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에 대하야―최근 발견의 청초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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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민석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0월 25일 (금) 17:05 판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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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충일의 건주기정도기에 대하야―최근 발견의 청초사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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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申忠一의 建州紀程圖記에 對하야―最近 發見의 淸初史料―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0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인영 역자 집필일자 1939년 2월 게재연월 1939년 4월
시작쪽 134쪽 종료쪽 144쪽 전체쪽 011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본문


임진역이 일어난 지 3년 만인 선조인물 23년(명만력 23년) 을미 12월에 남부(南部) 주부(主簿) 신충일인물가 조정의 명을 받들어 당시 만주 소자하(蘇子河) 유역에서 흥기 중이든 후의 청 태조 노아합적인물(奴兒哈赤)이 거주하는 성에 이르러 그 실정을 정찰하고 돌아온 사실은 이미 널리 아는 바일 것이다. 당시의 견문을 기록한 신충일인물의 보고서는 소위 서계라 하여 선조실록서적 권71, 29년 병신 십이월 정유조에 수록되어 있으나 실록에는 “自二十二日 至二十八日 所經一路事(○○○○○) 收錄于圖(○○○○)라는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 그것은 전혀 게재되지 않었던바 연전에 진단학회단체 소장 성해응(成海應)의 연경재전집서적 중에 ‘건주기정(建州紀程)’이라 제목을 지어 신충일인물의 보고서를 초(抄)하여 둔 가운데 실록에서는 볼 수 없든 지도(○○)가 들어있는 것이 판명되자 도엽암길인물(稻葉岩吉) 박사는 「申忠一書啓び도기원고」라는 논문을 청구학총학술지 제29호권호에 발표하여 신충일인물의 보고서가 갖고 있는 청초사료로서의 가치를 소개한 바 있었으니 이 역시 우리 기억에 새로운 바이다.
쪽수▶P134-1壬辰役이 이러난 지 三年 만인 宣祖 二十八年(明萬曆二十三年) 乙未 十二月에 南部主簿 申忠一이 朝廷의 命을 받들어 當時 滿洲蘇子河流域에서 興起 中이든 後의 淸太祖奴兒哈赤의 居城에 이르러 그 實情을 偵察하고 돌아온 事實은 이미 널리 아는 바일 것이다. 當時의 見聞을 記錄한 申忠一의 報告書는 所謂 書啓라 하야 宣祖實錄 卷七十一, 二十九年 丙申 十二月 丁酉條에 收錄되어 있으나 實錄에는 「自二十二日 至二十八日 所經一路事(○○○○○) 收錄于圖(○○○○)」라는 文句가 있음에도 不拘하고 圖 그것은 全혀 揭載되지 않었든바 年前에 震檀學會所藏 成海應의 硏經齋全集 中에 「建州紀程」이라 題하야 申忠一의 報告書를 抄하여 둔 가운데 實錄에서는 볼 수 없든 地圖(○○)가 들어있는 것이 判明되자 稻葉岩吉 博士는 「申忠一書啓び圖記」라는 論文을 靑丘學叢 第二十九號에 發表하야 申忠一의 報告書가 갖고 있는 淸初史料로서의 價値를 紹介한 바 있었으니 이 亦是 우리 記憶에 새로운 바이다.
그런데 지나간 8월 하순 의외에도 당시 조정에 바친 보고서 외에 신충일인물 자장(自藏)의 1건이 충청남도 청양군에 거주하는 그 후손가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본보에 게재한 ‘자료’가 곧 그것으로, 원본은 세로(偏) 41센티미터, 가로(長) 1127센티미터의 권축(卷軸)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이른바 건주기정도기는 이 권축을 가리킴이니 이것은 외형으로 보나 내용으로 보나 신충일 자필의 보고서(서계)의 초본이 아니었든가 한다.
쪽수▶P134-2그런데 지나간 八月 下旬 意外에도 當時 朝廷에 바친 報告書 外에 申忠一 自藏의 一件이 忠淸南道 靑陽郡에 居住하는 그 後孫家로부터 나오게 되였다. 本報에 揭載한 「자료」 바가 곧 그것으로, 原本은 縱(偏) 四一糎、橫(長) 一一二七糎의 卷軸으로 되어있다. 여기에 이른바 建州紀程 圖記는 이 卷軸을 가라침이니 이것은 外形으로 보나 內容▶P135-1으로보나 思忠一 自筆의 報告書(書啓)의 草本이 아니였든가 한다.
이 도기에는 먼저 신충일인물 그가 11월 하순 경성을 떠나 12월 15일 강계에 도착, 12월 23일 만포진에 이르러 안내자로 여진 추장 동여을고인물(童汝乙古)·정퍅응인물(定愎應), 향통사(鄕通事) 나세응인물(羅世弘)·하세국인물(河世國)와 그밖에 노자 2명을 데리고 일행 7인이 그날 오후 만포를 떠나 압록강 수상을 건너 건주 노아합적인물 성에 향하게 된 것을 간단히 기록한 다음 12월 22일로부터 12월 28일 노아합적인물 성에 이르기까지의 경유한 천지과 지명, 부락의 다소, 군비의 유무를 기입한 지도를 붙였다. 이 지도에는 물은 청색, 길은 적색, 산은 묵으로 그리고, 그들 일행이 매일 숙박한 곳과 부락 추장의 이름과 도중의 견문까지도 기입하였다. 그다음에 노아합적인물이 사는 성에 들어가 내성의 중앙 목책(木柵) 안에 있는 노아합적인물 집의 약도와 외성 안에 있는 노아합적인물의 아우 소아합적인물(小兒哈赤) 집의 약도를 그리고, 이어서 신충일인물 자신이 성내에 머무르는 동안 친히 견문한 97개조의 기사를 첨부하여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신충일인물의 오촌숙인 신숙인물의 도기 제발(題跋)이 있어, 거기에는 (이것도 또한 신숙인물 자필이 아닌가 생각된다) “時萬曆二十四年丙申四月燈夕後三日 西峯申熟仁仲題”라 써 있다. 그러면 이 도기와 선조실록서적연경재전집서적에 수록된 그것과의 관계는 어떠하며 또 내용에 있어서 여하한 차이가 있는가 하면, 먼저 우리는 노아합적인물 집 및 소아합적인물 집의 약도가 이번 도기에만 보이는 것을 지적치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노아합적인물 집의 약도와 소아합적인물 집의 약도는 실록에는 물론, 연경재전집서적에도 보이지 않는 새 사료라는 점이다. 그리고 실록과 연경재전집서적에 오른 것으로 이 도기에 보이지 않는 조목은 하나도 없고, 또 끝에 첨부되여 있는 신숙인물의 제발도 실록이나 연경재전집서적에서는 그 전문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도기의 유래에 관하여는 신숙인물의 제발에
쪽수▶P135-2이 圖記에는 먼저 申忠一 그가 十一月 下旬 京城을 떠나 十二月 十五日 江界에 到着, 十二月 二十一日 滿浦鎭에 이르러 案內者로 女眞酋長童汝乙古·定愎應, 鄕通 事羅世弘·河世國과 그밖에 奴子 二名을 다리고 一行 七人이 그날 午後 滿浦를 떠나 鴨綠江 水上을 건너 建州奴兒哈赤城에 向하게 된 것을 簡單히 記錄한 다음 十二月 二十二日로부터 十二月 二十八日 奴兒哈赤城에 이르기까지의 經由한 川地과 地名 部落의 多少, 軍備의 有無를 記入한 地圖를 붙였다. 이 地圖에는 물은 靑色, 길은 赤色, 山은 墨으로 그리고, 그들 一行이 每日 宿泊한 곳과 部落酋長의 이름과 途中의 見聞까지도 記入하였다. 그다음에 奴兒哈赤居城에 들어가 內城의 中央 木柵 內에 있는 奴兒哈赤家의 略圖와 外城 內에 있는 奴兒哈赤의 아우 小兒哈赤家의 略圖를 그리고, 이어서 申忠一 自身이 城內에 留하는 동안 親히 見聞한 九十七個條의 記事를 添付하여 있다. 그리고 그 끝에는 申忠一의 五寸叔인 申熟의 圖記題跋이 있어, 거기에는 (이것도 또한 申熟 自筆이 아닌가 생각된다) 「時萬曆二十四年丙申四月燈夕後三日 西峯申熟仁仲題」라 써 있다. 그러면 이 圖記와 宣祖實錄 及 研經齋全集에 수록된 그것과의 關係는 어떠하며 또 內容에 있어서 如何한 差異가 있는가 하면, 먼저 우리는 奴兒哈赤 家 及 小兒哈赤家의 畧圖가 이번 圖記에만 보이는 것을 指摘치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면 奴兒哈赤家의 略圖와 小兒哈赤家의 略圖는 實錄에는 勿論, 研經齋全集에도 보이지 않는 新史料라는 點이다. 그리고 實錄과 硏經濟全集에 오른 것으로 이 圖記에 보이지 않는 條目은 하나도 없고, 또 끝에 添付되여 있는 申熟의 題跋도 實錄이나 研經齋全集에서는 그 全文을 볼 수 없었든 것이다. 圖記의 由來에 關하여는 申熟의 題跋에

歲乙未宣祖인물 二十八年 明萬曆二十三年秋九月 遼東鎮守官 走驛書言 奴酋奴兒哈赤인물聚人馬浩大 候永合渡江〇鴨綠江 隳突我西彊 延臣上言 此不可以爲信 急之 亦不可以爲不信 緩之 其備之之策 則自當豫圖之矣 須遣有智有才 能審事機者一人 往奴酋所 察虛實以來 上宣祖인물可之 吾族子忠 ▶P136-1一 字恕甫 實膺其選 及其還也 圖其山川·道里·城柵· 屋慮于前 錄其士馬‧耕農·問答·事爲于後 爲二通 其一上進 其一自藏 一日 袖其自藏者 來示余 屬余題其末(○○○○○○○○○○○○○○○○○○○○○○○○○○) 余披而閱之 云云

쪽수▶P135-3

歲乙未〇宣祖 二十八年 明萬曆二十三年秋九月 遼東鎮守官 走驛書言 奴酋〇奴兒哈赤聚人馬浩大 候永合渡江〇鴨綠江 隳突我西彊 延臣上言 此不可以爲信 急之 亦不可以爲不信 緩之 其備之之策 則自當豫圖之矣 須遣有智有才 能審事機者一人 往奴酋所 察虛實以來 上〇宣祖可之 吾族子忠 ▶P136-1一 字恕甫 實膺其選 及其還也 圖其山川·道里·城柵· 屋慮于前 錄其士馬‧耕農·問答·事爲于後 爲二通 其一上進 其一自藏 一日 袖其自藏者 來示余 屬余題其末(○○○○○○○○○○○○○○○○○○○○○○○○○○) 余披而閱之 云云

이라 하였다. 신숙인물은 평산 신씨 계보에 의하면 충일인물의 오촌숙이어니와, 이 글을 쓴 만력 24년 병신 3월은 충일인물의 귀국 후 겨우 3개월을 경과하였을 뿐이다. “遼東鎭守官 走驛苦言” 운운의 일절은 신숙인물의 오해라는 것을 후에 말하고자 하는 바이나, 우리는 이 글에 의하여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로는 충일인물은 만주로부터 귀국하자, 곧 보고서 두 벌을 작성하여 한 벌은 조정에 바치고 한 벌은 자장하였다는 것이니, 이로써 보면 이번에 발견된 신숙인물의 발이 있는 도기는 신충일인물 자장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발견된 도기는 해서로 쓴 것이 아니고 초서체로 써 있는 것과 또 곳곳에 가필, 정정한 것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이것은 당시 조정에 바친 보고서(서계)의 초고인 것 같기도 하며 또한 신충일인물 자필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둘째로는 연경재전집서적에 들어있는 ‘건주기정’은 틀림없이 이 신씨가 장본에 의하여 초록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건주기정’에는 첫머리에
쪽수▶P136-2이라 하였다. 申熟은 平山 申氏 系譜에 依하면 忠一의 五寸叔이어니와, 이 글을 쓴 萬曆 二十四年 丙申 四月은 忠一 의 歸國 後 겨우 三個月을 經過하였을 뿐이다. 「遼東鎭守官 走驛苦言」 云云의 一節은 申熟의 誤解라는 것을 後에 말하고저 하는 바이나, 우리는 이 글에 依하야 두 가지 重要한 事實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첫째로는 忠一은 滿洲로부터 歸國하자, 곧 報告書 두 벌을 作成하여 한 벌은 朝庭에 바치고 한 벌은 自藏하였섰다는 것이니, 이로써 보면 이번에 發見된 申熟의 跋이 있는 圖記는 車忠一 自藏의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번 發見된 圖記는 楷書로 쓴 것이 아니고 草書體로 써 있는 것과 또 곳곳에 加筆 訂正한 것이 있는 點으로 보아 이것은 當時 朝廷에 바친 報告書(書啓)의 草稿인 것 같기도 하며 또한 申忠一 自筆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둘째로는 硏經齋全集에 들어있는 「建州紀程」은 틀림없이 이 申氏家 藏本에 依하야 抄錄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웨 그런가 하면 「建州紀程」에는 첫머리에

萬曆乙未秋九月 遼東都司走驛言 奴酋聚人馬 候水合 寇我西彊 朝廷遺武出身申忠一인물偵之 以十一月二十二日 待胡人嚮導 從鄕通事羅世弘·하세국인물鎮奴姜守等 午離滿浦鎭 渡鴨綠江 與中朝將官余希允行 二十八日 (而)至奴酋家 以所經山川·道里·城柵·屋慮錄之 爲二軸 以其一進于朝 以其一藏之家 云云

쪽수▶P136-3

萬曆乙未秋九月 遼東都司走驛言 奴酋聚人馬 候水合 寇我西彊 朝廷遺武出身申忠一偵之 以十一月二十二日 待胡人嚮導 從鄕通事羅世弘·河世國鎮奴姜守等 午離滿浦鎭 渡鴨綠江 與中朝將官余希允行 二十八日 (而)至奴酋家 以所經山川·道里·城柵·屋慮錄之 爲二軸 以其一進于朝 以其一藏之家 云云

이라는 설명을 하였다. 이중 “朝廷遣武出身申忠一인물偵之”“與中朝將官余希允行”이란 글은 고사촬요서적(攷事撮要) 권상, 대명기년 만력 23년 을미조에 “建州佟奴免(兒)哈赤部衆漸盛 請中朝將官余希允(元) 與我國武官申忠一인물往覘 仍諭朝旨”라 한 데 의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의 글은 확실히 앞서 언급한 신숙인물의 발에 의한 데 틀림없을 것이다. 더구나 신숙인물의 발에 “爲二通”이라 한 것을 건주기정에는 “爲二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권축으로 된 도기를 실견하였다는 증거가 될 줄로 안다. 그러면 연경재전집서적는 어느 때 어떠한 동기로 신씨가 장본 도기를 보게 되었던 것인가. 여기에는 역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정조인물 20년 병조참의 이의준인물(李義駿), 전부사 성대중인물(成大中) 등이 왕명을 받들어 존주휘편서적(尊周彙編) 편찬에 착수하였던 사실이 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존주휘편서적 15권은 인조인물 병자 정축역에 만주군과의 강화에 반대한 이들의 대의명분을 표창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 널리 만주 관계의 사료를 공사에 긍하여 수집하였다. 이 존주휘편서적 편찬에는 청성(靑城) 성대중인물이 이에 참가하였고, 청성의 아들 연경재 성해응인물도 또한 규장각 검서관의 한 사람으로서 후로 이에 참여하게 되였던 것이니 연경재전집서적 중에 수록된 북방 관계의 많은 사료는 곧 이때에 수집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충일인물의 보고서도 또한 존주휘편서적 편찬 시에 연경재인물의 주의를 이끌었던 것 같으니, 존주휘편서적 권1, 황조기년 제일 첫머리에 만력 23년 12월조와 다음 만력 25년 정월조에 신충일인물 도기의 일절을 게재하여 있다. 이것으로써 보면 신충일인물의 건주기정도기는 존주휘편서적 편찬을 계기로 연경재인물의 주의에 올라, 드디어 그 문집에까지 초록되어 오늘날에 전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신충일인물는 어떠한 인물이었던가. 평산 신씨 계보에 의하면 신충일인물의 자(字)는 서보(恕甫)요 명종인물 9년(명가정(明嘉靖) 제33년) 갑인에 면천군수 신묵인물(申默)의 제3자로써 출생하야 선조인물 16년 계미에 무과에 급제하고 관은 부총관에 이르렀으며 광해군인물 14년 임술(향년 69)에 죽었는데 후에 영의정을 추증(追贈)하였다고 한다.
세계
쪽수▶P136-4이라는 說明을 하였다. 이中 「朝廷遣武出身申忠一偵之」 와 「與中朝將官余希允行」이란 글은 攷事撮要 卷上, 大明紀年 萬曆 二十三年 乙未條에 「建州佟奴免(兒)哈赤部衆漸盛 請中朝將官余希允(元) 與我國武官申忠一往覘 仍諭朝旨」라 한 데 依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의 글은 確實히 前揭 申熟의 跋에 依한 데 틀임없을 것이다. 더구나 申熟의 跋에 「爲二通」이라 한 것을 建州紀程에는 「爲二軸」이라 하였으니, 이것은 또한 卷軸으로 된 圖記를 實見하였다는 證據가 될 줄로 안다. 그러면 成硏究經齋는 어느 때 어떠한 動機로 申▶P137氏家藏本 圖記를 보게 되었든 것인가. 여기에는 亦是 理由가 있었든 것이니 그것은 다름 아니라 正祖 二十年 兵曹參議 李義駿, 前府使 成大中 等이 王命을 받들어 尊周彙編 編纂 着手하였든 事實이 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尊周彙編 十五卷은 仁祖 丙子 丁丑役에 滿洲軍과의 講和에 反對한 이들의 大義名分을 表彰하기 爲하야 맨든 것으로 널리 滿洲關係의 史料를 公私에 亘하야 蒐集하였다. 이 尊周彙編 編纂에는 靑城 成大中이 이에 參加하였고, 靑城의 子 硏經齋 成海應도 또한 奎章閣 檢書官의 一人으로써 後로 이에 參與게 되였든 것이니 硏經濟全集 中에 收錄된 北方 關係의 많은 史料는 곧 이때에 蒐集되였든 것이 아 닌가 생각된다. 申忠一의 報告書도 또한 尊周彙編 編纂 時에 硏經濟의 注意를 이끌었든 것 같으니, 尊周彙編 卷一, 皇朝紀年第一 첫머리에 萬曆 二十三年 十二月條와 다음 萬曆 二十四年 正月條에 申忠一 圖記의 一節을 揭載하여 있다. 이것으로써 보면 申忠一의 建州紀程圖記는 尊周彙編 編纂 契機로 硏經濟의 注意에 올라, 드디어 그 文集에까지 抄錄되야 今日에 傳하게 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먼저 申忠一은 如何한 人物이었든가. 平山 申氏 系譜에 依하면 申忠一의 字는 恕甫요 明宗 九年(明嘉靖 第三十三年) 甲寅에 沔川郡守 申默의 第三子로써 出生하야 宣祖 十六年 癸未에 武科에 及第하고 官은 副摠管에 이르렀으며 光海君 十四年 壬戌(享年 六十九)에 卒하였는데 後에 領議政을 追贈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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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자세한 관력에 관하여는―그 종제(從弟) 신민일인물(申敏一)의 화당집서적(化堂集), 선조실록서적광해군일기서적에 산견하는 것을 종합하여 간단히 적어보면, 그는 선조인물 임진역 초에 전라도 강진 현감으로 있었으며 만주에 갔을 때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남부 주부(종6품)이었었다. 만주로부터 귀국하여 얼마 안 되어 그는 함흥 판관이 되였으나, 그해(선조인물 28년) 4월 초순에는 사헌부의 공격을 받아 파직되었다. 당시 파직의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로는 그가 임진역 초 당진 현감으로 있을 때 남해 현감 변응정인물(邊應井)과 협력하야 금산에서 적병과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처음에 응정인물과 생사를 같이하기를 약속하였음에 불구하고 응정인물은 전사하였으나 충일인물은 퇴주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전번 그가 건주 노아합적인물 성에 갔을 때 그는 노아합적인물이 준 의복을 입고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의 예를 행하여 도리어 그들의 웃음을 샀다는 것이다. 과연 충일인물의 행동이 어떠했는지는 지금 이를 확인할 사료가 없으므로 어떻다고 평론할 수는 없으나, 생각건대 사헌부의 신충일인물 파직 이유와 같은 것은 당시 동서 분당의 한 현상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여하튼 그는 함흥 판관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가 당숙 신숙인물에게 도기의 발문을 의촉한 때는 곧 그가 함흥으로부터 경성에 돌아왔으리라고 생각되는 4월 18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되어 다시 등용되어 혹은 호남 독포사(督捕使)도 되고 혹은 명사 접반관(接伴官)도 되고 혹은 김해부사 혹은 수군절도사 혹은 부총관이 되었으니 무인으로서는 상당한 관직을 역임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광해군인물 14년 임술 4월, 그가 돌아가기 전 얼마 안 되어 그는 안악군수 겸 방어사에 천거되었던 일이 있으나 이는 당시 충일인물의 맏아들 신칙인물(申恜)이 이조좌랑의 직에 있었던 관계상 문제를 일으키게 되여 결국 임명을 보지 못하고 말었는데 이 문제의 진상과 시비는 확실치 않다.
쪽수▶P138-1그의 자세한 官歷에 關하여는―그 從弟 申敏一의 化堂集, 宣祖實錄 及 光海君日記에 散見하는 것을 綜合하여 簡單히 적어보면, 그는 宣祖 壬辰役初에 全羅道 康津縣監으로 있었으며 滿洲에 갔을 때는 우에 말한 바와 같이 南部主簿(從六品)이었었다. 滿洲로부터 歸國하야 얼마 안 되여 그는 咸興判官이 되였으나, 그해(宣祖 二十八年) 四月 初旬에는 司憲府의 攻擊을 받아 罷職되였다. 當時 罷職의 理由를 살펴보면, 첫째로는 그가 壬辰役初 唐津縣監으로 있을 때 南海縣監 邊應井과 協力하야 錦山에서 敵兵과 싸우게 되었을 때, 그는 처음에 應井과 生死를 같이하기를 約束하였음에 不拘하고 應井은 戰死하였으나 忠一은 退走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前번 그가 ▶P139-1建州 奴兒哈赤城에 갔을 때 그는 奴兒哈赤가 준 衣服을 입고 五拜三叩頭의 禮를 行하야 도리어 그들의 웃음을 삿다는것이다. 果然 忠一의 行動이 如斯하였는지는 지금 이를 確認할 史料가 없으므로 어떻다고 評論할 수는 없으나, 생각컨대 司憲府의 申忠一 罷職 理由와 같은 것은 當時 東西 分黨의 한 現象으로 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如何튼 그는 咸興判官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가 堂叔 申熟에게 圖記의 跋文을 依囑한 때는 곧 그가 咸興으로부터 京城에 돌아왔으리라고 생각되는 四月 十八日이였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 되여 다시 登用되야 或은 湖南 督捕使도 되고 或은 明使 接伴官도 되고 或은 金海府使 或은 水軍節度使 或은 副摠管이 되였으니 武人으로서는 相當한 官職을 歷任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光海君 十四年 壬戌 四月, 그가 돌아가기 前 얼마 안 되여 그는 安岳郡守 兼 防禦使에 薦擧되였든 일이 있으나 이는 當時 忠一의 長子 申恜이 吏曹佐郞의 職에 있었든 關係上 問題를 이르키게 되여 結局 任命을 보지 못하고 말었는데 이 問題의 眞相과 是非는 確實치 않다.
임진역이 일어나자 건주위(建州衛) 도독(都督) 노아합적인물 (티)가 선명(鮮明) 양군을 위하여 원병을 내겠다고 자청한 것은 알려진 사실이며 전운이 아직 암담하던 만력 23년 7월에 노아합적인물은 부하 여진인 90여 명을 만포로 보내어 그곳 첨사(僉使)에게 서계(書契)를 제출한 일이 있었다. 임진역 이전에 있어서는 여진 추장들은 함경도를 경유하야 매년 경성에 올라와서 약간의 토산을 진상하고 그 대상으로 조정으로부터 여러 가지 상사를 받아가지고 귀향하였다. 그것은 물론 조선의 직첩(職帖)을 가진 여진인에게 한한 것이었지만 압록강 외에 거주하는 소위 건주좌위 도독 여진인들은 세조인물 6년 경진(천순 4년)에 소위 건주좌위 도독 동창(童倉)의 직첩 문제로 인하여 명조의 간섭이 있었으므로 이래 조선의 관직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경성에 왕래함도 금지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만포진에 와서 소위 조선의 접대를 받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 조선의 교섭은 대개 구두와 물물교환의 방식을 취하여 왔을 뿐으로 서로 문서를 교환하여 교섭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때 노아합적인물는 전례 없는 서계―그 내용은 앞서 여진인에게 약탈된 조선인과 가축을 돌려보내고 일부는 두 나라가 서로 영구히 화평하자는 의미의 것―을 제출하는 동시에 90여 명의 다수를 만포로 보내어 이에 대한 회답까지 요구하였다는 것은 요컨대 이로써 조선의 그들에 대한 태도와 처치를 엿보려고 시험하는 데 불과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또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다른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것은 여진인 10여 명이 몰래 평안도 위원군에 월경하여 인삼을 채취하던 중 그곳 사람들에게 발각되어 그중 수명이 잡혀 죽임을 당한 일이다. 이러한 사건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때에는 그들이 이를 복수키 위하여 많은 사람과 말을 모아 장차 강을 넘어 침입하리라는 풍설이 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서는 아직 임진역이 계속되든 중이었으므로 북방 여진인에 대한 방비에까지 힘을 쓸 여지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여기에 대한 의론이 비등하게 되었다. 이때 병조는 일책을 생각하여 헌의(獻議)하였으니 그것은 곧 당시 평양 부근에 주둔하고 있는 명나라 유격(遊擊) 호대수인물(胡大受)에게 청하여 그 부하의 사람을 노아합적인물에게 보내여 조선과의 화평을 설유케 하여 일시 시국의 안정을 도모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조선은 호대수인물로 하여금 여진과 조선과는 다같이 천조의 속국이니 그 영토를 보존하여 너희 여진은 압록강을 넘어서 스스로 조선과 교통치 말 것이며 조선도 또한 천조의 명이 없는 한 너희 여진과 교통치 못하리라는 의미의 선유(宣諭)를 하여달라는 것이다. 다행히 호대수인물는 이러한 조선의 부탁을 듣게 되었다. 그래서 호대수인물는 조선이 역시 희망하는 그 부하의 여희원인물(余希元)이라는 사람을 만포로 보내게 되었다. 여희원인물은 8월 중순 호대수인물의 선유문을 휴대하고 만포에 도착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조선의 여진 통사(通事) 하세국인물에게 선유문을 주어 노아합적인물에게 보내 수교케 하였다. 그래서 하세국인물은 선유문을 노아합적인물에게 주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그때 노아합적인물는 그 부장 마신인물(馬臣) 등을하세국인물과 함께 만포로 보내어 다시 서계를 만포첨사에게 제출케 되었다. 마신인물은 11월 2일 만포에 도착하여 직접 여희원인물의 선유도 듣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즉 여희원인물의 제1회 선유이니, 이때 여희원인물마신인물에게 약속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년 정월에는 여희원인물 자신이 많은 식물을 가지고 친히 노아합적인물 성에 가서 그들에게 분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약속은 그들을 회유함에는 언제나 불가결의 조건이었던 것이다.
쪽수▶P139-2壬辰役이 이러나자 建州衛都督 奴兒哈赤 (티)가 鮮明 兩軍을 爲하야 援兵을 내겠다고 自請한 것은 周知의 事實이어니와 戰雲이 아즉 暗澹하든 萬曆 二十三年 七月에 奴兒哈赤는 部下 女眞人 九十餘名을 滿浦로 보내여 그곳 僉使에게 書契를 提出한 일이 있었다. 壬辰役 以前에 있어서는 女眞 酋長들은 咸鏡道를 經由하야 每年 京城에 올라와서 若干의 土産을 進上하고 그 代償으로 朝廷으로부터 여러 가지 賞賜를 받아가지고 歸鄕하였다. 그것은 勿論 朝鮮의 職帖을 가진 女眞人에게 限한 것이었지만 鴨綠江 外에 居住하는 所謂 建州左衛都督女眞人들은 世祖 六年 庚辰(天順 四年)에 所謂 建州左衛都督 童倉의 職帖 問題로 因하야 明朝의 干涉이 있었음으로 爾來 朝鮮의 官職을 얻지 못하게 되었으며 따라서 京城에 往來함도 禁止되고 말았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만 滿浦鎭에 와서 所謂 朝鮮의 接待를 받을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 朝鮮의 交涉은 대개 口頭와 物物交換의 方式을 取하여 왔을 뿐으로 서루 文書를 交換하야 交涉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때 奴兒哈赤는 前例 없는 書契―그 內容은 앞서 女眞人▶P140에게 掠奪된 朝鮮人畜을 돌려보내고 일부는 二國이 서루 永久히 和平하자는 意味의 것―을 提出하는 同時에 九十餘名의 多數를 滿浦로 보내여 이에 對한 回答까지 要求하였다는 것은 要컨대 이로서 朝鮮의 그들에 對한 態度와 處置를 엿보려고 試驗하는 데 不過하였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또 이와 거진 때를 같이하여 다른 한 가지 事件이 發生하였으니, 그것은 女眞人 十餘名이 몰래 平安道 渭原郡에 越境하야 人蔘을 採取하든 中 그곳 사람들에게 發覺되어 그中 數名이 捕殺을 當한 일이다. 이러한 事件은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이때에는 그들이 이를 復讐키 爲하야 많은 人馬를 모두아 장차 越江侵入하리라는 風說이 傳하게 되었던 것이다. 當時 朝鮮서는 아직 壬辰役이 繼續되든 中이였음으로 北方 女眞人에 對한 防備에까지 힘을 쓸 餘地는 全혀 없었던 것이다. 그럼으로 朝廷에서는 여기에 對한 議論이 沸騰하게 되었다. 이때 兵曹는 一策을 생각하야 獻議하였으니 그것은 곧 當時 平壤 附近에 駐屯하고 있는 明나라 遊擊胡大受에게 請하야 그 部下의 사람을 奴兒哈赤에게 보내여 朝鮮과의 和平을 說諭케하야 一時 時局의 安定 圖謀하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朝鮮은 胡大受로 하여금 女眞과 朝鮮과는 다같이 天朝의 屬國이니 그 領土를 保存하야 너이 女眞은 鴨綠江을 넘어서 사사로 朝鮮과 交通치 말 것이며 朝鮮도 또한 天朝의 命이 없는 限 너이 女眞과 交通치 못하리라는 意味의 宣諭를 하여달라는 것이다. 多幸이 胡 大受는 이러한 朝鮮의 付托을 듣게 되였다. 그래서 胡大受는 朝鮮이 亦是 希望하는 그 部下의 余希元이라는 사람을 滿浦로 보내게 되였다. 余希元은 八月 中旬 胡大受의 宣諭文을 携帶하고 滿浦에 到着하야 그곳에 머물면서 朝鮮의 女眞通事 河世國에게 宣諭文을 주어 奴兒哈 赤에게 보내 手交케 하였다. 그래서 河世國은 宣諭文을 奴兒哈赤에게 주고 돌아오게 되였는데, 그때 奴兒哈赤는 그 副將 馬臣 等을 河世國과함께 滿浦로 보내어 다시 書契를 滿浦僉使에게 提出케 되였다. 馬臣은 十一月 二日 滿油에 到着하야 直接 余希元의 宣諭도 듣게 되였든 것이다. 이것이 즉 余希元의 第一回 宣諭이니, 이때 余希元은 馬臣에게 約束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P141-1니라 來年 正月에는 金希元 自身이 많은 食物을 가지고 親히 奴兒哈赤城에 가서 그들에게 分與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約束은 그들을 懷柔함에는 언제나 不可缺의 條件이었든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조선서는 다시 명년 정월 여희원인물 제2회 선유 즉 여희원인물이 상사를 가지고 노아합적인물 성에 갈 때 다만 통사 하세국인물만을 그와 동행케 할 뿐 아니라 계략 있고 사기를 잘 이해할 만한 무사 한 명을 선택하여 하세국인물와 같이 노아합적인물에게 파견하야 일변으로는 개유하며 일변으로는 체탐할 방침을 세우게 되었으니 여기에 선발된 이가 곧 남부 주부 신충일인물이었던 것이다. 앞서 말한 신숙인물의 제발에 “遼東鎭守官 走驛書言” 운운의 일절은 신숙인물의 오해에 불과하다. 그러면 특히 남부 주부 신충일인물가 선발된 이유는 어디 있었던가. 이에 대하여는 신숙인물의 제발 중에 “(前略) 其未徃也 吾見之李學士好閔家(●●●●●●●●●●●●●●) 徃萬里胡地 其逆順未可知 而憂愁畏憚之意 無一毫形於言面” 운운이라는 것이 보인다. 이것으로써 보면 신충일인물와 오봉(五峯) 이호민인물(李好閔)과는 당시 상당한 친교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호민인물은 그때 신충일인물의 여하한 지위에 있었던가 하면 그는 병조참지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으로 추측한다면 신충일인물를 직접 추천한 사람은 이호민인물이 아니었던가 한다. 여하간 명년 정월에는 신충일인물노아합적인물 성에 파견키로 결정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11월 23일에 비변사는 계하기를 북방 사기가 정급한 이때 하루라도 빨리 노아합적인물에 대한 만포첨사 유렴인물(柳濂)의 답서를 신충일인물에게 주어 입송케 하야 그곳 정세를 살펴 후일의 참고를 삼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 비변사의 의견은 곧 채용되어 신충일인물는 (여희원인물와는 따로) 즉시 서울을 출발하여 만포로 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도기 축두에 “臣於上年十一月二十△△△朝” 운운 11월 24일(○○)이나 25일사조(○○○)일 것이다. 신충일인물의 파견은 요컨대 표면상 명목은 노아합적인물 서계에 대한 답서를 지참한 만포첨사의 사자에 불과하나 기실은 노아합적인물의 실력을 정찰할 임무를 가졌던 것이다. 경성 출발 후 충일인물의 행동은 도기에 보이는 바와 같았다. 즉 그는 선조인물 28년 12월 23일에 만포를 출발하여 12월 28일에 건주 노아합적인물 성에 도착하고, 성 안에 머무르기 일주일 만에 다음 해 정월 5일에 노아합적인물 성을 출발하야 왕로와 거의 같은 길을 밟아 만포에 도착, 1월 하순에 경성에 귀환하였던 것이다.
쪽수▶P141-2이때를 當하야 朝鮮서는 다시 明年 正月 余希元 第二回 宣諭 即 余希元이 賞賜를 가지고 奴兒哈赤城에 갈 때 다만 通事 河世國만을 그와 同行케 할 뿐 아니라 計略 있고 事機를 잘 理解할 만한 武士 한 名을 選擇하야 河世國과 같이 奴兒哈赤에게 派遣하야 一邊으로는 開諭하며 一邊으로는 體探할 方針을 세우게 되였으니 여기에 選拔된 이가 곧 南部主簿 申忠一이었던 것이다. 前揭 申熟의 題跋에 「遼東鎭守官 走驛書言」 云云의 一節은 申熟의 誤解에 不過하다. 그러면 特히 南部主簿 申忠一이 選拔된 理由는 어데 있었던가. 이에 對하여는 申熟의 題跋 中에 「(前略) 其未徃也 吾見之李學士好閔家(●●●●●●●●●●●●●●) 徃萬里胡地 其逆順未可知 而憂愁畏憚之意 無一毫形於言面」 云云이라는 것이 보인다. 이것으로써 보면 申忠一과 五峯 李好閔과는 當時 相當한 親交가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李好閔은 그때 申忠一의 如何한 地位에 있었던가 하면 그는 兵曹參知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點으로 推測한다면 申忠一을 直接 推薦한 사람은 李好閔이 아니었던가 한다. 如何間 明年 正月에는 申忠一을 奴兒哈赤城에 派遣키로 決定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여 十一月 二十三日에 備邊司는 啓하되 北方 事機가 正急한 이때 하로라도 빨리 奴兒哈赤에 對한 滿浦僉使 柳濂의 答書를 申忠一에게 주어 入送케 하야 그곳 情勢를 살펴 後日의 參考를 삼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이 備邊司의 意見은 곧 採用되야 申忠一은 (余希元과는 따로) 即時 서울을 出發하야 滿浦로 向하게 되였던 것이다. 圖記 軸頭에 「臣於上年十一月二十△△△朝」 云云 十一月 二十四日(○○)이나 二十五日辭朝(○○○)일 것이다. 申忠一의 派遣은 要컨댄 表面上 名目은 奴兒哈赤 書契에 對한 答書를 持參한 滿浦僉使의 使者에 不過하나 其實은 奴兒哈赤의 實力을 偵察할 任務를 가졌던 것이다. 京城 出發 後 忠一의 行動은 圖記에 보이는 바와 같았다. 즉 그는 宣祖 二十八年 十二月 二十三日에 滿浦를 出發하야 十二月 二十八日에 建州 奴兒哈赤城에 到着하고、城內에 留하기 一▶P142-1週日 만에 翌年 正月 五日에 奴兒哈赤城을 出發하야 往路와 거진 같은 길을 밟아 滿浦에 到着, 一月 下旬에京城에 歸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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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2-2以上과 같이 申忠一은 胡遊擊의 部下 余希元과는 한 번도 同行한 일이 없으니 余希元의 第二回 宣諭는 忠一이 京城에 돌아온 다음 달 즉 宣祖 二十九年(萬曆 二十四年) 二月이었었다. 즉 余希元은 전번 約束보담 한 달 늦게 奴兒哈赤城에 到着하였거니와 朝鮮側 隨行員은 譯官 金億禮, 滿浦僉使軍官 安忠誠 等이었다. 淸朝 太祖實錄 丙申 二月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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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2-3

明遺官員一員 朝鮮官二日 從者二百人來 上令我軍盡甲 親兵於外 遇於妙弘廊地界 迎入大城 優禮答遺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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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2-4라 한 것이 그것이다. 余希元 兩次의 宣諭에 關하여는 宣祖實錄에 詳細히 나타나 있으나 여기서는 論及치 않기로 한다. 申忠一 來訪에 關한 滿洲側 史料는 全혀 찾아볼 수 없으나 그러나 다만 申忠一과 余希元과는 한 번도 行動을 같이하지 않았다는 것만은 記憶하여 둘 必要가 있다. 그런 때 成硏經齋는 前揭 淸朝實錄과 거이 同文인 大淸開國方畧의 記事를 引用하야 申忠一은 金希元과 더부러 同行하였다고 하고, 最近 朝鮮史編修會 編 朝鮮史 第四編 第十卷에도 余希元의 宣諭와 申忠一의 派遣을 混同하고 또 年前 稻葉岩吉 博士도 淸朝實錄의 記事를 引用하야 大明國官員이라 한 것은 余希元을 가르친 것이며, 高麗國官員 이라 함은 申忠一 等을 가르침이니 淸實錄이 이러한 明朝 兩國人의 同行을 叙述하였음에 對하야 申忠一의 報告書가 余希元과 同行하였음에 言及치 않았음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誤解는 宣祖實錄의 前後 關係 記事를 仔細히 檢討한다면 明確히 解決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誤解가 또한 硏經齋로부터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記憶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仁祖朝에 編纂된 宣祖修正實錄(卷二十九, 二十八年 十二月 朔己亥條)이 벌써 그와 같은 誤解를 하고 있으며, 崔鳴吉 等의 增修本 攷事撮要(卷上, 萬曆二十三年 乙未條)에도 이와 同一하다. 硏經齋가 關係한 尊周彙編(卷一, 萬曆 二十三年 乙未條)이 또한 이러한 誤謬에 빠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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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2-5申忠一의 來住路에 關하여는 圖記에 依하야 大略을 짐▶P143-1작할 수 있거니와 地名은 漢字로 記入되여 있으나 이것은 漢字의 朝鮮音으로 읽을 것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며 또 諺文으로 發音을 明示한 곳도 보인다. 圖記에 보이는 地名으로 現今 地名에 一致하는 것은 거진 찾아볼 수 없으니 圖記의 보이는 地名考證만도 確實이 우리 研究 의 對象이 될 것이나 忠一의 往復路는 大體로 現今의 滿浦鎭으로부터 鴨綠江을 건너 高句麗 時代의 서울 輯安縣을 지나 北上하야 板岔嶺을 넘어 新開河 上流의 나와 新開河를 따라 下流에 이르러 거기서 다시 渾河의 支流 富爾江의 流域을 거슬러 올라가 現今 蘇子河 流域인 興京老城 附近에 있는 奴兒哈赤城에 到着하였던 것이다. 忠一의 到着 한 奴兒哈赤의 居城은 萬曆 十五年에 築造한 所謂 虎欄哈達下 東南의 無名城으로 이 城의 構造에 關한 滿洲側 記錄으로서는 겨우 盛京通志에 若干 보일 뿐이나 申忠一의 「圖記」에는 가장 細密한 說明이 있다. 特히 淸太祖 奴兒哈赤 建陽 以前 그들의 生活狀態를 考察함에 있어서 가장 興味 있는 것은 奴兒哈赤家와 그 弟 小兒哈赤家의 畧圖일 것이다. 이 圖는 上述한 바와 같이 이번 發見된 圖記에서 처음 볼 수 있는 것으로 滿洲側 史料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全혀 찾아볼 수 없는 新史料이다. 이에 依하면 그들의 居住하는 家屋은 蓋瓦丹靑한 建物이며 客廳과 三層 鼓樓도 있어 現在 우리가 그것을 仿佛히 目睹하고 있는 느낌이 있다. 그 밖에 무릇 九十七個條의 說明文이 있으니 이는 그가 一週間 동안 城內에서 直接 보고들은 見聞錄이다. 이中에는 城郭構造의 闢한 說明을 비롯하여 城內外에 居住하는 人民의 多少, 軍備의 强弱, 그들의 生活狀態,正月 一日 奴兒哈赤家 宴會의 光景, 奴兒哈赤家의 世系, 奴兒哈赤와 그 弟 小兒哈赤와의 關係, 奴兒哈赤 兄弟의 容貌, 奴兒哈赤와 兀剌, 如許 及 蒙古와의 關係, 그들에게 使役되여있는 朝鮮人 奴隷이야기, 滿浦僉使에게 보내는 奴兒哈赤의 回帖文筆을 맡은 唯一의 漢人歪乃의 關한 일, 其他 女眞人과의 問答, 特히 日本消息과 鳥銃에 關한 記事 等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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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3-2圖記의 內容價値에 關한 批判과 檢討는 장차 淸朝史 硏究者의 새로운 課題의 하나로 믿는 바이어니와, 申忠一의 以上과 같은 報告는 當時에 있어서도 相當한 注目을 이끌었던 것이다. 즉 忠一의 圖記를 보옵신▶P144-1宣祖大王은 「老乙可赤事 極可憂慮 自古胡虜 只逐水草而居 今老酋多設鎭堡·城池·器械 無不備造 而蒙古三衛 亦皆歸順云 其漸不可說也」라 하고 或 「終必有大可憂者」라 하야 我國도 姑息之策을 버리고 반다시 山城을 修築하며 邊將을 極擇하야 積穀鍊兵하여만 되리라 하야, 忠一의 報告書를 當時 兼京畿黃海平安咸鏡道都體察使인 西厓 柳成龍에게 보인 바 있었다. 그러나 이에 對한 積極的 防 策은 아무것도 實現된 것이 없었던 것이다. 그 後 다만 申忠一의 建州偵察은 光海君 時代에 이르러 滿洲의 風雲이 急迫하자 滿浦僉使 鄭忠信의 建州偵察을 비롯하야 屢次에 亘한 奴兒哈赤의 內情偵探의 先例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今日에 있어서는 申忠一의 建州紀程圖記는 當時와는 다른 意味에 있어서 重要性을 가지고 있으니 다시 말하면 가장 豐富한 內容을 가진 淸朝開國期 新史料로써 새로 우리의 注目을 이끌게 된 것이다. (昭和 十四年 二月 日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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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144-2【附記】 지나간 늦은 가을 어느 日曜日이었었다. 나는 平山 申氏 系譜에 申忠一 그의 무덤이 「在廣津先塋內」라 함을 보고 한조각 碑라도 찾어볼가 하야 二三學友와 더부러 서울 郊外 광나루(廣壯里)로 나아갔었다. 多幸히 우리는 곧 峨嵯山 南麓에서 그의 祖父 贈吏曹判書廷美의 墓碑를 찾게 되였다. 이 碑는 그리 크지는 않으나 잇기가 껴서 겨우 「廷美」 두 字를 判讀할 수 있었다. 이 碑가 서 있는 塋城 內에는 上中下 三段에 都合 四基의 墳墓가 있으니 上段 一基에 碑가 있어 그것이 그의 祖父 무덤임을 알 수 있었고 中段 二基와 下段 一基에는 아무 表示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前揭 系譜에 依하면 廣津 先塋 內에는 忠一 그와 그 父 默과 그 祖父 廷美(夫人 完山 李氏 墓祔)의 무덤만이 있으니 이것으로써 推測컨댄 中段의 二基는 그 父 默과 그 母(安氏인지 金氏인지 未詳)의 것이며 下段의 一基가 곧 申忠一 그의 무덤에 틀림없을 것이다. 우리는 暫時 感慨無量히 이에 敬意를 表하였다. 또 葦滄 吳世昌 氏의 槿域書畵徵에는 簪纓譜와 震彙續考에 依하야 「申忠一 平山人 惕齋申點從子 官至水使 畫竹 與灘隱齊名」이라 하였다. 그의 墓誌銘과 아울러 그의 畵竹의 出現은 最近 나의 가장 큰 關心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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