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혜숙

North Korea Humanities

강태희(KNU2025)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12월 4일 (목) 13:38 판 (→‎출생 및 학창시절)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강태희(KNU2025))이 작성했습니다.




복혜숙(卜惠淑)
복혜숙.jpeg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732>
 
한글명 복혜숙 한자명 卜惠淑 영문명 가나명 이칭 마리(馬利)
성별 여 생년 1904년 몰년 1982년 출신지 충청남도 대천 전공 영화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복혜숙은 1919년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6세에 일본에 건너가 요코하마기예학교(橫濱技藝學校)에 들어갔으며, 이 시기에 많은 영화와 연극을 보고 배우가 될 꿈을 갖게 되었다. [1] 귀국한 뒤 1920년 당시 단성사의 인기 변사인 김덕경(金悳經)의 소개로 김도산(金陶山)을 알게 되어 신극좌(新劇座)에 입단하여 신극좌의 「오! 천명(天命)」에서 처음 무대에 서고, 1922년에는 극단 토월회(土月會)에 입단하였으며,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 ·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만년에는 배우극장(俳優劇場)에 입단하여 연기생활을 계속하였다.[2] 최초로 영화에 출연한 것은 이규설(李圭卨) 감독의 「농중조(龐中鳥)」(1926)이었으며, 그 뒤 이구영(李龜永) 감독의 「낙화유수」(1927), 이규설 감독의 「순정은 신과 같다」(1928), 김영환(金永煥) 감독의 「세 동무」(1928), 박기채(朴基彩) 감독의 「춘풍 春風」(1935), 안종화(安鍾和) 감독의 「역습」(1936), 최인규(崔寅奎) 감독의 「수업료」(1940), 신경균(申敬均) 감독의 「감격시대」(1943) 등이 광복 전의 주요 출연작품이다. [3] 광복 후에는 최인규 감독의 「자유만세」(1946)에 출연한 것을 시작으로 198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그는 연극 · 영화 등에서 온후하고 다정한 연기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만년에는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출연하였다. 연기 활동 외에도 한국영화배우협회 회장(1955), 한국영화인협회 연기분과 초대위원장(1961) 등을 지내며 영화계의 원로로서 많은 공로를 쌓았다. [4]


생애


출생 및 학창시절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이화여자고등학교기관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기관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에 마음을 빼앗겨 연기자가 될 생각에 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기관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인물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금화학교기관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5]


제목2


제목3


제목4


제목5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Person: 홍아무개 A hasSon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Book: ○○○ Person: 홍길동 A creator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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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 『복혜숙』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 『복혜숙』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 『복혜숙』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4. ↑ 『복혜숙』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 『복혜숙』online,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