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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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18일 (금) 22:58 판 (본문1-1: (1)강화천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동태와 여몽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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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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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2)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0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04월
시작쪽 19쪽 종료쪽 58쪽 전체쪽 40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5.삼별초의 기인





































본문1-1: (1)강화천도를 중심으로 한 고려의 동태와 여몽관계


삼별초난은 강도(강화)로부터 구경(개성)에 환도할 즈음에 그것을 계기로 하여 일어난 것이니 이 난의 유래를 추려보는 데 있어 우리는 먼저 강화천도의 동기와 및 그의 의의와 효과 또는 그로 인하여 일어난 여몽 양국의 관계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쪽수▶P19-1三別抄亂은 江都(江華)로부터 舊京(開城)에 還都할 지음에 그것을 契機로 하야 이러난 것이니 이 亂의 由來를 추워보는 데 있어 吾人은 먼저 江華遷都의 動機와 및 그의 意義와 効果 또는 그로 因하야 일어난 麗蒙 兩國의 關係로부터 살펴볼 必要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강화천도의(○○○○○) 사정(○○). 강화천도는 제1회 몽고침입을 받은 후에 일어난 사실이니 이에 관하여 고려사절요(권16)에 의하면 고종 19년 6월조에
쪽수▶P19-2江華遷都의(○○○○○) 事情(○○). 江華遷都는 第一回 蒙古侵入을 바든 後에 일어난 事實이니 이에 關하야 高麗史節要(卷十六)에 依하면 高宗 十九年 六月條에

崔瑀 會宰樞於其第 議遷都 時國家 昇平旣久 京都 戶至十萬 金碧相望 人情 安土重遷 然畏瑀 無敢發一言者 (中略) 夜別抄指諭金世沖 排門而入 詰瑀曰 松京 太祖以來 歷代持守 凡二百餘年 城堅而兵食足 固當戮力而守 以衛社稷棄此而去 將安所都乎 瑀問守城策 世冲不能對 御史大夫大集成(崔怡 後室의 父)謂瑀曰 世冲效兒女之言 敢沮大議 請斬之 以示中外 鷹揚軍上護軍金鉉寶 希集成意 亦言之 遂引世冲 斬之 是日 瑀奏請王速下殿 西幸江華 王猶豫未決 瑀奪祿轉車百餘兩 輸家財于江華 京師洶洶 令有司 刻日 發送五部人戶 仍榜示城中曰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 又分遣使于諸道 徙民山城海島

쪽수▶P19-3

崔瑀 會宰樞於其第 議遷都 時國家 昇平旣久 京都 戶至十萬 金碧相望 人情 安土重遷 然畏瑀 無敢發一言者 (中略) 夜別抄指諭金世沖 排門而入 詰瑀曰 松京 太祖以來 歷代持守 凡二百餘年 城堅而兵食足 固當戮力而守 以衛社稷▶P20-1棄此而去 將安所都乎 瑀問守城策 世冲不能對 御史大夫大集成(崔怡 後室의 父)謂瑀曰 世冲效兒女之言 敢沮大議 請斬之 以示中外 鷹揚軍上護軍金鉉寶 希集成意 亦言之 遂引世冲 斬之 是日 瑀奏請王速下殿 西幸江華 王猶豫未決 瑀奪祿轉車百餘兩 輸家財于江華 京師洶洶 令有司 刻日 發送五部人戶 仍榜示城中曰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 又分遣使于諸道 徙民山城海島

라 하였다. 태조 이래 300여년—김세충의 말 속에는 200여년 운운이라 하였으나 2는 3의 오기가 아니면 그저 어림치고 말한 것으로 생각되거니와—동안 수도로서의 송경은 인호(人戶)가 은성(殷盛)하여 금벽이 상망하리 만큼 번창하였으므로 도성의 인정은 안토중천에 기울어 질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최우의 위세에 눌려 유승단(유승단의 반대론은 다음에 술할 터) 김세충 이외에는 반대의 발언을 감히 하는 자가 없었다. 김세충은 단순한 무인으로서 ”城堅而兵食足”이라는 것을 들어 어디까지든지 사직(社稷)을 위호하자는 것이었으나, 구체적인 송경의 수성책을 묻는 데에는 역시 대답이 막혔던 것이다. 천도론이 드디어 대세를 제(制)하여 최우는 단연히 김세충을 베어 인심을 위압하고 즉일(6월 17일 을축)로 고종께 주청하여 속히 강화로 행행(行幸)할 것을 재촉하고 기일을 정하여 송경의 오부(五部) 인호를 강화에 옮기려 할 때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이라고 방시하고 또 제도(諸道)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지방인민도 산성 해도에 옮긴 것이니 천도 결정에 당하여 최우의 결심과 용단이 어떠하였음을 추찰할 수가 있다.
쪽수▶P20-2라 하였다. 太祖 以來 三百餘年—金世沖의 言內에 二百餘年 云云이라 하였으나 二는 三의 誤가 아니면 거저 어름치고 말한 것으로 생각되거니와—동안 首都로서의 松京은 人戶가 殷盛하야 金碧이 相望하리 만큼 繁昌하였음으로 都城의 人情은 安土重遷에 기우러 질 것도 또한 當然한 일이다. 그러나 崔瑀의 威勢에 눌려 兪升旦(兪升旦의 反對論은 다음에 述할 터) 金世沖 以外에는 反對의 發言을 敢히 하는 者가 없었다. 金世沖은 單純한 武人으로서 「城堅而兵食足」이라는 것을 드러 어데까지던저 社稷을 衛護하자는 것이었으나, 具體的인 松京의 守城策을 뭇는 데에는 亦是 對答이 막혔던 것이다. 遷都論이 디디여 大勢를 制하야 崔瑀는 斷然히 金世沖을 베혀 人心을 威壓하고 即日(六月 十六日 乙丑)로 高宗께 奏請하야 速히 江華로 行幸할 것을 재촉하고 期日을 定하야 松京의 五部 人戶를 江華에 옮기려 할 새 「遷延不及期登道者 以軍法論」이라고 榜示하고 또 諸道에 使者를 보내여 地方人民도 山城 海島에 옴긴 것이니 遷都 決定에 當하야 崔瑀의 決心과 勇斷이 어떠하였음을 推察할 수가 있다.
이와 같이 천도를 결정한 최우는 그 익일에 2영군을 강화에 발하여 궁궐의 경영을 급히 하였으나 7월 7일에 고종이 강화에 건너갔을 때에 강화 객관에 입어(入御)한 것을 보면 궁실이 미처 정비되기도 전에 천도를 급히 하였던 것으로서, 천도 때의 창황(倉皇)한 정경은 다음의 기사로써 상상할 수가 있는 것이니 같은 책 고종 19년 7월 을유조에
쪽수▶P20-3이와 가티 遷都를 決定한 崔瑀는 그 翌日에 二領軍을 江華에 發하야 宮闕의 經營을 急히 하였으나 七月 七日에 高宗이 江華에 건너갔을 때에 江華 客館에 入御한 것을 보면 宮室이 미처 整備되기도 前에 遷都를 急히 하였던 것으로서, 遷都時의 倉皇한 情景은 다음의 記事로써 想像할 수가 있는 것이니 同書 高宗 十九年 七月 乙酉條에

王 發開京 次于昇天府(今 開豊郡) 丙戌 入御江華客館 時 霖雨彌旬 泥濘沒脛 人馬僵仆 達官及良家婦女 至有跣足負戴者 鰥寡孤獨 失所號哭者 不可勝計

쪽수▶P21-1

王 發開京 次于昇天府(今 開豊郡) 丙戌 入御江華客館 時 霖雨彌旬 泥濘沒脛 人馬僵仆 達官及良家婦女 至有跣足負戴者 鰥寡孤獨 失所號哭者 不可勝計

라 하였다. 고려의 강화천도는 몽고의 침구에 대한 소극적 저항책에서 나온 것이니 고종 18년(몽고 태종 3년) 8월에 살리타(撒禮塔)가 침입한 이래로 지방적으로는 박서 김경손 등의 귀주대첩을 보았으나 표한(標悍) 잔폭한 몽고병은 질풍과 같이 섬치(閃馳)하여 서북 일대를 유린하고 같은 해 12월경에는 개성 부근에까지 출몰함에 이르렀다. 그 위에 몽고인의 탐학(貪虐)은 예전 요•금 사람과 달라 우리 측의 비사(卑辭) 후폐(厚幣)의 외교적 의례만으로는 만족하지 아니하고 침략지에는 달로화치(단사관)까지 두어 고려의 주권을 침식하며 여정(麗廷)에 향하여는 왕공대관의 동남동녀를 비롯하여 금 은주자(金銀珠子) 금수(錦繡) 능라(綾羅) 수달피(水獺皮) 등 진귀한 물자의 징색(徵索)은 그의 도를 극하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고려 측에서도 심상한 수단으로서는 당하기 어려움을 각오하게 된 것으로서 당시 집정자인 최우는 드디어 천도의 대사를 단행하지 아니하지 못한 것이다.
쪽수▶P21-2라 하였다. 高麗의 江華遷都는 蒙古의 侵寇에 對한 消極的 抵抗策에서 나온 것이니 高宗 十八年(蒙古 太宗 三年) 八月에 撒禮塔이 侵入한 以來로 地方的으로는 朴犀 金慶孫 等의 龜州大捷을 보왔으나 標悍殘暴한 蒙古兵은 疾風과 가티 閃馳하야 西北 一帶를 蹂躙하고 同年 十二月頃에는 開城 附近에까지 出沒함에 이르렀다. 그 우에 蒙古人의 貪虐은 예전 遼•金人과 달러 우리 側의 卑辭 厚幣의 外交的 儀禮만으로는 滿足하지 아니하고 侵略地에는 達魯花赤(斷事官)까지 두어 高麗의 主權을 侵蝕하며 麗廷에 向하여는 王公大官의 童男童女를 비롯하야 金銀珠子 錦繡 綾羅 水獺皮 等 珍貴한 物資의 徵索은 그의 度를 極하던 것이다. 이에 對하야 高麗 側에서도 尋常한 手段으로서는 當키 어려움을 覺悟하게 된 것으로서 當時 執政者인 崔瑀는 디디여 遷都의 大事를 斷行치 아니치 못한 것이다.
최우의 강화천도는 몽고 방어에 자못 자신을 가지고 행한 것이니 천도에 반대하던 김세충이 송경 수성책에 답하지 못함으로 즉석에서 베인 것으로도 저간의 사정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원래 유목민족의 습성을 아직까지 벗지 못한 몽고인의 수전(水戰)에 졸렬한 점은 일찍부터 고려에 간파하게 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이러한 몽고의 약점을 공방(攻防)에 이용한 것은 지방에서부터 먼저 시험하였으니 고종 18년 9월에 몽고병이 황봉 두 주에 침범하니 두 주수는 인민을 거느리고 철도(황주)에 입보(入保)하였고 또 같은 책 같은 해(18년) 10월조에
쪽수▶P21-3崔瑀의 江華遷都는 蒙古 防禦에 자못 自信을 가지고 行한 것이니 遷都에 反對하던 金世沖이 松京 守城策에 答치 못함으로 卽席에서 베힌 것으로도 這間의 事情을 엿볼 수가 있거니와 元來 遊牧民族의 習性을 아직까지 벗지 못한 蒙古人의 水戰에 拙劣한 點은 일직부터 高麗에 看破케 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이러한 蒙古의 弱點을 攻防에 利用한 것은 地方에서부터 먼저 試驗하였으니 高宗 十八年 九月에 蒙古兵이 黃鳳 二州에 侵犯하매 二州守는 人民을 거느리고 鐵島(黃州)에 入保하였고 또 同書 同年(十八年) 十月條에

咸新鎭報曰 國家若遣舟楫 我當盡殺留城蒙人小尾生等 然後卷城乘舟如京 乃命金永時等三十人 具舟楫以送 果殺蒙人幾盡 小尾生 先覺亡去 副使全僩 率吏民 入保薪島

쪽수▶P21-4

咸新鎭報曰 國家若遣舟楫 我當盡殺留城蒙人小尾生等 然後卷城乘舟如京 乃命金永時等三十人 具舟楫以送 果殺蒙人幾盡 小尾生 先覺亡去 副使全僩 率吏民 入保薪島

라 한 것으로 보면 함신진(의주)에서는 주즙(舟楫)의 편을 얻어 유주(留駐)하는 몽고인을 오살(鏖殺)한 다음에 신도(용천)에 입보한 일까지 있었다.
쪽수▶P22-1라 한 것으로 보면 咸新鎭(義州)에서는 舟楫의 便을 어더 留駐하는 蒙古人을 鏖殺한 다음에 薪島(龍川)에 入保한 일까지 있었다.
이와 같이 몽고 침구의 벽두에 있어 각지에서는 벌써 해도에 입보하고 또는 주즙의 편으로써 몽고에 당한 것은 강화천도의 남상(濫觴)이 된 것으로 믿거니와 다시 몽고인은 그들 자신의 약점을 고려에 향하여 폭로도 하였으니 고려사(권23) 고종 19년 2월조에
쪽수▶P22-2이와 가티 蒙古侵寇의 劈頭에 있어 各地에서는 발서 海島에 入保하고 또는 舟楫의 便으로써 蒙古에 當한 것은 江華遷都의 濫觴이 된 것으로 믿거니와 다시 蒙古人은 그들 自身의 弱點을 高麗에 向하야 暴露도 하였으니 高麗史(卷二十三) 高宗 十九年 二月條에

遣西京都領鄭應卿 前靜州副使朴得芬 押船三十艘 水手三千人 發龍州浦(今 龍川) 赴蒙古 從其請也

쪽수▶P22-3

遣西京都領鄭應卿 前靜州副使朴得芬 押船三十艘 水手三千人 發龍州浦(今 龍川) 赴蒙古 從其請也

라 하였다. 현대문주21▶이것은 몽고 태종 4년에 동진(동하라고도 칭하는 것이니 오늘날 간도지방에 있었음)의 포선만노(蒲鮮萬奴)를 치려 할 때의 일인 듯 하거니와[“a” 1] 당시 양국 사이에는 화전의 판이 아직 결정되지 못한 데에도 불구하고 고려에 향하여 선박과 수수(水手)를 청한 것은 명백히 몽고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 보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소위 ‘조수자고(阻水自固)’의 대책을 천도 이후에도 강조한 바가 있으니
쪽수▶P22-4라 하였다. 원문주21▶이것은 蒙古 太宗 四年에 東眞(東夏라고도 稱하는 것이니 今 間島地方에 있었음)의 蒲鮮萬奴를 치려 할 때의 일인 듯 하거니와[1] 當時 兩國 사이에는 和戰의 局이 아직 決定되지 못한 데에도 不拘하고 高麗에 向하야 船舶과 水手를 請한 것은 明白히 蒙古 自身의 弱點을 드러 보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바이다. 그럼으로 高麗에서는 所謂 「阻水自固」의 策을 遷都 以後에도 强調한 바가 있으니

郎將尹椿 自蒙古軍來 椿板入蒙古有年(고종 40년 10월에 양근성방호별감으로서 몽고에 출강하였던 자) 至是 逃還言曰⋯⋯車羅大 甞將舟師七十艘盛陳旗幟 欲攻押海(羅州近海의 島) 使椿及一官人 乘別船督戰 押海人 置二砲於大艦 待之 兩軍 相待未戰 車羅大臨岸望之 召椿等曰 我船受砲(○○○○) 必糜碎(○○○) 不可當也(○○○○) 更令移船攻之 押海人 隨處備砲 故蒙人遂罷水攻之具(○○○○○○○○) 爲今計 宜屯田島內(○○○○○) 且耕且守(○○○○) 淸野以待(○○○○) 策之上也(○○○○) 崔流然之(고려사절요 권17 고종 43년 6월조)

쪽수▶P22-5

郎將尹椿 自蒙古軍來 椿板入蒙古有年(高宗 四十年 十月에 楊根城防護別監으로서 蒙古에 出降하였던 者) 至是 逃還言曰⋯⋯車羅大 甞將舟師七十艘盛陳旗幟 欲攻押海(羅州近海의 島) 使椿及一官人 乘別船督戰 押海人 置二砲於大艦 待之 兩軍 相待未戰 車羅大臨岸望之 召椿等曰 我船受砲(○○○○) 必糜碎(○○○) 不可當也(○○○○) 更令移船攻之 押海人 隨處備砲 故蒙人遂罷水攻之具(○○○○○○○○) 爲今計 宜屯田島內(○○○○○) 且耕且守(○○○○) 淸野以待(○○○○) 策之上也(○○○○) 崔流然之(高麗史節要 卷十七 高宗 四十三年 六月條)

라 한 윤춘의 보고는 그가 경험한 몽고인의 약점을 들어 최우 이래 고려의 대몽방략의 적절한 것을 다시금 칭도(稱道)하는 동시에 그것의 강화를 고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쪽수▶P22-6라 한 尹椿의 報告는 그가 經驗한 蒙古人의 弱點을 드러 崔瑀 以來 高麗의 對蒙方略의 適切한 것을 다시금 稱道하는 同時에 그것의 强化를 高調한 것으로 解釋된다.
이와 같이 보아 오면 최우의 천도를 단행한 의도와 천도지로서 강화를 택한 의미도 이해할 수가 있으니 개성은 비록 북으로 천마 성거의 험(險)을 액(扼)하고 있다 하나 역시 수적의 땅으로서 서쪽으로부터서의 대륙경적을 막아 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단구(丹寇) 때로부터 쓰린 경험을 가진 바이다. 그러나 강화는 나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개성과도 가까운 위에 혈구 마니의 천험과 갑곶의 요진을 옹유(擁有)한 형승(形勝)의 땅으로서 소위 천지의 현대문주22▶오구(奧區)[“a” 2]를 이루어 비록 육지에 핍근하다 하나 고려의 제해력을 가하면 넉넉히 몽고에 당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쪽수▶P23-1이와 가티 보와 오면 崔瑀의 遷都를 斷行한 意圖와 遷都地로서 江華를 擇한 意味도 理解할 수가 있으니 開城은 비록 北으로 天磨 聖居의 險을 扼하고 있다 하나 亦是 受敵의 地로서 西으로부터서의 大陸勁敵을 막어 내기 어려운 것은 이미 丹寇 때로부터 쓰린 經驗을 가진 바이다. 그러나 江華는 國의 中間에 位置하야 開城과도 가까운 우에 穴口 摩尼의 天險과 甲串의 要津을 擁有한 形勝의 地로서 所謂 天地의 원문주21▶奧區[2]를 이루워 비록 陸地에 逼近하다 하나 高麗의 制海力을 加하면 넉넉히 蒙古에 當할 수가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강화피란의 의견은 이미 천도의 전년 즉 고종 18년 12월경에 나타나게 되었으니
쪽수▶P23-2그런데 江華避亂의 意見은 이미 遷都의 前年 即 高宗 十八年 十二月頃에 나타나게 되였으니

昇天府副使尹繗 錄事朴文檥 潜置家屬于江華 乃說崔瑀曰 江華可以避亂 瑀信之 使二人先徍審之 云云(고려사절요 권16 고종 18년 12월조)

쪽수▶P23-3

昇天府副使尹繗 錄事朴文檥 潜置家屬于江華 乃說崔瑀曰 江華可以避亂 瑀信之 使二人先徍審之 云云(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八年 十二月條)

이라 한 기사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몽고병은 도성 부근까지 출몰함으로 승천부 부사 윤인과 녹사 박문의 등은 그들의 가속을 미리 강화에 옮기고 최이(우)에게 강화는 난을 피할 만한 곳이라고 빙징(憑懲)한 것이다. 윤인 등은 강화를 다만 피란지로서 들었으나 최이는 집권자로서 국정을 전단(專壇)하고 있던 만큼 피란을 통종한 것은 최이의 개인에 관한 것으로만 볼 것도 아니며 그 위에 최이는 바로 윤인 등으로 하여금 실지로 강화를 답사시킨 것도 단순한 개인의 피란지를 물색케 하였다는 것보다 천도지로서의 적부성을 다시 내사하게 한 것으로 해석되는 바이니 이렇게 본다면 윤인 등의 강화 피란을 권고한 것도 몽고 침구에 대한 천도피란을 건의한 것이 아닐까 한다.
쪽수▶P23-4이라 한 記事로써 알 수 있는 것이다. 當時 蒙古兵은 都城 附近까지 出沒함으로 昇天府 副使 尹繗과 錄事 朴文檥 等은 그들의 家屬을 미리 江華에 옮기고 崔怡(瑀)에게 江華는 亂을 避할 만한 곳이라고 憑懲한 것이다. 尹繗 等은 江華를 다만 避亂地로서 드렀으나 崔怡는 執權者로서 國政을 專壇하고 있던 만큼 避亂을 通慫한 것은 崔怡의 個人에 關한 것으로만 볼 것도 아니며 그 우에 崔怡는 바로 尹繗 等으로 하여금 實地로 江華를 踏査시킨 것도 單純한 個人의 避亂地를 物色케 하였다는 것보다 遷都地로서의 適否性을 다시 內査케 한 것으로 解釋되는 바이니 이렇게 본다면 尹繗 等의 江華 避亂을 勸告한 것도 蒙古侵寇에 對한 遷都避亂을 建議한 것이 아닐런가 한다.
그 익년(19년) 정월에 이르러 살리타는 침략 각지에 달로화치(達魯花赤)를 남기고 일단 살거(撒去)하였으나 몽고와의 관계는 자못 용이하지 아니한 바가 있고 몽고병의 행동은 또한 예측을 불허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같은 해 2월에 들어서부터는 천도문제가 벌써 표면화하여 재추 중신의 회의를 거듭하였으니 2월 20일(신미)에
쪽수▶P23-5그 翌年(十九年) 正月에 이르러 撒禮塔은 侵略 各地에 達魯花赤을 남기고 一旦 撒去하였으나 蒙古와의 關係는 자못 容易치 아니한 바가 있고 蒙古兵의 行動은 또한 豫測을 不許하던 것이다. 그리하야 同年 二月에 드러서부터는 遷都問題▶P24-1가 발서 表面化하야 宰樞 重臣의 會議를 거듭하였으니 二月 二十日(辛未)에

























본문1-2: (2)고려무인의 전통적 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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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3: (3)환도문제와 삼별초난과의 경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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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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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元史에는 太宗 四年에 東眞征伐에 關한 記事가 보이지 아니하나 高麗史節要 卷十六 高宗 十八年 冬十月條에 「蒙古二人 持牒 至平州……其牒云 我兵初至咸新鎭 迎降者皆不返 汝國若不下 我終不返 降則當向東眞矣」라 하였고 元高麗紀事 太宗 五年 四月 高麗에 보이는 國書 中에 「朕命汝征討萬奴 爲何 逗遛不進此汝之罪三也」라 한 記事와 仝書 己酉 八月 十五日 高麗에 보니 皇后太子의 懿旨에 「於壬辰年(太宗 四年) 令隨從撒兒塔 征討萬奴 爾等即郤違背 遷入海島」라 한 記事를 對照하야 상고해 보면 蒙古 太宗은 撒禮塔을 식혀 高麗를 치게 할 적에 萬一 高麗가 歸降한다면 다시 高麗로부터 揆兵을 어더 東眞까지 연겁퍼 討平할 計劃이었던 것 갓다. 일로 보면 當時 蒙古의 請에 依하야 船隻과 水手를 보내게 된 것도 (비록 그들의 要求에는 차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또한 東眞征伐計劃에 關聯된 것으로 믿는 바이다.
  2. 崔滋 三都賦 江都條에 보임.






현대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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