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극로

North Korea Humanities

김윤진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1월 20일 (토) 13:59 판

이극로(李克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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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동아일보 1930년 9월 30일자 기사
 
한글명 이극로 한자명 李克魯 영문명 Lee Geuk-Ro 가나명 이칭 Kolu Li
성별 남성 생년 1893년 몰년 1978년 출신지 경상남도 의령군 전공 국어학


개요

국어학자. 한글운동가. 1893년 경상남도 의령군에서 태어났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수학한 후 만주 동창학교와 백산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다 상해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 동제대학 예과를 마친 뒤 독일 베를린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중국의 생사 공업’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을 시찰한 뒤 1929년 귀국하여 조선어학회 간사장 등을 맡아 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사전 편찬 작업을 주도하였다. 1928년 파리대학에서 조선어 음성 실험에 참여했던 자료를 바탕으로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1947)을 편찬하였다. 남북연석회의에 조선건민회 대표로 참석한 뒤 평양에 잔류하여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1978년 타계하여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생애

출생과 성장

1893년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두곡리에서 태어났다. 자서전 『고투사십년』(1947)에 따르면 [1]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맏형수와 서모 밑에서 자랐다. 독일어로 쓴 이력서에 따르면 자신이 “의사 이근주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적혀 있는데, [2] 이극로의 아버지는 전문적인 의원은 아니었지만 동네에서 의원 일을 보았다고 한다.[3]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집은 가난한 농가였고 농사일을 하다가 짬을 내어 글을 몇 자씩 배우며 주경야독하였다고 한다. 8세 이후부터 한시를 짓는 데 재능을 보였다. 동리에서 공동으로 보는 『대한매일신보』를 통해 세상 소식을 접하고, 가정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1910년,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출하여 머리를 깎고 마산 창신학교에 입학한다. 마산 창신학교에서 보통과 1년, 고등과 1년으로 2년 동안 수학하였다. 1912년 4월[4] 이극로는 서간도 신흥강습소로 향한다. 경성역과 안동현을 경유한 뒤 강원도에서 서간도로 향하는 이주민들과 동행하여 압록강을 거슬러 회인현에 도착한다. 한편 회인현으로 가는 여정 중에 이극로는 평안북도 창성군에서 아침밥을 먹게 되는데, 일행 중 한 명이 ‘고추장’을 청했으나 듣는 사람은 평북 방언 ‘댕가지장’으로만 알고 있어 말이 통하지 않는 경험을 한다. 이 경험은 이극로가 표준어 사정 등 어문 정리의 필요성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

만주와 시베리아에서의 생활

이극로는 만주 회인현 내 독립운동 연락기관인 동창점 여관에 묵게 된다. 여관의 경영자이자 동창학교의 교장인 이원식의 소개로, 신흥강습소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고 동창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한다. 동창학교에서 이극로는 박은식의 등사 일을 돕고 윤세복을 알게 되었으며 대종교에 귀의하였다.[5] 또한 동료 교원이자 주시경의 제자였던 김진과 교유하는데, 김진은 주시경의 제자로 조선어 연구의 좋은 참고서를 많이 가져왔기에 이극로는 그를 만나고 한글 연구의 기회를 얻었다고 회고한다.
1913년 동창학교를 떠나 유하현으로 간 이극로는, 당시 서간도에서 문사로 유명했던 『신흥교우보』의 주간 강일수를 만난다. 강일수는 문학을, 이극로는 육군학을 공부하기로 하고 당시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함께 가기로 계획한다. 1914년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향해 떠난다. 시베리아 남동부 치타에 당도한 이극로는, 모자라는 여비를 구하기 위하여 치타에 있는 감자 농장에서 일한다. 그러던 중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에서의 계획을 이루기 어렵게 되자 다시 회인현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신채호를 만나게 되었고, 이후 1915년에는 윤세복, 의병대장 이석대‧김동평과 함께 백두산 산록에 있는 무송현으로 이주하여 독립군 양병에 참여하고 백산학교 교원으로 재직하였다. 이 시기 중국 마적단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윤세복의 권유로 1915년 겨울에 무송현을 떠나 서울로 향하게 되는데, 안동현까지 당도하여 여관에 머무르던 중 이우식이 자신의 공부를 후원해주리라는 정보를 듣고 서울 대신 상해로 가게 된다.

중국 상해에서의 유학 생활과 모스크바행

이우식의 후원은 어렵게 되었지만 신규식의 주선으로 학비를 마련하여, 1916년 4월 상해 프랑스 조계에 있던 독일인 경영 대학인 동제대학에 입학하였다.[6] 당시 공과 4학년이던 중국인 조후달(赵厚达)의 주선으로 이극로는 면비생으로 공부하게 된다. 우등의 성적을 가질 것과, 조후달의 타자기 찍는 일을 도와준다는 조건이었다. 또한 상해에서 이극로는 김두봉과 함께 한글을 연구했으며, 김두봉의 창안인 한글 자모분할체 활자를 만들기 위해 상무인서관 인쇄소에 함께 다니며 교섭하였다. 상해 유학생회 총무로 활동하며, 독립운동 각 단체와 학생층 연락 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7]
1920년 2월 예과를 졸업한 뒤, 의과와 공과 중 선택해야 했기에 공과에 입학하였으나 소질에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자퇴한 후 독일 베를린 유학을 계획한다. 북경에 있는 신성모의 집에 머물다가, 의사 이태준과 동행이 되어 북경을 떠나려고 하지만 장자커우에서 자동차 길이 막혀 귀환한다. 1921년 4월에는 신채호가 작성한, 이승만 위임통치청원을 반대하는 ‘성토문’에 김원봉, 오성륜, 장건상 등과 함께 서명하였다.[8] 상해의 이동휘에게서 전보가 온 것을 계기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과의 분쟁 해결을 위해 국제공산당 3차 회의에 참석하려고 하던 상해파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박진순과 동행하여 1921년 6월 해로를 통해 모스크바로 가는 여정에 오른다.[9] 이극로는 이때 중국어와 서양어의 통역을 담당하게 된다.[10] 이들은 홍콩, 베트남 사이공, 싱가포르, 스리랑카 콜롬보, 지부티, 수에즈 운하를 거쳐 이집트 포트사이드 항에 도착한다. 카이로에서 이틀 간 머문 뒤 알렉산드리아 항을 출발하여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항구 시라쿠사와 카타니아를 거쳐 나폴리에서 이틀, 로마에서 사흘 간 머무른 다음 밀라노, 스위스 베른, 제네바를 구경하고 베를린으로 직행한다. 이들은 1개월 간 베를린에 머물다가 독일 공산당 대표 빌헬름 피크(Friedrich Wilhelm Reinhold Pieck)와 동행하여 슈테틴[11] 항구에 가서 배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에 도착한다. 이후 기차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구경한 뒤 모스크바로 직행하였다. 모스크바에서 3개월 간 머물며 건설 중에 있는 새 수도의 모습을 구경한다.[12] 통역 업무를 마친 이극로는 유학 생활을 위하여 라트비아 리가, 리투아니아, 폴란드를 지나 1922년 1월 베를린으로 돌아온다.[13]

독일 베를린에서의 유학 생활과 항일 활동

1922년 4월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14] 철학부에 입학하였다. 『고투사십년』에 따르면 전공을 선택함에 있어 정치학, 경제학을 주과로 삼고 철학·인류학·언어학을 부과로 하여 공부하였다고 한다. 이극로가 작성한 독일어 이력서에는 민족경제학, 법학, 철학, 종족학을 공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5] 이극로는 4년 간 정식 학생으로, 1년 간 연구생으로 대학 생활을 하게 된다.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에서 에리히 해니슈(Erich Haenisch)[16]에게 몽골어를 배우다가, 함께 공부하던 독일 학생들에게 조선어를 틈틈이 알려주게 되었는데 그들의 요청으로 정식으로 1923년 10월 조선어강좌를 창설하게 된다. 이극로는 1926년까지 3년 간 조선어과 강사를 무보수로 맡았으며, 독일, 러시아, 네덜란드인 학생 등이 강좌를 수강했다. 이때 수강생들이 조선어의 철자법 통일과 사전 편찬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의구심을 드러냈는데, 이는 이극로가 조선어 사전 편찬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17]
베를린에서 결성된 조선인 유학생들의 단체 유덕고려학우회에서 이극로는 1923년과 1924년에 활동한 것으로 확인된다.[18] 유덕고려학우회는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고 ‘한국 내 일본의 유혈 통치’라는 인쇄물을 독일어(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 영어(Japan’s Bloody Rule in Korea)로 배포하였다.[19] 글의 내용은 일본의 침략사, 일본 관동대지진과 한인 학살 실상, 한인지지 호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20] 글의 하단에 이극로, 고일청, 김준연이 대표로 서명하고 있으며,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관심이 있는 경우 다음 주소로 찾아오기를 바란다며 이극로의 주소가 적혀 있다.[21]
1924년 2월, 이극로는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본문 32쪽의 책자를 율리우스 지텐펠트(Julius Sittenfeld)사에서 인쇄하여 간행하였다.[22]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이 작은 책자는 4000년 이상 정치적인 독립과 높은 문화를 누려 왔던 한 민족이 어떻게 처음으로 외세의 지배에 놓였으며 다시 독립을 이루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23]라며 일본의 조선 침탈과 조선의 독립운동을 유럽인들에게 알리기 위해 간행하였음을 명시하고 있다.
1927년 2월에는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24]에 황우일, 이의경(이미륵), 김법린, 허헌 등과 함께 참가한다. 이극로는 ‘조선 대표단 결의안’(Resolution der Koreanischen Delegation)을 제출하였다.[25] 또한 한국 대표단은 한국의 실정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하여 ‘한국의 문제’라는 자료를 각국의 대표에게 배포하였다.[26] 베를린의 인쇄소 살라드룩운트스타인코프(Saladruck & Steinkopf)에서 인쇄된 이 자료는 앞뒤 표지를 포함하여 12쪽으로 되어 있으며, 본문은 독일어 4쪽, 영어 4쪽으로 구성되어 있다.[27] 표지에는 ‘한국의 문제’가 영어·프랑스어·독일어(The Korean Problem, Le Problème Coréen, Das Koreanische Problem)로 적혀 있다.[28] 대회가 반영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한국 문제는 관심을 끌지 못했고, 이극로의 강력한 항의로 조선 독립 문제에 대해 논의할지의 여부를 표결에 부쳤으나 결국 부결되어 무산되었다. 3개월 후인 1927년 5월에 이극로는 Korea und sein Unabhängigkeitskampf gegen den japanischen Imperialismus(한국, 그리고 일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투쟁)이라는 책자를 발간한다.[29] 머리말에 따르면 1924년 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 주로 정치적인 면을 자세히 다루었던 데 비해 이 책자는 경제적·문화적 관계에도 주목하고, 계속 추가된 정치적 운동의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첫 번째 소책자를 보강하는 성격을 지닌다.
1927년 5월 이극로는 중국의 생사 공업(“Die Seidenindustrie in China”)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논문은 지도교수 헤르만 슈마허(Hermann Schumacher)의 추천으로 빌헬름 크리스티안 출판사(Wilhelm Christians Verlag)에서 출판되었다.[30] 당시 상해에 있던 김두봉에게 편지하여 한글 자모 활자를 받은 뒤, 이를 본떠 독일 국립 인쇄소의 허가로 4호 활자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첫 시험으로 1927년 이광수의 『허생전』 일부를 인쇄하여 동방어학부연감(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에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한 조선 지식인의 삶 한 장면)이라는 제목으로 공개하였다.[31]

런던에서의 유학 생활과 음성학 연구

이극로는 1927년 6월, 고향 친구 신성모를 따라 영국 런던으로 향한다. 1927년 11월 런던정치경제대학교에 입학하여 한 학기 청강하였다.[32] 상해에서 친하게 지나던 정환범과 함께 수학하였으며 최린, 공탁(공진항)과 교유하였다. 영국에서 이극로는 시오니스트이자 작가였던 이스라엘 코헨(Israel Cohen)을 방문하기도 하였다.[33] 또한 이 시기 이극로는 식민지 사람들도 자유롭게 독립 연설을 하는 모습을 보고, 영국의 언론 자유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1928년 1월 런던을 떠나 베를린으로 다시 돌아온 이극로는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 음성학 실험실 프란츠 베틀로(Franz Wethlo)의 지도로 조선어 음성을 실험하고 연구하였다.[34] 런던에 돌아와 잠시 머물다가 1928년 5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여 약 1개월 동안 프랑스 파리대학 음성학연구소 실험실에서 위베르 페르노(Hubert Pernot), 체코슬라바키아 출신 에마누엘 슈라메크(Emanuel Šrámek)의 요청으로 조선어 음성 실험에 참여한다.[35]
이극로는 파리에 머무르던 시기 파리대학에 재학 중이던 공진항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자서전에서 회고하였다. 공진항의 회고에 따르면 이 시기 이극로는 민족에 남는 일을 무엇인가 하고 싶다고 공진항에게 의논을 해 왔으며 이때 공진항은 한글운동을 독려했다고 한다.[36]

구미 시찰과 전국 일주

파리에서의 연구와 시찰을 마친 후 다시 런던으로 간 이극로는 영국, 아일랜드, 스코틀랜드를 시찰할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떠난다. 맨체스터를 구경하고, 아일랜드 더블린에 도착한 뒤 아일랜드 교육부를 방문한다. 이극로는 아일랜드인들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것과 간판 등 모든 것이 영어로 표기된 것을 보고, 귀국 후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에 한평생을 바치자고 결심한다.[37] 뒤이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에든버러를 거쳐 런던에 도착하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38]에서 음성학 권위자 대니얼 존스(Daniel Johns)를 방문하고 조선어 음에 대한 논평을 들었다.[39]
1928년 6월부터는 미국 뉴욕에 도착한 뒤 북미대륙을 횡단하며 대학, 공장, 박물관, 도서관 등을 시찰하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 하와이 등에서 현지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글에 대한 강연을 하였다.[40] 대표적으로 1928년 8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연설한 강연문을 보면, 이극로는 사전 편찬, 순국문 사용, 가로 쓰기를 주장했음을 알 수 있다.[41] 또한 뉴욕에서는 한글 타자기를 발명했던 이원익을 수차례 방문하여 한글 자모의 활자와 타자기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뉴욕에서 장덕수를 만나 그에게서 귀국 후 무엇을 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자 이극로는 조선어 사전을 만들 것이라고 대답하기도 했다.[42] 필라델피아에서는 서재필을, 하와이에서는 이승만을 만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1928년 10월부터 1929년 1월까지 일본 안의 공장과 전문 대학교, 기타 제반 회사의 시설을 시찰했다. 박사직과 민석현을 통하여 사카타니 요시로(阪谷芳郎),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를 알게 되어, 이들의 소개로 동경 상공 회의소와 대판 상공 회의소에 가서 소개서를 얻어 일본 안의 각 방면 상공업을 시찰한 것이었다. 1929년 1월 부산에 도착한 후 고향에서 잠시 머문 뒤 경성으로 온 이극로는 “조선어 연구기관과 조선어연구자”에 대해 가장 먼저 알아보았다고 자서전에서 밝히고 있다. 같은 해 4월, 조선어연구회에 입회하였다. 서울을 시찰한 뒤 이극로는 전 조선 시찰의 8개월 프로그램을 세워 실행한다. 자서전에 따르면 전 조선을 일주할 때 만주의 안동현과 용정시를 겸하여 돌게 되었으며, 시찰 프로그램은 실업계, 교육계, 사상계를 중심하고 명승고적을 가미한 것이라고 한다. 공장과 광산, 농장, 어장, 학교, 도서관, 신문사, 사찰 등을 둘러본 이극로는 금강산을 마지막 목적지로 하여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다.

조선어학회 활동과 어문 운동

이극로는 언어문제가 곧 민족 문제의 중심이라고 파악하였으며 어문 운동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43] 정인승의 회고에 따르면, 학술 활동이 중심이었던 조선어연구회가 1929년 4월 이극로의 입회를 계기로 사전 편찬 사업에 착수하면서, 대중적 운동 단체로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고 한다.[44]
이극로는 조선어사전 편찬에 대한 사회 각계 인사들의 동의를 이끌어 1929년 한글날 기념 축하회에서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회를 열고 취지서를 발표하였다.[45]1929년 10월 31일에 조선어사전편찬위원 108명[46]의 발기인 중 준비위원과 상무위원이 정해졌는데, 이극로는 위원장 겸 편집부 상무를 맡았다.[47]1929년 12월에는 평안남도 강서군 출신으로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소학교 교사로 있던 김공순(金恭淳)과 결혼했다.[48] 1930년 1월, 조선어연구회의 간사에 이극로와 최현배가, 간사장에 장지영이 선임되었다.[49]이극로는 조선어연구회 간사와 조선어사전편찬회 상무위원을 겸하며 사전 편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50]
1930년 중국군경이 만주 길림과 돈화 사이 철도 연선 각지에 사는 조선인 동포를 체포하고 총살한 ‘길돈사건’이 발생하자, 신간회를 중심으로 한 사회단체들은 이극로를 재만 동포 위문사 겸 만주 당국 교섭사로 파견하였다.[51] 이때, 천도교청년당 대표로 김기전 또한 동행하였다.[52] 1930년 9월 30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이극로는 재만 동포들의 집을 방문하고 중국 동북지역 총사령관 장학량과 장작상 등을 만났다.[53]
이극로는 사전 편찬을 위해 철자법·표준어·외래어 관련 어문규정이 정비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54] 이에 따라 1930년 12월에는 이극로 등을 위원으로 한 조선어 철자 통일 위원회가 구성되었다.[55] 1931년 1월 이극로는 신명균·이윤재·최현배·이희승 등의 동의를 얻어 조선어연구회라는 명칭을 조선어학회로 바꾸었으며,[56] 조선어학회 1대 간사장에 선임되었다.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의 외래어 표기법 문제를 1931년 그해 추진할 사업 중 하나로 선정하고, 간사였던 이극로, 최현배, 장지영이 실행을 담당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이후 이들은 각계의 권위자들로 이루어진 ‘외국 어음 표기 문제’를 다룰 협의회를 구성했다.[57] 1932년 1월 이극로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장지영, 김윤경, 이만규와 함께 기관지를 간행하기로 결정하였으며[58] <그 결과 1932년 5월 기관지 『한글』의 창간호가 발간된다.[59] 1934년 12월 2일에는 조선어 표준어 사정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이러한 결과로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1940년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이 마련되었다.[60]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2대~6대 간사(1932~1937), 7대(1937~1938) 간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사전 편찬을 주도하였으며 어문정리 및 사전과 관련한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였다.[61]
1935년에는 이인, 이윤재 등과 함께 조선어학회의 ‘자매기관’인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을 조직하였다.[62] 조선기념도서출판관은 태국의 실례를 본받아 널리 조선 민중의 관혼상제 등의 비용을 절약시켜서 그 일부로 조선어 도서를 출판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기관으로, 김윤경의 『조선문자급어학사』, 노양근의 『날아 다니는 사람』 등을 출판하였다.[63] 또한 1937년 이극로는 이인, 이우식 등과 함께 학자들의 연구를 지원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양사관’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좌절되었다.[64]
이극로는 대종교와 연계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극로는 대종교 경의원 참사로 활동하면서, 1942년 6월 만주 영안현 대종교총본사에서 출간된 한글 가사집 『한얼노래』에 실린 37곡 중 27곡을 작사하였다.[65] 이극로가 대종교 3대 교주 윤세복에게 보낸 편지에 들어있던 「널리 펴는 말」이라는 글을 일제가 조선어학회 사무실 이극로의 책상에서 발견하고 이를 조선어학회와 대종교를 탄압하는 계기로 삼으면서,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과 대종교 탄압 사건인 ‘임오교변’이 일어났다.[66] 이에 이극로는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 책임자로 체포되어 함흥형무소에 수감된다. 1942년 12월 21일부터 1945년 1월 16일까지 9회의 공판이 이루어졌고 이극로는 조선어학회 사건 관계자 중 가장 높은 형량이었던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67]
해방 이후 1945년 8월 17일 출옥한 이극로는 조선어학회의 재건에 착수한다. 1945년 8월 25일 조선어학회는 임시총회를 개최하여 간사를 선정하고 당면 과업을 결정하였다.[68] 이극로가 간사장에 선출되었고, 간사에 최현배·김병제·이희승·정인승·김윤경이 선임되었으며 당면 과업으로는 국어교원 양성을 위한 국어강습회 개최, 초중등 국어교재 편찬, 『한글』지 속간, 국어사전편찬의 완결 등이 결의되었다.[69] 1945년 9월 조선어학회는 ‘국어 교과서편찬위원회’를 설치하였고 이극로는 편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이극로는 여러 글과 강연을 통해 한자 폐지를 주장하였고 [70] 교과서 한글 전용안을 관철시켰으며, 강연회 등을 통해 한글 보급 운동을 전개했다.[71] 또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위해 1945년 9월 이극로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72] 1945년 10월 9일에는 한글날 기념식이 거행되었으며 이극로가 작사한 ‘한글노래’가 불렸다.[73] 1945년 11월에는 조선교육심의회 초등교육부 위원에 위촉되어 초등학교 의무제도의 실시를 이끌었다.[74]
이극로는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에 모두 참석하여 좌우 합작을 꾀하였으나 좌절되자 두 모임 모두에서 탈퇴 성명을 발표한다.[75] 1946년 6월 이승만의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설에 대해 반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같은 달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를 해소하고 조선건민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민족의식과 민족의 단합을 강조하였다.[76]
1947년 2월에는 을유문화사에서 자서전 『고투사십년』이 출간되었다. 『고투사십년』은 이극로의 자서전[77]과 자작시 및 노래,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를 번역하고 평한 안석제의 열전과, 유열의 열전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로 구성되어 있다. 이극로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사전 편찬에 관여하였는데, 1947년 10월 9일 『조선말 큰사전』(을유문화사) 제1권의 발간으로 그 결실을 보게 된다.[78] 1947년 11월에는 음성학 연구서인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아문각)이 출간되었다.

북한에서의 활동

이극로는 조선건민회 대표로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한 후 평양에 잔류하였다.[79] 1948년 8월, 이극로는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에 선임되었으며[80] 9월에는 제1차 내각 무임소상에 임명되었다.[81]
1948년 10월 2일 개최된 내각 제4차 각의에서는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안에 설치되어 있던 조선어문연구회를 폐지하고 교육성 내에 새로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82] 당시 무임소상이었던 이극로는 이 새로운 조선어문연구회의 책임자로서 북한 언어정책을 총괄하게 된다.[83] 이극로가 위원장을 맡은 조선어문연구회는 ‘조선어 문법의 편수 간행, 조선어 사전의 편찬 간행, 조선 어문 연구 잡지의 발행, 조선 어문 연구 논문집의 간행, 조선 어문에 대한 특별 강연회의 개최’라는 당면 사업 과제를 설정하였다.[84]
1949년 3월 조선어문연구회는 『조선어 연구』를 창간하였다. 창간사에서 이극로는 “우리의 국어 생활이 다시 활발하여지는 이 때에, 무엇보다도 먼저 말과 글에 대한 지도적 역할을 할만한 잡지가 절대로 필요하다”[85]라고 하며 국어교육을 맡은 교육자, 우리말과 글 연구자, 문필 종사자에게 특히 이 잡지가 필요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같은 해 11월 조선어문연구회에서 이극로는 『실험도해 조선어 음성학』을 펴냈다. 이는 1947년 아문각에서 출간되었던 『實驗圖解朝鮮語音聲學』(1947)을 수정·보완한 것이다.
1949년 6월에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중앙상무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1월 과학원 후보원사에 임명되었다. 1950년에는 「1950년을 맞이하면서」(『조선어연구』 2-1)를 통해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에 입각한 철자법, 문법, 사전을 완성하고 조선 어문을 연구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86] 1952년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장, 1953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임되었다. 1953년에는 「이·웨·쓰딸린의 로작 『맑쓰주의와 언어학의 제 문제』에 비추어 본 공화국 언어학의 정형과 그 당면 과업」을 『과학원 학보』 2집에 게재하였으며 1954년에는 Новая Корея(새조선) 9호에 러시아어로 이승만의 한글간소화 방안을 비판한 논문을 발표하였다.[87]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1958년 3월 김두봉이 정치에서 완전히 몰락한 뒤 김두봉의 6자모에 대해 비판하는 논문 「소위 <6자모>의 비과학성」을 발표했다.[88] 1957년 8월에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에 선임되었고 12월에는 조국통일민주전선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1958년 1월에는 조·소 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을 맡았다. 음성학 연구 또한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는데 1957년 「조선 말 력점 연구」, 1960년 「조선말의 악센트」 등의 성과를 발표하였다. 1961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62년 과학원 조선어 및 조선문학연구소 소장, 1964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의장에 선임되었다. 1964년에는 「북청 방언의 조(調) 연구」를 발표하였으며 1966년에는 사회 과학원 출판사에서 『조선어 조 연구』를 간행하였다. 1970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1972년 양강도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3년 과학원 및 사회과학원 원사로 임명되었다. 1978년 85세로 타계하여 평양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연구

문법론 연구

이극로의 문법론 연구는 어문 운동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그 성과는 해방 후 남북한의 국어학에 영향을 미쳤다. 「조선말 임자씨의 토」(1)(2)(3), 「조선어의 시간 표시법」, 「조선어 단어 성립의 분계선」, 「체언에 붙는 접미사 <이>의 본질」 등을 통해 이 점을 살펴볼 수 있다.
「조선말 임자씨의 토」(1)(2)(3)(1935)에서 이극로는 말본(語法)의 터를 닦고자 조선어학회의 여러 사람들이 함께 힘써오다가 철자 통일안에 집중하느라 잠시 멈추게 되었는데, 자신이 지금 쓰는 이 글은 그때 만들어 두었던 것을 닦아서 내어놓는 것이라고 말한다.[89] 이 글에서 이극로는 조선말 토를 처리하는 세 가지 태도가 있음을 지적한다. ‘토를 단어로 보는 사람’, ‘체언 밑에 오는 토만 단어로 보고 용언 아래 오는 토는 어미로 보는 사람’, ‘토를 모두 어미로 보는 사람’이 그 세 가지인데, 고영근에 따르면 이 분류 체계는 해방 후 김민수, 김윤경의 제1유형(분석적 체계), 제2유형(절충적 체계), 제3유형(종합적 체계)로 발전되었다는 점에서 그 학설적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90] 이 글에서 이극로는 체언에 서술격 조사 ‘이(다)’가 붙는 현상과 용언의 어간에 어미 ‘-기’가 붙어 명사로 바뀌는 현상을 상관적인 현상으로 보았다.[91]이러한 견해는 북한에서 발표한 「체언에 붙는 접미사 <이>의 본질」(1964)에서도 되풀이되어 문화어 ‘바꿈토’의 설정을 합리화한다.[92]
「조선어의 시간 표시법」(1935)에서는 우리말의 시제를 최초로 논문의 형태로 다루었다.[93] 시간을 주관적 시간과 객관적 시간으로 나누었으며, 종결형의 시제와 관형사형의 시제를 달리 파악하였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94]
「조선어 단어 성립의 분계선」(1936)에서는 관형사, 접두사, 합성(복합)명사, 수사, 명수사, 연월일시 표시어, ‘하다’와 ‘되다’가 붙은 단어들을 대상으로 단어 성립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곳에서 논의한 단어 성립 문제가 『큰사전』에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95]

음성학과 음운론 연구

독일과 프랑스에서 음성학을 접했던 이극로는 지속적으로 음성학 및 음운론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였다. 해방 전의 연구로는 훈민정음과 ‘ㆍ’음가에 대한 연구를 들 수 있다.[96] 「훈민정음의 독특한 성음 관찰」(1932)에서는 비교 문자론, 성음 분류법, 후음의 세 주제를 논의 대상으로 다루었으며, 「훈민정음의 “중간 ㅅ” 표기법」(1939)에서는 사이ㅅ을 성문(聲門)을 막는 절음(絶音) 기호로 보고, 사이ㅅ 대신 ‘ㆆ’를 독립적으로 중간에 두고 절음의 표기법을 통일시킬 것을 제안하였다.[97] 「‘ㆍ’의 음가에 대하여」(1937)에서는 문헌과 방언을 바탕으로 아래아의 음가를 추정하여 국제음성기호 ‘ɔ’에 상당(相當)한다고 하였고, 「“ㆍ”의 음가를 밝힘」(1941)에서는 여기에 1940년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의 설명을 추가하였다.[98]
음성학과 음운론에 대한 이극로의 성과가 집성된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1947)은 한국어 실험음성학의 선구로 평가된다.[99] 책의 머리말에서 이극로는 파리대학 음성학연구소에서 음성 실험을 한 자료(“그 때에 쓰던 나의 인조 구개로써 발음 위치를 확정하는 재료와 또 카이모그라프(寫音機)로 실험한 재료”[100])와, 조선어학회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 참여했던 경험이 저술의 바탕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실험도해 조선어음성학』(1947)의 많은 부분은 이미 1930년대에 발표한 논문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책의 전체 목차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一. 實驗 音聲學의 基礎 1. 音聲 實驗의 方法 2. 音聲의 生理 3. 악센트(Accent) 4. 홀소리(母音) 發生의 理 5. 닿소리(子音) 發生의 理 二. 音의 相關性 1. 소리의 이음(連音) 2. 닿소리의 만나 바꾸임 3. 소리의 줄거나 죽어짐 4. 소리의 끊음(絶音) 5. 조선 말 소리의 보기틀 6. 文字와 音聲記號 7. 音의 長短, 單複, 받침법, 口蓋音化


『朝鮮社會史讀本』은 1936년 4월에 발행되었는데, 불과 한 달 후인 5월에 ‘改訂’ 판이 나왔다. 선행연구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 “발행 금지를 막기 위한 조치가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했지만,[101]出版警察報』 1936년 5월호에 실린 「内地出版物取締狀況」을 통해 부분 ‘삭제 처분’을 받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삭제 대상은 242쪽, 247쪽, 249쪽인데 모두 “내선융화 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있다는 이유였다.[102]
삭제 대상으로 『出版警察報』에서 적시한 것은 242쪽의 “이 무렵 일본 거류민의 조선인에 대한 소치는 실로 극히 ××(참혹)하여 조선인이 빌린 돈이나 외상값을 내지 않을 때는 그 조선인의 문에 못 질을 했다. 그게 점점 할 수 없게 되자 이번에는 자기 집에 감옥을 만들어 조선인을 잡아 와 그 안에 넣고 가족이나 친구가 돈을 갚기를 기다려 비로소 풀어 줬다”라는 부분이다. 이렇게 242쪽에서는 ‘中井錦城’라는 일본인 관리의 ‘朝鮮回顧録’를 인용하여 한국병합 전에 벌어진 재조 일본인의 고압적인 행위를 고발하면서 “착착 식민지화에의 준비 공작을 진행해 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247~249쪽에서는 청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일본군이 조선의 “왕궁을 포위하고 정치개혁을 요구”했다고 서술하고, 갑오개혁을 설명하면서 “大韓萬歲! 自由·平等·友愛!”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 이 ‘개혁’에 대한 동의는 그리고 협력은 조선 자신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조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식민제도를 전제로 하여 그리고 그 발전적 완료를 위해 길을 깨끗이 하기 위해서였다”라고도 서술하였다. 여기서 ‘×××’는 ‘일본의’라고 판단된다. 또한, “일청전쟁의 참화가 한국의 자유, 평등, 우애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는 표현도 사용했다.
삭제 처분은 발행일인 4월 5일에서 아흐레 지난 4월 14일에 내려졌다. 그렇다면 책이 이미 유포된 뒤의 삭제 처분은 어떻게 행해졌을까. 다음 달인 1936년 6월호 『出版警察報』에 실린 「差押其の他執行狀況」에 따르면 北海道에서 九州에 걸쳐 처분이 집행되어 약 20%의 ‘差押率’을 기록한 것이 확인된다. 경찰 측도 “다수 부현(府縣)의 집행이 우선 주목할 만하다”라고 실적을 평가했다.[103] 필자가 소장하고 있는 초판본(2011년 2월에 東京의 고서점에서 구입)은 241~242쪽과 247~250쪽이 잘려 나간 상태다. ‘삭제 처분’ 흔적으로 판단된다.

일본의 『朝鮮社會史讀本』 검열 양상(241~242쪽 잘려나감)

일본 전국 도서관을 중심으로 소장이 확인되는 초판본을 ‘전수 조사’한 결과 전체의 약 30%에서 해당 쪽이 잘려나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사회사독본』은 초판이 내용 일부에 대해 ‘삭제 처분’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정판을 낸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사회사독본』 초판 삭제 처분 실행 여부 ※ 1~19는 ‘ CiNii Books’에서 검색한 결과를 토대로 도시샤대학 도서관을 통해 전국 도서관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이다.
번호 소장처 소장처상세 삭제상황 특이사항
1 BerlinStabi 미확인
2 九大
3 京大法 受入: 1936.12.8.
4 京大経 経済図 受入: 1936.12.8.
5 和光大
6 天津図 日本文庫 미확인
7 山口大 受入: 1936.6.20.
8 弘大 本館
9 東大文 韓国朝鮮 잘려나감 붉은 글자로 다음과 같은 기재. 240쪽 좌상에 ‘241 242’, 243쪽 우상에 ‘二頁抹消’, 249쪽 우상에 ‘247 248 抹消’. 249~250쪽은 잘려나가지 않았으나 목 부근에 두 곳 찢어져 있음.

受入: 2004.11.30.

10 法大 多図
11 滋県大① 受入: 2004.3.31.
12 滋県大② 잘려나감 受入: 2004.3.31.
13 神大社会
14 神市図 미확인
15 神戸市外大
16 立命館 잘려나감 241~242쪽은 잘려나간 내용을 손으로 다른 종이에 써서 붙임. 247~250쪽은 일단 잘려나간 쪽을 그대로 다시 붙임. ‘梗石韓吉彦蔵書之印’ 날인.
17 立大 잘려나감
18 静大
19 早大中央
20 서울대 心岳文庫
21 연세대 국학자료실 잘려나감
22 홍종욱 잘려나감 ‘難波所蔵’ ‘学書 号’ 날인.
23 미즈노 나오키 저자가 改造社에 보낸 증정본. 여러 곳에 저자에 의한 수정 흔적.

조선연구와 민족통일전선

1930년대 조선 연구 붐이 찾아왔다. 그 중심에는 안재홍, 정인보 등 민족주의자가 주도한 조선학 운동이 있었다. 1931년 5월에 ‘이충무공 유적 보존회’가 창립되었고, 1932년 5월에는 동아일보가 단군릉 수축을 위한 모금 운동을 벌였다. 1934년에는 정약용을 기리는 다산 서세 99주년 기념사업이 벌어졌다.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통해 우리 역사에도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법칙이 관철된다고 주장한 사회주의자 백남운도 1935년의 다산 서세 100주년 기념사업에 참가했다. 백남운은 1935년 7월 『동아일보』의 ‘정다산 서세 백년 기념’ 지면에 정인보, 현상윤과 함께 기고했고, 8월에는 『신조선』에 안재홍, 정인보, 백낙준 등과 함께 글을 실었다. 김태준은 1933년 10월에서 이듬해 3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가요개설」을 70회 이상 연재했고, 1935년 7월에는 『조선일보』 ‘다산 선생 백년제 특집’에 참가했다.
민족전통문화에 대한 강조는 1930년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104] 소련에서는 10월 혁명 이래 러시아 민족주의는 위험한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1930년대 들어 러시아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났다. 1935년 코민테른 제7회 대회반파시즘인민전선이라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했다. 반파시즘 인민전선론은 대중의 민족 감정, 민족주의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1930년대 초반 찾아온 조선 연구열은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혹은 반제 민족통일전선론적 성격을 가졌다.[105] 식민지 조선의 사회운동은 1930년 전후에 정점을 맞은 뒤 침체에 빠졌다. 계급지상주의, 국제주의에 대한 비판 속에 조선이라는 주체가 새로운 저항의 근거로 떠오른 것이다. 백남운은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족적 대립과 자본주의적 대립이 거의 서로 일치한다”고 민족통일전선의 근거를 밝혔다.[106]
사회주의 운동 주류에서는 조선 연구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카프(KAPF)의 서기장을 지낸 바 있는 임화는 ‘조선학의 수립’, ‘조선문학의 재건’, ‘조선적 현실의 분석’ 등 말뿐인 ‘과학적 환상’이 ‘비관주의와 패퇴 정신’을 은폐한다고 지적하고, ‘모스크바에서 조선으로’라는 풍조 비판했다.[107] 김남천은 “이순신의 백골을 땅 속에서 들추어서 그것을 혀끝으로 핥는 사람, 단군을 백두산 밀림 속에서 찾아다가 사당간에 모시는 사람, 정다산을 하수구 속에서 찬양하는 사람” 등을 비판했다. 이순신, 단군, 정약용을 좇는 1930년대 조선 연구열을 비꼰 셈이다.[108] 프로핀테른 극동부에서 파견되어 비합법 공산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던 권영태(權榮台)경성제대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 교수와의 협의에서, ‘사회민주주의’, ‘민족개량주의’와 더불어 백남운의 『朝鮮社會經濟史』를 들어 조선인 사이에 “이상한 충동을 일으킨다”고 비판했다.[109]
식민지 조선에서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태도는 민족의 전통과 문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와 깊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청원은 1938년 5월 이후 다시 비합법 공산주의 활동에 종사하면서 「朝鮮革命論」을 집필했다.[110]「朝鮮革命論」에서는 “토착 부르주아 자신이 상업자본적 고리대적 흡혈귀적 존재로서 농촌에서 봉건적 제관계와 연결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다.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한 축이 되어야 할 건전한 민족부르주아지의 존재를 부정한 셈이다. 혁명운동을 통해 세워야 할 “정권의 성질은 당연히 소비에트적 형태의 노동자,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적 독재”라고 주장했다. 통일전선의 필요성도 언급하지만 “본문의 주지와 모순되는 혹덩어리 같은 것”[111]이었다.
이청원은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비관적이었다. 1936년 『조선사회사독본』 서문에서는 ‘조선학’을 ‘유교 훈화적, 정책적, 반봉건적’이라고 지칭하고, “그 공식의 천재는 ‘단군’을 분식하고 그 전체적인 영웅은 ‘이순신’의 옷을 빌려 입고, 그 재간 있는 사람들은 ‘정다산’의 가면을 쓰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12] 1937년 11월 동아일보에 실은 글에서는 “지금 서구 천지에서는 문화전통의 옹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사정이 다른 우리의 경우는 문화전통 옹호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옹호할 문화의 토대 즉 현실적 지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발견은 없다. (중략) 우리는 부정하고 비판하고 극복할 문화전통밖에 없다.”고 밝혔다.[113] 1937년 11월 동아일보에 실은 글에서는 “지금 서구 천지에서는 문화전통의 옹호를 외치고 있지만 그와 사정이 다른 우리의 경우는 문화전통 옹호의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옹호할 문화의 토대 즉 현실적 지반이 없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는 이른바 위대한 발견은 없다. (중략) 우리는 부정하고 비판하고 극복할 문화전통밖에 없다.”고 밝혔다.[114]
조선의 문화와 전통에 대한 부정은 반제 민족통일전선의 부정과 연동했다. 이러한 이청원의 태도에 대해 민족주의자들 역시 거리를 두었다. ‘蓮湖亭人’이라는 이름으로 발표된 「文化領域에 顯現되는 惡質的 諸流에 抗하야」(『批判』, 1937.2.)라는 글에서는, 안재홍이 『신조선』을 편집하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조선학 운동을 강하게 비판하던 이청원, 한흥수 두 사람의 논문을 ‘보이콧트’했다고 고발했다.[115] ‘蓮湖亭人’이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연호정(蓮湖亭)이 울진에 있는 정자임을 고려하면, 울진 출신의 사회주의자로서 조선 연구에도 깊이 가담한 최익한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최익한과 이청원의 인연을 보여주는 사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북한에서의 연구

논점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인가?

세계사적 보편성을 강조한 백남운아시아적 특수성을 주목한 이청원을 놓고 보면,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백남운과 그렇지 못한 이청원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쉽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1933)와 달리 『조선봉건사회경제사』(1937)에서는 아시아적 특수성을 고려했다. 나아가 해방 직후인 1946년의 글에서는 원시공산사회와 고대사회 사이에 ‘초(初)계급사회’로서 아시아적 단계를 상정하고, 이후 아시아적 노예제, 아시아적 봉건제가 이어진다고 서술했다. 일찍이 자신이 비판했던 1930년대 일본 강좌파 역사학의 시대 구분을 수용한 셈이다. 다만 북한 정권에 참여한 후에는 고조선을 전형적 노예제 사회로 규정하는 등 사적 유물론의 기계적 적용으로 회귀했다. 신생 독립국의 국민사 서술이라는 시무에 쫓겨, 세계사적 보편성과 아시아적 특수성의 조화라는 과제는 중단된 것이다.
이청원의 한국사 연구는 백남운의 『조선사회경제사』(1933)를 높게 평가하는 등 내재적 발전의 모순을 중시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러나 일본의 좌파 역사학자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점차 아시아적 특수성에 주목하게 되었고, 이렇게 변화된 역사상은 『조선사회사독본』(1936)에 담겼다. 이후 이청원과 백남운은 날 선 비판을 주고받았다. 백남운이 내재적 모순 발전에 의해 식민지 조선의 변혁이 가능할 것이라고 낙관했다면, 이청원은 아시아적 정체성을 직시하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해방 후 한국사 연구에서도 아시아적 특수성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했다. 자칫 공식주의에 빠지기 쉬운 내재적 발전론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해 온 미야지마 히로시 님, 이영훈 님의 연구를 생각한다면, 세계사적 보편성은 선이고 아시아적 특수성은 악이라는 단순한 규정을 내리기는 어렵다.“일찍이 미야지마는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에 입각한 조선사의 시기 구분을 시도하여, 농업생산력의 발전을 기준으로 ‘이조기’를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宮嶋 1984b, 64)으로 규정한 바 있다. 나아가 소농사회론의 다른 한 사람의 유력한 논자인 이영훈은 미야지마의 주장을 발전시켜, 소농민 경영의 안정성에 바탕한 지주제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을 중시하여 조선 후기 사회를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하였다(이영훈 1987, 93-94). 흥미로운 사실은 미야지마의 최근의 연구에서는 그간의 소농사회론의 연구 성과를 반영하여 스스로 ‘제3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했던, 보다 구체적으로는 이영훈에 의해 ‘제4차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규정되었던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를 ‘초기 근대’(宮嶋 2004, 180)라고 부르고 있는 점이다.” 홍종욱, 「내재적 발전론의 임계 –가지무라 히데키와 안병태의 역사학-」, 강원봉 외 편, 『가지무라 히데키의 내재적 발전론을 다시 읽는다』, 아연출판부, 2014, 98~99쪽.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

이청원은 식민지 사회주의자라기보다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정영환 님은 재일조선인 운동사를 설명하면서 1930~1955년을 “일본 공산당 입당기”라고 파악했다. 코민테른의 일국일당 원칙에 따라 재일조선인들은 1930년 무렵 조선인 독자 조직을 해체하고 일본인 사회운동에 합류했다. 바로 이청원이 걸었던 길이다. 1920~30년대 비식민화(decolonization)의 방향을 둘러싸고 제국 내 비식민화와 탈제국 비식민화가 길항했다. 전자가 동화(자치?)라면 후자는 독립(자치?)이었다. 이청원처럼 일본에 거주하며 일본인과 같은 조직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은 제국의 사회주의자였다. 일본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조선인 프롤레타리아트가 연대하여 제국의 부르주아지에 맞서고자 한 이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민족부르주아지와의 연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1945년 이후에도 미국의 일본 점령, 중국의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으로 국가와 민족의 경계는 유동적이었다. 1955년 재일조선인들은 북한의 해외공민이라면서 일본공산당을 탈퇴하여 총련 즉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를 결성했다. 도베 히데아키 님은 1955년의 변화를 ‘일본공산당의 국민화’라고 정의했다. 북한에서는 1956년 8월 전원회의 사건으로 소련계와 연안계가 권력에서 배제되었다. 동아시아 제국 질서의 해체와 국민국가 체제의 확립이 뚜렷해지는 가운데, 제국의 사회주의자 이청원의 역사 인식은 설 자리를 잃었다.

논저 목록

이청원 논저 목록
저자명 기사명 단행본
잡지명
권호 출판사 출판
일자
분류
李靑垣 외 今日朝鮮敎會의 發展에는 人物이냐? 金錢이냐?
: 紙上討論 續論
宗敎敎育 1(8) 朝鮮主日學校
聯合會
193008 雑誌
李靑垣 新興? 「滿洲國」에 朝鮮農民의 生路,
民族改良主義策動을 粉碎하라!
우리동무 3 193301 雑誌
李靑垣 日本에 잇서서의 經濟恐慌은 어듸로 가나 新階段 1(8) 朝鮮之光社 193305 雑誌
李靑垣 世界經濟恐慌과 國際經濟會議
-國際經濟會議는 무엇을 할까?-
新階段 1(9) 朝鮮之光社 193306 雑誌
李靑垣 資本主義 第三期와 石油
-石油을 支配하는 者는 世界을 支配한다-
大衆 1(3) 大衆科學
硏究社
193306 雑誌
李靑垣 朝鮮農業の根本問題 大衆經濟 193401 雑誌
李淸源 朝鮮に於ける小作農の狀態と
小作令の制定(資料)
經濟評論 1(3) 193411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を讀む 唯物論硏究 26 193412 雑誌
李淸源 朝鮮に於ける階級分化に就いて 文化集團 3(2) 193502 雑誌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朝鮮封建社會史 唯物論硏究 30 193504 雑誌
李淸源 「アジア的生産樣式」とは何か 生きた新聞 1(5) 193505 雑誌
李淸源 朝鮮封建社會史(二) 唯物論硏究 31 193505 雑誌
李淸源 朝鮮の火田民とは? 勞働雜誌 1(3) 193506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經濟史の硏究について 社會 4(6) 193507 雑誌
李淸源 朝鮮原始氏族共産體硏究 東亞 8(7) 193507 雑誌
李淸源 亞細亞的生産樣式에 關하야 新東亞 47/5(9) 新東亞社 193509 雑誌
李淸源 震檀學報 第三卷을 읽고(上)(中)(三)(完) 東亞日報 193511
09석3,
12석3,
13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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雑誌
李淸源 朝鮮人思想에 잇어서의
「아세아的」形態에 (對하야)(一)-(五)
東亞日報 193511
30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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雑誌
李淸源 昨年朝鮮學界의 收穫과 趨勢一考(1)-(10) 朝鮮中央日報 193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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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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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조(4),
18조(4),
21조(4),
22조(4),
23조(4),
24조(4)
雑誌
李淸源 昨年中 日本學界에 나타난
朝鮮에 關한 論著에 對하야(一)(二)(三)(完)
東亞日報 193601
01기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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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06
雑誌
李淸源 災害朝鮮의 救濟策/朝鮮은 災害의 땅!/
克服策의 再檢討, 自然의 暴威 征服은 무엇으로?
社會的 條件의 緩和는 어떠케?
//「問題는 本質把握 社會的條件 認識必要」
東亞日報 19360101기4 雑誌
李淸源 古典硏究의 方法論
-(먼저)文化遺産에 對한 批判的 態度-(1)(2)(3)
朝鮮日報 193601
03석(3),
06석(3),
07석(5)
雑誌
李淸源 現代文化에 對하야 朝鮮中央日報 19360206 雑誌
李淸源 時事小感
-두가지 問題에 對하야-(1)(2)(3)
朝鮮日報 193602
15석(5),
16석(6),
19석(5)
雑誌
李淸源 朝鮮原始社會硏究 批判 4(1/2) 批判社 193603 雑誌
李淸源 檀君神話에 對한 科學的 批判
-懷古的 文辭의 流行을 보고서-(一)(二)(完)
朝鮮中央日報 193603
05조(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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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조(4)
雑誌
李淸源 朝鮮農業의 生産規模(一)(二)(三) 批判 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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雑誌
李淸源 朝鮮經濟의 特殊性
-現階段朝鮮經濟機構의 側面的硏究-
批判 4(8) 批判社 193610 雑誌
李淸源 「朝鮮의 얼」의 現代的 考察 批判 5(3) 批判社 193703 雑誌
李淸源 「人乃天主義」의 現代的 考察
-人乃天主義의 歷史的生成의 分析-
批判 5(3) 批判社 193703 雑誌
李淸源 文化의 特殊性과 一般性
-그(것의) 成立過程에 對한 解明-(1)(2)
朝鮮日報 193708
08석(5),
193708
10석(5)
雑誌
李淸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亞日報 193711
02조(4),
03조(4),
05조(4)
雑誌
李淸源 古代社會新羅의 花郞制度再批判(一)(二)(完) 東亞日報 193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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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조(4)
雑誌
李淸源 朝鮮에 잇서서의 封建的 構成의 成立過程(一)(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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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判社 19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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雑誌
李淸源 朝鮮에 잇서서의 封建的 構成의 成立過程(三)
-(六)(完)-麗末의 社會的 性格-
批判 6(7),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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批判社 193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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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맑스와 民族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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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變動되는 國際情勢와 朝鮮 新天地 1(7) 서울新聞社出版局 194608 雑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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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解放第一年回顧 其四 朝鮮經濟의 動向 新世代 1(4) 서울타임스社 194609 雑誌
李淸源 朝鮮社會의 基底로서의 半封建的 農業關係 朝鮮經濟 1(5) 朝鮮經濟社 194609 雑誌
李淸源 朝鮮民族文化에 對하여 文化戰線 2 194611 雑誌
李淸源 民主主義와 靑年 民主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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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農民戰爭으로서의 東學亂
-發生의 歷史的 條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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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建國思相總動員運動의 社會的 根據 人民 2(1) 194701 雑誌
李淸源 十月革命은 全世界 勤勞人民들을 團合시켯다 朝蘇文化 8 194711 雑誌
李淸源 강화조약의 력사적 교훈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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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諸問題 1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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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김일성장군 빨지산투쟁의 력사적 의의 歷史諸問題 2 朝鮮歷史
編纂委員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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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갑오농민전쟁의 성격과 그 력사적 의의 歷史諸問題 3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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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二十世紀初 朝鮮의 對外關係와 國內情形 歷史諸問題 4 朝鮮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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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朝鮮の民族ブルジョアジーの特質 朝鮮月報 4,5 195703,04 雑誌
李淸源 序文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04 単行本
李淸源 發行者序(序文은 중복) 朝鮮社會史讀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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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序文 朝鮮讀本-朝鮮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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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淸源 序に代へて 朝鮮歷史讀本 白揚社 193707 単行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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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미제의 조선 침략사 국립 출판사 19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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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저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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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조선 민족 부르죠아지의 특질 조선에 있어서 프로레타리아트의 헤게모니를 위한 투쟁 1955 単行本
Ли Чен Вон ; перевод с корейского под редакцией Сон Дин Фа 서문 Имдинс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 1592-98 г.г. Пхеньян : Типография издательства Новая Корея 19550128 単行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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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청원 조선은 왜 과거 일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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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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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에 대한 검열 처분 : 「内地出版物取締狀況」, 『出版警察報』 93, 1936.6.
  3.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에 대한 검열 처분 : 「差押其の他執行狀況」, 『出版警察報』 94, 1936.7.
  4. 일본의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 검열 흔적(홍종욱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감
  5. 조선의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 검열 흔적(연세대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감
  6. 『朝鮮社會史讀本』(白揚社, 1936)의 리쓰메이칸(立命館大學) 소장본 : 261~262쪽 잘려나간 부분을 손으로 다시 씀
  7. 일본 경찰이 이청원을 요주의·요시찰인물로 관리한 기록 : 「豊特高秘第1700號 要注意鮮人所在不明手配ノ件」(1932.6.24.)(長澤秀編, 『樺太警察部文書 戦前朝鮮人関係警察資料集Ⅰ』, 緑蔭書房, 2006)
  8. 이청원의 전향 기록 :「(十六)李靑垣事平昌秀吉の場合」, 『思想研究資料 特輯 第九十五号 左翼前歴者の転向問題に就て』, 司法省刑事局, 1943.8.(『社會問題資料叢書 第1輯』, 1972)
  9. 러시아 문서관 이청원 파일 : ① 이청원 사진1, ② 이청원 사진2, ③ 간부이력서, ④ 자서전 외 여러 문서 합철
  10.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과학원 력사연구소, 「서문」 『삼국 시기의 사회 경제 구성에 관한 토론집』, 과학원출판사, 1955. : 숙청 후 이청원 이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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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1. 임영태, 「북한의 권력과 역사학 북으로 간 맑스주의 역사학자와 사회경제학자들 - 김광진, 김석형, 김한주, 박문규, 박시형, 백남운, 이청원, 인정식, 전석담」, 『역사비평』 6, 역사비평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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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홍종욱, 「북한 역사학 형성에 소련 역사학이 미친 영향」, 『인문논총』 77(3),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2020.

주석


  1. 이극로의 생애 중 <출생과 성장>부터 <구미 시찰과 전국 일주>까지는 이극로의 자서전 『고투사십년』(을유문화사, 1947)의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를 기본 자료로 참고하였다. 해당 부분에서 인용 표시가 없는 문장은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에서 가져온 정보임을 밝혀둔다.
  2.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34쪽(Kolu Li, “Lebenslauf”).
  3. 차민기,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지역문학연구』 2, 1998, 9쪽. 이는 이종무의 인터뷰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종무는 이극로의 맏형 이상로(李祥魯)의 장손이며 배제학교 재학 당시 이극로의 집에서 수년 간 기거하였다고 한다. 차민기, 같은 책, 10쪽.
  4.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1912년 4월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정황상 1911년으로 추정된다는 지적도 있다. 차민기, 「고루 이극로 박사의 삶 연구」,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96쪽.
  5.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84쪽.
  6. 이극로가 진학할 당시의 교명은 ‘사립동제의공전문학교(私立同济医工专门学校)’였으며 이 학교는 독일 의사 에리히 파울룬(Erich Paulun)이 1907년 설립‧경영한 학교이다.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67쪽.
  7. 이극로, 「(三一運動의 追憶) 上海에서 留學生總務로」, 『朝光』 12-1, 1946.3.
  8.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68-69쪽.
  9.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28쪽.
  10.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가 말하고 있는 ‘서양어’란 독일어임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시기 이극로는 중국어와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였고 영어와 일본어에도 능통했다.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3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75-76쪽.
  11. 1945년까지 독일령 ‘슈테틴’이었으며 현재는 폴란드령 ‘슈체친’으로 부른다.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1쪽.
  12. 이극로,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1936.5, 148쪽.
  13. 이극로, 「中國上海의 大學生活:中國上海에서 留學하던 때와 그 뒤」, 『朝光』 2-5, 1936.5, 148쪽.
  14.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白林大學”(베를린대학)이라고 지칭한다. 이극로가 입학할 당시 교명은 프리드리히-빌헬름대학교(Friedrich-Wilhelms-Universität, 현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였다.
  15.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289쪽(Kolu Li, “Lebenslauf”);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0쪽.
  16.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쪽.
  17. 이극로, 「朝鮮語辭典과 朝鮮人」, 『別乾坤』 4-7, 1929.1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0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88-89쪽.
  18. 홍선표, 「1920년대 유럽에서의 한국독립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 27, 2006, 446-447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0쪽.
  19.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
  20.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8-154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1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쪽.
  21.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49쪽, 151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3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2-473쪽.
  22. 정용대 편, 『해외의 독립운동사료(1) 국제연맹편』, 국가보훈처, 1991, 166-196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38-34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4쪽.
  23.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한국인물사연구회, 2006, 341쪽(Kolu Li,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
  24. 이극로가 ‘세계약소대회’라고 회고하는 이 대회는 반제국침략주의대연맹이 개최한 ‘Kongresses gegen Koloniale unterdrückung und Imperialismus’(영문 공식 명칭은 International Congress against Colonial Oppression and Imperialism, 국제 반식민압제·제국주의 대회)이다.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151쪽.
  25.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1쪽.
  26. 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정규화, 『이미륵 박사 찾아 40년』, 범우, 2012, 71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에서 재인용.
  27. 이정은, 「이미륵과 한국의 문제」, 『한국독립운동사연구』 13, 1999, 237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
  28.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9쪽.
  29.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10-122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76-477쪽.
  30.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44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76쪽.
  31.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한국인물사연구』 5, 2006, 335쪽; 이극로, 조준희 옮김, 『고투사십년』, 아라, 2014, 8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147쪽;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68쪽(Li Kolu, “Aus dem Leben eines koreanischen Gelehrten,” Mitteilungen des Seminars für Orientalische Sprachen, Jg.30, Berlin : Ostasiatische Studien, 1927, pp. 99-110.).
  32.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倫敦大學 政治經濟學部”라고 지칭한다.
  33. 「해제: 1920년대 유럽에서 이극로의 조선어강좌와 민족운동」,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Ⅰ 유럽 편』, 소명출판, 2019, 483-484쪽.
  34.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0쪽, 307쪽.
  35.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1쪽. 1928년 5월 15일에 육성으로 녹음한 레코드(석지훈 발굴)는 프랑스 국립도서관 홈페이지에 남아 있다.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3m.media,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3m/f2.media, https://gallica.bnf.fr/ark:/12148/bpt6k1292527.media에서 청취 가능하며 이는 각각 Alphabet et sons du coréen (1), Sons du coréen (2), L'homme est dieu : extrait de Thyon-to-kyo-ri(조선 글씨와 조선 말소리(1), 조선 말소리(2), 인내천: 천도교리 발췌)이다. http://egloos.zum.com/veritasest/v/1964446; 조준희, 「고투 13년 : 『이극로 전집』 집필 회고와 유럽 정보」, 『근대서지』 20, 2019, 133-134쪽; 양효경, <"조선 글씨는 28자 올시다"…최초 한글 음성 자료>, MBC 뉴스 데스크, 2019.8.15. https://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452012_28802.html
  36. 공진항, 「잊지 못할 일 생각나는 사람들」, 『이상향을 찾아서』, 탁암공진항희수기념문집간행위원회, 1970, 603-604쪽.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96쪽에서 재인용.
  37. 김일성, 『세기와 더불어』 8, 조선로동당출판사, 1998, 401-402쪽;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4-115쪽.
  38. 『고투사십년』에서 이극로는 “倫敦大學”이라고 지칭한다.
  39.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16쪽.
  40.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120-132쪽.
  41. 박용규, 「자료소개 : 국어가 민족의 생명, 가장 시급한 문제(이극로 박사의 국문 강연문, 『신한민보』, 1928.8.30.)」, 『형태론』 13-1, 2011, 165-169쪽.
  42. 「玉에서틔골르기 縷心刻骨半生獻身, 한글標準語査定에는 으뜸되는殊勳者 朝鮮語辭典編纂에血汗勞心: 朝鮮語學會 李克魯氏」, 『조선일보』, 1937.1.1.
  43. 이극로,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63쪽.
  44. 한말연구학회 편, 『건재 정인승 전집 6 국어운동사』, 도서출판 박이정, 1997, 106-107쪽.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274쪽에서 재인용.
  45.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88-89쪽. 조선어사전편찬위원회는 1931년 1월 6일 위원회를 열어, 회장으로 이우식을 추대하고 위원을 확대하면서 편찬 사무를 실질적으로 개시하게 된다. 리의도, 같은 책, 151-152쪽.
  46. 동아일보는 조선어사전편찬회 발기인의 숫자를 108인으로 보도하였는데 나열한 명단은 107명이었다. 한글학회, 『한글학회 100년사』, 한글학회, 2009, 528쪽.
  47.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275쪽.
  48. 이극로, 「서약문을 교환하던 날」, 『조광』 5-7, 1939.7, 231-234쪽;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178-180쪽.
  49.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78쪽.
  50. 어휘의 수집‧풀이와 편집에 관한 일은 조선어사전편찬회가 맡고, 표준어의 조사‧선정과 철자법의 통일에 관한 일은 조선어연구회에서 맡기로 1930년 1월 6일 결정되었다. 1936년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의 업무를 조선어학회가 넘겨받아, 사전 편찬 사업의 주체가 조선어학회로 일원화되었다.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35쪽, 152쪽.
  51. 이극로,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4쪽.
  52. 이극로,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8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55쪽.
  53. 이극로,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54-62쪽.
  54.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 『한글』 3-10, 1935.12; 이극로, 「한글 발달에 대한 회고와 및 신전망」, 『조선중앙일보』, 1936.1.1.-1.4;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계획」, 『신동아』 6-1, 1936.1;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현상」, 『사해공론』 2-5, 1936.5; 이극로,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 『고투사십년』, 1947, 63-64쪽.
  55.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37쪽.
  56. 김윤경은 이극로가 개명하기를 주장하였다고 밝혔다. 김윤경, 「조선어학회 수난기」, 『한글』 11-1, 1946.4, 59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91쪽에서 재인용.
  57.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42쪽.
  58. 안석제 역,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6쪽.
  59. 『한글』은 1927년 2월부터 1928년 10월까지 ‘동인지’로 발간되었으며, 1932년 1월 9일 조선어학회는 ‘기관지’의 제호로 ‘한글’을 그대로 쓰기로 결정한다. 리의도, 『한글학회 110년의 역사』, 한글학회, 2019, 127쪽.
  60.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276쪽.
  61. 이극로, 「조선어사전과 조선인」, 『별건곤』 4-7, 1929.12; 이극로, 「한글운동」, 『신동아』 5-1, 1935.1;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 『한글』 3-10, 1935.12; 이극로, 「한글 발달에 대한 회고와 및 신전망」, 『조선중앙일보』, 1936.1.1.-1.4;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금후계획」, 『신동아』 6-1, 1936.1; 이극로, 「조선어문정리운동의 현상」, 『사해공론』 2-5, 1936.5; 이극로, 「어문정리와 출판업」, 『박문』 1, 1938.10 등.
  62. 홍종욱, 「이인(李仁)이 회고한 해방 전야」, 『애산학보』 44, 2017, 231쪽.
  63. 안석제 역,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78-79쪽.
  64. 홍종욱, 「이인(李仁)이 회고한 해방 전야」, 『애산학보』 44, 2017, 234-238쪽. 이인은 일본의 방해로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회고하였고, 조선어학회 사건 예심종결결정문에 따르면 이우식이 자금을 제공하기 곤란해졌기 때문에 계획이 좌절되었다고 한다. 홍종욱, 같은 글, 237쪽.
  65.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0쪽; 한정호, 「이극로의 ‘고투 40년’ 문학살이 연구 : 시가 작품을 중심으로」, 『영주어문』 30, 2015, 149쪽;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99쪽.
  66.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0-21쪽; 조준희, 「이극로의 「미지의 한국」과 「널리 펴는 말」」,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8, 2016, 376-379쪽.
  67. 안석제 역, 「조선어학회 사건 함흥지방법원 예심 종결서 일부」,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1쪽.
  68.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1-142쪽.
  69. 『한글』 11-1, 1946.4, 62-63쪽.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1쪽에서 재인용.
  70. 이극로, 「조선문화와 한글」, 『중앙신문』, 1945.11.1; 이극로, 「한자폐지에 대하여」, 『한글문화』 창간호, 1946.3; 「한자폐지의 가부」, 『조선일보』, 1947.4.2; 『동아일보』, 1945.12.17; 『자유신문』, 1945.12.22.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7-151쪽에서 재인용.
  71. 한글문화보급회, 『한글문화』 창간호, 1946.3, 10쪽; 이응호, 『미 군정기의 한글운동사』, 성청사, 1974, 208쪽. 정재환, 『한글의 시대를 열다 : 해방 후 한글학회 활동 연구』, 경인문화사, 2013, 43쪽에서 재인용.
  72.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6쪽;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02쪽; 박용규, 「일제시대 이극로의 민족운동 연구 - 한글운동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185쪽.
  73. 『한글』 1946.4, 66쪽; 이극로, 「한글 기념일과 한글노래- 한글을 배워서 건국에 헌신하자」, 『백민』 창간호, 백민문화사, 1945.12, 30쪽.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5쪽에서 재인용.
  74.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8쪽; 박용규, 「해방 후 한글운동에서의 이극로의 위상」, 『동양학』 45, 2009, 144쪽; 「연보」,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Ⅲ 고투사십년』, 소명출판, 2019, 209쪽.
  75. 유열, 「스승님의 걸어오신 길」,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87-88쪽.
  76. 조선건민회. 「성명서」, 1946.6.20; 박용규, 『북으로 간 한글운동가 : 이극로 평전』, 도서출판 차송, 2005, 236쪽.
  77. ‘머리 말’, ‘수륙 이십만리 주유기’, ‘길돈사건 진상 조사와 재만 동포 위문’, ‘조선어 학회와 나의 반생’으로 구성되어 있다.
  78. 1957년 전 6권으로 완간된다.
  79. 이극로가 북한에 잔류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제출되었다. 박지홍의 증언에 따르면 이극로는 북에 와서 사전을 편찬해달라는 김두봉의 편지를 받은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정재환, 「해방 후 조선어학회·한글학회 활동 연구(1945~1957년)」,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3, 37-39쪽.
  80. 이극로는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2기, 제3기, 제4기 대의원을 역임하였다.
  81. 이극로의 생애 중 <북한에서의 활동>은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311쪽의 연표를 기본 자료로 참고하였다.
  82. 고영근, 『통일시대의 어문문제』, 길벗, 1994, 95쪽; 이준식, 「지식인의 월북과 남북 국어학계의 재편 :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8, 2014, 15-16쪽.
  83. 이준식, 「지식인의 월북과 남북 국어학계의 재편 :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8, 2014, 16쪽.
  84. 이준식, 「지식인의 월북과 남북 국어학계의 재편 : 언어정책을 중심으로」, 『동방학지』 168, 2014, 16쪽.
  85. 리극로, 「창간사」, 『조선어 연구』 창간호, 1949.3, 3쪽.
  86.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287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43쪽.
  87.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288쪽;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44쪽.
  88. 「해제」, 조준희 엮음, 『이극로 전집 Ⅳ 북한 편』, 소명출판, 2019, 286쪽.
  89. 이극로, 「조선말 임자씨의 토(一)」, 『한글』 3-1, 1935.1, 156쪽.
  90.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4쪽.
  91. 고영근, 『역대한국문법의 통합적 연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113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5쪽.
  92.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51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5쪽.
  93.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7쪽.
  94.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7쪽.
  95.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84쪽.
  96.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5쪽.
  97. 조남호, 「이극로의 학문세계」,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62-163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6쪽. 이극로의 견해는 대체로 조선어학회와 일치하였지만, 이러한 주장은 조선어학회의 공식적 견해로 수용되지 못했다. 조남호, 같은 글, 163쪽.
  98. 조남호, 「이극로의 학문세계」,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59쪽; 고영근, 「이극로의 어학사상의 위치」,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276-277쪽.
  99. 이상억, 「이극로(1947), 『실험도해 조선어음성학』」 『주시경학보』 3, 1989; 서민정, 「주변부 국어학의 재발견을 위한 이극로 연구 – 국가어로서 ‘국어’ 형성에서 역할을 중심으로」, 『우리말연구』 25, 2009; 고영근, 「이극로의 사회사상과 어문운동」, 이극로박사기념사업회 편, 『이극로의 우리말글 연구와 민족운동』, 도서출판 선인, 2010.
  100. 이극로, 「머리말」, 『實驗 圖解 朝鮮語 音聲學』, 아문각, 1947.
  101. 広瀬貞三, 「李清源の政治活動と朝鮮史研究」, 『新潟国際情報大学情報文化学部紀要』 7, 2004.3, 38쪽.
  102. 「内地出版物取締狀況」, 『出版警察報』 92, 警保局圖書課, 1936.5., 136쪽.
  103. 「差押其の他執行狀況」, 『出版警察報』 93, 1936.6., 132·170쪽.
  104. 소련, 유럽, 코민테른의 민족에 대한 강조는 홍종욱, 「반파시즘 인민전선론과 사회주의 운동의 식민지적 길」, 『역사와현실』 118, 2020.12., 336~337쪽.
  105. 쓰루조노 유타카(鶴園裕)는 조선학운동을 일종의 ‘통일전선적 학문운동’으로 평가했다. 鶴園裕, 「近代朝鮮における国学の形成-「朝鮮学」を中心に」, 『朝鮮史研究会論文集』 35, 1997.10.
  106. 白南雲, 「朝鮮経済の現段階論」, 『改造』 1934.4., 69쪽.
  107. 임화, 「역사적 반성에의 요망」, 『조선중앙일보』 1935.7.4.-16.(『임화문학예술전집2 문학사』, 360쪽).
  108. 김남천, 「이광수 전집 간행의 사회적 의의」(1935.9.5.-9.7.)(정호웅·손정수 엮음, 『김남천 전집 Ⅰ』, 박이정, 2000, 127쪽).
  109. 「三宅城大教授の赤化運動事件」, 『思想彙報』 2, 1935.3., 37쪽.
  110. 일본 관헌은 이청원(李青垣), 송군찬(宋君瓚), 황병인(黄炳仁) 세 명의 공동 저작이라고 판단했다. 「朝鮮革命論」, 『思想彙報』 19, 1939.6.
  111. 서중석,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해방 후 민족국가 건설운동과 통일던선-』, 역사비평사, 1991, 158쪽.
  112. 李淸源, 『朝鮮社會史讀本』, 白揚社, 1936, 1~2쪽.
  113. 이청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亜日報』, 1937.11.2.~5.
  114. 이청원, 「朝鮮의 文化와 그 傳統(一)(二)(三)」, 『東亜日報』, 1937.11.2.~5.
  115. 蓮湖亭人, 「文化領域에 顯現되는 惡質的 諸流에 抗하야」, 『批判』, 1937.2., 112쪽. 조형열, 「1930년대 마르크스주의 지식인의 학술문화기관 구상과 “과학적(科學的) 조선학(朝鮮學)” 수립론」, 『역사학연구』 61, 2016.2., 1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