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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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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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娑의 研究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6호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36년 11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1쪽 전체쪽 031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佛塔偈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後不休 <br/ ─慈藏作─
佛塔偈
萬代輪王三界主 雙林示滅幾千秋
眞身舍利今猶在 普使群生後不休 <br/ ─慈藏作─






본문


본문1: 서론


불가에 독특한 건축으로 탑파라는 것이 있으니 이는 범어 Stupa 파리어 ThuPa의 사음이라 불사리를 봉안하는 취상을 이름이나 후에 불교의 역사적 전개, 교리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석가의 유적 내지 경설의─말하자면 법사리의 숭배 목적으로 적취되는 건물, 즉 지제 현대문주1▶Chaitya[a 1]까지도 중화 이동에 있어서는 탑파라는 명칭 아래 총괄되어 있고 또다시 불사리·법사리를 호지하는 승려의 사리를 봉치한 경영까지도 사리의 의의가 광의로 해석되어 탑파로써 부르게 현대문주2▶되었다.[a 2]
쪽수▶P001佛家에 獨特한 建築으로 塔婆라는 것이 있으니 이는 梵語 Stupa 巴利語 ThuPa의 寫音이라 佛舍利를 奉安하는 聚相을 이름이나 後에 佛敎의 歷史的 展開, 教理의 發展으로 말미암아 釋迦의 遺跡 乃至 經說의 ─말하자면 法舍利의 崇拜 目的으로 積聚되는 建物, 即 支提 원문주1▶Chaitya[1]까지도 中華以東에 있어서는 塔婆라는 名稱 아래 總括되어 있고 ▶P002-1또다시 佛舍利·法舍利를 護持하는 僧侶의 舍利를 封置한 經營까지도 舍利의 意義가 廣義로 解釋되어 塔婆로써 부르게 원문주2▶되었다.[2]
이와 같이 탑파는 불가의 신앙 중심인─또는 신앙 전체인 불법승 삼보를 봉안하고 표치하고 기념하는 건물이라 불교 신앙 시대에 있어서 항상 가람의 중심을 이루었을 것은 물론이요 후에 비록 우상숭배‧유법숭배로 신앙 내용이 번천되어 조상‧회상‧사경‧간경의 의의가 고조되어 당전자장의 중요성이 늘어 탑파 중심 사상에 현대문주3▶다소의 변천이 있었다 하더라도[a 3] 그것이 원래가 불교인 이상, 불도인 이상, 사리 숭배는 근본적으로 포업할 수 없었고 또 여러 경전마다 사리 숭배, 조탑 공덕이 설교되는 한편 현대문주4▶민속적 신앙과의 혼융으로[a 4] 말미암아 조탑 행사는 미신적으로 유행되게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소로는 척촌에 미만하는 공예적인 토탑 옥탑 김탑으로부터 대로는 수십 수백척의 웅위한 고탑에 이르기까지 다종다양의 형식 탑파가 조영되고 또 한편으로는 화탑, 인탑, 각탑, 조탑 등 도상적탑파까지 성용케되었다.
쪽수▶P002-2이와 같이 塔婆는 佛家의 信仰 中心人─또는 信仰 全體인 佛法僧 三寶를 奉安하고 標幟하고 記念하는 建物이라 佛敎 信仰 時代에 있어서 恒常 伽藍의 中心을 이루었을 것은 勿論이요 後에 비록 偶像崇拜‧遺法崇拜로 信仰 內容이 樊遷되어 造像‧繪像‧寫經‧刊經의 意義가 高調되어 堂殿慈藏의 重要性이 늘어 塔婆中心思想에 원문주3▶多少의 變遷이 있었다 하더라도[3] 그것이 元來가 佛敎인 以上, 佛徒인 以上, 舍利崇拜는 根本的으로 抛嶪할수 없었고 또 여러 經典마다 舍利崇拜, 造塔功德이 說敎되는 한편 원문주4▶民俗的信仰과의 混融으로[4] 말미암아 造塔行事는 迷信的으로 流行되게까지 이르렀다. 이리하여 小로는 尺寸에 未滿하는 工藝的인 土塔 玉塔 金塔으로부터 大로는 數十 數百尺의 雄偉한 高塔에 이르기까지 多種多樣의 形式塔婆가 造營되고 또 한편으로는 畫塔, 印塔, 刻塔, 彫塔等 圖像的塔婆까지 盛用케되었다.
이와 같이 잡다한 종류와 형식의 탑파가 조성되고 건립됨에는 반드시 그 동기를 이루는 사상적 배경 즉 교리의 변천이 커다란 맥전을 이루고 있나니 이러한 의미에서 교리사 상에서 내다본 탑파의 변천이란 것이 불학도로서 가장 중요한 호제목의 하나일 것이요 또 긴급한 연구 재료일 것이로되 교리 교사에 대하여는 전혀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감히 당치 못할 것이므로 문제를 제한하여 필자는 다못(다만) 미술사적 견지에서 조선 탑파 형식의 변천을 고찰하여 볼까 한다.
쪽수▶P002-3이와 같이 雜多한 種類와 形式의 塔婆가 造成되고 建立됨에는 반드시 그 動機를 이루는 思想的 背景 即 敎理의 變遷이 커다란 脈塼을 이루고 있나니 이러한 意味에서 敎理史 上에서 내다본 塔婆의 變遷이란 것이 佛學徒로서 가장 重要한 好題目의 하나일 것이요 또 緊急한 硏究 材料일 것이로되 敎理 敎史에 對하여는 全혀 門外漢인 筆者로서는 敢히 當치 못할 것이므로 問題를 制限하여 筆者는 다못 美術史的 見地에서 朝鮮 塔婆 形式의 變遷을 考察하여 볼까 한다.
탑파가 이미 불가에 특유한 건물이라 할진댄 그 기원이 불교와 함께 있었을 듯하나 그러나 인도에서의 탑파의 기원에 대하여는 일찍이 파라문교 시대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석가재세(在世) 시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석가입멸 후에 발생된 것이라고도 하여 그 설이 분분하여 아주 귀일되지 못한 채로 있고 중국에서의 초건된 기원설에 관하여는 고승전에

康僭會 吳赤烏十年(A.D.247)至建康 孫權分求舍利旣得之 權爲造塔 晋帝過江更修飾之 此中國造塔始也

라 하였으나 후한서 도겸전 중에

(笮融) 大起浮屠寺 註浮屠佛也 上累金盤 下爲層樓 又堂閣周回 可容三千許人云云

의 구가 있어 후한 영제 중평 6년(A.D.189)으로부터 현대문주5▶헌제 초평 4년(A.D.193) 간에 이미 탑파의 건립 사실이 있었음을 말하였으니[a 5] 그 기원의 구원함을 可히 알 수 있다.
쪽수▶P002-4塔婆가 이미 佛家에 特有한 建物이라 할진댄 그 起源이 佛敎와 함께 있었을 듯하나 그러나 印度에서의 塔婆의 起▶P003-1源에 對하여는 일찍이 婆羅門敎 時代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釋迦在世 時에도 있었다 하며 또는 釋迦入滅 後에 發生된 것이라고도 하여 그 說이 粉粉하여 아주 歸一되지 못한 채로 있고 中國에서의 初建된 起源說에 關하여는 高僧傳에
康僭會 吳赤烏十年(A.D.247)至建康 孫權分求舍利旣得之 權爲造塔 晋帝過江更修飾之 此中國造塔始也
라 하였으나 後漢書 陶謙傳 中에
(笮融) 大起浮屠寺 註浮屠佛也 上累金盤 下爲層樓 又堂閣周回 可容三千許人云云
의 句가 있어 後漢 靈帝 中平 6年(A.D.189)으로부터 원문주5▶獻帝 初平 4年(A.D.193) 間에 이미 塔婆의 建立 事實이 있었음을 말하였으니[5] 그 起源의 久遠함을 可히 알 수 있다.
그후 조선의 불교 수입은 현대문주6▶소수림왕 2년 이전에 민간에서 이미 사신한 자 있었다는 것이 논의되어 있으나[a 6] 현대문주7▶고구려의 최초 불찰인 성문사라는 것이 성문이란 일공관의 변용이었다 할진댄[a 7] 탑파의 기원은 적어도 이후에 있었을 것은 물론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사실이 보이지 않고 오직 현대문주8▶요동성 육왕탑의 전설과 평양성 서 대보산 하의 영탑 전설이 가장 황탄한 설화 형식으로 전하여 있고[a 8] 북사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현대문주9▶백제에 있어서도 탑파의 초건 년대를 종잡을 수 없는 채 탑장 아비지와 미륵사 천왕사[a 9] 현대문주10▶도양사의 탑기가[a 10] 있을 뿐이요 현대문주11▶가락국에는 신라에 불교가 수입되기 전에 가장 전설적인 금관성 파사석탑기가 보이고[a 11] 현대문주12▶신라 또한 가장 뒤늦은 교국임에도 불구하고 탑파 초건에 관한 특별한 기록이 없는 채 흥륜사의 탑기가 후대에 보인다.[a 12] 이와 같이 문징의 부비는 해동 탑파의 기원을 용역히 정립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당대의 불교 신앙이 불상 사리를 동시예 숭배하여 전탑 경영이 상당히 발전된 위진 육조의 영향 하에 계발된 것인즉 불법 전수와 함께 또는 얼마 후에 탑파의 조영이 있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으니 이러한 견지에서 해동의 조탑 기원을 가정한다면 소수림왕 2년 전후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고국양왕 말년까지(A.D.372-392) 전후 20년간에는 적어도 최외한 경영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쪽수▶P003-2그後 朝鮮의 佛敎 輸入은 원문주6▶小獸林王 2年 以前에 民間에서 이미 私信한 者 있었다는 것이 論議되어 있으나[6] 원문주7▶高句麗의 最初 佛刹인 省門寺라는 것이 省門이란 一公館의 變用이었다 할진댄[7] 塔婆의 起源은 적어도 이後에 있었을 것은 勿論이나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事實이 보이지 않고 오직 원문주8▶遼東城 育王塔의 傳說과 平壤城 西 大寶山 下의 靈塔 傳說이 가장 荒誕한 說話 形式으로 傳하여 있고[8] 北史에 "有僧尼多寺塔"으로써 일컫고 있던 원문주9▶百濟에 있어서도 塔婆의 初建 年代를 종잡을 수 없는 채 塔匠 阿非知와 彌勒寺 天王寺[9] 원문주10▶道讓寺의 塔記가[10] 있을 뿐이요 원문주11▶駕洛國에는 新羅에 佛敎가 輸入되기 前에 가장 傳說的인 金官城 婆娑石塔記가 보이고[11] 원문주12▶新羅 또한 가장 뒤늦은 敎國임에도 不拘하고 塔婆 初建에 關한 特別한 記錄이 없는 채 興輪寺의 塔記가 後代에 보인다.[12] 이와 같이 文徵의 不備는 海東 塔婆의 起源을 容易히 定立치 못하게 하고 있으나, 그러나 當代의 佛敎 信仰이 佛像 舍利를 同時예 崇拜하여 殿塔 經營이 相當히 發展된 魏晉 六朝의 影響 下에 啓發된 것인즉 佛法 傳授와 함께 또는 居無何에 塔婆의 造營이 있었을 것으로 想定할 수 있으니 이러한 見▶P004-1地에서 海東의 造塔 起源을 假定한다면 小獸林王 2年 前後부터 "下敎崇信佛法求福" 하였다는 故國讓王 末年까지(A.D.372-392) 前後 20年間에는 적어도 崔嵬한 經營이 있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즉 조선 탑파의 기원을 이룬 탑파는 어떠한 종류의 어떠한 형식의 것이었을까. 조선에서의 조탑 시원을 이미 고구려에 둔 이상 이 문제는 즉 고구려의 탑파에 대한 문제로 환치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는 현대문주13▶이동충태(伊東忠太, 이토 주타) 박사가 일찍이 간단한 시론을 보였지만[a 13]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다시 문제삼는 학자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요컨대 유물, 유문이 가히 빙거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필자─ 또한 새삼스레 무슨 호증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입론할 여지도 없는 바이지만 서술의 순서상 일언을 비치 아니할 수 없으니, 대저 중국 자체에 있어서도 인도 원래의 복분식 전탑 형식 가부색 가왕의 작리부도에서 췌득하여 중국식으로 발전하게 된 누각식 부도와가 그 어느 것이 중국 탑파의 시원을 이루었을까가 문제되어 있는 이때 고분 축조 형식에 벌써 서역적 투팔 천정 수법이 성용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황탄한 전설이나마 요동성 육왕탑과 같이 인도식 복분 형식의 토탑 기록을 가장 오랜 전설인 듯이 가지고 있는 고구려에 있어 탑파의 시원 형식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실로 난문에 전하는 과제라 아니할 수 없다.
쪽수▶P004-2然則 朝鮮 塔婆의 起源을 이룬 塔婆는 어떠한 種類의 어떠한 形式의 것이었을까. 朝鮮에서의 造塔 始源을 이미 高句麗에 둔 以上 이 問題는 即 高句麗의 塔婆에 對한 問題로 換置되지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 問題에 對하여는 원문주13▶伊東忠太 博士가 일찍이 簡單한 試論을 보였지만[13] 結末을 보지 못한 채 다시 問題삼는 學者가 나지 아니하니 이는 要컨대 遺物, 遺文이 可히 憑據할만한 것이 없는 탓이라 筆者─ 또한 새삼스레 무슨 好證이 있을 바가 아니니 다시 立論할 餘地도 없는 바이지만 叙述의 順序上 一言을 費치 아니할 수 없으니, 大抵 中國 自體에 있어서도 印度 原來의 覆盆式 塼塔 形式 迦賦色 迦王의 雀離浮屠에서 揣得하여 中國式으로 發展하게 된 樓閣式 浮屠와가 그 어느 것이 中國 塔婆의 始源을 이루었을까가 問題되어 있는 이때 古墳 築造 形式에 벌써 西域的 鬪八 天井 手法이 盛用되어 있고 한편으론 비록 荒誕한 傳說이나마 遼東城 育王塔과 같이 印度式 覆盆 形式의 土塔 記錄을 가장 오랜 傳說인 듯이 가지고 있는 高句麗에 있어 塔婆의 始源 形式을 어떻게 設定할 것인가─實로 難問에 展하는 課題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중국 자체의 원시 탑파설에 있어 상술한 바와 같이 두 가지 계통설이 대립하고 있다 하나 인도식 복분부도는 위진 이후에 경영된 운강 기타 석굴의 조벽에서 매우 왜곡된 형식으로서 누각식 탑파가 동시에 볼 수 있을 뿐임에 반하여 누각식 탑파 형식은 비록 조형상으론 다시 고고한 실례(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전에 말한 착융의 목조 탑파 건립 사실이 문헌을 통하여 최고한 례로 전하여 있고 북위 효문제가 낙양으로 천도한 후(A.D.493)─경영한 용문의 석굴사에서는 복분식 탑파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육조 이후 수당을 통하여 누각식 탑파가 중국 탑파의 본류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역사를 통하여 복분식 부도로는 극히 전설적인 전거의 요동성 육왕탑이 고고한 일례로 남아 있고 현대문주14▶〿일기로 들어와서 통도사 계단이란[a 14] 것이 하나 전하여 있고 그리고 고려 이후에 들어와 다소의 류형이 있다 하나 〿〿 왜곡된 복분 형식에 한한 점에서 조선의 탑파도 원래가 중국의 탑파 규범 아래 누각식 탑파가 조종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조선 탑파의 시원 형식은 누각식 탑파계에로 돌려봄이 가장 순리일 듯싶다. 이러한 이산 하에서 필자는 목조 탑파로부터 고찰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쪽수▶P004-3그러나 이곳에 다시 생각하여 볼 것은 中國 自體의 原始 塔婆說에 있어 上述한 바와 같이 두 가지 系統說이 對立하고 있다 하나 印度式 覆盆浮屠는 魏晉 以後에 經營된 雲岡 其他 石窟의 彫壁에서 매우 歪曲된 形式으로서 樓閣式 塔婆가 同時에 볼 수 있을 뿐임에 反하여 樓閣式 塔婆 形式은 비록 造型上으론 다시 高古한 實例를 볼 수 없다 하더라도 前에 말한 笮融의 木造 塔婆 建立 事實이 文獻을 通하여 最古한 例로 傳하여 있고 北魏 孝文帝가 洛陽으로 遷都한 後(A.D.493)─經營한 龍門의 石窟寺에서는 覆盆式 塔婆를 볼 수 없게 되었으며 다시 또 六朝 以後 隋唐을 通하여 樓閣式 塔婆▶P005-1가 中國 塔婆의 本流를 이르고 있으며 또 〿〿에 있어서도 歷史를 通하여 覆盆式 浮屠로는 極히 傳說的인 前擧의 遼東城 育王塔이 高古한 一例로 남아 있고 원문주14▶〿一期로 들어와서 通度寺 戒壇이란[14] 것이 하나 傳하여 있고 그리고 高麗 以後에 들어와 多少의 類形이 있다 하나 〿〿 歪曲된 覆盆 形式에 限한 點에서 朝鮮의 塔婆도 原來가 中國의 塔婆 規範 아래 樓閣式 塔婆가 祖宗을 이루었던 것으로 따라서 朝鮮 塔婆의 始源 形式은 樓閣式 塔婆系에로 돌려봄이 가장 順理일 듯싶다. 이러한 理山 下에서 筆者는 木造 塔婆로부터 考察의 실마리를 열어 보고자 하는 바이다.


































본문2: 1. 木造塔婆


기술한 바와 같이 인도에서의 탑파의 본원적 형식은 토양으로 조축한 복분식 부도이었다. 그러나 복분의 반구양식이 그 기단과 함께 적취에 반한 공덕의 관념으로 말미암마 탑고됨에 따라 복분의 탑신은 포탄형으로 수고하여지고 기단의 층도도 중후하게 되며, 이어 곧 기단과 탑신에 시설되었던 난순이 건축적 방실의 형태로 변천되며 또는 탑중거불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탑실을 고의로 경영하게 되니 탑파가 전체로 루각식 건물로 번안될 인연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건타라 지방에 작리부도라는 목층고탑이 가부색가왕대에 벌써 건조되었다는 것도 그 발생 과정에 하등의 비약적 무리를 느끼게 하지 않는 까닭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당대에 목조의 고루건축으로서는 세계적 발전을 보이고 있던 중국으로서 법현 이하 다수한 구법승으로 말미암아 발견되고 전파된 이 작리부도가 간접 직접으로 중국 탑파 조성에 중요한 규범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서역제국을 통하여 습득한 당대의 탑파 지식이 원본적 복분 형식을 탐득하였다느니보다 당대에 한창 유행되고 성용되어 있던 기루식 탑파가 먼저 유전되었을 것이 순리로 상상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위서 석로지에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라고 있어 탑파의 형식이 천축구상에 의하였다 하나 복분식 부도와는 전연 다른 층루식 건물일 뿐더러 한인이 그로써 곧 탑규의 정형인 듯이 여기고 있는 소식을 알 수 있다. 즉 중국에서의 탑파에 대한 이러한 상식은 이어 곧 조선에 있어서도 그 실정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삼국유사가 전하는 삼보감통록의 요동성 육왕탑이라는 것은 잘해야 발해대 사실의 오전에 부과한 것이었을 것이요 거론할 재료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목조 탑파야말로 조선 탑위의 시원이었고 조종이었으니 다만 교화가 편파된 지 1500여년에 문헌 상으로도 전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현물로서도 이조 중엽 이후에 속하는─ 탑파의 의의를 상실하고 있는 이기의 고루 건물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해동의 교국으로 이 어인 변상이랴. 요요한 문헌과 황잔한 유적에서나마 탑상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까닭이 이곳에 있다할까.
쪽수▶P005-2己述한 바와 같이 印度에서의 塔婆의 本源的 形式은 土壤으로 造築한 覆盆式 浮屠이었다. 그러나 覆盆의 半球樣式이 그 基壇과 함께 積聚에 伴한 功德의 觀念으로 말미암마 塔高됨에 따라 覆盆의 塔身은 砲彈形으로 秀高하여지고 基壇의 層度도 重後하게 되며, 이어 곧 基壇과 塔身에 施設되었던 欄楯이 建築的 房室의 形態로 變遷되며 또는 塔中居佛의 思想으로 말미암아 塔室을 故意로 經營하게 되니 塔婆가 全體로 樓閣式 建物로 飜案될 因緣이 이러한 데부터 있었던 것이다. 健陀羅 地方에 雀離浮屠라는 木層高塔이 迦賦色迦王代에 벌써 建造되었다는 것도 그 發生 過程에 何等의 飛躍的 無理를 느끼게 하지 않는 所以然이 이러한데 있거니와 當代에 木造의 高樓建築으로서는 世界的 發展을 보이고 있던 中國으로서 法顯 以下 多數한 求法僧으로 말미암아 發見되고 傳播된 이 雀離浮屠가 間接 直接으로 中國 塔婆 造成에 重要한 規範을 이루지 아니할 수 없었을 것이요 또 西域諸國을 通하여 拾得한 當代의 塔婆 知識이 原本的 覆盆 形式 ▶P006-1을 探得하였다느니보다 當代에 한창 流行되고 盛用되어 있던 騎樓式 塔婆가 먼저 流傳되었을 것이 順理로 想像되는 바이니 그러므로 魏書 釋老志에
凡宮塔制度 猃依天竺舊狀而重構之 從一級至三五七九 世人相承 謂之浮圖 或云佛圖
라고 있어 塔婆의 形式이 天竺舊狀에 依하였다 하나 覆盆式 浮屠와는 全然 다른 層樓式 建物일 뿐더러 漢人이 그로써 곧 塔葵의 定形인 듯이 여기고 있는 消息을 알 수 있다. 即 中國에서의 塔婆에 對한 이러한 常識은 이어 곧 朝鮮에 있어서도 그 實情을 같이 하였을 것이니 그러므로 三國遺事가 傳하는 三寶感通錄의 遼東城 育王塔이라는 것은 잘해야 渤海代 事實의 誤傳에 不過한 것이었을 것이요 擧論할 材料도 못된다 할 것이 아닐까. 이렇게 보면 木造 塔婆야말로 朝鮮 塔萎의 始源이었고 祖宗이었으니 다만 敎化가 遍播된 지 1500餘年에 文獻 上으로도 傳하여 온 것이 그리 많지 못하고 現物로서도 李朝 中葉 以後에 屬하는─ 塔婆의 意義를 喪失하고 있는 二基의 高樓 建物이 남아 있을 뿐이니 "龍象擇徒 爲寰中之福田 大小乘法 爲京國之慈雲 他方菩落 出現於世 西域名憎 降臨於境"하던 海東의 敎國으로 이 어인 變相이랴. 寥寥한 文獻과 荒殘한 遺跡에서나마 塔相을 엿보지 아니할 수 없는 所以然이 이 곳에 있다할까.
대저 삼국기의 사료는 모든 방면이 그러하지만 탑파의 조건 사실, 특히 목조 탑파의 건립 사실에 있어서도 요요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유명한 예로는 백제의 미륵사, 신라의 흥륜사 황룡사 기타의 소수 예가 있을 뿐이다. 백제의 미륵사탑에 관하여는 삼국유사 권2 무왕조에

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

이라 한 구중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란 일절로써 추고코자 하는 바이니 그 현 유적지는 전라북도 익산군 김마면 기산리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최외한 석탑 일기와 초체가 다수 산재하여 있으며 일찍이 관야정(關野貞, 세키노 다다시) 박사로 말미암아 학계에 보고된 바 있었는데 그는 전설과 유적을 전반적으로 의심하고서 신라 문무왕 말년에 고구려의 종실 안승의 신라 래투의 사실에 부회시켜 통일 이후에 속할 사관으로써 입론하였더니(주15) 후에 그의 문하인 등도 해치랑(藤島 亥治郞, 후지시마 가이치로) 공학 박사는 그 유지를 다시 고찰한 후, 현존한 석탑만을 관야씨 설에 부합되는 것으로 지지하고 사찰의 원기는 그 규모의 굉대함이라든지 가람의 배치 의태가 전설대로 백제 무왕대에 속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륙조 가람 배치법을 정통적으로 계승한 삼국기 즉 백제 시대에 속할 가람일 것이라는 것을 주장한 바가(주16) 있었다. 이에 대하여는 금서룡 문학 박사도 문제한 바 있었고(주17) 필자 자신의 의견도 있으나 이는 후회에 서술하기로 하고 등도 박사의 고증에 의하여 현 사역을 보건대 현존한 석탑 구역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중의 서구에 속한 것으로 그는 이를 서탑원이라 가칭하고 이 구역의 동편으로 당탑지 의 토양이 또다시 구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동탑원지로써 칭하고 다시 이 양탑 원지 위로 품자형으로 일탑원지를 추정하여 전탑 삼소라는 것을 설정하고 동탑원과 중탑원에는 목조 탑파가, 서탑원의 석탑 형식과 같은 류의 탑파가 있었을 것을 입증하였다. 그러나 그 이상 다시 더 구체적으로 상정할 자료가 없는 이상 백제의 목탑은 해결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를 돌이켜 신라에서의 상태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006-2大抵 三國期의 史料는 모든 方面이 그러하지만 塔婆의 造建 事實, 特히 木造 塔婆의 建立 事實에 있어서도 寥寥하니 지금 알 수 있는 가장 有名한 例로는 百濟의 彌勒寺, 新羅의 興輪寺 皇龍寺 其他의 少數 例가 있을 뿐이다. 百濟의 彌勒寺塔에 關하여는 三國遺事 卷2 武王條에
一日王與夫人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彌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藍於此地 因所願也 ▶P007-1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食 殿塔廊廡各三所創之 額曰彌勒寺云云
이라 한 句中의 "殿塔廊廡各三所創之"란 一節로써 推考코자 하는 바이니 그 現 遺跡地는 全羅北道 益山郡 金馬面 箕山里에 남아 있다. 이곳에는 지금도 崔嵬한 石塔 一基와 礎砌가 多數 散在하여 있으며 일찍이 關野貞 博士로 말미암아 學界에 報告된 바 있었는데 그는 傳說과 遺跡을 全般的으로 疑心하고서 新羅 文武王 末年에 高句麗의 宗室 安勝의 新羅 來投의 史實에 附會시켜 統一 以後에 屬할 寺觀으로써 立論하였더니(註15) 後에 그의 門下인 藤島 亥治郞 工學 博士는 그 遺址를 다시 考察한 後, 現存한 石塔만을 關野氏 說에 符合되는 것으로 支持하고 寺刹의 原基는 그 規模의 宏大함이라든지 伽藍의 配置 意態가 傳說대로 百濟 武王代에 屬할 것으로 또는 적어도 六朝 伽藍 配置法을 正統的으로 繼承한 三國期 即 百濟 時代에 屬할 伽藍일 것이라는 것을 主張한 바가(註16) 있었다. 이에 對하여는 今西龍 文學 博士도 問題한 바 있었고(註17) 筆者 自身의 意見도 있으나 이는 後回에 敍述하기로 하고 藤島 博士의 考證에 依하여 現 寺域을 보건대 現存한 石塔 區域은 "殿塔廊廡各三所創之"라고 한 것 中의 西區에 屬한 것으로 그는 이를 西塔院이라 假稱하고 이 區域의 東便으로 堂塔址 의 土壤이 또다시 區가 있음으로써 이곳을 東塔院址로써 稱하고 다시 이 兩塔 院址 위로 品字形으로 一塔院址를 推定하여 殿塔 三所라는 것을 設定하고 東塔院과 中塔院에는 木造 塔婆가, 西塔院의 石塔 形式과 같은 類의 塔婆가 있었을 것을 立證하였다. 그러나 그 以上 다시 더 具體的으로 想定할 資料가 없는 以上 百濟의 木塔은 解決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問題를 돌이켜 新羅에서의 狀態를 보지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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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7-2大抵 佛敎가 新羅에 傳播되기는 三國史記에 이른바 法興王 15年보다 그 以前에 있었을 것이 여러가지로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法興王代 佛敎가 國敎로써 樹立되기 前까지는 堂塔의 壯嚴이 特히 있었을 법하지 아니하니 三國 ▶P008-1遺事의 阿道基羅 傳說 中에 보이는 七處伽藍說은 너무 傳說的인 것이므로 擧論할 수 없고 新羅의 最初 佛刹로 歷史上 가장 有名한 것은 興輪寺, 永興寺가 있으니 興輪寺는 法興王 14年 丁未에 草創하여(註18) 法興王 22年 乙卯에 大開하고 眞興王 5年에 畢成하였다 하고 永興寺 亦 同代에 創違하였다 한다. 그러나 建築的 莊嚴은─特히 우리가 問題하는 塔婆에 對하여는 三國遺事 卷3 「興輪寺壁畫普賢條」條의 "殿塔及草樹土石皆發異香"이란 一句와 同書 卷5 「金現感虎」 條의 "新羅俗 每當仲春 初八至十五日 都人士女 兢德興輪寺之殿塔 爲商會"라는 一 句節이 있을 뿐이요 遺跡으로도 何等 이 以上의 事實을 闡發시킬 資料가 남아있지 않다. 爾後 3寶의 隆盛을 따라 堂塔의 造營은 年復年 增加하여 太清 天壽間(眞興王代)에는 벌써 "寺寺星張, 塔塔雁行" 하는 盛觀을 이루게 되었으나 木造 塔婆의 壯嚴은 依然히 찾기 어렵다. 다만 三國遺事 卷5 "月明師兜率歌"中에 "童入內院塔中而隱 茶珠在南壁畵慈氏像前"이란 句에서 內院(天柱寺)(註19) 塔婆가 木造 塔婆로서 그 안에 壁畵 釋迦像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 同書 「二惠同塵」 條에 "志鬼心火出燒其塔"이란 句에서 靈廟寺에 木塔이 있었음을 알 수 있고(註20) 善德王代 創建이라는 慶州 祗林寺에도 定光如來 舍利閣인 三層塔이 있었다 하지만(註21) 古新羅期의 木造 塔婆의 代表的 作品으로 가장 具體的 文徵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皇龍寺 九層球이 하나 있을 뿐이다. 三國遺事에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慈藏)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幤帛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徳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乃 以寳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来 経營木石 伊于龍春 一云 龍樹 幹蠱 率小匠二百人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㓕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 皆隱不現 匠於是攺悔 畢成其塔 刹柱記云 鐵盤已上高四十二尺 已下一百八十三尺 慈藏以五台所授舍利百粒 分安於柱中 ▶P009-1并通度寺戒壇及大和寺塔, 以副池龍之請 大和寺在阿由縣南今蔚州, 亦藏師所創也 樹塔之後 天地開泰 三韓爲一 豈非塔之霊䕃乎
라 하는 것이 塔婆 造營의 動機와 經過의 具體的 報告로서 가장 膾炙되어 있는 記錄이며 新羅 三賓의 一에 對한 有名한 史實이다. 現今 慶州 內東面 九黃里에 남아있는 礎砌에 依하여 推考되는 塔婆의 大는 初層 平面이 約 73尺 4至로 各柱 間이 10尺 4寸强의 7間4面인 49間 建物이라 中央에는 幅 約 4尺, 高 2尺 7寸 5分의 立方形 突起石面 위에 約 6寸 前後의 圓形 凹穴이 있는 燦柱石이 놓여있다. 前擧한 文例에 依하면 總高 225尺의 塔婆이라하나 이만한 平面으로서 九層塔이었다면 總高 적어도 三四百尺은 되었으리라고 한다.(註22) 비로소 그 保壯함을 알 수 있거니와 朝鮮에서는 勿論이요 日本에도 이만한 機構의 塔婆는 없었다 한다. 麗太祖가 故智에 依하여 輕重을 물었다는 新羅 三寶의 一이요, 統業 祈願을 爲하여 効聲한 塔婆도 그것이요, 蒙古兵亂에 灰爐될 때까지 屢次의 改修를(註23) 힘쓴 것도 이 塔이요, 顯宗代 朝遊宮을 헐어서까지 重創한 것도(註24) 이 塔이니 革朝繼禪은 政治的 常奪이어니와 民族的으로 얼만한 尊崇의 的이었든지 可히 알만하다. 祗林寺의 木造 塔婆라는 것이 初曆 平間 約 60尺 7寸, 各柱間 距離 6尺 23寸의 三層塔婆로서 中央 樣柱石이 幅 7寸 5分 深 約 5寸의 二重方穴이 있다는 것쯤은 비록 三國期의 塔婆라 하더라도 比較도 안 되는 例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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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9-2却說 上述한 三國期 塔婆의 一二의 例는 即 六朝式 伽藍 配治法(日本서 말하는 百濟 七堂 伽藍制라는 것)의 一塔式 伽藍 制脹期의 例이니 塔婆 中心의 伽藍 配置法이 重要視되던 漢魏 以來의 傳統的 配置法에서 影響되던 經營이라 따라서 그 經營도 壯偉함이 本色이었으나 次次로 像設의 重要性이 迷信的으로 高調됨을 따라 塔婆의 配置는 修飾的으로 圖案的으로 羅列케 되어 金堂(像殿)에 對한 補處로서의 配設을 받게 되니 이것이 中國의 隋唐 以後의 影響을 받기 시작▶P10-1한 新羅統一 前後부터의 兩塔式 伽藍制度의 發生 緣起이였다. 이리하여 木造 塔婆 그 自體도 架構에 致重하려던 雄度를 잃고 漸次로 裝飾的 建物에 치우치는 傾向이 있었으니 이러한 傾向은 石塔의 變遷에서 明瞭히 看取할 수 있으나 少數의 遺例나마 木造 塔婆에서도 보지 못할 바 아니니 이러한 傾向에 있는 塔婆로 文獻이나 遺跡으로 傳하여 있는 例를 모조리 긁어모아 四天王寺의 東西塔, 望德寺의 東西塔, 普門寺의 東西塔 等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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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四天王寺(現 邊洲郡 內東面 排盤里 有寺址)는 文武王 15年에 唐兵 來侵에 際하여 明郎法師의 神印 密法에 依하여 護國讓兵코자 創立하였거니와 大正 11年度 古蹟調査報告書 第1冊의 遺址調査에 依하면
南方東塔의 土壇高 4尺 3寸으로 礎石이 12枚가 있어 東西南北으로 各四枚式 配列되어있고(即 三間四至의 建物이다) 中央에 一大礎石(即 榛柱心石)이 놓여있다. 各礎石의 間隔은 5尺 1寸이요 礎列의 一邊長은 23尺 5寸이다. 礎石의 形狀은 比較的 簡單하고 側礎는 花崗石으로서 邊長 2尺 高 1寸의 方形突起가 있을 뿐이요 中心 礎石도 略同形이나 突起邊長은 3尺 8寸餘, 高는 3寸이요 中央에 1尺과 8寸大의 二段方形의 凹形孔穴이있다. 西塔址도 大概 같고 東西塔址의 中心距離는 約 135尺이다. 以上大意抄譯
即 層高는 不明이나 邊長 13尺 5寸의 三間四至의 塔婆임을 알 수 있다. 同 報告書에는 다시 北東, 北西에 各其 方形土壇에 上述한 塔址와 類似한 配列法을 갖고 있는 二基의 地形 塔址로 誤認하고 所謂 四天王寺라는 名稱에 副意시키기 爲한 經營이였던듯이 立論하였지만 이는 要컨댄 伽藍配置法에 對한 不備한 識見의 所致이었고 北東, 北西의 塔址라는 것은 竇은 經樓, 鼓樓(또는 鐘樓)에 該當한 建物이였던 것이다. 이는 何如間에 우리는 塔址에서 發見되었다는 有名한 遺物을 忘却하여서는 아니된다. 即 四天王像을 半肉高로 浮彫한 瓦覺과(增長天, 持國天이 發見되었▶P11-1다) 花菱形(所謂 干烏形이란 것) 綠釉甃甓과 또 實相花蔓을 深刻한 瓦塼 等이니 說에 依하면 實相花蔓의 瓦塼은 中央에 깔리고 花菱形 綠釉甓은 緣飾이 되어있었다 하며 四天王甓은 壁間에 嵌飾되었던 것이 아닐까 推測된다. 特히 筆者가 興味있게 생각하는 것은 三國遺事에 보이는 良志使錫條에
釋良志 未詳祖考鄉邑 唯現跡於善德王朝(中略) 旁通雜譽 神妙絕比 叉善筆札 靈廟丈六三尊‧天王像‧並殿塔之瓦 天王寺塔下八部神將 法林寺主佛三尊‧左右金剛神等 皆所塑也 (下略)
라는 一節이니 由來 工匠의 賤技로서 竹帛에 姓名을 남긴 者─曉天의 殘星보다 더욱 零星한 朝鮮에 있어 이와 같이 大書特書되어있을 뿐 아니라 現今 四天王寺址에서 發見된 甓塼의 類─그 彫法이 絕妙 瑰麗 雄渾한 點에서 盛唐藝風에 遜色을 보이지 않고 海東工藝를 爲하여 萬丈의 氣焰을 吐하고 있는 이때 釋良志를 눈앞에 그려보지 아니할 수 없다. "善德王朝에 現跡키 시작한" 그는 文武王代까지 生存하여 그 絕妙한 神技를 包滿한 老技를 마음껏 發掘하였던 모양이니 釋良志는 四天王寺로서 말미암아 그 聲名을 오늘에 다시 살렸고, 四天王寺는 釋良志로 말이암아 오늘날 그 壯嚴이 다시 推想케 되니 妙好因緣이라 아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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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1-2이 四天王寺와 因緣을 같이 하고 時代를 같이 하고 地域을 같이 하고 寺觀을 거의 같이 한 듯한 寺刹이 있으니 이는 即 望德寺이다. 三國史記 卷9 景德王 14年條에
望德寺塔動 唐令狐澄新羅國記曰其國爲唐立此寺故以爲名兩塔相對髙十三層忽震動開合如欲傾倒者數日其年禄山亂疑其應也
라고 있는 이 註記가 우리에게 가장 興味를 끄는 記錄이라 아니할 수 없다. 前擧한 大正 11年度 古蹟調査報告書에 依하여 遺跡의 特히 塔址의 現狀을 綜合하여 보면 ▶P12-1大略 4尺高土壇 위에 邊長 2尺 1寸 內外의 方形突起가 있는 礎石10基가 各石의 間隔 約 3尺 2‧3寸의 距離를 갖고 一邊에 四枚式 羅列되어 있으니 邊總長18尺內外의 三間四至의 塔婆임을 알 수 있겠고 中央의 擦柱心石은 邊長2尺 1寸大의 八角形으로 中央에 二段의 凹形孔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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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2-2이와 같이 邊長 18尺 內外의 三間四至塔으로 層高가 13層이었다면 實로 怪奇하게도 峻峭하였던 感이 없지 않으나, 그러나 兩塔間의 中心 距離─約 105尺의 閒隔을 갖고 있으면서 三國史記에 屢代를 通하여 "二塔相擊"이니 "二塔戰"이니 하는 記錄이 있음을 볼 때 事實에 있어 相當한 高層이였던 듯은 하다. 裝飾의 功은 四天王寺만큼 차질 수 없다 하더라도 欺唐키 爲한 寺觀이었으니 어찌 또한 踈忽하였으랴 榛柱礎石이 이미 類例없는 八角의 巧技를 呈하였음에서도 裝飾의 華嚴性을 대강 想像할 수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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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2-3이 外에 歷史上으로 不明하나 慶州 內東面 普門里 金堂坪에 普門寺址에 兩塔址가 있다 한다. 藤島 博士의 推考에 依하면 東西塔婆의 距離 一七六唐尺이요 三間四至의 三重塔으로서 各柱間 8尺 間隔이라 하고 現今 西塔址에는 邊長 約 4尺 5寸大의 正方形 臺石 위에 直徑 約 4尺 1寸 高 約 8寸 3分의 八辦蓮花形 椽柱心石이 있어 此種礎石으로서는 望德寺의 그것보다 더 華麗할 뿐 아니라 日本 全國에 있어서도 이만한 心礎의 例를 볼 수 없다 하였으니 이에 따른 塔婆의 華飾─ 또한 대단하였을 것이나 想像은 그만두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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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2-4以上 貧弱한 少數의 擧例이나, 그러나 三國期 塔婆가 塔婆 中心 思想에서 그 結構의 雄偉에 置重하였다가 統一期로 들면서부터 塔葵의 地位가 一介 補處의 意義로 貶下되어 結構보다도 彫飾에 儼重케 된 大體의 過程을 살필 수 있다. ▶P13-1粗大한 雜石 柱礎에서 加工된 礎石으로 畵壁의 手法에서 膨壁의 手法으로, 地土槽間에서 甃甓의 槽間, 釉甓의 槽間으로 草踈한 茸瓦에서 華嚴된 瓦茸으로(瓦當彫法의 華麗를 뜻함) 一言以藏之하면 動的 意義, 實本的 意義가 사라지고 靜的으로 裝飾的으로 貶下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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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2이러한 本意의 墮落은 功業을 遂城하여 安逸로 頹廢되어 들어가는 統一後#의 新羅社會에서는 救出할 수 없는 일이요─이러한 動機로 말미암아 石塔이 獨特한 發展을 이루게 되었지만─新興 氣勢에 뛰놀던 高麗의 創業氣運에 依賴치 않고서는 復活될 수 없는 狀態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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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3麗太祖의 十訓要가 얼마나 史料로서의 嚴密性을 가졌을까는 疑問이지만 國家의 大業이 法力으로 말미암아 就戌된다하여 寺院 創作에 致力하였던 것만은 그 行蹟에 依하여 믿을만하니 創業 始初에 都內十刹을 創立한 것도 這間의 消息의 一端을 傳하는 것이라 하겠지만
昔新羅造九層塔 ○皇龍寺塔 遂成一統之業 今欲開京建七層塔 西京建九層塔 冀借玄功除群醜 合三韓爲一家(註28)
云云의 建塔으로 말미암은 護國創業의 祐願觀 〿〿 新羅의 古智를 模倣한 만큼 이로 말미암아 塔婆의 中興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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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4지금 開京의 七重塔이란 것은 어떠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高麗期 木造 塔婆로서는 西京 重興寺의 九層塔(註29), 中興寺의 塔(註30), 開京 眞觀寺의 九層塔(註31), 慧日 重光寺塔(註32) 西〿 金剛寺의 塔(註33) 南原 萬福寺의 五重塔(註34) 開京 演福寺의 五重塔 等을 文獻에서나마 찾아볼 수 있다. 이 中에 建築壯嚴이 제법 傳하여 있는 것은 演福寺의 五重塔婆가 하나 있다. 高麗圖經 卷17 祠宇, 廣通普濟寺(即 演福寺) 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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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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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2. 甓塔(或云博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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