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진

North Korea Humanities

장문석 (토론 | 기여)님의 2020년 6월 23일 (화) 21:35 판 (개요)

김광진(金洸鎭)
KimKwangjin.png
출처 : 동아일보 1935년 1월 2일자 기사
 
한글명 김광진 한자명 金洸鎭 영문명 Kim Kwang-Jin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3년 몰년 1981년 출신지 평양 전공 역사학


개요

상학사. 역사학자. 1903년 평양에서 태어나서 민족학교와 관립학교에서 수학한 후, 일본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경성제국대학 조수 및 부수를 거쳐 보성전문학교 경제학 교원으로 교육 및 연구를 담당하였다. 해방 후 북한 정권 건설에 참여하여 김일성종합대학 및 과학원 등에서 근무하였다. 한국사의 아시아적 특수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 출발하였으나 이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조선에도 적용되었다는 일국사적 발전단계론으로 옮겨갔다.

생애

김광진은 1903년 6월 23일 평양 대동강변에서 땔감 장사를 하던 아버지의 외동 아들로 태어났다. 김광진은 공립보통학교가 아니라 일신학교(日新學校)에서 수학하였다.[1] 일신학교에서는 '구한국 시대 교과서'를 사용하고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창가를 가르쳤으며, 김광진의 재학 중에도 학교와 경찰 사이의 충돌이 이어졌으며 결국 그가 졸업하기 직전 학교는 문을 닫았다.[2]
1917년 김광진은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홍종인(洪鍾仁)노동규(盧東奎)가 동기생이었으며, 함석헌(咸錫憲)이 1년 선배였다. 이후 1919년 김광진은 "몇 명의 동료들과 함께 서울에서 온 학생과 연락을 취하면서 비밀리에 봉기를 준비했다. 우리는 며칠 밤 철야로 수천 장의 국기를 만들고 호신용 단도를 갖춘 채 드디어 3월 1일을 맞이하였"으며, "그 해 10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60 가까웠던 아버지도 연행되었다".[3]

닛코(日光) 여행 (출처: 尹仁上, 『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오른쪽부터 김광진, 김선형, 윤인상)

1922년 4월 1일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東京商科大學) 예과에 입학한다. 이듬해 간토(關東)대지진이 일어나자 김광진은 직접적인 피해를 겪지는 않았지만, 조선인 학살을 목격하였고 강의실에서 벌어진 교수의 조선인 혐오 발언에 항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도쿄상과대학에는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 오쓰카 긴노스케(大塚金之助) 등이 근무하고 있었지만, 김광진 스스로의 회고에 따르면, 항의사건 이후 "학교 강의에 흥미를 잃고 혼자서 맑스·레닌주의 공부를 시작했다". 또한 그는 "비합법 독서회에도 참가하고 또한 비합법인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이나 발행 금지 서적의 배포 등에도 관계했다".[4] 1925년 3월 김광진은 예과를 졸업한다. 백남운(白南雲)은 김광진의 도쿄상과대학 3년 선배였으며, 본과 동기는 강석천(姜錫天), 김선형(金善炯), 윤원상(尹元上), 윤인상(尹仁上), 이완조(李玩朝) 등이었다. 윤인상의 회고에 따르면, 김광진은 "미남"이었고 화술에 능했"으며 스스럼없이 주변 농가에 들러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며, 평양 출신 도쿄 유학생 모임인 기성학생회(箕城學生會)의 임원으로 활동하였다.[5] 본과 3학년 시절 김광진은 윤인상, 김선형 등과 시오바라(鹽原)와 닛코(日光)로 무전여행을 떠났다. 1928년 3월 김광진은 도쿄상과대학을 졸업하여 상학사(商學士) 학위를 받는다.[6]

1928년 11월 김광진은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법문학부(法文學部) 부수(副手)로 임명되었고 1929년도에는 같은 곳의 조수(助手)로 근무하였다.[7]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선경제연구소(朝鮮經濟硏究所)『조선경제의_연구-경성제국대학_법문학회_제1부논집_제2책(朝鮮經濟の硏究-京城帝大學法文學會第一部論集第二冊-)』을 간행할 당시 사무를 담당하였다. 경성제대 경제학 교원이었던 시카다 히로시(四方博)는 후일 "조수나 부수는 경제관계는 거의 조선인이었습니다. 조선에서 교육 받은 이들과 그 당시 말로 '내지(內地)'의 대학을 나와 갈 곳이 없어 돌아온 이들이 꽤 와 있었습니다."라고 회고하였다.[8] 김광진은 경성제대 조수 근무를 계기로 성대 그룹 [9] 특히 그 중에서도 유진오(兪鎭午)와 교유하였다. 1931년 9월 조선사회사정연구소(朝鮮社會事情硏究所)가 설립될 때 김광진도 참여하였다. 유진오는 "김광진 군은 동경상대 출신이었지만 나이와 생활태도나 사상 경향이 우리들과 비슷해서 죽이 잘 맞았다"[10] 1934년 미야케(三宅) 교수 적화운동사건이 일어나는데 이 사건으로 김광진도 증인으로 조사를 받는다. 1929년 4월부터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강사로 출강하고 있었던 김광진은 김성수(金性洙)가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한 후인 1932년 4월 전임강사로 부임한다. 유진오는 "인촌(仁村)은 세 사람의 신진(新進)을 이끌고 등장하였는데, 세 사람이란 오천석(吳天錫), 김광진 양 씨와 나였다"라고 회고하였다.[11] 당시 신문에서는 김광진을 "호신사(好紳士)"로 소개하면서, "밤이 새도록 공부를 계속(繼續)하는" '독학자(篤學者)'인 동시에 "학생들이 씨(氏)를 방문하면 씨는 과제를 권하고 권하고 차를 권하고 선생이 학담(學談)에 취하면 술까지 권하는 때가 있"을 정도로 학생들과 관계도 좋았다고 기록하였다.[12] 보성전문학교는 『보성전문학교연구연보_보전학회논집(普成專門學校硏究年報_普專學會論集)』를 간행하는 데, 실제 편집은 김광진이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13] 당시 언론에서는 "이러한 순전한 연구논문집의 발행은 조선에서 처음이니만큼 조선문화사상에 찬연한 존재가 될" 것이라고 소개하였으며, 후일 유진오는 "일본 모 사대(私大) 신문에서는 『보전논집』의 내용을 소개하고 나서, 이제 경성에서는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한 '관학파(官學派)'에 대항하여 '사학파(私學派)'가 대두되었다고 논평하였다."[14]
1934년 김광진은 극예술연구회의 앵화원(櫻花園) 공연을 보러 갔다가 노천명(盧天命)을 만나 교제를 시작한다. 1939년 2월 『문장(文章)』 창간호에 유진오는 소설 「이혼(離婚)」을 싣는데, 이 소설은 노천명과 김광진의 연애를 다룬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다.[15] 1939년 김광진은 보성전문학교를 사직하고 평양으로 귀향하여 1940년 1월 평안상사주식회사(平安商社株式會社) 전무이사(專務取締役)로 취임하며 같은 해 10월 조선제정공업주식회사(朝鮮製釘工業株式會社) 감사로 취임하여 사업가로 전신한다. 평양에서 김광진은 왕수복(王壽福)을 만난다.

1945년 8월 17일 김광진은 조만식(曺晩植)이 중심이 된 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 결성에 참가하여 무임소위원으로 선출된다. 이후 건준 평남지부는 평남 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는데, 김광진은 민족주의 계열의 한 사람으로 합류하여 상공위원장을 맡는다. 다만, 김광진은 당시 이미 조선공산당원이었다.[16] 1946년 1월 중순 김광진은 인재 유치 특명을 띠고 1946년 1월 중순에 서울로 내려와 백남운을 만나 지식인의 월북문제를 깊숙이 논의하였다.[17]



참고문헌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Data Network

<btn>김광진.lst| 김광진 lst 페이지로 가기</btn>

주석


  1. 장지연(張志淵)의 청원으로 대한제국 학부로부터 ‘私立學校’로 인허된 곳이다. 「日新認許」『皇城新聞』, 1906.4.25.
  2.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今日の朝鮮』, 外國文出版社, 1965.3(任正赫,『現代朝鮮の科學者たち』, 彩流社, 1997, 수록), 169-170쪽.
  3.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1쪽.
  4. 金洸鎭, 「學究四O年の道」, 173-174쪽.
  5. 尹仁上,『90을 바라보며』, 光林社, 1991, 69~103·406~417쪽.「東京箕城學友 卒業生送別式, 임원도 새로히 선거」,『東亞日報』, 1926.2.7(5).
  6. 『東京商科大學一覧(昭和三年度)』, 1928.10.
  7. 「昭和三年十月二日 金洸鎭 法文學部副手ヲ命ス(大學)」,『京城帝國大學學報』 20, 1928.11.5.
  8. 「京城帝大」の社会経済史研究」, 旗田巍編,『シンポジウム 日本と朝鮮』, 勁草書房, 1969, 51쪽.
  9. '성대 그룹'은 식민지기와 해방정국에 걸쳐 활약한 경성제국대학 출신 사회주의 지식인·운동가들이다.
  10. 兪鎭午,『나의 人生觀, 젊음이 깃 칠 때』, 徽文出版社, 1978, 111쪽.
  11. 兪鎭午,『養虎記 - 普專·高大, 三十年의 回顧-』, 高麗大學校出版部, 1977, 5쪽.
  12. G記者,「敎授·講師打令 普成專門篇(七) 商科敎授 金洸鎭氏」,『朝鮮日報』, 1933.5.11 석(2).
  13. 홍종욱, 「보성전문학교에서 김일성종합대학으로 - 식민지 지식인 김광진의 생애와 경제사 연구」, 『역사학보』 232, 역사학회, 2016, 297쪽.
  14. 「硏究의 一端을 學界에 提供, 普專學會論文集發刊」,『每日申報』, 1934.3.8. 兪鎭午,「片片夜話㊵ 金性洙 校長의 의욕」,『東亞日報』, 1974.4.17(5).
  15. 朴鳳宇,「孤獨과 生活환 女流詩人 盧天命」『女苑』, 1959년 8월; 朴致遠,「盧天命 그 文學과 生涯 - 살을 깎듯 했던 孤獨의「化身」-」『 隨筆文學』, 1978.5. 황금찬,「황금찬의 문단 반세기(20) 유진오 편」, 『문학세계』, 2008.9.
  16. 韓載德『, 金日成을 告発한다―朝鮮労動黨働治下의 北韓回顧録―』, 內外文化社, 1965, 52쪽.
  17. 박병엽 구술, 유영구·정창현 엮음『박병엽 증언록2, 전 노동당 고위간부가 본 비밀회동, 김일성과 박헌영 그리고 여운형』, 선인, 2010, 2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