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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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17일 (목) 15:19 판 (본문2: 제목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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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와 그의 난에 취하여(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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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三別抄와 그의 亂에 就하야(1)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9 발행기관
저자 김상기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8년07월
시작쪽 1쪽 종료쪽 29쪽 전체쪽 29쪽 연재여부 3회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1.서언


중말기의 고려는 가위 내란 외구로 종시된 관이 있다 할지니, 특히 내란 중에도 묘청의 서경반란과 정중부 일파의 무부(武夫)의 난과 본고에서 논술하려는 삼별초난이 가장 그 저명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3대 난은 어느 것이나 그의 유래가 자못 복잡다단한 만큼 정치 사회 내지 사상상(上)에 끼친바 영향이 실로 다대(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3자에 나아가 개괄적으로 살펴보면 후자 즉 삼별초난은 전 2자 즉 묘청 정중부의 난에 비하여 자못 그 뜻을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묘청 정중부의 난은 내부적 운동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삼별초난은 복잡한 내부적 사정 이외에 외부 압력에 대한 일종의 반발운동이었다. 그리하여 그의 결과에 있어서도 내부에 끼친바 영향보다도 국내에 뻗어드는 외력의 소장(消長)에 지대한 관계를 가진 것이다. 다시 종(縱)으로 이 3대 난의 이면에 흐르는 조류를 살펴보면 묘청 일파로 말미암아 나타난 고려인의 자아적 정신은 다시 임연 배중손 등의 배몽(排蒙)사상으로 출현되었으며 정중부 일파로 말미암아 순치된 무사 전횡의 기세는 삼별초의 동향에 지침이 되었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맥락을 추려보면 삼별초난은 묘청 정중부 양 난의 조류가 합치된 데에서 출현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말기 고려에 있어 대내대외의 정치적 동향과 그에 관한 사조의 대류 형태를 소구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쪽수▶P2-1中末期의 高麗는 可謂 內亂 外寇로 終始된 觀이 있다 할지니, 特히 內亂 中에도 妙淸의 西京叛亂과 鄭仲夫 一派의 武夫의 亂과 本槁에서 論述하려는 三別抄亂이 가장 그 著名한 것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이 三大 亂은 어느 것이나 그의 由來가 자못 複雜多端한 만큼 政治 社會 乃至 思想上에 끼친바 影響이 實로 多大한 것이어니와, 다시 이 三者에 나아가 槪括的으로 살펴보면 後者 即 三別抄亂은 前 二者 即 妙淸 鄭仲夫의 亂에 比하야 자못 그 趣를 달리하는 바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妙淸 鄭仲夫의 亂은 內部的 運動에 지나지 못하였으나 三別抄亂은 複雜한 內部的 事情 以外에 外部 壓力에 對한 一種의 反撥運動이었다. 그리하야 그의 結果에 있어서도 內部에 끼친바 影響보다도 國內에 뻐더드는 外力의 消長에 至大한 關係를 가진 것이다. 다시 縱으로 이 三大亂의 裡面에 흐르는 潮流를 살펴보면 妙淸一派로 말미암어 나타난 高麗人의 自我的 精神은 다시 林衍 裴仲孫 等의 排蒙思想으로 出現되였으며 鄭仲夫 一派로 말미암어 馴致된 武士 專橫의 氣勢는 三別抄의 動向에 指針이 되였던 것으로 믿는 바이니 이와 같이 脉絡을 추워보면 三別抄亂은 妙淸 鄭仲夫 兩亂의 潮流가 合致된 데에서 出現한 것으로도 볼 수가 있다. 여기에서 吾人은 中末期 高麗에 있어 對內對外의 政治的 動向과 그에 關한 思潮의 對流 形態를 溯究할 수도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본문2: 2.고려병제의 변천과 삼별초









































본문3: 제목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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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3(생략) 되지 못한다-그러나 稷山 舊邑에서 直北 約 8~9里 되는 곳에 ‘都下里’(혹은 都監里ㆍ忠南 天安郡 成歡面)란 里名과 都下里에서 西北 약 6里되는 곳 즉 安城川 合流處에 ‘安宮▶P14-1里’(或云宮里ㆍ同上)란 里名과 其外 同川 流域인 振威郡 芙蓉面의 ‘坪宮里’(一云 上宮里) ‘新宮里’(一云 下宮里) 등의 里名이 있는 것은 크게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들 洞里에서 아직 그럴듯한 遺跡과 遺物은 發見하지 못하였지만, 그 里名은 必然 尋常하지 않은 久遠한 由來와 歷史를 가지고 있는 듯하니, 속히 말하면, 稷山 舊邑의 北 安城川 流域은 이 等地를 國都로 삼던 어느 時代 즉 辰國時代 내지 그 正統인 馬韓時代의 宮闕都市가 있던 곳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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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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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3그리하여 그러한(都字 宮字 붙은) 里名이 傳稱되어 오는 것이 아닌가, 최근 物故한 中樞院 囑託 大原利武氏도 일찍이 이 地名에 注意를 拂하여 同 地域을 馬韓時代의 都邑 所在地로 推定한 일이 있는데, 이 점에 있어서는 그의 意見과 전혀 一致하며, 오직 나는 馬韓時代뿐만 아니라, 그 以前 辰國時代로부터의▶P15-1都闕 소재지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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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제목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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辰國은 저 朝鮮(樂浪) 眞番 臨屯의 諸部族과 한 가지 古代 半島內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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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國으로 일찍이 中國에 알려진 著名한 나라이어니와, 辰國의 名이 文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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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에 나타나기는 이미 󰡔史記󰡕, 󰡔漢書󰡕의 朝鮮傳에서부터이다. 󰡔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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書󰡕 朝鮮傳은 말할 것도 없이 󰡔史記󰡕 朝鮮傳을 거의 그대로 轉載하다시피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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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지만, (간혹 거기에 修辭上의 異同과 添削이 있음은 別問題로 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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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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