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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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7일 (일) 14: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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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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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娑의 研究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호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6년 11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1쪽 전체쪽 031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佛塔偈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後不休 <br/ ─慈藏作─
佛塔偈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後不休 <br/ ─慈藏作─






본문


본문1: 서론


불가에 독특한 건축으로 탑파라는 것이 있으니 이는 범어 Stupa 파리어 ThuPa의 사음이라 불사리를 봉안하는 취상을 이름이나 후에 불교의 역사적 전개, 교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석가의 유적 내지 경설의─말하자면 법사리의 숭배 목적으로 적취되는 건물, 즉 지제 현대문주1▶Chaitya[a 1]까지도 중화 이동에 있어서는 탑파라는 명칭 아래 총괄되어 있고 또다시 불사리·법사리를 호지하는 승려의 사리를 봉치한 경영까지도 사리의 의의가 광의로 해석되어 탑파로써 부르게 현대문주2▶되었다.[a 2]
쪽수▶P001佛家에 獨特한 建築으로 塔婆라는 것이 있으니 이는 梵語 Stupa 巴利語 ThuPa의 寫音이라 佛舍利를 奉安하는 聚相을 이름이나 後에 佛敎의 歷史的 展開, 教理의 發展으로 말미암아 釋迦의 遺跡 乃至 經說의 ─말하자면 法舍利의 崇拜 目的으로 積聚되는 建物, 即 支提 원문주1▶Chaitya[1]까지도 中華以東에 있어서는 塔婆라는 名稱 아래 總括되어 있고 ▶P002-1또다시 佛舍利·法舍利를 護持하는 僧侶의 舍利를 封置한 經營까지도 舍利의 意義가 廣義로 解釋되어 塔婆로써 부르게 원문주2▶되었다.[2]
이와 같이 탑파는 불가의 신앙 중심인─또는 신앙 전체인 불법승 삼보를 봉안하고 표치하고 기념하는 건물이라 불교 신앙 시대에 있어서 항상 가람의 중심을 이루었을 것은 물론이요 후에 비록 우상숭배‧유법숭배로 신앙 내용이 번천되어 조상‧회상‧사경‧간경의 의의가 고조되어 당전자장의 중요성이 늘어 탑파 중심 사상에 현대문주3▶다소의 변천이 있었다 하더라도[a 3] 그것이 원래가 불교인 이상, 불도인 이상, 사리 숭배는 근본적으로 포업할 수 없었고 또 여러 경전마다 사리 숭배, 조탑 공덕이 설교되는 한편 현대문주4▶민속적 신앙과의 혼융으로[a 4] 말미암아 조탑 행사는 미신적으로 유행되게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소로는 척촌에 미만하는 공예적인 토탑 옥탑 김탑으로부터 대로는 수십 수백척의 웅위한 고탑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의 형식 탑파가 조영되고 또 한편으로는 화탑, 인탑, 각탑, 조탑 등 도상적탑파까지 성용케되었다.
쪽수▶P002-2이와 같이 塔婆는 佛家의 信仰 中心人─또는 信仰 全體인 佛法僧 三寶를 奉安하고 標幟하고 記念하는 建物이라 佛敎 信仰 時代에 있어서 恒常 伽藍의 中心을 이루었을 것은 勿論이요 後에 비록 偶像崇拜‧遺法崇拜로 信仰 內容이 樊遷되어 造像‧繪像‧寫經‧刊經의 意義가 高調되어 堂殿慈藏의 重要性이 늘어 塔婆中心思想에 원문주3▶多少의 變遷이 있었다 하더라도[3] 그것이 元來가 佛敎인 以上, 佛徒인 以上, 舍利崇拜는 根本的으로 抛嶪할수 없었고 또 여러 經典마다 舍利崇拜, 造塔功德이 說敎되는 한편 원문주4▶民俗的信仰과의 混融으로[4] 말미암아 造塔行事는 迷信的으로 流行되게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小로는 尺寸에 未滿하는 工藝的인 土塔 玉塔 金塔으로부터 大로는 數十 數百尺의 雄偉한 高塔에 이르기까지 多種多樣의 形式塔婆가 造營되고 또 한편으로는 畫塔, 印塔, 刻塔, 彫塔等 圖像的塔婆까지 盛用케되었다.
이와 같이 잡다한 종류와 형식의 탑파가 조성되고 건립됨에는 반드시 그 동기를 이루는 사상적 배경 즉 교리의 변천이 커다란 맥전을 이루고 있나니 이러한 의미에서 교리사 상에서 내다본 탑파의 변천이란 것이 불학도로서 가장 중요한 호제목의 하나일 것이요 또 긴급한 연구 재료일 것이로되 교리 교사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감히 당치 못할 것이므로 문제를 제한하여 필자는 다못(다만) 미술사적 견지에서 조선 탑파 형식의 변천을 고찰하여 볼까 한다.
쪽수▶P002-3이와 같이 雜多한 種類와 形式의 塔婆가 造成되고 建立됨에는 반드시 그 動機를 이루는 思想的 背景 即 敎理의 變遷이 커다란 脈塼을 이루고 있나니 이러한 意味에서 敎理史 上에서 내다본 塔婆의 變遷이란 것이 佛學徒로서 가장 重要한 好題目의 하나일 것이요 또 緊急한 硏究 材料일 것이로되 敎理 敎史에 對하여는 全혀 門外漢인 筆者로서는 敢히 當치 못할 것이므로 問題를 制限하여 筆者는 다못 美術史的 見地에서 朝鮮 塔婆 形式의 變遷을 考察하여 볼까 한다.
탑파가 이미 불가에 특유한 건물이라 할진댄 그 기원이 불교와 함께 있었을 듯하나 그러나 인도에서의 탑파의 기원에 대하여는 일찍이 파라문교 시대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석가재세(在世) 시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석가입멸 후에 발생된 것이라고도 하여 그 설이 분분하여 아주 귀일되지 못한 채로 있고 중국에서의 초건된 기원설에 관하여는 고승전에

康僭會 吳赤烏十年(A.D.247)至建康 孫權分求舍利旣得之 權爲造塔 晋帝過江更修飾之 此中國造塔始也

라 하였으나 후한서 도겸전 중에

(笮融) 大起浮屠寺 註浮屠佛也 上累金盤 下爲層樓 又堂閣周回 可容三千許人云云

의 구가 있어 후한 영제 중평 6년(A.D.189)으로부터 현대문주5▶헌제 초평 4년(A.D.193) 간에 이미 탑파의 건립 사실이 있었음을 말하였으니[a 5] 그 기원의 구원함을 可히 알 수 있다.
쪽수▶P002-4塔婆가 이미 佛家에 特有한 建物이라 할진댄 그 起源이 佛敎와 함께 있었을 듯하나 그러나 印度에서의 塔婆의 起▶P003-1源에 對하여는 일찍이 婆羅門敎 時代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釋迦在世 時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釋迦入滅 後에 發生된 것이라고도 하여 그 說이 粉粉하여 아주 歸一되지 못한 채로 있고 中國에서의 初建된 起源說에 關하여는 高僧傳에
康僭會 吳赤烏十年(A.D.247)至建康 孫權分求舍利旣得之 權爲造塔 晋帝過江更修飾之 此中國造塔始也
라 하였으나 後漢書 陶謙傳 中에
(笮融) 大起浮屠寺 註浮屠佛也 上累金盤 下爲層樓 又堂閣周回 可容三千許人云云
의 句가 있어 後漢 靈帝 中平 6年(A.D.189)으로부터 원문주5▶獻帝 初平 4年(A.D.193) 間에 이미 塔婆의 建立 事實이 있었음을 말하였으니[5] 그 起源의 久遠함을 可히 알 수 있다.
그후 조선의 불교 수입은 현대문주6▶소수림왕 2년 이전에 민간에서 이미 사신한 자 있었다는 것이 논의되어 있으나[a 6] 현대문주7▶고구려의 최초 불찰인 성문사라는 것이 성문이란 일공관의 변용이었다 할진댄[a 7] 탑파의 기원은 적어도 이후에 있었을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사실이 보이지 않고 오직 현대문주8▶요동성 육왕탑의 전설과 평양성 서 대보산 하의 영탑 전설이 가장 황탄한 설화 형식으로 전하여 있고[a 8] 북사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현대문주9▶백제에 있어서도 탑파의 초건 년대를 종잡을 수 없는 채 탑장 아비지와 미륵사 천왕사[a 9] 현대문주10▶도양사의 탑기가[a 10] 있을 뿐이요 현대문주11▶가락국에는 신라에 불교가 수입되기 전에 가장 전설적인 금관성 파사석탑기가 보이고[a 11] 현대문주12▶신라 또한 가장 뒤늦은 교국임에도 불구하고 탑파 초건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없는 채 흥륜사의 탑기가 후대에 보인다.[a 12] 이와 같이 문징의 부비는 해동 탑파의 기원을 용역히 정립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당대의 불교 신앙이 불상 사리를 동시예 숭배하여 전탑 경영이 상당히 발전된 위진 육조의 영향 하에 계발된 것인즉 불법 전수와 함께 또는 얼마 후에 탑파의 조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견지에서 해동의 조탑 기원을 가정한다면 소수림왕 2년 전후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고국양왕 말년까지(A.D.372-392) 전후 20년간에는 적어도 최외한 경영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쪽수▶P003-2그後 朝鮮의 佛敎 輸入은 원문주6▶小獸林王 2年 以前에 民間에서 이미 私信한 者 있었다는 것이 論議되어 있으나[6] 원문주7▶高句麗의 最初 佛刹인 省門寺라는 것이 省門이란 一公館의 變用이었다 할진댄[7] 塔婆의 起源은 적어도 이後에 있었을 것은 勿論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事實이 보이지 않고 오직 원문주8▶遼東城 育王塔의 傳說과 平壤城 西 大寶山 下의 靈塔 傳說이 가장 荒誕한 說話 形式으로 傳하여 있고[8] 北史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원문주9▶百濟에 있어서도 塔婆의 初建 年代를 종잡을 수 없는 채 塔匠 阿非知와 彌勒寺 天王寺[9] 원문주10▶道讓寺의 塔記가[10] 있을 뿐이요 원문주11▶駕洛國에는 新羅에 佛敎가 輸入되기 前에 가장 傳說的인 金官城 婆娑石塔記가 보이고[11] 원문주12▶新羅 또한 가장 뒤늦은 敎國임에도 不拘하고 塔婆 初建에 關한 特別한 記錄이 없는 채 興輪寺의 塔記가 後代에 보인다.[12] 이와 같이 文徵의 不備는 海東 塔婆의 起源을 容易히 定立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當代의 佛敎 信仰이 佛像 舍利를 同時예 崇拜하여 殿塔 經營이 相當히 發展된 魏晉 六朝의 影響 下에 啓發된 것인즉 佛法 傳授와 함께 또는 居無何에 塔婆의 造營이 있었을 것으로 想定할 수 있으니 이러한 見▶P004-1地에서 海東의 造塔 起源을 假定한다면 小獸林王 2年 前後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故國讓王 末年까지(A.D.372-392) 前後 20年間에는 적어도 崔嵬한 經營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즉 조선 탑파의 기원을 이룬 탑파는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형식의 것이었을까. 조선에서의 조탑 시원을 이미 고구려에 둔 이상 이 문제는 즉 고구려의 탑파에 대한 문제로 환치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현대문주13▶이동충태(伊東忠太, 이토 주타) 박사가 일찍이 간단한 시론을 보였지만[a 13]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다시 문제삼는 학자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요컨대 유물, 유문이 가히 빙거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필자─ 또한 새삼스레 무슨 호증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입론할 여지도 없는 바이지만 서술의 순서상 일언을 비치 아니할 수 없으니, 대저 중국 자체에 있어서도 인도 원래의 복분식 전탑 형식 가부색 가왕의 작리부도에서 췌득하여 중국식으로 발전하게 된 누각식 부도와가 그 어느 것이 중국 탑파의 시원을 이루었을까가 문제되어 있는 이때 고분 축조 형식에 벌써 서역적 투팔 천정 수법이 성용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황탄한 전설이나마 요동성 육왕탑과 같이 인도식 복분 형식의 토탑 기록을 가장 오랜 전설인 듯이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 있어 탑파의 시원 형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실로 난문에 전하는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004-2然則 朝鮮 塔婆의 起源을 이룬 塔婆는 어떠한 種類의 어떠한 形式의 것이었을까. 朝鮮에서의 造塔 始源을 이미 高句麗에 둔 以上 이 問題는 即 高句麗의 塔婆에 對한 問題로 換置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對하여는 원문주13▶伊東忠太 博士가 일찍이 簡單한 試論을 보였지만[13] 結末을 보지 못한 채 다시 問題삼는 學者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要컨대 遺物, 遺文이 可히 憑據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筆者─ 또한 새삼스레 무슨 好證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立論할 餘地도 없는 바이지만 叙述의 順序上 一言을 費치 아니할 수 없으니, 大抵 中國 自體에 있어서도 印度 原來의 覆盆式 塼塔 形式 迦賦色 迦王의 雀離浮屠에서 揣得하여 中國式으로 發展하게 된 樓閣式 浮屠와가 그 어느 것이 中國 塔婆의 始源을 이루었을까가 問題되어 있는 이때 古墳 築造 形式에 벌써 西域的 鬪八 天井 手法이 盛用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荒誕한 傳說이나마 遼東城 育王塔과 같이 印度式 覆盆 形式의 土塔 記錄을 가장 오랜 傳說인 듯이 가지고 있는 高句麗에 있어 塔婆의 始源 形式을 어떻게 設定할 것인가─實로 難問에 展하는 課題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중국 자체의 원시 탑파설에 있어 상술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계통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 인도식 복분부도는 위진 이후에 경영된 운강 기타 석굴의 조벽에서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서 누각식 탑파가 동시에 볼 수 있을 뿐임에 반하여 누각식 탑파 형식은 비록 조형상으론 다시 고고한 실례(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전에 말한 착융의 목조 탑파 건립 사실이 문헌을 통하여 최고한 예로 전하여 있고 북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A.D.493)─경영한 용문의 석굴사에서는 복분식 탑파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육조 이후 수당을 통하여 누각식 탑파가 중국 탑파의 본류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역사를 통하여 복분식 부도로는 극히 전설적인 전거의 요동성 육왕탑이 고고한 일례로 남아 있고 현대문주14▶〿일기로 들어와서 통도사 계단이란[a 14] 것이 하나 전하여 있고 그리고 고려 이후에 들어와 다소의 류형이 있다 하나 〿〿 왜곡된 복분 형식에 한한 점에서 조선의 탑파도 원래가 중국의 탑파 규범 아래 누각식 탑파가 조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조선 탑파의 시원 형식은 누각식 탑파계에로 돌려봄이 가장 순리일 듯싶다. 이러한 이산 하에서 필자는 목조 탑파로부터 고찰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쪽수▶P004-3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中國 自體의 原始 塔婆說에 있어 上述한 바와 같이 두 가지 系統說이 對立하고 있다 하나 印度式 覆盆浮屠는 魏晉 以後에 經營된 雲岡 其他 石窟의 彫壁에서 매우 歪曲된 形式으로서 樓閣式 塔婆가 同時에 볼 수 있을 뿐임에 反하여 樓閣式 塔婆 形式은 비록 造型上으론 다시 高古한 實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前에 말한 笮融의 木造 塔婆 建立 事實이 文獻을 通하여 最古한 例로 傳하여 있고 北魏 孝文帝가 洛陽으로 遷都한 後(A.D.493)─經營한 龍門의 石窟寺에서는 覆盆式 塔婆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六朝 以後 隋唐을 通하여 樓閣式 塔婆▶P005-1가 中國 塔婆의 本流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歷史를 通하여 覆盆式 浮屠로는 極히 傳說的인 前擧의 遼東城 育王塔이 高古한 一例로 남아 있고 원문주14▶〿一期로 들어와서 通度寺 戒壇이란[14] 것이 하나 傳하여 있고 그리고 高麗 以後에 들어와 多少의 類形이 있다 하나 〿〿 歪曲된 覆盆 形式에 限한 點에서 朝鮮의 塔婆도 原來가 中國의 塔婆 規範 아래 樓閣式 塔婆가 祖宗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朝鮮 塔婆의 始源 形式은 樓閣式 塔婆系에로 돌려봄이 가장 順理일 듯싶다. 이러한 理山 下에서 筆者는 木造 塔婆로부터 考察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본문2: 1. 木造塔婆


기술한 바와 같이 인도에서의 탑파의 본원적 형식은 토양으로 조축한 복분식 부도이었다. 그러나 복분의 반구양식이 그 기단과 함께 적취에 반한 공덕의 관념으로 말미암마 탑고됨에 따라 복분의 탑신은 포탄형으로 수고하여지고 기단의 층도도 중후하게 되며, 이어 곧 기단과 탑신에 시설되었던 난순이 건축적 방실의 형태로 변천되며 또는 탑중거불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탑실을 고의로 경영하게 되니 탑파가 전체로 누각식 건물로 번안될 인연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건타라 지방에 작리부도라는 목층 고탑이 가부색가왕대에 벌써 건조되었다는 것도 그 발생 과정에 하등의 비약적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 까닭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당대에 목조의 고루건축으로서는 세계적 발전을 보이고 있던 중국으로서 법현 이하 다수한 구법승으로 말미암아 발견되고 전파된 이 작리부도가 간접 직접으로 중국 탑파 조성에 중요한 규범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서역제국을 통하여 습득한 당대의 탑파 지식이 원본적 복분 형식을 탐득하였다느니보다 당대에 한창 유행되고 성용되어 있던 기루식 탑파가 먼저 유전되었을 것이 순리로 상상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위서 석로지에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라고 있어 탑파의 형식이 천축구상에 의하였다 하나 복분식 부도와는 전연 다른 층루식 건물일 뿐더러 한인이 그로써 곧 탑규의 정형인 듯이 여기고 있는 소식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탑파에 대한 이러한 상식은 이어 곧 조선에 있어서도 그 실정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전하는 삼보감통록의 요동성 육왕탑이라는 것은 잘해야 발해대 사실의 오전에 부과한 것이었을 것이요 거론할 재료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목조 탑파야말로 조선 탑위의 시원이었고 조종이었으니 다만 교화가 편파된 지 1500여년에 문헌 상으로도 전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현물로서도 이조 중엽 이후에 속하는─ 탑파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는 이기의 고루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해동의 교국으로 이 어인 변상이랴. 요요한 문헌과 황잔한 유적에서나마 탑상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 이곳에 있다할까.
쪽수▶P005-2己述한 바와 같이 印度에서의 塔婆의 本源的 形式은 土壤으로 造築한 覆盆式 浮屠이었다. 그러나 覆盆의 半球樣式이 그 基壇과 함께 積聚에 伴한 功德의 觀念으로 말미암마 塔高됨에 따라 覆盆의 塔身은 砲彈形으로 秀高하여지고 基壇의 層度도 重後하게 되며, 이어 곧 基壇과 塔身에 施設되었던 欄楯이 建築的 房室의 形態로 變遷되며 또는 塔中居佛의 思想으로 말미암아 塔室을 故意로 經營하게 되니 塔婆가 全體로 樓閣式 建物로 飜案될 因緣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健陀羅 地方에 雀離浮屠라는 木層高塔이 迦賦色迦王代에 벌써 建造되었다는 것도 그 發生 過程에 何等의 飛躍的 無理를 느끼게 하지 않는 所以然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當代에 木造의 高樓建築으로서는 世界的 發展을 보이고 있던 中國으로서 法顯 以下 多數한 求法僧으로 말미암아 發見되고 傳播된 이 雀離浮屠가 間接 直接으로 中國 塔婆 造成에 重要한 規範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西域諸國을 通하여 拾得한 當代의 塔婆 知識이 原本的 覆盆 形式 ▶P006-1을 探得하였다느니보다 當代에 한창 流行되고 盛用되어 있던 騎樓式 塔婆가 먼저 流傳되었을 것이 順理로 想像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魏書 釋老志에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라고 있어 塔婆의 形式이 天竺舊狀에 依하였다 하나 覆盆式 浮屠와는 全然 다른 層樓式 建物일 뿐더러 漢人이 그로써 곧 塔葵의 定形인 듯이 여기고 있는 消息을 알 수 있다. 即 中國에서의 塔婆에 對한 이러한 常識은 이어 곧 朝鮮에 있어서도 그 實情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三國遺事가 傳하는 三寶感通錄의 遼東城 育王塔이라는 것은 잘해야 渤海代 事實의 誤傳에 不過한 것이었을 것이요 擧論할 材料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木造 塔婆야말로 朝鮮 塔萎의 始源이었고 祖宗이었으니 다만 敎化가 遍播된 지 1500餘年에 文獻 上으로도 傳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現物로서도 李朝 中葉 以後에 屬하는─ 塔婆의 意義를 喪失하고 있는 二基의 高樓 建物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海東의 敎國으로 이 어인 變相이랴. 寥寥한 文獻과 荒殘한 遺跡에서나마 塔相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所以然이 이 곳에 있다할까.
대저 삼국기의 사료는 모든 방면이 그러하지만 탑파의 조건 사실, 특히 목조 탑파의 건립 사실에 있어서도 요요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예로는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흥륜사 황룡사 기타의 소수 예가 있을 뿐이다. 백제의 미륵사탑에 관하여는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

이라 한 구중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란 일절로써 추고코자 하는 바이니 그 현 유적지는 전라북도 익산군 김마면 기산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최외한 석탑 일기와 초체가 다수 산재하여 있으며 일찍이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 박사로 말미암아 학계에 보고된 바 있었는데 그는 전설과 유적을 전반적으로 의심하고서 신라 문무왕 말년에 고구려의 종실 안승의 신라 래투의 사실에 부회시켜 통일 이후에 속할 사관으로써 입론하였더니(주15) 후에 그의 문하인 등도 해치랑(藤島 亥治郞, 후지시마 가이치로) 공학 박사는 그 유지를 다시 고찰한 후, 현존한 석탑만을 관야씨 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지지하고 사찰의 원기는 그 규모의 굉대함이라든지 가람의 배치 의태가 전설대로 백제 무왕대에 속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륙조 가람 배치법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삼국기 즉 백제 시대에 속할 가람일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주16)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금서룡 문학 박사도 문제한 바 있었고(주17) 필자 자신의 의견도 있으나 이는 후회에 서술하기로 하고 등도 박사의 고증에 의하여 현 사역을 보건대 현존한 석탑 구역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중의 서구에 속한 것으로 그는 이를 서탑원이라 가칭하고 이 구역의 동편으로 당탑지 의 토양이 또다시 구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동탑원지로써 칭하고 다시 이 양탑 원지 위로 품자형으로 일탑원지를 추정하여 전탑 삼소라는 것을 설정하고 동탑원과 중탑원에는 목조 탑파가, 서탑원의 석탑 형식과 같은 류의 탑파가 있었을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다시 더 구체적으로 상정할 자료가 없는 이상 백제의 목탑은 해결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돌이켜 신라에서의 상태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006-2大抵 三國期의 史料는 모든 方面이 그러하지만 塔婆의 造建 事實, 特히 木造 塔婆의 建立 事實에 있어서도 寥寥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有名한 例로는 百濟의 彌勒寺, 新羅의 興輪寺 皇龍寺 其他의 少數 例가 있을 뿐이다. 百濟의 彌勒寺塔에 關하여는 三國遺事 卷2 武王條에
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P007-1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
이라 한 句中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란 一節로써 推考코자 하는 바이니 그 現 遺跡地는 全羅北道 益山郡 金馬面 箕山里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崔嵬한 石塔 一基와 礎砌가 多數 散在하여 있으며 일찍이 關野貞 博士로 말미암아 學界에 報告된 바 있었는데 그는 傳說과 遺跡을 全般的으로 疑心하고서 新羅 文武王 末年에 高句麗의 宗室 安勝의 新羅 來投의 史實에 附會시켜 統一 以後에 屬할 寺觀으로써 立論하였더니(註15) 後에 그의 門下인 藤島 亥治郞 工學 博士는 그 遺址를 다시 考察한 後, 現存한 石塔만을 關野氏 說에 符合되는 것으로 支持하고 寺刹의 原基는 그 規模의 宏大함이라든지 伽藍의 配置 意態가 傳說대로 百濟 武王代에 屬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六朝 伽藍 配置法을 正統的으로 繼承한 三國期 即 百濟 時代에 屬할 伽藍일 것이라는 것을 主張한 바가(註16) 있었다. 이에 對하여는 今西龍 文學 博士도 問題한 바 있었고(註17) 筆者 自身의 意見도 있으나 이는 後回에 敍述하기로 하고 藤島 博士의 考證에 依하여 現 寺域을 보건대 現存한 石塔 區域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中의 西區에 屬한 것으로 그는 이를 西塔院이라 假稱하고 이 區域의 東便으로 堂塔址 의 土壤이 또다시 區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東塔院址로써 稱하고 다시 이 兩塔 院址 위로 品字形으로 一塔院址를 推定하여 殿塔 三所라는 것을 設定하고 東塔院과 中塔院에는 木造 塔婆가, 西塔院의 石塔 形式과 같은 類의 塔婆가 있었을 것을 立證하였다. 그러나 그 以上 다시 더 具體的으로 想定할 資料가 없는 以上 百濟의 木塔은 解決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問題를 돌이켜 新羅에서의 狀態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대저 불교가 신라에 전파되기는 삼국사기에 이른바 법흥왕 15년보다 그 이전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증명할 수 있으나 그러나 법흥왕대 불교가 국교로써 수립되기 전까지는 당탑의 장엄이 특히 있었을법하지 아니하니 삼국유사의 아도기라 전설 중에 보이는 칠처가람설은 너무 전설적인 것이므로 거론할 수 없고 신라의 최초 불찰로 역사상 가장 유명한 것은 흥륜사, 영흥사가 있으니 흥륜사는 법흥왕 14년 정미에 초창하여(주18) 법흥왕 22년 을묘에 대개하고 진흥왕 5년에 필성하였다 하고 영흥사 역 동대에 창위하였다 한다. 그러나 건축적 장엄은─특히 우리가 문제하는 탑파에 대하여는 삼국유사 권3 「興輪寺壁畫普賢條」조의 "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이란 한 구와 동서 권5 「金現感虎」 조의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라는 일 구절이 있을 뿐이요 유적으로도 하등 이 이상의 사실을 천발시킬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이후 3보의 융성을 따라 당탑의 조영은 연복년 증가하여 태청 천수간(진흥왕대)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성관을 이루게 되었으나 목조 탑파의 장엄은 의연히 찾기 어렵다. 다만 삼국유사 권5 "月明師兜率歌"중에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이란 구에서 내원(천주사)(주19) 탑파가 목조 탑파로서 그 안에 벽화 석가상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동서 「二惠同塵」 조에 "志鬼心火出燒其塔"이란 구에서 영묘사에 목탑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주20) 선덕왕대 창건이라는 경주 지림사에도 정광여래 사리각인 삼층탑이 있었다 하지만(주21) 고신라기의 목조 탑파의 대표적 작품으로 가장 구체적 문징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황룡사 구층구이 하나 있을 뿐이다. 삼국유사에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

/> 라 하는 것이 탑파 조영의 동기와 경과의 구체적 보고로서 가장 회자되어 있는 기록이며 신라 삼빈의 하나에 대한 유명한 사실이다. 현금 경주 내동면 구황리에 남아있는 초체에 의하여 추고되는 탑파의 대는 초층 평면이 약 73척 4지로 각 주(柱) 사이가 10척 4촌강의 7간4면인 49간 건물이라 중앙에는 폭 약 4척, 고 2척 7촌 5분의 입방형 돌기석면 위에 약 6촌 전후의 원형 요혈이 있는 찬주석이 놓여있다. 전거한 문례에 의하면 총고 225척의 탑파이라하나 이만한 평면으로서 구층탑이었다면 총고 적어도 삼사백척은 되었으리라고 한다.(주22) 비로소 그 보장함을 알 수 있거니와 조선에서는 물론이요 일본에도 이만한 기구의 탑파는 없었다 한다. 고려태조가 고지에 의하여 경중을 물었다는 신라 삼보의 하나요, 통업 기원을 위하여 효성한 탑파도 그것이요, 몽고병란에 회로될 때까지 누차의 개수를(주23) 힘쓴 것도 이 탑이요, 현종대 조유궁을 헐어서까지 중창한 것도(주24) 이 탑이니 혁조계선은 정치적 상탈이어니와 민족적으로 얼만한 존숭의 적이었든지 가히 알만하다. 지림사의 목조 탑파라는 것이 초력 평간 약 60척 7촌, 각주간 거리 6척 23촌의 삼층탑파로서 중앙 양주석이 폭 7촌 5분 심 약 5촌의 이중방혈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삼국기의 탑파라 하더라도 비교도 안 되는 예라 할 것이다.
쪽수▶P007-2大抵 佛敎가 新羅에 傳播되기는 三國史記에 이른바 法興王 15年보다 그 以前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法興王代 佛敎가 國敎로써 樹立되기 前까지는 堂塔의 壯嚴이 特히 있었을 법하지 아니하니 三國 ▶P008-1遺事의 阿道基羅 傳說 中에 보이는 七處伽藍說은 너무 傳說的인 것이므로 擧論할 수 없고 新羅의 最初 佛刹로 歷史上 가장 有名한 것은 興輪寺, 永興寺가 있으니 興輪寺는 法興王 14年 丁未에 草創하여(註18) 法興王 22年 乙卯에 大開하고 眞興王 5年에 畢成하였다 하고 永興寺 亦 同代에 創違하였다 한다. 그러나 建築的 莊嚴은─特히 우리가 問題하는 塔婆에 對하여는 三國遺事 卷3 「興輪寺壁畫普賢條」條의 "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이란 一句와 同書 卷5 「金現感虎」 條의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라는 一 句節이 있을 뿐이요 遺跡으로도 何等 이 以上의 事實을 闡發시킬 資料가 남아있지 않다. 爾後 3寶의 隆盛을 따라 堂塔의 造營은 年復年 增加하여 太清 天壽間(眞興王代)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盛觀을 이루게 되었으나 木造 塔婆의 壯嚴은 依然히 찾기 어렵다. 다만 三國遺事 卷5 "月明師兜率歌"中에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이란 句에서 內院(天柱寺)(註19) 塔婆가 木造 塔婆로서 그 안에 壁畵 釋迦像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同書 「二惠同塵」 條에 "志鬼心火出燒其塔"이란 句에서 靈廟寺에 木塔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註20) 善德王代 創建이라는 慶州 祗林寺에도 定光如來 舍利閣인 三層塔이 있었다 하지만(註21) 古新羅期의 木造 塔婆의 代表的 作品으로 가장 具體的 文徵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皇龍寺 九層球이 하나 있을 뿐이다. 三國遺事에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P009-1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
라 하는 것이 塔婆 造營의 動機와 經過의 具體的 報告로서 가장 膾炙되어 있는 記錄이며 新羅 三賓의 一에 對한 有名한 史實이다. 現今 慶州 內東面 九黃里에 남아있는 礎砌에 依하여 推考되는 塔婆의 大는 初層 平面이 約 73尺 4至로 各柱 間이 10尺 4寸强의 7間4面인 49間 建物이라 中央에는 幅 約 4尺, 高 2尺 7寸 5分의 立方形 突起石面 위에 約 6寸 前後의 圓形 凹穴이 있는 燦柱石이 놓여있다. 前擧한 文例에 依하면 總高 225尺의 塔婆이라하나 이만한 平面으로서 九層塔이었다면 總高 적어도 三四百尺은 되었으리라고 한다.(註22) 비로소 그 保壯함을 알 수 있거니와 朝鮮에서는 勿論이요 日本에도 이만한 機構의 塔婆는 없었다 한다. 麗太祖가 故智에 依하여 輕重을 물었다는 新羅 三寶의 一이요, 統業 祈願을 爲하여 効聲한 塔婆도 그것이요, 蒙古兵亂에 灰爐될 때까지 屢次의 改修를(註23) 힘쓴 것도 이 塔이요, 顯宗代 朝遊宮을 헐어서까지 重創한 것도(註24) 이 塔이니 革朝繼禪은 政治的 常奪이어니와 民族的으로 얼만한 尊崇의 的이었든지 可히 알만하다. 祗林寺의 木造 塔婆라는 것이 初曆 平間 約 60尺 7寸, 各柱間 距離 6尺 23寸의 三層塔婆로서 中央 樣柱石이 幅 7寸 5分 深 約 5寸의 二重方穴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三國期의 塔婆라 하더라도 比較도 안 되는 例이라 할 것이다.
각설 상술한 삼국기 탑파의 일이의 예는 즉 육조식 가람 배치법(일본서 말하는 백제 칠당 가람제라는 것)의 일탑식 가람 제창기의 예이니 탑파 중심의 가람 배치법이 중요시되던 한위 이래의 전통적 배치법에서 영향되던 경영이라 따라서 그 경영도 장위함이 본색이었으나 차차로 상설의 중요성이 미신적으로 고조됨을 따라 탑파의 배치는 수식적으로 도안적으로 라렬케 되어 김당(상전)에 대한 보처로서의 배설을 받게 되니 이것이 중국의 수당 이후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양탑식 가람제도의 발생 연기이였다. 이리하여 목조 탑파 그 자체도 가구에 치중하려던 웅도를 잃고 점차로 장식적 건물에 치우치는 경향이 있었으니 이러한 경향은 석탑의 변천에서 명료히 간취할 수 있으나 소수의 유례나마 목조 탑파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경향에 있는 탑파로 문헌이나 유적으로 전하여 있는 예를 모조리 긁어모아 사천왕사의 동서탑, 망덕사의 동서탑, 보문사의 동서탑 등을 들 수 있다.
쪽수▶P09-2却說 上述한 三國期 塔婆의 一二의 例는 即 六朝式 伽藍 配治法(日本서 말하는 百濟 七堂 伽藍制라는 것)의 一塔式 伽藍 制脹期의 例이니 塔婆 中心의 伽藍 配置法이 重要視되던 漢魏 以來의 傳統的 配置法에서 影響되던 經營이라 따라서 그 經營도 壯偉함이 本色이었으나 次次로 像設의 重要性이 迷信的으로 高調됨을 따라 塔婆의 配置는 修飾的으로 圖案的으로 羅列케 되어 金堂(像殿)에 對한 補處로서의 配設을 받게 되니 이것이 中國의 隋唐 以後의 影響을 받기 시작▶P10-1한 新羅統一 前後부터의 兩塔式 伽藍制度의 發生 緣起이였다. 이리하여 木造 塔婆 그 自體도 架構에 致重하려던 雄度를 잃고 漸次로 裝飾的 建物에 치우치는 傾向이 있었으니 이러한 傾向은 石塔의 變遷에서 明瞭히 看取할 수 있으나 少數의 遺例나마 木造 塔婆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傾向에 있는 塔婆로 文獻이나 遺跡으로 傳하여 있는 例를 모조리 긁어모아 四天王寺의 東西塔, 望德寺의 東西塔, 普門寺의 東西塔 等을 들 수 있다.
사천왕사(현 변주군 내동면 배반리 유사지)는 문무왕 15년에 당병 내침에 제하여 명랑법사의 신인 밀법에 의하여 호국양병코자 창립하였거니와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 제1책의 유지조사에 의하면

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

즉 층고는 부명이나 변장 13척 5촌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다. 동 보고서에는 다시 북동, 북서에 각기 방형토단에 상술한 탑지와 유사한 배열법을 갖고 있는 이기의 지형 탑지로 오인하고 소위 사천왕사라는 명칭에 부의시키기 위한 경영이였던듯이 립론하였지만 이는 요컨댄 가람배치법에 대한 부비한 식견의 소치이었고 북동, 북서의 탑지라는 것은 두은 경루, 고루(또는 종루)에 해당한 건물이였던 것이다. 이는 하여간에 우리는 탑지에서 발견되었다는 유명한 유물을 망각하여서는 아니된다. 즉 사천왕상을 반육고로 부조한 와각과(증장천, 지국천이 발견되었다) 화릉형(소위 간오형이란 것) 녹유추벽과 또 실상화만을 심각한 와전 등이니 설에 의하면 실상화만의 와전은 중앙에 깔리고 화릉형 녹유벽은 연식이 되어있었다 하며 사천왕벽은 벽간에 감식되었던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특히 필자가 흥미있게 생각하는 것은 삼국유사에 보이는 양지사석조에

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

라는 절이니 유래 공장의 천기로서 죽백에 성명을 남긴 자─효천의 잔성보다 더욱 영성한 조선에 있어 이와 같이 대서특서되어있을 뿐 아니라 현금 사천왕사지에서 발견된 벽전의 류─그 조법이 절묘 괴려 웅혼한 점에서 성당예풍에 손색을 보이지 않고 해동공예를 위하여 만장의 기염을 토하고 있는 이때 석량지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선덕왕조에 현적키 시작한" 그는 문무왕대까지 생존하여 그 절묘한 신기를 포만한 노기를 마음껏 발굴하였던 모양이니 석량지는 사천왕사로서 말미암아 그 성명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사천왕사는 석량지로 말미암아 오늘날 그 장엄이 다시 추상케 되니 묘호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0-2四天王寺(現 邊洲郡 內東面 排盤里 有寺址)는 文武王 15年에 唐兵 來侵에 際하여 明郎法師의 神印 密法에 依하여 護國讓兵코자 創立하였거니와 大正 11年度 古蹟調査報告書 第1冊의 遺址調査에 依하면
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
即 層高는 不明이나 邊長 13尺 5寸의 三間四至의 塔婆임을 알 수 있다. 同 報告書에는 다시 北東, 北西에 各其 方形土壇에 上述한 塔址와 類似한 配列法을 갖고 있는 二基의 地形 塔址로 誤認하고 所謂 四天王寺라는 名稱에 副意시키기 爲한 經營이였던듯이 立論하였지만 이는 要컨댄 伽藍配置法에 對한 不備한 識見의 所致이었고 北東, 北西의 塔址라는 것은 竇은 經樓, 鼓樓(또는 鐘樓)에 該當한 建物이였던 것이다. 이는 何如間에 우리는 塔址에서 發見되었다는 有名한 遺物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即 四天王像을 半肉高로 浮彫한 瓦覺과(增長天, 持國天이 發見되었▶P11-1다) 花菱形(所謂 干烏形이란 것) 綠釉甃甓과 또 實相花蔓을 深刻한 瓦塼 等이니 說에 依하면 實相花蔓의 瓦塼은 中央에 깔리고 花菱形 綠釉甓은 緣飾이 되어있었다 하며 四天王甓은 壁間에 嵌飾되었던 것이 아닐까 推測된다. 特히 筆者가 興味있게 생각하는 것은 三國遺事에 보이는 良志使錫條에
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
라는 一節이니 由來 工匠의 賤技로서 竹帛에 姓名을 남긴 者─曉天의 殘星보다 더욱 零星한 朝鮮에 있어 이와 같이 大書特書되어있을 뿐 아니라 現今 四天王寺址에서 發見된 甓塼의 類─그 彫法이 絕妙 瑰麗 雄渾한 點에서 盛唐藝風에 遜色을 보이지 않고 海東工藝를 爲하여 萬丈의 氣焰을 吐하고 있는 이때 釋良志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善德王朝에 現跡키 시작한" 그는 文武王代까지 生存하여 그 絕妙한 神技를 包滿한 老技를 마음껏 發掘하였던 모양이니 釋良志는 四天王寺로서 말미암아 그 聲名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四天王寺는 釋良志로 말이암아 오늘날 그 壯嚴이 다시 推想케 되니 妙好因緣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 사천왕사와 인연을 같이 하고 시대를 같이 하고 지역을 같이 하고 사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사찰이 있으니 이는 즉 망덕사이다. 삼국사기 권9 경덕왕 14년조에

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

라고 있는 이 주기가 우리에게 가장 흥미를 끄는 기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전거한 대정 11년도 고적조사보고서에 의하여 유적의 특히 탑지의 현상을 종합하여 보면 대략 4척고토단 위에 변장 2척 1촌 내외의 방형돌기가 있는 초석 10기가 각 석의 간격 약 3척 2‧3촌의 거리를 갖고 일변에 사매식 나열되어 있으니 변 총장18척 내외의 삼간사지의 탑파임을 알 수 있겠고 중앙의 찰주심석은 변장2척 1촌대의 팔각형으로 중앙에 이단의 요형공혈이 있다.
쪽수▶P11-2이 四天王寺와 因緣을 같이 하고 時代를 같이 하고 地域을 같이 하고 寺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寺刹이 있으니 이는 即 望德寺이다. 三國史記 卷9 景德王 14年條에
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
라고 있는 이 註記가 우리에게 가장 興味를 끄는 記錄이라 아니할 수 없다. 前擧한 大正 11年度 古蹟調査報告書에 依하여 遺跡의 特히 塔址의 現狀을 綜合하여 보면 ▶P12-1大略 4尺高土壇 위에 邊長 2尺 1寸 內外의 方形突起가 있는 礎石10基가 各石의 間隔 約 3尺 2‧3寸의 距離를 갖고 一邊에 四枚式 羅列되어 있으니 邊總長18尺內外의 三間四至의 塔婆임을 알 수 있겠고 中央의 擦柱心石은 邊長2尺 1寸大의 八角形으로 中央에 二段의 凹形孔穴이 있다.
이와 같이 변장 18척 내외의 삼간사지탑으로 층고가 13층이었다면 실로 괴기하게도 준초하였던 감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양탑간의 중심 거리─약 105척의 한격을 갖고 있으면서 삼국사기에 누대를 통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사실에 있어 상당한 고층이였던 듯은 하다. 장식의 공은 사천왕사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기당키 위한 사관이었으니 어찌 또한 소홀하였으랴 진주초석이 이미 유례없는 팔각의 교기를 정하였음에서도 장식의 화엄성을 대강 상상할 수 있다 하겠다.
쪽수▶P12-2이와 같이 邊長 18尺 內外의 三間四至塔으로 層高가 13層이었다면 實로 怪奇하게도 峻峭하였던 感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兩塔間의 中心 距離─約 105尺의 閒隔을 갖고 있으면서 三國史記에 屢代를 通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記錄이 있음을 볼 때 事實에 있어 相當한 高層이였던 듯은 하다. 裝飾의 功은 四天王寺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欺唐키 爲한 寺觀이었으니 어찌 또한 踈忽하였으랴 榛柱礎石이 이미 類例없는 八角의 巧技를 呈하였음에서도 裝飾의 華嚴性을 대강 想像할 수 있다 하겠다.
이 외에 역사상으로 불명하나 경주 내동면 보문리 김당평에 보문사지에 양탑지가 있다 한다. 등도 박사의 추고에 의하면 동서탑파의 거리 일칠육당척이요 삼간사지의 삼중탑으로서 각주간 8척 간격이라 하고 현금 서탑지에는 변장 약 4척 5촌대의 정방형 대석 위에 직경 약 4척 1촌 고 약 8촌 3분의 팔판연화형 연주심석이 있어 차종초석으로서는 망덕사의 그것보다 더 화려할 뿐 아니라 일본 전국에 있어서도 이만한 심초의 예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탑파의 화식─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상상은 그만두기로 하자.
쪽수▶P12-3이 外에 歷史上으로 不明하나 慶州 內東面 普門里 金堂坪에 普門寺址에 兩塔址가 있다 한다. 藤島 博士의 推考에 依하면 東西塔婆의 距離 一七六唐尺이요 三間四至의 三重塔으로서 各柱間 8尺 間隔이라 하고 現今 西塔址에는 邊長 約 4尺 5寸大의 正方形 臺石 위에 直徑 約 4尺 1寸 高 約 8寸 3分의 八辦蓮花形 椽柱心石이 있어 此種礎石으로서는 望德寺의 그것보다 더 華麗할 뿐 아니라 日本 全國에 있어서도 이만한 心礎의 例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塔婆의 華飾─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想像은 그만두기로 하자.
이상 빈약한 소수의 거례이나, 그러나 삼국기 탑파가 탑파 중심 사상에서 그 결구의 웅위에 치중하였다가 통일기로 들면서부터 탑규의 지위가 일개 보처의 의의로 폄하되어 결구보다도 조식에 엄중케 된 대체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조대한 잡석 주초에서 가공된 초석으로 화벽의 수법에서 팽벽의 수법으로, 지토조간에서 추벽의 조간, 유벽의 조간으로 초소한 용와에서 화엄된 와용으로(와당조법의 화려를 뜻함) 한마디로 말하면 동적 의의, 실본적 의의가 사라지고 정적으로 장식적으로 폄하되어갔다.
쪽수▶P12-4以上 貧弱한 少數의 擧例이나, 그러나 三國期 塔婆가 塔婆 中心 思想에서 그 結構의 雄偉에 置重하였다가 統一期로 들면서부터 塔葵의 地位가 一介 補處의 意義로 貶下되어 結構보다도 彫飾에 儼重케 된 大體의 過程을 살필 수 있다. ▶P13-1粗大한 雜石 柱礎에서 加工된 礎石으로 畵壁의 手法에서 膨壁의 手法으로, 地土槽間에서 甃甓의 槽間, 釉甓의 槽間으로 草踈한 茸瓦에서 華嚴된 瓦茸으로(瓦當彫法의 華麗를 뜻함) 一言以藏之하면 動的 意義, 實本的 意義가 사라지고 靜的으로 裝飾的으로 貶下되어갔다.
이러한 본의의 타락은 공업을 수성하여 안일로 퇴폐되어 들어가는 통일후〿의 신라사회에서는 구출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동기로 말미암아 석탑이 독특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지만─신흥 기세에 뛰놀던 고려의 창업기운에 의뢰치 않고서는 복활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던 것이다.
쪽수▶P13-2이러한 本意의 墮落은 功業을 遂城하여 安逸로 頹廢되어 들어가는 統一後〿의 新羅社會에서는 救出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動機로 말미암아 石塔이 獨特한 發展을 이루게 되었지만─新興 氣勢에 뛰놀던 高麗의 創業氣運에 依賴치 않고서는 復活될 수 없는 狀態에 이르렀던 것이다.
려태조의 십훈요가 얼마나 사료로서의 엄밀성을 가졌을까는 의문이지만 국가의 대업이 법력으로 말미암아 취술된다하여 사원 창작에 치력하였던 것만은 그 행적에 의하여 믿을만하니 창업 시초에 도내십찰을 창립한 것도 저간의 소식의 일단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

운운의 건탑으로 말미암은 호국창업의 우원관 〿〿 신라의 고지를 모방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탑파의 중흥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쪽수▶P13-3麗太祖의 十訓要가 얼마나 史料로서의 嚴密性을 가졌을까는 疑問이지만 國家의 大業이 法力으로 말미암아 就戌된다하여 寺院 創作에 致力하였던 것만은 그 行蹟에 依하여 믿을만하니 創業 始初에 都內十刹을 創立한 것도 這間의 消息의 一端을 傳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
云云의 建塔으로 말미암은 護國創業의 祐願觀 〿〿 新羅의 古智를 模倣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塔婆의 中興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지금 개경의 칠중탑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고려기 목조 탑파로서는 서경 중흥사의 구층탑(註29), 중흥사의 탑(註30), 개경 진관사의 구층탑(註31), 혜일 중광사탑(註32) 서〿 김강사의 탑(註33) 남원 만복사의 오중탑(註34) 개경 연복사의 오중탑 등을 문헌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중에 건축장엄이 제법 전하여 있는 것은 연복사의 오중탑파가 하나 있다. 고려도경 권17 사우, 광통보제사(즉 연복사) 조에

廣通普濟寺 在王府之南 泰安門內直北百餘步 寺額揭於官道南向 中門榜日神通之門 正殿極雄壯 過於王居 榜日羅漢〿殿(中略) 殿之西爲浮屠 五級高逾二百尺 後爲法堂 旁爲居(下略)

라 보이니 "五級高逾二百尺"도 고려 목탑파에 대한 유일한 구체적 보고이거니와 "殿之西爲浮屠"라는 것도 자미있는 배치법의 하나로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쪽수▶P13-4지금 開京의 七重塔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高麗期 木造 塔婆로서는 西京 重興寺의 九層塔(註29), 中興寺의 塔(註30), 開京 眞觀寺의 九層塔(註31), 慧日 重光寺塔(註32) 西〿 金剛寺의 塔(註33) 南原 萬福寺의 五重塔(註34) 開京 演福寺의 五重塔 等을 文獻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中에 建築壯嚴이 제법 傳하여 있는 것은 演福寺의 五重塔婆가 하나 있다. 高麗圖經 卷17 祠宇, 廣通普濟寺(即 演福寺) 條에
▶P14-1廣通普濟寺 在王府之南 泰安門內直北百餘步 寺額揭於官道南向 中門榜日神通之門 正殿極雄壯 過於王居 榜日羅漢〿殿(中略) 殿之西爲浮屠 五級高逾二百尺 後爲法堂 旁爲居(下略)
라 보이니 "五級高逾二百尺"도 高麗 木塔婆에 對한 唯一한 具體的 報告이거니와 "殿之西爲浮屠"라는 것도 滋味있는 配置法의 하나로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이곳에 가람 배치에 대하여 일언을 삽입하건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삼국기의 일탑식 가람에서는 자오선상에 남하여 문•탑•김당•강당이 순차로 놓이고 탑과 김당을 내정에 포함하고 강당과 문을 련락하여 사방형 랑무가 돌려 있고 승방과 식당이 따로 정연히 배치되니 이것을 칠당가람제라고 일본에서는 불렀던 것이다. 즉 탑과 김당이 남북으로 정연히 놓였던 것이니 이는 상설과 사리와가 평등의 지위를 가졌던 까닭이다. 그럼으로 일본에서는 이러한 의미로 당과 탑을 동서로 또는 서동으로 병치하는 가람 배치법을 일찍이 취하였으니 이것이 내량의 법륭사 법기사 법륜사 등의 "플랜"(평면)이었다. 즉 고의 탑과 광의 당을 좌우로 배치함에서 건축조형상 력의 평형이란 특이한 배치법 창안한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로 일본서 창안한 독특한 가람배치법이라 칭할 만한 것이어서 중국 조선에서 우금것 그 유례들을 볼 수 없었다. 조선의 신라통일 전후부터의 가람배치라는 것도 이미 술한 바와 같이 탑의 의의가 보처로서 폄하되어 각형랑무 안에 중심에 앉은 김당을 획위하기 위한 것처럼 좌우 량탑이 벌어지게 되고 북으로는 동서에 경루 고루가 배설되어 마치 이 오각이 골패의 관오모양으로 배치되었다가 선찰이 융성됨을 따라 가람배치는 마침내 잡연 부정하게 되었고 탑자의 위치도 정위가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한가지 연복사의 당탑과, 또 위에 말한 남원 만관사의 당탑배치가 동전서탑, 동탑서전의 형식을 갖고 있어 멀리 저 법륭사 법륜사 등과 동일한 배치를 가지고 있는 듯이 되어있으니 이곳에 일본의 창안이라는 상술한 배치법이 다시 검토를 받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다만 이곳의 조선에서의 예는 시대적으로 매우 뒤늦으며 또 만복사의 당탑배치라는 것은 사찰 그 자체가 인도의 고의를 본따(주35) 전체로 동향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므로 자료로써는 매우 희박한 점이 없지 않으나 전체로 자미있는 문제라 아니 할 수 없다.
쪽수▶P14-2이곳에 伽藍 配置에 對하여 一言을 揷入하건대 위에도 말한 바와 같이 三國期의 一塔式 伽藍에서는 子午線上에 南하여 門•塔•金堂•講堂이 順次로 놓이고 塔과 金堂을 內庭에 包含하고 講堂과 門을 連絡하여 四方形 廊廡가 돌려 있고 僧房과 食堂이 따로 整然히 配置되니 이것을 七堂伽藍制라고 日本에서는 불렀던 것이다. 即 塔과 金堂이 南北으로 整然히 놓였던 것이니 이는 像設과 舍利와가 平等의 地位를 가졌던 까닭이다. 그럼으로 日本에서는 이러한 意味로 堂과 塔을 東西로 또는 西東으로 並置하는 伽藍 配置法을 일찍이 取하였으니 이것이 奈良의 法隆寺 法起寺 法輪寺等의 "플랜"(平面)이었다. 即 高의 塔과 廣의 堂을 左右로 配置함에서 建築造型上 力의 平衡이란 特異한 配置法 創案한 것이었다. 이것은 事實로 日本서 創案한 獨特한 伽藍配置法이라 稱할 만한 것이어서 中國 朝鮮에서 于今것 그 類例들을 볼 수 없었다. 朝鮮의 新羅統一 前後부터의 伽藍配置라는 것도 이미 述한 바와 같이 塔의 意義가 補處로서 貶下되어 角形廊廡 안에 中心에 앉은 金堂을 獲衛하기 爲한 것처럼 左右 兩塔이 벌어지게 되고 北으로는 東西에 經樓 鼓樓가 配設되어 마치 이 五閣이 骨牌의 冠五모양으로 配置되었다가 禪刹이 隆盛됨을 따라 伽藍配置는 마침내 雜然 不整하게 되었고 塔姿의 位置도 定位가 없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한가지 演福寺의 堂塔과, 또 위에 말한 南原 萬關寺의 堂塔配置가 東殿西塔, 東塔西殿의 形式을 갖고 있어 멀리 저 法隆寺 法輪寺 等과 同一한 配置를 가지▶P15-1고 있는 듯이 되어있으니 이곳에 日本의 創案이라는 上述한 配置法이 다시 檢討를 받지 아니치 못하게 된다. 다만 이곳의 朝鮮에서의 例는 時代的으로 매우 뒤늦으며 또 萬福寺의 堂塔配置라는 것은 寺刹 그 自體가 印度의 古意를 본따(註35) 全體로 東向되었던 것인지 모르겠으므로 資料로써는 매우 稀薄한 點이 없지 않으나 全體로 滋味있는 問題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연복사의 당탑의 배치도 후에 그 위치가 변경되었던 듯하여 권근의 탑중창기문에는

演福實據城中闉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千餘權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其說備載舊籍 兹不贅陳云云

이라 있다. 이리하여 모처럼 조선에 하나 보이기 시작한 특별한 배치의 가람도 그 자료로서의 귀중성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그 이유로는 동기문 중에

王氏亭國五百年 屢更喪亂 寺之興廢 殆非一次 此塔之壞 不知的在何時

라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나 하여간 자료성을 다소 상실케 된 것은 가석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본문제로 돌아가서 고려 탑자로 또 이조 탑자로 가장 유명한 이 연복사탑의 장엄에 대하여 다시 고찰치 않으면 아니 되겠다.
쪽수▶P15-2그러나 이 演福寺의 堂塔의 配置도 後에 그 位置가 變更되었던 듯하여 權近의 塔重創記文에는
演福實據城中闉闠之側 本號唐寺 方言唐與大相似 亦謂大寺 爲屋最鉅 至千餘權 內鑿三池九井 其南又起五層之塔 以應風水 其說備載舊籍 兹不贅陳云云
이라 있다. 이리하여 모처럼 朝鮮에 하나 보이기 시작한 特別한 配置의 伽藍도 그 資料로서의 貴重性을 잃게 되고 말았으니 그 理由로는 同記文 中에
王氏亭國五百年 屢更喪亂 寺之興廢 殆非一次 此塔之壞 不知的在何時
라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나 何如間 資料性을 多少 喪失케 된 것은 可惜한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本問題로 돌아가서 高麗 塔姿로 또 李朝 塔姿로 가장 有名한 이 演福寺塔의 壯嚴에 對하여 다시 考察치 않으면 아니 되겠다.

至恭愍王 欲勞之而未就 後有狂儈長遠心者 夤緣權貴 優民伐材 卒亦罔成 恭讓君賴將相之力 復祖宗之緒 即位以來 事佛益力 爰命天珪等 募工興役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今乃竪 橫縱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覆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이라 한 것은 권근 중창기문의 한 절이거니와 "將訖厥功而中輟"한 것은 마침내 조선태조로 하여금 그 공덕을 거두게 함이었으니 초건이 이미 "以應風水"하기 위함이였고 중창이 또한 국태민안하기 위한 것이었음에(주36) 부구하고 고려실이 조선으로 말미암아 혁명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조선 태조로 하여금 "亦資衛敎利邦國 五層復建畢功役"이란 의식을 내었다 하면 이 얼마나 고집스러운 역사적 운명이냐. 복아리민지자로 해인사 고탑을 중수하였다는 사실과(註37) 함께 려태조의 건탑 이유와 선덕왕의 건탑 이유가 시대를 초월하여 완강히 계연을 맺고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5-3至恭愍王 欲勞之而未就 後有狂儈長遠心者 夤緣權貴 優民伐材 卒亦罔成 恭讓君賴將相之力 復祖宗之緒 即位以來 事佛益力 爰命天珪等 募工興役 辛未二月始事 掘舊址塡木石 以固厥基 迄今乃竪 橫縱六楹 克壯且廣 累至五層覆▶P16-1以扁石 將訖厥功 憲臣有言而中輟
이라 한 것은 權近 重創記文의 一節이거니와 "將訖厥功而中輟"한 것은 마침내 朝鮮太祖로 하여금 그 功德을 거두게 함이었으니 初建이 이미 "以應風水"하기 爲함이였고 重創이 또한 國泰民安하기 僞한 것이었음에(註36) 不拘하고 麗室이 朝鮮으로 말미암아 革命되고, 뿐만 아니라 다시 朝鮮 太祖로 하여금 "亦資衛敎利邦國 五層復建畢功役"이란 意識을 내었다 하면 이 얼마나 固執스러운 歷史的 運命이냐. 福阿利民之資로 海印寺 古塔을 重修하였다는 事實과(註37) 함께 麗太祖의 建塔 理由와 善德王의 建塔 理由가 時代를 超越하여 頑強히 繼緣을 맺고 있음에 놀라지 아니할 수 없다.

董工益勤 功乃生成 實申壬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朝鮮太祖卽位2年) 塗塈丹臒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輝暎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盧肖像

요컨댄─종횡 육함이라 하였으니 오간사지의 오층건물로 "覆以扁石"이라 하였으니 상륜의 형굉은 아니요 노반복발 이 형식을 말한 듯하며 "上安佛舍利"는 이 복발에 불사리를 안치함을 이른 것인 듯하며(주38) "中皮大藏具萬軸"이라 하였으니 층루까지 통하여 다닐 수 있었던 듯하며(주39) "下置毘盧備嚴飾"이라 한것은 의궤상 그 이유를 알 수 없으나 탑내존상으로 비로만 있었다면 일종 이례가 아니었을까. 즉 대체에 있어 탑파의 순수성이 매우 왜곡된 감이 있지 아니할까. 이것은 또한 당대 불교의 잡박성을 상징함이 아니였을까 대방의 교종를 바라는 바이다.
쪽수▶P16-2董工益勤 功乃生成 實申壬冬十有二月也 癸酉之春(朝鮮太祖卽位2年) 塗塈丹臒 翬飛雲表 鳥翔天際 金碧炫燿 輝暎半空 上安佛舍利 中庋大藏 下置毗盧肖像
要컨댄─縱橫六檻이라 하였으니 五間四至의 五層建物로 "覆以扁石"이라 하였으니 相輪의 形宏은 아니요 露盤覆鉢 이 形式을 말한 듯하며 "上安佛舍利"는 이 覆鉢에 佛舍利를 安置함을 이른 것인 듯하며(註38) "中皮大藏具萬軸"이라 하였으니 層樓까지 通하여 다닐 수 있었던 듯하며(註39) "下置毘盧備嚴飾"이라 한것은 儀軌上 그 理由를 알 수 없으나 塔內尊像으로 毘盧만 있었다면 一種 異例가 아니었을까. 即 大體에 있어 塔婆의 純粹性이 매우 歪曲된 感이 있지 아니할까. 이것은 또한 當代 佛敎의 雜駁性을 象徵함이 아니였을까 大方의 敎宗를 바라는 바이다.
각설 이씨 조선으로 들어와서의 최초의 목조 탑파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그후 어떠한 것이 또 경영되었는지는 졸연히 알기 어려우며 현재 조선의 목조 탑파 형식 건물로 남아 있는 것은 화순 쌍봉사의 삼중각과 보은, 법주사의 팔상전이 있을 뿐이다. 전자는 평상에 있어, 층고에 있어, 배치에 있어, 탑파의 모영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대웅전으로 이용되어 있어 내용적으로 다를 뿐더러 이층옥개도 상륜 복발 등 탑파로서의 없지 못할 규약적 양식을 갖지 아니하고 보통 전각식의 중옥형개를 가지고 있음에서 한 개의 준아위외한 고루 건물에 지나지 아니하니 문제되지 아니하며(주40) 보은 법주사의 건물은 사상적으론 탑파의 정신을 떠남이 있으나(유상전이라 불러 있는 까닭에) 조형상으론 탑파로서의 규약을 제법 준수하고 있는 데서 현금 조선의 유일한 목조 탑파라 아니할 수 없다.(주41) 사부에 의하면 인조 2년 벽암대사의 중창이라 하니 그 초창은 불명이거니와(주42) 현재의 양식은 거대한 석계 위에 변장 37척 5촌대의 오사지의 탑신이 놓여있다. 초창에는 사방에서 통하는 문이 중간마다 있고 제삼층 사층의 탑신은 삼간사지요 제오층은 탑신을 갖지 아니한 채 옥미가 놓여있다. 오포중앙의 사주식 건물로 단확이 베풀어져 있고 피와식이며 옥정에는 노반이 중첩되어 있고 조그만 복발 위에 오륜을 꿰어찬 찰간보주 끝에서 결색이 사출하여 전각사우에 매여 달렸고 각층 전각사우에 보탁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내부에 있어 일층이상은 물론 통치 못하게 되어있고 찰주사면에는 석가팔변상도가 각면 이부식 괘치되어있고 단 위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소불상 나한경들이 잡연히 놓여있으니 이 불상들은 없어진 용화전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지면에는 판상이 깔려있고 외벽은 전부 〿창이 뚫려 있으나 일부는 근대식 유리창으로 인하여 고치를 많이 잃고 제이층 외부 정면에는 팔상전이란 액이 붙어 있다. 상륜고는 약 13척, 탑총고는 약 80여척, 전체로 광폭의 도가 심함으로써 안정솔은 크나 찰간 기타 저왜한 감이 불무하다.(주43) 지금 동편으로 단각문을 연결한 토장이 쌓여 있으니 탑의 미관을 위하여, 탑의 존엄을 위하여 의당 허러침이 가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곳에도 이조기에 들어와서의 탑파의 지위가 얼마나 폄하되고 있었는가가 입증된다.
쪽수▶P16-3却說 李氏 朝鮮으로 들어와서의 最初의 木造 塔婆는 이것을 契機로 하여 그후 어떠한 것이 또 經營되었는지는 卒然히 알기 어려우며 現在 朝鮮의 木造 塔婆 形式 建物로 남아 있는 것은 和順 雙峯寺의 三重閣과 報恩, 法住寺의 捌相殿이 있을 뿐이다. 前者는 平商에 있어, 層高에 있어, 配置에 있어, 塔婆의 模影을 가지고 있으나, 그러나 大雄殿으로 ▶P17利用되어 있어 內容的으로 다를 뿐더러 二層屋蓋도 相輪 覆鉢 等 塔婆로서의 없지 못할 規約的 樣式을 갖지 아니하고 普通 殿閣式의 重屋形蓋를 가지고 있음에서 한 개의 峻峨危嵬한 高樓 建物에 지나지 아니하니 問題되지 아니하며(註40) 報恩 法住寺의 建物은 思想的으론 塔婆의 精神을 떠남이 있으나(柳相殿이라 불러 있는 까닭에) 造型上으론 塔婆로서의 規約을 제법 遵守하고 있는 데서 現今 朝鮮의 唯一한 木造 塔婆라 아니할 수 없다.(註41) 寺傅에 依하면 仁祖 2年 碧岩大師의 重創이라 하니 그 初創은 不明이거니와(註42) 現在의 樣式은 巨大한 石階 위에 邊長 37尺 5寸大의 五四至의 塔身이 놓여있다. 初創에는 四方에서 通하는 門이 中間마다 있고 第三層 四層의 塔身은 三間四至요 第五層은 塔身을 갖지 아니한 채 屋楣가 놓여있다. 五包重昻의 四注式 建物로 丹艧이 베풀어져 있고 皮瓦式이며 屋頂에는 露盤이 重疊되어 있고 조그만 覆鉢 위에 五輪을 꿰어찬 檫竿寶珠 끝에서 結索이 四出하여 轉角四隅에 매여 달렸고 各層 轉角四隅에 寶鐸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內部에 있어 一層以上은 勿論 通치 못하게 되어있고 擦柱四面에는 釋迦八變相圖가 各面 二部式 掛置되어있고 壇 위에 가장 아름답지 못한 小佛像 羅漢儆들이 雜然히 놓여있으니 이 佛像들은 없어진 龍華殿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 한다. 地面에는 板床이 깔려있고 外壁은 全部 〿窓이 뚫려 있으나 一部는 近代式 瑠璃窓으로 因하여 古致를 많이 잃고 第二層 外部 正面에는 捌相殿이란 額이 붙어 있다. 相輪高는 約 13尺, 塔總高는 約 80餘尺, 全體로 廣幅의 度가 甚함으로써 安定率은 크나 檫竿 其他 低矮한 感이 不無하다.(註43) 지금 東便으로 單脚門을 連結한 土墻이 쌓여 있으니 塔의 美觀을 爲하여, 塔의 尊嚴을 爲하여 宜當 허러침이 可할 것은 두말할 것 없다. 이곳에도 李朝期에 들어와서의 塔婆의 地位가 얼마나 貶下되고 있었는가가 立證된다.
이상으로써 우리는 조선 목탑파의 변천을 개관하였다. 삼국기의 생동적 순수성에서, 정적인 수식적인 것으로, 이어 다시 풍수적으로 미신적으로 잡신적으로 내용이 변천되는 동시에 조형양식도 점차 퇴폐부순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경로를 볼 수 있다. 사회의 변상을 짐작하고 문화의 변상을 짐작하고 신앙의 변상을 짐작한다면 가장 논리적인 인과적인 경과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다른 재료의 탑파를 관찰함에서 더욱 구체적인 지식을 얻을 것 같다.
쪽수▶P18-1以上으로써 우리는 朝鮮 木塔婆의 變遷을 槪觀하였다. 三國期의 生動的 純粹性에서, 靜的인 修飾的인 것으로, 이어 다시 風水的으로 迷信的으로 雜信的으로 內容이 變遷되는 同時에 造型樣式도 漸次 頹廢不純한 길로 떨어져 들어간 經路를 볼 수 있다. 社會의 變相을 斟酌하고 文化의 變相을 斟酌하고 信仰의 變相을 斟酌한다면 가장 論理的인 因果的인 經過이었다 할 것이다. 이러한 傾向은 다른 材料의 塔婆를 觀察함에서 더욱 具體的인 知識을 얻을 것 같다.































본문3: 2. 甓塔(或云博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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