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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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8일 (금) 15:14 판 (본문1-1: (1)양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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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전세제도의 성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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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田稅制度의 成立過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4 발행기관
저자 박시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96쪽 종료쪽 148쪽 전체쪽 53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이 소편의 목적은, 이조가 전 조(朝) 고려의 퇴폐된 토지제도를 개혁하여 한 개의 새로운 전제(田制)를 확립한 제공작 중, 특히 전세제도에 관한 것에 대하여, 그 확립의 전말과 제도의 내용을 구명하는 데 있다. 대개 이조의 전세제도는 태조가 자신의 권력으로써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한 과전법에 의하여 잠정적인 편법을 발견하였고, 그 후 태종 조(朝)의 다소의 수정을 거쳐, 마침내 세종 조(朝)에 이르러 결정적인 대변혁을 거쳐 가지고, 세조 이후 경국대전에 등재되어, 그 이후 길이 만세불역지법(萬世不易之法)으로 시행하려던 것이니 이 소편의 당면적인 토구(討究)의 대상은 즉 경국대전 소재 전세관계 제조문의 내면적인 해석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96-1이 小篇의 目的은, 李朝가 前朝 高麗의 頹廢된 土地制度를 改革하야 한 箇의 새로운 田制를 確立한 諸工作中, 特히 田稅制度에 關한 것에 對하야, 그 確立의 顚末과 制度의 內容을 究明하는 데 있다. 大概 李朝의 田稅制度는 太祖가 自身의 權力으로써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한 科田法에 依하야 暫定的인 便法을 發見하얐고, 그 後 太宗朝의 多少의 修正을 거처, 마침내 世宗朝에 이르러 決定的인 大變革을 거처 가지고, 世祖 以後 經國大典에 登載되여, 厥後 기리 萬世不易之法으로 施行하랴든 것이니 이 小篇의 當面的인 討究의 對象은 即 經國大典 所載 田稅關係 諸條文의 內面的인 解釋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본문


본문1: 1.공법 이전의 수세법


이조 최초의 전조에 관한 법제는 고려 공양왕 3년에 발포된 소위 ‘과전법’ 중의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가 주문이 되어 있다.
쪽수▶P96-2李朝 最初의 田租에 關한 法制는 高麗 恭讓王 三年에 發布된 所謂「科田法」 中의 次揭 一條가 主文이 되어 있다.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고려사 권78 식화지

쪽수▶P97-1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穀三十斗(○○○○○) 此外有橫斂者 以臟論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

위의 조는 세종 조(朝)의 공법이 시행되기까지 유효하는 법이니, 이에 대하여 차례대로 해석을 시도하고자 한다.
쪽수▶P97-2右一條는 世宗朝의 貢法이 施行되기까지 有效하는 法이니, 이에 對하야 逐次 解釋을 試코자 한다.
위의 조의 해석에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잠깐 해혹을 하여 둘 것이 있다. 즉 과전법 중, 위에 든 전조(○○)에 관한 규정에 계속하여,
쪽수▶P97-3右條의 解釋에 드러가기 前에 여기서 暫間 解惑을 하야 둘 것이 있다.即 科田法 中, 右揭 田租(○○)에 關한 規定에 繼續하여,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쪽수▶P97-4

除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外 凡有田者皆納() 水田一結 白米二斗 早田一結 黄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이라는 조가 있는데, 이것은 전세(○○)에 관한 규정이다. 그러면 조(租)와 세(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국가가 직접 수납하는 공과로 1결에 30두씩 마련이요, 이에 대한 ()는 능침·창고·궁사·공해 소속의 일반 공전과 공신전이라는 특별한 사전과를 제외한 일절의 전 즉 과전·직전·별사전·군전 등의 모든 사전과, 향·진·역·관 등의 모든 외역전과의 소유자(점유자)가 그들에게 사급된 수화전 혹은 경작전의 소득 중에서 국가에 납부하는 바, 감축된(○○○) ()로 1결에 2두씩 마련이다. 따라서 일반 공전은 조 이외에 다시 세를 바치는 것은 없다. 국가에서 조를 수납하는 전과 세를 수납하는 전은 최초부터 구별되어 있다. 환언하면 조는 일반 전에 대한 본래의 공과요, 세는 특정한 사인에게 수조권 또는 경작권을 부여한 전에 대하여 국가가 전연 이를 방임하지 않고 그들의 수입의 일부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감축된 조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초에는 조와 세의 이름을 명확히 구분하였으나 후에는 점점 ‘조’자를 사용하지 않고 종래의 조도 ‘세’라고 칭하게 되었다. 물론 경국대전 등에는 ‘조’자를 일절 사용하지 안 하였다. 양자는 본질적으로 하등의 차이가 없는 것인 이상 두 용어의 통일은 조금도 불가가 없었던 것이다. 이 소편에 있어 ‘조’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의미의 용어니 독자는 이를 살피기 바란다.
쪽수▶P97-5이라는 一條가 있는데, 이것은 田稅(○○)에 關한 規定이다. 그러면 租와 稅는 어떻게 다른 것이냐 하면, ()는 國家가 直接 收納하는 公課로 一結에 三十斗씩 마련이요, 此에 對한 ()는 陵寢·倉庫·宮司·公廨所屬의 一般 公田과 功臣田이라는 特別한 私田과를 除外한 一切의 田 即 科田·職田·別賜田·軍田 等의 諸私田과, 鄕·津·驛·舘 等의 諸外役田과의 所有者(占有者)가 그들에게 賜給된 收和田 或은 耕作田의 所得 中에서 國家에 納付하는 바, 減縮된(○○○) ()로 一結에 二 斗式 마련이다. 따라서 一般公田은 租以 外에 다시 稅를 바치는 것은 없다. 國家에서 租를 收納하는 田과 稅를 收納하는 田은 最初부터 區別되여 있다. 換言하면 租는 一般 田에 對한 本來의 公課요, 稅는 特定한 私人에게 收租權 又는 耕作權을 賦與한 田에 對하야 國家가 全然 此를 放任하지 않고 그들의 收入의 一部를 갈라서 거두는, 말하자면 減縮된 租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最初에는 租와 稅의 名을 明確히 區分하얐으나 後에는 漸々 「租」字를 使用하지 않고 從來의 租도 「稅」라고 稱하게 되였다. 勿論 經國大典 等에는「租」字를 一切 使用하지 안 하였다. 兩者는 本質的으로 何等의 差異가 없는 것인 以上 두 用語의 統一은 조금도 不可가 없었던 것이다. 이 小篇에 있어 「稅」라고 부르는 것도 또한 이러한 意味의 用語니 讀者는 이를 諒하기 바란다.


































본문1-1: (1)양전법


과전법 조문에 1결 30두라 하였으니, 먼저 ‘결’로 따지는 양전법을 설명할 필요가 있다.
쪽수▶P97-6科田法 條文에 一結 三十斗라 하얐으니, 먼저 「結」로 따지는 量田法을 說明할 必要가 있다.
①양전척⋯⋯양전(전지 측량)의 기초가 되는 양전척(○○○)의 제도는 고려 조(朝)에서 이조로 그냥 인계된 것인데 세종실록 12년 8월 무인조에
쪽수▶P97-7①量田尺⋯⋯量田(田地測量)의 基礎가 되는 量田尺(○○○)의 制▶P98-1度는 高麗朝에서 李朝로 그냥 引繼된 것인데 世宗實錄 十二年 八月 戊寅條에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쪽수▶P98-2

惣制河演上言 自前朝 只以上中下三等定制 將農夫手 二指計十 爲上田尺 二指計五 三指計五 爲中田尺 三指計十 爲下田尺

이라 하고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에는
쪽수▶P98-3이라 하고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에는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쪽수▶P98-4

舊制 田品只有上中下 所量之尺 三等各異 上田尺 二十指 中田尺 二十五指 下田尺 三十指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일절의 전은 위선 그 비척(肥瘠)의 차이에 의하여 상 중 하 3등급에 구별된다. 이리하여 이 3종전을 측량하는 양전척은 각각 다르다. 3종 양전척을 결정한 최초의 표준은 정당한 농부의 2지(생각건대 제2지와 제3지였을 것이다)를 밀착하여 그 횡격(橫隔)의 선을 좇아 이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전장을 상전척(○○○) 1척으로 하고 같은 법으로 2지를 5도, 3지(생각건대 제2 제3 제4지였을 것이다)를 5도 거듭하여 그 전장을 가지고 중전척(○○○) 1척으로 하고 3지를 10도 거듭하여 하전척(○○○) 1척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3종 척장의 비는 대강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쪽수▶P98-5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一切의 田은 위선 그 肥瘠의 差異에 依하야 上中下 三等級에 區別된다. 이리하야 이 三種田을 測量하는 量田尺은 各々 다르다. 三種 量田尺을 決定한 最初의 標準은 正常한 農夫의 二指(생각컨대 第二指와 第三指이었을 것이다)를 密着하야 그 橫隔의 線을 쫓아 此를 거듭하기를 열 번한 후 그 全長을 上田尺(○○○) 一尺으로 하고 同法으로 二指를 五度, 三指(생각컨댄 第二 第三 第四指이었을 것이다)를 五度 거듭하야 그 全長을 가지고 中田尺(○○○) 一尺으로 하고 三指를 十度 거듭하야 下田尺(○○○) 一尺으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三種尺長의 比는 大綱 20:25:30=4:5:6이 되는 셈이다.
②결부제⋯⋯상 중 하 3종전의 각 지적법은 다음과 같다. 무릇 지적의 단위를 ()이라 칭하고 결의 100분의 1을 ()라 하고 부의 10분의 1을 ()이라 하고 속의 10분의 1을 ()라 한다. 이 모든 등수법은 거의 고려 조(朝) 이전부터의 원칙인 모양이다. 또 고려 조(朝)의 양전법은 문종 23년의 제정에 의하여 양전척(○○○) 대척을 장1보(○○)라 하고 33보 4방을 지적 1결(○○)로 정하였다고려사 권78. 식화지 전제 경리조. 그런데 실제의 양전에 있어서는 고려말의 현제(現制)로서는 3보 3척 4방을 가지고 1부로 하고 있었다. 이 제(制)에 의하면 1부는 12·25평방보 3.5(보)×2.5(보)=12.25평방보가 되어 1결 1,089평방보 33(법)×33(보)=1089평방법의 100분의 1보다 넓게 된다. 이 실지 측량상의 오차는 아마 문종의 결법 제정 당시부터 그랬을 것인데 산법의 미발달에서 나온 착오인가 한다. 공양왕 원년에 장차 대두할 신 정권에 의하여 전반적인 양전이 실행되었는데 그때도 물론 이 3보3척 4방위 1부의 방법에 의거하여 이조로 넘어 온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 5년에 다시 전국적 양전을 할 때에 이 불합리를 시정하기 위하여, 1부의 지적을 축소시켜 3보1척8촌(3·3보)4방으로 하였다. 이에 의하여 1부는 10·89평방보 3.3(보)×3.3(보)=10,89평방보가 되어 1결의 100분의 1에 해당하게 되었으나 지방에 종래 실제(○○)행하여져(○○○○) 오던(○○) 1결(○○)의 면적(1부12·25평방보의 100배 1,235평방보)은 상당한 축소를 보게 되어 인민에 대하여는 결국 그만한 증세가 되어 버린 셈이다(1결당 세액은 부동하는 고로). 이에 세종 10년 10월에 이르러 전세 경멸(輕滅)의 의미에서 태종 5년 이래의 신제(新制)를 폐하고 다시 1부는 전과 같이 3보3척 4방으로 하고, 1결을 넓혀 35보 4방으로 하였다. 이리하여 1결은 1,235평방보 35(보)×35(보)=1225평방보가 되어 다시 1부의 100배에 해당하게 되었다세종실록 10년 10월 신사조 참조.
쪽수▶P98-6②結負制⋯⋯上中下 三種田의 各 地積法은 다음과 같다. 무릇 地積의 單位를 ()이라 稱하고 結의 百分之一을 ()라 하고 負의 十分之一을 ()이라 하고 束의 十分之一을 ()라 한다. 이 諸等數法은 거의 高麗朝 以前부터의 原則인 모양이다. 또 高麗朝의 量田法은 文宗 二十三年의 制定에 依하야 量田尺(○○○) 六尺을 長一步(○○)라 하고 三十三步 四方을 地積 一結(○○)로 定하얐다高麗史 卷七十八. 食貨志田制經理條. 그런데 實際의 量田에 있어서는 高麗末의 現制로서는 三步三尺 四方을 가지고 一負로 하고 있었다. 此制에 依하면 一負는 一二·二五平方步 3.5(步)×2.5(步)=12.25平方步가 되여 一結 一, 〇八九平方步 33(法)×33(步)=1089平方法의 百分之一보다 넓게 된다. 이 實地 測量 上의 誤差는 아마 文宗의 結法 制定 當時부터 그랬을 것인데 算法의 未發達에서 나온 錯誤인가 한다. 恭讓王 元年에 將次 擡頭할 新政權에 依하야 全般的인 量田이 實行되였는데 그때도 勿論 이 三步三尺 四方爲 一負의 方法에 依據하야 李朝로 넘어 온 것이다. 그렇다가 太宗 五年에 다시 全國的 量▶P99-1田을 할 때에 이 不合理를 是正하기 爲하야, 一負의 地積을 縮少시켜 三步一尺八寸(三·三步)四方으로 하얐다. 이에 依하야 一負는 1〇·八九平方步 3.3(步)×3.3(步)=10,89平方步가 되여 一結의 百分之一에 該當하게 되였으나 他方에 從來 實際(○○)行하야저(○○○○) 오든(○○) 一結(○○)의 面積(一負一二·二五平方步의 百倍 一,二三五平方步)은 相當한 縮少를 보게 되여 人民에 對하야는 結局 그만한 增稅가 되여 버린 셈이다(一結當 稅額은 不動하는 故로). 이에 世宗 十年 十月에 이르러 田稅輕滅의 意味에서 太宗 五年 以來의 新制를 廢하고 다시 一負는 前과 같이 三步三尺 四方으로 하고, 一結을 넓히어 三十五步 四方으로 하았다. 이리하야 一結은 一,二三五平方步 35(步)×35(步)=1225平方步가 되여 다시 一負의 百倍에 該當하게 되였다世宗實錄 十年 十月 辛巳條 參照.
이 최후의 방법은 세종의 공법 제정 때까지 지속되어 온 것인데 이 법에 의한 상중하(○○○) 3종전(○○○) 각1결의(○○○○) 실적(○○)은 두루 척제에 의한 지나의 경묘법으로 환산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세종실록 26년 6월 갑신조 용비어천가 제73장 주석.
쪽수▶P99-2이 最後의 方法은 世宗의 貢法 制定 때까지 持續되여 온 것인데 此法에 依한 上中下(○○○) 三種田(○○○) 各一結의(○○○○) 實積(○○)은 周尺制에 依한 支那의 頃畝法으로 換算한다면 다음과 같았다 한다世宗實錄 二十六年 六月 甲申條 龍飛御天歌 第七十三章 註.































본문1-2: (2)수세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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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 2.공법 시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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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1: (1)세종 12년의 공법 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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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2: (2)세종 18년·19년 간의 공법 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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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3: (3)세종 20년에서 25년까지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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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3.공법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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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1: (1)세종 25년 7월부터 익 26년 6월까지―공법의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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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2: (2)세종 26년 6월부터 11월까지―공법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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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4.공법 정착 이후의 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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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1: (1)제위전에 관한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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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2: (2)신공법의 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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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3: (3)연분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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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4: (4)감면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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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5.공법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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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6.공법 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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