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도시문화의 기원(2)

North Korea Humanities

최솔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0일 (수) 10:11 판 (본문1-2: ② 은상족의 유래 및 도시문화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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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도시문화의 기원(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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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中國都市文化의 起源 (二)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13 발행기관 @
저자 도유호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3월
시작쪽 110쪽 종료쪽 145쪽 전체쪽 036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二. 은상도시문화




본문1-1: ① 도시문화의 의의


농촌 즉 촌락과 도시와의 구별은 일견 확연한 듯하나, 사실은 퍽 곤란한 것이니, 현재에도 바로 농촌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도시라고 하기도 어려운 경우가 퍽 많은 것과 같은 모양으로, 선사시대 내지 유사시대 초기에 있어서도 사세(사세)가 그러했던 것이다. 그러면 최초에 대체로 도시는 여하히 하여 기원되었느냐고 하면, 그것은 참말 어려운 문제이다.
쪽수▶P110-1農村 即 村落과 都市와의 區別은 一見 確然한 듯하나, 事實은 퍽 困難한 것이니, 現在에도 바로 農村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都市라고 하기도 어려운 境遇가 퍽 많은 것과 同樣으로, 先史時代 乃至 有史時代 初期에 있어서도 事勢가 그러했든 것이다. 그러면 最初에 大體로 都市는 如何히 하여 起源되었느냐고 하면, 그것은 참말 어려운 問題이다.
민속학(종족학)상에서 이 도시문화의 기원에 관하여 좀 구체적으로 논한 이는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이요, 선사학상에서 이 도시문화를 발전사적 관련에서 좀 체계 있게 논한 이는 멩힌 교수이다. 슈미트 신부는 토템적 수렵문화에 있어, 그들의 비교적 정주적인 생활에 수반하여, 여기서 발전된 수공업, 미술, 상업 등은 그것이 벌써 도시문화의 단서라고 논하였다. 현대문주1▶거기서 그는 die Anfange der “stadtischen” Kultur라고 썼는데, 도시적이란 형용사에 이렇게 인용표를 첨가한 것은, 이 도시적이란 용어에 다소 어폐가 있음을 지시하는 것이니, 그도 그것이 아직 완전한 도시문화 현상이 아님은 간과치 않은 것이다.[a 1] 그는 다시 토템문화와 모권문화와의 종합으로 형성된 ‘토템적 모권문화권’을 논함에 제하여, ‘농업’(즉 재배)과 도시적 공업의 종합에 의하여 형성되는 ‘도시촌락’들(Stadt-Dörfer)을 지적하며, 선사시대의 이집트, 인도, 페루 또는 어느 정도까지는 바빌론에도, 이러한 ‘소국가형체’를(kleine Stastsgetbilde)이 있었음을 예상한다. 그는 이런 ‘소국가형’의 기저에, 후에 목유민들이 침입하여 거기서 대국가가 성립됨을 논한다. 현대문주2▶그리하여 이집트과 바빌론에 셈(Semiten) 과 함(Hamiten)의 양 족이 침입하여 거기서 대제국이 기원된 예를 디 모르간의 저서(L. de Morgan; Les Premières Civilisations, P. 239)에서 이끌어 보이었다.[a 2]
쪽수▶P110-2民俗學(種族學)上에서 이 都市文化의 起源에 關하여 좀 具體的으로 論한 이는 쉬밀 及 콥퍼쓰 兩師이요, 先史學上에서 이 都市文化를 發展史的 關聯에서 좀 體系 있게 論한 이는 멩긴 敎授이다. 쉬밀 神父는 「토템」的 狩獵文化에 있어, 그들의 比較的 定住的인 生活에 伴하여, 여기서 發展된 手工業, 美術, 商業 等은 그것이 벌써 都市文化의 端緖라고 論하였다. 원문주1▶거기서 그는 die Anfange der “stadtischen” Kultur라고 썼는대, 都市的이란 形容詞에 이렇게 引用表를 添加한 것은, 이 都市的이란 用語에 多少 語弊가 있음을 指示하는 것이니, 그도 그것이 아직 完全한 都市文化 現象이 아님은 看過치 않은 것이다.[1] 그는 다시 「토템」文化와 母權文化와의 綜合으로 形成된 「토템的 母權文化圈」을 論함에 際하여, 「農業」(即 栽培)▶P111-1과 都市的 工業의 綜合에 依하여 形成되는「都市村落」들(Stadt-Dörfer)을 指摘하며, 先史時代의 埃及, 印度, 「페루」, 又는 어느 程度까지는 巴比倫에도, 이러한 「小國家形體」를(kleine Stastsgetbilde)이 있었음을 豫想한다. 그는 이런 「小國家形」의 基底에, 後에 牧遊民들이 侵入하여 거기서 大國家가 成立됨을 論한다. 원문주2▶그리하여 埃及과 巴比倫에 「셈」(Semiten) 과 「함」(Hamiten)의 兩族이 侵入하여 거기서 大帝國이 起源된 例를 듸·모르간의 著書(L. de Morgan; Les Premières Civilisations, P. 239)에서 이끌어 보이었다.[2]
슈미트과 코퍼스 양 선생는 여기서 다시 목유족의 침입에 의한 대제국들의 건설과 함께, 문명(고급문화)의 기원 및 발전에 관한 목유제족의 문화사적 의의를 고조(高調)한 것은 학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목유문화의 의의를 고조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도시문화는 토템문화에 돌려보내는 만큼, 목유문화와 도시문화와의 관련에 관하여는 별로 언급한 바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주장으로는 농촌문화에서 도시문화로의 과도과정에 대한 설명은 전연 할 수가 없게 된다. 고급문화를 논함에 이르러는 바로 이 과도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더구나 고고학적으로 도시문화라고 칭위할 수 있는 것은, 농촌문화 이후의 것이오 슈미트 및 코퍼스 양 선생가 논한 토템도시란, 결코 도시라고 할 수가 없게 된다.
쪽수▶P111-2쉬밀과 콥퍼쓰 兩師는 여기서 다시 牧遊族의 侵入에 依한 大帝國들의 建設과 함께, 文明(高級文化)의 起源 及 發展에 關한 牧族諸族의 文化史的 意義를 高調한 것은 學界에 널리 알려진 事實이다. 이렇게 牧遊文化의 意義를 高調함에도 不拘하고, 그들은 都市文化는 「토템」文化에 돌려보내는 만큼, 牧遊文化와 都市文化와의 關聯에 關하여는 別로 言及한 바가 없다. 그뿐 아니라 그들의 主張으로는 農村文化에서 都市뮌화로의 過渡過程에 對한 說明은 全然 할 수가 없게 된다. 高級文化를 論함에 至하여는 바로 이 過渡過程이 問題인 것이다. 더구나 考古學的으로 都市文化라고 稱謂할 수 있는 것은, 農村文化 以後의 것이오 쉬밀 及 콥퍼쓰 兩師가 論한 「토템」都市란, 決코 都市라고 할 수가 없게 된다.
고고학상에서 도시문화를 논할 규범은 그 건축물의 유지(遺址)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농촌과 도시와의 구별은 곤란한 경우가 퍽 많은 것이다. 농촌이라도 거기에 성벽이 둘러쌌으면, 그것은 벌써 도시에 가까워지는 경우가 많으니, 유럽 중세기의 도시에 관하여도 사세는 유사했던 것이다. 현대문주3▶그런 고로 그 이론 초시에 있어서, 농촌과 도시의 구분점은 성벽에 있다고 한 것은, 그 이론의 근거가 박약함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정의 일면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이다.[a 3] 선사시대에 있엇어도, 이 성벽의 의의는 동일했던 것이다. 대촌락에 성벽이 둘러싼 유지를 보건대, 그것은 촌락으로 해서는 규모가 너무나 크고, 도시로 해서는 아직 너무나 적은 경우가 많다. 사세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도시는 결국 촌락과는 구별할 수가 있게 된다.
쪽수▶P111-3考古學上에서 都市文化를 論할 規範은 그 建築物의 遺址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農村과 都市와의 區別은 困難한 境遇가 퍽 많은 것이다. 農村이라도 거기에 城壁이 둘려쌌으면, 그것은 벌써 都市에 가까워지는 境遇가 많으니, 歐羅巴 中世紀의 都市에 關하여도 事勢는 類似했든 것이다. 원문주3▶그런 故로 그 理論 初始에 있어서, 農村과 都市의 區分點은 城壁에 있다고 한 것은, 그 理論의 根據가 薄弱함에도 不拘하고, 當時 事情의 一面을 如實히 反影하는 것이다.[3] 先史時代에 있엇어도, 이 城壁의 意義는 同一했든 것이다. 大村落에 城壁이 둘러싼 遺址를 보건대, 그것은 村落으로 해서는 規模가 너무나 크고, 都市로 해서는 아직 너무나 적은 境遇가 많다. 事勢가 이러함에도 不拘하고 都市는 決局 村落과는 區別할 수가 ▶P112-1있게 된다.
도시의 유지가 농촌의 유지보다 범위가 컸으면, 그것은 또 그 도시의 주민은 단순한 농민만이 아니였던 소식을 전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슈미트, 코퍼스 양 씨가 고조한 공업 및 상업의 경영이 있엇다. 그 주민은 다수(물론 비교적 의미에서) 하였다. 그 건축물들은 비교적 대규모적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사회 구성에 있어, 재래의 횡적 구분(horizontale Gliederung)의 대신에, 여기서는 구분이 종적(vertikal)으로 되어있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이 종적 구분은 물론 도시문화에서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단서는 벌써 그 전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계급적 구성 좀 확연히 된 것은 아마 여기에 이르러 가능했을 것이다. 그것은 이하에 더 논하기로 하고, 그러면 이렇게 촌락문화와는 근본적으로 구별하게 되는 도시문화는 여하히 하여 발생하였는가?
쪽수▶P112-2都市의 遺址가 農村의 遺址보다 範圍가 커있으면, 그것은 또 그 都市의 住民은 單純한 農民만이 아니엿든 消息을 傳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쉬, 코 兩氏가 高調한 工業 及 商業의 經營이 있엇다. 그 住民은 多數(勿論 比較的 意味에서) 하였다. 그 建築物들은 比較的 大規模的이엿다. 그뿐 아니라 그 社會 構成에 있어, 在來의 橫的 區分(horizontale Gliederung)의 대신에, 여기서는 區分이 縱的(vertikal)으로 되어있는 것을 엿볼 수가 있다. 이 縱的 區分은 勿論 都市文化에서 비로소 始作된 것은 아니다. 端緖는 벌써 그 前에 있엇든 것이다. 그러나 階級的 構成 좀 確然히 된 것은 아마 여기에 이를어 可能했을 것이다. 그것은 以下에 더 論하기로 하고, 그러면 이렇게 村落文化와는 根本的으로 區別하게 되는 都市文化는 如何히 하여 發生하였는가?
멩힌 교수는 도시문화의 기원지를 양하(兩河)지대와는 떠나서 서부 투르키스탄에 찾으려고 한다. 아나우에서 발견된 도시문화의 유지를, 그는 지금까지 알려진 도시문화 중 최고(最古)의 것으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그는 도시문화의 기원에 관한 저간의 소식을 얻어 들으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그것은 농촌문화(신재배문화와 축우(畜牛)문화의 종합으로 된)와 목유문화, 그 중에도 특히 축우문화와의 종합으로 된 것이라고 추측한다.
쪽수▶P112-3멩긴 敎授는 都市文化의 起源地를 兩河地帶와는 떠나서 西部 「투르케스탄」에 찾을려고 한다. 「아나우」에서 發見된 都市文化의 遺址를, 그는 只今까지 알려진 都市文化 中 最古의 것으로 取扱할 뿐만 아니라, 여기서 그는 都市文化의 起源에 關한 這間의 消息을 얻어 들을려고 한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그것은 農村文化(新栽培文化와 畜牛文化의 綜合으로 된)와 牧遊文化, 그 中에도 特히 畜牛文化와의 綜合으로 된 것이라고 推測한다.
아나우에는 주로 문화층이 3개가 있었는데, 제1 및 제2기는 북구(北丘)에 있고, 벌써 청동기시대인 제3기는 남구(南丘)에 있다. 도시문화는 제2기에서 보이고 제1기는 아직 도시문화의 유지는 아니다. 현대문주4▶그러나 여기에 다소 도시문화의 단서가 보이는 듯도 하다 펌펠리씨는 이 아나우와 수사지대(Susiana)와의 도시문화가 상호 관련된 것을 지적하는 一方, 수사의 도시문화가 아나우 제2기 (AnauⅡ)보다 더 발전된 것, 따라서 아나우 도시문화편이 더 오랜 것을 논하였다.[a 4] 그리고 보면 아나우에 최고(最古)의 도시문화를 찾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도시문화가 기원된 것이라고는 아직 주장할 근거가 그리 견고한 것은 아니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멩힌 교수의 의견을 좀 들어보기로 하자.
쪽수▶P112-4「아나우」에는 主로 文化層이 三個가 있었는대, 第一 及 第二期는 北丘에 있고, 벌써 靑銅器時代인 第三期는 南丘에 있다. 都市文化는 第二期에서 뵈이고 第一期는 아직 都市文化의 遺址는 아니다. 원문주4▶그러나 여기에 多少 都市文化의 端緖가 보이는 듯도 하다 펌펠리氏는 이 「아나우」와 「쑤사」地帶(Susiana)와의 都市文化가 相互 關聯된 것을 指摘하는 一方, 「쑤사」의 都市文化가 「아나우」 第二期 (AnauⅡ)보다 더 發展된 것, 따라서 「아나우」 都市文化便이 더 오랜 것을 論하였다.[4] 그리고 보면 「아나우」에 最古의 都市文化를 찾는 것도 無理는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都市文化가 起源된 것이라고는 아직 主張할 根據가 그리 堅固한 것은 아니다. 인제 여기서 우리는 멩긴 敎授의 意見을 좀 들어보기로 하자.

현대문주5▶『…아나우 제1기는 농촌기 이전이다. 그러나 비록 원신석기시대적(Protoneolithisch)임에도 불구하고, 건축 및 주거양식에 의하여, 다소 도시적 성질을 함유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도시제의 근원을 각생동물사양(角生動物飼養)문화(Hornvielsichtertum)와 붙잡어 맬 수가 있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거기에는 신석기시대 초기의 그 외의 양 문화나(즉 축돈문화 및 기승동물사양문화—도) 또는 그들의 후신의 영향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아나우 제2기는 가장 여러 방향과 관계를 갖었다. 그것은 최고(最古)의 도시문화를 제시한다. 그랬다고 바로 대표적의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금후 퍽 낳은 증거를 발견할런지도 모르겠으나, 그러나 이것으로도, 도시문화는 축우문화와 기승동물사양문화 혹은 황원(荒原)문화가 중첩한 것에서, 촌락문화와의 협력하에 기원된 것인 듯하나, 단순히 촌락문화와 황원문화와의 혼합만으로 된 것은 아니리라는 것만은, 넉넉히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오직 조그만 색조이나, 중요한 것이다.』[a 5]
(Anau I ist vorbänerlich, besitzt aber, obwold proto-neolithusch, durch seinen Hausbau und die Art der Niederlassung einen etwas städtischen Charakter. Vielleicht darf man also städtisches Wesen an der Wurzel irgendwie näher mit dem Hornviehzüchter tume verquicken, freilich nicht ohne dass die beiden anderenNachfahren dabei von Einfluss gewesen wären. Anau II weist ja Beziehungen nach den verschiedensten Richtungen hin auf. Es repräsentiert älteste Start- kultur, olue gerade besonders typisch dafür sein zu müssen. Vielleici t finden wir noch einmal viel bessere Belege. Aber es g uügt, um wahrscheinlich zu machen, dass die Stadtkultur aus einer Überlagerung von Rinderzüchter- und Reittierzüchter- oder Steppenkultur unter Mitwirkung von Dorfkulturen entstanden ist, aber nicht einfach durch Vermengung von Dorf- und Steppenkultur. Das ist eine kleine, aber nicht unwi chtige Nuancierung)

쪽수▶P113-1

원문주5▶『…「아나우」 第一期는 農村期 以前이다. 그러나 비록 原新石器時代的(Protoneolithisch)임에도 不拘하고, 建築 及 住居樣式에 依하여, 多少 都市的 性質을 含有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都市制의 根原을 角生動物飼養文化(Hornvielsichtertum)와 붓잡어맬 수가 있지 않은가고 생각한다. 勿論 그랬다고, 거기에는 新石器時代 初期의 其外의 兩文化나(即 畜豚文化 及 騎乘動物飼養文化—都) 又는 그들의 後身의 影響이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아니 「아나우」 第二期는 가장 여러 方向과 關係를 갖었다. 그것은 最古의 都市文化를 提示한다. 그랬다고 바로 代表的의 것이라는 것은 아니다. 今後 퍽 낳은 證據를 發見할런지도 몰으겠으나, 그러나 이것으로도, 都市文化는 畜牛文化와 騎乘動物飼養文化 或은 荒原文化가 重疊한 것에서, 村落文化와의 協力下에 起源된 것인 듯하나, 單純히 村落文化와 荒原文化와의 混合만으로 된 것은 아니리라는 것만은, 넉넉히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오직 조금한 色調이나, 重要한 것이다.』[5]
(Anau I ist vorbänerlich, besitzt aber, obwold proto-neolithusch, durch seinen Hausbau und die Art der Niederlassung einen etwas städtischen Charakter. Vielleicht darf man also städtisches Wesen an der Wurzel irgendwie näher mit dem Hornviehzüchter tume verquicken, freilich nicht ohne dass die beiden anderenNachfahren dabei von Einfluss gewesen wären. Anau II weist ja Beziehungen nach den verschiedensten Richtungen hin auf. Es repräsentiert älteste Start- kultur, olue gerade besonders typisch dafür sein zu müssen. Vielleici t finden wir noch einmal viel bessere Belege. Aber es g uügt, um wahrscheinlich zu machen, dass die Stadtkultur aus einer Überlagerung von Rinderzüchter- und Reittierzüchter- oder Steppenkultur unter Mitwirkung von Dorfkulturen entstanden ist, aber nicht einfach durch Vermengung von Dorf- und Steppenkultur. Das ist eine kleine, aber nicht unwi chtige Nuancierung)

멩힌은 여기서 축우민이 도시문화 기원에 가장 큰 역할을 띤 듯하다고 하는 것이다. 저간의 사세를 지금은 좀 더 확연히 알겠다고, 그는 나에게 말한 일이 있다. 멩힌은 아나우 도시문화에는 사마(飼馬)의 가능성이 있었음을 아직 부인치 않았다. 그러하였기에 그는 기승동물 사양문화도 여기서 든 것이다. 그런데, 바로 말의 사양이 여기서는 문제인 것이다. 마골은 문화의 최저층에서부터 시작하여 최후층까지에 다수로 출토되었다. 그것은 아직 목축의 형적이 조금도 없는 층에서 다른 야생동물(수렵동물)의 유골과 함께 발견되기 시작하여 후에는 다른 가축동물의 유골과 함께 발견된다. 그리고 그것은 모두 동일한 종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당시 아나우 동물의 유골을 검사한 뒤르스트 교수(Ulrich Duerst)의 보고에 의하면, 이것은 야생인지 가축인지를 구별할 수가 도저히 없다고 한다. 馬는 황원의 목축민 하에 있어서는 사축시에도 그 생활상태가 야생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고로, 그 골격상에도 하등 변화가 없다고 한다. 현대문주6▶따라서 아나우에서 출토된 것은, 그것이 모두 야생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또 사축된 것도 있었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한다.[a 6] 나의 졸견에 의하면 그런데, 암만해야 여기에는 축마(畜馬)의 형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미 학계에 잘 알려있듯이, 전(前)아시아의 고대문명에는 말이 결여하였다. 말은 인도하지대의 도시문화에도 없었던 것이다. 만약 전아시아가 서부 투르키스탄과 관련이 있었고, 투르키스탄의 도시문화가 그리로 갔었다면, 거기에 말만은 안 갔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 축마와 인연이 깊은 몽고인종(황인종)계의 두골은 아나우에는 조금도 안 보이는 것도, 여기서 다소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뿐 아니라, 이 마골 운운의 것은 사실은 마골이 아니라 ‘당나귀 뼈’(騾骨)일런지도 모를 것이다. ‘말뼈’와 ‘당나귀 뼈’의 구별은 당당한 학자들 사이에도 구별이 곤란하여 흑백을 다루게 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과연 이 아나우의 ‘마골’ 운운하는 것는 ‘당나귀 뼈’라고 논단한 학자도 있다는 말을 나는 풍문에 들었었다.(멩힌 교수에게서) ‘아나우’ 발굴보고 중에는 그렇지 않아도 의혹되는 개소가 많다. 그 최하층에는 채색도기가 보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가축의 형적은 전연 없는 것, 따라서 그것은 순전한 재배문화였다는 것은, 암만 해야 검사 부족에 의한 주장인 듯이 내게는 생각한다. 그리고 보면 아나우 제1기(Anau Ⅰ)는 농촌문화기 이전의 재배문화라는 것도 그리 신빙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쪽수▶P114-1멩긴은 여기서 畜牛民이 都市文化 起源에 가장 큰 役割을 演한 듯하다고 하는 것이다. 這間의 事勢를 只今은 좀 더 確然히 알겠다고, 그는 나에게 말한 일이 있다. 멩긴은 「아나우」 都市文化에는 飼馬의 可能性이 있었음을 아직 不認치 않았다. 그러하였기에 그는 騎乘動物 飼養文化도 여기서 擧한 것이다. 그런대, 바로 馬의 飼養이 여기서는 問題인 것이다. 馬骨은 文化의 最底層에서부터 始作하여 最後層까지에 多數로 出土되었다. 그것은 아직 牧畜의 形蹟이 조금도 없는 層에서 다른 野生動物(狩獵動物)의 遺骨과 함까ㅔ 發見되기 始作하여 後에는 다른 家畜動物의 遺骨과 함께 發見된다. 그리고 그것은 모다 同一한 種으로 되어있다. 그런대, 當時 「아나우」 動物의 遺骨을 檢査한 뛰르스트 敎授(Ulrich Duerst)의 報告에 依하면, 이것은 野生인지 家畜인지를 區別할 수가 到底히 없다고 한다. 馬는 荒原의 牧畜民 下에 잇어서는 飼畜時에도 그 生活狀態가 野生과 조금도 달으지 않은 故로, 그 骨格上에도 何等 變化가 없다고 한다. 원문주6▶따라서 「아나우」에서 出土된 것은, 그것이 모다 野生이라고 하기도 어렵고, 또 飼畜된 것도 있었다고 하기도 어렵다고 한다.[6] 나의 拙見에 依하면 그런대, 암만해야 여기에는 畜馬의 形蹟은 없었든 것 같다. 임의 學契에 잘 알려있듯이, 前亞細亞의 古代文明에는 馬가 缺如하였다. 馬는 印度河地帶의 都市文化에도 없었든 것이다. 萬若 前亞細亞가 西部 「투르케스탄」과 關聯이 있었고, 「투르케스탄」의 都市文化가 그리로 갔었다면, 거기에 馬만은 않 갔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뿐 外라, 이 畜馬와 因緣이 깊은 蒙古人種(黃人種)系의 頭骨은 「아나우」에는 조금도 않 뵈는 것도, 여기서 多少 考慮한 必要가 있다. 그뿐 아니라, 이 馬骨 云云의 것은 事實은 馬骨이 아니라 「당나구 뼈」(騾骨)일런지도 물을 것이다. 「말뼈」와 「당나구 뼈」의 區別은 堂堂한 學者들 새에도 區別이 困難하여 黑白을 다루게 된 境遇가 한두 번이 아니다. 果然 이 「아나우」의 「馬骨」 云云 者는 「당나구 뼈」라고 論壇한 學者도 있다는 말을 나는 風聞에 들었었다.(멩긴 敎授에게서) 「아누우」 發掘報告 中에는 그렇지 않어도 疑惑되는 個所가 많다. 그 最下層에는 彩色陶器가 뵈임에도 不拘하고, 거기에는 家畜▶P115-1의 形蹟은 全然 없는 것, 따라서 그것은 純全한 栽培文化였다는 것은, 암만 해야 檢査 不足에 依한 主張인 듯이 내게는 생각한다. 그리고 보면 「아나우」 第一期(Anau Ⅰ)는 農村文化期 以前의 栽培文化라는 것도 그리 信憑할 만한 것이 못 된다.
이상에서 말은 제거하고 보면, 소가 문제이다. 그러면 축우문화와 농촌문화와의 종합이 또 논제가 된다. 그러면 축우민이 농촌에 들어와서, 그 종합의 결과로 도시문화가 일어났는가? 그것도 그리 확연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도, 축우문화소는 농촌문화에 벌써 함유되었는 만큼, 이 축우문화적 작용은 벌써 농촌문화 자체 내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런데 또 하나 주의할 것은, 수사와 아나우는 펌펠리씨가 주장하듯이 과연 계통이 동일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우가 더 오래다는 것은 퍽 고려할 여지가 있는 주장이다. 그외 반대로 아나우는 제2차적의 것일런지도 모를 것이다. 즉, 전아시아 도시문화의 파급에 의하여 아나우에 도시문화가 발생하였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나우의 채색도기는 여하간 전아시아에서 온 것이다. 도시문화만이 그와는 반대로 아나우에서 전아시아로 갔다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물론 기후의 변화와 지리조건의 변천으로 아나우의 인간이 전아시아편을 향하여 이동한 형적이 보이기도 하나, 그 이동 전에 벌써 전아시아에는 도시문화가 있었을 것은 십분 가능한 것이다. 이렇고 보면, 농촌문화의 요람지가 역시 도시문화의 요람지가 되고 만다.
쪽수▶P115-2以上에서 馬는 除去하고 보면, 牛가 問題이다. 그리면 畜牛文化와 農村文化와의 綜合이 또 論題가 된다. 그리면 畜牛民이 農村에 들어와서, 그 綜合의 結果로 都市文化가 일어났는가? 그것도 그리 確然히 對答할 수 있는 問題가 아니다. 그보다도, 畜牛文化素는 農村文化에 벌써 含有되었는 만큼, 이 畜牛文化的 作用은 벌써 農村文化 自體 內에서 可能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런대 또 하나 注意할 것은, 「쑤사」와 「아나우」는 펌펠리氏가 主張하듯이 果然 系統이 同一한 것이다. 그러나, 「아나우」가 더 오래다는 것은 퍽 考慮할 餘地가 있는 主張이다. 그외 反對로 「아나우」는 第二次的의 것일런지도 몰을 것이다. 即, 前亞細亞 都市文化의 波及에 依하여 「아나우」에 都市文化가 發生하였는지도 몰을 것이다. 「아나우」의 彩色陶器는 如何間 前亞細亞에서 온 것이다. 都市文化만이 그와는 反對로 「아나우」에서 前亞細亞로 갔다는 理由가 어대에 있을가? 勿論 氣候의 變化와 地理條件의 變天으로 「아나우」의 人間이 前亞細亞便을 向하여 移動한 形蹟이 뵈이기도 하나, 그 移動 前에 벌써 前亞細亞에는 都市文化가 있었을 것은 十分 可能한 것이다. 이렇고 보면, 農村文化의 搖籃地가 亦是 都市文化의 搖籃地가 되고 만다.
이 도시문화의 기원에 관하여는, 참말 그 결론이 어려운 것이다. 그 기원은 여하하였던, 이 도시문화는 형성 후, 역시 (그 전의 다른 문화와 같은 모양으로) 사방을 향하여 전파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중국에도 온 것이다. 도시문화는 고급문화 즉 문명의 출발점이다. 그런 고로 civilisation이란 자는 ‘도시화’라는 의미에서 나온 추상명사인 것이다. 여기서 문자도 기원되었다. 또 금속기시대도 여기서 출발한 것이다.
쪽수▶P115-3이 都市文化의 起源에 關하여는, 참말 그 決論이 어려운 것이다. 그 起源은 如何하였던, 이 都市文化는 形成 後, 亦是 (其前의 달은 文化와 同樣으로) 四方을 向하여 傳派하기 始作하였든 것이다. 그것이 中國에도 온 것이다. 都市文化는 高級文化 即 文明의 出發點이다. 그런 故로 civilisation이란 字는 「都市化」라는 意味에서 나온 抽象名詞인 것이다. 여기서 文字도 起源되었다. 또 金屬器時代도 여기서 出發한 것이다.
이 도시문화에는 그러나, 민속학적으로 고찰하면, 이상하게도 가장 원시문화의 현상, 즉 슈미트, 코퍼스 양 선생이 운위하는 ‘원(原)문화’(Urkultur)의 문화현상이 많은 것이다. 현대문주7▶그레브너씨는 이것을 몬 첨 지적하였을 따름이오, 그 설명의 도는 몰랐든 것이다.[a 7] 현대문주8▶슈미트, 코퍼스 양 선생는, 여기에 관하여, 그것은 고급문화의 주요 건설자인 목유민은, ‘원문화’에서 파생한 까닭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a 8]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거기에도 해답 않 되는 바가 많다. 즉 예하면, 가장 원시문화에 보이는, 조각, 회화가 고급문화에 왔어 재현하는 것은 이것이 결여한 목유문화로는 설명할 수가 없다. 또 가장 원시문화에 보이는 홍수신화가 고급문화에 재현하는 것도 목유문화와 ‘원문화’와의 관계로는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문제의 해답은 금후의 연구에 맡길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목유문화를 통하여 설명하거나, 또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이 사실에 의하여, 목유문화가 원문화에서 직접 파생하였다는 이론적 근거를 운위하는 것은 그 이유가 가장 박약한 것이다.
쪽수▶P115-4이 都市文化에는 그러나, 民俗學的으로 考察하면, 異常하게도 가장 原始文化의 現象, 即 쉬, 콥 兩師가 云謂하는 「原文化(Urkultur)의 文化現象이 많은 것이다. ▶P116-1원문주7▶그렙너氏는 이것을 몬 첨 指摘하였을 따름이오, 그 說明의 道는 몰랐든 것이다.[7] 원문주8▶쉬밀, 콥퍼쓰 兩師는, 여기에 關하여, 그것은 高級文化의 主要 建設者인 牧遊民은, 「原文化」에서 派生한 까닭이라고 主張하는 것이다.[8] 그 主張에도 一理가 있기는 하나, 그러나 거기에도 解答 않 되는 바가 많다. 即 例하면, 가장 原始文化에 뵈이는, 彫刻, 繪畵가 高級文化에 왔어 再現하는 것은 이것이 缺如한 牧遊文化로는 說明할 수가 없다. 또 가장 原始文化에 뵈이는 洪水神話가 高級文化에 再現하는 것도 牧遊文化와 「原文化」와의 關係로는 說明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問題의 解答은 今後의 硏究에 마낄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을 牧遊文化를 通하여 說明하거나, 又는 一步 더 나가서 이 事實에 依하여, 牧遊文化가 「原文化」에서 直接 派生하였다는 理論的 根據를 云爲하는 것은 그 理由가 가장 薄弱한 것이다.
이 도시문화와 관련하여 논할 것은 또 사회의 계급적, 종적 구성인 것이다. 또 종래에는 국가의 기원이 바로 문제인 것이다. 현대문주9▶나는 연구보고 당시에, 국가의 기원은 이 도시문화의 기원과 관련하여 논하여야 된다고 주장한 일이 있거니와, 계급분화의 기저 위에 형성된 국가의 기원에 관하여는 사실 이 도시문화론을 제외하고는 이론적 근거가 적은 것이다.[a 9] 그런데 여기서, 도시문화의 기원을 목유민의 농민 정복에 찾게 되면 거기서 18세기 이래, 현금의 오펜하이머(Franz Oppenheimer)에 이르기까지, 학설의 한 계통을 형성하는 소위 ‘정복국가설’에는 물론 한 의의가 있기도 하겠다. 그러나 도시문화의 기원에는 암만 하여야 ‘정복’의 역할은 그리 큰 것은 아니다. 목유민의 정복 이전에 도시문화는 농촌의 발전과정으로 일어났으며, 또 도시문화에 있어서는, 그 경제적 기초가 계급분화의 사회현상을 자연적으로 야기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 바이다.
쪽수▶P116-2이 都市文化와 關聯하여 論할 것은 또 社會의 階級的, 縱的 構成인 것이다. 또 仍終에는 國家의 起源이 바로 問題인 것이다. 원문주9▶나는 硏究報告 當時에, 國家의 起源은 이 都市文化의 起源과 關聯하여 論하여야 된다고 主張한 일이 있거니와, 階級分化의 基底 우에 形成된 國家의 起源에 關하여는 事實 이 都市文化論을 除外하고는 理論的 根據가 적은 것이다.[9] 그런데 여기서, 都市文化의 起源을 牧遊民의 農民 征伏에 찾게 되면 거기서 十八世紀 以來, 現今의 「오펜하이머」(Franz Oppenheimer)에 일으기까지, 學說의 一系統을 形成하는 所謂 「征伏國家說」에는 勿論 一意가 있기도 하겠다. 그러나 都市文化의 起源에는 암만 하여야 「征伏」의 役割은 그리 큰 것은 아니다. 牧遊民의 征伏 以前에 都市文化는 農村의 發展過程으로 일어났으며, 또 都市文化에 있어서는, 그 經濟的 基礎가 階級分化의 社會現象을 自然的으로 惹起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 바이다.
농촌문화에 있어서 보면 거기에는 아직도 원시 공동사회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농촌문화에는 사유재산제는 적어도 토지 소유에 있어서는, 암만 해야 있은 형적이 없다. 현대문주10▶이것은 ‘게르만’의 유사시대에 있어서도 그 여파가 남아있은 것으로, 유럽 사학계에서 이것을 맨 처음 발견한 자는 타말(打末)의 측량가(후에는 대학교수) 올루프젠(Oluffsen)이다.[a 10]
쪽수▶P116-3農村文化에 있어서 보면 거기에는 아직도 原始 共同社會的 傾向이 있는 것이다. 農村文化에는 私有財産制는 적어도 土地 所有에 있어서는, 암만 해야 있은 形蹟이 없다. 원문주10▶이것은 「게르만」의 有史時代에 있어서도 그 餘波가 남어있은 것으로, 歐羅巴 史學界에서 이것을 몬첨 發▶P117-1見한 者는 打末의 測量家(後에는 大學敎授) 올루ᅋᅳ젠(Oluffsen)이다.[10]
원(原)문화기에는 물론 계급제가 없다. 그들은 완전한 ‘코뮤니즘’ 사회를 형성하는 것으로 이 소유형식은 에스키모족 모양으로 동산(動産)에까지 이른 경우가 많은 것이다. 그레브너는 토템적 수렵문화에 이르러, 사회구분은 벌써 종적으로 될냐는 경향을 보이는 것을 지적하였었다. 현대문주11▶이것은 목유문화에 이르러는 퍽 더 현저히 발달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계급분화는 결코 완성한 것은 아니다.[a 11]
쪽수▶P117-2「原文化期」에는 勿論 階級制가 없다. 그들은 完全한 「콤뮤늬즘」 社會를 形成하는 것으로 이 所有形式은 「에스키모」族 모냥으로 動産에까지 及한 境遇가 많은 것이다. 그렙너는 「토템」的 狩獵문화에 일을어, 社會區分은 벌써 縱的으로 될냐는 傾向을 뵈는 것을 指摘하였었다. 원문주11▶이것은 牧遊문화에 이르러는 퍽 더 顯著히 發達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階級分化는 決코 完成한 것은 아니다.[11]
그레브너는 모권적 재배문화는 구계단이나 신계단을 막론하고, 모두 ‘코뮤니스틱’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슈미트, 코퍼스 양 선생는 그러나 그 구계단에는 여자를 유권자로 하는, 토지의 사유를 인정한다. 그들도 그러나 재배문화의 신계단만은 「콤뮤늬스틱」임을 인정한다. 재배문화의 구계단에 있어서는 과연 다소 토지사유의 경향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신계단에 이르러는 완전한 코뮤니즘이 출현한다. 이 신계단은, 바로 계급 구성이 다소 발달한 목유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향의 결과는 이미 대두하기 시작했던 사유재산제를 도리어 완전히 해소하여버린 것이다. 그것도 역사발전변증법의 한 작란인 것이다.
쪽수▶P117-3그렙너는 母權的 栽培文化는 舊階段이나 新階段을 莫論하고, 모다 「콤뮤늬스틱」한 것으로 取扱하였다. 쉬, 콥 兩師는 그러나 그 舊階段에는 女子를 有權者로 하는, 土地의 私有를 認定한다. 그들도 그러나 栽培文化의 新階段만은 「콤뮤늬스틱」임을 認定한다. 栽培文化의 舊階段에 있어서는 果然 多少 土地私有의 傾向이 뵈이는 것이다. 그러나 新階段에 이르러는 完全한 「콤뮤늬즘」이 出現한다. 이 新階段은, 바로 階級 構成이 多少 發達한 牧遊文化의 影響을 받았음에도 不拘하고, 이 影響의 結果는 임의 擡頭하기 始作했든 私有財産制를 도로혀 完全히 解消하여버린 것이다. 그것도 歷史發展辨證法의 한 작란인 것이다.
신재배문화의 이 코뮤니즘은, 농촌문화에 와서도 남아있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벌써 동요된 점도 있으니, 첫째 여기에는 노예제도 완전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농촌문화 후에 도시문화가 일어나며, 거기에는 계급분화가 단행된바, 거기서 정당한 의미의 국가는 처음 이러났든 것이다. 그리하여 국가는 최초에 도시국가로 출현하였던 것이다. 그런 고로 라틴어의 civitas도 최초에는 도시를 의미한 것이 후에 국가를 의미하게 된 것이다(로마가 도시명으로, 국가명이 된 것과 서로 함께하여). 그리스의 polis에 있어서도 사세는 동일했던 것이다. 현대의 시민국가가 중세기의 도시국가에 그 기원을 두며 State나 Staat란 말은 이태리어의 도시를 의미하는 말 Stato에 소급되는 사실과 상대하여, 상고 태초의 국가 기원을 연구함은 재미있는 문제이다.
쪽수▶P117-4新栽培文化의 이 「콤뮤늬즘」은, 農村文化에 와서도 남어있은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벌써 動搖된 點도 있으니, 첫째 여기에는 奴隸制도 完全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 農村文化 後에 都市文化가 起生하며, 거기에는 階級分化가 斷行된바, 거기서 正當한 意味의 國家는 처음 이러났든 것이다. 그리하여 國家는 最初에 都市國家로 出現하였든 것이다. 그런 故로 羅典語의 civitas도 最初에는 都市를 意味한 것이 後에 國家를 意味하게 된 것이다(羅馬가 都市名으로, 國家名이 된 것과 相伴하여). 希臘의 polis에 있어서도 事勢는 同一했든 것이다. 現代의 市民國家가 中世紀의 都市國家에 그 起源을 두며 State나 Staat란 語는 伊太利語의 都市를 意味하는 語 Stato에 溯及되는 事實과 相對하여, 上古 太初의 國家 起源을 硏究함은 滋味 있는 問題이다.


























본문1-2: ② 은상족의 유래 및 도시문화의 기원


앞 절에서 우리는 도시문화의 개념을 가장 개요적으로 고찰하였다. 이제 우리는 중국의 도시문화를 논하기로 하자. 중국 도시문화는 지금까지의 사적(史籍)과 고고학적 재료가 허하는 한, 은상(殷商)시대에 그 기원을 찾을 수가 있다. 아니, 중국의 도시제는, 그 형체가 사실은 주대(周代)에 이르러, 확연히 파악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그 기원은 상대(商代)에 있은 것이다. 이것을 좀 자세히 고찰하기 위하여 우리는 은상족의 유래부터 알아보기로 하자.
쪽수▶P119-1前節에서 우리는 都市文化의 槪念을 가장 槪要的으로 考察하였다. 이제 우리는 中國의 都市文化를 論하기로 하자. 中國 都市文化는 只今까지의 史籍과 考古學的 材料가 許하는 限, 殷商時代에 그 起源을 찾을 수가 있다. 아니, 中國의 都市制는, 그 形體가 事實은 周代에 이르러, 確然히 把握할 수가 있는 것이다. 비록 그러나, 그 起源은 商代에 있은 것이다. 이것을 좀 仔細히 考察하기 爲하여 우리는 殷商族의 由來부터 알어보기로 하자.
상족의 유래에 관하여 근본적으로 연구한 분은, 내가 아는 한, 소천탁치(소천琢治) 박사인 것이다. 박사는 중앙연구원(중앙연구원)에서 안양(安陽) 발굴을 시작하기에 전에 사적(史籍)에 의하여 은상족의 유래를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결과는 고고학적 재료 사실에 배치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재료는 박사의 학설을 도리어 지지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주로 박사의 학설을 경개(梗概)적으로 소개하고, 그것을 고고학적 재료로 보충하며, 또 나의 졸견을 다소 가해보기로 한다.
쪽수▶P119-2商族의 由來에 關하여 根本的으로 硏究한 분은, 내가 아는 限, 小川琢治 博士인 것이다. 博士는 中央研究院에서 安陽 發掘을 始作하기에 前에 史籍에 依하여 殷商族의 由來를 찾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硏究結果는 考古學的 材料 事實에 背馳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考古學的 材料는 博士의 學說을 도로혀 支持하게 된 것이다. 나는 여기서 主로 博士의 學說을 梗概的으로 紹介하고, 그것을 考古學的 材料로 補充하며, 또 나의 拙見을 多少 加해보기로 ▶P120-1한다.
박사가 상족의 유래를 천명하기 위하여 취급한 주요 사료는 목천자전(穆天子傳)이다. 목천자전의 사적 가치에 관하여는 일반이 다 잘 아는 바이니, 나는 여기서 별로 사족을 더할 필요가 없다. 소천 박사는 이 목천자전에 보이는 서막(西膜)의 인민이 은인(殷人)과 동종(同宗)인 것이며, 또 이 ‘서막’의 막(膜)은 은도(殷都)의 하나인 ‘박’(亳)과 어근이 동일한 것임에 주의하여, 문제의 해결에 착수한 것이다. 주 목왕(穆王) 서정과 관련하여, 여기에 대하여 박사는 말하기를, 『その規模頗る大でその通過した線路に當る民族は今の南山山脈の北麓に當る鍾山(春山)昆侖の地方に周人と同宗の邦があるが, 之に接してその北及び東北の沙漠に接する地帶 即ち 山北以北黄河の左岸に至るまで, 大抵所謂西膜の地域に屬し, 殷人と同宗に屬するものであった。史記趙世家及秦本紀によりその祖先造父が殷人と同宗なることも從來旣に知れた所であるが, 此の旅行の記事によりその鄕土が西方遙かに 天山の東に至るまで沙漠泉地にゐた事が闡明された。』고 한다.(支那歷史地理硏究續集, 401쪽). 여기서 조부(造父) 운운은 다소 문제이다. 조부가 은인과 동종이었음에는 물론 이의가 없다. 그러나 목왕이 그를 봉한 조성(趙城)의 위치는 산서성(山西省)의 하동(河東)에 찾는 것이 일반적 견해인 만큼 소천 박사의 설의 이 점에는 다소 좌단(左袒)키 어려운 점도 있는 바이다. 그러나 조씨가 돈황에도 있었던 것은 사실인 만큼, 박사의 이 구절에도 상당한 이유는 있다. 여하간 소천 박사의 서막에 관한 지역 결정에는 대체로 보아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박(亳)은 막(膜)과 동일계통어임에도 하등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은도가 亳이라고 하는 것은 은민(殷民)이 서막에서 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소천 박사가 말하는 이 은민은, 안양을 중심으로 한 상대의 은민과는 구별하기 위하여, 원상족(Proto-Shang)이라고 칭한다. 연구보고 당시에도 나는 Proto-Shang이란 용어 하에 이 문제를 취급했었다. 중국 내지에 들어온 은민은, 그들 이전에 온 종족과 융화를 하여 벌써 異종족을 형성했던 까닭이다.
쪽수▶P120-2博士가 商族의 由來를 闡明하기 爲하여 取扱한 主要 史料는 穆天子傳이다. 穆天子傳의 史的 價値에 關하여는 一般이 다 잘 아는 바이니, 나는 여기서 別로 蛇足을 加할 必要가 없다.小川 博士는 이 穆天子傳에 뵈이는 西膜의 人民이 殷人과 同宗인 것이며, 또 이 「西膜」의 膜은 殷都의 하나인 「亳」과 語根이 同一한 것임에 注意하여, 問題의 解決에 着手한 것이다. 周 穆王 西征과 關聯하여, 여기에 對하여 博士는 말하기를, 『その規模頗る大でその通過した線路に當る民族は今の南山山脈の北麓に當る鍾山(春山)昆侖の地方に周人と同宗の邦があるが, 之に接してその北及び東北の沙漠に接する地帶 即ち 山北以北黄河の左岸に至るまで, 大抵所謂西膜の地域に屬し, 殷人と同宗に屬するものであった。史記趙世家及秦本紀によりその祖先造父が殷人と同宗なることも從來旣に知れた所であるが, 此の旅行の記事によりその鄕土が西方遙かに 天山の東に至るまで沙漠泉地にゐた事が闡明された。』고 한다.(支那歷史地理硏究續集, 四〇一頁). 여기서 造父 云云은 多少 問題이다. 造父가 殷人과 同宗이었음에는 勿論 異議가 없다. 그러나 穆王이 그를 封한 趙城의 位置는 山西省의 河東에 찾는 것이 一般的 見解인 만큼 小川 博士의 設의 此點에는 多少 左袒키 어려운 點도 있는 바이다. 그러나 趙氏가 敦煌에도 있었던 것은 事實인 만큼, 博士의 이 句節에도 相當한 理由는 있다. 如何間 小川 博士의 西膜에 關한 地域 決定에는 大體로 보아 別로 疑心할 餘地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亳은 膜과 同一系統語임에도 何等 疑心할 餘地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殷都가 亳이라고 하는 것은 殷民이 西膜에서 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小川 博士가 말하는 이 殷民은, 安陽을 中心으로 한 商代의 殷民과는 區別하기 爲하여, 「原商族」(Proto-Shang)이라고 稱한다. 硏究報告 當時에도 나는 Protoo-Shang이란 用語 下에 이 問題를 取扱했었다. 中國 乃至에 들어온 殷民은, 그들 以前에 온 種族과 融化를 하여 벌써 異種族을 形成했던 까닭이다.
이 원상족은 중앙아시아 알타이 목유민 계통의 족으로 그 언어도 서장(西藏)지나어계의 언어가 아니라, 알타이계의 언어였던 것은 소천 박사가 간파한 바이다. 즉 주 목왕이 서방에 순수(巡狩)할 때, 서막인의 언어가, 당시 이미 단철적인 지나어로 화하여벌인 주인(周人)의 언어와는 달랐음을 엿볼 수가 있는바, 목천자전에는 그런 고로 초목명, 지명 등에 관하여, 이것은 서막어로는 무엇이라고 한다는 설명, 즉 「西膜之所謂」의 구가 있다. 동전(同傳) 제2권에는 예컨대,

甲申至于黑水, 西膜之所謂鸿鷺

라는 구가 있는바, 여기에 관하여 소천 박사는 「鸿鷺は準噶里語の哈拉即ち土耳其語の Kara, 日本語のクロである。故に殷人は土耳共系に屬する民族であったことは疑を容れる餘地がない。』(同 435쪽)라고 한다. 여기서 소천 박사가 터키계라는 것은 즉 내가 이상에 알타이계라고 한 것과 동일한 의미의 것으로, 원상족은 이 알타이계의 어를 사용하던 것이 단철어를 사용하는 종족의 지역에 들어오며, 그들의 글도 단철화하기 시작했으니, 소천 박사도 지적하듯이, 예하면, 홍로(鸿鷺)가 단철화하여, 흑궁(黑弓), 흑시(黑矢)를 노궁노시(盧弓盧矢)라고 하며, 흑수를 노수라고 한 것은 그 좋은 예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예에서 보면, 홍로가 노(盧)로 단철화하기 벌써 이전에, 동일어는 벌써 흑(黑)으로 단철화한 것을 엿볼 수가 있다. ‘흑’은 즉 ‘홍로’란 어의 두자(頭字)를 취하여 된 단철화인 것이다. 즉 ‘흑’ 자신이 벌써 알타이계어의 중국어적 단철화인 것이다. 이것은 알타이 목유문화계의 종족들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단 한 번이 아니라, 그 횟수가 여러 번인 것을 빙증하는 것이다.
쪽수▶P120-3이 原商族은 中央亞細亞 「알타이」 牧遊民 系統의 族으로 그 言語도 西藏支那語系의 語가 아니라, 「알타이」系의 語▶P121-1이었던 것은 小川 博士가 看破한 바이다. 即 周穆王이 西方에 巡狩할 때, 西膜人의 言語가, 當時 임의 單綴的인 支那語로 化하여벌인 周人의 言語와는 달렀음을 엿볼 수가 있는바, 穆天子傳에는 그런 故로 草木名, 地名 等에 關하여, 이것은 西膜語로는 무엇이라고 한다는 說明, 即 「西膜之所謂」의 句가 있다. 同傳 第二卷에는 例하면,

甲申至于黑水, 西膜之所謂鸿鷺

라는 句가 있는바, 여기에 關하여 小川 博士는 「鸿鷺は準噶里語の哈拉即ち土耳其語の Kara, 日本語のクロである。故に殷人は土耳共系に屬する民族であったことは疑を容れる餘地がない。』(同四三五頁)라고 한다. 여기서 小川 博士가 土耳其系라는 것은 即 내가 以上에 「알타이」系라고 한 것과 同一한 意味의 것으로, 原商族은 이 「알타이」系의 語를 使用하던 것이 單綴語를 使用하는 種族의 地域에 들어오며, 그들의 글도 單綴化하기 始作했으니, 小川 博士도 指摘하듯이, 例하면, 鸿鷺가 單綴化하여, 黑弓, 黑矢를 盧弓盧矢라고 하며, 黑水를 瀘水라고 한 것은 그 好例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의 例에서 보면, 鸿鷺가 盧로 單綴化하기 벌써 以前에, 同一語는 벌써 黑으로 單綴化한 것을 엿볼 수가 있다. 「黑」은 即 「鸿鷺」란 語의 頭字를 取하여된 單綴化인 것이다. 即 「黑」 自身이 벌써 「알타이」系語의 中國語的 單綴化인 것이다. 이것은 「알타이」 牧遊文化系의 種族들이 中國에 들어온 것은 單 한 번이 아니라, 그 回數가 여러 번인 것을 憑證하는 것이다.
이제 은도명으로, 서적에나 갑골문에 실린 박(亳)에 관하여 고찰하건대, 소천 박사는, 현금 신강성(新彊省) 준가르에서 ‘박’은 촌락, 동산(Bag=Dorf, Garten)을 의미한다는 스벤 헤딘씨((Sven Hedin)의 보고에 의하여(동일 32쪽)아래와 같이 말한다.

亳の語原に關しては…或は薄姑, 蒲姑, 番和, 般吾 等の如く二字[で]示し, 或[は]膜薄の如く一字に縮めた場合があつて, 共に現今の新彊省に行はる, 準喝里(東土耳其)語のバク Bag=Dorf, Gartenとは全く同一である。今の此地方の樹木草叢ある泉地に使用される所から推せば, 亳といふ固有名詞は沙漠邊緣に居住した時の殷人の鄕土に行はれた居宅及び聚落を意味する普通名詞であると考えてはよい。
薄膜亳等の地名には散氏銘に出る滩莫の如く之を區別する字を冠するもののあるのはその普通名詞から起った経路を語るもので, 之に反して穆天子傳に出る西膜は此の種の聚落の分布する地方一團を綜括して同民族の居住地を區別した名稱で國名に近い特種の意義になつてゐる。(同四二九頁)(□는 나의 첨가이다.)

쪽수▶P121-2인제 殷都名으로, 書籍에나 甲骨文에 실닌 亳에 關하여 考察하건대, 小川 博士는, 現今 新彊省 準喝里에서 「박」은 村落, 동산(Bag=Dorf, Garten)을 意味한다는 스ᅄᅦᆫ·헤듼氏((Sven Hedin)의 報告에 依하여(同一三二頁)左와 如히 말한다.

亳の語原に關しては…或は薄姑, 蒲姑, 番和, 般吾 等の如く二字[で]示し, 或[は]膜薄の如く一字に縮めた場合があつて, 共に現今の新彊省に行はる, 準喝里(東土耳其)語のバク Bag=Dorf, Gartenとは全く同一である。今の此地方の樹木草叢ある泉地に使用される所から推せば, 亳といふ固有名詞は沙漠邊緣に居住した時の殷人の鄕土に行はれた居宅及び聚落を意味する▶P122-1普通名詞であると考えてはよい。
薄膜亳等の地名には散氏銘に出る滩莫の如く之を區別する字を冠するもののあるのはその普通名詞から起った経路を語るもので, 之に反して穆天子傳に出る西膜は此の種の聚落の分布する地方一團を綜括して同民族の居住地を區別した名稱で國名に近い特種の意義になつてゐる。(同四二九頁)(□는 나의 添加이다.)

소천 박사가 여기서 박(亳)을 준가르(동터키)어라고 하는 것은 물론 그가 언어학자가 아닌 데서 나온 오류이다. 본론 제1장 제2절에서 말한 멩게스(Karl Menges)군의 서신에 의하면, 첫째 준가르어이니, 동터키어이니 하는 것 언어학상으로는 허용할 용어가 못 된다. 이것은 노농러시아에서는 위구르어(Ujgurisch)라고 하는 것으로 멩게스군은 이것을 구어(舊)語와 구별하기 위하여 신위구르어(Neu-Ujgurisch)라고 칭한다고 한다. 그리고 Bag은 터키어가 아니라, 이상에도 이미 (제1장 제2절) 말한 바와 같이 페르시아어라고 한다. ‘박’은 페르시아어로는 동산(Garten)을 의미하는 것으로 투르키스탄(Turkistan)의 관개지대에서는 오아시스 주거를 의미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물론 소천 박사도 ‘박’이란 어가 서방에서 온 것을 간과한 것은 결코 아니니, 그런 고로 그는, 시골의 한 지구를 의미하는 羅典의 Pagus(프랑스어 Pays의 前身)나, 또는 Pagus의 前身인 그리스어의 Pagos와 Bag과의 관련을 논한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パグスの語源が希臘語のパゴス Pagosであるといふのは東方傳來を暗示する如く見え, 或は西亞の村落系に由來するかと想像され, bagと Pagosとの聲音の相通するのが偶然の一致でない様に思はれるのである. 第三篇に述べる所の先秦田制に於いても再び同じ樣な羅馬田制との間に暗合を認め得るから單文孤證に過ぎないとして全く無視することは出來ぬ.(同四三一-四三二頁)

쪽수▶P122-2小川 博士가 여기서 亳을 准可리(東土耳其)語라고 하는 것은 勿論 그가 言語學者가 아닌 데서 나온 誤謬이다. 本論 第一章 第二節에서 말한 멩게쓰(Karl Menges)君의 書信에 依하면, 첫재 準喝里語이니, 東土耳其語이니 하는 것 言語學上으로는 容許할 用語가 못 된다. 이것은 勞農露西亞에서는 「우이구르」語 (Ujgurisch)라고 하는 것으로 멩게쓰君은 이것을 舊語와 區別하기 爲하여 新「우이구르」語(Neu-Ujgurisch)라고 稱한다고 한다. 그리고 Bag은 土耳其語가 아니라, 以上에도 이미 (第一章 第二節) 말한 바와 같이 波斯語라고 한다. 「박」은 波斯語로는 동산(Garten)을 意味하는 것으로 土耳其斯坦(Turkistan)의 灌漑地帶에서는 「오아시쓰」 住居를 意味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勿論 小川 博士도 「박」이란 語가 西方에서 온 것을 看過한 것은 決코 아니니, 그런 故로 그는, 시골의 一地區를 意味하는 羅典의 Pagus(佛語 Pays의 前身)나, 又는 Pagus의 前身인 希臘語의 Pagos와 Bag과의 關聯을 論한 것이다. 그는 그리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パグスの語源が希臘語のパゴス Pagosであるといふのは東方傳來を暗示する如く見え, 或は西亞の村落系に由來するかと想像され, bagと Pagosとの聲音の相通するのが偶然の一致でない様に思はれるのである. 第三篇に述べる所の先秦田制に於いても再び同じ樣な羅馬田制との間に暗合を認め得るから單文孤證に過ぎないとして全く無視することは出來ぬ.(同四三一-四三二頁)

박(亳)이 페르시아어라면, 그것은 인도게르만어 계통의 어일 것이오, 그것은 그리스어의 ‘파고스’와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박에 의하여, ‘알타이’ 목유문화 계통의 원상족은 벌써 목유민이 아니라, 서방에서 온 문화영향을 받아, 농민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이 농민의 형태로 중국 내지에 들어왔던 것이다. 상족이 황하 중류지역에 들어왔을 때, 거기서 만난 토민들도 농민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의할 것은, 인도게르만 계통의 농촌문화는 벌써 채도와 함께 전래하였을 가능성도 있으니, 상족이 인도게르만 농촌문화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인도게르만 농촌문화 전래의 초시나 또는 전부는 아니오, 오직 여러 번 파급한 조류 중의 하나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이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서방에서 온 문화의 조류는 그 수가 퍽 많았으니, 채도 이후, 청동기, 철기에 있었어도 그 조류는 끊기지 않던 것이다. 이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원상족은 그 이동과 동시에 청동기를 중국에 가지고 온 족이라고 나는 믿는바, 이 청동기만으로 보아도, 원상족은 인도게르만 농촌문화와 관련이 있는 것이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또 전아시아의 도시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아온 것이다. 그들이 안양에 들어온 이후의 전아시아 영향은 퍽 컸는바, 그 외에 인도게르만 문화도 또다시 상대 이후, 주대를 거쳐, 전아시아 영향과는 달리, 중국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서방에서 동래한 문화조류는 퍽 복잡했던 것이다.
쪽수▶P122-3亳이 波斯語라면, 그것은 「인도게르만」語 系統의 語일 것이오, 그것은 希臘語의 「파고쓰」와도 關聯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亳에 依하여, ‘알타이’ 牧遊文化 系統의 ▶P123-1原商族은 벌써 牧遊民이 아니라, 西方에서 온 文化影響을 받아, 農民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이 農民의 形態로 中國 內地에 들어왔던 것이다. 商族이 黃河 中流地域에 들어왔을 때, 거기서 만난 土民들도 農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注意할 것은, 「인도게르만」 系統의 農村文化는 벌써 彩陶와 함께 傳來하였을 可能性도 있으니, 商族이 「인도게르만」 農村文化의 要素를 함께 가지고 왔다면, 그것은 「인도게르만」 農村文化 傳來의 初始나 又는 全部는 아니오, 오직 여러 번 波及한 潮流 中의 하나에 不過한 것일 것이다.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西方에서 온 文化의 潮流는 그 數가 퍽 많었으니, 彩陶 以後, 靑銅器, 鐵器에 있었어도 그 潮流는 不絶했던 것이다.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原商族은 그 移動과 同時에 靑銅器를 中國에 가지고 온 族이라고 나는 믿는바, 이 靑銅器만으로 보아도, 原商族은 「인도게르만」 農村文化와 關聯이 있는 것이오, 그뿐 外라, 그들은 또 前亞細亞의 都市文化의 影響도 많이 받어온 것이다. 그들이 安陽에 들어온 以後의 前亞細亞 影響은 퍽 컸는바, 其外에 「인도게르만」 文化도 또다시 商代 以後, 周代를 것처, 前亞細亞 影響과는 달리, 中國에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西方에서 東來한 文化潮流는 퍽 複雜했던 것이다.
상족 이전에 중국에는 하족(夏族)이 들어왔다고 일반은 논한다. 그 이론의 근거는 물론 사적(史籍)의 전통이다. 이 하족에 관하여는 고고학적으로는 참말 이론적 규범이 없다. 이것을 흑도(黑陶)문화에 비정하려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너무나 투기적인 감이 있다. 소천 박사는 이 하족은 원래 은족과 언어상으로도 동일한 계통의 종족이오, 또 그 후예는 서하(西夏)라고 하는바, 나는 이 소위 하족이라는 것을 원상족의 가장 초시적 이동에 참여한 한 부족이 아닌가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하족과 서하족의 관련에 관하여는, 나의 연구로는 아직 별로 확연한 주장을 할 수가 없다. 하와 상과의 관련에 관하여는 사적에 의하더라도 그 언어가 동일하였음을 지시하는 것이 있으니, 예하면 ‘年’을 하는 歲, 은은 祀, 주는 年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바, 歲나 祀는 동일한 말이다. 이것은 조선어의 ‘살’(齡)과도 관련된 말이라고 나는 믿는바, 주의 ‘年’과는 전연 계통이 다른 말일 것이다. 현대문주12▶그런데 하대(夏代)에 관하여는 우왕(禹王)의 치수전설이 있는바, 이것은 물을 것 없이 (소천 박사도 논하듯이) 전아시아에서 온 홍수신화의 에우헤메로스적 기록인 것이다.[a 12] 신화가 사실화한 만큼, 소위 하대(夏代)와 한 특수종족을 관련시킴에는 퍽 문제가 많다.
쪽수▶P123-2商族 以前에 中國에는 夏族이 들어왔다고 一般은 論한다. 그 理論의 根據는 勿論 史籍의 傳統이다. 이 夏族에 關하여는 考古學的으로는 참말 理論的 規範이 없다. 이것을 黑陶文化에 比定할랴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너무나 投機的인 感이 있다. 小川 博士는 이 夏族은 原來 殷族과 言語上으로도 同一한 系統의 種族이오, 또 그 後裔는 西夏라고 하는바, 나는 이 所謂 夏族이라는 것을 原商族의 가장 初始的 移動에 參與한 一部族이 아닌가고 생각하는 바이다. 그리고 이 夏族과 西夏族의 關聯에 關하여는, 나의 硏究로는 아직 別로 確然한 主張을 할 수가 없다. 夏와 商과의 關聯에 關하여는 史籍에 依하더라도 그 言語가 同一하였음을 指示하는 것이 있으니, 例하면 「年」을 夏는 歲, 殷은 祀, 周는 年이라고 하였다고 하는바, 歲나 祀는 同一한 語이다. 이것은 朝鮮語의 「살」(齡)과도 關聯된 語라고 나는 믿는바, 周의 「年」과는 全然 系統▶P124-1이 달은 語일 것이다. 원문주12▶그런데 夏代에 關하여는 禹王의 治水傳說이 있는바, 이것은 묻잘 것 없이 (小川 博士도 論하듯이) 前亞細亞에서 온 洪水神話의 「에우헤메루쓰」的 記錄인 것이다.[12] 神話가 史實化한 만큼, 所謂 夏代와 一特殊種族을 關聯시킴에는 퍽 問題가 많다.
이제 상족의 이동에 관하여 보건대, 상서(尙書) 서(序)에는 自契至于成湯八遷, 湯始居亳, 從先王居라는 구절도 있고 또 仲丁遷于囂…河亶甲居相…副乙圯于耿…盤庚五遷, 將治亳殷, 民咨胥怨 등등의 구절도 있다. 이 기술을 모두 신빙할 수가 없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상족이, 비록 농민이기는 하나, 아직 목유시대의 전통이 심하여, 정주생활을 못하고 이리저리 이동한 사실만은 엿볼 수가 있다.
쪽수▶P124-2인제 商族의 移動에 關하여 보건대, 尙書序에는 自契至于成湯八遷, 湯始居亳, 從先王居라는 句節도 있고 또 仲丁遷于囂…河亶甲居相…副乙圯于耿…盤庚五遷, 將治亳殷, 民咨胥怨 等等의 句節도 있다. 이 記述을 모다 信憑할 수가 없는 것은 事實이나, 그러나 여기서 우 라는 商族이, 비록 農民이기는 하나, 아직 牧遊時代의 傳統이 甚하여, 定住生活을 못하고 이리 저리 移動한 事實만은 엿볼 수가 있다.
은도의 명칭에 관하여는 갑골복사(갑골복사) 중에는 오직 박과 상의 두 개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ex silentio 논단하는 것은 다소 논리적 결함이 있음은 사실이나, 그러나, 나는 감히 박과 상만이 은민이 사용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이다. 나의 이 주장에 다소 근사한 의견은 소천 박사도 가졌던 것이다. 소천 박사는 은이란 자만은 비록 복사에는 없으나 은인도 사용하였으리라고 하나, 나는 그 주장이 부당하다고 믿는다. 최근 중국 학자 일반이 주장하듯이, 나는 ‘은(殷)’은 주인(周人)이 상인(商人)을 칭위함에 사용한 語이오, 상족 자신은 商이라고 하였다고 믿는다. 商人稱殷, 自盤庚始, 自此以前惟稱商, 自盤庚천도之後, 於是殷商兼稱, 或只稱殷也라는 재래의 의견도 따라서, 나는 부당한 것이라고 믿는다.
쪽수▶P124-3殷都의 名稱에 關하여는 甲骨卜辭 中에는 오직 亳과 商의 二者가 있을 뿐이다. 여기서 ex silentio 論斷하는 것은 多少 論理的 缺陷이 있음은 事實이나, 그러나, 나는 敢히 亳과 商만이 殷民이 使用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者이다. 나의 이 主張에 多少 近似한 意見은 小川 博士도 가젔던 것이다. 小川 博士는 殷이란 字만은 비록 卜辭에는 없으나 恩人도 使用하였으리라고 하나, 나는 그 主張이 不當하다고 믿는다. 最近 中國 學者 一般이 主張하듯이, 나는 「殷」은 周人이 商人을 稱謂함에 使用한 語이오, 商族 自身은 商이라고 하였다고 믿는다. 商人稱殷, 自盤庚始, 自此以前惟稱商, 自盤庚遷都之後, 於是殷商兼稱, 或只稱殷也라는 在來의 意見도 따라서, 나는 不當한 것이라고 믿는다.
상족이 그 ‘도읍’을 처음에는 박이라고 하다가 종래에는 상이라고 한 것은, 상족의 추장거소가 촌락에서 도시로 변천한 과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관하여 우리는 소천 박사의 상 자(字)에 관한 의견을 좀 더 들어보기로 하자.商は說文に「從外知內也, 冏(商=都)省章聲」といふ動詞と「行賈也 從貝商省聲」といふ名詞と二種の解釋に止るも, 然れども儀禮士昏禮には「日入三商, 爲昏」といひ, その疏に「商謂商量, 是刻漏之名也」といひ, 又た五音宮商角徵羽の第二音となり, 「金爲商」といふ意味もある。此の三の字義を考覈するに, 金を鳴らして時刻を知らす方はシャン, チャン, ヂャンといふ様 音響を寫したものと察せられ, 市場の取引に始終の相圖に時刻を報ずる爲めに金を鳴らすことから同じ語が商買の意味に用ゐられたと想像される。商量計度といぶ意味は價格の協定から當然起るべきものである。(同四三頁)。
쪽수▶P124-4商族이 그 「都邑」을 처음에는 亳이라고 하다가 仍終에는 商이라고 한 것은, 商族의 酋長居所가 村落에서 都市로 變遷한 過程을 反影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關하여 우리는 小川 博士의 商字에 關한 意見을 좀 더 들어보기로 하자.

商は說文に「從外知內也, 冏(商=都)省章聲」といふ動詞と「行賈也 從貝商省聲」といふ名詞と二種の解釋に止るも, 然れども儀禮士昏禮には「日入三商, 爲昏」といひ, その疏に「商謂商量, 是刻漏之名也」といひ, 又た五音宮商角徵羽の第二音となり, 「金爲商」といふ▶P125-1意味もある。此の三の字義を考覈するに, 金を鳴らして時刻を知らす方はシャン, チャン, ヂャンといふ様 音響を寫したものと察せられ, 市場の取引に始終の相圖に時刻を報ずる爲めに金を鳴らすことから同じ語が商買の意味に用ゐられたと想像される。商量計度といぶ意味は價格の協定から當然起るべきものである。(同四三頁)。

소천 박사의 이 이론에는 근거가 퍽 박약하다. 그것은 가장 황당한 논법이니, 일견 그럴듯한 어구임에도 불구하고, 채용하기에는 너무나 투기적인 것이다. 그러나 박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 이번에는 다소 들어볼 만한 소리를 한다. 이상의 구절 바로 다음에,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是だけでは固有名詞としての商の意義に緣遠く見えるが, バグと同じくシャ─ルShahr又は Shehirといふ市街を意味する土耳共語と語源が一であるべく, 哈剌沙爾Karashar(里市)(黑市의誤植이다—都)といふ様な市街が新彊省に現存する所から見れば, 村落亳の間に市場商が文化生活の進歩に伴ひ発生することも亦た自然の徑路である。(同四三〇頁)

쪽수▶P125-2小川 博士의 이 理論에는 根據가 퍽 薄弱하다. 그것은 가장 荒唐한 論法이니, 一見 그럴듯한 語句임에도 不拘하고, 採用하기에는 너무나 投機的인 것이다. 그러나 博士는 여기서 一步 더 나가, 이번에는 多少 들어볼 만한 소리를 한다. 以上의 句節 바로 대음에, 博士는 如左히 썼다.

是だけでは固有名詞としての商の意義に緣遠く見えるが, バグと同じくシャ─ルShahr又は Shehirといふ市街を意味する土耳共語と語源が一であるべく, 哈剌沙爾Karashar(里市)(黑市의誤植이다—都)といふ様な市街が新彊省に現存する所から見れば, 村落亳の間に市場商が文化生活の進歩に伴ひ発生することも亦た自然の徑路である。(同四三〇頁)

소천 박사가 여기서 운위하는 Shahr나 Shehir는 멩게스군의 서신에 의하건대, 터키어가 아니라, 역시 페르시아어라고 한다. 멩게스군은 페르시아어, 터키, 아라비아어 등등 근 20개국어에 능통한 언어학자인 만큼 나는 그의 의견에는 신빙할 바가 있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가 šahr(Shahr), šähir (Shehir)는 페르시아어라는 것을 나는 채용하기로 한다. 군은 그런데, šahr가 상이 될 이유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현대문주13▶그것보다도 šahr, šähir와 관련하여는, 도리어 ša-örl, ša-ho-örl 등을 연상케 될 것이라고 한다.[a 13]
쪽수▶P125-3小川博士가 여기서 云爲하는 Shahr나 Shehir는 멩게쓰君의 書信에 依하건대, 土耳其語가 아니라, 亦是 波斯語라고 한다. 멩게쓰君은 波斯語, 土耳其器, 亞刺比亞語 等等 近二十個國語에 能通한 言語學者인 만큼 나는 그의 意見에는 信憑할 바가 있는 것을 안다. 따라서, 그가 šahr(Shahr), šähir (Shehir)는 波斯語라는 것을 나는 採用하기로 한다. 君은 그런데, šahr가 商이 될 理由를 잘 몰으겠다고 한다. 원문주13▶그것보다도 šahr, šähir와 關聯하여는, 도로혀 ša-örl, ša-ho-örl 等을 聯想케 될 것이라고 한다.[13]
멩게스군은 šahr(š 대신에 나는 ś를 쓴다. 즉 śahr)와 商과의 관련을 모르겠다고 하나, 그것은 君이 여기서 언어학상 일반이 通用하는 음변화 기타의 規則을 고려하고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단철어인 지나어에 있어서는 šahr(śahr, shahr)가 ša-ör이나 ša-ho-örl이 될 수가 있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소천 박사는 지나어에 관하여는 서양 학자들이 상용하는 음변화上의 法則은 고려치 말고, 그 範園를 벗어나야 된다고 하는바 그 주장은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s‘ahr(sahr, shahr)가 sang(商)이 됨은 십분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소천 박사는 목천자전에 보이는 석지(析支), 선지(鮮支)나, 노국의 전유(民國語魯及禮記祭法篇)나, 또는 선우(鮮虞) 등은 모두 ‘상’의 와전일 것이오, 은허가 있는 창덕부 탕음현 북을 흐르는 장수(漳水)는 상에 가까운 강물인 까닭에 지은 강 이름이오, 은왕 천을의 성탕이란 칭호도 성왕이 지은 낙읍(雒邑)을 성주(成周)라고 하는 것과 동양으로, 지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 주장들에는 한 의의가 있는 듯하다. 여하간, 소천 박사는 언어학자는 아니나, 그러나 동서 양 언어에 관한 그의 이 지명 비교에는 채용할 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상은 또 나의 졸견에 의하면, ‘성’(城)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쪽수▶P125-4멩게쓰君은 šahr(š 代身에 나는 ś를 쓴다. 即 śahr)와 商과의 關聯을 몰으겠다고 하나, 그것은 君이 여기서 言語學上 一般이 通用하는 音變化 其他의 規則을 考慮하고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單綴語인 支那語에 있어서는 šahr(śahr, shahr)가 ša-ör이나 ša-ho-örl이 될 수가 있는 到底히 없는 것이다. 小川 博士는 支那語에 關하여▶P126-1는 西洋 學者들이 常用하는 音變化上의 法則은 考慮치 말고, 그 範園를 벗어나야 된다고 하는바 그 主張은 正當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śahr(šahr, shahr)가 śang(商)이 됨은 十分 可能한 것이다. 그런대, 小川 博士는 穆天子傳에 뵈이는 析支, 鮮支나, 魯國의 顓臾(民國語魯及禮記祭法篇)나, 又는 鮮虞 等은 모다 「商」의 轉訛일 것이오 殷墟가 있는 彰德府 湯陰縣 北을 흘으는 漳水는 商에 가까운 河水인 까닭에 지은 河名이오, 殷王 天乙의 成湯이란 稱號도 成王이 지은 雒邑을 成周라고 하는 것과 同樣으로, 地名에 不過할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 主張들에는 一意가 있는 듯하다. 如何間, 小川 博士는 言語學者는 아니나, 그러나 東西 兩語에 關한 그의 이 地名 比較에는 採用할 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商은 또 나의 拙見에 依하면, 「城」과도 關係가 있는 것이다.)
상을 페르시아어의 샤르(šahr)나 세히르(šähir)와 관련시키고 보면, 상대 도시문화와 서방의 그것과의 관련의 일면을 또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하간 은상족에게 있어서는, 갑골문에도 보이는 그들의 두 도읍명은 모두 서방 계통의 것으로, 하나는 촌락제와 관련되었고, 다른 하나는 도시제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박(亳)은 직접 인도게르만 농촌문화와 관련되었을 것이나, 상은 그것이 페르시아어와 관련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인도게르만 도시문화의 전래를 말하는 것이라고는 하기가 어렵다. 그보다도, 그것은 인도게르만 이전의 것으로 어나 동일한 어원에서 출발한 것이, 하나는 인도게르만어인 페르시아어에 가서 샤르, 세히르가 되었고, 중국에 와서는 상이 되었을 것이다. 여하간 상은 도시를 의미하는 말로, 서방에서 온 이 말은 나중에는 한 도시명의 고유명사가 되었고, 후에는 국명이 된 것이다. 도시명의 국명으로의 전개는 또 동시에 그 국가가 ‘도시국가’에서 출발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로마의 예와 동양으로).
쪽수▶P126-2商을 波斯語의 「샤-르」(šahr)나 「세히르」(šähir)와 關聯시키고 보면, 商代 都市文化와 西方의 그것과의 關聯의 一面을 또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如何間 殷商族에게 있어서는, 甲骨文에도 뵈이는 그들의 二都名은 모다 西方 系統의 것으로, 하나는 村落制와 關聯되었고, 달은 하나는 都市制와 關聯된 것이다. 그런데 亳은 直接 「인도게르만」 農村文化와 關聯되었을 것이나, 商은 그것이 波斯語와 關聯되어있음에도 不拘하고, 「인도게르만」 都市文化의 傳來를 말하는 것이라고는 하기가 어렵다. 그보다도, 그것은 「인도게르만」 以前의 것으로 어나 同一한 語源에서 出發한 것이, 하나는 「인도게르만」語인 波斯語에 가서 「샤-르」, 「세히르」가 되었고, 中國에 와서는 商이 되었을 것이다. 如何間 商은 都市를 意味하는 語로, 西方에서 온 이 語는 乃終에는 一都市名의 固有名詞가 되었고, 後에는 國名이 된 것이다. 都市名의 國名으로의 展開는 또 同時에 그 國家가 「都市國家」에서 出發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羅馬의 例와 同樣으로).
제1장 제2절에서, 나는 중국의 문화는 그 기원에 있어 피동적이었는 만큼, 농촌문화나 도시문화나를 막론하고, ‘정상적’인 순서를 벗어나, ‘착란’된 상태로 수입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도시문화 문제에 관하여, 좀 더 명확히 엿볼 수 있다.
쪽수▶P126-3第一章 第二節에서, 나는 中國의 文化는 그 起源에 있어 被動的이었는 만큼, 農村文化나 都市文化나를 莫論하고, 「正常的」의 順序를 벗어나, 「錯亂」된 狀態로 收入하였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都市文化 問題에 關하여, 좀 더 明確히 엿볼 수 있다.
먼저 문자 문제에 관하여 보자. 문자는 도시문화가 기원된 이후, 거기서 처음 발명된 것이다. 전지구상의 문자는 모두 그 기원을 결국은 오직 한 곳에 두는 것이다. 문자가 지구상 여러 점에서 독립적으로 기원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도 단원론이 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도시문화에 그 기원을 두는 문자 전파작용을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도시제 그것과 동시에 유동한 것도 아니요, 또 그 가는 곳이 도시제가 이미 존재한 곳에만 한한 것도 아니었다. 즉 문자는 농촌문화나 그 이외의 문화 속으로도 침류하였던 것이다. 중국에도 그렇게 문자는 들어왔던 것이다. 즉 중국문자는 도시문화 이전에 기원되었던 것이다.
쪽수▶P127-1먼저 文字 問題에 關하여 보자. 文字는 都市文化가 起源된 以後, 거기서 처음 發明된 것이다. 全地上의 文字는 모다 그 起源을 決局은 오직 한 곳에 두는 것이다. 文字가 地球上 諸點에서 獨立的으로 起源된 것은 決코 아니다. 여기서도 單元論이 眞理인 것이다. 그런데 都市文化에 그 起源을 두는 文字 傳派作用을 始作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都市制 그것과 同時에 流動한 것도 아니요, 또 그 가는 곳이 都市制가 이미 存在한 곳에만 限한 것도 아니었다. 即 文字는 農村文化나 그 以外의 文化 속으로도 浸流하였던 것이다. 中國에도 그렇게 文字는 들어왔던 것이다. 即 中國文字는 都市文化 以前에 起源되었던 것이다.
중국문자도 그것이 상형문자로 기원되었는바, 그것은 전아시아에서나, 인도(아리안족 이전)에서 들어온 것이다. 중국문화 서방기원론을 주장한 서양 학자들은 「수메르 문자와 지나 문자와의 관계를 벌써 논하였다고 하나, 나는 그들의 저서는 아직 구경할 기회를 못 가젓었다. 즉, Pauthier, F. Lenormant, John Chambers, C. J. Ball 제씨의 저서나, 또는 서방기원론의 장본인 Terrien de Lacouperie씨의 저서 Western Origin of the Chinese Civilization은, 빈에서는 지금까지 구득할 재주가 내게는 없었다. 나는 오직 다른 학자들의 저서 중에 소개된, 그들의 이론을 가장 불충분하게 들어보았을 따름이다. 따라서 중국문화 일반과 서방과의 관련에 관한 그들의 의견을 나는 잘 모를 뿐 아니라, 또 문자가 서방에서 중국에 들어온 경로에 관한 그들의 의견도 나는 자세히 모른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그들이 이미 주장한 바를 반복하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나의 악의에서 나온 일종의 표절행위가 아닌 것을 독자제군은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쪽수▶P127-2中國文字도 그것이 像形文字로 起源되었는바, 그것은 前亞細亞에서나, 印度(아리안族 以前)에서 들어온 것이다. 中國文化 西方起源論을 主張한 西洋 學者들은 「수메리아 文字와 支那 文字와의 關係를 벌써 論하였다고 하나, 나는 그들의 著書는 아직 구경할 期會를 못 가젓었다. 即, Pauthier, F. Lenormant, John Chambers, C. J. Ball 諸氏의 著書나, 又는 西方起源論의 張本人 Terrien de Lacouperie氏의 著書 Western Origin of the Chinese Civilization은, 維也納에서는 只今까지 求得할 才操가 내게는 없었다. 나는 오직 다른 學者들의 著書 中에 紹介된, 그들의 理論을 가장 不充分하게 들어보았을 따름이다. 따라서 中國文化 一般과 西方과의 關聯에 關한 그들의 意見을 나는 잘 몰을 뿐 外라, 또 文字가 西方에서 中國에 들어온 經路에 關한 그들의 意見도 나는 仔細히 몰은다. 따라서 내가 여기서 그들이 임의 主張한 바를 返復하는 수가 있더라도, 그것은 나의 惡意에서 나온 一種의 剽竊行爲가 아닌 것을 讀者諸君은 理解해주기를 바란다.
나는 중국의 상형문자를 전아시아의 문자와 비교하여 조직적으로 연구해본 일은 없다. 나는 가장 단편적 고찰을 시험해보았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문자가 서방 문자의 전래에 의하여 기원된 것만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 첫째 순설형(純楔形) 문자 이전의 전아시아 문자나, 또는 아리안족 이전의 인도하지대 도시문화의 문자를 갑골문과 비교하면, 그 형태가 상사(相似)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직관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국 문자는 그러면 태초에 대체로 바로 어디서 왔느냐고 하면, 그 대답은 내게는 불가능하다. 그것이 직접 수메르 문자의 수입이라기도 어렵고, 또 직접 인도(아리안 이전)에서 온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인도하지대 도시문화에서 발견된 문자에 관하여도 처음 학자들은 그것은 수메르 문자에서 기원된 것이라거니, 또는 미노스 문자와 관련된이라거니 하여, 이론이 구구하였었다. 나의 목격한 바에 의하면, 현대문주14▶또 이 인도 문자는 스미스(Smith)씨와 캐드(Cadd)씨가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미노스 문자에 혹사(酷似)하다.[a 14] 현대문주15▶그랬다고 에게 문자가 바로 인도로 온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문제가 이렇게 되매, 마샬경은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은 이 모-든 문자는 모두 독립적으로 존재한 것이오, 그보다 더 이전의 어느 공통한 문자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주장하여, 그 해결의 도를 찾으려고 한 것이다.[a 15] 중국문자에 관하여도 이제는 마샬씨의 의견에 다소 근사한 해결의 방도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된 感이 있다. 일직이 인도 도시문화의 존재가 아직 세간에 알려지기 이전에는, 중국문자를 수메르문자만과 비교할 수가 있었으나, 인도하지대의 도시문화가 알려진 오늘에는 수메르문자만을 중국문자와 관련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쪽수▶P127-3나는 中國의 像形文字를 前亞細亞의 文字와 比較하여 組織的토 研究해본 일은 없다. 나는 가장 斷片的 考察을 試驗해보았음에 不過하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中國 文字가 西方 文字의 傳來에 依하여 起源된 것만은 넉넉히 알 수가 있다. 첫재 純楔形 文字 以前의 前亞細亞 文字나, 又는 「아리안」族 以前의 印度河地帶 都市文化의 文字를 甲▶P128-1骨文과 比較하면, 그 形態가 相似함은 무엇보다도 먼저 直觀的으로 感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中國 文字는 그러면 太初에 大體로 바로 어데서 왔느냐고 하면, 그 對答은 내게는 不可能하다. 그것이 直接 「수메리아」 文字의 輸入이라기도 어렵고, 또 直接 印度(아리안 以前)에서 온 것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印度河地帶 都市文化에서 發見된 文字에 關하여도 처음 學者들은 그것은 「수메리아」 文字에서 起源된 것이라거니, 又는 「미노아」 文字와 關聯된이라거니 하여, 理論이 區區하였었다. 나의 目擊한 바에 依하면, 원문주14▶또 이 印度 文字는 스미ᅊᅳ(Smith)氏와 깯(Cadd)氏가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미노아」 文字에 酷似하다.[14] 원문주15▶그랬다고 「에게이쓰」 文字가 바로 印度로 온 것이라고 主張할 수는 없다. 問題가 이렇게 되매, 마-ᄉힲᆯ卿은 그런 게 아니라, 事實은 이 모-든 文字는 모다 獨立的으로 存在한 것이오, 그보다 더 以前의 어느 共通한 文字에서 派生한 것이라고 主張하여, 그 解決의 道를 찾을랴고 한 것이다.[15] 中國文字에 關하여도 인제는 마-ᄉힲᆯ氏의 意見에 多少 近似한 解決의 方途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된 感이 있다. 일직이 印度 都市文化의 存在가 아직 世間에 알려지기 以前에는, 中國文字를 「수메리아」文字만과 比較할 수가 있었으나, 印度河地帶의 都市文化가 알려진 오늘에는 「수메리아」文字만을 中國文字와 關聯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인도문자는 아직 판독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문주16▶워델씨는 이 인도문자를 해득하였다고 세간에 높이 선전하고, 이것을 모두 수메르와 관련시켜 놓았으나, 그것은 기문적 이론 창조에 능한 씨의 한 소동에 불과한 것이오, 거기에 하등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a 16] 따라서 인도문자와 중국문자 내지는 중국어와를 비교하여 논할 수는 當分間은 없다. 그 대신 수메르문자와는 자형에 있어서나 또는 단어에 있어서나, 비교가 가능한 것이다.
쪽수▶P128-2印度文字는 아직 判讀할 수 없는 것이다. 원문주16▶왜들氏는 이 印度文字를 解得하였다고 世間에 높이 宣傳하고, 이것을 모두 「수메리아」와 關聯시켜 놓았으나, 그것은 奇聞的 理論 創造에 能한 氏의 一騷動에 不過한 것이오, 거기에 何等 根據가 있는 것은 아니다.[16] 따라서 印度文字 와 中國文字 乃至는 中國語와를 比較하여 論할 수는 當分間은 없다. 그 代身 「수메리아」文字와는 字形에 있어서나 又는 單語에 있어서나, 比較가 可能한 것이다.
현대문주17▶중국어 및 문자와 수메르와의 관련에 관하여, 워델 박사는 그것이 수메르어의 어휘만 아니라, 문자를 그대로 가져간 것이 많다고 하는바,[a 17] 나의 졸견을 여기서 좀 전개해보건대,

현대문주18▶중국어 「山」은 상형은 도유호 중도문2-1.png이오 음가(Phonetic value)는 śan이다. 수메르 문자로도 도유호 중도문2-2.png, 도유호 중도문2-3.png 등이오 음가는 śat이다(이집트어로는 sat, samt). 同字는 인도문자에도 뵈인다. 山은 수메르어로 ‘살’ 外에 또 kur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구(丘)’에 상당한 것이다. 교본증길(橋本增吉)씨의 東洋고대史(平凡社, 세계역사大계 제3卷) 중에 실린 볼(Ball)씨의 비교표를 본즉 산(山)이나 구(丘)나 역시 수메르어 및 문과 상대되어 있는바, 그것은 사실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수메르어의 Ma(山)도 중국의 ‘묘(墓)’와 상대되는 것이다. 또 사(蛇)는 수메르어로는 sir, sir, 중국어로는 蛇. 수메르어의 eku(lake, irrigation, canal, ditch)는 ‘구(溝)’와 관련이 있는 것이오, 그것은 수메르어의 dag, tag(dagger, wound, strike)에 상당한 것으로는 중국에는 ‘타(打)’도 있고 또 ‘도(刀)’도 있다. 刀는 ‘후인도’(Hinterindian)의 나가(Naga)족은 띠오라고 하는바, 그것은 모두 같은 계통의 어일 것이다. 이집트어에는 daś(knife, sharp, point, cut) 등의 이에 상당한 어자가 있다. … 어휘는 그만두고서라도, 문법상으로도 수메르어와 중국어에는 공통되는 바가 있는 듯하다.[a 18]

쪽수▶P128-3원문주17▶中國語 及 文字와 「수메리아」와의 關聯에 關하여, 왜들 博士는 그것이 「수메리아」語의 語彙만 아니라, 文字를 그대로 가져간 것이 많다고 하는바,[17] 나의 拙見을 여기서 좀 展開해보건대,

원문주18▶中國語 「山」은 像形은 도유호 중도문2-1.png이오 音價(Phonetic ▶P129-1value)는 śan이다. 「수메리아」字로도 도유호 중도문2-2.png, 도유호 중도문2-3.png 等이오 音價는 śat이다(埃及語로는 sat, samt). 同字는 印度文字에도 뵈인다. 山은 「수메리아」語로 「살」 外에 또 kur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丘」에 相當한 것이다. 橋本增吉氏의 東洋古代史(平凡社, 世界歷史大系 第三卷) 中에 실린「뽀-ㄹ」(Ball)氏의 比較表를 본 則 山이나 丘나 亦是 「수메리아」語 及 文과 相對되어 있는바, 그것은 事實 關聯된 것이다. 그런데 그뿐 아니라, 「수메리아」語의 Ma(山)도 中國의 「墓」와 相對되는 것이다. 또 蛇는 「수메리아」語로는 sir, sir, 中語로는 蛇. 「수메리아」語의 eku(lake, irrigation, canal, ditch)는 「溝」와 關聯이 있는 것이오, 그것은 「수메리아」語의 dag, tag(dagger, wound, strike)에 相當한 것으로는 中國에는 「打」도 있고 또 「刀」도 있다. 刀는 「後印度」(Hinterindian)의 「나가」Naga族은 「띠오」라고 하는바, 그것은 모두 同系統의 語일 것이다. 埃及語에는 daś(knife, sharp, point, cut) 等의 이에 相當한 語字가 있다. … 語彙는 그만두고서라도, 文法上으로도 「수」語와 中語에는 共通되는 바가 있는 듯하다.[18]

이상의 예에서 본 수메르어와 중국어와의 혹사(酷似)는 그것이 중국문자가 수메르에서 전래하였고, 또 이들 어휘가 직접 수메르에서 온 것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어느 공통되는 어족에서 출발한 것이 한 편으로는 중국에 왔고, 다른 한 편으로는 수메르에 간 것일 가능성도 십분 있다. 이런 공통어족은 그리고 오직 하나만일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스트로어족이겠기도 하고, 또 알타이어족이겠기도 하고, 또 그 외의 어족이겠기도 하다. 그것은 일본어와 조선어 중에 공통되는 어휘가 더러는 알타이어계에서 나온 것이오, 더러는 오스트로어계에서 나온 것이오, 또 더러는 한문에서 나온 것임과 동일한 것이다. 그런데 수메르어나 이집트어 기타를 동양어와 비교하고 보면, 중국어 이외에 또 다른 언어와도 공통되는 것이 있으니, 예하면 ‘좌수(右手)’를 의미하는 수메르어의 cha, ta나, 이집트어의 da, da(-t), tat은 일본어의 テ, タ(手)와 관련된 것이다.(松本信廣씨에 의하면 이것은, 그의 운위하는 오스트로아시아어, 즉 오스트로어계의 어이다). 또는, 물을 의미하는 수메르어의 mo(「악칻」(Akkad)語의 Mu)나, 이집트어의 Mu, Ma, Mi는 조선어의 「물」, 일본어의 ミヅ(헝가리어로는 ‘비즈’라고 한다고 들었다)와 관련되며, 종래에는 라틴어의 Mare(海), 독일어의 Meer, 프랑스어의 mer, 또는 일본어의 ウミ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현대문주19▶아니 문화의 상통과 동양(同樣)으로 언어상의 상통도, 우리가 추측하는 이상으로 되어있는 것이다.[a 19]
쪽수▶P129-2以上의 例에서 본 「수메리아」語와 中國語와의 酷似는 그것이 中國文字가 「수메리아」에서 傳來하였고, 또 此等 語彙가 直接 「수메리아」에서 온 것을 말하는 것은 決코 아니다. 그것은 어느 共通되는 語族에서 出發한 것이 一方으로는 中國에 왔고, 他方으로는 「수메리아」에 간 것일 可能性도 十分 있다. 이런 共通語族은 그리고 오직 하나만일 것은 決코 아니다. 그것은 「오-스트리」語族이겠기도 하고, 또 「알타이」語族이겠기도 하고, 또 其外의 語族이겠기도 하다. 그것은 日本語와 朝鮮語 中에 共通되는 語彙가 더러는 「알타이」語系에서 나온 것이오, 더러는 「오-스트리」語系에서 나온 것이오, 또 더러는 漢文에서 나온 것임과 同一한 것이다. 그런데 「수메리아」語나 埃及語 其他를 東洋語와 比較하고 보면, 中國語 以外에 또 달른 語와도 共通되는 것이 있으니, 例하면 「右手」를 意▶P130-1味하는 「수메리아」語의 cha, ta나, 埃及語의 da, da(-t), tat은 日本語의 テ, タ(手)와 關聯된 것이다.(松本信廣氏에 依하면 이것은, 그의 云謂하는 「오-스트로아지아」語, 即 「오-스트리」語系의 語이다). 又는, 水를 意味하는 「수메리아」語의 mo(「악칻」(Akkad)語의 Mu)나, 埃及語의 Mu, Ma, Mi는 朝鮮語의 「물」, 日本語의 ミヅ(匈牙利語로는 「비-즈」라고 한다고 들었다)와 關聯되며, 仍終에는 羅典語의 Mare(海), 獨語의 Meer, 佛語의 mer, 又는 日本語의 ウミ와 關聯이 있을 것이다. 원문주19▶아니 文化의 相通과 同樣으로 言語上의 上通도, 吾人이 推測하는 以上으로 되어있는 것이다.[19]
사세가 이와 같아 중국문자를 수메르 문자의 후신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여하간 중국문자가 전연 독립적으로 중국 내에서 기원된 것이 아니오, 그것이 수메르 문자와 간접으로라도 관련이 있었음에는 별로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중국문자는 인도하지대 도시문화의 문자와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금후 이 인도문자가 판독되는 때는, 여기에 관한 우리의 지식은 퍽 증대할 것이다.
쪽수▶P130-2事勢가 如此하여 中國文字를 「수메리아」 文字의 後身이라고 斷言하기는 어려우나, 如何間 中國文字가 全然 獨立的으로 中國 內에서 起源된 것이 아니오, 그것이 「수메리아」 文字와 間接으로라도 關聯이 있었음에는 別로 疑心할 餘地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中國文字는 印度河地帶 都市文化의 文字와도 關聯이 있었을 것이다. 今後 이 印度文字가 判讀되는 때는, 여기에 關한 우리의 智識은 퍽 增大할 것이다.
중국문자의 기원에 관하여, 소천 박사는 퍽 재미있는 의견을 가지고 있다. 「支那歷史地硏究讀集」 중에 있는 여기에 관한 개소를 轉載하건대,

華山の陽即ち上洛(雒)の商を契の封ぜられた商國とする鄭皇甫兩氏の說と並べ考ふべきは契の語源である. 内藤博士の續王亥を論ずるに當り鄭玄毛詩大雅及び周禮注に據り契即ち龜骨の灼き方を意味するとし, 殷人の契を以て氏族を代表したのも書契が殷代から初まつたと信じたからであるとしたのは面白い見方である. 然れども契機をセツともケイとも讀むのから考ふれば鄭玄の如く「灼」の意味とするよりも, 鄭玄以前の呂覽の「契舟求劍」といひ, 戰國策の「鍥朝涉之脛」といひ, 荀子勸學篇の「鍥而舍之, 朽木不朽, 鍥而不舍, 金石可鏤」といふ刻む意味の方が或は妥當ならんかと感ぜられ, 尙ほまた折又は析に通じ, 剖き又は折る以外に割符の契即ち合印を刻みつけて二分する意味を考へ得る. 龜卜に用ゐる文字よりも此の如き合印が更に古く, 結繩に代へて使用されたと想はれる.
上洛の商に中山經の玄扈山があつて, 太平寰宇記(卷一四一)に黄帝錄といふ道書を引き, 黄帝が玄扈山上に在った時鳳あり圖を銜んで帝の前に至り, 帝再拜して之を受けたといひ, 洛水に河圖玉版を引き
倉頡爲帝南巡狩, 登陽盧之山, 臨於玄扈洛汭之水. 靈龜負書, 丹甲靑文, 以授之,
といふ傳說を載せてゐる. 是は河圖の傳說と倉韻が文字を明した洛書の傳說の神話化したもので, 取り留めのない說話には過ぎぬが, 殷祖契なる名と書契との關係を示する如く見えて面白い. (四一七-四一八頁)

쪽수▶P130-3中國文字의 起源에 關하여, 小川 博士는 퍽 滋味있는 意見을 가지고 있다. 「支那歷史地硏究讀集」 中에 있는 여기에 關한 個所를 轉載하건대,

華山の陽即ち上洛(雒)の商を契の封ぜられた商國とする鄭皇甫兩氏の說と並べ考ふべきは契の語源である. 内藤博士の續王亥を論ずるに當り鄭玄毛詩大雅及び周禮注に據り契即ち龜骨の灼き方を意味するとし, 殷人の契を以て氏族を代表したのも書契が殷代から初まつたと信じたからであるとしたのは面白い見方である. 然れども契機をセツともケイとも讀むのから考ふれば鄭玄の如く「灼」の意味とするよりも, 鄭玄以前の呂覽の「契舟求劍」といひ, 戰國策の「鍥朝涉之脛」といひ, 荀子勸學篇の「鍥而舍之, 朽木不朽, 鍥而不舍, 金石可鏤」といふ刻む意味の方が或は妥當ならんかと感ぜられ, 尙ほまた折又は析に通じ, 剖き又は折る以外に割符の契即ち合印を刻みつけて二分する意味を考へ得る. 龜卜に用ゐる文字よりも此の如き合印が更に▶P131-1古く, 結繩に代へて使用されたと想はれる.
上洛の商に中山經の玄扈山があつて, 太平寰宇記(卷一四一)に黄帝錄といふ道書を引き, 黄帝が玄扈山上に在った時鳳あり圖を銜んで帝の前に至り, 帝再拜して之を受けたといひ, 洛水に河圖玉版を引き
倉頡爲帝南巡狩, 登陽盧之山, 臨於玄扈洛汭之水. 靈龜負書, 丹甲靑文, 以授之,
といふ傳說を載せてゐる. 是は河圖の傳說と倉韻が文字を明した洛書の傳說の神話化したもので, 取り留めのない說話には過ぎぬが, 殷祖契なる名と書契との關係を示する如く見えて面白い. (四一七-四一八頁)

파일:도유호 중도문2-5.png
第四圖(쿠나族의 呪文字와 漢字와의 比較)
파일:도유호 중도문2-5.png
第四圖(쿠나族의 呪文字와 漢字와의 比較)
소천 박사가 여기서 契의 원의(原意)를 설명함에는 나는 전부 좌단할 수는 없다. 합인(合印) 운운은 다소 문제이다. 현대문주20▶그것은 ‘서(書)’가 그냥 ‘씀’을 의미함에 대하여, 각서(刻書, einritzen) 즉 ‘새김’을 의미함에 불과한 것이다.[a 20] 비록 그러나 이 契를 인명 契와 관련하여 논함에는 한 의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쪽수▶P131-2小川 博士가 여기서 契의 原意를 說明함에는 나는 全部 左袒할 수는 없다. 合印 云云은 多少 問題이다. 원문주20▶그것은 「書」가 그냥 「씀」을 意味함에 對하여, 刻書(einritzen) 即 「색암」을 意味함에 不過한 것이다.[20] 비록 그러나 이 契를 人名契와 關聯하여 論함에는 一意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자(제3도 참조)는 안양 은허에 이전하기 전에 벌써 있었던 것은 넉넉히 추측할 수가 있다. 현대문주21▶성자애(城子崖) 상층문화에서도 원시문자는 벌써 출토된 것이다.[a 21] 도시문화를 안양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하면 (이하 더 상론할 것), 이것으로 중국문자가 도시문화 이전에 기원된 것만은 벌써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아마 원상족이, 안양에 들어오기 이전에 가졌던 것으로, 문자는 안양 은허 시대에 점점 더 발전을 하였었던 것이다. 원상족에게 문자가 전래한 것은 서방 도시문화가 이 농민들에게 전래한 일면인 것인바, 이 도시문화의 영향에 의하여, 그들의 일부에는 벌써 세습적 추장제가 발생한 것이니, 상대 왕가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이제 더 논할 바와 같이, 이 세습적 추장제의 발생에 의하여 재래의 사회제도에 대동요가 야기하였음에 불구하고, 상국가의 멸망시까지 농촌문화 ‘코뮤니즘’의 근저가 남아있었던 것은 주의할 바이다.
쪽수▶P131-3文字(第三圖 參照)는 安陽 殷墟에 移轉하기 前에 벌써 있었던 것은 넉넉히 推測할 수가 있다. 원문주21▶城子崖 上層文化에서도 原始文字는 벌서 出土된 것이다.[21] 都市文化를 安陽에서 始作된 것이라고 하면 (以下 더 詳論할 것), 이것으로 中國文字가 都市文化 以前에 起源된 것만은 벌써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아마 「原商族」이, 安陽에 들어오기 以前에 가졌던 것으로, 文字는 安陽 「殷墟」 時代에 漸漸 더 發展을 하였었던 것이다. 原商族에게 文字가 傳來한 것은 西方 都市文化가 이 農民들에게 傳來한 一面인 것인바, 이 都市文化의 影響에 依하여, 그들의 一部에는 벌서 世襲的 酋長制가 發生한 것이니, 商代 王家가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인제 더 論할 바와 같이, 이 世襲的 酋長制의 發生에 依하여 在來의 社會制度에 大動搖가 惹起하였음에 不拘하고, 商國家의 滅亡時까지 農村文化「큼뮤늬즘」의 根底가 남어있었던 것은 注意할 바이다.
중국의 문자는 그 후 수차에 걸쳐 자체가 개혁되었었음에 불구하고, 한대에 창작된 현재의 해체(楷體)에도, 아직까지 상형시대의 전통이 남아있어, 철자제를 떠나기가 가장 요원한 것이다. 중국문자가 아직까지도 이렇게 표징제((Zeichensystem)에 머물러있고, 철자제(Alpha- beteusystem)에는 도달치 못한 것은, 나의 졸견에 의하건대, 그 언어가 단철어임에 최대원인이 있는 것이다. 상형문자는, 문자상으로는 일을테면 단철문(이것을 독일어로 말한다면 einsilbige Schrift)인 것이다. 다철어에 이 단철문은 사실 조화될 수 없는 1개의 모순적 현상인 것이다. 거기서 철자제는 필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단철어인 중국어에 바로 이 단철적인 상형문이 배합이 됨애 거기에는 내적 모순이 전연 없었던 것이다. 현대문주22▶따라서 중국문자는 결국 현대에까지, 어렵기 그지없는 이 한자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a 22]
쪽수▶P131-4中國의 文字는 그 後 數次에 互하여 字體가 改革되었었음에 不拘하고, 漢代에 創作된 現在의 楷體에도, 아직까지 象形時代의 傳統이 남어있어, 綴字制를 떠나기▶P132-1가 가장 遙遠한 것이다. 中國文字가 아직까지도 이렇게 表徵制((Zeichensystem)에 머므러있고, 綴字制(Alpha- beteusystem)에는 到達치 못한 것은, 나의 拙見에 依하건대, 그 言語가 單綴語임에 最大原因이 있는 것이다. 象形文字는, 文字上으로는 일을테면 單綴文(이것을 獨逸語로 말한다면 einsilbige Schrift)인 것이다. 多綴語에 이 單綴文은 事實 調和될 수 없는 一個의 矛盾的 現象인 것이다. 거기서 綴字制는 必然的으로 發生한 것이다. 그러나, 單綴語인 中國語에 바로 이 單綴的인 象形文이 配合이 됨애 거기에는 內的 矛盾이 全然 없었던 것이다. 원문주22▶따라서 中國文字는 決局 現代에까지, 어렵기 그지없는 이 漢字로 남어있게 된 것이다.[22]
이상에서 문자에 관하여 논하였다. 여기서는 이제 청동기의 수입에 관하여 좀 논하여보자. 나는 이상에서 청동기의 수입이 원상족의 이동과 관련이 있음을 말하였다. 이것은 벌써 소천 박사도 다소 상상하였던 바인 바, 그 후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여, 저간의 소식은 좀 더 확연하여진 것이다. 현대문주23▶이 청동기 또는 동기(銅器)가 서방과 관련이 있음은 중국 학자들도 인정하는 바로,[a 23] 거기에는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오직 그것이 여하히 하여 중국에 들어왔는가이다. 유럽의 예를 보면, 청동기의 전파는 종족 이동과는 별로 관계가 없이, 통상 기타에 의하여 된 것이다. 그러나 鐵의 전파는 일리리아족의 이동과 직접 관련이 있은 것이다. 중국에 있어 보면 이와는 반대로 鐵의 전래는 단순한 문화發射작용에 의하여 주로 된 것이나, 청동(및 동)은 원상족의 이동에 의하여 전래한 것인 듯하다. 이 원상족의 이동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광범한 지역에 걸친 것으로, 주 목왕 서순(西巡) 당시에 ‘하수(河首)’(난주의 북)에 은민 부락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이 관련에서 회고하여야 된다. 목천자전 제2권 초두에 있는
□栢夭曰□封膜晝于河水之陽以爲殷人主
운운의 句(□는 脫簡)에 관하여 소천 박사는, 「膜は薄又は亳, 晝は或は丑の假借で, 亳丑をして同姓の恩人祖先を祭らせたと解せられる」(續集 一三三頁)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의견인 것이다. 성자애(城子崖) 상층의 소위 담국(譂國)문화라는 것도, 사실은 이 원상족의 문화의 일부인 것으로, 은상국가를 형성한 것은 오직 그 일부에 불과한 것이다. 현대문주24▶이 광범한 종족 이동에 의하여 청동기문화가 지나에 널리 전파된 것은 가장 그럴듯한 사세인 것이다.[a 24] 그런데 청동기는 은상 유사시대 이전에는 아직 그 사용범위가 크지 못하였으니, 여기서는 금석병용시대라고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쪽수▶P132-2以上에서 文字에 關하여 論하였다. 여기서는 인제 靑銅器의 輸入에 關하여 좀 論하여보자. 나는 以上에서 靑銅器의 輸入이 原商族의 移動과 關聯이 있음을 말하였다. 이것은 벌서 小川 博士도 多少 想像하였든 바인 바, 그 後 考古學的 發掘에 依하여, 這間의 消息은 좀 더 確然하여진 것이다. 원문주23▶이 靑銅器 又는 銅器가 西方과 關聯이 있음은 中國 學者들도 認定하는 바로,[23] 거기에는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問題는 오직 그것이 如何히 하여 中國에 들어왔는가이다. 歐羅巴의 例를 보면, 靑銅器의 傳派는 種族 移動과는 別로 關係가 없이, 通商 其他에 依하여 된 것이다. 그러나 鐵의 傳派는 「일리리아」族의 移動과 直接 關聯이 있은 것이다. 中國에 있어 보면 이와는 反對로 鐵의 傳來는 單純한 文化發射作用에 依하여 主로 된 것이나, 靑銅(及 銅)은 「原商族」의 移動에 依하여 傳來한 것인 듯하다. 이 原商族의 移動은 吾人이 想像하는 以上으로 廣汎한 地域에 互한 것으로, 周穆王 西巡 當時에 「河首」(蘭州의 北)에 殷民 部落이 있었던 것을 우리는 이 關聯에서 回顧하여야 된다. 穆天子傳 第二卷 初頭에 있는
□栢夭曰□封膜晝于河水之陽以爲殷人主
云云의 句(□는 脫簡)에 關하여 小川 博士는, 「膜は薄又は亳, 晝は或は丑の假借で, 亳丑をして同姓の恩人祖先を祭らせたと解せられる」(續集 一三三頁)라고 하는 것은 正當한 意見인 것이다. 城子崖 上層의 所謂 譂國文化라는 ▶P133-1것도, 事實은 이 原商族의 文化의 一部인 것으로, 殷商國家를 形成한 것은 오직 그 一部에 不過한 것이다. 원문주24▶이 廣汎한 種族 移動에 依하여 靑銅器文化가 支那에 널니 傳派된 것은 가장 그럴듯한 事勢인 것이다.[24] 그런데 靑銅器는 殷商 有史時代 以前에는 아직 그 使用範圍가 크지 못하였으니, 여기서는 金石倂用時代라고 하는 것이 當然한 것이다.
현대문주25▶이 청동기 및 동기(銅器)에 관하여 李濟 박사는 그것의 대부분은 유럽 청동기시대 제4기의 것과, 예니세이지대의 청동기를 연상케 한다고 하는바,[a 25] 이것이 아시아 중앙을 경유하여 유럽에까지 관련된 것은 제1장 제2절에서도 이미 논한 바이다. 그런데, 유럽의 우르넨펠드문화와 관련하여 여기서 좀 더 논할 필요가 있다. 이 우르넨펠드문화(Urnenfelder-Kultur)는 청동기 제3기 초에 중앙유럽에 뵈던 것이, 그 말기(청동기는 여기서 사분이 아니라 삼분하는 것이 당연하다. 따라서 ‘그 말기’란 즉 제3기 말의 칭이다)에는 전 유럽이 이 문화 영향하에 있었으며, 또 이 ‘우르’문화족은 사방으로 이동을 하였던 것이다. 유럽 철기시대 문화는 바로 이 문화에 직접 연결되었으며, 일리리아족은 바로 이 우르넨펠드문화와 불가분적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우르’문화계의 종족이 바로 지나 변경에까지 왔을 가능성을 여기서 지적하는 바이다.
쪽수▶P133-2원문주25▶이 靑銅器 及 銅器에 關하여 李濟 博士는 그것의 大部分은 歐羅巴 靑銅器時代 「第四期」의 것과, 「예늬쎄이」地帶의 靑銅器를 聯想케 한다고 하는바,[25] 이것이 亞細亞 中央을 經由하여 歐羅巴에까지 關聯된 것은 第一章 第二節에서도 이미 論한 바이다. 그런데, 歐羅巴의 「우르넨펠드」文化와 關聯하여 여기서 좀 더 論할 必要가 있다. 이 「우르넨펠드」文化(Urnenfelder-Kultur)는 靑銅器 第三期 初에 中央歐羅巴에 뵈던 것이, 그 末期(靑銅期는 여기서 四分이 아니라 三分하는 것이 當然하다. 따라서 「그 末期」란 即 第三期 末의 稱이다)에는 全歐羅巴가 이 文化 影響下에 있었으며, 또 이 「우르」文化族은 四方으로 移動을 하였던 것이다. 歐羅巴 鐵器時代 文化는 바로 이 文化에 直接 聯結되었으며, 「일리리아」族은 바로 이 「우르넨펠드」文化와 不可分的 關係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 「우르」文化系의 種族이 바로 支那 邊境에까지 왔을 可能性을 여기서 指摘하는 바이다.
일주서 왕회편에는 義渠以玆白 운운의 구절이 있다. 이 의거(義渠)는 원(原)일리리아족(Proto-Illyrer)계의 종족이기가 쉬운바, 서양 학자들은 대하 ‘토하라’에 관하여는 귀가 아프도록 말썽이었으나, 이 의거에 관하여는 별로 말이 없는 것은 다소 이상히 생각하는 바이다. 이 의거족에 관하여도 소천 박사는 자세한 연구를 하였는바, 박사는 묵자 절장편(墨子 節葬篇)에서 아래의 구절을 인용하여 그들의 습속의 일면을 소개한다(六二頁).

秦之西有義渠之國者, 其親戚死, 聚柴薪而焚之, 爐上謂之登遐, 然後成爲孝子….

쪽수▶P133-3逸周書 王會篇에는 義渠以玆白 云云의 句가 있다. 이 義渠는 「原일리리아」族(Proto-Illyrer)系의 種族이기가 쉬운바, 西洋 學者들은 大夏 「토하라」에 關하여는 귀가 아프도록 말성이었으나, 이 義渠에 關하여는 別로 말이 없는 것은 多少 異常히 생각하는 바이다. 이 義渠族에 關하여도 小川 博士는 仔細한 研究를 하였는바, 博士는 墨子節葬篇에서 左의 句를 引用하여 그들의 習俗의 一面을 紹介한다(六二頁).

秦之西有義渠之國者, 其親戚死, 聚柴薪而焚之, 爐上謂之登遐, 然後成爲孝子….

의거국은 전국시대에는 강대한 외족이었는 바, 소천 박사는 한대 서역 여러 국명 중에 보이는 ‘강거(康居)’는 ‘의거’의 와(訛)임을 지적하였다. 의(義)의 고음은 ‘의’(ngie)이다. 그리고 ‘강’의 고음은 qan 즉 프랑스어의 quand자의 음 비슷한 것이다. 그것은 n의 종음이 확연한 kang은 결코 아니었다. 따라서 의나 강은 모두 비향음자(鼻響音字)인 것이다. 그런데 g, k의 시음을 가져 ‘겨(渠, 居)에 선치되는 때, ngie는 qan로 화할 것은 음변화상 십분 가능한 바이다. 즉 환언하면, 의나 강은 ‘겨’(渠, 居)에 선치된 동일한 비향적 시음(Nasal Anlaut)의 표시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소천 박사의 주장에는 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쪽수▶P133-4義渠國은 戰國時代에는 强大한 外族이었는 바, 小川 博士는 漢代 西域 諸國名 中에 뵈이는 「康居」는 「義渠」의 訛임을 指摘하였다. 義의 古音은 「의」(ngie)이다. 그리고 ▶P134-1康의 古音은 qan 即 佛蘭西語의 quand字의 音 비슷한 것이다. 그것은 n의 終音이 確然한 kang은 決코 아니었다. 따라서 義나 康은 모다 鼻響音字인 것이다. 그런데 g, k의 始音을 가져 「겨」(渠, 居)에 先置되는 때, ngie는 qan로 化할 것은 音變化上 十分 可能한 바이다. 即 換言하면, 義나 康은 「겨」(渠, 居)에 先置된 同一한 鼻響的 始音(Nasal Anlaut)의 表示에 不過한 것이다. 따라서 小川 博士의 主張에는 一意가 있는 것이다.
위서(魏書) 및 수서(隋書)의 후예라고 하였으며, 「婚姻喪制與突厥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돌궐인에 관하여 수서 돌궐전에는

有死者, 停葬張中, 家人親屬, 多殺牛馬而祭之, 遶張號呼, 以刀劃面, 血淚交下, 七度而止, 於是擇日, 置葬馬上而焚, 取灰而葬, 表木爲瑩, 立屋其中, 圖畵死者形儀, 及生時所經戰陣之狀, 甞殺一人則立一石, 有 至千百者

라고 쓰여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의거족이 퍽 오래 계속한 것을 보는바, 그들이 화장의 제를 가졌던 것이 바로 우리의 관심하는 바이다. 주초(周初)에 보이는 이 의거족의 존재는 벌써 퍽 이전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바, 그런데 이 의거족은 유럽 인종이어던 형적이 있는 것이 또 더구나 재미있는 바이다. 여기에 관하여 소천 박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此の如く康居と義渠とが同種族であるとすれば, 前者の漢代に於ける天山東部及び東北部の住所に比して, 先秦時代には黄河を越えて遙かに東南にも分布してゐたのである. 魏書によれば「人皆深目高鼻多髥, 善商賈, 諸夷交易, 多湊其國」といひ, 羌種族即ち黨項などとは體質の著しく異った種族で, 或は戦国時代に既に一異種族たる區別が明瞭であったかも知れぬ.(六五頁)

쪽수▶P134-2魏書 及 隋書의 後裔라고 하였으며, 「婚姻喪制與突厥同」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突厥人에 關하여 隋書 突厥傳에는

有死者, 停葬張中, 家人親屬, 多殺牛馬而祭之, 遶張號呼, 以刀劃面, 血淚交下, 七度而止, 於是擇日, 置葬馬上而焚, 取灰而葬, 表木爲瑩, 立屋其中, 圖畵死者形儀, 及生時所經戰陣之狀, 甞殺一人則立一石, 有 至千百者

라고 씨여 있다. 여기서 우리는 義渠族이 퍽 오래 繼續한 것을 보는바, 그들이 火葬의 制를 가졌던 것이 바로 우리의 關心하는 바이다. 周初에 뵈는 이 義渠族의 存在는 벌써 퍽 以前에 있었을 可能性이 있는바, 그런데 이 義渠族은 歐羅巴 人種이어던 形跡이 있는 것이 또 더구나 滋味있는 바이다. 여기에 關하여 小川 博士는 如左히 말한다.

此の如く康居と義渠とが同種族であるとすれば, 前者の漢代に於ける天山東部及び東北部の住所に比して, 先秦時代には黄河を越えて遙かに東南にも分布してゐたのである. 魏書によれば「人皆深目高鼻多髥, 善商賈, 諸夷交易, 多湊其國」といひ, 羌種族即ち黨項などとは體質の著しく異った種族で, 或は戦国時代に既に一異種族たる區別が明瞭であったかも知れぬ.(六五頁)

이것으로 의거족이 유럽 인종이었고, 또 화장제를 가졌던 것을 엿볼 수가 있다면, 이것이 우르넨펠드 문화와 관련이 있었음은 퍽 가능한 것이다. 우르넨펠드 문화는 그 명칭이 벌써 지시하듯이 화장족의 문화였고, 그것은 어느 점으로 보던지 인도게르만족의 문화였던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청동기문화가 이 유럽의 것과 퍽 관련이 많아 보이는 판에 바로 주초(周初)에 화장제를 가진 유럽 인종계의 종족이 이렇게 중국 西邊에 있었던 것을 사적(史籍)에 의하여 고증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은 의미심장한 현상이다. 원상족은 그 청동문화들 이런 종족에게서 전수(傳受)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상족은 인도게르만 농촌문화를 동시에 전수(傳受)하였을 가능성을 십분 가진 것이었다. 인도게르만 농촌문화는 이렇게 원상족에게 전래된 것이겠으나, 이미 수차 논한 바와 같이, 인도게르만 농촌문화는 벌써 그 전에 채도문화를 통하여 전래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인도게르만 이전의 다뉴브지대의 소위 ‘동부선문도기문화’(Ostbandkeramische Kultur)와 직접 관련이 있었기도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이네 겔던 교수의 주장과 같이 원오스트로네시아족의 문화와 관련이 있었는지도 모를 것이다. 아니, 이 채도문화기의 농촌문화는 여하했던, 적어도 원상족의 농촌문화는 인도게르만족의 그것과 관련이 있었음에는 여하간 더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쪽수▶P134-3이것으로 義渠族이 歐羅巴 人種이었고, 또 火葬制를 가졌던 것을 엿볼 수가 있다면, 이것이 「우르넨펠드」 文化와 關聯이 있었음은 퍽 可能한 것이다. 「우르넨펠드」 文化는 그 名稱이 벌써 指示하듯이 火葬族의 文化였고, 그것은 어느 點으로 보던지 「인도게르만」族의 文化였던 것이다. ▶P135-1그런데 中國의 靑銅器文化가 이 歐羅巴의 것과 퍽 關聯이 많아 뵈이는 판에 바로 周初에 火葬制를 가진 歐羅巴 人種系의 種族이 이렇게 中國 西邊에 있었던 것을 史籍에 依하여 考證할 수가 있게 되는 것은 意味深長한 現象이다. 原商族은 그 靑銅文化들 이런 種族에게서 傳受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商族은 「인도게르만」 農村文化를 同時에 傳受하였을 可能性을 十分 가진 것이었다. 「인도게르만」 農村文化는 이렇게 原商族에게 傳來된 것이겠으나, 이미 數次 論한 바와 같이, 「인도게르만」 農村文化는 벌써 그 前에 彩陶文化를 通하여 傳來하였을 可能性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것은 「인도게르만」 以前의 「단늅」地帶의 所謂 「東部線紋陶器文化」(Ostbandkeramische Kultur)와 直接 關聯이 있었기도 쉬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하이네·껠데언 敎授의 主張과 같이 原「오-스트로네지아」族의 文化와 關聯이 있었는지도 몰을 것이다. 아니, 이 彩陶文化期의 農村文化는 如何했던, 적어도 原商族의 農村文化는 「인도게르만」族의 그것과 關聯이 있었음에는 如何間 더 疑心할 餘地가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은상족의 유래와 그들의 문자 및 청동기문화의 유래에 관하여 일고하였었다. 이제 우리는 그들의 도시문화 기원 그것에 언급하려고 한다.
쪽수▶P135-2以上에서 우리는 殷商族의 由來와 그들의 文字 及 靑銅器文化의 由來에 關하여 一考하였었다. 인제 우리는 그들의 都市文化 起源 그것에 言及할랴고 한다.
상족은 벌써 문자도 가졌었고 ‘세습왕조의 정체’(물론 어폐가 있다!)도 가졌었음에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 도시제를 몰랐었던 것이다. 이 은허에 이래한 것은 반경시(盤庚時)였다. 그것은 상서에도 기록되어있거니와, 또 갑골문에 의하여 사적(史籍) 전통상의 은왕 이름의 대부분은 그것이 단순한 구상적 인명이 아니었던 것을 증명할 수가 있다. 물론 그랬다고 전통적 기록이 모두 신빙할 만한 사실기록이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체재상 신화적 외양을 전연 제거한 상서에 있어서도 虞夏兩書가 주로 신화의 에우헤메로스적 기록, 즉 신화의 사실화적 기록인 것은 소천탁치 박사나, 마스페로 교수 또는 중국의 유복(劉復) 호적(胡適), 고힐강(顧頡剛) 여러 학자가 벌써 간파한 바이다. 아니 그뿐 아니라, 상대에 관한 기록에 있어서도 재래의 전통에는 신빙치 못할 바가 많은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적어도 반경시(盤庚時)까지 소급하여는 재래의 기록에 신빙할 바가 많다.
쪽수▶P135-3商族은 벌써 文字도 가졌었고 「世習王朝의 政體」(勿論 語弊가 있다!)도 가졌었음에 不拘하고 그들은 아직 都市制를 몰랐었던 것이다. 이 「殷墟」에 移來한 것은 盤庚時이었다. 그것은 尙書에도 記錄되어있거니와, 도 甲骨文에 依하여 史籍 傳統上의 殷王名의 大部分은 그것이 單純한 構想的 人名이 아니었던 것을 證明할 수가 있다. 勿論 그랬다고 傳統的 記錄이 모다 信憑할 만한 史實記錄이라는 것은 決코 아니다. 그 體裁上 神話的 外樣을 全然 除去한 尙書에 있어서도 虞夏兩書가 主로 神話의 「에우헤메루쓰」的 記錄, 即 神話의 史實化的 記錄인 것은 小川琢治 博士나, 마스뻬로 敎授 又는 中國의 劉復 胡適, 顧頡剛, 諸學者가 벌써 看破한 바이다. 아니 그뿐 外라, 商代에 關한 記錄에 있어서도 在來의 傳統에는 信憑치 못할 바가 많은 것이다. ▶P136-1비록 그렇기는 하나, 적어도 盤庚時까지 溯及하여는 在來의 記錄에 信憑할 바가 많다.
은민이 도읍을 여러 번 옮긴 것은 강물의 범람이 그 원인이었다고 하나, 그보다도 (이상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그들에게는 아직도 목유민의 전통이 남아있었던 만큼, 정주생활에 채 익숙지 못했던 것이 큰 원인이었던 것이다. 반경이 은허의 땅으로 옮기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모르는 바이다. 한 편에서 반경오천(盤庚五遷)이라고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조을(祖乙)이 경(耿)에 도읍한 후, 이 경에서 반경은 지금의 소둔촌(小屯村)으로 옴겼다고 한다. 그런데 경이니, 상(相)이니, 효(囂)니 하는 지명이 사적(史籍)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갑골문에는 박(亳)과 상(商)만이 보이는 것은 암만 해야(이상에서 논한 여러 점을 고찰하건대) 소둔촌 천도 이전에는 그 도읍을 원래는 ‘마을’을 의미하였던 ‘박’으로 칭위하였던 저간의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쪽수▶P136-2殷民이 都邑을 여러 번 옴긴 것은 河水의 氾濫이 그 原因이었다고 하나, 그보다도 (以上에서 이미 指摘한 바와 같이), 그들에게는 아직도 牧遊民의 傳統이 남어있었던 만큼, 定住生活에 채 닙숙지 못했던 것이 큰 原因이었던 것이다. 盤庚이 「殷墟」의 地로 옴기기 前에는 어디에 있었는지 우리는 잘 몰르는 바이다. 一便에서 盤庚五遷이라고 하면, 다른 한 便에서는 祖乙이 耿에 都한 後, 이 耿에서 盤庚은 只今의 小屯村으로 옴겼다고 한다. 그런데 耿이니, 相이니, 囂니 하는 地名이 史籍에 뵈임에도 不拘하고, 甲骨文에는 亳과 商만이 뵈는 것은 암만 해야(以上에서 論한 諸點을 考察하건대) 小屯村 遷都 以前에는 그 都邑을 原來는 「마을」을 意味하였던 「亳」으로 稱謂하였던 這間의 消息을 傳하는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상서 반경편에 의하면, 반경이 천도함에 제하여 민간의 반대가 심하였던 것이다. 반경은 거기서 달래고 으르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소둔촌에 와서 도읍을 정하였대야, 그것은 아직 현금의 촌락에도 비할 수 없이 원시적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도읍’의 건축물이란 혈거(穴居)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민가만 아니라 왕궁도 그랬던 것이다. 이것은 중앙연구원의 안양 발굴의 결과, 일반이 다 알게 된 것이다. 왕궁의 궁(宮)자는 복사(卜辭)에는 도유호 중도문2-7.png, 도유호 중도문2-8.png, 도유호 중도문2-9.png, 도유호 중도문2-10.png 등으로 되어있는 바, 이것은 거혈(居穴)에 ‘지붕’(roof)이 덮인 것을 상징한 것이라고 중국 학자들은 말한다. 시경 대아편에는 주의 선조, 고공단수(古公亶殳)에 관하여 아래와 같은 구절이 쓰여있다.

古公亶殳, 陶復陶穴, 未有家屋.

여기의 도복(陶復)의 ‘復’을 주자는 중요(重窰)라고 해석하였으나, 그것은 사실은 복(覆)인 것이다. 즉 지붕말이다. 도복도혈(陶復도혈)이란 ‘진흙’으로 만든 거혈의 지면 위에 반란형(半卵形)으로 올려 민 ‘지붕’과, 땅 밑을 파 들어간 내부를 합하여 도기에 비교하여 하는 말이다. 또 맹자(슬문공장구하)에는

堯舜旣沒, 聖人之道衰, 暴君代作, 壞宮室以為汙池,民無所安息,

이라고 쓰여있는 바, 여기서 옛날 폭군이 대건축물을 헐어버렸다는 게 아니라, 지하를 파 들어간 거혈을 두드려 부시고, 거기에 물을 부어 못을 만들었단 말이다. 은왕의 ‘궁전’이 거혈이었음은 그리 예외가 아닌 것이다. … 혈거생활은 그 잔영이 현재의 중국에도 남아있는 곳이 많은 것이다. 그것을 사진을 통하여 나는 수차 구경한 경험이 있다. 안양 발굴보고 중에도 현재의 혈거생활이 지적되어있다.
쪽수▶P136-3尙書 盤庚篇에 依하면, 盤庚이 遷都함에 際하여 民間의 反對가 甚하였던 것이다. 盤庚은 거기서 달래고 을으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이 小屯村에 와서 都邑을 定하였대야, 그것은 아직 現今의 村落에도 比할 수 없이 原始的의 것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都邑」의 建築物이란 穴居에 不過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民家만 아니라 王宮도 그랬던 것이다. 이것은 中央硏究院의 安陽 發掘의 結果, 一般이 다 알게 된 것이다. 王宮의 宮字는 卜辭에는 도유호 중도문2-7.png 도유호 중도문2-8.png 도유호 중도문2-9.png 도유호 중도문2-10.png 等으로 되어있는 바, 이것은 居穴에 「집웅」(roof)이 덮인 것을 象徵한 것이라고 中國 學者들은 말한다. 詩經 大雅篇에는 周의 祖先, 古公亶殳에 關하여 左와 如한 句가 씨여있다.

古公亶殳, 陶復陶穴, 未有家屋.

여기의 陶復의 「復」을 朱子는 重窰라고 解釋하였으나, 그것은 事實은 覆인 것이다. 即 「집웅」말이다. 陶復陶穴이란 「진흙」으로 만든 居穴의 地面 우에 半卵形으로 올려민 「집웅」과, 땅 밑을 파 들어간 內部와를 合하여 陶器에 比하야 하는 말이다. 또 孟子(膝文公章句下)에는 ▶P137-1

堯舜旣沒, 聖人之道衰, 暴君代作, 壞宮室以為汙池,民無所安息,

이라고 씨어있는 바, 여기서 옛날 暴君이 大建築物을 헐어버렸다는 게 아니라, 地下를 파 들어간 居穴을 두드려 부시고, 거기에 물을 부어 못을 만들었단 말이다. 殷王의 「宮殿」이 居穴이었음은 그리 例外가 아닌 것이다. … 穴居生活은 그 殘影이 現在의 中國에도 남어있는 곳이 많은 것이다. 그것을 寫眞을 通하여 나는 數次 구경한 經驗이 있다. 安陽 發掘報告 中에도 現在의 穴居生活이 指摘되어있다.
소둔촌 은허에 들어와서 지은 그들의 주거는 ‘움’(穴)이었으나, 이 지하를 파 들어가던 ‘구멍’은 차차 지상으로 올려 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종내에는 당당한 가옥들이 쭉 들어앉게 된 것이다. 지하를 향한 마이너스적 운동이 지상을 향한 플러스적 운동으로 전향한 것은, 그러나 결코 내적 발전에만 의한 것은 아닌 것이다. 서방에서 자꾸 밀려오는 도시문화의 대조류에 못 이겨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쪽수▶P137-2小屯村 「殷墟」에 들어와서 지은 그들의 住居는 「움」(穴)이었으나, 이 地下를 파 들어가던 「구녕」은 次次 地上으로 올려밀기 始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仍終에는 堂堂한 家屋들이 죽 들앉게 된 것이다. 地下를 向한 「미누쓰」的 運動이 地上을 向한 「플루쓰」的 運動으로 轉向한 것은, 그러나 決코 內的 發展에만 依한 것은 아닌 것이다. 西方에서 자꾸 밀려오는 都市文化의 大潮流에 못 니겨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왕궁이 (또는 민가 일반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러왔으면 은상문화 일반에도 동일한 변화는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李濟씨는 이 건축물 樣態에 의하여 은대문화를 ‘방원갱시기(方圓坑時期)’와 ‘판축시기(版築時期)’의 2기로 구분하였던 것이다. 이제 이것을 사회적으로 논하면, 이 주거의 발전은 사회 계급 분화의 과정을 동반한 것이오, 지배기관의 종적(종적(縱的)) 발전을 의미한 것이다.
쪽수▶P137-3王宮이 (又는 民家 一般이) 地下에서 地上으로 올러왔으면 殷商文化 一般에도 同一한 變化는 있었든 것이다. 그러기에 李濟氏는 이 建築物 樣態에 依하여 殷代文化를 「方圓坑時期」와 「版築時期」의 二期로 區分하였었던 것이다. 인제 이것을 社會的으로 論하면, 이 住居의 發展은 社會 階級 分化의 過程을 同伴한 것이오, 支配機關의 縱的 發展을 意味한 것이다.
소둔촌 은허에 천도한 이후 은국이 망할 때까지는 300년도 채 못 되는 2세기 반 내외의 기간이었건만, 그 사이의 발전은 참말 장족의 것이었었다. 그들은 종래에는 당당한 도시문화의 형체를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이 발전과 동시에 서방 도시문화의 영향은 가장 컸던 것이다. 은상문화가 얼마나 찬란하였던가는 벌써 그들의 청동기 미술이 말하는 것이다. 은인은 미술에 있어서만 아니라, 그 천문관에 있어서도 가장 볼 만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현재에도 있는 간지법은 그것이 벌써 은대에 있었고, 또 그것은 전아시아의 역법과 직접 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은대의 서방과의 문화관계에는, 인도 도시문화는 또 여하한 역할을 연출하였느냐고 하면, 그것은 아직 잘 모르는 바이다. 그러나 필연 인도와도 그 관련은 퍽 컸을 것이다. 현대문주26▶서방의 문화 영향은 상대 이후, 주대, 한대를 통하여도 가장 컸던 것이다.[a 26]
쪽수▶P137-4小屯村 「殷墟」에 遷都한 以後 殷國이 亡할 때까지는 三百年도 채 못 되는 二世紀 半 內外의 期間이었건만, 其間의 發展은 참말 長足의 것이었었다. 그들은 仍終에는 堂堂한 都市文化의 形體를 가젔던 것이다. 그리고 이 發展과 同時에 西方 都市文化의 影響은 가장 컷던 것이다. 殷商文化가 얼마나 燦爛하였던가는 벌써 그들의 靑銅器 美術이 말하는 것이다. 殷人은 美術에 있어서만 아니라, 그 天文觀에 있어서도 가장 볼 만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現在에도 있는 干支法은 그것이 벌써 殷代에 있었고, 또 그것은 前亞細亞의 曆法과 直接 關係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殷代의 西方과의 文化關係에는, 印度 都市文▶P138-1化는 또 如何한 役割을 演하였느냐고 하면, 그것은 아직 잘 몰으는 바이다. 그러나 必然 印度와도 그 關聯은 퍽 컸을 것이다. 원문주26▶西方의 文化 影響은 商代 以後, 周代, 漢代를 通하여도 가장 컷던 것이다.이 西方과의 關聯에 關하야는 左記의 書籍 參照.
Rostovzeff (Rostovcev): a. a. O. 及 同氏의 L'art chinois de l'époque de Han, Revue des arts Asiatiques 1924. 其外 또 Östasiatiska Samlingarna(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 Stockholm, 誌上에 發表한 J. G. Andersson, Glov Janse, H. J. Arne 諸氏의 諸論文. 濱田, 前揭書. Bleichsteiner: a. a. O.</ref>
서방에서 온 중국의 도시문화는 동쪽 및 동남쪽을 향하여 더 전파하였던 것이니, 아메리카 중부의 도시문화, 고급문화는 그것이 중국의 도시문화, 고급문화와 관련 없이는 기원될 수가 없었던 것을 나는 이제는 확신하는 바이다. 동쪽 및 전아시아 구세계의 고급문화가 아메리카 신세계(아메리카는 선사학상으로나 민속학상으로도 신세계인 것이다)에 파급된 관계에 대하여는 록 박사와 보크 박사가 주장한 바로, 그들은 아메리카의 씨족토템주의는 구세계의 고급문화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전아시아 천문관의 ‘수대’(獸帶, Zodiaeus, Tierkreis)와 관련시켰었다. 그 후 그레브너 교수나 슈미트, 코퍼스 양 선생는 또 중부 아메리카 고급문화(도시문화)와 전아시아 및 지나의 고급문화와의 관련을 논하였었다. 록 교수는 그 후 중부 아메리카의 천문관, 음양사상, 역법 등이 구세계에 그 근원을 두는 것을 더 논하게 되었었다. 그는 나에게 그것은 특히 고대 중국과 관련이 있는 것을 이제는 좀 더 확연히 알 수 있노라고 말하여주었었다. 그 외 또 혼보스텔씨는 「파나마」의 쿠나족(Cuna)의 주문에 사용하는 문자가 중국에서 온 것을 지적하며(제4도 비교), 중부 아메리카 상형문자의 기원을 중국문자에 찾았다. 현대문주27▶여하간 이것으로 전지구의 문화가 이리저리 엉킨 것이며, 역사발전의 전적 고찰의 필요를 또 한 번 더 느끼게 된다.[a 27] (미완)
쪽수▶P138-2西方에서 온 中國의 都市文化는 東 及 東南을 向하여 더 傳派하였던 것이니, 亞米利加 中部의 都市文化, 高級文化는 그것이 中國의 都市文化, 高級文化와 關聯 없이는 起源될 수가 없었던 것을 나는 인제는 確信하는 바이다. 東 及 前亞細亞 舊世界의 高級文化가 亞米利加 新世界(亞米利加는 先史學上으로나 民俗學上으로도 新世界인 것이다)에 波及된 關係에 對하여는 뢱 博士와 뽀륵 博士가 主張한 바로, 그들은 亞米利加의 氏族토템主義는 舊世界의 高級文化에 그 根源을 두는 것이라고 하며 그것을 前亞細亞 天文觀의 「獸帶」(Zodiaeus, Tierkreis)와 關聯시켰었다. 그 後 그렙너 敎授나 쉬밑, 콥퍼쓰 兩師는 또 中部 亞米利加 高級文化(都市文化)와 前亞細亞 及 支那의 高級文化와의 關聯을 論하였었다. 뢱 敎授는 그 後 中部 亞米利加의 天文觀, 陰陽思想, 曆法 等이 舊世界에 그 根源을 두는 것을 더 論하게 되었었다. 그는 나에게 그것은 特히 古代 中國과 關聯이 있는 것을 인제는 좀 더 確然히 알 수 있노라고 말하여주엇섰다. 其外 또 호른뽀스텔氏는 「파나마」의 「쿠나」族(Cuna)의 呪文에 使用하는 文字가 中國에서 온 것을 指摘하며(第四圖 比較), 中部 亞米利加 象形文字의 起源을 中國文字에 찾었다. 원문주27▶如何間 이것으로 全地球의 文化가 이리저리 엉킨 것이며, 歷史發展의 全的 考察의 必要를 또 한 번 더 느끼게 된다.Ferdinand Bork: “Amerika und Westasien” in “Orientalisches Archiv”, hrsg. von Hugo Grothe Leipzig, Band Ⅲ(1912-1913)
Derselbe: “Weitere Verbindungslinien zwischen der Alten und eder Neuen Welt”.(Ibid. Bd. Ⅲ 1912-1913) F. Graebner: “Ethnologie”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E. M. von Hornbostel: “Chinesische Ideogramme in Amerika” in “Anthropos” ⅩⅩⅤ(1930).
F. Röck: “Die kulturhistorische Bedeutung von Ortungsreihen und Ortungsbildern” in “Anthropos” ⅩⅩⅤ(1930).
Derselbe: “Kalender, Sternglaube und Weltbilder der Tolteken als Zeugen verschollener Kulturbeziehungen zur Alten Welt” in “Mitteilungen der Anthropologischen Gesellschafrt in Wien” LⅡ. Bd(1922).
Vgl. auch John Loewenthal: “Das altmexikanische Ritual tlacacaliztli und seine Parallelen in den Vegetationskulten der Alten Welt” in selben Pand der “Mitteiungen usw.”</ref> (未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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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254.
  2. a. a. O. S. 302-303.
  3. Vgl. W. Sombart; Der moderne Kapitalismus Bd.1 L Halbband. München u. Leipzig 1922, S. 124
  4. Explorations in Turkestan(expedition of 1904), edited by Raphael Pumpelly, Washington 1908(Publications of the Carnegie Institution 73/1-2) Vol. Ⅰ, P. 74
  5.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S. 470.
  6. Explorations in Turkestan Vol. Ⅱ, P. 385.
  7. F. Graebner; Das Weltbild der Primitiven(Geschichte der Philosophie in Einzeldarstellungen hrsg. von G. Kafka, Bd 1) München 1924, S. 129. Derselbe; “Ethnologie”, S. 560.
  8. Völker und Kulturen,
  9. 國家를 das einzig Vollständige in dieser unvollständigen Welt des Daseins라고 한 헤-겔도 仍終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ein wirklicher Stast und eine wirkliche Staatsregierung entstehen nur, wenn bereits ein Unterschied der Stände da ist, wenn Reichtum und Armnt sehr gross werden und ein solches Verhältnis eintritt, dass eine grosse Menge ihre Bedürfnisse nicht mehr auf eine Weisc, wie sie es gewolunt ist, befriedigen kann”(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ReclamAnsgabe S. 133) 이것을 헤-겔은 傍點을 처가며(gosperrt) 썼다. 헤-겔의 言辭에는 언제나 兩面이 있는바, 그가 여기서 wirklich라고 한 것은 世間이 常用하는 wirklich와 同一한 것이오, 그가 哲學的 「잠꼬대」를 할쩍에 云謂하는 wirklich와는 何等 關係가 없는 것이다. 헤-겔은 왜, 언제나 이렇게 兩面을 가젔는가? 그것을 몰으고는, 그의 哲學 「성주풀이」에 넘어가는 수가 많다. 朝鮮의 젊은 哲學者 安浩相氏의 「普通學會論集」 中에 發表된 論文을 닑고, 나는 氏의 蘊蓄에 感歎은 하였으나, 同時에 그가 헤-겔의철學 「야바우」에 넘어갔다는 感을 禁할 수가 없었다.
  10. Josef Kulischer; Allgemeine Wirtschaftsgeschichte. Ⅰ. Bd München und Berlin 1928. S.29
    이 「울루ᅋᅳ젠」이란 일흠을 아는 者는 얼마 못되는 것은 學界의 一奇現象이다. 엥겔스는 一八八八年 英文으로 「宣言」에 쓴 註에, 「農村콤뮤늬즘」의 發見者를 「학쓰타우젠」(Haxthausen)으로 하였다. 一八九〇年에도 엥겔쓰는 同一한 見解를 갖었었든 것이다. 그의 「後裔」, 그 中에도 特히 「亞細亞的 生產樣式」으로 말썽인 學徒諸君이 「울루ᅋᅳ젠」의 일흠을 몰으는 것은 無理가 아니다. 아니, 이 亞流 論客들만 아니다. 碩學 쉬밑 師는 近著 Das Eigentum auf den ältesten Stufen der Menschheit Bd. Ⅰ, Münster 1937 中에서 「콤뮤늬즘」의 史的 存在를 論한 學者들을 羅列하는바, 거기서 그는 在來의 常例인 「학쓰타우젠」과 「마우에르」에 始終하고 만다. 쉬밑 師도 울루ᅋᅳ젠이 누구인지는 全然 몰으고 文獻考證을 하고 있다.
    줄리숴 敎授의 報道에 依하건대, 打末의 「울루ᅋᅳ젠」이 「村落콤뮤늬즘」에 關하야 처음 數次에 互한 講演을 한 것은 一八二一年의 事이다. 울루ᅋᅳ젠은 測量家로서 後에 大學敎授 及 翰林學院員으로 昇級한 學者이다.
  11. Vgl. F. Graebner; Ethnologie S. 515, 547
  12. 洪水神話 一般은 前亞細亞에서 起源된 것이라고 하며, 그 原因은 自然界의 一大變動에 있었다고 하였었다. 卽 波斯灣의 海中에서 火山이 暴發하자 海溢이 닐어나서 이 大水災를 當한 것이 乃終에는 神話化한 것이라고도 하였고, 또는 氷河期의 退去와 함께 氷河가 融解하야 大水災를 惹起한 것이 後에는 神話가 되였다고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렙너 敎授의 報道에 依하면 그것은 발서 퍽 以前의 原始文化에서 이 前亞細亞의 高級文化로 넘어온 一神話에 不過한 것이다.
    Vgl. F. Graebner; Das Weltbild der Primitiven, München 1924. Derselbe; “Ethnologie” S. 560 ff.
  13. šahr šāhir가 ša-örl ša-ho-örl 이 되였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朝鮮 現語의 「서울」이나, 徐那伐(三國史記 卷一, 新羅本紀一), 徐耶伐(同 卷三十四 雜志三, 地理一), 沙伐國의 沙伐(同上) 等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울」은 必然 波斯語의 šahr, šahir와 關係있는 것으로 처음 中央亞細亞 「알타이」牧遊民系에 傳來한 것이 다시 朝鮮에까지 온 것일 것이다. 勿論 바로 波斯語가 決局 朝鮮에까지 들어온 것이라고 斷言하기는 可能性이 퍽 많기는 하나) 어려운 바이다. 어나 달은 語源에서 出發한 것이 一便으로는 波斯에 갔고, 他方으로는 「알타이」族을 經由하야 朝鮮에 들어온 것이기도 쉬운 바이다. 如何間 이것으로 朝鮮의 都市文化도 間接으로나마 亞細亞 以西(前亞細亞를 合하야)의 西方 都市文化와 關聯된 消息을 들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世間이 다 알듯이, 「日本書紀」 第十九卷에 뵈는 「呼曰日向襲之高千穗 添 山 峯 矣」 中의 曾富理神의 曾富理(ソホリ)는 또 「서울」과 關係가 있는 것이다.
  14. Vg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edited by Sir John Marshall, London 1931, Vol. Ⅱ, P. 411.
  15. J. Marshall; “Other Antiquities and Art” in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Vol. I, Chapter IV.
  16. L. A. Waddell; The Indo-Sumerian Seals Deciphered, London 1925.
  17. L. A. Waddell; A Sumer Aryan Dictionary, London 1927, Intruductory P.ⅩⅩⅩⅡ.
  18. 言語學에 關한 知識이 없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수메리아」語와 中國語와의 關係를 論함은 事實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拙見을 試驗하는 나를 讀者諸君은 寬大히 容恕하기를 바란다.
    「수메리아」는 古語이오, 또 그 判讀도 充分히 된 것은 아닌 것인 만큼, 이 語에 關하야는 理論이 區區하다. 첫재 그 語의 所屬系統도 아직 채 몰으니, “Les langues du Monde” 中, 前亞細亞語에 關하야 執筆한 「오-뜨랑氏(C. Autran)는, 그런 故로 左와 如히 (「수메리아」語에 關하야) 말한다.
    Après qu'on a, tour à tour, essayé de le rattacher à l'indo-européen, àl'≪ouralo-altaïque≫, à l'égyptien, au sémitique, au mandchou, aux langues du Caucase, on d'y voir un idiome d'un type linguistique similaire à celui des idiomes africains, la plupart des spécialistes ont, aujourd'hui, renoncé à lui trouver des parents. (A. Meillet et M, Cohn: Les langues du monde- Collection Linguistique, publiée par la Société de Linguistique de Paris, XⅥ-, Paris 1923 P. 280)
    事勢가 이런 것은 事實은 이 「수메리아」語는 混合語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只今 仔細히 記憶할 수는 없으나, 아마 쉬밑 師는 「수」語를 「코카서쓰」語 乃至는 「야ᅋᅦᇀ」語(Japhetitisch)에 歸屬시킬 傾向을 가졌든가 보다. (그의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를 읽을 때 拔抄한 「노-트」에는 不幸히 이 個所가 缺如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이 記憶에는 別로 錯誤가 없을 것이다.) 「야ᅋᅦᇀ」語라면 그것은 母權文化系의 語인 듯한 것인 만큼, 「오-스트리」語(Austrisch)와 關係가 깊은 것이다. 따라서 「수메리아」語에 「오-스트리」語系의 語彙, 文章上 特徵 其他가 뵈는 것은 決코 意外가 아닌 것이다. 「수메리아」語에는 그러나 또 「우랄·알타이」語系의 影響도 퍽 많은 模樣이다. 그러기에 「수」語를 「우랄·알타이」語로 計算하는 분도 있는 듯하다(以上 A Autran氏의 文句에도 뵈듯이 여기에 關하야, 亞弗利加의 Zulu 及 Ntu語 中에 包含된 「수메리아」語素를 論하는 ᅄᅡ-그너(W. Wagner) 師의 文句를 引用해보기로 하자.
    “Van Oort reiht nämlich auch Sumner unter die uralischen Sprachen ein, und zwar in die nördliche Gruppe. Als die südliche betrachtet er das Ntu, während er Türkisch bis Japanisch als altaische Grappe anführt. Mit seiner Zusammenstellung von Sumer mit Ural-Altaisch hat er im wesentlichen nur das Gleiche getan wie Oppert, Lonormant, Hommel u. a., doron sumcro-ural-altaische These Schmidt allerdings als "nicht überzeugend" ablehnt. Ob mit Recht? Und van Oort's Annahme einer Verwandtschaft von Sumer und Ntu lässt sich heutzutage ale richtigerweisen.” (W. Wagner “Sumerisches Sprachgut im Zulu und Ntu”in “Anthropos ⅩⅩⅣ 1929, S. 552…J. F. van Oort: The Origin of the Bantu, Cape Town 1907)
    인제 「수메리아」語 中, 「오-스트리」語系에서 온 影響인 듯한 것을 支那語와 關聯하야 參考하건대, 오-뜨랑氏는 「수메리아」語 特徵 中 如左한 것도 든다.
    l'abrègement des mcts par chute d'initiale ou de finale qui modifie parfois jusqu'à en rendre l'identification malaisée des éléments grammaticaux essentiels; 이것은 「오-스트리」語라기보다도 支那語와 多少 共通되는 點일 것이다.
    au point de vue morphologigue: la brièveté ordinaire des formes, dont un grand nombre sont monosylla-biques, l'absence de différenciation extérieure entre les diverses parties du discours: nom, verbe, adverbe, etc; l’absence de distinction morphologique des genres; l’inexistence d’une flexion proprement dite;(P. 278)
    여기서 「變化」(flexion)가 正當한 意味에서 없다는 것은, 所謂 膠接語(agglutinierende Sprachen) 一般과 關聯되는 것이니, 「알타이」語도 여기에 包含디는 것이다. 性의 區別이 없는 것도 亦然하다. 또 母音에 所謂 變態音 ö, ü가 없는 것은 「오-스트리」語系의 影響과 關聯이 있는 것이나 아닐런지? 그러나 果然 이 所謂 變態母音이 없었는 지도 問題이다. 「수메리아」語에 關하야는 우리의 知識은 너무나 不足한 것이 많다. 우리는 오-뜨랑氏도 말한 바와 같이, 中亞 及 小亞細亞의 上古에 關한 知識이 좀 더 豐富하야질 때까지 기달일 수밖에 없는 바이다.
  19. 極東語와 「인도게르만」語와의 關聯에 關하야는 콥펠만氏의 左의 論文을 參照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同 論文 中에는 多少 左袒키 어려운 點이 있는 것을 일러둔다.
    Koppelmann; “Die Verwandtschaft des Koreanischen und der Ainusprache mit den indogermanischen Sprachen” in “Anthropos” ⅩⅩⅡ. S. 199 ff.
    「우랄·알타이」語와 「인도게르만」語와는 그렇지 않어도 關聯이 있는 것이다. 첫재 文章構造에있어 兩者는 原來 모다가 「後置語」(Suffix-Sprache)이다. 卽 第二格 (Genitiv)이, 그것에 依하야 좀 더 狹義的으로 決定되는 名詞에(例하면 「나의 집」의 「집」) 前置(後置가 아니라 前置이다) 되는 것이다. 따라서 兩語族, 目的格의 位置나 動詞의 位置가 모다 「後置語」에 相應하는 것으로, 相互類似하였든 것이다. 그런대, 「인도게르만」語 中 더러는 「前置語」(Präfix-Sprache)와 混合하야 本來의 構造를 變更하였든 것이다. 「게르만」語는 그 代表的의 것이다. 現今 獨逸語나 英語에 있어, 그것이 第二格을 後置하거나, 又는 所有格을 後置도 하고 前置도 하는 것은 이 「게르만」語가 그것 以前의 歐羅巴의 어느 (母權文化系의) 前置語와 混合하야 前置語로 變하였음에 그 原因이 있는 것이다.
  20. 朱芳圃, 甲骨學商史編(上海 一九三五年), 第九章 「卜法」條 恭照. 中國, 劉光漢氏는 이 書契의 「契」字를 가지고 中國文字의 起源을 楔形文字에 찾을 수 있는 一規範으로 한다. 그리하야 左와 如히 主張한다.
    中國文字出於巴比倫鍥文, 鍥契古通, 故文字古稱書契.(「國粹學報」)
    劉氏의 이 主張에는 그러나 信憑할 바가 없는 것이다. 一種의 臆說에 不過한 것이다.
  21. 甘肅, 河南 地帶에서 出土된 彩陶 中에는 文字에 酷似한 紋樣을 呈하는 者가 있다. 그러나 이것을 文字라고 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仰韶文化에 발서 高級文化, 都市文化의 影響이 多少 뵈이기 始作도 하는 만큼, 여기에 발서 中國文字의 端緖는 있었다고 主張했대야, 그리 無理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文字라고 하는 것은 암만 해야 좀 過言인 것이다. 如何間 仰韶期 後에 오는 後岡期(黑陶期)에는 이런 紋樣조차 全然 缺如하고 灰陶期에 일으러 中國文字의 原始形은 비로소 뵈이는 것이다.
  22. 이 漢文字에는 詩的 價値, 文學的 價値가 豐富한 것은 事實이다. 西洋 學徒들이 支那文學을 배우면, 거기에 陶醉하는 것도 그 原因은 그 文字 自體에 발서 豐富한 詩味가 있는 까닭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漢文은 果然 不幸한 文字인 것이다. 吾人이 漢字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는 限, 吾人은 西洋人과 科學上 競爭을 하기에는 퍽 不利한 處地에 있는 것이다.
  23. 李濟, 「安陽最近發掘報告及六次工作之總估計」(安陽發掘報告 第四期)
  24. 殷商 靑銅器에 關하야는 左記書籍參照—
    濱田靑陵(耕作), 「東亞文明の黎明」(東京, 昭和五年).
    梅原末治, 「支那古代の銅利器に就いて」(東方文化學院東京研究所 出版 「東方學報」 第二冊, 昭和六年十一月).
    其外, Östasiatiska Samlingarna 誌上에 發表되는 Karlgren氏 論文들도 參考.
  25. 李濟, 前揭書.
    商代 及 其以後의 靑銅器에 뵈이는 紋樣, 卽 雷紋, 虺龍紋, 襲餐紋 等을 濱田 博士나 梅原 博士는 南洋, 太平洋 島嶼世界 及 中部 亞米利加의 形의 더 發展한 것이라고 한다. 特히 濱田 博士는 「로스토ᅋᅳ체ᅋᅳ」 教授의 說을 들어 거기에 反對한다. 그러나 博士의 여기에 關한 意見에는 根本的 誤謬가 있는 것이다. 島嶼世界의 것은 大陸의 것이 傳來하야 거기서 原始的으로 退化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中部 亞米利加의 것은 아마 中國 의 것이 島嶼世界를 經由하야 傳來한 것일 것이다. 維也納民俗學博物館(Mnseum für Völkerkunde)에서 나는 中部 亞米利加에서 온 所謂 「돌멍에」(Steinjoch)라는 洋文字의 U字形으로 된 石制品에 색여진 紋樣을 보았는바, 그때 나는 그것이 殷周代의 것이 傳來한 것임을 直觀的으로나마 感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스토ᅋᅳ체ᅋᅳ 教授는 當時 아직 殷墟의 組織的 發掘이 없었든 만큼, 周代 以前의 것은 信憑할 수 없어서, 周代에서 出發하야 論하였는바, 그것은 勿論 今日에 至하야는 誤解이다. 周代의 것은 殷代의 것의 傳承에 不過한 것임은 더 論할 餘地가 없다. 그런대 로 敎授는 中國의 動物 及 植物 紋樣의 聯結을 「스키-트」族(Skythen)의 그것과 關聯시키며, 또 그 動物紋樣은 中國의 것이나, 모다 原來는 「이란」地帶의 中央亞細亞(Iranian Central Asia)에서 由來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는 一方 그는 또 中國의 動物紋樣이 「바빌론=앗시리아」의 美術과 關聯된 것이며, 그 原形은 「수메리아」에 있음을 論한다. 如何間 中國 商代 及 其以後의 雷紋, 虺龍紋, 饕餐紋 等等은 大陸에서 온 것이다. (雷紋 卽 mäander紋은 例하면 「우크라인」의 舊石器時代 後期의 「메진」文化 Mezynien에 발서 뵈이는 것이다. 第五圖). 이 關聯에서 뿔라이히쉬라이너 敎授는 Auch die bekannten Taotiel-Masken haben ihre primitiven Vorbilder auf Schnitzarbeiten aus dem Aitai, und der chinesische Drache mag einer Verbindung iranischer, sibirischer und vielleicht griechischer Elemente seine Entstehung verdanken. (Berichte usw., S. 40)이라고 한다. 그런대 나는 商代의 그것은 前亞細亞의 都市文化와도 因緣이 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如何間 南洋 及 島嶼世界의 것은 大陸에서 傳來한 것이오, 그것이 中國에 있어 더 發展하야 以上의 諸紋樣이 된 것은 決코 아니다. 여기서 나는 또 中央研究院系의 中國 學者들이 南洋에서 온 文化素라고 하는 것 中에는 그와 反對의 것이 많음을 指摘하야 둔다. 濱田, 前揭書, 四六頁. 梅原末治, 殷墟出土 白色土器の研究(東方文化學院 京都研究所 研究報告, 第一冊, 昭和七年), 第七節. Rostovzeff(Rostoveev): Iranians and Greeks in South Russia, Oxford 1922, P. 193 ff. R. Bleichsteiner: “Zum eurasiatischen Tierstil” in “Berichte des Asien Arbeitskreises”, Heft 2, Juni 1939(Wien und Peking)
    「우크라인」의 舊石器時代 後期 메진文化(Mezynien)에 뵈이는 雷紋(Mäander-Muster).
    a, 射弓時에 使用하는 象牙製의 腕楯(Armplatto).
    b, 象牙製彫相
    (Aus Menghin : Weltgeschichte usw.S. 208)






현대문주


  1.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S. 254.
  2. a. a. O. S. 302-303.
  3. Vgl. W. Sombart; Der moderne Kapitalismus Bd.1 L Halbband. München u. Leipzig 1922, S. 124
  4. Explorations in Turkestan(expedition of 1904), edited by Raphael Pumpelly, Washington 1908(Publications of the Carnegie Institution 73/1-2) Vol. Ⅰ, P. 74
  5. Menghin; Weltgeschichte der Steinzeit, S. 470.
  6. Explorations in Turkestan Vol. Ⅱ, P. 385.
  7. F. Graebner; Das Weltbild der Primitiven(Geschichte der Philosophie in Einzeldarstellungen hrsg. von G. Kafka, Bd 1) München 1924, S. 129. Derselbe; “Ethnologie”, S. 560.
  8. Völker und Kulturen,
  9. 국가를 das einzig Vollständige in dieser unvollständigen Welt des Daseins라고 한 헤겔도 종래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ein wirklicher Stast und eine wirkliche Staatsregierung entstehen nur, wenn bereits ein Unterschied der Stände da ist, wenn Reichtum und Armnt sehr gross werden und ein solches Verhältnis eintritt, dass eine grosse Menge ihre Bedürfnisse nicht mehr auf eine Weisc, wie sie es gewolunt ist, befriedigen kann”(G. W. F. Hegel: Vorlesungen über die Philosophie der Geschichte, ReclamAnsgabe S. 133) 이것을 헤겔은 방점을 처가며(gosperrt) 썼다. 헤겔의 언사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는바, 그가 여기서 wirklich라고 한 것은 세간이 상용하는 wirklich와 동일한 것이오, 그가 철학적 ‘잠꼬대’를 할 적에 운위하는 wirklich와는 하등 관계가 없는 것이다. 헤겔은 왜, 언제나 이렇게 양면을 가졌는가? 그것을 모르고는, 그의 철학 ‘성주풀이’에 넘어가는 수가 많다. 조선의 젊은 철학자 안호상씨의 「普通學會論集」 중에 발표된 논문을 읽고, 나는 씨의 온축(蘊蓄)에 감탄은 하였으나, 동시에 그가 헤겔의 철학 ‘야바위’에 넘어갔다는 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10. Josef Kulischer; Allgemeine Wirtschaftsgeschichte. Ⅰ. Bd München und Berlin 1928. S.29
    이 올루프젠이란 이름을 아는 자는 얼마 못 되는 것은 학계의 한 기현상이다. 엥겔스는 1888년 영문으로 「선언」에 쓴 주에, ‘농촌 코뮤니즘’의 발견자를 학쓰타우젠(Haxthausen)으로 하였다. 1890년에도 엥겔쓰는 동일한 견해를 갖었았던 것이다. 그의 ‘후예’, 그 중에도 특히 ‘아시아적 생산양식’으로 말썽인 학도제군이 올루프젠의 이름을 모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아니, 이 아류 논객들만 아니다. 석학 슈미트 선생은 근래의 저서 Das Eigentum auf den ältesten Stufen der Menschheit Bd. Ⅰ, Münster 1937 중에서 ‘코뮤니즘’의 사적 존재를 논한 학자들을 나열하는바, 거기서 그는 재래의 상례인 학쓰타우젠과 마위에르에 시종하고 만다. 슈미트 선생도 올루프젠이 누구인지는 전연 모르고 문헌고증을 하고 있다.
    줄리숴 교수의 보도에 의하건대, 타말의 올루프젠이 ‘촌락 코뮤니즘’에 관하여 처음 수차에 걸친 강연을 한 것은 1821년의 일이다. 올루프젠은 측량가로서 후에 대학교수 및 한림학원원으로 승급한 학자이다.
  11. Vgl. F. Graebner; Ethnologie S. 515, 547
  12. 홍수신화 일반은 전아시아에서 기원된 것이라고 하며, 그 원인은 자연계의 일대 변동에 있었다고 하였었다. 즉 페르시아만의 바다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자 해일이 일어나서 이 대수재(大水災)를 당한 것이 나중에는 신화화한 것이라고도 하였고, 또는 빙하기의 퇴거와 함께 빙하가 융해하여 대수재를 야기한 것이 후에는 신화가 되였다고도 하였었다. 그러나, 그레브너 교수의 보도에 의하면 그것은 벌써 퍽 이전의 원시문화에서 이 전아시아의 고급문화로 넘어온 한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Vgl. F. Graebner; Das Weltbild der Primitiven, München 1924. Derselbe; “Ethnologie” S. 560 ff.
  13. šahr šāhir가 ša-örl ša-ho-örl 이 되였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조선 현대어의 ‘서울’이나, 서나벌(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서야벌(동 권34 잡지3, 지리1), 사벌국의 사벌(동상) 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울’은 필연 페르시아어의 šahr, šahir와 관계있는 것으로 처음 중앙아시아 알타이목유민계에 전래한 것이 다시 조선에까지 온 것일 것이다. 물론 바로 페르시아어가 결국 조선에까지 들어온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가능성이 퍽 많기는 하나) 어려운 바이다. 어나 다른 어원에서 출발한 것이 一편으로는 페르시아에 갔고, 他方으로는 알타이족을 경유하여 조선에 들어온 것이기도 쉬운 바이다. 여하간 이것으로 조선의 도시문화도 간접으로나마 아시아 以西(전아시아를 合하여)의 서방 도시문화와 관련된 소식을 들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세간이 다 알듯이, 「일본서기」 제19권에 보이는 「呼曰日向襲之高千穗 添 山 峯 矣」 中의 曾富理神의 曾富理(ソホリ)는 또 ‘서울’과 관계가 있는 것이다.
  14. Vgl.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edited by Sir John Marshall, London 1931, Vol. Ⅱ, P. 411.
  15. J. Marshall; “Other Antiquities and Art” in “Mohenjo-Daro and the Indus Civilization”, Vol. I, Chapter IV.
  16. L. A. Waddell; The Indo-Sumerian Seals Deciphered, London 1925.
  17. L. A. Waddell; A Sumer Aryan Dictionary, London 1927, Intruductory P.ⅩⅩⅩⅡ.
  18. 언어학에 관한 지식이 없는 내가 여기서 이렇게 수메르어와 중국어와의 관계를 논함은 사실은 주제넘은 짓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졸견을 시험하는 나를 독자제군은 관대히 용서하기를 바란다.
    수메르는 고어이오, 또 그 판독도 충분히 된 것은 아닌 것인 만큼, 이 언어에 관하여는 이론이 구구하다. 첫째 그 언어의 소속계통도 아직 채 모르니, “Les langues du Monde” 중, 전아시아어에 관하여 집필한 아우트랑씨(C. Autran)는, 그런 고로 아래와 같이 (수메르어에 관하여) 말한다.
    Après qu'on a, tour à tour, essayé de le rattacher à l'indo-européen, àl'≪ouralo-altaïque≫, à l'égyptien, au sémitique, au mandchou, aux langues du Caucase, on d'y voir un idiome d'un type linguistique similaire à celui des idiomes africains, la plupart des spécialistes ont, aujourd'hui, renoncé à lui trouver des parents. (A. Meillet et M, Cohn: Les langues du monde- Collection Linguistique, publiée par la Société de Linguistique de Paris, XⅥ-, Paris 1923 P. 280)
    사세가 이런 것은 사실은 이 수메르어는 혼합어인 것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자세히 기억할 수는 없으나, 아마 슈미트 선생은 수메르어를 코카서스어 내지는 야벳어(Japhetitisch)에 귀속시킬 경향을 가졌던가 보다. (그의 Sprachfamilien und Sprachenkreise der Erde를 읽을 때 발초한 노트에는 불행히 이 개소가 결여되어 있다. 그러나 나의 이 기억에는 별로 착오가 없을 것이다.) 야벳어라면 그것은 모권문화계의 어인 듯한 것인 만큼, 오스트로어(Austrisch)와 관계가 깊은 것이다. 따라서 수메르어에 오스트로어계의 어휘, 문장상 특징 기타가 보이는 것은 결코 의외가 아닌 것이다. 수메르어에는 그러나 또 우랄 알타이어계의 영향도 퍽 많은 모양이다. 그러기에 수메르어를 우랄 알타이어로 계산하는 분도 있는 듯하다(이상 A Autran씨의 문구에도 뵈듯이 여기에 관하여, 아프리카의 Zulu 및 Ntu어 중에 포함된 수메르어소를 논하는 바그너(W. Wagner) 선생의 문구를 인용해보기로 하자.
    “Van Oort reiht nämlich auch Sumner unter die uralischen Sprachen ein, und zwar in die nördliche Gruppe. Als die südliche betrachtet er das Ntu, während er Türkisch bis Japanisch als altaische Grappe anführt. Mit seiner Zusammenstellung von Sumer mit Ural-Altaisch hat er im wesentlichen nur das Gleiche getan wie Oppert, Lonormant, Hommel u. a., doron sumcro-ural-altaische These Schmidt allerdings als "nicht überzeugend" ablehnt. Ob mit Recht? Und van Oort's Annahme einer Verwandtschaft von Sumer und Ntu lässt sich heutzutage ale richtigerweisen.” (W. Wagner “Sumerisches Sprachgut im Zulu und Ntu”in “Anthropos ⅩⅩⅣ 1929, S. 552…J. F. van Oort: The Origin of the Bantu, Cape Town 1907)
    이제 수메르어 중, 오스트로어계에서 온 영향인 듯한 것을 지나어와 관련하여 참고하건대, 아우트랑씨는 수메르어 특징 중 아래와 같은 것도 든다.
    l'abrègement des mcts par chute d'initiale ou de finale qui modifie parfois jusqu'à en rendre l'identification malaisée des éléments grammaticaux essentiels; 이것은 오스트로어라기보다도 지나어와 다소 공통되는 점일 것이다.
    au point de vue morphologigue: la brièveté ordinaire des formes, dont un grand nombre sont monosylla-biques, l'absence de différenciation extérieure entre les diverses parties du discours: nom, verbe, adverbe, etc; l’absence de distinction morphologique des genres; l’inexistence d’une flexion proprement dite;(P. 278)
    여기서 ‘변화’(flexion)가 정당한 의미에서 없다는 것은, 소위 膠接語(agglutinierende Sprachen) 일반과 관련되는 것이니, 알타이語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이다. 성의 구별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하다. 또 모음에 소위 변태音 ö, ü가 없는 것은 오스트로어계의 영향과 관련이 있는 것이나 아닐런지? 그러나 과연 이 소위 변태모음이 없었는지도 문제이다. 수메르어에 관하여는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부족한 것이 많다. 우리는 아우트랑씨도 말한 바와 같이, 중앙아시아 및 소아시아의 상고에 관한 지식이 좀 더 풍부하여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바이다.
  19. 극동어와 인도게르만어와의 관련에 관하여는 코퍼스펠만씨의 아래의 논문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동 논문 중에는 다소 좌단키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을 일러둔다.
    Koppelmann; “Die Verwandtschaft des Koreanischen und der Ainusprache mit den indogermanischen Sprachen” in “Anthropos” ⅩⅩⅡ. S. 199 ff.
    우랄 알타이어와 인도게르만어와는 그렇지 않아도 관련이 있는 것이다. 첫째 문장구조에 있어 양자는 원래 모두가 ‘후치어’(Suffix-Sprache)이다. 즉 제2격 (Genitiv)이, 그것에 의하여 좀 더 협의적으로 결정되는 명사에(예하면 ‘나의 집’의 ‘집’) 전치(후치가 아니라 전치이다) 되는 것이다. 따라서 양 어족, 목적격의 위치나 동사의 위치가 모두 ‘후치어’에 상응하는 것으로, 상호 유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인도게르만어 중 더러는 ‘전치어’(Präfix-Sprache)와 혼합하여 본래의 구조를 변경하였던 것이다. 게르만어는 그 대표적인 것이다. 현금 독일어나 영어에 있어, 그것이 제2격을 후치하거나, 또는 소유격을 후치도 하고 전치도 하는 것은 이 게르만어가 그것 이전의 유럽의 어느 (모권문화계의) 전치어와 혼합하여 전치어로 변하였음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20. 朱芳圃, 갑골學商史編(上海 1935년), 제9장 「卜法」條 恭照. 중국, 劉光漢씨는 이 書契의 「契」字를 가지고 중국문자의 기원을 설형문자에 찾을 수 있는 한 규범으로 한다. 그리하여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중국문자出於바빌론鍥文, 鍥契古通, 故문자古稱書契.(「國粹學報」)
    劉씨의 이 주장에는 그러나 신빙할 바가 없는 것이다. 일종의 억설에 불과한 것이다.
  21. 감숙, 하남 지대에서 출토된 채도 중에는 문자에 혹사(酷似)한 문양을 보이는 것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라고 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앙소문화에 벌써 고급문화, 도시문화의 영향이 다소 보이기 시작도 하는 만큼, 여기에 벌써 중국문자의 단서는 있었다고 주장했대야, 그리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문자라고 하는 것은 암만 해야 좀 과언인 것이다. 여하간 앙소기 후에 오는 후강기(흑도기)에는 이런 문양조차 전연 결여하고 회도기에 이르러 중국문자의 원시형은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22. 이 한문자에는 시적 가치, 문학적 가치가 풍부한 것은 사실이다. 서양 학도들이 지나문학을 배우면, 거기에 도취하는 것도 그 원인은 그 문자 자체에 벌써 풍부한 시미(詩味)가 있는 까닭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한문은 과연 불행한 문자인 것이다. 우리가 한자라는 무거운 짐을 등에 지고 있는 한, 우리는 서양인과 과학상 경쟁을 하기에는 퍽 불리한 처지에 있는 것이다.
  23. 李濟, 「安陽最近發掘報告及六次工作之總估計」(安陽發掘報告 第四期)
  24. 은상 청동기에 관하여는 左記서적참조—
    濱田靑陵(耕作), 「東亞文明の黎明」(東京, 昭和五年).
    梅原末治, 「支那古代の銅利器に就いて」(東方文化學院東京研究所 出版 「東方學報」 第二冊, 昭和六年十一月).
    그 외, Östasiatiska Samlingarna 지상에 발표되는 Karlgren씨 논문들도 참고.
  25. 李濟, 전게서.
    상대 및 그 이후의 청동기에 보이는 문양, 卽 雷紋, 虺龍紋, 襲餐紋 等을 빈전(濱田) 박사나 매원 박사는 남양, 태평양 도서세계 및 중부 아메리카의 형태의 더 발전한 것이라고 한다. 특히 빈전(濱田) 박사는 로스톱체프 교수의 설을 들어 거기에 반대한다. 그러나 박사의 여기에 관한 의견에는 근본적 오류가 있는 것이다. 도서세계의 것은 대륙의 것이 전래하여 거기서 원시적으로 퇴화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중부 아메리카의 것은 아마 중국의 것이 도서세계를 경유하여 전래한 것일 것이다. 빈 민속학박물관(Mnseum für Völkerkunde)에서 나는 중부 아메리카에서 온 소위 ‘돌멍에’(Steinjoch)라는 양문자의 U자형으로 된 석제품에 색여진 문양을 보았는바, 그때 나는 그것이 은주대의 것이 전래한 것임을 직관적으로나마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로스톱체프 교수는 당시 아직 은허의 조직적 발굴이 없었던 만큼, 주대 이전의 것은 신빙할 수 없어서, 주대에서 출발하여 논하였는바, 그것은 물론 금일에 이르러는 오해이다. 주대의 것은 은대의 것의 전승에 불과한 것임은 더 논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로스톱체프 교수는 중국의 동물 및 식물 문양의 연결을 스키타이족(Skythen)의 그것과 관련시키며, 또 그 동물문양은 중국의 것이나, 모두 원래는 이란지대의 중앙아시아(Iranian Central Asia)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는 한편 그는 또 중국의 동물문양이 ‘바빌론=아시리아’의 미술과 관련된 것이며, 그 원형은 수메르에 있음을 논한다. 여하간 중국 상대 및 그 이후의 뇌문, 虺龍紋, 饕餐紋 등등은 대륙에서 온 것이다. (뇌문 즉 mäander문은 예하면 우크라이나의 구석기시대 후기의 ‘메진’문화(Mezynien)에 벌써 보이는 것이다. 제5도). 이 관련에서 블라이히슈타이너 교수는 Auch die bekannten Taotiel-Masken haben ihre primitiven Vorbilder auf Schnitzarbeiten aus dem Aitai, und der chinesische Drache mag einer Verbindung iranischer, sibirischer und vielleicht griechischer Elemente seine Entstehung verdanken. (Berichte usw., S. 40)이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상대의 그것은 전아시아의 도시문화와도 인연이 깊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바이다. 여하간 남양 및 도서세계의 것은 대륙에서 전래한 것이오, 그것이 중국에 있어 더 발전하여 이상의 여러 문양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여기서 나는 또 중앙연구원계의 중국 학자들이 남양에서 온 문화소라고 하는 것 중에는 그와 반대의 것이 많음을 지적하여 둔다. 濱田, 前揭書, 四六頁. 梅原末治, 殷墟出土 白色土器の研究(東方文化學院 京都研究所 研究報告, 第一冊, 昭和七年), 第七節. Rostovzeff(Rostoveev): Iranians and Greeks in South Russia, Oxford 1922, P. 193 ff. R. Bleichsteiner: “Zum eurasiatischen Tierstil” in “Berichte des Asien Arbeitskreises”, Heft 2, Juni 1939(Wien und Peking)
    우크라이나의 구석기시대 후기 메진문화(Mezynien)에 뵈이는 뇌문(Mäander-Muster).
    a, 사궁시에 사용하는 상아제의 완순(腕楯, Armplatto).
    b, 상아제 조상
    (Aus Menghin : Weltgeschichte usw.S. 208)
  26. 이 서방과의 관련에 관하여는 아래의 서적 참조.
    Rostovzeff (Rostovcev): a. a. O. 및 동씨의 L'art chinois de l'époque de Han, Revue des arts Asiatiques 1924. 그 외 또 Östasiatiska Samlingarna(Bulletin of the Museum of Far Eastern Antiquities), Stockholm, 誌上에 발표한 J. G. Andersson, Glov Janse, H. J. Arne 제씨의 제논문. 빈전(濱田), 전게서. Bleichsteiner: a. a. O.
  27. Ferdinand Bork: “Amerika und Westasien” in “Orientalisches Archiv”, hrsg. von Hugo Grothe Leipzig, Band Ⅲ(1912-1913)
    Derselbe: “Weitere Verbindungslinien zwischen der Alten und eder Neuen Welt”.(Ibid. Bd. Ⅲ 1912-1913) F. Graebner: “Ethnologie”
    Schmidt u. Koppers: Völker und Kulturen.
    E. M. von Hornbostel: “Chinesische Ideogramme in Amerika” in “Anthropos” ⅩⅩⅤ(1930).
    F. Röck: “Die kulturhistorische Bedeutung von Ortungsreihen und Ortungsbildern” in “Anthropos” ⅩⅩⅤ(1930).
    Derselbe: “Kalender, Sternglaube und Weltbilder der Tolteken als Zeugen verschollener Kulturbeziehungen zur Alten Welt” in “Mitteilungen der Anthropologischen Gesellschafrt in Wien” LⅡ. Bd(1922).
    Vgl. auch John Loewenthal: “Das altmexikanische Ritual tlacacaliztli und seine Parallelen in den Vegetationskulten der Alten Welt” in selben Pand der “Mitteiungen us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