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3)

North Korea Humanities

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5년 2월 4일 (화) 14:54 판

진단학보 원고(Article) 목록으로 이동하기 XML 문서 다운받기

조선탑파의 연구(3)
Icon article.png
출처 :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6월
시작쪽 051쪽 종료쪽 095쪽 전체쪽 045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2. 典型的樣式成立以後의一般石塔樣式의變遷相


우리는 석조 탑파의 제1절 제1항에서 익산군 용화산 하 미륵사지에 있는 다층석탑 조선 석탑파로서의 최초의 시원형식을 이룬 유일한 유구로서 설명하였고, 같은 곳 왕궁면 왕궁리 속칭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 저 미륵탑의 모방적 재현 형식의 유구로서 건축적 구조특질보다도 조각적 응집 결태로서의 과도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으며, 부여읍 추정 정림사지에 있는 오중탑(속칭 평제탑)은 미륵탑의 건축적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다 더 완성태로의 발전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직접 계련 관계는 여하간에 양식적으로는 다른 시원적인 일례가 의성군 영니산 하 일명사지에 오중탑 일기가 있어 이것들이 경주 감은사지의 삼중탑 양기, 고선사지의 삼중탑, 나원리 일명사지의 오중탑, 충주 가금면 탑정리 일명사지의 칠중탑(속칭 중앙탑) 등에서 종합적으로 취합되어 그곳에 조선석탑으로서의 최초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이 있었다는 것을 제2항에서 설명하였고, 그리고 제3항에서 이 양대부류의 세대관을 말하여 미륵탑·왕궁평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통일 이전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을 통일 이후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 후 필자의 반성과 추구는 이상 논고 중 한 개의 모순을 발견케 되었으니 즉 그것은 왕궁평탑에 대한 의견이다. 무엇이냐 하면 왕궁평탑은 외형으로서는 제1부류 즉 시원적 양식부류에 유사시킬 수 있는 양식 감정을 충분히 가졌고 또 일부 옥개의 구조법 같은 데에서 정림탑과의 유사점이 있지만, 옥리층단형 「밭임」의 전반적으로 전자형 사분파의 평면을 이루는 의사는 이 제1부류에 속하는 기타 석탑들과는 공통성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제2부류의 전형적 탑파류들과 공통되는 것, 또 초층옥신 판석으로 구성하면서 우주 및 중간주의 형식을 편의적인 부조법에 의하였을 뿐더러 상하의 태세 변화, 즉 '엔터시스'의 정신이 없는 것─이러한 짤막한 양식적으로도 확실히 제2부류 하에 속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환언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이 왕궁평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과 같이 양식적으로 제1부류 즉 시원부류에 유사시킬 수 없는 동시에 시대적으로도 그러한 유류들과 함께 신라 통일 이전, 즉 삼국기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 통일 후 즉 저 전형적 탑파들이라 지칭한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들과 함께 유사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문제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형적 탑파들은 이미 전절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초층옥신들의 구조수법에 있어 사개우주가 이미 「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별개의 장석으로써 독립되게 구성되고, 그리고 벽면의 면석만은 또다시 다른 석편으로써 구성하고 있음에서(단 나원리탑만은 각 면 일매판석으로써 성립시키고 일우일주를 모각하게 됨) 그 사실적 진실미를 갖고 있는 터인데, 왕궁평탑에는 이러한 진실미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초층옥신벽면에 한 간주를 나타낸 것도 혹시 저 정림탑·중앙탑 등의 초층옥신에서 볼 수 있는 이간구분 재현을 위해 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그러한 의사에서의 표현 양식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우졸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영니산 하오중탑이 이층 이상의 곡신부터 이간벽을 나타낸 무의미성보다도 더 심한 무의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미성의 졸렬한 실례는 성주읍동 의공사(일운 동방사)지에도 일기(현존 팔중)가 있지만, 시대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여하간, 이상의 이유에서 왕궁평탑을 양식사적 견지에서는 제1기의 시원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고, 제2기의 전형적 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초층옥신만은 후대의 수보였다면 나머지 상층 부분은 제2기의 유형 속에 편입시켜도 좋을 가능성이 많으나, 그렇지 않고 이 초층옥신이 원상대로라 하면 이 탑은 여전히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2기의 부류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탑파 자신의 이러한 양식적 문제를 떠나서 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한 개의 참고자료로서의 와당 같은 것을 부차적으로 상고한다면, 그 와당문양은 이미 관계야 박사도 지칭한 바와 같이 신라 통일 초의 것이라는 것과 공통되는 특질을 가졌고, 또 나의 소견으로는 충주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와당과도 공통되는 시대성을 보이는 점이 있음에서, 이 와당을 통하여 볼 때 저 중앙탑이라는 것과 이 왕궁평탑이라는 것과가 위치적으로 공통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러한 점을 통해서나 왕궁평탑이 겨우 제2기의 탑파부류들에 끼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뿐, 양식적으로는 위태위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제1기 석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삼기에 한정되고 만다. 즉 그 삼기만이 통일 이전의 작품인 것이다. 미륵탑은 손상이 심한 것이지만 정림탑, 영니산하탑은 당풍이 아직 보이지 않은 즉 육조 기풍이 명백히 보이는 탑이라 하겠다. 적어도 수풍까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51우리는 石造 塔婆의 第一節 第一項에서 益山郡 龍華山 下 彌勒寺址에 있는 多層石塔 朝鮮石塔婆로서의 最初의 始源形式을 이룬 唯一한 遺構로써 說明하였고 同地 王宮面 王宮里 俗稱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 저 彌勒塔의 模倣的 再現 形式의 遺構로서 建築的 構造特質보다도 彫刻的 凝集 結態로서의 過渡 傾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說明하였으며, 扶餘邑 推定 定林寺址에 있는 五重塔 (俗稱 平濟塔)은 彌勒塔의 建築的 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야 보다 더 完成態로의 發展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直接 係聯關係는 如何間에 樣式的으론 다른 始源的인 一例가 義城郡 盈尼山 下 逸名寺址에 五重塔 一基가 있어 이것들이 慶州 感恩寺址의 三重塔 兩基, 高仙寺址의 三重塔, 羅原里 逸名寺址의 五重塔, 忠州 可金面塔亭▶P52里 逸名寺址의 七重塔(俗稱 中央塔) 等에서 綜合 聚成되야 그곳에 朝鮮石塔으로서의 最初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있었다는 것을 第二項에서 說明하였고 그리고 第三項에서 이 兩大部類의 世代觀을 말하야 彌勒塔·王宮坪塔·定林塔·盈尼山下塔 統一以前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을 統一 以後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後─ 筆者의 反省과 追究는 以上 論考 中 한 개의 矛盾을 發見케 되었으니 即 그것은 王宮坪塔에 대한 意見이다. 무엇이냐 하면 王宮坪塔은 外樣으로선 第一部類 即 始源的 樣式部類에 類聚될 수 있는 樣式 感情을 充分히 가졌고 또 一部 屋蓋의 構造法같은데 定林塔과의 類似點이 있지만 屋裏層段形「밭임」의 全般的으로 田字形四分派의 平面을 이루는 意思는 이 第一部類에 屬하는 諸他石塔에는 共通性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第二部類의 典型的 塔婆類들에 共通되는 것, 또 初層屋身 板石으로써 構成하면서 隅柱及 中間柱의 形式을 便宜的인 浮彫法에 依하였을 뿐더러 上下의 太細의 變化, 即「엔터시스」의 精神이 없는 것─이러한 짧은 樣式的으로도 確實히 第二部類의 下에 屬할 것임을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換言하면 이러한 理由에서 이 王宮坪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等과 같이 樣式的으로 第一部類 即 始源部類에 類聚시킬 수 없는 同時에 時代的으로도 그러한 類들과 함께 新羅統一 以前, 即 三國期에 둘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新羅統一後 即 저 典型的 塔婆들이라 指稱한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들과 함께 類聚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問題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典型的 塔婆들은 이▶P53미 前節에서도 說明한 바와 같이 그 初層屋身들의 構造手法에 있어 四個隅柱가 이미「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別個의 長石으로써 獨立되히 構成되고 그리고 壁面의 面石만은 또 다시 다른 石片으토써 構成하고 있음에서(但羅源里塔만은各面一枚板石으로써 成立시키고 一隅一柱를 模刻하게됨) 그 寫實的 眞實味를 갖고 있는 터인데, 王宮坪에는 이러한 眞實珠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初層屋身壁面에 한 間柱를 나타낸 것도 或欺 저 定林塔·中央塔 等의 初層屋身에서 볼 수 있는 二間區分 再現키 爲한 것이였었는지 알 수 없지만 萬一 그러한 意思에서의 表現 樣式이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愚拙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盈尼山 下五重塔이 二層 以上의 屈身부터 二間壁을 나타낸 無意味性보다도 더 甚한 無意味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無意味性의 拙劣한 實例는 원문주1▶星州邑東 醫公寺(一云 東方寺)址에도 一基(現存 八重)가[1] 있지만 時代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何如間, 以上 理由에서 王宮坪塔을 樣式史的 見地에선 第一期의 始源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킬 수 없고 第二期의 典型的 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키기 困難한 것이다. 차라리 初層屋身만은 後代의 修補였다면 나머지 上層 部分은 第二期의 類型 속에 編시켜도 좋을 可能性이 많은데 그렇지 않고 이 初層屋身이 原狀대로라 하면 이 塔은 依然히 救할 수 없는 것이다. 即 第二期의 部類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못 塔婆 自身의 이러한 樣式的 問題를 떠나서 그 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한 개의 參考資料로서의 瓦當같은 것을 副次的으로 商量한다면 그 瓦當紋儀는 이미 關野貞 博士도 指稱한 바와 같이 新羅統一初의 것이라는 것과 共通되는 特質을 가졌고 또 나의 所見으로선 忠州 中央塔附近에서 ▶P54-1發見되었다는 瓦當과도 共通되는 時代性을 보이는 點이 있음에서 이 瓦當을 通하야 볼제는 저 中央塔이란 것과 이 王宮坪塔이란 것과가 位次的으로 共通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即 이러한 點을 하여서나 $宮坪堵이 겨우 第二期의 堵婆部類들에 끼워질수 있는 可能性이 생기게될뿐, 樣式的론 危殆危殆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朝鮮의 第一期石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三基에 限定되고 만다. 即 其三基만이 統一 以前의 作品인 것이다. 彌勒塔은 損傷이 甚한 것이지만 定林塔, 盈尼山下塔 唐風이 아직 보이지 않은 即 六朝 氣風이 明白히 보이는 塔이라 하겠다. 적어도 隨風까지는 充分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전절 제2항에서는 전형적 탑파로서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을 열거하여 양식사적 순차를 정해 보았으나 확실한 단안을 내리지 못한 점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양식적으로 그 사탑이 거의 동일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 후의 상고에 의하면, 위은탑을 제1위, 고선탑을 제2위, 중앙탑을 제3위, 나원리탑을 제4위에 둘까 한다. 그 이유로선 우선 고선탑이 양식적으로 감은탑과 전혀 동일하나 옥개 기타에 다소 축소된 의사와 기단상 대복석에 다소 간소화된 수법과 초층탑신에 수식 의사의 가미 등이 있어 이러한 점에서 이것을 감은탑 다음에 두겠고, 중앙탑은 부분적으로는 고의(古意)를 다소 남긴 점도 있으나, 다시 또 부분적으로 신의(新意)에 속하는 것도 있어(예를 들어,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 점은 신의라 할 수 있다) 고의는 옛것 외 잔재로 볼 수 있어 하한이 미정되는 것이나, 신의는 그 상한에 제한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고선탑 하위에 둘 수 있겠고, 나원리탑은 초층옥신에 벌써 사매판석으로써 결구하는 동시에 그 일우에 우주를 표현하려는 의사와 제3층 이상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제2층, 제1층 옥개는 옥개와 옥개밭임이 별석이다) 의사가 있어 이러한 점에서 최하위에 두는 바이다. 시대로 말하면 이 유형의 양식 상안을 감은탑에 두었으므로 이 유형은 모두 문무왕대 이후가 된다. 연대로 말하면 문무왕 8년(즉 신라 통일 원년 서기 668년) 이후이나 각 탑파의 개별적 건립 연수란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필자는 이 사탑을 조선 석탑의 전형적 탑파라 지칭하는 동시에 조선 석탑파사상 제2기에 속하는 것이요, 신라 역사상 중대 전기에 속하는 탑파라 간주한다. 중대 전기라는 것은 정치사적으로 말한다면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신라사의 세대 구분에 있어 《신라본기》가 말하는 진덕왕까지의 성골 시대를 고기라 하고, 무열왕 이후 경순왕까지 진골 시대 중 혜공왕대까지를 중대라 한 구분법에 의하여,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중대 일대, 필자는 또다시 성덕왕대까지 구분하여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중대 전기, 효성왕부터 혜공왕대까지를 중대 후기라 함에 의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전에 말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들의 통일 이전의 작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신라 중대 전기란 것과 시대적으로는 상호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사실 말이지, 무열왕 일대는 물론이요 문무왕 8년까지도 통일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즉 삼국기의 잔존이 여전히 계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삼국 말기의 작품이라 할 때 신라사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이 신라 중대에도 걸쳐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미륵탑·정림탑은 백제 복멸 이전에 속할 것임으로 그 하한이 서기 661년 전까지 되나, 이것도 신라사적으로 보면 신라 중대에 걸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신라 영역 내에 있어 세년이 불확실한 채 저 미륵탑·정림탑 간에 개재할 수 있는 영니산하탑이 시대적으로 이 신라 중대에 속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 점에서 미륵탑·정림탑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백제탑이니), 영니산하탑만 신라사적으로 보아 신라 중대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즉 무열왕 이후이다. 그러나 확실히 저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구별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들을 통일 이후 작이라면, 영니산하탑은 통일 이전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감은탑의 상한이 반드시 문무왕 8, 9년 즉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대, 실제 연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문무왕 8, 9년 이후까지도, 즉 감은탑의 상한이 내려가는 대로 그 하한이 따라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충분히 신라 중기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일 이전에 간단히 두어버린 것은 감은탑 이하 제탑과 명료한 구획을 보이기 위한 한 양식사적 처분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이곳에 제1기(시원양식들) 작품이란 것이 신라사적 견지에 있어서는 실제 연대적으로는 중대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감은탑 이하 제탑과 실제 연대로서 중복되는 것이 아니요, 여전히 구분되면서 중대라는데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양식사적 세대라는 것과 역사에서 말하는 실제 세대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다소 의미가 다른 세대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원적 양식이라는 제1기의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이 전형적 탑파라 할 제2기의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함께 세대적으로는 신라 중대 전기에 합쳐질 수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매우 논술에 있어 혼란될 혐의가 있음으로, 편의적 도식적으로나마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을 통일 이전의 제1기의 탑파라 하고, 감은탑 이하 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 등을 제2기 탑파─세대적으로는 중대 전기의 탑파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이 이러한 세대 문제를 내거는 것은 탑파의 세대적 동향이란 것을 살피기 위한 것임이 주견의 하나인 까닭이다.
쪽수▶P54-2다시 前節 第二項에서는 典型的 塔婆로서 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을 列舉하야 樣式史的 順次를 定해 보았으나 確實한 斷案을 내리지 못한 點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樣式的으로 그 四塔이 거의 等一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後의 商考에 依하면, 威恩塔을 第一位, 高仙塔을 第二位, 中央塔을 第三位, 羅原里塔을 第四位에 둘까한다. 그 理由로선 爲先 高仙塔이 樣式的으로 感恩塔과 全혀 同一하나 屋蓋 其他에 多少 疑縮된 意思와 基壇上 臺覆石에 多少 簡化된 手法과 初層塔身에 修飾 意思의 加味 等이 있어 이러한 點에서 이것을 感恩塔 다음에 두겠고 中央塔은 部分的으론 古意를 多少 남긴 點도 있으나 다시 또 部分的으로 新意에 屬하는 것도 있어(例如, 屋蓋와 屋蓋「밭임」과가 一石으로 되는 點은 新意라 할 수 있다) 古意는 옛것 외 殘滓로 볼 수 있어 下限이 未定되는 것이나 新意는 그 上限에 制限이 있는 것인즉 이러한 點에서 高仙▶P55塔 下位에 둘 수 있겠고 羅原里塔 初層屋身에 벌써 四枚板石으로써 結構하는 同時에 그 一隅에 隅柱를 表現하려는 意思와 第三層 以上 屋蓋와 屋蓋「밭임」이 一石으로 되는(第二, 第一 屋蓋는 屋蓋와 屋蓋밭임이 別石이다) 意思가 있어 이러한 點에서 最下位에 두는 바이다. 時代로 말하면 이 類型의 樣式 上眼을 感恩塔에 두었은즉 이 類型은 모두 文武王代 以後가 된다. 年代로 말하면 文武王 8年(即 新羅 통統一年 西紀 668年)以後이나 各其 塔婆의 個別的 建立 年數란 勿論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筆者는 이 四塔을 朝鮮 石塔의 典型的 塔婆라 指稱하는 同時에 朝鮮 石塔婆史上 第二期에 屬하는 것이요 新羅 歷史上 中代前期에 屬하는 塔婆라 看做한다. 中代前期라는 것은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러 聖德王代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新羅史의 世代區分에 있어 新羅本紀가 말하는 眞德王까지의 聖骨 時代를 古期라 하고 武烈王 以後 敬順王까지 眞骨 時代 中 惠恭王代까지를 中代라한 區分法에 依하야 武烈王부터 惠恭王까지의 中代一代 筆者는 또다시 聖德王代까지 區分하야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를 中代前期, 孝成王부터 惠恭王代까지를 中代後期 라 함에 依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前에 말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들의 統一 以前의 作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新羅 中代 前期란 것과 時代的으론 相覆되는 部分이 생긴다. 事實말이지 武烈王 一代는 勿論이요 文武王 8年까지도 統一은 完成된 것이 아니다. 即 三國期의 殘存이 依然히 繼續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을 三國末期의 作品이라할 때 新羅史的으론 依然히 그것이 新羅中代에도 걸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못 彌勒塔·定林塔은 百濟 覆滅 以前에 屬할 것임으로 그 下限▶P56이 西紀 661年 前까지 되나 이것도 新羅史的으로 보면 新羅 中代에 걸칠 可能性도 있는 것이다. 况新羅 領域 內에 있어 歲年이 不確實한채 저 彌勒塔·定林塔 間에 介在할 수 있는 盈尼山下塔이 時代的으로 이 新羅 中代에 屬하지말란 法이 없다. 이 點에서 彌勒塔·定林塔은 別 問題로 하더라도(百濟塔이니) 盈尼山下塔만 新羅史的으로 보아 新羅中代에 編入시킬 수도 있다. 即 武烈王 以後이다. 그러나 確實히 저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區別을 세우기 爲하야 그것들을 統一 以後 作이라면 盈尼山下塔 統一以前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感恩塔의 上限이 반드시 文武王 8, 9年 即後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댄 實際 年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文武王 8, 9年 以後까지도 即 感恩塔의 上限이 내려가는대로 그下限이 쫓아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야 時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充分히 新羅中期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統一以前에 簡便히 두어버린 것은 感恩塔 以下 〿 諸塔과 明瞭한 區劃을 보이기 爲한 한 樣式史的 處分手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第一期(始原樣式들) 作品이란 것이 新羅史的 見地에 있어선 實際 年代的으론 中代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同時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感恩塔 以下 諸塔과 實際 年代로선 重覆되는 것이 아니요 依然히 區分되면서 中代라는데 包含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樣式史的 世代라는 것과 歷史에서 말하는 實際 世代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多少 意味가 다른 世代라는 것이 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始源的 樣式이라는 第一期의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이 典型的 塔婆라 할 第二期의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함끠 世代的으론 新羅 中代 前期에 合쳐질 수도 있는 것인 ▶P57-1이렇게 되면 매우 論述에 있어 混亂될 嫌이 있음으로 해서 便宜的 圖式的이나마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 統一 以前의 第一期의 塔婆라 하고 感恩塔 以下 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 等율 第二期 塔婆─ 世代的으론 中代前期의 塔婆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하여 이러한 世代 問題를 내거는 것은 塔婆糾 世代的 動向이란 것을 살피기 爲한 것임이 主見의 하나인 까닭이다.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 등 전형적 탑파라 말하고 조선석탑파사상 제2기를 형성하는 탑파라 말하며, 세대적으로는 문무왕 때부터 성덕왕대까지의 중대 전기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탑이 전고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일, 기단이 중층기단으로서 하층은 저평광대하고 상층은 고대포후하되 상대복석에는 초층옥신을 받기 위한 '괴임'이 중단으로 되어 있고, 상대복석에는 상대중석을 받기 위한 방각과 반호형 '몰딩'이 있으며, 중대석에는 상대에 일면사개의 영주, 하대중석에는 일면오개의 영주가 있으며
이일, 초층옥신은 사개우주가 별석이며 사개벽면석이 별석이며(나원리탑은 이미 과도성을 보임)
삼일, 옥석헌미는 수평이요 상부 낙수면은 아무런 층절이 없는 경사면이요 사주형옥면의 사우간각면엔 우동 형식의 조의도 없고, 상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옥상에 상단의 「괴임」이 있고 옥리에는 하등 조각이 없을 뿐더러 옥석 「밭임」이란 것이 정연히 오층단형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중대 전기에 한정시킨 것은 이미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양식적 상안 이를 감은탑이 문무왕대로 비롯하여 신문왕 초년까지에 완성된 사실에서 시작하여 고선·중앙·나원리 등 제탑이 양식적으로 거의 동류된 데서 같은 세대에 둔 것이지만, 그 하한을 하필 성덕왕대까지 결정한 것은 사료적으로는 확실한 근거가 없으되, 이 사탑은 기풍상 성당의 기풍이 농후할 뿐더러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된 와당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이 중대 전기로서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양식의 일단 저하된 제작들이 대개는 차대 즉 중대 후기(효성왕대부터 혜공왕대까지)에 많이 귀속되어지는 점에서 한 개의 도식적 분류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중대 후기에 귀속되는 조선석탑으로서의 제3기에 속할 양식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쪽수▶P57-2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 等 典型的 塔婆라 말하고 朝鮮石塔婆史 上 第二期를 形成하는 塔婆라 말하고 世代的으론 文武王때부터 聖德王代까지의 中代前期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塔이 前稿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一日, 基壇이 重層基壇으로서 下層은 底平廣大하고 上層은 高大鋪厚하되 上臺覆石에는 初層屋身을 받기 爲한「괴임」이 重段으로 되어있고 上臺覆石에는 上臺中石을 받기 爲한 方角과 半弧形 「몰딩」이 있으며 中臺石에는 上臺에 一面四個 檸柱, 下臺中石에는 一面五個의 檸柱가 있으며
二日, 初層屋身은 四個隅柱가 別石이며 四個壁面石이 別石이며(羅原里塔은 이미 過渡性을 보임)
三日, 屋石軒尾는 水平이요 上部 落水面은 아무런 層節이 없는 傾斜面이요 四注形屋面의 四隅桿角面엔 隅棟 形式의 彫意도 없고 上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屋上에 上段의「괴임」이 있고 屋裏에는 何等 彫刻이 없을 뿐더러 屋石「밭임」이란 것이 整然히 五層段形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點

等에서 共通性을 갖고있다. 이것을 中代前期에 限定시킨 것은 이미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樣式的 ▶P58上眼 이를 感恩塔이 文武王代로 비롯하여 神文王 初年까지에 完成된 史實에서 시작하여 高仙·中央·羅原里 等 諸塔이 樣式的으로 거의 等類된 데서 같은 世代에 둔 것이지만 그 下限을 何必 聖德王代까지 決定한 것은 史料的으론 確實한 憑據가 없으되 이 四塔은 氣風上 盛唐의 氣風이 濃厚할 뿐더러 中央塔附近에서 發見된 瓦當같은 것이 一般히 이 中代前期로서의 特色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樣式의 一段 低下된 諸作들이 대개는 次代 即 中代後期(孝成王代부터 惠恭王代까지)에 많이 歸屬되어지는 點에서 한 개의 圖式的 分類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中代 後期에 歸屬되는 朝鮮石塔으로서의 第三期에 所屬될 樣式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본문1-1: 2-1. 第三期的作品들


제 3기의 작품들이란 양식적으론 제 2기의 작품들과 대동소이한 것이다. 즉 기단 중, 하대중석면의 탱주가 일반적으로 5개에서 4개로 왜축되었고 옥신과 옥석이 모두 일석(一石)으로 응정되었고 일반히 규모가 줄어든 것 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실례를 들면 이와 같다.

경주군 양북면 장항리일명사지 오중탑쌍기(서탑 재건)
②동 내동면 불국사 석가삼중탑
③동 장수사지 삼중탑
④동 황복사지 삼중탑
⑤동 남산리일명사지 삼중탑쌍기(도파)
⑥동 천군리일명사지 삼중탑쌍기(재건)
⑦동 남산리옥정곡사지 삼중탑(도파)
⑧동 경주면 삼중탑쌍기(도파)
⑨동 외동면 원원사지 삼중탑쌍기(재건)
⑩동 서면 명장리일명사지 삼중탑
⑪창녕군창녕면 술정리동부일명사지 삼중탑
⑫금천군남면 폐갈항사 삼중탑쌍기(금재경성)

쪽수▶P58-2第三期的 作品들이란 樣式的으론 第二期的 作品들과 大同小異한 것이다. 即 基壇 中, 下臺中石面의 撑柱가 一般的으로 五個에서 四個로 矮縮되었고 屋身과 屋石이 모두 一石으로 凝精되었고 一般히 規模가 矮少된 것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實例를 들면 如左하다.

①慶州郡陽北面 獐項里逸名寺址 五重塔雙基(西塔再建)
②同 內東面 佛國寺 釋迦三重塔
③同 長壽寺址 三重塔
④同 皇福寺址 三重塔
▶P59-1⑤同 南山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倒破)
⑥同 千軍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再建)
⑦同 南山里玉井谷寺址 三重塔(倒破)
⑧同 慶州面 三重塔雙基(倒破)
⑨同 外東面 遠願寺址 三重塔雙基(再建)
⑩同 西面 明莊里逸名寺址 三重塔
⑪昌寧郡昌寧面 述亭里東部逸名寺址 三重塔
⑫金泉郡南面 廢葛項寺 三重塔雙基(今在京城)

이상, 여러 탑 이름 외면의 조식 유무, 오중삼중의 차별, 기세의 강약의 차도 등을 별문제로 하면, 탑파로서의 양식은 전혀 한 개의 유형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여러 탑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첫째, 그 유형들이 지방적으로 경상도 일대에만 한정되어 있고, 특히 또 경주가 중심이 되어 있다는 점에서 커다란 한 의미를 느낀다. 즉, 제2기의 탑파가 역시 그러하여 사탑 중 삼탑이 경주를 중심으로 있었고, 일탑만이 중원경 충주에 있었다. 제1기의 탑은 두 기가 외성, 즉 백제 국경 내에 있었고, 한 기만이 신라 국령 내에 있으나 도심을 떠난 의성군에 가 있었다. 의성에서 어찌하여 고고한 최초의 한 석탑 양식이 이와 같이 발생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외부에서 발생된 한 양식이 제2기로 들면서 신라 통일 후 신라의 도심 지대로 집중되어, 제3기의 양식까지 저와 같이 경도 중심으로 발전된 것임을 볼 때, 당대의 문화가 또한 이 제2기, 제3기를 중심으로 경주를 중심으로 익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3기 작품에 이르러 벌써 석탑이 건축으로서의 활발한 건축적 정신보다도 수식적인 것으로의 급격한 변천을 보인다. 즉, 현대문주10▶ 장항리 일명사지[a 1]의 오중탑에는 초층 옥신 각 면에 문비 모양이 모각되었을 뿐더러, 우주와 문선 사이에 추경한 인왕 양상이 연화좌 위에 활약적인 태세로 부각되어 있다. 초층 옥신에 이와 같이 사방 문호를 만드는 것은 본디 목조 탑의 의사로서, 그것은 내부 실내에 통하는 의사였다. 저 분황사의 탑에서도 그 퇴화된 형식이나마 사방 감실의 경영이 있음을 보았고, 제1기 석탑의 미륵탑에서도 그 의사를 보았으며, 영니산 하탑, 안동 법림사지, 법흥사지, 일직면 일명사지 등의 모전탑·박탑 등에서도 그 일면적인 감실 경영을 보았고, 제2기에 들어서 고선탑 같은 곳에서도 사방의 문호 양식의 모각이 있음을 본 바이다. 고선탑에서의 문호 양식의 모각은 특히 우수한 것이어서 문주, 문미, 문한, 각치의 표현은 물론이요, 문선의 수문포수의 모각도 화려하며, 문선에는 부석금초를 박았던 공혈까지 남아 있다. 또 문호 양측에 인왕상을 돌각한 예도 일찍이 분황탑에서 그 예를 본 바이다. 다만 후대까지도 인왕상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모두 자연 암석 위에 질타노호의 형상을 하고 있는 표현을 취하고 있는데, 유독 장항리탑에서는 인왕상을 연화좌 위에 올려 앉혀 있다. 이것은 특수한 예이니 지도론에는 「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梵天王坐蓮(○○○○○) ▶P61華上是故(●●●●)諸佛隨世俗故(●●●●●●) 於寶華上結跏趺坐(●●●●●●●●) 운운이라 있고 대일경소에는 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若是佛(○○○) 謂當作八葉芬陀利(○○○○○○○) 白蓮華也(○○○○) 其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 令花半敷(○○○○) 勿令極開也(○○○○○) 若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 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이라 있어 인왕도 본래는 보살 마하살이니까 연화좌에 올림이 당연할 것 같으되, 그것은 본신의 보살상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변신하여불법 수호의 일신장(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형상으로 표현되었을 적엔 일반적으로 반석 거암에 올리는 것이 통식이다. 즉, 장항리탑에서의 예는 한 개의 특수한 실례인데, 어느 사이엔가 일반적인 제2기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삼왕 조각이 초층 탑신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장항탑과 함께 제3기 작품 중에 유집되어 있는 원원사지 삼중탑 쌍기에는 초층 옥신 사면에 장구형 방곽을 만들고서 그 안에 사천왕(동방 지국천, 남방 증장천, 서방 광목천, 북방 다문천)을 부각하고, 기단 상층 중대석 면석부에는 연화좌에 십이지상을 부각하였다. 사천왕은 제석천의 외장이며, 십이지상은 약사불의 십이신장과 배합되는 것들이다. 사천왕은 순전히 중국식으로 말하면 사방신이요, 십이지는 십이시신인 동시에 방위신인 것이다. 즉, 중국적 사상으로서만 해석한다면, 그것은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의 비호 관념의 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불설에 의한 사천왕은 육욕천(첫째 사왕천, 둘째 도리천, 셋째 야마천, 넷째 도솔천, 다섯째 낙변화천, 여섯째 타화자재천) 중 첫 번째 하늘인 사천왕에 속하는 천왕들이요, 제석천은 두 번째 하늘인 도리천(일명 삼십삼천)을 주재하는 천제로서, 도리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있는 세계이며, 사왕천은 수미산 중턱에 있는 세계로서, 다 같이 제석이 영도하고 있는 지거천의 세계이다. 이 이상, 세 번째 하늘부터 여섯 번째 하늘까지는 공거천으로서 지거천과 구별되는 세계이니 문제 밖이며, 삼십삼천에 군림한 석가모니의 천제석은 저 사면의 사천왕을 영솔하고 있는데, 이 사천왕은 다시 또 각각 팔대천왕을 영솔하고 있다. 동시에 사천왕은 팔부귀중을 영솔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사천왕의 영도 아래 삼보옹호의 수호장령으로 이용되는 것은 이 팔부귀중들이다. 다음에 말할 제4기 작품들 이하, 시대적으로는 신라 하대에서부터, 조형적으로는 이 팔부중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팔부중의 표현 의지만은 제3기 작품인 불국사 석가삼중탑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다고 하여도 가하다. 즉, 탑파 그 자체에는 아무런 표현이 없지만, 탑파 외위를 둘러 여덟 개의 연화좌가 있는 방구결계가 그것이다. 여덟 개의 연화좌에 관하여는 믿을 만한 사료가 없으나, 불국사 역대기 (혹은 불국사 고금창기)에 보면, 동쪽 다보탑, 서쪽 석가탑(일명 무영탑)이란 다음에 ‘팔방금강좌’란 것이 있어, 이 ‘팔방금강좌’라는 것이 혹 이 팔방연화좌를 두고 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금강좌라는 것은 지도론에 「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 운운이라 있어, 보살 좌처이니만큼 불국사 삼중탑에서의 연화팔좌를 곧 팔부중의 좌처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이 특별한 팔방금강좌의 경영은 곧 탑파에 팔부중을 표현하는 의사의 선구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즉, 불국사 삼중탑에서의 이 팔좌는 실제로도 팔부보살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던 것인지, 또는 좌석만 만들고 상의적으로 그곳에 팔부보살이 공양하며 좌한 의사를 담았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현대문주2▶어쨌든 탑파 그것 이외에 수호의 보살 내지 천왕신장들을 이와 같이 첨부시키려는 의사가 일반적으로 구체화했던 사실만은 알 수 있다. [a 2] 저 안동 법흥사지 칠중박탑의 기단면에도 부장좌상이 부각되어 있는 예를 말한 적이 있다. 그 세대는 물론 이 중대에 속하는 것이나, 제2기 작품들과 같이 전기에 귀속시킬 것인지(그 편의 가능성이 많다고 필자는 생각하지만), 또는 후기, 즉 이 제3기와 등대에 둘 것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든 그곳에도 이미 신장을 탑파 기단에 표현시켰다. 다만 그것은 퇴화가 심하여 본래 몇 개의 신장을 표현한 것인지(현재는 매우 산란되어 있음), 따라서 신장의 성질도 불분명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것을 표현하려는 의사가 이 중대 후기를 중심하여 그 전후에 현저해진 특색만은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 팔부중에 대하여는 다시 후에 말하기로 하고, 앞서 서술한 사천왕은 물론 중국식 사방신에 통하는 의사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불교적인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은 형상 그 자체가 벌써 보여주는 바이다. 그러나 십이지상이 십이수신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에서는 불교적인 것보다도 중국적인 시신관념에 더 큰 영향을 받은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당대에 있어서는 이 수신관념은 본디 중국적인 순수한 관념에서보다는 일반적으로 불교적인 것과 혼합되었던 것으로 필자는 생각하는 바이다. 이는 단순히 당대로부터 현저히 농후해진 동양의 풍수관념이란 것이 전설이 전하는 바와 같이 도선선사(통일 후 161년생, 향년 72세)로 말미암아 일행선사(개원 15년 입멸, 통일 후 61년) 법이 유전된 것이라 함에서뿐만 아니라, 십이지 초상의 표현이 신라에서 조형적으로 유행된 것이 단순히 분묘 관계에서뿐 아니라 불찰 관계에서도 유행되기 시작한 점에서 곧 불가적 해석과의 혼합을 생각하게 하는 바라고 하겠다. 십이지 초상이 분묘 관계에 표현되기는 신라의 전칭 성덕왕릉(전칭 모모 왕릉 내지 묘로 지칭되는 것은 실제 그들의 능묘라고 곧 인정할 근거들이 충분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현대문주3▶고증이 필요한 것이요 [a 3] 지금은 다만 일시적 가칭호로서 거용할 따름이다.)의 병석외호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사지의 예로는 황복사지, 내동면 배반리 일명사지, 외동면 말방리 동곡사지 및 구례 화엄사 오중탑에서 발견된 예가 있으며, 불등에는 경주 읍내 최영진 씨 사저 내에 있는 석등 같은 곳에서도 볼 수 있어, 일반적으로 불교 관계에도 성행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뜻에서 필자는 신라 능묘에서의 십이지상은 단순히 중국적인 풍수관념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며 현대문주2▶거기에는 약사불에 대한 두터운 신앙과의 혼여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 [a 4] 경덕왕 14년 을미(통일 후 89년), 분황사의 삼십만 육천칠백 근 약사상의 주조는 가장 유명한 사실이지만, 현재 신라불로서 우수한 작품 중에 이 약사상이 많음을 볼 때, 약사 신앙이 신라에, 특히 이 중대에 얼마나 성했는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인연한 십이지상의 표현 욕구의 발달에 대하여는 각별한 관심이 가는 것이다. 전칭 성덕왕릉의 십이지상이 신라 능묘에 나타난 십이지상 중에서 가장 최초의 것에 속하는데, 그것이 전칭대로 실제 성덕왕릉이라 하더라도 실질적인 조성은 성덕왕이 훙서한 후에 이루어졌을 것이므로, 이렇게 본다면 십이지상의 표현은 저 탑파에서의 일례와 같이 일반적으로 중대 후기의 한 특색이다. 십이지상이 있는 능묘 중 전칭 진덕왕릉, 문무왕릉(괘릉), 김유신묘라는 것들이 조형 양식상 모두 각각 당대의 것이 될 수 없고, 중대 이후에 속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현대문주3▶학자 간의 정견[a 5]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탑파에도 한 개의 중대의 특색이란 것이 이런 곳에 하나 있음이 강조되어지지 아니할 수 없다.
쪽수▶P59-2以上, 諸塔名 外面의 彫飾有無, 五重三重의 差別, 氣勢의 强弱의 差度 等을 別 問題로 하면 塔婆로서의 樣式은 全혀 한 개의 類型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諸塔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一曰 그 類型들이 地方的으로 慶尙道一帶에만 限해있고 特히 또 慶州가 中心되어 있다는 곳에 커다란 한 意義를 느낀다. 即 第二期의 塔婆가 亦然하야 四塔 中 三塔이 慶州를 中心하여 있었고 一塔만이 中原京 忠州에 있었다. 第一期의 塔은 二基가 外城 即 百濟 國境 內에 있었고 一基만 이 新羅 國領 內에 있으나 都心을 떠난 義城郡에 가 있었다. 義城에 어찌하야 高古한 最初의 한 石塔樣式이 이와 같이 發祥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外部에서 發生된 한 樣式이 第二期로 들면서▶P60 新羅統一 後 新羅의 都心地帶로 集中되어 第三期의 樣式까지 저와 같이 京都中心으로 發展된 것임을 볼 때 當代의 文化가 또한 이 第二期 第三期를 中心하야 慶州를 中心으로 익(熟)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三期 作品에 이르러 벌써 石塔이 建築으로서의 勃勃한 建築的 精神보다도 修飾인 것으로의 急據한 變遷을 본다. 即 원문주10▶獐項里逸名寺址[2]의 五重塔에는 初層屋身 各面에 門扉模樣이 模刻되었을 뿐더러 隅柱와 門扇間에 遒勁한 仁王兩像이 蓮花座 위에 活躍的 態勢로써 浮刻되여있다. 初層屋身에 이와 같이 四方門戶를 만드는 것은 본디 木造 塔의 意思로서 그것은 內部室內에 通하는 意思였다. 저 芬皇寺의 塔에서도 그 頹化된 形式이나마 四方龕室의 經營이 있음을 보았고 第一期 石塔의 彌勒塔에서도 그 意思를 보았고 盈尼山下塔, 安東法林寺址, 法興寺址, 一直面逸名寺址 等의 模塼塔·博塔 等에서도 그 一面的인 龕室經營을 보았고 第二期에 들어서 高仙塔 같은 데서도 四方의 門戶 樣式의 模刻이 있음을 본 바이다. 高仙塔에서의 門戶樣式의 模刻은 特히 優秀한 것이어서 門柱, 門楣, 門限, 閣峙의 表現은 勿論이요 門扇의 獸吻鋪首의 模刻도 塊麗하고 門扇에는 浮錫金釗을 박았던 孔穴까지 남아있다. 또 門戶兩側에 仁王像 凸刻한 例도 일찍이 芬皇塔에서 그 例를 본 바이다. 다만 後代까지도 仁王像을 表現함에 있어서는 모두 自然岩石 위에 叱咤怒呼의 形像을 하고 있는 表現을 取하고 있는데 唯獨 獐項里塔에서는 仁王像을 蓮花座 위에 올려 앉혀있다. 이것은 特殊한 例이니 智道論에는 「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梵天王坐蓮(○○○○○) ▶P61華上是故(●●●●)諸佛隨世俗故(●●●●●●) 於寶華上結跏趺坐(●●●●●●●●)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若是佛(○○○) 謂當作八葉芬陀利(○○○○○○○) 白蓮華也(○○○○) 其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 令花半敷(○○○○) 勿令極開也(○○○○○) 若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 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이라 있어 仁王도 번대는 菩薩 摩訶薩이니까 蓮華座에 올림이 當然할 것 같으되 그것은 本身의 菩薩像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變身하야 佛法守護의 一神將(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形像으로 表現되었을 적엔 一般이 盤石 巨岩에 올리는 것이 通式이다. 即 獐項里塔에서의 例는 한 개의 特殊한 實例인데 何如間에 一般이 第二期 作品에선 볼 수 없는 三王彫刻이 初層塔身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項塔과 함끠 第三期 作品 中에 類聚되어있는 遠願寺址 三重塔 雙基에는 初層屋身 四面에 長矩形方廓을 만들고서 그 안에 四天王(東方持國天 南方增長天 南方廣目天 北方多開天)을 浮刻하고 基壇 上層中臺石面石部에는 蓮花座에 十二支像을 浮刻하였다. 四天王은 帝釋天의 外將이며 十二支像은 藥師佛의 十二神將과 配合되는 것들이다. 四天王은 純支那式으로 말하면 四方神이요 十二支는 十二時神인 同時에 方位神인 것이다. 即 支那的 思想으로서만 解釋한다면 그것은 空間과 時間과를 通해서의 庇護觀念의 現示라 할 수 있다. 그러나 佛說에 依한 四天王은 六欲天(一曰四王天, 二曰忉利天, 三曰夜摩天, 四曰 兜率歌, 五曰 樂變化天, 六曰 他化自在天)中 第一天인 四天王에▶P62 屬하는 天王들이요 帝釋天은 第二天인 忉利天(一曰 三十三天)을 主宰하는 天帝로서 忉利天은 須彌山頂에 있는 世界이요 四王天은 須彌山中復에 있는 世界로서 다같이 帝釋이 領導하고 있는 地居天의 世界이다. 이 以上 第三天으로부터 第六天까지는 空居天으로서 地居天과 區別되는 世界이니 問題外이고 三一三天에 君臨한 釋迦能의 天帝釋은 저 四面의 四天王을 領牟하고 있는데 이 四天王은 다시 또 各其八大天王을 領率하고있다. 同時에 四天王은 八部鬼衆을 領率하고 있는데 一般이 四天王의 領導아래 三寶擁護의 守護將令으로 利用되기는 이 八部鬼衆들이라. 다음에 말할 第四期作品들 以下 時代的으론 新羅下代에서부터 造形的으론 이 八部衆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八部衆의 表現意思만은 第三期作品인 佛國寺 釋迦三重塔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하여도 可하다 即, 塔婆 그自身엔 아무런 表現이 없지만 塔婆 外圍를 돌려 八個의 蓮花座가있는 方區結界가 그것이다. 八個蓮花座에 關하여는 何等 信憑할 史料가 없으나 佛國寺 歷代記 (或云佛國寺古今創記)에 보면 東多寶塔 西釋迦塔 一名無影塔이란 다음에 八方金剛座란 것이 있어 이 八方金剛碎란것이 或歟이 八方蓮花座를 두고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金剛座라는 것은 智度論에「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云云이라 있어 菩薩坐處이니만치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蓮華八座를 곧 八部衆의 坐處로는 是認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特別한 八方金剛座의 經營은 ▶P63곧 塔婆에 八部衆을 表現하는 意思의 先軀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即,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이 八座는 實際에 있어서도 八部菩薩 造成하야 奉安하였던 것인지 또는 座石만 만들고 想意的으로 그곳에 八部菩薩이 供養而坐한 意思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원문주2▶어쨌든 塔婆 그것 以外에 守護의 菩薩 乃至 天王神將들을 이와 같이 添付시키려는 意思가 一般的으로 具體化했든 事實만은 알 수 있다.[3] 저 安東 法興寺址 七重博塔의 基壇面에도 部將坐像이 浮刻되어 있는 例를 말한 적이 있다. 그 世代는 勿論 이 中代에 屬하는 것이나 第二期作品들과 같이 前期에 歸屬시킬 것인지 (그 便의 可能性이 많다고 筆者는 생각하지만) 또는 後期 即 이 第三期와 等代에 둘 것인지 確實치 못하지만 何如間 그곳에도 이미 神將을 塔婆基壇에 表現시켰다. 다만 그것은 頹壞가 甚하야 본래 몇 개의 神將을 表現한 것인지(現今은 매우 散亂되었음) 따라서 神將의 性質도 不分明하지만 何如間 그러한 것을 表現하려는 意思가 이 中代後期를 中心하여 그 前後에 現著해진 特色만은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 八部衆에 대하여는 다시 後에 말하기로 하고 前述한 四天王은 勿論 支那式四方神에 通하는 意思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佛敎的인 것이었을 것은 形像 그自身이 벌써 보이는 바이지만 十二支像이 十二獸神으로 表現돼있는 點엔 佛敎的인 것보다도 支那的인 時神觀念에 더 큰 影響이 있는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當代에 있어서는 이 獸神觀念은 본디 支那的인 純粹한 觀念에서보다도 一般이 佛敎的인 것과 混與되었던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이는 한갓 當代로부터 現著히 濃厚해진 東洋의 風水觀念이란 것이 傳說이 傳하는 바와 같이 道詵禪師(統一後 161年生享年72)▶P64로 말미암아 一行禪師(開元15年 入滅統一後 61年也)의 法이 流轉된 것이라 함에서 뿐 아니라 十二支肖像의 表現이 新羅에서 造型的으로 流行됨이 한갓 墳柒關係에서 뿐 아니라 佛刹關係 엣것에도 流行되기 시작함이 곧 佛家的 解釋과의 混與를 생각케 하는 바라 하겠다. 十二支肖像이 墳墓關係에 表現되기는 新羅의 傳稱聖德王陵(傳稱某某王陵乃至墓로써 指稱되는 것은 實際 그들의 陵墓라고 곧 認定할 根〿들이 充分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원문주3▶考證이 必要한 것이요 [4] 지금은 다만 一時的假稱號로서 擧用할 따름이다)의 屛石外護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寺址의 例론 皇福寺址, 內東面排盤里逸名寺址, 外東面末方里洞鵠寺址 及求禮 華嚴寺五重塔에서 發見된 例가 있고 佛燈에는 慶州邑內 崔泳鎭 氏 私邸 內에 있는 石燈 같은 데도 있어 一般이 佛敎關係에도 盛行되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에서 筆者는 新羅陵墓에서의 十二支像은 한갓 支那的인 風水觀念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요 원문주2▶거기에는 藥師佛에 대한 두터운 信仰과의 混與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 [5] 景德王十四年乙未(統一後89年), 芬皇寺의 三十萬六千七百斤 藥師像의 鑄造란 가장 有名한 事實이지만 現在 新羅佛로서 優秀한 作品에 이 藥師像이 많음을 볼 때 藥師의 信仰이 新羅에, 特히 이 中代에 얼마나 盛했든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因緣한 十二支像의 表現欲의 發達이란 것에 대하여는 格別한 關心이 가지는 것이다. 傳聖德王陵의 十二支像이 新羅 陵墓에 나타난 十二支像 中엔 가장 最初의 것에 屬하는 것인데 그것이 傳稱대로 事實 聖德王陵이라 한 데도 實際造成은 聖德王 薨御 後에 있었을 것이니까 이렇게 본다면 十二支像의 表現은 저 塔婆에서의 一例와 같이 一般이 中代後期의 한 特色이다. 十二支像이 있는 陵墓中 傳稱 眞德王陵, 文武王陵(掛陵) 金庾信墓라는 것들이 造▶P65-1型樣式 上 모두 各其 當代의 것이 될 수 없고 中代 以後에 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원문주3▶學者間의 定見 [6]이다. 이러한 것을 볼 때 塔婆에도 한 개의 中代의 特色이란 것이 이런 곳에 하나 있음이 強調되여지지 아니할 수 없다.
제3기 탑파에 있어서, 앞서 서술한 조각적 수식 의욕의 발달과 함께 또 하나의 특색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현대문주11▶별개의 장식물의 첨부이다.[a 6] 그 현저한 예는 김천군 남면 오봉리 갈항사지에 있던 삼중탑(현재 경성 경복궁 내)에 볼 수 있는 특색이니, 그것은 초층 옥신 면석 각 면에 사천왕 입상이 있었던 듯한 요철의 흔적이 희미하게 보이며, 또한 사우의 주형 측우에는 일례로 다섯 개의 정혈이 있고, 주형 내연에는 두 열로 각각 일곱 개의 정혈이 있으며, 면석 상하 좌우에는 네 개의 정혈이 있다. 또한 제1층 옥개에는 현첨 일면에 각 여섯 개의 정혈이 있고, 낙수면에도 정혈이 산재해 있으며, 제2층 및 제3층 옥개 현첨면에도 동일한 정혈이 각 면에 다섯 개씩 있고, 낙수면에도 전과 같이 산재해 있으며, 옥신 주형 내에도 각각 네 개의 정혈이 있다. 이러한 정혈들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탑신 전체를 조각 장식이 있는 금동판으로 덮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니, 당대 이른바 '퇴제' 상이라 하여 금동판을 양각의 모형상에 대고 두들겨 물상을 압출해내는 기법이 유행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한편으로는 이러한 퇴제 사천왕상을 초층 옥신에 정식하고, 다른 부분에도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여러 물상의 퇴제품을 덮어 장식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저 고선사탑이 초층 옥신의 문호 형식에 가장하였던 부석유금정과는 비교할 수 없는 찬란한 수식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제3기 작품부터는 일반적으로 옥개 전각 양면에, 또는 전각 저면에 정혈이 나타나니, 이것은 소위 결색(예를 들어 보은 법주사 팔상전 상륜부 사천 결색)과 또는 풍령이 달려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 갈항사탑에 대하여, 특히 신라 하대 일반 부도(승려 묘탑)의 옥개에서 볼 수 있는 앙화 형식의 칙금 장식까지 연상하라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후대의 예로서 너무 빨리 고대까지 소급시킨 연상이라 할 수 있겠고, 또한 현첨 저면에는 벌써 요곡된 층절면까지 표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삼국유사를 읽을 적에, 현대문주4▶함통 7년, 명랑 신인조에 「師挺生新羅 入唐學道 將還因海龍之請 入龍宮傳秘法 施黃金千兩(一云千斤)濟行地下 湧出本宅井底乃捨爲寺 以龍王所施黃金飾塔像 光曜特殊 因名金光焉」[a 7]운운한 기록이 있는데, ‘황금으로 탑과 불상을 장식했다’는 구절을 불상, 불서, 나아가 불구류에 황금으로 장식한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갈항사에서의 실례는 실제로 불탑에 황금 수식이 있었음을 이해하게 한다. (단, 금광사의 유탑은 오층석탑이었으나 파손이 심하고, 또한 양식적으로는 제4기에 속하는 듯하다. 이것은 후에 다시 서술하겠음.)
쪽수▶P65-2第三期塔婆에 있어서 上述한 彫刻的 修飾意欲의 發達과 함끠 또 하나 特色으로 들 것은 원문주11▶ 別個 裝飾物의 添付이다.[7] 그 現著한 例는 金泉郡 南面 梧鳳里 葛項寺址에 있든 三重塔(今在京城 景福宮內)에서 볼 수 있는 特色이니 그것은 初層屋身面石에 各面에 四天王立像이 있었는 듯한 凹凸의 痕跡이 그윽이 보이고 또 四隅의 柱形側隅에는 一例五個의 釘穴이 있고 柱形內緣에는 二列各七個의 釘穴이 있고 面石上下 左右에는 四個의 釘穴이 있다. 또 第一 層屋替에는 軒簷 一面에 各 六個 釘穴이 있고 落水面에도 釘穴이 散在해있고 第二層 第三層 屋蓋 軒簷面에도 同樣의 釘穴이 各面 五個式있고 落水面에도 如前散在해 있고 屋身柱形 內에도 各 四個 釘穴이 있다. 이러한 釘穴들은 곳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하면 塔身 全部를 곳 彫刻裝飾이 있는 金銅板으로써 덮었던 것을 보힘이니 當代 所謂 「褪製」 像이라하야 金銅板을 陽刻의 模型像에 대고 뚜들겨 物像을 押出해내인 手法의 것이 流行되었든 것이니 말하자면 한편으론 이러한 槌製四天王像 初層屋身에 釘飾하고 다른 部分에도 또한 想像할 수 없는 여러 物像의 槌製品을 덮어 裝飾하얏든 것이다. 이것은 저 高仙寺塔이 初層屋身의 門戶形式에 加裝하얏든 浮錫鏂金釘과는 比較할 수 없는 燦爛한 修飾이였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第三期 作品부터서는 一般的으로 屋蓋轉角兩面에, 또▶P66-1는 轉角底面에 釘穴이 나타나나니 이것은 所謂 結索(例如報恩法住寺捌相殿相輪部四田結索)과 또는 風鈴이 달렸든 것으로 解釋된다. 또 葛項寺塔에 대하얀 特히 新羅 下代 一般浮圖(僧侶墓塔)의 屋蓋에서 볼 수 있는 仰花形式의 飭金裝飾까지 聯想하라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後代의 例로써 너머 빨리 古代까지 溯及시킨 聯想이라 할 수 있겠고 또 軒簷底面에는 벌써 凹曲된 層節面까지 表現되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가 三國遺事를 읽을 적에 원문주4▶ 咸通第七, 明朗神印條에 「師挺生新羅 入唐學道 將還因海龍之請 入龍宮傳秘法 施黃金千兩(一云千斤)濟行地下 湧出本宅井底乃捨爲寺 以龍王所施黃金飾塔像 光曜特殊 因名金光焉」[8]云云이란 것에 黃金飾塔像 云云한 것이 佛像, 佛書, 乃至 佛具類에나 黃金으로 裝飾했든 것으로도 理解함즉 하지만 葛項寺에서의 實例는 實際佛塔에 黃金修飾이 있었음을 理解케 한다(但 金光寺의 遺塔은 五層石塔이였으나 被指이 甚하고 또 樣式的으론 第四期에 있는 듯하다. 이것은 後에 다시 敍述하겠음)
이상, 제3기 탑파에 이르러 조선의 석탑이 구조적으로 매우 통일된 정제성을 형성하고(즉 기단은 기단대로, 옥신은 옥신대로, 옥개는 옥개대로 단순히 통일되며, 옥개의 오층단 ‘받임’, 이층단 ‘괴임’의 정제, 상층 기단 사개탱주, 하층단 기단의 사개탱주 등 이미 서술) 동시에 수식장각의 급속한 발전을 보는 바이다. 이러한 뜻은 전형적인 양식 탑파에서만 발휘된 뜻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특수한 별개 양식의 발생을 촉진시킨 특별한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제 이 사정을 다음에 서술할까 하는데, 그보다도 이 제3기란 세대적으로 어떠한 범위에 속하는 것인가 그 규정의 내역을 이곳에서 말하지 아니하면 아니 될 듯하다.
쪽수▶P66-2 以上 第三期 塔婆에 이르러서 朝鮮의 石塔이 構造的으론 매우 統一된 整齊性을 形成하고 即基壇基은 基壞대로 屋身은 屋身대로 屋蓋는 屋蓋대로 單純히 統一되며, 屋蓋의五層段 「밭임」, 二層段「괴임」의 整齊, 上層基壇 四介撑柱, 下層段基壇의 四介撑柱 等 已述) 同時에 修飾裝刻의 急速한 發展을 보는 바이다. 이러한 意思는 典型的인 樣式塔婆에서만 發揮된 意思가 아니라 그와 同時에 特殊한 別個 樣式의 發生을 促進시킨 特別한 意味도 있는 것이다. 이제 이 事情을 다음에 叙述할가 하는데 그보다도 이 第三期란 世代的으론 어떠한 範圍에 屬하는 것인가 그 規定의 內譯을 이곳에 말치 아니하면 아니 될 듯하다.

































본문1-2: 2-2. 第三期作品의 世代論


우리는 제3기 작품과 제2기 작품을 구별할 때, 첫째 조건으로 그 기단 양식에서 중층이면서 상층 기단 중대석의 탱주가 한 면 네 개임을 공통적인 요소로 하고, 하층 기단 중대석의 탱주가 한 면 다섯 개인 것을 제2기, 네 개인 것을 제3기 작품이라 구분한다. 동시에 탑신에 있어서 제2기 작품이나 제3기 작품이 옥석 ‘받임’은 최종까지 정연한 오층단이로되, 옥석과 옥신 등의 경영이 단일하게 통제되지 않고 여러 편석으로 구성된 것을 제2기라 하고, 단일하게 통제된 것을 제3기라 하여, 제2기 작품으로는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세대를 신라 중대 전기, 즉 정치사적으로 말하면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 통일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통일 이후 70년간의 것이라 말하였다. 그러므로 양식사적으로 이 제2기의 차위에 속하는 제3기의 작품이란, 물론 세대로 논한다 하더라도 차기에 속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양식사적 순위를 시대사적 순위로 번역할 때는, 시대사적 순열이 일직선 계열을 이루는 것처럼 그렇게 명확하게 일직선적인 순열을 이룰 수 없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즉, 양식사적 순위란 오히려 차원을 달리한 층위적 순위 계열을 이루는 것이어서, 제3기의 상한이 시간적으로는 제2기의 하한과 겹쳐질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시간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양식 발생과 양식 발전 그 자체에서도 그러한 것이다. 예컨대, 한 양식이 완전히 발전되고 소멸된 후에야 다른 신양식이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고, 한 양식이 발생된 후 그것이 발전되는 동안에도 그 중에서 또 다른 한 양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아버지의 생명이 다한 후에 아들의 새 생명이 출생하여 직선적인 승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생존하는 동안 아들의 새 생명이 탄생하고, 또 그 속에서 손자의 새 생명이 나와 층위적으로 계열이 전개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양식 발전이란 차원을 달리해 가면서 층위적으로 전개되는 만큼, 이것을 평면적으로 일련의 계열을 지어 앞뒤를 재단한다는 것은 무리한 편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탑파의 역사를 말함에 있어서도, 양식 발전에서 이러한 중복은 불가피한 것이며, 우리가 제2기와 제3기를 양식적으로 구별하고, 다시 시간적으로 그것을 전후에 배당할 때 이러한 시간적 중복은 사실로서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이는 두 양식의 하한과 상한 사이의 문제일 뿐,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가 또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이 중심과 중심 사이의 거리를 고려하고, 그 간의 성질상 다른 점을 살피는 것이 역사적 이해의 한 방법이므로, 이를 위한 구분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를 중요시하는 나머지 앞서 말한 하한과 상한 간의 실제적 중복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 한 가지 예로 설명하면, 제2기 탑파와 제3기 탑파의 구별을 손쉽게 짓는다면, 기단 중대석의撑주가 상층에서는 네 개, 하층에서는 다섯 개이면 제2기, 네 개이면 제3기라 하였다. 그런데 이대로 하면, 선산군 해평면 낙산동 일명사지에 있는 삼중탑도 제2기에 속한다. 그렇다고 해서 시대적으로도 제2기와 같은 신라 중대 전기에 두겠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것이니, 이는 탑신 그 자체가 모전탑이라 하여 특수한 별개의 양식을 이루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이 삼중탑은 후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저 영니산 하탑의 외양을 모방한 탑신 형식을 갖춘 것이다.), 초층 옥신을 받는 ‘괴임’ 양식이 왜축된 점이라든지, 옥개석 ‘받임’이 4단으로 왜축된 점 등─ 이러한 점은 일반적으로 제3기적 작품과도 떨어져 일종의 과도적 형식을 이루고 있다. 즉, 기단만 보면 대체로 제3기 작품보다는 고양식에 속하는 점이 있으나, 옥석 경영에서는 제3기 작품보다도 뒤처지는 새로운 요소가 그곳에 있다. 이 탑 자체는 물론 이 전형적인 양식 속에 포함되지 않는 별개의 독특한 양식을 가지고 있어, 이 점에서 달리 논의될 특질을 지니고 있지만, 양식적 측면에서는 앞서 언급한 중간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필자가 제2기 탑파를 시간적으로 신라 중대 전기에 배속시키고, 제3기 작품을 중대 후기에 배속시킨다고 해서, 양식적으로 제2기와 제3기로 구별되는 것이 모두 전적으로 완전히 시간적으로도 중대 전기와 중대 후기에 완전히 귀속되는 것이 아니며, 실제 연대적으로는 제2기 하의 작품이 중대 후기 초까지도 이어질 수 있으며, 제3기 작품이 중대 전기 말까지도 이어질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중대 전기와 중대 후기라고 하여 그에 배속시키는 것은 대체적인 큰 흐름을 말한 것일 뿐이며, 개별 작품에 관하여는 시간적으로 다소의 출입이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쪽수▶P67우리는 第三期作品 第一期作品에서 區別할제 첫째 條件은 그 基壇 樣式에 있어 重層이면서 上層基壇中臺石의 撑柱가 一面四個임을 共通的 要素로 하고 下層基壇中臺石의 擇柱가 一面五個인 것을 第二期, 四個인 것을 第三期作이라 區分한 同時에 塔身에 있어서 第二期 作品이나 第三期 作品이 屋石「밭임」은 最終까지 整然한 五層段이로되 屋石, 屋身 等의 經營이 單一되게 統制 안 된 것을 即 여러 片石으로써 結構된 것을 第二期라 하고 單一되게 統制된 것을 第三期라 하야 第二期作으로서는 感恩塔·高仙塔· 中央塔·羅原里塔 等을 드러 그 世代를 新羅 中代 前期 即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 統一을 中心하야 생각한다면 統一 以後 七十年間 것이라 말하얏다. 그러므로 樣式史的으로 이 第二期의 次位에 屬하는 이 第三期의 作品이란 勿論 世代로 論한다 하더라도 次期에 屬할 것은 當然한 일이라 하겠다. 그런데 樣式史的 順位를 時代史的 順位로 翻譯할 때는 時代史的 順列이 一直線系列을 이룸과 같이 그렇게 載然히 一直線的 順列을 이룰 수는 없는 것임을 注意할 必要가 있다. 即 樣式史的 順位란 오히려 次元을 달리한 層位的 順位系列을 이루는 것이여서 第三期 上限이란 것이 時間的으론 第二期 下限과 겹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何必 時間的 問題에서 뿐 아니라 樣式發生과 樣式發展의 그 自體에서도 그러한 것이니 例컨댄 한 樣式이 完全히 發展되고 消失된 後에라야 다른 新樣式이 비로서 나오는 것이 아니요 한 樣式이 發生된 後, 그것이 發展되는 동안에 於中에서 다른 한 樣式이 또 나▶P68올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맛치 父의 生命이 方終한 後에 子의 新生命이 出生하야 直線的 承繼를 이룸이 아니요 父의 存命中 子의 新生命은 生產되고 또 그속에서 孫의 新生命이 나와 層位的으로 系列이 展開됨과 같은 것이니 이와 같이 樣式 發展이란 次元을 달리해가면서 層位的으로 展開되는이 만치 이것을 平面的으로 一系列을 지워 前後를 裁斷한다는 것은 無理한 便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塔婆의 歷史를 말함에 있어서도 樣式 發展에 이러한 重復은 不可避의 것이라 우리가 第二期 第三期를 樣式的으로 區別하고 다시 時間的으로 그것을 前後에 配當시킬제 이러한 時間的 重複은 事實로써 免치 못할 것이지만 이것은 兩樣式의 下限과 上限과 서의 問題일 뿐 中心과 中心과의 距離가 또한 없지 못할 것이니 이 中心과 中心과의 距離를 차고 그간의 性質上 殊別된 것을 차짐이 歷史的 理解의 한 方法인즉 이것을 爲한 區分은 누구나 理解하겠지만 이것을 重要視하는 남어지 前에 말한 下限과 上限과의 實際的 重複 事實을 이저서는 아니된다. 이제 一例로써 說明하면 第二期 塔婆와 第三期 塔婆와의 區別을 손쉽게 짓는다면 其壇中臺石의 撑柱가 上層에선 四個, 下層에선 五個를 第二期, 四個를 第三期라 한다 하얏는데 이대로 하면 善山郡 海平面 洛山洞逸名寺址에 있는 三重塔도 第二期 分類에 든다. 그렇다고 해서 時代的으로도 第二期와 等代인 中代前期에 두겠느냐 하면 그렇치 못한 것이니 그것은 塔身 그 自體가 模塼塔이라 하야 特殊한 別個 樣式을 이룸에서 그러함이 아니라(이 三重塔은 後에 다시 說明하겠지만 저盈尼山 下塔의 外樣을 模한 塔身形式을 갖춘 것이다.) 初層屋身을 받는 「괴임」 樣式의 矮縮된 點이라든지 屋蓋石 「밭임」이 四段으로 矮縮된 點等─이러한 點은 ▶P69-1一般이 第三期的 作品과도 떠러저 一種의 過渡的 形式을 이루고 있다. 即 基壇만에는 大體에 있어 第三期 作品보다는 古樣式에 屬하는 點이 있으나 屋石經營에는 第三期 作品보다도 뒤지는 新要素가 그곳에 있다.이 塔 自體는 勿論 이 典型的 樣式 속에 類聚되지 아니하는 殊別된 別個樣式을 갖고 있어 이 點에서 달리 論해질 特質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樣式 一面에 있어서는 上述한 於中的 意味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이곳에 筆者가 第二期 塔婆를 時間的으로 中代前期에 配屬시키고 第三期 作品을 中代後期에 配屬시킨다고 하야 樣式的으로 第二期 第三期로 區別되는 것이 모두 全體로 完全히 時間的으로도 中代前期와 中代後期에 完屬되는 것이 아니요 實際 年代的으론 第二期 下의 作品이 中代後期 初까지도 거칠 수 있는 것이요 第三期 作品이 中代前期 末까지도 거칠 수 있는 것임을 아러야 할 것이다. 이곳에 中代前期요 中代後期라하야 그곳에 配屬시켜지는 것은 大體의 大勢를 말한 것뿐이요 個個 作品에 關하얀 時間的으로 多少의 出入이 있을 것을 斟酌하여야 한다.
이제 필자가 제3기 작품으로 유집시킨 유형의 양식적 공식을 든다면, 기단이 중단이 되되 하단 중대석의 각 면 장주가 네 개, 갑석(석복) 상부 즉 상단 중대석을 받는 절충 부분에 사분일 호형 각형단의 '몰딩'이 있는 것, 상층 기지 중대석에撑주가 역시 네 개, 상단 갑석(석복) 부분의 각형 부연과 상부 초층 옥신을 받는 부분의 중단형 '괴임', 탑신의 각 옥신은 단일석이며, 우주 형식이 모각되어 있고(이 옥신도 실은 전체로 상부가 하부보다 폭이 약간 좁혀져 있다), 옥석에는 몇 층이든 간에 오단 '받임'이 정연하며, 상부 옥신을 받는 부분에는 정연한 중단 '괴임'이 있으며, 옥개의 첨단은 저면이 수평 직선이고, 노반에도 신부에는 주형이 없으나 상부 갑석에는 부연이 달린 정연한 갑석으로 되어 있다(상륜부는 모두 일락되어 불분명하지만) 지금 이러한 양식의 대표작은 전에도 실례를 열거하였지만, 불국사 석가 삼중탑이 보편적이니만큼 그것을 대표 예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실제 연대를 논함에 있어 유일한 좋은 예는 김천 폐갈항사 삼중탑 쌍기가 있을 뿐이다. 즉, 그 탑의 동탑 상층 기단 중대석 면에 다음과 같은 각명이 있다.
쪽수▶P69-2이제 筆者가 第三期 作品으로 類聚시킨 類型의 樣式的 公式을 든다면 基壇이 重段이되 下壇中臺石의 各面掌柱가 四個, 甲石(石覆)上部 即 上壇中臺石을 받는 折衷部分에 四分一弧形 角形段의 「몰딩」이 있는 것, 上層基地中臺石에 撑柱가 亦四個, 上壇甲石(石覆) 部分의 角形副緣과 上部初層屋身을 받는 部分의 重段形 「괴임」 塔身의 各屋身은 單一石이요 隅柱形式이 模刻되어 있고(이 屋身도 實은 全體로 上部가 下部보다 幅이 畧干 좁혀저 있다) 屋石에는 몇 層이든 間에 五段「밭임」이 整然하고 上部屋身을 받는 部分에는 整然한 重段「괴임」이 있고 屋蓋의 簷▶P70-1端은 底面이 水平直線이요 露盤에도 身部에는 柱形이 없으나 上部甲石에는 副緣이 달린 整然한 甲石로 되여있다(相輪部는 擧皆 佚落되여 不分明하지만) 지금 이러한 樣式의 代表作은 前에도 實例를 列擧하얏지만 佛國寺 釋迦 三重塔이 普遍되니 만치 그것을 代表 例로 들 수 있다. 그런데 지금 實際 年代를 論함에 있어 唯一한 好例는 金泉廢葛項寺 三重塔雙基가 있을 뿐이다. 即 그 塔의 東塔上層基壇中臺石面에 左와 같은 刻銘이 있다.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본문1-3: 제목@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
쪽수▶PXXX ▶PXXX
































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원문주석1
  2. 원문주석10
  3. 원문주석2
  4. 원문주석3
  5. 원문주석2
  6. 원문주석3
  7. 원문주석11
  8. 원문주석4






현대문주


  1. 해독문주석10
  2. 현대문주석2
  3. 현대문주석3
  4. 현대문주석2
  5. 현대문주석3
  6. 해독문주석11
  7. 해독문주석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