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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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6일 (화) 17:48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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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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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6월
시작쪽 051쪽 종료쪽 095쪽 전체쪽 045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2. 典型的樣式成立以後의一般石塔樣式의變遷相


우리는 석조 탑파의 제1절 제1항에서 익산군 용화산 하 미륵사지에 있는 다층석탑 조선 석탑파로서의 최초의 시원형식을 이룬 유일한 유구로서 설명하였고, 같은 곳 왕궁면 왕궁리 속칭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 저 미륵탑의 모방적 재현 형식의 유구로서 건축적 구조특질보다도 조각적 응집 결태로서의 과도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으며, 부여읍 추정 정림사지에 있는 오중탑(속칭 평제탑)은 미륵탑의 건축적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다 더 완성태로의 발전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직접 계련 관계는 여하간에 양식적으로는 다른 시원적인 일례가 의성군 영니산 하 일명사지에 오중탑 일기가 있어 이것들이 경주 감은사지의 삼중탑 양기, 고선사지의 삼중탑, 나원리 일명사지의 오중탑, 충주 가금면 탑정리 일명사지의 칠중탑(속칭 중앙탑) 등에서 종합적으로 취합되어 그곳에 조선석탑으로서의 최초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이 있었다는 것을 제2항에서 설명하였고, 그리고 제3항에서 이 양대부류의 세대관을 말하여 미륵탑·왕궁평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통일 이전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을 통일 이후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 후 필자의 반성과 추구는 이상 논고 중 한 개의 모순을 발견케 되었으니 즉 그것은 왕궁평탑에 대한 의견이다. 무엇이냐 하면 왕궁평탑은 외형으로서는 제1부류 즉 시원적 양식부류에 유사시킬 수 있는 양식 감정을 충분히 가졌고 또 일부 옥개의 구조법 같은 데에서 정림탑과의 유사점이 있지만, 옥리층단형 「밭임」의 전반적으로 전자형 사분파의 평면을 이루는 의사는 이 제1부류에 속하는 기타 석탑들과는 공통성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제2부류의 전형적 탑파류들과 공통되는 것, 또 초층옥신 판석으로 구성하면서 우주 및 중간주의 형식을 편의적인 부조법에 의하였을 뿐더러 상하의 태세 변화, 즉 '엔터시스'의 정신이 없는 것─이러한 짤막한 양식적으로도 확실히 제2부류 하에 속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환언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이 왕궁평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과 같이 양식적으로 제1부류 즉 시원부류에 유사시킬 수 없는 동시에 시대적으로도 그러한 유류들과 함께 신라 통일 이전, 즉 삼국기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 통일 후 즉 저 전형적 탑파들이라 지칭한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들과 함께 유사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문제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형적 탑파들은 이미 전절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초층옥신들의 구조수법에 있어 사개우주가 이미 「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별개의 장석으로써 독립되게 구성되고, 그리고 벽면의 면석만은 또다시 다른 석편으로써 구성하고 있음에서(단 나원리탑만은 각 면 일매판석으로써 성립시키고 일우일주를 모각하게 됨) 그 사실적 진실미를 갖고 있는 터인데, 왕궁평탑에는 이러한 진실미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초층옥신벽면에 한 간주를 나타낸 것도 혹시 저 정림탑·중앙탑 등의 초층옥신에서 볼 수 있는 이간구분 재현을 위해 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그러한 의사에서의 표현 양식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우졸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영니산 하오중탑이 이층 이상의 곡신부터 이간벽을 나타낸 무의미성보다도 더 심한 무의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미성의 졸렬한 실례는 성주읍동 의공사(일운 동방사)지에도 일기(현존 팔중)가 있지만, 시대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여하간, 이상의 이유에서 왕궁평탑을 양식사적 견지에서는 제1기의 시원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고, 제2기의 전형적 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초층옥신만은 후대의 수보였다면 나머지 상층 부분은 제2기의 유형 속에 편입시켜도 좋을 가능성이 많으나, 그렇지 않고 이 초층옥신이 원상대로라 하면 이 탑은 여전히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2기의 부류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탑파 자신의 이러한 양식적 문제를 떠나서 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한 개의 참고자료로서의 와당 같은 것을 부차적으로 상고한다면, 그 와당문양은 이미 관계야 박사도 지칭한 바와 같이 신라 통일 초의 것이라는 것과 공통되는 특질을 가졌고, 또 나의 소견으로는 충주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와당과도 공통되는 시대성을 보이는 점이 있음에서, 이 와당을 통하여 볼 때 저 중앙탑이라는 것과 이 왕궁평탑이라는 것과가 위치적으로 공통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러한 점을 통해서나 왕궁평탑이 겨우 제2기의 탑파부류들에 끼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뿐, 양식적으로는 위태위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제1기 석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삼기에 한정되고 만다. 즉 그 삼기만이 통일 이전의 작품인 것이다. 미륵탑은 손상이 심한 것이지만 정림탑, 영니산하탑은 당풍이 아직 보이지 않은 즉 육조 기풍이 명백히 보이는 탑이라 하겠다. 적어도 수풍까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51우리는 石造 塔婆의 第一節 第一項에서 益山郡 龍華山 下 彌勒寺址에 있는 多層石塔 朝鮮石塔婆로서의 最初의 始源形式을 이룬 唯一한 遺構로써 說明하였고 同地 王宮面 王宮里 俗稱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 저 彌勒塔의 模倣的 再現 形式의 遺構로서 建築的 構造特質보다도 彫刻的 凝集 結態로서의 過渡 傾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說明하였으며, 扶餘邑 推定 定林寺址에 있는 五重塔 (俗稱 平濟塔)은 彌勒塔의 建築的 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야 보다 더 完成態로의 發展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直接 係聯關係는 如何間에 樣式的으론 다른 始源的인 一例가 義城郡 盈尼山 下 逸名寺址에 五重塔 一基가 있어 이것들이 慶州 感恩寺址의 三重塔 兩基, 高仙寺址의 三重塔, 羅原里 逸名寺址의 五重塔, 忠州 可金面塔亭▶P52里 逸名寺址의 七重塔(俗稱 中央塔) 等에서 綜合 聚成되야 그곳에 朝鮮石塔으로서의 最初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있었다는 것을 第二項에서 說明하였고 그리고 第三項에서 이 兩大部類의 世代觀을 말하야 彌勒塔·王宮坪塔·定林塔·盈尼山下塔 統一以前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을 統一 以後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後─ 筆者의 反省과 追究는 以上 論考 中 한 개의 矛盾을 發見케 되었으니 即 그것은 王宮坪塔에 대한 意見이다. 무엇이냐 하면 王宮坪塔은 外樣으로선 第一部類 即 始源的 樣式部類에 類聚될 수 있는 樣式 感情을 充分히 가졌고 또 一部 屋蓋의 構造法같은데 定林塔과의 類似點이 있지만 屋裏層段形「밭임」의 全般的으로 田字形四分派의 平面을 이루는 意思는 이 第一部類에 屬하는 諸他石塔에는 共通性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第二部類의 典型的 塔婆類들에 共通되는 것, 또 初層屋身 板石으로써 構成하면서 隅柱及 中間柱의 形式을 便宜的인 浮彫法에 依하였을 뿐더러 上下의 太細의 變化, 即「엔터시스」의 精神이 없는 것─이러한 짧은 樣式的으로도 確實히 第二部類의 下에 屬할 것임을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換言하면 이러한 理由에서 이 王宮坪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等과 같이 樣式的으로 第一部類 即 始源部類에 類聚시킬 수 없는 同時에 時代的으로도 그러한 類들과 함께 新羅統一 以前, 即 三國期에 둘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新羅統一後 即 저 典型的 塔婆들이라 指稱한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들과 함께 類聚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問題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典型的 塔婆들은 이▶P53미 前節에서도 說明한 바와 같이 그 初層屋身들의 構造手法에 있어 四個隅柱가 이미「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別個의 長石으로써 獨立되히 構成되고 그리고 壁面의 面石만은 또 다시 다른 石片으토써 構成하고 있음에서(但羅源里塔만은各面一枚板石으로써 成立시키고 一隅一柱를 模刻하게됨) 그 寫實的 眞實味를 갖고 있는 터인데, 王宮坪에는 이러한 眞實珠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初層屋身壁面에 한 間柱를 나타낸 것도 或欺 저 定林塔·中央塔 等의 初層屋身에서 볼 수 있는 二間區分 再現키 爲한 것이였었는지 알 수 없지만 萬一 그러한 意思에서의 表現 樣式이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愚拙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盈尼山 下五重塔이 二層 以上의 屈身부터 二間壁을 나타낸 無意味性보다도 더 甚한 無意味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無意味性의 拙劣한 實例는 원문주1▶星州邑東 醫公寺(一云 東方寺)址에도 一基(現存 八重)가[1] 있지만 時代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何如間, 以上 理由에서 王宮坪塔을 樣式史的 見地에선 第一期의 始源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킬 수 없고 第二期의 典型的 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키기 困難한 것이다. 차라리 初層屋身만은 後代의 修補였다면 나머지 上層 部分은 第二期의 類型 속에 編시켜도 좋을 可能性이 많은데 그렇지 않고 이 初層屋身이 原狀대로라 하면 이 塔은 依然히 救할 수 없는 것이다. 即 第二期의 部類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못 塔婆 自身의 이러한 樣式的 問題를 떠나서 그 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한 개의 參考資料로서의 瓦當같은 것을 副次的으로 商量한다면 그 瓦當紋儀는 이미 關野貞 博士도 指稱한 바와 같이 新羅統一初의 것이라는 것과 共通되는 特質을 가졌고 또 나의 所見으로선 忠州 中央塔附近에서 ▶P54-1發見되었다는 瓦當과도 共通되는 時代性을 보이는 點이 있음에서 이 瓦當을 通하야 볼제는 저 中央塔이란 것과 이 王宮坪塔이란 것과가 位次的으로 共通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即 이러한 點을 하여서나 $宮坪堵이 겨우 第二期의 堵婆部類들에 끼워질수 있는 可能性이 생기게될뿐, 樣式的론 危殆危殆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朝鮮의 第一期石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三基에 限定되고 만다. 即 其三基만이 統一 以前의 作品인 것이다. 彌勒塔은 損傷이 甚한 것이지만 定林塔, 盈尼山下塔 唐風이 아직 보이지 않은 即 六朝 氣風이 明白히 보이는 塔이라 하겠다. 적어도 隨風까지는 充分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전절 제2항에서는 전형적 탑파로서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을 열거하여 양식사적 순차를 정해 보았으나 확실한 단안을 내리지 못한 점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양식적으로 그 사탑이 거의 동일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 후의 상고에 의하면, 위은탑을 제1위, 고선탑을 제2위, 중앙탑을 제3위, 나원리탑을 제4위에 둘까 한다. 그 이유로선 우선 고선탑이 양식적으로 감은탑과 전혀 동일하나 옥개 기타에 다소 축소된 의사와 기단상 대복석에 다소 간소화된 수법과 초층탑신에 수식 의사의 가미 등이 있어 이러한 점에서 이것을 감은탑 다음에 두겠고, 중앙탑은 부분적으로는 고의(古意)를 다소 남긴 점도 있으나, 다시 또 부분적으로 신의(新意)에 속하는 것도 있어(예를 들어,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 점은 신의라 할 수 있다) 고의는 옛것 외 잔재로 볼 수 있어 하한이 미정되는 것이나, 신의는 그 상한에 제한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고선탑 하위에 둘 수 있겠고, 나원리탑은 초층옥신에 벌써 사매판석으로써 결구하는 동시에 그 일우에 우주를 표현하려는 의사와 제3층 이상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제2층, 제1층 옥개는 옥개와 옥개밭임이 별석이다) 의사가 있어 이러한 점에서 최하위에 두는 바이다. 시대로 말하면 이 유형의 양식 상안을 감은탑에 두었으므로 이 유형은 모두 문무왕대 이후가 된다. 연대로 말하면 문무왕 8년(즉 신라 통일 원년 서기 668년) 이후이나 각 탑파의 개별적 건립 연수란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필자는 이 사탑을 조선 석탑의 전형적 탑파라 지칭하는 동시에 조선 석탑파사상 제2기에 속하는 것이요, 신라 역사상 중대 전기에 속하는 탑파라 간주한다. 중대 전기라는 것은 정치사적으로 말한다면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신라사의 세대 구분에 있어 《신라본기》가 말하는 진덕왕까지의 성골 시대를 고기라 하고, 무열왕 이후 경순왕까지 진골 시대 중 혜공왕대까지를 중대라 한 구분법에 의하여,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중대 일대, 필자는 또다시 성덕왕대까지 구분하여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중대 전기, 효성왕부터 혜공왕대까지를 중대 후기라 함에 의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전에 말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들의 통일 이전의 작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신라 중대 전기란 것과 시대적으로는 상호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사실 말이지, 무열왕 일대는 물론이요 문무왕 8년까지도 통일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즉 삼국기의 잔존이 여전히 계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삼국 말기의 작품이라 할 때 신라사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이 신라 중대에도 걸쳐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미륵탑·정림탑은 백제 복멸 이전에 속할 것임으로 그 하한이 서기 661년 전까지 되나, 이것도 신라사적으로 보면 신라 중대에 걸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신라 영역 내에 있어 세년이 불확실한 채 저 미륵탑·정림탑 간에 개재할 수 있는 영니산하탑이 시대적으로 이 신라 중대에 속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 점에서 미륵탑·정림탑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백제탑이니), 영니산하탑만 신라사적으로 보아 신라 중대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즉 무열왕 이후이다. 그러나 확실히 저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구별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들을 통일 이후 작이라면, 영니산하탑은 통일 이전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감은탑의 상한이 반드시 문무왕 8, 9년 즉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대, 실제 연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문무왕 8, 9년 이후까지도, 즉 감은탑의 상한이 내려가는 대로 그 하한이 따라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충분히 신라 중기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일 이전에 간단히 두어버린 것은 감은탑 이하 제탑과 명료한 구획을 보이기 위한 한 양식사적 처분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이곳에 제1기(시원양식들) 작품이란 것이 신라사적 견지에 있어서는 실제 연대적으로는 중대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감은탑 이하 제탑과 실제 연대로서 중복되는 것이 아니요, 여전히 구분되면서 중대라는데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양식사적 세대라는 것과 역사에서 말하는 실제 세대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다소 의미가 다른 세대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원적 양식이라는 제1기의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이 전형적 탑파라 할 제2기의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함께 세대적으로는 신라 중대 전기에 합쳐질 수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매우 논술에 있어 혼란될 혐의가 있음으로, 편의적 도식적으로나마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을 통일 이전의 제1기의 탑파라 하고, 감은탑 이하 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 등을 제2기 탑파─세대적으로는 중대 전기의 탑파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이 이러한 세대 문제를 내거는 것은 탑파의 세대적 동향이란 것을 살피기 위한 것임이 주견의 하나인 까닭이다.
쪽수▶P54-2다시 前節 第二項에서는 典型的 塔婆로서 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을 列舉하야 樣式史的 順次를 定해 보았으나 確實한 斷案을 내리지 못한 點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樣式的으로 그 四塔이 거의 等一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後의 商考에 依하면, 威恩塔을 第一位, 高仙塔을 第二位, 中央塔을 第三位, 羅原里塔을 第四位에 둘까한다. 그 理由로선 爲先 高仙塔이 樣式的으로 感恩塔과 全혀 同一하나 屋蓋 其他에 多少 疑縮된 意思와 基壇上 臺覆石에 多少 簡化된 手法과 初層塔身에 修飾 意思의 加味 等이 있어 이러한 點에서 이것을 感恩塔 다음에 두겠고 中央塔은 部分的으론 古意를 多少 남긴 點도 있으나 다시 또 部分的으로 新意에 屬하는 것도 있어(例如, 屋蓋와 屋蓋「밭임」과가 一石으로 되는 點은 新意라 할 수 있다) 古意는 옛것 외 殘滓로 볼 수 있어 下限이 未定되는 것이나 新意는 그 上限에 制限이 있는 것인즉 이러한 點에서 高仙▶P55塔 下位에 둘 수 있겠고 羅原里塔 初層屋身에 벌써 四枚板石으로써 結構하는 同時에 그 一隅에 隅柱를 表現하려는 意思와 第三層 以上 屋蓋와 屋蓋「밭임」이 一石으로 되는(第二, 第一 屋蓋는 屋蓋와 屋蓋밭임이 別石이다) 意思가 있어 이러한 點에서 最下位에 두는 바이다. 時代로 말하면 이 類型의 樣式 上眼을 感恩塔에 두었은즉 이 類型은 모두 文武王代 以後가 된다. 年代로 말하면 文武王 8年(即 新羅 통統一年 西紀 668年)以後이나 各其 塔婆의 個別的 建立 年數란 勿論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筆者는 이 四塔을 朝鮮 石塔의 典型的 塔婆라 指稱하는 同時에 朝鮮 石塔婆史上 第二期에 屬하는 것이요 新羅 歷史上 中代前期에 屬하는 塔婆라 看做한다. 中代前期라는 것은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러 聖德王代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新羅史의 世代區分에 있어 新羅本紀가 말하는 眞德王까지의 聖骨 時代를 古期라 하고 武烈王 以後 敬順王까지 眞骨 時代 中 惠恭王代까지를 中代라한 區分法에 依하야 武烈王부터 惠恭王까지의 中代一代 筆者는 또다시 聖德王代까지 區分하야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를 中代前期, 孝成王부터 惠恭王代까지를 中代後期 라 함에 依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前에 말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들의 統一 以前의 作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新羅 中代 前期란 것과 時代的으론 相覆되는 部分이 생긴다. 事實말이지 武烈王 一代는 勿論이요 文武王 8年까지도 統一은 完成된 것이 아니다. 即 三國期의 殘存이 依然히 繼續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을 三國末期의 作品이라할 때 新羅史的으론 依然히 그것이 新羅中代에도 걸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못 彌勒塔·定林塔은 百濟 覆滅 以前에 屬할 것임으로 그 下限▶P56이 西紀 661年 前까지 되나 이것도 新羅史的으로 보면 新羅 中代에 걸칠 可能性도 있는 것이다. 况新羅 領域 內에 있어 歲年이 不確實한채 저 彌勒塔·定林塔 間에 介在할 수 있는 盈尼山下塔이 時代的으로 이 新羅 中代에 屬하지말란 法이 없다. 이 點에서 彌勒塔·定林塔은 別 問題로 하더라도(百濟塔이니) 盈尼山下塔만 新羅史的으로 보아 新羅中代에 編入시킬 수도 있다. 即 武烈王 以後이다. 그러나 確實히 저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區別을 세우기 爲하야 그것들을 統一 以後 作이라면 盈尼山下塔 統一以前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感恩塔의 上限이 반드시 文武王 8, 9年 即後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댄 實際 年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文武王 8, 9年 以後까지도 即 感恩塔의 上限이 내려가는대로 그下限이 쫓아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야 時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充分히 新羅中期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統一以前에 簡便히 두어버린 것은 感恩塔 以下 〿 諸塔과 明瞭한 區劃을 보이기 爲한 한 樣式史的 處分手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第一期(始原樣式들) 作品이란 것이 新羅史的 見地에 있어선 實際 年代的으론 中代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同時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感恩塔 以下 諸塔과 實際 年代로선 重覆되는 것이 아니요 依然히 區分되면서 中代라는데 包含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樣式史的 世代라는 것과 歷史에서 말하는 實際 世代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多少 意味가 다른 世代라는 것이 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始源的 樣式이라는 第一期의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이 典型的 塔婆라 할 第二期의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함끠 世代的으론 新羅 中代 前期에 合쳐질 수도 있는 것인 ▶P57-1이렇게 되면 매우 論述에 있어 混亂될 嫌이 있음으로 해서 便宜的 圖式的이나마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 統一 以前의 第一期의 塔婆라 하고 感恩塔 以下 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 等율 第二期 塔婆─ 世代的으론 中代前期의 塔婆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하여 이러한 世代 問題를 내거는 것은 塔婆糾 世代的 動向이란 것을 살피기 爲한 것임이 主見의 하나인 까닭이다.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 등 전형적 탑파라 말하고 조선석탑파사상 제2기를 형성하는 탑파라 말하며, 세대적으로는 문무왕 때부터 성덕왕대까지의 중대 전기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탑이 전고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일, 기단이 중층기단으로서 하층은 저평광대하고 상층은 고대포후하되 상대복석에는 초층옥신을 받기 위한 '괴임'이 중단으로 되어 있고, 상대복석에는 상대중석을 받기 위한 방각과 반호형 '몰딩'이 있으며, 중대석에는 상대에 일면사개의 영주, 하대중석에는 일면오개의 영주가 있으며
이일, 초층옥신은 사개우주가 별석이며 사개벽면석이 별석이며(나원리탑은 이미 과도성을 보임)
삼일, 옥석헌미는 수평이요 상부 낙수면은 아무런 층절이 없는 경사면이요 사주형옥면의 사우간각면엔 우동 형식의 조의도 없고, 상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옥상에 상단의 「괴임」이 있고 옥리에는 하등 조각이 없을 뿐더러 옥석 「밭임」이란 것이 정연히 오층단형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중대 전기에 한정시킨 것은 이미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양식적 상안 이를 감은탑이 문무왕대로 비롯하여 신문왕 초년까지에 완성된 사실에서 시작하여 고선·중앙·나원리 등 제탑이 양식적으로 거의 동류된 데서 같은 세대에 둔 것이지만, 그 하한을 하필 성덕왕대까지 결정한 것은 사료적으로는 확실한 근거가 없으되, 이 사탑은 기풍상 성당의 기풍이 농후할 뿐더러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된 와당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이 중대 전기로서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양식의 일단 저하된 제작들이 대개는 차대 즉 중대 후기(효성왕대부터 혜공왕대까지)에 많이 귀속되어지는 점에서 한 개의 도식적 분류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중대 후기에 귀속되는 조선석탑으로서의 제3기에 속할 양식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쪽수▶P57-2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 等 典型的 塔婆라 말하고 朝鮮石塔婆史 上 第二期를 形成하는 塔婆라 말하고 世代的으론 文武王때부터 聖德王代까지의 中代前期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塔이 前稿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一日, 基壇이 重層基壇으로서 下層은 底平廣大하고 上層은 高大鋪厚하되 上臺覆石에는 初層屋身을 받기 爲한「괴임」이 重段으로 되어있고 上臺覆石에는 上臺中石을 받기 爲한 方角과 半弧形 「몰딩」이 있으며 中臺石에는 上臺에 一面四個 檸柱, 下臺中石에는 一面五個의 檸柱가 있으며
二日, 初層屋身은 四個隅柱가 別石이며 四個壁面石이 別石이며(羅原里塔은 이미 過渡性을 보임)
三日, 屋石軒尾는 水平이요 上部 落水面은 아무런 層節이 없는 傾斜面이요 四注形屋面의 四隅桿角面엔 隅棟 形式의 彫意도 없고 上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屋上에 上段의「괴임」이 있고 屋裏에는 何等 彫刻이 없을 뿐더러 屋石「밭임」이란 것이 整然히 五層段形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點

等에서 共通性을 갖고있다. 이것을 中代前期에 限定시킨 것은 이미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樣式的 ▶P58上眼 이를 感恩塔이 文武王代로 비롯하여 神文王 初年까지에 完成된 史實에서 시작하여 高仙·中央·羅原里 等 諸塔이 樣式的으로 거의 等類된 데서 같은 世代에 둔 것이지만 그 下限을 何必 聖德王代까지 決定한 것은 史料的으론 確實한 憑據가 없으되 이 四塔은 氣風上 盛唐의 氣風이 濃厚할 뿐더러 中央塔附近에서 發見된 瓦當같은 것이 一般히 이 中代前期로서의 特色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樣式의 一段 低下된 諸作들이 대개는 次代 即 中代後期(孝成王代부터 惠恭王代까지)에 많이 歸屬되어지는 點에서 한 개의 圖式的 分類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中代 後期에 歸屬되는 朝鮮石塔으로서의 第三期에 所屬될 樣式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본문1-2: 2-1. 第三期的作品들




































본문1-3: 제목@




































본문2-2: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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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원문주석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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