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기

North Korea Humanities

김나경(C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2일 (수) 01:06 판 (초기 생애 및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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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李秉岐)
이병기.jpg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글명 이병기 한자명 李秉岐 영문명 Lee Byungki 가나명 이칭 가람(嘉藍)
성별 남성 생년 1891(고종 28)년 몰년 1968년 출신지 전라북도 익산 전공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해방 이후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을 저술한 학자. 시조시인.


생애


초기 생애 및 교육

이병기는 1891년 3월 5일,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에서 변호사 이채(李倸)의 1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 16세까지 이병기는 할아버지 이동우(李東愚)의 뜻에 따라 고향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평범한 학동으로 지냈고, 1906년에 결혼하였다. [2] 그즈음에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량치차오[梁啓超][1873~1929]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을 우연히 접한 이병기는 신학문에 뜻을 세우고 전주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에 관립한성사범학교를 졸업하면서 주시경의 조선어문법 수업을 받았다 . 이러한 교육은 그의 기초 학문적 소양을 쌓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3]


교사 생활과 초기 활동

1913년부터 남양, 여산 등의 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고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 1921년에는 권덕규, 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발기, 조직하여 한글 강의를 펼쳤고, 1926년에는 ‘시조회’를 발기하였다 . 이병기는 시조 부흥과 혁신을 위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며 활동하였다.


시조 혁신 및 학문적 업적

1920년 첫 문학작품 「수레 뒤에서」를 발표한 후, 시조 부흥론이 일기 시작한 1924년 무렵부터 시조에 관심을 보였다. 1926년 무렵부터 시조 혁신에 자각을 가지고 다양한 논문을 발표하였다. 주요 논문으로는 「시조는 혁신하자」, 「시조란 무엇인가」 등이 있으며, 『동아일보』의 시조 모집을 통해 신인들을 발굴하여 시조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1939년 『가람시조집』을 출간하며 자연 관조와 순수서정의 시조를 발표했다. 6·25 이후에는 사회적 관심을 반영한 작품들을 발표하며 현대시조의 새로운 일면을 개척했다.


서지학 및 국문학 분야의 업적

시조 외에도 서지학과 국문학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고전작품 발굴과 소개에 큰 공로를 세웠으며, 주요 발굴 작품으로는 「한중록」, 「인현왕후전」, 「요로원야화기」, 신재효의 판소리 작품 등이 있다. 또한, 많은 수필과 일기를 남겼으며 주요 저서로는 『가람시조집』, 『국문학개론』, 『국문학전사』, 『가람문선』 등이 있다. 학술원 추천회원을 거쳐 1960년 학술원 임명회원이 되었으며, 서울대학교 교수로 활동하다 1956년 정년퇴임하였다.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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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디지털익산문화대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2. 디지털익산문화대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