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식

North Korea Humanities

조유빈(P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5월 29일 (수) 15:42 판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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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식(印貞植)
인정식.jpg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글명 인정식 한자명 印貞植 영문명 Jeong-Sik In 가나명 이칭 김영호, 김수삼, 김광수
성별 생년 1907년 몰년 미상년 출신지 평안남도 용강 전공 경제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인정식(印貞植, 일본식 이름: 桐生一雄 기류 이치오)[1] 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친일 공산주의 이론가이다. 호는 엽풍(燁豊)이다. 일제강점기 동안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으나,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파로 변절, 이후 친일 이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해방정국에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 가입하여 마르크스주의 학술운동 등에 활동하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전향하여 국민보도연맹 주요 간부로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때 부인과 딸을 남쪽에 남긴 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월북하여 북조선 농림상 장관을 맡았다.


생애


생애 초기

1907년 3월 17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소작을 주면서 직접 농사도 지어 당시로서는 부농에 속하는 편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자인 조부가 개설한 시열재(時說齋)에서 천자문 등의 한학을 배우고 광량만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인 1917년 세살 위인 노미석과 중매로 결혼했다. 1921년 3월 평양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1925년 일본에 건너가 1926년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했으나, 1929년 11월, 경제학부 학사 학위 취득 예정을 3개월 앞두고 자퇴했다.


공산주의 활동

1927년 9월 고려공산청년회 일본총국에 가입하여 일본지회 소속으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1928년 6월부터 제 고려공상당청년회 일본부 조직위원으로 활동하며 <조선청년> <레닌주의>등의 간행 일을 맡아했다. 1929년 5월 일제의 치안유지법에 의거하여 사회주의 사상 탄압을 대대적으로 개시하면서 이를 피해 국내로 귀국하였으나 6월 말 경기도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고, 서대문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다 1934년 가출옥했다. 출옥직후 고향에서 독서회를 조직하고 야학을 개설하고, 청소년과 농민들에게 민족의식, 공산주의를 고취하는데 힘썼다. 이후 1935년에 경성부로 상경하여 중앙일보사로 입사한 뒤 조선농업경제에 관한 다수의 평론을 발표했고 박문병과의 농업문제 논쟁을 거치며 대표적인 좌파 성향의 농업경제학자로 유명해졌다.


친일행적

1938년 4월 공화계 야학 사건의 주모자로 검거되었다. 같은 해 말 사상전향을 서약하고 석방되었고, 이후 1945년 8월 광복이 되는 시점까지 일제에 적극 협력하며 친일 이론가, 학자로 활동했다. 인정식이 풀려난 직후 1938년 월간지 <삼천리> 11월호에 친일논설을 기고한 이후 다음달 12월에는 부민관에서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여하였다. 당시 인정식의 발언은 내선일체 문제를 고찰할 때 "조선인의 행복과 번영을 중심적인 입각점으로 삼아야 한다."면서도, "현실을 직시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인정식은 이후 친일전향 단체 대화숙에서 활동하며 내선일체 이론가로서 <동양지광> 등을 통해 기고 활동을 벌였다.


광복이후

광복 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일제의 토지조사 사업을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파악하는 논문 등을 발표했다.[2] 1947년 반헌영 체포령 해제를 요청하기 위해 농민 대표들이 미소공동위원회를 방문했을 때 전국농민조합연맹 대표자격으로 동행했다. [3] 1949년에는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여 '남로당노선 비판기' 등 논문을 쓰며 적극적으로 보도연맹 활동을 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북조선으로 갔다. 이후 인정식은 북조선에서의 활동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연구


농업문제에 대한 연구

인정식은 당시의 농업연구를 '민족주의 학파'와 '과학적 입장에 입각한 학파'로 구분하고 전자는 "극도로 소극적이고 개량주의적인 것에 불과"하며 그 이데올로기와 농촌 궁핍의 실천적 해결방도에 있어서 관료적인 농촌정책과 꼭 닮은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한 인정식은 <안창호론>에서도 흥사단, 동우회 등의 문화,교육주의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다. 인정식은 이런 민족주의 계열에 대비해서 농촌의 수취관계, 특히 소작제와 그에 따른 고율지대를 핵심으로 보고 철저하게 이 입장을 발전시켜 나갔다.


30년대 농촌 자연경제 규정

인정식은 일제 때 토지조사사업이 자본주의화를 위한 첫 걸음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봉건적 소유관계를 근대적으로 가장한 데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당시 조선 농촌이 가장 본질적인 생산과정에서는 봉건적 = 농노적으로 된 관계에 있다고 보고, 자연적 조건에 의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정체성의 기초 아래 30년대 조선 농촌경제를 '자연경제'로 규정하고 고율의 기아지대로 말미암아 이의 확대,심화가 이루어지고 있어 자본주의적 발전의 길이 저지되고 있다고 보았다.


농민에 대한 신뢰와 애정

인정식이 봉건지대에 기초한 연구의 경향으로 흐른 것은 농업연구가로서 실증적인 현장조사를 한 결과 농업인구의 1할만이 춘궁기에 미곡을 먹을 수 있는 당시의 농촌현실이 소작료 때문이라고 직접 파악했던 데 근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가 1939년 <인문평론>에 쓴 '농민문학'에 관한 글은 문화적 소양만이 아니라 농민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인정식 Institution: 일본호세이대학 A dropout B
Person: 인정식 Institution: 동국대학교 A worksAt B
Person: 인정식 Group: 인병선 A hasdaughter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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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850쪽쪽.
  2. 최영창 기자 (1997년 4월 28일). “근대 土地소유권 확립시기 논란”. 문화일보.
  3. 임경석 (2004년 4월 15일). 〈제3부 북한에서 -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국면〉. 《이정 박헌영 일대기》. 서울: 역사비평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