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사군 문제 관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North Korea Humanities

(본문2: 사군철폐의 내적 소인)
(본문3: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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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12-1}}大元帝國이 衰微하여 漠北에 退却한 以後 東蒙古의 韃靼部는 때때로 明나라의 討征를 받어 疲弊하여진 데 對하여 西蒙古의 瓦剌部는 明宣德 末年에 蒙古 內部의 競敵인 韃靼의 和寧王 阿魯台를 꺼꾸러 트리고 漸次로 强大하여졌는데 瓦剌의 實權을 掌握한 脫歡은 元나라 皇室의 遺裔 脫脫不花王을 推戴하여 汗位에 올려놓았다. 脫歡의 死後 그 子 也先이 그 父의 代를 繼承하자 瓦剌部는 더욱 猛權을 四隣에 펼치게 되여 그 勢力이 西로는 中央亞細亞에 및고 東으로는 滿洲를 跳躍하여 우리 朝鮮 北境에까지 및을려고 하였으며 南으로는 明나라 北邊을 威脅하고 디디어 正統 十四年(朝鮮世宗 三十一年)八月 明英宗 皇帝를 土木(河北省)에서 사루잡게 된 것은 周知의 事實이다. 瓦剌의 對外 勢力은 內部의 紛爭으로 말미암아 오래 繼續되지 못하였지만은 瓦剌의 滿洲 經略에 關하여는 和田淸 博士의 {{TagRef|10}}「兀良哈三衛に關する硏究」<ref>滿鮮地理歷史研究報告 第十二·第十三 所收.</ref> 中에 詳述한 바 있어 滿洲史上 著名한 事件의 하나이다. 馬文升의 撫安東夷記에는 正統 十四年 瓦剌 活動을 記述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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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12-2}}<blockquote no="05">至景泰後 始克寧證 而海西野人女直之有名者 率死于也先之亂 朝廷所賜璽書 盡爲也先所取 其子孫以無授官璽書可徵 不復承襲 雖歲遣使入貢 第名曰舍人 以是道不得乘傳 置錫宴不得預上席  賞賚視昔又薄 皆忿怨思亂 遼東人咸知之{{TagPage|13-1}}而時未有以處之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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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13-2}}라 하여 也先의 滿洲 經略에 依한 海西 等 女眞人의 經濟的 政治的 打擊을 指摘하였거니와 瓦剌의 滿洲 經略은 特히 海西 女直에 있어서 相當히 徹底的이어서 以後 滿洲에 있어서의 女眞人의 中心 勢力은 海西로부터 建州로 올마가게 되였다. 그러면 瓦剌의 滿洲 經略은 얼마나 한 程度로 朝鮮에 影響을 미쳤을가. 明 正統 十三年은 우리 朝鮮 世宗 二十九年에 該當한다. 瓦剌은 {{TagRef|11}}兀良哈 三衛<ref>明人이 이른바 兀良哈는 普通 興安嶺 以東에 있는 泰寧·福餘·朶顏 等 蒙古族의 三衛를 가리침이며, 朝鮮서는 兀良哈(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豆滿江 內外에 居住하는 女眞族으로서, 豆滿江 內外의 兀良哈는 明나라의 所謂 毛憐衛에 該當한다.</ref>를 蹂躪한 後 장차 그 東隣인 海西 女直을 屈服식힐려고 했을 때로서 이러한 情勢는 謝恩使 李穰의 歸朝로 因하여 곧 朝鮮서도 알게 되 였다. 世宗實錄 卷一百十六, 二十九年 閏四月 丙子(十五日) 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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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 {{TagSpage|13-3}}<blockquote no="06">謝恩使工曹參判李穰 回自京師言 遼東摠兵官曹義言 今夏 深處達達討平三衛達子 欲攻海西野人 恐將深入後門 須啓殿下 謹愼備邊 遂下諭書于平安·咸吉道 申嚴隄備</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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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 {{TagSpage|13-4}}라 한 것이 그것으로 所謂 後門은 朝鮮의 北境 咸鏡道 方面을 가라친 것이다. 이보담 十餘日 後인 同戊子(二十七日) 條, 通事 崔倫의 啓에도 「中國人言 深處達達 瓦刺也先 將兵億萬 幾殲三衛達子 又於夏秋間 謀襲海西野人 野人畏偃 鄯家登山」이라 하여 亦是 같은 말이 보이는데 同年 六月 平安道 觀察使에게 내린 諭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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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 {{TagSpage|13-5}}<blockquote no="06">{{TagRef|12}}今通事金辛 回自遼東啓 達達也先太師屯兵黃(潢)河<sup>〇遼河上流 西喇木倫河</sup> 冬月 欲攻海西野人 遼東閱軍隄備 建州李滿住曾往北京 自請扈從 閏四月 挈家赴京 童倉·凡察亦無如之何 欲將向東屯居 予料也先 旣滅三衛 欲殲海西 諸種野人 莫不畏懼{{TagPage|14-1}}不敢寧居 蓋其勢方張如此 其盛將來之變 難以盡知 卿密知此意 一應防禦諸事 預愼布置<ref>世宗實錄 卷一百十六, 二十九年 六月 戊子.</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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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 {{TagSpage|14-2}}라 하여 朝鮮서는 也先大師의 來侵보담도 也先의 海西 攻略에 依한 影響을 더 重大視하고 따라서 建州 女眞 酋長 李滿住·童倉·凡察 等이 朝鮮으로 몰려올 것을 憂慮하여 平安道의 防備를 굿게 할려고 하였든 것이다. 그럼으로 {{TagRef|13}}同年 九月에는 下三道(忠淸·全羅·慶尙) 及 京中의 米穀을 모와 黃海道와 平安道로 輸送하여 軍需에 充當케 하였는데<ref>世宗實錄 卷一百十七, 二十九年 九月 乙未.</ref> {{TagRef|14}}이는 當時 平安道 方面의 邊備가 咸鏡道 方面의 그것에 比하여 훨신 貧弱하였든 까닭이다.<ref>世宗實錄 卷一百十六, 二十九年 閏四月 辛巳條에 「……今五鎭阜盛 士馬精强 以此行兵攻伐 則不足矣 堅壁自守則雖有大賊 不足慮也……」라 하고, 同書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月 丁亥條、議政府 啓 中에 「平安道沿邊防禦布置 未得其要 衆論不同若憚於輕改 固執因循 則邊事失誤 慮有後悔······」라 하였다.</ref> 그러나 얼마 안 되여 唐人押送官 金有禮가 遼東서 馳啟하되 {{TagRef|15}}「也先率兵數萬 屯黃河<sup>〇潢河</sup>上 帝勅諭遼東隄備曰 也先將幷朝鮮打擾」<ref>世宗實錄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月 丁亥.</ref>라 하여 장차 也先의 兵馬가 朝鮮에까지 밋츠리라는 情報를 보내자 朝鮮서는 이에 對하여 처음으로 積極的 防禦策을 講究케 되였든 것이니 {{TagRef|16}}즉 金孝誠을 平安道 都節制使  李穫을 江界 節制使 朴好問을 朔川 節制使 趙石岡을 判義州 牧使에 任命하고 萬若 也先이 親히 重兵을 거나리고 올 때는 이와 一戰을 相交할 決心까지 가지게 되였든 것이다.<ref>世宗實錄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一月 庚寅·乙未.</ref> 이것을 便宜上 瓦剌 來侵에 對備한 第一次 動員이라고 하여 두자. 이 第一次 動員을 契機로 해서 가장 注目되는 바는 鴨綠江 沿邊 防禦策이 從來의 그것과는 달라진 點이니 {{TagRef|17}}軍事上으로 沿邊의 郡邑을 江界와 朔川 兩道에 나누어 各各 二品 以上의 節制使를 두고 渭原·慈城·虞芮·閭延·茂昌 江界道에 理山·碧團·昌城·定寧·義州·麟山을 朔川道에 屬하게 하며 都節制使營을 寧邊에 두고 沿邊口子의 勢弱孤單한 것은 併合해서 防戊케 하였다.<ref>世宗實錄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月 丁亥. 同書 卷一百十九, 三十年 正月 甲午.</ref> 沿邊 防禦策은 翌年 滿洲의 情勢綏和로 말미암어 復舊되였으나 그러나 드디어 慈城郡 西解口子{{TagPage|15-1}}(慈城郡 三興面 西海洞)의 萬戶는 撤廢되고 말었으니 世宗實錄卷 一百十九, 三十年 三月 甲辰 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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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 {{TagSpage|15-2}}<blockquote no="07">議政府據兵曹呈啓 平安道慈城郡西解口子 人稱土瘠 又爲鴨綠江分流之處 行城亦難築 勢甚孤單 不宣民居 請罷西解萬戶 移其民于奉浦等處……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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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9번= {{TagSpage|15-3}}라 한 것이 그것으로 이後 다시 滿洲 情勢의 急迫과 이에 對한 第二次·第三次 動員을 거처 드디어 四郡撤廢에까지 進展함으로 以下 瓦刺 活動에 對하여 追及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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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0번= {{TagSpage|15-4}}瓦刺가 그 猛威을 遺憾없이 發揮한 것은 正統 十四年(朝鮮 世宗 三十一年) 七八月間의 일로서 한편으로 脫脫不花王이 引率한 一軍은 遼東의 廣寧을 攻擊하여 이에 大損害를 주고 또 한편으로 也先은 大同을 侵犯하여 드디어 親征의 途에 있든 明帝 英宗을 土木에서 사로잡고말었다. {{TagRef|18}}明帝가 捕虜된 消息은 九月 二十九日 곧 朝鮮에 알려졌지만<ref>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九月 丙午.</ref> {{TagRef|19}}이보담 앞서 明나라에서는 朝鮮軍과 女眞軍을 遼東에 會合시켜 가지고 東側으로부터 瓦刺를 征討할 計畫을 세워 明使遼東指揮王武는 九月 九日 京城에 到着 明帝의 勅諭를 交附하였다.<ref>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九月 丙戌. 明史 卷二百二十, 朝鮮傳.</ref> 그러나 朝鮮으로 하여금 極度로 驚擾케 한 것은 脫脫不花軍의 廣寧 襲擊의 報道이었다. 脫脫不花軍의 廣寧 襲擊에 關하여는 明史 卷一 百七十七、王翶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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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1번= {{TagSpage|15-5}}<blockquote no="08">(正統十四年)……脫脫不花大擧犯廣寧 翺方閱兵 寇碎至業潰 翺入城自保 或謂城不可守 翺手劒曰 敢言棄城者斬 寇退 坐停俸半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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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2번= {{TagSpage|15-6}}라 하고 遼東志 卷五, 王翶傳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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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3번= {{TagSpage|16-1}}<blockquote no="09">(正統)十四年八月內 北虜大學犯京師 部落數萬寇廣寧 時翺聚兵教場 虜騎卒至 我軍遂潰 翺收散卒 堅壁固守 虜遂遁去</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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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4번= {{TagSpage|16-2}}라 하였는바 北虜가 京師를 犯하였다는 것은 勿論 也先이 明帝를 사로잡은 것을 意味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朝鮮側 記錄에 依하면 먼저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戊申(一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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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5번= {{TagSpage|16-3}}<blockquote no="10">通事李裕德 自遼東先馳報云 臣謁都司 王大人言 西有聲息甚急 外郞謝本曰 今七月二十日 達達 也先兵馬 夜入長城 廣寧摠兵官不知賊入 出校場散銀於軍士 也先兵馬直來 摠兵官與軍士奔入城內 閉門自守 也先兵馬圍城三重 虜軍卒一千馬八千匹 又自廣寧至遼東站路 人馬奪掠殆盡 先騎至遼東西門 臣亦狼狽出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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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6번= {{TagSpage|16-4}}라 하였다. 여기에 이른바 也先兵馬라는 것은 脫々不花兵馬의 誤傳이나 곧 繼續하여 「是日夜二鼓報至 即召政府·兵曹·都鎭撫·議兩界陽備之事」라 하고 또 同 己未 及 乙丑條에 이에 關聯한 記事가 보이는 것으로 보면 朝鮮이 얼마만큼 이 事件을 重大視하였든가를 察知할 수 있을것이다. 萬一 瓦刺軍이 廣寧을 襲擊한 後 곧 東南으로 向하여 朝鮮으로 오게 된다면 危期는 旬日之間에 切迫하였든 것이니 通事 李裕德의 馳報가 이르자 深夜임에도 不拘하고 議政府·兵曹·都鎭撫 等을 召集하여 對策을 講究케 한 것은 오히려 當然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己酉(二日)條에는 이어셔 對策協議의 關한 詳細한 記載가 있는데 거기 依하면 自古로 變報가 많었으나 이때보담 더 重大한 적은 없었다고 하여 特히 智略과 經驗이 많은 右贊成 金宗瑞를 平安道 都節制使에 任命하고 吏曹參議 朴薑으로 {{TagPage|17-1}}平安道 都鎭撫를 삼아 文臣 李全粹·具致寬 兩人을 이에 從屬케 하며 左贊成 朴從愚를 咸吉道 都體察使에 任命하고 工曹參議 南祐良으로 咸吉道 都鎭撫를 삼아 文臣 元孝然·李永瑞 兩人을 이에 從屬케 하며 京軍 中에서 特히 驍勇한 將士 六十名을 選出하여 平安道에 四十名 咸吉道에 二十名을 配定하고 當時 諸道의 兵士는 단지 十數萬에 不過하였음으로 軍士 增募의 方針을 樹立하여 各 道에 駝報 召集케 되였음으로 中外가 騷然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瓦刺 來侵에 對備한 第二次 動員이다. 이때 鄕里 梁山에있던 前知中樞院事 李澄石 前都節制使 李澄玉 兄弟도 被召되였는데 그 父 前中樞 李全生은 九十八歲의 老齡이었다. 그는 二子가 徵召됨을 듣고 그들을 불러놓고 國家를 爲하여 盡力하기를 激勵한 佳話는 本稿 劈頭에 揭載한 것과 같다. 同條에 「左議政河演等啓……停今年行城之役 以休士卒 上曰善……時東西兩界困於築城 士馬勞憊 平安尤甚 猝有聲息 朝議恐賊闌入 無如之何」라 하여 第二次 動員과 同時에 當年度 行城築造의 役을 停止한 것은 注目할 바로서 {{TagRef|20}}同年 十月 遼東의 情勢가 얼마큼 平穩해짐을 따라 平安道 都鎭撫 朴薑을 召還하고 이어서 咸吉道 都體察使 朴從愚도 召還하였지만은<ref>世宗實錄 卷一百二十六, 三十一年十月 戊申·丁卯.</ref> {{TagRef|21}}翌年 五月 平安道 觀察使 韓確·平安道 都節制使 金宗瑞 等이 또다시 行城의 役을 停止하자고 請하였음에 對하여 그 役軍의 數를 減케 하였던 것이다.<ref>世宗實錄 卷一百二十七, 三十二年 正月 壬寅.</ref> 이는 世宗이 升遐하시기 二個月 前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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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7번= {{TagSpage|17-2}}文宗이 即位하자 그해 三月 議政府의 獻議에 依하여 東國兵鑑 二卷을 撰成케 되였다. 이 東國兵鑑의 編纂은 우리 朝鮮의 上古로부터 高麗 末葉에 이르기까지의 外敵 來侵을 列舉하고 이에 對한 우리의 防禦{{TagPage|18-1}}策과 그 得失을 詳考할 目的에서 나온 것이니 文宗實錄 卷一, 即位 三月 乙卯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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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8번= {{TagSpage|18-2}}<blockquote no="11">議政府啓 方今中國有警 我國備邊之事 不可不慮 若中國歷代之事 稽之史冊可知 我國之事最宜先知 而專不知之 甚不可也 願自三國以至高麗 彼敵來侵之事 我國備禦之策 首尾得失 詳考採摭 以備觀覽 上曰 此意甚善 宜速撰集廣布 後撰成模印 名曰東國兵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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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9번= {{TagSpage|18-3}}이라 하였다. 由是觀之면 東國兵鑑은 確實히 上述한 바와 같은 情勢下의 第二次 動員의 文化的 產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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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대원제국이 쇠미하여 사막의 북쪽에 퇴각한 이후 동몽고의 달단부는 때때로 명나라의 토정를 받아 피폐하여진 데 대하여 서몽고의 와랄부는 명 선덕 말년에 몽고 내부의 경쟁자인 달단의 화녕왕 {{TagPerson|[[아로태]]}}(阿魯台)를 쓰러트리고 점차로 강대하여졌는데 와랄의 실권을 장악한 {{TagPerson|[[탈환]]}}(脫歡)은 원나라 황실의 후예 {{TagPerson|[[탈탈불화]]}}(脫脫不花)왕을 추대하여 한위(汗位)에 올려놓았다. 탈환의 사후 그 아들 야선이 그 아버지의 대를 계승하자 와랄부는 더욱 맹권을 사린에 펼치게 되여 그 세력이 서로는 중앙아시아에 미치고 동으로는 만주를 도약하여 우리 조선 북경에까지 미칠려고 하였으며 남으로는 명나라 북변을 위협하고 드디어 정통 14년(조선 {{TagPerson|[[세종]]}} 31년)8월 명 영종 황제를 토목(하북성)에서 사로잡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와랄의 대외 세력은 내부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지만 와랄의 만주 경략에 관하여는 {{TagPerson|[[화전청]]}}(和田淸) 박사의 {{TagRefT|10}}「{{TagArticle|[[兀良哈三衛に關する硏究]]}}」<ref group="a">{{TagJournal|[[]]}} {{TagVolume|[[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12|제12]]}}·{{TagVolume|[[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13|제13]]}} 소수.</ref> 중에 상술한 바 있어 만주사상 저명한 사건의 하나이다. {{TagPerson|[[마문승]]}}의 {{TagBook|[[무안동이기]]}}(撫安東夷記)에는 정통 14년 와랄 활동을 기술한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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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blockquote no="05">至景泰後 始克寧證 而海西野人女直之有名者 率死于也先之亂 朝廷所賜璽書 盡爲也先所取 其子孫以無授官璽書可徵 不復承襲 雖歲遣使入貢 第名曰舍人 以是道不得乘傳 置錫宴不得預上席  賞賚視昔又薄 皆忿怨思亂 遼東人咸知之而時未有以處之也</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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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라 하여 {{TagPerson|[[야선]]}}(也先)의 만주 경략에 의한 해서(海西) 등 여진인의 경제적, 정치적 타격을 지적하였거니와 와라의 만주 경략은 특히 해서 여진에 있어서 상당히 철저적이어서 이후 만주에 있어서의 여진인의 중심 세력은 해서로부터 건주로 옮아가게 되였다. 그러면 와라의 만주 경략은 얼마나 한 정도로 조선에 영향을 미쳤을까. 명 정통 13년은 우리 조선 {{TagPerson|[[세종]]}} 29년에 해당한다. 와랄은 {{TagRefT|11}}올량합 삼위<ref group="a">명인이 이른바 올량합은 보통 흥안령 동쪽에 있는 태령·복여·타안 등 몽고족의 삼위를 가리킴이며, 조선서는 올량합(오랑캐)이라고 하는 것은 두만강 내외에 거주하는 여진족으로서, 두만강 내외의 올량합은 명나라의 소위 모련위에 해당한다.</ref>를 유린한 후 장차 그 동린인 해서 여직을 굴복시킬려고 했을 때로서 이러한 정세는 사은사(謝恩使) {{TagPerson|[[이양]]}}(李穰)의 조선 귀국으로 인하여 곧 조선서도 알게 되었다. {{TagBook|[[세종실록]]}} 권116, 29년 윤4월 병자(15일) 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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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 <blockquote no="06">謝恩使工曹參判李穰 回自京師言 遼東摠兵官曹義言 今夏 深處達達討平三衛達子 欲攻海西野人 恐將深入後門 須啓殿下 謹愼備邊 遂下諭書于平安·咸吉道 申嚴隄備</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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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 라 한 것이 그것으로 소위 후문은 조선의 북경 함경도 방면을 가리킨 것이다. 이보다 10여 일 후인 동 무자(27일) 조, 통사 {{TagPerson|[[최윤]]}}(崔倫)의 계에도 <cite no="04">“中國人言 深處達達 瓦刺也先 將兵億萬 幾殲三衛達子 又於夏秋間 謀襲海西野人 野人畏偃 鄯家登山”</cite>이라 하여 역시 같은 말이 보이는데 같은 해 6월 평안도 관찰사에게 내린 유(諭)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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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 <blockquote no="06">{{TagRefT|12}}今通事金辛 回自遼東啓 達達也先太師屯兵黃(潢)河<sup>〇遼河上流 西喇木倫河</sup> 冬月 欲攻海西野人 遼東閱軍隄備 建州李滿住曾往北京 自請扈從 閏四月 挈家赴京 童倉·凡察亦無如之何 欲將向東屯居 予料也先 旣滅三衛 欲殲海西 諸種野人 莫不畏懼不敢寧居 蓋其勢方張如此 其盛將來之變 難以盡知 卿密知此意 一應防禦諸事 預愼布置<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6, 29년 6월 무자.</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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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 라 하여 조선서는 {{TagPerson|[[야선]]}} 대사의 내침보다도 야선의 해서 공략에 의한 영향을 더 중대시하고 따라서 건주 여진 추장 {{TagPerson|[[이만주]]}}·{{TagPerson|[[동창]]}}·{{TagPerson|[[범찰]]}} 등이 조선으로 몰려올 것을 우려하여 평안도의 방비를 굳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 {{TagRefT|13}}같은 해 9월에는 하삼도(충청·전라·경상) 및 서울 중의 미곡을 모아 황해도와 평안도로 수송하여 군수에 충당케 하였는데<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7, 29년 9월 을미.</ref> {{TagRefT|14}}이는 당시 평안도 방면의 변비가 함경도 방면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빈약하였던 까닭이다.<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6, 29년 윤4월 신사조에 “……今五鎭阜盛 士馬精强 以此行兵攻伐 則不足矣 堅壁自守則雖有大賊 不足慮也……”라 하고, {{TagBook|[[세종실록|같은 책]]}} 권118, 29년 10월 정해조, 의정부 계 중에 “平安道沿邊防禦布置 未得其要 衆論不同若憚於輕改 固執因循 則邊事失誤 慮有後悔······”라 하였다.</ref>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당인압송관 {{TagPerson|[[김유례]]}}(金有禮)가 요동서 치계하되 {{TagRefT|15}}<cite no="05">“也先率兵數萬 屯黃河<sup>〇潢河</sup>上 帝勅諭遼東隄備曰 也先將幷朝鮮打擾”</cite><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8, 29년 10월 정해.</ref>라 하여 장차 {{TagPerson|[[야선]]}}의 병마가 조선에까지 미치리라는 정보를 보내자 조선에서는 이에 대하여 처음으로 적극적 방어책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이니 {{TagRefT|16}}즉 {{TagPerson|[[김효성]]}}(金孝誠)을 평안도 도절제사 {{TagPerson|[[이확]]}}(李穫)을 강계 절제사 {{TagPerson|[[박호문]]}}(朴好問)을 삭천 절제사 {{TagPerson|[[조석강]]}}(趙石岡)을 판의주 목사에 임명하고 만약 {{TagPerson|[[야선]]}}이 친히 중병을 거느리고 올 때는 이와 일전을 상교할 결심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8, 29년 11월 경인·을미.</ref> 이것을 편의상 와랄 내침에 대비한 제1차 동원이라고 하여 두자. 이 제1차 동원을 계기로 해서 가장 주목되는 바는 압록강 연변 방어책이 종래의 그것과는 달라진 점이니 {{TagRefT|17}}군사상으로 연변의 군읍을 강계와 삭천 양도에 나누어 각각 2품 이상의 절제사를 두고 위원·자성·우예·여연·무창 강계도에 이산·벽단·창성·정녕·의주·인산을 삭천도에 속하게 하며 도절제사영을 영변에 두고 연변 구자의 세약고단(勢弱孤單)한 것은 병합해서 방무케 하였다.<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18, 29년 10월 정해. {{TagBook|[[세종실록|같은 책]]}} 권119, 30년 정월 갑오.</ref> 연변 방어책은 다음 해 만주의 정세수화(情勢綏和)로 말미암아 복구되었으나 그러나 드디어 자성군 서해구자(자성군 삼흥면 서해동)의 만호는 철폐되고 말었으니 {{TagBook|[[세종실록]]}} 권119, 30년 3월 갑진 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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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 <blockquote no="07">議政府據兵曹呈啓 平安道慈城郡西解口子 人稱土瘠 又爲鴨綠江分流之處 行城亦難築 勢甚孤單 不宣民居 請罷西解萬戶 移其民于奉浦等處……從之</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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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9번= 라 한 것이 그것으로 이후 다시 만주 정세의 급박과 이에 대한 제2차·제3차 동원을 거처 드디어 사군철폐에까지 진전함으로 이하 와라 활동에 대하여 추급하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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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0번= 와라가 그 맹위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정통 14년(조선 {{TagPerson|[[세종]]}} 31년) 7, 8월간의 일로서 한편으로 {{TagPerson|[[탈탈불화]]}}왕이 인솔한 일군은 요동의 광녕을 공격하여 이에 큰 손해를 주고 또 한편으로  {{TagPerson|[[야선]]}}은 대동을 침범하여 드디어 친정의 도에 있든 명제 영종을 토목에서 사로잡고 말았다. {{TagRefT|18}}명제가 포로된 소식은 9월 29일 곧 조선에 알려졌지만<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25, 31년 9월 병오.</ref> {{TagRefT|19}}이보다 앞서 명나라에서는 조선군과 여진군을 요동에 회합시켜 가지고 동측으로부터 와라를 정토할 계획을 세워 명사 요동지휘 {{TagPerson|[[왕무]]}}(王武)는 9월 9일 경성에 도착 명제의 칙유를 교부하였다.<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25, 31년 9월 병술. {{TagBook|[[명사]]}} 권220, 조선전.</ref> 그러나 조선으로 하여금 극도로 경요케 한 것은 {{TagPerson|[[탈탈불화]]}} 군사의 광녕 습격의 보도이었다. {{TagPerson|[[탈탈불화]]}} 군사의 광녕 습격에 관하여는  {{TagBook|[[명사]]}} 권177, 왕고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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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1번= <blockquote no="08">(正統十四年)……脫脫不花大擧犯廣寧 翺方閱兵 寇碎至業潰 翺入城自保 或謂城不可守 翺手劒曰 敢言棄城者斬 寇退 坐停俸半載</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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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2번= 라 하고 {{TagBook|[[요동지]]}} 권5, 왕고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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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3번= <blockquote no="09">(正統)十四年八月內 北虜大學犯京師 部落數萬寇廣寧 時翺聚兵教場 虜騎卒至 我軍遂潰 翺收散卒 堅壁固守 虜遂遁去</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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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4번= {{TagSpage|16-2}}라 하였는바 북로가 경사를 범하였다는 것은 물론 {{TagPerson|[[야선]]}}이 명제를 사로잡은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먼저 {{TagBook|[[세종실록]]}} 권125, 31년 8월 무신(1일)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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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5번= <blockquote no="10">通事李裕德 自遼東先馳報云 臣謁都司 王大人言 西有聲息甚急 外郞謝本曰 今七月二十日 達達 也先兵馬 夜入長城 廣寧摠兵官不知賊入 出校場散銀於軍士 也先兵馬直來 摠兵官與軍士奔入城內 閉門自守 也先兵馬圍城三重 虜軍卒一千馬八千匹 又自廣寧至遼東站路 人馬奪掠殆盡 先騎至遼東西門 臣亦狼狽出來</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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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6번= 라 하였다. 여기에 이른바 {{TagPerson|[[야선]]}}병마라는 것은 {{TagPerson|[[탈탈불화]]}} 병마의 잘못이나 곧 계속하여 <cite no="06">“是日夜二鼓報至 即召政府·兵曹·都鎭撫·議兩界陽備之事”</cite>라 하고 또 {{TagBook|[[세종실록|같은 책]]}} 기미 및 을축조에 이에 관련한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면 조선이 얼마만큼 이 사건을 중대시하였던가를 찰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와라군이 광녕을 습격한 후 곧 동남으로 향하여 조선으로 오게 된다면 위기는 순일지간에 절박하였던 것이니 통사 {{TagPerson|[[이유덕]]}}(李裕德)의 치보(馳報)가 이르자 심야임에도 불구하고 의정부·병조·도진무 등을 소집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TagBook|[[세종실록]]}} 권125, 31년 8월 기유(2일)조에는 이어서 대책협의에 관한 상세한 기재가 있는데 거기 의하면 자고로 변보가 많았으나 이때보다 더 중대한 적은 없었다고 하여 특히 지략과 경험이 많은 우찬성 {{TagPerson|[[김종서]]}}를 평안도 도절제사에 임명하고 이조참의 {{TagPerson|[[박강]]}}(朴薑)으로 평안도 도진무를 삼아 문신 {{TagPerson|[[이전수]]}}(李全粹)·{{TagPerson|[[구치관]]}}(具致寬) 두 사람을 이에 종속케 하며 좌찬성 {{TagPerson|[[박종우]]}}(朴從愚)를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공조참의 {{TagPerson|[[남우량]]}}(南祐良)으로 함길도 도진무를 삼아 문신 {{TagPerson|[[원효연]]}}(元孝然)·{{TagPerson|[[이영서]]}}(李永瑞) 두 사람을 이에 종속케 하며 경군 중에서 특히 사납고 날쌘 장사 60명을 선출하여 평안도에 40명 함길도에 20명을 배정하고 당시 제도의 병사는 단지 십수만에 불과하였으므로 군사를 더 모집할 방침을 수립하여 각 도에 타보(駝報) 소집케 되었으므로 중외가 시끄럽고 수선스러웠다고 한다. 이것이 와라 내침에 대비한 제2차 동원이다. 이때 향리 양산에 있던 전 지중추원사 {{TagPerson|[[이징석]]}}(李澄石) 전 도절제사 {{TagPerson|[[이징옥]]}}(李澄玉) 형제도 피소되었는데 그 아버지 전 중추 {{TagPerson|[[이전생]]}}(李全生)은 98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두 아들이 징소됨을 듣고 그들을 불러놓고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기를 격려한 가화(佳話)는 본고 벽두에 게재한 것과 같다. 같은 조에 <cite no="07">“左議政河演等啓……停今年行城之役 以休士卒 上曰善……時東西兩界困於築城 士馬勞憊 平安尤甚 猝有聲息 朝議恐賊闌入 無如之何”</cite>라 하여 제2차 동원과 동시에 당년도 행성 축조의 역을 정지한 것은 주목할 바로서 {{TagRefT|20}}같은 해 10월 요동의 정세가 얼마큼 평온해짐을 따라 평안도 도진무 {{TagPerson|[[박강]]}}을 소환하고 이어서 함길도 도체찰사 {{TagPerson|[[박종우]]}}도 소환하였지만<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26, 31년 10월 무신·정묘.</ref> {{TagRefT|21}}다음 해 5월 평안도 관찰사 {{TagPerson|[[한확]]}}(韓確)·평안도 도절제사 {{TagPerson|[[김종서]]}} 등이 또다시 행성의 역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음에 대하여 그 역군의 수를 줄이게 하였던 것이다.<ref group="a">{{TagBook|[[세종실록]]}} 권127, 32년 정월 임인.</ref> 이는 {{TagPerson|[[세종]]}}이 승하하시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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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7번= {{TagPerson|[[문종]]}}이 즉위하자 그해 3월 의정부의 헌의에 의하여 {{TagBook|[[동국병감]]}} 2권을 찬성하게 되었다. 이 {{TagBook|[[동국병감]]}}의 편찬은 우리 조선의 상고로부터 고려 말엽에 이르기까지의 외적 내침을 열거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방어책과 그 득실을 상고할 목적에서 나온 것이니 {{TagBook|[[문종실록]]}} 권1, 즉위 3월 을묘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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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8번= <blockquote no="11">議政府啓 方今中國有警 我國備邊之事 不可不慮 若中國歷代之事 稽之史冊可知 我國之事最宜先知 而專不知之 甚不可也 願自三國以至高麗 彼敵來侵之事 我國備禦之策 首尾得失 詳考採摭 以備觀覽 上曰 此意甚善 宜速撰集廣布 後撰成模印 名曰東國兵鑑</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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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9번= 이라 하였다. 유시관지(由是觀之)면 {{TagBook|[[동국병감]]}}은 확실히 상술한 바와 같은 정세 하의 제2차 동원의 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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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25일 (월) 02:32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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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군 문제 관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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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廢四郡問題管見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13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인영 역자 집필일자 1940년 8월 10일 게재연월 1941년 3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4쪽 전체쪽 034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소개글


澄玉父前中樞全生 年九十八 聞二子被召 置酒前二子而飮之曰 予年近百歲 位入樞府 身享二宰樞榮養 國家以爾等爲有用 同時徵召 願努力王事 勿以予老爲念 予人事已盡 死復何恨 執盞起舞而歌 聞者壯其志 而嘉李氏有子也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8월 기유조―

쪽수▶P1-1

澄玉父前中樞全生 年九十八 聞二子被召 置酒前二子而飮之曰 予年近百歲 位入樞府 身享二宰樞榮養 國家以爾等爲有用 同時徵召 願努力王事 勿以予老爲念 予人事已盡 死復何恨 執盞起舞而歌 聞者壯其志 而嘉李氏有子也
世宗實錄서적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已酉條―






본문


본문1: 서언


이조 초기에 있어서의 육진(경흥·경원·온성·종성·회령·부령) 개척과 사군(무창·여연·우예·자성) 설치가 조선 북방 발전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오늘날 평안북도 자성·후창 양군에 해당하는 사군 지방은 설치된 지 얼마 안 되어 단종인물 3년 을해(현대문주1▶세조인물 원년,[a 1] 명 경태 6년, 1453A.D.) 먼저 우예·여연·무창 3군이 철폐되고 이어서 세조인물 5년에는 자성군까지도 철폐되어 그 주민들은 전부 강계와 구성으로 이주하고 말았는데 그 후 이 지방을 ‘폐사군’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저명한 사실이다. 이 폐사군에 관한 연구로서는 일직 진전좌우길인물(津田左右吉) 박사가 현대문주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원고[a 2]라는 제목 하에 약간 논술한 바 있었고 또 고 뢰야마웅인물(瀨野馬熊) 씨 현대문주3▶조선폐사군고원고[a 3]라는 논문이 있는바 특히 후자는 전자가 이용할 기회를 얻지 못한 이조실록 읍지 등을 참조해 가지고 먼저 사군의 군치와 강역에 관한 상세한 지리적 고증하고 다음에 사군 설치로부터 철폐에 이르는 그간의 사정을 논술한 역작이다. 그러나 폐사군에 관한 문제는 이것을 전면적으로 관찰할 때 오늘까지의 연구는 극소한 그 일부분의 구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진전인물 박사나 뢰야인물 씨의 연구에 있어서도 나는 이를 다시 한번 검토할 필요를 느끼고 있는 이만치 수년 전 이 문제에 관한 신사료 원영주인물(元永胄) 일기와 이여절인물(李汝節) 수본(진단학회기관 소장 연경재전집서적 수록)이 출현하자 현대문주4▶종래의 사군 지명 고증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약간의 비견을 발표한 바 있었다.[a 4] 본 소고에 있어서는 세조인물조에 사군을 철폐한 원인에 대하여 과연 종래의 견해가 그 역사적 사건의 진상을 파촬(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재음미하는 동시에 또한 나의 견해를 진술코자 하는 바이다.
쪽수▶P2-1李朝 初期에 있어서의 六鎭(慶興·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 開拓과 四郡(茂昌·閭延·虞芮·慈城) 設置가 朝鮮 北方 發展史上 重要한 位置를 차지함은 다시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現今 平安北道 慈城·厚昌 兩郡에 該當하는 四郡 地方은 設置된 지 얼마 안 되어 端宗 三年 乙亥(원문주1▶世祖元年,[1] 明景泰 六年, 1453A.D.) 먼저 虞芮·閭延·茂昌 三郡이 撤廢되고 이어서 世祖 五年에는 慈城郡까지도 撤廢되여 그 住民들은 全部 江界와 龜城으로 移住하고 말었는데 그後 이地方 「廢四郡」이라고 불러온 것은 이미 著名한 事實이다. 이 廢四郡에 關한 硏究로서는 일즉 津田左右吉 博士가 원문주2▶「鮮初に於ける鴨綠江上流地方の領土」[2]라는 題目 下에 若干 論述한 바 있었고 또 故 瀨野馬熊 氏 원문주3▶「朝鮮廢四郡考」[3]라는 論文이 있는바 特히 後者는 前者가 利用할 機會를 얻지 못한 李朝實錄 邑誌 等을 參照해 가지고 먼저 四郡의 郡治와 疆域에 關한 詳細한 地理的 考證하고 다음에 四郡設置로부터 撤廢에 이르는 그間의 事情을 論述한 力作이다. 그러나 廢四郡에 關한 諸問題는 이것을 全面的으로 觀察할 때 今日까지의 硏究는 極少한 그 一部分의 究明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津田 博士나 瀨野 氏의 硏究에 있어서도 ▶P3-1나는 이를 다시 한번 檢討할 必要를 늣기고 있는 이만치 數年 前 이 問題에 關한 新史料 元永胄日記와 李汝節手本(震檀學會藏硏經齋全集所收)이 出現하자 원문주4▶從來의 四郡地名 考證에 對한 批判과 아울러 若干의 卑見을 發表한 바 있었다.[4] 本 小稿에있어서는 世祖朝에 四郡을 撤廢한 原因에 就하여 果然 從來의 見解가 그 歷史的 事件의 眞相을 把撮한 것인가 아닌가를 再吟味하는 同時에 또한 나의 見解를 陳述코자 하는 바이다.
이조가 태조인물의 건국 이래 정종인물·태종인물을 거처 제4대 세종인물 말년에 이르는 약 60년 동안에 전조 고려의 강역 이외인 함경도와 경계가 확실치 않던 압록강 상류지방을 개척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의 자연적 경계에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거기에 육진과 사군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관점에서 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북방 발전이라는 욕구는 적어도 고려 건국 이래 배양되어 온 조선사회의 이상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대원제국이 쇠망하고 명국의 새 세력이 아직 요동 방면에 확립치 못하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며, 셋째로는 고려 공민왕인물조에 동북면 병마사 유인우인물로 하여금 원나라 쌍성총관부(함경남도 영흥)를 탈취케 함으로써 시작된 국토확장책의 귀결인 것이며, 넷째로는 태조인물가 동북면(함경도) 출신인 것과 세종인물이 적극적 진취적 정책을 감행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세조인물조에 이르러 함경도 육진 방면에 있어서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압록강 상류 지방의 사군을 철폐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쪽수▶P3-2李朝가 太祖의 建國 以來 定宗·太宗을 거처 第四代 世宗 末年에 이르는 約 六十年 동안에 前朝 高麗의 疆域 以外인 咸鏡道와 境界가 確實치 않든 鴨綠江 上流地方을 開拓하여 鴨綠江과 豆滿江의 自然的 境界에까지 國土를 擴張하고 거기에 六鎭과 四郡을 두게 된 것은 무릇 네 가지 觀點에서 이를 理解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北方 發展이라는 欲求는 적어도 高麗 建國 以來 培養되여 온 朝鮮社會의 理想이었다는 것이며, 둘째로는 大元帝國이 衰亡하고 明國의 新勢力이 아직 遼東方面에 確立치 못하였다는 時代的 背景을 가지고 進行된 것이며, 셋째로는 高麗 恭愍王朝에 東北面 兵馬使 柳仁雨로 하여금 元나라 雙城摠管府(咸鏡南道 永興)를 奪取케 함으로써 始作된 國土擴張 策의 歸結인 것이며, 넷째로는 太祖가 東北面(咸鏡道) 出身인 것과 世宗이 積極的 進取的 政策 敢行한 것이 곧 그것이다. 그러면 世祖朝에 이르러 咸鏡道 六鎭 方面에있어서는 別다른 變化가 없었음에도 不拘하고 鴨綠江 上流地方의 四郡을 撤廢하였음은 어떠한 까닭인가.
사군이라는 명칭은 이것을 관제상으로 볼 때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다. 자성과 우예는 설치로부터 철폐까지 종시 군으로서 일관하였지만 여연은 세종인물 17년 군으로부터 도호부가 되고 무창은 그 설치로부터 2년을 경과한 세종인물 24년에 처음으로 현에서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러므로 철폐 당시로 말하면 일부삼군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편의상 이러한 시간적 관제상 관념을 버리고 종래의 상식적 관제상 명칭에 좇아 어떤 것이나 다 군 혹은 읍이라고 하여둔다.
쪽수▶P4-1四郡이라는 名稱은 이것을 官制上으로 볼 때 반다시 正當한 것은 아니다. 慈城과 虞芮는 設置로부터 撤廢까지 終始 郡으로서 一貫하였지만은 閭延은 世宗 十七年 郡으로부터 都護府가되고 茂昌은 그 設置로부터 二年을 經過한 世宗 二十四年에 처음으로 縣에서 郡으로 陞格하였다. 그러므로 撤廢 當時로 말하면 一府三郡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便宜上 이러한 時間的 官制上 觀念을 버리고 從來의 常識的 官制上 名稱에 좃차 어떤 것이나 다 郡 或은 邑이라고 하여둔다.




































본문2: 사군철폐의 내적 소인


사군철폐의 선구는 단종인물 3년 4월 자성군을 제외한 여연·무창·우예 삼군의 철폐로서 이는 세조인물가 즉위하기 3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단종인물 원년 세조인물(당시의 수양대군)는 안평대군인물 이하 영의정 황보인인물, 좌의정 김종서인물 등 반대당을 일소하고 이징옥인물의 반란을 평정한 후 중외 병마도통사가 되어 내외의 실권은 벌서 세조인물 일파의 수중에 있었던 때로서 우예 이북 삼군철폐론은 물론 세조인물 일파의 의도에서 나왔던 것이다. 단종실록서적 권14, 3년 4월 무자(14일)조에
쪽수▶P4-2四郡撤廢의 先驅는 端宗 三年 四月 慈城郡을 除外한 閭延·茂昌·虞芮 三郡의 撤廢로서 이는 世祖가 即▶P5-1位하기 三個月 前의 일이었다. 그러나 端宗 元年 世祖(當時의 首陽大君)는 安平大君 以下 領議政 皇甫仁 左議政 金宗瑞 等 反對黨을 一掃하고 李澄玉의 叛亂을 平定한 後 中外兵馬都統使가되여 內外의 實權은 벌서 世祖 一派의 手中에 있었든 때로서 虞芮 以北 三郡 撤廢論은 勿論 世祖 一派의 意圖에서 나왔든 것이다. 端宗實錄 卷十四, 三年 四月 戊子(十四日)條에

平安道都體察使朴從愚啓 臣巡審江邊諸邑諸口子 虞·閭延·茂昌則本邑軍士甚少 故都節制使以南道軍士臨時抄定往戍 有弊無益 當竝所屬諸堡革罷 其軍資義倉米穀分給慈城 江界之民 至秋各於其邑收納 江界乃後門巨鎭 且陳荒田地千餘結 古龜州乃賊路要衝 城基東西北三面據險 城內多水泉 又有可耕之地數千餘結 若復置守令 因古基築城設關 則可與義州·江界鼎足而峙, 相爲掎角控制賊路, 當以虞芮之民徙處江界 閭·茂昌之民……至是 都統府·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同議啓 平安道江邊諸邑諸口子因革 竝依都體察使所啓施行 龜州四面疆域 令觀察使審定 令吏曹擇慈祥勤儉人爲守令 其新徙之民 限五年 蠲免徭役 其所貸義倉之穀 三年後 收納龜州虞芮之民徙居江界者 亦依此施行 且三邑之民 不可置之度外 宜令慈城郡時遣兵探候 江界節制使 亦一年兩度巡察 從之

쪽수▶P5-2

平安道都體察使朴從愚啓 臣巡審江邊諸邑諸口子 虞·閭延·茂昌則本邑軍士甚少 故都節制使以南道軍士臨時抄定往戍 有弊無益 當竝所屬諸堡革罷 其軍資義倉米穀分給慈城 江界之民 至秋各於其邑收納 江界乃後門巨鎭 且陳荒田地千餘結 古龜州乃賊路要衝 城基東西北三面據險 城內多水泉 又有可耕之地數千餘結 若復置守令 因古基築城設關 則可與義州·江界鼎足而峙, 相爲掎角控制賊路, 當以虞芮之民徙處江界 閭·茂昌之民……至是 都統府·議政府堂上·六曹判書以上同議啓 平安道江邊諸邑諸口子因革 竝依都體察使所啓施行 龜州四面疆域 令觀察使審定 令吏曹擇慈祥勤儉人爲守令 其新徙之民 限五年 蠲免徭役 其所貸義倉之穀 三年後 收納龜州虞芮之民徙居江界者 亦依此施行 且三邑之民 不可置之度外 宜令慈城郡時遣兵探候 江界節制使 亦一年兩度巡察 從之

라 하였다. 이에 의하면 평안도 체찰사 박종우인물가 압록강 연안의 모든 읍·구자(만호를 둔 작은 성과 요새)를 돌아다니며 살핀 결과 우예·여연·무창 3읍은 각각 그 읍 군사의 수가 매우 적어서 청천강 이남의 (평안)남도 군사를 임시로 초출하여 삼읍을 지키게 한 까닭으로 유폐무익하다고 논하였으므로 이를 다시 도총부·의정부의 당상관 내지 육조판서들로 하여금 심의케 하여 드디어 박종우인물의 의견과 같이 3읍을 철폐하고 우예 주민을 강계로 여연·무창 주민을 옛 구주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던 것이다. 삼읍철폐에 대한 선후책에 관하여는 후일 다시 언급코자 하거니와 여하간 삼읍철폐는 평안도 도체찰사 박종우인물의 계에 의한 것이며 그 주요한 이유가 본읍 군사의 수가 매우 적어서 남도 군사가 왕래하며 지키기에는 폐해가 많을 뿐이라는 점에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그런데 평안도 도체찰사 박종우인물의 파견은 전전년 단종인물 원년 11월 검토관 양성지인물(梁誠之)의 계에 의한 것으로서 그 파견의 확실한 시일은 알 수 없으나 단종실록서적 권9, 원년 11월 갑인조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쪽수▶P5-3라 하였다. 이에 依하면 平安道 體察使 朴從愚가 鴨綠江 沿岸의 諸邑·諸口子(萬戶를 둔 小城堡)를 巡審한 結果 虞芮·閭延·茂昌 三邑은 各各 그 邑軍士의 數가 매우 저거서 清川江 以南의 (平安)南道軍士를 臨時로 抄出하여 三邑을 직하게 한 까닭으로 有弊無益하다고 論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都摠府·議政府의 堂上官 及 六曹判書들로 하여금 審議케 하여 드디어 朴從愚의 意見과 같이 三邑을 撤廢하고 虞芮 住民을 江▶P6-1界로 閭延·茂昌 住民을 古龜州로 移住시키기로 決定하였든 것이다. 三邑撤廢에 對한 善後策에 關하여는 後日 다시 言及코자 하거니와 如何間 三邑撤廢는 平安道 都體察使 朴從愚의 啟에 依한 것이며 그 主要한 理由가 本邑軍士의 數가 매우 저거서 南道軍士가 往戍함에는 弊害가 많을 뿐이라는 點에 있었든 것만은 事實이다. 그런데 平安道 都體察使 朴從愚의 派遣은 前前年 端宗 元年 十一月 檢討官 梁誠之의 啟에 依한 것으로서 그 派遣의 確實한 時日은 알 수 없으나 端宗實錄 卷九, 元年 十一月 甲寅條에는 다음과 같은 記事가 있다.

檢討官梁誠之 於經筵啓曰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盡賣田産, 因而逃散 流入遼潘者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命議于政府 啓曰 臣等亦知有此弊 然不可以一儒之言撤邊備 請遣大臣看審 然後定之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往審便否 從愚亦以誠之之言爲然 卽罷三邑 時邊人謂 復三年不罷 則兵民將自潰矣

쪽수▶P6-2

檢討官梁誠之 於經筵啓曰 今平安長城之役雖罷 閭延·茂昌·虞芮等郡隔在江邊 南道軍士越大嶺而戍守 人馬俱疲盡賣田産, 因而逃散 流入遼潘者甚多 雖棄三邑 大江限帶 我之封疆如舊 乞撤三邑之戍 以慈城爲界 以休南民 以固邦本 命議于政府 啓曰 臣等亦知有此弊 然不可以一儒之言撤邊備 請遣大臣看審 然後定之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往審便否 從愚亦以誠之之言爲然 卽罷三邑 時邊人謂 復三年不罷 則兵民將自潰矣

검토관 양성지인물가 여연·무창·우예 등 삼군철폐를 주장한 이유는 대략 두 가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여연 등 삼군은 압록강변에 따로 떨어져 있으므로 세종인물조 이래 압록강 연안 곳곳에 여진인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막대한 경비와 인부를 써가며 역사 중이던 장성(혹 행성이라고도 함) 축조는 이를 이미 정지하였다고 하더라도 삼읍 수수(戍守)는 남도 군사가 적유령·마전령 같은 큰 고개를 넘어서 가야만 되는 고로 사람과 말이 공히 피로하고 그 까닭에 평안도 인민 중에는 전산(田產)을 팔고 만주 방면으로 유입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며, 둘째로 삼읍을 철폐하더래도 압록강이 가로질러 있으므로 국토는 조금도 멸축되는 일이 없이 옛과 같다는 것이 또 한 가지 이유였다. 그러므로 삼읍의 수수(戍守)를 철폐함으로써 인민의 로고를 덜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양성지인물의 주창에 대하여 의정부도 역시 동감이었으나 처리를 신중히 하기 위하여 운성부원군 박종우인물를 평안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다시 한번 삼읍의 사정을 심찰케 하였던 것이다.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 운운 이하는 단종실록서적 편찬자의 말이지만 당시 변인(邊人)들이 복3년에 철파치 않으면 병사와 인민들이 스스로 무너지리라 하였다는 것을 보면 사군 지방의 유지가 얼마나 곤란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사군지방 국경 수비의 어려움은 단종인물조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었다. 태종인물조의 여연군 설치 이래 세종인물조의 사군정비에 있어서 가지가지 곤란을 맛보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사군지방의 지형이 깊이 만주 방면에 두입(斗入)하여 있을 뿐 아니라 산악이 중첩하여 교통이 불편하고 토지가 비옥치 못한 이만치 군사의 파견과 군량 운반에 있어서 적지 않은 고심을 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종인물조에 있어서도 벌써부터 정중에는 이 방면 방비의 개혁을 주장한 사람도 없지 않었으나 진취적인 세종인물은 단연 그러한 의견을 물리치고 조종의 강역은 결코 퇴축(退縮)치 못하리라는 자각 하에 오히려 적극적 시설을 감행하여 왔었다. 세종인물의 이러한 적극적 정책에 대하여서는 뢰야인물 씨도 전게 논문 중에서 논술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거듭 노노히 발명치 않기로 하나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注意를 要하는 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世宗朝에 있어서는 사군 중의 어떤 한 군일지라도 그 전 군을 들어서 철폐를 주장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니 당시방수의 곤란을 들어서 개폐을 논한 것은 다만 압록강 연변 1, 2구자(성보)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직껏 세종인물에 있어서는 삼군 내지 일군 전체를 철폐하자는 의론은 없었던 것이다. 이 점은 특히 주목할 바이다. 그러면 일군 내지 수군 존폐 문제가 발생한 최초는 언제인가.
쪽수▶P6-3檢討官 梁誠之가 閭延·茂昌·虞芮 等 三郡撤廢을 主張한 理由은 大略 두 가지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로 閭延 等 三郡은 鴨綠江邊에 따루 떠러저 있음으로 世宗朝 以來 鴨綠江 沿岸 處處에 女眞人의 侵入을 맛기 爲하여 莫大한 經費와 人夫를 써가며 役事 中이든 長城(或 行城이라고도 함) 築造는 이를 이미 停止하였다고 하드래도 三邑戌守에는 南道軍士가 狄踰嶺·麻田嶺같은 大嶺을 넘어서 가야만 되는 故로 人馬 共히 疲勞하고 그 까닭에 平安道 人民 中에는 田產을 팔고 滿洲 方面으로 流入하는 者가 많다는 것이 한 가▶P7지 理由이며, 둘째로 三邑을 撤廢하드래도 鴨綠江이 가루질려 있음으로 國土는 조금도 滅縮되는 일이 없이 如舊하다는 것이 또 한 가지 理由이었다. 그러므로 三邑의 戊守를 撤廢함으로써 人民의 勞苦를 덜게 하자는 것이었다. 이 梁誠之의 主唱에 對하여 議政府도 亦 同感이었으나 處理를 慎重히 하기爲하여 雲城府院君 朴從愚를 平安道 都體察使에 任命하고 다시 한번 三邑의 事情을 審察케 하였든 것이다. 「後遣雲城府院君朴從愚」 云云 以下는 端宗實錄 編纂者의 말이지만 當時 邊人들이 復三年에 撤罷치 않으면 兵民이 自潰하리라 하였다는 것을보면 四郡地方의 維持가 얼마나 困難하였든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四郡地方 防戍의 辛苦는 端宗朝에 처음 생긴 일은 아니었다. 太宗朝의 閭延郡 設置 以來 世宗朝의 四郡整備에있어서 가지가지 困難을 맛보았음은 두 말할 것도 없는 것으로 四郡地方의 地形이 깊이 滿洲 方面에 斗入하여 있을 뿐 아니라 山岳이 重疊하여 交通이 不便하고 土地가 肥沃치 못한 이만치 軍士의 派遣과 軍糧運搬에 있어서 적지 않은 苦心를 要하였든 것이다. 그러므로 世宗朝에 있어서도 벌서부터 廷中에는 이 方面 防備의 改革 主張한 사람도 없지 않었으나 進取的인 世宗은 斷然 그러한 意見을 물러 치고 祖宗의 彊域은 決코 退縮치 못하리라는 自覺 下에 오히려 積極的 施設을 敢行하여 왔었다. 世宗의 이러한 積極的 政策에 對하여서는 瀨野 氏도 前揭 論文 中에서 論述한 바 있음으로 여기서는 거듭 呶呶 發明치 않기로하나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注意를 要하는 點이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世宗朝에 있어서는 四郡 中의 어떤 한 郡일지라도 그 全郡을 들어서 撤廢을 主張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니 當時▶P8-1防戍의 困難을 들어서 改廢을 論한 것은 다만 鴨綠江 沿邊 一二口子(城堡)에 關한 것뿐이었다. 아직껏 世宗朝에 있어서는 三郡 乃至 一郡 全體를 撤廢하자는 議論은 없었든 것이다. 이 點은 特히 注目할 바이다. 그러면 一郡 乃至 數郡 存廢 問題가 發生한 最初는 언제인가.
우예 이북 삼군 존폐 문제가 의논케 된 최초는 문종인물이 즉위한 해 8월이었다. 그 전말에 관한 기록은 문종실록서적 권3, 즉위 8월 정유조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쪽수▶P8-2虞芮 以北 三郡 存廢 問題가 議論케 된 最初는 文宗이 即位한 해 八月이었다. 그 顚末에 關한 記錄은 文宗實錄 卷三, 即位 八月 丁酉條에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召河·南智·金宗瑞·鄭甲孫等, 議革平安道沿邊不緊各口子萬戶及軍兵 僉曰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 南道各官防戍軍士 亦皆因此疲弊 固無利益 其弊甚鉅 宜皆革罷 以慈城爲界 今此深入設關防 實非萬世長策 自朝至日昃 堅執其議 上頗然之 令左承旨鄭而漢 與大臣更議 仍出兩界沿邊地圖以示之 而漢啓曰 臣爲都體察使皇甫仁從事官 巡行兩界 已十年矣 沿邊郡邑關防排置之事 仁一依世宗布置之策 爲之耳 我世宗以高世之見創物之智 明見萬里 備邊之事無不洞照 兩界沿邊要害之處 大城小堡星羅碁市 前後相望 邊警息矣 聖謨洋洋 豈至今日遽忍革之哉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諸大臣曰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上曰 世宗已曾布置之事 何不議其固守之策 而反獻革罷之議乎 事遂寢

쪽수▶P8-3

召河·南智·金宗瑞·鄭甲孫等, 議革平安道沿邊不緊各口子萬戶及軍兵 僉曰 平安道沿邊 不緊各口子頗多 自虞芮至茂昌各官各口子 徙入江邊 土地褊少塉薄 民不聊生 南道各官防戍軍士 亦皆因此疲弊 固無利益 其弊甚鉅 宜皆革罷 以慈城爲界 今此深入設關防 實非萬世長策 自朝至日昃 堅執其議 上頗然之 令左承旨鄭而漢 與大臣更議 仍出兩界沿邊地圖以示之 而漢啓曰 臣爲都體察使皇甫仁從事官 巡行兩界 已十年矣 沿邊郡邑關防排置之事 仁一依世宗布置之策 爲之耳 我世宗以高世之見創物之智 明見萬里 備邊之事無不洞照 兩界沿邊要害之處 大城小堡星羅碁市 前後相望 邊警息矣 聖謨洋洋 豈至今日遽忍革之哉 雖不得闢國 其可蹙祖宗封疆乎 雖寸土 不可蹙也 諸大臣曰 虞芮以上 今雖革罷 限以鴨綠大江 彼人不得入居于此 固非蹙地之例也 上曰 世宗已曾布置之事 何不議其固守之策 而反獻革罷之議乎 事遂寢

이때 중신급에 있던 하연인물·남지인물·김종서인물·정갑손인물 등의 우예 이북 삼군을 철폐하자는 이유를 볼진대 이 역시 지리적으로는 삼군이 적지에 튀어나와 있을 뿐만 아니라 토지가 춘박(椿薄)하여 백성이 살기 어려운 것, 군사적으로는 (평안)남도 각읍의 군사가 방수왕환(防戍往還)에 있어서 폐해가 많은 것, 또 우예 이북 삼군을 철폐하더라도 압록강을 끼고 있음으로 여진인이 거기에 입거치 못할 것으로 그 지방이 우리 국토임에는 변함이 없다는 등이었다.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그들은 종일 삼군의 폐지를 주장하였으므로 문종인물도 처음 는 그럴듯이 생각하고 도승지 정이한인물 등에게 명하여 서북양계연변지도까지 내주어 다시 의논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찍 도체찰사 황보인인물의 종사관으로서 북방 개척에 종사한 일이 있는 정이한인물은 북경의 변비가 오로지 세종대왕인물의 성모(聖謨)에서 나온 것을 역설하여 비록 국토를 넓히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조종의 봉강(封疆)을 줄일 수야 있겠는가 하는 세종인물의 적극적 방침 그것을 그대로 다시 주창함에 이르러 문종도 일직 세종대왕인물이 포치(布置)한 일인데 어찌 그 고수책을 의론치 않고 도리어 폐지책을 주장하는가 하여 드디어 삼군철폐의 의견을 물리치고 말었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우리의 주의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찍 세종인물조에 있어서 함경도 육진 개척에 가장 큰 공로를 남긴 김종서인물 그이가 이때 삼군 철폐를 주창한 중의 한 사람인 점이다. 세종인물 15년(명 선덕 8년) 오음회(지금 회령)의 알타이족 건주좌위 추장 동맹가첩목아인물와 그 맏아들 권두인물(權豆(관두(管豆)))는 당시 개원 방면으로부터 남하한 혐진 올적합족의 추장 양목탑올인물에게 피살된 사건은 동북면(함경도) 개척에 있어서 일대 전환기가 되었던 것으로서 이 기회를 이용하여 조선서는 여진족의 구축과 북경 확장에 적극적 정책을 취하게 되었거니와 이때 세종인물이 함길도 관찰사로서 중용한 이는 실로 김종서인물 그이었다. 이래 김종서인물세종인물의 적극적 정책을 받들어 육진 개척에 진력하였음은 다같이 아는 사실로 세종인물현대문주5▶“雖有寡人 若無宗瑞 不足以辦此事 雖有宗瑞 若無寡人 不足以主此事”[a 5]라고까지 하였다고 전한다. 육진 개척과 삼군 철폐―이는 서로 모순되는 적극 소극의 대립이다. 어떠한 연유로 세종인물을 받들어 함경도 방면에 있어서는 적극책을 취하여 온 김종서인물가 이때 평안도 방면에 있어서는 소극책를 주장하였는가. 현대문주6▶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보담 앞서 세종인물 32년 정월 평안도 병마 도절제사로서 압록강 연안 행성(장성) 축조역의 정지를 청하였고[a 6] 현대문주7▶같은 해(문종인물 즉위 후) 7월에는 우예·태일·만포 등 삼만호의 철폐를 주창한 바도 있었으니[a 7] 이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뢰야인물 씨는 사군 유지의 곤란과 이에 대한 세종인물·문종인물의 고심을 지적한 후에 현대문주8▶“さて四郡廢棄說が世祖の時に至つてかく急に實行さるしに至つたのは, どういふ譯であるかと云ふに, 畢竟, 此の時には廷臣等の説が既に悉く廢棄に一致して居たのと, 世祖は北邊經營に開して世宗のやうな進取的意見を抱持して居なかったのと, 王の果斷な性質とに因るであらうが, 又一方から見ると世祖の即位が大體辛辣な手段を用ひて端宗から王位を無理に捥ぎ取ったのであるから, 廷臣中には成三問等六臣のやうな註略又宗室には錦城大君瑜の如き註略非常手段を用ひて端宗の位を復せんと企つる人々もあり, 鮮廷の内外にはそんな邊疆問題よりも當面の内治を先にせねばならぬといふ立場にあつたからであるやうに思はれる.”[a 8] 운운이라 하여 세조인물조에 이르러 갑자기 사군 폐기를 실행케 된 이유를 (1) 정신의 의견 일치, (2) 세조인물가 북변 경영에 관하여 진취적 의견을 안 가졌던 것, (3) 세조인물 즉위의 과단성, (4) 세조인물 즉위의 사정이 찬탈인 만치 변경 문제보다도 내치에 치중하는 정책을 취하게 된 것 등 몇 가지를 들었다. 물론 세조인물가 북변 경영에 진취적이 아니었다는 데 대하여는 나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지만 대체로 상식적인 점에 있어서 이러한 견해도 타당치 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만으로서 충분할 것인가. 사군철폐에는 앞서 지적해 둔 김종서인물 그이에 대한 의문의 해석과 아울러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쪽수▶P8-4이때 重臣級에 있든 河演·南智·金宗瑞·鄭甲孫 等의 虞芮 以北 三郡을 撤廢하자는 理由를 볼진대 이 亦是 地理的으로는 三郡이 敵地에 斗하여 있을 뿐만 아니라 土地가 椿薄하여 百姓이 살기 어려운 것, 軍事▶P9的으로는 (平安)南道 各邑의 軍士가 防戍往還에있어서 弊害가 많은것, 또 虞芮 以北 三郡을 撤廢하더라도 鴨綠江을 끼고 있음으로 女眞人이 거기에 入居치 못할 것으로 그 地方이 우러 國土임에는 變함이 없다는 等이었다. 이러한 理由를 들어서 그들은 終日 三郡의 廢止을 主張하였음으로 文宗도 처음 는 그럴듯이 생각하고 都承旨 鄭而漢 等에게 命하여 西北兩界沿邊地圖까지 내주어 다시 議論케 하였든 것이다. 그러나 일즉 都體察使 皇甫仁의 從事官으로써 北方 開拓에 從事한 일이 있는 鄭而漢은 北境의 邊備가 오로지 世宗大王의 聖謨에서 나온 것을 力說하여 비록 國土를 널리지는 못할지언정 엇지 祖宗의 封疆을 주릴 수야 있겠는가 하는 世宗의 積極的 方針 그것을 그대로 다시 主唱함에 이르러 文宗도 일측 世宗大王이 布置한 일인데 엇지 그 固守策 議論치 않고 도로혀 廢止策을 主張하는가 하여 드디어 三郡撤廢의 意見을 물리치고 말었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우리의 注意를 이끄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일죽 世宗朝에 있어서 咸鏡道 六鎭 開拓에 가장 큰 功勞를 남긴 金宗瑞 그이가 이때 三郡 撤廢를 主唱한 中의 한 사람인 點이다. 世宗 十五年(明宣德八年) 吾音會(今 會寧)의 斡朶里族 建州左衛 酋長 童猛哥帖木兒과 그 長子 權豆(管豆)는 當時 開原 方面으로부터 南下한 嫌眞 兀狄哈族의 酋長 楊木塔兀에게 被殺된 事件은 東北面(咸鏡道) 開拓에 있어서 一大 轉換期가 되였든 것으로서 이 機會를 利用하여 朝鮮서는 女眞族의 驅逐과 北境 擴張에 積極的 政策를 取하게 되였거니와 이때 世宗이 咸吉道 觀察使로써 重用한 이는 實로 金宗瑞 그이었다. 爾來 金宗瑞가 世宗의 積極的 政策를 받들어 六鎭 開拓에 盡力하▶P10였음은 다같이 아는 事實로 世宗도 원문주5▶「雖有寡人 若無宗瑞 不足以辦此事 雖有宗瑞 若無寡人 不足以主此事」[5]라고까지 하였다고 傳한다. 六鎭 開拓과 三郡 橄廢―이는 서로 矛盾되는 積極 消極의 對立이다. 如何한 緣由로 世宗을 받들어 咸鏡道 方面에있어서는 積極策을 取하여 온 金宗瑞가 이때 平安道 方面에 있어서는 消極策를 主張하였는가. 원문주6▶「그뿐만 아니라 그는 이보담 앞서 世宗 三十二年 正月 平安道 兵馬 都節制使로써 鴨綠江 沿岸行城(長城)築 造役의 停止를 請하였고[6] 원문주7▶同年(文宗 即位 後) 七月에는 虞芮·泰日·滿浦 等 三萬戶의 撤廢를 主唱한 바도 있었으니[7] 이를 如何히 解釋할 것인가. 瀨野 氏는 四郡 維持의 困難과 이에 對한 世宗·文宗의 苦心을 指摘한 後에 원문주8▶「さて四郡廢棄說が世祖の時に至つてかく急に實行さるしに至つたのは, どういふ譯であるかと云ふに, 畢竟, 此の時には廷臣等の説が既に悉く廢棄に一致して居たのと, 世祖は北邊經營に開して世宗のやうな進取的意見を抱持して居なかったのと, 王の果斷な性質とに因るであらうが, 又一方から見ると世祖の即位が大體辛辣な手段を用ひて端宗から王位を無理に捥ぎ取ったのであるから, 廷臣中には成三問等六臣のやうな註略 又宗室には錦城大君瑜の如き註略非常手段を用ひて端宗の位を復せんと企つる人々もあり, 鮮廷の内外にはそんな邊疆問題よりも當面の内治を先にせねばならぬといふ立場にあつたからであるやうに思はれる.」[8] 云云이라 하여 世祖朝에 이르러 갑자기 四郡廢棄를 實行케 된 理由를 (1) 廷臣의 意見 一致, (2) 世祖가 北邊經營에 關하여 進取的 意見을 안 가졌든 것, (3) 世祖 即位의 果斷性, (4) 世祖 即位의 事情이 纂奪인 만치 邊境 問題보담도 內治에 置重하는 政▶P11-1策을 取하게 된 것 等 멧가지를 들었다. 毋論 世祖가 北邊經營에 進取的이 아니었다는 데 對하여는 나는 딴 見解를 가지고 있지만 大體로 常識的인 點에 있어서 이러한 見解도 妥當치 않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見解만으로서 充分할 것인가. 四郡撤廢에는 앞서 指摘해 둔 金宗瑞 그이에 對한 疑問의 解釋과 아울러 좀 더 根本的인 理由가 있을 것이다.
여하튼 이상과 같은 종래의 견해는 마단 사군철폐의 내적 원인을 지적하였음에 불과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서는 사군철폐의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러한 내적 소인 이외에 외적 도인이 존재하여 외적 도인은 내적인 그것보다도 오히려 중차대하게 생각되는 까닭이다. 현대문주9▶우리 조선과 여진인과의 관계는 경제적 교섭이 원만히 진행하는 한에 있어서 거기에는 별다른 군사적 정치적 사건은 생기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a 9] 그러면 그 외적 도인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쪽수▶P11-2如何튼 以上과 같은 從來의 見解은 마단 四郡撤廢의 內的 原因을 指摘하였음에 不過한 것으로서 그것만으로서는 四郡撤廢의 事情 充分히 理解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그러한 內的 素因 以外에 外的 導因이 存在하여 外的 導因은 內的인 그것보담도 오히려 重且大하게 생각되는 까닭이다. 원문주9▶우리 朝鮮과 女眞人과의 關係는 經濟的 交涉이 圓滿히 進行하는 限에 있어서 거기에는 別다른 軍事的 政治的 事件은 생기지 않는 것이 普通이다.[9] 그러면 그 外的 導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본문3: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상)


대원제국이 쇠미하여 사막의 북쪽에 퇴각한 이후 동몽고의 달단부는 때때로 명나라의 토정를 받아 피폐하여진 데 대하여 서몽고의 와랄부는 명 선덕 말년에 몽고 내부의 경쟁자인 달단의 화녕왕 아로태인물(阿魯台)를 쓰러트리고 점차로 강대하여졌는데 와랄의 실권을 장악한 탈환인물(脫歡)은 원나라 황실의 후예 탈탈불화인물(脫脫不花)왕을 추대하여 한위(汗位)에 올려놓았다. 탈환의 사후 그 아들 야선이 그 아버지의 대를 계승하자 와랄부는 더욱 맹권을 사린에 펼치게 되여 그 세력이 서로는 중앙아시아에 미치고 동으로는 만주를 도약하여 우리 조선 북경에까지 미칠려고 하였으며 남으로는 명나라 북변을 위협하고 드디어 정통 14년(조선 세종인물 31년)8월 명 영종 황제를 토목(하북성)에서 사로잡게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와랄의 대외 세력은 내부의 분쟁으로 말미암아 오래 계속되지 못하였지만 와랄의 만주 경략에 관하여는 화전청인물(和田淸) 박사의 현대문주10▶兀良哈三衛に關する硏究원고[a 10] 중에 상술한 바 있어 만주사상 저명한 사건의 하나이다. 마문승인물무안동이기서적(撫安東夷記)에는 정통 14년 와랄 활동을 기술한 다음
쪽수▶P12-1大元帝國이 衰微하여 漠北에 退却한 以後 東蒙古의 韃靼部는 때때로 明나라의 討征를 받어 疲弊하여진 데 對하여 西蒙古의 瓦剌部는 明宣德 末年에 蒙古 內部의 競敵인 韃靼의 和寧王 阿魯台를 꺼꾸러 트리고 漸次로 强大하여졌는데 瓦剌의 實權을 掌握한 脫歡은 元나라 皇室의 遺裔 脫脫不花王을 推戴하여 汗位에 올려놓았다. 脫歡의 死後 그 子 也先이 그 父의 代를 繼承하자 瓦剌部는 더욱 猛權을 四隣에 펼치게 되여 그 勢力이 西로는 中央亞細亞에 및고 東으로는 滿洲를 跳躍하여 우리 朝鮮 北境에까지 및을려고 하였으며 南으로는 明나라 北邊을 威脅하고 디디어 正統 十四年(朝鮮世宗 三十一年)八月 明英宗 皇帝를 土木(河北省)에서 사루잡게 된 것은 周知의 事實이다. 瓦剌의 對外 勢力은 內部의 紛爭으로 말미암아 오래 繼續되지 못하였지만은 瓦剌의 滿洲 經略에 關하여는 和田淸 博士의 원문주10▶「兀良哈三衛に關する硏究」[10] 中에 詳述한 바 있어 滿洲史上 著名한 事件의 하나이다. 馬文升의 撫安東夷記에는 正統 十四年 瓦剌 活動을 記述한 다음

至景泰後 始克寧證 而海西野人女直之有名者 率死于也先之亂 朝廷所賜璽書 盡爲也先所取 其子孫以無授官璽書可徵 不復承襲 雖歲遣使入貢 第名曰舍人 以是道不得乘傳 置錫宴不得預上席 賞賚視昔又薄 皆忿怨思亂 遼東人咸知之而時未有以處之也

쪽수▶P12-2

至景泰後 始克寧證 而海西野人女直之有名者 率死于也先之亂 朝廷所賜璽書 盡爲也先所取 其子孫以無授官璽書可徵 不復承襲 雖歲遣使入貢 第名曰舍人 以是道不得乘傳 置錫宴不得預上席 賞賚視昔又薄 皆忿怨思亂 遼東人咸知之▶P13-1而時未有以處之也

라 하여 야선인물(也先)의 만주 경략에 의한 해서(海西) 등 여진인의 경제적, 정치적 타격을 지적하였거니와 와라의 만주 경략은 특히 해서 여진에 있어서 상당히 철저적이어서 이후 만주에 있어서의 여진인의 중심 세력은 해서로부터 건주로 옮아가게 되였다. 그러면 와라의 만주 경략은 얼마나 한 정도로 조선에 영향을 미쳤을까. 명 정통 13년은 우리 조선 세종인물 29년에 해당한다. 와랄은 현대문주11▶올량합 삼위[a 11]를 유린한 후 장차 그 동린인 해서 여직을 굴복시킬려고 했을 때로서 이러한 정세는 사은사(謝恩使) 이양인물(李穰)의 조선 귀국으로 인하여 곧 조선서도 알게 되었다. 세종실록서적 권116, 29년 윤4월 병자(15일) 조에
쪽수▶P13-2라 하여 也先의 滿洲 經略에 依한 海西 等 女眞人의 經濟的 政治的 打擊을 指摘하였거니와 瓦剌의 滿洲 經略은 特히 海西 女直에 있어서 相當히 徹底的이어서 以後 滿洲에 있어서의 女眞人의 中心 勢力은 海西로부터 建州로 올마가게 되였다. 그러면 瓦剌의 滿洲 經略은 얼마나 한 程度로 朝鮮에 影響을 미쳤을가. 明 正統 十三年은 우리 朝鮮 世宗 二十九年에 該當한다. 瓦剌은 원문주11▶兀良哈 三衛[11]를 蹂躪한 後 장차 그 東隣인 海西 女直을 屈服식힐려고 했을 때로서 이러한 情勢는 謝恩使 李穰의 歸朝로 因하여 곧 朝鮮서도 알게 되 였다. 世宗實錄 卷一百十六, 二十九年 閏四月 丙子(十五日) 條에

謝恩使工曹參判李穰 回自京師言 遼東摠兵官曹義言 今夏 深處達達討平三衛達子 欲攻海西野人 恐將深入後門 須啓殿下 謹愼備邊 遂下諭書于平安·咸吉道 申嚴隄備

쪽수▶P13-3

謝恩使工曹參判李穰 回自京師言 遼東摠兵官曹義言 今夏 深處達達討平三衛達子 欲攻海西野人 恐將深入後門 須啓殿下 謹愼備邊 遂下諭書于平安·咸吉道 申嚴隄備

라 한 것이 그것으로 소위 후문은 조선의 북경 함경도 방면을 가리킨 것이다. 이보다 10여 일 후인 동 무자(27일) 조, 통사 최윤인물(崔倫)의 계에도 “中國人言 深處達達 瓦刺也先 將兵億萬 幾殲三衛達子 又於夏秋間 謀襲海西野人 野人畏偃 鄯家登山”이라 하여 역시 같은 말이 보이는데 같은 해 6월 평안도 관찰사에게 내린 유(諭)를 보면
쪽수▶P13-4라 한 것이 그것으로 所謂 後門은 朝鮮의 北境 咸鏡道 方面을 가라친 것이다. 이보담 十餘日 後인 同戊子(二十七日) 條, 通事 崔倫의 啓에도 「中國人言 深處達達 瓦刺也先 將兵億萬 幾殲三衛達子 又於夏秋間 謀襲海西野人 野人畏偃 鄯家登山」이라 하여 亦是 같은 말이 보이는데 同年 六月 平安道 觀察使에게 내린 諭를 보면

현대문주12▶今通事金辛 回自遼東啓 達達也先太師屯兵黃(潢)河〇遼河上流 西喇木倫河 冬月 欲攻海西野人 遼東閱軍隄備 建州李滿住曾往北京 自請扈從 閏四月 挈家赴京 童倉·凡察亦無如之何 欲將向東屯居 予料也先 旣滅三衛 欲殲海西 諸種野人 莫不畏懼不敢寧居 蓋其勢方張如此 其盛將來之變 難以盡知 卿密知此意 一應防禦諸事 預愼布置[a 12]

쪽수▶P13-5

원문주12▶今通事金辛 回自遼東啓 達達也先太師屯兵黃(潢)河〇遼河上流 西喇木倫河 冬月 欲攻海西野人 遼東閱軍隄備 建州李滿住曾往北京 自請扈從 閏四月 挈家赴京 童倉·凡察亦無如之何 欲將向東屯居 予料也先 旣滅三衛 欲殲海西 諸種野人 莫不畏懼▶P14-1不敢寧居 蓋其勢方張如此 其盛將來之變 難以盡知 卿密知此意 一應防禦諸事 預愼布置[12]

라 하여 조선서는 야선인물 대사의 내침보다도 야선의 해서 공략에 의한 영향을 더 중대시하고 따라서 건주 여진 추장 이만주인물·동창인물·범찰인물 등이 조선으로 몰려올 것을 우려하여 평안도의 방비를 굳게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럼으로 현대문주13▶같은 해 9월에는 하삼도(충청·전라·경상) 및 서울 중의 미곡을 모아 황해도와 평안도로 수송하여 군수에 충당케 하였는데[a 13] 현대문주14▶이는 당시 평안도 방면의 변비가 함경도 방면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빈약하였던 까닭이다.[a 14]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당인압송관 김유례인물(金有禮)가 요동서 치계하되 현대문주15▶“也先率兵數萬 屯黃河〇潢河上 帝勅諭遼東隄備曰 也先將幷朝鮮打擾”[a 15]라 하여 장차 야선인물의 병마가 조선에까지 미치리라는 정보를 보내자 조선에서는 이에 대하여 처음으로 적극적 방어책을 강구하게 되었던 것이니 현대문주16▶김효성인물(金孝誠)을 평안도 도절제사 이확인물(李穫)을 강계 절제사 박호문인물(朴好問)을 삭천 절제사 조석강인물(趙石岡)을 판의주 목사에 임명하고 만약 야선인물이 친히 중병을 거느리고 올 때는 이와 일전을 상교할 결심까지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a 16] 이것을 편의상 와랄 내침에 대비한 제1차 동원이라고 하여 두자. 이 제1차 동원을 계기로 해서 가장 주목되는 바는 압록강 연변 방어책이 종래의 그것과는 달라진 점이니 현대문주17▶군사상으로 연변의 군읍을 강계와 삭천 양도에 나누어 각각 2품 이상의 절제사를 두고 위원·자성·우예·여연·무창 강계도에 이산·벽단·창성·정녕·의주·인산을 삭천도에 속하게 하며 도절제사영을 영변에 두고 연변 구자의 세약고단(勢弱孤單)한 것은 병합해서 방무케 하였다.[a 17] 연변 방어책은 다음 해 만주의 정세수화(情勢綏和)로 말미암아 복구되었으나 그러나 드디어 자성군 서해구자(자성군 삼흥면 서해동)의 만호는 철폐되고 말었으니 세종실록서적 권119, 30년 3월 갑진 조에
쪽수▶P14-2라 하여 朝鮮서는 也先大師의 來侵보담도 也先의 海西 攻略에 依한 影響을 더 重大視하고 따라서 建州 女眞 酋長 李滿住·童倉·凡察 等이 朝鮮으로 몰려올 것을 憂慮하여 平安道의 防備를 굿게 할려고 하였든 것이다. 그럼으로 원문주13▶同年 九月에는 下三道(忠淸·全羅·慶尙) 及 京中의 米穀을 모와 黃海道와 平安道로 輸送하여 軍需에 充當케 하였는데[13] 원문주14▶이는 當時 平安道 方面의 邊備가 咸鏡道 方面의 그것에 比하여 훨신 貧弱하였든 까닭이다.[14] 그러나 얼마 안 되여 唐人押送官 金有禮가 遼東서 馳啟하되 원문주15▶「也先率兵數萬 屯黃河〇潢河上 帝勅諭遼東隄備曰 也先將幷朝鮮打擾」[15]라 하여 장차 也先의 兵馬가 朝鮮에까지 밋츠리라는 情報를 보내자 朝鮮서는 이에 對하여 처음으로 積極的 防禦策을 講究케 되였든 것이니 원문주16▶즉 金孝誠을 平安道 都節制使 李穫을 江界 節制使 朴好問을 朔川 節制使 趙石岡을 判義州 牧使에 任命하고 萬若 也先이 親히 重兵을 거나리고 올 때는 이와 一戰을 相交할 決心까지 가지게 되였든 것이다.[16] 이것을 便宜上 瓦剌 來侵에 對備한 第一次 動員이라고 하여 두자. 이 第一次 動員을 契機로 해서 가장 注目되는 바는 鴨綠江 沿邊 防禦策이 從來의 그것과는 달라진 點이니 원문주17▶軍事上으로 沿邊의 郡邑을 江界와 朔川 兩道에 나누어 各各 二品 以上의 節制使를 두고 渭原·慈城·虞芮·閭延·茂昌 江界道에 理山·碧團·昌城·定寧·義州·麟山을 朔川道에 屬하게 하며 都節制使營을 寧邊에 두고 沿邊口子의 勢弱孤單한 것은 併合해서 防戊케 하였다.[17] 沿邊 防禦策은 翌年 滿洲의 情勢綏和로 말미암어 復舊되였으나 그러나 드디어 慈城郡 西解口子▶P15-1(慈城郡 三興面 西海洞)의 萬戶는 撤廢되고 말었으니 世宗實錄卷 一百十九, 三十年 三月 甲辰 條에

議政府據兵曹呈啓 平安道慈城郡西解口子 人稱土瘠 又爲鴨綠江分流之處 行城亦難築 勢甚孤單 不宣民居 請罷西解萬戶 移其民于奉浦等處……從之

쪽수▶P15-2

議政府據兵曹呈啓 平安道慈城郡西解口子 人稱土瘠 又爲鴨綠江分流之處 行城亦難築 勢甚孤單 不宣民居 請罷西解萬戶 移其民于奉浦等處……從之

라 한 것이 그것으로 이후 다시 만주 정세의 급박과 이에 대한 제2차·제3차 동원을 거처 드디어 사군철폐에까지 진전함으로 이하 와라 활동에 대하여 추급하여 보자.
쪽수▶P15-3라 한 것이 그것으로 이後 다시 滿洲 情勢의 急迫과 이에 對한 第二次·第三次 動員을 거처 드디어 四郡撤廢에까지 進展함으로 以下 瓦刺 活動에 對하여 追及하여 보자.
와라가 그 맹위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은 정통 14년(조선 세종인물 31년) 7, 8월간의 일로서 한편으로 탈탈불화인물왕이 인솔한 일군은 요동의 광녕을 공격하여 이에 큰 손해를 주고 또 한편으로 야선인물은 대동을 침범하여 드디어 친정의 도에 있든 명제 영종을 토목에서 사로잡고 말았다. 현대문주18▶명제가 포로된 소식은 9월 29일 곧 조선에 알려졌지만[a 18] 현대문주19▶이보다 앞서 명나라에서는 조선군과 여진군을 요동에 회합시켜 가지고 동측으로부터 와라를 정토할 계획을 세워 명사 요동지휘 왕무인물(王武)는 9월 9일 경성에 도착 명제의 칙유를 교부하였다.[a 19] 그러나 조선으로 하여금 극도로 경요케 한 것은 탈탈불화인물 군사의 광녕 습격의 보도이었다. 탈탈불화인물 군사의 광녕 습격에 관하여는 명사서적 권177, 왕고전에
쪽수▶P15-4瓦刺가 그 猛威을 遺憾없이 發揮한 것은 正統 十四年(朝鮮 世宗 三十一年) 七八月間의 일로서 한편으로 脫脫不花王이 引率한 一軍은 遼東의 廣寧을 攻擊하여 이에 大損害를 주고 또 한편으로 也先은 大同을 侵犯하여 드디어 親征의 途에 있든 明帝 英宗을 土木에서 사로잡고말었다. 원문주18▶明帝가 捕虜된 消息은 九月 二十九日 곧 朝鮮에 알려졌지만[18] 원문주19▶이보담 앞서 明나라에서는 朝鮮軍과 女眞軍을 遼東에 會合시켜 가지고 東側으로부터 瓦刺를 征討할 計畫을 세워 明使遼東指揮王武는 九月 九日 京城에 到着 明帝의 勅諭를 交附하였다.[19] 그러나 朝鮮으로 하여금 極度로 驚擾케 한 것은 脫脫不花軍의 廣寧 襲擊의 報道이었다. 脫脫不花軍의 廣寧 襲擊에 關하여는 明史 卷一 百七十七、王翶傳에

(正統十四年)……脫脫不花大擧犯廣寧 翺方閱兵 寇碎至業潰 翺入城自保 或謂城不可守 翺手劒曰 敢言棄城者斬 寇退 坐停俸半載

쪽수▶P15-5

(正統十四年)……脫脫不花大擧犯廣寧 翺方閱兵 寇碎至業潰 翺入城自保 或謂城不可守 翺手劒曰 敢言棄城者斬 寇退 坐停俸半載

라 하고 요동지서적 권5, 왕고전에는
쪽수▶P15-6라 하고 遼東志 卷五, 王翶傳에는

(正統)十四年八月內 北虜大學犯京師 部落數萬寇廣寧 時翺聚兵教場 虜騎卒至 我軍遂潰 翺收散卒 堅壁固守 虜遂遁去

쪽수▶P16-1

(正統)十四年八月內 北虜大學犯京師 部落數萬寇廣寧 時翺聚兵教場 虜騎卒至 我軍遂潰 翺收散卒 堅壁固守 虜遂遁去

쪽수▶P16-2라 하였는바 북로가 경사를 범하였다는 것은 물론 야선인물이 명제를 사로잡은 것을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조선측 기록에 의하면 먼저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8월 무신(1일)조에
쪽수▶P16-2라 하였는바 北虜가 京師를 犯하였다는 것은 勿論 也先이 明帝를 사로잡은 것을 意味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우리 朝鮮側 記錄에 依하면 먼저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戊申(一日)條에

通事李裕德 自遼東先馳報云 臣謁都司 王大人言 西有聲息甚急 外郞謝本曰 今七月二十日 達達 也先兵馬 夜入長城 廣寧摠兵官不知賊入 出校場散銀於軍士 也先兵馬直來 摠兵官與軍士奔入城內 閉門自守 也先兵馬圍城三重 虜軍卒一千馬八千匹 又自廣寧至遼東站路 人馬奪掠殆盡 先騎至遼東西門 臣亦狼狽出來

쪽수▶P16-3

通事李裕德 自遼東先馳報云 臣謁都司 王大人言 西有聲息甚急 外郞謝本曰 今七月二十日 達達 也先兵馬 夜入長城 廣寧摠兵官不知賊入 出校場散銀於軍士 也先兵馬直來 摠兵官與軍士奔入城內 閉門自守 也先兵馬圍城三重 虜軍卒一千馬八千匹 又自廣寧至遼東站路 人馬奪掠殆盡 先騎至遼東西門 臣亦狼狽出來

라 하였다. 여기에 이른바 야선인물병마라는 것은 탈탈불화인물 병마의 잘못이나 곧 계속하여 “是日夜二鼓報至 即召政府·兵曹·都鎭撫·議兩界陽備之事”라 하고 또 같은 책서적 기미 및 을축조에 이에 관련한 기사가 보이는 것으로 보면 조선이 얼마만큼 이 사건을 중대시하였던가를 찰지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와라군이 광녕을 습격한 후 곧 동남으로 향하여 조선으로 오게 된다면 위기는 순일지간에 절박하였던 것이니 통사 이유덕인물(李裕德)의 치보(馳報)가 이르자 심야임에도 불구하고 의정부·병조·도진무 등을 소집하여 대책을 강구하게 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8월 기유(2일)조에는 이어서 대책협의에 관한 상세한 기재가 있는데 거기 의하면 자고로 변보가 많았으나 이때보다 더 중대한 적은 없었다고 하여 특히 지략과 경험이 많은 우찬성 김종서인물를 평안도 도절제사에 임명하고 이조참의 박강인물(朴薑)으로 평안도 도진무를 삼아 문신 이전수인물(李全粹)·구치관인물(具致寬) 두 사람을 이에 종속케 하며 좌찬성 박종우인물(朴從愚)를 함길도 도체찰사에 임명하고 공조참의 남우량인물(南祐良)으로 함길도 도진무를 삼아 문신 원효연인물(元孝然)·이영서인물(李永瑞) 두 사람을 이에 종속케 하며 경군 중에서 특히 사납고 날쌘 장사 60명을 선출하여 평안도에 40명 함길도에 20명을 배정하고 당시 제도의 병사는 단지 십수만에 불과하였으므로 군사를 더 모집할 방침을 수립하여 각 도에 타보(駝報) 소집케 되었으므로 중외가 시끄럽고 수선스러웠다고 한다. 이것이 와라 내침에 대비한 제2차 동원이다. 이때 향리 양산에 있던 전 지중추원사 이징석인물(李澄石) 전 도절제사 이징옥인물(李澄玉) 형제도 피소되었는데 그 아버지 전 중추 이전생인물(李全生)은 98세의 노령이었다. 그는 두 아들이 징소됨을 듣고 그들을 불러놓고 국가를 위하여 진력하기를 격려한 가화(佳話)는 본고 벽두에 게재한 것과 같다. 같은 조에 “左議政河演等啓……停今年行城之役 以休士卒 上曰善……時東西兩界困於築城 士馬勞憊 平安尤甚 猝有聲息 朝議恐賊闌入 無如之何”라 하여 제2차 동원과 동시에 당년도 행성 축조의 역을 정지한 것은 주목할 바로서 현대문주20▶같은 해 10월 요동의 정세가 얼마큼 평온해짐을 따라 평안도 도진무 박강인물을 소환하고 이어서 함길도 도체찰사 박종우인물도 소환하였지만[a 20] 현대문주21▶다음 해 5월 평안도 관찰사 한확인물(韓確)·평안도 도절제사 김종서인물 등이 또다시 행성의 역을 정지하자고 청하였음에 대하여 그 역군의 수를 줄이게 하였던 것이다.[a 21] 이는 세종인물이 승하하시기 2개월 전의 일이었다.
쪽수▶P16-4라 하였다. 여기에 이른바 也先兵馬라는 것은 脫々不花兵馬의 誤傳이나 곧 繼續하여 「是日夜二鼓報至 即召政府·兵曹·都鎭撫·議兩界陽備之事」라 하고 또 同 己未 及 乙丑條에 이에 關聯한 記事가 보이는 것으로 보면 朝鮮이 얼마만큼 이 事件을 重大視하였든가를 察知할 수 있을것이다. 萬一 瓦刺軍이 廣寧을 襲擊한 後 곧 東南으로 向하여 朝鮮으로 오게 된다면 危期는 旬日之間에 切迫하였든 것이니 通事 李裕德의 馳報가 이르자 深夜임에도 不拘하고 議政府·兵曹·都鎭撫 等을 召集하여 對策을 講究케 한 것은 오히려 當然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八月 己酉(二日)條에는 이어셔 對策協議의 關한 詳細한 記載가 있는데 거기 依하면 自古로 變報가 많었으나 이때보담 더 重大한 적은 없었다고 하여 特히 智略과 經驗이 많은 右贊成 金宗瑞를 平安道 都節制使에 任命하고 吏曹參議 朴薑으로 ▶P17-1平安道 都鎭撫를 삼아 文臣 李全粹·具致寬 兩人을 이에 從屬케 하며 左贊成 朴從愚를 咸吉道 都體察使에 任命하고 工曹參議 南祐良으로 咸吉道 都鎭撫를 삼아 文臣 元孝然·李永瑞 兩人을 이에 從屬케 하며 京軍 中에서 特히 驍勇한 將士 六十名을 選出하여 平安道에 四十名 咸吉道에 二十名을 配定하고 當時 諸道의 兵士는 단지 十數萬에 不過하였음으로 軍士 增募의 方針을 樹立하여 各 道에 駝報 召集케 되였음으로 中外가 騷然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瓦刺 來侵에 對備한 第二次 動員이다. 이때 鄕里 梁山에있던 前知中樞院事 李澄石 前都節制使 李澄玉 兄弟도 被召되였는데 그 父 前中樞 李全生은 九十八歲의 老齡이었다. 그는 二子가 徵召됨을 듣고 그들을 불러놓고 國家를 爲하여 盡力하기를 激勵한 佳話는 本稿 劈頭에 揭載한 것과 같다. 同條에 「左議政河演等啓……停今年行城之役 以休士卒 上曰善……時東西兩界困於築城 士馬勞憊 平安尤甚 猝有聲息 朝議恐賊闌入 無如之何」라 하여 第二次 動員과 同時에 當年度 行城築造의 役을 停止한 것은 注目할 바로서 원문주20▶同年 十月 遼東의 情勢가 얼마큼 平穩해짐을 따라 平安道 都鎭撫 朴薑을 召還하고 이어서 咸吉道 都體察使 朴從愚도 召還하였지만은[20] 원문주21▶翌年 五月 平安道 觀察使 韓確·平安道 都節制使 金宗瑞 等이 또다시 行城의 役을 停止하자고 請하였음에 對하여 그 役軍의 數를 減케 하였던 것이다.[21] 이는 世宗이 升遐하시기 二個月 前의 일이었다.
문종인물이 즉위하자 그해 3월 의정부의 헌의에 의하여 동국병감서적 2권을 찬성하게 되었다. 이 동국병감서적의 편찬은 우리 조선의 상고로부터 고려 말엽에 이르기까지의 외적 내침을 열거하고 이에 대한 우리의 방어책과 그 득실을 상고할 목적에서 나온 것이니 문종실록서적 권1, 즉위 3월 을묘조에
쪽수▶P17-2文宗이 即位하자 그해 三月 議政府의 獻議에 依하여 東國兵鑑 二卷을 撰成케 되였다. 이 東國兵鑑의 編纂은 우리 朝鮮의 上古로부터 高麗 末葉에 이르기까지의 外敵 來侵을 列舉하고 이에 對한 우리의 防禦▶P18-1策과 그 得失을 詳考할 目的에서 나온 것이니 文宗實錄 卷一, 即位 三月 乙卯條에

議政府啓 方今中國有警 我國備邊之事 不可不慮 若中國歷代之事 稽之史冊可知 我國之事最宜先知 而專不知之 甚不可也 願自三國以至高麗 彼敵來侵之事 我國備禦之策 首尾得失 詳考採摭 以備觀覽 上曰 此意甚善 宜速撰集廣布 後撰成模印 名曰東國兵鑑

쪽수▶P18-2

議政府啓 方今中國有警 我國備邊之事 不可不慮 若中國歷代之事 稽之史冊可知 我國之事最宜先知 而專不知之 甚不可也 願自三國以至高麗 彼敵來侵之事 我國備禦之策 首尾得失 詳考採摭 以備觀覽 上曰 此意甚善 宜速撰集廣布 後撰成模印 名曰東國兵鑑

이라 하였다. 유시관지(由是觀之)면 동국병감서적은 확실히 상술한 바와 같은 정세 하의 제2차 동원의 문화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쪽수▶P18-3이라 하였다. 由是觀之면 東國兵鑑은 確實히 上述한 바와 같은 情勢下의 第二次 動員의 文化的 產物이라고 할 수 있다.




























































































본문4: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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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5: 사군살폐의 외적 도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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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6: 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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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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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睿宗實錄 卷六, 元年 七月 戊子條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同癸巳 條申叔舟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世祖實錄이 乙亥年을 元年으로 한 데 對하여, 國朝寶鑑 其他는 翌年丙子로써 世祖 元年을 삼었다. 本稿에는 世祖實錄에 依하여 乙亥를 元年으로 하였다.
  2. 津田左右吉 博士 著, 朝鮮歷史地理 第二卷, 이五五―三六〇頁.
  3. 東洋學報 第十三卷 第一號‧第三號. 潮野馬熊 遺稿 二五三―三六〇頁.
  4. 拙稿 「鮮初廢四郡地理考」(靑丘學叢 第二十九號·第三十號).
  5. 海東野言 卷一, 世宗紀. 國朝名臣錄 卷十三.
  6. 世宗實錄 卷一百十, 三十二年 正月 壬寅.
  7. 文宗實錄 卷二, 卽位 七月 戊午.
  8. 東洋學報 第十三卷, 五二二―五二三頁.
  9. 拙稿 「鮮初女真貿易考」(震檀學報 第八卷) 參照.
  10. 滿鮮地理歷史研究報告 第十二·第十三 所收.
  11. 明人이 이른바 兀良哈는 普通 興安嶺 以東에 있는 泰寧·福餘·朶顏 等 蒙古族의 三衛를 가리침이며, 朝鮮서는 兀良哈(오랑캐)라고 하는 것은 豆滿江 內外에 居住하는 女眞族으로서, 豆滿江 內外의 兀良哈는 明나라의 所謂 毛憐衛에 該當한다.
  12. 世宗實錄 卷一百十六, 二十九年 六月 戊子.
  13. 世宗實錄 卷一百十七, 二十九年 九月 乙未.
  14. 世宗實錄 卷一百十六, 二十九年 閏四月 辛巳條에 「……今五鎭阜盛 士馬精强 以此行兵攻伐 則不足矣 堅壁自守則雖有大賊 不足慮也……」라 하고, 同書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月 丁亥條、議政府 啓 中에 「平安道沿邊防禦布置 未得其要 衆論不同若憚於輕改 固執因循 則邊事失誤 慮有後悔······」라 하였다.
  15. 世宗實錄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月 丁亥.
  16. 世宗實錄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一月 庚寅·乙未.
  17. 世宗實錄 卷一百十八, 二十九年 十月 丁亥. 同書 卷一百十九, 三十年 正月 甲午.
  18.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九月 丙午.
  19.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五, 三十一年 九月 丙戌. 明史 卷二百二十, 朝鮮傳.
  20. 世宗實錄 卷一百二十六, 三十一年十月 戊申·丁卯.
  21. 世宗實錄 卷一百二十七, 三十二年 正月 壬寅.






현대문주


  1. 예종실록서적 권6, 원년 7월 무자조에 “傳于春秋館曰 今繼鑑廳 以丙子稱世祖元年 春秋館以乙亥稱元年何如 同知事梁誠之等啓曰世祖卽位於乙亥年 若此年不稱元 恐涉魯山 謹考世記大全 亦以乙亥稱元年 上曰然”이라 하고, 같은 해 계사조 신숙주인물 말에 “魯山禪而 世祖卽位 當以即位之年爲紀元”이라 하였는데, 세조실록서적가 을해년을 원년으로 한 데 대하여, 국조보감서적 기타는 다음 해 병자로써 세조인물 원년을 삼었다. 본고에는 세조실록서적에 의하여 을해를 원년으로 하였다.
  2. 진전좌우길인물 박사 지음, 조선역사지리서적 제2권, 255―360쪽.
  3. 동양학보학술지 제13권 제1호권호제3호권호. 뢰야마웅인물 유고 253―360쪽.
  4. 졸고 「선초폐사군지리고원고」(청구학총학술지 제29호·제30호권호).
  5. 해동야언서적 권1, 세종기. 국조명신록서적 권13.
  6. 세종실록서적 권110, 32년 정월 임인.
  7. 문종실록서적 권2, 즉위 7월 무오.
  8. 東洋學報 第十三卷, 五二二―五二三頁.
  9. 졸고 「선초여진무역고원고」(진단학보학술지 제8권권호) 참조.
  10. [[]]학술지 제12권호·제13권호 소수.
  11. 명인이 이른바 올량합은 보통 흥안령 동쪽에 있는 태령·복여·타안 등 몽고족의 삼위를 가리킴이며, 조선서는 올량합(오랑캐)이라고 하는 것은 두만강 내외에 거주하는 여진족으로서, 두만강 내외의 올량합은 명나라의 소위 모련위에 해당한다.
  12. 세종실록서적 권116, 29년 6월 무자.
  13. 세종실록서적 권117, 29년 9월 을미.
  14. 세종실록서적 권116, 29년 윤4월 신사조에 “……今五鎭阜盛 士馬精强 以此行兵攻伐 則不足矣 堅壁自守則雖有大賊 不足慮也……”라 하고, 같은 책서적 권118, 29년 10월 정해조, 의정부 계 중에 “平安道沿邊防禦布置 未得其要 衆論不同若憚於輕改 固執因循 則邊事失誤 慮有後悔······”라 하였다.
  15. 세종실록서적 권118, 29년 10월 정해.
  16. 세종실록서적 권118, 29년 11월 경인·을미.
  17. 세종실록서적 권118, 29년 10월 정해. 같은 책서적 권119, 30년 정월 갑오.
  18.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9월 병오.
  19. 세종실록서적 권125, 31년 9월 병술. 명사서적 권220, 조선전.
  20. 세종실록서적 권126, 31년 10월 무신·정묘.
  21. 세종실록서적 권127, 32년 정월 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