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조의 국도주산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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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9일 (화) 19:00 판 (본문2: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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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의 국도주산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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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世宗朝의 國都主山問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 11월
시작쪽 101쪽 종료쪽 108쪽 전체쪽 01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제목@


이조 태조인물, 태종인물 양대에는 한양(경성)의 건도(建都) 여부 문제로 상하 간에 논의가 한참 복잡하고 또 이로 인하여 심신을 피곤하게 함이 많았지만, 태종인물의 아들로 그 자리를 이으신 세종인물조에 있어서는 경성의 주산(主山) 경정(更定) 내지 신궐(新闕) 창건 문제로 이는 마침내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일시 의론이 분운하여 군신 간에 심신의 피로함을 면치 못하였다. 이 전후 두 사실이 조선초 나라의 도읍에 관한 저명한 또 흥미있는 사제(事題)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지리 도참의 사상사적 방면으로 보아 더욱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고려시대에 성행하는 이 종류의 사상이 조선 초의 인심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태조인물, 태종인물 세종인물과 같은 영걸의 군주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졌으며? 또 이런 사상이 실제에 있어 얼마만치의 실현과 영향을 끼쳤는지? 이러한 점들에 대해 고찰하는 것은 자못 흥미 있는 연구라 할 수 있다. 이 소논문은 즉 그 방면 연구의 한 작은 부분으로, 주제의 사실이 조선 초에는 저명하였지만, 지금에는 세간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사실인 듯하므로 필자는 이제 특히 그에 대한 전말을 논술하여 저 독자의 참고에 제공하고자 한다.
쪽수▶P101-1李朝 太祖 太宗 兩代에는 漢陽(京城)의 建都 與否 問題로 上下 間에 論議가 한참 複雜하고 또 이로 因하여 心身을 勞함이 많았지만, 太宗의 子로 그 位를 이으신 世宗朝에 있어서는 京城의 主山更定 乃至 新闕 創建 問題로 이는 마침내 實現되지 못하고 말았지만―역시 一時 議論이 紛紜하여 君臣 間에 心身의 勞를 免치 못하였다. 이 前後 두 事實이 鮮初 國都에 關한 著名한 또 興味있는 事題 라고 할 수 있거니와, 이는 무엇보다도 地理 圖讖의 思想史的 方面으로 보아 더욱 興味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高麗時代에 盛行하는 이 種類의 思想이 鮮初의 人心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또 太祖 太宗 世宗과 같은 英傑의 主로서도 여기에 얼마나 큰 關心을 가졌으며? 또 이런 思想이 實際에 있어 얼마만치의 實現과 影響을 끼쳤는지? 이들 諸點에 나아가 考察하는것은 자못 興味있는 研究이므로써다. 이 小論文은 즉 그 方面 硏究의 一小部分으로, 主題의 事實이 鮮初에는 著名하였지만, 지금에는 世間에서 널리 잘 알지 못하는 事實인 듯하므로 筆者는 이제 特히 그에 對한 顚末을 論述하여 저 讀者의 叅考에 供코자 한다.





































본문2: 제목@


주산이라 함은 ‘조산(朝山)’, ‘안산(案山)’의 대신 가리키는 것으로 공히 풍수지리가의 술어이니 소위 명당(좌처)의 원근(遠近)한 앞산을 안산, 조산이라 함에 대하여 그(명당)의 주된 뒷산을 특히 주산이라 하는 것이다. 처음 태조인물께서 한양에 전도(奠都)하실 때(태조인물 3년)에는 국도의 주산을 지금의 백악(속칭 북악)으로 삼아 그 밑에 명당을 구하여 신궁 즉 경복궁을 경영하였고 다음 정종인물이 개경으로 천도하였다가 태종인물이 다시 신도 한양으로 재도(再都)하실 때(태종인물 5년)에는 경복궁에 대한 이궁(離宮)의 의미로 현재 응봉(鷹峯) 아래에 신궁 즉 창덕궁을 일으키고 그곳을 시어소(時御所)로 삼아 상어(常御)하였다. 경복궁을 서정궐(西正闕)이라고 하면 창덕궁은 동별궁(東別宮)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러나 경복궁의 땅은 원시 고려 숙종인물 때의 남경 옛궁 땅(지금 신무문 뒤)에 연접한 곳으로 다름 없이 전 왕조 때의 명당을 그대로 이어받은 데 불과하고 창덕궁도 고려 고종인물의 남경 가궐(假闕) 여말 3대(공민·우‧공양의 세 왕)의 한양 궁궐의 땅이라고 상상되는 지금 창경원의 인접지로 역시 전 왕조의 것을 이용한 데 불과하다 하여도 된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나 이조 태조인물, 태종인물 時代에는 다 한양의 주산을 백악으로 이정함에 이의가 없었던 것 같다.
쪽수▶P101-2主山이라 함은 「朝山」, 「案山」의 對稱으로 共히 風水地理家의 術語이니 所謂 明堂(坐處)의 遠近한 前山을 案山朝山이라 함에 對하여 그(明堂)의 主된 後山을 特히 主山이라 하는 것이다. 처음 太祖께서 漢陽에 奠都하실 때(太祖 三年)에는 國都의 主山을 지금의 白岳(俗稱 北岳)으로 삼▶P102-1어 그 밑에 明堂을 求하야 新宮 즉 景福宮을 經營하였고 다음 定宗이 開京으로 遷都하였다가 太宗이 다시 新都 漢陽으로 再都하실 때(太宗 五年)에는 景福宮에 對한 離宮의 意味로 今 鷹峯 下에 新宮 즉 昌德宮을 일으키고 그곳을 時御所로 삼어 常御하였었다. 景福宮을 西正闕이라고 하면 昌德宮은 東別宮이라고 할 만하였다. 그러나 景福宮의 地는 원시 高麗 肅宗 時의 南京舊宮地(今 神武門 後)에 連接한 곳으로 無異 前朝 時의 明堂을 그대로 承襲한 데 不過하고 昌德宮도 高麗 高宗의 南京假閥 麗末 三代 (恭愍·禑‧恭讓의 三王)의 漢陽 宮闕의 地라고 想像되는 今 昌慶苑의 隣接地로 역시 前朝의 것을 利用한 데 不過하다하여도 可하다. 그리고 高麗時代에나 李朝 太祖 太宗 時代에는 다 漢陽의 主山을 白岳으로 認함에 異議가 없었던 것 같었다.
그런데 세종인물태종인물의 선위를 받아 경복궁에 어(御)하신 지(일시는 창덕궁에 이어(移御)하신 일도 있지만) 정히 15년에 이르러서는 풍수학인 중에 경도(京都) 주산에 대하여 다른 설을 제기하는 자가 있었다. 즉 경도의 주산은 백악이 아니라 현재 창덕궁의 오른편에 연한 주맥(취운정래맥(醉雲亭來脈))이라 하여, 가까운 창덕궁을 이곳에 옮김이 좋다 하는 새로운 설이 최양선인물(崔揚善)이란 풍수학인에 의하여 주창되었다. 이에 관한 세종실록서적의 기사를 보면 15년(계축)가을 7월 갑인(초삼일)조에 아래와 같은 일절이 있다.
쪽수▶P102-2그런데 世宗이 太宗의 禪位를 받아 景福宮에 御하신 지(一時는 昌德宮에 移御하신 일도 있지만) 正히 十五 年에 이르러서는 風水學人 中예 京都 主山에 對하여 異說을 提起하는 者가 있었다. 卽 京都의 主山은 白岳이 아니라 今 昌德宮의 右臂에 連한 主脈(醉雲亭來脈)이라 하여, 가까운 昌德宮을 이곳에 옮김이 좋다 하는 新說이 崔揚善이란 風水學人에 依하여 主唱되었었다. 이에 關한 世宗實錄의 記事를 보면 十五年(癸丑)秋七月甲寅(初三日)條에 如左한 一節이 있다.

上 御思政殿○景福宮內勳政殿北引見知申事安崇善 曰 󰡔崔揚善啓云 「景福宮北山非主山登木覔○南山而見之 鄕校洞○今雲泥洞連脈 今承文院基地(●●●●●●) 實是主山 定都之時 何不營宮闕於此 而乃於白岳之下乎 地理書曰 人家居主山之穴 則子孫衰微 若移昌德宮于承文院之基 則萬世之利也」 揚善狂妄之人 固不足信 然荔蕘之言 聖人擇之 比之荔蕘 揚善優矣 乃令前判淸州牧使李蓁 同揚善登木覔見之 蓁亦以揚善之言爲是 大抵地理之書 深遠難窮 登高則主山之穴 可以見之 擇淸明日 與領議政黃喜인물·禮曹判書申商·率李蓁·이양달인물·高仲安·崔揚善 鄭秧等 登木覔 望見主山之穴 果爾差誤 則昌德宮固難移矣(●●●●●●●) 構結百餘間(●●●●●) 以爲離宮可矣(●●●●●●)󰡕 云云

쪽수▶P102-3

上 御思政殿○景福宮內勳政殿北引見知申事安崇善 曰 『崔揚善啓云 「景福宮北山非主山登木覔○南山而見之 鄕校洞○今雲泥洞連脈 今承文院基地(●●●●●●) 實是主山 定都之時 何不營宮闕於此 而乃於白岳之下乎 地理書曰 人家居主山之穴 則子孫衰微 若移昌德宮于承文院之基 則萬世之利也」 揚善狂妄之人 固不足信 然荔蕘之言 聖人擇之 比之荔蕘 揚善優矣 乃令前判淸州牧使李蓁 同揚善登木覔見之 蓁亦以揚善之言爲是 大抵地理之書 深遠難窮 登高則主山之穴 可以見之 擇淸明日 與領議政黃喜·禮曹判書申商·率李蓁·李陽達·高仲安·崔揚善 鄭秧等 登木覔 望見主山之穴 果爾差誤 則昌德宮固難移矣(●●●●●●●) 構結百餘間(●●●●●) 以爲離宮可矣(●●●●●●)』 云云

위 글 중 “……” 안의 기사는 통히 세종인물가 지신사(知申事) 안숭선인물(安崇善)을 만나고 하신 말씀으로 그중의 “……” 부분은 특히 최양선인물의 언설을 든 것인데 양선인물의 설 중에 “鄕校洞連脈 今承文院基地 實是主山”이란 것이 이때 문제의 중심점이었다. 향교동은 지금의 운니동(전의 이름은 교동)으로서 그의 연맥(連脈)인 승문원 기지란 곳은 지금 어느 지점에 해당하는지는 자세하지 못하나 여지승람서적(권2) 경도 승문원조를 보면 원은 “在弘禮門○景福宮勤政殿南門外”라 하고 그 밑에 世宗인물莊憲大王十五年癸亥○亥는 丑의 誤인 듯……且以院在北部陽德坊(●●●●●●●●●)里混閭巷 殊非藏欽降詔勅敬重之意 遂移入禁內云云”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때의 소위 승문원 구기는 지금의 계동이었던 양덕방(陽德坊)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동시에 “鄕校洞連脈”이란 것은 역시 지금의 계동과 가회동 사이에 걸친 취운정의 내맥을 이른 것이 명백한즉 그 소위 ‘주산’은 지금의 취운정 부근의 지대에 다름 아닐 것이다. 어떻든 최양선인물의 주장은 남쪽으로 옮겨 짓는 것이 만세의 이(利)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지리서’는 어떤 것을 가르쳐 이름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그 의미는(다시 거듭하여 말하면) 경도 주산 혈(穴)에 국왕이 살지 않고 인民이 거주하면 민가에는 길할 망정 왕가에는 길치 못하여 손이 쇠미하여진다는 것이니 후에 말할 권도인물(權蹈)의 반대론 중에 보이는 말에 의하여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다.
쪽수▶P102-4右文 中 『……』 內의 記事는 통히 世宗이 知申事 安崇善을 ▶P103-1引見하시고 하신 말씀으로 其中의 「……」 部分은 特히 崔揚善의 言說을 引示하신 것인데 揚善의 說 中에 「鄕校洞連脈 今承文院基地 實是主山」이란 것이 이때 問題의 中心點이었다. 鄕校洞은 지금의 雲泥洞(前名 校洞)으로서 그의 連脈인 承文院基地란 곳은 지금 어느 地點에 當하는지는 仔細치 못하나 輿地勝覽(卷二) 京都 承文院條를 보면 院은 「在弘禮門○景福宮勤政殿南門外」라 하고 그 밑에 「世宗莊憲大王十五年癸亥○亥는 丑의 誤인 듯……且以院在北部陽德坊(●●●●●●●●●)里混閭巷 殊非藏欽降詔勅敬重之意 遂移入禁內云云」이라고 하였으므로 이때의 所謂 承文院舊基는 지금의 桂洞이었던 陽德坊에 있었던 것이 分明하고 同時에 「鄕校洞連脈」이란 것은 역시 지금의 桂洞과 嘉會洞사 이에 걸친 醉雲亭의 來脈을 이른 것이 明白한즉 그 所謂 「主山」은 지금의 醉雲亭 附近의 地帶에 不外할 것이다. 어떻든 崔揚善의 主張은 南에 移建함이 萬世의 利가 되겠다는 말이었다. 「地理書」는 어떤 것을 가르쳐 이름인지 仔細치 않으나 그 意味는(다시 거듭하야 말하면) 京都主山穴에 國王이 宅하지 않고 人民이 居住하면 民家에는 吉할 망정 王家에는 吉치 못하여 孫이 衰微하여진다는 것이니 後에 말할 權蹈의 反對論 中에 보이는 말에 依하여 더욱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다시 앞의 실록 기사에 나타나는 세종인물대왕의 말씀에 의하면 대왕은 최양선인물의 이 계청에 움직인 바가 되어 전판 청주목사 이태인물(李泰)로 하여금 양선인물과 함께 목멱(木覔)(남산)에 올라 문제의 점을 망찰하게 하였는바 이태인물 역시 양선인물의 설을 옳다 함으로 더욱 신중히 이를 정하기 위하여 특히 청명한 날을 가리어 영의정 이하 모든 중신 및 지관들을 다시 목멱에 보내 주산혈을 바라보게 하여 만일 과연 재래의 것이 그릇되었다고 하면 창덕궁은 본래 옮기기 어려운 것인즉 새로히 100여간의 이궁을 결구할 수밖에 없다는 의사의 표시였다.
쪽수▶P103-2다시 前記 實錄 記事에 나타나는 世宗大王의 말씀에 依하면 大王은 崔揚善의 이 啓請에 움직인 바가 되어 前判 淸州牧使 李泰으로 하여금 揚善과 함께 木覔(南山)에 올라 問題의 點을 望察케 하였는바 李泰 역시 揚善의 設을 옳다 함으로 더욱 愼重히 이를 定하기 爲하여 特히 淸明한 날을 가리어 領議政 以下 諸重臣 及 諸地官들을 다시 木覔에 보내 主山穴을 바라보게 하여 만일 果然 在來의 것이 그릇되었다고 하면 昌德宮은 본래 옮기기 어려운 것인즉 새로히 百餘間의 離宮을 結構할 수밖에 없다는 意思의 表示였다.
그리하여 대왕은 이달(7월) 경신 즉 초9일에 앞의 언명과 같이 영의정 이하 모든 중신 및 지관들에게 명하여 지금 남산에 올라 산수의 맥을 면밀하게 보아 땅을 상(相)케 하고 서로 더 불어 양선인물의 설의 가부를 변론케 하였었다. 이때 상지관(相地官)의 한 사람으로 일찍이 한양 건도 때에 참섭하였던 이양달인물(李陽達)과 및 고중안인물(高仲安)·정앙인물(鄭秧) 등은 시찰의 결과 재래대로 백악을 현무(뒷산), 경복궁의 땅을 명당으로 인정함에 대하여 이태인물신효창인물(申孝昌)은 양선인물와 같이 이를 그르(誤)다고 하였다. 이렇게 의견이 일치하지 아니함에 황희인물는 다시 화공을 명하여 경성 산맥의 조종(祖宗)인 삼각산의 산형을 그리어 위(上)에 바치게 하는 동시에 지사(地師)들로 각기 소언(所言)을 써서 올리게 하였더니 대왕은 이를 집현전에 하시(下示)하였다(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의심하기를 이태인물·신효창인물 등이 뒤에서 양선인물를 부추겨 지리의 요설로써 진계(進階)의 모책을 삼으려고 하였다 한다). 각 지사의 언론 중 재래의 주산을 시인하는 이양달인물고중안인물정앙인물 등의 설을 다시 들어보면 그들은 말하기를
쪽수▶P103-3그리하여 大王은 이 달(七月) 庚申 卽 初 9日에 右의 言命과 같이 領議政 以下 諸重臣 及 諸地官들을 命하여 지금 南山▶P104-1에 올라 山水의 脈을 究觀하야 地를 相케 하고 서로 더 불어 揚善의 說의 可否를 辨論케 하였었다. 이때 相地官의 一人으로 일찍이 漢陽 建都 時에 參涉하였던 李陽達과 및 高仲安·鄭秧 等은 視察의 結果 在來대로 白岳을 玄武(後山), 景福宮의 地를 明堂으로 認定함에 對하여 李泰과 申孝昌은 揚善과 같이 이를 그르(誤)다고 하였다. 이렇게 意見이 一致치 아니함에 黃喜는 다시 畵工을 命하여 京城 山脈의 祖宗인 三角山의 山形을 그리어 위(上)에 바치게 하는 同時에 地師들로 各其 所言을 써서 올리게 하였더니 大王은 이를 集賢殿에 下示하였다(그런데 그때 사람들은 疑心하기를 李泰·申孝昌 等이 陰히 揚善을 嗾하여 地理의 妖說로써 進階의 謀策을 삼으려고 하였다 한다). 各 地師의 言論 中 在來의 主山을 是認하는 李陽達‧高仲安 및 鄭秧 等의 設을 다시 들어보면 그들은 가로대

백악은 삼각봉(산)으로부터 내려와 보현봉성내에서 성북 외로 보이는 우뚝 솟은 봉을 이루고 또 보현봉에서 내려와 평강을 이루어 수리에 이르러 첨봉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백악이며 그 밑에 기국(碁局)과 같은 명당을 만들어 만병을 세울 만하니 이야말로 전후 정중의 정명당(正明堂)이라 할 수 있다. 주산의(●●●) 북은 바깥 골짜기가 삼각산의 서남에서 돌아 큰 한 줄기를 만들고 나암사옛 고양군 동ᄍᆃᆨ 15리 남극에 환지(環至)하고 그 한 줄기가 또한 서남으로 향하여 모악(지금 안산) 서쪽 경계에 이르니 명당의 서북강(西北岡)이요 중수회환(衆水回還)의 대개이며 또 주산의 동북쪽 그 큰 줄기(●●●●●●●●●●)는 청양동 원처의 동북에서 동남으로 주회(周回)하여 큰 평야에 이르러 멈추고 또 한 줄기(●●●)는 청양동원의 동남에서 벽와요(甓瓦窰)로 돌아서 대교(大郊)에 내려오고 또 한 가지(●●●●)는 사한동사아리 동남에서 돌아서 그치고 또 한 가지(●●●●)는 사한동원의 남에서 동으로 돌아 동대문에 이르러 그치니 이는 곧 명당의 동남강(東南岡)이요 중수의 대개이다. 그리고 백악명당의 좌우(●●●●●●●)로 말하면 오른편은 주산 소쪽 경계에서 나타나 서남으로 크게 돌아서 동으로 동대문 수구에 이르고 그 왼편은 동남으로 돌아서 또한 동대문 수구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주산 명당의 전후좌우는 균제 방정하여 평(平)치 아니함이 없고 또 조상정룡(祖上正龍)의 대맥은 남방으로 직행하여 그 기가 치성(熾盛)하기 때문에 백악·인왕·모악·남산이 공히 돌기하여 봉을 이루었다. 그런데 지금 설자의 소위 래맥이란 것은 그 기가 적은 까닭에 단지 정업원(현재 원동 북단?)의 뒤 하나의 작은 봉우리응봉을 일으켜 종묘의 혈을 이룰 뿐이요 다른 혈(국처(局處))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이 봉 외에는 다시 성기가 없으므로 종묘로 들어간 혈도 또한 다시 봉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방기맥(旁起脈)·정기맥(正起脈)의 둘로 말한다면 종묘의 땅은 이 곧 방기맥의 정맥이라 할 수 있고 또 지금 설자가 말하는 곳은 방기맥의 방맥이라 할 수 있다. 고인은 흔히 산맥의 대소 성쇠를 초목(草木) 지간(枝幹)의 대소 영고(榮枯)에 빗대어 말을 한다.

쪽수▶P104-2

白岳은 三角峯(山)으로부터 내려와 普賢峯城內에서 城北外로 보이는 우뚝 소슨 놉흔 峰을 作하고 또 普賢峯에서 내려와 平岡을 作하여 數里에 이르러 尖峯을 일으키니 이것이 곧 白岳이며 그 밑에 碁局과 같은 明堂을 作하여 萬兵을 세울 만하니 이야말로 前後 正中의 正明堂이라 할 수 있다. 主山의(●●●) 北은 外峽이 三角山의 西南에서 돌어 大一枝를 作하야 羅岩寺舊高陽郡東 十五里 南極에 環至하고 그 一枝가 또한 西南行하여 母岳(今 鞍山) 西畔에 이르니 明堂의 西北岡이요 衆水回還의 大槪이며 또 主山의 東北은 其一大枝(●●●●●●●●●●)는 淸凉洞源處의 東北에서 東南으로 周回하여 大野에 이르러 멈추고 又 一枝(●●●)는 淸凉洞源의 東南에서 甓瓦窰로 回至하여 大郊에 下하고 또 한 가지(●●●●)는 沙閑洞沙阿里 東南에서 回周하여 그치고 또 한 가지(●●●●)는 沙閑洞源의 南에서 東으로 돌아 東大門에 이르러 그치니 이는 곧 明堂의 東南岡이요 衆水의 大槪이다. 그리고 白岳明堂의 左右(●●●●●●●)로 말하면 右臂는 主山西畔에서 出하여 西南으로 크게 回周하여 東으로 東大門 水口에 이르고 其 左臂는 東南으로 回周하여 또한 東大門 水口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主山明堂의 前後左右는 均齊 方正하여 平치 아니함이 없고 또 祖上正龍의 大脈은 南方으로 直行하여 其 氣가 熾盛하기 때문에 白岳·仁王·母岳·南山이 共히 突起▶P105-1하여 峯을 成하였다. 그런데 지금 說者의 所謂 來脈이란 것은 그 氣가 적은 까닭에 단지 淨業院(今 苑洞 北端?)의 後 一小峯鷹峰을 일으켜 宗廟의 穴을 作할 뿐이요 다른 穴(局處)은 이루지 못하였으며 이 峯 外에는 다시 盛氣가 없으므로 宗廟로 들어간 穴도 또한 다시 峯을 일으키지 못한 것이 아닌가. 旁起脈·正起脈의 둘로 말한다면 宗廟의 地는 이 곧 旁起脈의 正脈이라 할 수 있고 또 지금 說者의 말하는 곳은 旁起脈의 旁脈이라 할 수 있다. 古人은 흔히 山脈의 大小 盛衰를 草木 枝幹의 大小 榮枯에 比하야 말을 한다.

그 다음 이와 반대되는 이태인물·최양선인물 등의 자세한 언론을 들으면 그들은 말하되
쪽수▶P105-2그 다음 이와 反對되는 李泰·崔揚善 等의 仔細한 言論을 들으면 그들은 말하되

삼각산은 뻗어서 보현봉에 이르고 보현봉은 뇌락(磊落)하여 강롱(岡隴)·산롱(山隴)을 이루며 좌우 두 골짜기에 나뉘어 왼쪽 골짜기는 기복이 요장(遙長)하고 관란(關欄)을 이루어 안암지(安庵地)지금 안암에 이르며 오른쪽 골짜기는 행하기 반리에 백악의 성봉을 이루고 또 반리를 만들어 인왕산의 강롱을 이루고 인왕산은 2리를 행하여 남으로 회전하여 주산취운정 뒷산을 조읍(朝揖)하니 이것이 가위 조대(朝對)의 정(正)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앙에는 정맥이 있어 동남으로 입수하여 행하기 2리에 이르러 롱구(隴丘)를 이루니 곧 주산이 이것이요 주산의 낙맥(落脈)은 현사(懸絲)와 같되 봉요(蜂腰) 단속의 이상을 재기하여 소위 현무(주산) 수두(垂頭)의 격을 만드니 왼편계산에서 휘문고보를 지나 운현궁 쪽으로 내려온 맥는 만환(彎環)하여 혈 앞에 이르고 오른편화동 안국동 등지로 내려온 줄기는 활(弓)과 같은 형상으로 명당에 읍하고 있다. 또 3중의 지엽은 좌우로 (혈을) 포옹하여 산수 서로 정이 있으며 중앙의 명당은 스스로 정히 존귀하고 국(局) 중의 모든 물줄기는 천심에 합하여 가위 기취(氣聚)의 땅이 되니 경에 왈 양수협처시명당(兩水夾處是明堂) 지엽주회중자시(枝葉周回中者是)라고 하였다.

쪽수▶P105-3

三角山은 뻗어서 普賢峯에 이르고 普賢峯은 磊落하여 岡隴·山隴을 이루며 左右二峽에 나뉘어 左峽은 起伏이 遙長하고 關欄을 作하여 安庵地今 安岩에 이르며 右峽은 行하기 半里에 白岳의 星峯을 作하고 또 半里를 作하여 仁王山의 岡龍을 成하고 仁王山은 二里를 行하여 南으로 回轉하여 主山醉雲亭後山을 朝揖하니 이것이 可謂 朝對의 正이라고 할 수 있으며, 中央에는 正脈이 있어 東南으로 入首하여 行하기 二里에 이르러 隴丘를 이루니 곧 主山이 이것이요 主山의 落脈은 懸絲와 같되 蜂腰 斷續의 異狀을 再起하여 所謂 玄武(主山) 垂頭의 格을 作하니 左臂桂山에서 徽文 高普를 지나 雲峴宮 쪽으로 내려온 脈는 彎環하여 穴前에 이르고 右臂花洞 安國洞 等地로 내려온 줄기는 활(弓)과 같은 形狀으로 明堂에 揖하고 있다. 또 三重의 枝葉은 左右로 (穴을) 抱擁하여 山水 서로 情이 있으며 中央의 明堂은 스스로 政히 尊貴하고 局中의 諸 水流는 天心에 合하여 可謂 氣聚의 地가 되니 經에 曰兩水夾處是明堂 枝葉周回中者是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국도 주산에 대한 견해는 당시 정반대의 두 파가 있어 일파는 백악설을 주장하여 어디까지든지 백악 명당이 사방의 균정을 얻고 그 기의 치성함이 있다 하고 이에 대하여 다른 일파는 승문원기지설을 주창하여 그곳이 조대의 정을 획득하고 좌우 환포(環抱)의 정이 있고 더욱 양수협처(兩水夾處)의 기취지지(氣聚之地)라고 하였다. 이 주산 정부(正否) 문제는 언뜻 보면 실제 생활에 있어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 같고 또한 지금의 생각으로 보면 무용, 무의미의 토론에 불과하지만 당시는 풍수지리를 중시하던 시대요 또 그 정부론의 결정 여하에 의하여 새로운 이궁의 건조 여부가 달린 것이다. 세종인물대왕과 같은 성지영명(聖智英明)의 임금으로도 이런 지리 문제에 대하여는 자뭇 관심 세려하여 이때 대신에게 말씀하기를―지리의 론은 비록 다 믿(진신(盡信))치는 못하나 또한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리는 맥세가 착종하여 진실로 살피지 아니하면 그 요를 얻을 수 없으며 소자첨인물(蘇子瞻(軾)), 주원회인물(朱元晦(熹))와 같은 통유대현(通儒大賢)으로도 장지를 복택(卜擇)한 일이 있고 황차조종이 도읍을 짓고고 산릉을 정함에 다 지리를 이용하였으므로 나는 유신으로 하여금 그 요를 강명케 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때 지신사 안숭선인물은 계청하되 제학 정인지인물·부교리 유의손인물 등의 유신을 집현전에 출근케 하여 지리를 강습케 하되 이들로는 풍수학 제조(提調) 별좌(別坐)를 삼고 영의정 황희인물로 도제조(都提調), 전대 제학 하연인물으로 제조를 삼아 전심으로 강습케 하면 국가에 유보(有補)하고 풍수의 학이 또한 밝아지리라고 함에, 왕은 곧 이를 쫓으셨다. 그리고 또 15일(병인)에는 황희인물, 신상인물(申商), 김자지인물(金自知), 하연인물, 정인지인물안숭선인물 등에게 명하여 삼각산 현봉 등지를 실제로 답사하여 주산의 내용을 철저히 심사하도록 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이 황희인물 등의 실지답사가 아직 행하기 전에) 다른 유신들 사이에는 풍수설을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파가 있어 예조참판 권도인물와 같은 이는 누누히 장언을 올리어 풍수설의 탄망을 논하여 대왕을 간하니 그 언론의 대요는 아래와 같다.
쪽수▶P105-4이와 같이 國都主山에 對한 見解는 當時 正反對의 二派가 있어 一派는 白岳說을 主張하여 어디까지든지 白岳 明堂이 四方의 均正을 得하고 其氣 의 熾盛함이 있다 하고 이에 對하여 他 一派는 承文院基地說을 主唱하여 그곳이 朝對의 正을 得하고 左右 環抱의 情이 있고 더욱 兩水 夾處의 氣聚之地라고하 였다. 이 主山 正否 問題는 언뜻 보▶P106-1면 實際 生活에 있어 何等의 關係가 없는 것 같고 또한 지금의 생각으로 보면 無用無意味의 討論에 不過하지만 當時는 風水地理를 重視하던 時代요 또 그 正否論의 決定 如何에 依하여 新離宮의 建造 與否가 달린 것이다. 世宗大王과 같은 聖智英明의 主로도 이런 地理 問題에 對하여는 자뭇 關心細慮하여 이때 代言에게 말씀하기를―地理의 論은 비록 다 믿(盡信)지는 못하나 또한 廢할 수는 없는 것이다. 地理는 脈勢가 錯綜하여 진실로 察하지 아니하면 그 要를 究得할 수 없으며 蘇子瞻(軾)朱元晦(熹)와 같은 通儒大賢으로도 葬地를 卜擇한 일이 있고 況且祖宗이 都 邑을 建하고 山陵을 定함에 다 地理를 用하였음으로 나는 儒臣으로 하여금 其要를 講明케 하려고 한다 하였다. 이데 知申事 安崇善은 啓請하되 提學 鄭麟趾·副校理 柳義孫 等의 儒臣을 集賢殿에 出勤케 하여 地理를 講習케 하되 이들로는 風水學提調別坐를 삼고 領義政 黃喜로 都提調, 前大提學 河演으로 提調를 삼어 專心으로 講習케 하면 國家에 有補하고 風水의 學이 또한 밝어지리라고 함에, 上은 곧 이를 쫓으셨다. 그리고 또 十五日(丙寅)에는 黃喜 申商 金自知 河演 鄭麟趾 및 安崇善 等에게 命하여 三角山 賢峯 等地를 實際로 踏査하여 主山의 來龍을 徹底히 審査하도록 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때(이 黃喜 等의 實地踏査가 아직 行하기 前에) 다른 儒臣들 사이에는 風水說을 根本的으로 反對하는 派가 있어 禮曹參判 權蹈와 같은 이는 累累 長言을 올리어 風水說의 誕妄을 論하여 大王을 諫하니 其 言論의 大要는 아래와 같다.

竊謂 周公·孔子大聖也 制禮作樂·垂法萬世者 周公也 繼徃開來·垂敎萬世者 孔子也 是故 爲治而不法周公孔子 未見其可也 今揚善인물上書之事 臣未知其詳 聞之人言 「以承文院爲國之明堂(●●●●●●●●●) 而景福宮非明堂也(●●●●●●●●) 不可不營建宮室而使常人居之地德所鍾(●●●●●●●●●●●●●●●●●) 或生豪傑(●●●●) 非社稷之利也(●●●●●●)」 於是命大臣相之 又命集賢殿參考地理之書 以備顧問臣未知풍수之說出於何人 其應之吉凶 果如所言而關係國家之利害 如是之重 則周公孔子憂國慮世之盛心何無一語及之 初爲此說者 果賢於周公孔子乎 司馬溫公朱文公亦大賢也 擇葬之說 溫公極論其非 而文公亦取之 是必有所見矣 然則풍수之說 周公孔子之所不言 溫公文公之所不取 其爲誕妄而不足信 昭然可知矣 揚善인물之學粗而未精 則其不可信 不疑矣(中略) 以殿下之明聖 極知揚善인물之誕妄 而不能不動於聖慮 其邪說之利害 如是之慘(中略) 觸冒天威 敢陳管見 伏惟聖慈垂察焉 創業垂統之主 其見遠而其慮深 我太祖인물神謀容算 高出一時臣民之上 雖一號令之出 亦未甞輕以處之 況定都營室事之大者 豈無稽而臆定之哉(中略) 今信其希進輕薄之言 而疑太祖인물之所定 其可乎(中略) 夫自宇宙以來 帝王興替 不知其幾 其以壓勝之術而豪傑之出 何代乎 如以壓勝而防其豪傑之出 使國祚傳之無窮則周公孔子必先爲之矣(中略) 且我漢城之都 見於圖讖前朝之時 或營宮室 或來巡幸 非一二矣 未防聖朝李氏朝鮮之興 苟有天命 豈以智巧之私 所能防哉(下略)

쪽수▶P106-2

竊謂 周公·孔子大聖也 制禮作樂·垂法萬世者 周公也 繼徃開來·垂敎萬世者 孔子也 是故 爲治而不法周公孔子 未見其可也 今揚善上書之事 臣未知其詳 聞之人言 「以承文院爲國之明堂(●●●●●●●●●) 而景福宮非明堂也(●●●●●●●●) 不可不營建宮室而使常人居之地德所鍾(●●●●●●●●●●●●●●●●●) 或生豪傑(●●●●) 非社稷之利也(●●●●●●)」 於是命大臣相之 又命集賢殿參考地理之書 以備顧問臣未知風水之說出於何人 其應之吉凶 果如所言而關係國家之利害 如是之重 則周公孔子憂國慮世之盛心何無一語及之 初爲此說者 果賢於周公孔子乎 司馬溫公朱文公亦大賢也 擇葬之說 溫公極論其非 而文公亦取之 是必有所見矣 然則風水之說 周公孔子之所不▶P107-1言 溫公文公之所不取 其爲誕妄而不足信 昭然可知矣 揚善之學粗而未精 則其不可信 不疑矣(中略) 以殿下之明聖 極知揚善之誕妄 而不能不動於聖慮 其邪說之利害 如是之慘(中略) 觸冒天威 敢陳管見 伏惟聖慈垂察焉 創業垂統之主 其見遠而其慮深 我太祖神謀容算 高出一時臣民之上 雖一號令之出 亦未甞輕以處之 況定都營室事之大者 豈無稽而臆定之哉(中略) 今信其希進輕薄之言 而疑太祖之所定 其可乎(中略) 夫自宇宙以來 帝王興替 不知其幾 其以壓勝之術而豪傑之出 何代乎 如以壓勝而防其豪傑之出 使國祚傳之無窮則周公孔子必先爲之矣(中略) 且我漢城之都 見於圖讖前朝之時 或營宮室 或來巡幸 非一二矣 未防聖朝李氏朝鮮之興 苟有天命 豈以智巧之私 所能防哉(下略)

위의 글을 올린 권도인물(후에 제(踶)라 개명함)는 즉 려말 국초의 유판(儒版)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양촌 권근인물의 둘째 아들인데 대대 유(儒)를 업으로 하는 가정의 출생이니만치 그의 언론은 가위 유자로서의 정견을 극(極)하였다고 할 수 있고 또한 실제에 있어서도 불경‧미신적 사상을 타파하는 일대 문자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상서에 대한 대왕의 감상과 의견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대왕은 다음날 사정전(思政殿)에 와서 안숭선인물·김종서인물 등을 만나 보시고 인물(蹈)의 상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비평을 하였다.
쪽수▶P107-2上書人 權蹈(後에 踶라 改名함)는 즉 麗末 國初의 儒版의 一人으로 有名한 陽村權近의 第二子인데 代代 儒를 業으로 하는 家庭의 出生이니만치 그의 言論은 可謂 儒者로서의 正見을 極하였다고 할 수 있고 또한 實際에 있어서도 不經‧迷信的 思想을 打破하는 一大文字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上書에 對한 大王의 感想과 意見은 어떠하였느냐 하면 大王은 翌日 思政殿에 御하여 安崇善·金宗瑞 等을 引見하시고 蹈의 上書에 對하여 다음과 같이 批評을 하였었다.

대저 인신이 애군우국(愛君憂國)하여 숨김이 없이 말하면(언수부중(言雖不中)이라도) 그 우국의 충심은 지극한 것이다. 그러나 “或 生豪傑”이라는 말은 양선인물의 발한 바도 아니요 내가 말한 바도 아니다. 어찌 압승(壓勝)의 술(術)로써 이러한 일을 하겠느냐. 양선인물이 승문원동으로 명당을 삼는 것은 비록 믿기에 부족하지만 내가 그 지세를 상(相)하여 시비를 알고 싶다. 인물의 말이 만일 경복궁은 조종(祖宗)의 소영(所營)이라 옮기지 말라는 의미이면 그 말은 정대(正大)하다 하여 가납(嘉納)하겠으나 지리의 서로써 믿을 수 없다 하면 나는 취하지 아니한다. 지리서가 경이 아니어서 간혹 탄망함이 있으나 오로지 버리지는 못한다. 주문공인물은 본래 지리를 취하는 자가 아니지만 오히려 술자로 더불어 장사 지낼 땅을 원처(遠處)에 택하였다. 더욱 우리 조종(祖宗)의 개국 건도에 관해서는 지리를 상(相)하여 이를 정하였고 신민의 친족을 장사 지낼 때도 반드시 산수의 형을 보아서 한다. 태종인물께에 상이 말씀하시길 지리를 불용하면 이(已)어니와 만일 이를 쓸진댄 정(精)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지리서에 “居幹龍·則枝斷·居枝龍則元氣絕”라 하였으니 이 말도 혹 그렇지 아니함이 없으며 황건원릉태조인물에도 다 지리를 이용하여 정하였거든 궁궐을 영(營)함에 지리를 폐함이 가능하겠느냐. 지리를 반대하는 인물가 그 아버지 양촌(권근인물)의 장례를 지낼 때 과연 지리를 이용하지 아니하고 오직 그 수심(水深) 토후(土厚)한 것만 취하였을까?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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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抵 人臣이 愛君憂國하여 숨김이 없이 말하면(言雖不中이라도) 其 憂國의 忠은 至極한 것이다. 그러나 「或 生豪傑」의 言은 揚善의 發한 바도 아니요 予의 言한 바도 아니다. 어찌 壓勝의 術로써 이러한 일을 하겠느냐. 揚善이 承文院洞으로 明堂을 삼는 것은 비록 不足信이나 予가 其 地勢를 相하여 是非를 알고 싶다. 蹈의 言이 만일 景福宮은 祖宗의 所營이라 옮기지 말라는 意味이면 其 所言은 正大하다 하여 嘉納하겠으나 地理의 書로써 不可信이라 하면 予는 取치 아니한다. 地理書가 經이 아니어서 間或 誕妄함이 있으나 오로지 버리지는 못한다. 朱文公은 본래 地理를 取하는 者가 아니지만 오히려 術者로 더불어 葬身의 地를 遠處에 擇하였다. 더욱 我祖宗의 開國建都에 及하여는 地理를 相하여 이를 定하였고 臣民▶P108-1의 葬親에 있어서도 반듯이 山水의 形을 보아서 한다. 太宗께에 嘗曰 地理를 不用하면 已어니와 만일 이를 쓸진댄 精히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셨고 또 地理書에 「居幹龍·則枝斷·居枝龍則元氣絕」라 하였으니 이 말도 혹 그렇지 아니함이 없으며 況 健元陵太祖陵에도 다 地理를 用하여 定하였거든 宮闕을 營함에 地理를 廢함이 可하겠느냐. 地理를 反對하는 蹈가 其 父 陽村(權近)을 葬할 時에 果然 地理를 用치 아니하고 오직 그 水深 土厚한 것만 取하였을가? 疑心한다.

세종인물대왕의 풍수지리에 대한 신앙의 심천은 이에 의하여 더욱 알 수 있으나, 그 사상 내지 신앙은 다름 없이 전통적인 것으로 태조인물, 태종인물의 국도 전건 시의 경우와 방불함이 있으니 세종인물태종인물“不用地理則已矣 如其用之 不可不精”이라 한 말씀을 들은 것에 있어 특히 그러함을 알 수 있다. 대왕의 말씀과 같이 옛 사람이 이미 지리의 술을 이용하고 국초 정도 시에 또한 이를 응용하고 실제 신민에 친족을 장사 지냄에 있어서도 이를 자주 이용하지만 이때 오로지 왕가에서만 취하지 말라면 아무리 세종인물께서 영명하시다 할지라도 쉽게 쫓기 어려운 일이었다.
쪽수▶P108-2世宗大王의 風水地理에 對한 信仰의 深淺은 이에 依하여 더욱 窺知되거니와 其 思想 及 信仰을 無異 傳統的의 것으로 太祖 太宗의 國都 奠建 時의 境遇와 仿佛함이 있으니 世宗이 太宗의 「不用地理則已矣 如其用之 不可不精」이라 한 말씀을 引함에 있어 特히 그러함을 알 수 있다. 大王의 말씀과 같이 古人이 이미 地理의 術을 用하고 國初 定都 時에 또한 이를 應用하고 實際 臣民에 葬親에 있어서도 이를 盛用하면서만 獨히 이때 王家에서만 取치 말라면 아모리 世宗께서 英明하시다할지라도 容易히 쫓기 어려운 일이었다.
삼각산 심시(審視)의 명을 받은 영의정 황희인물 이하 제신들은 17일 무진에 풍수학인 이양달인물 등을 이끌고 백악에 올라 이를 보고 다시 돌이켜 봉황암휴암(鵂岩), 즉 부엉바위에 올라 관망하고 돌아왔었다. 이때 신주산론자인 이태인물, 신효창인물최양선인물 등은 왈 “보현봉 정맥은 곧 승문원터로 들어와 정히 현무수두(玄武垂頭)의 땅이 되니 국(도)의 명당이 이만한 자가 없다” 하고 이에 對하여 이양달인물, 고중안인물, 정앙인물 등은 “보현봉 정맥은 백악봉에 수(垂)하였다” 하여 이론이 분운하였다. 세종인물께서는 이에 답답하여 “내일 내가 친히 백악에 올라 입맥처의 가부를 결하리라” 하시고 다음 날 18일(기사)에 제신을 데리고 백악중봉에 행차하여 삼각산의 내맥을 보시고 다시 봉황암에 내려와 승문원 산맥의 세를 보실 때 이양달인물, 고중안인물, 정앙인물과 및 최양선인물 등은 각각 그 지리의 이해를 설명해 바쳤다. (이조판서 허조인물(許稠)는 계하기를 지금 전하께서 최양선인물의 말을 따라 명당의 주혈을 다시 심사하시나 경복궁은 태조인물, 태종인물의 소건소거(所建所居)라 불가경(不可輕)이오니 청하건대 양선인물의 탄망한 죄를 가(加)하소서 함에 세종인물 왈 경복궁을 태조인물 태종인물의 소건소거라 하면 나 역시 따르려니와 양선인물을 탄망하다 하여 가죄(加罪)하기를 청한다면 그는 과하다고 하였다.)
쪽수▶P108-3三角山 審視의 命을 받은 領議政 黃喜 以下 諸臣들은 十七日 戊辰에 風水學人 李陽達 等을 이끌고 白岳에 올라 이를 보고 다시 돌이켜 鳳凰岩鵂岩, 即 부엉바위에 올라 觀望하고 돌아왔었다. 이때 新主山論者인 李泰 申孝昌 및 崔揚善 等은 曰 「普賢峯 正脈은 곧 承文院터로 들어와 正히 玄武垂頭의 地가 되니 國(都)의 明堂이 이만한 者이 없다」 하고 이에 對하여 李陽達 高仲安 鄭秧 等은 「普賢峯 正脈은 白岳峯에 垂하였다」 하여 二論이 紛紜하였다. 世宗께서는 이에 답답하야 「明日 내가 親히 白岳에 올라 入脈處의 可否를 決하리라」 하시고 翌 十八日(己巳)에 諸臣을 데리고 白岳中峯에 行幸여사 三角山의 來脈을 보시고 다시 鳳凰岩에 내려와 承文院山脈의 勢를 보실 때 李陽達 高仲安 鄭秧과 및 崔揚善 等은 各各 其 地理의 利害를 說明해 바쳤다. (吏曹判書 許稠는 啓曰 今 殿下께서 崔揚善의 言을 從하여 明堂의 主穴을 更審하시나 景福宮은 太祖 太宗의 所建所居라 不可輕이오니 請컨대 揚善의 誕妄한▶P109-1 罪를 加하소서 함에 世宗 曰 景福宮을 太祖 太宗의 所建所居라 하면 予 乃 從之려니와 揚善을 誕妄하다 하여 加罪하기를 請한다면 그는 過하다고 하였다.)
환궁 후에 왕은 안숭선인물을 접견하시고 당일 친히 상(相)한 이야기를 알려 말하길―오늘 백악에 올라 한참 지맥을 간망하고 또 이양달인물, 최양선인물 등의 두 언론을 들으면서 반복 간망하여 본즉 보현봉의 산맥은 직접 백악에 들어 지금 경복궁이 정히 명당이 되나 그러나 승문원의 내맥도 또한 심상한 곳은 아니다. 지금 이양달인물 등의 반대는 승문원의 터는 첫째 주산의 ‘저미(仾微)’ 둘째 ‘산수초직(山水稍直)’, 셋째 ‘조대남산(朝對南山)’이 높다 하는 것으로써 허물을 잡는다. 다시 풍수학으로 하여금 지리서를 강구하여 그 이해‧장단을 논계하게 하라고 하였었다. 주산 문제는 이와 같이 왕이 친상(親相)하시도록까지 일시 중대, 복잡화하였던 것이므로 필자도 (일방 이 문제를 논하기 위하여) 연전 수차에 거쳐 북산의 지리를 등사, 재관망하여 보았는데 나의 소견은 역시 대왕과 다름이 없어 삼각산의 정래맥인 보현봉의 산맥은 백악에 직입(直入)하였다고 할 수 있되 신주산론자 측의 소칭지(所稱地)인 지금 계동, 가회동의 중간지대도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 과연 보통 평범한 곳이 아니라 할 만치 국세의 의(宜)를 득하였고 또 경성의 정중앙에 당하여 ‘일국의 중앙의 중앙’이라고 하여도 될 것이다. 백악 명당은 소위 사신청룡·백호·주작·현무이 부단하여 현무와 백호는 몹시 고준하고 (명당에) 급박함에 대하여 청룡과 주작은 공히 저평(低平)하고 또 그 명당수의 부족은 국초 정도 시로부터의 결점이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논자의 새로운 주산의 땅은 (이양달인물의 평과 같이) 주산이 좀 저미하여 백악처럼 실하고 크지는 못하나 그 내맥이 뇌락(磊落)하여 소위 봉요학슬(蜂腰鶴膝)의 격을 이루고 좌우 용호의 세도 균등하고 분명하며 또 주작도 정남에 있게 되어 가위 사신 단정의 면세를 득하고 명당의 물도 좌우 양 골짜기계동수와 가회동, 재동수에서 비롯하여 당시에는 수량이 제법 있었던 것 같고 그것이 또한 이양달인물의 평과 같이 초직(稍直)하다고 하겠지만 혈 앞에서 Y자형으로 합금(合襟)하여 흐르기 때문에 그는 상관이 없을 것 같다. 도리어 “兩水夾處是眞龍”감룡경서적 권1의 길격(吉格)을 만들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즉 최양선인물, 이태인물 등의 주장은 풍수지리상으로 볼 때는 무리하다고 할 수 없고 대왕이 이들의 주장에 대하여 적지 않은 동의를 가지시게 된 것도 또한 이유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다시 이때 이태인물가 왕께 올린 서를 보면 말하길
쪽수▶P109-2還宮 後에 上은 安崇義을 引見하시고 當日의 親相談을 披露하여 가로되―今日 白岳에 올라 한참 地脈을 看望하고 또 李陽達 崔揚善 等의 두 言論을 들으면서 反復 看望하여 본즉 普賢峯의 山脈은 直接 白岳에 入하여 지금 景福宮이 正히 明堂이 되나 그러나 承文院의 來脈도 또한 尋常한 곳은 아니다. 지금 李陽達 等의 反對는 承文院의 터는 첫째 主山의 「仾微」 둘째 「山水稍直」 셋째 「朝對南山」이 높다 하는 것으로써 허물을 잡는다. 다시 風水學으로 하여금 地理書를 講究하야 其 利害‧長短을 論啓하게 하라고 하였었다. 主山問題는 이와 같이 王이 親相하시도록까지 一時 重大 複雜化하였던 것이므로 筆者도 (一方 이 問題를 論하기 爲하여)年前 數次에 亘하여 北山의 地理를 登査 在觀望하여 보았는데 나의 所見은 역시 大王과 다름이 없어 三角山의 正來脈인 普賢峯의 山脈은 白岳에 直入하였다고 할 수 있되 新主山論者 側의 所稱地인 今 桂洞 嘉會洞의 中間地帶도 風水地理上으로 볼 때 果然 普通 平凡한 곳이 아니라 할 만치 局勢의 宜를 得하였고 또 京城의 正中央에 當하여 「一國의 中央의 中央」이라고 하여도 可하다. 白岳 明堂은 所謂 四神靑龍·白虎·朱雀·玄武이 不端하여 玄武와 白虎는 몹시 高俊하고 (明堂에) 急迫함에 對하여 靑龍과 朱雀은 共히 低平하고 또 그 明堂水의 不足은 國初 定都 時로부터의 缺點이었다. 그러나 이에 反하여 論者의 新主山의 地는 (李陽達의 評과 같이) 主山이 좀 低微하여 白岳처럼 實하고 크지는 못하나 其 來脈이 磊落하여 所謂 蜂腰鶴膝의 格을 이루고 左右 龍虎의 勢도 均等하고 分明하며 또 朱雀도 正南에 있게 되어 可謂 四神端正의 面勢를 得하고 明堂의 水도 左右兩峽桂洞水와 嘉會洞 齋洞水에서 出하여 當時에는 水量이 제법 있었던 것 같고 그것이 또한 李陽達의 評과 같이 稍直하다고 하겠지만 穴前에서 Y字形으로 合襟하여 흐르기 때문에 그는 相關이 없을 것 같다. 도리어 「兩水夾處是眞龍」據龍經卷一의 吉格을 만들어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즉 崔揚善 李秦 等의 主張은 風水地理上으로 볼 때는 無理하다고 할 수 없고 大王이 이들▶P110-1의 主張에 對하여 不少한 同意를 가지시게 된 것도 또한 理由가 없다고 할 수 없다. 다시 이때 李泰의 王께 올린 書를 보면 曰

臣竊惟 尋龍大要求其氣聚而已 縱地有寬隘·大小之異 但聚氣多則爲吉 山水稍有反背 則非吉 審矣 古人傳術之妙 不越乎此 臣愚陋淺見 誠不足以識風水之奧妙然心之所同然 無間古今 苟得其所同然 亦庶乎目力之不忒矣 大抵營建宮室 先相四神端不端 今觀夫白岳之爲玄武(●●●●●●●●●) 勢若雄秀 而求其情 則無入首懷抱之形 論其朱雀(●●) 則低平而弱 顧其靑龍(●●●●)則反背而洩 瞻其白虎(●●●●) 則高亢而險 四神之不端若此(中略)行副司正崔揚善인물所相濟生院(●●●)即承文院基地 規局主脈磊落(●●●●●●) 蜂腰鶴膝(●●●●) 其氣不雜(●●●●) 雍容而入特起圓隴(●●●●●●●●) 分布衆支(●●●●) 四圍團集(●●●●) 尊居局中(●●●●) 此山家 「大則特小」之說 爲可據也 何則華嶽(○○)(三角山)之形(○○) 撑空磅礴(○○○○) 其氣猛烈(○○○○) 踊躍而南(○○○○) 來止結局(○○○○) 當此局中(○○○○) 非特小之山(○○○○○) 不可爲主也(○○○○○) 至於朱崔則木覔正照(○○○○○○○○○) 顧瞻左右(○○○○) 回環重複(○○○○) 語其局心(○○○○) 則中正無偏(○○○○○) 三陽備具(○○○○) 此其氣象之中 又有取焉之地也 臣愚管見如斯 伏惟斷自聖心

쪽수▶P110-2

臣竊惟 尋龍大要求其氣聚而已 縱地有寬隘·大小之異 但聚氣多則爲吉 山水稍有反背 則非吉 審矣 古人傳術之妙 不越乎此 臣愚陋淺見 誠不足以識風水之奧妙然心之所同然 無間古今 苟得其所同然 亦庶乎目力之不忒矣 大抵營建宮室 先相四神端不端 今觀夫白岳之爲玄武(●●●●●●●●●) 勢若雄秀 而求其情 則無入首懷抱之形 論其朱雀(●●) 則低平而弱 顧其靑龍(●●●●)則反背而洩 瞻其白虎(●●●●) 則高亢而險 四神之不端若此(中略)行副司正崔揚善所相濟生院(●●●)即承文院基地 規局主脈磊落(●●●●●●) 蜂腰鶴膝(●●●●) 其氣不雜(●●●●) 雍容而入特起圓隴(●●●●●●●●) 分布衆支(●●●●) 四圍團集(●●●●) 尊居局中(●●●●) 此山家 「大則特小」之說 爲可據也 何則華嶽(○○)(三角山)之形(○○) 撑空磅礴(○○○○) 其氣猛烈(○○○○) 踊躍而南(○○○○) 來止結局(○○○○) 當此局中(○○○○) 非特小之山(○○○○○) 不可爲主也(○○○○○) 至於朱崔則木覔正照(○○○○○○○○○) 顧瞻左右(○○○○) 回環重複(○○○○) 語其局心(○○○○) 則中正無偏(○○○○○) 三陽備具(○○○○) 此其氣象之中 又有取焉之地也 臣愚管見如斯 伏惟斷自聖心

이라 하여 신구 명당의 이해(우열과 장단)를 지리적으로 요령 있게 설명하였는데 특히 위의 글 중에 “山家大則特小之說”“……非特小之山不可爲主”라 함은 다 감여가(堪輿家)의 정종(正宗)으로 삼는 금낭경서적(錦囊經)(일명 장서) 중의 사상이니, 같은 책서적 취류편에 “大者特小 小者特大”라 하고 그 아래 긴 주에 “衆山俱大 宜取小者爲特 衆山俱小 宜取大者爲特”이라 함이 즉 그것이며 (전조 충렬왕인물 3년 가을 7월에 관후서(觀候暑)로부터 “謹按道詵密記稀山爲高樓 多山爲平屋 多山爲陽 稀山爲陰 高樓爲陽平屋爲陰云云”이라 한 것도 이러한 사상에 연원한 것인 듯 참고함이 좋겠다) 또 위의 상서 중에 “三陽云云”은 조송(趙宋)의 채목당인물(蔡牧堂)(성우)의 저라 하는 발미론서적(發微論)에서 출래한 것이니 즉 같은 론서적(천심편)에 “凡脈陰 四山高於本身 艮(☶)之象也 上畫爲陽穴宜淺 四山與本身齊 坎(☵)之象也 中畫爲陽 穴宜不淺不深 四山低於本身 震(☳)之象也 下畫爲陽 穴宜深”이라 함이 그것이다. 요하면 이태인물는 경성과 같은 사위의 산이 높고 큰 곳에는 특히 저미한 주산을 취하여야 하며 지금 문제 중에 새 명당지는 이 이론에 적합한 외에 다시 국심(局心)에 있어 소위 삼양(三陽)의 격을 구비하였다는 말이다.
쪽수▶P110-3이라 하여 新舊 明堂의 利害(優劣長短)를 地理的으로 要領 있게 說明하였는데 特히 右文 中에 「山家大則特小之說」과 「……非特小之山不可爲主」라 함은 다 堪輿家의 正宗으로 삼는 錦囊經(一名 葬書) 中의 思想이니, 同書 取類篇에 「大者特小 小者特大」라 하고 其 下 張注에 「衆山俱大 宜取小者爲特 衆山俱小 宜取大者爲特」이라 함이 즉 그것이며 (前朝 忠烈王 三年秋 七月에 觀候暑로부터 「謹按道詵密記稀山爲高樓 多山爲平屋 多山爲陽 稀山爲陰 高樓爲陽平屋爲陰云云」이라 한 것도 이러한 思想에 淵源한 것인 듯 參考함이 좋겠다) 또 右 上書 中에 「三陽云云」은 趙宋의 蔡牧堂(成禹)의 著라 하는 發微論에서 出来한 것이니 即 同論(淺深篇)에 「凡脈陰 四山高於本身 艮(☶)之象也 上畫爲陽穴宜淺 四山與本身齊 坎(☵)之象也 中畫爲陽 穴宜不淺不深 四山低於本身 震(☳)之象也 下畫爲陽 穴宜深」이라 함이 그것이다. 要하면 李秦은 京城과 같은 四圍의 山이 높고 큰 곳에는 特히 低微한 主山을 取擇하여야 하며 지금 問題 中에 新明堂地는 이理論예 適合한 外에 更히 局心에있어 所謂 三陽의 格을 具備하였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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