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문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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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8일 (월) 13:44 판 (본문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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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문왕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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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葛文王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5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6년 7월
시작쪽 182쪽 종료쪽 201쪽 전체쪽 020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


갈문왕(葛文王)은 특히 신라사에 나타나는 칭호로서 삼국사기서적(권1) 유리이사금인물 조에 “妃日知葛文王(○○○)之女也”라는 기사에 보이는 것이 그의 최초이며, 그리하여 신라통일기에 이르기까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칭호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같은 책서적(같은 권) 일성이사금인물 기(紀) “封朴阿道 爲葛文王” 주에
쪽수▶P182-1葛文王은 特히 新羅史에 나타나는 稱號로서 三國史記(卷一) 儒理 尼師今條에 「妃日知葛文王(○○○)之女也」라는 記事에 뵈이는 것이 그의 最初이며, 그리하야 新羅統一期에 이르기까지 자주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이 稱號에 對한 解釋에 있어서는 同書(同卷) 逸聖 尼師今紀 「封朴阿道 爲葛文王」 註에

新羅追封 稱葛文王 其義末詳

쪽수▶P182-2

新羅追封 稱葛文王 其義末詳

이라 하고 삼국유사서적에도
쪽수▶P182-3이라 하고 三國遺事에도

羅人 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

쪽수▶P182-4

羅人 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

이라 하였다. 현대문주1▶유사서적의 이 기사는 사기서적의 것을 도습(蹈襲)한 듯하거니와,[a 1] 어쨌든 이로 보면 고려에 있어서도 적어도 인종인물 시대에 와서는 갈문왕의 의미가 이미 미상(未詳)한 것에 속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어급한 사기의 기사에 있어 갈문왕 그것의 의미는 미상이라 하였으나 갈문왕이라는 칭호는 추봉왕(追封王)에게 일컬었던 것이라 하였으니, 이 ‘추봉’이라는 2자는 후세에 내려오면서 고문의 의의를 푸는 데에 호개의 조건, 호개의 근거로서 이용되어온 것이다. 갈문에 대하여 성호 이익(○○○○)인물
쪽수▶P182-5이라 하였다. 원문주1▶遺事의 이 記事는 史記의 것을 蹈襲한 듯하거니와,[1] 엇젯던 일로 보면 高麗에 있어서도 적어도 仁宗 時代에 와서는 葛文王의 意味가 이미 未詳한 것에 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前擧한 史記의 記事에 있어 葛文王 그것의 意味는 未詳이라 하였으나 葛文王이라는 稱號는 追封王에게 일커럿던 것이라 하였나니, 이 「追封」이라는 二字는 ▶P183-1後世에 나려오면서 高文의 意義를 푸는 데에 好個의 條件, 好個의 根據로서 利用되여온 것이다. 葛文에 對하야 星湖 李瀷(○○○○)

新羅之世 多追尊異姓 皆稱葛文王 本宗正統 謂之麻立干 葛與麻 以絰帶言也 按周禮 王爲諸侯總 縗弁而加絰 同姓則麻 異姓則葛 謂葛絰之王別於本宗也성호사설서적 경사편(經史篇) 8

쪽수▶P183-2

新羅之世 多追尊異姓 皆稱葛文王 本宗正統 謂之麻立干 葛與麻 以絰帶言也 按周禮 王爲諸侯總 縗弁而加絰 同姓則麻 異姓則葛 謂葛絰之王別於本宗也星湖僿說 經史篇 八

라 하여 ‘추봉’을 조건으로 ‘사(死)’를 연상하고 상례복제(喪禮服制)의 질대(絰帶)를 끌어 “異姓則葛”의 갈(葛)과 갈문왕의 갈(葛)과에 관계를 붙일 때 머리(頭) 또는 마루(宗)의 사음(寫音)인 마립(麻立)의 마(麻)까지 들어 갈질(葛絰)에 대한 마질(麻絰)로 부회하여 갈문을 상복제의 갈질에서 나온 것이라 해석하였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해석은 성호의 뛰어난 제자 순암 안정복(○○○○○)인물에게서도 찾아볼 수가 있는 것이니동사강목서적·부록 이와 같이 한자의 글자 뜻이나 유학사상에 얽매인 해석에 대하여는 깊은 천착을 새삼스러히 하고자 아니하거니와 우선 간단히 몇 가지 점을 들어 음미해 보면, 현대문주2▶(가)신라의 갈문왕 칭호를 가진 이로는 소위 다른 성(姓) 이외에도 본종에 속한 것이 또한 많으며,[a 2] 그리고 (나)소위 본종정통(本宗正統)에도 갈문왕의 칭호와 병행하여 마립간 이외에 이사(질)금의 칭호도 있으니 이 같은 칭호와 갈(葛)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하며, (다)설령 갈문은 추봉과 관계가 있다 할지라도 상복제를 가지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도 수긍키 어려우니와, 하물며 고대 신라에 있어 중국식의 상복제가 이뤄졌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에랴 이와 같은 뜻으로도 성호의 해석을 좇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차라리 재래로 잊어 왔던 갈문왕의 의미에 대하여 해석을 내리려던 그의 노력을 감사할 것이다. 다음 이에 대하여 이재 황윤석(○○○○○)인물
쪽수▶P183-3라 하야 「追封」을 條件으로 「死」를 聯想하고 喪禮服制의 絰帶를 끄러 「異姓則葛」의 葛과 葛文王의 葛과에 關係를 부칠 새 마리(頭) 또는 마루(宗)의 寫音인 麻立의 麻까지 드러 葛絰에 對한 麻絰로 附會하야 葛文을 喪服制의 葛絰에서 나온 것이라 解釋하였다. 그리고 이와 同一한 解釋은 星湖의 高弟 順庵 安鼎福(○○○○○)에게서도 차저볼 수가 있는 것이니東史綱目·附錄 이와 같이 漢字의 字義나 儒學思想에 拘泥된 解釋에 對하야는 깊은 穿鑿을 새삼스러히 하고저 아니하거니와 우선 簡單히 몇 가지 點을 드러 吟味해 보면, 원문주2▶(가)新羅의 葛文王 稱號를 가진 이로는 所謂 異姓 以外에도 本宗에 屬한 것이 또한 많으며,[2]그리고 (나)所謂 本宗正統에도 葛文王의 稱號와 井行하야 麻立干 以外에 尼師(叱)今의 稱號도 있으니 이 같은 稱號와 葛과의 關係를 어떻게 解釋하며, (다)設令 葛文은 追封과 關係가 있다 할지라도 喪服制를 가지고 이름을 부친다는 것도 首肯키 어려우니와, 하물며 古代 新羅에 있어 中國式의 喪服制가 行하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음에랴 이와 같은 뜻으로도 星湖의 解釋에 좇기 어려움을 알 수 있는 것이니, 우리는 차라리 在來로 이저왔던 葛文王의 意味에 對하야 解釋을 나리려던 그의 努力을 感謝할 것이다. 다음 이에 對하야 頤齋 黃胤錫(○○○○○)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東國方言 謂死日走斤 葛之方言近走 文之方言近斤이재유고서적 잡저 화음방언자의

쪽수▶P183-4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 東國方言 謂死日走斤 葛之方言近走 文之方言近斤頤齋遺藁 雜著 華音方言字義

이리하여 갈문에 대하여 언어상으로 이두(吏讀)적 해설을 시도한 것은 이재의 탁견으로서 갈문 해석에 일보를 내켜 놓은 것이다. 그러나 ‘갈문’을 ‘주근’으로 훈독(訓讀)하여 죽음(死)의 의미로 해석한 것은, 갈문의 본훈(本訓)(칙글)으로 보아도 타당하다고 생각하기 어려우며, 또 고대의 습속이 아무리 소박하였다 할지라도 ‘주근’이라는 것은 소위 추봉 칭호의 성질상으로 보아도 마땅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바이다.
쪽수▶P183-5이리하야 葛文에 對하야 言語上으로 吏讀的 解說을 試한 것은 頤齋의 卓見으로서 葛文 解釋에 一步를 내켜 노흔 것이다. ▶P184-1그러나 「葛文」을 「주근」으로 訓讀하야 死의 意味로 解釋한 것은, 葛文의 本訓(칙글)으로 보아도 妥當하다고 생각키 어려우며, 또 古代의 習俗이 아모리 素樸하였다 할지라도 「주근」이라는 것은 所謂 追封 稱號의 性質上으로 보아도 맛당한 것으로는 믿기 어려운 바이다.
이와 같은 경향을 띤 해석이 최근에 이르러도 또한 적지 아니한 것이니, 갈성말치(○○○○)인물(葛城末治) 씨는 신라의 갈문왕에 대하여 모두 추봉이라는 단정 아래에서 갈문을 ‘칙혀’ 즉 ‘칙혀올림’의 미래동사인 Chic-kul로 훈독할 것이라 하여 갈문왕을 숭상왕(崇上王)이라는 의미라 하였으며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4호권호·갈성말치인물 씨의 「新羅斯文王に就て원고 최근에 양주동(○○○)인물 씨도 갈문왕을 추봉의 것으로 보고 갈문왕을 갈만님금(장왕(藏王))으로 읽을 것이며 또 혹 ‘交’‘代’의 옛 훈(訓)이 ‘갈마든다’라는 것으로 대왕(代王)의 뜻으로도 해석할 것이라 하고, 다시 적확한 해석이라 하여 염(殮)의 훈(訓) ‘갈물’을 들어 갈문왕은 ‘훙왕(薨王)’이라고 해석하였다청구학총학술지 제22호권호 양주동인물 씨의 「葛文王·その他원고. 이상 양씨인물의 해석에 대하여 먼저 {{TagPerson갈성}} 씨의 설로 보면 갈문의 훈(訓)으로 든 ‘칙글’을 ‘칙힐’이라는 미래동사와 같이 본다 하더라도 현대어인 미래동사를 가지고 대번에 신라 고대에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생각한다. 비록 {{TagPerson갈성}} 씨는 자기의 설을 변호하기 위하여 “遺事王暦 篇に 「第十四儒禮尼師今 一作世里智王」と出づ 儒禮は 弩儒又は儒理とも書し世nuliを 義讀したるものにして 智は人名の後に 附する敬稱たり 訓蒙字に 世の義を nuliとせるにて知るべし云云”이라는 예를 들어 “史記及遺の二書に 收載せられたる當時の地名·人名·官職名·其の他金石に鐫刻せられたる史? 讀等に就て 文字の用例を見るに, 吾人が 今日用ふるものと酷似せるは 勿論云云”이라고 논하고(실은 지금에는 ‘세(世)’를 누리라고도 하지 않지마는), 다시 신라의 어법에 대하여 “而して當時の語辭には 今日の如き過·現‧來の劃然たる區別なかりしものならん”앞의 동양학보학술지이라는 독단적 변해를 내렸다. 이것은 ‘칙힐’이라는 말이 신라에도 있었으리라는 것을 암암리에 변해하는 동시에 신라말에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이 획연치 못하였다는 것은 갈문이 소위 미래동사가 됨을 도호(塗糊)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에 ‘칙힐’이라는 말이 있고 없던 것과 신라말에 과거(過)·현재(現)·미래(來)가 구분이 획연하였던지 안 하였던지는 아직 별문제로 하고라도 다만 씨가 근거한 현대어 ‘칙힐’을 가지고 보면 과거에 속한 인물(?)의 추봉에 미래동사를 칭호로 붙였다는 것은 자못 모순된 혐(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커다란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쪽수▶P184-2이와 같은 傾向을 띠운 解釋이 最近에 이르러도 또한 적지 아니한 것이니, 葛城末治(○○○○) 氏는 新羅의 葛文王에 對하야 모두 追封이라는 斷定 아래에서 葛文을 「칙혀」 卽 「칙혀올림」의 未來動詞인 Chic-kul로 訓讀할 것이라 하야 葛文王을 崇上王이라는 意味라 하였으며東洋學報 第十三卷 第四號·葛城末治 氏의 「新羅斯文王に就て」 最近에 梁柱東(○○○) 氏도 葛文王을 追封의 것으로 보고 葛文王을 갈만님금(藏王)으로 읽을 것이며 또 或 「交」「代」의 古訓이 「갈마든다」라는 것으로 代王의 義로도 解釋할 것이라 하고, 다시 的確한 解釋이라 하야 殮의 訓 「갈물」을 들어 葛文王은 「薨王」이라고 解釋하였다靑丘學叢 第二十二號 梁柱東 氏의 「葛文王·その他」. 以上 兩氏의 解釋에 對하야 먼저 葛城 氏의 說로 보면 葛文의 訓으로 든 「칙글」을 「칙힐」이라는 未來動詞와 같이 보아준다 하더라도 現代語인 未來動詞를 가지고 대번에 新羅 古代에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매우 危險한 일로 생각한다. 비록 葛城 氏 는 自己의 說을 辯護하기 爲하야 『遺事王暦 篇に 「第十四儒禮尼師今 一作世里智王」と出づ 儒禮は 弩儒又は儒理とも書し世nuliを 義讀したるものにして 智は人名の後に 附する敬稱たり 訓蒙字に 世の義を nuliとせるにて知るべし云云』이라는 예를 들어 『史記及遺の二書に 收載せられたる當時の地名·人名·官職名·其の他金石に鐫刻せられたる史? 讀等に就て 文字の用例を見るに, 吾人が 今日用ふるものと酷似せるは 勿論云云」이라고 論하고(實은 現今에는 「世」를 누리라고도 하지 않지마는), 다시 新羅의 語法에 對하야 「而して當時の語辭には 今日の如き過·現‧來の劃然たる區別なかりしものならん」前擧 東洋學報이라는 獨斷的 辯解를 나리였다. 이것은 「칙힐」이라는 말이 新羅에도 있었으리▶P185-1라는 것을 暗暗理에 辯解하는 同時에 新羅말에 過去 現在 未來의 區別이 劃然치 못하였다는 것은 葛交이 所謂 未來動詞가 됨을 塗糊하려는 意圖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新羅에 「칙힐」이라는 말이 있고 없던 것과 新羅말에 過·現·來가 區分이 劃然하였던지 안 하였던지는 아직 別問題로 하고라도 다만 氏의 根據한 現代語 「칙힐」을 가지고 보면 過去에 屬한 人物(?)의 追封에 未來動詞를 稱號로 부첫다는 것은 자못 矛盾된 嫌이 없지 아니한 것으로서 多大한 疑問을 가지게 하는 것이다.
다음 양주동인물 씨의 갈만임금설은 비록 장염(藏殮)의 훈(訓)을 훈몽자회서적석봉천자문서적에서 취하였다 하나 이 역시 근세어에 준거한 것이라 반드시 고대 신라에 소급하여 틀림없음을 보증하기 어려우며, 또 갈문왕을 ‘갈만님금’으로 읽는다면 적어도 갈문왕의 왕을 이사(질)으로 쓴 예가 없는 이상에 자못 속단의 혐이 없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갈문왕의 왕과 이사금, 마립간 등의 관계는 아래 글에서 논할 터) 그리고 갈만님금 즉 훙왕은 황이재인물의 주근왕 즉 ‘사왕(死王)’설과 같은 해석으로서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사(死)’ 또는 ‘훙(薨)’은 칭호로서의 타당성이 적으며, 소위 추봉설로 보아도 별 의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쪽수▶P185-2다음 梁柱東 氏의 갈만임금說은 비록 藏殮의 訓을 訓蒙字會와 石峯千字文에서 取하였다 하나 이 亦 近世語에 準據한 것이라 반드시 古代 新羅에 溯及하야 틀림없음을 保證키 어려우며, 또 葛文王을 「갈만님금」으로 읽는다면 적어도 葛文王의 王을 尼師(叱)으로 쓴 例가 없는 以上에 자못 速斷의 嫌이 不無한 것으로 생각된다. (葛文王의 王과 尼師今 麻立干 等의 關係는 下文에서 論할 터) 그리고 갈만님금 即 薨王은 黃頤齋의 주근王 即 「死王」說과 同樣의 解釋으로서 우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死」 또는 「薨」은 稱號로서의 妥當性이 적으며, 所謂 追封說로 보와도 別意義를 보여주는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상에서 열거한 성호인물로부터 양주동인물 씨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갈문왕에 대한 해석은 나의 억측일지는 모르나 거의 다 그의 근거를 추봉에 둔 듯싶다. 추봉은 사자를 전제로 하는 만큼 사(死)로서의 해설이 이와 같이 면면하여 끊임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서적유사서적를 통틀어보면 일찍이 고 금서룡인물(今西龍) 박사도 지적한 바와 같이 추봉에만 한한 칭호가 아닌 듯하니신라사연구서적·신라갈문왕고원고, 사기서적유사서적에 의하여 살펴보면 갈문왕의 칭호를 가진 이로는 일지(日知) 갈문왕을 비롯하여 갈문왕 사공(史恭)에 이르기까지 대개 17, 8명을 들 수가 있으나 그 가운데에 ‘봉(封)’으로 말미암아 된 갈문왕은 6명에 지나지 못하고 그 외는 모두 갈문왕모 또는 모갈문왕으로(갈문왕호를 붙이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예가 있으나 의미에 있어서는 동일한 것임) 보일 뿐으로서 그들 갈문왕은 과연 봉함으로 인하여 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봉으로 인하여 된 것으로 보이는 6명의 갈문왕에 대하여 살펴보면
쪽수▶P185-3以上에서 列擧한 星湖로부터 梁柱東 氏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가지 葛文王에 對한 解釋은 나의 臆測일지는 모르나 거의 다 그의 根據를 追封에 둔 듯싶다. 追封은 死者를 前提로 하는 만큼 死로서의 解說이 이와 같이 綿綿하야 끊임없는 것이다. 그러나 史記나 遺事를 通트러보면 일찍이 故今 西龍 博士도 指摘한 바와 같이 追封에만 限한 稱號가 아닌 듯하니新羅史硏究·新羅葛文王考, 史記와 遺事에 依하야 살펴보면 葛文王의 稱號를 가진 이로는 日知 葛文王을 비롯하야 葛文王 史恭에 이르기까지 대개 十七八名을 들 수가 있으나 그 가운대에 「封」으로 말미암어 된 葛文王은 六名에 지나지 못하고 ▶P186-1그 外는 모두 葛文王某 또는 某葛文王으로(葛文王號를 부치는데, 이와 같은 두 가지 例가 있으나 意味에 있어서는 同一한 것임) 뵈일 뿐으로서 그들 葛文王은 果然 封함으로 因하야 된 것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封으로 因하야 된 것으로 뵈이는 六名의 葛文王에 就하야 살펴보면

5-1▶(1), 封朴阿道 爲葛文王삼국사기서적 권1 일성이사금인물 15년조
5-2▶(2), 封父骨正 爲世神葛文王같은 책서적 권2 첨해이사금인물 원년조
5-3▶(3), 封老仇道 爲葛文王같은 책서적 같은 권 미추이사금인물 2년조
5-4▶(4), 八月以伊飡弩里夫 爲上大等 封母弟伯飯 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같은 책서적 권5 진평왕인물 원년조
5-5▶현대문주3▶(5), 태종 무열왕인물의 아버지 문흥(文興) 갈문왕[a 3]

쪽수▶P186-2

5-1▶(1), 封朴阿道 爲葛文王三國史記 卷一 逸聖 尼師今 十五年條
5-2▶(2), 封父骨正 爲世神葛文王仝書 卷二 沾解 尼師今 元年條
5-3▶(3), 封老仇道 爲葛文王仝書 仝卷 味鄒 尼師今 二年條
5-4▶(4), 八月以伊飡弩里夫 爲上大等 封母弟伯飯 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仝書 卷四 眞平王 元年條
5-5▶원문주3▶(5), 太宗 武烈王의 父 文興 葛文王[3]

이상 6명의 갈문왕은 ‘봉’으로 인하여 될 듯하나, 과연 추봉에 속한 것인가 다시 이에 관하여 살펴보면, (1)박아도(朴阿道)에 있어서는 “封朴阿道爲葛文王”이라는 단편적 기사뿐이므로 이것을 가지고 추봉 여부를 논하기는 원래 불가능한 것이며, (2)골정(骨正)은 벌휴이사금인물제9대의 장자로서 내해이사금인물제10대 즉위 이전에 이미 사거(死去)하였음으로 그의 아들 첨해이사금인물제12대 때에 세신(世神)이라는 미호(美號)를 붙여 추봉한 것으로 믿으며 현대문주4▶(3)구도(仇道)는 미추이사금인물이 아버지로서 미추이사금인물 2년에 봉한 것이니, 갈성인물 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a 4] 연령상으로 보아 추봉인 것을 짐작할 수가 있는 것이다. (4)진정(眞正) 갈문왕(백반(伯飯))과 진안 갈문왕(국반(國飯) 갈문왕으로도 보임)에 있어서는 우선 진안 갈문왕을 들어 살펴보면 그는 진평왕인물의 아우요 진덕여왕인물의 아버지니 만일 진안 갈문왕이라는 것이 추봉이라면 국반(국분(國芬), 국안(國安)으로도 쓰였음)은 진평왕인물 원년까지 사거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렇다면 진덕여왕인물이 태어난 해를 국반이 추봉된 해 즉 진평왕인물 원년(서기 579)으로 가정하여도 여왕이 즉위한 때의(서기 647) 연령은 69세의 노령일지니 사기서적(권5)에 여왕에 대하여 “姿質豊麗長七尺 垂手過膝”이라는 기사라든지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여왕이 칠십의 노령으로 즉위하였다고는 인정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진평왕인물 원년에 국반을 봉한 것이 추봉인지 아닌지는 아직 연구해 볼 문제라고 생각하며, 다음 (5)태종 무열왕인물의 아버지 용춘(龍春)에 관하여는 사기서적“追封王考 爲文興大王”유사서적“龍春卓文興葛文王”이라는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문흥 갈문왕이라는 것은 추봉으로도 간주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주3 참조.
쪽수▶P186-3以上 六名의 葛文王은 「封」으로 因하야 될 듯하나, 果然 追封에 屬한 것인가 다시 이에 關하야 살펴보면, (1)朴阿道에 있어서는 「封朴阿道爲葛文王」이라는 斷片的 記事뿐임으로 이것을 가지고 追封 與否를 論하기는 元來 不可能한 것이며, (2)骨正은 伐休 尼師今第九代의 長子로서 奈解 尼師今第十代 即位 以前에 이미 死去하였음으로 그의 子 沾解 尼師今第十二代 때에 世神이라는 美號를 부처 追封한 것으로 믿으며 원문주4▶(3)仇道는 味鄒尼師今이 父로서 味鄒尼師今 二年에 封한 것이니, 葛城 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4] 年齡上으로 보와 追封인 것을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 (4)眞正 葛文王(伯飯)과 眞安 葛文王(國飯 葛文王으로도 뵈임)에 있어서는 우선 眞安 葛文王을 들어 살펴보면 그는 眞平王의 母弟요 眞德女王의 父니 만일 眞安葛文王이라는 것이 追封이라면 國飯(國芬 國安으로도 씨엿슴)은 眞平王 元年까지에 死去한 것으로 보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니, 만일 그럿타면 眞德女王의 生年을 國飯의 追封된 해 即 眞平王 元年(西紀五七九)으로 假定하여도 女王의 即位▶P187-1한 때의(西紀六四七) 年齡은 六十九成의 老齡일지니 史記(卷五)에 女王에 對하야 「姿質豊麗長七尺 垂手過膝」이라는 記事라던지 其他 여러 가지 事情을 아울러 생각해 보면, 女王이 七十의 老齡으로 即位하였다고는 認하기 어려운 것이다. 따라서 眞平王 元年에 國飯을 封한 것이 追封인지 아닌지는 아직 硏究해 볼 問題라고 생각하며, 다음 (5)太宗 武烈王의 父 龍春에 關하여는 史記의 「追封王考 爲文興大王」과 遺事의 「龍春卓文興葛文王」이라는 記事를 對照하야 보면 文興 葛文王이라는 것은 追封으로도 看做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註3 參照.
이와 같이 봉으로 인하여 된 6명의 갈문왕 중에도 추봉으로 확인되는 것은 겨우 세신(골정), 구도, 문흥의 3명뿐이니 만일 사기에 “追封皆稱葛文王”이라는 문구가 없었다 하면 추봉에 근거한 근세 이래의 여러 가지 해석이 과연 출현하게 되었을까도 의문일 것이다. 현대문주5▶그뿐만 아니라 상대 신라에 과연 추봉의 예가 있었던가도 문제이지만 그 위에 갈문왕이라는 명칭 자체에 있어서도 다만 갈문을 가지고 ‘왕(王)’의 수식사적 또는 형용사적으로만 해석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니 원래 신라에 있어 왕이라는 한식 칭호를 붙인 것이 지증왕인물 4년부터의 일이다.[a 5] 이와 같이 지증왕인물 4년 이전에는 국왕의 칭호로서도 거서간, 차차웅, 이사(질)금, 마립간 등을 붙였던 것이니, 특히 갈문왕에 한하여 이전부터 ‘왕’을 붙였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며, 따라서 갈문이 만일 왕(王)자를 기다려 비로소 완전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지증왕 이전에는 갈문왕의 왕에 해당한 재래어를 붙였던 증좌가 없는 이상 그들의 해석은 타당성을 잃는 것이다.
쪽수▶P187-2이와 같이 封으로 因하야 된 六名의 葛文王 中에도 追封으로 確認되는 것은 겨우 世神(骨正) 仇道 文興의 三名뿐이니 만일 史記에 「追封皆稱葛文王」이라는 文句가 없었다 하면 追封에 根據한 近世 以來의 여러 가지 解釋이 果然 出現하게 되었을까도 疑問일 것이다. 원문주5▶그뿐만 아니라 上代 新羅에 果然 追封의 例가 있었던가도 問題려니와 그 우에 葛文王이라는 名稱 自體에 있어서도 다만 葛文을 가지고 「王」의 修飾詞的 또는 形容詞的으로만 解釋하기 어려운 點이 있는 것이니 元來 新羅에 있어 王이라는 漢式 稱號를 부친 것이 智證王 四年부터서의 일이다.[5] 이와 같이 智證王 四年 以前에는 國王의 稱號로서도 居西干 次次雄 尼師(叱)今 麻立干 等을 부쳤던 것이니, 特히 葛文王에 限하야 以前부터 「王」을 부첬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아니하며, 따러서 葛文이 만일 王字를 기달러 비로소 完全한 意味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적어도 智證王 以前에는 葛文王의 王에 該當한 在來語를 부쳤던 證左가 없는 以上 그들의 解釋은 妥當性을 일른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 초기부터 나타나는 갈문왕이라는 칭호에 있어 ‘왕’이라는 것만은 지증왕인물 이후에 붙여진 것일지나, 갈문이라는 것은 재래로 써 내려오던 독립적 의미를 갖춘 보통 칭호였던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이 같은 억측이 용인된다면 갈문의 해석으로 왕(王)자를 기다려 비로소 의미를 나타나게 되는(갈문 밑에 왕에 해당하는 재래어의 붙여진 예가 없는 이상에) ‘주근’, ‘칙킬’, ‘갈믄’ 등은 독립적 칭호로 쓰일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쪽수▶P187-3그럼으로 新羅 初期부터 나타나는 葛文王이라는 稱號에 있어 「王」이라는 것만은 智證王 以後에 부처진 것일지나, 葛文이라는 것은 在來로 써나려오던 獨立的 意味를 가추운 普通 稱號이었던것이 아닐런가 한다. 만일 이 같은 臆測이 容認된다면 葛文의 解釋으로 王字를 기달러 비로소 意味를 나타나게 되는(葛文 밑에 王에 該當한 在來語의 부처진 例가 없는 以▶P188-1上에) 「주근」「칙킬」「갈믄」 等은 獨立的 稱號로 씨여질 것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갈문왕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이상에 열거한 추봉을 근거로 한 모든 설 이외에 근래에 또 금서룡(○○○)인물 박사의 골몸(骨身)설과 점패방지진(○○○○○)인물(鮎貝房之進) 씨의 갈천궁(葛川宮)설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금서인물 박사의 골몸설에 있어서는 그의 저 신라사연구서적·신라갈문왕고원고
쪽수▶P188-2葛文王에 對한 解釋에 있어서는 以上에 列擧한 追封을 根據로 한 諸說 以外에 近來에 또 今西龍(○○○) 博士의 골몸(骨身)說과 鮎貝房之進(○○○○○) 氏의 葛川宮說을 들 수가 있는 것이다. 今西 博士의 골몸說에 있어서는 그의 著 新羅史硏究·新羅葛文考에

葛Kal字を假りて表示せる語は, 骨Kol字を假りて表示せる親族家族の話なる可し, 即ち骨品の骨なる可し, 文は字音mumの假字にして, 身體の義即ち現代語の mom を表示せしものなるべし, 葛文は親身の義なる可し, 葛文王の王字は中古に至り漢字の使用流行するに至り恐らくば法興, 眞興の頃に於て漢譯せしものにして百濟に君の文字を用ひ, 日本に鶏彌と稱し, 新羅に於ては錦または今の假字を用ひし語なりしなる可し.

쪽수▶P188-3

葛Kal字を假りて表示せる語は, 骨Kol字を假りて表示せる親族家族の話なる可し, 即ち骨品の骨なる可し, 文は字音mumの假字にして, 身體の義即ち現代語の mom を表示せしものなるべし, 葛文は親身の義なる可し, 葛文王の王字は中古に至り漢字の使用流行するに至り恐らくば法興, 眞興の頃に於て漢譯せしものにして百濟に君の文字を用ひ, 日本に鶏彌と稱し, 新羅に於ては錦または今の假字を用ひし語なりしなる可し.

라 하였다. 이 설에 있어 ‘골몸’과 ‘갈문’과의 어음 관계는 아직 그만두고라도 (가)골(骨)은 신라 골품의 골이라 하였으나 신라에는 성골, 진골 또는 제1골, 제2골의 구별이 있었으니 어느 골을 가르쳐 골몸이라 하였는지 ‘친신(親身)의 뜻’이라는 것만 가지고는 막연한 감이 있으며 (나)신라어에 있어 ‘골몸’에 대응되는 말로 모모(某々)의 몸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이상 골몸이라는 말이 조선어상으로 보아 생소한 느낌을 주는 것이며, 갈문왕의 왕은 법흥인물, 진흥왕인물쯤에 한역(漢譯)한 것으로서 백제는 군(君)자를 쓰고 일본에는 계미(鷄彌)라 칭하고 신라에 있어서는 금(錦) 또는 가(假)자를 썻던 말일지라 하였으나 갈문금(葛文錦) 또는 갈문금(葛文今)으로 쓰인 증적(證跡)이 없는 이상 결국 무의미한 추론에 불과한 것이니,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금서인물 박사 설을 추종하기 어려우며, 다음 점패인물 씨의 갈천궁설에 있어서는 갈문을 지명으로 보는 견지에서 갈문의 문을 차수(借水)의 방언이라 하여 천(川)의 차자(借字)로 보며 또 문(文)의 훈(訓) ‘글’은 골(항(巷), 동(洞), 곡(谷))의 차자로도 보아 갈문이 지명일 것을 논단하고, 삼국사기서적(직관지)에 보이는 궁호(宮號)를 열거한 뒤에 특히 갈천궁전(宮典)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쪽수▶P188-4라 하였다. 이 說에 있어 「골몸」과 「갈문」과의 語音 關係는 아직 그만두고라도 (가)骨은 新羅 骨品의 骨이라 하였으나 新羅에는 聖骨 眞骨 또는 第一骨 第二骨의 區別이 있었으니 어느 骨을 가르쳐 骨몸이라 하였는지 「親身의 義」라는 것만 가지고는 漠然한 感이 있으며 (나)新羅語에 있어 「골몸」에 對應되는 語로 某々의 몸이라는 말이 보이지 않는 以上 골몸이라는 말이 朝鮮語上으로 보와 生疎한 늣낌을 주는 것이며, 葛文王의 王은 法興, 眞興王頃에 漢譯한 것으로서 百濟에 君字를 쓰고 日本에는 鷄彌라 稱하고 新羅에 있어서는 錦 또는 假字를 썻던 語일지라󰡕 하였으나 葛文錦 또는 葛文今으로 씨인 證跡이 없는 以上 結局 無意味한 推論에 不過한 것이니, 이와 같은 點으로 보아 今西 博士 說에 追從키 어려우며, 다음 鮎貝 氏의 葛川宮說에 있어서는 葛文을 地名으로 보는 見地에서 葛文의 文을 借水의 方言이라 하야 川의 借字로 보며 또 文의 訓 「글」은 골(巷, 洞, 谷)의 借字로도 보와 葛文이 地名일 것을 論斷하고, 三國史記(職官志)에 보이는 宮號를 列擧한 後에 特히 葛川宮典이라는 것에 着眼하야

右宮號城の中葛川宮の葛川は正に葛文にして五萬分地圖寧越の里名葛文里とも同名となる譯なり, 今慶州を中心として葛川と云ふ川名無きかを廣く聞質すも是と同名一切無し, 唯慶州の東北邦里約二里許に左の辰韓六村の一なる習比部 後の臨川部屬村に葛谷と云ふ里名あり(中略) 葛谷は今も同名にて現存しあること, 五萬分地圖所載の如く, 共南約十町許にして勿川里あり(中略) 葛谷里の葛と 勿川里の勿とを合すれば葛文にして 川とを合すれば葛川となれば, 新羅盛時には本と一部落たりしを後代衰殘して別々の里名となりしにあらざるかを思ふものなり.점패인물 씨·잡고(雜攷) 왕 제1집·갈문조

쪽수▶P189-1

右宮號城の中葛川宮の葛川は正に葛文にして五萬分地圖寧越の里名葛文里とも同名となる譯なり, 今慶州を中心として葛川と云ふ川名無きかを廣く聞質すも是と同名一切無し, 唯慶州の東北邦里約二里許に左の辰韓六村の一なる習比部 後の臨川部屬村に葛谷と云ふ里名あり(中略) 葛谷は今も同名にて現存しあること, 五萬分地圖所載の如く, 共南約十町許にして勿川里あり(中略) 葛谷里の葛と 勿川里の勿とを合すれば葛文にして 川とを合すれば葛川となれば, 新羅盛時には本と一部落たりしを後代衰殘して別々の里名となりしにあらざるかを思ふものなり.鮎貝 氏·雜攷王 第一輯·葛文條

라 하여 갈문을 갈천으로 속단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하여 갈곡(葛谷)의 갈과 물천리(勿川里)의 물을 합하면 갈문이 되고, 물천리의 천을 합하면 갈천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자유스러운 추론으로서 독단의 도를 넘은 듯하며, 그리고 이와 같이 갈문을 지명으로 본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쪽수▶P189-2라 하야 葛文을 葛川으로 速斷하고, 그것을 立證하기 爲하야 葛谷의 葛과 勿川里의 勿을 合하면 葛文이 되고, 勿川里의 川을 合하면 葛川이 된다는 것은 너무나 自由스러운 推論으로서 獨斷의 度를 넘은 듯하며, 그리고 이와 같이 葛文을 地名으로 본 다음과 같은 結論을 나리게 되었다.

さて此の宮號に地名を稱したるは最近までも繼續され居たる朝鮮の習俗たりしなり, 即ち 「王の生家」「王妃の生家」「王子大君の家」を稱して明禮宮, 於義宮, 壽進宮, 龍洞宮, 雲峴宮, 竹洞宮, 樓洞宮, 磚洞宮 等, 坊名詞名を一般が稱し居たるは新羅の遺俗なり, 又直に此の宮號を人敬稱にも移して, 雲峴大監(註略) 竹洞大監(註略) 桂洞大監(註略と稱したるなり(註略)即ち大監が王に代はりたる丈けにて葛文王と同一の稱呼なり.점패인물 씨 지음, 위의 책

쪽수▶P189-3

さて此の宮號に地名を稱したるは最近までも繼續され居たる朝鮮の習俗たりしなり, 即ち 「王の生家」「王妃の生家」「王子大君の家」を稱して明禮宮, 於義宮, 壽進宮, 龍洞宮, 雲峴宮, 竹洞宮, 樓洞宮, 磚洞宮 等, 坊名詞名を一般が稱し居たるは新羅の遺俗なり, 又直に此の宮號を人敬稱にも移して, 雲峴大監(註略) 竹洞大監(註略) 桂洞大監(註略と稱したるなり(註略)即ち大監が王に代はりたる丈けにて葛文王と同一の稱呼なり.鮎貝 氏 著 仝上

라 하여 갈문왕은 갈천궁에 살던 인물들이라는 것을 논단하였다. 이 설에 있어서는 (가)우선 갈문이 지명으로서의 갈천인 것이 의문이며, (나)근세 조선의 습속이라 하여 궁호에 지명을 붙이고 또 궁호를 ‘인경칭(人敬稱)’에 옮겨 쓰는 것을 (이런 것은 조선뿐만 아니겠으나) 들어 대번에 상대 신라의 오랜 습속이라 하는 것도 아직 연구의 여지가 있는 문제요, (다)또는 신라 상대로부터 통일기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간의 각 씨족의 수많은 갈문왕들이 갈천궁에서만 살았더라는 것은 양주동인물 씨도 지적한 바와 같이청구학총학술지 제22호권호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점패인물 씨 설에도 커다란 의문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189-4라 하야 葛文王은 葛川宮에 살던 人物들이라는 것을 論斷하였다. 이 說에 있어서는 (가)우선 葛文이 地名으로서의 葛川인 것이 疑問이며, (나)近世 朝鮮의 習俗이라 하야 宮號에 地名을 부치고 또 宮號를 「人敬稱」에 옮겨 쓰는 것을 (이런 것은 朝鮮뿐만 아니겠으나) 들어 대번에 上代 新羅의 古習이라 하는 것도 아직 硏究의 餘地가 있는 問題요, (다)또는 新羅 上代▶P190-1로부터 統一期에 이르기까지 約 六百年間의 各 氏族의 數만흔 葛文王들이 葛川宮에서만 사럿드라는 것은 梁柱東 氏도 指摘한 바와 같이靑丘學叢 二十二號 想像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면 우리는 鮎貝 氏 說에도 多大한 疑問을 가지지 아니할 수 없다.


























본문2: 2


고대 조선에서 신성, 위대, 존귀한 존재 또는 군장, 장상을 ‘감’, ‘가미’, ‘검’, ‘금’의 호로 불렀던 것이니 (감, 가미, 금, 검 등은 동일어의 음전(音轉)에 지나지 못함으로 이 글에서는 편의상 총괄적으로 ‘감’을 들 터임), 이것을 한자로 기사(記寫)함에 실로 다종다양으로 쓰인 것이다. 간(干), 감(邯), 금(今), 금(錦), 현대문주6▶금(金),[a 6] 개마(蓋馬), 금마(金馬), 고마(固麻) 등은 감에 대한 보통 차자의 기사이나, 소위 갈문도 실은 ‘감’을 표기한 것으로 믿는다. 이에 관하여 몇 가지 예를 들어 기사상으로 갈문과 관련된 것을 살펴보면, 감문국(甘文國)(개령(開寧))은 신라 조분이사금인물 2년에(서기 231) 토평(討平)된 것으로서 그 이전에는 일개의 소국가를 이루었던 것이다.삼국사기서적 권3. 이 감문국의 감문은 금마(金馬), 개마(蓋馬)와 같이 ‘감’의 기사일 것이니, 먼저 감문의 ()으로부터 살펴보면 고구려의 천개소문인물일본서기서적권24에는 伊梨柯須彌(이리가수미)로 읽었으니, 이는 조선의 옛 음을 전한 것으로 믿는다. 이리(伊梨)는 고구려어의 우물(泉)을 의미하는 ‘어을(於乙)’이 잘못이요 가수미(柯須彌)는 개소문에 당하는 것일지니조선사강좌서적·상세사(上世史) 제10장 참조, 문을 彌(미)로 읽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여지승람서적권49 문천(文川)조에 의하면
쪽수▶P190-2古代 朝鮮에서 神聖 偉大 尊貴한 存在 또는 君長 長上을 「감」「가미」「검」「금」의 號로 불렀던 것이니(감 가미 금 검 等은 同一語의 音轉에 지내지 못함으로 本稿에서는 便宜上 總括的으로 「감」을 들 터임), 이것을 漢字로 記寫함에 實로 多種多樣으로 씨여진 것이다. 干 邯 今 錦 원문주6▶[6] 蓋馬 金馬 固麻 等은 감에 對한 普通 借字의 記寫이나, 所謂 葛文도 實은 「감」을 表記한 것으로 믿는다. 이에 關하야 몇 가지 例를 들어 記寫上으로 葛文과 關聯된 것을 살펴보면, 甘文國(開寧)은 新羅 助賁 尼師今 二年에(西紀 二三一) 討平된 것으로서 그 以前에는 一個의 小國家를 이루웟던 것이다.三國史記 卷三. 이 甘文國의 甘文은 金馬 蓋馬와 같이 「감」의 記寫일 것이니, 먼저 甘文의 ()으로부터 살펴보면 高句麗의 泉蓋蘇文을 日本書紀卷二十四에는 伊梨柯須彌(이리가 미)로 讀하였으니, 이는 朝鮮의 古音을 傳한 것으로 믿는다. 伊梨는 高句麗語의 우물(泉)을 意味하는 「於乙」이 訛요 柯須彌는 蓋蘇文에 當하는 것일지니朝鮮史講座·上世史 第十章 參照, 文을 彌(미)로 읽엇던 것을 짐작할 수 있으며, 또 輿地勝覽卷四十九 文川條에 依하면

古稱妹城(○○) 高麗成宗八年 築城爲文州(○○)防禦使

쪽수▶P190-2

古稱妹城(○○) 高麗成宗八年 築城爲文州(○○)防禦使

라 하였으니, 매성(妹城)을 문주(文州)라 한 것은 개소문을 ‘가스미’라 한 것과 서로 출입이 있는 것으로서 또한 우연한 것이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현대문주7▶다시 감문국에 있어서도 군장을 ‘금(金)’으로 불렀던 듯하니,[a 7] 이것은 군장을 ‘감’으로(간(干), 금(金)) 부르던 금(또는 큰)가라국 즉 금관국과 흡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감문을 ‘감’으로 해석하는 데에 있어 한가지 암시가 되는 것이다.
쪽수▶P190-3라 하였으니, 妹城을 文州라 한것은 蓋蘇文을 「가스미」라 한 것과 서루 出入이 있는 것으로서 또한 偶然한 것이 아닐이라▶P191-1고 생각된다. 원문주7▶다시 甘文國에 있어서도 君長을 「金」으로 불렀던 듯하니,[7] 이것은 君長을 「감」으로(干, 金) 부르던 금(또는 큰)가라國 即 金官國과 恰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도 또한 甘文을 「감」으로 解釋하는 데에 있어 한가지 暗示가 되는 것이다.
이것으로도 감문은 ‘감’ 즉 ‘가미’의 차자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나, 이에 관하쳐 다시 적확한 유례를 들어보면, 삼국유사서적권1 고조선(왕검조선)조에
쪽수▶P191-2이것으로도 甘文은 「감」 即 「가미」의 借字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나, 이에 關하야 다시 的確한 類例를 드러보면, 三國遺事卷一 古朝鮮(王儉朝鮮)條에

(前略) 都平壤今西京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

쪽수▶P191-3

(前略) 都平壤今西京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

이라 하였다. 단군의 제2신도(神都)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금미달의 달은 산 또는 재를 칭한 것이요, 금미는 단군신도라는 의미로 보나 이두식 기사의 예로 보나 ‘감’ 즉 ‘가미’의 기사임이 분명하니, 이것은 감문과 전혀 동일한 것이며, 또 같은 책서적 가락국기 거질미왕(居叱彌王) 주에 “一云今勿金氏”라 한 것이 있으니 이것은 거질미와 금물(今勿)이 동음이역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요, 금물은 또 금무(今武)와도 통하는 것이니, 삼국사기서적지리지 3“今武縣 本百濟今勿縣 景德王改名”이라 하였다. 금물(물의 음미(音尾)의 불발하는 것 같은 예는 아래에서 들 터)과 금무는 같은 음을 기사한 것일지니, 신라 경덕왕인물 때에 이르러 물의 대신으로 아의(雅意)를 띠는 무(武)자로 바꿔 쓴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면 거질미(거질미의 질(叱)은 ‘님금’의 음사인 이질금의 질과 동례임) 금물, 금무는 ‘감’, ‘가미’를 기사한 것으로서 감문, 금미와 공통되는 것이다. 이밖에 옛 지명에 많이 나타나는 감물(甘勿), 가문(加文), 가질문(加叱文), 가문(佳文), 고미(古彌)(곤미(昆湄)), 가미(嘉彌), 고모(古牟) 등은 모두 감문에 통하는 것으로서 다시 일일이 누설할 필요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감’ 또는 ‘가미’의 기사가 실로 다양다종인 것이니 고래로 한자 차용의 이두식 기사는 시대를 따라 또는 편의를 따라 적어내려 온 것임으로 동일한 말에 있어서도 자못 복잡다단한 용례를 보여주는 것이 허다하다. 이러한 견지에서 다시 기사상으로 갈을 살펴볼까 한다.
쪽수▶P191-4이라 하였다. 檀君의 第二神都는 今彌達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으니, 今彌達의 達은 山 또는 재를 稱한 것이요, 今彌는 檀君神都라는 意味로 보나 吏讀式 記寫의 例로 보나 「감」 卽 「가미」의 記寫임이 分明하니, 이것은 甘文과 全혀 同一한 것이며, 또 同書 駕洛國記 居叱彌王 注에 「一云今勿金氏」라 한 것이 있나니 이것은 居叱彌와 今勿이 同音異譯인 것을 뵈여주는 것이요, 今勿은 또 今武와도 通하는 것이니, 三國史記地理志三에 「今武縣 本百濟今勿縣 景德王改名」이라 하였다. 今勿(勿의 音尾의 不發하는 것 갓흔 例는 아래에서 들 터)과 今武는 同音을 記寫한 것일지니, 新羅 景德王 때에 이르러 勿의 代로 雅意를 떼운 武字로 박구워 쓴 것에 不過한 것이다. 그러면 居叱彌(居叱彌의 叱은 「님금」의 音寫인 尼叱今의 叱과 同例임) 今勿 今武는 「감」「가미」를 記寫한 것으로서 甘文 今彌와 共通되는 것이다. 이밖에 古地名에 만히 나타나는 甘勿 加文 加叱文 佳文 古彌(昆湄) 嘉彌 古牟 等은 모두 甘文에 通하는 것으로서 다시 一一히 縷說할 必要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감」 또는 「가미」의 記寫가 實로 多樣多種인 것이니 古來로 漢字 借用의 吏讀式 記寫는 時代를 따러 또는 便宜를 따러 적어나려 온 것임으로 同一語에 있어서도 자못 複雜多端한 用例를 뵈여주는 것이 許多하다. ▶P192-1이러한 見地에서 다시 記寫上으로 葛을 살펴볼까 한다.
갈문의 문은 감문의 문과 동례인 것으로서 다시 설명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거니와, 갈(葛)자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원래 이두식 기사에 있어서는 머리만 발음하게 되는 글자의 예가 허다한 것이니 갈문의 갈도 다만 그의 두음 즉 ‘가’로 읽을 것이다. 다음 그와 같은 예를 몇 가지 들어보면, 삼국유사서적권4“嘉瑟岬惑作加西又嘉栖 皆方言也岬俗云古尸云云이라 하였으니 가슬(嘉瑟)은 고시 또는 고지(곶(串), 갑(岬))로 읽을 것으로서, 슬(瑟)은 그의 두음(시)만 발음하게 되는 것이며, “仇史郡古之屈自郡같은 책서적 제3이라 하여 굴자(屈自)는 ‘구지’ 또는 ‘고지’의 사음(寫音)으로서 굴도 두음(구)만 취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며 “閼智 即卿言小兒之稱”같은 책서적 권1이라 한 것은 알지(閼智)를 소아를 가리키는 ‘아지’로 읽을 것을 말함이니, 閼(알)도 또한 두음(아)만 읽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예는 실로 매거(枚舉)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것이니, 갈문의 갈도 ‘가’음을 취한 것으로 귀납할 수 있거니와, 다시 일보를 나아가 갈이 가음으로 쓰인 것을 들어보면 여지승람서적권36 영광조(靈光條) 육창향(陸昌鄕) 주에
쪽수▶P192-2葛文의 文은 甘文의 文과 同例인 것으로서 다시 說明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거니와, 葛字에 就하야 상고해보면 元來 吏讀式 記寫에 있어서는 頭만 發하게 되는 字例가 許多한 것이니 葛文의 葛도 다만 그의 頭音 即 「가」로 읽을 것이다. 다음 그와 같은 例를 몇 가지 들어보면, 三國遺事卷四에 「嘉瑟岬惑作加西又嘉栖 皆方言也岬俗云古尸云云」이라 하였으니 嘉瑟은 고시 또는 고지(串, 岬)로 읽을 것으로서, 瑟은 그의 頭音(시)만 發케 되는 것이며, 「仇史郡古之屈自郡仝書 第三이라 하야 屈自는 「구지」 또는 「고지」의 寫音으로서 屈도 頭音(구)만 取한 것을 뵈여주는 것이며 「閼智 即卿言小兒之稱」仝書 卷一이라 한 것은 閼智를 小兒의 稱인 「아지」로 讀할 것을 말함이니, 閼(알)도 또한 頭音(아)만 讀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例는 實로 枚舉키 어려울 만큼 만흔 것이니, 葛文의 葛도 「가」音을 取한 것으로 歸納할 수 있거니와, 다시 一步를 나아가 葛이 가音으로 씨여진 것을 들어보면 輿地勝覽卷三十六 靈光條 陸昌鄕註에

一云葛草一云加位

쪽수▶P192-3

一云葛草一云加位

라 하였으니, 갈이 가(加)와 같이 쓰이던 것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일로 보면 갈문은 개마(蓋馬), 고마(固麻), 감문(甘文), 거질미(居叱彌), 금미(今彌), 고미(古瀰), 고모(古牟) 등과 동일한 기사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192-4라 하였으니, 葛이 加와 같이 씨여지던 것을 보여주는 證左이다. 일로 보면 葛文은 蓋馬 固麻 甘文 居叱彌 今彌 古瀰 古牟 等과 同一한 記寫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 갈문왕은 어떠한 사람들을 칭하던 것인가. 이 방면으로부터 또한 갈문의 의미를 음미해볼까 한다. 이에 관하여는 간단히 금서룡인물 박사의 조사에 의하고자 하니, 금서인물 박사는 사기서적유사서적의 두 책을 통하여 17명(?)의 갈문왕을 들었다. 현대문주8▶그리하여 왕의 아버지가 8명, 왕의 외구(外舅) 즉 왕후의 아버지가 7명, 왕의 외할아버지가 8명, 여왕의 배우자가 1명, 불명의 것이 1명으로 유별하였다.[a 8] 이중에는 동일한 갈문왕이 중복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니, 예를 들면 (가)갑왕의 장인인 동시에 을왕의 생부가 되는 것, (나)갑을 두 왕의 장인, (다)갑왕의 장인이며 을왕의 외할아버지 등으로 되어있는 것이니 이것은 신라 성골왕족의 결혼관계로 보아 당연한 것으로 생각된다(성골과 갈문왕의 관계는 아래 절에서 논할 터).
쪽수▶P192-5다음 葛文王은 어떠한 사람들을 稱하던 것인가. 이 方面으로부터 또한 葛文의 意味를 吟味해볼가 한다. 이에 關하여는 簡單히 今西龍 博士의 調査에 依하고저 하나니, 今西 博士는 史記와 遺事의 兩書를 通하야 十七名(?)의 葛文王을 들었다. 원문주8▶그리하야 王의 父가 八, 王의 外舅 即 王后의 父가 七, 王의 外祖가 八, 女王의 匹이 一, 不明의 것이 一로 類別하였다.[8] 이中에는 同一한 葛文王이 重複된 關係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만흐니, 例하면 (가)甲王의 外舅인 同時에 乙王의 生父가 되▶P193-1는 것, (나)甲乙兩王의 外舅, (다)甲王의 外舅이며 乙王의 外祖 等으로 되여있는 것이니 이것은 新羅 聖骨王族의 結婚關係로 보와 當然한 것으로 생각된다(聖骨과 葛文王의 關係는 下節에서 論할 터).
어쨌든 갈문왕은 왕의 근친들이 많이 가졌던 칭호인 것은 의심치 못할 사실이니, 성골족에 대하여 경우를 따라 군장, 장상을 가리키는 ‘감’을 부치게 된 것이 괴이한 일은 아닐 것이며, 또 그들 갈문왕 중에는 갈문의 대신으로 단지 왕을 붙여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현대문주9▶파사이사금인물의 장인이요 또 외조라는 설이 있는 허루(許婁) 갈문왕은 허루왕으로도 쓰였으며,[a 9]지마이사금인물의 장인은 사기서적권1에는 갈문왕 마제(摩帝)(머리(頭)의 뜻인 듯)라 하였으나, 유사서적왕력에는 마제국왕으로 쓰였다. 사기서적에는 마제가 사람 이름과 같이 되고 유사서적에는 나라 이름과 같이 된 차이는 있지만 갈은 다만 갈문왕은 다만 왕으로도 쓰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일성이사금인물의 장인은 지소례왕(支所禮王)으로 보이나사기서적 권1, 신라왕통에 그러한 칭호가 없는 것이다. 지소왕도 성골일 것으로 보아 지소례 갈문왕을 다만 지소례왕으로 쓴 것이 아닐까 한다.
쪽수▶P193-2엇젯던 葛文王은 王의 近親들이 만히 가젓던 稱號인 것은 疑心치 못할 事實이니, 聖骨族에 對하야 境遇를 따러 君長 長上의 稱인 「감」을 부치게 된 것이 怪異한 일은 아닐 것이며, 또 그들 葛文王 中에는 葛文의 代로 單只 王을 부처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원문주9▶婆娑 尼師今의 外舅요 또 外祖라는 設이 있는 許婁 葛文王은 許婁王으로도 씨였으며,[9] 또 祗摩 尼師今의 外舅는 史記卷一에는 葛文王 摩帝(頭의 義인 듯)라 하였으나, 遺事王曆에는 摩帝國王으로 씨였다. 史記에는 摩帝가 人名와 같이 되고 遺事에는 國名과 같이 된 差는 있다 할지나 葛은 다만 葛文王은 다만 王으로도 쓰던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며, 또 逸聖 尼師今의 外舅는 支所禮王으로 보이나史記 卷一, 新羅王統에 그러한 稱號가 없는 것이다. 支所王도 聖骨일 것으로 보와 支所禮 葛文王을 다만 支所禮王으로 쓴 것이 아닐가 한다.
요컨대 ‘왕’은 ‘감’에 대신한 일종이요 갈문은 ‘감’의 이두식 기사의 일종일 것이므로 왕과 갈문이 서로 출입이 있을 것은 당연한 일로 믿으니, 위에 든 허루, 마제, 지소례 등의 예는 그의 증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쪽수▶P193-3要컨대 「王」은 「감」에 對한 一種이요 葛文은 「감」의 吏讀式 記寫의 一種일 것임으로 王과 葛文이 서로 出入이 있을 것은 當然한 일로 믿나니, 우에 든 許婁 摩帝 支所禮 等의 例는 그의 證跡을 뵈여주는 것이다.
이상으로써 갈문의 뜻을 소구해 보왔거니와 다시 갈문왕이라는 명칭에 대하여 살펴보면 군장 또는 장상을 가리키는 갈문에 왕을 붙인 것은 그의 본래의 의미로 보아 자못 중첩된 감이 없지 아니하나, 원래 우리의 언어를 기사함에 한자를 차용하였던 만큼 명사에 있어서도 본어의 의미와 한자의 그것이 중복됨이 많은 것이다. 현금 용어에 있어서도 그러한 예가 허다하거니와, 고대 기록에도 그러한 것이 적지 아니하니, 이제 몇 가지 그의 예를 들어보면 앞서 언급한 “儒禮尼叱今一作世里智王”이라는 유사서적의 기사에 있어서도 세리(世里)는 ‘누리’로서 특히 리(里)를 붙여 세(世)자 훈(訓)의 어미를 보인 것이니 세는 유(儒)(노(弩))체(禮)에 해당하는 것이며 세리()의 지(智)는 신지(臣智)(마한)의 지, 건길지(鞬吉支)(백제)의 지, 막리지(莫離支)(고구려)의 지와 동일한 것으로서 군왕, 장상을 의미하는 것이어늘 이에 다시 왕을 붙였으니, 이것은 재래 명칭을 그대로 두고 한식 칭호인 왕(王)자를 첨부한 것이며, 삼국유사서적가락국기“鉗知王 一云金鉗王”이라 하였으니, 겸(鉗)은 ‘감’을 표기한 것이요 지(知)는 세리지의 지와 동일한 것으로서, 겸지는 거룩한 또는 큰 님금의 뜻이어늘 거기다가 왕(王)자를 붙인 것이니, 겸지왕은 또 김겸왕(김은 성으로 붙인 것으로 해석됨)이라 하여 지(知)자를 뺀 것으로도 그의 곡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든 가락의 거질미왕도 또한 ‘감(가미)왕’이라 한 것에 벗어나지 아니할 것이요 앞서 언급한 유사서적“嘉瑟岬惑作加西 又嘉栖 皆方言也 岬俗云古尸故惑云古尸 寺 猶言興寺也라 한 기사에 있어서도 가슬(嘉瑟)은 고시(古尸)와 동일한 것으로 갑(岬)을 의미하는 말이어늘 가슬에 다시 갑을 부쳤으니 이것은 한말을 이중으로 역사(譯寫)한 것이다. 일로 보면 갈문에 왕(王)자가 붙은 것은 차라리 의례의 것에 속함이어늘 그러나 보통명사인 갈문은 왕(王)자가 붙음을 따라 특수 명칭과 같이 후대의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이다.
쪽수▶P193-4以上으로써 葛文의 義를 溯究해 보왓거니와 다시 葛文王이라는 名稱에 就하야 살펴보면 君長 또는 長上의 稱인 葛文에 王을 부친 것은 그의 本來의 意味로 보와 자못 重疊된 感이 없지 아니하나, 元來 우리의 言語를 記寫함에 漢字를 借用하였던 만큼 名詞에 있어서도 本語의 意味와 漢字의 그것이 重複됨이 만흔 것이다. 現今 用語에 있어서도 그러한 例가 許多하거니와, 古代 記錄에도 그러한 것이 적지 아니하니, 이제 몇 가지 그의 例를 들어보면 前擧한 「儒禮尼叱今一作世里智王」이라는 遺事의 記事에 있어서도 世里는 「누리」로서 特히 里를 부처 世字訓의 語尾를 보인 것이니 世▶P194-1는 儒(弩)禮에 當하는 것이며 世里()의 智는 臣智(馬韓)의 智 鞬吉支(百濟)의 支 莫離支(高句麗)의 支와 同一한 것으로서 君王 長上을 意味하는 것이어늘 이에 다시 王을 부쳤으니, 이것은 在來 名稱을 그대로 두고 漢式 稱號인 王字를 添附한것이며, 三國遺事駕洛國記에 「鉗知王 一云金鉗王」이라 하였으니, 鉗은 「감」을 表記한 것이요 知는 世里智의 智와 同一한 것으로서, 鉗知는 거룩한 또는 큰 님금의 뜻이어늘 거게다가 王字를 부친 것이니, 鉗知王은 또 金鉗王(金은 姓으로 부친 것으로 解釋됨)이라 하야 知字를 뺀 것으로도 그의 曲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에서 든 駕洛의 居叱彌王도 또한 「감(가미)王」이라 한 것에 버서나지 아니할 것이요 前擧한 遺事의 「嘉瑟岬惑作加西 又嘉栖 皆方言也 岬俗云古尸故惑云古尸 寺 猶言興寺也」라 한 記事에 있어서도 嘉瑟은 古尸와 同一한 것으로 岬을 意味하는 말이어늘 嘉瑟에 다시 岬을 부쳤으니 이것은 한말을 二重으로 譯寫한 것이다. 일로 보면 葛文에 王字가 붙은 것은 차라리 依例의 것에 屬함이어늘 그러나 普通名詞인 葛文은 王字가 붙음을 따러 特殊 名稱과 같이 後人에게 알려진 것이다.
이와 같은 갈문왕의 명칭은 언제부터 나타났던 것이었을까. 위에서도 여러 번 논급한 바와 같이 갈문의 원어인 ‘감’은 상고부터의 용호(用號)였으나 ‘감’의 차자인 갈문에 왕을 붙이게 된 것은 지증인물, 법흥인물 양왕 시대부터의 일이 아닐까 한다. 지증왕인물 때에 이르러 비로소 재래식 왕호인 마립간의 대신으로 왕을 칭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특히 갈문에 한하여 왕을 붙였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며, 현대문주10▶그리고 법흥왕인물 때에 이르러서는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쓴 것이 명확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a 10]
쪽수▶P194-2이와 같은 葛文王의 名稱은 언제부터 나타났던 것이였을까. 우에서도 여러 번 論及한 바와 같이 葛文의 元語인 「감」은 上古부터서의 用號이었으나 「감」의 借字인 葛文에 王을 부치게 된 것은 智證 法興 兩王 時代부터서의 일이 아닐까 한다. 智證王 때에 이르러 비로소 在來式 王號인 麻立干의 代로 王을 稱한 것으로 보와 그 以前에 特히 葛文에 限하야 王을 부쳤으리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며, 원문주10▶그리고 眞興王 때에 이르러서는 葛文王이라는 稱號를 쓴 것이 明確히 나타나 있는 것이다.[10]

































본문3: 3


상고 신라에서는 군장, 장상을 일반적으로 ‘감’의 칭호로써 불러왔으나, 현대문주11▶신라의 국가적 발전에 따라 국왕에 대한 칭호가 파생케 되었을 것으로 믿으니 거서간(居西干)은 거매금(居寐錦)과[a 11] 동일한 것으로서 거ㅅ감 즉 큰감으로 읽을지니 백제의 건길지와 같이 대간 즉 대왕의 뜻일지며, 이사(질)금은 삼국사기서적권1“尼師今方言也 謂齒理”라는 김대문의 해설이 붙어있으나 이것은 한 억설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서 이사금의 사는 질과 같이 ㅅ음을 하는 것이니, 니ㅅ금 즉 님(경애의 호칭)금의 뜻일지며 마립간의 마립에도 “麻立者 方言謂橛也云云”의 김대문의 해설이 보이나삼국사기서적 권3 마립은 머리(頭) 또는 마루(宗)의 뜻일 것이다. 일로 보면 신라의 국왕의 호는 무엇이거나 재래의 칭호인 干(감)의 위에 ‘큰’, ‘님’, ‘머리’(또는 마루) 등의 수식어를 붙여 된 것이니’ 이와 같은 왕호는 결국 ‘감’의 칭호에서 파생된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쪽수▶P195-1上古 新羅에서는 君長 長上을 一般的으로 「감」의 稱號로써 불러왔으나, 원문주11▶新羅의 國家的 發展에 따러 國王에 對한 稱號가 泒生케 되였을 것으로 믿나니 居西干은 居寐錦과[11] 同一한 것으로서 거ㅅ감 即 큰감으로 읽을지니 百濟의 鞬吉支와 같이 大干 即 大王의 意일지며, 尼師(叱)今은 三國史記卷一에 「尼師今方言也 謂齒理」라는 金大問의 解說이 부터있으나 이것은 한 臆說에 지나지 못하는 것으로서 尼師今의 師는 叱과 같이 ㅅ音을 하는 것이니, 니ㅅ금 即 님(敬愛의 稱)금의 意일지며 麻立干의 麻立에도 「麻立者 方言謂橛也云云」의 金大問의 解說이 보이나三國史記 卷三 麻立은 머리(頭) 또는 마루(宗)의 意일 것이다. 일로 보면 新羅의 國王의 號는 무엇이거나 在來의 稱號인 干(감)의 우에 「큰」「님」「머리」(또는 마루) 等의 修飾語를 부처 된 것이니 이와 같은 王號는 結局 「감」의 稱號에서 泒生된 過程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다시 재래의 칭호인 ‘감’ 즉 갈문왕은 어떠한 사람에게 붙여졌던가를 고구해보려 한다. 갈문왕의 칭은 대개 왕의 근친, 외척에 많은 것은 우에서도 논급한 바이나 그러나 일면에있어 왕의 아버지, 왕의 장인, 왕의 외할아버지 중에는 갈문왕의 칭호를 가지지 못한 이가 또한 많은 것이니 이에 관하여 간단히 금서룡인물 박사의 조사를 빌어 숫자로써 표시하면 갈문왕의 칭호를 향수하지 못한 이로서 왕의 아머지가 7명, 왕의 장인이 5명, 외할아버지가 4명이다금서인물 박사의 앞의 책서적에 의거한 것이니 왕의 장인과 외할아버지에 있어서는 1인으로 두 곳에 가산된 것이 많음.
쪽수▶P195-2이와 같은 見地에서 다시 在來의 稱號인 「감」 即 葛文王은 어떠한 사람에게 부처젓던가를 考究해보려 한다. 葛文王의 稱은 대개 王의 近親 外戚에 만흔 것은 우에서도 論及한 바어니와 그러나 一面에있어 王의 父 王의 外舅 王의 外祖 中에는 葛文王의 稱號를 가지지 못한 이가 또한 만흔 것이니 이에 關하야 簡單히 今西龍 博士의 調査를 빌어 數字로써 表示하면 葛文王의 稱號를 享受치 못한 이로서 王의 父가 七名, 王의 外舅가 五名, 外祖가 四名이다今西博士의 前擧書에 依據한 것이니 王의 外舅와 外祖에 잇서서는 一人으로 兩處에 加算된 것이 만흠.
이에 의하면 왕의 근친, 외척으로서 갈문왕의 칭호를 가지지 못한 수가 앞 절에서 열거한 피봉(被封) 갈문왕 수에 비하여 배 이상에 달하는 것이니, 이것은 사서의 누락으로도 볼 수가 없는 것이요, 명백히 갈문왕은 봉함으로 하여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닌 한 가지 증좌가 되는 동시에 또 왕의 근친, 외척에 반드시 붙여지던 칭호가 아니었던 것도 추찰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가.
쪽수▶P195-3이에 依하면 王의 近親 外戚으로서 葛文王의 稱號를 가지지 못한 數가 前節에서 列擧한 被封 葛文王 數에 比하야 倍 以上에 達하는 것이니, 이것은 史書의 漏落으로도 볼 수가 없는 것이요, 明白히 葛文王은 封함으로 하야 現出된 것이 아닌 한가지 證左가 되는 同時에 또 王의 近親 外戚에 반다시 부처지던 稱號가 아니였던 것도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니, 이것은 무엇을 意味하고 있는 것인가.
원래 ‘감’은 군장, 장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여 왔던 관계상 거서간, 이사금 시대에 들어서도 신라왕족을 구성한 씨족의 장상에게 의연히 그 칭호가 붙여졌을 것이며, 동일한 씨족 중에도 일반 족원은 그와 같은 칭호를 향수하지 못하였을 것은 ‘감’의 의의상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왕의 근친, 외척 중에도 갈문왕의 칭이 붙지 아니한 것은 대개 그 씨족의 일반 족원이 그에(왕의 근친, 외척) 해당하는 경우에 한하여 그리되는 것이 아닐런가 억측된다.
쪽수▶P196-1元來 「감」은 君長 長上의 稱으로 씨여 왔던 關係上 居西干 尼師今 時代에 드러서도 新羅王族을 構成한 氏族의 長上에게 依然히 그의 稱號가 부처젓슬 것이며, 同一한 氏族 中에도 一般 族員은 그와 같은 稱號를 享受치 못하였을 것은 「감」의 意義上으로 推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國王의 近親 外戚 中에도 葛文王의 稱이 붓지 아니한 것은 대개 該 氏族의 一般 族員이 그에(王의 近親 外戚) 當하는 境遇에 限하야 그리되는 것이 아닐런가 臆測된다.
그러나 갈문왕 가운데는 이미 논거한 바와 같이 봉으로 말미암 된 것도 있으니 이것은 어떠한 사정에서 기인한 것인가. 원래 ‘감’은 그의 성질상으로 보아도 봉에 의하여 출현되지 못할 것이나 신라의 중대에 가까이 올수록 국왕의 권위가 높아짐을 따라 소위 존친영족(尊親榮族)의 관념이 강하여짐으로 특별한 경우에 갈문왕을 봉하는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그리하여 앞서 언급한 6명의 피봉 갈문왕 중에 골정, 백반, 국반, 용춘의 4명은 세신(○○), 진정(○○), 진안(○○), 문흥(○○)(문흥은 익(謚)으로도 볼 수 있으나)의 미호(美號)를 각각 붙여 갈문왕에 봉한 것이니, 이는 재래의 본명을 붙인 갈문왕에 비하여 자못 색채가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이같이 봉의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일종의 가족주의에서 나온 특수한 예로 볼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196-2그러나 葛文王 가운대에는 이미 論擧한 바와 같이 封으로 말미아마 된 것도 있나니 이것은 어떠한 事情에서 起因한 것인가. 元來 「감」은 그의 性質上으로 보와도 封에 依하야 出現되지 못할 것이나 新羅의 中代에 갓치이 올수록 國王의 權威가 높아짐을 따러 所謂 尊親榮族의 觀念이 強하야짐으로 特別한 境遇에 葛文王을 封하는 形式을 가추게 된 것이 아니였을까 한다. 그리하야 前擧한 六名의 被封 葛文王 中에 骨正 伯飯 國飯 龍春의 四名은 世神(○○) 眞正(○○) 眞安(○○) 文興(○○)(文興은 謚로도 볼 수 있으나)의 美號를 各各 부처 葛文王에 封한 것이니, 이는 在來의 本名을 부친 葛文王에 比하야 자못 色彩가 다른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要컨대 이같이 封의 形式을 取하게 된 것은 一種의 家族主義에서 나온 特例로 볼 수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에 신라의 골품과 갈문왕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갈문왕은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왕의 근친, 외척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칭호며, 또 갈문왕에는 박, 석, 김 이외의 씨성이 붙여진 예가 없으니 이것은 명백히 신라왕족을 구성한 소위 박석김 3씨족이 향유하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위 성골은 이 3씨족으로 구성된 신라왕족(통일기 이전의)을 가리키는 것이니, 성골에 관하여는 삼국사기서적(5권) 진덕왕인물 8년조에
쪽수▶P196-3다음에 新羅의 骨品과 葛文王과의 關係를 살펴보면 葛文王은 旣述한 바와 같이 王의 近親 外戚에게서 만히 볼 수 있는 稱號며, 또 葛文王에는 朴, 昔, 金 以外의 氏姓이 부처진 例가 없으니 이것은 明白히 新羅王族을 構成한 所謂 朴昔金 三氏族의 享有하던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所謂 聖骨은 이 三氏族으로 構成된 新羅王族(統一期 以前의)을 가르친 것이니, 聖骨에 關하여는 三國史記(卷五) 眞德王 八年條에

國人謂 始祖赫居世至眞德 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〇末의誤〿)王 謂之眞骨

쪽수▶P196-4

國人謂 始祖赫居世至眞德 二十八王 謂之聖骨 自武烈至永(〇末의誤〿)王 謂之眞骨

이라 하였고 신당서서적(新唐書) 신라전에
쪽수▶P197-1이라 하였고 新唐書 新羅傳에

共建官 以親屬爲上 其族名 第一骨第二骨以自別兄弟女 姑姨 從姉妹 皆聘爲妻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 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 常爲妾媵

쪽수▶P197-2

共建官 以親屬爲上 其族名 第一骨第二骨以自別兄弟女 姑姨 從姉妹 皆聘爲妻 王族爲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 第一骨 不娶第二骨女 雖娶 常爲妾媵

이라 하였다. 신당서서적의 기사는 신라의 골품제가 엄행되던 때의 자료에 근거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으로서 이 두 기사를 대조해 보면 당서의 제1골은 성골에 제2골은 진골에 해당하는 것이다. 당서서적의 기사는 당시 신라왕족 간에 이뤄지던 제한적 혼인제를 전하는 것이니 왕족 즉 성골족 간의 그와 같은 혼제에 관하여 갈문왕 중에서 한둘의 예를 들어보면 지증마립간인물의 아버지 습보(習寶) 갈문왕은 그의 숙부 눌지마립간인물의 딸 조생부인(鳥生夫人)과 결혼하였으며 법흥왕인물의 동생 입종(立宗) 갈문왕은(진흥왕인물의 아버지) 법흥왕인물의 딸과 결혼하였으니사기서적 권3, 4
쪽수▶P197-3이라 하였다. 新唐書의 記事는 新羅의 骨品制가 嚴行되던 때의 資料에 根據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으로서 이 두 記事를 對照해 보면 唐書의 第一骨은 聖骨에 第二骨은 眞骨에 該當한 것이다. 唐書의 記事는 當時 新羅王族 間에 行하던 制限的 婚姻制를 傳하는 것이니 王族 即 聖骨族 間의 그와 같은 婚制에 關하야 葛文王 中에서 한둘의 例를 드러보면 智證 麻立干의 父 習寶 葛文王은 그의 叔父 訥祗 麻立干의 女 鳥生夫人과 結婚하였으며 法興王의 弟 立宗 葛文王은(眞興王의 父) 法興王의 女와 結婚하였으니史記 卷三, 四
이것은 당서에 보이는 바와 같이 형제녀, 종자매와의 결혼이 행해지던 왕족 즉 성골의 관습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시 “王旅僞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라는 기사로써 미루어 보면 갈문왕은 성골에 한한 칭호였음을 또한 추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갈문왕의 칭호와 성골은 운명을 같이할 것도 또한 추단할 수가 있는 것이니, 현대문주12▶신라의 성골은 28대 진덕여왕인물으로서 단절되었으며[a 12] 상고 이래 역대로 자주 나타나던 갈문왕의 칭호도 태종 무열왕인물의 아버지 문흥 갈문왕으로서 일단락을 지은 것은 도간의 소식을 말하는 것이다.
쪽수▶P197-4이것은 唐書에 보이는 바와 같이 兄弟女 從姊妹와의 結婚이 行해지던 王族 即 聖骨의 慣習을 나타내는 것이며, 다시 「王旅僞第一骨 妻亦其族 生子皆爲第一骨 不娶第二骨女」라는 記事로써 미루워 보면 葛文王은 聖骨에 限한 稱號였음을 또한 推察할 수가 있는 것이다. 따러서 葛文王의 稱號와 聖骨은 運命을 같이할 것도 또한 推斷할 수가 있는 것이니, 원문주12▶新羅의 聖骨은 二十八代 眞德女王으로써 斷絕되였으며[12] 上古 以來 歷代로 자조 나타나든 葛文王의 稱號도 太▶P198-1宗 武烈王의 父 文興 葛文王으로써 一段落을 지은 것은 道間의 消息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이르러 오직 하나의 갈문왕 칭호가 새삼스럽게 보이니 제43대 희강왕인물의 비 문목부인(文穆夫人)은 갈문왕(○○○) 충공의 딸이라는 것이 곧 이것이다삼국사기서적 권10. 충공은 제38대 원성왕의 손이요 제44대 민애왕인물의 아버지니(민애왕인물 때에 이르러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존(追尊)되었음) 이는 고대로 근친, 왕족에 많이 보이던 갈문왕의 칭이 관습에 은현(隱現)되어 우연히 충공에 붙여진 것에 불과한 것으로 해석된다. 일로 보면 갈문왕의 칭호가 태종 무열왕인물 이후 즉 진골 왕실에 들어서 없어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쪽수▶P198-2그러나 新羅 末期에 이르러 오직 하나의 葛文王 稱號가 새삼스러히 보이나니 第四十三代 僖康王의 妃 文穆夫人은 葛文王(○○○) 忠恭의 女라는 것이 곧 이것이다三國史記 卷十. 忠恭은 第三十八代 元聖王의 孫이요 第四十四代 閔哀王의 父니(閔哀王 때에 이르러 宣康大王으로 追尊되였음) 이는 古代로 近親 王族에 만히 보이던 葛文王의 稱이 慣習에 隱現되여 偶然히 忠恭에 부처진 것에 不過한 것으로 解釋된다. 일로 보면 葛文王의 稱號가 太宗 武烈王 以後 即 眞骨王室에 드러서 없서지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신라의 성골은 사로(斯盧) 6촌의 결합에서 출현된 것으로 믿거니와 이 6촌의 결합에서 소위 박석김 3씨족이 나타나고 동시에 왕위 계승에 있어 이 3씨족은 우월적 조건을 가지게 되었으며, 다른 측면에 배타적 성질이 첨가되었다. 여기에서 신성한 혈통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고 소위 성골이라는 명사도 나온 것으로 믿는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성골족의 장상에 대하여 재래 군장, 장상을 가리키는 말인 ‘감’을 붙이게 된 것은 또한 있을 만한 일이다.
쪽수▶P198-3元來 新羅의 聖骨은 斯盧 六村의 結合에서 出現된 것으로 믿거니와 이 六村의 結合에서 所謂 朴昔金 三氏族이 나타나고 同時에 王位 繼承에 있어 이 三氏族은 優越的 條件을 가지게 되였으며, 他面에 排他的 性質이 添加되였다. 여기에서 神聖한 血統이라는 觀念이 생기게 되고 所謂 聖骨이라는 名詞도 나온 것으로 믿는다. 그리하야 이와 같은 聖骨族의 長上에 對하야 在來 君長 長上의 稱인 「감」을 부치게 된 것은 또한 있을 만한 일이다.
끝으로 갈문왕의 칭호가 태종 무열왕인물 이후부터 나타나지 못한 유래를 간단히 고찰해보면 먼저, (A)신라 국세의 발전과 그에 인한 골품제의 변화를 들 수가 있는 것이다. 현대문주13▶신라통일기에 이르러 국세의 급속한 발전과 새로운 귀족의 첨가, 결합으로 말미암아[a 13] 재래 씨족제도에 의하여 출현된 골품제에 변화가 생기고 그 결과 성골족의 해소작용이 촉치(促致)된 것이니, 갈문왕 호에 있어서는 그의 대상이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B)일면에 있어서는 당과의 정치적, 문화적 교섭이 그의 통일기부터 더욱 빈번함을 따라 중국식 전례의 영향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삼국사기서적권5 태종 무열왕인물 원년조에
쪽수▶P198-4끝으로 葛文王의 稱號가 太宗 武烈王 以後부터 나타나지 못한 由來를 簡單히 考察해보면 먼저, (A)新羅 國勢의 發展과 그에 因한 骨品制의 變化를 들 수가 있는 것이다. 원문주13▶新羅統一期에 이르러 國勢의 急速한 發展과 新附 貴族의 添加 結合으로 말미암어[13] 在來 氏族制度에 依하야 出現된 骨品制에 變化가 생기고 그 結果 聖骨族의 解消作用이 促致된 것이니, 葛文王 號에 있어서는 그의 對象이 사러진 것이다. 그리고 (B)一面에 있어서는 唐과의 政治的 文化的 交涉이 그의 統一期부터서 더욱 頻繁함을 따러 中國式 典禮의 影響이 또한 적지 아니하였던 것이니, 三國史記卷五 太宗 武烈王 元年條에

追封王考 爲文興大王

쪽수▶P198-5

追封王考 爲文興大王

이라 하였다. 이것이 국왕의 사친(私親)에 대한 중국식 추존형식으로서 처음 보이는 것이 다른 면에 있어 왕실의 외척에 대하여도 왕호를 부치지 아니하는 것이 원칙으로 되었던 것이니, 이것도 성골족의 해소에 다시 중국식 전례의 영향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쪽수▶P199-1이라 하였다. 이것이 國王의 私親에 對한 中國式 追尊形式으로서 처음 뵈이는 것이며 他面에 있어 王室의 外戚에 對하야도 王號를 부치지 아니하는 것이 原則으로 되였던 것이니, 이것도 聖骨族의 解消에 다시 中國式 典禮의 影響을 입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통일 이후의 신라에는 역대 국왕의 사친에 대하여 대개는 모모대왕이라는 추존을 가하였던 것이니 이와 같은 전례의 결과는 태종 무열왕 이전에 있어 왕실존친이 갈문왕의 칭호를 흔히 가지던 것과 유사히 보임으로 인하여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이라는 막연한 후세적 해설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런가 생각한다. (끝)
쪽수▶P199-2그리하야 統一 以後의 新羅에는 歷代 國王의 私親에 對하야 대개는 某某大王이라는 追尊을 加하였던 것이니 이와 같은 典禮의 結果는 太宗 武烈王 以前에 있어 王室尊親이 葛文王의 稱號를 흔이 가지던 것과 類似히 보임으로 因하야 「新羅追封王 皆稱葛文王」이라는 漠然한 後世的 解說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닐런가 생각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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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三國遺事(卷一) 第二 南解王條에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三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이라 한 것과 三國史記(卷四) 智證 麻立干條에「論日新羅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中略)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라 한 것을 對照해보면 內容과 句法이 서로 一致하며 또 遺事(卷三) 原宗興法條에 註로서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이라 한 것을 보면 史臣은 金富軾을 가르친 것이며 「史論曰云云」은 「忠臣金富軾論曰云云」으로 解釋된다.
  2. 助賁 尼師今과 그의 弟 沾解 尼師今의 父는 骨正(世神) 葛文王이요 味鄒王은 父 仇道를 葛文王에 封하였으며(三國史記 卷二) 智證 麻立干은 習寶 葛文王의 子요 眞興王은 葛文王 立宗의 子요(仝書卷四) 太宗 武烈王은 (卓)文興 葛文王의 子다(三國遺事·王曆).
  3. 三國遺事(王曆) 第二十九 太宗 武烈王條에 「名春秋, 金氏, 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라 하였고 三國史記 卷五 太宗 武烈王 元年條에 「夏四月 追封王考僞文興大王」이라 하엿나니 이 兩書의 記事를 對照하여 보면 龍春 卓 文興 葛文王의 卓字는 誤字 또는 衍字인 듯하며 文興 葛文王은 追封에 屬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
  4. 東洋學報 第十三卷 第四號·葛城末治 氏 「新羅女王に就いて」에 史記に考仇道を封じて葛文王と爲すとあるを以て是亦追討たらざるべからず 禮記に「生曰父曰母曰妻 死曰考曰祝曰嬪」とあり……按ずるに仇道は阿達羅王十九年波珍飡を拜し 伐休王二年仇須兮と興に左右軍主と爲りし人にして當時二十歳と假定すれば(中略)味鄒王二年は九十七歳に相當す 此の年齢より見るも味鄒王即位以前旣に死亡し 即位の後之を葛文王に追封したるものと解釋するを妥當とすべし云云.
  5. 三國史記(卷四) 智證王 四年條에 「冬十月 群臣上言(前略)又觀 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世 但稱方言 未正尊稱今群臣一意 謹上尊號新羅國王 王從之」라 뵈임.
  6. 新羅의 金姓에 關하야는 三國史記 脫解 尼師今 九年條에(三國遺事에는 後漢 明帝 永平王 三年 即 脫解 尼叱今 四年의 일로 뵈임) 始祖 閼智가 金櫝에서 나왔다 하야 金으로 姓을 하였다고 뵈이나 元來 金氏族이 閼智 一族에 限한 것이 아니니 新羅에 잇서서도 第五世 婆娑 尼師今 외 妃가 金氏 史省夫人으로 보이며(史記) 三國遺事(王曆)에 第三 弩禮 尼叱今의 妃는 辭要王女 金氏로 뵈이나니(史記에는 儒理 尼師今의 妃를 日智 葛文王의 女라 하고 「或云妃姓朴許婁王之女」라는 註가 뵈이나) 이것들을 年代上으로 보와 閼智의 子孫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駕洛의 首露王 一族도 金姓을 부치게 된 것으로 보면 古代에 神聖한 氏族으로서 검族屬이 만헛던 것을 알 수 잇으며 後世에 나려옴을 따러 이와 같은 검氏族에 對하야 검의 譯字인 金을 中國式 姓으로 부첫던 것이 아닐런가 한다.
  7. 輿地勝覽(卷二十九) 開寧條에 「甘文……金孝王陵」의 註로 「在縣北二十里, 有大塚, 俗傅甘交金孝王陵」이라 하니 金孝王의 金도 新羅의 金과 갓치 君長의 稱 「감」으로 나온 것으로 解釋된다.
  8. 今西龍 博士의 新羅史硏究·新羅葛文王考에 依하면 十七名의 葛文王을 드는 中에 眞正 葛文王과 葛文王 忠恭은 統計에 너치 아니하였으며 또 國飯 葛文王도 「王(眞德)의 父」에 너헛스나 三國史記(卷四)에 依하면 眞平王 元年에 「封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이라 하였다. 博士의 眞正 忠恭의 兩葛文王을 統計에 너치 아니한 것과 葛文王의 類別에 잇서 王의 母弟를 들지 아니한 것은 그의 理由를 解하기 어렵다.
  9. 三國史記(卷一) 儒理 尼師今條 及 婆娑 尼師今條에 依하면 許婁 葛文王 또는 許婁王의 姓은 朴으로도 뵈이고 金으로도 뵈이나 元來 新羅의 王室 三姓은 뒤에 追附한 것으로서 新羅 初에 朴金의 漢字姓이 存在치 못한 것은 다시 說明할 것도 없는 것이다. 所謂 新羅 王室 三姓은 血統 關係가 錯雜한 만큼 서로 석박귀기 쉬운 것이니 中代 新羅의 朴堤上의 朴도 金으로도 씨엿던 것으로도 알 수 잇다. 다시 三國遺事(王曆)에 依하면 弩禮 尼叱今의 外舅요 婆娑 尼叱今의 外祖는 辭要王이라 하엿스나 이 辭要王의 辭要는 今西 氏도 指摘한 바와 가티(今西 氏의 前擧書) 許婁의 誤算된 것으로 믿는다.
  10. 昌寧에 잇는 眞興王 巡狩 管境碑에 葛文王 稱號가 나타나 뵈임.
  11. 崔致遠撰 智證大師寂照塔碑文參照.
  12. 史記에 「國人謂始祖赫居世系眞德二十八王謂之聖骨云云」이라 하였고 遺事(王曆) 善德女王條에 「善德女王(中略)聖骨男盡故女王立」이라 하고 同 眞德女王條에 「己上中古聖骨 己上(○上은 下의 誤)下古眞骨」이라 하였다.
  13. 金官(駕洛)國主 金仇亥 一族은 眞骨 待遇를 받엇던 것이니 三國史記(卷四) 法興王 十九年條에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證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이라 하였으며 駕洛系의 金庾信 一族과 太宗 金春秋 一族과의 血緣的 結合도 그의 一例이다.






현대문주


  1. 삼국유사서적(권1) 제2 남해왕조에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 麻立干者四羅末名儒崔致遠 作帝王三年代曆 皆稱某王 不言居西干等 豈以其言鄙野不足稱也 今記新羅事 具存方言 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이라 한 것과 삼국사기서적(권4) 지증마립간인물조에 “論日新羅稱居西干者一 次次雄者一 尼師今者十六(中略)今記新羅事 其存方言 亦宜矣”라 한 것을 대조해 보면 내용과 구법이 서로 일치하며 또 유사서적(권3) 원종흥법조에 주로서 “羅人凡追封王者 皆稱葛文王 其實 史臣亦云未詳”이라 한 것을 보면 사신(史臣)은 김부식인물을 가리키는 것이며 “史論曰云云”은 “忠臣金富軾論曰云云”으로 해석된다.
  2. 조분이사금인물과 그의 동생 첨해이사금인물의 아버지는 골정(세신) 갈문왕이요 미추왕인물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으며(삼국사기서적 권2) 지증 마립간은 습보 갈문왕의 아들이요 진흥왕인물은 갈문왕 입종의 아들이요(사기서적 권4) 태종 무열왕인물은 (탁)문흥 갈문왕의 아들이다(삼국유사서적·왕력)
  3. 삼국유사서적(왕력) 제29 태종 무열왕인물조에 “名春秋、金氏、眞智王子龍春卓文興葛文王之子也 龍春一作龍樹”라 하였고 삼국사기서적 권5 태종 무열왕 원년조에 “夏四月 追封王考僞文興大王”이라 하였으니 이 두 책의 기사를 대조하여 보면 용춘(龍春) 탁(卓) 문흥(文興) 갈문왕의 탁(卓)자는 오자 또는 연자(衍字)인 듯하며 문흥 갈문왕은 추봉에 속한 것으로도 볼 수 있음.
  4. 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4호권호 갈성말치인물 씨 「新羅女王に就いて원고」에 史記に考仇道を封じて葛文王と爲すとあるを以て是亦追討たらざるべからず 禮記に「生曰父曰母曰妻 死曰考曰祝曰嬪」とあり……按ずるに仇道は阿達羅王十九年波珍飡を拜し 伐休王二年仇須兮と興に左右軍主と爲りし人にして當時二十歳と假定すれば(中略)味鄒王二年は九十七歳に相當す 此の年齢より見るも味鄒王即位以前旣に死亡し 即位の後之を葛文王に追封したるものと解釋するを妥當とすべし云云.
  5. 삼국사기서적(권5) 지증왕인물 4년조에 “冬十月 群臣上言(前略)又觀 自古有國家者 皆稱帝稱王 自我始祖立國 至今二十世 但稱方言 未正尊稱今群臣一意 謹上尊號新羅國王 王從之”라 보임.
  6. 신라의 김(金) 씨성에 관하여는 삼국사기서적 탈해이사금인물 9년조에(삼국유사서적에는 후한 명제 영평왕인물 3년 즉 탈해 이질금 4년의 일로 보임) 시조 알지가 금독(金櫝)에서 나왔다 하여 김(金)으로 성을 하였다고 보이나 원래 김씨족이 알지 일족에 한한 것이 아니니 신라에 있어서도 제5세 파사이사금인물 외 비가 김씨 사성부인(史省夫人)으로 보이며(사기서적) 삼국유사서적(왕력)에 제3 노례(弩禮) 이질금의 비는 사요왕(辭要王) 딸 김씨로 보이니(사기서적에는 유리이사금인물의 비를 일지 갈문왕의 딸이라 하고 “或云妃姓朴許婁王之女”라는 주가 보이나) 이것들을 연대상으로 보아 알지의 자손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가락의 수로왕인물 일족도 김(金)성을 붙이게 된 것으로 보면 고대에 신성한 씨족으로서 검족속이 많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후세에 내려옴을 따라 이와 같은 검씨족에 대하여 검의 역자인 김(金)을 중국식 성으로 붙였던 것이 아닐까 한다.
  7. 여지승람서적(권29) 개령조에 “甘文……金孝王陵”의 주로 “在縣北二十里、有大塚、俗傅甘交金孝王陵”이라 하니 금효왕인물(金孝王)의 금(金)도 신라의 금(金)과 같이 군장을 가리키는 말인 ‘감’에서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8. 금서룡인물 박사의 신라사연구서적·신라갈문왕고원고에 의하면 17명의 갈문왕을 드는 중에 진정 갈문왕과 갈문왕 충공은 통계에 넣지 아니하였으며 또 국반 갈문왕도 ‘왕(진덕)의 아버지’에 넣었으나 삼국사기서적(권5)에 의하면 진평왕 원년에 “封母弟伯飯爲眞正葛文王 國飯爲眞安葛文王”이라 하였다. 박사가 진정, 충공의 두 갈문왕을 통계에 넣지 아니한 것과 갈문왕의 유별에 있어 왕의 동생을 들지 아니한 것은 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렵다.
  9. 삼국사기서적(권1) 유리이사금인물조 및 파사이사금인물조에 의하면 허루 갈문왕 또는 허루왕의 성은 박으로도 보이고 김으로도 보이나 원래 신라의 왕실 3성은 뒤에 추가된 것으로서 신라 초에 박김의 한자성이 존재하지 못한 것은 다시 설명할 것도 없는 것이다. 소위 신라 왕실 3성은 혈통 관계가 착잡한 만큼 서로 섞이기 쉬운 것이니 중대 신라의 박제상인물(朴堤上)의 박도 김으로도 쓰였던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다시 삼국유사서적(왕력)에 의하면 노례 이질금의 장인이요 파사 이질금의 외할아버지는 사요왕이라 하였으나 이 사요왕의 사요는 금서인물 씨도 지적한 바와 가티(금서인물 씨의 앞의 책서적) 허루가 오산된 것으로 믿는다.
  10. 창녕에 있는 진흥왕인물 순수관경비(巡狩管境碑)에 갈문왕 칭호가 나타나 보임.
  11. 최치원인물(崔致遠)이 찬(撰)한 지증대사적조탑비문(智證大師寂照塔碑文) 참조.
  12. 사기서적에 “國人謂始祖赫居世系眞德二十八王謂之聖骨云云”이라 하였고 유사(왕력) 선덕여왕조에 “善德女王(中略)聖骨男盡故女王立”이라 하고 같은 진덕여왕인물조에 “己上中古聖骨 己上(○上은 下의 誤)下古眞骨”이라 하였다.
  13. 금관(가락)국의 주인 김구해인물 일족은 진골 대우를 받았던 것이니 삼국사기서적(4권) 법흥왕인물 19년조에 “金官國主金仇亥 與妃及三子 長曰奴宗仲曰武德季曰武力 以國帑寶物來降 王證待之 授位上等 以本國爲食邑 子武力仕至角干”이라 하였으며 가락계의 김유신인물 일족과 태종 김춘추인물 일족과의 혈연적 결합도 그의 일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