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명익(SNU24-1)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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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1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 곽수민(PNU2024)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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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익(崔明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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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nks.ac.kr/Word/View.aspx?id=1001
 
한글명 최명익 한자명 崔明翊 영문명 Choe Myongik 가나명 チェ・ミョンイク 이칭 유방(柳坊)
성별 생년 1903년(고종40) 7월 15일년 몰년 1972년 10월 3일년 출신지 평안남도 평원군 전공 평양보통고등학교~이후 일본유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최명익은 해방 이전에는 모더니즘 작가로 활동하였고 해방 이후에는 북한 문예정책에 부합한 사회주의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과 역사소설을 창작하였다. [1]


생애


생애

최명익은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태어나 1916년 평양보통고등학교에 입학했다. 1921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으며, 1923년 돌아와 1928년경부터 유방(柳坊)이라는 필명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북한 최초의 문화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회장직을 맡았다. 1946년 이후, 최명익은 점차 공산주의자의 길을 걸으며 1956년 「서산대사」, 1961년 「임오년의 서울」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 부르주아였던 전력이 문제시되어 숙청되었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2]


문학활동

최명익은 1928년 홍종인(洪鍾仁) · 김재광(金在光) · 한수철(韓壽哲) 등과 함께 동인지 『백치(白雉)』를 발간하였으며, 유방이라는 필명으로 「희련시대」, 「처의 화장」을 발표했다. 1937년에는 동인지 『단층(斷層)』을 유항림(兪恒林) · 김이석(金利錫) 등과 함께 주관하였다. 그가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 것은 1936년 『조광(朝光)』에 단편소설 「비오는 날」을 발표하고부터로, 광복 전에 중편 · 단편 소설 10편 정도를 발표하였으며,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장삼이사(張三李四)』라는 창작집을 발간하였다.[3]


소설가로써의 평가

그는 1930년대 지식인 소설의 대표적인 작가로, 이상(李箱)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심리소설의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된다. 그의 소설에는 무력증과 자의식의 과다에 매몰된 지식인과 속악하다고 할 수 있는 대중적 삶을 사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두 유형의 인물 대비를 통하여 1930년대의 지식인의 무기력과 절망감 · 소외의식을 강하게 형상화하려고 시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결국, 그는 ‘어떻게 살아야 인간은 후회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까?’ 하는 과제를 추구한 소설가라 할 수 있다.[4]


예술단체의 회장과 중앙상임위원 역임 시기

최명익은 1945년 평양의 문예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의 회장을 역임하였으나, 당시까지는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945년 12월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한국의 신탁통치가 결정되고, 1946년 김일성이 북한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부터 점차 공산주의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46년 3월 출범한 북조선문학예술총연맹 중앙상임위원과 평안남도 위원장을 맡았으며, 1946년 말에 이루어진 건국사상총동원운동에 호응하여 직접 함경도 성진구역으로 파견을 가기도 했다. 해방 후 그의 두 번째 소설 작품에 해당하는 「마천령」은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글이다. 최명익은 1972년 숙청된 이후, 김정일이 1984년 최명익의 유고작인 「이조망국사」를 완성하도록 조치함으로써 복권되었다. 이후 1993년에는 「서산대사」와 「임오년의 서울」이 북한에서 다시 출판되었다.[5]






연구


활동과 집필한 소설들(1930~1960)

최명익은 193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945년 9월에 북한의 순수문학 단체인 평양예술문화협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46년에는 북조선예술총동맹 산하 단체인 북조선문학동맹의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이후 북조선예술총동맹에서 활동하였다. 최명익은 문인들과 평양문화인협회를 결성한 뒤 희곡 <무대 뒤>(1945)를 창작하고 어린이 잡지인 『평양아동문화사』, 『어린동무』 등을 창립하고 편집하였다. 이후 문예총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45년부터 1956년 사이에 북한 국어교과서 『우리말』을 책임 집필하여 완성하였다. 조선작가동맹 결성 후에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소설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해방 후 토지개혁 주제인 <맥령>(1946)을 비롯하여 <담배 한 개>(1946), <제1호>(1946), <남향집>(1948), <공등풀>(1949), <기계>(1947, 48) 등과 성진 적색농조원들의 투쟁을 다룬 <마천령>(1947)을 창작하였고 6.25 전쟁에 관한 <조국의 목소리>(1951), <기관사>(1951), <소년 권동수>(1952) 등을 발표하였다. 이후 그는 1957년에 항일무장투쟁 참가자들의 회상기 집필에 참여하였고 평양문학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전후 그는 역사소설 창작에 힘을 기울여 <섬월이>(1963), <임오년의 서울>(1961), <서산대사>(1961) 등을 창작하였다. 이외에 『고주몽』, 『지리학자 김정호』 등의 역사 이야기와 수필집 『글에 대한 생각』(1964)을 집필하였다.[6]


숙청 이후

북한 문단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최명익은 전쟁 직후 ‘부르주아 잔재의 작가’로 비판받았으며 1960년대 중반에 숙청을 당하면서 문단 중심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는 1984년 2월 14일에 작가대열에서 제외되었지만 김정일은 그의 유고작품인 『리조망국사』를 완성하도록 조치를 취하였고 1993년에 역사소설 『서산대사』와 『임오년의 서울』을 재판하도록 하였다. 최명익은 해방 이전에는 식민지 시대에서 근대를 맞이하는 지식인의 자의식과 남녀 갈등을 심리주의 기법으로 형상하여 1930년대 후반기 심리소설의 대표자로 불렸다. 해방 이후에는 북한 문예정책에 부합하는 사회주의 사실주의 창작방법에 충실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역사소설을 통해 민중의 주체성과 혁명성, 애국주의를 발현한다.

[7]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종인,김재광,한수철 Institution: 최명익의『백치(白雉)』함께발간 isRelatedTo
Person: 최명익 Institution: 평양예술문화협회 A isMemberOf B
Person: 최명익 Group: 북조선문학동맹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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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20세기 북한예술문화사전 http://www.nks.ac.kr/Word/View.aspx?id=100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7291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