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동

North Korea Humanities

허준혁(PNU2024)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6월 2일 (일) 14:09 판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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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동(梁柱東)
양주동 시인.jpg
출처 : 조선일보
 
한글명 양주동 한자명 梁柱東 영문명 가나명 이칭 호:무애(無涯)
성별 생년 1903년 몰년 1977년 출신지 경기도 개성 전공 영어영문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양주동(梁柱東) : 1903-1977, 호는 무애(无涯). 시인, 국·영문학자, 동국대· 연대교수 역임, 신라 향가 등 한국 고가를 연구하여 초기 국어학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1]


생애


어린시절 및 학력

아버지 원장과 어머니 강릉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6세 때 아버지, 12세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으나 곧 중퇴하고 고향에 돌아가 5~6년간 한학에 몰두했다. 1920년 상경해 중동학교 고등속성과를 졸업한 후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예과에 입학하면서 문학에 뜻을 두었다. 1923년 잠시 귀국하여 유엽·백기만·이장희 등과 함께 〈금성〉을 발간하고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했다.[2]



대학 교육 이후

1918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평양 숭실전문학교(崇實專門學校) 교수로 부임하였다가 일제말 이 학교의 폐쇄로 그 자리를 물러나 1940년부터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사로 재직하고 있다가 광복을 맞았다. 광복 후에는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여(1947), 중간에 수년간 연세대학교 교수로 옮겨 있었던 것(1958∼1961)을 빼고는 종신토록 동국대학교에 헌신하였다. 1957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54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학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젊었을 때에는 영문학을 강의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인 및 문학이론가로서 문단에서의 활약이 화려하였으나,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부터는 주로 고시가(古詩歌)의 주석에 전념하는 국학자로 전신하였다.[3]



시의 성향

《금성(金星)》 동인으로 등장하여(1923) 민족주의적 성향의 시를 주로 썼다. 시집 《조선의 맥박(脈搏)》(1930)은 그의 대표작이기도 한데, 그의 시들이 가지는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염상섭(廉想涉)과 함께 《문예공론(文藝公論)》(1919)을 발간하며 시작된 양주동의 평론은 문학사가들에 의하여 절충론이라고 불린다. 염상섭과 박영희(朴英熙) 사이의 문학논쟁을 이어받아 경향파(傾向派)의 기수였던 김기진(金基鎭)과의 사이에 폈던 논전은 특히 유명하다. [4]





연구


제목1


제목2


제목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고등보통학교 A graduates B
Person: 홍길동 Institution: ○○대학교 A worksAt B
Person: 홍길동 Group: ○○학회 A isMemberOf B



Time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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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원







주석


  1. https://www.kculture.or.kr/brd/board/252/L/menu/465?brdType=R&thisPage=11&bbIdx=8599&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2.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5a1180b
  3.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동 [梁柱東]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
  4. [네이버 지식백과] 양주동 [梁柱東]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이응백, 김원경, 김선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