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명희(SNU24-1)

North Korea Humanities

박한별(C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5월 30일 (목) 20:3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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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명(한자명)
홍명희 사진.png
출처 : 네이버 나무위키
 
한글명 홍명희 한자명 洪命憙 영문명 Hong Myeong Hee 가나명 이칭 벽초(碧初)
성별 남성 생년 1888년 5월 23일년 몰년 1968년 3월 5일 (향년 79세)년 출신지 조선 충청도 괴산군 일도면 동부리(현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 450-1번지) 전공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일제강점기의 소설가, 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이자 북한의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이다.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의 3대 천재'로 알려진[5] 인물로 실제로 셋은 죽마고우였으며 홍명희는 이 중 유일하게 친일로 변절하지 않았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렸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6.25 전쟁 당시 이광수가 납북되자 신변을 보호해주었으며 이광수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생애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홍명희는 충청도 괴산군 괴산읍 동부리(괴산 홍범식 고가)에서 출생하였으며[3], 근처 제월리로 이주했으며 지난날 한때 충청도 괴산군 증평면 증평리에서도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다. 제월리에는 그의 일가가 살던 생가가 존재하고 있다.[3]

그의 가계는 풍산 홍씨로 선조와 인목왕후의 딸인 정명공주(貞明公主)와 남편 영안위 (永安尉) 홍주원(洪柱元, 1606~1672)의 차남 홍만형(洪萬衡, 1633~1670)이 그의 10대조이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친정인 홍봉한, 홍인한 형제는 홍주원의 장남 홍만용(洪萬容, 1631~1692)의 증손이고, 방계 선조들 중에는 정조 때의 세도재상 홍국영도 있다. 또한 다산 정약용의 처가 역시 그의 집안의 방계 혈족들이었다. 고모 홍정식은 독립운동가 조완구의 아내이기도 했다.[1]

홍명희의 증조부 홍우길은 장원급제후 대사헌, 예조판서 이조판서를 지냈고, 할아버지 홍승목은 정2품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조선총독부가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인 금산군수 홍범식은 한일합방에 분개하여 자결한다. 어려서 생모를 잃고, 아버지 홍범식은 조씨와 재혼했으며, 계모 조씨에게서 이복 동생들이 태어났다.

생모 은진 송씨(恩津 宋氏, 1871~1890)는 군수 송은로(宋殷老)의 딸로, 송시열과 함께 서인의 영수였던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9대손이다. 외숙 송종면(宋鍾冕, 1866~?)도 문과 급제자였다.

1900년에 참판 민영만(閔泳晩, 1863~1916)의 딸 여흥 민씨(驪興 閔氏, 1885~1953)와 결혼하였다. 장인 민영만은 고종(高宗, 1852~1919)의 외조부 민치구(閔致久, 1795~1874)의 형 민치대(閔致大)의 손자이며, 민선호(閔璿鎬)의 아들이다.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 閔氏)나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집안과도 그리 멀지 않다.


학창시절과 독립운동 활동

1901년부터 1906년 일본으로 가기 전까지 중경의숙에서 학문을 공부하고 문학에 처음 접함. (부친은 법학을 하길 바랬으나 문학을 더 좋아함.)

그는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일본의 다이세이 중학(大成中學)에서 수학하였다.


1910년 8월 29일 그의 아버지 홍범식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경술국치에 치욕을 느껴 자결하였다. 당시 일본에서 공부하던 홍명희는 아버지의 자결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학업을 포기하고 조선에 돌아온다. 그가 부친상 중인 1911년 4월에 일본 문예지에 게재한 일본어 단편 소설 "유서"가 근래 발굴되었다.

그는 항일의식을 자결로 실천한 아버지가 남긴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하지 말고 저항하라'는 유언을 그대로 받들어 실천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괴산에서 충청북도 최초로 참여하였다. 상하이로 건너가서는 이광수를 다시 만나기도 했다. 이때 그는 이광수와 친밀하게 지내며 그에게 톨스토이를 권했다고도 한다. 홍명희는 조소앙, 이광수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계속하였는데, 이광수는 '도저히 상하이 생활을 못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귀국길에 오른다. 하지만 홍명희는 이광수를 버리지는 않았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 교장 근무, 아들 홍기문과 함께 참여한 신간회 결성등의 업적도 남겼다.

아들 홍기문의 증언에 의하면 맑스주의를 공부한다며 원서를 읽고,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 1879~1946)와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1880~1958) 등의 책을 사서 보기도 했다고 한다.[16] 또 1920년대 중반에는 조선 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가 출당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가 적극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한 적은 없는 것 같지만, 상당히 우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은 것은 사실로 보인다.

1927년 《현대평론》이 창간되자, 그 창간호에 이관용(李冠鎔)·안재홍·김준연·이순탁(李順鐸)·백남운(白南雲)·이긍종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1928년 11월 21일 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을 비롯해 1930년대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소설 임꺽정은 '살아 있는 최고의 우리말사전'이라 불리었는데, 임꺽정 저자 홍명희의 투옥과 개인 사정 등으로 연재가 4차례 중단됐으며,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는 '조광'에 발표됐다. 1940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못 이겨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던 소설 '임꺽정'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칩거, 은둔생활을 지냈다.

1941년에 임전대책협의회(臨戰對策協議會), 1945년에는 언론보국회(言論報國會)에 이광수(李光洙, 香山光郞), 최남선(崔南善) 등과 나란히 참여하여, 그도 친일 시비에서 완전히 자유롭기는 어렵다.


'광복 이후

제목3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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