)’이 정확하다고 하는 동시에 유행본(流行本)의 ‘중국(衆國)’의 중(衆)은 이 진자(辰字)의 와오(訛誤)라고 생각하며, 또 한서서적에는 이 경우에 역시 진국(辰國)으로 되어 있으되, 특히 거기에는 ‘방(傍)’ 일자(一字)가 탈락된 것이라고 관찰된다. 그런즉 진국(辰國)의 명(名)은 맨 처음 사기서적로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자치통감서적권21에는 이 경우에 단(單)히 ‘진국(辰國)’이라고만 하여 있고, ‘진번방(眞番旁)’ 삼자(三字)가 생략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크게 의미있는 필치라고 볼 수 있고, 찬자(撰者)의 의거(依據)한 사기서적본이 금일(今日) 유행의 보통본과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진번방(眞番旁)’ 삼자(三字)는 진국(辰國)의 위치를 보이기 위하여 입(入)한 문자이므로, 문체상으로 보면 이는 실상 용문췌우(冗文贅疣)에 지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자치통감서적에는 이들 삼자(三字)를 일부러 생략(省略)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보면 조선왕(朝鮮王) 우거인물에게 옹알(雍閼)되어 한(漢)에 통함을 얻지 못한 국은 오직 ‘진(辰)’ 일국뿐이요, 진번(眞番)은 이에 가입하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다. 사실상 진번(眞番)은 저 임둔(臨屯)과 같이 우거인물의 조(祖) 만(滿)의 시대에 이미 조선(낙랑(樂浪))에 복속되어 그 판도의 일부분을 성하였었으므로 (사기서적 조선전(朝鮮傳)에 조선왕(朝鮮王) 만(滿)의 위세를 말한 곳에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 皆來服屬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과연 진국(辰國)과 한가지 독립적으로 지나(支那) 조정에 통하려고 하였는지는 일 의문이다. 그러므로 한서서적의 “眞番辰國云云”에는 여하튼 동의하기 어려우며, 이는 필경 찬자(撰者)의 고의나 혹 부주의에 인하여 ‘방(旁)’ 일자(一字)를 빠트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학설
쪽수▶P4-2이라고 보이어 있다. 이 後一節은 즉(漢武帝時에) 今의 平壤 方面을 中心으로 하였던 朝鮮王 右渠가 그 隣近의 眞番, 辰國이 漢에 通하려함을 遮斷하였다는 것인데, 이를 根本的인 󰡔史記󰡕 朝鮮傳에 徵하면, ‘眞番’下에는 ‘旁’一字가 더하여 있고, 그리고 今日 普通 流行本 󰡔史記󰡕에는 이 境遇에 “眞番旁衆國云云”이라 하여 辰國의 名이 보여 있지 않지만, 宋刊本 󰡔史記󰡕에는 衆國은 分明히 辰國으로 되어 있어, “眞番旁辰國云云”이라 하였다 한다. 校刊史記集註 索隱正義札記 四의 “眞番旁衆國”註에“宋本衆作辰”이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단 ‘旁’ 字는 如何한 本의 󰡔史記󰡕에든지 다 한결같이 되어 있다. 나는 이미 원문주3▶拙稿 「眞番郡考」 [3]중에 이를 辯하였음과 같이 宋本의 ‘辰國’이 正確하다고 하는 同時에 流行本의 ‘衆國’의 衆은 이 辰字의 訛誤라고 생각하며, 또 󰡔漢書󰡕에는 이 境遇에 역시 辰國으로 되어 있으되, 특히 거기에는 ‘旁’一字가 脫落된 것이라고 觀察된다. 그런즉 辰國의 名은 맨 처음 󰡔史記󰡕로부터 보이기 시작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또 󰡔資治通鑑󰡕卷21에는 이 境遇에 單히 ‘辰國’이라고만 하여 있고, ‘眞番旁’ 三字가 省略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크게 意味있는 筆致라고 볼 수 있고, 撰者의 依據한 󰡔史記󰡕本이 今日 流行의 普通本과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 ‘眞番旁’ 三字는 辰國의 位置를 보이기 위하여 入한 文字이므로, 文體上으로 보면 이는 實相 冗文贅疣에 지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通鑑󰡕에는 이들 三字를 일부러 省略한 것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보면 朝鮮王 右渠에게 雍閼되어 漢에 通함을 얻지 못한 國은 오직 ‘辰’ 一國뿐이요, 眞番은 이에 加入하지 아니하였던 모양이다. 事實上 眞番은 저 臨屯과 같이 右渠의 祖 滿의 時代에 이미 朝鮮(樂浪)에 服屬되▶P5-1어 그 版圖의 一部分을 成하였었으므로 (󰡔史記󰡕 朝鮮傳에 朝鮮王 滿의 威勢를 말한 곳에 侵降其旁小邑 眞番臨屯皆來服屬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果然 辰國과 한 가지 獨立的으로 支那 朝廷에 通하려고 하였는지는 一 疑問이다. 그러므로 󰡔漢書󰡕의 “眞番辰國云云”에는 여하튼 同意하기 어려우며, 이는 畢竟 撰者의 故意나 혹 不注意에 인하여 ‘旁’ 一字를 빠트린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진번방(眞番旁)’ 삼자(三字)가 위에 말함과 같이 문장상으로 보아서는 비록 용문(冗文)이요 부췌(附贅)이지만, 진국(辰國)의 위치를 논함에는 여간 가치있고 귀중한 문자가 아니니, 우리는 이에 의하여 기(其) 위치를 고득(考得)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물론 진국(辰國)의 방위를 고찰함에는 전기(前記)의 “右渠......雍閼不通”의 구(句)도 퍽 유조(有助)한 것이지만, 그 친절한 품은 이의 比(비)가 되지 못한다. ‘진번방(眞番旁)’은 자(字)의 시(示)함과 같이 진번(眞番)의 곁이란 말인즉, 진국(辰國)의 위치는 말할 것도 없이 진번(眞番) 直近(직근)의 지(地)에서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진번(眞番)의 위치 경역(境域)에 대하여는 졸고(拙稿)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 중에 이미 비견(鄙見)을 발표하였으므로 상세한 내용에 있어서는 그것을 참고하기를 바라거니와, 대개 나는 진번(眞番)은-본 조선(낙랑(樂浪)) 임둔(臨屯) 진국(辰國) 사이에 개재하였던 것으로 다음에 한군(漢郡)의 설치를 보게 되고, 그 후 군현 폐합 시에 기(其) 일부는 폐기, 일부는 낙랑(樂浪)에 병합되고, 또 그 병합되었던 부분이 후일 낙랑(樂浪)에서 분리되어 대방군(帶方郡)을 성(成)하였던 것으로 인식되어-그 지방이 금(今) 황해도공간 자비령(慈悲嶺) 이남 한강 이북의 지(地)에 해당하다고 생각하며, 또 당시 조선의 본토는 자비령(慈悲嶺) 이북 청천강공간 이남의 지(地) 즉 금(今)의 황해도공간 북단과 및 평안남도의 전부를 포함한 땅에 지나지 못하고, 진번(眞番) 급 조선의 인읍(隣邑)인 임둔(臨屯)은 졸고(拙稿) ‘玄菟郡及臨屯郡考(현토군급임둔군고'원고 에 역설함과 같이 금일(今日)의 함경남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음에 틀림없었다고 생각한다.학설 여기의 鄙見(비견)은 단지 간략히 결론만을 표시한 것이지鄙見(비견)으로서 큰 착오가 없다고 하면, 진국(辰國)의 위치는 스스로 진번(眞番) (내지 임둔(臨屯)) 남(南)에 있어야 될 것이니, 금(今) 한강 이남의 지(地)가 이에 당(當)할 것은 물론이다. 단 후일 眞番郡(진번군)이 낙랑(樂浪)에 병합되어 기(其) 남부가 폐기됨에 이르러서는 진국(辰國)의 북경(北境)은 한강 이북에 진출하였던 것 같은데, 이에 관하여는 오히려 후절에 말하려 한다.
쪽수▶P5-2 ‘眞番旁’ 三字가 위에 말함과 같이 文章上으로 보아서는 비록 冗文이요 附贅이지만, 辰國의 位置를 논함에는 여간 價値있고 貴重한 文字가 아니니, 우리는 이에 의하여 其 位置를 考得할 수 있는 까닭이다. 물론 辰國의 方位를 考察함에는 前記의 “右渠……雍閼不通”의 句도 퍽 有助한 것이지만, 그 親切한 품은 이의 比가 되지 못한다. ‘眞番旁’은 字의 示함과 같이 眞番의 곁이란 말인즉, 辰國의 位置는 말할 것도 없이 眞番 直近의 地에서 구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眞番의 位置 境域에 대하여는 拙稿 「眞番郡考」 중에 이미 鄙見을 發表하였으므로 詳細한 內容에 있어서는 그것을 參考하기를 바라거니와, 대개 나는 眞番은-本 朝鮮(樂浪) 臨屯 辰國 사이에 介在하였던 것으로 다음에 漢郡의 設置를 보게 되고, 그 후 郡縣 廢合時에 其 一部는 廢棄, 一部는 樂浪에 倂合되고, 또 그 倂合되었던 部分이 後日 樂浪에서 分離되어 帶方郡을 成하였던 것으로 認識되어-그 地方이 今 黃海道 慈悲嶺 以南 漢江 以北의 地에 該當하다고 생각하며, 또 當時 朝鮮의 本土는 慈悲嶺 以北 淸川江 以南의 地 즉 今의 黃海道 北端과 및 平安南道의 全部를 包含한 땅에 지나지 못하고, 원문주4▶眞番 及 朝鮮의 隣邑인 臨屯은 拙稿 「玄菟郡及臨屯郡考」 [4]에 力說함과 같이 今日의 咸鏡南道의 大部分을 차지하였음에 틀림없었다고 생각한다. 여기의 ▶P6-1鄙見은 단지 簡略히 結論만을 表示한 것이지만, 鄙見으로서 큰 錯誤가 없다고 하면, 辰國의 位置는 스스로 眞番 (내지 臨屯) 南에 있어야 될 것이니, 今 漢江 以南의 地가 이에 當할 것은 물론이다. 단 後日 眞番郡이 樂浪에 倂合되어 其 南部가 廢棄됨에 이르러서는 辰國의 北境은 漢江 以北에 進出하였던 것 같은데, 이에 관하여는 오히려 後節에 말하려 한다.
진국(辰國)의 방위는 대개 상술한 바로써 짐작되거니와, 진국(辰國)의 정치적 중심지 및 그 강역 여하(如何)에 있어서는 사한(史漢)의 기사로서는 도저히 고찰할 도리가 없고 반드시 이를 고찰하자면 오직 타 사료에 資賴(자뢰)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쪽수▶P6-2辰國의 方位는 대개 上述한 바로써 斟酌되거니와, 辰國의 政治的 中心地 및 그 疆域 如何에 있어서는 史漢의 記事로서는 到底히 考察할 道理가 없고 반드시 이를 考察하자면 오직 他史料에 資賴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乙) 위략서적에 보이는 진국(辰國) 진한(辰韓)의 기사에 대한 해석과 진국(辰國)의 정치적 중심지 및 기타의 고찰
쪽수▶P6-3(乙) 󰡔魏畧󰡕에 보이는 辰國 辰韓의 記事에 대한 解釋과 辰國의 政治的 中心地 및 其他의 考察
사한(史漢)의 다음으로 ‘진(辰)’에 관하여 (사한(史漢)보다) 비교적 자세한 기사를 싣고, 또 그 기사에 의하여 상기 문제를 해석할 수 있는 문헌을 들면, 어환인물위략서적진수인물 삼국지서적위지서적에 우(右)할 자-없다. 위략서적위지서적에 앞서 된 자로 기(其) 완편은 금일(今日)에 전하지 아니하나, 기(其) 중 몇 부분은 단간적(短簡的)으로 제 사서 중에 산견(散見)되어 있고, 특히 그 동방에 관한 기사는 위지서적 배송지(裴松之) 주(註)에 많이 인용되었나니, 지금 먼저 위략서적 기사 중에 보이는 진국(辰國), 진한(辰韓), ᆞ조선(朝鮮), 낙랑(樂浪) 간의 관계 사실을 주로 하여, 그 소위 진국(辰國), 진한(辰韓)의 동이(同異) 여부와 진국(辰國)의 정치적 중심지 및 기타에 관한 지리적 방위를 고찰하려 한다. 즉 위지서적 삼한전(三韓傳)의 배송지(裴松之) 주(註)를 보면 여하(如下)한 위략서적의 기사가 있다.
쪽수▶P6-4史漢의 다음으로 ‘辰’에 관하여 (史漢보다) 比較的 仔細한 記事를 싣고, 또 그 記事에 의하여 上記 問題를 解釋할 수 있는 文獻을 들면, 魚豢의 『魏略』과 陳壽 『三國志』의 魏志에 右할 者-없다. 『魏略』은 魏志에 앞서 된 者로 其完篇은 今日에 전하지 아니하나, 其中 몇 部分은 短簡的으로 諸史書 중에 散見되어 있고, 특히 그 東方에 관한 記事는 『魏志』 裴松之 註에 많이 引用되었나니, 지금 먼저 『魏略』 記事 중에 보이는 辰國辰韓ㆍ朝鮮樂浪間의 關係事實을 주로 하여, 그 소위 辰國辰韓의 同異 여부와 辰國의 政治的 中心地 및 기타에 관한 地理的 方位를 考察하려 한다. 즉 『魏志』 三韓傳의 裴松之 註를 보면 如下한 『魏略』의 記事가 있다.
(A)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 右渠不用 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眞)蕃不相往來 (B)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ᆞ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 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鑡因將戶來來 出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ᆞ入辰韓 逆取戶來降伴輩 尙得千人 其 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牟(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쪽수▶P6-5(A)初, 右渠未破時 朝鮮相歷谿卿 以諫 右渠不用 東之辰國 時 民隨出居者二千餘戶 亦與朝鮮貢(眞)蕃不相往來 (B)至王莽地皇時 廉斯鑡爲辰韓右渠帥 聞樂浪土地美ᆞ人民饒樂 亡欲來降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P7-1一人 其語非韓人 問之 男子曰 我等漢人 名戶來 我等輩千五百人 伐材木 爲韓所擊得 皆斷髮爲奴 積三年矣 鑡曰我當降漢樂浪 汝欲去不 戶來曰可 辰鑡因將戶來來 出詣含資縣 縣言郡 郡卽以鑡爲譯 從芩中乘大船ᆞ入辰韓 逆取戶來降伴輩 尙得千人 其 五百人已死 鑡時曉謂辰韓 汝還五百人 若不者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辰韓曰五百人已死 我當出贖直耳 乃出辰韓萬五千人 牟(弁)韓布萬五千匹 鑡收取直還 郡表鑡功義 賜冠幘田宅 子孫數世 至安帝延光四年時 故受復除
위략서적의 문(文)은-비단 전기(前記) 문제를 고찰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기(其) 외에도-여러 가지 좋은 hint를 주는 귀중한 사료로 사유되므로 좀 번거롭지만, 기(其) 전문에 대하여 한번 해석을 내릴 필요가 있다. 설명의 편의상 상문(上文)을 대별하면, 내가 A B의 부호를 붙임과 같이 전후 이절(二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쪽수▶P7-2위 󰡔魏略󰡕의 文은-非但 前記 問題를 考察함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其外에도-여러 가지 좋은 hint를 주는 貴重한 史料로 思惟되므로 좀 번거롭지만, 其 全文에 대하여 한번 解釋을 내릴 必要가 있다. 說明의 便宜上 上文을 大別하면, 내가 A B의 符號를 붙임과 같이 前後 二節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 A절은-기(其) 중 “右渠未破時”라 함은 조선왕(朝鮮王) 우거인물가 아직 한(漢)(무제(武帝))군에게 토멸(討滅)되기 전의 위(謂)며, ‘공번(貢蕃)’은 진번(眞番)의 와(譌)로-우거인물의 파멸하기 전에 그 상신(相臣)인 역계경인물이 주(主)를 간(諫)하되 듣지 아니하여 고국을 버리고 동으로 진국(辰國)에 달아나오니, 때의 민중으로 그를 따라 옮기는 자-이천여호에 달하고, 또 그 후 그들은 조선과 및 그 속지인 진번(眞番)과 서로 통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니, ‘東之辰國’은 진국(辰國)의 위치가 반도의 지형상 조선, 낙랑(樂浪) 지방에서 좀 (초초(稍稍)) 동남지방에 당하였던 관계로 그와 같이 이름이요, 결코 (진국(辰國)이) 조선의 정동(正東)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동절(同節) 중 “亦與朝鮮云云”의 역자(亦字)의 입(入)한 이유는 차절(此節) 상문에 역시 배송지(裴松之) 주(註)에 소인(所引)된 위략서적 문(文) 중에 “其(準)子及親 留在國者 因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라 한-즉 위씨(衛氏) 전의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패주되어 남으로 해중(海中)에 왕하여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아니하였다는-사실의 구(句)가 있음에 기인한 바이어니와, 이 조선왕(朝鮮王) 준(準)의 남래 지점에 취(就)하여는 후장(後章)에 말하려 한다) 그런데 역계경인물 이하 이천여호의 이민군의 내주(來住) 지점이 진국(辰國)의 하(何) 방위에 있었는가 함에 대하여는 뒤에 말할 다른 중대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으므로, 우선 여기에는 지엽의 번(煩)을 피하기 위하야 보류하여 둔다.
쪽수▶P7-3첫째 A節은-其中 “右渠未破時”라 함은 朝鮮王 右渠가 아직 漢(武帝)軍에게 討滅되기 전의 謂며, ‘貢蕃’은 眞番의 譌로-右渠의 破滅하기 전에 그 相臣인 歷谿卿이 主를 諫하되 듣지 아니하여 故國을 버리고 東으로 辰國에 달아나오니, 때의 民衆으로 그를 따라 옮기는 자-二千餘戶에 달하고, 또 그 후 그들은 朝鮮과 및 그 屬地인 眞番과 서로 통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니, ‘東之辰國’은 辰國의 位置가 半島의 地形上 朝鮮樂浪地方에서 좀 (稍稍) 東南地方에 當하였던 關係로 그와 같이 이름이요, 결코 (辰國이) 朝鮮의 正東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고 同節 중 “亦與朝鮮云云”의 亦字의 入한 理由는 此節 上文에 亦是 裴松之 註에 所引된 󰡔魏畧󰡕文 중에 “其(準)子及親 留在國者 因姓韓氏 準王海中 不與朝鮮相往來”라 한-卽 衛氏 前의 朝鮮王 準이 衛滿에게 敗走되어 南으 ▶P8-1로 海中에 王하여 朝鮮과 서로 往來하지 아니하였다는-事實의 句가 있음에 基因한 바이어니와, 이 朝鮮王 準의 南來 地點에 就하여는 後章에 말하려 한다) 그런데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의 移民羣의 來住 地點이 辰國의 何方位에 있었는가 함에 대하여는 뒤에 말할 다른 重大問題와 關聯하여 考察할 必要가 있으므로, 우선 여기에는 枝葉의 煩을 피하기 위하야 保留하여 둔다.
다음에 B절은-대요만 들어 말하면-왕망(王莽) 지황(地皇) 연간(A.D. 20~23)에 진한(辰韓) 염사치인물란 자가 진한(辰韓)을 등지고 낙랑(樂浪)에 투항(귀화)하러 가는 도차(途次), 전중(田中)에서 진한(辰韓)에 억류된 한인(漢人)(낙랑인(樂浪人)) 호래인물란 자를 만나, 이를 데리고 낙랑(樂浪) 함자현(含資縣)에 나아가서 사유를 말한즉, 현(縣)에서는 이를 낙랑(樂浪) 군청(郡廳)으로 보고하였더니, 군에서는 곧 치(鑡)을 사역(使譯)으로 삼아 금중(芩中)으로부터 대선(大船)을 타고 진한(辰韓)에 들어와 진한(辰韓) 당국자와 담판케 하여, 호래(戶來)의 항반배(降伴輩) 중 생존자 일천인을 취하고, 기여(其餘) 사망자 오백인에 대하여는 배상으로 진한인(辰韓人) 일만 오천명(?)과 모(牟)(변(弁)의 오(誤)인듯)한포(韓布) 일만 오천필을 수취하여 가지고 낙랑(樂浪)에 돌아오매, 군은 치(鑡)의 공적을 표창하고 기후(其後) 자손에게까지 관직의 제수(除授)가 있었다는 사화(史話)니, 이에 있어 먼저 주의할 것은 이때의 낙랑군(樂浪郡)은 이미 그 인근 군현의 폐합을 행한 후라, 남으로 폐진번군(廢眞番郡)의 북반(금 황해도의 대부분)을 병(倂)하고, 동으로 폐임번군(廢臨屯郡)의 남반부(금 함남 함흥(咸興) 이남)를 합한 대낙랑시대(大樂浪時代)에 속하며, 또 그 속현인 함자현(含資縣)(본시 구진번군(舊眞番郡)의 속현)은 한서서적 지리지(地理志) 낙랑군(樂浪郡) 동현조(同縣條) 주(註)에 의하면, 대수(帶水)(금 월당강(月唐江)) 소출의 지(地)로 대수(帶水)는 (거기서) “西至帶方(○今 봉산(鳳山)) 入海”라 하였으므로 함자(含資)가 금일(今日)의 서흥군(瑞興郡) 등지에 당할 것은 이미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 중에도 상설(詳說)한 바어니와, 저 염사치(廉斯鑡)이 이곳에 와서 사유를 말한 것은 현(함자(含資))이 정(正)히 낙랑(樂浪)(본토) 방면 즉 금(今) 평양공간 방면에 통하는 요충에 당하였던 까닭이다. 또 염사치(廉斯鑡)이 낙랑(樂浪)의 사명을 받들어, 대선(大船)을 타고 진한(辰韓)으로 출발하던 지점인 금중(芩中)은 지금의 어느 곳이냐 하면, 이 역시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 중에 일언(一言)하여둔 바와 같이 금(芩)은 잠(岑)의 오(誤)로 한지(漢志) 낙랑군(樂浪郡) 속현조(屬縣條)에 보이는 장잠현(長岑縣) 그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고, 장잠현(長岑縣)은 금일(今日)의 松禾郡(송화군) 등지로 사고(私考)되니(「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 참조), “從芩中乘大船入辰韓”은 말할 것도 없이 송화(松禾) 등지에서 대선(大船)을 타고 황해(黃海)에 떠서 진한(辰韓)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특히 대선(大船)을 타고 간 것은 다수(多數)한 호래(戶來)의 항반배(降伴輩)를 역취(逆取)하여 올 준비로서의 의의도 있지만, 또한 그 선로(船路)가 보통의 하천이 아니요, 황해(黃海)와 같은 대해(大海)이었던 것에도 있었을 것이다.
쪽수▶P8-2 다음에 B節은-大要만 들어 말하면-王莽 地皇年間(A.D. 20~23)에 辰韓 廉斯鑡란 者가 辰韓을 등지고 樂浪에 投降(歸化)하러 가는 途次, 田中에서 辰韓에 抑留된 漢人(樂浪人) 戶來란 자를 만나, 이를 데리고 樂浪 含資縣에 나아가서 事由를 말한즉, 縣에서는 이를 樂浪 郡廳으로 報告하였더니, 郡에서는 곧 鑡를 使譯으로 삼아 芩中으로부터 大船을 타고 辰韓에 들어와 辰韓 當局者와 談判케 하여, 戶來의 降伴輩 중 生存者 一千人을 取하고, 其餘 死亡者 五百人에 대하여는 賠償으로 辰韓人 一萬 五千名(?)과 牟(弁의 誤인듯)韓布 一萬 五千匹을 收取하여 가지고 樂浪에 돌아오매, 郡은 鑡의 功績을 表彰하고 其後 子孫에게까지 官職의 除授가 있었다는 史話니, 이에 있어 먼저 注意할 것은 이때의 樂浪郡은 이미 그 隣近 郡縣의 廢合을 행한 후라, 南으로 廢眞番郡의 北半(今 黃海道의 大部分)을 倂하고, 東으로 廢臨屯郡의 南半部(今 咸南 咸興 以南)를 합한 大樂浪時代에 속하며, 또 그 屬縣인 含資縣(本是 舊眞番郡의 屬縣)은 󰡔漢書󰡕 地理志 樂浪郡 同縣條 註에 의하면, 帶水(今 月唐江) 所出의 地로 帶水는 (거기서) “西至帶方(○今 鳳山) 入海”라 하였으므로 含資가 今日의 瑞興郡 等地에 當할 것은 이미 「眞番郡考」 중에도 詳說한 바어니와, 저 廉斯鑡가 이곳에 와서 事由를 말한 것은 縣(含資)이 正히 樂浪(本土) 方面 卽今 平壤 方面에 ▶P9-1통하는 要衝에 當하였던 까닭이다. 또 廉斯鑡가 樂浪의 使命을 받들어, 大船을 타고 辰韓으로 出發하던 地點인 芩中은 지금의 어느 곳이냐 하면, 이 역시 「眞番郡考」 중에 一言하여둔 바와 같이 芩은 岑의 誤로 漢志 樂浪郡 屬縣條에 보이는 長岑縣 그것임에 틀림없을 것 같고, 長岑縣은 今日의 松禾郡 等地로 私考되니 (「眞番郡考」 參照), “從芩中乘大船入辰韓”은 말할 것도 없이 松禾 等地에서 大船을 타고 黃海에 떠서 辰韓에 들어왔다는 것이다. 특히 大船을 타고 간 것은 多數한 戶來의 降伴輩를 逆取하여 올 準備로서의 意義도 있지만, 또한 그 船路가 普通의 河川이 아니요, 黃海와 같은 大海이었던 것에도 있었을 것이다.
다시 상기 위략서적의 사화(史話)를 요약하면, 전(前) 일절(一節)은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인물 이하 이천여 호가 조선(우거인물)을 버리고 동으로 진국(辰國)지방에 流移來住(유이내주)하여 조선(朝鮮)진번(眞番)과 상통하지 아니하였다는 것, 이에 대하여 후(後) 일절(一節)은 진한(辰韓) 우거수(右渠帥) 염사치인물가 (前漢末(전한말)에) 진한(辰韓)을 배(背)하고 북으로 낙랑(樂浪)에 귀화하여 낙랑(樂浪)의 사명(使命)으로 진한(辰韓) 당국자와 한(漢)의 유리한 담판을 행하여 공적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 후(後) 일절(一節)에 연견(連見)되는 소위 ‘진한(辰韓)’은 억(抑) 어떤 지방을 가리켜 이름인가? 즉 이 ‘진한(辰韓)’은 전절(前節) 중에 보이는 진국(辰國) 그것과 전혀 동일한 것인가 아닌가? 만일 동일한 것이라고 하면, 기(其) 정치적 중심지는 어디가 될 것인가? 이것이 다음에 의론할 제일(第一)의 문제이며, 또 그 소위 “진한(辰韓) 우거수(右渠帥)”란 어떻게 해석하여야 좋을 것이며(우거수(右渠帥)의 稱(칭)을 듣던 염사치인물는 저 조선상(朝鮮相) 역계경인물 등의 이주 部民(부민)과 사회적으로 종족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던 것인가 없던 것인가), 염사치인물의 원주지(原住地)는 지금 어느 곳에 可當(가당)할 것인가? 이것이 제이(第二)의 문제이다.
쪽수▶P9-2 다시 上記 󰡔魏略󰡕의 史話를 要約하면, 前一節은 朝鮮相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가 朝鮮(右渠)을 버리고 東으로 辰國地方에 流移來住하여 朝鮮眞番과 相通하지 아니하였다는 것, 이에 대하여 後一節은 辰韓 右渠帥 廉斯鑡가 (前漢末에) 辰韓을 背하고 北으로 樂浪에 歸化하여 樂浪의 使命으로 辰韓 當局者와 漢의 有利한 談判을 행하여 功績을 세웠다는 것인데, 이 後一節에 連見되는 소위 ‘辰韓’은 抑 어떤 地方을 가리켜 이름인가? 즉 이 ‘辰韓’은 前節 중에 보이는 辰國 그것과 전혀 同一한 것인가 아닌가? 만일 同一한 것이라고 하면, 其 政治的 中心地는 어디가 될 것인가? 이것이 다음에 議論할 第一의 問題이며, 또 그 소위 “辰韓 右渠帥”란 어떻게 解釋하여야 좋을 것이며(右渠帥의 稱을 듣던 廉斯鑡는 저 朝鮮相 歷谿卿等의 移住 部民과 社會的으로 種族的으로 密接한 關係가 있던 것인가 없던 것인가), 廉斯鑡의 原住地는 지금 어느 곳에 可當할 것인가? 이것이 第二의 問題이다.
제일(第一) 문제에 있어 말하면, 재래 학자의 다수는 여기 소위 ‘진한(辰韓)’을 문자대로 보아 뒤에 말할 삼한 중의 진한(辰韓)과 전연 동일한 자로 처리함이었고, 오직 선사(先師) 길전동오 박사인물와 같은 이는 이와 견해를 달리하여, 여기의 ‘진한(辰韓)’은 공(恐)컨대 마한(馬韓)을 오칭(誤稱)한 것이리라고 하였는데학설, 그 이유는 상기 사화(史話) 중에 선박의 이야기가 있는 것과 정말 진한(辰韓)의 중심지는 전혀 산지요 바다(해(海))가 없다는 것 등에 있다. 나도 일찍이 길전동오 박사인물의 설에 자극되어 그와 같은 의견을 표시한 일이 졸고(拙稿) 「진번군고(眞番郡考)」원고 있거니와, 원래 진한(辰韓)은 기(其) 중심지가 해변에 있지 아니할뿐더러, 정치상으로 말하더라도 후(後)에 장차 말할 바와 같이 얼마 동안은 마한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일(一) 유이부족(流移部族)에 불과하였던 것이므로, 그 때 이 유이(流移) 부족의 세력 정도가 제법 인민(人民) 일만 오천인(물론 이 숫자는 그대로 신용키는 어렵지만)과 변한(弁韓)포(布) 일만 오천 필의 배상을 내놓을 만하였을는지 이것도 의문이며, 또 염사치인물의 위협한 말 가운데에 특히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라고 한 것도 이 유이부족(流移部族)에 대하여 한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요(要)하면 전기(前記) 위략서적 文中(문중)의 ‘진한(辰韓)’은 유이부족(流移部族)의 진한(辰韓)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 기(其) 유이부족(流移部族)의 종주(宗主)인 진국(辰國)(후일 소위 마한(馬韓))을 이름한 것일지니, B절 중의 ‘진한(辰韓)’은 A절의 진국(辰國) 그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는 필경 위략서적의 찬자(撰者)가 진한(辰韓)과 진국(辰國)의 일우(一隅)에 내주(來住)한 유이부족(流移部族)에 대한 특별 칭호인 진국(辰國)과를 혼동하여, 진국(辰國)이 곧 진한(辰韓)이요 진한(辰韓)이 곧 진국(辰國)이라고 오인한 까닭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당(唐)의 장초금(張楚金)의 소찬(所撰)인 **한원(翰苑)** 번이부(蕃夷部) 삼한조(三韓條) 옹씨(雍氏) 주(注)에 인용된 위략서적에 “韓在帶方南......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辰韓 古之辰國也”라고 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것을 확증할 수 있다. 후에 말할 위지서적 삼한전(三韓傳)에도 이와 똑같은 기사가 있는데, 그것은 물론 이 위략서적의 설을 그대로 승습(承襲)한 데 불과한 것일 것이다. 진한(辰韓)(유이부족(流移部族))이 진국(辰國)의 일부분이라고 할지언정, 그 전체 혹은 주체라고 할 수 없을 것은 후에 다시 자세히 변론하려고 하거니와, 위략서적 찬자(撰者)가 객체와 주체, 부분과 전체의 명칭을 구별하지 않고 (위와 같이) 그냥 혼동해버린 것은 여하간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쪽수▶P9-3 第一問題에 있어 말하면, 在來 學者의 多數는 여기 소위 ‘辰韓’을 文字대로 보아 뒤에 말할 三韓 중의 辰韓과 ▶P10 全然 同一한 자로 處理함이었고, 오직 先師 吉田東伍 博士와 원문주5▶같은 이는 [5] 이와 見解를 달리하여, 여기의 ‘辰韓’은 恐컨대 馬韓을 誤稱한 것이리라고 하였는데, 그 理由는 上記 史話 중에 船舶의 이야기가 있는 것과 정말 辰韓의 中心地는 전혀 山地요 바다(海)가 없다는 것 등에 있다. 나도 일찍이 博士의 說에 刺戟되어 그와 같은 意見을 원문주6▶表示한 일이 [6]있거니와, 元來 辰韓은 其 中心地가 海邊에 있지 아니할뿐더러, 政治上으로 말하더라도 後에 장차 말할 바와 같이 얼마동안은 마한의 支配를 받고 있던 一 流移部族에 불과하였던 것이므로, 그 때 이 流移부족의 勢力 程度가 제법 人民 一萬 五千人(물론 이 數字는 그대로 信用키는 어렵지만)과 弁韓布 一萬 五千匹의 賠償을 내놓을 만하였을는지 이것도 疑問이며, 또 廉斯鑡의 威脅한 말 가운데에 특히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라고 한 것도 이 流移部族에 대하여 한 말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要하면 前記 󰡔魏略󰡕文中의 ‘辰韓’은 流移部族의 辰韓을 指稱한 것이 아니라, 其 流移 部族의 宗主인 辰國(後日 소위 馬韓)을 이름한 것일지니, B節 중의 ‘辰韓’은 A節의 辰國 그것으로 解釋할 수밖에 없다. 이는 畢竟 󰡔魏畧󰡕의 撰者가 辰韓과 辰國의 一隅에 來住한 流移部族에 대한 特別 稱號인 辰國과를 混同하여, 辰國이 곧 辰韓이요 辰韓이 곧 辰國이라고 誤認한 까닭이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唐의 張楚金의 所撰인 󰡔翰苑󰡕 蕃夷部 三韓條 雍氏 注에 引用된 󰡔魏略󰡕에 “韓在帶方南……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辰韓 古之辰國也”라고 한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한 것을 確證할 수 있다. 후에 말할 󰡔魏志󰡕 三韓傳에도 이와 똑 같은 記事가 있는데, 그것은 물론 이 󰡔魏略󰡕의 설을 그대로 承襲한 데 不過한 것일 것이다. 辰韓(流移部族)이 辰國의 一部分이라고 할지언정, 그 全體 或은 主體라고 할 수 없을 것은 후에 다시 仔細히 辯論하려▶P11-1고 하거니와, 󰡔魏略󰡕 撰者가 客體와 主體, 部分과 全體의 名稱을 區別하지 않고 (위와 같이) 그냥 混同해버린 것은 如何間 注意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전기(前記) 위략서적문(文) B절 중에 連出(연출)한 ‘진한(辰韓)’은 개시(皆是) 진국(辰國)을 지칭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거기에도 세론(細論)하여보면, “乘大船入辰韓”의 ‘진한(辰韓)’은 특히 그 정치적 중심지 즉 그 수부(首府)를 가리킴이고, 다음 “鑡時曉謂辰韓云”의 ‘진한(辰韓)’은 특히 그 정치적 책임자 즉 그 당국자를 의미한 것이며, 또 그 다음 “辰韓曰云云”의 ‘진한(辰韓)’ 역시 그 정부 당국자를 가리켜 이른 것이다. 그러면, 진국(辰國)의 정치적 중심지(수부(首府))는 지리상 하(何) 방위에 당할 것인가? 이는 좀 막연하지만, 우리는 우선 저 “從芩中乘大船入辰韓” 및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등 구(句)로 추(推)해야 대체의 방위를 고정(考定)할 수 있다. 낙랑(樂浪)과 진국(辰國)(중심지)과의 교통 왕래에 있어 위와 같이 승선(乘船)의 설화가 빈출하는 것을 보면, 진국(辰國)의 중심지는 낙랑(樂浪) 방면과의 해로 교통에 편한 해안지대 특히 한강공간 하류 이남의 서해안 지방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대체의 방위에 불과한 것이고, 서해안 지방의 어느 지점이 거기에 당할 것인가 함에는 위 기사와 이 견해는 좀 막연하여 명백하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이 견해를 기초로 하여 오인(吾人)의 상식적 판단에 소(訴)하여 보면-한강 이남 서부해안 지대에 있어 자래(自來) 고도(古都)로 일컬어오는 곳이 넷이 있으니, 일(一)은 직산(稷山), 일(一)은 公州(공주), 일(一)은 부여(扶餘), 일(一)은 익산(益山)이다. 익산은 마한(후기)의 수도로, 공주와 부여는 백제 후기의 수부(首府)로, 직산은 전설상 백제(百濟) 초기의 도(都)인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의 소재지로 일러오는데, 이 직산(稷山) 위례성설(慰禮城說)만은 근세 이래 선유(先儒)의 비판 거리가 되어, 지금은 대개 학자의 부인(否認)한 바가 되었으며, 나도 역시 백제(百濟)의 ‘위례성(慰禮城)’은 실상 지금의 직산(稷山)이 아니라, 한강공간 유역의 지(地)로 그 최초의 것은 강북공간(하북(河北))인 금(今) 경성공간 부근, 하남공간(강남(江南)) 천도 후의 것은 금(今) 광주공간(구산면(九川面) 성내리(城內里))의 지(地)라고 생각되나니, 나의 이 견해의 기초는 다산(茶山) 정약용인물 선생의 ‘위례성고(慰禮城考)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서적권3.’에 있으므로 그것을 일독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직산(稷山)은 백제(百濟)의 고도(古都)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의 소재지가 아니라고 하면 그 전설은 후세의 와전 혹은 附會(부회)로 볼 수밖에 없으나,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곡절이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그러나 그 곡절은 단순하다고 생각된다-직산(稷山) 지방이 바로 백제(百濟)의 국도(國都)는 아니더라도, 백제 이전 구원(久遠)한 역사를 가지고 있던 하남(河南)(한강 이남) 제일(第一)의 고국도(古國都)로 저명하였던 것이 후일 그곳이 백제(百濟)에게 공취(攻取)되어 주객전도의 상태를 정(呈)한 까닭에 후세에 그와 같은 부회(附會) 와전을 생(生)한 것이 아닌가. 하남(河南) 제일(第一)의 고국(古國)을 든다면 물론 저 진국(辰國)(마한(馬韓)의 고국(故國))에 우(右)할 자 없으니, 직산(稷山) 방면은 고진국(古辰國)의 정치적 중심지(마한(馬韓) 전기의 수도)로 추정함에 가장 적당한 곳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단 주의할 것은 현금(現今) 행정구획 상으로는 ‘직산(稷山)’은 충남공간 천안군공간의 일면명(一面名) 또는 일리명(一里名)으로 밖에 남아 있지 아니하나, 전일(前日)에는 금(今) 직산면(稷山面)을 비롯하여 동군(同郡) 성거면(聖居面) 입장면(笠場面) 성환면(成歡面) 등을 포함한 일(一) 읍현(邑縣)이었으니, 여기에 연출(連出)하는 직산(稷山)은 물론 구일(舊日)의 것을 가리킨 것이다). 진국(辰國)의 정치적 중심지가 선박 교통에 편리한 해안 지방에 있었던 것 같았다 함은 위에 이미 말한 바어니와, 이 직산(稷山) 방면이야말로 실로 거기 해당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지리를 개관하면-직산(稷山) 및 그 부근 일대의 지(地)는 동남으로 성거(聖居)의 웅옥(雄獄)을 등지고 서북으로 성환(成歡)(소사평(素沙坪)) 평택(平澤)의 대야(大野)를 전개하여 조선 서해의 유일한 심입만(深入灣)인 아산만(牙山灣)에 임하고, 성거산(聖居山) 급 안성(安城) 방면에서 발원하는 여러 갈래의 중수(衆水)는 이 평야에 집중하여 서(西)으로 흘러 아산만(牙山灣)에 주입(注入)하니, 소위 안성천(安城川)이 이것이다. 안성천(安城川)의 하류(입해처(入海處))는 비교적 광활하여 주즙(舟楫) 통행의 성(盛)이 고금을 통하여 변함이 없고, 오직 평택 이동(以東)에 있어서는 지금에는 하폭(河幅)이 협천(狹淺)하여 주즙(舟楫)의 리(利)를 보지 못하지만, 석일(昔日)에는 불연(不然)하여 그 이동(以東)에까지 선박의 출입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지방 고로(古老)들에게 들으면, 전일(前日)에는 선척이 평택(平澤) 이동(以東) 어느 곳 어느 곳에까지 들어와 닿았다는 전설이 있고, 또 근일 실제 상류 근처 지하에서 왕왕 개흙(포니(浦泥))이 나옴을 본다 하니, 과연 이렇다 하면 석일(昔日)의 안성천(安城川) 중류는 금일(今日)의 유(類)가 아니요 조석수(潮汐水)에 의하여 제법 수량도 있고 어느 지점까지는 행주(行舟)의 편(便)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직산(稷山) 일대는 아산만(牙山灣)에 임한 해안(海岸) 지대에 속하므로 석일(昔日) 진국(辰國)과 낙랑(樂浪)과의 교통에 있어 해로를 취하였을 것은 당연한 이세(理勢)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겠고, 따라 저 위략서적의 “乘大船入辰韓”의 구(句)는 금일 황해(黃海) 일각에서 대선(大船)을 띄(부(浮))여 경기 서해를 통하야 아산만(牙山灣)으로부터 진국(辰國)의 수부(首府)인 금(今) 직산(稷山) 지방에 들어온 것을 말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있다.
쪽수▶P11-2 이와 같이 前記 󰡔魏略󰡕文 B節 중에 連出한 ‘辰韓’은 皆是 辰國을 指稱한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거기에도 細論하여보면, “乘大船入辰韓”의 ‘辰韓’은 특히 그 政治的 中心地 즉 그 首府를 가리킴이고, 다음 “鑡時曉謂辰韓云”의 ‘辰韓’은 특히 그 政治的 責任者 즉 그 當局者를 意味한 것이며, 또 그 다음 “辰韓曰云云”의 ‘辰韓’ 역시 그 政府 當局者를 가리켜 이른 것이다. 그러면, 辰國의 政治的 中心地(首府)는 地理上 何 方位에 當할 것인가? 이는 좀 漠然하지만, 우리는 우선 저 “從芩中乘大船入辰韓” 및 “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 등 句로 推해야 대체의 方位를 考定할 수 있다. 樂浪과 辰國(中心地)과의 交通往來에 있어 위와 같이 乘船의 說話가 頻出하는 것을 보면, 辰國의 中心地는 樂浪 方面과의 海路 交通에 편한 海岸地帶 특히 漢江 下流 以南의 西海岸 地方이 되어야 할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이는 대체의 方位에 不過한 것이고, 西海岸 地方의 어느 地點이 거기에 當할 것인가 함에는 위 記事와 이 見解는 좀 漠然하여 明白하지 못한 감이 있다. 그러나 이 見解를 基礎로 하여 吾人의 常識的 判斷에 訴하여 보면-漢江 以南 西部海岸 地帶에 있어 自來 古都로 일컬어오는 곳이 넷(四)이 있으니, 一은 稷山, 一은 公州, 一은 扶餘, 一은 益山이다. 익산은 마한(후기)의 수도로, 공주와 부여는 백제 후기의 首府로, 직산은 傳說上 百濟 初期의 都인 河南 慰禮城의 所在地로 일러오는데, 이 稷山 慰禮城說만은 近世 以來 先儒의 批判 거리가 되어, 지금은 대개 學者의 否認한 바가 되었으며, 나도 亦是 百濟의 ‘慰禮城’은 實相 지▶P12금의 稷山이 아니라, 漢江 流域의 地로 그 最初의 것은 江北(河北)인 今 京城 附近, 河南(江南) 遷都 後의 것은 今 廣州(九川面 城內里)의 地라고 생각되나니, 나의 이 見解의 基礎는 원문주7▶茶山 丁若鏞 先生의 ‘慰禮城考 [7] 에 있으므로 그것을 一讀하기를 바란다. 이와 같이 稷山은 百濟의 古都 ‘河南慰禮城’의 所在地가 아니라고 하면 그 傳說은 後世의 訛傳 或은 附會로 볼 수밖에 없으나, 거기에는 반드시 어떠한 曲折이 있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다. 그러나 그 曲折은 單純하다고 생각된다-稷山 地方이 바로 百濟의 國都는 아니더라도, 百濟 以前 久遠한 歷史를 가지고 있던 河南(漢江 以南) 第一의 古國都로 著名하였던 것이 後日 그곳이 百濟에게 攻取되어 主客顚倒의 狀態를 呈한 까닭에 後世에 그와 같은 附會訛傳을 生한 것이 아닌가. 河南 第一의 古國을 든다면 물론 저 辰國(馬韓의 故國)에 右할 者 없으니, 稷山 方面은 古辰國의 政治的 中心地(馬韓 前期의 首都)로 推定함에 가장 適當한 곳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단 注意할 것은 現今 行政區劃上으로는 ‘稷山’은 忠南 天安郡의 一面名 또는 一里名으로밖에 남아 있지 아니하나, 前日에는 今 稷山面을 비롯하여 同郡 聖居面 笠場面 成歡面 等을 包含한 一 邑縣이었으니, 여기에 連出하는 稷山은 물론 舊日의 것을 가리킨 것이다). 辰國의 政治的 中心地가 船舶 交通에 便利한 海岸 地方에 있었던 것 같았다 함은 위에 이미 말한 바어니와, 이 稷山 方面이야말로 실로 거기 該當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그 地理를 槪觀하면-稷山 및 그 附近 一帶의 地는 東南으로 聖居의 雄獄을 등지고 西北으로 成歡(素沙坪) 平澤의 大野를 展開하여 朝鮮 西海의 唯一한 深入灣인 牙山灣에 臨하고, 聖居山 及 安城方面에서 發源하는 여러 갈래의 衆水는 이 平野에 集中하여 西으로 흘러 牙山灣에 注入하니, 소위 安城川이 ▶P13-1이것이다. 安城川의 下流(入海處)는 比較的 廣闊하여 舟楫 通行의 盛이 古今을 통하여 변함이 없고, 오직 平澤 以東에 있어서는 지금에는 河幅이 狹淺하여 舟楫의 利를 보지 못하지만, 昔日에는 不然하여 그 以東에까지 船舶의 出入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地方 古老들에게 들으면, 前日에는 船隻이 平澤 以東 어느 곳 어느 곳에까지 들어와 닿았다는 傳說이 있고, 또 近日 實際 上流 近處 地下에서 往往 개흙(浦泥)이 나옴을 본다 하니, 果然 이렇다 하면 昔日의 安城川 中流는 今日의 類가 아니요 潮汐水에 의하여 제법 水量도 있고 어느 地點까지는 行舟의 便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떻든 稷山 一帶는 牙山灣에 臨한 海岸 地帶에 속하므로 昔日 辰國과 樂浪과의 交通에 있어 海路를 취하였을 것은 當然한 理勢라고 보지 아니하면 아니되겠고, 따라 저 󰡔魏略󰡕의 “乘大船入辰韓”의 句는 今日 黃海 一角에서 大船을 띄(浮)여 京畿 西海를 통하야 牙山灣으로부터 辰國의 首府인 今 稷山 地方에 들어온 것을 말한 것이라고 解釋할 수 있다.
진국(辰國)의 도성이 직산(稷山) 지방의 어느 지점에 당할까 함에 있어서도 고찰할 필요가 있는데, 거기 관하여는 더욱 가거(可據)할 문헌도 없고 또 그럴듯한 유적도 발견하지 못하여 분명히 어디라고 당처(當處)를 지정하기 어려우나-물론 성거산(聖居山)에는 세전(世傳) 소위 ‘위례성(慰禮城)’의 유지가 있고 직산(稷山) 구읍(舊邑)에는 ‘사산성(蛇山城)’의 유적이 있으나, 다 이들은 삼국시대(三國時代) 혹은 나말여초(羅末麗初)의 소축(所築)에 계(係)한듯 할뿐더러, 이들은 확실히 난시(亂時) 소용(所用)의 산성이요 평시 상거(常居)의 도성이 아니므로 지금 고려하는 문제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그러나 직산(稷山) 구읍(舊邑)에서 직북(直北) 약 8~9리 되는 곳에 ‘도하리(都下里)’(혹은 도감리(都監里) ᆞ충남(忠南) 천안군(天安郡) 성환면(成歡面))란 리명(里名)과 도하리(都下里)에서 서북 약 6리 되는 곳 즉 안성천(安城川) 합류처에 ‘안궁리(安宮里)’
쪽수▶P13-2辰國의 都城이 稷山 地方의 어느 地點에 當할까 함에 있어서도 考察할 必要가 있는데, 거기 관하여는 더욱 可據할 文獻도 없고 또 그럴듯한 遺跡도 發見하지 못하여 分明히 어디라고 當處를 指定하기 어려우나-물론 聖居山에는 世傳 소위 ‘慰禮城’의 遺址가 있고 稷山 舊邑에는 ‘蛇山城’의 遺跡이 있으나, 다 이들은 三國時代 혹은 羅末 麗初의 所築에 係한듯 할뿐더러, 이들은 確實히 亂時 所用의 山城이요 平時 常居의 都城이 아니므로 지금 考慮하는 問題의 對象은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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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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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운(或云)궁리(宮里) 동상(ᆞ同上))란 리명(里名)과 기(其) 외 동천(同川) 유역인 진위군(振威郡) 부용면(芙蓉面)의 ‘평궁리(坪宮里)’(일운(一云) 상궁리(上宮里)) ‘신궁리(新宮里)’(일운(一云) 하궁리(下宮里)) 등의 리명(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들 동리에서 아직 그럴듯한 유적과 유물은 발견하지 못하였지만, 그 리명(里名)은 필연 심상하지 않은 구원(久遠)한 유래와 역사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직산(稷山) 구읍(舊邑)의 북(北) 안성천(安城川) 유역은 이 등지를 국도로 삼던 어느 시대 즉 진국시대(辰國時代) 내지 그 정통인 마한시대(馬韓時代)의 궁궐도시가 있던 곳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러한(도자(都字) 궁자(宮字) 붙은) 리명(里名)이 전칭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물고(物故)한 중추원(中樞院) 촉탁(囑託) 대원리무(大原利武)씨도 일찍이 이 지명에 주의를 불(拂)하여 동 지역을 마한ㅅ대(馬韓時代)의 도읍 소재지로 추정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의견과 전혀 일치하며, 오직 나는 마한시대(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이전 진국시대(辰國時代)로부터의 도궐(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쪽수▶P14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이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그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원문주8▶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8]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 ▶P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이와 같이 직산(稷山) 등지를 고진국(古辰國) 및 그 후신인 마한(馬韓)(전기)의 국도 소재지로 인정함에 거의 의심이 없다 하면, 당시 그 국도를 포함한 지방의 명칭은 무엇이라고 하였던가 함에 대하여 언급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한원(翰苑)**(번이부(蕃夷部)) 삼한조(三韓條) “臣智都號目支”下(하) 옹씨(雍氏)의 주(注)에 인(引)한 위략서적을 보면
쪽수▶P15-2이와 같이 稷山 等地를 古辰國 및 그 後身인 馬韓(前期)의 國都 所在地로 認定함에 거의 疑心이 없다 하면, 當時 그 國都를 包含한 地方의 名稱은 무엇이라고 하였던가 함에 대하여 言及하지 아니하면 아니된다. 󰡔翰苑󰡕(蕃夷部) 三韓條 “臣智都號目支”下 雍氏의 注에 引한 󰡔魏略󰡕을 보면
三韓 各有長帥 其置官 大者名巨(臣)智 次曰邑借 凡有小國五十六 惣十餘萬戶 辰王治目支國 支國置官 赤(亦)多曰巨(臣)智라 하여 진왕(辰王)은 목지국(目支國)을 치(治)한다고 하였다. 후한서서적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에도 “馬韓最大 共立其種 爲辰王 都目支國”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물론 위략서적에 의한 것인듯), 위지서적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에는-목지(目支)가 월지(月支)로 되어 있어- “辰王治月支國”이라 하고, 또 同條(동조) 상문(上文)에 열거한 소위 마한(馬韓) 오십여 국 중에도 월지국(月支國)의 명(名)이 나타난다. 목자(目字)와 월자(月字)가 음은 대상부동(大相不同)하되 자양(字樣)은 근사하여 서로 착오되기 쉬운 자인즉, ‘목지(目支)’ ‘월지(月支)’의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지금 갑자기 판단은 내릴 수 없고 그대로 양존(兩存)하여 둘 수밖에 타도(他道)가 없으나, 하여간 위 제서(諸書)에 의하면, 목지(目支) 혹운(或云) 월지(月支)는 진왕(辰王)의 치부(治府) 즉 진(辰)의 국도 소재지(후일의 ‘기내(畿內)’와 같은 구역)의 명호(名號)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위지서적 (삼한조(三韓條))에 의하면, 진왕(辰王)의 치부(治府)인 월지(月支)(목지(目支))국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마한(馬韓) 열국 중에 들어 있고, 또 거기에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라 하고 상기 후한서서적에도 “馬韓......共立其種爲辰王”이라고 하였는즉, 이때의 진왕(辰王)은 마한(馬韓) 공위(共立)의 마한주(馬韓主)를 지칭함인 듯하나, 원래 마한(馬韓)은 진국(辰國)의 주체요 정통이며 또 그 소위 ‘진왕(辰王)’의 칭호도 본시 진국(辰國)에 왕(王)한 所以(소이)의 것, 다시 간단히 말하면 ‘진국왕(辰國王)’의 의(義)에 불과한 것이니, 진왕(辰王)의 치도(治都)라고 하는 목지(目支)(월지(月支))국은 즉 진국(辰國) 이래의 기내(畿內) 지방으로 인정할 수 있는 곳이다.
쪽수▶P15-3三韓 各有長帥 其置官 大者名巨(臣)智 次曰邑借 凡有小國五十六 惣十餘萬戶 辰王治目支國 支國置官 赤(亦)多曰巨(臣)智라 하여 辰王은 目支國을 治한다고 하였다. 󰡔後漢書󰡕 東夷傳 三韓條에도 “馬韓最大 共立其種 爲辰王 都目支國”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물론 󰡔魏略󰡕에 의한 것인 듯), 󰡔魏志󰡕 東夷傳 三韓條에는-目支가 月支로 되어 있어- “辰王治月支國”이라 하고, 또 同條 上文에 列擧한 소위 馬韓 五十餘國 중에도 月支國의 名이 나타난다. 目字와 月字가 音은 大相不同하되 字樣은 近似하여 서로 錯誤되기 쉬운 字인즉, ‘目支’ ‘月支’의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지금 갑자기 判斷은 내릴 수 없고 그대로 兩存하여 둘 수밖에 他道가 없으나, 하여간 위 諸書에 의하면, 目支 或云 月支는 辰王의 治府 卽 辰의 國都 所在地(後日의 ‘畿內’와 같은 區域)의 名號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魏志󰡕(三韓條)에 의하면, 辰王의 治府인 月支(目支)國은 지금 말한 바와 같이 馬韓 列國 중에 들어 있고, 또 거기에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라 하고 上記 󰡔後漢書󰡕에도 “馬韓……共立其種爲辰王”이라고 하였은즉, 이때의 辰王은 馬韓 共立의 馬韓主를 指稱함인 듯하나, 元來 馬韓은 辰國의 主體요 正統이며 또 그 소위 ‘辰王’의 稱呼도 本是 辰國에 王한 所以의 것, 다시 간단히 말하면 ‘辰國王’의 義에 不過한 것이니, 辰王의 治都라고 하는 目支▶P16-1(月支)國은 즉 辰國 以來의 畿內地方으로 認定할 수 있는 곳이다.
목(월)지국(目(月)支國) 외에 이때 소위 무슨 국 무슨 국 하는 제(諸) 소국도 물론 글자대로의 일국의 자격을 가진 자가 아니라, 말하자면 반자치적 읍락(부락)을 이루어가지고 있는 자를 이름이니, 기(其) 중에는 대소의 차가 있어, 대읍락(만여 호)에는 소위 ‘신지(臣智)’, 소읍락(수천 호)에는 읍차용어란 장관(長官)이 있어 각각 그 지방을 다스리었다. 단 신지(臣智) 등 칭호에 취(就)하여는 후에도 상설(詳說)할 터이어니와, 이는 상기 위략서적에 보임과 같이 “其置官大者名臣智 次曰 邑借”라고 하였으므로, 신지(臣智)는 한 大官(대관)의 칭호라고 할지언정 이를 곧 전체의 최고지배자인 왕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원(翰苑)**에 신지(臣智)와 진왕(辰王)을 혼동하여 (‘辰王都號目支’라 할 것을) ‘臣智都號目支’라 한 것은 그릇된 견해이다.
쪽수▶P16-2目(月)支國外에 이때 소위 무슨 國 무슨 國 하는 諸 小國도 물론 글자대로의 一國의 資格을 가진 者가 아니라, 말하자면 半自治的 邑落(部落)을 이루어가지고 있는 者를 이름이니, 其中에는 大小의 差가 있어, 大邑落(萬餘戶)에는 소위 ‘臣智’, 小邑落(數千戶)에는 ‘邑借’란 長官이 있어 各各 그 地方을 다스리었다. 단 臣智 등 稱號에 就하여는 후에도 詳說할 터이어니와, 이는 上記 󰡔魏略󰡕에 보임과 같이 “其置官 大者名臣智 次曰 邑借”라고 하였으므로, 臣智는 한 大官의 稱號라고 할지언정 이를 곧 全體의 最高支配者인 王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翰苑󰡕에 臣智와 辰王을 混同하여 (‘辰王都號目支’라 할 것을) ‘臣智都號目支’라 한 것은 그릇된 見解이다.
그러면 금(今) 직산(稷山) 및 그 부근 지방이 석일(昔日) 진국(辰國) 급 마한시대(馬韓時代)에는 ‘목지(目支)’(혹운(或云) ‘월지(月支)’)라고 일컫던 것은 재언(再言)을 불대(不待)어니와, 전인(前引) 위략서적 기사 중에는 목지(目支)의 목(目)을 약(略)하여 단(單)히 지국(支國)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지(支)’가 고어(古語)에 무엇을 의미한 말인지 혹 성읍(城邑)의 의(義)는 아닌지 아직 분명하지 못하나-후일 백제(百濟)의 지명 중에도 흔히 끝에 ‘지(支)’ ‘지(只)’의 삼국사서적 지리지(地理志)에 의하면, 백제(百濟) 지명 중에 ‘소력지(所力只)’(전주(全州) 서북), ‘구지산(仇只山)’(금구(金溝)), ‘지벌지(只伐只)’(고산(高山)) ‘고녹지(古祿只)’(영광(靈光) 동북), ‘노지(奴只)’(광주(光州)), ‘다지(多只)’(함평(咸平) 동북), ‘두부지(豆夫只)’(동복(同福)), ‘노사지(奴斯只)’(유성(儒城)), ‘두잉지(豆仍只)’(연기(燕岐)), ‘벌수지(伐首只)’(당진(唐津)), ‘굴지(屈支)’(창평(昌平)), ‘율지(栗支)’(담양(潭陽) 동북), ‘과지(菓支)’(옥과(玉果)), ‘둔지(遁支)’(순천(順天) 북), ‘벌음지(伐音支)’(공주(公州) 서)등의 지명이 보임. 어(語)가 붙는 것이 많다-지(支)와 직산(稷山)의 직(稷)과 직산(稷山)의 구호(舊號)인 사산(蛇山)의 사(蛇)가 서로 음이 엇비슷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즉 사(蛇)니 직(稷)이니 하는 음은 다 목(월)지(目(月)支)의 지(支)에서 변천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양자를 지명상으로 비정하여도 불가함이 없을 것 같다.
쪽수▶P16-3 그러면 今 稷山 및 그 附近 地方이 昔日 辰國 及 馬韓時代에는 ‘目支’(或云 ‘月支’)라고 일컫던 것은 再言을 不待어니와, 前引 󰡔魏略󰡕 記事 중에는 目支의 目을 略하여 單히 支國이라고도 하였는데, 이 ‘支’가 古語에 무엇을 意味한 말인지 혹 城邑의 義는 아닌지 아직 分明하지 못하나-後日 百濟의 地名 중에도 원문주9▶흔히 끝에 ‘支’ ‘只’의 [9] 語가 붙는 것이 많다-支와 稷山의 稷과 稷山의 舊號인 蛇山의 蛇가 서로 音이 엇비슷한 것은 偶然한 일이 아닌 것 같다. 즉 蛇니 稷이니 하는 音은 다 目(月)支의 支에서 變遷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兩者를 地名上으로 比定하여도 不可함이 없을 것 같다.
이상은 위략서적의 소위 ‘진한(辰韓)’과 진국(辰國)이 전연(全然) 동일하다는 것과 또 그 정치적 중심지가 목(월)지국(目(月)支國)으로, 금(今) 직산(稷山) 방면에 해당한다는 것을 논술한 바어니와, 다음에는 제이(第二) 문제인 “辰韓右渠帥”의 의의(意義) 급 ‘염사치(廉斯鑡)’의 원주지(原住地)에 대하여 고찰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辰韓右渠帥”의 진한(辰韓)도 진국(辰國) 그것의 위(謂)임은 물론이나, 소위 ‘우거수(右渠帥)’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필자는 연전(年前)에 졸고(拙稿) ‘진번군고(眞番郡考)’를 초(草)할 때에 이에 논급(論及)하여 우거수(右渠帥)를 우거인물의 수(帥)란 의(義)로 해석하여, 이는 진국(辰國)의 일우(一隅)에 내거(來居)한 조선상(朝鮮相) (우거인물의 상(相)) 역계경인물의 끼친(유(遺)) 명호(名號)가 아닌가 하는 동시에 우거수(右渠帥)를 그 이주 조선인(朝鮮人) 부락에 세세(世世) 장(長)되는 자의 칭호로 추측하고, 인하여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은 토착의 진인(辰人)(한인(韓人))과는 전혀 계통을 달리한 것이라고 하는 의견을 발현하였었는데, 그 후 다시 생각하여본즉, 우거수(右渠帥)는 역시 종래 학자의 설과 같이 ‘진한(辰韓)’(즉 진국(辰國)) 우변(右邊)의 거수(渠帥) 즉 우변(右邊) 장수(長帥)란 義(의)로 해(解)하는 편이 훨씬 온당할 것 같으며, 실제 위지서적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에는 “각유장수(各有長帥)”라 “각유거수(各有渠帥)”라 한 문구가 있고, 전기(前記) 위략서적의 인문(引文) 중에도 “三韓各有長帥”라고 한 기사가 보여 있다. 그리하여 염사치(廉斯鑡)은 진국(辰國) 우변(右邊)의 (어떤 국읍(國邑)의) 거수(渠帥)로 진인(辰人)에 계통하고, 저 유이부락(流移部落)의 조선민(朝鮮民)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라는 반대의 결론에 다다랐다. 그리고 염사치(廉斯鑡)란 것도 실상 순전한 인명 같이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물론 위략서적에는 이를 순수한 인명으로 보아 “廉斯鑡爲辰韓右渠帥”라 하고, 또는 ‘진치(辰鑡)’라 단(單)히 ‘치(鑡)’라고도 약서(略書)하였으나, 이 치(鑡)의 음이 저 한국 국읍(國邑) 거수(渠帥)의 칭(稱)인 신지(臣智) 읍차(邑借) 험측(險側)(이들에 관하여는 오히려 후(後)에 말할 기회가 있음) 등의 지(智), 차(借), 측(側)과 자못 근사함을 보면 치(鑡)도 실상 한인국읍(韓人國邑)의 장관(長官)에 대한 칭호 같고, 염사(廉斯)는 즉 그 나라의 어느 부락명인 것 같다. 과연 후한서서적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를 보면 “建武二十年 韓人 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 四時朝謁”이란 기사가 있으니(동서(同書) 광무제(光武帝) 본기(本紀) 건무이십년조(建武二十年條)에는 단(單)히 “秋 東夷韓國人率衆請樂浪內附”라 하였음), 이 기사에 보이는 염사인(廉斯人) 소마시(蘇馬諟)와 저 위략서적에 보이는 소위 우거수(右渠帥) 염사치(廉斯鑡)이 서로 어떠한 관계의 인물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여기에 “韓人廉斯人”이라 또는 “封......廉斯邑君”이라 한 것을 보면, 염사(廉斯)는 분명히 한국(韓國)(진국(辰國))의 일읍명(一邑名)인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동시에 소마시(蘇馬諟)와 염사치(廉斯鑡)은 다 같은 한인(韓人)의 염사읍장(廉斯邑長)으로 전후하여 일(一)(후자)은 왕망(王莽) 지황(地皇) 시(時)에, 일(一)(전자)은 광무제(光武帝) 건무연간(建武年間)(20년)에 낙랑(樂浪)에 귀부하여 한(漢)의 관책(冠幘) 우(又)는 봉수(封綬)를 받던 인물들인 것 같다. (대개 제 한국(韓國)의 신지(臣智) 읍장 중에는 물론이요, 하호(下戶)들 중에도 한(漢)의 의책(衣幘)과 印綬(인수)를 받는 것을 일종의 영예로 알아 소위 “詣郡(○樂浪)朝謁”을 상습(常習)으로 하는 자가 왕왕 있었으며, 위(魏) 시(時)에는 한국 하호(下戶)의 의책(衣幘)이 천유여인(千有餘人)에 달한 일이 있었다 한다). 삼국지서적 위지서적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 ‘염사치(廉斯鑡)’는 염사읍장(廉斯邑長)의 의(義)인 듯하므로, 치(鑡)의 본명은 무엇이었던지 알 수 없고, 따라 위략서적에 “廉斯鑡爲辰韓右渠帥”라 함은 좀 우스운(소(笑)) 기사 같으나 이에 의하여 오인(吾人)은 치(鑡)의 본적지인 염사읍(廉斯邑)의 방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염사치(廉斯鑡)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요, 진한(辰韓) 우거수(右渠帥)는 상술(上述)과 같이 진국(辰國) 우변(右邊)의 장수(長帥)란 뜻인즉 염사(廉斯)의 위치는 진국(辰國)의 우변지(右邊地)에 구하여야 되겠고, 또 우변지(右邊地)라 하면 적어도 진국(辰國)의 수도인 월(목)지국(月(目)支國) 즉 금(今) 직산(稷山) 방면에서 서방(서북 혹 서남)에 당한 곳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는데, 이것만으로는 막연하여 염사읍(廉斯邑)의 당처(當處)를 지정해낼 수 없다. 그러나 염사(廉斯)와 근사한 지명을 직산(稷山) 서쪽에 구하여 볼 때 나는 저 해미(海美)의 염솔(廉率)(혹작(或作) 염솔(鹽率))을 연상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해미(海美) 염솔(廉率)은 지금은 충남(忠南) 서산군(瑞山郡)에 속하여 금(今) 정미면(貞美面)이 즉 그곳인데, 이는 이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권20)해미현(海美縣) 고적조(古跡條)에 일부곡(一部曲)의 명(名)으로 나타나 ‘염솔부곡(廉率部曲)’이라 하고, 그 주(注)에 “廉一作鹽, 在縣北三十六里”라고 하였다. 이 염솔(廉率)과 저 염사(廉斯)는 발음이 거의 일치할 뿐더러, 지리상으로 보아도 염솔(廉率) 부근은 서해에 돌출한 태안반도(泰安半島)의 북우(北隅) 일(一) 만입처에 위치하여 고금을 통하여 역시 해로 교통의 편(便)을 점하고 있는 곳이므로, 석일(昔日) 낙랑(樂浪) 방면과의 왕래 교통이 빈삭(頻數)하던 염사(廉斯) 그곳으로 비정하야 불가함이 없을 것이다. 단 염사치(廉斯鑡)이 처음 낙랑(樂浪)에 투항하러 갈 때에는 해로를 취하지 않고 육로를 취한 듯한 것은 전인(前引) 위략서적 기사 중에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이라 한 것으로써 알 수 있고, 또 이와 같이 육로를 취한 이유는 자세하지 못하나, 혹 월지(月支) 근처의 호래(戶來)와 같은 낙랑(樂浪) 降人(항인)(포로)을하나 데리고 가서 사유를 진술하려고 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치(鑡)이 호래(戶來)의 항반배(降伴輩)를 역취(逆取)하러 본국에 돌아올 때에는 물론 해로를 취하였으므로 “乘大船入辰韓”이라고 한 것이다. 어떻든 염사(廉斯) 지방은 진국(辰國)의 일(一) 군읍(郡邑)으로 낙랑(樂浪)과의 교통이 편리한 곳에 위치하여 저 ‘염사치(廉斯鑡)’ 이래 그 읍장의 낙랑(樂浪)에 밀통(密通)하는 자-많이 있었고, 그리하여 위지서적후한서서적 등서 (삼한조(三韓條))에는 염사(廉斯)가 (한(漢) 시(時)에) 낙랑(樂浪)에 속하여 사시조알(四時朝謁)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낙랑(樂浪)에 속하였다고 함은 소마시(蘇馬諟)와 같이 귀부를 밀청(密請)한 자가 있어 한(漢)이 이를 허함에 기인된 사실인 듯하나, 그 소위 속(屬)은 일종 명의(名義) 상의 ‘속(屬)’이요 결코 실질상으로 그 지방이 낙랑군(樂浪郡)에 할여(割與)되어 그 통치를 받았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쪽수▶P16-4 以上은 󰡔魏畧󰡕의 소위 ‘辰韓’과 辰國이 全然 同一하다는 것과 또 그 政治的 中心地가 目(月)支國으로, 今 稷山▶P17方面에 該當한다는 것을 論述한 바어니와, 다음에는 第二問題인 “辰韓右渠帥”의 意義 及 ‘廉斯鑡’의 原住地에 대하여 考察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辰韓右渠帥”의 辰韓도 辰國 그것의 謂임은 물론이나, 소위 ‘右渠帥’란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筆者는 年前에 拙稿 ‘眞番郡考’를 草할 때에 이에 論及하여 右渠帥를 右渠의 帥란 義로 解釋하여, 이는 辰國의 一隅에 來居한 朝鮮相 (右渠의 相) 歷谿卿의 끼친(遺) 名號가 아닌가 하는 同時에 右渠帥를 그 移住 朝鮮人 部落에 世世 長되는 자의 稱號로 推測하고, 인하여 右渠帥 廉斯鑡는 土着의 辰人(韓人)과는 전혀 系統을 달리한 것이라고 하는 意見을 發見하였었는데, 그 후 다시 생각하여본즉, 右渠帥는 역시 從來 學者의 설과 같이 ‘辰韓’(卽辰國) 右邊의 渠帥 卽 右邊 長帥란 義로 解하는 편이 훨씬 穩當할 것 같으며, 實際 󰡔魏志󰡕 東夷傳 三韓條에는 “各有長帥”라 “各有渠帥”라 한 文句가 있고, 前記 󰡔魏略󰡕의 引文 중에도 “三韓各有長帥”라고 한 記事가 보여 있다. 그리하여 廉斯鑡는 辰國 右邊의 (어떤 國邑의) 渠帥로 辰人에 系統하고, 저 流移部落의 朝鮮民과는 關係가 없는 것이라는 反對의 結論에 다다랐다. 그리고 廉斯鑡란 것도 實相 純全한 人名 같이는 생각되지 아니한다. 물론 󰡔魏略󰡕에는 이를 純粹한 人名으로 보아 “廉斯鑡爲辰韓右渠帥”라 하고, 또는 ‘辰鑡’라 單히 ‘鑡’라고도 略書하였으나, 이 鑡의 音이 저 韓國 國邑 渠帥의 稱인 臣智 邑借 險側(이들에 관하여는 오히려 後에 말할 機會가 있음) 등의 智, 借, 側과 자못 近似함을 보면 鑡도 實相 韓人國邑의 長官에 대한 稱號 같고, 廉斯는 즉 그 나라의 어느 部落名인 것 같다. 과연 󰡔後漢書󰡕 東夷傳 三韓條를 보면 “建武二十年 韓人 廉斯人蘇馬諟等 詣樂浪貢獻 光武封蘇馬諟爲漢廉斯邑君 使屬樂浪 四時朝謁”이란 記事가 있으니(同書 光武帝 本紀 建武二▶P18十年條에는 單히 “秋 東夷韓國人率衆請樂浪內附”라 하였음), 이 記事에 보이는 廉斯人 蘇馬諟와 저 󰡔魏略󰡕에 보이는 소위 右渠帥 廉斯鑡가 서로 어떠한 關係의 人物인지는 仔細히 알 수 없으나, 여기에 “韓人廉斯人”이라 또는 “封……廉斯邑君”이라 한 것을 보면, 廉斯는 分明히 韓國(辰國)의 一邑名인 것을 確認할 수 있고, 同時에 蘇馬諟와 廉斯鑡는 다 같은 韓人의 廉斯邑長으로 前後하여 一(後者)은 王莽 地皇時에, 一(前者)은 光武帝 建武年間(20年)에 樂浪에 歸附하여 漢의 冠幘 又는 封綬를 받던 人物들인 것 같다. (대개 諸韓國의 臣智 邑長 중에는 물론이요, 下戶들 중에도 漢의 衣幘과 印綬를 받는 것을 一種의 榮譽로 알아 소위 “詣郡(○樂浪)朝謁”을 常習으로 하는 자가 往往 있었으며, 원문주10▶魏時에는 韓國 下戶의 衣幘이 千有餘人에 달한 일이 있었다 한다). [10] ‘廉斯鑡’는 廉斯邑長의 義인 듯하므로, 鑡의 本名은 무엇이었던지 알 수 없고, 따라 󰡔魏略󰡕에 “廉斯鑡爲辰韓右渠帥”라 함은 좀 우스운(笑) 記事 같으나 이에 의하여 吾人은 鑡의 本籍地인 廉斯邑의 方位를 斟酌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廉斯鑡는 辰韓의 右渠帥요, 辰韓 右渠帥는 上述과 같이 辰國 右邊의 長帥란 뜻인즉 廉斯의 位置는 辰國의 右邊地에 求하여야 되겠고, 또 右邊地라 하면 적어도 辰國의 首都인 月(目)支國 卽 今 稷山 方面에서 西方(西北 或 西南)에 當한 곳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되겠는데, 이것만으로는 漠然하여 廉斯邑의 當處를 指定해낼 수 없다. 그러나 廉斯와 近似한 地名을 稷山 西쪽에 求하여 볼 때 나는 저 海美의 廉率(或作 鹽率)을 聯想하지 아니할 수 없었다. 海美 廉率은 지금은 忠南 瑞山郡에 속하여 今 貞美面이 즉 그곳인데, 이는 이미 󰡔東國輿地勝覽󰡕(卷20)海美縣 古跡條에 一部曲의 名으로 나타나 ‘廉率部曲’이라 하고, 그 注에 “廉一作鹽, 在縣北三十六里”라고 하였다. 이 廉率과 저 廉斯는 發音이 거의 一致할 뿐더러, 地理上▶P19-1으로 보아도 廉率 附近은 西海에 突出한 泰安半島의 北隅 一 灣入處에 位置하여 古今을 통하여 역시 海路 交通의 便을 占하고 있는 곳이므로, 昔日 樂浪 方面과의 往來 交通이 頻數하던 廉斯 그곳으로 比定하야 不可함이 없을 것이다. 단 廉斯鑡가 처음 樂浪에 投降하러 갈 때에는 海路를 취하지 않고 陸路를 取한 듯한 것은 前引 󰡔魏畧 󰡕記事 중에 “出其邑落 見田中驅雀男子一人”이라 한 것으로써 알 수 있고, 또 이와 같이 陸路를 取한 理由는 仔細하지 못하나, 혹 月支 近處의 戶來와 같은 樂浪 降人(捕虜)을 하나 데리고 가서 事由를 陳述하려고 함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鑡가 戶來의 降伴輩를 逆取하러 本國에 돌아올 때에는 물론 海路를 取하였으므로 “乘大船入辰韓”이라고 한 것이다. 어떻든 廉斯地方은 辰國의 一 郡邑으로 樂浪과의 交通이 便利한 곳에 位置하여 저 ‘廉斯鑡’ 以來 그 邑長의 樂浪에 密通하는 자-많이 있었고, 그리하여 󰡔魏志󰡕 及 󰡔後漢書󰡕 等書 (三韓條)에는 廉斯가 (漢時에) 樂浪에 屬하여 四時朝謁이라고 하였는데, 여기 樂浪에 속하였다고 함은 蘇馬諟와 같이 歸附를 密請한 자가 있어 漢이 이를 許함에 基因된 事實인 듯하나, 그 소위 屬은 一種 名義上의 ‘屬’이요 결코 實質上으로 그 地方이 樂浪郡에 割與되어 그 統治를 받았다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丙) 위지서적 후한서서적의 진국(辰國) 여(與) 삼한 관계 기사에 대한 검토 및 진국(辰國)의 강역
쪽수▶P19-2(丙) 󰡔魏志󰡕 󰡔後漢書󰡕의 辰國 與 三韓 關係 記事에 대한 檢討 및 辰國의 疆域
이상은 주로 위략서적 기사에 의하여 진국(辰國)의 정치적 중심지 내지 진국(辰國)의 일(一) 지방인 염사(廉斯)의 위치에 대하여 우견(愚見)을 진술한 바이지만, 진국(辰國)과 삼한과의 역사지리적 관계라든지 진국(辰國)의 강역에 있어서는 아직 논급(論及)하지 못하였다. 여기 관하여는 불가불 위지서적후한서서적 등의 기사를 주로 검토하여 써 새로운 고찰을 내리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쪽수▶P19-3以上은 주로 󰡔魏略󰡕 記事에 의하여 辰國의 政治的 中心地 내지 辰國의 一 地方인 廉斯의 位置에 대하여 愚見을 陳述한 바이지만, 辰國과 三韓과의 歷史地理的 關係라든지 辰國의 疆域에 있어서는 아직 論及하지 못하였다. 여기 관하여는 不可不 󰡔魏志󰡕 及 󰡔後漢書󰡕 等의 記事를 주로 檢討하여 써 새로운 考察을 내리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삼국지(三國志)**의 위지서적 동이전(東夷傳) 삼한조(三韓條)에 의하면
쪽수▶P20-1󰡔三國志󰡕의 魏志 東夷傳 三韓條에 의하면
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라 하고, 또 그 밑에 “馬韓在西云云”이라 “辰韓在馬韓之東云云”이라 하고, 동전(同傳) 예조(濊條)에 “濊南與辰韓云云”이라 한 구절들이 있으며, 후한서서적** 동이전(東夷傳) 한조(韓條)에는
쪽수▶P20-2韓 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라 하고, 또 그 밑에 “馬韓在西云云”이라 “辰韓在馬韓之東云云”이라 하고, 同傳 濊條에 “濊南與辰韓云云”이라 한 句節들이 있으며, 󰡔後漢書󰡕 東夷傳 韓條에는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中略)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中略) 其南與倭接 凡七十八國 (中略) 各在山海間 地方合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쪽수▶P20-3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中略)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中略) 其南與倭接 凡七十八國 (中略) 各在山海間 地方合四千餘里 東西以海爲限 皆古之辰國也
라고 한 기사가 있다. 즉 위지서적에는 삼한 중 특히 진한(辰韓)-마한(馬韓)의 동(東)과 예(濊)의 남(南)에 있는 진한(辰韓)-만이 고지진국(古之辰國)이라고 하였음에 대하여 후한서서적에는 진한(辰韓)뿐만 아니라 삼한의 지(地) 전체가 다 고지진국(古之辰國)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재래 위지서적의 차설(此說)을 시인하는 자는 진한(辰韓)이 곧 진국(辰國)이라 하고, 후한서서적의 설을 종(從)하는 이는 삼한 전체가 곧 진국(辰國)이라고 주장하여 왔다. 그러면 오인(吾人)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견해를 취할 것인가. 이 문제는 진국(辰國)의 강역(疆域)을 논함에는 물론이요, 진국(辰國)과 삼한과의 역사지리적 관계를 밝힘에 있어서도 또한 큰 상관이 있는 것이므로, 좀 자세히 논난(論難)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쪽수▶P20-4라고 한 記事가 있다. 즉 󰡔魏志󰡕에는 三韓 중 특히 辰韓-馬韓의 東과 濊의 南에 있는 辰韓-만이 古之辰國이라고 하였음에 대하여 󰡔後漢書󰡕에는 辰韓뿐만 아니라 三韓의 地 全體가 다 古之辰國이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在來 󰡔魏志󰡕의 此說을 是認하는 자는 辰韓이 곧 辰國이라 하고, 󰡔後漢書󰡕의 설을 從하는 이는 三韓 全體가 곧 辰國이라고 主張하여 왔다. 그러면 吾人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見解를 취할 것인가. 이 問題는 辰國의 疆域을 논함에는 물론이요, 辰國과 三韓과의 歷史地理的 關係를 밝힘에 있어서도 또한 큰 相關이 있는 것이므로, 좀 仔細히 論難할 必要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위지서적의 설을 평하면, 위지서적의 소위 ‘辰韓者古之辰國也’의 설은 실상 앞서 말한 위략서적의 설을 그대로 승습(承襲)함에 불과한 것이지만, 어떻든 이는 상기 후한서서적의 설과 서로 반대될 뿐 아니라, 같은 위지서적의 타 기사와도 서로 충돌되는 난점을 가지고 있으니, 즉 위지서적 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 월지국(月支國) 등 마한(馬韓) 제(諸) 국읍을 열거한 하(下)에 “辰王治月支國”이라 하고, 또 그 아래 변진조(弁辰條)에 “辰王 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이상의 이구(二句)는 앞서도 인용하였지만) “辰王(韓)不得自立爲王 (魏略曰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 “辰王不得自立爲王”의 진왕(辰王)은 이미 일본 고(故) 나가통세 박사인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조선상고사서적 제11장 삼한고(三韓考). 진한(辰韓)의 오(誤)일 것은, 이 구절 밑에 배씨(裵氏) 주(注)의 위략서적에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라 하고, 또 양서서적 동이전(東夷傳)(신라조(新羅條))에는 분명히 “辰韓不得自立爲王 云云”이라(물론 양서서적에 이 구절을 신라조(新羅條)에 입(入)한 것은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잘못된 것이지만) 하였음으로써 알 수 있고, 따라서 마한(馬韓)과 진한(辰韓)과는 종속, 주객의 관계로 되어 있던 것을 요득(了得)할 수 있으며, 그 위의 진왕(辰王)은 기술(旣述)한 바와 같이 원래 진국왕(辰國王)의 의(義)로 진국(辰國)에 군림한 소이(所以)의 칭호라고 볼 것이어니와, 이것이 이때 특히 마한인(馬韓人)에 한하여 세습되는 것은 마한(馬韓)은 본시 고진국(古辰國)의 정통이요 주체인 때문으로써다. 만일 위지서적의 설대로 진한(辰韓)이 곧 고시(古時)의 진국(辰國)이라 하면, 진왕(辰王)은 진한(辰韓)에 한한 왕이 되어야 할 터인데, 사실은 마한(馬韓)의 세습주(世襲主)로 되어있을 뿐더러 진한(辰韓)에는 워낙 자립의 주(主)를 가지지 못하고 도리어 마한(馬韓)의 지배를 받았던 것이다. 위지서적에 정작 이 진국(辰國)의 정통인 마한(馬韓)을 내놓고 도리어 거기 종속적 관계를 가진 (자립의 주(主)를 갖지 못한) 저 유이부락(流移部落)의 진한(辰韓)을 고지진국(古之辰國)이라고 한 것은 본말을 전도한 큰 착견(錯見)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물론 삼한 중의 진한(辰韓)을 고진국(古辰國)의 일부분이라 하면 몰라도 삼한 중 특히 이것만을 고지진국(古之辰國)이라고 함은 결국 요령을 얻기 어려운 설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인하여 위지서적 위략서적의 설에는 찬동할 수 없다.
쪽수▶P20-5 먼저 󰡔魏志󰡕의 설을 評하면, 󰡔魏志󰡕의 소위 ‘辰韓者古之辰國也’의 설은 실상 앞서 말한 󰡔魏畧󰡕의 설을 그대로 承襲함에 不過한 것이지만, 어떻든 이는 上記 󰡔後漢書󰡕의 설과 서로 反對될 뿐 아니라, 같은 󰡔魏志󰡕의 他記事와도 서로 衝▶P21-1突되는 難點을 가지고 있으니, 즉 󰡔魏志󰡕 東夷傳 馬韓條에 月支國等 馬韓 諸國邑을 列擧한 下에 “辰王治月支國”이라 하고, 또 그 아래 弁辰條에 “辰王 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以上의 二句는 앞서도 引用하였지만) “辰王(韓)不得自立爲王 (魏略曰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 “辰王不得自立爲王”의 辰王은 원문주11▶이미 日本 故 那珂通世博士가 指摘한 바와 같이 [11] 辰韓의 誤일 것은, 이 句節 밑에 裵氏 注의 『魏略』에 “明其爲流移之人 故爲馬韓所制”라 하고, 또 󰡔梁書󰡕 東夷傳(新羅條)에는 分明히 “辰韓不得自立爲王 云云”이라 (물론 󰡔梁書󰡕에 이 句節을 新羅條에 入한 것은 후에 말할 바와 같이 잘못된 것이지만) 하였음으로써 알 수 있고, 따라서 馬韓과 辰韓과는 宗屬, 主客의 關係로 되어 있던 것을 了得할 수 있으며, 그 위의 辰王은 旣述한 바와 같이 元來 辰國王의 義로 辰國에 君臨한 所以의 稱呼라고 볼 것이어니와, 이것이 이때 특히 馬韓人에 限하여 世襲되는 것은 馬韓은 本是 古辰國의 正統이요 主體인 때문으로써다. 만일 󰡔魏志󰡕의 설대로 辰韓이 곧 古時의 辰國이라 하면, 辰王은 辰韓에 限한 王이 되어야 할 터인데, 事實은 馬韓의 世襲主로 되어있을 뿐더러 辰韓에는 워낙 自立의 主를 가지지 못하고 도리어 馬韓의 支配를 받았던 것이다. 󰡔魏志󰡕에 정작 이 辰國의 正統인 馬韓을 내놓고 도리어 거기 從屬的 關係를 가진 (自立의 主를 갖지 못한) 저 流移部落의 辰韓을 古之辰國이라고 한 것은 本末을 顚倒한 큰 錯見이라고 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다. 물론 三韓中의 辰韓을 古辰國의 一部分이라 하면 몰라도 三韓 중 특히 이것만을 古之辰國이라고 함은 結局 要領을 얻기 어려운 설로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 인하여 󰡔魏志󰡕 󰡔魏略󰡕의 설에는 贊同할 수 없다.
그러면 후한서서적의 설은 어떠하냐? 후한서서적 동이전(東夷傳)의 기사는 대개 위략서적 위지서적의 것을 습수(襲修)함이 많음에 불구하고, 진국(辰國)에 취(就)하여는 소설(所說)이 위와 같이 크게 다르니, 이는 따로 근거한 바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후한서서적에는 전인(前引) 기사에 계속하여
쪽수▶P21-2그러면 󰡔後漢書󰡕의 설은 어떠하냐? 󰡔後漢書󰡕 東夷傳의 記事는 대개 󰡔魏畧󰡕 󰡔魏志󰡕의 것을 襲修함이 많음에 不拘하고, ▶P22-1辰國에 就하여는 所說이 위와 같이 크게 다르(異)니, 이는 따로 根據한 바가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을까? 󰡔後漢書󰡕에는 前引 記事에 繼續하여
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쪽수▶P22-2馬韓最大 共立其種爲辰王 都目支國 盡王三韓之地
운운(云云)이라고 명언(明言)한 일절(一節)이 있는데, 기(其) 중 진왕(辰王)이 삼한 땅에 다 왕(王)한다는 설은-위지서적에는 이와 같이 분명히 보여있지 아니한 바로-상문(上文)의 “삼한은 다 고시(古時)의 진국(辰國)이라”는 설을 일층 유리하게 한 말 같다. 유리하게 하였다는 것보다도 영(寧)히 차설(此說)의 기초적 견해였는지 모르겠다. 즉 후자는 전자에 의하여 얻은 결론이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辰王......盡王三韓之地”의 설은 또 무엇에 기인한 바인가?
 위지서적에는 지금 말한 대로 이렇게 “盡王三韓之地”라고 명시한 문구는 없지만, 그
래도 이는 위지서적**(한조(韓條))의 타 기사에 의하여 추단(推斷)한 말 같다. 기술(旣述)과 같이위지서적동이전(東夷傳) 마한조(馬韓條)에는 월지국(月支國) 등 소위 마한(馬韓) 오십여 국을 들고, 그 밑에 “辰王治月支國”이라 하고-그 의미는 진왕(辰王)이 월지국(月支國)을 치도(治都)로 하여 이여(爾餘) 오십여 국을 다스린다는 것이고-또 그 아래 변진조(弁辰條)에는 변진(弁辰)(변한(弁韓)) 이십여 국을 들되 변진(弁辰) 이자(二字)를 붙인 자(者) 십여 국과 그것을 붙이지 아니한 자(者) 12국을 혼합 열거한 후에 “其十二國屬辰王”이라고 하였다. 즉 변진조(弁辰條)의 기사는 변진(弁辰) 이십여 국 중 12국만이 진왕(辰王)에 속하였다는 것이니, 후한서서적의 찬자(撰者)는 이 마한변진(馬韓ᆞ弁辰) 양조(兩條)의 기사에 의하여 그러한 추단(推斷)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한다. (단 주의할 것은 재래에는 흔히 이 진왕(辰王)에 속하였다는 12국을 진한(辰韓)의 제(諸) 소국으로 오해하는 동시에 변진(弁辰) 이십여 국을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총합 수로 본 것이니, 이는 위지서적 찬자(撰者)로부터의 큰 오류이다). 마한(馬韓) 오십여 국 중에는 후술할 바와 같이 진한(辰韓) 부락도 포함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거니와, 어떻든 진한(辰韓)은 본래 진국(辰國)(후일 소위 마한(馬韓))의 일부분으로 어느 시기까지는 마한(馬韓)과 한가지 진왕(辰王)의 통치 하에 있었고, 또 변진(弁辰) 이십여 국 중의 12국도 위와 같이 진왕(辰王)에 속하였다고 하였는즉, 이를 범론(汎論)할 때에는 진왕(辰王)이 三韓地(삼한지)에 왕(王)하였다고 하여도 크게 불가함이 없을 것 같으나, 12국 이외의 타 변진(弁辰) 제국(諸國)은 이때 진왕(辰王)에 속하지 아니 하였던 모양인즉, 이를 위지서적의 기사대로 엄밀히 말할 때에는 “盡王三韓之地”라고 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나 오인(吾人)에게는 이러한 상상이 허용된다-즉 위지서적 기사 이전 진국시대(辰國時代)에는 변진(弁辰) 이십여 국도 저 마한(馬韓) 오십여 국(기(其) 중에는 진한(辰韓)도 포함)과 한가지 진왕(辰王)의 통령(統領) 하에 있었던 것이 그 후 진국(辰國)의 통제가 이완됨에 따라 기(其) 중 십여 국은 진국(辰國)의 지배를 벗어나 수 개의 독립국(대가야(大伽耶) 급(及) 금관가야(金官伽耶)와 같은)을 형성하고 오직 12국만이 의연히 구상태(舊狀態)대로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것도 미구(未久)에 독립하여 신라(新羅)와 같은 나라가 생기게 되었지만) 위지서적에 특히 “其十二國屬辰王”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난다. 만일 이것이 허용된다 하면 삼한을 다 고지진국(古之辰國)이라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물론 후한서서적의 찬자가 그러한 사실을 조사하고 한 말인지 혹은 조사는 못하였더라도 그만한 추측을 가지고 이와 같은 결론을 내렸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하여간 후한서서적의 설은 위지서적의 설에 비하여 훨씬 합리적이므로 나는 그 설을 좇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단 이때 삼한의 지역은 위지서적에 보임과 같이 대방(帶方) 남(南)에 있어 동서는 해(海)로써 한하고 남(南)은 왜(倭)와 접하여 방(方)) 사천리가 된다 하였고, 또 대방(帶方)과 한(韓)과의 경계는 필자가 일찍이 이를 금(今) 경기(京畿) 황해(黃海) 양도의 계선(界線)인 예성강(禮城江) 일대에 고증한 일이 있는데 졸고(拙稿) 「진번군고(眞番郡考)」(주(註)2 소재). -한(韓)의 북경(北境)이 이와 같이 진출한 것은 다름 아니라, 전한시대(前漢時代)에 한강(漢江) 이북의 진번군(眞番郡)이 낙랑군(樂浪郡)에 병합되어 군(郡) (진번(眞番))의 남반(南半)이 전혀 폐기됨과 후한말(後漢末)에 이르러 한(韓)이 그 동북의 예(濊)와 함께 강성하게 되었던 것 등에 기인한 바이므로-원래의 한국(韓國)인 진국(辰國)의 북경(北境)은 한사군(漢四郡) 이전 및 그 초기에는 한강(漢江) 일대에 지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때 진국(辰國)의 전 지역은 한강(漢江) 이남의 기호(畿湖), 강원(江原), 영남(嶺南)(영남)의 제(諸) 지방을 포함한 비교적 광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 위만(衛滿)이 조선왕(朝鮮王) 준(準)을 파축(破逐)하고 이에 대신하여 조선(朝鮮) 본토(Proper) 내지 임둔(臨屯), 진번(眞番) 등 근방 제국(諸國)을 영속(領屬)하던 위세를 가지고도 오히려 남으로 진국(辰國)에 대하여는 어찌하지 못하였던 것과, 또 그 후 한무제(漢武帝)가 위씨조선(衛氏朝鮮)을 토멸(討滅)하고 동방에 사군(四郡)을 설치할 시에도 역시 진국(辰國) 방면에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당시 진국(辰國)이 강성하였기 때문이며, 조선왕(朝鮮王) 준(準)이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남으로 한국(韓國) 해중(海中)에 달아 들어와 우거(寓居)한 것이라든지 위씨조선(衛氏朝鮮) 파멸 직전에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 이하 이천여 호가 진국(辰國)에 이주해 온 것이라든지는 다 진국(辰國)이 북으로 유이부족(流移部族)을 받아들일 만한 지리적 위치와 지리적 여지(餘地)에 넉넉하였던 까닭이다. 이는 특히 후에 진한(辰韓) 문제를 해석하는데 큰 관계를 가진 것이므로 미리 주의를 요하는 것이다.
쪽수▶P22-3云云이라고 明言한 一節이 있는데, 其中 辰王이 三韓땅에 다 王한다는 설은-󰡔魏志󰡕에는 이와 같이 分明히 보여있지 아니한 바로-上文의 “三韓은 다 古時의 辰國이라”는 설을 一層 有理하게 한 말 같다. 有理하게 하였다는 것보다도 寧히 此說의 基礎的 見解였는지 모르겠다. 즉 後者는 前者에 의하여 얻은 結論이었는지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辰王……盡王三韓之地”의 설은 또 무엇에 基因한 바인가? 󰡔魏志󰡕에는 지금 말한 대로 이렇게 “盡王三韓之地”라고 明示한 文句는 없지만, 그래도 이는 󰡔魏志󰡕(韓條)의 他 記事에 의하여 推斷한 말 같다. 旣述과 같이 󰡔魏志󰡕 東夷傳 馬韓條에는 月支國等 소위 馬韓五十餘國을 들고, 그 밑에 “辰王治月支國”이라 하고-그 意味는 辰王이 月支國을 治都로 하여 爾餘 五十餘國을 다스린다는 것이고-또 그 아래 弁辰條에는 弁辰(弁韓) 二十餘國을 들되 弁辰 二字를 붙인 者 十餘國과 그것을 붙이지 아니한 者 十二國을 混合 列擧한 後에 “其十二國屬辰王”이라고 하였다. 즉 弁辰條의 記事는 弁辰 二十餘國 중 十二國만이 辰王에 속하였다는 것이니, 󰡔後漢書󰡕의 撰者는 이 馬韓ㆍ弁辰 兩條의 記事에 의하여 그러한 推斷을 내린 것이 아닌가 한다. (단 注意할 것은 在來에는 흔히 이 辰王에 속하였다는 十二國을 辰韓의 諸小國으로 誤解하는 同時에 弁辰 二十餘國을 弁韓 辰韓의 總合數로 본 것이니, 이는 󰡔魏志󰡕 撰者로부터의 큰 誤謬이다). 馬韓 五十餘國 중에는 後述할 바와 같이 辰韓 部落도 ▶P23包含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거니와, 어떻든 辰韓은 본래 辰國(後日 소위 馬韓)의 一部分으로 어느 時期까지는 馬韓과 한가지 辰王의 統治下에 있었고, 또 弁辰 二十餘國 중의 十二國도 위와 같이 辰王에 속하였다고 하였은즉, 이를 汎論할 때에는 辰王이 三韓地에 王하였다고 하여도 크게 不可함이 없을 것 같으나, 十二國 以外의 他 弁辰 諸國은 이때 辰王에 屬하지 아니 하였던 모양인즉, 이를 󰡔魏志󰡕의 記事대로 嚴密히 말할 때에는 “盡王三韓之地”라고 하여서는 아니될 것이다. 그러나 吾人에게는 이러한 想像이 許容된다-즉 󰡔魏志󰡕 記事 以前 辰國時代에는 弁辰 二十餘國도 저 馬韓 五十餘國(其中에는 辰韓도 包含)과 한가지 辰王의 統領下에 있었던 것이 그 후 辰國의 統制가 弛緩됨에 따라 其中 十餘國은 辰國의 支配를 벗어나 數個의 獨立國(大伽耶 及 金官伽耶와 같은)을 形成하고 오직 十二國만이 依然히 舊狀態대로 있었기 때문에 (물론 이것도 未久에 獨立하여 新羅와 같은 나라가 생기게 되었지만) 󰡔魏志󰡕에 특히 “其十二國屬辰王”이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推測이 난다. 만일 이것이 許容된다 하면 三韓을 다 古之辰國이라고 하여도 無妨할 것이다. 물론 󰡔後漢書󰡕의 撰者가 그러한 史實을 調査하고 한 말인지 혹은 調査는 못하였더라도 그만한 推測을 가지고 이와 같은 結論을 내렸는지는 仔細히 알 수 없으나, 何如間 󰡔後漢書󰡕의 說은 󰡔魏志󰡕의 說에 比하여 훨씬 合理的이므로 나는 그 설을 좇은 지 이미 오래되었다. 단 이때 三韓의 地域은 󰡔魏志󰡕에 보임과 같이 帶方 南에 있어 東西는 海로써 限하고 南은 倭와 接하여 方 四千里가 된다 하였고, 원문주12▶또 帶方과 韓과의 境界는 筆者가 일찍이 이를 今 京畿 黃海 兩道의 界線인 禮城江 一帶에 考證한 일이 있는데 [12]-韓의 北境이 이와 같이 進出한 것은 다름 아니라, 前漢時代에 漢江 以北의 眞番郡이 樂浪郡에 倂合되어 郡 (眞▶P24-1番)의 南半이 전혀 廢棄됨과 後漢末에 이르러 韓이 그 東北의 濊와 함께 强盛하게 되었던 것 등에 基因한 바이므로-元來의 韓國인 辰國의 北境은 漢四郡 以前 및 그 初期에는 漢江 一帶에 지나지 못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때 辰國의 全 地域은 漢江 以南의 畿湖, 江原, 嶺南의 諸地方을 包含한 比較的 廣大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저 衛滿이 朝鮮王 準을 破逐하고 이에 대신하여 朝鮮 本土(Proper) 내지 臨屯, 眞番等 近傍 諸國을 領屬하던 威勢를 가지고도 오히려 南으로 辰國에 대하여는 어찌하지 못하였던 것과, 또 그 후 漢武帝가 衛氏朝鮮을 討滅하고 東方에 四郡을 設置할 時에도 역시 辰國 方面에 손을 대지 못하였던 것은 무엇보다도 當時 辰國이 强盛하였기 때문이며, 朝鮮王 準이 衛滿에게 쫓기어 南으로 韓國海中에 달아 들어와 寓居한 것이라든지 衛氏朝鮮 破滅 直前에 朝鮮相 歷谿卿 以下 二千餘戶가 辰國에 移住해 온 것이라든지는 다 辰國이 北으로 流移部族을 받아들일 만한 地理的 位置와 地理的 餘地에 넉넉하였던 까닭이다. 이는 특히 후에 辰韓問題를 解釋하는데 큰 關係를 가진 것이므로 미리 注意를 요하는 것이다.
진국(辰國)의 기원, 왕통, 정치의 조직 여하에 관하여는 가고(可考)할 문헌이 인멸하여 여간 유감이 아니나, 진국(辰國)의 존현(存現)은 이미 지나(支那)의 전국시대(戰國時代) 경부터 있었던 것 같고, 그 정치적 조직은 위지서적에 나타나는 삼한의 그것을 참고하여 보면, 중앙에 최고지배자인 진왕(辰王)이 있어 목(월)지국(目(月)支國)을 치소로 삼고, 그 통할(統轄) 지역 내에는 다수(多數)한 반자치적 부락으로 분형(分形)되어 대부락에는 ‘신지(臣智)’(혹운(或云) 진지렴(秦支廉)), 소부락에는 ‘읍차(邑借)’ ‘험측(險側)’ ‘번예(樊濊)’(혹운(或云) 불예(不例) ‘살해(殺奚)’ 등의 거수(渠帥)가 있어 각기 지방을 다스렸던 것이니, 말하자면 합중부락국가(合衆部落國家)로 세습적 최고지배자를 가졌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쪽수▶P24-2辰國의 起源, 王統, 政治의 組織 如何에 관하여는 可考할 文獻이 湮滅하여 如干 遺憾이 아니나, 辰國의 存現은 이미 支那의 戰國時代頃부터 있었던 것 같고, 그 政治的 組織은 󰡔魏志󰡕에 나타나는 三韓의 그것을 參考하여 보면, 中央에 最高支配者인 辰王이 있어 目(月)支國을 治所로 삼고, 그 統轄地 域內에는 多數한 半自治的 部落으로 分形되어 大部落에는 ‘臣智’(或云 秦支廉), 小部落에는 ‘邑借’ ‘險側’ ‘樊濊’(或云不例) ‘殺奚’ 등의 渠帥가 있어 各其 地方을 다스렸던 것이니, 말하자면 合衆部落國家로 世襲的 最高支配者를 가졌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진(辰)’이란 칭호의 의의(意義)에 있어서도 이를 고징(考徵)할 문헌이 없고, 순 언어상으로 오랫동안 생각하여 보았으나 아직 좋은 결안(結案)을 얻지 못하였다. 혹 어떤 사람은 진국(辰國) 거수(渠帥)의 칭에 신지(臣智)란 것이 있음을 고려로 삼아 진(辰)과 신(臣)은 서로 상통할 수 있는 음인즉, 진국(辰國)은 즉 신지국(臣智國)의 의(義)가 아닌가 하는 이도 있지만, 이에 대하여는 썩 찬성하기 어렵다. 하여간 진국(辰國) 칭호에 관하여는 후고(後考)에 맡기어 둔다.(미완)
쪽수▶P25-1 '辰’이란 稱號의 意義에 있어서도 이를 考徵할 文獻이 없고, 純言語上으로 오랫동안 생각하여 보았으나 아직 좋은 結案을 얻지 못하였다. 혹 어떤 사람은 辰國 渠帥의 稱에 臣智란 것이 있음을 考慮로 삼아 辰과 臣은 서로 上通할 수 있는 音인즉, 辰國은 즉 臣智國의 義가 아닌가 하는 이도 있지만, 이에 대하여는 썩 贊成하기 어렵다. 何如間 辰國 稱號에 관하여는 後考에 맡기어 둔다.(未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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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東國地理志』 「三韓에 關한 按說」 及 『東史纂要』 後叙 參照.
  2. 『史學雜誌』 第40編 第5號 「眞番郡考」, 同誌 第41篇 第4號 及 第5號 「玄菟郡 及 臨屯郡考」 및 『靑丘學叢』 第13號 「浿水考」.
  3. 『史學雜誌』 第40編 第5號, 1929.
  4. 同 第41編 第4號~第5號, 1930.
  5. 『日韓古史斷』 154面〜155面.
  6. 拙稿 「眞番郡考」(註1 所載)
  7. 『我邦彊域考』卷3.
  8. 雜誌 『朝鮮』 第176號
  9. 『三國史記』 地理志에 의하면, 百濟 地名 중에 ‘所力只’(全州 西北), ‘仇只山’(金溝), ‘只伐只’(高山) ‘古祿只’(靈光 東北), ‘奴只’(光州), ‘多只’(咸平 東北), ‘豆夫只’(同福), ‘奴斯只’(儒城), ‘豆仍只’(燕岐), ‘伐首只’(唐津), ‘屈支’(昌平), ‘栗支’(潭陽 東北), ‘菓支’(玉果), ‘遁支’(順天 北), ‘伐音支’(公州 西)等의 地名이 보임.
  10. 『三國志』 魏志 東夷傳 三韓條.
  11. 『朝鮮古史考』 第11章 三韓考.
  12. 拙稿 「眞番郡考」(註1 所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