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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전통 식생활과 생물학·영양학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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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직은 생물학과 영양학을 기반으로 조선의 전통 식생활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초기 연구자 중 한 명이다.{{TagPerson|김호직}} 그는 조선의 음식 문화를 민속적 관습으로만 다루지 않고, 식물 자원과 영양 성분, 환경 조건을 함께 고려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ref name="ency">「김호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073</ref>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 중심의 근대 영양학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한반도의 기후와 토양, 식재료 특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연구 틀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김호직은 생물학과 영양학을 기반으로 조선의 전통 식생활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초기 연구자 중 한 명이다.{{TagPerson|김호직}} 그는 조선의 음식 문화를 민속적 관습으로만 다루지 않고, 식물 자원과 영양 성분, 환경 조건을 함께 고려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ref name="ency">「김호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1073</ref>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 중심의 근대 영양학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한반도의 기후와 토양, 식재료 특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연구 틀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2025년 12월 10일 (수) 19:23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이승은(S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김호직(한자명)
김호직.jpg
출처 : 『잊혀진 사람들: 도시 빈곤의 초상』, 피움넷(P-UM), https://www.p-um.net/p/special/forgotten-people/cm0i4ktzf002301ahaz2u2i3w
 
한글명 김호직 한자명 金浩稙 영문명 Gim Hojik 가나명 이칭 자 : 맹집(孟集), 호 : 우강(雨岡)
성별 남성 생년 1905년 몰년 1959년 출신지 평안북도 벽동군 전공 생물학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김호직(1905~1959)은 평안북도 벽동 출신의 영양학자·교육자로, 수원고등농림학교와 일본 동경제국대학,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숙명여자전문학교 교수, 부산수산대학장, 문교부 차관,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 등을 지내며 국민영양 개선과 농사교육 보급에 큰 공을 세웠다.[1] 그는 특히 콩 단백질과 곡류 보강식 연구를 통해 보강식을 발명하고 대통령상을 받았으며,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의 한국인 최초 개종자이자 한국 교회 초기 지도자로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1]


생애


===유년기와 학력 ===

김호직(金浩稙, 1905~1959)은 1905년 4월 16일 평안북도 벽동군에서 태어났다.김호직인물평안북도 벽동군공간 향교 교장을 지낸 아버지 밑에서 성장하며 일찍부터 교육의 중요성을 체험했다.[2] 그는 벽동농업학교를 거쳐 1924년 수원고등농림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했고, 졸업생 대표로 답사를 맡을 만큼 성적과 리더십을 인정받았다.벽동농업학교기관수원고등농림학교기관 수학 능력을 인정받은 김호직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제국대학(당시 동경제국대학) 생물학과에서 유학하며 본격적으로 생물학을 전공했다.도쿄제국대학기관 그는 농학·생물학 지식을 바탕으로 조선의 농업과 식생활을 개선할 수 있는 과학적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 경험이 이후 전통 식생활 연구와 영양학 연구의 기반이 되었다.[3]


일제강점기의 교육 활동

도쿄제국대학을 졸업한 뒤 김호직은 전주 신흥학교 박물 교사로 근무하면서 현장 교육 경험을 쌓았다.[2] 이후 대구 계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교감 박정근의 여동생 박필근과 결혼해 가정을 꾸렸다. 그는 이 시기에 학생들에게 생물학을 가르치는 동시에, 자연관찰과 실험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근대 과학 교육을 확산시키려 했다. 1930년대에 들어서 그는 이화여자전문학교와 숙명여자전문학교에서 생물학과 영양학을 강의했다.이화여자전문학교기관숙명여자전문학교기관 여성 고등교육 기관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교육과 가정 위생·영양 개선을 중요한 과제로 삼았고, 교실 강의 외에도 대중 강연과 글쓰기를 통해 식생활 개선의 필요성을 설파했다.[3]


해방 이후 학계·행정 경력과 미국 유학

해방 이후 김호직은 숙명여자전문학교 재건에 참여하여 교장으로 재직하며 학교 운영과 교육과정 정비에 힘썼다.[2] 이어 국립수원농사시험장과 농사개량원 부총재로 일하며 농업 기술과 농사교육 확산에 기여했다. 1948년에는 대한민국 정부 대표로 FAO 제2차 총회에 참석해 국제 식량·농업 논의에 참여했다.FAO기관FAO 제2차 총회사건

1949년 그는 정부 파견 제1호 유학생으로 미국 코넬대학교에 진학해 영양학 석사(M.N.S.)를 취득하고, 이어 콩단백질의 영양학적 가치를 분석한 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코넬대학교기관 이 연구를 통해 그는 단백질 공급원이 부족한 한국 상황에서 콩을 활용한 영양 보강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제시했다.[2][3]

귀국 후 김호직은 부산수산대학(현 부경대학교) 학장, 연희대학교 교수, 문교부 차관,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장 등을 역임하며 교육 행정과 고등교육 현장에서 폭넓게 활동했다.부산수산대학기관연희대학교기관건국대학교기관 국민 영양 개선과 농사 교육을 결합한 정책·연구를 지속했고, 이러한 공로로 1953년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3][2]


종교와 사회 활동, 그리고 사망

김호직은 처음에는 개신교 장로교 신자로 활동했으나, 미국 유학 시절 동료 학생 올리버 웨이먼의 전도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일명 모르몬교) 신앙을 받아들였다.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단체 1951년 7월 29일 시스케하나 강에서 한국인 최초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침례를 받았고, 이후 “내 양을 먹이라(Feed my sheep)”라는 성경 구절을 삶의 좌표로 삼았다고 전해진다.[2][1]

한국전쟁 시기와 그 이후 그는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모임에 참여하며, 영양학자·교육자·종교 지도자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6·25전쟁사건 1957년에는 개신교 주류의 반대 속에서도 해당 교회의 재단 설립에 크게 기여해, 한국 내 종교 지형 변화에도 흔적을 남겼다.[2]

1959년 그는 세계식량농업기구(FAO) 세미나에 초청되어 인도로 출국했다가 고혈압으로 쓰러진 뒤 귀국했고, 같은 해 8월 31일 서울시 교육위원회 회의 중 뇌일혈로 세상을 떠났다.[2]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망우리공원 인근 사설 묘역에 안장되었다. 이 묘역은 망우리공원 안에서 유일한 사유지 개인 묘역으로, ‘콩박사’이자 교육자, 종교인으로서 그가 남긴 복합적인 삶의 궤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망우리공원공간





연구


전통 식생활과 생물학·영양학 연구

김호직은 생물학과 영양학을 기반으로 조선의 전통 식생활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초기 연구자 중 한 명이다.김호직인물 그는 조선의 음식 문화를 민속적 관습으로만 다루지 않고, 식물 자원과 영양 성분, 환경 조건을 함께 고려하는 생태학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3] 이러한 문제의식은 서구 중심의 근대 영양학 이론을 그대로 수용하기보다, 한반도의 기후와 토양, 식재료 특성을 반영한 독자적인 연구 틀을 구축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그의 대표적인 연구 성과는 1944년에 간행된 『조선식물개론』이다.조선식물개론서적 이 저서는 조선 전역에 분포한 식물 자원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식용 가능 여부와 영양적 특성을 함께 서술함으로써 식생활 연구의 기초 자료를 제공하였다.[3] 김호직은 이를 통해 조선 식재료의 가치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식량 자립과 국민 건강 증진이라는 사회적 과제에 학문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조선식물개론』은 이후 한국의 식품과학·영양학 연구에서 전통 식재료를 학문적 대상으로 다루는 출발점 중 하나로 평가된다. 그는 이 연구를 통해 생물학, 농학, 영양학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였으며, 학문 연구가 실제 사회 문제 해결과 결합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2]


콩 단백질 연구와 영양 보강식 개발

해방 이후 김호직의 연구는 실천적 영양 문제, 특히 단백질 결핍 문제 해결로 확장되었다. 그는 미국 코넬대학교에서 수행한 연구를 바탕으로 콩 단백질의 영양학적 가치를 분석하고, 이를 식량 부족 상황에서 활용할 수 있는 대체 단백질원으로 제시하였다.코넬대학교기관[2] 이러한 연구는 당시 한국 사회의 영양 불균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김호직은 콩 단백질을 활용한 보강식을 개발하여 특허를 취득하였으며, 이를 학교 급식과 가정 식단에 적용할 수 있는 형태로 구체화하였다. 그는 단순한 이론 연구에 그치지 않고, 실제 조리와 섭취가 가능한 식품 형태로 연구 결과를 전환함으로써 학문과 생활의 연결을 시도했다.[3]

이 연구는 한국 영양학사에서 콩을 단순한 전통 식재료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검증된 영양 자원으로 재정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호직의 연구는 이후 국민 영양 정책과 식품 연구 분야에 영향을 미쳤으며, 전통 식재료를 활용한 현대적 영양 연구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2]


연구 성과의 사회적 확산과 교육적 의의

김호직은 연구 성과를 학술지와 대학 강의, 대중 강연을 통해 적극적으로 확산시켰다. 그는 생물학과 영양학 지식을 교실과 연구실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고, 사회 전반의 식생활 개선으로 연결하고자 했다.[3] 이러한 태도는 학문 연구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그의 학자적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또한 그는 여러 고등교육 기관에서 후학을 양성하며 생물학·영양학의 기초 교육을 강화했다.연희대학교기관부산수산대학기관[2] 김호직의 제자들은 이후 학계와 교육계, 연구기관 등에서 활동하며 그의 연구 방향을 계승·확장했다.

김호직의 연구는 조선 후기 식생활 연구, 해방 이후 영양 문제, 그리고 근대 생물학 교육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한다. 그의 학문적 궤적은 연구가 특정 시대의 사회적 조건과 어떻게 맞물려 전개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한국 근현대 과학사와 식생활사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3]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김호직 Location: 평안북도 벽동군 A bornIn B
Person: 김호직 Institution: 수원고등농림학교 A graduates B
Person: 김호직 Institution: 도쿄제국대학 A graduates B
Person: 김호직 Institution: 코넬대학교 A studiesAt B
Person: 김호직 Institution: 연희대학교 A worksAt B
Person: 김호직 Institution: 부산수산대학 A worksAt B
Book: 조선식물개론 Person: 김호직 A creator B
Person: 김호직 Group: 예수그리스도후기성도교회 A isMemberOf B
Person: 김호직 Location: 망우리공원 A buriedIn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주석


  1. 1.0 1.1 1.2 김호직, 『김호직 – DR2001-7』, LDSKorea.
  2. 2.00 2.01 2.02 2.03 2.04 2.05 2.06 2.07 2.08 2.09 2.10 2.11 정종배, 「김호직(金浩稙, 1905~1959)」, 『망우리 열전』, P-UM Forgotten People.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pum"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
  3. 3.0 3.1 3.2 3.3 3.4 3.5 3.6 3.7 3.8 「김호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인용 오류: 잘못된 <ref> 태그; "ency"이 다른 콘텐츠로 여러 번 정의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