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학인의 조선문학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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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21일 (토) 00:08 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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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학인의 조선문학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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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學人의 朝鮮文學에 對한 態度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조윤제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9년 3
시작쪽 100쪽 종료쪽 109쪽 전체쪽 010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문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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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0-1여기서 學人이라 하는 것은 物論 文字 그대로 學問하는 사람 即 學者를 意味하는 말이 되겠으나 그러나 從來 우리들의 先輩는 오늘날 우리들이 意味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널리 一般으로 學問을 할 줄 아는 사람 或은 글을 쓸 줄 아는 사람에까지 그 內容을 擴張하야 써왔다. 또 옛날사람들은 學問이라면 곧 漢學을 意味하였고, 오늘날 우리들이 하고 있는 朝鮮文學 따위는 學問의 範疇에 들어가지 않었을지도 모를 것이다. 따라서 내가 여기 學人이라 하는 것은 漢學을 專攻하고 또 널리 學問를 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意味에 쓰고자 한다. 그리하여 이들이 朝鮮文學에 對하야 어떠한 態度를 取하야 왔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자 하거니와, 먼저 本論에 들어가기 前에 잠깐 朝鮮의 漢文學과 朝鮮文學과의 關係를 簡單히 말하여 두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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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0-2大體로 朝鮮文學이라면 이것이 學問硏究의 對象이 되여 專門的으로 硏究하는 學者도 以前에는 그리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에 對한 意義라던지 或은 그가 가지고 있는 硏究의 範圍란것도 充分히 論難되지 않은 채 오늘에 남어 있는듯하나, 더욱이 이와 漢文學과의 關係같은 것은 앞으로 朝鮮文學을 體系세우는 데에 있어서 極히 重大한 問題이면서도 實로 그 見解가 確定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여기 말하려는 데는 얼마큼 獨斷이 있다는 것을 미리 諒解하여 주기를 바라거니와, 朝鮮은 오랜▶P101-1 옛적부터 漢文化에 接觸하야 그 文字를 배우고 글을 배워왔었다. 그런데 朝鮮의 固有文字인 諺文은 그보다 훨씬 後代 곧 李朝에 들어와서 비로소 發明되었으니까 이것이 發明되기 前은 勿論이고 發明된 以後라 할지라도 思想感情의 重要한 發表는 主張 漢字漢文에 依하야 되여 왔었다. 그러고도 그에 對하여는 조금도 異國文字視하들않고 도로혀 그를 正確한 글 標準的 發表機關이라고, 確信하여 왔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이 朝鮮에 發達한 漢文學에 對한限 決코 對岸火를 보듯이 冷待할 수 없고 도로혀 그 氣分으로 보아 그냥 朝鮮文學이 될 듯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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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1-2그러나 또 立場을 바꾸어서 朝鮮文學으로부터 생각하야 보면 朝鮮文學은 어디까지든지 朝鮮의 文學이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即 朝鮮語로 表現된 것이 아니면 이를 朝鮮文學이라 認證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면 朝鮮에서 發達하였다는 漢文學이라 할지라도 當然히 朝鮮文學의 領域에서 除去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또 한便 먼저도 말한 바와 같이 漢文은 朝鮮에 일즉이 文字없는 時代에 들어와서 朝鮮사람에게 愛用되었을 뿐 아니라 乃終에는 一點의 疑心도 없이 自國文視 되어버려 幾多의 作品을 産出하고 그것이 漢文으로 表記되었건만 純朝鮮文보다도 더 잘 朝鮮人의 思想感情生活을 表現하여 왔음을 생각할 때, 漢文學을 朝鮮文學으로부터 除去하기에는 얼마큼 躊躇하지 않으면 안 될 것도 같다. 그러나 나는 그렇다하야 곧 漢文學即朝鮮文學이라고는 하고 싶지 않다. 朝鮮文學은 朝鮮의 文學인 以上 어디까지든지 自己의 領域을 保持할 必要가 있다고 믿는다. 空然히 自己의 領域을 넓히는 것은 멀지 않어 自己를 그 瓦解의 運命에 던짐과 같아서 文化라든지 文學에 對한 意識이 全然 옛날과 달라진 오늘에 있어서도 漢文學 朝鮮文學 中에 넣는다는 것은 一顧의 價値가 없는 愚論에 지나지 못하겠거니와 그러나 지나간 過去의 文學時代 即 아즉 漢文學을 自國文學과 同樣視하든 時代의 漢文學은 敢히 이것을 朝鮮文學의 一部分이라고 보는 것은 關係가 없을 듯하다. 이를 좀 더 些細히 말하면 朝鮮에 있어서 朝鮮사람 손에 依하야 發達되여 온 漢文學은 朝鮮文學의 詩歌, 小說, 同樣▶P102-1으로 그 一部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即 漢文學即朝鮮文學이라던지 朝鮮文學即漢文學이라는 것이 아니라 漢文學은 朝鮮文學의 一部分이 되여서 큰 朝鮮文學을 構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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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2實로 獨斷無謀한 생각일지 모르나 나는 大綱 이러한 立場에서 朝鮮文學을 생각하여 보고자한다. 그러나 이 論文에 있어서 朝鮮文學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廣意味의 朝鮮文學이 아니고 훨신 좁은 意味의 朝鮮文學, 即 朝鮮語로 表記된 純朝鮮文學을 意味하는 것이니까 이 點에 誤解없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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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3그러면 일로부터 本論에 들어가서 李朝諺文이 制定된 以來 그 文學에 對하야 漢學專攻의 學人들이 如何한 態度로 臨하였는가를 말하고자 하나, 諺文을 制定하던 그 當時의 一般的社會는 支那文化에 相當히 浸潤하야 벌서 새로 制作된 諺文에 對하여는 그다지 期待를 갖지 않었던 것이다. 期待인커냥 그 중에는 도로혀 不必要視하는 者도 있었으니 저 崔萬理가 世宗大王께 諺文頒布의 反對上奏를 하였다는 것은 벌서 너무도 有名한 이야기꺼리가 되었으나, 그러나 그것은 單純한 그 一人의 소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도로혀 그들 그 當時 輿論의 一部分이라 보는 것이 妥當할 듯이 나에게는 생각되나, 其實 一部의 反對를 물리치고 世宗大王이 諺文을 頒布하야 極力 그 使用을 獎勵하시었으나 그 効果는 別로 나타나지 않고 世上은 그냥 漢文第一主義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學人들의 朝鮮文學에 對한 態度는 一言으로 말하면 冷談하였다 할 수밖에 없었거니와 그러나 學人이라 할지라도 거기는 또 理學을 主로 하는 學人과 文學을 主로 하는 學人에 난훌 것이니 그들의 사이에도 제절로 그 態度가 달렀을 것도 不得已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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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4元來 理學者라하면 文學에 對하여는 그다지 理解를 가지지 못한 듯하야 栗谷과 같은 大學者도 그 編著인 「精言妙選」 序文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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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5詩雖非學者能事 亦所以吟詠性情 宣暢淸和以滌胸中之滓穢 則亦存省之一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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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2-6라 하였다. 即 詩라는 것은 學者가 너머 좋아할 바는 아니나, 그것이 孔子의 所謂 思無邪의 作인 것 같으면 그를▶P103-1吟詠하야 智中의 滓穢를 씻어 바리는 일도 있어 有益하나 그렇지 않으면 學問을 妨害할 따름이고 利益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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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2栗谷의 이 생각은 거의 理學者의 一般的 생각이라 하여도 可하나, 그러나 이것이 一步를 誤하면 文學의 輕視論 文學의 排斥論에까지도 이르기가 쉬우니, 一例를 들면 成宗朝에 金諶이란 사람이 있는데 이이는 當時 弘文館 副提學에 있어 當時 慶尙道監司 李克墩이 酉陽雜俎, 唐 宋詩話, 遺山樂府, 破閑集, 補閑集, 太平通職 等의 書를 刊行하야 國王께 獻上하였을 때 다음과 같은 箚子를 올린 것이 實錄에 보인다. 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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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3伏開頃者 李克墩爲慶尙監司 李宗準爲都事時 將所刊酉陽雜俎 唐宋時話 遺山樂府及破閑集 補閑集 太平 通戴等書以獻 旣 命藏之內府 旋下唐宋詩話 破閑 補 閑等集 令臣等略註歷代年號人物出處以進 臣等竊惟 帝王之學 當潜心經史以講究修齊治平之要 治亂失得 之跡耳 外此皆無益於治道 而有妨於聖學 克墩等豈不 知雜俎詩話等書 爲恠誕不經之說 浮華戲劇之詞 而必 進於上者 知殿下留意於詩學而中之也 人主所尙 趨之 者衆 克墩尙爾 况媒進者乎 若此依誕戲劇之書 殿下 當如淫聲美色而遠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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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4라 하였다. 거의 詩話, 雜書類를 淫聲美色에 比하야 이를 警戒하고 있다. 勿論 이것은 一種 脫線的 文學蔑視論이라 하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이러한 態度도 相當히 널리 또 깊이 뿌리박힌 듯하야 지금도 아직 古漢學者 間에는 文學 即 所謂 詞章學을 輕視하는 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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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5그러나 이에 對하야 文學派의 學者는 어떻던가 하면 그들은 文學者인 만큼 大端히 그 態度가 달랐었다. 그들을 一一히 列擧하기는 어려우니까 여기서는 金春澤의 說을 紹介하야 보면 그는 먼저 程伊川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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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6一, 古之學者 惟務義情性 今之爲文者 專務悅人
二, 人見六經 便謂聖人作文 不知聖人撼發胸中所蘊 自 成交耳
三, 游夏何嘗秉筆 學爲詞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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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7이라는 말에 明快한 反駁을 加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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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3-8愚謂 聖人何嘗不作文 惟不養性 而只作文 則不可 且▶P104-1作文 豈是與養性之事 判然背馳者 聖莫過於伊尹傅說周公 而訓命及七月詩 不可謂不作文 又不可謂不悅人 所謂務悅人 有公私是非 若伊傅周公之務悅人 乃欲以感動人主 非如後來欲竊科第者比 而今觀其文 豈是率然攄發而成者 其必秉筆易藁 無疑也 且如周公苟欲使成王 知稼穡之艱則 招致一田夫 朝夕道說 豈不詳悉 或周公自爲道說於咨嗟吁咈之間 有何不可 而必爲詩 令瞽誦之 其欲悅人 庸有旣哉 想春日遲遲 采蘩祁祁等語尤能以感動成王矣 動人之道 言之不足而有文 文之不足而有樂 盖文者 居於言語音樂之間 苟曰聖人不作文則 樂亦不作矣 至如游夏之檀弓樂記 觀其製作之體 豈可曰不秉筆而學哉 伊川此言 似乎過高 不然則以文詞非其所好故然耶 朱子劇好古詩楚辭 不惟好之 盖嘗倣而爲之 頗有似之者 朱子固亦秉筆之人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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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4-2라 하였다. 그는 또 달아 여러 가지 實例를 들어 반다시 作文이 不可치 않다는 것을 主張하였으나 結局 文學의 尊重論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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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4-3이와 같이 漢學者라 할지라도 벌서 理學派와 文學派間에 있어 文學에 對한 態度를 달리하고 있으나, 그러나 孔子도 「詩三百 一言以蔽之 思無邪」라 極讃하여 있으니까 理學者에 있어서도 空然히 文學을 輕視할 수는 없는 것이다. 元來 文學은 經學에 本하야 性情의 眞으로부터 攄發하여야 될 것이니까 그 根本 意味에 있어서는 또한 이를 認하고 또 讃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다만 거기에 警戒할 바는 文學이 文學自身을 爲한 文學이 되지 않을 것인대 이 點은 文學派의 學者에 있어서도 亦是 틀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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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4-4따라서 文學中에도 小說類의 所謂 軟文學은 特別한 警戒를 받어 왔던 것이니 朴燕岩 같은 이도 小說을 썼음으로 一部世俗學者로부터 僞學의 學者라는 評을 받었거니와 沈𨫃라는 이는 小說에 對하야 모진 筆鋒으로 그 著 「松泉筆譚」 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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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4-4稗官小說 自漢唐以來代有之 如搜神等書 語多慌愧 而文頗雅馴 其他諸種間 亦有實事 可以補史家之闕遺 備詞場之採綴者 至於水滸傳 西遊記之屬 雖用意新巧 命辭環奇 別是一種文字 非上所稱諸書之例也 明人劇賞之 加以俗尙輕薄波蕩 輒贋作一副說話 以售於▶P105-1世 大抵皆演成史傳 無非男女交歡事也 演史出而正史 事蹟汨亂 男女之事及多淫媒 尤非壯士所可近眼 而近 來人 鮮篤實 喜以此等小說作 爲消寂遺日之資 甚可 歡也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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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5-2이라 하였다. 漢字漢文으로 表記된 것이라도 그것이 小說이라면 그러한 特別한 警戒를 받어 왔거든, 하물며 漢學者의 눈에는 文字같이도 보이지 않는 諺文小說에 있어서는 거의 말할 必要조차 없으나, 洪直弼은 또 그著 梅山雜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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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5-3吾東士大夫閩門之行極正 三代之所未有 無愧漢書所 云婦人貞信之稱 而近世大防漸壞 往往有不忍言者 寔由世教衰 禮不興行以致然耳 若是者 何以當華人所贊 禮樂之邦 仁義之國哉 東俗教女子以諺而不以文 是故 生不聞聖哲成訓 既不識三綱五常之爲重 至若諺稗 皆是淫褻不經之說 而婦人不知都出於虛贋 認以惇史 其反道悖德 咸從此出 自朝家嚴禁諺碑 云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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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5-4이라 하야 諺文小說은 마땅히 法律로써 이것을 嚴禁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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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5-5小說에 對한 理解가 너무나 不足하고 그 論調가 또 너무나 壯烈한데 對하야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으나, 이는 要컨댄 小說이 그 文은 軟弱하고 그 實은 荒唐無稽할 뿐 아니라 늘 男女交歡之事로 하기 때문에 世道를 害하고 利益함이 없어 性情의 眞으로부터 攄發한 正當한 文學에 違反된다는 것이다. 創作인 以上 正史의 事蹟과 다를 것도 判然한 일이고 또 人生의 산生活을 描寫하는 小說이라면, 男子가 나오고 女子가 나올 것도 不得已한 既定事實이라 하여야 될 것을, 이것을 먼저 認識하지 못한다면 본대 그 말에 傾注할 必要조차 없지마는, 그래도 옛적 漢學者의 小說에 對한 一部的 態度라 하야 들어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여기 紹介하게 된 沈𨫃라던지 洪直弼이라던지 하는 이들은 比較的 近代의 人物들이란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니, 朝鮮小說의 發達이 비록 늦었다 하드라도 李朝中葉에는 相當히 그 作品이 나왔었고 李朝初葉에도 벌서 傳奇體的 小說의 出現이 있었건만, 어찌하야 末期에서야 비로소 그 對한 態度를 表示하게 되었는가. 생각컨댄 이것도 外來文化의 한 影響이라 하지 않을 수 없▶P106-1을 듯하니, 李期는 國初以來 朱子學으로 墻壁을 싸고 모든 精神文化는 글로서 醇化되여 왔었다하여 可할 것이나 鄰邦支那에서는 明末濟初에 亙하야 文藝學이 大盛하고 더욱이 淸朝에 와서는 實是學이 勃興하여 왔었다. 文化上 언제든지 그 影響을 받지 않고는 마지않는 支那와 朝鮮과의 關係인만큼 淸朝의 熟爛한 文化는 곧 朝鮮에 影響하야 李朝 英正時代에는 洪水가 밀어오듯이 淸朝實是學이 移入하여 오고, 달아서 文藝學이 掩襲하여 왔었다. 여기에 沈滯하였든 朝鮮學界는 새로운 힘을 얻어 再燃하야 可히 文藝의 復興時代를 演出하였다 함은 一般史 家의 共認하는 바이나, 文學界에 있어서도 그 影響이 또한 적지 않었으니 漢學者間 小說을 云云한 것도 其實은 이 時代에 와서 볼 수 있는 것이고, 그 前이라 하면 그야말로 視而不見하는 態度를 固執하여 왔던 것이다. 따라서 小說이 正史를 汨亂하게 風紀를 紊亂하게 한다고 이르는 만큼도 漢學者의 小說에 對한 態度는 消極的이나마 얼마큼 關心을 가지었다고 하여야 하겠으니, 비록 攻駁을 한다 하드라도 읽지 않고는 하지 못할 것이어던, 그 읽은 것만이라도 그 以前에 比하면 그들의 思想에 一大變革을 일으킨 것이고 小說文學 對하야는 새로운 認識을 가저왔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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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6-2다음에야 詩歌에 對하야 보면 詩는 天機의 顯現한 바라 하야 支那에서도 特히 尊重되었었고, 歌도 또한 詩에 다음 갈 것으로 더욱이 歌없는 自然에 나와 王政의 得失과 風俗의 隆替를 竊視할 수 있는 것이라 하야, 일즉부터 그 採集의 方法까지 講究되었던 것이다. 그런대 朝鮮學者는 朝鲜의 詩歌를 보는 눈이 어두워 世宗朝에 朴堧이 詩歌의 價値를 絶叫하고, 여러 번 朝議에 그 採集을 提唱하였으나 그에 應하는 사람이 別로 없었다. 또 中宗朝에 元繼蔡라는 이가 亦是 朴堧과 同樣의 意見을 朝議에 내었으나 이것 또한 有耶無耶로 되고 말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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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6-3그러나 詩歌는 小說과 性質이 크게 달라 이를 小說 同樣으로 버려둘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李朝의 學者는 이것을 어떻게 보았느냐하면 申象村은 「詩餘」라 하는 말을 빌어 說明하였다. 지금 그의 말을 引用하야 보면 그는 詩餘序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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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7-1余旣歸田 世固棄我 而我且惓於世故矣 顧平昔榮顯 已糠粃土葺 惟遇物諷詠則 有馮婦下車之病 有所會心 輒形詩章 而有餘繼 以方言而腔之 而記之以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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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7-2이라 하였다. 即 이 意味는 老後 田園에서 自適할 때 마침 詩興이 일어나면 詩章의 形式을 빌어 이를 表現하여 보거니와 그래도 아직 興이 未盡하고 餘韻이 남으면 그 때에는 朝鮮말로서 歌의 形式에 읊어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詩餘라 하는 말을 借用하였는데, 詩餘는 본시 唐人의 歌詞의 異稱으로, 혹은 長短句라고도 하야 역시 詩의 餘韻이란 意味에서 由來된 用語니, 蜀中錡話에 「唐人長短句 時之餘也」라고 하였다. 그러나 象村의 所謂詩餘는 支那式의 歌詞를 意味한 것이 아니라 朝鮮의 詩歌를 말한 것임은 勿論이다. 이것은 생각컨댄 漢詩는 支那의 詩로서 萬若 朝鮮사람이 일로서 詩를 짓는다 하면 암만하여도 가슴 가운대 일어나는 鬱憤을 다시 漢語에 飜譯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詩가 詩인 가장 重大한 點은 그 內容에 그 形式이 있을 일이다. 그래서 申象村과 같은 大文豪, 即 形式만의 漢詩를 짓들 않고 詩의 眞髓에 깊이 들어간 申象村에 있어서는 벌서 漢詩만으로는 時興 폐기에 滿足하지 않고, 朝鮮語에 依하야 또 다시 읊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그는 朝鮮의 詩歌를 詩餘라 하였으나 그 實은 「詩粹」라 하여 可할 것이다. 即 胸中의 詩興을 漢詩로 짓고 지어서 表現하여도 그 정말 純粹한 興이야 漢詩로서는 到底히 表現하여 낼 수 없고 朝鮮말로서야 그를 表現하야 얻을 수 있다면 암만하여도 「詩粹」라 하지 않고는 안 될 것이다. 일즉이 退溪도 著 陶山十二曲序文에 이와 비슷한 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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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7-3老人素不解音律 而猶知厭聞世俗之樂 閃閑居養疾之餘 凡有感於情性者 每發於詩 然今之詩 異於古之詩 可詠而不可歌也 如欲歌之 必綴以俚俗之語 蓋國俗音節 所有不得不然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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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7-4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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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7-5이와 같이 朝鮮사람으로서 정말 다운 詩다운 詩를 쓸랴면 아무래도 朝鮮의 詩歌가 아니고는 滿足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金西浦는 西浦漫筆에서 다음과 같은 名言을 發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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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8-1人心之發於口者爲言 言之有節奏者爲歌詩文賦 四方 之言雖不同 荀有能言者 各因其言而節奏 則皆足以動 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假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而閭巷間樵童汲婦 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同日而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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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8-2이라고. 即 朝鮮사람이 漢文을 배워 漢文를 짓는다 하지마는 된 것은 一種 鸚鵡의 사람말 흉내에 지나지 못하고, 그보다는 차라리 閭間의 樵童, 汲婦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정말 詩의 價値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 對하여는 그의 從孫 北軒에 있어서도 亦是 같었으니 그 散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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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8-3東人成效古人爲歌詞 而所辨惟四聲 其中淸濁虛實則 昧然不知 何與中華樂律相合哉 其以東國言語爲之者 不論共自合於東國樂律與否 就其辭意 或多悠揚婉切 眞可以動人聽感人心者 不惟勝於效古之歌詞 其視詩文諸作 又不啻過之 無他眞與假之分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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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8-4라 하야 바로 朝鮮의 詩歌를 詩의 眞이라 하고, 漢詩를 그에 對하야 詩의 假라 하였다. 우리로 보아 가장 切實한 말일 줄 생각하나, 이는 要컨대 詩歌는 다른 文學과도 달라 日常 內容만이 아니라 形式을 主張하는 文學인 때문에 그런 것이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漢語는 우리의 말과는 根本的으로 그 系統과 또 그 形態를 달리하야 우리들의 微妙한 感情을 如實히 表現함에는 거의 不適當한 말이다. 따라서 漢學者의 朝鮮詩歌에 對한 態度는 제절로 小說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었든 것이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過去에 우리 學界에는 西浦와 北軒이 많지 않았으며, 또 그들이라 할지라도 그 全體思想에 있어서는 亦是 朝鮮文學은 늘 第二次的 地位에 있어 얼마큼 그에 對하야 理解와 同情을 가젔는 데에 지나지 못하였음을 나는 慨嘆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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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8-5以上 朝鮮小說과 詩歌에 對한 李朝漢學者의 態度를 簡單히 一瞥하였으나 一言으로 그 結論을 말한다면 小說에 對하여는 全然 價値를 理解하지 못하였고, 詩歌에 對하여는 比較的 그 理解가 두터웠으나 아즉 그 態度가 極히 消極的이여서 全혀 詩餘的으로 取扱하여 온 것이 事實이▶P109-1다. 勿論 이것은 李朝學人 全體의 意思를 表示한 말이라고는 아즉 할 수 없으나 그러나 그들의 大部分이 가지고 있는 態度란 것은 속일 수 없는 事實이니, 여기 따라 그들의 朝鮮文學上 活躍이란 것도 제절로 明確한 일이고, 또 直接間接으로 이것이 朝鮮文學上에 어떠한 影響을 끼첬을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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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09-2(附記) 이 小考는 筆者가 昨年十一月二十日 城大朝鮮語文學會 主催 講演會에서 發表하였든 바의 一部를 整理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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