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시형

North Korea Humanities

최환서(C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11일 (화) 19:46 판 (Triple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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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시형(朴時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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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858709&cid=58050&categoryId=58069
 
한글명 박시형 한자명 朴時亨 영문명 Park Si Hyung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10년 몰년 2001년 출신지 경상북도 문경군 전공 사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박시형 박사는 북한 역사학 발전에 지대한 공로를 세운 최고 권위자이다. 그는 동명왕릉과 안학궁 발굴 및 정리, 단군릉·동명왕릉·왕건왕릉 개건사업에 참가해 한반도 북부 지역의 고대사와 중세사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김에 따라 남한에도 널리 알려진 학자다.


생애


출생부터 해방이전 일제 강점기

박시형은 1910년 1월 16일에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 하리에서 태어났다. 문경공립보통학교와 경성 제2공립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그 후 지품보통학교 부설 간이학교에서 훈도로 약 10년간 근무한 뒤에 1937년 4월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에 선과생으로 입학했다. 1940년 3월에 졸업했으며 이듬해 [진단학보] 14호에 「이조 전세제도의 성립과정」을 발표하여 연구자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논문에서는 간접적으로 언급될 뿐이지만, 박시형의 주장은 일제가 창출한 조선토지제도론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박시형은 공법의 효용과 연속성을 실증적으로 증명하고 봉건적 토지국유의 실체를 강조함으로써 총독부 및 와다의 식민주의에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박시형은 아직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경성제대에서 배운 실증주의적 방법론만으로는 일제 식민사학의 프레임을 넘어설 수 없었다.


해방 이후 식민사관에 맞서다

해방된 이후에야 박시형은 식민사학을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방법론을 획득할 수 있었다. 유물사관이었다. 박시형은 1945년 10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고 경성경제전문학교에서 교원을 지내고 있었는데, 1946년 8월 어느 날 “문득 평양에서 찾아온 어떤 일꾼”으로부터 김일성이 그를 초대했다는 소식을 전달받는다. 그리고 9월 1일부터 신학기를 시작할 예정이었던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일하기 위해 8월 17일 밤, 경성제대 동기였던 김석형, 김수경과 함께 “반바지에 등산모 차림으로 몰래 38도선을 넘어서 입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연구를 재개한 박시형은 우선 기존의 지론을 재단장한다. 1948년 [력사과학] 4호에 게재한 「리조 초기의 전제: 경국대전 전제 제조(諸條)의 연구」에서 박시형은 조선 초기에 봉건적 토지국유의 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으나, 일부 귀족들에게 토지소유가 집중된 까닭에 일반 농민들은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고 논한다. 1941년에 작성한 「이조 전세제도의 성립과정」에서 내린 결론과 유사하다. 하지만 같은 내용이더라도 토지제도의 문란이 식민지라는 현실로 귀결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토지개혁이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 진보적이고 혁명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서사가 될 수 있었다.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北역사학계의 거두가 되다

‘조선역사’ ‘조선고대중세사’ ‘조선사사료학’ ‘조선력사사료강독’ 등 역사교과서들과 ‘광개토왕릉비’ ‘발해사’ ‘조선토지제도사’(상·하) ‘17세기 이후 우리나라 봉건사회의 몇개 부문 학문유산’(1∼9권) 등 수많은 저서를 집필했다. 이러한 공로로 북한 최고 학위인 역사학 원사(1952), 교수학직(1949), 박사학위(1949)를 받은 데 이어 ‘김일성상’(1972), ‘노력영웅’칭호(1996) 등 많은 명예칭호와 훈장을 받기도 했다. 46년 8월 월북한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교수로, 53년부터 과학원역사연구소 소장, 57년 1월부터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으로 근무했다. 이어 61년부터 김일성종합대학 역사학부 강좌장(학과장)을 지냈으며 76년부터 사망 전까지 연구사로 일해왔다.





연구


발해사 연구에 몰두하다

박시형은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점과 당에 대해 치열하게 투쟁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로 인해 당과 손을 잡고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화되었고,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병립하는 남북국시대론이 형성되었다. 이는 민족사의 체계와 정통을 신라가 아닌 발해에 두려는 시도였다. 1962년의 박시형 논문 이후, 고고학과 민속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발해사 연구가 이루어졌고 그 역사와 문화의 독자성이 부각되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주체의 력사관’이 학계에 영향을 끼치면서 발해사 연구의 이러한 측면은 더욱 강해졌다. 신라의 통일 혹은 통합이라는 표현조차 사라지고 전기신라, 후기신라라는 개념이 등장했으며,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다고 간주된 고려의 건국이 사상 최초의 통일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는 과거 신채호가 제기했던 역사 인식을 더욱 전개·발전시킨 측면을 지니고 있었는데, 여기서 발해를 민족의 역사로 적극적으로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통일이 가진 의미 역시 부정하지 않았던 남한 역사학계와 큰 차이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발해 및 남북국시대를 둘러싼 이러한 남북 역사학의 인식 차이는 통일보다는 분단을 고착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되었고, 양자의 견해를 종합하기 위한 방법이 모색되기도 했다. 그러나 발해의 왕실 및 지배집단을 고구려인으로 단정하여 민족사에 포섭시키는 점에서 남북한의 역사학은 거의 일치한다고 볼 수 있으며, 현실의 대내적·대외적 정치 상황을 발해에 투사하는 점도 유사하다. 따라서 박시형을 비롯한 북한의 발해사 연구를 남한도 포함하여 총체적으로 검토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역사학이 공통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일이 먼저 필요할 것이다. 박시형과 북한의 발해사 연구를 진정 사학사 연구의 대상으로 설정하고 분석하기 위해서는 남북한 역사학의 근저에 있는 것을 직시하는 한편 철저한 자기 검증 및 비판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시형 Institution: 지품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시형 Institution: 경성제국대학교 A worksAt B
Person: 박시형 Group: 조선공산당 A isMemberOf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