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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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훈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8일 (월) 14:23 판 (본문2: 2.전법과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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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초기 국역편성의 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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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李朝初期 國役編成의 基底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4 발행기관
저자 김석형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41년06월
시작쪽 1쪽 종료쪽 50쪽 전체쪽 50쪽 연재여부 범주 논술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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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본문


본문1: 1.머리말


국가가 인민에 대하여 그의 직접적인 노동력을 수취한다는 것, 곧 부역이라는 것은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여 구성되는 봉건적 국가의 한 징표로서 주지되는 사실이다. 국가 재정의 운용이 현대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상이한 봉건적 국가는, 봉쇄적이요 개개로 고립한 일반적 자연경제에 제한되는 것이므로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모든 부문의 요구를 충당하려면, 인민을 직접 징발, 사역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대소(大小)의 토목 영선에는 물론이요, 이조초기와 같아서는, 궁중의 잡역과 병기 집물의 제조까지도 직접 인민을 징발하여 이에 당하게 하였고, 그뿐 아니라 자염, 목부, 조세의 조전, 도기, 자기의 제조 등에도, 모두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조선조 초기의 인민이 지는 국역은 실로 많기도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국역은 지방 관아에서 지방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과, 또 중앙에서 국가 전체의 목적 아래에서 필요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줄 안다. 경국대전 호전 요부조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전자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해당 조 말미의 세주(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자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지방적 국역은 그것이 여하한 사적 과정을 밟아 왔든, 후자의 전체적 국역이라고 할 만한 것에 비하면, 소규모의 것이었고 지방에 따라 또한 사정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본론에 있어서는 건드리지 않기로 한다. 후자인 전체적 국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일시적인 것, 예를 들면 한성도시건설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출전 같은 것과 항구적인 것과를 구별할 수 있으니, 본론의 이른바 국역이라는 것은, 곧, 이 전체적인 국역 중에서도 항구적인 것을 가리킨 것이다.
쪽수▶P1-1國家가 人民에 對하여 그의 直接的인 勞働力을 收取한다는 것, 곧 賦役이라는 것은 一般的 自然經▶P2濟를 土臺로 하여 構成되는 封建的 國家의 한 徵表로서 周知되는 事實이다. 國家 財政의 運用이 現代의 그것과 根本的으로 相異한 封建的 國家는, 封鎻的이요 個個로 孤立한 一般的 自然經濟에 制限되는 것이므로 勞働力을 必要로 하는 모든 部門의 要求를 充當할랴면, 人民을 直接 徵發, 使役하는 수밖에 없었든 것이다. 大小의 土木 營繕에는 勿論이요, 李朝 初期와 같아서는, 宮中의 雜役과 兵器 什物의 製造에까지도 直接 人民을 徵發하여 이에 當케 하였고, 그뿐 아니라 煮塩, 牧夫, 租稅의 漕轉, 陶器, 磁器의 製造 等에도, 凡 사람을 사서 한다는 일이 없었으니, 朝鮮朝 初期의 人民이 지는 國役은 實로 많기도 많었든 것이다. 이러한 國役은 地方 官衙에서 地方的으로 必要로 하는 것과, 또 中央에서 國家 全體의 目的 아래에에서 必要로 하는 것, 이 두 가지로 大別할 수 있을 줄 안다. 經國大典 戶典 徭賦條에 「凡田八結 出一夫, 一歲不過役六日 云云」이라 한 것은 前者에 該當한 것인데, 그것은 該條 末尾의 細註에 「京城底十里, 皆京役」이라 한 것으로도 自明한 事實이다. 이러한 地方的 國役은 그것이 如何한 史的 過程을 밟어왔든, 後者의 全體的 國役이라고 할 만한 것에 比하면, 小規模의 것이었고 地方에 딿아 또한 事情을 달리하였을 터이므로 本論에 있어서는 건다리지 않기로 한다. 後者인 全體的 國役이라고 하는 것도, 그중에서, 一時的인 것, 例하면 漢城都市建設이라든가, 또 가끔 있는 出戰 같은 것과 恒久的인 것과를 區別할 수 있으니, 本論의 이른바 國役이라는 것은, 곧, 이 全體的인 國役 中에서도 恒久的인 것을 가르친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국역에 대하여는 경국대전에도 별다른 규정이 없으니, 그것은 곧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이 노동부대가 제공되기 때문이었다. 조선조 초기의 병제가 소위 부병제라 하여 국민개병주의의 원칙에 입각하였고, 신분이라는 것이 그 사회의 모든 인민의 활동을 규정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국민개병의 원칙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판이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위에 말한 노동부대가 군역의 이름 아래에서 제공되는 것도 이러한 신분을 토대로 한 개병주의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양반의 자손이 져야 하는 병역은 갑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천인이 져야 하는 병역은 괭이와 삽을 드는 노동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군역이라는 것은 단순한 병역이 아니라, 당시의 국역의 근간을 이루었던 것이다. 세종실록 10년 8월 임오조에 보이는 양성지의 의견은 차간(此間)의 소식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다.
쪽수▶P3-1이러한 意味의 國役에 對하여는 經國大典에도 別다른 規定이 없으니, 그것은 곧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이 勞働部隊가 提供되기 때문이었다. 朝鮮朝 初期의 兵制가 所謂 府兵制라 하야 國民皆兵主義의 原則에 立脚하였고, 身分이라는 것이 그 社會의 모든 人民의 活動을 規定하는 것이었으므로 이 國民皆兵의 原則이 오늘날의 그것과는 判異한 것이었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우에 말한 勞働部隊가 軍役의 일흠 아래에서 提供되는 것도 이러한 身分을 土臺로 한 皆兵主義이기 때문이었다. 쉽게 말하면 兩班의 子孫이 저야 하는 兵役은 甲옷 입고 투구를 쓰는 벼슬이었지만, 賤人이 저야 하는 兵役은 굉이와 삽을 드는 勞働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軍役이라는 것은 單純한 兵役이 아니라, 當時의 國役의 根幹을 이루웠든 것이다. 世宗實錄 十年 八月 壬午條에 보이는 梁誠之의 意見은 此間의 消息을 端的으로 말하고 있다.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쪽수▶P3-2

(上略) 且本朝軍士 親兵曰 內禁衛·兼司僕 衛兵曰 甲士別侍衛 勳位曰 忠義·忠賛術 宿衛曰 奉忠·供宸術 番上曰 正兵平虜衛 步軍曰 破敵衛 役軍曰 防牌 使令軍曰 攝六十 控鶴軍曰近杖 奴軍曰 壯勇隊 軍器監曰 別軍 鎭守軍曰 鎭軍·守城軍 此內外騎步之額也

양성지의 이 열거가 당시의 제색군인을 모두 망라한 것이냐 아니냐는 고사하고라도, 그가 제색군인을 역목(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주목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병종론(兵種論)에 의하면 오늘날의 기술적인 병종과는 판이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당시의 병종이 신분에 제한되어 결정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역군이라든가 사명군이라 하는 범주를 번상군이라든가 보군이라든가 하는 범주와 같은 가치에 있어서 논하였으나, 후자는 기술적인 것이었으므로 사령, 역군과 동일시될 성질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병종론에서 선군을 빼었고 또 역군인 대졸과 공천 중에서도 선상노를 불문에 부쳤다. 사령인 섭(攝)60도 번상군이요 보군이었다. 그의 병종론에 소루(疎漏)한 감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신분을 토대로 하여 병종을 논한 데에 그의 탁견이 보인다. 대개, 당시에 있어서 병종을 구분하는 것은 신분이었고, 또한 반대로 군역(국역)의 부담에 있어서 다시 그의 신분은 세분화되었으니, 예를 들면, 신량역천(身良役賤)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방패는 활과 칼 대신에 괭이와 삽을 드는, 병역 아닌 역군이라는 병역을 졌으며, 또한 그가 역군인 방패라는 병역을 지는 데에서, 그의 신분은 신량역천 중의 세분화된 방패라는 신분이 되었던 것이다. 병사라는 것은 적어도 조선조 초기에 있어서는 단순한 기술상의 병사가 아니라 그 사회 구성 관계에 있어서의 신분의 운명적인 존재상이었던 것이다.
쪽수▶P3-3梁誠之의 이 列擧가 當時의 諸色軍人을 總히 網羅한 것이냐 아니냐는 姑捨하고라도, 그가 諸色軍人을 役目에 따라서 나눈 것은 우리의 注目을 끄는 바이다. 다시 말하면 그의 兵種論에 依하면 오늘날쪽수▶P4-1의 技術的인 兵種과는 判異함을 볼 수 있으니, 그것은 當時의 兵種이 身分에 制限되여 決定되는 까닭이었다. 그는 役軍이라든가 使命軍이라 하는 範疇를 番上軍이라든가 步軍이라든가 하는 範疇와 같은 價値에 있어서 論하였으나, 後者는 技術的인 것이었으므로 使令, 役軍과 同一視될 性質의 것은 아니며, 또 그는 이 兵種論에서 船軍을 빼었고 또 役軍인 隊卒과 公賤 中에서도 選上奴를 不問에 붙였다. 使令인 攝六十도 番上軍이요 步軍이었다. 그의 兵種論에 疎漏한 憾이 없지 않지만, 大體로 身分을 土臺로 하여 兵種을 論한 데에 그의 卓見이 보인다. 大概, 當時에 있어서 兵種을 區分하는 것은 身分이었고, 또한 反對로 軍役(國役)의 負擔에 있어서 다시 그의 身分은 細分化되였으니, 例하면, 身良役賤의 身分이었기 때문에 防牌는 활과 칼 代身에 굉이와 삽을 드는, 兵役 아닌 役軍이라는 兵役을 졌으며, 또한 그가 役軍인 防牌라는 兵役을 지는 데에서, 그의 身分은 身良役賤 中의 細分化된 防牌라는 身分이 되었든 것이다. 兵士라는 것은 적어도 朝鮮朝 初期에 있어서는 單純한 技術 上의 兵士가 아니라 그 社會 構成 關係에 있어서의 身分의 運命的인 存在相이었든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병사는 당시 일반적 자연경제를 토대로 하는 국가 재정의 특이한 운용에 의하여, 또 한번 윤색을 받게 되니, 당시의 병제 조직의 해부는 이 두 가지의 요소를 실마리로 하여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신분의 구현이었던 이 이조초기의 인민은 법제적인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조직되어, 국가에 대한 여러가지 부담을 졌다. 병역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병사는 이 호구법의 수단에 의하여 처음 전 인민층에서 추출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출된 병사는 그의 신분적 제한에 있어서 ‘성색’되었고, 국가는 이를 제가 가지는 특이한 방법으로서 조직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추출 편성되는 병사는, 또 다시 서반 관료 조직의 일원으로서 편입되어, 처음 구체적인 병사가 되었던 지라, 이 두 가지 과정에 의하여 처음, 단순한 인정(人丁)은 일개의 전문적인 병사가 되니, 전자의 과정은 후자의 그것의 토대요, 후자의 그것은 전자의 당연한 결과이지만, 본론에 있어서는 군역의 조직의 근본을 이루는 이 호구법에서 그치기로 한다.
쪽수▶P4-2이러한 意味의 兵士는 當時 一般的 自然經濟를 土臺로 하는 國家 財政의 特異한 運用에 依하야, 또 한번 潤色을 받게 되니, 當時의 兵制 組織의 解剖는 이 두 가지의 要素를 실마리로 하야 플어나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나자부터서 한날의 身分의 具現이었든 이 李朝 初期의 人民은 法制的인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組織되여, 國家에 對한 여러가지 負擔을 젔다. 兵役은 그것의 가장 된 자의 하나요, 兵▶P5-1士는 이戶口法의 手段에 依하야 처음 全 人民層에서 抽出되였든 것이다. 이렇게 하야 抽出된 兵士는 그의 身分的 制限에 있어서 「成色」되였고, 國家는 이를 제가 가지는 特異한 方法으로서 組織하였든 것이다. 이렇듯 抽出 編成되는 兵士는, 또 다시 西班 官僚 組織의 一員으로서 編入되여, 처음 具體的인 兵士가 되였든 지라, 이 두 가지 過程에 依하야 처음, 單純한 人丁은 一個의 專門的인 兵士가 되니, 前者의 過程은 後者의 그것의 土臺요, 後者의 그것은 前者의 當然한 結果이지마는, 本論에 있어서는 軍役의 組織의 根本을 이루는 이 戶口法에서 그치기로 한다.
호구법이라는 것이 당시에 있어서의 신분 제도에 의존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호구법이야말로 그 신분 제도를 강화하는 관건이었던 것이다. 곧 호적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에 따라서, 특권의 증명서도 되고 병역의 대장도 되는 것이었다. 이조초기의 전 인민이 호구법에 의하여 편성되고, 인정이 이에 의하여 추출되고, 이렇듯 추출된 인정 중에서 또 군인인 정정(正丁)이 다시 추출되는 이러한 과정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형식 중에는, 고려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중국(특히 당)에 배운 바도 많았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허무한 시간적 또는 공간적 관계에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은 본론의 취재할 문제는 당시 사회의 구성 관계에서 인과 지어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형식적인 인연이 그다지 중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당시의 호적이 여하히 중국식을 빌렸고, 고려의 형식에 배웠다고 하더래도, 당시의 독특한 사회 구성 관계를 몰각한다면, 그는 이에 대하여 아무것도 회득(會得)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듯이, 군역과 호구법을 논한다는 제일보(一步)에서 당시의 전법을 논하게 된 것이다. 대개, 호구의 편성에 당면하여 이에 본질적인 제한을 줄 것은 그의 토지에 대한 소유 관계이기 때문이다.
쪽수▶P5-2戶口法이라는 것이 當時에 있어서의 身分 制度에 依存한다는 것은 또 다시 말할 것도 없거니와, 도리어 이 戶口法이야말로 그 身分 制度를 强化하는 關鍵이었든 것이다. 곧 戶籍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에 따라서, 特權의 證明書도 되고 兵役의 臺帳도 되는 것이었다. 李朝 初期의 全 人民이 戶口法에 依하야 編成되고, 人丁이 이에 依하야 抽出되고, 이렇듯 抽出된 人丁 中에서 또 軍人인 正丁이 다시 抽出되는 이러한 過程에서 보이는바 여러가지 形式 中에는, 高麗에 본뜬 것도 있을 것이고 中國(特히 唐)에 배운 바도 많었겠지만, 吾人은 이러한 虛無한 時間的 또는 空間的 關係에 言及치 않으랴 한다. 그것은 本論의 取材할 問題는 當時 社會의 構成 關係에서 因果 지워야 할 것이므로, 이러한 形式的인 因緣이 그다지 重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當時의 戶籍이 如何히 中國式을 빌었고, 高麗의 形式에 배웠다고 하드래도, 當時의 獨特한 社會 構成 關係를 沒却한다면, 그는 이에 對하야 아모것도 會得치 몯할 것이▶P6-1다. 이렇듯이, 軍役과 戶口法을 論한다는 第一步에서 當時의 田法을 論하게 된 것이다. 大概, 戶口의 編成에 當面하야 이에 本質的인 制限을 줄 것은 그의 土地에 對한 所有 關係이기 때문이다.


































본문2: 2.전법과 호


이조초기의 전법은 공양왕 3년에 창정된 소위 과전법에 의하여, 최후의 결정을 보았던 것은 주지되는 사실이다. 고려사 권78, 지(志)권 제32, 식화1에 보이는바 공양왕 3년 5월, 도평의사사의 상언에 의하여 창정된 과전법의 세목은, 전제 개혁론자들의 종래 창도하여 온 것의 실천인 점에 있어서, 그것은 물론 고려말 대토지 사유와 전연 대척적인 것이었다. 즉 대토지 사유에 의한 이 사회의 근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의 분배의 불균형을 타파한 것에, 그의 최대 안목이 있었던 것이다. 이 과전법의 창정에 의하여 토지 소유에 대한 국가의 권력적 간섭과, 그 분배의 균형이 꾀하여 졌던 것이다. 이하, 이 과전법의 세목 중에서 수속·상속·벌칙 등을 쟁하하고, 직접 이 분배와 소유에 관한 항목을 들면 다음과 같다.
쪽수▶P6-2李朝 初期의 田法은 恭讓王 三年에 創定된 所謂 科田法에 依하야, 最後의 決定을 보았든 것은 周知되는 事實이다. 高麗史 卷七十八, 志卷 第三十二, 食貨一에 보여지는바 恭讓王 三年 五月, 都評議使司의 上言에 依하야 創定된 科田法의 細目은, 田制 改革論者들의 從來 唱導하여 온 것의 實踐인 點에 있어서, 그것은 勿論 麗末 大土地 私有와 全然 對蹠的인 것이었다. 即 大土地 私有에 依한 이 社會의 根本的인 生產手段인 土地의 分配의 不均衡을 打破한 것에, 그의 最大 眼目이 있었든 것이다. 이 科田法의 創定에 依하야 土地 所有에 對한 國家의 權力的 干涉과, 그 分配의 均衡이 꽤하여 졌든 것이다. 以下, 이 科田法의 細目 中에서 手續·相續·罰則 等을 除外하고, 直接 이 分配와 所有에 關한 項目을 들면 如左하다.

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P7-1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
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
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
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
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

쪽수▶P6-3

一. 拘收公私徃年田籍 盡行檢覆 覈其眞僞 因舊損益 以定陵寢·倉庫·宮司·軍資寺 及寺院·外官職田·廪給田·鄕·津·驛吏·軍匠·雜色之田
一. 京畿四方之本 宜置科田 以優士大夫 凡居京城衛王室者 不論時散 各以科受 第一科, 自在內大君 至門下侍中 一▶P7-1百五十結 (中略) 第十八科 權務散職 十結
一. 外方王室之藩 宜置軍田 以餋軍士 東西兩界 依舊充軍需 六道閑良官吏 不論資品高下 隨其本田多少 各給軍田十結, 或 五結.
一. 軍·鄉吏及諸有役人 如有死亡無後者 逃避本役者 赴京從仕者則 代其役者 遞受其田
一. 今後 凡稱私田 其主雖有罪犯 不許沒爲公田
一.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倡妓·僧尼等人 身及子孫 不許受田
一. 凡公私田租 每水田一結 糙米三十斗 旱田一結 雜糓三十斗 此外有橫歛者 以曮論
一. 除陵寢·倉庫·宮司·公解·功臣田外 凡有田者 皆納稅 水田一結 白米二斗 旱田一結 黃豆二斗 舊京畿 納料物庫 新京畿及外方 分納豊儲·廣興倉
一. 田主奪田客所耕田 一負至五負 笞二十 每五負 加一等 罪至杖八十 職牒不收 一結以上 其丁許人遞受
一. 佃客 母得將所耕田 擅賣·擅興別戶之人 如有死亡·移徒·戶絕者 多占餘田 故令荒蕪者 其田聽從田主住意區處

과전법의 창정은 종래의 대토지 사유의 양기(揚棄)인 점에 있어서 사전의 공전화는 물론, 그의 분배가 대형의 토지 사유에서 소형의 토지 소유로 변하였다는 것에 최대 안목이 있다는 것은 상술한 바이다. 앞서 든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사전이 인정될 뿐으로, 명목은 여하튼 중앙 권력이 미치기 쉬운 거리에 두었고, 지방 6도에서도 수기사전다소(●●●●●●)하여 10결 혹은 5결의 사전이 군전으로서 인정받았다. 그러면 또 이러한 토지 분배에 있어서 소유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현대문주1▶우선, 이에 대하여 신진 후카야 도시데츠(深谷敏鐵)씨에게 들어보기로 하자.[“a” 1] 그의 의견은 대개 이러하였다.
쪽수▶P7-2科田法의 創定은 從來의 大土地 私有의 揚棄인 點에 있어서 私田의 公田化는 勿論, 그의 分配가 大型의 土地 私有에서 小型의 土地 所有로 變하였다는 것에 最大 眼目이 있다는 것은 上述한 바이다. 前揭 科田法의 細目에 依하면 京畿에 있어서만 私田이 認定될 뿐으로, 名目은 如何튼 中央 權力이 미치기 쉬운 距離에 두었고, 地方 六道에서도 隨其私田多少하야 十結 或은 五結의 私田이 軍田으로서 認定▶P8-1받었다. 그러면 또 이러한 土地 分配에 있어서 所有 關係는 어떠하였든가. 원문주1▶于先, 이에 對하야 新進 深谷敏鐵氏에게 들어보기로 하자.[1] 그의 意見은 大概 이러하였다.
전국의 전지는 그 전종의 여하를 물문하고, 국가의 권력적 간섭을 받게 되니, 곧 국가는 전국의 전지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이러므로 전국의 전지는 모두가 공전이요, 뿐만 아니라, 능침·창고·궁사·공해·공신전을 제외한 모든 전지는 국가에 대하여 납세의 의무를 지고 수전자(受田者)의 전인 공신전과 같은 것은 납세의 의무까지도 지지 않는 전지라 하더라도 국가를 이에 대하여 ‘처분 관리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므로 그냥 사전이 아니라 ‘공전 중의 사전’이라. 국가는 전지에 대하여 수세·수조의 이중 수취를 행하는데, 그 중에는 면세의 전지도 있고, 과전·군전·공신전 등(수전자의 전)에 대하여는 국가는 수조하지 않으니 이들이 곧 ‘공전 중의 사전’인 것이다. 나머지의 전지는 국가 직속의 전지로서 특제한 자 외 납세·납조라는 이중의 지대를 국가에 대하여 지불하므로 그들은 ‘공전 중의 공전’이라 할 수 있다. 또 수전자의 전인 경우에는 수전자는 그의 전지에 대하여 국가 대신에 전객(佃客)에게서 수조를 할 수 있으니, 곧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한다. 전주는 전객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하여 천매·천여하지를 못하니 전객은 그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행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전지를 들어 그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을 살핀다면 국가·전주·전객의 3요소가 그를 지배하고 있어서, 위와 같은 3개의 지배 형태를 추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
쪽수▶P8-2全國의 田地는 그 田種의 如何를 勿問하고, 國家의 權力的 干涉을 받게 되니, 곧 國家는 全國의 田地에 對하야 「處分 管理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한다. 이러므로 全國의 田地는 모다가 公田이요, 뿐만 아니라, 陵寢·倉庫·宮司·公廨·功臣田을 除外한 모든 田地는 國家에 對하야 納稅의 義務를 지고 受田者의 田인 功臣田과 같은 것은 納稅의 義務까지도 지지 않는 田地라 하드래도 國家를 이에 對하야 「處分 管理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하므로 그냥 私田이 아니라 「公田 中의 私田」이라. 國家는 田地에 對하야 收稅·收租의 二重 收取를 行하는데, 그 中에는 免稅의 田地도 있고, 科田·軍田·功臣田 等(受田者의 田)에 對하야는 國家는 收租치 않으니 이들이 곧 「公田 中의 私田」인 것이다,. 남어지의 田地는 國家 直屬의 田地로서 特除한 者 外 納稅·納租라는 二種의 地代를 國家에 對하야 支拂하므로 그들은 「公田 中의 公田」이라 할 수 있다. 또 受田者의 田인 境遇에는 受田者는 그의 田地에 對하야 國家 代身에 佃客에게서 收租를 할 수 있으니, 곧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한다. 田主는 佃客이 耕作하는 土地에 對하야 擅賣·擅與하지를 못하니 佃客은 그 土地에 對하야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行하는 것이다. 이러므로 같은 한 조각의 田地를 들어 그것의 所有 關係의 內容을 살핀다면 國家·田主·佃客의 三要素가 그를 支配하고 있어서, 如上 三個의 支配 形態를 抽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과전법의 창정은 대형의 토지 사유를 소형의 토지 공유(후카야씨의 말대로 토지분배라고 할까)로 바꾸어 놓았으니, 곧 과전법의 본질적인 두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쓰인 과전법의 세목에 의하면 경기에 있어서만 150결 이하의 사전이 용인되고 그것은 그의 명목으로 하는 바가 어떠하였든 국가 권력의 가장 미치기 쉬운 거리에다가 둔 것으로, 외방 6도에는 10결 내지 5결의 사전이 군전이라는 명목 아래에 용치되었을 뿐이었다. 이 군전은 위에 쓰인 세목에 의하면 외방 6도에 있는 것으로서 경기라든지 양계에 있어서는 그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나 양계 또는 경기에 시위왕실하는 병사가 있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곧 군전을 받은 자는 반드시 시위왕실할 의무가 있더라도 반대로 시위왕실하는 자가 반드시 군전의 절수자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전이라는 것은 소형의 ‘공전 중의 사전’으로서 전세만을 국가에 지불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군전은 수기본전다소(●●●●●●)하여 절수되었던 것이라, 일반 군인이 가지고 있는 곧 생활의 지반으로 하고 있는 전지와는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군전은 군인 중의 특수한 부류—수전패—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은 경기와 양계를 제한 지방에서 소형의 ‘공전 중의 사전’인 10결 혹 5결을 ‘수조권’에 기초하여 ‘지배’하는 자였다. 나머지의 군인은 귀족 양반의 출신을 별문제로 하고는 군전의 절수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생활 지반은 ‘공전 중의 공전’이었고 위에 쓰인 세목에 보이는 전객이었던 것이다. 즉, ‘군향리 및 제유역인’의 전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은 납세·납조를 하여야 하고,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하는 자였다. 따라서 경기와 양계에 군전이 없다고 함은 이 공전 중의 사전으로서의 군전을 말함이요, 이러한 군인전이라고나 할 공전 중의 공전은 전국적으로 편재하였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군인과 향리와 기타 유역인이 전국적으로 편재하고 또 군인전이라고나 할 것의 소유 관계의 내용이 상술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군인전이라고 할 만한 것은 납조함으로써 그의 전객을 소작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조(租)라는 것이 1결 20석(2백두)에 대하여 30두, 2석이라는 10분의 1이라는 것은 그들 전객을 오히려 오늘날의 자작농에 견줄 수 있게 한다.
쪽수▶P9-1이렇듯, 科田法의 創定은 大型의 土地 私有를 小型의 土地 公有(深谷氏의 말대로 土地支配라고 할까)로 바꾸워 놓았으니, 곧 科田法의 本質的인 二面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上記 科田法의 細目에 依하면 京畿에 있어서만 百五十結 以下의 私田이 容認되고 그것은 그의 名目으로 하는 바가 어떠하였든 國家 權力의 가장 미치기 쉬운 距離에다가 둔 것으로, 外方 六道에는 十結 乃至 五結의 私田이 軍田이라는 名目 下에 容置되였을 뿐이었다. 이 軍田은 上記 細目에 依하면 外方 六道에 있는 것으로서 京畿라든지 兩界에 있어서는 그의 存在를 否定하고 있다. 그러나 兩界 또는 京畿에 侍衛 王室하는 兵士가 있었음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니, 곧 軍田을 받은 者는 반듯이 侍衛 王室할 義務가 있드래도 反對로 侍衛 王室하는 者가 반다시 軍田의 折受者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軍田이라는 것은 小型의 「公田 中의 私田」으로서 田稅만을 國家에 支拂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軍田은 隨其本田多少하야 折受되였든 것이라, 一般 軍人이 가지고 있는 곧 生活의 地盤으로 하고 있는 田地와는 區別되어야 하는 것이다. 軍田은 軍人 中의 特殊한 部類—受田牌—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그들은 京畿와 兩界를 除한 地方에서 小型의 「公田 中의 私田」인 十結 或 五結을 「收租權」에 基하야 「支配」하는 者이었다. 남어지의 軍人은 貴族 兩班의 出身을 別問題로 하고는 軍田의 折受를 받지 못하고, 그들의 生活 地盤은 「公田 中의 公田」이었고 上記 細目에 보이는 佃客이었든 것이다. 即, 「軍鄕吏 及 諸有役人」의 田이라는 것이 그것이고, 그들은 納稅·納租를 하여야 하고,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하는 者이었다. 따라서 京畿와 兩界에 軍田이 없다고 함▶P10-1은 이 公田 中의 私田으로서의 軍田을 말함이요, 이러한 軍人田이라고나 할 公田 中의 公田은 全國的으로 遍在하였다고 보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것은 軍人과 鄕吏와 其他 有役人이 全國的으로 遍在하고 또 軍人田이라고나 할 것의 所有 關係의 內容이 上述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이렇듯 軍人田이라고 할 만한 것은 納租함으로써 그의 佃客을 小作人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租라는 것이 一結 二十石(二百斗)에 對하야 三十斗, 二石이라는 十分之一이라는 것은 그들 佃客을 오히려 오늘날의 自作農에 견줄 수 있게 한다.
당시의 병제가 디디고 서는 기초는 토지 소유 관계뿐만은 아니었다. 봉건적 사회라는것은 신분제라는 질긴 제한이 그의 주장된 징표를 이루는 것으로서, 병제는 또한 이 신분적 제한을 기초로 하지 아니치 못하였다. 대체 신분이라는 것은 단순한 특권, 혹은 전통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기본 조건에 기초한 계급이라는 것의 법률적인 현상 형태겠으며, 병제가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기초인 신분적 제한은 병제와 전제와의 관계와 독립하여 따로 병제와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병제와 전제와의 관계의 중간적 계기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토지 제도는 직접 병종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신분 제한을 통과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당시의 군인은 그 신분에 의하여 병종의 결정되고, 또 이 병종이라는 것이 그의 신분을 다시 한 번 세분화시키는 것이었다. 선군은 양인이라 하였지만 또 선군이라는 양인 중의 한 신분층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0-2當時의 兵制가 디디고 서는 基礎는 土地 所有 關係뿐만은 아니었다. 封建的 社會라는것은 身分制라는 질긴 制限이 그의 주장된 徵表를 이루는 것으로서, 兵制는 또한 이 身分的 制限을 基礎로 하지 아니치 몯하였다. 大體 身分이라는 것은 單純한 特權, 或은 傳統에 뿌리박은 것이 아니라 經濟的인 基本 條件에 基礎한 階級이라는 것의 法律的인 現象 形態이겠으며, 兵制가 디디고 서는 또 하나의 基礎인 身分的 制限은 兵制와 田制와의 關係와 獨立하여 따로이 兵制와 關係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兵制와 田制와의 關係의 中間的 契機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위에 말한 土地 制度는 直接 兵種과 關係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이 身分 制限을 通過하는 것이었다. 쉽게 말하면 當時의 軍人은 그 身分에 依하야 兵種의 決定되고, 또 이 兵種이라는 것이 그의 身分을 다시 한 번 細分化시키는 것이었다. 船軍은 良人이라야 하였지마는 또 船軍이라는 良人 中의 한 身分層이 있었든 것이다.
당시의 신분층을 크게 나누어 귀족 양반과 양인과 천인, 또 양인과 천인의 중간층인 신량역천, 이 네 개의 기본층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신량역천에 대하여는 세종실록, 원년 5월 경오조에,
쪽수▶P10-3當時의 身分層을 크게 나누어 貴族 兩班과 良人과 賤人, 또 良人과 賤人의 中間層인 身良役賤, 이▶P11-1 네 個의 基本層으로 나눌 수 있으니 그중 身良役賤에 對하야는 世宗實錄, 元年 五月 庚午條에,

國俗 以身良役賤者 或稱干 或稱尺

쪽수▶P11-2

國俗 以身良役賤者 或稱干 或稱尺

이라 하여 흔히 소위 간척의 무리라는 것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양인이면서도 국가에 의하여 천인이 질 역을 졌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신분은 또 어떠한 경제적인 기본 조건에 서서 있었던가, 위의 과전법에 의하면,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와 ‘경작권에 기초한 토지분배’를 볼 수 있었으니, 수조자인 전주와 경작자인 전객을 구별할 수 있었다. 전주는 국가 제(諸)기관과 사원을 제하고는 공신전·과전·군전의 절수자의 일군이었고, 그들은 소위 양반귀족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객이라는 것에는 ‘군·향리 내지 제유역인’으로서, 거기에는 양인과 신량역천과 천인이 넓게 포함되고 있다. 그 중 ‘공사천구·공상·매복맹인·무격·창기·승니 등인(等人)’은 ‘신(身) 및 자손’이 ‘불허수전’이므로, 이들 천인 무리는 양인과 신량역천과 더불어 토지에 대하여 ‘경작권에 기초한 지배’는 할 수 있으나, 양인처럼 수전하여 즉 수조자로서의 출세를 바랄 수 없는 자였다. 양인은 자유민으로서 사환(仕宦)하여 양반이 될 수 있으므로 법제적으로는 ‘수조권에 기초한 토지분배’인 ‘수전’에도 참여할 수 있는 신분층이요, 또 천인은 국가 또—공천—개인에—사천—그 인격을 소유되는 자로서, 후자인 사천은 승려와 더불어 사민이므로 국역을 직접으로 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공천 중에서도 납공노비와 선상노비를 가릴 수 있어서, 선상은 다른 신분층과 같이 국역에 직접 당하는 자요 납공은 그 대신에 공을 바치는 자이다. 이러한 특별한 자를 제한 모든 신분층은 모두 다 군(국)역을 졌지만 거기에는 병역이라는 이름은 같으나 벼슬로서의 병역도 있었고 한 천역으로서의 병역도 있었으니, 그것은 모두가 다 이 신분적 제한의 당연소치(●●●●)였다. 또 위에도 한 차례 말한 바와 같이 그가 무슨 병역을 지느냐는 것은 그의 기본적인 신분이 제한할 것이고, 한 번 어떠한 병종이 되고 보면 그것이 곧 그의 더 자세한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당시의 병종은 바로 그것이 신분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쪽수▶P11-3이라 하야 흔이 所謂 干尺의 徒라는 것이 곧 그들이다. 그들은 良人이면서도 國家에 依하야 賤人이 질 役을 지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身分은 또 어떠한 經濟的인 基本 條件에 서서 있었든가, 우의 科田法에 依하면,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와 『耕作權에 基한 土地支配』를 볼 수 있었으니, 收租者인 田主와 耕作者인 佃客을 區別할 수 있었다. 田主는 國家 諸機關과 寺院을 除하고는 功臣田·科田·軍田의 折受者의 一群이었고, 그들은 所謂 兩班貴族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佃客이라는 것에는 『軍·鄉吏 及 諸有役人』으로서, 거기에는 良人과 身良役賤과 賤人이 넓이 包含되고 있다. 그 중 『公私賤口·工商·賣卜盲人·巫覡·娼妓·僧尼 等人』은 『身 及 子孫』이 『不許受田』이므로, 이들 賤人 群은 良人과 身良役賤과 더부러 土地에 對하야 『耕作權에 基한 支配』는 할 수 있으나, 良人처럼 受田하야 即 收租者로서의 出世를 바랄 수 없는 者이었다. 良人은 自由民으로서 仕宦하야 兩班이 될 수 있으므로 法制的으로는 『收租權에 基한 土地支配』인 『受田』에도 叅與할 수 있는 身分層이요, 또 賤人은 國家 또—公賤—個人에—私賤—그 人格을 所有되는 者로서, 後者인 私賤은 僧侶와 더부러 私民이므로 國役을 直接으로 지는 일은 없는 것이다. 公賤 中에서도 納貢奴婢와 選上奴婢를 가릴 수 있어서, 選上은 다른 身分層과 같이 國役에 直接 當하는 者요 納貢은 그 代身에 貢을 바치는 者이다. 이러한 特別한 者를 除한 모▶P12-1든 身分層은 모도 다 軍(國)役을 졌지만 거기에는 兵役이라는 일홈은 같으나 벼슬로서의 兵役도 있었고 한 賤役으로서의 兵役도 있었으니, 그것은 모도가 다 이 身分的 制限의 當然所致이었다. 또 우에도 一言한 바와 같이 그가 무슨 兵役을 지느냐는 것은 그의 基本的인 身分이 制限할 것이고, 한 번 어떠한 兵種이 되고 보면 그것이 곧 그의 더 仔細한 身分이 되였기 때문에 當時의 兵種은 바로 그것이 身分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국역과 토지 소유와의 관계가 신분적 제한이라는 중간 다리를 거쳐서 맺어지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러 우리는 임이 이들 병종의 복잡다기할 토지 소유 내용을 추상할 수 있거니와, 다시 나아가 당시의 일반 양인 병사만을 살피어 보더라도, 위에 해석한 과전법의 내용을 저 후카야씨처럼 개괄적으로만 검토하기에 그침을 망설이게 할 것이다. 군전의 절수자는 ‘시위왕실’할 의무가 있더라도 ‘시위왕실’하는 자가 반드시 군전 절수자가 아님은 상술한 바거니와, 일반 병사는 고사하고 양인의 토지의 수조권에 대해서는 법제적으로는 권리가 있으나, 예를 들면 정병의 시위패라는 것은 무수전패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국가의 이에 대한 전지 절수는 처음부터 고려될 바 아니었다. 태종 6년 5월, 수전품관의 시위의 법을 신명할 때 의정부는 계(啓)하여
쪽수▶P12-2이와 같이 國役과 土地 所有와의 關係가 身分的 制限이라는 中間 다리를 거치어서 맺히여 지는 것이므로, 이에 이르러 吾人은 임이 이들 兵種의 複雜多岐할 土地 所有 內容을 推想할 수 있거니와, 다시 나아가 當時의 一般 良人 兵士만을 살피어 본다드래도, 우에 解釋한 科田法의 內容을 저 深谷氏처럼 概括的으로만 檢討하기에 그침을 망서리게 할 것이다. 軍田의 折受者는 『侍衛王室』할 義務가 있드래도 『侍衛王室』하는 者가 반듯이 軍田 折受者가 아님은 上述한 바이어니와, 一般 兵士는 姑捨하고 良人의 土地의 收租權에 對해서는 法制的으로는 權利가 있으나, 例하면 正兵의 侍衛牌라는 것은 無受田牌에도 드러가지 못하고, 國家의 이에 對한 田地 折受는 처음부터 顧慮될 바 아니었다. 太宗 六年 五月, 受田品官의 侍衛의 法을 申明할새 議政府는 啓하야

현대문주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P13-1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a” 2]

쪽수▶P12-3

원문주2▶受田品官 全爲居京城 衛王室 載在六典 無識之徒 不顧立法之意 累年在外 以致衛虛疎 又憑受田 不肯應當外方軍役 本府會受敎旨以禁之 顧乃不長成法 只求自便 切見 外方侍衛軍·騎船軍·未受一畝之田 尙且長年從軍 受田品官則▶P13-1於京於外 一無所從 實爲不當 (下略) [2]


































본문3: 3.호수와 봉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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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4: 4.호적과 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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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5.군액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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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6.맺는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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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TripleData




Data Network






주석







원문주


  1. 史學雜誌 第五十編 第五號 第六號 所載 深谷敏鐵氏 論文 「鮮初の土地制度 一斑」
  2. 太宗實錄, 六年 五月 壬戌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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