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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13일 (금) 22:16 기준 최신판

👩🏻‍🏫본 문서는 서울대학교 " 24-2 미디어위키를 활용한 역사 데이터 편찬" 수강생(오정온(SNU2024))이 작성했습니다.




강재언(姜在彦)
20051014012989.jpg
출처 : 김원용, 「동학연구 물꼬 장본인 재일사학자 강재언 교수」, 『전북일보』online,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작성일: 2005년 10월 14일.
 
한글명 강재언 한자명 姜在彦 영문명 Jaeon Kang 가나명 カン ジェオン 이칭
성별 남성 생년 1926년년 몰년 2017년년 출신지 제주도 전공 한국 근대사, 사상사




항목

차례


개요 생애 연구 데이터 참고자원 주석




개요

하나조노(花園)대 객원교수 등을 역임했으며 역사학자의 관점에서 한일관계, 북한 문제 등에 대해 심도있는 연구와 저술 활동을 했다. [1] 고인은 1954년 발표한 ‘조선 봉건체제의 해체와 농민전쟁’을 비롯해 ‘조선근대사연구’(1970년), ‘조선의 개화사상’(1981년) 등의 연구로 일본에서 한국 근대사 전문가로 인정받았다.[2] 또한 일본 현지의 학계, 문화계 재일동포 인사들과 함께 1975년 계간지 ‘삼천리’를 창간했으며, ‘계간 청구’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재일동포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노력해왔다. [3]


생애


일본으로 밀항하다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나 제주농고를 나온 그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으로 밀항해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기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한국사 연구로 방향을 바꿨다. [4] 강재언은 이와 관련하여 도일을 결심하게 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5] 행간을 읽어보면 도일 전 한국에서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던 그에게 제주 4.3사건의 영향도 적지 않게 있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분단 조국의 한 측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심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6]



좌익 활동

강재언은 1951년 9월 일본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재일동포가 많이 거주하는 오사카에서 오사카조선인문화협회(大阪朝鮮人文化協会)단체에도 소속하면서 문화 활동도 병행했다. [7] 오사카조선인문화협회(당시 회장 김종명<金鐘鳴>)는 해방 직후 탄생하여 재일동포사회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좌익단체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 조련)의 산하단체로 재일동포 문화계 인사들의 구심처가 된 곳이다. [8] 강재언이 열성적인 좌익 활동가이었던 것은 모교 오사카상과대학에서 조수 임명 기회를 포기하면서까지 민전 활동에 투신했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9] 1953년 4월 강재언은 대학 강단을 뒤로 한 채 도쿄로 이주하여 민전 산하 조선통신사(朝鮮通信社)한일민족문제학회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0]


다케나카와 결혼

일본 정착 후 강재언이 부인 다케나카 에미코(竹中恵美子)인물 와 결혼한 것은 1955년이며 강재언이 좌익진영 활동가로 도쿄에서 재일동포 좌 익단체 민전(民戰,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在日朝鮮統一民主戦線)의 약 칭) 기관지 편집 일에 종사했을 때이다. [11] 지금보다 훨씬 조선인에 대한 민족차별이 거셌던 시대에 다케나카는 강재언을 택함으로 인해 가족 과의 인연을 끊었고 강재언 또한 “식민지시대를 잊었냐”는 가족들의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12] 제학자로 일본 여성노동문제 연구자의 시조가 된 다케나카는 오사카상과대학(현 오사카시립대) 최초의 여성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재언과의 슬하에 아들 하나를 두었다. [13] 경제적 뒷받침이 없는 민족단체에서 일하던 강재언이 다케나카의 지원 없이 연구활동을 이어나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다케나카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는 그의 여러 저작의 사사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14]



조총련 활동과 결별

한국사람으로 정체성이 분명했던 강 교수는 일본에 귀화해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할 생각이 없었고 1953년부터 1968년 인연을 끊을 때 까지 조총련 활동에 집중했다. [15] 조총련계열의 통신사, 잡지사, 연구소에 근무하며 일본인과 한국어를 모르는 재일동포를 대상으로 계몽서를 펴내거나 한국문제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론 일본학자들에 맞서 싸우는 민족운동을 벌였다. [16] 그 시기에 강 교수는 조총련내부와 사상적 갈등과 투쟁은 불가피 했고 김일성과 그 가족을 신격화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한 것을 역사학자로 용인할 수 없었고 북한의 현실은 그가 공부한 사회주의와 거리가 멀어 결국 결별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조총련과의 결별은 경제활동의 단절로 이어져 몇 년간은 고독을 술로 달래며 연구에 몰두했다. [17] 1970년에 출간된 <한국근대사연구>(한울)을 비롯해 칩거기간에 4-5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펴냈다.[18]


재일동포 후학들의 스승이 되다

이렇게 남북분단과 재일동포사회의 반발에 시달린 강재언이었지만 이후 재일 1세로서 그가 지향하게 된 것은 국가에 종속하지 않은 재일 동포 나름의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과 후학을 기르는 일이 되었다. [19] 강재언의 주변에는 앞서 언급한 김조설을 비롯하여 일본 대학을 다닌 재일 동포 학생조직 재일한국학생동맹(在日韓國學生同盟, 한학동) 소속의 학생들이 다수 모여 들었다. [20] 오사카상과대학의 후신 오사카시립대학 을 비롯해 일본 각지에서 시간강사로 일했던 강재언은 재일동포들 가운데 특히 민단으로부터도 제명된 한학동 소속 재일동포 2세 학생들의 정체성 회복을 위해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21]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사독재시절에 적지 않은 한학동 출신자들이 대학원 진학 등 모국수학으로 국내에 들어왔다가 일련의 재일동포간 첩단사건 등으로 누명을 쓰고 그 다수가 영장도 없이 구금되거나 교도소에서 복역했던 것도 잊어서는 안되는 사실이다. [22] 1981년 여러 재일동포들의 비판을 무릅쓰고 강재언 등의 방한을 추진했을 때 내건 명분은 이들 재일동포 정치범 구원이었던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맥락도 함께 감안되어야 할 것이다.[23]





연구


『한국근대사연구』

1980년대 초만 해도 국내 역사연구자 가운데 근대사를 전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통사 형태는 아니지만 ‘통사적으로’ 정리된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연구』서적가 번역 발간된 것은 한국근대사 연구의 열기가 막 끓 어오르던 그 시절 젊은 연구자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이 되었다. [24] 우선 전공 분야의 마땅한 입문서가 없었던 시점에 출간된 책이라 개항 이후 3·1운동 시기에 이르는 한국근대사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더없이 유용하였다. [25] 게다가 그것이 ‘내재적 발전론’이라는 하나의 일관된 이론체계에 의해 서술되었다는 점이 당시 연구자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게 다가왔다. [26] 우선 『한국근대사연구』의 구성을 보면, 일본에서 출판된 『조선근대사연구』(日本評論社, 1970)에서 네 개의 논문과 『근대조선의 변혁사상』(日本評論 社, 1973)에서 두 개의 논문을 뽑아서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27] 따라서 이 책은 엄밀히 말해서 통일된 구상 아래 새로 집필한 것이 아니라, 한국 근대정치사 분야와 사상사 분야의 기 발표 논문을 바탕으로 근대민족운동의 전개 과정을 연대기적 서술 방식으로 체계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8]


『근대한국사상사연구』

『근대한국사상사연구』서적에서는 8장으로 구성하여 북학사상, 이항로의 위정척사사상, 개화파의 자유민권사상, 동학(천 도교), 활빈당, 국권회복을 위한 언론, 한국독립운동의 근거지 문제, 사상사에서 본 3·1운동 등 모두 8개의 사상사적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29] 비슷한 시기에 번역 출간되어 한국근대사 연구의 초심자들에게 입문서처럼 읽혔던 『한국근대사연구』와 『근대한국사사상사연구』라는 강재언의 두 저작은 주제가 서로 겹치거나 중복된 내용도 많다. [30] 각각 별개로 출간되었을 뿐 사실상 보완관계에 있는 동일한 서술체계라고도 할 수 있다.[31]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서적은 2001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사에서 간행됐던 『조선 유교 2천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32] 한국 근대 사상사 연구와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의 관계사 연구 성과들을 한데 묶어, 유학의 역사를 조회하고 있다. [33] 더불어 우리의 생활 습성까지 깊게 뿌리 내린 유학이라는 실체를 밝힘으로써 우리의 모습을 명확히 살피고 미래를 진단하고 있다.[34]





데이터


TripleData

Source (A) Target (B) Relationship
Person: 강재언 Person: 다케나카 에미코 A hasSpouse B
Person: 강재언 Institution: 오사카상과대학 A graduates B
Person: 강재언 Group: 오사카조선인문화협회 A isMemberOf B
Person: 강재언 Institution: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A worksAt B
Person: 강재언 Institution: 하나조노대학 A worksAt B
Book: 『한국근대사연구』 Person: 강재언 A creator B



Timeline




Network Graph






참고자원



김웅기,「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1.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28.

강영진, 「(5)'재일 코리언'으로 살아온 세월, 연구.탐구의 치열함 지켜」, 『제주일보』online, 제주일보, 작성일: 2015년 04월 03일.

김효순, 「“남·북·일본 갈린 세 형제…저세상에선 만나길”」, 『한겨레』online, 한겨레신문사, 작성일: 2017년 12월 07일.

최이락, 「「강재일 역사학자 강재언씨 별세」」, 『연합뉴스』online, 연합뉴스, 작성일: 2017년 11월 21일.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박사」」, 『동아일보』online, 동아일보, 작성일: 2017년 11월 23일.






주석


  1. 최이락, 「「강재일 역사학자 강재언씨 별세」」, 『연합뉴스』online, 연합뉴스, 작성일: 2017년 11월 21일.
  2.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박사」」, 『동아일보』online, 동아일보, 작성일: 2017년 11월 23일.
  3.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박사」」, 『동아일보』online, 동아일보, 작성일: 2017년 11월 23일.
  4. 김효순, 「“남·북·일본 갈린 세 형제…저세상에선 만나길”」, 『한겨레』online, 한겨레신문사, 작성일: 2017년 12월 07일.
  5.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1.
  6.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1.
  7.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3.
  8. 김웅기,「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3.
  9. 김웅기,「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3.
  10.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3.
  11.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1.
  12.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2.
  13.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2.
  14.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12.
  15. 강영진, 「(5)'재일 코리언'으로 살아온 세월, 연구.탐구의 치열함 지켜」, 『제주일보』online, 제주일보, 작성일: 2015년 04월 03일.
  16. 강영진, 「(5)'재일 코리언'으로 살아온 세월, 연구.탐구의 치열함 지켜」, 『제주일보』online, 제주일보, 작성일: 2015년 04월 03일.
  17. 강영진, 「(5)'재일 코리언'으로 살아온 세월, 연구.탐구의 치열함 지켜」, 『제주일보』online, 제주일보, 작성일: 2015년 04월 03일.
  18. 강영진, 「(5)'재일 코리언'으로 살아온 세월, 연구.탐구의 치열함 지켜」, 『제주일보』online, 제주일보, 작성일: 2015년 04월 03일.
  19.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43.
  20.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45.
  21.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45.
  22.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45.
  23. 김웅기 「인물사적 관점에서 바라본 재일 역사학자 강재언」, 『韓日民族問題硏究 』제36집, 한일민족문제학회, 2019, 246.
  24.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28.
  25.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28.
  26.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28.
  27.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28.
  28.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28.
  29.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31.
  30.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31.
  31. 홍순권, 「고 강재언 선생의 한국근대사 연구를 되돌아보며」, 『역사연구』제33호, 역사학연구소, 2017, 231.
  32.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online, 예스24.
  33.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online, 예스24.
  34.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online,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