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참에 대한 일이의 고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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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2일 (화) 12:57 판 (본문2: 도참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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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참에 대한 일이의 고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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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圖讖에 對한 一二의 考察(一)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병도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 4
시작쪽 001쪽 종료쪽 018쪽 전체쪽 018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민속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도참은 일종의 미신 혹은 신비사상에 속하는 것이고, 이것의 신앙 조작 내지 유행은 동양사상 특히 중국 및 조선사상에 있어 일층 많이 발견되는 사상이며, 더욱 그 정치·사회사의 이면에 있어, 때때로 밀접한 교섭을 가지는 것이니, 종래 이런 류의 사상은 종종의 신비적 언설에 의하야 인심을 충동 혹은 지배하야 종종의 공능(功能)을 행사하였을 만큼 실제생활에 끼친 영향은 실로 적지 아니하였다. 한 왕조가 일어나고 거꾸러지는 소위 ‘역성혁명’의 큰 변동기에 있어서는 물론이요, 기타 내환외우로 시국이 불안한 때에도 이런 종류의 사상은 반드시 머리를 듣고 활보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욱 정치(개혁)운동, 민중(갱생)운동의 지도자 자신이 이를 이용 혹은 조작하여 자기편에 유리하도록 민중을 기만하고 구사(驅使)하며 민중은 이에 맹신, 맹종하여 얼마나 많은 성패득실의 자취를 역사상에 남기어 놓았는지 모른다. 저 왕망인물(王莽)의 찬위, 광무인물(光武)의 중흥을 비롯하여 중국 역대의 역성의 때에 도참의 유작(遺作) 혹은 이용 유행을 보지 아니한 적이 없었고, 또 황건(黃巾), 백련(白蓮) 기타의 비밀결사적 운동이 순연히 이러한 사상으로 색채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우리 동방에 있어서도 옛적 삼국의 쇠망의 때라든지, 더구나 고려 일대는 말할 것도 없고, 이조의 초중말엽에도 이런 사상과의 교섭이 얼마나 잦았으며, 특히 최근세의 동학교문의 운동과 같은 것은 마치 중국의 백련교, 의화권교(義和拳敎)의 운동과 방불한 감을 주게 하는 것으로, 이 역시 도참적 요소를 다량으로 가미하였던 것이다. 중국의 소위 『공자폐방기서적(孔子閉房記)』니 『추배도서적(推背圖)』니 하는 것과 고려조의 『도선비기서적(道詵秘記)』 따위 이조의 『정감록서적(鄭鑑錄)』 따위의 도참서류는, 식자계급, 무식자계급을 막론하고 오랫동안 인심을 미혹하여 종종의 폐해를 끼치었으며, 이런 까닭에 혹은 도참 배척의 성과 금지의 령이 행치 아니한 것은 아니었지, 워낙 그 신앙 및 사상의 뿌리가 인간 심리에 깊이 밝히어 있는 만큼 잠재적 세력을 가지고 기회를 따라 재현의 작용을 함이 보통이었다. 도참에 대한 사상사적 방면의 연구는 오인에게 과여된 중요한 제목임에 불구하고 재래 학자의 학술적 고찰을 거치지 아니하였으며, 현금에도 이에 대하여 연구하는 이가 있는지 없는지 나의 과문으로는 듣지 못하였다. 나는 연래 이 방면 연구에 다소의 흥미와 관심을 가지게 되어 간간이 사고의 일단을 발표하여 왔거니와, 이번에는 특히 도참 그것의 개념에 대하여―즉 그 의의, 유별 및 기원에 대하여―약간의 고찰을 시하려 한다.
쪽수▶P001-1圖讖은 一種의 迷信 혹은 神祕思想에 屬하는 자이어니와, 이것의 信仰 造作 乃至 流行은 東洋史上 特히 中國 及 朝鮮史上에 있어 一層 많이 發見되는 事象이며, 더욱 그 政治·社會史의 裏面에 있어, 때때로 密接한 交涉을 가지는 것이니, 從來 이런 類의 思想은 種種의 神秘的 言說에 依하야 人心을 衝動 혹은 支配하야 種種의 功能을 行使하였는 이만치 實際生活에 끼친 影響은 實로 적지 아니하였다. 한 王朝가 일어나고 거꾸러지는 所謂 『易姓革命』의 큰 變動期에 있어서는 勿論이요, 其他 內患外憂로 時局이 不安한 때에도 이런 種類의 思想은 반드시 머리를 듣고 闊步하게 된다. 그리하여 더욱 政治(改革)運動 民衆(更生)運動의 指導者 自身이 이를 利用 혹은 造作하야 自己편에 有利하▶P002도록 民衆을 欺瞞하고 驅使하며 民衆은 이에 盲信 盲從하여 얼마나 많은 成敗得失의 자취를 歷史上에 남기어 놓았는지 모른다. 저 王莽의 簒位, 光武의 中興을 비롯하여 中國 歷代의 易姓의 際에 圖讖의 遺作 혹은 利用 流行을 보 지 아니한 적이 없었고, 또 黃巾 白蓮 其他의 秘密結社的 運動이 純然히 이러한 思想으로 色彩되지 아니한 것이 없었다. 우리 東方에 있어서도 옛적 三國의 衰亡의 際라든지, 더구나 高麗 一代는 말할 것도 없고, 李朝의 初中末葉에도 이런 思想과의 交涉이 얼마나 잦았으며, 特히 最近世의 東學敎門의 運動과 같은 것은 마치 中國의 白蓮敎 義和拳敎의 運動과 枋佛한 感을 주게 하는 것으로, 이 역시 圖讖的 要素를 多量으로 加味하였던 것이다. 中國의 所謂 『孔子閉房記』니 『推背圖』니 하는 것과 高麗朝의 『道詵秘記』 따위 李朝의 『鄭鑑錄』 따위의 圖讖書類는, 識者階級 無識者階級을 莫論하고 오랫동안 인심을 迷惑하여 種種의 弊害를 끼치었으며, 이런 까닭에 혹은 圖讖排斥의 聲과 禁止의 令이 行치 아니한 것은 아니었지, 워낙 그 信仰 及 思想의 뿌리가 人間心理에 깊이 밝히어 있는 이만치 潜在的 勢力을 가지고 機會를 따라 再現의 作用을 함이 普通이었다. 圖讖에 對한 思想史的 方面의 研究는 吾人에게 課與된 重要한 題目임에 不拘하고 在來 學者의 學術的 考察을 거치지 아니하였으며, 現今에도 이에 對하여 硏究하는 이가 있는지 없는지 나의 寡聞으로는 듣지 못하였다. 나는 年來 이 方面 硏究에 多少의 興味와 關心을 가지게 되어 間間이 私考의 一端을 發表하여 왔거니와, 이번에는 特히 圖讖 그것의 槪念에 就하여―즉 그 意義 類別 및 起源에 就하여―若干의 考察을 試하려 한다.





































본문2: 도참의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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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3-1圖識은 즉 圖와 讖과의 連稱語로서, 單히 이를 圖라고도 하고 讖이라고 도하며 또 緯와 結合하야 圖緯 讚緯라고도 하는 것이나, 圖讖과 緯는 後에 말할 바와 같이 본래 本質을 달리하고, 처음에는 반드시 交涉이 있던 것도 아니며, 그 用語에 있어서도 『圖讖』편이 『圖緯』나 『讚緯』의 語보다는 좀 몬저 나타나고 또 널리 使用되어 온다. 그러므로 여기에 나는 特히 圖讖이란 用語를 就하기로 하였다. 그러면 圖讖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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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3-2圖讖이 무엇인가를 좀 仔細히 상고하려면 그 用語의 意義로부터 詮索할 必要가 있고, 또 그리함에는 각기 글자의 오랜 用語文例와 그 本質的 語義를 캐어, 이 두 글자의 連合된 所以를 밝히어 봄이 便利할 듯하다. 나의 考究의 便宜上, 먼저 讖字에 就하여 조사하고 생각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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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3-3今日 傳來의 文獻으로서 讖字가 나타나는 가장 오랜 것을 든다면, 第一 먼저 史記卷四十三 趙世家에―扁鵲이 趙簡字의 病을 보고 나와서 告하는 말이란 記載 中에―『在昔 秦繆公嘗如此七日而寤 寤之日 告公孫支與子輿日 我之帝所甚樂 (中略) 帝告我 晉國將大覇○獻公의 亂 五世不安 其後將覇○文公 未老而死 霸者之子○襄公 且令而國○秦公 男女無別 公孫支 書而藏之 奏讖(●●)於是出矣』라 한 秦讖과 淮南子卷十六 說山訓 中에 『六畜生 多耳目者不祥 讖書(●●)著之』라 한 讖書를 들 수 있다. 그런데 史記의 所謂 『秦讖』은 그 內容의 믿기 어려움은 別問題로 하고―同書卷百五 扁鵲傳에 보이는 同一 記事 中에는 『奏策』으로 되어있다. 讖字가 先秦文獻에 全혀 나타나지 안는 것으로 보면 차라리 『奏策』이 原史料 그대로의 面▶P004目을 傳하는 것 같고 『秦讖』의 讖은 史記 撰者의 손에 改筆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거니와, 그는 어떻든 이러한 境遇의 『策』과 讖과는 勿論 意味 相通의 것으로 共히 一種의 神託(oracle) 夢兆(omen from dream) 혹은 天啓(divine revelation)를 記錄한 簡冊의 謂인 듯, 就中 策에는 簡札‧著筮‧符籤의 意가 있으므로 이는 確實이 神의 音信(message) 占言 等을 적은 簡札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淮南子의 所謂 『讖書』는 瑞異徵驗에 關한 書로서, 別言하면 徵兆 (omen)의 吉凶을 判斷하는 書인 듯하다. 다음에 漢書卷四十八 賈誼傳을 보면 同人의 鶚賦 中에 『異物來崪 私怪其故 發書占之()言 其度』라 한 讖字가 보이는데, 史記卷八十四 同人傳의 同文 中에는 讖字가 역시 策字로 되어있다. 勿論 이것도 策字가 original이요 字는 漢書 撰者의 改置한 바로 볼 것이어니와, 여기의 策은 龜策 蓍策의 策으로 占 意味한 것이며 讖은 策의 辭, 다시 말하면 占辭 그것이다. 즉 이런 境遇의 讖字와 策字는 占 또는 占言이란 意味로 通用된 것인 듯하다. 讖字의 發明이 어느 때에 되었는지는 자세치 아니하나 現存한 文獻으로는 우의 史記 · 淮南子의 記事로써 그 初見이라고 할 수 있으며, 前漢 末期에는 이 方面의 專門家와 專門書籍이 많이 나타나기 때문에 漢書의 이즈음에 關한 記事 中에는 讖字가 더러 나오게된다. 漢書卷十一 哀帝紀 建平 二年條에 待詔夏賀良 等의 上言 中에는 『赤精子之讖(○○○○○) 漢家歷運中衰云云』의 句가 있고、同書卷七十五 李尋傳에 依하면 이 앞서 成帝時에도 齊人甘忠可란 者가 있어 역시 이 讖說을 唱하야 『天帝使眞人赤精子下敎我此道』라고 한 것이 적히어 있다. 所謂 『赤精子의 讖』은 그 標枋으로서는 역시 一種의 神託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그보다도 天帝 · 眞人에 假託(●●)하야 漢室의 歷運을 말한 普通의 豫言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또 同書卷九十九 王莽傳을 보면 地皇 二年條에는 卜者王況이 李焉이란 者를 爲하여 讖書(○○)를 作하야 『劉氏가 復興하고 李氏가 그를 도으리라』는 말을 한 것이 있고, 更始 元年條에도 道士西門君惠란 者가 天文讖記(○○○○)를 좋아하여 將軍 王涉을 ▶P005-1爲하여 말하기를 『星孛掃宮 劉氏當復興云云』이라고 하였다는 것이 적히어 있다. 『劉氏復興』의 說은 當時에 盛行하는 讖說이어서 宛人 李通 等도 이런 設로써 劉秀(光武帝)를 衝動하여 마침내 舉事를 하게 한 것은 有名한 事實로, 後漢書卷一 光武紀 첫 장에 『宛人李通等 以圖讖(○○)說光武云 劉氏復與 李氏爲輔云云』이라고 하여 있거니와, 이들 讖書 · 讖記 · 圖讖은 역시 卜筮 또는 天文에 依하여, 혹은 鬼神에 假託하여, 當時 劉氏의 再興을 豫言하고 또 이를 刺戟케 한 一種의 符命說이었다. 圖讖이란 語는 同後漢書에, 『圖緯』, 『讖緯』의 語와 함께 거이 枚舉키 어려울 만치 많이 나오지만, 漢書 王莽傳 平帝元始四年의 記事 中에도 이 『天文圖讖』의 語가 보이나 現存 文獻으로는 이것이 初見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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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5-2要컨대 圖讖의 讖은 讖言 讖書 讖記 讖錄의 謂인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또 그것이 神託 天啓 夢兆 瑞異 占言 歷運 符命 및 其他의 豫言 秘記 等을 가르치는 말인 것도 以上 列擧의 文例에 例하여 明白하지만 다시 讖이란 글자의 뜻이 무엇인가를 상고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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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5-3許愼의 說文을 보면, 『讖()也 有徵驗(○○)之書 河雒所出書曰讖 从言 韱聲』이라 하고, 또 後漢書卷八十九 張衡傳을 보면 同人의 圖讖非難의 疏中에 『立言於前(○○○○) 有徵於後(○○○○) 故智者貴焉 謂之讖書』라고 하였다. 唐의 章懷太子의 後漢書 光武帝紀 註前記 圖讖의 註에는 『讖 符命之書 讖()也 言爲王者受命之徵驗(○○)也』라 하고, 宋의 戴侗의 六書故에는 『前定徵兆之言』이라고 定義하였다. 이들 說에 依하면 讖에는 驗也 徵也의 義가 있으니, 事前의 立言 ‧ 徵兆 ‧ 暗示 等의, 將來에 있어서의, 符合 效驗을 約束(promise)하는 것이다. 別言하면 未來의 事相에 對한 標徵(token) 혹은 信號(signal)로서 「그러케 될」 것을 確證的으로 豫言하는 것이다. 說文에 『河雒所出書』란 것은 즉 河圖洛書의 謂로서, 圖書에 就하여는 後에 仔細히 말▶P006하려고 하거니와, 이것과 章懷太子의 所謂 『讖符命之書』는 各各 讖의 一例證으로서 든 것에 끝이고 그 一般的 意義는 아니다. 차라리 그 一般的 意味는 『驗也』, 『徵驗也』라고 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讖의 目的論的 說明이라고 할 수 있고, 그 木質的 語源的 意義는 따로 있다고 생각된다. 劉熙의 釋名(釋典藝)에는 以上 諸說과 달라 『讖纖也 其義纖也』라고 하였다. 讖의 義를 纖微也라고 한 것은 讖記 讖言의 內容이 대개 神祕한 隱微한 徵兆 兆朕의 語로써 채(充)여 있다는 見地에서의 解釋뿐만 아니라, 자못 根本的으로, etymologically로 讖字를 解釋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上記 說文에 『从言韱聲』이라고 함과 같이 이 글자는 言字와 韱字로써 結合되어 있다. 韱의 聲(音)뿐 아니라 그 뜻도 맺어 있는 것이다. 韱은 韯 혹은 虃으로도 書하여 說文에 『山韭也』라고 하였다. 山韮(○○)는 즉 細葉인 『부추』의 謂로 古來 中國人의 常食하는 野菜의 一種이다. 細葉의 特徵을 가지기 때문에 이 韱字는 굴러서 纖微 些細 尖銳의 義를 갖게 되었으니, 그것은 이 글자와 合成된 다른 모든 글자의 意義로부터 歸納하여 알 수 있다. 于先 孅銳也細也泉水纔出也悔也細慮也銳也竹籤也細也纖虫長帶, 旗斿銳尖也 細雨微雨과 같은 字를 보아도 明瞭할 것이다. 그런즉 讖字도―言邊에 韱을 붙였으므로―역시 纖微한 말이라든지 隱秘한 意味를 가진 말이라고 解釋될 것이다. 이것이 도리어 讖字의 original한 뜻일 것이다. 이러한 纖徵의 뜻을 가진 讖字가 神託 天啓 夢兆 瑞異 卜言 歷運說 符命說 및 其他의 豫言과 같이 將來의 徵驗을 約束하는 말에 對한 一共通的 術語로 된 것은 當然한 바로서, 이들 自身이 極히 神秘的인 隱微的인 特質을 有하고 또 極히 秘密히 造作되고 또 往往 秘密히 使用되는 것이다. 讖記를 在來 朝鮮서는 祕記 密記 祕詞 혹은 祕訣이라고도 하거니와, 그 理由는 여기에 있다. 要컨대 讖이란 것은 隱秘한 言語 혹은 文字로써 將來의 일을 豫言 暗示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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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7-1우에는 讖字의 意義를 說明하였으므로 다음에는 圖讖의 圖가 무엇인가에 對하여 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常懷太子는 後漢書 光武紀 註前引 李通의 圖讖說下注에 『圖河圖也』라고 하였으나, 河圖가 무엇이란 說明은 보이어 있지 않다. 그러나 圖讖의 圖는 결국 河圖와 같은 類의 것을 指稱한 바에 틀림없으므로, 역시 거긔 關한 오랜 記事를 조사해 볼 必要가 있다. 먼저 儒家經典 中에 就하야 이를 求하면, 尙書 顧命篇에 『越玉五重 陳寶 (中略) 太玉 夷玉 天球 河圖(○○) 在東序』라 한 河圖의 語가 보이고, 論語 子罕篇에 『子曰鳳島不至 河不出圖(○○○○) 吾已矣夫』, 易繫辭(上)에 『河出圖(○○○) 洛出書 聖人則之』, 禮記 禮運篇에 『天降豪露 地出醴泉 山出器車 河出馬圖(○○○○)』의 文이 보인다. 원문주1▶여긔 이른바 『河圖』 혹은 『圖』 『馬圖』는 易의 『洛出書』의 書와 相並하여 儒家의 所謂 河圖洛書란 것이니, 圖書에 對한 漢儒들의 解釋[1]을 들으면, 河圖는 즉 八卦로서 伏犧氏 時代에 河水에서 龍馬가 出하여 그 背文(紋)을 본받아 이를 畫한 것이라 하고 이에 對하여 洛書는 즉 洪範九疇로서 禹의 時에 洛水에서 神龜가 出하여 그 背甲에 排列된 數類에 依하여 이를 成한 것이라 한다. 이러한 設은 본래 믿을 바 되지 못하지만 宋儒에 이르러서는 一層 說을 敷衍하여, 易 繫辭의 天地數로 構成된 五十五點의 원문주2▶奇偶黑白圖[2]를 龍馬河圖의 形이라고 하는 同時에 八卦를 이에 關聯시키며, 또 九宮·九星의 術에서 由來된 四十五點의 원문주3▶黑白圖[3]를 神龜洛書의 文(紋)이라고 하는 同時에 洪範九疇를 여기에 關係 붙이는 것이 普通이나, 원문주4▶그러나 혹은 이와 正反對로 後者의 四十五點圖를 河圖라 하고 前者의 五十五點圖를 洛書라고 하는 說도 있었다.[4] 龍 혹은 龍馬가 圖를 負하고 河水에서 出하였다 혹은 單히 河水에서 圖가 出하였다 또는 이에 對하여 洛水에서는 龜文이 나타났다 하는 等說은 실상 黃河流域을 中心으로 하여 發展하든, 그리고 龍·鳳·龜·麟 等 物을 靈物視하든 上代 中華 民族에 있어서는 그러할 듯한 傳說이라고 할는지 모르겠으나, 所謂 河圖가 伏犧氏 時代에, 洛書가 禹의 時代에 나왔다는 것이라든지 圖와 書의 形式 ▶P008及 內容이 어떠어떠하다는 上記 諸說은 全然 後儒들의 附會한 바로서, 이에 對하여는 近世 淸儒들의 考證的 研究에 依한 痛快한 辨說이 많음으로, 새삼스러이 吾人의 辨을 要치 아니하지만, 어떻든 河圖와 洛書를 易과 書에 關係 붙이어 解釋하는 것은 漢儒 以來의 無理한 짓이라고 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혹은 上引한 易繫辭의 文에 依하야 그 不然함을 反辨할 이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河圖洛書를 八卦 及 九疇에 分設과 같은 表示는 없고, 다만 卜筮 起源의 하나로서 兩者를 並擧한 데 不過하며, 뿐만 아니라 吾人은 進하여 繫辭의 文, 그것에 큰 懷疑를 가지고 있다. 원래 繫辭 中에는 漢代 學者의 潤色 혹은 添入한 듯한 部分이 많이 있고, 더욱 위의 繫辭의 一節은 同人의 筆法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닌 듯하며첫째 聖人得之의 같은 句가 上下에 重疊하여 있는 것이 우습다, 또 其中의 『洛出書』란 것은 다른 經典 中에는 勿論, 經典 以外의 他先秦文獻 中에도 나타나지 아니하므로 原文으로서는 더욱 더욱 信用을 둘 수 없다. 그러므로 위의 繫辭의 一節은 결국 秦 以後의 儒者의 所爲에 依한 蛇足이라고 볼 수밖에 없고, 따라 이 글에 依하여 圖書를 卜筮起源의 一로서 보는 것도 無根據한 일이겠다. 그러면 上記 尙書 論語 及 禮記에 보이는 河圖關係의 文字는 대체 무엇을 意味한 것인가. 尙書의 河圖는―그것이 果然 傳說과 같이 周의 成王 時代의 것인지 아닌지는 疑問이며 또 그것이 무엇인가도―分明치 못하지만, 同文 中에 大玉 夷玉 天球 等과 함께 列擧되었는 것을 보면 그것(河圖)은 역시 玉石類의 것으로 마치 左傳 昭公 二十四年(冬十月)에 津人이 河水에서 寶珪를 얻었다고 함과 같이 이것도 河水에서 나왔다고 하는 瑞玉이거나 혹은 紋石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때 珍寶視 또는 얼마쯤 神祕視되었을 것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음에 論語의 『河不出圖』의 圖는 역시 이러한 瑞紋이 있는 玉石類를 意味한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傳說에 이름과 같은 龍馬의 圖의 謂인지 잘 알 수 없으나, 어른 『鳳鳥不至』와 井擧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聖人王者의 符瑞 혹은 蘚徵▶P009-1으로서의 어떠한 圖를 가르친 것임에 틀림없을지니, 즉 聖人王者가 나오면 거기에 앞서서 鳳鳥가 飛來하고 河水로부터는 瑞圖가 나온다는 傳說에 依하여 極히 詩的으로 嘆息한 말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대체 孔子의 말로 보아 상치가 없을 것이다. 끝으로 禮記의 『河出馬圖』는 鄭玄의 註에 『龍馬負圖而出也』라고 함과 같이 확실히 傳說上의 龍馬의 圖를 이름이며, 同文 中에 『天降豪露』 『地出體泉』 『山出器車』 等과 列擧되였음을 보아 이것도 祥瑞를 意味한 것에 틀림없다. 『洛出(龜)書』의 句가 보이지 아니함을 보면 禮記의 이 記載도 先秦 文獻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後秦 文獻에는 河圖洛書가 並擧됨이 普通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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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09-2다시 儒家 經典 以外의 諸書에 나타나는 圖書關係의 記載를 들면, 墨子卷五 非攻篇 下에 『赤鳥銜珪 降周之岐社曰 天命周文王 伐殷有國 秦顚來賓 河出綠圖(○○○○) 地出乘黃神馬』이라 하고, 呂氏春秋卷十三 有始覽 應同章에 『赤鳥銜円書(●●) 集于周社云云』, 同書(卷二十) 特君覽 觀表章에 『人亦有徵 事與國皆有徵 聖人上知千歲 下知千歲 非意之也 盖有自云也 綠圖(○○) · 幡簿 從此生矣』라 하고, 淮南子 俶眞訓에 『至德之世 (中略) 洛出円書(●●●●) 河出綠圖(○○○○)』라 하고 漢書卷四十九 鼂錯傳에―錯의 上言 中에―『臣聞五帝神聖 (中略) 河出圖(○○○) 洛出書(●●●) 神龍至 鳳鳥翔云云』, 同書(卷六) 武帝紀 元光元年 五月詔에 『朕聞 (中略) 周之成康 刑錯不用 德及鳥獸 敎通四海 (中略) 麟鳳在郊藪 河洛出圖書(○○○○○)云云』이라 하고, 其他 緯書 中에는 이러한 類의 記載가 가장 많이 보이어 一一히 枚舉키 어려우나, 圖書에 就하여는 何者든지 符瑞 혹은 徵驗으로서―神秘的 또는 傳說的으로―말하여 있다. 墨子의 『綠圖』와 淮南子의 『綠圖』 及 『円書』는 河水 또는 洛水에서 나왔다고 하므로 疑心없이 河圖洛書의 謂지만, (但 前者는 文王時에, 後者는 至德之世에 出한다 하고), 呂氏春秋의 『円書』 及 『綠圖』는 洛水나 河水와는 關係가 없는 모양인즉 이는 반드시 河圖洛書라고 하기는 어렵고, 또 그 所謂 綠圖란 것도 前後의 文義로부터 보면▶P010-1 純粹한 符瑞는 아니요 一種 未來의 徵驗書, 즉 讖記(豫言記)와 같은 것의 謂임을 알 수 있다. 綠圖라고 하면 글자대로 綠色의 圖란 뜻이지만, 혹은 이를 錄圖(○○)라고도 書한다. 易緯是類謀에 『錄圖(○○)有自顓頊云云』 『河出錄圖(○○) 雒授變書』 『錄圖(○○)世讖』이라 함과 尙書緯璇璣鈴에 孔子의 言이라고 하야 『五帝出受錄圖』라 함과 孝經緯鉤命訣에 『舜即位 巡省中河 錄圖(○○)授文』이라고 함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또 저 史記卷六 秦本紀 始皇 三十二年條에 燕人盧生이란 者가 始皇帝의 使命에 依하여 海에 入하였다가 還來하야 鬼神事로써 錄圖書(○○○)를 奏하여 曰 『亡秦者胡也』라고 함과 일로 因하여 始皇帝는 將軍 蒙恬으로 하여금 北胡를 쳐서 河南의 地를 略取하게 하였다 함은 有名한 事實이지만, 여기에는 錄圖書란 語가 보인다. 錄圖書라고 함은 錄圖의 書란 意味인 듯하며, 즉 錄圖란 이름을 借來한 書로서 이는(河水의 대신으로) 鬼神에 假託하야 造作한 一種의 豫言記(讖記)임이 無疑한 것이다. 圖는 後에 籙圖 혹은 圖籙이라고도 하고 또는 이를 略하여 單히 籙이라 圖라 하기도 하니, 魏의 宋均은 論語讖註에 籙를 說明하여 『籙 天敎命也』라고 하였다. 即 籙은 天神으로부터 受한 敎書(message)의 謂라는 것이다. 要컨대 錄圖의 錄은 처음에는 色의 意味로 使用되였던 것이나, 後에 綠과 錄의 音通에 依하여 錄字가 거기에 代用되고 또 錄과 籙과의 사이에 音義가 相通한 所以로 後에는 籙字가 거기에 充當되게 되었거니와, 最初의 綠字와는 좀 距離가 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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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1-2圖書에 對한 神秘的 觀念의 擴大에 따라, 河圖洛書의 稱은 種種의 神秘的 書籍에 借用되어, 緯書 中에는 勿論이요 道敎의 道藏 中에도 그 이름을 取한 것이 많이 있다. 더욱 道藏 中에는 寶籙 圖籙 靈圖, 其他 무슨 圖 무슨 籙이라고 名稱한 書가 가장 많거니와, 이들은 勿論 未來를 豫言 혹은 標徵하는 約束이 아니라 단지 『聖書』 『聖經』과 같은 意味에서 使用된 것이므로 純然한 圖讖家의 所謂 圖書와는 本質을 달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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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1-3이와 같이 設述하여온즉, 圖讖의 ()는 符瑞 혹은 徵驗의 性質을 가진 所謂 河圖 · 綠圖(錄圖) · 圖書 等의 謂임이 더욱 疑心없을 것이나 정작 圖字의 語義에 就하여는 아직 言及하지 아니 하였으므로 다음에는 그것을 考察하려 한다. 說文에 依하면 圖는 『畫計難也 从口从啚 圖難意也』하고 段氏의 註에 『啚者嗇也 嗇者愛濇也 愼難之意也云云』이라 하야 計畫 · 愼難 ·愛濇의 意가 있다고 하였으며, 또 爾雅(釋詁)에는 『謀也』라 하고 釋名(釋典藝)에는 『圖度也 盡其品度也(●●●●●)』라 하야 謀度 · 商量 · 窮究의 意가 있다고 하였다. 圖에 計畫 愼難 謀度 等의 意가 있는 것은 의심 없으나, 이는 말하▶P012-1자면 第二次 第三次的의 語義에 屬하고 第一次의 根本的 語義는 아니며, 더욱 說文 及 其注에 圖字 內의 啚字를 難意 또는 嗇의 義로 解한 데 對하여는 나는 贊成하지안는다. 왜 그러냐 하면 啚는 卽 鄙로서 都鄙(地方區域)字의 義인 所 以다. 鄙의 古字는 본래 啚니 거기에 邑字를 附한 것은 後世의 일이다. 羅掘玉 氏도 啚에 就하여 원문주5▶『此即都鄙之本字 說文解字 以爲啚嗇字 而以鄙爲都鄙字 考古文都鄙字 亦不从邑 从邑者後來所增也』[5]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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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2-2원문주6▶啚의 殷虛文字形은 ․․․와 같이 되어있는데[6] 羅氏의 說에 依하면 이는 倉廩의 象으로서 倉廩 所在가 啚라는 것이니, 원문주7▶啚의 㐭이 바로 廩의 本字임을 參考함이 좋다(京도 역시 倉廩의 義임을 並考이 可함)[7]. 圖字도 卜辭 乃至 古金文에는 □를 省畧한 곳도 있지만 其 理由는 鄙字의 邑邊을 省畧함과 같다. 圖字의 □는 古文圍字로서 包圍의 意니, 『从口从啚』의 圖字의 語源的 意義(○○○○○○○○)는―倉廩 所在의 地, 즉 田庄 領地를 包含한 象으로서 所有土地圖 領地圖 疆域圖 輿地圖, 다시 簡單히 말하면 地圖 또는 그것을 畫한다는 뜻이다. 版圖니 圖籍이니 하는 圖는 다 地圖를 이름이다. 圖字의 第一次的 根本的 意義는 이와 같이 地圖, 또는 地圖를 그린다는 것에 있을 것이나, 이것이 一轉하여 土地山川 以外의 다른 事像 物像의 畫寫까지도 圖라고 하게 되었다. 이는 圖의 第二次的 派生的 語義라고 할 수 있거니와, 위의 說文 爾雅 및 釋名에 보인 計畫 謀度의 義도 말하자면 第一次的 語義 혹은 第二次的 字義에서 再轉한것일 것이다. 이를 英語의 map이란 말과 對照하여 보면 興味를 느끼게 하는 것이 있으니 map의 本義는 말할 것도 없이 地圖(名詞), 또는 地圖로 나타낸다(動詞)는 것이나, 轉하여 圖를 畫한다 表現한다는 뜻도 되고, 또는 거기에 out란 말을 붙이어 mapout이라고 하면 計畫한다 謀策한다는 뜻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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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2-3그런데 여기에 注意할 것은 圖와 畵와의 區別이니, 이에 對하여는 辭源의 圖畫條에 比較的 要領 있는 說明이 보이▶P013-1어있다. 가로대 『()者脫離實物 於精神上製成之 如地圖非實際所能審視 僅依測量之所得 顯之於紙上是也 ()者以所見之實物 用點線濃淡彩色等 表視之 以發其美之觀念』이라고 하였다. 즉 圖는 實事 實物을 떠나서 多少 抽象的 혹은 含縮的으로 그것의 特徵 條理 要領만을 表示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얼마쯤 解釋思考의 餘地를 가지게 하는 것이나, 畫는 될수록 實物에 卽近하야 直觀的으로 美의 感을 하도록 表現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원문주8▶畫의 古字形은 또는 로서 羅振玉氏의 說[8]과 같이 『日光四射』의 狀을 象한 것이니, 畫가 日光을 象하는 데서 出發한 字이라 하면 圖는 倉廩所在(所有土地, 즉 領地)를 畫하는 데서 出發한 字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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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3-2이와 같이 圖字에 있어 ①地圖의 義, ②圖象 畫象의 義, ③計畫 謀策의 義가 있다고 하면, 河圖 綠圖(錄圖) 圖書의 圖 즉 圖讖의 圖는 三者 中 그 어떤 意義에 該當할 것인가? 이는 勿論 第二의 圖象(名詞)의 意요, 第一의 地圖나 第三의 計畫 謀度의 意는 아니니, 換言하면 河圖 綠(錄)圖 圖書 等 符瑞 徵驗의 圖는, 人爲的 計畫的 謀策的 出現을 標榜한다는 것보다도 될수록 神意的 自然的 天然的 出現을 標榜하는 것으로서 讖과 같이 未來에 일어날 事實의―秘密(隱密)한―象徵(Symbol) 標徵(Token) 信號(Sygnal) 徵候(Smptom) 前兆(omen) 暗示(Suggestion)로서의 意義를 가진 것이다. 즉 將來에 어떠한 事實이 일어나기 前에 미리 그 事象의 標徵으로서 어떠한 形式의 圖가 나타난다는 것이 즉 河圖 綠圖인 所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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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3-3그러나 그 圖는 반드시 圖畫的 形式을 要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形式으로나 含縮的 象徵的 信號的 表示를 줄 만한 記寫면 可하므로 文字 其他 符號로도 表示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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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3-4일로써 보면 圖는 讖과 거의 性質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즉 圖나 讖이나 將來의 徵驗을 意味하고 天▶P014-1意的(神意的) 自然的 現出을 標榜하는 同時에 그 表現(表示)의 方法과 形式이 神祕를 極하고 또 兩者가 흔히 王者 受命의 符驗으로서 任務를 다하든 點에 있어 全혀 서로 一致하여 조금도 다름이 없다. 이는 마침내 圖와 讖이 結合하여 『圖讖』이란 術語를 生하게 하고 또 위에 引說한 바와 같이 說文에 『河雒所出書曰讖』이라 하여 河圖洛書를 곧 讖이라고까지 하게 된 所以어니와, 以後로 圖와 讖은 더욱 더욱 區別이 없게 되어 圖가 곧 讖이요 讖이 곧 圖라고 할 만치 되었다. 그러나 兩者間에 區別이 全혀 없는 것은 아니다. 圖書에는 원래 符瑞·標徵으로서의 意가 많음에 對하여 讖에는 그보다도 占驗 豫言의 義가 더 또 讖의 傳達方法은 文字 外에 言語로써 發表할 수 있지만, 圖에 있어서는 文字나 其他의 形式으로써 반드시 記寫(○○)를 要하므로 言語(口頭)에 依한 表示는 圖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圖와 讖을 嚴密한 意味에서 區別한다면 지금 말한 바와 같으나, 兩者를 結合하여 『圖讖』이라고 할 때는 勿論 그 뜻도 서로 混合된 것이므로 그러한 巖密한 區別과 分析할 必要가 없는 것이다. 夢中에 나타나는 讖―즉 夢讖―과 言語(口述)에 依한 讖과 같은 것은 何等의 記寫의 形式이 없으므로 이를 圖라고 單稱할 수는 없지만, 圖讖이라고는 할 수 있는 것이며, 또 文字 以外의 어떠한 符號나 圖形으로 나타낸 未來의 標徵은 이를 『圖』라고 할지언정 『讖』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역시 圖讖이란 連稱語로서 부를 수는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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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4-2以上 說述한 바에 依하여 讀者는 圖讖이란 대체 무엇인가를 了得하였을 줄로 믿지만 다시 이를 묶어서 簡單히 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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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4-3圖讖은 그 內容形式의 眞僞와, 現出의 神祕與否를 莫論하고 將來의 事象―特히 人間生活의 吉凶禍福 盛衰得失▶P015-1에 對한 豫言 혹은 徵兆를 泛稱하는 用語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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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015-2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圖讖의 重要 條件은 무엇보다도 將來 事實에 對한 豫言 · 暗示에 있으므로 그 內容 方式 및 現出 의 神秘와 같은 것은 第二次的이라고 할 수 있으며, 過去에 關한 傳說的 說話는 설령 어떠한 神秘를 極하였을지라도 圖讖의 性質에 屬하지는 못한다. 例하면 緯書尙書中候에 堯舜禹湯文武周公의 諸聖人이 河圖洛書를 受하였다는 後人의 附會的 傳說은 이를 圖讖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機會에 있어 한 가지 辨明하여 두지 아니하면 아니 될 것은 圖讚과 祕緯와의 區別에 對하여서니, 祕緯의 書도 其中에 圖讖 祥瑞 歷運 符命 및 其他에 關한 神秘的 要素가, 많이 있어, 필경 緯와 圖讖을 連稱하여, 『圖緯』 『讖緯』 혹은 『緯圖』 『緯讖』이라고 하여, 全然 兩者를 混同하게까지 되고 또한 緯書 中에는 天文(占星) 災異에 關한 것이 많음으로 因하여 이를 『星緯』 혹은 『緯候』라고도 하지만, 緯는 本是 經 에 對한 語로 劉熙의 釋名(釋典藝)에 依하면 『緯圍也 反覆圍繞 以成經』이라 하고 실제 緯로서 經에 依附한 者가 있으니, 즉 易緯稽覽圖·乾鑿度·坤靈圖·通卦驗·是類謀‧辨終備 等 書緯璇璣鈴‧考靈耀·刑德収·帝命驗·運期授 等 詩緯推度災·紀歷樞·含神務 等 禮緯含文嘉·稽命徵·斗威儀 樂緯動聲儀·稽耀嘉·叶圖徵 孝經緯援神契·鉤命決 春秋緯演孔圖·元命包·文耀釣·運斗樞·感情符·合誠圖·考異郵·保乾圖·漢含孳·侑助期·握誠圖·潜譚巴·說題辭 等 七緯의 書가 그것이며, 또 緯書 中에는 未來에 對한 豫言的 部分보다도 過去에 關한 附會的 傳說이 많음으로 圖讖과는 本質 體制를 달리하는 것으로 보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淸의 徐養原의 緯候辨을 보면 원문주9▶『要之 圖讖乃術士之言 與經義初不相涉 至後人造作緯書 則因圖讖而牽合於經義 其於經義 皆西京博士家言 爲今文之學者也 盖前漢說經者好言災異 易有京房 尙書有夏侯勝 春秋有董仲舒 其說頗近於圖讖 著緯者因而文飾之 今有乾鑿度 與孟京易學相表裏 卦氣起中孚 稽覽圖詳之 張霸 僞撰百兩篇 作緯 者卽造中候十八篇 以符百二十篇之數 何休著公羊 述演孔圖於終篇 鄭康成曰公羊長於讖 又翼奉曰臣學齊詩 開五際之要▶P016其說見於汎歷樞 此其緣飾經術之大畧也云云』[9]이라고 한 一節이 있으니―이는 緯書 成立의 由來를 簡述한 것이어니와―그 要領은 圖讖은 術士의 言으로 經義와는 애초에 交涉이 없는 者이나 緯는 圖讖 其他 災異說에 依하여 經義를 牽合文飾한 것인즉 圖讖과 緯와는 本質을 달리한다는 意味의 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徐氏의 說을 매우 穩當한 양으로 생각하는 同時에 我中을 得한 者로 본다. 隋書(卷三十二) 經籍志에는 緯 及 讖의 由來를 述하야 『孔子旣叙六經 以明天人之道 知後世不能稽同其意 故別立緯及讖 以遺來世 其書出於前漢 有河圖九篇 洛書六篇』이라고 하여 孔子가 비로소 이를 내인 것과 같이 말하였지만, 그것은 固不足信의 說話다. 孔子와 같은 이가 그러한 不經無稽의 言을 後世에 垂할 理도 萬無하고 또 緯書 中에는 孔子 以後 漢代 思想의 要素가 많이 들어 있으므로써다. 未來를 豫言하는 圖讖思想의 起源은 後에 말할 바와 같이 孔子 以前 멀리 原始時代에 求할 수 있음에 反하여 緯의 始現은 普通 學者의 所唱과 같이 前漢末 哀平時代에서 더 멀리 올라갈 수 없는 것이다. 漢書(卷七十五) 李尋傳에 尋이 王根에게 說한 言 中에 『五經六緯』의 句가 있음을 보면 尋說의 年代는 正히 成帝時에 當한즉 이즈음부터 緯의 崩芽가 發하였던 것 같다. 何如튼 緯와 圖讖과는 本質을 달리하는 同時에 起源年代도 서로 큰 差異가 있는 것이니, 위의 徐氏의 論文 中에 또한 『竊意緯書當起 於西京之季 而圖讖則自古有之』라고 하였다. 이 역시 움직일 수 없는 鐵案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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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孔安國은 河圖를 八卦라 解하고(論語 何晏集解), 劉歆은 『虙犧氏繼天而王受河圖 則而畫之 八卦是也 禹治洪水 賜雒書 法而陳之 洪範是也』라 附會하고(漢書 五行志), 鄭玄은 春秋緯에 의하여 『河龍圖發 洛龜書感 河圖有九篇 洛書有六篇』이라 하고(鄭玄易註), 다시 僞孔安國尙書大傳에 이르러서는 『河圖八卦 伏犧王天下 龍馬出河 遂則其文 以畵八卦 謂之河圖』, 『天與禹洛出書 神龜負文而出 列於背 有數至于九 禹遂因而第之 以成九類』라 하였으니, 河圖洛書에 對한 漢儒 以來의 設이 어떻게 發展되어 온 것을 알 수 있다.
  2. 五十五點의 奇偶黑白圖란 것을, 즉 易繫辭에 보이는 大衍數(天地數)―天一·地二·天三·地四·天五·地六·天七·地八·天九·地十―를 東西南北 中央의 五方에 分配하여, 北(水)에는 一과 六, 東(水)에는 三과 八, 南(火)에는 二와 七, 西(金)에는 四와 九, 中央(土)에는 五와 十의 奇(白) 偶(黑) 兩數를 配定한 것이니, 이러한 配定은 어느 때로부터 始作된 것인지 仔細치 아니하나, 이미 漢代에도 行하였던 모양이니, 楊雄의 太玄經(玄圖篇)에 『一與六共宗(范望解云在北方也) 二與七爲朋(在南方也) 三與八成友(在東方也) 四與九同道(在西方也) 五與十相守(在中央也)』라 하고, 鄭玄의 易注 中(大衍數)에는 분명히 『衍演也 天一生水于北 地二生火于南 天三生木于東 地四生金于西 天五生土于中 陽無耦 陰無配未得相成 地六成水于北 與天一幷 天七成火于南 與地二幷 地八成木于東 與天三幷 天九成金于西 與地四幷 地十成土于中 與天五幷也云云』(鄭氏佚書易注七)이라 하였다. 楊子의 配定은 과연 范氏의 注解와 같이 방위까지 幷指한 것이라고 볼는지 一疑問이나, 易의 天地數를 奇偶合作으로 分配하려고 한 것만은 分明하며, 鄭氏의 配定은 바로 宋儒들의 이른바 河圖 그대로의 內容이다. 그러나 楊氏나 鄭氏는 이러한 配定만 試하였을 뿐이요, 일찍이 이를 가리켜 『河圖』라고는 明言하지 아니하였다. 이를 비로소 河圖라고 하기는 소위 後魏 關子明의 洞極經이란 것으로서, 거기에 『河圖之文 七前六後 八左九右 聖人觀之 以畵卦云云』이라고 보이거니와, 洞極經은 실상 宋의 阮逸의 僞作에 係한 것임은 學者가 共認하는 바이다. 또 그 所謂 河圖之文이란 것도 奇偶兩數合作의 分配가 아니므로 完全한 五十五點의 奇偶黑白圖라고는 할 수 없다. 五十五點의 奇偶黑白圖로서 河圖의 形式을 具體化시킨 이는 즉 朱子 及 蔡元定 等이니 그 圖形과 說明은 易學啓蒙에 仔細히 보인다.
  3. 四十五點의 黑白圖는 즉 二九四·七五三·六一八(總數 四十五)의 數를 橫으로 上中下 三段에 分列하되, 奇數는 白, 偶數는 黑으로 나타낸 것이니, 이 配列의 數는 縱으로나 橫으로나, 또는 斜로나 어느 편으로든지 一列을 合하면 十五의 和을 得하는 것인데 西洋에서도 옛부터 이를 異常이 여기어 魔方 또는 方陣이라고 하여왔으나, 지금은 一種의 遊戱算術에 不過한 것이다. 中國에서는 옛날에 더욱 이 數를 神秘視하여 明堂의 九宮制(禮記月令, 大戴禮明堂篇에 보임)를 비롯하여 易乾鑿度의 太一下行九宮說, 天文曆象의 九星術에 이를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配列의 圖를 洛書로 附會하기는 실상 宋阮逸의 僞作인 洞極經에 시작되어 거기에 『洛書之文 九前一後 三左七右 四前左 八後左 六後右 後聖稽 之以爲三象 一四七 爲天生之數 二五八爲地育之數 三六九爲資之數』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朱子 及 蔡元定에 이르러 大成된 것이니, 朱, 蔡의 洛書四十五點黑白圖의 圖形과 說明은 역시 易學啓蒙 中에 仔細히 보인다.
  4. 五十五點의 大衍數를 洛書라 하고, 四十五點의 九宮數를 河圖라고 한 것은 宋의 劉牧의 所撰인 易數釣隱圖의 說인데, 劉氏는 가로대 河圖와 洛書는 共히 伏羲氏 時代에 나타나 伏羲가 이를 兼則하여 八卦를 畫하었던바, 五行의 數가 顯著치 못하므로 禹가 다시 이를 法하여 九疇를 陳하니, 生成의 數 五十五가 이에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 說은 確實히 後日의 朱子 及 蔡元定의 定한 河圖 洛書의 圖說과는 正反對의 것이거니와, 四十五點의 九宮數를 河圖로 삼는 說의 傾向은 劉氏보다도 훨씬 以前에 求할 수 있나니, 後漢書(卷八十七) 劉瑜傳을 보면 同人의 上書 中에 『河圖授嗣 正在九房』이란 句 보이고, 또 魏의 魏伯陽의 易叅同契(上卷)에는 『上察河圖文 下序地形流』라고 한 文句가 있다. 九房이니 河圖文이니 하는 것은 天文의 太一九宮 혹은 九星을 가리켜 이름인 듯하니, 이 推測이 어그러지지 아니한다면 위의 劉氏의 所謂 河圖는 여기에 淵源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5. 羅振玉著 殷虛書契考釋(啚字條).
  6. 同 上.
  7. 元의 王禎의 農書(十六), 農器圖譜十倉廩門에 『京 倉之方著 廣雅云字從广倉也 又四起曰京 今取其方而高大之義 以名倉曰京則其象也云云』이라 한 것을 參考함이 좋다.
  8. 羅振玉著 殷虛文字類編(畵字條).
  9. 詁經精舍文集 卷十二(緯侯不起於哀平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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