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탑파의 연구(3)"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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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번= {{TagSpage|58-2}}第三期的 作品들이란 樣式的으론 第二期的 作品들과 大同小異한 것이다. 即 基壇 中, 下臺中石面의 撑柱가 一般的으로 五個에서 四個로 矮縮되었고 屋身과 屋石이 모두 一石으로 凝精되었고 一般히 規模가 矮少된 것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實例를 들면 如左하다. <blockquote no="XX">①慶州郡陽北面 獐項里逸名寺址 五重塔雙基(西塔再建)<br/>②同 內東面 佛國寺 釋迦三重塔<br/>③同 長壽寺址 三重塔<br/>④同 皇福寺址 三重塔<br/>{{TagPage|59}}⑤同 南山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倒破)<br/>⑥同 千軍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再建)<br/>⑦同 南山里玉井谷寺址 三重塔(倒破)<br/>⑧同 慶州面 三重塔雙基(倒破)<br/>⑨同  外東面 遠願寺址 三重塔雙基(再建)<br/>⑩同 西面 明莊里逸名寺址 三重塔<br/>⑪昌寧郡昌寧面 述亭里東部逸名寺址 三重塔<br/>⑫金泉郡南面 廢葛項寺 三重塔雙基(今在京城)<br/></blockquote>以上, 諸塔名 外面의 彫飾有無, 五重三重의 差別, 氣勢의 强弱의 差度 等을 別 問題로 하면 塔婆로서의 樣式은 全혀 한 개의 類型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諸塔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一曰 그 類型들이 地方的으로 慶尙道一帶에만 限해있고 特히 또 慶州가 中心되어 있다는 곳에 커다란 한 意義를 느낀다. 即 第二期의 塔婆가 亦然하야 四塔 中 三塔이 慶州를 中心하여 있었고 一塔만이 中原京 忠州에 있었다. 第一期의 塔은 二基가 外城 即 百濟 國境 內에 있었고 一基만 이 新羅 國領 內에 있으나 都心을 떠난 義城郡에 가 있었다. 義城에 어찌하야 高古한 最初의 한 石塔樣式이 이와 같이 發祥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外部에서 發生된 한 樣式이 第二期로 들면서{{TagPage|60}} 新羅統一 後 新羅의 都心地帶로 集中되어 第三期의 樣式까지 저와 같이 京都中心으로 發展된 것임을 볼 때 當代의 文化가 또한 이 第二期 第三期를 中心하야 慶州를 中心으로 익(熟)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三期 作品에 이르러 벌써 石塔이 建築으로서의 勃勃한 建築的 精神보다도 修飾인 것으로의 急據한 變遷을 본다. 即 {{TagRef|10}}獐項里逸名寺址<ref>원문주석10</ref>의 五重塔에는 初層屋身 各面에 門扉模樣이 模刻되었을 뿐더러 隅柱와 門扇間에 遒勁한 仁王兩像이 蓮花座 위에 活躍的 態勢로써 浮刻되여있다. 初層屋身에 이와같이 四方門戶를 만드는 것은 본디 木造 塔의 意思로서 그것은 內部室內에 通하는 意思였다. 저 芬皇寺의 塔에서도 그 頹化된 形式이나마 四方龕室의 經營이 있음을 보았고 第一期 石塔의 彌勒塔에서도 그 意思를 보았고 盈尼山下塔, 安東法林寺址, 法興寺址, 一直面逸名寺址 等의 模塼塔·博塔 等에서도 그 一面的인 龕室經營을 보았고 第二期에 들어서 高仙塔 같은 데서도 四方의 門戶 樣式의 模刻이 있음을 본 바이다. 高仙塔에서의 門戶樣式의 模刻은 特히 優秀한 것이어서 門柱, 門楣, 門限, 閣峙의 表現은 勿論이요 門扇의 獸吻鋪首의 模刻도 塊麗하고 門扇에는 浮錫金釗을 박았던 孔穴까지 남아있다. 또 門戶兩側에 仁王像 凸刻한 例도 일찍이 芬皇塔에서 그 例를 본 바이다. 다만 後代까지도 仁王像을 表現함에 있어서는 모두 自然岩石 위에 叱咤怒呼의 形像을 하고 있는 表現을 取하고 있는데 唯獨 獐項里塔에서는 仁王像을 蓮花座 위에 올려 앉혀있다. 이것은 特殊한 例이니 智道論에는 <cite no="XX">「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ruby|梵天王坐蓮|○○○○○}} {{TagPage|61}}{{ruby|華上是故|●●●●}}{{ruby|諸佛隨世俗故|●●●●●●}} {{ruby|於寶華上結跏趺坐|●●●●●●●●}}」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이 <cite no="XX">「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ruby|若是佛|○○○}} {{ruby|謂當作八葉芬陀利|○○○○○○○}} {{ruby|白蓮華也|○○○○}} {{ruby|其華令開敷四布|○○○○○○}} {{ruby|若是菩薩|○○○○}} {{ruby|亦作此華坐而|○○○○○}} {{ruby|令花半敷|○○○○}} {{ruby|勿令極開也|○○○○○}} {{ruby|若緣覺聲聞|○○○○○}} {{ruby|當坐於花葉之上|○○○○○○○}} {{ruby|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ruby|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ruby|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cite>이라 있어 仁王도 번대는 菩薩 摩訶薩이니까 蓮華座에 올림이 當然할 것 같으되 그것은 本身의 菩薩像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變身하야 佛法守護의 一神將(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形像으로 表現되었을 적엔 一般이 盤石 巨岩에 올리는 것이 通式이다. 即 獐項里塔에서의 例는 한 개의 特殊한 實例인데 何如間에 一般이 第二期 作品에선 볼 수 없는 三王彫刻이 初層塔身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項塔과 함끠 第三期 作品 中에 類聚되어있는 遠願寺址 三重塔 雙基에는 初層屋身 四面에 長矩形方廓을 만들고서 그 안에 四天王(東方持國天 南方增長天 南方廣目天 北方多開天)을 浮刻하고 基壇 上層中臺石面石部에는 蓮花座에 十二支像을 浮刻하였다. 四天王은 帝釋天의 外將이며 十二支像은 藥師佛의 十二神將과 配合되는 것들이다. 四天王은 純支那式으로 말하면 四方神이요 十二支는 十二時神인 同時에 方位神인 것이다. 即 支那的 思想으로서만 解釋한다면 그것은 空間과 時間과를 通해서의 庇護觀念의 現示라 할 수 있다. 그러나 佛說에 依한 四天王은 六欲天(一曰四王天, 二曰忉利天, 三曰夜摩天, 四曰 兜率歌, 五曰 樂變化天, 六曰 他化自在天)中 第一天인 四天王에{{TagPage|62}}  屬하는 天王들이요 帝釋天은 第二天인 忉利天(一曰 三十三天)을 主宰하는 天帝로서 忉利天은 須彌山頂에 있는 世界이요 四王天은 須彌山中復에 있는 世界로서 다같이 帝釋이 領導하고 있는 地居天의 世界이다. 이 以上 第三天으로부터 第六天까지는 空居天으로서 地居天과 區別되는 世界이니 問題外이고 三一三天에 君臨한 釋迦能의 天帝釋은 저 四面의 四天王을 領牟하고 있는데 이 四天王은 다시 또 各其八大天王을 領率하고있다. 同時에 四天王은 八部鬼衆을 領率하고 있는데 一般이 四天王의 領導아래 三寶擁護의 守護將令으로 利用되기는 이 八部鬼衆들이라. 다음에 말할 第四期作品들 以下 時代的으론 新羅下代에서부터 造形的으론 이 八部衆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八部衆의 表現意思만은 第三期作品인 佛國寺 釋迦三重塔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하여도 可하다 即, 塔婆 그自身엔 아무런 表現이 없지만 塔婆 外圍를 돌려 八個의 蓮花座가있는 方區結界가 그것이다. 八個蓮花座에 關하여는 何等 信憑할 史料가 없으나 佛國寺 歷代記 (或云佛國寺古今創記)에 보면 東多寶塔 西釋迦塔 一名無影塔이란 다음에 八方金剛座란 것이 있어 이 八方金剛碎란것이 或歟이 八方蓮花座를 두고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金剛座라는 것은 智度論에<cite no="XX">「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cite>云云이라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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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1-1원문1번= {{TagSpage|58-2}}第三期的 作品들이란 樣式的으론 第二期的 作品들과 大同小異한 것이다. 即 基壇 中, 下臺中石面의 撑柱가 一般的으로 五個에서 四個로 矮縮되었고 屋身과 屋石이 모두 一石으로 凝精되었고 一般히 規模가 矮少된 것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實例를 들면 如左하다. <blockquote no="XX">①慶州郡陽北面 獐項里逸名寺址 五重塔雙基(西塔再建)<br/>②同 內東面 佛國寺 釋迦三重塔<br/>③同 長壽寺址 三重塔<br/>④同 皇福寺址 三重塔<br/>{{TagPage|59}}⑤同 南山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倒破)<br/>⑥同 千軍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再建)<br/>⑦同 南山里玉井谷寺址 三重塔(倒破)<br/>⑧同 慶州面 三重塔雙基(倒破)<br/>⑨同  外東面 遠願寺址 三重塔雙基(再建)<br/>⑩同 西面 明莊里逸名寺址 三重塔<br/>⑪昌寧郡昌寧面 述亭里東部逸名寺址 三重塔<br/>⑫金泉郡南面 廢葛項寺 三重塔雙基(今在京城)<br/></blockquote>以上, 諸塔名 外面의 彫飾有無, 五重三重의 差別, 氣勢의 强弱의 差度 等을 別 問題로 하면 塔婆로서의 樣式은 全혀 한 개의 類型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諸塔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一曰 그 類型들이 地方的으로 慶尙道一帶에만 限해있고 特히 또 慶州가 中心되어 있다는 곳에 커다란 한 意義를 느낀다. 即 第二期의 塔婆가 亦然하야 四塔 中 三塔이 慶州를 中心하여 있었고 一塔만이 中原京 忠州에 있었다. 第一期의 塔은 二基가 外城 即 百濟 國境 內에 있었고 一基만 이 新羅 國領 內에 있으나 都心을 떠난 義城郡에 가 있었다. 義城에 어찌하야 高古한 最初의 한 石塔樣式이 이와 같이 發祥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外部에서 發生된 한 樣式이 第二期로 들면서{{TagPage|60}} 新羅統一 後 新羅의 都心地帶로 集中되어 第三期의 樣式까지 저와 같이 京都中心으로 發展된 것임을 볼 때 當代의 文化가 또한 이 第二期 第三期를 中心하야 慶州를 中心으로 익(熟)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三期 作品에 이르러 벌써 石塔이 建築으로서의 勃勃한 建築的 精神보다도 修飾인 것으로의 急據한 變遷을 본다. 即 {{TagRef|10}}獐項里逸名寺址<ref>원문주석10</ref>의 五重塔에는 初層屋身 各面에 門扉模樣이 模刻되었을 뿐더러 隅柱와 門扇間에 遒勁한 仁王兩像이 蓮花座 위에 活躍的 態勢로써 浮刻되여있다. 初層屋身에 이와같이 四方門戶를 만드는 것은 본디 木造 塔의 意思로서 그것은 內部室內에 通하는 意思였다. 저 芬皇寺의 塔에서도 그 頹化된 形式이나마 四方龕室의 經營이 있음을 보았고 第一期 石塔의 彌勒塔에서도 그 意思를 보았고 盈尼山下塔, 安東法林寺址, 法興寺址, 一直面逸名寺址 等의 模塼塔·博塔 等에서도 그 一面的인 龕室經營을 보았고 第二期에 들어서 高仙塔 같은 데서도 四方의 門戶 樣式의 模刻이 있음을 본 바이다. 高仙塔에서의 門戶樣式의 模刻은 特히 優秀한 것이어서 門柱, 門楣, 門限, 閣峙의 表現은 勿論이요 門扇의 獸吻鋪首의 模刻도 塊麗하고 門扇에는 浮錫金釗을 박았던 孔穴까지 남아있다. 또 門戶兩側에 仁王像 凸刻한 例도 일찍이 芬皇塔에서 그 例를 본 바이다. 다만 後代까지도 仁王像을 表現함에 있어서는 모두 自然岩石 위에 叱咤怒呼의 形像을 하고 있는 表現을 取하고 있는데 唯獨 獐項里塔에서는 仁王像을 蓮花座 위에 올려 앉혀있다. 이것은 特殊한 例이니 智道論에는 <cite no="XX">「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ruby|梵天王坐蓮|○○○○○}} {{TagPage|61}}{{ruby|華上是故|●●●●}}{{ruby|諸佛隨世俗故|●●●●●●}} {{ruby|於寶華上結跏趺坐|●●●●●●●●}}」</cite>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이 <cite no="XX">「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ruby|若是佛|○○○}} {{ruby|謂當作八葉芬陀利|○○○○○○○}} {{ruby|白蓮華也|○○○○}} {{ruby|其華令開敷四布|○○○○○○}} {{ruby|若是菩薩|○○○○}} {{ruby|亦作此華坐而|○○○○○}} {{ruby|令花半敷|○○○○}} {{ruby|勿令極開也|○○○○○}} {{ruby|若緣覺聲聞|○○○○○}} {{ruby|當坐於花葉之上|○○○○○○○}} {{ruby|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ruby|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ruby|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cite>이라 있어 仁王도 번대는 菩薩 摩訶薩이니까 蓮華座에 올림이 當然할 것 같으되 그것은 本身의 菩薩像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變身하야 佛法守護의 一神將(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形像으로 表現되었을 적엔 一般이 盤石 巨岩에 올리는 것이 通式이다. 即 獐項里塔에서의 例는 한 개의 特殊한 實例인데 何如間에 一般이 第二期 作品에선 볼 수 없는 三王彫刻이 初層塔身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項塔과 함끠 第三期 作品 中에 類聚되어있는 遠願寺址 三重塔 雙基에는 初層屋身 四面에 長矩形方廓을 만들고서 그 안에 四天王(東方持國天 南方增長天 南方廣目天 北方多開天)을 浮刻하고 基壇 上層中臺石面石部에는 蓮花座에 十二支像을 浮刻하였다. 四天王은 帝釋天의 外將이며 十二支像은 藥師佛의 十二神將과 配合되는 것들이다. 四天王은 純支那式으로 말하면 四方神이요 十二支는 十二時神인 同時에 方位神인 것이다. 即 支那的 思想으로서만 解釋한다면 그것은 空間과 時間과를 通해서의 庇護觀念의 現示라 할 수 있다. 그러나 佛說에 依한 四天王은 六欲天(一曰四王天, 二曰忉利天, 三曰夜摩天, 四曰 兜率歌, 五曰 樂變化天, 六曰 他化自在天)中 第一天인 四天王에{{TagPage|62}}  屬하는 天王들이요 帝釋天은 第二天인 忉利天(一曰 三十三天)을 主宰하는 天帝로서 忉利天은 須彌山頂에 있는 世界이요 四王天은 須彌山中復에 있는 世界로서 다같이 帝釋이 領導하고 있는 地居天의 世界이다. 이 以上 第三天으로부터 第六天까지는 空居天으로서 地居天과 區別되는 世界이니 問題外이고 三一三天에 君臨한 釋迦能의 天帝釋은 저 四面의 四天王을 領牟하고 있는데 이 四天王은 다시 또 各其八大天王을 領率하고있다. 同時에 四天王은 八部鬼衆을 領率하고 있는데 一般이 四天王의 領導아래 三寶擁護의 守護將令으로 利用되기는 이 八部鬼衆들이라. 다음에 말할 第四期作品들 以下 時代的으론 新羅下代에서부터 造形的으론 이 八部衆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八部衆의 表現意思만은 第三期作品인 佛國寺 釋迦三重塔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하여도 可하다 即, 塔婆 그自身엔 아무런 表現이 없지만 塔婆 外圍를 돌려 八個의 蓮花座가있는 方區結界가 그것이다. 八個蓮花座에 關하여는 何等 信憑할 史料가 없으나 佛國寺 歷代記 (或云佛國寺古今創記)에 보면 東多寶塔 西釋迦塔 一名無影塔이란 다음에 八方金剛座란 것이 있어 이 八方金剛碎란것이 或歟이 八方蓮花座를 두고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金剛座라는 것은 智度論에<cite no="XX">「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cite>云云이라 있어  
 
菩薩坐處이니만치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蓮華八座를 곧 八部衆의 坐處로는 是認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特別한 八方金剛座의 經營은 {{TagPage|63}}곧 塔婆에 八部衆을 表現하는 意思의 先軀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即,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이 八座는 實際에 있어서도 八部菩薩 造成하야 奉安하였던 것인지 또는 座石만 만들고 想意的으로 그곳에 八部菩薩이 供養而坐한 意思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塔婆 그것 以外에 守護의 菩薩 乃至 天王神將들을 이와 같이 添付시키려는 意思가 一般的으로 具體化했든 事實만은 알 수 있다. 저 安東 法興寺址 七重博塔의 基壇面에도 部將坐像이 浮刻되어 있는 例를 말한 적이 있다. 그 世代는 勿論 이 中代에 屬하는 것이나 第二期作品들과 같이 前期에 歸屬시킬 것인지 (그 便의 可能性이 많다고筆者는생각하지만) 또는 後期 即 이 第三期와 等代에 둘 것인지 確實치 못하지만 何如間 그곳에도 이미 神將을 塔婆基壇에 表現시켰다. 다만 그것은 頹壞가 甚하야 본래 몇 개의 神將을 表現한 것인지(現今은 매우 散亂되었음) 따라서 神將의 性質도 不分明하지만 何如間 그러한 것을 表現하려는 意思가 이 中代後期를 中心하여 그 前後에 現著해진 特色만은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 八部衆에 대하여는 다시 後에 말하기로 하고 前述한 四天王은 勿論 支那式四方神에 通하는 意思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佛敎的인 것이었을 것은 形像 그自身이 벌써 보이는 바이지만 十二支像이 十二獸神으로 表現돼있는 點엔 佛敎的인 것보다도 支那的인 時神觀念에 더 큰 影響이 있는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當代에 있어서는 이 獸神觀念은 본디 支那的인 純粹한 觀念에서보다도 一般이 佛敎的인 것과 混與되었던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이는 한갓 當代로부터 現著히 濃厚해진 東洋의 風水觀念이란 것이 傳說이 傳하는 바와 같이 道詵禪師(統一後 161年生享年72){{TagPage|64}}로 말미암아 一行禪師(開元15年 入滅統一後 61年也)의 法이 流轉된 것이라 함에서 뿐 아니라 十二支肖像의 表現이 新羅에서 造型的으로 流行됨이 한갓 墳柒關係에서 뿐 아니라 佛刹關係 엣것에도 流行되기 시작함이 곧 佛家的 解釋과의 混與를 생각케 하는 바라 하겠다. 十二支肖像이 墳墓關係에 表現되기는 新羅의 傳稱聖德王陵(傳稱某某王陵乃至墓로써 指稱되는 것은 實際 그들의 陵墓라고 곧 認定할 根〿들이 充分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考證이 必要한 것이요(주석3) 지금은 다만 一時的假稱號로서 擧用할 따름이다)의 屛石外護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寺址의 例론 皇福寺址, 內東面排盤里逸名寺址, 外東面末方里洞鵠寺址 及求禮 華嚴寺五重塔에서 發見된 例가 있고 佛燈에는 慶州邑內 崔泳鎭 氏 私邸 內에 있는 石燈 같은 데도 있어 一般이 佛敎關係에도 盛行되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에서 筆者는 新羅陵墓에서의 十二支像은 한갓 支那的인 風水觀念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요 거리에는 藥師佛에 대한 두터운 信仰과의 混與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주석2) 景德王十四年乙未(統一後89年), 芬皇寺의 三十萬六千七百斤 藥師像의 鑄造란 가장 有名한 事實이지만 現在 新羅佛로서 優秀한 作品에 이 藥師像이 많음을 볼 때 藥師의 信仰이 新羅에, 特히 이 中代에 얼마나 盛했든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因緣한 十二支像의 表現欲의 發達이란 것에 대하여는 格別한 關心이 가지는 것이다. 傳聖德王陵의 十二支像이 新羅 陵墓에 나타난 十二支像 中엔 가장 最初의 것에 屬하는 것인데 그것이 傳稱대로 事實 聖德王陵이라한 데도 實際造成은 聖德王 薨御 後에 있었을 것이니까 이렇게 본다면 十二支像의 表現은 저 塔婆에서의 一例와 같이 一般이 中代後期의 한 特色이다. 十二支像이 있는 陵墓中 傳稱 眞德王陵, 文武王陵(掛陵) 金庾信墓라는 것들이 造{{TagPage|65-1}}型樣式 上 모두 各其 當代의 것이 될 수 없고 中代 以後에 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學者間의 定見(주석3)이다.
 
菩薩坐處이니만치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蓮華八座를 곧 八部衆의 坐處로는 是認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特別한 八方金剛座의 經營은 {{TagPage|63}}곧 塔婆에 八部衆을 表現하는 意思의 先軀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即,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이 八座는 實際에 있어서도 八部菩薩 造成하야 奉安하였던 것인지 또는 座石만 만들고 想意的으로 그곳에 八部菩薩이 供養而坐한 意思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塔婆 그것 以外에 守護의 菩薩 乃至 天王神將들을 이와 같이 添付시키려는 意思가 一般的으로 具體化했든 事實만은 알 수 있다. 저 安東 法興寺址 七重博塔의 基壇面에도 部將坐像이 浮刻되어 있는 例를 말한 적이 있다. 그 世代는 勿論 이 中代에 屬하는 것이나 第二期作品들과 같이 前期에 歸屬시킬 것인지 (그 便의 可能性이 많다고筆者는생각하지만) 또는 後期 即 이 第三期와 等代에 둘 것인지 確實치 못하지만 何如間 그곳에도 이미 神將을 塔婆基壇에 表現시켰다. 다만 그것은 頹壞가 甚하야 본래 몇 개의 神將을 表現한 것인지(現今은 매우 散亂되었음) 따라서 神將의 性質도 不分明하지만 何如間 그러한 것을 表現하려는 意思가 이 中代後期를 中心하여 그 前後에 現著해진 特色만은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 八部衆에 대하여는 다시 後에 말하기로 하고 前述한 四天王은 勿論 支那式四方神에 通하는 意思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佛敎的인 것이었을 것은 形像 그自身이 벌써 보이는 바이지만 十二支像이 十二獸神으로 表現돼있는 點엔 佛敎的인 것보다도 支那的인 時神觀念에 더 큰 影響이 있는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當代에 있어서는 이 獸神觀念은 본디 支那的인 純粹한 觀念에서보다도 一般이 佛敎的인 것과 混與되었던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이는 한갓 當代로부터 現著히 濃厚해진 東洋의 風水觀念이란 것이 傳說이 傳하는 바와 같이 道詵禪師(統一後 161年生享年72){{TagPage|64}}로 말미암아 一行禪師(開元15年 入滅統一後 61年也)의 法이 流轉된 것이라 함에서 뿐 아니라 十二支肖像의 表現이 新羅에서 造型的으로 流行됨이 한갓 墳柒關係에서 뿐 아니라 佛刹關係 엣것에도 流行되기 시작함이 곧 佛家的 解釋과의 混與를 생각케 하는 바라 하겠다. 十二支肖像이 墳墓關係에 表現되기는 新羅의 傳稱聖德王陵(傳稱某某王陵乃至墓로써 指稱되는 것은 實際 그들의 陵墓라고 곧 認定할 根〿들이 充分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考證이 必要한 것이요(주석3) 지금은 다만 一時的假稱號로서 擧用할 따름이다)의 屛石外護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寺址의 例론 皇福寺址, 內東面排盤里逸名寺址, 外東面末方里洞鵠寺址 及求禮 華嚴寺五重塔에서 發見된 例가 있고 佛燈에는 慶州邑內 崔泳鎭 氏 私邸 內에 있는 石燈 같은 데도 있어 一般이 佛敎關係에도 盛行되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에서 筆者는 新羅陵墓에서의 十二支像은 한갓 支那的인 風水觀念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요 거리에는 藥師佛에 대한 두터운 信仰과의 混與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주석2) 景德王十四年乙未(統一後89年), 芬皇寺의 三十萬六千七百斤 藥師像의 鑄造란 가장 有名한 事實이지만 現在 新羅佛로서 優秀한 作品에 이 藥師像이 많음을 볼 때 藥師의 信仰이 新羅에, 特히 이 中代에 얼마나 盛했든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因緣한 十二支像의 表現欲의 發達이란 것에 대하여는 格別한 關心이 가지는 것이다. 傳聖德王陵의 十二支像이 新羅 陵墓에 나타난 十二支像 中엔 가장 最初의 것에 屬하는 것인데 그것이 傳稱대로 事實 聖德王陵이라한 데도 實際造成은 聖德王 薨御 後에 있었을 것이니까 이렇게 본다면 十二支像의 表現은 저 塔婆에서의 一例와 같이 一般이 中代後期의 한 特色이다. 十二支像이 있는 陵墓中 傳稱 眞德王陵, 文武王陵(掛陵) 金庾信墓라는 것들이 造{{TagPage|65-1}}型樣式 上 모두 各其 當代의 것이 될 수 없고 中代 以後에 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學者間의 定見(주석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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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6일 (화) 19:00 기준 최신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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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탑파의 연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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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鮮塔婆의 硏究(三)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14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고유섭 역자 @ 집필일자 @ 게재연월 1941년6월
시작쪽 051쪽 종료쪽 095쪽 전체쪽 045쪽 연재여부 연재 범주 논문 분야 고고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2. 典型的樣式成立以後의一般石塔樣式의變遷相


우리는 석조 탑파의 제1절 제1항에서 익산군 용화산 하 미륵사지에 있는 다층석탑 조선 석탑파로서의 최초의 시원형식을 이룬 유일한 유구로서 설명하였고, 같은 곳 왕궁면 왕궁리 속칭 왕궁평에 있는 오중석탑, 저 미륵탑의 모방적 재현 형식의 유구로서 건축적 구조특질보다도 조각적 응집 결태로서의 과도 경향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설명하였으며, 부여읍 추정 정림사지에 있는 오중탑(속칭 평제탑)은 미륵탑의 건축적 정신을 그대로 계승하여 보다 더 완성태로의 발전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직접 계련 관계는 여하간에 양식적으로는 다른 시원적인 일례가 의성군 영니산 하 일명사지에 오중탑 일기가 있어 이것들이 경주 감은사지의 삼중탑 양기, 고선사지의 삼중탑, 나원리 일명사지의 오중탑, 충주 가금면 탑정리 일명사지의 칠중탑(속칭 중앙탑) 등에서 종합적으로 취합되어 그곳에 조선석탑으로서의 최초의 전형적 양식의 성립이 있었다는 것을 제2항에서 설명하였고, 그리고 제3항에서 이 양대부류의 세대관을 말하여 미륵탑·왕궁평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통일 이전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을 통일 이후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 후 필자의 반성과 추구는 이상 논고 중 한 개의 모순을 발견케 되었으니 즉 그것은 왕궁평탑에 대한 의견이다. 무엇이냐 하면 왕궁평탑은 외형으로서는 제1부류 즉 시원적 양식부류에 유사시킬 수 있는 양식 감정을 충분히 가졌고 또 일부 옥개의 구조법 같은 데에서 정림탑과의 유사점이 있지만, 옥리층단형 「밭임」의 전반적으로 전자형 사분파의 평면을 이루는 의사는 이 제1부류에 속하는 기타 석탑들과는 공통성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제2부류의 전형적 탑파류들과 공통되는 것, 또 초층옥신 판석으로 구성하면서 우주 및 중간주의 형식을 편의적인 부조법에 의하였을 뿐더러 상하의 태세 변화, 즉 '엔터시스'의 정신이 없는 것─이러한 짤막한 양식적으로도 확실히 제2부류 하에 속할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환언하면 이러한 이유에서 이 왕궁평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과 같이 양식적으로 제1부류 즉 시원부류에 유사시킬 수 없는 동시에 시대적으로도 그러한 유류들과 함께 신라 통일 이전, 즉 삼국기에 둘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신라 통일 후 즉 저 전형적 탑파들이라 지칭한 감은탑·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들과 함께 유사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문제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전형적 탑파들은 이미 전절에서도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초층옥신들의 구조수법에 있어 사개우주가 이미 「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별개의 장석으로써 독립되게 구성되고, 그리고 벽면의 면석만은 또다시 다른 석편으로써 구성하고 있음에서(단 나원리탑만은 각 면 일매판석으로써 성립시키고 일우일주를 모각하게 됨) 그 사실적 진실미를 갖고 있는 터인데, 왕궁평탑에는 이러한 진실미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초층옥신벽면에 한 간주를 나타낸 것도 혹시 저 정림탑·중앙탑 등의 초층옥신에서 볼 수 있는 이간구분 재현을 위해 한 것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만일 그러한 의사에서의 표현 양식이었다면 그것은 너무나 우졸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영니산 하오중탑이 이층 이상의 곡신부터 이간벽을 나타낸 무의미성보다도 더 심한 무의미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미성의 졸렬한 실례는 성주읍동 의공사(일운 동방사)지에도 일기(현존 팔중)가 있지만, 시대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여하간, 이상의 이유에서 왕궁평탑을 양식사적 견지에서는 제1기의 시원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고, 제2기의 전형적 양식 부류에도 유사시킬 수 없는 것이다. 차라리 초층옥신만은 후대의 수보였다면 나머지 상층 부분은 제2기의 유형 속에 편입시켜도 좋을 가능성이 많으나, 그렇지 않고 이 초층옥신이 원상대로라 하면 이 탑은 여전히 구제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2기의 부류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탑파 자신의 이러한 양식적 문제를 떠나서 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한 개의 참고자료로서의 와당 같은 것을 부차적으로 상고한다면, 그 와당문양은 이미 관계야 박사도 지칭한 바와 같이 신라 통일 초의 것이라는 것과 공통되는 특질을 가졌고, 또 나의 소견으로는 충주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되었다는 와당과도 공통되는 시대성을 보이는 점이 있음에서, 이 와당을 통하여 볼 때 저 중앙탑이라는 것과 이 왕궁평탑이라는 것과가 위치적으로 공통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즉 이러한 점을 통해서나 왕궁평탑이 겨우 제2기의 탑파부류들에 끼워질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길 뿐, 양식적으로는 위태위태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의 제1기 석탑은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삼기에 한정되고 만다. 즉 그 삼기만이 통일 이전의 작품인 것이다. 미륵탑은 손상이 심한 것이지만 정림탑, 영니산하탑은 당풍이 아직 보이지 않은 즉 육조 기풍이 명백히 보이는 탑이라 하겠다. 적어도 수풍까지는 충분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쪽수▶P51우리는 石造 塔婆의 第一節 第一項에서 益山郡 龍華山 下 彌勒寺址에 있는 多層石塔 朝鮮石塔婆로서의 最初의 始源形式을 이룬 唯一한 遺構로써 說明하였고 同地 王宮面 王宮里 俗稱 王宮坪에 있는 五重石塔 저 彌勒塔의 模倣的 再現 形式의 遺構로서 建築的 構造特質보다도 彫刻的 凝集 結態로서의 過渡 傾向을 보이고 있는 것이라 說明하였으며, 扶餘邑 推定 定林寺址에 있는 五重塔 (俗稱 平濟塔)은 彌勒塔의 建築的 精神을 그대로 繼承하야 보다 더 完成態로의 發展을 보인 것이라 하였고 다시 이들과의 直接 係聯關係는 如何間에 樣式的으론 다른 始源的인 一例가 義城郡 盈尼山 下 逸名寺址에 五重塔 一基가 있어 이것들이 慶州 感恩寺址의 三重塔 兩基, 高仙寺址의 三重塔, 羅原里 逸名寺址의 五重塔, 忠州 可金面塔亭▶P52里 逸名寺址의 七重塔(俗稱 中央塔) 等에서 綜合 聚成되야 그곳에 朝鮮石塔으로서의 最初의 典型的 樣式의 成立이 있었다는 것을 第二項에서 說明하였고 그리고 第三項에서 이 兩大部類의 世代觀을 말하야 彌勒塔·王宮坪塔·定林塔·盈尼山下塔 統一以前에 둘 수 있다 말하였고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을 統一 以後에 둘 수 있는 것이라 말하였다. 그런데 그後─ 筆者의 反省과 追究는 以上 論考 中 한 개의 矛盾을 發見케 되었으니 即 그것은 王宮坪塔에 대한 意見이다. 무엇이냐 하면 王宮坪塔은 外樣으로선 第一部類 即 始源的 樣式部類에 類聚될 수 있는 樣式 感情을 充分히 가졌고 또 一部 屋蓋의 構造法같은데 定林塔과의 類似點이 있지만 屋裏層段形「밭임」의 全般的으로 田字形四分派의 平面을 이루는 意思는 이 第一部類에 屬하는 諸他石塔에는 共通性이 없는 것─오히려 그것은 第二部類의 典型的 塔婆類들에 共通되는 것, 또 初層屋身 板石으로써 構成하면서 隅柱及 中間柱의 形式을 便宜的인 浮彫法에 依하였을 뿐더러 上下의 太細의 變化, 即「엔터시스」의 精神이 없는 것─이러한 짧은 樣式的으로도 確實히 第二部類의 下에 屬할 것임을 보이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換言하면 이러한 理由에서 이 王宮坪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等과 같이 樣式的으로 第一部類 即 始源部類에 類聚시킬 수 없는 同時에 時代的으로도 그러한 類들과 함께 新羅統一 以前, 即 三國期에 둘 수 없는 것이다.그러면 新羅統一後 即 저 典型的 塔婆들이라 指稱한 感恩塔·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들과 함께 類聚시킬 수 있는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주 問題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러한 典型的 塔婆들은 이▶P53미 前節에서도 說明한 바와 같이 그 初層屋身들의 構造手法에 있어 四個隅柱가 이미「엔터시스」는 잃었다 하더라도 別個의 長石으로써 獨立되히 構成되고 그리고 壁面의 面石만은 또 다시 다른 石片으토써 構成하고 있음에서(但羅源里塔만은各面一枚板石으로써 成立시키고 一隅一柱를 模刻하게됨) 그 寫實的 眞實味를 갖고 있는 터인데, 王宮坪에는 이러한 眞實珠가 이미 사라진 것이다. 또 저 初層屋身壁面에 한 間柱를 나타낸 것도 或欺 저 定林塔·中央塔 等의 初層屋身에서 볼 수 있는 二間區分 再現키 爲한 것이였었는지 알 수 없지만 萬一 그러한 意思에서의 表現 樣式이였다면 그것은 너무나 愚拙한 것이었다 아니할 수 없다. 그것은 盈尼山 下五重塔이 二層 以上의 屈身부터 二間壁을 나타낸 無意味性보다도 더 甚한 無意味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無意味性의 拙劣한 實例는 원문주1▶星州邑東 醫公寺(一云 東方寺)址에도 一基(現存 八重)가[1] 있지만 時代는 매우 동떨어지는 것 같다. 何如間, 以上 理由에서 王宮坪塔을 樣式史的 見地에선 第一期의 始源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킬 수 없고 第二期의 典型的 樣式 部類에도 類聚시키기 困難한 것이다. 차라리 初層屋身만은 後代의 修補였다면 나머지 上層 部分은 第二期의 類型 속에 編시켜도 좋을 可能性이 많은데 그렇지 않고 이 初層屋身이 原狀대로라 하면 이 塔은 依然히 救할 수 없는 것이다. 即 第二期의 部類에도 넣을 수 없는 것이다. 다못 塔婆 自身의 이러한 樣式的 問題를 떠나서 그 附近에서 發見되었다는 한 개의 參考資料로서의 瓦當같은 것을 副次的으로 商量한다면 그 瓦當紋儀는 이미 關野貞 博士도 指稱한 바와 같이 新羅統一初의 것이라는 것과 共通되는 特質을 가졌고 또 나의 所見으로선 忠州 中央塔附近에서 ▶P54-1發見되었다는 瓦當과도 共通되는 時代性을 보이는 點이 있음에서 이 瓦當을 通하야 볼제는 저 中央塔이란 것과 이 王宮坪塔이란 것과가 位次的으로 共通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即 이러한 點을 하여서나 $宮坪堵이 겨우 第二期의 堵婆部類들에 끼워질수 있는 可能性이 생기게될뿐, 樣式的론 危殆危殆 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朝鮮의 第一期石塔은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三基에 限定되고 만다. 即 其三基만이 統一 以前의 作品인 것이다. 彌勒塔은 損傷이 甚한 것이지만 定林塔, 盈尼山下塔 唐風이 아직 보이지 않은 即 六朝 氣風이 明白히 보이는 塔이라 하겠다. 적어도 隨風까지는 充分히 있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전절 제2항에서는 전형적 탑파로서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을 열거하여 양식사적 순차를 정해 보았으나 확실한 단안을 내리지 못한 점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양식적으로 그 사탑이 거의 동일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 후의 상고에 의하면, 위은탑을 제1위, 고선탑을 제2위, 중앙탑을 제3위, 나원리탑을 제4위에 둘까 한다. 그 이유로선 우선 고선탑이 양식적으로 감은탑과 전혀 동일하나 옥개 기타에 다소 축소된 의사와 기단상 대복석에 다소 간소화된 수법과 초층탑신에 수식 의사의 가미 등이 있어 이러한 점에서 이것을 감은탑 다음에 두겠고, 중앙탑은 부분적으로는 고의(古意)를 다소 남긴 점도 있으나, 다시 또 부분적으로 신의(新意)에 속하는 것도 있어(예를 들어,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 점은 신의라 할 수 있다) 고의는 옛것 외 잔재로 볼 수 있어 하한이 미정되는 것이나, 신의는 그 상한에 제한이 있는 것이므로 이러한 점에서 고선탑 하위에 둘 수 있겠고, 나원리탑은 초층옥신에 벌써 사매판석으로써 결구하는 동시에 그 일우에 우주를 표현하려는 의사와 제3층 이상 옥개와 옥개 '밭임'이 일석으로 되는(제2층, 제1층 옥개는 옥개와 옥개밭임이 별석이다) 의사가 있어 이러한 점에서 최하위에 두는 바이다. 시대로 말하면 이 유형의 양식 상안을 감은탑에 두었으므로 이 유형은 모두 문무왕대 이후가 된다. 연대로 말하면 문무왕 8년(즉 신라 통일 원년 서기 668년) 이후이나 각 탑파의 개별적 건립 연수란 물론 말할 수 없는 것이며, 필자는 이 사탑을 조선 석탑의 전형적 탑파라 지칭하는 동시에 조선 석탑파사상 제2기에 속하는 것이요, 신라 역사상 중대 전기에 속하는 탑파라 간주한다. 중대 전기라는 것은 정치사적으로 말한다면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신라사의 세대 구분에 있어 《신라본기》가 말하는 진덕왕까지의 성골 시대를 고기라 하고, 무열왕 이후 경순왕까지 진골 시대 중 혜공왕대까지를 중대라 한 구분법에 의하여, 무열왕부터 혜공왕까지의 중대 일대, 필자는 또다시 성덕왕대까지 구분하여 무열왕대부터 성덕왕대까지를 중대 전기, 효성왕부터 혜공왕대까지를 중대 후기라 함에 의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전에 말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들의 통일 이전의 작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신라 중대 전기란 것과 시대적으로는 상호 겹치는 부분이 생긴다. 사실 말이지, 무열왕 일대는 물론이요 문무왕 8년까지도 통일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즉 삼국기의 잔존이 여전히 계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을 삼국 말기의 작품이라 할 때 신라사적으로는 여전히 그것이 신라 중대에도 걸쳐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미륵탑·정림탑은 백제 복멸 이전에 속할 것임으로 그 하한이 서기 661년 전까지 되나, 이것도 신라사적으로 보면 신라 중대에 걸칠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하물며 신라 영역 내에 있어 세년이 불확실한 채 저 미륵탑·정림탑 간에 개재할 수 있는 영니산하탑이 시대적으로 이 신라 중대에 속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이 점에서 미륵탑·정림탑은 별 문제로 하더라도(백제탑이니), 영니산하탑만 신라사적으로 보아 신라 중대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즉 무열왕 이후이다. 그러나 확실히 저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구별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들을 통일 이후 작이라면, 영니산하탑은 통일 이전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감은탑의 상한이 반드시 문무왕 8, 9년 즉 후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대, 실제 연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문무왕 8, 9년 이후까지도, 즉 감은탑의 상한이 내려가는 대로 그 하한이 따라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대적으로는 영니산하탑이 충분히 신라 중기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을 통일 이전에 간단히 두어버린 것은 감은탑 이하 제탑과 명료한 구획을 보이기 위한 한 양식사적 처분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이곳에 제1기(시원양식들) 작품이란 것이 신라사적 견지에 있어서는 실제 연대적으로는 중대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동시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감은탑 이하 제탑과 실제 연대로서 중복되는 것이 아니요, 여전히 구분되면서 중대라는데 포함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양식사적 세대라는 것과 역사에서 말하는 실제 세대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다소 의미가 다른 세대라는 것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시원적 양식이라는 제1기의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이 전형적 탑파라 할 제2기의 감은탑 이하의 제탑과 함께 세대적으로는 신라 중대 전기에 합쳐질 수도 있는 것인데, 이렇게 되면 매우 논술에 있어 혼란될 혐의가 있음으로, 편의적 도식적으로나마 미륵탑·정림탑·영니산하탑 등을 통일 이전의 제1기의 탑파라 하고, 감은탑 이하 고선탑·나원리탑·중앙탑 등을 제2기 탑파─세대적으로는 중대 전기의 탑파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이 이러한 세대 문제를 내거는 것은 탑파의 세대적 동향이란 것을 살피기 위한 것임이 주견의 하나인 까닭이다.
쪽수▶P54-2다시 前節 第二項에서는 典型的 塔婆로서 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을 列舉하야 樣式史的 順次를 定해 보았으나 確實한 斷案을 내리지 못한 點이 많았는데 그것은 그만치 樣式的으로 그 四塔이 거의 等一한 데서 그리하였지만 이제 그後의 商考에 依하면, 威恩塔을 第一位, 高仙塔을 第二位, 中央塔을 第三位, 羅原里塔을 第四位에 둘까한다. 그 理由로선 爲先 高仙塔이 樣式的으로 感恩塔과 全혀 同一하나 屋蓋 其他에 多少 疑縮된 意思와 基壇上 臺覆石에 多少 簡化된 手法과 初層塔身에 修飾 意思의 加味 等이 있어 이러한 點에서 이것을 感恩塔 다음에 두겠고 中央塔은 部分的으론 古意를 多少 남긴 點도 있으나 다시 또 部分的으로 新意에 屬하는 것도 있어(例如, 屋蓋와 屋蓋「밭임」과가 一石으로 되는 點은 新意라 할 수 있다) 古意는 옛것 외 殘滓로 볼 수 있어 下限이 未定되는 것이나 新意는 그 上限에 制限이 있는 것인즉 이러한 點에서 高仙▶P55塔 下位에 둘 수 있겠고 羅原里塔 初層屋身에 벌써 四枚板石으로써 結構하는 同時에 그 一隅에 隅柱를 表現하려는 意思와 第三層 以上 屋蓋와 屋蓋「밭임」이 一石으로 되는(第二, 第一 屋蓋는 屋蓋와 屋蓋밭임이 別石이다) 意思가 있어 이러한 點에서 最下位에 두는 바이다. 時代로 말하면 이 類型의 樣式 上眼을 感恩塔에 두었은즉 이 類型은 모두 文武王代 以後가 된다. 年代로 말하면 文武王 8年(即 新羅 통統一年 西紀 668年)以後이나 各其 塔婆의 個別的 建立 年數란 勿論 말할 수 없는 것이며 筆者는 이 四塔을 朝鮮 石塔의 典型的 塔婆라 指稱하는 同時에 朝鮮 石塔婆史上 第二期에 屬하는 것이요 新羅 歷史上 中代前期에 屬하는 塔婆라 看做한다. 中代前期라는 것은 政治史的으로 말한다면 武烈王代부러 聖德王代까지를 말함이 되나니 이것은 新羅史의 世代區分에 있어 新羅本紀가 말하는 眞德王까지의 聖骨 時代를 古期라 하고 武烈王 以後 敬順王까지 眞骨 時代 中 惠恭王代까지를 中代라한 區分法에 依하야 武烈王부터 惠恭王까지의 中代一代 筆者는 또다시 聖德王代까지 區分하야 武烈王代부터 聖德王代까지를 中代前期, 孝成王부터 惠恭王代까지를 中代後期 라 함에 依한 것이다. 이리 말하면 前에 말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들의 統一 以前의 作이란 것과 이곳에 말한 新羅 中代 前期란 것과 時代的으론 相覆되는 部分이 생긴다. 事實말이지 武烈王 一代는 勿論이요 文武王 8年까지도 統一은 完成된 것이 아니다. 即 三國期의 殘存이 依然히 繼續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을 三國末期의 作品이라할 때 新羅史的으론 依然히 그것이 新羅中代에도 걸쳐질 수가 있는 것이다. 다못 彌勒塔·定林塔은 百濟 覆滅 以前에 屬할 것임으로 그 下限▶P56이 西紀 661年 前까지 되나 이것도 新羅史的으로 보면 新羅 中代에 걸칠 可能性도 있는 것이다. 况新羅 領域 內에 있어 歲年이 不確實한채 저 彌勒塔·定林塔 間에 介在할 수 있는 盈尼山下塔이 時代的으로 이 新羅 中代에 屬하지말란 法이 없다. 이 點에서 彌勒塔·定林塔은 別 問題로 하더라도(百濟塔이니) 盈尼山下塔만 新羅史的으로 보아 新羅中代에 編入시킬 수도 있다. 即 武烈王 以後이다. 그러나 確實히 저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區別을 세우기 爲하야 그것들을 統一 以後 作이라면 盈尼山下塔 統一以前이라 할 수 있을 뿐이요, 感恩塔의 上限이 반드시 文武王 8, 9年 即後에 시작되었을 것이 아닐진댄 實際 年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文武王 8, 9年 以後까지도 即 感恩塔의 上限이 내려가는대로 그下限이 쫓아 내려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리하야 時代的으론 盈尼山下塔이 充分히 新羅中期에 깊이 들어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 統一以前에 簡便히 두어버린 것은 感恩塔 以下 〿 諸塔과 明瞭한 區劃을 보이기 爲한 한 樣式史的 處分手段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 第一期(始原樣式들) 作品이란 것이 新羅史的 見地에 있어선 實際 年代的으론 中代까지도 들어올 수 있는 것인 同時에 그렇다고 반드시 저 感恩塔 以下 諸塔과 實際 年代로선 重覆되는 것이 아니요 依然히 區分되면서 中代라는데 包含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곳에 樣式史的 世代라는 것과 歷史에서 말하는 實際 世代와 간에 어긋나는, 또는 多少 意味가 다른 世代라는 것이 成立될 수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始源的 樣式이라는 第一期의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이 典型的 塔婆라 할 第二期의 感恩塔 以下의 諸塔과 함끠 世代的으론 新羅 中代 前期에 合쳐질 수도 있는 것인 ▶P57-1이렇게 되면 매우 論述에 있어 混亂될 嫌이 있음으로 해서 便宜的 圖式的이나마 彌勒塔·定林塔·盈尼山下塔 等 統一 以前의 第一期의 塔婆라 하고 感恩塔 以下 高仙塔·羅原里塔·中央塔 等율 第二期 塔婆─ 世代的으론 中代前期의 塔婆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 굳하여 이러한 世代 問題를 내거는 것은 塔婆糾 世代的 動向이란 것을 살피기 爲한 것임이 主見의 하나인 까닭이다.
감은탑·고선탑·중앙탑·나원리탑 등 전형적 탑파라 말하고 조선석탑파사상 제2기를 형성하는 탑파라 말하며, 세대적으로는 문무왕 때부터 성덕왕대까지의 중대 전기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탑이 전고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일일, 기단이 중층기단으로서 하층은 저평광대하고 상층은 고대포후하되 상대복석에는 초층옥신을 받기 위한 '괴임'이 중단으로 되어 있고, 상대복석에는 상대중석을 받기 위한 방각과 반호형 '몰딩'이 있으며, 중대석에는 상대에 일면사개의 영주, 하대중석에는 일면오개의 영주가 있으며
이일, 초층옥신은 사개우주가 별석이며 사개벽면석이 별석이며(나원리탑은 이미 과도성을 보임)
삼일, 옥석헌미는 수평이요 상부 낙수면은 아무런 층절이 없는 경사면이요 사주형옥면의 사우간각면엔 우동 형식의 조의도 없고, 상층옥신을 받기 위하여 옥상에 상단의 「괴임」이 있고 옥리에는 하등 조각이 없을 뿐더러 옥석 「밭임」이란 것이 정연히 오층단형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점

등에서 공통성을 갖고 있다. 이것을 중대 전기에 한정시킨 것은 이미 전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양식적 상안 이를 감은탑이 문무왕대로 비롯하여 신문왕 초년까지에 완성된 사실에서 시작하여 고선·중앙·나원리 등 제탑이 양식적으로 거의 동류된 데서 같은 세대에 둔 것이지만, 그 하한을 하필 성덕왕대까지 결정한 것은 사료적으로는 확실한 근거가 없으되, 이 사탑은 기풍상 성당의 기풍이 농후할 뿐더러 중앙탑 부근에서 발견된 와당 같은 것이 일반적으로 이 중대 전기로서의 특색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양식의 일단 저하된 제작들이 대개는 차대 즉 중대 후기(효성왕대부터 혜공왕대까지)에 많이 귀속되어지는 점에서 한 개의 도식적 분류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중대 후기에 귀속되는 조선석탑으로서의 제3기에 속할 양식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쪽수▶P57-2感恩塔·高仙塔·中央塔·羅原里塔 等 典型的 塔婆라 말하고 朝鮮石塔婆史 上 第二期를 形成하는 塔婆라 말하고 世代的으론 文武王때부터 聖德王代까지의 中代前期에 두어질 수 있는 것인데 이 塔이 前稿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一日, 基壇이 重層基壇으로서 下層은 底平廣大하고 上層은 高大鋪厚하되 上臺覆石에는 初層屋身을 받기 爲한「괴임」이 重段으로 되어있고 上臺覆石에는 上臺中石을 받기 爲한 方角과 半弧形 「몰딩」이 있으며 中臺石에는 上臺에 一面四個 檸柱, 下臺中石에는 一面五個의 檸柱가 있으며
二日, 初層屋身은 四個隅柱가 別石이며 四個壁面石이 別石이며(羅原里塔은 이미 過渡性을 보임)
三日, 屋石軒尾는 水平이요 上部 落水面은 아무런 層節이 없는 傾斜面이요 四注形屋面의 四隅桿角面엔 隅棟 形式의 彫意도 없고 上層屋身을 받기 爲하여 屋上에 上段의「괴임」이 있고 屋裏에는 何等 彫刻이 없을 뿐더러 屋石「밭임」이란 것이 整然히 五層段形을 틀림없이 이루고 있는 點

等에서 共通性을 갖고있다. 이것을 中代前期에 限定시킨 것은 이미 前에도 말한 바와 같이 그 樣式的 ▶P58上眼 이를 感恩塔이 文武王代로 비롯하여 神文王 初年까지에 完成된 史實에서 시작하여 高仙·中央·羅原里 等 諸塔이 樣式的으로 거의 等類된 데서 같은 世代에 둔 것이지만 그 下限을 何必 聖德王代까지 決定한 것은 史料的으론 確實한 憑據가 없으되 이 四塔은 氣風上 盛唐의 氣風이 濃厚할 뿐더러 中央塔附近에서 發見된 瓦當같은 것이 一般히 이 中代前期로서의 特色을 가지고 있고 또 다음에 말할 이 樣式의 一段 低下된 諸作들이 대개는 次代 即 中代後期(孝成王代부터 惠恭王代까지)에 많이 歸屬되어지는 點에서 한 개의 圖式的 分類를 그렇게 꾀해본 것이다. 그러면 中代 後期에 歸屬되는 朝鮮石塔으로서의 第三期에 所屬될 樣式들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다음에 말해볼까 한다.




































본문1-1: 2-1. 第三期的作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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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P58-2第三期的 作品들이란 樣式的으론 第二期的 作品들과 大同小異한 것이다. 即 基壇 中, 下臺中石面의 撑柱가 一般的으로 五個에서 四個로 矮縮되었고 屋身과 屋石이 모두 一石으로 凝精되었고 一般히 規模가 矮少된 것뿐이다. 지금 그 알려져 있는 實例를 들면 如左하다.

①慶州郡陽北面 獐項里逸名寺址 五重塔雙基(西塔再建)
②同 內東面 佛國寺 釋迦三重塔
③同 長壽寺址 三重塔
④同 皇福寺址 三重塔
▶P59⑤同 南山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倒破)
⑥同 千軍里逸名寺址 三重塔雙基(再建)
⑦同 南山里玉井谷寺址 三重塔(倒破)
⑧同 慶州面 三重塔雙基(倒破)
⑨同 外東面 遠願寺址 三重塔雙基(再建)
⑩同 西面 明莊里逸名寺址 三重塔
⑪昌寧郡昌寧面 述亭里東部逸名寺址 三重塔
⑫金泉郡南面 廢葛項寺 三重塔雙基(今在京城)

以上, 諸塔名 外面의 彫飾有無, 五重三重의 差別, 氣勢의 强弱의 差度 等을 別 問題로 하면 塔婆로서의 樣式은 全혀 한 개의 類型을 이루는 것들이라 하겠다. 그런데 이 諸塔에서 무엇을 우리는 읽을 수 있느냐 하면 一曰 그 類型들이 地方的으로 慶尙道一帶에만 限해있고 特히 또 慶州가 中心되어 있다는 곳에 커다란 한 意義를 느낀다. 即 第二期의 塔婆가 亦然하야 四塔 中 三塔이 慶州를 中心하여 있었고 一塔만이 中原京 忠州에 있었다. 第一期의 塔은 二基가 外城 即 百濟 國境 內에 있었고 一基만 이 新羅 國領 內에 있으나 都心을 떠난 義城郡에 가 있었다. 義城에 어찌하야 高古한 最初의 한 石塔樣式이 이와 같이 發祥되었는가는 지금 알 수 없다. 그러나 外部에서 發生된 한 樣式이 第二期로 들면서▶P60 新羅統一 後 新羅의 都心地帶로 集中되어 第三期의 樣式까지 저와 같이 京都中心으로 發展된 것임을 볼 때 當代의 文化가 또한 이 第二期 第三期를 中心하야 慶州를 中心으로 익(熟)어 들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三期 作品에 이르러 벌써 石塔이 建築으로서의 勃勃한 建築的 精神보다도 修飾인 것으로의 急據한 變遷을 본다. 即 원문주10▶獐項里逸名寺址[2]의 五重塔에는 初層屋身 各面에 門扉模樣이 模刻되었을 뿐더러 隅柱와 門扇間에 遒勁한 仁王兩像이 蓮花座 위에 活躍的 態勢로써 浮刻되여있다. 初層屋身에 이와같이 四方門戶를 만드는 것은 본디 木造 塔의 意思로서 그것은 內部室內에 通하는 意思였다. 저 芬皇寺의 塔에서도 그 頹化된 形式이나마 四方龕室의 經營이 있음을 보았고 第一期 石塔의 彌勒塔에서도 그 意思를 보았고 盈尼山下塔, 安東法林寺址, 法興寺址, 一直面逸名寺址 等의 模塼塔·博塔 等에서도 그 一面的인 龕室經營을 보았고 第二期에 들어서 高仙塔 같은 데서도 四方의 門戶 樣式의 模刻이 있음을 본 바이다. 高仙塔에서의 門戶樣式의 模刻은 特히 優秀한 것이어서 門柱, 門楣, 門限, 閣峙의 表現은 勿論이요 門扇의 獸吻鋪首의 模刻도 塊麗하고 門扇에는 浮錫金釗을 박았던 孔穴까지 남아있다. 또 門戶兩側에 仁王像 凸刻한 例도 일찍이 芬皇塔에서 그 例를 본 바이다. 다만 後代까지도 仁王像을 表現함에 있어서는 모두 自然岩石 위에 叱咤怒呼의 形像을 하고 있는 表現을 取하고 있는데 唯獨 獐項里塔에서는 仁王像을 蓮花座 위에 올려 앉혀있다. 이것은 特殊한 例이니 智道論에는 「以蓮華軟淨 欲現神力能坐其上 令不壞故 又以莊嚴妙法坐故 又以諸華皆小無如此華羽 梵天王坐蓮(○○○○○) ▶P61華上是故(●●●●)諸佛隨世俗故(●●●●●●) 於寶華上結跏趺坐(●●●●●●●●)云云이라 있고 大日經疏에는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 等異也 若是佛興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令花開也 石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法念太子者的 T梵王金剛者開口執 士者閉口常或坐俱勿頭華葉上 若淨居諸一 至初禪梵天 等 世間立號爲梵者皆坐赤蓮華中」이 「如世人以蓮華爲吉祥淸淨能悅可衆心 今秘藏中亦以大悲胎藏妙法蓮華爲最秘密吉祥 一切加持法門力之身坐此華臺也 然世間蓮亦有無量差降 所謂大小開合色相淺深各發不同 如是心地花臺亦有權實開合等異也 若是佛(○○○) 謂當作八葉芬陀利(○○○○○○○) 白蓮華也(○○○○) 其華令開敷四布(○○○○○○) 若是菩薩(○○○○) 亦作此華坐而(○○○○○) 令花半敷(○○○○) 勿令極開也(○○○○○) 若緣覺聲聞(○○○○○) 當坐於花葉之上(○○○○○○○) 或坐俱勿頭華葉上(○○○○○○○○)(乃至) 若淨居諸天乃至初禪梵天等(○○○○○○○○○) 世間立號為梵者皆坐赤蓮華中(○○○○○○○○○○)이라 있어 仁王도 번대는 菩薩 摩訶薩이니까 蓮華座에 올림이 當然할 것 같으되 그것은 本身의 菩薩像을 갖추고 있을 때면 모르되 이미 變身하야 佛法守護의 一神將(兄之法意太子者後爲金剛力士密跡弟之法念太子看後爲梵王金剛者開口執獨股金剛杵或云不可超而閉口常示强力或云相向而開口暴拳)의 形像으로 表現되었을 적엔 一般이 盤石 巨岩에 올리는 것이 通式이다. 即 獐項里塔에서의 例는 한 개의 特殊한 實例인데 何如間에 一般이 第二期 作品에선 볼 수 없는 三王彫刻이 初層塔身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또 이 〿項塔과 함끠 第三期 作品 中에 類聚되어있는 遠願寺址 三重塔 雙基에는 初層屋身 四面에 長矩形方廓을 만들고서 그 안에 四天王(東方持國天 南方增長天 南方廣目天 北方多開天)을 浮刻하고 基壇 上層中臺石面石部에는 蓮花座에 十二支像을 浮刻하였다. 四天王은 帝釋天의 外將이며 十二支像은 藥師佛의 十二神將과 配合되는 것들이다. 四天王은 純支那式으로 말하면 四方神이요 十二支는 十二時神인 同時에 方位神인 것이다. 即 支那的 思想으로서만 解釋한다면 그것은 空間과 時間과를 通해서의 庇護觀念의 現示라 할 수 있다. 그러나 佛說에 依한 四天王은 六欲天(一曰四王天, 二曰忉利天, 三曰夜摩天, 四曰 兜率歌, 五曰 樂變化天, 六曰 他化自在天)中 第一天인 四天王에▶P62 屬하는 天王들이요 帝釋天은 第二天인 忉利天(一曰 三十三天)을 主宰하는 天帝로서 忉利天은 須彌山頂에 있는 世界이요 四王天은 須彌山中復에 있는 世界로서 다같이 帝釋이 領導하고 있는 地居天의 世界이다. 이 以上 第三天으로부터 第六天까지는 空居天으로서 地居天과 區別되는 世界이니 問題外이고 三一三天에 君臨한 釋迦能의 天帝釋은 저 四面의 四天王을 領牟하고 있는데 이 四天王은 다시 또 各其八大天王을 領率하고있다. 同時에 四天王은 八部鬼衆을 領率하고 있는데 一般이 四天王의 領導아래 三寶擁護의 守護將令으로 利用되기는 이 八部鬼衆들이라. 다음에 말할 第四期作品들 以下 時代的으론 新羅下代에서부터 造形的으론 이 八部衆이 나타나 있는 것인데 八部衆의 表現意思만은 第三期作品인 佛國寺 釋迦三重塔에서부터 벌써 나타나 있는 것이라 하여도 可하다 即, 塔婆 그自身엔 아무런 表現이 없지만 塔婆 外圍를 돌려 八個의 蓮花座가있는 方區結界가 그것이다. 八個蓮花座에 關하여는 何等 信憑할 史料가 없으나 佛國寺 歷代記 (或云佛國寺古今創記)에 보면 東多寶塔 西釋迦塔 一名無影塔이란 다음에 八方金剛座란 것이 있어 이 八方金剛碎란것이 或歟이 八方蓮花座를 두고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되는 바인데 대저 金剛座라는 것은 智度論에「地皆是衆生虛証業因緣報告有 是故不能舉菩薩 欲成佛時實相知彗身 是時坐處變爲金剛 有人言 土在金輪上 金輪在金剛王 從金剛際出如蓮華臺 直上持菩薩坐 處分不陷沒 以是故此道場坐處名爲金剛」云云이라 있어 菩薩坐處이니만치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蓮華八座를 곧 八部衆의 坐處로는 是認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이 特別한 八方金剛座의 經營은 ▶P63곧 塔婆에 八部衆을 表現하는 意思의 先軀가 아닌가도 생각되는 바이다. 即, 佛國寺 三重塔에서의 이 八座는 實際에 있어서도 八部菩薩 造成하야 奉安하였던 것인지 또는 座石만 만들고 想意的으로 그곳에 八部菩薩이 供養而坐한 意思를 했던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塔婆 그것 以外에 守護의 菩薩 乃至 天王神將들을 이와 같이 添付시키려는 意思가 一般的으로 具體化했든 事實만은 알 수 있다. 저 安東 法興寺址 七重博塔의 基壇面에도 部將坐像이 浮刻되어 있는 例를 말한 적이 있다. 그 世代는 勿論 이 中代에 屬하는 것이나 第二期作品들과 같이 前期에 歸屬시킬 것인지 (그 便의 可能性이 많다고筆者는생각하지만) 또는 後期 即 이 第三期와 等代에 둘 것인지 確實치 못하지만 何如間 그곳에도 이미 神將을 塔婆基壇에 表現시켰다. 다만 그것은 頹壞가 甚하야 본래 몇 개의 神將을 表現한 것인지(現今은 매우 散亂되었음) 따라서 神將의 性質도 不分明하지만 何如間 그러한 것을 表現하려는 意思가 이 中代後期를 中心하여 그 前後에 現著해진 特色만은 注意할 必要가 있다. 이 八部衆에 대하여는 다시 後에 말하기로 하고 前述한 四天王은 勿論 支那式四方神에 通하는 意思도 있었겠지만 보다 더 佛敎的인 것이었을 것은 形像 그自身이 벌써 보이는 바이지만 十二支像이 十二獸神으로 表現돼있는 點엔 佛敎的인 것보다도 支那的인 時神觀念에 더 큰 影響이 있는 듯이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當代에 있어서는 이 獸神觀念은 본디 支那的인 純粹한 觀念에서보다도 一般이 佛敎的인 것과 混與되었던 것으로 筆者는 생각하는 바이니 이는 한갓 當代로부터 現著히 濃厚해진 東洋의 風水觀念이란 것이 傳說이 傳하는 바와 같이 道詵禪師(統一後 161年生享年72)▶P64로 말미암아 一行禪師(開元15年 入滅統一後 61年也)의 法이 流轉된 것이라 함에서 뿐 아니라 十二支肖像의 表現이 新羅에서 造型的으로 流行됨이 한갓 墳柒關係에서 뿐 아니라 佛刹關係 엣것에도 流行되기 시작함이 곧 佛家的 解釋과의 混與를 생각케 하는 바라 하겠다. 十二支肖像이 墳墓關係에 表現되기는 新羅의 傳稱聖德王陵(傳稱某某王陵乃至墓로써 指稱되는 것은 實際 그들의 陵墓라고 곧 認定할 根〿들이 充分치 못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는 따로 考證이 必要한 것이요(주석3) 지금은 다만 一時的假稱號로서 擧用할 따름이다)의 屛石外護에서부터 비롯한 것이라 하겠고 寺址의 例론 皇福寺址, 內東面排盤里逸名寺址, 外東面末方里洞鵠寺址 及求禮 華嚴寺五重塔에서 發見된 例가 있고 佛燈에는 慶州邑內 崔泳鎭 氏 私邸 內에 있는 石燈 같은 데도 있어 一般이 佛敎關係에도 盛行되었음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이 뜻에서 筆者는 新羅陵墓에서의 十二支像은 한갓 支那的인 風水觀念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요 거리에는 藥師佛에 대한 두터운 信仰과의 混與가 가장 힘차게 있었다고 보는 바이다.(주석2) 景德王十四年乙未(統一後89年), 芬皇寺의 三十萬六千七百斤 藥師像의 鑄造란 가장 有名한 事實이지만 現在 新羅佛로서 優秀한 作品에 이 藥師像이 많음을 볼 때 藥師의 信仰이 新羅에, 特히 이 中代에 얼마나 盛했든가를 알 수 있고 거기에 因緣한 十二支像의 表現欲의 發達이란 것에 대하여는 格別한 關心이 가지는 것이다. 傳聖德王陵의 十二支像이 新羅 陵墓에 나타난 十二支像 中엔 가장 最初의 것에 屬하는 것인데 그것이 傳稱대로 事實 聖德王陵이라한 데도 實際造成은 聖德王 薨御 後에 있었을 것이니까 이렇게 본다면 十二支像의 表現은 저 塔婆에서의 一例와 같이 一般이 中代後期의 한 特色이다. 十二支像이 있는 陵墓中 傳稱 眞德王陵, 文武王陵(掛陵) 金庾信墓라는 것들이 造▶P65-1型樣式 上 모두 各其 當代의 것이 될 수 없고 中代 以後에 屬할 것이라는 것은 이미 學者間의 定見(주석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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