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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th Korea Human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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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1번= {{TagSpage|13-1}}田獵을 主로 하는 女眞人의 日常生活은 明朝에 對한 朝貢과 朝鮮에 對한 進上肅拜만으로는 維持할 수 없었음으로 그들은 또 近境에 貿易所를 要求하였다. {{TagRef|36}}鏡城 及 慶源의 貿易所는 그러한 女眞人의 經濟的 要求로 滿足시키기 爲하야 設置된 것이니, 그것은 또한 明世祖가 그들을 爲하야―自國의 利益을 圖謀함도 있지만―遼東에 馬市를 세워 懷柔의 手段을 삼았든 거와 同一하다.<ref>稻葉岩吉 「明代遼東の馬市」(史學雜誌 第二十四編 第一號·第二號. 增訂滿洲發達史 一八一頁―二〇四頁) 參照.</ref> 鏡城―慶源의 貿易所가 公式으로 設置된 것은 太宗 六年(明永樂 四年) 五月로서, 太宗實錄<sup>卷一一</sup> 六年 五月 己亥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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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2번= {{TagSpage|13-2}}<blockquote no="12">命置貿易所於鏡城·慶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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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3번= {{TagSpage|13-3}}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TagRef|37}}當時의 鏡城은 곧 現 鏡城이지마는, 慶源은 지금의 慶興郡으로, 그 邑治는 現 慶興郡 慶興面 古邑洞에 있었다.<ref>慶源府를 京城에 移治한 太宗 十年 以前의 慶源府治 現今의 慶源이 아니라, 世祖時에 新設된 慶興郡治와 同一한 곳으로, 世宗實錄 卷一百五十五, 地理志咸吉道吉州牧下에 收載된 所謂 都護府慶源條―世宗 十四年頃의 記錄―에 「孔州城阿吾地城南 豆滿江邊」이라 한 後에 註하여 「古慶源府時 爲邑城」이라 하고, 또 「孔州城南五許 平野中 有兩圓峯 南安德陵 北安安陵」이라 하였으며, 同地 理志慶興都護府條―世宗實錄編纂時(端宗 二年 三月 完成)의 記錄―에 慶興의 沿革을 說明하여 「古孔州 太祖七年 因古土城基改築石城 以其地有德安兩陵 且肇基之地 故號慶源府 太宗十年因野人入寇 遂棄不守 世宗十六年 復設慶源府於會叱家之地 距孔州隔遠 難於守禦 復修其城 差萬戶兼孔州等處管軍僉節制使 十七年 割屬孔州傍近三百戶 稱孔城縣 以僉節制使兼知縣事 十九年陞爲郡 改今名 二十五年 以郡城地勢傾窄 且城內無水泉 退築城東西北三面 以廣之 陞都護府」라 하고, 四境을 擧하여 「東距豆滿江十步 北距豆滿江十里 南距大海六十里 西距雄丘(今雄基)站九十里」라 하였으니, 그 位置는 現古邑 附近에 있던 것이 틀림없다. 일찍 津田左右吉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五十, 慶興郡護府山川條에 「海在府南三十里」, 「赤池在府南十里」, 「麻田島在府北四十里」, 「楸島在府北四十五里」라 한 것으로 보아, 慶興府治 卽 古慶源府治(孔州)를 또한 現古邑에 比定하였고(朝鮮歷史地理 第二卷 三一八頁) 池內宏도 이에 贊同하였다(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第二, 三〇九頁 註八). 本問題 範圍外일지도 모르나, 또 池內博士가 世祖實錄 卷十六, 五年 四月 丁丑條에 「兵曹 據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啓本啓 慶興府官舍 地勢傾仄 土田磽薄 城中唯一井泉 遇旱輒涸 常汲江水用之 撫安堡則土沃有水 又多良田 請移慶興府于撫安堡 又令撫夷萬戶移戍于慶興本邑 撫夷本邑則土地廣衍 其自願仍居者聽 防禦守護等事 令本府守令 來往檢察 從之」라 한 것을 보고, 最初의 慶興府治(古慶源府治)가 現在의 慶興郡治에 移轉된 것은 世祖 五年이며, 實錄記事 中의 撫安堡 또는 撫夷堡의 誤일 것이라 한 데 對해서는 同意하기 어렵다. 그 理由를 간단히 말하면 世祖 五年에 實錄이 傅하는 바와 같이 移動이 있었다고 하면, 輿地勝覽(成宗十二年成)에는 撫夷堡가 現古邑에, 慶興府治가 現慶興에 있지 않으면 안 됨에 不拘하고, 輿地勝覽―津田左右吉이 이에 依하여 慶興邑(古慶源府治, 孔州)을 現古邑에 比定하고, 池內 自身도 이에 贊同한 것 같이―에는 依然히 慶興府治는 現古邑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池內도 이 點에 이르러서는 解釋에 困難하였던지, 輿地勝覽 卷五十, 慶興都護府關防條에 「撫夷堡在府北二十六里」(現慶興郡治의 位置)라 한 것은 世祖 五年 慶興府 移轉 以前의 撫夷堡를 指示한 記事를 그대로 揭載한 것 같다고 하여, 問題를 簡單히 解決하고 말았다(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第七, 二四四頁). 그러나 여기 對하여는 再考할 餘地가 많다. 現在의 卑見으로서는―仔細한 것은 다른 機會로 미를 수 밖에 없으나―輿地勝覽에는 勿論 慶興府邑誌 같은 데에도 世祖 五年의 邑基移轉을 傳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實錄에는 「從之」라고 하였지만 그 實은 當時의 議論뿐으로 實行되지 않았다고 解釋하고 싶다. 古邑이라는 名稱이 생긴 것은 世祖 五年에 移轉된 까닭이 아니라, 邑誌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純祖 三十四年 以後 數次 慶興本邑과 位置가 相換된 까닭이다.</ref> 이때 貿易所의 設置를 主唱한 이는 곧 東北面 都巡使 朴信이니, 그의 上言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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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4번= {{TagSpage|13-4}}<blockquote no="13">{{TagRef|38}}鏡城·慶源地面 不禁出入 則或有闌出之患 一於禁絶 卽野人以不得塩鐵  或生邊隙 乞於二郡置貿易所 令彼人得來互市<ref>太祖實錄 卷十一, 六年 五月 己亥.</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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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5번= {{TagSpage|13-5}}라 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鏡城·慶源 二郡에 貿易所를 두게 된 動機와 目的이 女眞人으로 하여금 그 生活에 不可缺인 塩鐵을 自由 로 買得케 하야 이것으로써 邊患을 未前에 防止하려 함에 있었든 것이 明白하다. 또 朴信의 上言은 同年 二月 兀狄哈金文乃 等의 入寇와 直接 關係를 가진 것이니, 太宗實錄<sup>卷一一</sup>六年 二月 己卯條에 「兀狄哈金乃文等 寇慶源之蘇多老{{TagPage|14-1}}兵馬使朴齡擊却之」라 한 後, 그 入寇의 原因을 말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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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6번= {{TagSpage|14-2}}<blockquote no="14">初野人至慶源塞下 市塩鐵牛馬 及大明立建州衛 以於虛出爲指揮 招諭野人 慶源絕不爲市 野人憤怨 建州人又激之 乃入慶源界抄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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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7번= {{TagSpage|14-3}}이라 하얐다. 於虛出은 卽 永樂 元年(太宗 三年) 明에 入朝하여 建州 衛都指揮使에 任命된 阿合出(李思誠)이니, 鏡城과 慶源에 貿易所가 正式으로 設置된 事情이 더욱 明瞭할 뿐 아니라, 慶源塞下의 女眞人과의 貿易은 일즉 貿易所 設置 以前부터 매우 盛行되었으며, 그 主要한 交易이 塩鐵牛馬이었든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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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원문8번= {{TagSpage|14-4}}그러면 이때 正式으로 設置된 貿易所는 언제까지 存續하였는가. 이 疑問에 對하여 滿足한 解答을 내릴 記錄은 不幸히 지금에 찾아 볼 수 없으나, 推測컨대 慶源의 貿易所는 그 正式 設置로부터 四年을 지나 太宗 十年에 이르러 慶源府의 鏡城移治와 함께 自然 解消되고, 鏡城의 貿易所만이 存續되었을 것이나, 그것조차 確實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하나 女眞人이 朝鮮 近境에 居住하는 以上 그들과의 經濟的 交涉은 決코 斷切되지 않을 것만은 事實로, 豆滿江岸의 五鎭 設置와 함께 非公式이나마 어떠한 名目 下에 貿易所와 같은 것이 있지 않었을가 한다. {{TagRef|39}}當時 女眞 貿易은 三浦(熊川薺浦·東萊富山浦·蔚山塩浦)의 日本 貿易에 比하면 微微한 感이 없지 않으나, 東北과 西北 邊民의 越江貿易은 嚴禁하였음에도 不拘하고 間斷 없이 繼 續되었으며, 或은 邊將이 任意로 互市를 許諾한 적도 있었다.<ref>高麗史 卷一百十八, 趙浚傳上疏文中 「…權勢之家 競爲互市 貂皮·松子·人參·蜂蜜·黃蠟·米豆之類 無不徵歛 民甚苦之 扶老携幼 渡江而西 可爲痛哭…」이라 하고, 太祖實錄 卷二, 元年 十二月 庚午條에 「遣監察于義州等處 禁人越疆貿易」, 太祖實錄 卷二十三, 十二年 二月 庚午條, 議政府啓 「東西兩界之民 毋得與境外之人賣牛馬 曾有著令 無識之民 暗行買賣 自今犯者及官吏與把截人 知而故縱者 通同做賣者 隱匿不告者 乞重刑鑑後」, 世宗實錄 卷五十九, 十五年 三月 乙亥條, 戶曹啟에 「平安咸吉道 地連彼境 故鐵物買賣 已曾立法防禁 然無識之徒 意謂防禁疎闊 如前買賣者 間或有之 自今以後 兩道居民如炊飯·鐵器·農器·兵器等鐵物 與彼人買賣者及知情故放者 以違禁下海律科罪 有能捕告者 依此律文充賞…」, 世祖實錄 三十一, 九年 八月 甲午條에 「諭咸吉道都節制使康純曰 將鍮鐵器及水鐵農器 與野人互市者已令嚴禁 比聞無識之徒不畏邦憲 潛輸買賣者有之 專是慢法弛禁之所致也 卿其更加痛禁 推鞫以啓」, 成宗實錄 卷一百九十二, 十七年 六月 癸卯條, 永安道 觀察使 成俊書啟에 「臣觀本道人 愚惑無遠慮 與商賈通販 年或少稔 綿布一匹直米六七十斗 他物類此 雖傾家買之不憚 至於禁物 潛誘資易 轉賣彼人 牛馬鍮鐵軍器 將盡轉賣 非細故也…」, 中宗實錄 卷三十一, 九年 十月 壬寅條, 漢城府右尹 李長生書啓에 「…平安道滿浦鎭 館待三衛野人 自甲子年(燕山君十年)邊將擅開關市 國人持牛馬鐵器 絡釋輳集 貽害無窮 尤可痛禁…」 云云.</ref> {{TagRef|40}}如何튼 鏡城·慶源의 貿易所는 前朝 高麗時代의 保州(義州) 及 定州(定平) 榷場<ref>高麗時代 椎場 設置 問題에 關하여는 丸龜金作 氏의 論文 「高麗と契丹·女眞の刃貿易關係」(歷史學硏究 第五卷 第二號, 六三頁—七O頁) 中에 論述한 바 있으나, 高麗가 數次 椎場의 撤罷를 遼·金에 懇請한 데 對하여는 좀 더 明確한 解答을 내릴 必要가 있다.</ref>의 後身이며, {{TagRef|41}}淸宣德·順治年間에 起源하였다는 會寧 及 慶源 北關開市<ref>咸鏡道慶源開市定例, 通例剏剔設條. 仁祖實錄 卷四, 三十二年 六月 丙申, 東國文獻備考 卷七十二, 市〿考上附互市北關開市條.</ref> 또는 平安道 中江開市의 前身인 點에 있어, 朝滿文化史上 重要한 意義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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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1번= 전렵(田獵)을 주로 하는 여진인의 일상생활은 명조에 대한 조공과 조선에 대한 진상숙배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또 근경에 무역소를 요구하였다. {{TagRefT|36}}경성 내지 경원의 무역소는 그러한 여진인의 경제적 요구로 만족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니, 그것은 또한 명 세조가 그들을 위하여―자국의 이익을 도모함도 있지만―요동에 마시(馬市)를 세워 회유의 수단을 삼았던 것과 동일하다.<ref group="a">{{TagPerson|[[도엽암길]]}}(稻葉岩吉) 「{{TagArticle|[[明代遼東の馬市]]}}」({{TagJournal|[[사학잡지]]}} {{TagVolume|[[사학잡지 24-1|제24편 제1호]]}}·{{TagVolume|[[사학잡지 24-2|제2호]]}}. {{TagBook|[[증정만주발달사]]}} 181―204쪽) 참조.</ref> 경성―경원의 무역소가 공식으로 설치된 것은 {{TagPerson|[[태종]]}} 6년(명 영락 4년) 5월로서, {{TagBook|[[태종실록]]}}<sup>권11</sup> 6년 5월 기해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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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2번= <blockquote no="12">命置貿易所於鏡城·慶源</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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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3번=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TagRefT|37}}당시의 경성은 곧 지금 경성이지마, 경원은 지금의 경흥군으로, 그 고을은 현 경흥군 경흥면 고읍동에 있었다.<ref group="a">경원부를 경성에 이치(移治)한 {{TagPerson|[[태종]]}} 10년 이전의 경원부치 현금의 경원이 아니라, {{TagPerson|[[세조]]}} 때에 신설된 경흥군치와 동일한 곳으로, {{TagBook|[[세종실록]]}} 권155,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하에 수재된 소위 도호부 경원조―{{TagPerson|[[세종]]}} 14년경의 기록―에 “孔州城阿吾地城南 豆滿江邊”이라 한 후에 주하여 “古慶源府時 爲邑城”이라 하고, 또 “孔州城南五許 平野中 有兩圓峯 南安德陵 北安安陵”이라 하였으며, 같은 지리지 경흥 도호부조―{{TagBook|[[세종실록]]}} 편찬 시({{TagPerson|[[단종]]}} 2년 3월 완성)의 기록―에 경흥의 연혁을 설명하여 “古孔州 太祖七年 因古土城基改築石城 以其地有德安兩陵 且肇基之地 故號慶源府 太宗十年因野人入寇 遂棄不守 世宗十六年 復設경원府於會叱家之地 距孔州隔遠 難於守禦 復修其城 差萬戶兼孔州等處管軍僉節制使 十七年 割屬孔州傍近三百戶 稱孔城縣 以僉節制使兼知縣事 十九年陞爲郡 改今名 二十五年 以郡城地勢傾窄 且城內無水泉 退築城東西北三面 以廣之 陞都護府”라 하고, 사경을 거하여 “東距豆滿江十步 北距豆滿江十里 南距大海六十里 西距雄丘(今雄基)站九十里”라 하였으니, 그 위치는 현재 고읍 부근에 있던 것이 틀림없다. 일찍 {{TagPerson|[[진전좌우길]]}}(津田左右吉)은 {{TagBook|[[신증동국여지승람]]}} 권50, 경흥 도호부 산천조에 “海在府南三十里”, “赤池在府南十里”, “麻田島在府北四十里”, “楸島在府北四十五里”라 한 것으로 보아, 경흥부치 즉 옛 경원부치(공주)를 또한 현 고읍에 비정하였고({{TagBook|[[조선역사지리]]}} 제2권 318족) {{TagPerson|[[지내굉]]}}(池內宏)도 이에 찬동하였다({{TagJournal|[[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TagVolume|[[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2|제2]]}}, 309쪽 주8). 본 문제 범위 외일지도 모르나, 또 {{TagPerson|[[지내굉|지내]]}} 박사가 {{TagBook|[[세조실록]]}} 권16, 5년 4월 정축조에 “兵曹 據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啓本啓 慶興府官舍 地勢傾仄 土田磽薄 城中唯一井泉 遇旱輒涸 常汲江水用之 撫安堡則土沃有水 又多良田 請移慶興府于撫安堡 又令撫夷萬戶移戍于慶興本邑 撫夷本邑則土地廣衍 其自願仍居者聽 防禦守護等事 令本府守令 來往檢察 從之”라 한 것을 보고, 최초의 경흥부치(옛 경원부치)가 현재의 경흥군치에 이전된 것은 {{TagPerson|[[세조]]}} 5년이며, 실록 기사 중의 무안보 또는 무이보의 오류일 것이라 한 데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TagPerson|[[세조]]}} 5년에 실록이 전하는 바와 같이 이동이 있었다고 하면, {{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승람]]}}({{TagPerson|[[성종]]}} 12년 성)에는 무이보가 현 고읍에, 경흥부치가 현 경흥에 있지 않으면 안 됨에 불구하고, {{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승람]]}}―{{TagPerson|[[진전좌우길]]}}이 이에 의하여 경흥읍(옛 경원부치, 공주)을 현 고읍에 비정하고, {{TagPerson|[[지내굉|지내]]}} 자신도 이에 찬동한 것 같이―에는 의연히 경흥부치는 현 고읍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TagPerson|[[지내굉|지내]]}}도 이 점에 이르러서는 해석에 곤란하였던지, {{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승람]]}} 권50, 경흥 도호부 관방조에 “撫夷堡在府北二十六里”(현 경흥군치의 위치)라 한 것은 {{TagPerson|[[세조]]}} 5년 경흥부가 이전하기 전의 무이보를 지시한 기사를 그대로 게재한 것 같다고 하여,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말았다({{TagJournal|[[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TagVolume|[[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 7|제7]]}}, 244쪽). 그러나 여기 대하여는 재고할 여지가 많다. 현재의 비견으로서는―자세한 것은 다른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으나―{{TagBook|[[동국여지승람|여지승람]]}}에는 물론 {{TagBook|[[경흥부읍지]]}} 같은 데에도 {{TagPerson|[[세조]]}} 5년의 읍기(邑基) 이전을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록에는 ‘종지(從之)’라고 하였지만 그 실은 당시의 의논뿐으로 실행되지 않았다고 해석하고 싶다. 고읍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TagPerson|[[세조]]}} 5년에 이전된 까닭이 아니라, 읍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TagPerson|[[순조]]}} 34년 이후 수차 경흥 본읍과 위치가 상환된 까닭이다.</ref> 이때 무역소의 설치를 주창한 이는 곧 동북면 도순사 {{TagPerson|[[박신]]}}(朴信)이니, 그의 상언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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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4번= <blockquote no="13">{{TagRefT|38}}鏡城·慶源地面 不禁出入 則或有闌出之患 一於禁絶 卽野人以不得塩鐵  或生邊隙 乞於二郡置貿易所 令彼人得來互市<ref group="a">{{TagBook|[[태조실록]]}} 권11, 6년 5월 기해.</ref></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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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5번= 라 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경성·경원 2군에 무역소를 두게 된 동기와 목적이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 생활에 불가결인 소금과 철을 자유로 사들이게 하여 이것으로써 변환을 미전에 방지하려 함에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또 {{TagPerson|[[박신]]}}의 상언은 같은 해 2월 올적합 {{TagPerson|[[김문내]]}}(金文乃) 등의 침입와 직접 관계를 가진 것이니, {{TagBook|[[태종실록]]}}<sup>권11</sup>6년 2월 기묘조에 <cite no="06">“兀狄哈金乃文等 寇慶源之蘇多老兵馬使朴齡擊却之”</cite>라 한 후, 그 침입의 원인을 말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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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6번= <blockquote no="14">初野人至慶源塞下 市塩鐵牛馬 及大明立建州衛 以於虛出爲指揮 招諭野人 慶源絕不爲市 野人憤怨 建州人又激之 乃入慶源界抄掠</blockquo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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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7번= 이라 하였다. {{TagPerson|[[이사성|어허출]]}}(於虛出)은 즉 영락 원년({{TagPerson|[[태종]]}} 3년) 명에 입조하여 건주위 도지휘사에 임명된 아하출(阿哈出)({{TagPerson|[[이사성]]}})이니,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가 정식으로 설치된 사정이 더욱 명료할 뿐 아니라, 경원 요새 하의 여진인과의 무역은 일찍 무역소 설치 이전부터 매우 성행되었으며, 그 주요한 교역이 소금, 철, 소, 말이었던 것을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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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3해독문8번= 그러면 이때 정식으로 설치된 무역소는 언제까지 존속하였는가. 이 의문에 대하여 만족한 해답을 내릴 기록은 불행히 지금에 찾아볼 수 없으나, 추측컨대 경원의 무역소는 그 정식 설치로부터 4년을 지나 {{TagPerson|[[태종]]}} 10년에 이르러 경원부의 경성 이치와 함께 자연 해소되고, 경성의 무역소만이 존속되었을 것이나, 그것조차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하나 여진인이 조선 근경에 거주하는 이상 그들과의 경제적 교섭은 결코 단절되지 않을 것만은 사실로, 두만강 안의 오진 설치와 함께 비공식이나마 어떠한 명목 하에 무역소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TagRefT|39}}당시 여진 무역은 삼포(웅천 제포·동래 부산포·울산 염포)의 일본 무역에 비하면 미미한 감이 없지 않으나, 동북과 서북 변민의 월강 무역은 엄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단 없이 계속되었으며, 혹은 변장(邊將)이 임의로 호시(互市)를 허락한 적도 있었다.<ref group="a">{{TagBook|[[고려사]]}} 권118, 조준전 상소문 중 “…權勢之家 競爲互市 貂皮·松子·人參·蜂蜜·黃蠟·米豆之類 無不徵歛 民甚苦之 扶老携幼 渡江而西 可爲痛哭…”이라 하고, {{TagBook|[[태조실록]]}} 권2, 원년 12월 경오조에 “遣監察于義州等處 禁人越疆貿易”, {{TagBook|[[태조실록]]}} 권23, 12년 2월 경오조, 의정부계 “東西兩界之民 毋得與境外之人賣牛馬 曾有著令 無識之民 暗行買賣 自今犯者及官吏與把截人 知而故縱者 通同做賣者 隱匿不告者 乞重刑鑑後”, {{TagBook|[[세종실록]]}} 권49, 15년 3월 을해조, 호조계에 “平安咸吉道 地連彼境 故鐵物買賣 已曾立法防禁 然無識之徒 意謂防禁疎闊 如前買賣者 間或有之 自今以後 兩道居民如炊飯·鐵器·農器·兵器等鐵物 與彼人買賣者及知情故放者 以違禁下海律科罪 有能捕告者 依此律文充賞…”, {{TagBook|[[세조실록]]}} 31, 9년 8월 갑오조에 “諭咸吉道都節制使康純曰 將鍮鐵器及水鐵農器 與野人互市者已令嚴禁 比聞無識之徒不畏邦憲 潛輸買賣者有之 專是慢法弛禁之所致也 卿其更加痛禁 推鞫以啓”, {{TagBook|[[성종실록]]}} 권192, 17년 6월 계묘조, 영안도 관찰사 {{TagPerson|[[성준]]}}(成俊) 서계에 “臣觀本道人 愚惑無遠慮 與商賈通販 年或少稔 綿布一匹直米六七十斗 他物類此 雖傾家買之不憚 至於禁物 潛誘資易 轉賣彼人 牛馬鍮鐵軍器 將盡轉賣 非細故也…”, {{TagBook|[[중종실록]]}} 권31, 9년 10월 임인조, 한성부우윤 {{TagPerson|[[이장생]]}}(李長生) 서계에 “…平安道滿浦鎭 館待三衛野人 自甲子年(燕山君十年)邊將擅開關市 國人持牛馬鐵器 絡釋輳集 貽害無窮 尤可痛禁…” 운운.</ref> {{TagRefT|40}}여하튼 경성·경원의 무역소는 전조 고려 시대의 보주(의주) 내지 정주(정평) 각장<ref group="a">고려 시대 추장 설치 문제에 관하여는 {{TagPerson|[[환구금작]]}}(丸龜金作) 씨의 논문 「{{TagArticle|[[高麗と契丹·女眞の刃貿易關係]]}}」({{TagJournal|[[역사학연구]]}} {{TagVolume|[[역사학연구 5-2|제5권 제2호]]}}, 63—70쪽) 중에 논술한 바 있으나, 고려가 수차 추장의 철파를 요·금에 간청한 데 대하여는 좀 더 명확한 해답을 내릴 필요가 있다.</ref>의 후신이며, {{TagRefT|41}}청 선덕·순치년간에 기원하였다는 회령 내지 경원 북관 개시<ref group="a">함경도경원개시정례, 통례창척설조(通例剏剔設條). {{TagBook|[[인조실록]]}} 권4, 32년 6월 병신, {{TagBook|[[동국문헌비고]]}} 권72, 시〿고상부호시북관개시조.</ref> 또는 평안도 중강 개시의 전신인 점에 있어, 조만문화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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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1월 10일 (일) 18:3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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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초여진무역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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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원제목 朝初女眞貿易考 학술지 진단학보 수록권호 진단학보 8 발행기관 진단학회
저자 이인영 역자 집필일자 게재연월 1937년 11월
시작쪽 001쪽 종료쪽 030쪽 전체쪽 030쪽 연재여부 단독 범주 논문 분야 역사학



항목

차례


해제 목차 본문 데이터 주석




해제


내용을 입력합니다.@




목차







본문


본문1: 서언


무릇 국가의 새 영토 획득에는 군사상, 경제상 두 방면의 의미가 포함될 것이니, 군사상으로는 그 지방의 방어를 견고히 하여 국방의 안전을 도모하는 것이며, 경제상으로는 그 토지를 경작하고 천산물을 채취함으로써 국가의 부력을 증진하는 것이다. 이씨 조선은 세종대왕인물 말년에 이르러 필경 함경도에 육진(경흥·경원·온성·종성·회령·부령)과 평안도에 사군(여연·무창·우예·자성)을 두어, 압록·두만 양강의 자연적 경계에까지 국토를 확장하고, 곧 그 혜택을 향유하였다. 그중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동북면(함경도) 각지의 채금일 것이나, 그 원주민인 여진족―조선서는 보통 야인이라고 불렀다―의 초무(招撫)에는 적지 않는 고심이 있었던 것이다.
쪽수▶P1-1무릇 國家의 新領土 獲得에는 軍事上 經濟上 두 方面의 意味가 包含될 것이니, 軍事上으로는 그 地方의 防禦를 堅固히 하야 國防의 安全을 圖謀하는 것이며, 經濟上으로는 그 土地를 耕作하고 天産物을 採取함으로써 國家의 富力을 增進▶P2-1하는 것이다. 李氏 朝鮮은 世宗大王 末年에 이르러 畢竟 咸鏡道에 六鎭(慶興·慶源·穩城·鍾城·會寧·富寧)과 平安道에 四郡(閭延·茂昌·虞芮·慈城)을 두어, 鴨綠·豆滿 兩江의 自然的 境界에까지 國土를 擴張하고, 곧 그 惠澤을 享有하였다. 그中 特히 注目할 만한 것은 東北面(咸鏡道) 各地의 採金일 것이나, 그 原住民인 女眞族―朝鮮서는 普通 野人이라고 불렀다―의 招撫에는 적지 않는 苦心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서는 그들에 대한 회유책으로, 한편으로는 그 유력자의 향화 재경시위(在京侍衛)를 장려하여 의복·안마(鞍馬)·가사(家舍)·노비·양료(粮料)를 사여(賜與)하고 취처(娶妻)케 하며, 또 한편으로는 두만강 내외와 압록강 외에 거주하는 추장에게 혹은 도만호·만호·부만호·천호·백호, 혹은 중추원 지사(정2품) 이하 호군·사직·사정 등 조선의 관직에 임명하여, 거기에 상당한 대우를 받게 하며, 예에 의하여 봉록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것은 마치 명조가 만주 각처에 위소(衛所)를 설치하여, 그들을 그 도독·도지휘·천호·백호 등에 임명하여 그 지위에 따라 조공의 대우와 권리를 차별케 한 것과 다름이 없다. 여진인의 조선에 대한 조공은 이것을 진상숙배라는 명목으로 불러왔지만, 진상숙배는 명국에 대한 조공과 전혀 그 성질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여진인의 이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상숙배는 그들의 원하는 바이며, 또한 조선으로서는 그들을 물질적으로 회유하는 평화적 방식이다. 그렇지만 1년에 몇 회라는 규정이 있는 진상숙배만으로는 그들의 경제적 욕망을 전면적으로 만족시킬 수 없었으므로, 당시 명국이 여진인을 위하여 요동에 마시(馬市)를 세웠던 것과 같이, 조선도 역시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어 물자 교환의 편의를 돕게 하였다.
쪽수▶P2-2朝鮮서는 그들에 對한 懷柔策으로, 한편으로는 그 有力者의 向化 在京侍衛를 獎勵하야 衣服·鞍馬·家舍·奴婢·粮料를 賜與하고 娶妻케 하며, 또 한편으로는 豆滿江 內外와 鴨綠江 外에 居住하는 酋長에게 或은 都萬戶·萬戶·副萬戶·千戶·百戶, 或은 中樞院 知事(正二品) 以下 護軍·司直·司正 等 朝鮮의 官職에 任命하야, 거기에 相當한 待遇를 받게 하며, 例에 依하야 俸祿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것은 마치 明朝가 滿洲 各處에 衛所를 設置하야, 그들을 그 都督·都指揮·千戶·百戶 等에 任命하야 그 地位에 따라 朝貢의 待遇와 權利를 差別케 한 것과 다름이 없다. 女眞人의 朝鮮에 對한 朝貢은 이것을 進上肅拜라는 名目으로 불러왔지만, 進上肅拜는 明國에 對한 朝貢과 全혀 그 性質을 같이하는 것으로, 그것은 곧 女眞人의 利得을 意味한다. 그럼으로 進上肅拜는 그들의 願하는 바이며, 또한 朝鮮으로서는 그들을 物質的으로 懷柔하는 平和的 方式이다. 그러치만은 一年에 몇 回라는 規定이 있는 進上肅拜만으로는 그들의 經濟 的 欲望을 全面的으로 滿足시킬 수 없었음으로, 當時 明國이 女眞 人을 爲하야 遼東에 馬市를 세웠던 것과 같이, 朝鮮도 역시 鏡城과 慶源에 貿易所를 두어 物資交換의 便宜를 돕게 하였다.
여기에 이른바 선초는 태조 이성계인물의 즉위(명 홍무 25년 1392 A.D.)로부터 경국대전서적이 반포된 성종인물 초년(명 성화 6년 1470 A.D.)에 이르는 약 80년간을 가르침이니, 그간에 있어 동서 양북면의 개척은 훈민정음의 제정과 아울러 이씨 조선 500년을 통하여 가장 광휘 있는 위업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한 대사업이 성취된 것은 때가 마침 대원제국이 이미 쇠미하고 명조의 신세력이 아직 요동 방면에 확립치 못하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태조인물 그가 동북면 출신이었음에도 또한 중대한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번 돌이켜 이것을 우리 조선사회의 내부적 문제로서 관찰할 때, 그것은 실로 고려 건국 이래로 배양되어 온 북방 발전에 대한 욕구의 결실이며 연장이라고 믿는다.
쪽수▶P2-3여기에 이른바 鮮初는 太祖 李成桂의 卽位(明 洪武二十五年 1392 A.D.)로부터 經國大典이 頒布된 成宗 初年(明成化六年 1470 A.D.)에 이르는 約 八十年間을 가르침이니, 그間에 있어 東西 兩北面의 開拓은 訓民正音의 制定과 아울러 ▶P3-1李氏 朝鮮 五百年을 通하야 가장 光輝 있는 偉業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한 大事業이 成就된 것은 때가 마침 大元帝國이 임이 衰微하고 明朝의 新勢力이 아직 遼東 方面에 確立치 못하였다는 時代的 背景을 無視할 수는 없으나, 太祖 그가 東北面 出身이었음에도 또한 重大한 要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또 한번 도리켜 이것을 우리 朝鮮社會의 內部的 問題로서 觀察할 때, 그것은 實로 高麗建國 以來로 培養되어온 北方 發展에 對한 欲求의 結實이며 延長이라고 믿는다.
이제 여진과의 평화적 관계를 규약한 진상숙배의 본질을 밝히고, 경성과 경원의 무역소 설치의 유래를 고찰하며, 피아 교역품의 대략을 설명코자 함은, 종래 이 방면에 관한 선각의 논고가 없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고래로 밀접한 관계를 가진 우리 조선과 여진인과의 교섭이, 주로 경제적 관계에 입각하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명백히 하려 함에 있다.
쪽수▶P3-2이제 女眞과의 平和的 關係를 規約한 進上肅拜의 本質을 밝히고, 鏡城과 慶源의 貿易所 設置의 由來를 考察하며, 彼我 交易品의 大略을 說明코저 함은, 從來 이 方面에 關한 先覺의 論攷가 없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古來로 密接한 關係를 가진 우리 朝鮮과 女眞人과의 交涉이, 主로 經濟的 關係에 立脚하였다는 것을 다시 한번 明白히 하려 함에 있다.



































본문2: 진상숙배의 본질


여진인이 명조의 새서(璽書)를 받고, 또다시 조선의 직첩(職帖)을 겸수(兼受)하여 양속적 태도를 취한 것은, 이것을 경제적으로 관찰할 때 곧 그들의 경제생활을 풍부히 하려는 것이니, 진상숙배의 본질이 명국에 대한 조공과 같이 그들의 상경 무역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지적하고자 한다.
쪽수▶P3-3女眞人이 明朝의 璽書를 받고, 또다시 朝鮮의 職帖을 兼受하여 兩屬的 態度를 取한 것은, 이것을 經濟的으로 觀察할 때 곧 그들의 經濟生活을 豐富히 하려는 것이니, 進上肅拜의 本質이 明國에 對한 朝貢과 같이 그들의 上京貿易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指摘하고저 한다.







































본문2-1: (A) 세조수


여진인 내조(來朝)에 관한 규정을 살펴보면 경국대전서적권3 예전 대사객조에는 “倭人到浦 邊將考書契·圖書·路引 依勢朝數上送”이라 한 주에
쪽수▶P3-4女眞人 來朝에 關한 規定을 살펴보면 經國大典卷三 禮典待使客條에는 「倭人到浦 邊將考書契·圖書·路引 依勢朝數上▶P4-1送」이라 한 註에

野人亦依歲朝數上送

쪽수▶P4-2

野人亦依歲朝數上送

이라 하였을 뿐으로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실록서적권101 27년 11월 임신조를 보면,
쪽수▶P4-3이라 하였을 뿐으로 그 內容을 記錄치 않었다. 그러나 世宗實錄卷一○一 二十七年 十一月 壬申條를 보면,

議政府 據禮曹啟 諸種野人 每年往來頻數 驛路凋弊 若禁其來朝 有乖撫之義 自今定每歲來朝之數 兀良哈十行 骨看及吾都里七行 每行酋長則正官一·伴人四 其餘則正官一·伴人二 以爲恒式 母使人每年上來 量其數踈數 待滿三年 輸番上送 且忽刺溫地壤隔絶 眞亐直介親朝者罕有之 女真人詐稱子弟姪 冒名來朝 以要賞賜 其所來朝 非出於誠 義當不納 然不可遽絕 一歲來朝 不過五行 其近居邊境林阿·亐未車·大小居節·南納(訥)·高說·高漆等諸種亏知介來朝者 一歲不過二行 正官·伴人之數如上其 餘眞女眞人 或詐稱亐知介來朝 都節制使拒以不納 若稱會長使送 受文引來者 都節制使厚慰 仍遺物遣還 若諸種一時上來 則驛路受弊 量其多少 必待農隙 分運上送 從之

쪽수▶P4-4

議政府 據禮曹啟 諸種野人 每年往來頻數 驛路凋弊 若禁其來朝 有乖撫之義 自今定每歲來朝之數 兀良哈十行 骨看及吾都里七行 每行酋長則正官一·伴人四 其餘則正官一·伴人二 以爲恒式 母使人每年上來 量其數踈數 待滿三年 輸番上送 且忽刺溫地壤隔絶 眞亐直介親朝者罕有之 女真人詐稱子弟姪 冒名來朝 以要賞賜 其所來朝 非出於誠 義當不納 然不可遽絕 一歲來朝 不過五行 其近居邊境林阿·亐未車·大小居節·南納(訥)·高說·高漆等諸種亏知介來朝者 一歲不過二行 正官·伴人之數如上其 餘眞女眞人 或詐稱亐知介來朝 都節制使拒以不納 若稱會長使送 受文引來者 都節制使厚慰 仍遺物遣還 若諸種一時上來 則驛路受弊 量其多少 必待農隙 分運上送 從之

라 하여 여진인 세조에 관한 비교적 상세한 기사가 있다. 세조인물 10년 10월 함길도 도절제사 강순인물의 계본에도 현대문주1▶“臣考禮曹受敎 野人等一時出 來則必貽驛路之弊 不聽入朝 則乖撫綏之義 宜定數遺詣京師 每一年 兀良哈十行 骨看七 斡朵里七 火刺溫五 會長則正官一·兼從四 其餘正官一·兼從二 云云”[a 1]이란 것을 보면, 위에 말한 경국대전서적“野人亦依歲朝數上送”이라 함은 이러한 규정을 가리킨 것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 기사 내용을 검토하기 전에 이 같은 규정이 성립되기까지의 과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쪽수▶P4-5라 하야 女眞人 歲朝에 關한 比較的 詳細한 記事가 있다. 世祖 十年 十月 咸吉道 都節制使 康純의 啓本에도 원문주1▶「臣考禮曹受敎 野人等一時出 來則必貽驛路之弊 不聽入朝 則乖撫綏之義 宜定數遺詣京師 每一年 兀良哈十行 骨看七 斡朵里七 火刺溫五 會長則正官一·兼從四 其餘正官一·兼從二 云云」[1]이란 것을 보면, 위에 말한 經國大典에 「野人亦依歲朝數上送」이라 함은 이러한 規定을 가리킨 것에 틀림없다. 그러면 이 記事 內容을 檢討하기 前에 이 같은 規定이 成立되기까지의 過程을 考察할 必要가 있다.
고려 말에 있어 조선 태조 이성계인물와 여진과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하였던가는 태조실록서적권84년 12월 계묘조에
쪽수▶P4-6麗末에 있어 朝鮮 太祖 李成桂와 女眞과의 關係가 얼마나 緊密하였던가는 太祖實錄卷八四年 十二月 癸卯條에

東北一道 本肇之地 畏威懷德久矣 野人酋長 현대문주2▶遠至移蘭豆漫[a 2] 皆來服事 常佩弓劒 入衛潜邸 昵待左右 東征西伐 靡不從焉

쪽수▶P5-1

東北一道 本肇之地 畏威懷德久矣 野人酋長 원문주2▶遠至移蘭豆漫[2] 皆來服事 常佩弓劒 入衛潜邸 昵待左右 東征西伐 靡不從焉

이라 한 일절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개국공신 청해백 이지란인물(李之蘭) 같은 이는 본명을 두란첩목아(豆蘭帖木兒)라는 여진 추장의 한 사람이었던 것은 다 같이 아는 바로, 태조인물가 그 즉위 전후에 남으로 왜구를 물리치고 북으로 국강(國疆)을 넓힘에 있어 그들을 후대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안으로 국초가 확립하고 행정조직이 정비되어 국고의 비용이 한정되며, 밖으로 사대 교린의 관계가 점차 평화 상태에 돌아감에 따라, 종래 물질적 우대를 목표로 한 대야인책은 조만간 개량될 수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남으로 일본 사객의 상경을 제한하는 동시에, 북으로 여진인의 내조를 한정함은 자연적 추세이다. 더구나 왜인, 야인의 조선 경내에 내왕하는 비용은 명사의 그것과 같이 일절 조선이 부담하는 바로, 만일 야인의 상경로인 함경도나 강원도가 흉년을 만났을 때 그 내조를 제한함은 물론 필요한 일이다. 그럼으로 세종인물 5년 9월에는 예조가 계하여
쪽수▶P5-2이라 한 一節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지만, 開國功臣 青海 伯李之蘭 같은 이는 本名을 豆蘭帖木兒이라는 女眞酋長의 一人이었던 것은 다 같이 아는 바로, 太祖가 그 即位 前後에 南으로 倭寇를 물러치고 北으로 國疆을 넓임에 있어 그들을 厚待 利用한 것은 事實이다. 그러나 안으로 국초가 確立하고 行政組織이 整備되야 國庫의 費用이 限定되며, 밖으로 事大 交隣의 關係가 漸次 平和狀態에 도라감에 따라, 從來 物質的 優待를 目標로 한 對野人策은 早晚間 改良될 수밖에는 없었다. 따라서 南으로 日本 使客의 上京을 制限하는 同時에, 北으로 女眞人의 來朝를 限定함은 自然的 趨勢이다. 더구나 倭人, 野人의 朝鮮 境內에 來往하는 費用은 明使의 그것과 같이 一切 朝鮮이 負擔하는 바로, 萬一 野人의 上京路인 咸鏡道나 江原道가 凶年을 맛났을 때 그 來朝를 制限함은 勿論 必要한 일이다. 그럼으로 世宗 五年 九月에는 禮曹가 啓하야

咸吉·江原 近年失農 驛路凋弊 兀良哈·兀狄哈等朝京往返 未能支當 其弊莫甚 自今野人欲朝京者 今邊將母輕上送 厚待送還 如有不得己而朝京者 只送會長 以除驛路之弊

쪽수▶P5-3

咸吉·江原 近年失農 驛路凋弊 兀良哈·兀狄哈等朝京往返 未能支當 其弊莫甚 自今野人欲朝京者 今邊將母輕上送 厚待送還 如有不得己而朝京者 只送會長 以除驛路之弊

라 하였으므로 현대문주3▶왕도 이에 따라 야인의 상경을 될 수 있는 대로 제한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다만 그 추장만을 상송(上送)하게 하는 방침을 취하게 되었다.[a 3] 그 후 혹은 현대문주4▶명조의 지휘(조선 정4품 대우)[a 4] 이상의 관직을 가진 여진인의 상경은 제한치 않으나, 그 외는 매년 상경 100인을 넘지 않게 하며, 혹은 그중 두목 가는 자만 선택하여 매년 상경 4, 50인에 지나지 않게 하며, 혹은 추장의 친래라도 그 수종자(隨從者)는 2, 3인에 불과하게 하고, 만추(萬酋)의 현대문주5▶서계[a 5]를 가진 자면 다만 그 사람만 상송하고, 현대문주6▶그 나머지는 함길도 도절제사가 권의, 개유하여 후대 송환케 한 적도 있으나, 어떤 것이나 다 여의치 못하였다.[a 6]여하튼 그들은 상사(賞賜)를 바라고 상경숙배를 원하였지만은 조선서는 그 지지에 폐해가 많았으므로 가급적 제한을 가하려고 한 것만은 사실이니 앞서 언급한 세종인물 27년 11월의 의정부계는 이러한 목적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그 요점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쪽수▶P5-4라 하였으므로 원문주3▶王도 이에 따라 野人의 上京을 될 수 있는 대로 制限하고, 不得已한 境遇에는 다만 그 酋長만을 上送하게 하는 方針을 取하게 되었다.[3] 그 後 或은 원문주4▶明朝의 指揮(朝鮮 正四品 待遇)[4] 以上의 官職을 가진 女眞人의 上京은 制限치 않으나, 그 外는 每年 上京 百人을 넘지 않게 하며, 或은 그中 頭目가는 者만 選擇하여 每年 上京 四五十人에 지나지 않게 하며, 或은 酋長의 親來라도 그 隨從者는 二三人에 不過하게 하고, 萬酋의 원문주5▶書契[5]를 가진 者면 다만 그 사람만 上送하고, 원문주6▶其餘는 咸吉道 都節制使가 權宜開諭하여 厚待送還케 한 적도 있으나, 어떤 것이나 다 如意치 못하였다.[6]如何튼 그들은 ▶P6-1賞賜를 바라고 上京肅拜를 願하였지만은 朝鮮서는 그 支持에 弊害가 많었음으로 可及的 制限을 加할랴고 한 것만은 事實이니 前揭 世宗 二十七年 十一月의 議政府啓는 이러한 目的에서 나온 것이다. 이제 그 要點을 列擧하면 다음과 같다.
현대문주7▶1. 매세내조수
올량합(오랑합) 10행
골간직개(활아간올적합)·오도리(알타리) 7행
홀라온울진개(화라온올적합) 5행
임아거(니마거)·울미거(올미거)·대소거절·남눌(남돌)·고설·고칠등울지개(울직개, 올적합) 2행[a 7]
현대문주8▶그 외 야인은 접대치 않으나 단 추장 사송(使送)으로 문인(文引)있는 자는 도절제사가 그 토물을 받고 후위견환(厚慰遣還)시킬 것[a 8]
쪽수▶P6-2원문주7▶一, 每歲來朝數
兀良哈(五郞哈) 十行 骨看直介(闊兒看兀狄哈)·吾都里(斡朶里) 七行
忽刺溫亐眞介(火刺溫兀狄哈) 五行
林阿車(尼麻車)·亐未車(兀未車)·大小居節·南訥(南突)·高說·高漆等亐知介(亐直介, 兀狄哈) 二行[7]
원문주8▶其餘 野人은 接待치 않으나 但 酋長 使送으로 文引있는 者는 都節制使가 그 土物을 받고 厚慰遣還식힐 것[8]
1. 수종자
추장 정관 1명, 반인(伴人) 4명
그 외 정관 1명, 반인 2명
1. 동 1인은 매년 상경을 불허하고 만 3년 만에 윤번 상송할 것
1. 제종 야인 일시에 상송치 말고 농사의 여가를 기다려 분운(分運)할 것
쪽수▶P6-3一, 隨從者
酋長 正官 一名, 伴人四名
其餘 正官 一名, 伴人二名
一, 同 一人은 每年 上京을 不許하고 滿 三年 만에 輪番上送할 것
一, 諸種 野人 一時에 上送치 말고 農隙을 기다려 分運할 것
현대문주9▶이 규정은 물론 예외도 많았으나 성종인물까지 대체로 준수되었다.[a 9] 여기에 의하면 가장 많은 올량합 10행은 일행 평균 5인으로 가정하드라도 불과 50인이니, 현대문주10▶이것을 그들의 명국에 입조하는 인원 건주위·건주좌위·건주우위·모련위 등 매년 매위 100인[a 10]에 비하면, 1위 인원의 약 반수에 불과하니 그 규모의 대략을 추찰할 수도 있다.
쪽수▶P6-4원문주9▶이 規定은 勿論 例外도 많었으나 成宗까지 大體로 遵守되었다.[9] 여기에 依하면 가장 많은 兀良哈 十行은 一行 平均 五人으로 假定하드라도 不過 五十人이니, 원문주10▶이것을 그들의 明國에 入朝하는 人員 建州衛·建州左衛·建州右衛·毛憐衛 等 每年 每衛 一百人[10]에 比하면, 一衛 人員의 約 半數에 不過하니 그 規模의 大略을 推察할 수도 있다.




























본문2-2: (B) 상경로와 객관


상경 숙배의 허가를 얻은 그들은 동여진·서여진을 물론하고 대개 함경도를 경유하여 상경하였다. 야인 상경로에 관한 규정은 왜인 상경도로에 관한 상세한 규정이 세종실록서적권80 20년 3월 기사조나 해동제국기서적조빙응접기(朝聘應接紀) 삼포분박(三浦分泊) 상경도로조(上京道路條)에 기재된 것과 같은 명확한 것이 문헌에 나타나지 않으나―그것은 특별히 내왕로를 지정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겠지만―평안도를 경유케 한 것은 예외에 속한다. 세종인물 15년 2월에 건주 야인들이 평안도로 붙여 상경하기로 청하였을 때, 이순몽인물(李順蒙) 등은 그 불가함을 논하여 현대문주11▶彼人未嘗由此路(○○○○○○○)〇平安道而來朝(○○○) 且今作賊之狀頗著 未可遽從其請而上送也 且既有咸吉道往來之路(○○○○○○○○○○) 豈宜叉開此路乎”[a 11]라 한 것을 보드라도, 함경도가 야인 내왕의 상로인 것을 알 수 있거니와, 세종실록서적권3원년 4월 계사조에
쪽수▶P7-1上京 肅拜의 許可를 얻은 그들은 東女眞·西女眞을 勿論하고 대개 咸鏡道를 經由하여 上京하였다. 野人 上京路에 關한 規定은 倭人 上京道路에 關한 詳細한 規定이 世宗實錄卷八〇 二十年 三月己巳條나 海東諸國記朝聘應接紀三浦分泊上京道路條에 記載된 것과 같은 明確한 것이 文獻에 나타나지 않으나―그것은 特別히 來往路를 指定할 必要가 없었든 까닭이겠지만―平安道를 經由케 한 것은 例外에 屬한다. 世宗 十五年 二月에 建州 野人들이 平安道로 붙여 上京하기로 請하였을 때, 李順蒙 等은 그 不可함을 論하야 원문주11▶彼人未嘗由此路(○○○○○○○)〇平安道而來朝(○○○) 且今作賊之狀頗著 未可遽從其請而上送也 且既有咸吉道往來之路(○○○○○○○○○○) 豈宜叉開此路乎」[11]라 한 것을 보드라도, 咸鏡道가 野人 來往의 常路 인 것을 알 수 있거니와, 世宗實錄卷三元年 四月 癸巳絛에

上日 鏡城郡乃野人往來之地(○○○○○○○○○○) 供費倍也 歲貢貨減三分之二

쪽수▶P7-2

上日 鏡城郡乃野人往來之地(○○○○○○○○○○) 供費倍也 歲貢貨減三分之二

라 하고, 같은 책서적권119 30년 정월 을묘조에
쪽수▶P7-3라 하고, 同書卷一一九 三十年 正月 乙卯條에

議政府據兵曹呈啓……自綠楊(○○○)〇京畿道楊州郡至銀溪(○○○)〇江原道淮陽郡野人來王之路(○○○○○○) 受弊尤多 凋殘益甚 可復察訪 從之

쪽수▶P7-4

議政府據兵曹呈啓……自綠楊(○○○)〇京畿道楊州郡至銀溪(○○○)〇江原道淮陽郡野人來王之路(○○○○○○) 受弊尤多 凋殘益甚 可復察訪 從之

라 하였으며, 세조실록서적권288년 3월 을축조에는
쪽수▶P7-5라 하였으며, 世祖實錄卷二八八年 三月 乙丑條에는

野人者邑同哈·凡察·阿未多·質之等 還至抱川遇盗 受賜衣服件 皆被搶奪 云云

쪽수▶P7-6

野人者邑同哈·凡察·阿未多·質之等 還至抱川遇盗 受賜衣服件 皆被搶奪 云云

이라는 일절이 있다. 현대문주12▶이것으로써 보면 경성 이남의 야인 상경로는 당시에 있어 가장 주요한 교통로이며 현재에도 일등 도로인, 경성으로부터 의정부·포천·금화·회양·원산·문천·고원·영흥·정평·홍원·북청·이원·단천·성진·길주·명천을 지나 경성에 이르는 도로였을 것이다.[a 12] 그러나 평안도로부터―만포·강계·희천·영변·안주·숙천·평양을 경유하였을 것―상경한 적도 없지 않다. 세조인물 4년 건주좌위도독 동창인물(동맹가첩목아인물의 대를 잇는 아들) 등이 상경할 때 평안도를 경유한 것은 명백한 사실로서, 그 자세한 경과에 대하여는 후일 따로 논술하고자 하나, 그 전후에도 수차 여진인은 만포로부터 입조하였다. 그러나 (1) 그들이 조선 경내에 왕래하는 비용은 명사와 일본 사객의 그것과 같이 전혀 조선이 부담하는 바로서, 공용의 역마와 객관을 이용하였으므로, 황해·평안 역로의 조폐를 구하기 위하여, 또 (2) 평안도는 명사의 내왕로로서 야인 거추(巨酋)의 조선과의 통호(通好)는 명조의 혐오하는 바임으로, 명사에게 알려질 것을 염려하여, 현대문주13▶또 (3) 황평 양도의 산천의 험한 지세와, 도로의 우직(迂直)을 야인에게 알게 함은 국방상 불리함으로, 함경·강원도의 일로만으로 통일하게 하였다.[a 13]
쪽수▶P7-7이라는 一節이 있다. 원문주12▶이것으로써 보면 鏡城 以南의 野人 上京路는 當時에 있어 가장 主要한 交通路이며 現在에도 一等 道路인, 京城으로부터 議政府·抱川·金化·淮陽·元山·文川·高原·永興·定平·洪原·北靑·利原·端川·城津·吉州·明川을 지나 鏡城에 이르는 道路이었을 것이다.[12] 그러나 平安道로부터―滿浦·江界·熙川·寧邊·安州·肅川▶P8-1·平壤을 經由하였을 것―上京한 적도 없지 않다. 世祖 四年 建州左衛都督童倉(童猛哥帖木兒의 嗣子) 等이 上京할 때 平安道를 經由한 것은 明白한 事實로서, 그 仔細한 經過에 對하여는 後日 따로 論述하고저 하나, 그 前後에도 數次 女眞人은 滿浦로부터 入朝하였다. 그러나 (一) 그들이 朝鮮 境內에 往來하는 費用은 明使와 日本 使客의 그것과 같이 全혀 朝鮮이 負擔하는 바로서, 公用의 驛馬와 客舘을 利用하였음으로, 黃海·平安 驛路의 凋弊를 救하기 爲하야, 또 (二) 平安道는 明使의 來往路로서 野人 巨酋의 朝鮮과의 通好는 明朝의 嫌惡하는 바임으로, 明使에게 알려질 것을 念慮하야, 원문주13▶또 (三)黃平 兩道의 山川의 險阻, 道路의 迂直을 野人에게 알게 함은 國防上 不利함으로, 咸鏡·江原道의 一路만으로 統一하게 하였다.[13]
현대문주14▶당시 육진과 사군 방면에는 여진인을 접대하는 객관(야인관)이 성외에 있었다.[a 14] 현대문주15▶야인관을 성외에 설치한 것은 고려 이래의 제도이니,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성내의 허실을 알리지 않는 데 있다.[a 15] 현대문주16▶또 그들이 함길도 도절제사영(경성 혹은 종성)에 이르러 상경의 허가를 얻은 후, 여진 향통사가 그들을 인솔하여 상경할 때에도 일정한 객사가 지정되어, 여염에는 머무르지 못하게 하였던 것이다.[a 16] 그리하여 그들의 일행이 경성에 도착하면 현대문주17▶북평관(동부 흥성방)[a 17]에 유숙하였다. 현대문주18▶북평관은 명사의 태평관, 일본 사객의 동평관과 상대하여, 세종인물 20년 2월에 야인관의 명칭을 변경한 것으로, 동시에 북평관 감호관 이하의 관제가 제정되었다.[a 18]
쪽수▶P8-2원문주14▶當時 六鎭과 四郡 方面에는 女眞人을 接待하는 客舘(野人舘)이 城外에 있었다.[14] 원문주15▶野人舘을 城外에 設置한 것은 高麗 以來의 制度이니, 그것은 그들로 하야금 城內의 虛實을 알리지 않는 데 있다.[15] 원문주16▶또 그들이 咸吉道都節制使營(鏡城 或은 鍾城)에 이르러 上京의 許可를 얻은 後, 女眞鄕通事가 그들을 引率하야 上京할 때에도 一定한 客舍가 指定되야, 閭閻에는 止宿치 못하게 하였든 것이다.[16] 그리하야 그들의 一行이 京城에 倒着하면 원문주17▶北平舘(東部興盛坊)[17]에 留宿하였다. 원문주18▶北平舘은 明使의 太平舘, 日本 使客의 東平舘과 相對하야, 世宗 二十年 二月에 野人舘의 名稱을 變更한 것으로, 同時에 北平舘 監護官 以下의 官制가 制定되였다.[18]































본문2-3: (C) 공무역


숙배일이 되면 그들은 궁중에 들어가 각각 품계에 따라 국왕께 배알(拜謁)하고 궐내와 예조의 잔치에 참석하였다. 현대문주19▶다시 본토에 귀환할 때에는 사전(賜餞)이 있었다.[a 19] 그러나 숙배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그날 그들이 토의(土宜)를 진상한 데 대하여 회사(답사)와 상사(별사)를 받는 데 있다. 그러면 먼저 여진인의 진상물은 대략 어떤 것이었던가. 조선서는 그들의 진상물품에 대하여 특별한 규정이 없었으나, 현대문주20▶그들이 명국에 바치는 조공물은 대명회전서적권99 예부 조공 해서 여직조에 의하면 말·노랑가슴담비의 모피·스라소니(스라소니 모피)[a 20]·현대문주21▶해청(海靑)·토골(兎鶻)·황응(黃鷹)·아교·수각(殊角)(바다 상아)[a 21] 등이었으니, 조선에 진공한 물건도 이러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을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문주22▶원래 여진인의 진상에 관한 실록의 기사는 대개 간단히 ‘내헌토물(來献土物)’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그중 특히 명기한 것으로는 말·스라소니·스라소니 가죽·곰 가죽·사슴 가죽·해청(海靑)·매·어교(魚膠) 등을 찾아볼 수 있다.[a 22] 이것으로써 볼진댄 여진인이 조선에 진공하는 물품도 또한 명조에 바치는 물건과 별다른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니, 즉 여진인은 그 토산인 약간의 말·스라소니·해청·모피 등 물품을 진상하였던 것이다.
쪽수▶P8-3肅拜日이 되면 그들은 宮中에 들어가 各各 品階에 따라 國王께 拜謁하고 闕內와 禮曹의 賜宴에 參席하였다. 원문주19▶다시 本土▶P9-1에 歸還할 때에는 賜餞이 있었다.[19] 그러나 肅拜의 가장 重要한 目的은 그날 그들이 土宜를 進上한 데 對하야 回賜(答賜)와 賞賜(別賜)를 받는 데 있다. 그러면 먼저 女眞人의 進上物은 大略 如何한 것이었든가. 朝鮮서는 그들의 進上物品에 對하야 特別한 規定이 없었으나, 원문주20▶그들이 明國에 바치는 朝貢物은 大明會典卷九九禮部朝貢海西女直條에 依하면 馬·貂鼠皮·舍列孫(土豹皮)[20]·원문주21▶海靑·兎鶻·黃鷹·阿膠·殊角(海象牙)[21] 等이었으니, 朝鮮에 進貢한 物件도 이러한 範圍를 벗어나지 않을 것은 容易히 推測할 수 있을 것이다. 원문주22▶元來 女眞人의 進上에 關한 實錄의 記事는 대개 簡單히 「來献土物」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그 中 特히 明記한 것으로는 馬·土豹·土豹皮·熊皮·鹿皮·海靑·鷹·魚膠 等을 찾아볼 수 있다.[22] 이것으로써 볼진댄 女眞人이 朝鮮에 進貢하는 物品도 또한 明朝에 밫이는 物件과 別다른 것이 없음을 알 것이니, 卽 女眞人은 그 土産인 若干의 馬·土豹·海靑·毛皮 等 物을 進上하였든 것이다.
현대문주23▶여진인의 이러한 진상에 대하여 예조 및 호조의 당하관은 그 물품을 조사하여―공평과 정확을 기할 때는 시회인(상인)을 불러 간품(看品)도 시켰다―시가에 준하여 회사(○○○○○○○○)를 내렸다.[a 23] 현대문주24▶이제 세종인물 8년에 제정된 말에 대한 회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a 24]
쪽수▶P9-2원문주23▶女眞人의 이러한 進上에 對하야 禮曹 及 戶曹의 堂下官은 그 物品을 調査하야―公平과 正確을 期할 때는 市淮人(商人)을 불러 看品도 시켰다―市價에 準하야 回賜(○○○○○○○○)를 내렸다.[23] 원문주24▶이제 世宗 八年에 制定된 馬에 對한 回賜를 보면 다음과 같다.[24]

大馬上等 綿布四十五匹
大馬中等 綿布四十匹
大馬下等 綿布三十五匹
中馬上等 綿布三十匹
中馬中等 綿布二十五匹
中馬下等 綿布二十匹
小馬上等 綿布十五匹
小馬中等 綿布十匹
小馬下等 綿布六匹

쪽수▶P9-3

大馬上等 綿布四十五匹
大馬中等 綿布四十匹
大馬下等 綿布三十五匹
中馬上等 綿布三十匹
中馬中等 綿布二十五匹
▶P10-1中馬下等 綿布二十匹
小馬上等 綿布十五匹
小馬中等 綿布十匹
小馬下等 綿布六匹

이 규정은 후에 경국대전서적제3 호전 진헌조에까지 올라 항시 따라야 할 법식이 된 것이다. 현대문주25▶세종인물 13년 7월 스라소니 2구에 대한 회사는 면포 40필이었으니[a 25] 스라소니 가죽의 가격도 대략 추측할 수 있다. 현대문주26▶그 외의 물품에 대한 회사가는 자세치 않으나, 당시의 공평한 시가에 준하여 회사하였던 것만은 사실로, 회사품으로서는 면포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고, 기타 저포(苧布)·마포(麻布) 등도 있었다.[a 26]
쪽수▶P10-2이 規定은 後에 經國大典第三戶全進獻條에까지 올라 恒式이 된 것이다. 원문주25▶또 世宗 十三年 七月 土豹 二口에 對한 回賜는 綿布四十匹이었으니[25] 土豹皮의 價格도 大略 推測할 수 있다. 원문주26▶그 外의 物品에 對한 回賜價는 仔細치 않으나, 當時의 公平한 時價에 準하여 回賜하였든 것만은 事實로, 回賜品으로서는 綿布가 가장 많이 使用되었고, 其他 苧布·麻布 等도 있었다.[26]
회사 이외에 또 상사가 있다. 명조에서도 여진인―내지 기타 외국―의 조공에 대하여 회사와 아울러 상사―흔히 회사와 상사의 구별을 혼동함이 많다―가 있었지만, 현대문주27▶조선은 태조인물 시대에는 상경 야인에게 면의 한 벌을 주는 것이 정식이었던 것 같으나[a 27] 그 후 점점 증가하여 세종인물 28년에는 야인 사급(상사)의 식례가 결정되었다. 현대문주28▶즉 도만호·도지휘 이상을 1등, 상호군·대호군·호군·부만호 이상을 2등, 사직·부사직·사정·부사정·무직자를 3등으로 하야, 각각 옷·띠·갓·신·면포 등을 주게 하였던 것이다.[a 28] 현대문주28▶그러나 그 수량과 내용에 관한 기록이 없음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a 29]현대문주30▶세조인물 초년의 예를 보면 원년 12월 을묘의 사급은
쪽수▶P10-3回賜 以外에 또 賞賜가 있다. 明朝에서도 女眞人―及 其他 外國―의 朝貢에 對하야 回賜와 아울러 賞賜―흔히 回賜와 賞賜의 區別을 混同함이 많다―가 있었지만, 원문주27▶朝鮮은 太祖時代에는 上京 野人에게 綿衣 一襲을 주는 것이 定式이었든 것 같으나[27] 그 後 漸漸 增加하여 世宗 二十八年에는 野人賜給(賞賜)의 式例가 決定되었다. 원문주28▶卽 都萬戶·都指揮 以上을 一等, 上護軍·大護軍·護軍·副萬戶 以上을 二等, 司直·副司直·司正·副司正·無職者를 三等으로 하야, 各各 衣·帶·笠·靴·綿布 等을 주게 하였든 것이다.[28] 원문주28▶그러나 그 數量과 內容에 關한 記錄이 없음으로 仔細한 것은 알 수 없으나,[29]원문주30▶世祖 初年의 例를 보면 元年 十二月 乙卯의 賜給은

一等 浪孛兒罕等五人 各靴馬·刀子·有環·細條·藥囊
二等 李多弄介等六人 各馬一匹·角弓·有環·細條·刀子·藥囊
三等 柳乃也等五十人 各靑紅綿布各三匹·有環·細條·藥囊

쪽수▶P10-3

一等 浪孛兒罕等五人 各靴馬·刀子·有環·細條·藥囊
二等 李多弄介等六人 各馬一匹·角弓·有環·細條·刀子·藥囊
三等 柳乃也等五十人 各靑紅綿布各三匹·有環·細條·藥囊

이며,[a 30] 현대문주31▶3년 정월 신사의 사급은
쪽수▶P11-1이며,[30] 원문주31▶三年 正月 辛巳의 賜給은

一等 一人 鞁具馬一匹·條環一腰·刀子·藥囊
二等 八人 馬各一匹·靑木綿一匹·紅木綿二匹·角弓一張·條環一腰·刀子·藥囊
三等 二十一人 靑木綿一匹·紅木綿二匹·角弓一張·條環一腰·刀子·藥囊
四等 八十二人 各靑紅木綿各二匹·刀子·藥囊

쪽수▶P11-2

一等 一人 鞁具馬一匹·條環一腰·刀子·藥囊
二等 八人 馬各一匹·靑木綿一匹·紅木綿二匹·角弓一張·條環一腰·刀子·藥囊
三等 二十一人 靑木綿一匹·紅木綿二匹·角弓一張·條環一腰·刀子·藥囊
四等 八十二人 各靑紅木綿各二匹·刀子·藥囊

이었으니,[a 31] 그중 유환(有環)·세조(細條)·조환(條環) 등이 어떤 것인지 하며, 또 세종인물 20년에 제정된 내용과는 다소 다른 것이 있지만, 그 상사물의 대략을 엿볼 수 있다.
쪽수▶P11-3이었으니,[31] 그 中 有環·細條·條環 等이 어떤 것인지 하며, 또 世宗 二十年에 制定된 內容과는 多少 다른 것이 있지만, 그 賞賜物의 大略을 엿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진상에 대한 회사와 상사는 조선과 여진과의 공무역(관무역)이니, 근세까지도 동양의 국제무역은 대개 이러한 진상 또는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왔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형식을 존숭하는 사상에 기인하는 것으로, 당시 조선은 명국과의 문물 교환에 있어 조공의 형식을 취한 것은 물론이나, 여진과 일본 사객(대마도 사람과 각지의 토호)은 우리 조선에 대하여 진상의 예를 취하였다. 세종실록서적권102년 11월 기축조에
쪽수▶P11-4以上과 같은 進上에 對한 回賜와 賞賜는 朝鮮과 女眞과의 公貿易(官貿易)이니, 近世까지도 東洋의 國際貿易은 대개 이러한 進上 또는 朝貢의 形式을 取하여 왔었다. 다시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형식을 尊崇하는 思想에 基因하는 것으로, 當時 朝鮮은 明國과의 文物 交換에 있어 朝貢의 形式을 取한 것은 勿論이나, 女眞과 日本 使客(對馬島人과 各地의 土豪)은 우리 朝鮮에 對하야 進上의 禮를 取하였다. 世宗實錄卷一〇二年 十一月 己丑條에

日本國九州摠管源義俊遣人 献硫黄二千斤·蘇木五百斤·銅二百斤 回賜麻布三十匹·綿布四百七十匹

쪽수▶P11-5

日本國九州摠管源義俊遣人 献硫黄二千斤·蘇木五百斤·銅二百斤 回賜麻布三十匹·綿布四百七十匹

이라 한 것은 그 예에 불과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나 다 그 실질에 있어서는 통상무역에 지나지 않는다.
쪽수▶P11-6이라 한 것은 그 例에 不過하다. 그러나 어떤 것이나 다 그 實質에 있어서는 通商貿易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2-4: (D) 사무역


이상과 같은 진상숙배(공무역)을 기회로 일반 인민과의 사무역도 있었다. 현대문주32▶명경에서는 상사가 끝나는 날부터 3일간 여진인의 숙소인 회동관 중 북관에서 상인을 입관시켜 교역함을 허가하였다.[a 32] 조선서는 명경의 회동무역과 같은 특정의 규약은 없었으나, 여진인의 숙소인 북평관에서 일반 상인들과의 교역이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소위 태평 내지 동평관 사무역이 얼마나 성대하였는지는, 현대문주33▶세종인물 25년 정월에 명사 오량인물(吳良) 등이 경성에 왔을 때, 그 재래한 물품이 크고 많았으므로 정부가 전부를 공무역에 부치지 못하고, 경성·개성의 상인을 위시하여 경기·충청·황해·전라·경상 각 도의 인민으로 하여금 그 잔여를 자원 무역하게 한 것과,[a 33] 세종인물 6년 정월 호조의 계에 현대문주34▶“日本國客人私物 己裏入貿易 然市裏人 財物有限 難以畢易云云”[a 34]이라 한 일례를 볼지라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태평관·동평관 사무역에 비하면 북평관 사무역은 빈약한 감이 없지 않으나, 현대문주35▶그러나 세종인물 26년 정월에 북평관 감호관 박완(朴頑)이가 가를 감하여(○○○○○) 야인의 담비 가죽을 매수한 것에 죄를 물은 일을 보든지,[a 35] 대전속록서적권3 예전 대사객조
쪽수▶P11-7以上과 같은 進上肅拜(公貿易)을 機會로 一般 人民과의 私貿易도 있었다. 원문주32▶明京에서는 賞賜가 끝나는 날부터 三日間 ▶P12-1女眞人의 宿所인 會同舘 中 北舘에서 商人을 入舘시켜 交易함을 許可하였었다.[32] 朝鮮서는 明京의 會同貿易과 같은 特定의 規約은 없었으나, 女眞人의 宿所인 北平舘에서 一般 商人들과의 交易이 있었든 것만은 否認할 수 없다. 當時 所謂 太平 及 東平舘 私貿易이 얼마나 盛大하였는지는, 원문주33▶世宗 二十五年 正月에 明使 吳良 等이 來京하였을 때, 그 賷來한 物品이 太多하였음으로 政府가 全部를 公貿易에 붓치지 못하고, 京城·開城의 商人을 爲始하여 京畿·忠淸·黃海·全羅·慶尙 諸道의 人民으로 하여금 그 殘餘를 自願 貿易하게 한 것과,[33] 世宗 六年 正月 戶曹의 啓에 원문주34▶「日本國客人私物 己裏入貿易 然市裏人 財物有限 難以畢易云云」[34]이라 한 一例를 볼지라도 推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太平舘·東平舘 私貿易에 比하면 北平舘 私貿易은 貧弱한 感이 없지 않으나, 원문주35▶그러나 世宗 二十六年 正月에 北平舘 監護官 朴頑이가 價를 減하야(○○○○○) 野人의 貂皮를 買收한 것을 處罪한 일을 보든지,[35] 大典續錄卷三禮典待使客絛

野人到舘時……如有禁物潜賣者 官吏並重論

쪽수▶P12-2

野人到舘時……如有禁物潜賣者 官吏並重論

이라 하여 금물 즉 금은·보석·12승 이상 저마포 등 물건의 매매는 허락하지 않았지만, 그 외의 정당한 교역은 이것을 묵인하였다고 믿는다. 이 같은 북평관 사무역은 말하자면 진상숙배의 부속적 활동이었지만 공무역 이상의 효과가 피차에 있었을 것이다.
쪽수▶P12-3이라 하여 禁物 卽 金銀·寶石·十二升以上苧麻布 等 物 의 賣買는 許諾하지 않었지만, 그 外의 正當한 交易은 이것을 默認하였다고 믿는다. 이 같은 北平舘 私貿易은 말하자면 進上肅拜의 附屬的 活動이었지만는 公貿易 以上의 效果가 彼此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술한 바와 같이 여진인의 진상숙배의 본질을 검토하여 보면 피아 물산의 교역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 조공이라는 것은 약소한 민족 혹은 국가의 대국에 대한 사적 예의로서, 여기에 종주국이 속국에 대하여 물질상 혹은 문화상 자국의 부족함을 보충키 위하여 조공을 강제하는 것과, 또 그와 반대로 속국이 종주국의 문물을 수입하기 위하여 자진하여 조공의 예를 취하는 두 가지의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면, 여진인의 진상숙배는 곧 후자에 속한다.
쪽수▶P12-4그럼으로 上述한 바와 같이 女眞人의 進上肅拜의 本質을 檢討하여 보면 彼我 物産의 交易에 지나지 않는다. 元來 朝貢이라는 것은 弱小한 民族 或은 國家의 大國에 對한 事的 禮儀로서, 여기에 宗主國이 屬國에 對하야 物質上 或은 文化上 自國의 不足함을 補充키 爲하야 朝貢을 强制하는 것과, 또 그와 反對로 屬國이 宗主國의 文物을 輸入하기 爲하야 自進하여 朝貢의 禮를 取하는 두 가지의 境遇를 생각할 수 있다면, 女眞人의 進上肅拜는 곧 後者에 屬한다.

































본문3: 경성·경원의 무역소


전렵(田獵)을 주로 하는 여진인의 일상생활은 명조에 대한 조공과 조선에 대한 진상숙배만으로는 유지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또 근경에 무역소를 요구하였다. 현대문주36▶경성 내지 경원의 무역소는 그러한 여진인의 경제적 요구로 만족시키기 위하여 설치된 것이니, 그것은 또한 명 세조가 그들을 위하여―자국의 이익을 도모함도 있지만―요동에 마시(馬市)를 세워 회유의 수단을 삼았던 것과 동일하다.[a 36] 경성―경원의 무역소가 공식으로 설치된 것은 태종인물 6년(명 영락 4년) 5월로서, 태종실록서적권11 6년 5월 기해조에
쪽수▶P13-1田獵을 主로 하는 女眞人의 日常生活은 明朝에 對한 朝貢과 朝鮮에 對한 進上肅拜만으로는 維持할 수 없었음으로 그들은 또 近境에 貿易所를 要求하였다. 원문주36▶鏡城 及 慶源의 貿易所는 그러한 女眞人의 經濟的 要求로 滿足시키기 爲하야 設置된 것이니, 그것은 또한 明世祖가 그들을 爲하야―自國의 利益을 圖謀함도 있지만―遼東에 馬市를 세워 懷柔의 手段을 삼았든 거와 同一하다.[36] 鏡城―慶源의 貿易所가 公式으로 設置된 것은 太宗 六年(明永樂 四年) 五月로서, 太宗實錄卷一一 六年 五月 己亥條에

命置貿易所於鏡城·慶源

쪽수▶P13-2

命置貿易所於鏡城·慶源

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현대문주37▶당시의 경성은 곧 지금 경성이지마, 경원은 지금의 경흥군으로, 그 고을은 현 경흥군 경흥면 고읍동에 있었다.[a 37] 이때 무역소의 설치를 주창한 이는 곧 동북면 도순사 박신인물(朴信)이니, 그의 상언을 보면
쪽수▶P13-3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원문주37▶當時의 鏡城은 곧 現 鏡城이지마는, 慶源은 지금의 慶興郡으로, 그 邑治는 現 慶興郡 慶興面 古邑洞에 있었다.[37] 이때 貿易所의 設置를 主唱한 이는 곧 東北面 都巡使 朴信이니, 그의 上言을 보면

현대문주38▶鏡城·慶源地面 不禁出入 則或有闌出之患 一於禁絶 卽野人以不得塩鐵 或生邊隙 乞於二郡置貿易所 令彼人得來互市[a 38]

쪽수▶P13-4

원문주38▶鏡城·慶源地面 不禁出入 則或有闌出之患 一於禁絶 卽野人以不得塩鐵 或生邊隙 乞於二郡置貿易所 令彼人得來互市[38]

라 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경성·경원 2군에 무역소를 두게 된 동기와 목적이 여진인으로 하여금 그 생활에 불가결인 소금과 철을 자유로 사들이게 하여 이것으로써 변환을 미전에 방지하려 함에 있었던 것이 명백하다. 또 박신인물의 상언은 같은 해 2월 올적합 김문내인물(金文乃) 등의 침입와 직접 관계를 가진 것이니, 태종실록서적권116년 2월 기묘조에 “兀狄哈金乃文等 寇慶源之蘇多老兵馬使朴齡擊却之”라 한 후, 그 침입의 원인을 말하여
쪽수▶P13-5라 하였다. 이것을 보더라도 鏡城·慶源 二郡에 貿易所를 두게 된 動機와 目的이 女眞人으로 하여금 그 生活에 不可缺인 塩鐵을 自由 로 買得케 하야 이것으로써 邊患을 未前에 防止하려 함에 있었든 것이 明白하다. 또 朴信의 上言은 同年 二月 兀狄哈金文乃 等의 入寇와 直接 關係를 가진 것이니, 太宗實錄卷一一六年 二月 己卯條에 「兀狄哈金乃文等 寇慶源之蘇多老▶P14-1兵馬使朴齡擊却之」라 한 後, 그 入寇의 原因을 말하야

初野人至慶源塞下 市塩鐵牛馬 及大明立建州衛 以於虛出爲指揮 招諭野人 慶源絕不爲市 野人憤怨 建州人又激之 乃入慶源界抄掠

쪽수▶P14-2

初野人至慶源塞下 市塩鐵牛馬 及大明立建州衛 以於虛出爲指揮 招諭野人 慶源絕不爲市 野人憤怨 建州人又激之 乃入慶源界抄掠

이라 하였다. 어허출인물(於虛出)은 즉 영락 원년(태종인물 3년) 명에 입조하여 건주위 도지휘사에 임명된 아하출(阿哈出)(이사성인물)이니,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가 정식으로 설치된 사정이 더욱 명료할 뿐 아니라, 경원 요새 하의 여진인과의 무역은 일찍 무역소 설치 이전부터 매우 성행되었으며, 그 주요한 교역이 소금, 철, 소, 말이었던 것을 알겠다.
쪽수▶P14-3이라 하얐다. 於虛出은 卽 永樂 元年(太宗 三年) 明에 入朝하여 建州 衛都指揮使에 任命된 阿合出(李思誠)이니, 鏡城과 慶源에 貿易所가 正式으로 設置된 事情이 더욱 明瞭할 뿐 아니라, 慶源塞下의 女眞人과의 貿易은 일즉 貿易所 設置 以前부터 매우 盛行되었으며, 그 主要한 交易이 塩鐵牛馬이었든 것을 알겠다.
그러면 이때 정식으로 설치된 무역소는 언제까지 존속하였는가. 이 의문에 대하여 만족한 해답을 내릴 기록은 불행히 지금에 찾아볼 수 없으나, 추측컨대 경원의 무역소는 그 정식 설치로부터 4년을 지나 태종인물 10년에 이르러 경원부의 경성 이치와 함께 자연 해소되고, 경성의 무역소만이 존속되었을 것이나, 그것조차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하나 여진인이 조선 근경에 거주하는 이상 그들과의 경제적 교섭은 결코 단절되지 않을 것만은 사실로, 두만강 안의 오진 설치와 함께 비공식이나마 어떠한 명목 하에 무역소와 같은 것이 있지 않았을까 한다. 현대문주39▶당시 여진 무역은 삼포(웅천 제포·동래 부산포·울산 염포)의 일본 무역에 비하면 미미한 감이 없지 않으나, 동북과 서북 변민의 월강 무역은 엄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간단 없이 계속되었으며, 혹은 변장(邊將)이 임의로 호시(互市)를 허락한 적도 있었다.[a 39] 현대문주40▶여하튼 경성·경원의 무역소는 전조 고려 시대의 보주(의주) 내지 정주(정평) 각장[a 40]의 후신이며, 현대문주41▶청 선덕·순치년간에 기원하였다는 회령 내지 경원 북관 개시[a 41] 또는 평안도 중강 개시의 전신인 점에 있어, 조만문화사상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쪽수▶P14-4그러면 이때 正式으로 設置된 貿易所는 언제까지 存續하였는가. 이 疑問에 對하여 滿足한 解答을 내릴 記錄은 不幸히 지금에 찾아 볼 수 없으나, 推測컨대 慶源의 貿易所는 그 正式 設置로부터 四年을 지나 太宗 十年에 이르러 慶源府의 鏡城移治와 함께 自然 解消되고, 鏡城의 貿易所만이 存續되었을 것이나, 그것조차 確實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하나 女眞人이 朝鮮 近境에 居住하는 以上 그들과의 經濟的 交涉은 決코 斷切되지 않을 것만은 事實로, 豆滿江岸의 五鎭 設置와 함께 非公式이나마 어떠한 名目 下에 貿易所와 같은 것이 있지 않었을가 한다. 원문주39▶當時 女眞 貿易은 三浦(熊川薺浦·東萊富山浦·蔚山塩浦)의 日本 貿易에 比하면 微微한 感이 없지 않으나, 東北과 西北 邊民의 越江貿易은 嚴禁하였음에도 不拘하고 間斷 없이 繼 續되었으며, 或은 邊將이 任意로 互市를 許諾한 적도 있었다.[39] 원문주40▶如何튼 鏡城·慶源의 貿易所는 前朝 高麗時代의 保州(義州) 及 定州(定平) 榷場[40]의 後身이며, 원문주41▶淸宣德·順治年間에 起源하였다는 會寧 及 慶源 北關開市[41] 또는 平安道 中江開市의 前身인 點에 있어, 朝滿文化史上 重要한 意義를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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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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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원문주


  1. 世祖實錄 卷三十四, 十年十月己酉.
  2. 移蘭豆漫은 龍飛御天歌 卷七, 第五十三章 註에 「斡朶里·兒阿홀아·托溫타온三城 其俗謂之移蘭豆漫 猶三萬戶也 蓋以萬戶三人分領其地 故名之 自慶源府西北 行一月而至라 하였으니, 三萬戶의 位置를 滿洲 三姓 附近에 比定할 것은 일즉 日本 箭內亘이 滿洲歷史地理(第二 卷四 一二頁)에 論證한 바와 같다.
  3. 世宗實錄 卷二十一, 五年 九月 壬寅.
  4. 同書 卷五十一, 十三年 正月 乙酉.
  5. 書契는 酋長의 證明을 兼한 遣使紹介狀이니, 여기에 使用하는 酋長의 印信에는 두 가지 種類가 있었다. 하나는 朝鮮이 所賜한 것이며, 또 하나는 明朝의 衛指揮使印이다. 이 두 印信은 어떤 것이나 通用된 것 같다. 朝鮮의 印信을 最初로 받은 酋長은 太宗 五年 二月 斡朶里의 童猛哥帖木兒이니, 太宗實錄 卷九, 五年 二月 己丑條 에 「遣議政府知印金尙琦于東北面 賜童猛哥帖木兒慶源等處管軍萬戶印信一顆…」란 것이 그것이다. 그 後 世宗 二十五年 正月에는 斡朶里童所老加茂(童速魯帖木兒)에게 酋長印信을 주게 한 것이 世宗實錄卷十九, 二十五年 正月 己亥條에 보이나, 其外 酋長에게 印信을 준 記事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건대 그 餘의 酋長은 明朝所賜의 衛印을 使用하였겠지만, 如何間 酋長의 證明의 없는 女眞人의 來朝는 接待하지 않는 方針을 取하였다.
  6. 世宗實錄 卷三十六, 九年 四月 丙子. 同書 卷六十三, 十六年 正月 庚寅. 同書 卷八 十七, 二十一年 十月 己丑.
  7. 當時 兀良哈(吾郎哈 오랑캐 明毛憐衛) 吾都里(斡朶里 오도리) 骨看直介(闊兒看兀狄哈 콜칸우디거 明喜樂溫衛) 等 朝鮮과 關係 깊은 諸部落의 分布狀態를 앎에는, 端宗實錄 卷十三, 三年 三月 己巳條에 揭載된 咸吉道都體察使 李思哲啓本과, 旗田巍紹介論文 「吾都里族의 部落構成」(歷史學硏究 第二號)를 參照할 것이다.
  8. 婆猪江(佟佳江) 方面에 있는 李滿住의 建州衛는 兀良哈族에, 童山의 建州는 左衛와 凡察의 建州右衛 吾都里族에 算入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確實하지 않다.
  9. 成宗實錄 卷四十七, 五年 九月 己卯條에 「永安北道節度使魚有沼遣評事朴孟智問安…朴孟智啟曰 野人等上京之運 本無定數 沿路官站 不勝其弊 今分運一年母過十二 一運無過六七人 八月始上送甚便易 然遠地野人等 八九月間 方秋收田獵 無暇出來 至十月後 一時至 若取禀後 許令上京 則有違分運除弊之意 請遠地野人隨其來朝 與城底野人和會 依前分運上送 命議于院相 鄭麟趾議 依所啓施行 鄭昌孫·申叔舟·韓明澮·洪允成·曹錫文·尹子雲議 前者運數不定 不可歲終一時沓至 故酌定運數 八月爲始 跦運上送 而今年自八月之初 陸續入朝 有違立法分運之意 請今後自八月晦時秋收已畢後始上送 每一月 母過二三運 以除一路館待之弊 上從昌孫等議」이라 하고, 同書 卷四十八, 五年 十月 己丑條에는 「諭永安北道節度使魚有沼曰 前者諭卿 以預定野人運數 八月爲始上送者 慮其冬月沓至 道路轉送 館穀至待有弊耳 然八月之初收穫末畢 轉送之弊亦不背 自今待秋收 每朔無過二三運上送」이라 하였다. 朴孟智가 「野人等上京之運 本無定數云云」이라 한 것은 認識不足이라 할지나, 成宗 五年 九月에는 野人歲朝에 關한 規定이 多少 變更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後에도 數次 變動이 있으니, 攷事撮要 卷下, 接待野人事例에 「豐年 會寧四運 鍾城四運 穩城三運 慶源三運 慶興三運 以上共一百二十八 凶年 會寧三運 鍾城三運 穩城二運 慶源二運 慶興二運 以上共九十八云云」이란 規定은, 中宗 初年으로부터 淸朝의 興起를 契機로 女眞人 接待가 弊止되기 直前까지 施行하였다.
  10. 大明會典卷九十九, 禮部朝貢海西女眞條.
  11. 世宗實錄卷五十九, 十五年二月辛丑.
  12. 東國文獻備考 卷十五, 舆地考十, 道里京城東北抵慶興西水羅卷二 參照.
  13. 燕山君日記 卷三十六, 六年 正月 甲子.
  14. 世宗實錄 卷二十九, 七年閏 七月 己未. 文宗實錄 卷九, 元年 八月 甲戌. 北征錄 卷三, 庚辰 二月 丙寅. 中宗實錄 卷四十一, 十五年 十一月 辛未.
  15. 文宗實錄 卷四, 即位 元年 十月 庚辰.
  16. 經國大典 卷三, 禮典 待使客條.
  17. 北平舘의 位置는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漢城府 宮室條에 「北平館 在東部興盛坊(○○○○○○) 待野人之來朝」라 있고, 宮闕志(京城帝國大學付屬圖書館所藏舊奎章閣圖書五冊本) 及 增補文獻備考 卷三十八, 輿地考二十六 宮室條에도 同一한 記事가 보인다. 但 「今廢」라 하였다. 그러므로 北平舘이 東部興盛坊에 있었던 것은 알 수 있고, 또 그 北平舘은 世宗實錄 卷八十, 二十年 三月 甲辰條에 「以東部學堂爲北館 以乳牛所爲東部學堂」이라 하였으므로, 世宗 二十年 三月에 東部學堂 자리에 옮겨 온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世宗 二十年 三月 以前의 北平館(正確히 말하면 野人館의 位置는 勿論, 興盛坊의 位置가 未詳한 以上 位置가 世宗 二十年 三月 以後의 北平館의 位置도 仔細치 않으므로 後日의 硏究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京城府史(第一卷 七九頁)는 北平館의 位置를 「現 鐘路六丁目 四十一番地 一帶の地卽ち東大門女學校の地點」이라 하였으나 如何한 記錄과 踏査에 依하였는지 明記치 않았으므로 그대로 信을 두기 어렵다. 또 同 府史는 北平館을 說明하여 「野人(女眞人)を接待する所で東部學堂の地點に之を建てたが, 間もなく廢して再び學堂(東學)を建てた」라 하였으나, 나는 아직 寡聞으로서 얼마 안 되어 北平館을 廢止하고 再次 東學을 세웠다는 記錄―燕山君 十二年에 慶州·安東京邸(位置 未詳)에 移轉한 일은 있으나(燕山君日記 卷六十一, 十二年 三月 丁巳)―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와는 反對로 輿地勝覽 卷二, 京都下文職公署條에 「東學在東部彰善坊」이라 하고, 前揭 宮闕志에 亦 「東學在東部彰善坊」, 增補文獻備考 卷三十八, 輿地考二十六 宮室條에 亦 「東學在東部彰善坊 太宗十一年建 今無」―太宗 十一年 建은 그 最初 設置 年代를 말함―等으로 보아, 世宗 二十年 三月 以後에는 最近 李太王 三十一年 甲午에 東學이 廢止되기까지, 東學의 位置에는 移動이 없었던 것으로 믿는다.
  18. 世宗實錄 卷八十, 二十年 二月 癸酉·癸未.
  19. 經國大典 卷三, 禮典 待使客條.
  20. 大明一統志 卷八十九, 外夷女眞土産條 參照
  21. 同上.
  22. 太宗實錄 卷六, 三年 十二月 乙亥. 同書 卷二十一,十一年 正月 壬戌. 同書 卷二十二, 十一年 十二月 辛丑. 世宗實錄 卷三十一, 八年 正月 丙申. 同書 卷五十一, 十三年 正月 辛未. 同書 卷五十三, 十三年 七月 戊寅. 同書 卷九十, 二十二年 七月 丁巳.
  23. 世宗實錄 卷一百十七, 二十九年 七月 癸卯. 同書 卷一百十九, 三十年 二月 辛巳. 經國大典 卷三, 禮典 待使客條.
  24. 世宗實錄 卷三十一, 八年 正月 壬寅.
  25. 同書 卷五十三, 十三年 七月 戊寅.
  26. 太祖實錄 卷十, 五年 十月 壬寅.
  27. 同書 卷二, 元年 九月 壬寅條에 「賜衣兀良哈」, 卷三, 二年 五月 庚申條 「賜吾郎哈五人各一襲」, 卷四, 二年 十二月 丁亥條 「賜吾郎哈十餘人綿布衣」 云云.
  28. 世宗實錄 卷一百十一, 二十八年 正月 戊寅.
  29. 太宗實錄 卷九, 五年 正月 乙巳條에 「賜骨乙看兀狄哈萬戶金豆稱介·兼進兀狄哈萬戶童難等一襲·靴·笠·銀帶一腰(○○○○)」라 하고 同年 三月 辛亥條 「賜兀良哈上萬戶金大帖木兒光銀帶(○○○)一腰·萬戶戶柳遼河達魯花赤金都赤角帶一腰(○○○○)」라 하였으니, 品帶로서는 銀帶와 角帶도 있었던 것을 알겠다.
  30. 世祖實錄 卷二, 元年 十二月 乙卯.
  31. 同書 卷六, 三年 正月 辛巳.
  32. 大明會典 卷一百一, 禮部賜給海西女眞條.
  33. 世宗實錄 卷九十五,二 十四年 正月 丁卯·戊辰,
  34. 同書 卷二十三, 六年 正月 辛丑.
  35. 同書 卷一百三, 二十六年 正月 戊辰.
  36. 稻葉岩吉 「明代遼東の馬市」(史學雜誌 第二十四編 第一號·第二號. 增訂滿洲發達史 一八一頁―二〇四頁) 參照.
  37. 慶源府를 京城에 移治한 太宗 十年 以前의 慶源府治 現今의 慶源이 아니라, 世祖時에 新設된 慶興郡治와 同一한 곳으로, 世宗實錄 卷一百五十五, 地理志咸吉道吉州牧下에 收載된 所謂 都護府慶源條―世宗 十四年頃의 記錄―에 「孔州城阿吾地城南 豆滿江邊」이라 한 後에 註하여 「古慶源府時 爲邑城」이라 하고, 또 「孔州城南五許 平野中 有兩圓峯 南安德陵 北安安陵」이라 하였으며, 同地 理志慶興都護府條―世宗實錄編纂時(端宗 二年 三月 完成)의 記錄―에 慶興의 沿革을 說明하여 「古孔州 太祖七年 因古土城基改築石城 以其地有德安兩陵 且肇基之地 故號慶源府 太宗十年因野人入寇 遂棄不守 世宗十六年 復設慶源府於會叱家之地 距孔州隔遠 難於守禦 復修其城 差萬戶兼孔州等處管軍僉節制使 十七年 割屬孔州傍近三百戶 稱孔城縣 以僉節制使兼知縣事 十九年陞爲郡 改今名 二十五年 以郡城地勢傾窄 且城內無水泉 退築城東西北三面 以廣之 陞都護府」라 하고, 四境을 擧하여 「東距豆滿江十步 北距豆滿江十里 南距大海六十里 西距雄丘(今雄基)站九十里」라 하였으니, 그 位置는 現古邑 附近에 있던 것이 틀림없다. 일찍 津田左右吉은 新增東國輿地勝覽 卷五十, 慶興郡護府山川條에 「海在府南三十里」, 「赤池在府南十里」, 「麻田島在府北四十里」, 「楸島在府北四十五里」라 한 것으로 보아, 慶興府治 卽 古慶源府治(孔州)를 또한 現古邑에 比定하였고(朝鮮歷史地理 第二卷 三一八頁) 池內宏도 이에 贊同하였다(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第二, 三〇九頁 註八). 本問題 範圍外일지도 모르나, 또 池內博士가 世祖實錄 卷十六, 五年 四月 丁丑條에 「兵曹 據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啓本啓 慶興府官舍 地勢傾仄 土田磽薄 城中唯一井泉 遇旱輒涸 常汲江水用之 撫安堡則土沃有水 又多良田 請移慶興府于撫安堡 又令撫夷萬戶移戍于慶興本邑 撫夷本邑則土地廣衍 其自願仍居者聽 防禦守護等事 令本府守令 來往檢察 從之」라 한 것을 보고, 最初의 慶興府治(古慶源府治)가 現在의 慶興郡治에 移轉된 것은 世祖 五年이며, 實錄記事 中의 撫安堡 또는 撫夷堡의 誤일 것이라 한 데 對해서는 同意하기 어렵다. 그 理由를 간단히 말하면 世祖 五年에 實錄이 傅하는 바와 같이 移動이 있었다고 하면, 輿地勝覽(成宗十二年成)에는 撫夷堡가 現古邑에, 慶興府治가 現慶興에 있지 않으면 안 됨에 不拘하고, 輿地勝覽―津田左右吉이 이에 依하여 慶興邑(古慶源府治, 孔州)을 現古邑에 比定하고, 池內 自身도 이에 贊同한 것 같이―에는 依然히 慶興府治는 現古邑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池內도 이 點에 이르러서는 解釋에 困難하였던지, 輿地勝覽 卷五十, 慶興都護府關防條에 「撫夷堡在府北二十六里」(現慶興郡治의 位置)라 한 것은 世祖 五年 慶興府 移轉 以前의 撫夷堡를 指示한 記事를 그대로 揭載한 것 같다고 하여, 問題를 簡單히 解決하고 말았다(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第七, 二四四頁). 그러나 여기 對하여는 再考할 餘地가 많다. 現在의 卑見으로서는―仔細한 것은 다른 機會로 미를 수 밖에 없으나―輿地勝覽에는 勿論 慶興府邑誌 같은 데에도 世祖 五年의 邑基移轉을 傳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實錄에는 「從之」라고 하였지만 그 實은 當時의 議論뿐으로 實行되지 않았다고 解釋하고 싶다. 古邑이라는 名稱이 생긴 것은 世祖 五年에 移轉된 까닭이 아니라, 邑誌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純祖 三十四年 以後 數次 慶興本邑과 位置가 相換된 까닭이다.
  38. 太祖實錄 卷十一, 六年 五月 己亥.
  39. 高麗史 卷一百十八, 趙浚傳上疏文中 「…權勢之家 競爲互市 貂皮·松子·人參·蜂蜜·黃蠟·米豆之類 無不徵歛 民甚苦之 扶老携幼 渡江而西 可爲痛哭…」이라 하고, 太祖實錄 卷二, 元年 十二月 庚午條에 「遣監察于義州等處 禁人越疆貿易」, 太祖實錄 卷二十三, 十二年 二月 庚午條, 議政府啓 「東西兩界之民 毋得與境外之人賣牛馬 曾有著令 無識之民 暗行買賣 自今犯者及官吏與把截人 知而故縱者 通同做賣者 隱匿不告者 乞重刑鑑後」, 世宗實錄 卷五十九, 十五年 三月 乙亥條, 戶曹啟에 「平安咸吉道 地連彼境 故鐵物買賣 已曾立法防禁 然無識之徒 意謂防禁疎闊 如前買賣者 間或有之 自今以後 兩道居民如炊飯·鐵器·農器·兵器等鐵物 與彼人買賣者及知情故放者 以違禁下海律科罪 有能捕告者 依此律文充賞…」, 世祖實錄 三十一, 九年 八月 甲午條에 「諭咸吉道都節制使康純曰 將鍮鐵器及水鐵農器 與野人互市者已令嚴禁 比聞無識之徒不畏邦憲 潛輸買賣者有之 專是慢法弛禁之所致也 卿其更加痛禁 推鞫以啓」, 成宗實錄 卷一百九十二, 十七年 六月 癸卯條, 永安道 觀察使 成俊書啟에 「臣觀本道人 愚惑無遠慮 與商賈通販 年或少稔 綿布一匹直米六七十斗 他物類此 雖傾家買之不憚 至於禁物 潛誘資易 轉賣彼人 牛馬鍮鐵軍器 將盡轉賣 非細故也…」, 中宗實錄 卷三十一, 九年 十月 壬寅條, 漢城府右尹 李長生書啓에 「…平安道滿浦鎭 館待三衛野人 自甲子年(燕山君十年)邊將擅開關市 國人持牛馬鐵器 絡釋輳集 貽害無窮 尤可痛禁…」 云云.
  40. 高麗時代 椎場 設置 問題에 關하여는 丸龜金作 氏의 論文 「高麗と契丹·女眞の刃貿易關係」(歷史學硏究 第五卷 第二號, 六三頁—七O頁) 中에 論述한 바 있으나, 高麗가 數次 椎場의 撤罷를 遼·金에 懇請한 데 對하여는 좀 더 明確한 解答을 내릴 必要가 있다.
  41. 咸鏡道慶源開市定例, 通例剏剔設條. 仁祖實錄 卷四, 三十二年 六月 丙申, 東國文獻備考 卷七十二, 市〿考上附互市北關開市條.






현대문주


  1. 세조실록서적 권34, 10년 10월 기유.
  2. 이란두만인물(移蘭豆漫)은 용비어천가서적 권7, 제53장 주에 “斡朶里·兒阿홀아·托溫타온三城 其俗謂之移蘭豆漫 猶三萬戶也 蓋以萬戶三人分領其地 故名之 自慶源府西北 行一月而至”라 하였으니, 삼만호의 위치를 만주 삼성 부근에 비정할 것은 일직 일본 전내긍인물(箭內亘)이 만주역사지리학술지(제2 권4권호 12쪽)에 논증한 바와 같다.
  3. 세종실록서적 권21, 5년 9월 임인.
  4. 같은 책서적 권51, 13년 정월 을유.
  5. 서계는 추장의 증명을 겸한 견사(遣使) 소개장이니, 여기에 사용하는 추장의 인신(印信)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하나는 조선이 소사(所賜)한 것이며, 또 하나는 명조의 위지휘사인(衛指揮使印)이다. 이 두 인신은 어떤 것이나 통용된 것 같다. 조선의 인신을 최초로 받은 추장은 태종인물 5년 2월 알타리의 동맹가첩목아인물(童猛哥帖木兒)이니, 태종실록서적 권9, 5년 2월 기축조에 “遣議政府知印金尙琦于東北面 賜童猛哥帖木兒慶源等處管軍萬戶印信一顆…”란 것이 그것이다. 그 후 세종인물 25년 정월에는 알타리 동소로가무인물(童所老加茂)(동속로첩목아(童速魯帖木兒))에게 추장 인신을 주게 한 것이 세종실록서적 권19, 25년 정월 기해조에 보이나, 그 외 추장에게 인신을 준 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생각하건대 그 나머지 추장은 명조 소사의 위인을 사용하였겠지만, 여하간 추장의 증명이 없는 여진인의 내조는 접대하지 않는 방침을 취하였다.
  6. 세종실록서적 권36, 9년 4월 병자. 같은 책서적 권63, 16년 정월 경인. 같은 책서적 권8 17, 21년 10월 기축.
  7. 당시 올량합(오량합 오랑캐, 명 모련위), 오도리(알타리 오도리), 골간직개(활아간올적합 콜칸우디거 명 희락온위) 등 조선과 관계 깊은 부락의 분포 상태를 앎에는, 단종실록서적 권13, 3년 3월 기사조에 게재된 함길도 도체찰사 이사철인물(李思哲) 계본과, 기전외인물(旗田巍) 소개 논문 「오도리족의 부락구성원고」(역사학연구학술지 제2호권호)를 참조할 것이다.
  8. 파저강(동가강) 방면에 있는 이만주인물(李滿住)의 건주위는 올량합족에, 동산의 건주는 좌위와 범찰의 건주우위 오도리족에 산입하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확실하지 않다.
  9. 성종실록서적 권47, 5년 9월 기묘조에 “永安北道節度使魚有沼遣評事朴孟智問安…朴孟智啟曰 野人等上京之運 本無定數 沿路官站 不勝其弊 今分運一年母過十二 一運無過六七人 八月始上送甚便易 然遠地野人等 八九月間 方秋收田獵 無暇出來 至十月後 一時至 若取禀後 許令上京 則有違分運除弊之意 請遠地野人隨其來朝 與城底野人和會 依前分運上送 命議于院相 鄭麟趾議 依所啓施行 鄭昌孫·申叔舟·韓明澮·洪允成·曹錫文·尹子雲議 前者運數不定 不可歲終一時沓至 故酌定運數 八月爲始 跦運上送 而今年自八月之初 陸續入朝 有違立法分運之意 請今後自八月晦時秋收已畢後始上送 每一月 母過二三運 以除一路館待之弊 上從昌孫等議”이라 하고, 같은 책서적 권48, 5년 10월 기축조에는 “諭永安北道節度使魚有沼曰 前者諭卿 以預定野人運數 八月爲始上送者 慮其冬月沓至 道路轉送 館穀至待有弊耳 然八月之初收穫末畢 轉送之弊亦不背 自今待秋收 每朔無過二三運上送”이라 하였다. 박맹지인물(朴孟智)가 “野人等上京之運 本無定數云云”이라 한 것은 인식 부족이라 할지나, 성종인물 5년 9월에는 야인 세조에 관한 규정이 다소 변경된 것을 알 수 있다. 그 후에도 수차 변동이 있으니, 고사촬요서적 권하, 접대야인사례에 “豐年 會寧四運 鍾城四運 穩城三運 慶源三運 慶興三運 以上共一百二十八 凶年 會寧三運 鍾城三運 穩城二運 慶源二運 慶興二運 以上共九十八云云”이란 규정은, 중종인물 초년으로부터 청조의 흥기를 계기로 여진인 접대가 폐지되기 직전까지 시행하였다.
  10. 대명회전서적 권99, 예부 조공 해서 여진조.
  11. 세종실록서적 권59, 15년 2월 신축.
  12. 동국문헌비고서적 권14, 여지고 10, 도리 경성동북저경흥서수라(道里京城東北抵慶興西水羅) 권2 참조.
  13. 연산군일기서적 권36, 6년 정월 갑자.
  14. 세종실록서적 권29, 7년 윤 7월 기미. 문종실록서적 권9, 원년 8월 갑술. 북정록서적(北征錄) 권3, 경진 2월 병인. 중종실록서적 권41, 15년 11월 신미.
  15. 문종실록서적 권4, 즉위 원년 10월 경진.
  16. 경국대전서적 권3, 예전 대사객조.
  17. 북평관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서적 권3, 한성부 궁실조에 “北平館 在東部興盛坊(○○○○○○) 待野人之來朝”라 있고, 궁궐지서적(경성제국대학기관 부속도서관 소장 구 규장각 도서 5책본) 및 증보문헌비고서적 권38, 여지고 26 궁실조에도 동일한 기사가 보인다. 단 ‘금폐(今廢)’라 하였다. 그러므로 북평관이 동부 흥성방에 있었던 것은 알 수 있고, 또 그 북평관은 세종실록서적 권80, 20년 3월 갑신조에 “以東部學堂爲北館 以乳牛所爲東部學堂”이라 하였으므로, 세종인물 20년 3월에 동부학당 자리에 옮겨 온 것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세종인물 20년 3월 이전의 북평관(정확히 말하면 야인관의 위치는 물론, 흥성방의 위치가 미상한 이상 위치가 세종인물 20년 3월 이후의 북평관의 위치도 자세치 않으므로 후일의 연구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경성부사서적(제1권 79쪽)는 북평관의 위치를 “現 鐘路六丁目 四十一番地 一帶の地卽ち東大門女學校の地點”이라 하였으나 여하한 기록과 답사에 의하였는지 명기치 않았으므로 그대로 믿기 어렵다. 또 같은 부사서적는 북평관을 설명하여 “野人(女眞人)を接待する所で東部學堂の地點に之を建てたが, 間もなく廢して再び學堂(東學)を建てた”라 하였으나, 나는 아직 과문으로서 얼마 안 되어 북평관을 폐지하고 재차 동학을 세웠다는 기록―연산군 12년에 경주·안동경저(위치 미상)에 이전한 일은 있으나(연산군일기서적 권61, 12년 3월 정사)―을 보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여지승람서적 권2, 경도하문지공서조(京都下文職公署條)에 “東學在東部彰善坊”이라 하고, 앞서 언급한 궁궐지서적에 역시 “東學在東部彰善坊”, 증보문헌비고서적 권38, 여지고 26 궁실조에 역시 “東學在東部彰善坊 太宗十一年建 今無”―태종 21년 건(太宗十一年建)은 그 최초 설치 연대를 말함―등으로 보아, 세종인물 20년 3월 이후에는 최근 이태왕 31년 갑오에 동학이 폐지되기까지, 동학의 위치에는 이동이 없었던 것으로 믿는다.
  18. 세종실록서적 권80, 20년 2월 계유·계미.
  19. 경국대전서적 권3, 예전 대사객조.
  20. 대명일통지서적 권89, 외이 여진토산조 참조
  21. 같은 책서적.
  22. 태종실록서적 권6, 3년 12월 을해. 같은 책서적 권21, 11년 정월 임술. 같은 책서적 권22, 11년 12월 신축. 세종실록서적 권31, 8년 정월 병신. 같은 책서적 권51, 13년 정월 신미. 같은 책서적 권53, 13년 7월 무인. 같은 책서적 권90, 22년 7월 정사.
  23. 세종실록서적 권117, 29년 7월 계묘. 같은 책서적 권119, 30년 2월 신사. 경국대전서적 권3, 예전 대사객조.
  24. 세종실록서적 권31, 8년 정월 임인.
  25. 같은 책서적 권53, 13년 7월 무인.
  26. 태조실록서적 권10, 5년 10월 임인.
  27. 같은 책서적 권2, 원년 9월 임인조에 “賜衣兀良哈”, 권3, 2년 5월 경신조 “賜吾郎哈五人各一襲”, 권4, 2년 12월 정해조 “賜吾郎哈十餘人綿布衣” 운운.
  28. 세종실록서적 권111, 28년 정월 무인.
  29. 태종실록서적 권9, 5년 정월 을사조에 “賜骨乙看兀狄哈萬戶金豆稱介·兼進兀狄哈萬戶童難等一襲·靴·笠·銀帶一腰(○○○○)”라 하고 같은 해 3월 신해조 “賜兀良哈上萬戶金大帖木兒光銀帶(○○○)一腰·萬戶戶柳遼河達魯花赤金都赤角帶一腰(○○○○)”라 하였으니, 품대로서는 은대(銀帶)와 각대(角帶)도 있었던 것을 알겠다.
  30. 세조실록서적 권2, 원년 12월 을묘.
  31. 같은 책서적 권6, 3년 정월 신사.
  32. 대명회전서적 권101, 예부 사급 해서 여진조.
  33. 세종실록서적 권95, 24년 정월 정묘·무진,
  34. 같은 책서적 권23, 6년 정월 신축.
  35. 같은 책서적 권103, 26년 정월 무진.
  36. 도엽암길인물(稻葉岩吉) 「明代遼東の馬市원고」(사학잡지학술지 제24편 제1호권호·제2호권호. 증정만주발달사서적 181―204쪽) 참조.
  37. 경원부를 경성에 이치(移治)한 태종인물 10년 이전의 경원부치 현금의 경원이 아니라, 세조인물 때에 신설된 경흥군치와 동일한 곳으로, 세종실록서적 권155, 지리지 함길도 길주목하에 수재된 소위 도호부 경원조―세종인물 14년경의 기록―에 “孔州城阿吾地城南 豆滿江邊”이라 한 후에 주하여 “古慶源府時 爲邑城”이라 하고, 또 “孔州城南五許 平野中 有兩圓峯 南安德陵 北安安陵”이라 하였으며, 같은 지리지 경흥 도호부조―세종실록서적 편찬 시(단종인물 2년 3월 완성)의 기록―에 경흥의 연혁을 설명하여 “古孔州 太祖七年 因古土城基改築石城 以其地有德安兩陵 且肇基之地 故號慶源府 太宗十年因野人入寇 遂棄不守 世宗十六年 復設경원府於會叱家之地 距孔州隔遠 難於守禦 復修其城 差萬戶兼孔州等處管軍僉節制使 十七年 割屬孔州傍近三百戶 稱孔城縣 以僉節制使兼知縣事 十九年陞爲郡 改今名 二十五年 以郡城地勢傾窄 且城內無水泉 退築城東西北三面 以廣之 陞都護府”라 하고, 사경을 거하여 “東距豆滿江十步 北距豆滿江十里 南距大海六十里 西距雄丘(今雄基)站九十里”라 하였으니, 그 위치는 현재 고읍 부근에 있던 것이 틀림없다. 일찍 진전좌우길인물(津田左右吉)은 신증동국여지승람서적 권50, 경흥 도호부 산천조에 “海在府南三十里”, “赤池在府南十里”, “麻田島在府北四十里”, “楸島在府北四十五里”라 한 것으로 보아, 경흥부치 즉 옛 경원부치(공주)를 또한 현 고읍에 비정하였고(조선역사지리서적 제2권 318족) 지내굉인물(池內宏)도 이에 찬동하였다(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학술지 제2권호, 309쪽 주8). 본 문제 범위 외일지도 모르나, 또 지내인물 박사가 세조실록서적 권16, 5년 4월 정축조에 “兵曹 據咸吉道都體察使申叔舟啓本啓 慶興府官舍 地勢傾仄 土田磽薄 城中唯一井泉 遇旱輒涸 常汲江水用之 撫安堡則土沃有水 又多良田 請移慶興府于撫安堡 又令撫夷萬戶移戍于慶興本邑 撫夷本邑則土地廣衍 其自願仍居者聽 防禦守護等事 令本府守令 來往檢察 從之”라 한 것을 보고, 최초의 경흥부치(옛 경원부치)가 현재의 경흥군치에 이전된 것은 세조인물 5년이며, 실록 기사 중의 무안보 또는 무이보의 오류일 것이라 한 데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렵다.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면 세조인물 5년에 실록이 전하는 바와 같이 이동이 있었다고 하면, 여지승람서적(성종인물 12년 성)에는 무이보가 현 고읍에, 경흥부치가 현 경흥에 있지 않으면 안 됨에 불구하고, 여지승람서적진전좌우길인물이 이에 의하여 경흥읍(옛 경원부치, 공주)을 현 고읍에 비정하고, 지내인물 자신도 이에 찬동한 것 같이―에는 의연히 경흥부치는 현 고읍에 있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지내인물도 이 점에 이르러서는 해석에 곤란하였던지, 여지승람서적 권50, 경흥 도호부 관방조에 “撫夷堡在府北二十六里”(현 경흥군치의 위치)라 한 것은 세조인물 5년 경흥부가 이전하기 전의 무이보를 지시한 기사를 그대로 게재한 것 같다고 하여, 문제를 간단히 해결하고 말았다(만선지리역사연구보고학술지 제7권호, 244쪽). 그러나 여기 대하여는 재고할 여지가 많다. 현재의 비견으로서는―자세한 것은 다른 기회로 미룰 수 밖에 없으나―여지승람서적에는 물론 경흥부읍지서적 같은 데에도 세조인물 5년의 읍기(邑基) 이전을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실록에는 ‘종지(從之)’라고 하였지만 그 실은 당시의 의논뿐으로 실행되지 않았다고 해석하고 싶다. 고읍이라는 명칭이 생긴 것은 세조인물 5년에 이전된 까닭이 아니라, 읍지를 보더라도 알 수 있는 것 같이, 순조인물 34년 이후 수차 경흥 본읍과 위치가 상환된 까닭이다.
  38. 태조실록서적 권11, 6년 5월 기해.
  39. 고려사서적 권118, 조준전 상소문 중 “…權勢之家 競爲互市 貂皮·松子·人參·蜂蜜·黃蠟·米豆之類 無不徵歛 民甚苦之 扶老携幼 渡江而西 可爲痛哭…”이라 하고, 태조실록서적 권2, 원년 12월 경오조에 “遣監察于義州等處 禁人越疆貿易”, 태조실록서적 권23, 12년 2월 경오조, 의정부계 “東西兩界之民 毋得與境外之人賣牛馬 曾有著令 無識之民 暗行買賣 自今犯者及官吏與把截人 知而故縱者 通同做賣者 隱匿不告者 乞重刑鑑後”, 세종실록서적 권49, 15년 3월 을해조, 호조계에 “平安咸吉道 地連彼境 故鐵物買賣 已曾立法防禁 然無識之徒 意謂防禁疎闊 如前買賣者 間或有之 自今以後 兩道居民如炊飯·鐵器·農器·兵器等鐵物 與彼人買賣者及知情故放者 以違禁下海律科罪 有能捕告者 依此律文充賞…”, 세조실록서적 31, 9년 8월 갑오조에 “諭咸吉道都節制使康純曰 將鍮鐵器及水鐵農器 與野人互市者已令嚴禁 比聞無識之徒不畏邦憲 潛輸買賣者有之 專是慢法弛禁之所致也 卿其更加痛禁 推鞫以啓”, 성종실록서적 권192, 17년 6월 계묘조, 영안도 관찰사 성준인물(成俊) 서계에 “臣觀本道人 愚惑無遠慮 與商賈通販 年或少稔 綿布一匹直米六七十斗 他物類此 雖傾家買之不憚 至於禁物 潛誘資易 轉賣彼人 牛馬鍮鐵軍器 將盡轉賣 非細故也…”, 중종실록서적 권31, 9년 10월 임인조, 한성부우윤 이장생인물(李長生) 서계에 “…平安道滿浦鎭 館待三衛野人 自甲子年(燕山君十年)邊將擅開關市 國人持牛馬鐵器 絡釋輳集 貽害無窮 尤可痛禁…” 운운.
  40. 고려 시대 추장 설치 문제에 관하여는 환구금작인물(丸龜金作) 씨의 논문 「高麗と契丹·女眞の刃貿易關係원고」(역사학연구학술지 제5권 제2호권호, 63—70쪽) 중에 논술한 바 있으나, 고려가 수차 추장의 철파를 요·금에 간청한 데 대하여는 좀 더 명확한 해답을 내릴 필요가 있다.
  41. 함경도경원개시정례, 통례창척설조(通例剏剔設條). 인조실록서적 권4, 32년 6월 병신, 동국문헌비고서적 권72, 시〿고상부호시북관개시조.