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진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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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진(朴東鎭)인물
출처 :
 
한글명 박동진인물 한자명 朴東鎭 영문명 가나명 이칭
성별 남 생년 1899년 몰년 1981년 출신지 평안북도 정주 전공 건축과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박동진인물은 한국의 대표적 1세대 건축가 중 한 명이다.[1] 석조건축 혹은 고딕부흥식의 어휘를 자기 브랜드로 나타냈으며, 기능주의 건축을 추구했다.[2]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인물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다.[3]


생애


출생 및 배경

박동진인물은 1899년 4월 29일 정주에서 출생하였다.[4] 1915년 3월 정주定州 오산고등보통학교五山高等普通學校기관를 졸업하고 1917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 건축과에 입학하였다.[5] 이 당시 건축학을 택하는 우리들의 선배들이 거의 그러하였듯이 박동진인물도 건축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없이 상경上京하였다가 선배들의 충고가 진로결정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6] 그는 본래 선비 집안의 출신이었으며, 중학교 졸업 후 문학을 선택하여 일본의 대학에 유학을 갈 예정으로 입학 원서를 내 놓고 일본으로 가는 도중渡日途中에 서울을 들렀다.[7] 서울에서 만난 선배들에게 도일유학 준비중이며, 고학을 해서라도 문학을 공부하려 한다고 상의하자, 선배들은 이제부터는 기술 전공이 시대적 요청이며 평소에 미술을 좋아했으니 서울에 새로 생긴 경성공업전문학교의 건축과에 진학해 보라는 충고를 받았다 한다.[8] 우선 시험을 보고 합격했으나, 원래 계획했던 것과 워낙 먼 방향으로 일이 진행되어 고민하다가 주위의 권유로 입학하기로 마음먹었다.[9] 하지만, 건축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건축과를 졸업하고 나면 무엇을 하는 것인지도 잘 알지 못하였고 다만, 이걸 공부하면 장래에 집 짓는 공인工人이 된다는 막연한 추측만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10] 다만 그를 건축과에 지망하도록 하는 데에 유일하게 큰 힘으로 작용하였던 것은 중학시절에 배웠던 역사에서 미켈란젤로도 미술가인 동시에 위대한 건축가라는 기억이었다.[11] 하지만, 건축가가 되어서 모든 건물을 설계도 하고 시공에 참여도 하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12] 그의 학창시절의 마지막 해가 되었어야 할 1919년에 3.1독립운동사건이 일어나고, 그는 이 운동에 가담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앞장섰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반년을 지냈고, 2년 집행유예를 선고 받고 출감하였다.[13] 이어 그는 만주와 시베리아로 방랑 길을 떠났다가 1년 반이 흐른 후, 배움을 다시 시작하여 마무리 짓는 것이 우선 할 일이라 생각하고 귀국하여 경성고등공업학교기관[14]에 재입학하여 건축과를 다시 다니게 되었다.[15] 이렇게 마지막 1년을 보낸 후 1926년 3월 20일에 졸업을 하였다.[16][17]


조선총독부 시절

박동진인물은 졸업 후, 조선총독부기관 회계과의 기수로 취업하게 되었다.[18] 1936년 4월에 기사로 승진하고 1938년 4월에 조선총독부기관를 사직할 때까지 그는 실질적인 건축수업을 조선총독부기관에서 하였다고 볼 수 있다.[19] 그 사이 총독부 조직의 일원으로서 많은 프로젝트에 관여하였을 것이나, 이 기간 중에 박동진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본관과 도서관을 설계한 것을 비롯하여 당시의 한인사회의 건축전문인으로서 과외의 일을 통하여 민족을 위해 이바지했다고 여겨진다.[20] 조선총독부기관에 재직하고 있던 1938년 이전에 관여하였던 작품이 그 이후 시기의 (광복전 것만 중심으로 살펴 본다면) 작품보다 많은데, 그의 작품은 민족교육을 실현하던 학교건축이 대부분이며 더구나 고향을 중심으로 한 지연과 한인들 사이의 연고에 의해 연결된 일들을 주로 하였다.[21]


조선총독부 사임 후

1938년 5월, 태평건물주식회사기관를 창립하여 건설사업에 손을 대었다.[22] 사업적인 수완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근면 성실하게 일하여 경제적 여유가 생기게 되었다.[23] 여기에서 그는 고향 정주에 토지를 수만 평 구입하여 노후에 전원 생활을 계획하였다고 한다.[24][25]


광복 후

광복 다음해인 1946년 5월에 박동진건축연구소를 자영하고, 1951년 3월 부터는 대구에서 개교한 청구대학 토건학과 주임교수로 재직하였다.[26][27] 1960년 기신건축연구소(紀新建築硏究所)로 발전시켜 계속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미국건축가협회의 초청으로 1964년 4월부터 1년간 미국 및 유럽의 건축계를 시찰하고 돌아왔다.[28][29] 1970년대에 들어서는 대부분의 업무를 후배들에게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났다.[30] 1975년에는 대한건축학회로부터 작품상을 수상받았고, 80세 때인 1979년 봄에 미국으로 건너가 생활하다가 1980년 5월 30일 향년 81세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타계하였다.[31]





연구


우리 주택住宅에 대對하야원고와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일제강점과 해방, 6.25전쟁 등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을 거쳤던 박동진인물의 건축은 근대와 전근대의 전환기적 성격이 특징적이라고 하겠다.[32] 현대건축의 추세가 포함된 동아일보기관 연재 우리 주택에 대하야원고[33][34](1931.3.14∼4.5; 23일 중 16일)에서도 물론이다.[35][36] 이 글은 재래 주택의 현황을 건물배치, 평면, 외관 등으로 나눠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을 논한다.[37] 그 논지를 뒷받침하는 배경이 합리화·국제화돼가는 ‘현대건축의 추세’인 셈인데, 1회차 글에서 “현대에 있어서 우리 재래 생활방식의 가치는 거의 0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라는, 상당히 과격한 견해를 밝혔다.[38] 이런 개혁적 입장은 같은 해 12월 신동아新東亞에 출판한 곡선曲線과 건축미建築美에서 과학적·경제적 관점에서 필연적이지 않은 곡선을 거부하는 시각으로 나타났고, 10년후에 나온 춘추春秋의 북한주택개혁이론朝鮮住宅改革論(1941.8)은 우리주택에 대하야 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온돌폐지를 포함해 재래 주택의 완전한 개혁을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다.[39] 후자는 일제의 식민사관마저도 노출하는 한편으로, 현대건축의 흐름을 적극 수용하려는 그의 일관된 입장을 내포하고 있다.[40] 박동진인물은‘건축’을 ‘예술’로 인식했거나 최소한 ‘예술로서의 건축’을 서술 대상으로 했다.[41] 그러는 가운데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주류 경향을 적극 긍정한다.[42] 주류는 장식과 주관의 표현성을 극복한 합리주의와 기능주의였으며, 공통의 좌표는 결국 국제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43] 한편, 서양 근대건축운동의 시작을 19세기 말의 아르누보와 제체션에서 보되, 바그너야말로 이후 건축운동의 출발점이라 인식했다.[44] 박동진인물은 ‘예술’이 ‘필요’의 결과라는 바그너의 모토를 핵심 이념으로 인용했다.[45] 박동진인물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은 아무래도 아직 파편적이고 피상적인데,[46] 박동진인물의 현대건축의 추세는 자기 주택개량론을 위한 일간지 연재물의 한 챕터로 삽입돼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이 목적이었고, 따라서 상대적으로 제약된 지면 내의 개괄적 서술만이 가능한 조건이었다.[47][48] 그러나 더 중요한 바는 1931년의 이 글이 조선 건축계의 서양 근대건축에 관한 사실상의 첫 텍스트여서 아직 그 지식이 충분히 구비되지 못한 때 작성됐다는 점일 것이다.[49]1931년 당시의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 조선 건축계의 드문 자료라는 점에서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크다.[50] 더구나 당대 조선의 건축계와 대중에 나름의 신선한 지식을 제공했다고 판단되는데, 이로써 박동진인물은 최신 건축과 관련한 조선인 전문가로 각인됐을 것이다.[51] 글의 의도처럼 박동진이 자기 주택개량론을 뒷받침하면서 말이다.[52] 박동진인물의 현대건축의 추세 (1931.3)은 1930년대 조선의 건축계에서 나온, 서양 근대건축운동에 관한 한국 최초의 역사서술적 성격의 글로 판단된다.[53]


건축관

박동진인물의 작품은 조선일보사옥(1935년)과 같이 모던한 건물도 더러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석조건축물이었다.[54] 양식적으로도 보성전문학교 본관에서부터 비롯된 네오 고딕양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55] 고향인 평북 정주의 오산중학교 각교사와 보성전문과 같은 재단의 중앙중학교의 새로운 본관[56]에서도 일정한 스타일의 설계안들이 탄생하였다.[57] 이러한 경향의 건축물들은 광복 후에도 계속되어 영락교회, 남대문교회에서 그의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58] 그리고 그의 이러한 작품 경향, 특히 학교건축에서 고딕양식의 석조건축이라는 공식이 꽤나 오랫동안 이 나라의 교육기관의 건축문화를 이끌었다.[59] 광복전후에 세워지는 학교건물중, 일본계의 관립학교들은 빨간벽돌을 주재료로 사용하였으나, 민족 자본으로 세워지는 학교들은 석조로 세워지는 것들이 많았음은 보성전문과 그 설계자 박동진인물의 영향이 상당부분 있으리라 생각한다.[60]


작품리스트

작품 연도
보성전문학교 본관 (현 고려대 본관)普成全文學校本館(現 高麗大本館)[61] 1933~34년
조선일보사 사옥 (없음, 코리아나 호텔 자리)朝鮮日 報社社屋(無, 코리아나 호텔 자리)[62] 1934~35년
아서원 (현 없음)雅敘園(現無)[63] 1934년
보성전문학교 도서관普成全文學校圖書館[64] 1935~37년
오산중학교 본관 (평북 정주)五山中學校本館(平北定州)[65] 1935년
오산중학교 대강당五山中學校大講堂[66] 1936년
오산중학교 과학관五山中學校科學館[67] 1936년
중앙중학교 본관中央中學校本館[68] 1936년
중앙중학교 대강당中央中學校大講堂[69] 1937년
명신중학교 본관 (재령)明新中學校教本館(載寧)[70] 1937년
명신중학교 대강당明新中學校大講堂[71] 1938년
명신중학교 기숙사明新中學校寄宿舎[72] 1939년
대전지방법원 청사大田地方法院廳舍[73] 1939년
평안공업학교 본관 (2층)平安工業學校本館[74] 1940년
보성중학교 별관 교실普成中學校別館教室[75] 1940년
평안공업학교 대강당平安工業學校大講堂[76] 1941년
경방 남천 공장 (남천)京紡南川工場(南川)[77] 1942년
이성봉 소아과 의원李聖鳳小兒科醫院[78] 1942년
백인제 외과 수술실白麟濟外手術室[79] 1944년
영락교회榮樂教會[80] 1948년
남대문교회南大門教會[81] 1954년
고려대학교 준공 건물高麗大學校早今建物[82] 1955~65년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경성공업전문학교 A takesCourseAt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경성고등공업학교 A graduates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오산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Event: 3.1독립운동 Person: 박동진 A isRelatedTo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조선총독부 A worksAt B
Person: 박동진 Article: 우리 주택住宅에 대對하야 A isWriterOf B
Person: 박동진 Institution: 태평건물주식회사 A isMemberOf B
Article: 우리 주택住宅에 대對하야 Institution: 동아일보 A publishe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2.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5.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6.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7.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8.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9.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0.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1.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2.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3.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4. ↑ 경성공업전문학교기관가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朝鮮總督府制學校官制에 따라 학교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5.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6. ↑ 어찌 보면 박길용 보다 1년 늦게 입학하여 경성고등업학교기관를 제2회로 졸업하여 초창기의 졸업생으로서 역할을 해 내었을텐데, 식민지의 청년으로서 핍박과 어려움을 겪다가 드디어 건축계의 일선으로 나서게 되었으며 그때 나이 27세로 순조롭게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면, 경력 8년의 중견 실무자였을 것이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17.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0쪽.
  18.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19.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0.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1. ↑ 이는 공직에 있으면서 단지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었고 전문인으로서 민족을 위한 봉사로 행한 일들이라 생각된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2.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3.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4. ↑ 그러다 1945년 8월, 46세때 광복을 맞았으나 38선 이북에 속해 버린 고향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6.25를 겪으면서 혼란을 겪었다.
  25.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6. ↑ 1950년 태평건물주식회기관사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7.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2쪽.
  28. ↑ 1960년대 초에 그는 약 1년간 구미 각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는데, 국내의 모든 정세가 변해 있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3쪽.
  29. ↑ 윤일주, 박동진 (朴東鎭),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 한국학중앙연구원.
  30.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3쪽.
  31.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3쪽.
  32.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3. ↑ 글은 네 장으로 구성됐는데, 1장인 ‘생활生活과 주택住宅과’는 서론으로서 급변하는 시대상을 논하고, 본론인 3장 ‘우리 집住家의 現狀’및 4장‘우리의 새 집住家’는 각각 재래 주가에 대한 비판과 개선책을 담고 있고, 2장 현대건축의 추세는 전체 연재의 3∼5회 사흘 분(1931.3.17∼19)에 걸쳐 있으며, 자체로서 다섯 개의 섹션으로 나뉜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4. ↑ 2장의 구성은 아르누보와 제체션을 중심으로 도입부를 서술한 후, 당시 건축계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네 개 국가인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러시아의 건축 경향에 대해 차례로 정보를 제공하는 형식이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5. ↑ 박동진의 이 같은 시대적 한계 및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탐색은 그가 출판한 글에서도 확인되는데, 실제 디자인에서보다 개혁적 입장이 훨씬 뚜렷하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6.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7.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8.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39.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0.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1.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2.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3.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4.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5.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6. ↑ 박동진인물은 세계건축의 신경향을 보임으로써 자기 주택개량론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 주택에 대하야 글 첫머리에 이미 자신이 ‘전문적’ 논의를 의도하지 않음을 전제하긴 했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7. ↑ 하지만 현대건축의 추세만을 떼어놓고 볼 때 자체로서 의의가 큼에도 불구하고 인식의 시차와 한계가 노출됨은 결국 박동진인물이 처했던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제약의 발로라 할 수 있다.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23쪽.
  48.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49.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0.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1.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2.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3. ↑ 김현섭, 김제연, 「1930년대 박동진과 홍윤식의 서양 근대건축운동 인식」, 『건축역사연구』 제32권 1호, 한국건축역사학회, 2023, 30쪽.
  54.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55.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56. ↑ 구 본관 일본인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빨간벽돌 건물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된 후 박동진인물설계로 석조건물이 건립되었다.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57.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58.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59.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60.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4쪽.
  61.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2.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3.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4.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5.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6.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7.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8.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69.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0.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1.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2.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3.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4.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5.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p81쪽.
  76.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7.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8.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79.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80.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81.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
  82. ↑ 윤인석, 「한국의 건축가 - 박동진」, 『건축사 = Korean architects』, 제9호(통권 329호), 1996, 8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