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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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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인 지점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력이 다해, 골인 지점 10m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관중들의 응원 속에, 스태프의 도움을 받기 직전 권태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걸었고, 골인과 동시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갔다.
 
  골인 지점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력이 다해, 골인 지점 10m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관중들의 응원 속에, 스태프의 도움을 받기 직전 권태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걸었고, 골인과 동시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갔다.
 
  이 모습은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현지 언론에서도 입상한 쓰다 세이이치로나 김은배보다 더 크게 보도되었다. 대일본체육협회의 『제10회 올림픽 대회 보고서』에도 이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었다.<ref> "[https://web.archive.org/web/20110813111728/http://www.sports-reference.com/olympics/athletes/go/taika-gon-1.html]",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waybackmachine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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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는 경기 전 권태하와 김은배에게 자기 앞에 나서지 말고 뒤에서 뛰라고 지시했다. 이에 권태하는 선수의 장점을 고려하지 않고 페이스메이커와 자기중심적 전략을 요구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지시를 거부하고 앞서 달렸다. 이는 곧 오버페이스로 이어졌고, 선두그룹에서 달렸던 권태하는 체력 저하로 9위로 처져 탈진상태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결승전 10m를 앞두고 쓰러진 뒤 기다시피 골인하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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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기에서 쓰다 5위, 김은배 6위, 권태하는 9위를 했다. 그러나 세계 언론은 권태하를 주목해 대서특필했다. 비록 9위에 머물렀지만 기어서라도 결승선을 통과하려는 그의 정신이 바로 올림픽 정신이며, 우승보다 더 값진 스포츠 정신이라고 극찬했다.<ref> 윤호노."[https://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0396]", <html><online style="color:purple"><sup>online</sup></online></html>,충북인innews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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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0일 (수) 19:15 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25-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조수민(CNU2025))이 작성했습니다.




권태하 (한자명)
[[file:[파일:Kwon tae ha.jpg]|270px|thumb|center]]
출처 :
 
한글명 권태하 한자명 權泰夏 영문명 Kwon Tae-ha 가나명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06년 몰년 1971년 출신지 대한제국 충청북도 충주군 전공 육상


개요

일제강점기 조선마라톤보급회 단체 위원장, 대한육상경기연맹단체 회장 등을 역임한 체육인. [1]


생애


출생 및 학력

충청북도 충주 출생. 서울 중동학교 졸업 후 휘문고보에 입학하였다. 일본 리츠메이칸중학[立命館中學]에 전학하였고,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하였다. 1932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였다.[2]


학창 시절 및 선수 경력

권태하는 충청북도 청주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서울특별시의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일본 리츠메이칸 중학교를 거쳐 메이지 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3] 메이지 대학 시절에는 하코네 역전 경주에 1927년부터 매년 출전하여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1928년에는 4구간, 1930년에는 7구간에서 구간 신기록을 세우며 구간상을 수상했고, 럭비 선수로도 활동했다.[3]


1932년 메이지 대학 졸업 후에는 경성부에서 양정고등보통학교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다.[4]

같은 해 5월 8일,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마라톤 조선 예선에서 2시간 35분 12초의 기록으로 첫 마라톤 출전임에도 우승을 차지했다.[5]
5월 25일 도쿄에서 열린 최종 예선에서도 2시간 36분 50초로 우승하며, 김은배, 복싱의 황을수와 함께 조선인 최초의 올림픽 대표 선수로 선발되었다.[6]

올림픽 본선에서는 무더운 날씨 속에 9위를 기록했다.[7]

골인 지점인 로스앤젤레스 메모리얼 콜리세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체력이 다해, 골인 지점 10m 앞에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관중들의 응원 속에, 스태프의 도움을 받기 직전 권태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걸었고, 골인과 동시에 쓰러져 들것에 실려 갔다.
이 모습은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현지 언론에서도 입상한 쓰다 세이이치로나 김은배보다 더 크게 보도되었다. 대일본체육협회의 『제10회 올림픽 대회 보고서』에도 이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었다.[8]


기타 협회 활동

올림픽 합숙훈련을 위해 부산항을 출발한 권태하는 술에 취한 일본 경찰들에게 불심검문에 응하는 태도가 불손하다는 이유로 또 다시 구타를 당해 얼굴과 눈 주위에 상처를 입게 된다. 올림픽 마라톤 경기가 시작되기 전 일본은 예선전 3위를 했던 쓰다에게 코치 겸 선수역할을 맡겼다.

쓰다는 경기 전 권태하와 김은배에게 자기 앞에 나서지 말고 뒤에서 뛰라고 지시했다. 이에 권태하는 선수의 장점을 고려하지 않고 페이스메이커와 자기중심적 전략을 요구한 것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 지시를 거부하고 앞서 달렸다. 이는 곧 오버페이스로 이어졌고, 선두그룹에서 달렸던 권태하는 체력 저하로 9위로 처져 탈진상태로 경기장에 들어섰다. 결승전 10m를 앞두고 쓰러진 뒤 기다시피 골인하자 관중들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다.

이 경기에서 쓰다 5위, 김은배 6위, 권태하는 9위를 했다. 그러나 세계 언론은 권태하를 주목해 대서특필했다. 비록 9위에 머물렀지만 기어서라도 결승선을 통과하려는 그의 정신이 바로 올림픽 정신이며, 우승보다 더 값진 스포츠 정신이라고 극찬했다.[9]

  1. 권태하(權泰夏)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 곽형기."[1]", onlin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 "[2]", online,waybackmachine
  4. "[3]", online,waybackmachine
  5. waybackmachine."[4]", online,
  6. "[5]", online,waybackmachine
  7. "[6]", online,waybackmachine
  8. "[7]", online,waybackmachine
  9. 윤호노."[8]", online,충북인in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