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화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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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현지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11일 (월) 20:1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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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화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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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高麗畵跡 對하야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3호 발행기관 震檀學會
저자 고유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
시작쪽 109쪽 종료쪽 131쪽 전체쪽 23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일반으로 조선문화 방면이 다 그러하지만 미술공예품에 있어서도 문헌 내지 유적이 희귀한 중 특히 상고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무괴(無怪)한 편이나 근근 오백년 전 내지 천년 전 간의 고려의 별적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기괴를 지나 처 마하 불가사의의 일이라 할 만하다. 논자 있어 그 이유를 설명하여 가로되 혹은 병화부식(兵禍不息)을 거증하고 혹은 예도에 대한 일반의 무교무관심을 부회하나 전론은 오히려 사실에 근사하지만 후론은 일단의 검토를 경하여야 할 것이 위선 필자가 당장에 문제하고 있는 고려의 예도에 대한 애호가 범론상식으로써 의할 바 아니어서 단간 척소 산견되는 기록에서나마 일대 호화판을 그려낼 수 있으니, 여초 이래 사사건축의 장엄, 현고간의 팔만대장경과 일반서적의 인행, 의종 전후의 별궁 이전의 수려와 및 청자의 발달, 충렬 충선간의 사경예술의 발달, 기타 탑비, 나전칠기, 금착동기의 발달, 이러한 주도 이외의 편례를 모두 고사시하고 순전히 회화미술에서의 예만 들더라도 국초의 도화원 내지 화국의 설립이 대서특서할 중요한 사실로「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내외가 추억하는 유일의 조선미술안내서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 운운의 망론을 경거히 단론하였으나, 고려사 백관지 외직(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이란 기록이 있고, 파한집(破閑集)의 이영(李寧)의 기사 중에 「睿宗時畫局」이란 구와 동문선 이인로 이상귀휴도찬서(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구가 있으니, 화원화국의 존재를 어찌 의심하랴. 실로 이 화원의 설치야말로 장차로는 회화미술의 교화(아카데미슴)의 한 원인(遠因)을 형성할 것이나, 그러나 그 시설 당초에 있어서는 화용의 중차대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시설(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화도에 대한 애호를 이 화원의 한 일(一事)로써만 입증하려 함은 구우일모에 비의 불과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구체적 사실을 들어 말하면, 역대 제왕 중 헌종(주석1) 인종(주석2) 명종 충선왕 공민왕 등 지존으로서 화도에 정진한 이가 많음은 역사상 드문 일이며, 예종은 천장각(天章閣)을 구금에 창립하여 송제의 어필서화(御筆書畫)를 완장하여 때때로 군신에게 선시하였으며, 의종조에는 내시의 좌우번(左右番)이 유경(遊競)에 빙탁하여 진보 서화를 헌상하였으며, 충선왕은 연저(燕邸)에 만권당을 창구하 염복(閻復), 도수(姚燧), 조맹부(趙孟頫) 우집(虞集) 등 석유(碩儒)와 명화 대가들로 교유하되 특히 본국에서 시서화삼절(詩書畫三絕)로 칭송되던 이익재(李益齋)를 소치하여 그들과 교유하게 하였으니, 왕이 이미 능서의 재주로써 다시 삼절의 익재공(益齋公)을 소치한 것은 촌탁(忖度)하건댄 예문치학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화도에 정진, 명화의 수습에도 의략이 있었다 할 것이니 조맹과(趙孟顆)(주석3) 벌써 명화대가이지만 고소 주덕윤(朱德潤)과도 친교를 맺고 왕공엄(王公儼), 임인계(仁癸), 이간(李衎), 장언보(張彥輔), 유도권(劉道權) 등 대가들을 품등하며, 위언(韋偃)의 화송畫松 한간(韓幹)의 화마(畫馬) 등 고화를 들어 시화일치의 화론(畫論)을 설립한 계림공(鷄林公)이 어찌 고려화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사대부로서 화도에 능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주석4)─지륵사(智勒寺)의 광지선사(廣智禪師)가 일석도( 一釋徒)로서 「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호화벽을 들지 마자(주석5) 그러나 도화견문지(圖畫見聞誌)에 「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 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같은 글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고려인의 호화벽의 일단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고려사 열전 이녕조(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 함이 있으니 명종은 오히려 그림에 능한 인물인 만큼 그 의견은 개인적 의견에 불과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중의를 강조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대세를 알고 서의 결착이었든지 천언만사의 주석을 요(要)치 않는 절대의 호증(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화도에 대한 관심은 고려사회에 일반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결코 이조(李朝)말엽 이후의 조선의 정상으로써 과거를 촌도(忖道)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면 상술한 배경 속에서 자라난 고려의 회화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필자가 빈약한 문헌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一般으로 朝鮮文化 方面이 다 그러하지만 美術工藝品에 있어서도 文獻 乃至 遺跡이 稀貴한 中 特히 上古에 있어서 그러함은 오히려 無怪한 편이나 僅僅 五百年 前 乃至 千年 前 間의 高麗의 畫跡에 있어서도 그러함은 奇怪를 지나 처 摩訶 不可思議의 일이라 할 만하다. 論者 있어 그 理由를 說明하여 가로되 或은 兵禍不息을 擧證하고 或은 藝道에 對한 一般의 無敎無關心을 附會하나 前論은 오히려 事實에 近似하지만 後論은 一段의 檢討를 經하여야 할 것이 爲先 筆者가 當場에 問題하고 있는 高麗의 藝道에 對한 愛好가 凡論常識으로써 議할 바 아니어서 斷簡 尺素 散見되는 記錄에서나마 一大 豪華版을 그려낼 수 있으니 麗初 以來 寺社建築의 莊嚴, 顯高 間의 八萬大藏經과 一般書籍의 印行, 毅宗 前後의 別宮 離殿의 修麗와 및 靑磁의 發達, 忠烈 忠宣間의 寫經藝術의 發達, 其他 塔碑, 螺鈿漆器, 金錯銅器의 發達 이러한 晝道 以外의 片例를 모두 姑捨是하고 純全히 繪畫美術에서의 例만 들더라도 國初의 圖畫院 乃至 畫局의 設立이 大書特書할 重要한 事實로 「李王家博物舘所藏品寫眞帖解說」같은 內外가 推抑하는 唯一의 朝鮮美術案內書도「萬若 新羅朝에 이들 畫院 같은 것이 있었다 하면 이를 繼承한 麗朝에 있어서도 亦 그 施設이 없지 못할 것이나 然이나 史上에 다시 그 일이 없고」云云의 妄論을 輕擧히 斷論하였으나 高麗史 百官志 外職에 「賓曹員吏亦同上大府小府陳設司綾羅店圖書院幷屬焉」 이란 記錄이 있고, 破閑集의 李寧의 記事中에 「睿宗時畫局」이란 句와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에 「爰請畫局朴子雲J의 句가 있으니, 畫院畫局의 存在를 어찌 疑心하랴。實로 이 畫院의 設置야말로 將次로는 繪畫美術의 校化(아카데미슴)의 一 遠因을 形成할 것이나, 그러나 그 施設 當初에 있어서는 畫用의 重且大함을 오히려 더 많이 느끼고 施設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高麗時代의 畫道에 對한 愛好를 이 畫院의 一事로써만 立證하려 함은 九牛一毛에 比의 不過한 것이요 다시 돌이켜 具體的 事實을 들어 말하면, 歷代 諸王 中 獻宗(주석1) 仁宗(주석2) 明宗 忠宣王 恭愍王 等 至尊으로서 畫道에 精進한 이가 많음은 歷史上 드문 일이며, 睿宗은 天章閣을 九禁에 剏立하여 宋帝의 御筆書畫를 玩藏하여 때때로 群臣에게 宣示하였으며, 毅宗朝에는 內侍의 左右番이 遊競에 憑托하여 珍寶 書畫를 獻上하였으며, 忠宣王은 燕邸에 萬卷堂을 剏構하 閻復, 姚燧, 趙孟頫, 虞集 等 碩儒와 名畫 大家들로 交遊하되 特히 本國에서 詩書畫三絕로 稱頌되던 李益齋를 召致하여 그들과 交遊하게 하였으니, 王이 이미 能書의 才로써 다시 三絕의 益齋公을 召致한 것은 忖度하건댄 例文致學에만 뜻이 있었다느니보다 畫道에 精進, 名畫의 收拾에도 意略이 있었다 할 것이니 趙孟顆(주석3) 벌써 名畫大家이지만 姑蘇 朱德潤과도 親交를 맺고 王公儼,任仁癸, 李衎, 張彥輔, 劉道權 等 大家들을 品騰하며, 韋偃의 畫松 韓幹의 畫馬 等 古畫를 들어 詩畫一致의 畫論을 設立한 鷄林公이 어찌 高麗畫 發展에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士大夫로서 畫道에 能한 이가 많음을 말치마자(주석4)─ 智勒寺의 廣智禪師가 一釋徒로서 「方丈蕭然餘經書圖畫」라 일컬어진 好畫癖을 들지 마자(5) 그러나 圖畫見聞誌에「熙寧甲寅歲、遣使金良鑒入貢, 請求中國圖書 銳意購求、稍精者十無一二, 然猶費三百餘緡」이라 한 것은 무엇을 말한 것일 것이며, 同書에 「丙辰冬, 復遣使崔思訓入貢, 因將帶畫工數人, 奏請摹寫相國寺壁畫歸國, 詔許之 ”於是 盡模之持歸, 其模畫人頗有精於工法者」라 한 것이 모두 麗人의 好畫癖의 一端 證明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高麗史列 傳 李寧條에 「光弼子, 以西征功, 補除正, 正言崔基厚議曰 此子年甫二十, 在西征方十歲矣, 豈有十歲童子龍從軍者, 堅執不署, 王宗明召基厚責曰, 爾獨不念光弼榮吾國耶, 微光弼 三韓圖畫殆絕矣, 基厚乃署之」라함이 있으니 明宗은 오히려 能畫人物인 만큼 그 意見은 個人的 意見에 不過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되 「爾獨]이란 말이 얼마나 衆意를 強調한 것이며 「乃署之」란 말이 얼마나 大勢를 알고 서의 結着이었든지 千言萬辭의 注釋을 要치 않는 絕對의 好證이다. 이로써 보면 畫道에 對한 關心은 高麗社會에 一般이었던 것으로 볼 것이요. 決코 李朝末葉 以後의 朝鮮의 情狀으로써 過去를 忖度할 것이 아니라 하겠다.
그러면 上述한 背景 속에서 자라난 高麗의 繪畫는 어떠한 것이 있었던가. 이것이 筆者가 貧弱한 文獻에서 나마 이곳에 더듬어볼까 하는 바이다.






본문


본문1: 一.人物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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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11-3元來 繪畫의 始源이 人物畫에 있었음은 作畫衝動이 發揮되기 시작하는 兒童의 戱畫에 도 證明할 수 있으나, 그러나 初期의 人物畫는 類型的 人物畫이어서 어느 特殊한 個性을 가진 特殊한 人物畫 即 肖像畫가 아니었다. 이러한 意味의 肖像畫가 언제부터 朝鮮서 發生되었을까 함은 매우 推定하기 어려운 것이니 例컨대 高句麗壁畫에 나타난 人物畫들은 肖像畫라는 이 보다 오히려 類型的 人物畫에 가까운데 百濟의 阿佐太子는 벌써 完全한 肖像畫를 남긴 듯이 傳하여 내려오니, 어느 世代에 肖像畫가 비로소 發展되었는지 確實이 말하기 어려웁고 新羅統一期에 들어와서는 確實한 肖像畫가 있었던 듯하여 多少의 文獻에 남아 있다。例컨대 雙溪寺 眞鑒禪師 碑文에 보이는 6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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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1: (甲)眞殿의 發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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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2: (乙)圖形功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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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1-3: (丙)其他의 肖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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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 二.宗敎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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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1: (甲)佛敎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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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2: (乙)儒敎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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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3: (丙)道教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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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2-4: (丁)神道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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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3: (戊)自由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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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四.實用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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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1: (甲)天文地理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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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2: (乙)經籟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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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3: (丙)其他雜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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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현대문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